천일국 훈독경 제3권 17일
정성의 예물 (훈독본)
날짜 : 1967. 1. 29(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참된 정성이란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어린 정성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문화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수고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정성들이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이 여러 가지의 형태로 변화되어서는 정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일편단심, 통일된 마음을 중심삼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자기를 위주로 한 것이라면 정성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서 정성들인 것은 자기 일대에 있어서는 남아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의 일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정성의 터전은 상대를 위한 것만이 남아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주로 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사랑의 마음을 터전으로 하여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위해야만 정성이라는 명사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노력만으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상대의 세계를 위하는 데 있어서 예기치 못하는 불상사나 반대작용이 일어날 수 있고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더불어 인내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내만 가지고도 안됩니다. 안팎과 사방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나게 될 때는 잘라 버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하고, 반드시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17-227)
구원역사와 정성의 기준
오늘날 객관적으로 관찰해 볼 때 인류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역사의 배후에는 정성들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정성은 자기의 어떤 사상을 중심삼은 것입니다. 자기의 온갖 정성과 마음과 사랑을 상대의 세계에 투입시켰을 때 그 노력과 인내와 투쟁의 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먼저 내가 정성을 들여야 하고, 정성을 지닌 자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편단심, 즉 통일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상대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과 일편단심의 마음이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정성을 세워서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와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망의 세계에 떨어진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해 나오셨습니까?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도 사회환경에 치우침을 받지 않는 입장에서 배후의 정성의 터전을 중심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구원역사가 결정되느냐? 정성의 기준을 중심삼고 결정됩니다. 하늘의 정성이 보다 높게 될 때 사망세계에 있는 사회도 하늘의 정성 앞에 흡수될 수 있습니다. 즉, 더 큰 정성은 작은 정성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심은 더 큰 정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양심의 표준입니다. 인간이 작은 정성보다는 큰 정성권 내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인 것입니다.
단체, 종족, 또는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이 정성을 들일 때 거기에는 대다수가 동참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로 세워진 사람들이 그 단체나 종족이나 국가의 사상적인 기준을 대표해 가지고 환경을 정리해 나가는 방법으로 구원역사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하려고 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정성을 들이셔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일편단심, 마음의 구석구석까지 꽉 찬 일편단심으로 정성들이셔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사탄세계가 되었고, 사탄은 인간을 종의 입장에도 설 수 없을 정도로 유린해 놓았습니다. 이렇듯 사탄은 우리 인간을 종의 종의 자리까지 떨어지게 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원수의 피를 받고 태어난 타락의 후손들은 종으로도 세움을 받지 못하는 입장으로 떨어졌습니다. (17-229)
섭리관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사정
이런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구원하시느냐?
사탄의 종의 종이 된 인간을 하늘의 종의 종으로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탄국가 안에서 정성들인 어떤 주권자나 백성들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면 한 사람도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은 이 인류 앞에 있어서 최고의 기준으로 서야 하며 나보다 더 높은 정성의 자리를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 이하의 자리에서 어떤 사람을 구원했다면 완전히 구원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참소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면 사탄이 정성들이는 것 이상의 정성을 들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세계의 주권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 사람이 충성하는 도수 이상의 자리에 서시지 않고서는 사탄세계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을 종의 종에서 종, 양자, 아들의 자리를 거쳐서 신랑과 신부의 자리와 부모의 자리까지 복귀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섭리의 혜택을 받아야 할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하느냐? 인간도 역시 하나님을 대하려고 할 때마다 사탄이 옆에서 참소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설 수 없습니다.
조건이 성립되지 않고서는 구원섭리의 역사를 세울 수 없고, 구원섭리의 역사를 세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할 수 없고 섭리를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섭리관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사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17-231)
천국 가는 공식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탄세계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는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하느냐? 내 부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내 처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공식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창조본연의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완성시켜 나왔을 텐데 타락했기 때문에 거꾸로 복귀해 나온 것입니다.
이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해 나왔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고 가인 아벨이 잃어버린 아담가정의 기준을 민족의 형태로 복귀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벨적인 예수님 앞에 가인적인 입장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담의 가정에서 아벨을 죽인 가인과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중심삼고 제2이스라엘로 재편성되어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노아 시대의 구원섭리는 종의 종의 입장에서 종의 터전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종의 입장에서 양자의 입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 율법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 터전 위에 메시아, 즉 구세주를 보낸다는 약속을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구원섭리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시간만 지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넘어 세계적인 섭리를 할 수 있는 정성의 기준을 세워야만 하나님이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 앞에 양자의 터전을 결정지을 수 있는 민족적인 정성의 기대를 조성하여 환경을 갖추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법사와 제사장들이 반대하여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고, 다시 기독교를 중심삼은 역사가 재편성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17-233)
제2이스라엘의 책임
기독교를 중심삼은 제2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오셨다 가셨지만 다녀가지 않으신 것과 같은 입장에서 세계적인 이스라엘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제1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래서 제2이스라엘로 연결되어 기독교를 중심삼은 민주세계를 창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제2이스라엘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새로운 세계적인 아벨을 모시고 아벨을 죽였던 가인을 복귀해야 됩니다.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참아들로서 아벨적인 세계형 승리의 주권형태를 갖추고 오십니다.
여기에서 민주세계는 가인적인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이고,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 것을 탕감복귀하는 기준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오시는 주님을 백방으로 모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종의 종의 시대,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자녀의 시대, 부모의 시대로 넘어가는 섭리를 해 오시기 때문에 시대적인 한계선과 구원섭리의 한계선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에 있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메시아가 다시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내용도 달라져야 하고, 목적도 달라져야 하고, 생각하는 전체가 다 달라져야 됩니다. 섭리시대는 종의 종의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직계 자녀의 시대를 거쳐서 신랑 신부, 즉 부모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어린양 잔치에 와서 제1차 부활에 동참하려면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복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정성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있는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17-235)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자리
하나님이 지금까지 슬픈 길을 걸어오신 것은 수많은 선조들이 실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수하여 낙망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은 더욱 서러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분하였던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을 간직하고 참음의 심정으로 싸워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아버지, 이 승리는 내일의 싸움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담가정의 가인과 아벨 시대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오시면서 일편단심으로 변치 않는 정성의 마음으로 나오신 것과 같은 터전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땅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의 섭리를 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곳이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자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자리는 역사상의 수많은 선조들이 패자의 서러운 잔을 마시면서도 정성을 들여 나왔던 한탄과 한의 역사를 청산하고 환희의 쌍수를 들어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할 자리입니다. 사탄이 사방팔방으로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을 넘어선 정성어린 실적을 갖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럴 때 여기에서 새로운 역사적인 승리의 일보를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17-236)
충효는 다하지 못해도 동참자는 되어야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을 대하시기 위해서도 아무렇게나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어떻게 찾아왔습니까? 모진 역경을 참고 싸워 나오신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정성을 들였는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효성을 다하는 자는 되지 못했을 망정 동참자라도 되었는가?
이러한 마음을 느끼게 될 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고 들어올 수 있습니까? 종의 시대에 있어서도 책임을 완수하여 승리의 가치를 가지고 나선 자가 없었습니다. 양자의 시대였던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혈혈단신으로 왔다가 뭇사람들의 조소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오던 예수를 본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4천 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 흘린 터전 위에 메시아를 보내 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죽으러 왔습니까? 단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온 예수님이었다면 선생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구할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눈물로 정성들여 쌓으신 터전은 어디로 갔는가? 여러분이 쌍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서게 될 때 “아버지여, 당신의 피의 정성으로 된 인연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거두어들이실 수 있도록 결실된 개성완성의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의 일편단심을 저의 일편단심으로 연결되게 하옵소서! 당신의 사랑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당신이 참고 싸우신 그 이상으로 참고 싸워서 지상에서 승리의 한 날을 세우고 당신의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하면서 몸부림칠 수 있는 참다운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받아 가지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무리나, 하나님의 힘을 입어서 천국 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천국을 창건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17-238)
정성의 예물을 어떻게 받아야 하느냐
그러면 정성의 예물을 어떻게 받아야 하느냐? 정성들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받으면 수치입니다. 언제든지 예복을 갖추어서 정성어린 준비를 해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을 찾겠다고 하지 말고 그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성의 터전을 주님보다 더 크게 마련하고 세계를 위하여 눈물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주님은 오지 말라고 해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통일교인들이 정성어린 예물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충성할 수 있는 통일교회로서의 터전을 닦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어려운 여건과 환난 가운데 부딪치게 한 제1차적인 이유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정성은 눈물이 감돌고 피비린내가 나고 피골이 상접하는 역경 가운데서 들이는 하루의 정성은 편안한 때 드리는 십 년, 백 년의 정성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우리는 편안한 자리를 저버리고 반대의 길을 몸부림쳐 나왔던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 자신이 어떠한 실적은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정성어린 마음과 충성하는 간곡한 심정이 필요합니다. (17-240)
마지막 고비를 넘어야 할 때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성을 들이셨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기반을 닦기까지 피 흘리던 역사를 엮어 오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 눈물의 고비를 넘으면서 내일의 소망을 품고 최후까지 남아지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면서 투쟁한 역사적인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전에 아무리 평지에서 잘 달렸으면 뭘 하고 험산준령을 잘 넘었으면 무엇합니까? 최후의 분수령의 한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보다는 나라를 위해서, 나라보다는 세계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서 정성을 못 들이더라도 세계를 위해서 정성들이고, 세계를 위해서 정성을 못 들여도 하나님을 위해서 정성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일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12:30)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선조들이 들인 정성은 소망의 정성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망을 이루어서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은 못 들였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정성을 인간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전부 다 굴복시키고 탕감세계를 벗어난 입장에서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17-243)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은 무엇이냐
참다운 아들딸들이 들여야 할 정성은 소망의 정성, 영광의 정성, 충성의 정성, 모심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정성을 남기고 가야만 천국이 내 천국이 되고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정성은 탕감도상에서의 정성이었지만, 앞으로의 정성은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이어야 하고 모시는 자리에 동참하기 위한 정성이어야 합니다.
복귀원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슬픈 역사과정을 종결짓기 위해서 정성을 들여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야 하고 노아가정에서 이루지 못했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 자신의 제물 실수로 인해 4백 년 동안 후손들이 저주받게 되었을 때 몸부림치던 아브라함의 심정을 대신해야 되고,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비참한 자리에 처해 있을 때 불타던 민족애로 원수였던 애급 사람을 쳐죽인 그 서러운 심정을 대신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대하던 하나님의 모든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몰리고 쫓기던 수난의 역사를 당할 때 그 민족을 바라보던 하나님의 서러움과 지금까지 기독교가 거쳐온 수많은 피의 대가에 여러분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수고하셨다고 느낀다면 “하나님, 역사적인 한을 나로 말미암아 잊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승리의 결정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승자의 모습을 갖추어서 시봉(侍奉)과 영광 그리고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정성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어떻게 했다고 하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승리자의 영광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을 중심삼은 공분의 심정으로 원수를 무찌르고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선두에서 돌격전으로 최후의 결정을 짓자는 것입니다. 승패의 결정을 지어 승리한 민족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께서 영광의 한 날을 맞이하실 수 있도록 민족적인 정성을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날을 얼마나 그리워하시겠습니까! (17-245)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말아야
선생님은 하나님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성격을 대번에 뛰려고만 하게 해 놓으셨다면 무슨 사고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정한 고개에 오르게 되면 못 가게 막아 놓고 준비하게 하십니다. 거쳐야 할 단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선생님은 고개를 쉽게 넘지 못하더라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산 증거가 역사적인 재료가 됩니다. 다 올라가서 졸라맨 허리띠를 풀어 놓으면 많은 핍박과 시련이 옵니다. 한 번 넘어지면 한 번 일어서는 것이 공식이기 때문에 많은 핍박과 시련을 거치고 나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17-249)
정성의 줄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정성들인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그가 명령할 때는 천지가 “예!” 하고 순종할 만큼 정성들인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정성의 줄로 하나님을 꽁꽁 동여매면 하나님도 완전히 결박당합니다. 정성의 줄을 끊을 수 있는 천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무에 오르기 시합을 개최한다고 광고를 하셨다고 합시다. 그러면 욕심 많은 통일교인들은 제일 큰 나무에 서로 올라가려고 싸우다가 결국에는 실적도 없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재치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은 나무를 찾아 올라갈 것입니다. 우선, 차근차근 올라가서 하나하나 기준을 세우면서 완성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크게 출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착실히 실적을 쌓으면 여러분의 당대에 소망하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후대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세계에 대해서 남겨질 수 있는 정성의 터전을 지니고 나가면 자신과 후손의 명성이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까닭 없이 맞았으면 손해배상을 받아야 합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당한 그런 사연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이 갖지 못한 보화를 창고에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이 전도하러 나가서 지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이 나를 몰라준다고 원망하지 못했습니다. (17-250)
정성의 문을 거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도둑
사람은 정성의 예물을 받으면 정성의 예물을 돌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열만한 하늘의 은사에 백만한 정성을 가한 우리의 정성을 세계 만방과 하늘 앞에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후손들까지 평안하게 살 수 있는 탕감복귀의 조건을 남겨야 합니다.
정성의 문을 거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도둑입니다. 이미, 정성이 가는 길은 개척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겉으로는 처량하지만 훗날에 환희와 영광의 세계가 이루어질 때 아버지께서 맞아 주실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서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며, 죽더라도 그 날을 이 민족 앞에 소개해 주고 죽겠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만일 그런 죽음의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소망의 그 세계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결의하고 노력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17-253) *
&&&& 천일국 훈독경 제3권 17 일 원문 &&&&
정성의 예물
날짜 : 1967. 1. 29(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참된 정성이란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어린 정성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문화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수고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인간세계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도 큰 정성의 터전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구하실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 길을 걸어 나온 사람들은 구원의 터전을 인류 앞에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셨기에 하나님은 정성의 터전을 준비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를 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정성들이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즉 일편단심을 지녀야 합니다. 두 마음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통일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정성은 누구에게 빌려 주었다가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이 여러 가지의 형태로 변화되어서는 정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일편단심, 통일된 마음을 중심삼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자기를 위주로 한 것이라면 정성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를 위주로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즉 가정이면 가정, 사회면 사회, 국가면 국가 등 더 큰 상대를 위하여 들여야만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정성들인 것은 자기 일대에 있어서는 남아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의 일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정성의 터전은 상대를 위한 것만이 남아질 수 있습니다. 상대의 크기에 따라서 정성을 들인 실적이나 인연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정성이라는 명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일편단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주로 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사랑의 마음을 터전으로 하여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위해야만 정성이라는 명사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노력만으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상대의 세계를 위하는 데 있어서 예기치 못하는 불상사나 반대작용이 일어날 수 있고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더불어 인내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내만 가지고도 안됩니다. 안팎과 사방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나게 될 때는 잘라 버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하고, 반드시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17-227)
구원역사와 정성의 기준
오늘날 객관적으로 관찰해 볼 때 인류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일관된 목적성을 지닌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사의 배후에는 정성들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정성은 자기의 어떤 사상을 중심삼은 것입니다. 자기의 온갖 정성과 마음과 사랑을 상대의 세계에 투입시켰을 때 그 노력과 인내와 투쟁의 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먼저 내가 정성을 들여야 하고, 정성을 지닌 자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편단심, 즉 통일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상대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과 일편단심의 마음이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정성을 세워서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와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정성의 가치를 올바르게 자기의 소유로 지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중심인물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망의 세계에 떨어진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섭리해 나오셨습니까? 만약에, 적당히 형편에 따라서 되면 되고 말면 만다는 식으로 섭리해 오셨다면 사회환경의 치우침을 받고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섭리해 나오셨다는 결론밖에 안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없었습니다.
이 사회도 정성어린 배후의 인연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도 사회환경에 치우침을 받지 않는 입장에서 배후의 정성의 터전을 중심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구원역사가 결정되느냐? 정성의 기준을 중심삼고 결정됩니다. 하늘의 정성이 보다 높게 될 때 사망세계에 있는 사회도 하늘의 정성 앞에 흡수될 수 있습니다. 즉, 더 큰 정성은 작은 정성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심은 더 큰 정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양심의 표준입니다. 인간이 작은 정성보다는 큰 정성권 내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애국자가 되고, 충신이 되고, 효자 열녀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나 민족을 중심삼고 충성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소망합니다. 어느 누가 자기의 민족이나 국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 차이는 있을 망정 사랑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단체, 종족, 또는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이 정성을 들일 때 거기에는 대다수가 동참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로 세워진 사람들이 그 단체나 종족이나 국가의 사상적인 기준을 대표해 가지고 환경을 정리해 나가는 방법으로 구원역사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하려고 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되느냐? 정성을 들이셔야 합니다.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일편단심, 마음의 구석구석까지 꽉 찬 일편단심으로 정성들이셔야 합니다. 이렇게 구원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사탄세계가 되었고, 사탄은 인간을 종의 입장에도 설 수 없을 정도로 유린해 놓았습니다. 이렇듯 사탄은 우리 인간을 종에 종의 자리까지 떨어지게 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원수의 피를 받고 태어난 타락의 후손들은 종으로도 세움을 받지 못하는 입장으로 떨어졌습니다. (17-229)
섭리관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사정
이런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구원하시느냐? 적당히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주권자가 자기의 백성을 사랑하는 이상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어떤 단체에 있어서 그 단체의 중심인물을 하나님이 구원섭리의 담당자, 인간의 해방자로 빼 오실 수 있으려면 그 중심인물은 그 단체에 충성하는 그 누구보다 정성어린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탄의 종의 종이 된 인간을 하늘의 종의 종으로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탄국가 안에서 정성들인 어떤 주권자나 백성들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면 한 사람도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은 이 인류 앞에 있어서 최고의 기준으로 서야 하며 나보다 더 높은 정성의 자리를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 이하의 자리에서 어떤 사람을 구원했다면 완전히 구원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참소할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인간들을 그냥 두어 가지고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종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면 사탄이 정성들이는 것 이상의 정성을 들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세계의 주권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 사람이 충성하는 도수 이상의 자리에 서시지 않고서는 사탄세계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을 종의 종에서 종, 양자, 아들의 자리를 거쳐서 신랑과 신부의 자리와 부모의 자리까지 복귀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섭리의 혜택을 받아야 할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하느냐? 인간도 역시 하나님을 대하려고 할 때마다 사탄이 옆에서 참소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설 수 없습니다.
조건이 성립되지 않고서는 구원섭리의 역사를 세울 수 없고, 구원섭리의 역사를 세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할 수 없고 섭리를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섭리관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사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17-231)
천국 가는 공식
역사노정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6천 년 전부터 사탄세계와 인연이 맺어져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탄세계의 수많은 인류가 들인 정성의 도수를 능가해야만 구원섭리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탄도 참소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태복음 10;37) 했습니다. 예수님한테 합당치 못하다는 것은 사탄 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탄세계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는 누구를 더 사랑해야 하느냐? 내 부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내 처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공식입니다. 과거의 모든 선조들, 즉 노아나 아브라함 그리고 그밖의 모든 선조들도 이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우리가 사탄과 혈통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복귀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찾아야 할 소원이 남아 있습니다. 이 소원은 내 소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창조본연의 개인으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완성시켜 나왔을 텐데 타락했기 때문에 거꾸로 복귀해 나온 것입니다.
이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해 나왔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고 가인 아벨이 잃어버린 아담가정의 기준을 민족의 형태로 복귀했다는 조건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했던 그 기준을 세워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새로운 천국이념을 소개하기 위해서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적인 예수님 앞에 가인적인 입장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담의 가정에서 아벨을 죽인 가인과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중심삼고 제2이스라엘로 재편성되어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구원역사를 이끌어 나오시지만 그것이 발전적인 입장에 있지 못하게 될 때는 망합니다. 노아 시대의 구원섭리는 종에 종의 입장에서 종의 터전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종의 입장에서 양자의 입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 율법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 터전 위에 메시아, 즉 구세주를 보낸다는 약속을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구원섭리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시간만 지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성들인 것과 같이 정성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넘어 세계적인 섭리를 할 수 있는 정성의 기준을 세워야만 하나님이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때를 정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님을 보내 주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 앞에 양자의 터전을 결정지을 수 있는 민족적인 정성의 기대를 조성하여 환경을 갖추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법사와 제사장들이 반대하여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고, 다시 기독교를 중심삼은 역사가 재편성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17-233)
제2이스라엘의 책임
그러면 기독교를 중심삼은 제2이스라엘은 어떠한 책임을 해야 하느냐? 예수님이 오셨다 가셨지만 다녀가지 않으신 것과 같은 입장에서 세계적인 이스라엘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제1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래서 제2이스라엘로 연결되어 기독교를 중심삼은 민주세계를 창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민주세계를 창건한 제2이스라엘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새로운 세계적인 아벨을 모시고 아벨을 죽였던 가인을 복귀해야 됩니다.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참아들로서 아벨적인 세계형 승리의 주권형태를 갖추고 오십니다.
여기에서 민주세계는 가인적인 입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이고,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 것을 탕감복귀하는 기준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오시는 주님을 백방으로 모셔야 됩니다. 오시는 메시아를 오늘날 민주세계의 사회제도나 그 형태의 기준에 통할 수 있는 그런 메시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종의 종의 시대,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자녀의 시대, 부모의 시대로 넘어가는 섭리를 해 오시기 때문에 시대적인 한계선과 구원섭리의 한계선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에 있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메시아가 다시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 온다면 그런 주님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관념과 제도의 꼬리를 따라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한결같이 되풀이되면 안됩니다.
그것은 중간밖에 안되기 때문에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내용도 달라져야 하고, 목적도 달라져야 하고, 생각하는 전체가 다 달라져야 됩니다. 섭리시대는 종의 종의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직계 자녀의 시대를 거쳐서 신랑 신부, 즉 부모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어린양 잔치에 와서 제1차 부활에 동참하려면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복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정성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있는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정성스럽게, 코로 냄새를 맡는 것도 정성스럽게, 듣는 것도 정성스럽게, 육신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도 정성스럽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정성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것이 천리원칙입니다. (17-235)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자리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협조한다는 패들 가운데 오히려 기독교를 욕되게 하고 망치고 팔아먹는 류(類)가 많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피가 끓는 젊은 가슴을 가진 사나이들이라면 참을 수 없는 의분심과 적개심을 가지고 불의를 지구상에서 추방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불의를 추방하는 일에 정성을 바쳐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어디를 가든지 인간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의 주위에 어떤 어려운 환경과 원수들의 총칼이 모여든다고 해도 참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뼈 없는 사나이로 참아서는 안됩니다. “두고 보자! 어느 한 때에 내가 실력을 갖춘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시련의 환경은 종결될 것입니다.
개인에서부터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넘어설 때까지의 과정에는 싸움과 더불어 수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세계의 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내 앞에 이런 것들이 침범해 온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 놓고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승리한 터전의 위에서 아버지를 대해야지 패자의 모습을 가지게 되면 아버지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슬픈 길을 걸어오신 것은 수많은 선조들이 실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실수하여 낙망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은 더욱 서러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분하였던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을 간직하고 참음의 심정으로 싸워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아버지, 이 승리는 내일의 싸움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생활에서 싸움의 노정을 거쳐가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가슴을 부여안고 자탄하는 노정을 걷게 됩니다. 그것이 천리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망의 사람이 되려면 정성들인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가정의 가인과 아벨 시대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삼고 섭리해 나오시면서 일편단심으로 변치 않는 정성의 마음으로 나오신 것과 같은 터전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땅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의 섭리를 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곳이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자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자리는 역사상의 수많은 선조들이 패자의 서러운 잔을 마시면서도 정성을 들여 나왔던 한탄과 한의 역사를 청산하고 환희의 쌍수를 들어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할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탄이 사방팔방으로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을 넘어선 정성어린 실적을 갖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럴 때 여기에서 새로운 역사적인 승리의 일보를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17-236)
충효는 다하지 못해도 동참자는 되어야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 사람을 구하시는 데도 소홀히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한 사람을 대하시기 위해서도 아무렇게나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어떻게 찾아왔습니까? 아무렇게나 찾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진 역경을 참고 싸워 나오신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정성을 들였는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효성을 다하는 자는 되지 못했을 망정 동참자라도 되었는가?
이러한 마음을 느끼게 될 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고 들어올 수 있습니까? 불충했던 과거와 불충한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찾아오려니까 얼마나 초조하겠습니까? 그런 마음이라도 느껴봤습니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의 종의 시대에 한 대표자를 이 땅 위에 보내셨지만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종의 시대에 있어서도 책임을 완수하여 승리의 가치를 가지고 나선 자가 없었습니다. 양자의 시대였던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시여, 만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하면서 기도했던 예수님이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혈혈단신으로 왔다가 뭇사람들의 조소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오던 예수를 본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4천 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이 피 흘린 터전 위에 메시아를 보내 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사적인 섭리의 노정을 망각하고 역사적인 제물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기독교의 신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죽으러 왔습니까? 단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온 예수님이었다면 선생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구할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눈물로 정성들여 쌓으신 터전은 어디로 갔는가? 여러분이 쌍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서게 될 때 “아버지여, 당신의 피의 정성으로 된 인연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거두어들이실 수 있도록 결실된 개성완성의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의 일편단심을 저의 일편단심으로 연결되게 하옵소서! 당신의 사랑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당신이 참고 싸우신 그 이상으로 참고 싸워서 지상에서 승리의 한 날을 세우고 당신의 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하면서 몸부림칠 수 있는 참다운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받아 가지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무리나, 하나님의 힘을 입어서 천국 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천국을 창건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여! 역사적인 정성의 예물과 공적이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이 시대는 탕감시대인 만큼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됩니다.” 하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대의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피의 역사를 엮어 왔고, 하나님의 정성이 어린 제단이 피의 인연을 통해서 기독교로 계승되어 세계적인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외적인 형태는 갖추었지만 충과 의로 남아질 수 있는 내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17-238)
정성의 예물을 어떻게 받아야 하느냐
그러면 정성의 예물을 어떻게 받아야 하느냐? 하나님이 한민족에게 주시는 정성어린 예물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정성들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받으면 수치입니다. 언제든지 예복을 갖추어서 정성어린 준비를 해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는 주님을 찾겠다고 하지 말고 그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정성의 터전을 주님보다 더 크게 마련하고 세계를 위하여 눈물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주님은 오지 말라고 해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통일교인들이 정성어린 예물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복귀노정에서 이 민족 앞에 제시된 모든 여건들을 여러분 자체의 실적으로 여겨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 모든 실적을 합하고 뭉쳐서 하늘 앞에 정성어린 터전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충성할 수 있는 통일교회로서의 터전을 닦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어려운 여건과 환난 가운데 부딪치게 한 제1차적인 이유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정성은 어디서부터 효과가 빨리 나타나느냐?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에서 피리를 불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정성을 들인다면 효과가 없습니다. 눈물이 감돌고 피비린내가 나고 피골이 상접하는 역경 가운데서 들이는 하루의 정성은 편안한 때 드리는 십 년, 백 년의 정성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우리는 편안한 자리를 저버리고 반대의 길을 몸부림쳐 나왔던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 자신이 어떠한 실적은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정성어린 마음과 충성하는 간곡한 심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아들딸이 되지 못했으면 이 민족 중에서 그런 아들딸을 찾아내는 심부름꾼이라도 되어서 그들을 아버지 앞에 인도하고 나서 아버지를 한번 불러 보자는 것입니다. (17-240)
마지막 고비를 넘어야 할 때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성을 들이셨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기반을 닦기까지 피 흘리던 역사를 엮어 오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 눈물의 고비를 넘으면서 내일의 소망을 품고 최후까지 남아지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면서 투쟁한 역사적인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싸움의 마지막 고비를 넘어야 할 때가 왔는데, 여러분이 이전에 아무리 평지에서 잘 달렸으면 뭘 하고 험산준령을 잘 넘었으면 무엇합니까? 최후의 분수령의 한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설령, 거기서 죽을지언정 여러분은 가야만 합니다. 이미, 때는 결실을 해야 하는 가을인데도 여름인 줄 알고 푸르러 있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아궁이 속에 들어가는 불쏘시개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고, 재촉하고, 권고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보다는 나라를 위해서, 나라보다는 세계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대한민국, 한민족, 배달민족이라고 하는 이 민족이 없어지더라도 세계는 남아져야 합니다.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세계 인류로 남아져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서 정성을 못 들이더라도 세계를 위해서 정성들이고, 세계를 위해서 정성을 못 들여도 하나님을 위해서 정성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일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12:30)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선조들이 들인 정성은 소망의 정성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망의 한 날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몸부림친 정성이었지 소망을 이루어서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은 못 들였습니다. 탕감노정에서의 뒤넘이치던 정성은 들였을지언정 소망을 이루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정성은 못 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정성을 인간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전부 다 굴복시키고 탕감세계를 벗어난 입장에서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17-243)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은 무엇이냐
앞으로 참다운 아들딸들이 들여야 할 정성은 무엇이냐? 현실적인 생활무대에서의 정성이 아니라 소망의 정성, 영광의 정성, 충성의 정성, 모심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정성을 남기고 가야만 천국이 내 천국이 되고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정성은 탕감도상에서의 정성이었지만, 앞으로의 정성은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이어야 하고 모시는 자리에 동참하기 위한 정성이어야 합니다.
모심의 자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슬퍼해 나오셨던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고 슬픈 정성의 사연에 동참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을 소개하고 그에 따르는 탕감조건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하여 나온 것이 복귀원리입니다.
복귀원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슬픈 역사과정을 종결짓기 위해서 정성을 들여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담가정에서 아담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슬픔에 동참해야 되고, 가인이 최후의 결실을 맺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아버지께 못을 박았던 서러움을 잊으실 수 있게 하고, 노아가 120년 동안 참고 수고하여 충성해 나왔지만 일시에 파괴되었던 그 서러움을 잊으실 수 있게 해야 됩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3대에 걸쳐서 수고하시던 심정적인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로부터 예수님까지 2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하나님의 서러움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에게 심어 주기 위한 것이 복귀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야 하고 노아가정에서 이루지 못했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 자신의 제물 실수로 인해 4백 년 동안 후손들이 저주받게 되었을 때 몸부림치던 아브라함의 심정을 대신해야 되고,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비참한 자리에 처해 있을 때 불타던 민족애로 원수였던 애급 사람을 쳐죽인 그 서러운 심정을 대신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대하던 하나님의 모든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몰리고 쫓기던 수난의 역사를 당할 때 그 민족을 바라보던 하나님의 서러움과 지금까지 기독교가 거쳐온 수많은 피의 대가에 여러분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수고하셨다고 느낀다면 “하나님, 역사적인 한을 나로 말미암아 잊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승리의 결정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승자의 모습을 갖추어서 시봉(侍奉)과 영광 그리고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정성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어떻게 했다고 하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갈 길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조건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에게서 오늘 당장 이러한 마음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가로막힌 원수의 적진을 파괴해 버리고 승리자의 영광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승리자의 영광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한을 중심삼은 공분의 심정으로 원수를 무찌르고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선두에서 돌격전으로 최후의 결정을 짓자는 것입니다. 승패의 결정을 지어 승리한 민족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께서 영광의 한 날을 맞이하실 수 있도록 민족적인 정성을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날을 얼마나 그리워하시겠습니까! (17-245)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말아야
선생님은 하나님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성격을 대번에 뛰려고만 하게 해 놓으셨다면 무슨 사고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정한 고개에 오르게 되면 못 가게 막아 놓고 준비하게 하십니다. 거쳐야 할 단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선생님은 고개를 쉽게 넘지 못하더라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산 증거가 역사적인 재료가 됩니다. 다 올라가서 졸라맨 허리띠를 풀어 놓으면 많은 핍박과 시련이 옵니다. 한 번 넘어지면 한 번 일어서는 것이 공식이기 때문에 많은 핍박과 시련을 거치고 나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웃는 날을 일주일 이상 가져서는 안됩니다. 좋은 날이 있거든 “하나님, 요건 며칠 동안 가게 하시렵니까?” 하고 기도해서 하나님께 약속을 받고 웃어야 합니다. 그런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과 구면인 사람들이 많은데, 선생님이 여러분의 얼굴을 가만히 보면 이전과 다릅니다. 계절에 비유한다면 가을과 같습니다. 눈도 빛나지 않고 손도 기운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냥 두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죽을 때의 태세를 잘 갖추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지도하면서 염려한 것은 죽을 날이 가까워지는데 그 날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유언을 써 가지고 다닙니다. 아버지 앞에 가서 내가 요구할 수 있는 요건이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땅에 살아 있는 한 최대의 노력을 했다는 기준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17-249)
정성의 줄
선생님이 복잡한 영계에 울타리를 두르고 몸부림쳐 나왔기 때문에 하늘이 어느 한 때도 떠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터전 위에 서 있지만 수많은 영통인들과 신령한 사람들이 드나들 때 조심해야 됩니다. 이 분야는 자기의 경력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본성이 서로 다른 만큼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대할 때는 새로운 기준에 응할 수 있는 마음과 상응하는 가치를 가지고 상대적인 위치에서 대하지 않으면 조건에 걸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정성들인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배짱부리고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랑이 방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명령할 때는 천지가 “예!” 하고 순종할 만큼 정성들인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정성의 줄로 하나님을 꽁꽁 동여매면 하나님도 완전히 결박당합니다. 정성의 줄을 끊을 수 있는 천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무에 오르기 시합을 개최한다고 광고를 하셨다고 합시다. 그러면 욕심 많은 통일교인들은 제일 큰 나무에 서로 올라가려고 싸우다가 결국에는 실적도 없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만 크고 실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재치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은 나무를 찾아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많은 사람은 분수에 넘치는 제일 높은 나무를 올라가려다가 떨어지고 맙니다. 우선, 차근차근 올라가서 하나하나 기준을 세우면서 완성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크게 출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착실히 실적을 쌓으면 여러분의 당대에 소망하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후대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세계에 대해서 남겨질 수 있는 정성의 터전을 지니고 나가면 자신과 후손의 명성이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성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될 때 어떻게 옮겨지느냐? 작은 지남철에 쇠붙이들이 달랑달랑 붙어 있는데, 여기에 큰 지남철이 한번 싹 들어왔다가 나간다면 그 쇠붙이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두 다 큰 지남철에 달라붙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큰 지남철을 천운이라고 할 때 그 천운의 터전이 여러분 앞에 왔다가 갈 때는 지금까지 역대의 선조로부터 내려 온 정성의 터전을 모두 다 빼앗아 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럴 때, 즉 도둑을 맞을 때 가만히 앉아서 입벌리고 웃으면서 도둑을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도둑맞은 것을 다시 도둑질해 올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수만 번 지구성을 빼앗아 오는 도둑질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무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그런 작전을 해 왔습니다. 먼저, 내려가서 맞는 것입니다. 맞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동정을 받게 됩니다.
또, 높은 자가 낮은 자 앞에서 맞게 되면 반비례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쑥 올라오게 될 때는 몽땅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해서 은혜 받은 사람들의 많은 은혜의 보따리를 빼앗아 왔습니다. 이게 죄인 가요, 선인가요? 선입니다.
누구든지 까닭 없이 맞았으면 손해배상을 받아야 합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당한 그런 사연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이 갖지 못한 보화를 창고에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이 전도하러 나가서 지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전도하러 나갔을 때 지쳐서 신경통이 생기는 것도 여러분 자신의 잘못이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이구! 내 신경통은 뜻 때문에 생겼는데, 선생님은 그것도 몰라주시네!” 하면서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이 나를 몰라준다고 원망하지 못했습니다.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정성을 들이고 나서야 하나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17-250)
정성의 문을 거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도둑
사람은 정성의 예물을 받으면 정성의 예물을 돌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청춘을 불살라 버린 그 정성, 즉 눈물과 피와 땀을 갖고서 정성의 예물을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열만한 하늘의 은사에 백만한 정성을 가한 우리의 정성을 세계 만방과 하늘 앞에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후손들까지 평안하게 살 수 있는 탕감복귀의 조건을 남겨야 합니다.
그렇게 내 자신의 손으로 하늘의 요건에 플러스를 시키겠다고 몸부림을 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백성이면 백성으로서의 예물, 종족이면 종족으로서의 예물, 식구면 식구로서의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정성의 문을 거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도둑입니다. 이미, 정성이 가는 길은 개척되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여러분의 목적지를 향하여 쉬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모습이 비록 겉으로는 처량하지만 훗날에 환희와 영광의 세계가 이루어질 때 아버지께서 맞아 주실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서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며, 죽더라도 그 날을 이 민족 앞에 소개해 주고 죽겠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만일 그런 죽음의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소망의 그 세계를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결의하고 노력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17-2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