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3권 16일
체휼신앙의 중요성(훈독본)
날짜 : 1971. 2. 7(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이 시간에는 ‘체휼신앙의 중요성’이라는 제목으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신앙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고 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어져서 주체에게서 되어지는 사실이 대상에 미쳐지고 대상에게서 이루어지는 사실이 주체에게 관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수수작용을 해 가지고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되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환경에 변천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천되는 내용이 과거보다도 더 가치적인 것으로 느껴지게 될 때 우리는 신앙의 보람을 찾게 됩니다. (40-275)
체휼신앙의 출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의 마음에 느껴지는 사실을 상대적인 생활환경에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떤 신앙의 기준 밑에서 일년이면 일년 동안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면 그 계획이 나와 더불어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그리고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과 대상이 되는 내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를 환경 가운데 어떻게 맺히게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떠한 목표를 세워서 실천해 나간다고 하면 그 목표는 언제나 주체와 대상의 공동적인 목표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도 언제나 주체와 대상의 공동적인 가치의 결과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같이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때 체휼신앙이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의식을 가진 어떤 주체가 있으면 그 주체의 생각과 자기의 생각을 병행시켜 가지고 생활해야 됩니다. 자기의 하루의 생활과정이 주체와 더불어 함께하는 과정으로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될 때 체휼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40-276)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의 방향에 어떻게 일치시키느냐
마음에는 마음의 문, 즉 심문(心門)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 주시는 그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어떻게 갖다 맞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연을 보게 되면 춘하추동이 있고 아침, 낮, 저녁, 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봄 절기에, 어떤 사람은 여름 절기에, 어떤 사람은 가을 절기에, 어떤 사람은 겨울 절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아침과 같은 형의 사람, 낮과 같은 형의 사람, 저녁과 같은 형의 사람, 밤과 같은 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모습이 각양각이한 것은 처해 있는 위치가 전부 다른 동기에서 빚어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서 있는 기준에 따라서 우리의 모습도 전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한 중심을 중심삼고 춘하추동과 같은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중심을 기준으로 관계를 맺어야 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 주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주체 자신도 돌지만 대상인 우리 인간도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봄 절기와 같은 성품으로 나를 대한다면 나도 그 성품을 따라서 언제나 환경적으로 조절해 가지고 거기에 상대적인 입장에서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된다면 반드시 체휼적인 자극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40-277)
신앙자가 주의해야 할 것
그러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의해야 될 것은 어떠한 일을 막론하고 개인적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팽팽하게 공기가 들어가서 완전히 둥글게 된 공과 같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불안한 마음이라든가 개인의 욕심을 중심삼은 사(邪)된 마음을 가지면 둥그런 공과 같은 마음에 모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양심이 가책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음차 두 개를 놓고 하나를 울리면 다른 하나는 치지 않아도 그 음파에 자극되어 같은 진동수로 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공명체가 될 수 있는 원만한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한 주체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영적인 파동을 감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그리며 명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명상을 할 때는 하나님의 본성과 내 본성이 공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공명되는 내용을 중심삼고 자기가 바라는 목적을 대하게 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십니다.
그러한 공명을 느끼지 못하는 자리에서 어떠한 일을 대하게 될 때는 “하나님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내가 느끼지는 못하지만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다. 지금은 그 뜻을 중심삼고 내가 접선하는 순간이다.”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먼저 성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그 뜻과의 일치점을 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40-278)
뜻과 일치되려면
그러면 뜻의 일치점을 기하기 위해서는 순결한 마음으로 그 일을 중심삼아 가지고 내 마음이 완전히 공명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하더라도 그 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처해 있던 입장보다도 한 단계 전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더불어 주체와 대상의 입장에서 마음과 몸이 주고받는 느낌을 느껴 가지고 그 일을 대하여 나가게 될 때는 하늘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 와 있다는 감정을 가지고 어떠한 사물을 대하고 일을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뜻과 더불어 나는 완전히 일체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뜻을 이루는 자리에 간다는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나 자신이 그 동기와 일체가 되어서 결과적인 입장을 가져오게 될 때 그것이 공적인 목적에 결부되게 되면 보람을 느끼고 힘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기도생활을 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물건을 대하는 대물관계, 다음에 사람을 대하는 대인관계, 다음에는 대인관계에서 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물건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 사람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도 그 (천)법에 걸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40-280)
물건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신앙자로서 물건을 대할 때 어디까지나 공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공적으로 대하는데 그 물건이 열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를 어떻게 보다 크게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물건 가운데 하나님이 관계되어 계신다고 할 때 물건의 가치는 무한한 비중을 갖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물건을 대하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의 세계에서 느낌 가운데 그러한 감응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반드시 자기 혼자 바라보던 것보다도 더 입체적인 가치의 내용을 지니게 됩니다.
하나의 일이나 물건을 대했던 것이 나에게 환경적으로 큰 가치의 결과를 느끼게 해줬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영적이고 내적인 가치를 보다 높은 의미에서 차지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일을 하고 나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신을 두고 보더라도 수난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그 수난의 길을 자기 혼자 간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수난의 길을 무한한 가치의 중심인 하나님과 더불어 간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수난의 길 앞에 자기가 동참한 사실이 얼마나 큰 가치인가를 느끼면서 그 고통의 대가보다도 감사의 대가가 더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는 어떠한 고통의 길도 감사의 길이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영광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0-281)
사물은 원칙을 중심삼고 대하라
여러분이 그런 입장을 찾아 나가게 되면 무슨 일을 대하든 벌써 마음이 압니다. 어떠한 일이나 물건을 대하게 될 때 그것이 나에게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를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내 마음과 뜻,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는 데 있어서 일체가 되어야만 본래의 동기, 즉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일치되는 사위기대권이 벌어집니다.
그리하여 그 물건이 나와 주체와 대상의 결과에 부합된다는 가치를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결과가 거두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상의 물건으로서 선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한 선의 결과를 내 주위에 많이 쌓아 갈수록 내 자신에 있어서는 재창조 과정의 자리가 점점 넓어지는 것이요,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 어떤 물건을 대해도 벌써 그 물건 자체에서 나에게 파장이 옵니다. 그 물건을 원만한 마음, 사심을 떠나서 공명할 수 있는 음차와 같은 마음으로 심각하게 대하게 되면 그것이 좋다든가 나쁘다고 하는 감정이 우러납니다.
만일에 파장이 오지 않으면 물건을 척 대했을 때의 첫인상이나 처음 들어오는 감정을 통해서 그것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의 마음으로 진실된 입장에서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활 가운데서 느꼈던 첫 감정이 몇 퍼센트나 적중하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주시해야 됩니다. 그러한 생활태도를 습관화시키면 열 가지의 일이 있으면 그 가운데서 다섯 가지, 여섯 가지로 점점 그 도가 높아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걸 키워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을 대할 때는 자기의 체휼적인 감정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지극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직장생활에서 물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종이 한 장도 허술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허술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그 대가를 추구하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심정적인 체휼의 도를 넓히기 위한 조건물로서 찾기 위해 노력하고 생활적인 감정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되면 생활권 내에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같이하셨다는 것을 실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체휼신앙의 개발을 위해서는 여러분이 언제나 물건을 심각하게 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자들이 삯바느질을 한다고 할 때 그 일도 내 일과 같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의 옷과 같이 정성스런 마음으로 하게 되면 그 옷을 입는 사람이 옷을 대할 때 “이것은 선한 물건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40-283)
체휼신앙을 개발하는 생활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삼고 되어지는 주위의 모든 요건들은 나를 계발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생활태도를 중심삼고 살게 되면 처음 보는 사람이든, 안면이 있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체휼적인 환경을 계발하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사사건건에 있어서 틀림없이 효과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기쁨을 느꼈다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신앙생활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사는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운 길을 가더라도 그것이 모든 체휼적인 감정에 접해서 가는 길이라면 왠지 든든하고 희망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만일에 반대하는 함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것이 충격이 되고 자극이 되어서 나 자신의 중심이 꺾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화로 더 폭발적인 힘이 작용하게 되고 선의의 투쟁의 힘이 솟구쳐 나오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게 될 때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느낌으로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권 내에서 타락이 벌어지고, 실패가 벌어지고, 하나님 앞에 배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그 관계를 어떻게 잘 조정해서 하늘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하느냐 하는 것을 수시로 연구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생활과정을 분석해서 결과를 타진해야 합니다. 내가 느끼는 것은 몇 퍼센트는 맞는다, 몇 퍼센트는 틀림없다고 하는 그러한 내적인 인연을 여러분이 환경권 내에서 맺어 가지고 타진할 수 있는 입장, 그러한 결과를 측정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하나님이 같이하고 계시는지, 악이 같이하고 있는지를 분석해 낼 수 없습니다.
길을 나설 때 기도를 안 해도 괜찮습니다. 첫 걸음을 내디딜 때 하나님이 좋아하실 수 있는 길이냐, 섭섭한 길이냐를 알아야 됩니다. 첫 번에 느껴 오는 감이 “아, 이건 좋다. 나쁘다.” 하는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환경적으로 체휼신앙에 대한 것을 계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사람을 볼 때도 무심히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40-285)
체휼신앙의 중요성
여러분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 더욱이 지도자가 되려면 그 사람의 정상인 기준과 비정상적인 기준, 다시 말하면 슬플 때의 기준과 기쁠 때의 기준을 가려야 합니다. 눈만 보고도, 표정 하나만 보고도 금방 짐작해야 합니다.
말하는 어조라든가 태도를 보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배후에는 좋지 않은 무엇이 있구나!” 하는 것을 하나님과 더불어 내가 감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둘이 만날 때 표정만 봐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쭉 감정하는 것을 실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부합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을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만일 부합되었다고 느껴질 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권 내에서 내 감정이 하나님과 밀착되어 가지고 동화될 수 있느냐, 반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예감을 통해 분석해 가지고 내 생활권 내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결과를 많이 남길 것인가 하는 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기만 해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복잡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을 척 보게 되면 “저 사람이 오늘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고 앉아 있지만 맥이 있구나, 없구나!” 하는 감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그 감이 오고, 어떤 일이나 물건에 대한 감정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늘에 끌려 다니다가는 하늘이 떠나 버리면 지쳐 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체휼신앙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생활권 내에서 승리적인 결과, 즉 생활권 내에서 신의 목적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런 결과를 타진시킬 수 있는 가치적인 내용이 내가 대하기 전보다 대하고 난 후에 더 좋은 결과로 찾아진다고 할 때는 아무리 핍박이 와도 그냥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절대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행한 결과가 마이너스가 될 때는 아무리 힘을 내려고 해도 후퇴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체험은 못하더라도 생활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분석하는 도수를 높여 나가야 합니다.
그런 단계에 이르면 무슨 현상이 벌어지느냐? 삼각적인 관계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타진하는 놀음이 많이 벌어집니다. 즉, 제3의 일로서 나와 하등의 관계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계획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연하게 체휼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게 되면 제3점의 일로서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도 척 느껴지는 느낌을 통해서 관계를 맺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처럼 생활권 내에 있어서 발전할 수 있는 동기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40-288)
항상 기뻐하고 체휼적인 감도를 넓혀 가라
그리고 여러분이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때는 절대로 마이너스가 되어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아침에 나갈 때보다 기쁜 입장, 즉 플러스가 된 입장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집안에 불화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집을 나갔다 돌아올 때는 아무리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어려움을 탕감시켜 놓고 기쁨의 조건을 들고 들어와야 합니다. 만일 직장에서 분하고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집에 와서 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 자리에서 풀든가, 아니면 다른 일로 대체해서 그 이상의 기쁨의 조건으로 탕감시켰다는 놀음을 해 놓고 집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것을 보강할 수 있는 간접적인 자기만의 비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를 대하거나 아들딸을 대할 때 그런 기쁜 표정과 기쁜 마음으로 주고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직장에서 타격을 받았던 슬픔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망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전체를 중심삼고 그러한 생활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루를 무심코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를 대하게 되면 어떠한 표정으로 대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연구해 나가게 되면,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되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만물은 교재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영적인 세계의 직접적인 감응 또는 간접적인 감응을 일으킬 수 있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 창조물은 하나님의 성상을 닮아 난 것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간접적이나마 그 성상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는 우리가 반드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선의 요소, 내적인 성품이 있기 때문에 그 성품을 따라 움직여서 연결시키기 위한 생활을 넓혀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일도 지장을 줄 수 없고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40-290)
내가 선을 행함에 있어서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도 주지만 원수를 위해서 참되게 주는 그것이 얼마나 멋지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사지에 가더라도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동기의 존재는 원수가 되었더라도 나는 공적인 입장에서 소화시키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사탄이 아무리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으로 화해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40-292)
첫 번의 느낌으로 심령을 개발하라
여러분이 대하는 일은 전부 다 하늘이 실제의 생활을 중심삼고 천국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재료요, 하나의 교재로서 나에게 접근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그것을 좋은 결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데 주력해야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감, 첫 번의 느낌을 아버지 앞에 언제나 의논하고 공명체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하늘을 대할 수 있는 그런 기준만 되면 반드시 영파(靈波)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수한 안테나와 같은 입장에서 영계의 파장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하는 어떤 일의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첫 번으로 느끼는 감을 통하여 분석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면 자연히 자기 스스로가 실제의 생활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게 됩니다.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생활적인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야 험악한 세상에서 타락하지 않고 천국에 합당한 인격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기도나 신령한 역사를 통해서 은혜의 기준에 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영계에서 영인들이 협조해 주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우리 인간은 생명체라든가 생령체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에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계의 협조를 받지 않은 영력을 중심삼아 가지고 영의 작용을 계발해 놓으면 영인들이 지도해 주지 않아도 내 자신의 생령체에 의해서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느 기준까지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이 서러워하실 때 나에게도 형용할 수 없는 서러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 일을 실제로 느끼고 실제로 생활권 내에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선 사람이라야 체휼적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신앙이라는 것은 영계에서 협조해서 하는 것보다 생활권 내에서 감정해 가지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발전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도만 하고 행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찾아오셨다가도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적인 신앙의 기반을 우리의 생활권 내에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0-296)*
&&&&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16일 원문 &&&&
체휼신앙의 중요성
날짜 : 1971. 2. 7(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이 시간에는 ‘체휼신앙의 중요성’이라는 제목으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 위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길은 혼자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신앙길에 있어서 대상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고 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어져서 주체에게서 되어지는 사실이 대상에 미쳐지고 대상에게서 이루어지는 사실이 주체에게 관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맺어지지 않으면 뜻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나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이요, 뜻을 위해서 움직였다고 하는 결과가 하늘의 섭리 앞에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반드시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연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수수작용을 해 가지고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되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환경에 변천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천되는 내용이 과거보다도 더 가치적인 것으로 느껴지게 될 때 우리는 신앙의 보람을 찾게 됩니다. (40-275)
체휼신앙의 출발
대개, 사람은 상대적인 관계를 통해서 의식하게 됩니다. 물론 개인의 마음속에서도 생각은 하겠지만, 대다수는 감각적인 기관을 통하여 자극을 받아서 상대적인 관계를 중심삼고 의식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의 마음에 느껴지는 사실을 상대적인 생활환경에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떤 신앙의 기준 밑에서 일년이면 일년 동안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면 그 계획이 나와 더불어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그리고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과 대상이 되는 내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를 환경 가운데 어떻게 맺히게 하느냐 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볼 때 중요한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주고받으면 반드시 새로운 번식, 곧 제3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제3의 결과라는 것은 주체의 목적뿐만이 아니라 대상의 목적, 즉 이중목적을 지니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로 나타난 것이 주체와 대상의 인연을 맺기 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되어야만 보다 큰 자극을 느낄 수 있고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번 달이면 이번 달을 중심삼고 어떠한 목표를 세워서 실천해 나간다고 하면 그 목표를 자기 개인의 목표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목표는 언제나 주체와 대상의 공동적인 목표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도 언제나 주체와 대상의 공동적인 가치의 결과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말은 내가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은 나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동반해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같이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때 체휼신앙이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무의미하게 생활할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가진 어떤 주체가 있으면 그 주체의 생각과 자기의 생각을 병행시켜 가지고 생활해야 됩니다. 자기의 하루의 생활과정이 자기에 한정되는 과정이 아니라 주체와 더불어 함께하는 과정으로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될 때 체휼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40-276)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의 방향에 어떻게 일치시키느냐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마음의 문, 즉 심문(心門)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대하고 계시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 주시는 그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어떻게 갖다 맞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게 되면 춘하추동이 있고 아침, 낮, 저녁, 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성격도 전부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봄 절기에 해당하고, 어떤 사람은 여름 절기에 해당하고, 어떤 사람은 가을 절기에 해당하고, 어떤 사람은 겨울 절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아침과 같은 형의 사람, 낮과 같은 형의 사람, 저녁과 같은 형의 사람, 밤과 같은 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 모습을 보더라도 각양각이합니다.
그렇게 모습이 각양각이한 것은 서 있는 바탕이 전부 다르기 때문입니다. 처해 있는 위치가 전부 다른 동기에서 빚어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 서 있는 기준에 따라서 우리의 모습도 전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한 중심을 중심삼고 춘하추동과 같은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봄 절기와 여름 절기의 중간형의 사람이 있고 여름 절기와 가을 절기의 중간형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 개인 개인가 서 있는 위치는 전부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중심을 기준으로 관계를 맺어야 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기준이 우리의 주체적인 입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주체를 중심삼아 가지고 주체 자신도 돌지만 대상인 우리 인간도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봄 절기와 같은 성품으로 나를 대한다면 나도 그 성품을 따라서 언제나 환경적으로 조절해 가지고 거기에 상대적인 입장에서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된다면 반드시 체휼적인 자극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40-277)
신앙자가 주의해야 할 것
그러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의해야 될 것이(은) 무엇이냐? 일을 대하는 데 있어서 사소한 일이든 큰일이든, 어떠한 일을 막론하고 개인적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팽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팽팽하게 공기가 들어가서 완전히 둥글게 된 공과 같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완전히 팽팽한 공과 같은 마음 상태가 되지 않고 불안한 마음이라든가 개인의 욕심을 중심삼은 사(邪)된 마음을 가지면 둥그런 공과 같은 마음에 모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양심이 가책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원만한 공처럼 팽팽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어떠한 자극이 들어오면 마음 전체가 공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음차 두 개를 놓고 하나를 울리면 다른 하나는 치지 않아도 그 음파에 자극되어 같은 진동수로 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공명체가 될 수 있는 원만한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한 주체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영적인 파동을 감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명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것을 그리며 명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명상을 할 때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그 마음을 둥글게 해서 하나님이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본성과 내 본성이 공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봄 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봄 절기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과 더불어 그 성품이 완전히 공명될 수 있는 마음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공명되는 내용을 중심삼고 자기가 바라는 목적을 대하게 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명을 느끼지 못하는 자리에서 어떠한 일을 대하게 될 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바라보고 계신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내가 느끼지는 못하지만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다. 지금은 그 뜻을 중심삼고 내가 접선하는 순간이다.”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나 혼자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일이면 일 자체를 중심삼고 볼 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먼저 성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그 뜻과의 일치점을 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40-278)
뜻과 일치되려면
그러면 뜻의 일치점을 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비양심적인 입장에 서서는 안됩니다. 순결한 마음으로 그 일을 중심삼아 가지고 내 마음이 완전히 공명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하더라도 그 어려운 일이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처해 있던 입장보다도 한 단계 전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더불어 주체와 대상의 입장에서 마음과 몸이 주고받는 느낌을 느껴 가지고 그 일을 대하여 나가게 될 때는 하늘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 와 있다는 감정을 가지고 어떠한 사물을 대하고 일을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뜻과 더불어 나는 완전히 일체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뜻을 이루는 자리에 간다는 입장에서 일이면 그 일이 동기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나 자신이 그 동기와 일체가 되어서 결과적인 입장을 가져오게 될 때 그것이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목적에 결부되게 되면 그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보람을 느끼고 힘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기도생활을 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대하고 있는 것들은 대개 어떻게 구분이 되느냐? 물건을 대하는 대물관계, 다음에 사람을 대하는 대인관계, 다음에는 대인관계에서 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물건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 천법 혹은 하나님 앞에 걸리지 말라고 하고, 사람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도 걸리지 말라고 하고, 그 다음에 말하는 관계에 있어서도 그 (천)법에 걸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직장 생활이 벌어질 것이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인륜관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도덕관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하는 관계에 있어서는 행동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활권 내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여건들인 것입니다. (40-280)
물건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신앙자로서 물건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되느냐? 어디까지나 공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공적으로 대하는데 그 물건이 열만한 가치가 있다면 열만한 가치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천만한 가치로 보느냐, 그 가치를 어떻게 보다 크게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그 물건의 가치가 미미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개재해 계신다고 생각하면 그 가치를 천만의 비중으로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물건 가운데 하나님이 관계되어 계신다고 할 때 물건의 가치는 무한한 비중을 갖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물건을 대하게 되면 그 물건이 반갑게 느껴집니다.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서나 여러분의 마음의 세계에서 느낌 가운데 그러한 감응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면 그 결과는 반드시 자기 혼자 바라보던 것보다도 더 입체적인 가치의 내용을 지니게 됩니다.
하나의 일이나 물건을 대했던 것이 나에게 환경적으로 큰 가치의 결과를 느끼게 해줬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영적이고 내적인 가치를 보다 높은 의미에서 차지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일을 하고 나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내가 하고 있는 수고보다 하늘적으로 몇 백배, 몇 천배의 가치적인 결과가 나타난다고 생각하면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어려운 그 일이 오히려 감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신을 두고 보더라도 대인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어려운 일에 몰려 가지고 피해를 받거나 말할 수 없는 고역을 극복해야 할 수난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그 수난의 길을 자기 혼자 간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수난의 길을 무한한 가치의 중심인 하나님과 더불어 간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수난의 길 앞에 자기가 동참한 사실이 얼마나 큰 가치인가를 느끼면서 그 고통의 대가보다도 감사의 대가가 더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는 어떠한 고통의 길도 감사의 길이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영광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건을 대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대해서는 안됩니다. 물건은 나에게 플러스가 아니면 마이너스를 가져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즉, 나에게 있어 복이 되든가, 아니면 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열의 자리에서 내가 저 물건을 대하면 열 하나의 가치가 되느냐 아홉의 가치가 되느냐, 즉 마이너스를 가져오느냐 플러스를 가져오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거기에서 마이너스가 되는 자리를 피하고 플러스가 될 수 있는 입장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노력해야 됩니다. (40-281)
사물은 원칙을 중심삼고 대하라
여러분이 그런 입장을 찾아 나가게 되면 무슨 일을 대하든 벌써 마음이 압니다. 어떠한 일이나 물건을 대하게 될 때 그것이 나에게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를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내 마음과 뜻,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는 데 있어서 일체가 되어야만 본래의 동기, 즉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일치되는 사위기대권이 벌어집니다.
그리하여 그 물건이 나와 주체와 대상의 결과에 부합된다는 가치를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결과가 거두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상의 물건으로서 선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한 선의 결과를 내 주위에 많이 쌓아 갈수록 내 자신에 있어서는 재창조 과정의 자리가 점점 넓어지는 것이요,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 어떤 물건을 대해도 벌써 그 물건 자체에서 나에게 파장이 옵니다. 그 물건을 원만한 마음, 사심을 떠나서 공명할 수 있는 음차와 같은 마음으로 심각하게 대하게 되면 그것이 좋다든가 나쁘다고 하는 감정이 우러납니다.
만일에 파장이 오지 않으면 공적인 입장에서 사심을 떠나 일이면 일, 물건이면 물건을 척 대했을 때의 첫인상이나 처음 들어오는 감정을 통해서 그것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무의미한 자리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의 마음으로 진실된 입장에서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활 가운데서 느꼈던 첫 감정이 몇 퍼센트나 적중하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주시해야 됩니다. 그러한 생활태도를 습관화시키면 열 가지의 일이 있으면 그 가운데서 다섯 가지, 여섯 가지로 점점 그 도가 높아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걸 키워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도가 높아져 가야 됩니다. 반면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 그것은 뜻이 같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을 대할 때는 무의미하게 대하지 말고 반드시 원리원칙을 중심삼고 대해야 합니다. 사위기대 형태의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자기의 체휼적인 감정을 어떻게 개발하느냐 하는 문제가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직장생활에서 물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 회사의 일원으로서 회사의 물건은 공적인 물건인데도 불구하고 소홀하게 대한다면 그 사람은 회사에 마이너스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 물건은 나라의 물건이요, 하나님의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종이 한 장도 허술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허술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그 대가를 추구하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심정적인 체휼의 도를 넓히기 위한 조건물로서 찾기 위해 노력하고 생활적인 감정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되면 생활권 내에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신다는 것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하면 대할수록 내가 대하는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같이하셨다는 것을 실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체휼신앙의 개발을 위해서는 여러분이 언제나 물건을 소홀히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각하게 대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를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신앙길 전체가 걸려 넘어갈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 여자들이 삯바느질을 한다고 할 때 돈을 받기 위해서, 혹은 이익을 보기 위해서 그저 아무렇게나 일하게 되면 길이 막혀 버립니다. 그렇지만 그 일도 내 일과 같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의 옷과 같이 정성스런 마음으로 하게 되면 그 옷을 입는 사람이 옷을 대할 때 “이것은 선한 물건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체휼신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성을 들였는지 안 들였는지는 대번에 감정해 낸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을 그렇게 관찰해야 합니다. (40-283)
체휼신앙을 개발하는 생활
선생님은 여러분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할 때, 벌써 느낌이 다 들어옵니다. 그 웃음이 하나님 앞에 플러스가 되는 웃음이냐, 마이너스가 되는 웃음이냐 하는 느낌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습관화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삼고 되어지는 주위의 모든 요건들은 무의미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개발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혼자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태도를 중심삼고 살게 되면 처음 보는 사람이든, 안면이 있는 사람이든, 누구든지 소홀히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아무렇게나 대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모든 심정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체휼적인 환경을 개발하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사사건건에 있어서 틀림없이 효과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기쁨을 느꼈다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신앙생활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사는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길을 가더라도 지치지 않습니다. 만일에 죽음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이 뜻 앞에 합당한 죽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벌써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이 나를 탕감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냐, 마이너스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괴로운 길을 가더라도 그것이 모든 체휼적인 감정에 접해서 가는 길이라면 왠지 든든하고 희망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만일에 반대하는 함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것이 충격이 되고 자극이 되어서 나 자신의 중심이 꺾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화로 더 폭발적인 힘이 작용하게 되고 선의의 투쟁의 힘이 솟구쳐 나오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게 될 때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느낌으로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권 내에서 타락이 벌어지고, 실패가 벌어지고, 하나님 앞에 배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잠을 잘 때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활동하면서 사사건건 대하는 상대적인 요건을 중심삼고 내가 발전도 할 수 있고, 후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그 관계를 어떻게 잘 조정해서 하늘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하느냐 하는 것을 수시로 연구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생활과정을 분석해서 결과를 타진해야 합니다. 내가 느끼는 것은 몇 퍼센트는 맞는다, 몇 퍼센트는 틀림없다고 하는 그러한 내적인 인연을 여러분이 환경권 내에서 맺어 가지고 타진할 수 있는 입장, 그러한 결과를 측정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하나님이 같이하고 계시는지, 악이 같이하고 있는지를 분석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런 신앙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길을 나설 때 기도를 안 해도 괜찮습니다. 첫 걸음을 내디딜 때 이 길이 어떤 길이냐, 가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수 있는 길이냐, 섭섭한 길이냐를 알아야 됩니다. 첫 번에 느껴 오는 감이 “아, 이건 좋다. 나쁘다.” 하는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쁘다고 할 때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환경적으로 체휼신앙에 대한 것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사람을 볼 때도 무심히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개의 정상적인 표정은 어떻다는 것을 분석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개의 정상적인 태도는 저런 태도다. 또, 정상적인 말의 음색은 저런 것이다. 웃는 것도 정상적인 것은 저런 것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40-285)
체휼신앙의 중요성
여러분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 더욱이 지도자가 되려면 그 사람의 정상인 기준과 비정상적인 기준, 다시 말하면 슬플 때의 기준과 기쁠 때의 기준을 가려야 합니다. 정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위로 올라갔을 때는 기쁜 것이요, 아래로 내려갔을 때는 슬픈 것이라고 하는 것을 눈만 보고도, 표정 하나만 보고도 금방 짐작해야 합니다. “말소리가 정상적인 때는 이렇고, 기쁠 때의 말소리는 저렇더라. 좋지 않을 때는 눈빛이 어떻더라.” 하는 것을 가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어조라든가 태도를 보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배후에는 좋지 않은 무엇이 있구나!” 하는 것을 하나님과 더불어 내가 감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둘이 만날 때 표정만 봐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쭉 감정하는 것을 실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부합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을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만일 부합되었다고 느껴질 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권 내에서 내 감정이 하나님과 밀착되어 가지고 동화될 수 있느냐, 반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예감을 통해 분석해 가지고 내 생활권 내에서 어떻게 하면 좋은 결과를 많이 남길 것인가 하는 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기만 해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복잡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을 척 보게 되면 “저 사람이 오늘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고 앉아 있지만 맥이 있구나, 없구나!” 하는 감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그 감이 오고, 어떤 일이나 물건에 대한 감정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또, 말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이 공명체와 같은 입장에서 그 말이 파격적이냐, 아니면 순화적이냐 하는 것을 측정해야 합니다. 즉, 화합하기 위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대번에 측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몇 퍼센트나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왔느냐 하는 것을 분석해야 합니다. 그러한 문제를 여러분이 개발하면 누구나 체휼신앙권 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에 끌려 다니다가는 하늘이 떠나 버리면 지쳐 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체휼신앙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생활권 내에서 승리적인 결과, 즉 생활권 내에서 신의 목적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런 결과를 타진시킬 수 있는 가치적인 내용이 내가 대하기 전보다 대하고 난 후에 더 좋은 결과로 찾아진다고 할 때는 아무리 핍박이 와도 그냥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절대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행한 결과가 마이너스가 될 때는 아무리 힘을 내려고 해도 후퇴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은혜를 받게 될 때는 사람을 많이 꺼리게 됩니다. 물건도 함부로 이것저것 접하지 못하고 단조로운 것만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일상적으로 욕심을 갖고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은 절대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지 않은 물건, 즉 무관심하게 대하던 물건들만 대하게 합니다. 말도 자기를 변명하려고 하는 말은 못 하게 합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체험은 그렇게 (해놓고서)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영적인 체험은 못하더라도 생활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분석하는 도수를 높여 나가야 합니다.
그런 단계에 이르면 무슨 현상이 벌어지느냐? 삼각적인 관계에서 직접적인 결과를 타진하는 놀음이 많이 벌어집니다. 즉, 제3의 일로서 나와 하등의 관계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계획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연하게 체휼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게 되면 제3점의 일로서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도 척 느껴지는 느낌을 통해서 관계를 맺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처럼 생활권 내에 있어서 발전할 수 있는 동기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40-288)
항상 기뻐하고 체휼적인 감도를 넓혀 가라
그리고 여러분이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때는 절대로 마이너스가 되어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아침에 나갈 때보다 기쁜 입장, 즉 플러스가 된 입장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집안에 불화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마이너스가 되어 들어온다면 자기 아내나 아들딸에게도 마이너스의 느낌을 주게 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선을 추구해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입장에 서는 것은 선을 깎아 내리는 입장이 되므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지 못하고 서러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집을 나갔다 돌아올 때는 아무리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어려움을 탕감시켜 놓고 기쁨의 조건을 들고 들어와야 합니다. 만일 직장에서 분하고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집에 와서 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 자리에서 풀든가, 아니면 다른 일로 대체해서 그 이상의 기쁨의 조건으로 탕감시켰다는 놀음을 해 놓고 집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것을 보강할 수 있는 간접적인 자기만의 비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일부러 전신주에 이마를 부딪쳐서 그 아픈 것으로라도 탕감의 조건을 걸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탕감받는다는 회개의 기도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줄 눈깔사탕이라도 사 가지고 아이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그 기쁨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혹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옛날에 자기가 좋아하던 봄 노래라든가 가을 노래를 불러서 오늘의 슬픈 감정을 넘어 옛날의 기쁘던 감정을 살려서 그걸 중심삼고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를 대하거나 아들딸을 대할 때 그런 기쁜 표정과 기쁜 마음으로 주고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직장에서 타격을 받았던 슬픔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망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전체를 중심삼고 그러한 생활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작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를 무심코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를 대하게 되면 어떠한 표정으로 대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연구해 나가게 되면,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되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만물은 교재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영적인 세계의 직접적인 감응 또는 간접적인 감응을 일으킬 수 있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 창조물은 하나님의 성상을 닮아 난 것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간접적이나마 그 성상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는 우리가 반드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선의 요소, 내적인 성품이 있기 때문에 그 성품을 따라 움직여서 연결시키기 위한 생활을 넓혀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일도 지장을 줄 수 없고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은 탕감법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중심적인 존재가 되려면 공적인 입장에서 탕감시켜 놓는 환경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심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밑천을 많이 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40-290)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생활태도
내가 선을 행함에 있어서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도 주지만 원수를 위해서 참되게 주는 그것이 얼마나 멋지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사지에 가더라도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동기의 존재는 원수가 되었더라도 나는 공적인 입장에서 소화시키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마당에서도 원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리를 보다 양면적인 가치를 차지할 수 있는 자리로 알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깊은 가치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수난길이라고 하더라도 그 수난길이 자기에게 피해가 되지 않고, 한번 걸리면 사지에 빠져서 헤맬 수 있는 사탄의 올무라고 하더라도 그 올무와는 하등의 관계없는 결과, 오히려 사탄이 원수시할 수 있는 승리의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사탄이 아무리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으로 화해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계에 있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을 취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어떠한 핍박,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들이 나 자체를 꺾어 버리거나 망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승리의 자료로서 승리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6천 년 복귀역사를 해 나오시는 데 있어서 사탄이 아무리 반대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승리의 결과로 체득시키고 소화시켜 나오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태도를 여러분이 관계지어 나가야 됩니다.
물건을 대할 때보다 사람을 대할 때 감정이 더 빠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말로 표현해야 되는데 말만 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책임지지 못 할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하지 못할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서로가 주고받는 자리에서 교류하고 하나의 공동목표를 추구해 나가게 될 때는 반드시 실천될 것으로 알고, 그렇게 느끼고,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는 서로 좋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맺어진 친구는 영계에 가게 될 때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언제나 그와 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연이 맺어졌다면 그 친구가 간 영계를 나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40-292)
첫 번의 느낌으로 심령을 개발하라
여러분이 하루의 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도 여러분이 대하는 일을 무심코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부 다 하늘이 실제의 생활을 중심삼고 천국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재료요, 하나의 교재로서 나에게 접근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큼 그것을 좋은 결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데 주력해야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감, 첫 번의 느낌을 아버지 앞에 언제나 의논하고 공명체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밤이나 낮이나, 언제든지 하늘을 대할 수 있는 그런 기준만 되면 반드시 영파(靈波)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테나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안테나와 같은 입장에서 영계의 파장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하는 어떤 일의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첫 번으로 느끼는 감을 통하여 분석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면 자연히 자기 스스로가 실제의 생활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게 됩니다.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생활적인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야 험악한 세상에서 타락하지 않고 천국에 합당한 인격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기도나 신령한 역사를 통해서 은혜의 기준에 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영계에서 영인들이 협조해 주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우리 인간은 생명체라든가 생령체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에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계의 협조를 받지 않은 영력을 중심삼아 가지고 영의 작용을 개발해 놓으면 영인들이 지도해 주지 않아도 내 자신의 생령체에 의해서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느 기준까지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이 서러워하실 때 나에게도 형용할 수 없는 서러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다가 떠나 보내는 데 말할 수 없는 서러움이 벌어지게 되면, 그런 사람이 가는 길은 제물의 길이 아니면 하나님이 긍휼히 보시는 길입니다. 두 가지 중에 한 가지의 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일을 실제로 느끼고 실제로 생활권 내에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선 사람이라야 체휼적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신앙이라는 것은 영계에서 협조해서 하는 것보다 생활권 내에서 감정해 가지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자기가 피해를 받지 않고 전진적인 신앙과정과 생활과정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같이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발전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가르쳐 주면 틀림없기 때문에 그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도만 하고 행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찾아오셨다가도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적인 신앙의 기반을 우리의 생활권 내에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0-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