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휼과 실천, 下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 15 일)

訓讀王 | 20190923163614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 15 일


첨부파일 18 훈독경 3권 15일 체휼과 실천 下 -1.mp3


체휼과 실천,下

 

날짜 : 1975. 2. 2(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체휼과 실천,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上과 중복된 부분임) 


사람은 대개 지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대개, 우리 사람을 보게 되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진리로써 뭘 탐구해 가지고 이치에 맞으면 인정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부정하는 타입의 사람,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이치보다는 감으로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우리 통일교회의 술어로 말하면 영적이다, 지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의 사람과 지적인 면의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내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가지고 외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이요, 지적인 사람은 외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가지고 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가는 종류요, 하나는 들어오는 종류입니다. 그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사람은 대개 기도를 싫어합니다. “아, 기도가 무슨 필요 있느냐?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어떻게 하노?” 하면서 실감이 안 납니다. 미신 같아서 믿을 수 없고 자기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건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이론을 따져 가지고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동시에 나면서부터 “하나님!” 하는 말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막 좋아서 “아버지!” 하게 되면 밥을 안 먹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개, 영적인 운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지성적인 사람은 못 합니다. 신앙세계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미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이야 어떻든 느끼는 대로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환경에 백중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일도 벌어지게 됩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지성적인 사람이었는데 다메섹에서 하늘의 영적인 벼락을 한번 맞고 나서 변해 버렸습니다. 외적으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내적으로 그렇게 폭발적인 느낌의 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전부를 부정하고 그것을 존중시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기독교의 혁명의 기수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따지는 사람이 종교적인 심령세계의 위대한 지도역할을 할 수 없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봅니다. 그러한 두 종류가 있습니다. (76-136)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아서 부족한 면을 보강해야
  
사람은 두 종류가 있는데, 자신은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개, 영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크지만 진리 면에서는 뾰쪽합니다. 처음에는 굵지만 끝이 뾰쪽해지면 영원히 못 갑니다. 어느 때는 반드시 굴러 떨어집니다. 또, 진리는 크지만 영적인 면이 작다면 그것도 영원히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조정하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기도와 진리,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행을 만들어 가지고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와 육계를 조정해야 됩니다. 영적인 세계의 중앙에 서야 될 것이요, 진리세계의 중앙에 서 가지고 중심적인 자리에서 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만 강하면 외적인 면은 결여되어서 곧장 가야 할 텐데 오른쪽으로 삐뚤어져서 갑니다. 힘으로 본다면 힘센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적인 면이 강하면 왼쪽으로 가 버립니다. 그런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영적인 체험이 있더라도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합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진리로 조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중용의 길을 가면서 언제나 하늘의 섭리관에 방향을 일치시키는 놀음을 함으로 말미암아 영계의 발전을 가져 올 수 있고 지상세계와 진리세계의 발전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세계가 어떻게 움직여 들어오고 진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생활화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지 않고는 안됩니다. 신령과 진리가 반드시 하나되어 조화를 이루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인간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행복감을 느끼느냐? 진리 면에서 느끼는 행복은 방향적입니다. 왜 방향적이냐? 영과 육, 신령과 진리를 두고 보면 어떤 것이 주체냐? 신령이 주체입니다. 진리는 상대적입니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방향적입니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령은 변하지 않습니다. 중심적이기 때문에, 사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을 통해서 느끼는 행복이 귀하냐? 진리를 통해서 느끼는 느낌은 방향적이기 때문에 변합니다. 오래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신령을 통해서 느낀 그 느낌은 중심적이기 때문에 오래갑니다. 중심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입장이고 신령적인 면은 주체적인 입장입니다. 주체란 중심자리를 말하기 때문에 중심이란 것은 둘이 있을 수 없고 하나입니다. 그 주체적이고 중심적인 입장의 신령면을 통한 기쁨이라는 것은 영원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느낀 그 기쁨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두 면의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지식을 중심삼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실천문제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신령을 반드시 보강해야 됩니다. 보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기도만 하고 신령면에만 치중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진리에 대해서 연구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양면이 보강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걸 내 자신이 혼자 조정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를 잘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신령적이거든 진리적인 사람과 하나되라 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둘이서 “야! 내 맘은 이런데, 네 마음은 어떠니?” 하면서 속삭이고 말이에요. 형(型)이 다릅니다. 하나는 내형적이요, 하나는 외형적인 두 사람이 의논하고 협조해서 하나될 수 있으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필요합니다.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뭐 어떻고 어떻다는 말을 듣고 심령에 타격을 받아 가지고는 새까매지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혼자서 암만 기도로 해결하려고 해도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와 상대적인 사람, 진리적인 외적인 사람을 중심삼고 친구가 되어 있으면 “야, 이 녀석아! 이렇게 해!” 하고, 또 진리적인 면의 사람이 문제가 생겼을 때 영적인 면의 친구가 “야, 내가 기도해 보니까 이래!” 하면 쉽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합니다. 신앙자에게는 반드시 친구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76-137)

 

자기와 상대적인 소성을 가진 사람을 친구로 삼고 나가야

여러분이 원만한 인격을 지니려면 여러분과 다른 소성의 사람을 친구로서 환영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이구, 그 사람은 보기만 해도 싫어!” 해서는 안됩니다. 싫은 사람이 나에게 제일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싫은 사람을 좋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악한 사람이 선하게 될 수 있는 첩경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반드시 제일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 싫은 사람이 내게 있어서 원수가 아닙니다. 나와 제일 가까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참의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제일 가까울 수 있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적인 사람은 기도가 필요함과 동시에 뭐가 필요해요? 상대적인 친구가 필요합니다. 신령적인 사람은 지적인 면의 보강이 필요함과 동시에 뭐가 필요해요? 친구가 필요합니다. 혼자 신앙하려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남의 간증을 듣고 경험을 듣는 것은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내 성격의 짧은 면을 메우기 위해서는 간증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어서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라는 것입니다. 보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체험담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어 가지고 남이 말한 것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하는 것은 사탄 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는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판했다고 할 때는 사탄 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는 둘 중의 하나로 갈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내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암입니다. 

내 자신의 소성을 볼 때 선한 선조의 소성도 많이 갖고 있지만 악한 선조의 소성을 받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니 비판했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하지 말라는 말도 다 그런 이치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할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령적인 면에 자기의 소성이 맞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방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진리로 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면을 가려 가지고 가야 됩니다. 그렇게 반대적인 면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혹은 진리를 탐구하고, 혹은 신령면에서 체휼하면서 말입니다. 기도와 진리에 대한 탐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영적으로 느낀 것을 진리로 소화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되고, 진리적인 면의 사람은 신령적인 면을 보강할 수 있는 체휼적인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영원한 터전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혼자서는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와 상대적인 소성을 가진 사람을 친구로 삼든가 스승으로 삼아서 지도를 받고 협조를 받아 나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 이젠 나도 알았다.” 할 때 그렇게 알았다고 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봐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실험을 해봅니다. 전문가는 무엇이 전문가냐? 같은 일을 많이 해본 사람입니다. 전문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기술자는 어떤 사람이 기술자냐? 같은 일을 많이 해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실험을 해봐야 됩니다. (76-139)

 

체휼한 사실을 일일생활권에 접맥시켜야

여러분,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가 얼마나 통일권인지 모릅니다. “아무개가 보고 싶다.” 하면서 24시간 기다리면 그 사람이 옵니다. 집중하게 되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파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수신기와 같은 마음의 바탕이 있기 때문에 괜히 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마음이 강해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학교에 간다고 떠났는데도 교회에 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식적인 기준을 넘어 가지고 행동하는 그런 결과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교인들도 한창 반대받고 핍박받을 때는 아주머니들이 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간다고 갔는데 통일교회에 오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보통지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쳤다느니 무슨 전기장치를 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실제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신령적인 길을 통하면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기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체휼한 모든 사실을 실천장에 적용시키는 데 있어서 어떻게 상대성을 갖고 일일생활권에 접맥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신앙자입니다. 막연한 신앙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체휼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정신을 집중해야 됩니다. 영점의 자리에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하는 사람은 “도대체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참선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간단합니다. 마음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영원한 이상적인 선의 주체이시면 그 주체적인 존재 앞에 상대적인 바탕으로서 언제나 변함 없이 상대적인 기준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마음의 중심이라고 봅니다. 이걸 통일교회에서는 생심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상대기준만 딱 맞으면 초연한 힘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심문(心門)에 맞추어 가지고 심전(心田)을 개발해야 됩니다. 그 마음의 밭을 개발하고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런데 주체되시는 하나님은 모호하니까 하나님을 연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신을 집중시켜 가지고 내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내 마음을 맑게 해놓으면 반드시 방향을 알게 됩니다. 

지남철과 같이 말이에요,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는 자연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걸 느낍니다. 내가 동쪽을 향해서 기도를 했는데, 신비의 경지에 들어가면 벌써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북쪽을 향해서 기도했는데 언제 그렇게 되는지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런 사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잘 될 때가 있지요? 반면에, 내가 아무리 목욕재계를 하고 정성을 들이더라도 기도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합니다. 방의 위치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또, 방향에 따라서 다릅니다. 산에 가더라도 기도가 잘 되는 곳이 있습니다. 또, 사탄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음지입니다. 음지와 양지라는 것이 영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 체험하면 그런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암시나, 몽시나, 계시나 묵시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가 맺어지기 위해서 벌어지는 개척적이고 발전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여러분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76-142)

 

하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체휼신앙을 가져야

선생님은 자연을 참 좋아합니다. 왜 자연이 좋으냐 하면 선생님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비스런 체휼을 한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기분이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 기분이 아쉽습니다. 옛날에은혜로운 자연을 바라보고 명상하던 그런 경지 혹은 밤이면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런 경지가 말이에요. 사시사철 그 기분이 전부 다 다릅니다. 여러분이 복잡다단한 도회지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생활권에 싸여서 자기의 위치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수택리에 갈 때도 있고 청평에도 많이 갑니다. 미국에 가기 전에도 매일같이 청평에 갔다 왔습니다. 어제 저녁에 갔다 왔는데 아침에 또 뭐 하러 가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려면 서너 시간이 필요한데 왜 가느냐? 자연이 아주 새롭기 때문입니다. 느껴지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플러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컬컬할 때 메울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런 놀음을 합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런 면을 보강해야 됩니다. 본성의 감도라고 할까, 그러한 체휼적인 느낌을 언제든지 보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압니다. “아, 지금 내가 어떠한 단계에 들어왔다.” 하는 것을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얼마만큼 신앙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말씀을 해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하고 나면 반드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더욱이나, 열렬히 피땀을 흘리면 어느 면에 치우칩니다. 그걸 전부 다 조정해야 됩니다. 그러니 신앙길이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사람을 대할 때 척 보면 벌써 설명하기 전에 그 사람이 A, B, C형 중 어느 형인가를 분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것이 빠릅니다. 그런 체휼이 벌어져야 합니다. 영들도 무수합니다. 사람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별의별 영들이 다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별의별 녀석들이 다 있지요? 마찬가지로, 영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영을 감정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영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왼쪽으로 가느냐, 바른쪽으로 가느냐를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릴 수 없습니다. 선한 신이냐, 악한 신이냐 하는 것도 그런 느낌을 통해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체휼적인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76-145)

 

체험이 있으면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여러분이 체휼하려면 반드시 마음의 문을 맞추고 마음밭을 갈아서 개발해야 됩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면의 사람과 진리적인 면의 사람이 있는데, 나 혼자보다는 상대적인 어떤 지도자를 따라가든가 친구를 따라가면서 보강해 가지고 서로서로가 하나되는 입장을 취해야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빨리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반드시 실천장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무엇을 느꼈으면 그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무엇이 있었다.” 하고 그저 잊어버리지 말고 그것이 어디에 적중하느냐를 살펴야 됩니다. 반드시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이 어떻게 맞아떨어지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찾아야 됩니다. 몽시라든가 환상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실들이 현실에 적중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체휼신앙을 통해서 선한 환경을 유지해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한 생활인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앞으로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76-146)*  


&&&&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 15 일,  전문 &&&&

체휼과 실천 


날짜 : 1975. 2. 2(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우리들은 신앙길을 가고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자기가 체험하고 깨닫고 가는 길이 안되어 가지고는 생애를 걸고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신앙자는 체휼을 통해서만이 강해질 수 있다
  
누구의 어떤 말을 듣고 그 말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반드시 체험을 통해 그 말이 실제 사실인지, 아닌지를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입장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길을 가는데 있어서 말씀을 듣고 성경을 배웠으면 배운 그대로의 사실이 내 자신에서 형성되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체험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신앙해 나가기 때문에 그 체험이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만질 수 있는 내용으로 나타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느끼는 것과 같은 실감적인 입장에서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동시에 무형적인 주체를 상대로 하느니 만큼 내 자신이 체휼적인 체험단계까지 나가기란 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체휼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절대 필요합니다. 체휼의 길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알 수 있고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어떠한 내정적인 심정의 인연을 갖고 계시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끼고, 보다 이상적인 새로운 소망을 지니는 것도 체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4백 년 로마 박해시대에 있어서 그런 핍박을 받고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신앙길을 꿋꿋이 갈 수 있었던 것은 막연한 입장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러한 자리를 넘어갈 수 있었던 체휼적인 내용, 그들에게는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었던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 환경이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던 여건이 있었기에 순교의 길도 무난히 넘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베드로나 바울은 어려운 문제를 맞이할 적마다 반드시 하늘 앞에 기도를 했고, 그 기도를 통해서 하늘은 지시를 했습니다. 어디로 가라든가, 어디로 가지 말라든가 하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내적인 신앙생활의 기조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생활의 기반이나 전통이 있는 사람일 수록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체휼을 통한 사람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새로운 역사적인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자기가 내적으로 체휼한 것이 오늘날 실천세계에 있어서 환경에 적용되는 사실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그 사람은 강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지만 자신은 출발함과 동시에 그 사실을 믿을 수 있고,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결과 이후의 것까지도 예상하면서 강하고 담대하게 환경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체휼입니다. (76-124)
  
하늘의 마음 문과 내 마음 문을 맞추는 생활이 중요해
  
사람의 마음에도 문이 있습니다. 심문(心門)이라고 하지요? 마음의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이 언제나 한 면으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자체가 돌고 있기 때문에 그 문도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을 통하지 않고는 신이 있으면 신을 중심삼고, 플러스면 플러스를 중심삼고 마이너스의 입장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각도와 방향이 틀리게 되면 작용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그러한 마음 문이 있습니다. 
기도를 해보면 압니다. 기도를 해보면 시간에 따라서 느낌이 다릅니다. 새벽 한 시에 기도하는 것하고 세 시에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신비스런 깊은 경지에 들어가서 기도해 보면 기도하는 시간에 따라서 느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감정을 가지고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느끼는 감도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데도 어떤 시간에 잘 되는지 알아야 됩니다. 잘 되는 시간에는 하나님과 감응의 도가 가깝습니다. 잘 된다고 하는 거기를 점점점 들어가게 되면 문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문과 인간의 마음의 문이 딱 맞아 가지고 어느 기준까지만 맞추어 돌아가는 날에는 하나님이 느끼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우리 마음의 세계도 선한 마음이 있음과 동시에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의 마음이 “아, 나는 선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마음 자체도 선하지 않습니다.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악한 사탄권에 감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선한 권내의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천태만상의 차이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문을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신앙과정에서 언제나 주의해야 할 것은 마음의 문이 열리는 때를 알아서 하늘의 마음 문과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찾아 맞추는 생활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심도를 가려 가면서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하늘이 향하는 문과 일치화시키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한 문제입니다. (76-127) 

 


마음 문이 맞추어지면 입체적인 느낌, 암시를 받게 된다
  
여러분이 상대적인 입장에 서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입체적인 느낌이 옵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온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겨울과 같은 기분만 느꼈는데 가을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고, 그뿐 아니라 여름과 같은 기분도 느껴지고 봄과 같은 기분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느냐? 우주가 돌고 있기 때문에 마음도 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춘하추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의 세계도 돌면서 그와 같이 변화하는 감도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일년을 두고 보면 춘하추동의 사계절이고, 일년을 축소한 것이 하루인데 하루에도 춘하추동이 있습니다. 아침은 봄에 해당되고, 낮은 여름에 해당되고, 저녁은 가을에 해당되고, 그리고 밤은 겨울에 해당됩니다. 이와 같이 춘하추동의 계절적인 형태가 하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침이면 아침을 두고 보더라도 거기에서도 봄과 같은 아침을 느끼고, 여름과 같은 것을 느끼고, 가을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고, 겨울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큰 것은 큰 것을 중심삼고 단위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작은 것도 상대적인 단위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느껴지는 느낌이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계절을 따라서 자기가 봄이라는 것을 알면 좋지만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여름 절기라고 하는 것을 알면 좋지만 그걸 모릅니다. 혹은, 겨울이라고 하는 걸 모릅니다. 그것을 많은 체험과 기도생활을 통해서 “아, 지금 때가 어떤 때에 처해 있구나!” 하고 가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느냐? 우리말에 암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길을 무심코 쓱 가는데, 어떤 좋은 집 담벼락에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을 때 새는 날아갔지만 퍼득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어떤 사실을 통해서 암암리에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의 생활에 있어서 그런 형태가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암시적인 조건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76-129)
  
몽시란 마음 상태가 공명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감을 나타낸다
  
그 단계를 지나가게 되면 몽시 같은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꿈 가운데 일어나는 일인데, 깊은 잠 가운데서의 꿈이 아니라 비몽사몽간에 체험합니다. 바울 같은 양반도 비몽사몽간에 3층천을 체험했습니다. 꿈 같기도 하고 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꿈 안에 있는지 사실 안에 있는지…. 옆에서 누가 말하는 것을 들어서 3분의 2는 캐치하면서 비몽사몽간에 어떤 현상이나 음성 같은 것을 오관으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걸 무심코 흘려 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걸 종합해 가지고 어떤 방향의 인연을 나에게 연결시키기 위해 나타나는지 과학적인 면에서 데이터를 내라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 매일매일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살펴보면 반드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잊을 수 없는 몽시는 백 퍼센트 적중합니다. 그런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어떠한 사람이나 물건이 인연되어 있는 것이 사실 가운데서 실체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꿈 가운데서 누구하고 노래를 하고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꿈 가운데 노래가 아니고 옆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가 그 노래였다고 하는 그런 사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 있어서 마음의 상태가 공명(共鳴)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것을 지극히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76-131)

 


체휼과 실천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온다
  
그런 상태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공중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과 내가 둘인 것을 압니다. 다른 존재인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지요? 왜 그러냐 하면 마음이 아직까지 존재성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몸뚱이한테 끌려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존재성을 확립해 가지고 또 다른 하나의 주체가 되는 인격적인 차원의 자리가 형성되면 그 둘은 반드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이 높아지게 되면 은은해집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하고 이야기합니다. 공명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을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맨 첫 단계에서는 암시와 같은 사실들이 여러분의 생활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자는 그런 자료들을 수집해야 됩니다. 사람을 대할 때 무심코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배고픈 자의 심정이 돼야 합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그렇게 찾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언제나 주체가 되든가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확정적인 주체요, 확정적인 대상의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면 대번에 압니다. 혹은, 대상적인 존재가 나타나면 대번에 압니다. 내가 누굴 전도할 사람이 있으면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괜히, 그저 마음이 좋아서 가게 됩니다. 그런 것을 심파(心波)라고 하지요? 마음의 파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게 되면 고기 장사를 하는 사람은 푸주의 냄새가 납니다. 옷감 장사를 하는 사람은 천 냄새가 납니다. 여러분의 몸에서도 냄새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에서도 냄새가 납니다. 그 마음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촉각 같은 것이 있어 가지고 전부 접선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전파 같은 것을 발사해 가지고 상대적인 대상을 찾고 있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하는 사람의 태도는 전부 다 나와 더불어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타락은 무엇이냐 하면 모든 관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관계, 본연의 인간에 대한 관계, 본연의 신에 대한 관계를 전부 절단해 버린 것입니다. 절단된 관계의 세계를 우리가 다시 접속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내 자체가 이걸 접속시킬 수 있는 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작용을 해야만 관계가 개척되지 접속시키고자 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 한 환경은 개척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전부 다 무엇을 찾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기도하고 나면 “아, 오늘 좋은 일이 있다.” 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막연히 “좋은 일이 있으니까 그냥 좋은 일이 나타나겠지.”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을 찾아야 됩니다. 이러한 생활태도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체휼과 실천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76-132)
  
계시의 단계가 지나게 되면 묵시의 단계가 온다
  
그 단계가 높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그 다음에는 계시나 지시가 벌어집니다. 계시라는 것은 우리가 분석해야 됩니다. 지시라는 것은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계시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계시는 반드시 해석을 해야 됩니다. 무엇을 가르쳐 줄 때도 가르쳐 주는 데는 음성으로 들려주기도 하지만 환상으로도 보여 줍니다. 좋은 봄날을 맞이하여 사슴 한 쌍이 시냇가에서 생수를 마시면서 먼 산을 바라본다는 환상은 지극히 행복스러운 소망을 상징합니다. 그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런 것이 우연한 사실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밭을 개발하기 위한 하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밭은 유리판같이 평평하게 되어 있지 않고 울뚝불뚝합니다. 형은 수평 같은 면을 가졌지만, 그 자체는 울뚝불뚝합니다. 울뚝불뚝한 여기에 하늘의 감도가 반사되어 가지고 오게 되면 빛의 굴절과 마찬가지로 들어오는 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반사되어 나갑니다. 그러니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부 다 가리려니 그런 놀음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분 부분을 개발하려니까 그런 역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시의 단계를 지나게 되면 묵시의 단계입니다. 여러분, 묵시록이 있지요? 하루 종일 영계에 들어가서 체험을 한다든가 저나라의 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전부 다 그런 세계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정권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체휼적인 신앙을 갖지 않고는 위대한 하늘의 뜻을 생활무대에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을 갖지 않는 신앙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체휼적인 신앙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여러분이 알고 개발해 나가야 됩니다. (76-133)
  
영적인 역사의 과정을 통해 육신을 순화시켜 나가야
  
우리 식구들이 기도하는 중에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영적인 힘이 전기작용과 마찬가지로 들어옵니다. 여러분이 체험을 해봤으면 알겠지만, 고압에 접한 것과 같은 힘이 찾아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의식보다 강한 힘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세계의 의식입니다. 초자연적이고 초인적인 감정이 찾아들게 되면 우리의 육신은 타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연의 심성, 본연의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서 반발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 앞에 어떤 신의 성품이 강력하게 들어와도 자연적으로 순화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어오는 데는 한꺼번에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게 들어왔다 약하게 들어왔다 합니다. 그러면서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를 자꾸 하게 되면 육성(肉性)이라는 것, 타락성 자체가 전부 다 순화되어 가지고 백 퍼센트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다 받으면서도 감쪽같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가지고 순화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야 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단계적인 현상들이 벌어집니다. 암시라든가, 몽시라든가, 계시라든가, 지시라든가 하는 과정들을 여러분이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체휼의 단계에 들어가면 마음이 여러분을 명령합니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말을 못 하게 합니다. 혹은, 내가 좋은 말로 그 사람을 위해서 말해야 할 텐데 책망의 말이 나오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가끔씩 벌어지기 때문에 조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미치광이로 취급받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할 줄 모르면 안됩니다.
그와 같은 체휼적인 신앙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그 체휼적인 신앙의 실험을 통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강해집니다. 그 누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체휼과 실천,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76-134)

 

사람은 대개 지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대개, 우리 사람을 보게 되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진리로써 뭘 탐구해 가지고 이치에 맞으면 인정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부정하는 타입의 사람,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이치보다는 감으로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우리 통일교회의 술어로 말하면 영적이다, 지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의 사람과 지적인 면의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내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가지고 외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이요, 지적인 사람은 외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가지고 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가는 종류요, 하나는 들어오는 종류입니다. 그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사람은 대개 기도를 싫어합니다. “아, 기도가 무슨 필요 있느냐?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어떻게 하노?” 하면서 실감이 안 납니다. 미신 같아서 믿을 수 없고 자기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건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이론을 따져 가지고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동시에 나면서부터 “하나님!” 하는 말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막 좋아서 “아버지!” 하게 되면 밥을 안 먹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개, 영적인 운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지성적인 사람은 못 합니다. 신앙세계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미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이야 어떻든 느끼는 대로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환경에 백중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일도 벌어지게 됩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지성적인 사람이었는데 다메섹에서 하늘의 영적인 벼락을 한번 맞고 나서 변해 버렸습니다. 외적으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내적으로 그렇게 폭발적인 느낌의 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전부를 부정하고 그것을 존중시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기독교의 혁명의 기수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따지는 사람이 종교적인 심령세계의 위대한 지도역할을 할 수 없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봅니다. 그러한 두 종류가 있습니다. (76-136)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아서 부족한 면을 보강해야
  
사람은 두 종류가 있는데, 자신은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개, 영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크지만 진리 면에서는 뾰쪽합니다. 처음에는 굵지만 끝이 뾰쪽해지면 영원히 못 갑니다. 어느 때는 반드시 굴러 떨어집니다. 또, 진리는 크지만 영적인 면이 작다면 그것도 영원히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조정하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기도와 진리,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행을 만들어 가지고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와 육계를 조정해야 됩니다. 영적인 세계의 중앙에 서야 될 것이요, 진리세계의 중앙에 서 가지고 중심적인 자리에서 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만 강하면 외적인 면은 결여되어서 곧장 가야 할 텐데 오른쪽으로 삐뚤어져서 갑니다. 힘으로 본다면 힘센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적인 면이 강하면 왼쪽으로 가 버립니다. 그런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영적인 체험이 있더라도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합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진리로 조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중용의 길을 가면서 언제나 하늘의 섭리관에 방향을 일치시키는 놀음을 함으로 말미암아 영계의 발전을 가져 올 수 있고 지상세계와 진리세계의 발전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세계가 어떻게 움직여 들어오고 진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생활화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지 않고는 안됩니다. 신령과 진리가 반드시 하나되어 조화를 이루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인간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행복감을 느끼느냐? 진리 면에서 느끼는 행복은 방향적입니다. 왜 방향적이냐? 영과 육, 신령과 진리를 두고 보면 어떤 것이 주체냐? 신령이 주체입니다. 진리는 상대적입니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방향적입니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령은 변하지 않습니다. 중심적이기 때문에, 사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을 통해서 느끼는 행복이 귀하냐? 진리를 통해서 느끼는 느낌은 방향적이기 때문에 변합니다. 오래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신령을 통해서 느낀 그 느낌은 중심적이기 때문에 오래갑니다. 중심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입장이고 신령적인 면은 주체적인 입장입니다. 주체란 중심자리를 말하기 때문에 중심이란 것은 둘이 있을 수 없고 하나입니다. 그 주체적이고 중심적인 입장의 신령면을 통한 기쁨이라는 것은 영원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느낀 그 기쁨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두 면의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지식을 중심삼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실천문제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신령을 반드시 보강해야 됩니다. 보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기도만 하고 신령면에만 치중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진리에 대해서 연구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양면이 보강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걸 내 자신이 혼자 조정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를 잘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신령적이거든 진리적인 사람과 하나되라 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둘이서 “야! 내 맘은 이런데, 네 마음은 어떠니?” 하면서 속삭이고 말이에요. 형(型)이 다릅니다. 하나는 내형적이요, 하나는 외형적인 두 사람이 의논하고 협조해서 하나될 수 있으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필요합니다.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뭐 어떻고 어떻다는 말을 듣고 심령에 타격을 받아 가지고는 새까매지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혼자서 암만 기도로 해결하려고 해도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와 상대적인 사람, 진리적인 외적인 사람을 중심삼고 친구가 되어 있으면 “야, 이 녀석아! 이렇게 해!” 하고, 또 진리적인 면의 사람이 문제가 생겼을 때 영적인 면의 친구가 “야, 내가 기도해 보니까 이래!” 하면 쉽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합니다. 신앙자에게는 반드시 친구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76-137)

 


자기와 상대적인 소성을 가진 사람을 친구로 삼고 나가야
  
여러분이 원만한 인격을 지니려면 여러분과 다른 소성의 사람을 친구로서 환영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이구, 그 사람은 보기만 해도 싫어!” 해서는 안됩니다. 싫은 사람이 나에게 제일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싫은 사람을 좋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악한 사람이 선하게 될 수 있는 첩경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반드시 제일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 싫은 사람이 내게 있어서 원수가 아닙니다. 나와 제일 가까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참의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제일 가까울 수 있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적인 사람은 기도가 필요함과 동시에 뭐가 필요해요? 상대적인 친구가 필요합니다. 신령적인 사람은 지적인 면의 보강이 필요함과 동시에 뭐가 필요해요? 친구가 필요합니다. 혼자 신앙하려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남의 간증을 듣고 경험을 듣는 것은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내 성격의 짧은 면을 메우기 위해서는 간증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어서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라는 것입니다. 보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체험담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어 가지고 남이 말한 것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하는 것은 사탄 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는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판했다고 할 때는 사탄 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는 둘 중의 하나로 갈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내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암입니다. 
내 자신의 소성을 볼 때 선한 선조의 소성도 많이 갖고 있지만 악한 선조의 소성을 받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니 비판했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하지 말라는 말도 다 그런 이치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할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령적인 면에 자기의 소성이 맞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방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진리로 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면을 가려 가지고 가야 됩니다. 그렇게 반대적인 면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혹은 진리를 탐구하고, 혹은 신령면에서 체휼하면서 말입니다. 기도와 진리에 대한 탐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영적으로 느낀 것을 진리로 소화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되고, 진리적인 면의 사람은 신령적인 면을 보강할 수 있는 체휼적인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영원한 터전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혼자서는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와 상대적인 소성을 가진 사람을 친구로 삼든가 스승으로 삼아서 지도를 받고 협조를 받아 나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 이젠 나도 알았다.” 할 때 그렇게 알았다고 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봐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실험을 해봅니다. 전문가는 무엇이 전문가냐? 같은 일을 많이 해본 사람입니다. 전문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기술자는 어떤 사람이 기술자냐? 같은 일을 많이 해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실험을 해봐야 됩니다. (76-139)

 


체휼한 사실을 일일생활권에 접맥시켜야
  
여러분,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가 얼마나 통일권인지 모릅니다. “아무개가 보고 싶다.” 하면서 24시간 기다리면 그 사람이 옵니다. 집중하게 되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파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수신기와 같은 마음의 바탕이 있기 때문에 괜히 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마음이 강해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학교에 간다고 떠났는데도 교회에 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식적인 기준을 넘어 가지고 행동하는 그런 결과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교인들도 한창 반대받고 핍박받을 때는 아주머니들이 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간다고 갔는데 통일교회에 오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보통지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쳤다느니 무슨 전기장치를 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실제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신령적인 길을 통하면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기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체휼한 모든 사실을 실천장에 적용시키는 데 있어서 어떻게 상대성을 갖고 일일생활권에 접맥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신앙자입니다. 막연한 신앙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체휼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정신을 집중해야 됩니다. 영점의 자리에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하는 사람은 “도대체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참선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간단합니다. 마음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영원한 이상적인 선의 주체이시면 그 주체적인 존재 앞에 상대적인 바탕으로서 언제나 변함 없이 상대적인 기준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마음의 중심이라고 봅니다. 이걸 통일교회에서는 생심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상대기준만 딱 맞으면 초연한 힘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심문(心門)에 맞추어 가지고 심전(心田)을 개발해야 됩니다. 그 마음의 밭을 개발하고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런데 주체되시는 하나님은 모호하니까 하나님을 연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신을 집중시켜 가지고 내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내 마음을 맑게 해놓으면 반드시 방향을 알게 됩니다. 
지남철과 같이 말이에요,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는 자연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걸 느낍니다. 내가 동쪽을 향해서 기도를 했는데, 신비의 경지에 들어가면 벌써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북쪽을 향해서 기도했는데 언제 그렇게 되는지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런 사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잘 될 때가 있지요? 반면에, 내가 아무리 목욕재계를 하고 정성을 들이더라도 기도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합니다. 방의 위치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또, 방향에 따라서 다릅니다. 산에 가더라도 기도가 잘 되는 곳이 있습니다. 또, 사탄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음지입니다. 음지와 양지라는 것이 영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 체험하면 그런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암시나, 몽시나, 계시나 묵시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가 맺어지기 위해서 벌어지는 개척적이고 발전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여러분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76-142)

 


하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체휼신앙을 가져야
  
선생님은 자연을 참 좋아합니다. 왜 자연이 좋으냐 하면 선생님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비스런 체휼을 한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기분이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 기분이 아쉽습니다. 옛날에 은혜로운 자연을 바라보고 명상하던 그런 경지 혹은 밤이면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런 경지가 말이에요. 사시사철 그 기분이 전부 다 다릅니다. 여러분이 복잡다단한 도회지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생활권에 싸여서 자기의 위치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수택리에 갈 때도 있고 청평에도 많이 갑니다. 미국에 가기 전에도 매일같이 청평에 갔다 왔습니다. 어제 저녁에 갔다 왔는데 아침에 또 뭐 하러 가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려면 서너 시간이 필요한데 왜 가느냐? 자연이 아주 새롭기 때문입니다. 느껴지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플러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컬컬할 때 메울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런 놀음을 합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런 면을 보강해야 됩니다. 본성의 감도라고 할까, 그러한 체휼적인 느낌을 언제든지 보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압니다. “아, 지금 내가 어떠한 단계에 들어왔다.” 하는 것을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얼마만큼 신앙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말씀을 해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하고 나면 반드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더욱이나, 열렬히 피땀을 흘리면 어느 면에 치우칩니다. 그걸 전부 다 조정해야 됩니다. 그러니 신앙길이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사람을 대할 때 척 보면 벌써 설명하기 전에 그 사람이 A, B, C형 중 어느 형인가를 분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것이 빠릅니다. 그런 체휼이 벌어져야 합니다. 영들도 무수합니다. 사람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별의별 영들이 다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별의별 녀석들이 다 있지요? 마찬가지로, 영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영을 감정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영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왼쪽으로 가느냐, 바른쪽으로 가느냐를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릴 수 없습니다. 선한 신이냐, 악한 신이냐 하는 것도 그런 느낌을 통해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체휼적인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76-145)

 


체험이 있으면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여러분이 체휼하려면 반드시 마음의 문을 맞추고 마음밭을 갈아서 개발해야 됩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면의 사람과 진리적인 면의 사람이 있는데, 나 혼자보다는 상대적인 어떤 지도자를 따라가든가 친구를 따라가면서 보강해 가지고 서로서로가 하나되는 입장을 취해야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빨리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반드시 실천장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무엇을 느꼈으면 그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무엇이 있었다.” 하고 그저 잊어버리지 말고 그것이 어디에 적중하느냐를 살펴야 됩니다. 반드시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이 어떻게 맞아떨어지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찾아야 됩니다. 몽시라든가 환상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실들이 현실에 적중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체휼신앙을 통해서 선한 환경을 유지해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한 생활인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앞으로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76-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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