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1975. 2. 2(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체휼과 실천,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上과 중복된 부분임)
사람은 대개 지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대개, 우리 사람을 보게 되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진리로써 뭘 탐구해 가지고 이치에 맞으면 인정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부정하는 타입의 사람,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이치보다는 감으로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우리 통일교회의 술어로 말하면 영적이다, 지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의 사람과 지적인 면의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내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가지고 외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이요, 지적인 사람은 외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가지고 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가는 종류요, 하나는 들어오는 종류입니다. 그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사람은 대개 기도를 싫어합니다. “아, 기도가 무슨 필요 있느냐?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어떻게 하노?” 하면서 실감이 안 납니다. 미신 같아서 믿을 수 없고 자기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건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이론을 따져 가지고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동시에 나면서부터 “하나님!” 하는 말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막 좋아서 “아버지!” 하게 되면 밥을 안 먹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개, 영적인 운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지성적인 사람은 못 합니다. 신앙세계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미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이야 어떻든 느끼는 대로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환경에 백중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일도 벌어지게 됩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지성적인 사람이었는데 다메섹에서 하늘의 영적인 벼락을 한번 맞고 나서 변해 버렸습니다. 외적으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내적으로 그렇게 폭발적인 느낌의 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전부를 부정하고 그것을 존중시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기독교의 혁명의 기수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따지는 사람이 종교적인 심령세계의 위대한 지도역할을 할 수 없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봅니다. 그러한 두 종류가 있습니다. (76-136)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아서 부족한 면을 보강해야
사람은 두 종류가 있는데, 자신은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개, 영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크지만 진리 면에서는 뾰쪽합니다. 처음에는 굵지만 끝이 뾰쪽해지면 영원히 못 갑니다. 어느 때는 반드시 굴러 떨어집니다. 또, 진리는 크지만 영적인 면이 작다면 그것도 영원히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조정하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기도와 진리,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행을 만들어 가지고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와 육계를 조정해야 됩니다. 영적인 세계의 중앙에 서야 될 것이요, 진리세계의 중앙에 서 가지고 중심적인 자리에서 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만 강하면 외적인 면은 결여되어서 곧장 가야 할 텐데 오른쪽으로 삐뚤어져서 갑니다. 힘으로 본다면 힘센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적인 면이 강하면 왼쪽으로 가 버립니다. 그런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영적인 체험이 있더라도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합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진리로 조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중용의 길을 가면서 언제나 하늘의 섭리관에 방향을 일치시키는 놀음을 함으로 말미암아 영계의 발전을 가져 올 수 있고 지상세계와 진리세계의 발전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세계가 어떻게 움직여 들어오고 진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생활화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지 않고는 안됩니다. 신령과 진리가 반드시 하나되어 조화를 이루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인간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행복감을 느끼느냐? 진리 면에서 느끼는 행복은 방향적입니다. 왜 방향적이냐? 영과 육, 신령과 진리를 두고 보면 어떤 것이 주체냐? 신령이 주체입니다. 진리는 상대적입니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방향적입니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령은 변하지 않습니다. 중심적이기 때문에, 사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을 통해서 느끼는 행복이 귀하냐? 진리를 통해서 느끼는 느낌은 방향적이기 때문에 변합니다. 오래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신령을 통해서 느낀 그 느낌은 중심적이기 때문에 오래갑니다. 중심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입장이고 신령적인 면은 주체적인 입장입니다. 주체란 중심자리를 말하기 때문에 중심이란 것은 둘이 있을 수 없고 하나입니다. 그 주체적이고 중심적인 입장의 신령면을 통한 기쁨이라는 것은 영원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느낀 그 기쁨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두 면의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지식을 중심삼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실천문제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신령을 반드시 보강해야 됩니다. 보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기도만 하고 신령면에만 치중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진리에 대해서 연구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양면이 보강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걸 내 자신이 혼자 조정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를 잘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신령적이거든 진리적인 사람과 하나되라 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둘이서 “야! 내 맘은 이런데, 네 마음은 어떠니?” 하면서 속삭이고 말이에요. 형(型)이 다릅니다. 하나는 내형적이요, 하나는 외형적인 두 사람이 의논하고 협조해서 하나될 수 있으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필요합니다.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뭐 어떻고 어떻다는 말을 듣고 심령에 타격을 받아 가지고는 새까매지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혼자서 암만 기도로 해결하려고 해도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와 상대적인 사람, 진리적인 외적인 사람을 중심삼고 친구가 되어 있으면 “야, 이 녀석아! 이렇게 해!” 하고, 또 진리적인 면의 사람이 문제가 생겼을 때 영적인 면의 친구가 “야, 내가 기도해 보니까 이래!” 하면 쉽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합니다. 신앙자에게는 반드시 친구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76-137)
자기와 상대적인 소성을 가진 사람을 친구로 삼고 나가야
여러분이 원만한 인격을 지니려면 여러분과 다른 소성의 사람을 친구로서 환영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이구, 그 사람은 보기만 해도 싫어!” 해서는 안됩니다. 싫은 사람이 나에게 제일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싫은 사람을 좋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악한 사람이 선하게 될 수 있는 첩경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반드시 제일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 싫은 사람이 내게 있어서 원수가 아닙니다. 나와 제일 가까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참의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제일 가까울 수 있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적인 사람은 기도가 필요함과 동시에 뭐가 필요해요? 상대적인 친구가 필요합니다. 신령적인 사람은 지적인 면의 보강이 필요함과 동시에 뭐가 필요해요? 친구가 필요합니다. 혼자 신앙하려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남의 간증을 듣고 경험을 듣는 것은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내 성격의 짧은 면을 메우기 위해서는 간증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어서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라는 것입니다. 보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체험담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어 가지고 남이 말한 것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하는 것은 사탄 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는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판했다고 할 때는 사탄 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는 둘 중의 하나로 갈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내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암입니다.
내 자신의 소성을 볼 때 선한 선조의 소성도 많이 갖고 있지만 악한 선조의 소성을 받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니 비판했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하지 말라는 말도 다 그런 이치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할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령적인 면에 자기의 소성이 맞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방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진리로 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면을 가려 가지고 가야 됩니다. 그렇게 반대적인 면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혹은 진리를 탐구하고, 혹은 신령면에서 체휼하면서 말입니다. 기도와 진리에 대한 탐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영적으로 느낀 것을 진리로 소화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되고, 진리적인 면의 사람은 신령적인 면을 보강할 수 있는 체휼적인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영원한 터전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혼자서는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와 상대적인 소성을 가진 사람을 친구로 삼든가 스승으로 삼아서 지도를 받고 협조를 받아 나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 이젠 나도 알았다.” 할 때 그렇게 알았다고 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봐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실험을 해봅니다. 전문가는 무엇이 전문가냐? 같은 일을 많이 해본 사람입니다. 전문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기술자는 어떤 사람이 기술자냐? 같은 일을 많이 해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실험을 해봐야 됩니다. (76-139)
체휼한 사실을 일일생활권에 접맥시켜야
여러분,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가 얼마나 통일권인지 모릅니다. “아무개가 보고 싶다.” 하면서 24시간 기다리면 그 사람이 옵니다. 집중하게 되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파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수신기와 같은 마음의 바탕이 있기 때문에 괜히 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마음이 강해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학교에 간다고 떠났는데도 교회에 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식적인 기준을 넘어 가지고 행동하는 그런 결과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교인들도 한창 반대받고 핍박받을 때는 아주머니들이 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간다고 갔는데 통일교회에 오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보통지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쳤다느니 무슨 전기장치를 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실제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신령적인 길을 통하면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기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체휼한 모든 사실을 실천장에 적용시키는 데 있어서 어떻게 상대성을 갖고 일일생활권에 접맥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신앙자입니다. 막연한 신앙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체휼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정신을 집중해야 됩니다. 영점의 자리에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하는 사람은 “도대체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참선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간단합니다. 마음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영원한 이상적인 선의 주체이시면 그 주체적인 존재 앞에 상대적인 바탕으로서 언제나 변함 없이 상대적인 기준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마음의 중심이라고 봅니다. 이걸 통일교회에서는 생심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상대기준만 딱 맞으면 초연한 힘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심문(心門)에 맞추어 가지고 심전(心田)을 개발해야 됩니다. 그 마음의 밭을 개발하고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런데 주체되시는 하나님은 모호하니까 하나님을 연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신을 집중시켜 가지고 내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내 마음을 맑게 해놓으면 반드시 방향을 알게 됩니다.
지남철과 같이 말이에요,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는 자연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걸 느낍니다. 내가 동쪽을 향해서 기도를 했는데, 신비의 경지에 들어가면 벌써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북쪽을 향해서 기도했는데 언제 그렇게 되는지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런 사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잘 될 때가 있지요? 반면에, 내가 아무리 목욕재계를 하고 정성을 들이더라도 기도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합니다. 방의 위치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또, 방향에 따라서 다릅니다. 산에 가더라도 기도가 잘 되는 곳이 있습니다. 또, 사탄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음지입니다. 음지와 양지라는 것이 영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 체험하면 그런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암시나, 몽시나, 계시나 묵시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가 맺어지기 위해서 벌어지는 개척적이고 발전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여러분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76-142)
하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체휼신앙을 가져야
선생님은 자연을 참 좋아합니다. 왜 자연이 좋으냐 하면 선생님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비스런 체휼을 한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기분이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 기분이 아쉽습니다. 옛날에은혜로운 자연을 바라보고 명상하던 그런 경지 혹은 밤이면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런 경지가 말이에요. 사시사철 그 기분이 전부 다 다릅니다. 여러분이 복잡다단한 도회지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생활권에 싸여서 자기의 위치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수택리에 갈 때도 있고 청평에도 많이 갑니다. 미국에 가기 전에도 매일같이 청평에 갔다 왔습니다. 어제 저녁에 갔다 왔는데 아침에 또 뭐 하러 가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려면 서너 시간이 필요한데 왜 가느냐? 자연이 아주 새롭기 때문입니다. 느껴지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플러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컬컬할 때 메울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런 놀음을 합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런 면을 보강해야 됩니다. 본성의 감도라고 할까, 그러한 체휼적인 느낌을 언제든지 보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압니다. “아, 지금 내가 어떠한 단계에 들어왔다.” 하는 것을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얼마만큼 신앙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말씀을 해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하고 나면 반드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더욱이나, 열렬히 피땀을 흘리면 어느 면에 치우칩니다. 그걸 전부 다 조정해야 됩니다. 그러니 신앙길이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사람을 대할 때 척 보면 벌써 설명하기 전에 그 사람이 A, B, C형 중 어느 형인가를 분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것이 빠릅니다. 그런 체휼이 벌어져야 합니다. 영들도 무수합니다. 사람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별의별 영들이 다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별의별 녀석들이 다 있지요? 마찬가지로, 영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영을 감정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영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왼쪽으로 가느냐, 바른쪽으로 가느냐를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릴 수 없습니다. 선한 신이냐, 악한 신이냐 하는 것도 그런 느낌을 통해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체휼적인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76-145)
체험이 있으면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여러분이 체휼하려면 반드시 마음의 문을 맞추고 마음밭을 갈아서 개발해야 됩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면의 사람과 진리적인 면의 사람이 있는데, 나 혼자보다는 상대적인 어떤 지도자를 따라가든가 친구를 따라가면서 보강해 가지고 서로서로가 하나되는 입장을 취해야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빨리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반드시 실천장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무엇을 느꼈으면 그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무엇이 있었다.” 하고 그저 잊어버리지 말고 그것이 어디에 적중하느냐를 살펴야 됩니다. 반드시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이 어떻게 맞아떨어지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찾아야 됩니다. 몽시라든가 환상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실들이 현실에 적중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체휼신앙을 통해서 선한 환경을 유지해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한 생활인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앞으로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76-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