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과 절대적인 신앙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13일), u

훈독왕 | 20190916105756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13일

 


심정과 절대적인 신앙 (훈독본)
날짜 : 1970. 8. 9(일), 장소 : 한국 부산 동명장여관

 

우리는 타락한 입장에 있지만 남달리 새로운 뜻을 품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뜻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기존 가정이나 사회에서 누구나 흔히 느낄 수 있었던 그런 내용이 아니요, 그러한 사정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확실한 하나의 과제를 앞에 놓고 이 타락한 세상을 판가리할 수 있는 내용을 제시하며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추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된 내용을 중심삼고 참된 개인, 참된 가정, 참된 사회, 참된 국가, 참된 세계를 모색해 나가야 됩니다. 


참과 사랑

참이라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동에서나, 서에서나, 남에서나, 북에서 볼 때 그 방향은 다를지라도 그 모습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참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 중의 진실로서 모든 것을 규합할 수 있는 절대적인 하나의 표준이 되지 않고는 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참이 정착할 수 있는 그 자리는 나라는 관념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내 몸과 마음은 수시로 참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이 현실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리는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 가운데 있는 무엇을 정착점으로 삼겠느냐? 막연하나마, 사랑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 사랑에 접하게 될 때 영원한 행복이 깃들고, 그 사랑과 관계를 맺게 될 때 어떠한 거리와 환경도 초월하고 시간성을 넘어서 연결될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어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대도 그 사랑을 옮길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과거에도 옮길 수 없었고, 현재도 옮길 수 없으며, 미래에도 옮길 수 없는 그런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사랑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나와 관계를 맺어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안정된 중심의 자리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무한히 감촉되고 감각될 때 그 사랑이야말로 우주와 겨루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그 사랑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시작과 끝이 동일한 절대적인 사랑을 내 심지의 복판에 정한 사람이 있을진대, 그 사람은 비록 개인이로되 세계와 겨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사랑을 느끼고 가졌던 사람이 그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슬픔 중의 가장 큰 슬픔일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슬픔 이상의 슬픔이 없는 것입니다. 또, 불행 중의 제일 큰 불행은 무엇이냐? 그 사랑을 가졌다가 잃어버려서 그 사랑을 다시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런 사랑을 나 자신과 어떻게 결부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이 우주 가운데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겠느냐, 낮은 자리에 있겠느냐? 다시 말하면, 고기압권 내에 있겠느냐 저기압권 내에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그 사랑이 고기압권 내의 중심된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이 고기압권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거기에 찾아갈 수 없습니다. 대등한 고기압권을 갖추지 않고는 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흡수하고 이 사랑과 관계를 맺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고기압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만드느냐? 마태복음 5장 3절을 보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가난한 자가 없는 자 중의 없는 자를 도와주면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간들이 흔히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사랑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33-74)

신앙의 목적

모든 종교는 민족을 초월하여 천정(天情)의 인연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요, 험한 골짝길이요, 고독의 길입니다. 또한, 슬픔과 더불어 비장하게 투쟁하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런 길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한 가지, 내 마음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는 우주적인 사랑이 그리워서 거기에 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다리를 찾아 그 사랑만이 전부일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서 절대자로부터 공인을 받기 위해서 그런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사랑을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있다면 그 경지는 하나의 경지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 스스로 빈 것을 느끼고 나 스스로 충만되지 못한 사실을 느끼던 마음을 가득히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넘쳐흘러서 우주와 더불어 상관되게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무한한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무한한 가치를 지닌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절대적인 사랑과 일 대 일로 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우주를 바라보게 될 때 그 우주는 자기 품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서로 먼 거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상관관계에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무한한 사랑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 사랑은 역사도 현시대도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 미래도 그 사랑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경지가 우리에게 필히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흔히, 말하기를 자아완성이라고 합니다. 즉, 인생을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을 완성해서 완성한 사랑과 접해야 됩니다. 완성한 사랑과 접한 다음에는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나 자신이 갖는다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자식은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환경에 가거나, 아무리 극한 기쁨의 자리에 가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한 그 자식의 마음은 딴 데로 갈래야 갈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 부모의 품에 있는 것이요, 그 부모의 자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어떠한 자리에 가더라도 단 하나밖에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모체로 삼고 일생을 살아간다고 할진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기쁘나, 슬프나, 혹은 어려운 환경에 있더라도 그 사랑을 중심삼고 생각하고 그 사랑을 중심삼고 내일의 희망을 자극시켜 가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가면 부모와 자식간의 그 사랑의 인연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절대적인 사랑의 인연을 맺었으면 어떤 환경에 가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재고,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연을 말할 때 그 사연은 하나님의 내정과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33-77)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때

그러면 도의 길 가운데서 그런 자리에 제일 가까울 수 있는 때가 어느 때냐? 그 때는 사춘기시대와 같은 때라는 것입니다. 

 

사춘기 때는 꽃을 보더라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연장시켜서 전체의 꽃을 자신과 관계맺고 싶어합니다. 또, 특정한 나무면 나무를 감상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상한 인연을 전체의 인연, 즉 모든 자연과 인연지어 가지고 감상하고자 합니다. 그런 내심이 우러나오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무엇인지 모르게 내 전체가 흠뻑 좋아질 수 있는 하나의 사랑의 대상을 그려 가는 때가 사춘기인 것입니다. 

 

도의 세계에서 인격완성이란 표준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인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인연이 어느 때 맺어져야 되느냐? 사춘기 시기와 같은 그런 때 맺어져야 됩니다. 도의 생활권 내에 있어서 사춘기적인 감정이 떠나게 될 때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한때에 도의 생활이 끝날 것입니다. 

 

사춘기 때의 소녀들을 보면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웁니다. 왜 웁니까? 거기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자기 나름대로 흠뻑 젖어들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무한한 새로운 인연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상징적이요, 형상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그 가운데 무한한 사랑의 인연이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감정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심정에 새겨두어야 할 문제입니다.

 

바닷가에서 바닷물이 파도치는 것을 보게 될 때도 그 파도가 나를 치는 것 같고, 자연을 바라 볼 때도 자연이 전부 다 호흡하는 것 같고, 자신에게 환희를 가져다 주는 것같이 느끼게 됩니다. 기쁠 때 바라보면 최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슬플 때 바라보면 그 슬픔을 자극시켜 가지고 도리어 슬픔 가운데서 다른 새로운 각도의 희망을 자극시켜 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외로운 자리에 나가면 거기에서도 외롭지 않은 무한한 인연이 봄 절기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의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이런 것을 체험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봄철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꽃이 핀 동산에서 사방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과 꽃에 싸여 가지고 그 분위기에 무한히 품겨 들어가면서 무한한 가치를 음미하며 스스로 취하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 보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틀림없이 우주의 동적이고 정적인 맥박과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는 듯한 무한한 힘에 접하는 그런 경지를 느낄 것입니다. 한계가 지어진 몸이라도 그 한계가 지어진 경지에서 무한한 경지에 접해 갈 때 거기서부터 생명과 인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삶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스스로 행하는 것에 대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끼는 그 자리가 완성의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그러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33-79)


전체를 대신하는 사랑을 이루어야

그 자리는 사랑의 경지가 아니고는 못 넘어갑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눈은 다릅니다. 그리워하는 눈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정서적인 것을 중심삼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됩니다. 내 손이 움직이면 단지 힘이 소모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 손이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심정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내가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보다 가치 있는 심정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을 하는 데 혼자 있다고 해서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다 친구는 아닙니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갈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전체를 중심삼고 하나되었다 할 때는 그 전체에게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랑의 대상, 그야말로 천상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의 대상을 찾았다고 할 때는 그것을 무한히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바탕은 사랑을 갖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어느 한 사람만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일방적이요, 편파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서로가 하나되었다고 할 때는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축복받은 가정이나 뜻 앞에 세움을 받은 개인이 “내가 아무개를 사랑한다.” 하거나 “내가 아무개 자식을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둘이서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세계에서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33-81)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단순한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전체를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한한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랑의 뒷받침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더라도 선생님이 스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에 가장 고귀한 봄 절기와 같은 사랑의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떠나려야 떠날 수 없도록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여러분 자신과 선생님, 또는 선생님 자신과 하나님의 사이에 관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거기에는 무한한 분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제시해 주었느냐? 통일교회 원리의 내용뿐이냐? 죽음의 길에 들어가서도 그 죽음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 길에 있어서 자신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이 생애를 거쳐가는 데 있어서 그 생애의 추구점이 있어야 됩니다. 그물로 말하면, 벼리가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인생에 있어 그물의 벼리와 같은 것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닻을 내리게 되면 무한한 세계까지 들락날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심정을 느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는 경지에 도달하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떤 사람이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알려고만 하면 그것이 전파같이 전해 들어옵니다. 이것은 내적인 조건이 성립된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상대적인 인연을 통하여 오는 것은 영속적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내용을 통해서 흘러가야 영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주체적인 내용을 결정지어 주는 것은 상대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체적인 본연의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생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 추구해 나오는 하나님의 인격의 중심은 심정입니다. 그 심정의 극을 초월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내 죽음의 고통이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이라고 해도 그 죽음의 고통을 잊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품겨서 잠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최후를 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땅에 왔다 간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최고의 선물을 안고 가는 사람입니다. (33-82)


사랑의 길, 심정의 길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그 경지는 최고의 경지였던 것입니다. 모든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경지입니다. 이 땅 위의 사망권을 극복할 수 있는 힘에 접하는 그런 자리를 어떻게 모색할 것이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봄날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일생 동안 봄날을 노래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나이가 많아도 나이가 많다는 인식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나 마음은 다 그렇습니다. 백 살 살기가 힘들다는 말이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잖아요?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처녀 총각의 마음입니다. 자기 마누라가 쪼그랑 할머니지만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꽃 피었던 그런 시절을 표준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늙었다고 해서 밉게 보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그 인연을 중심삼고 일생 동안 그 느낌을 간직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그것으로 서로의 생애를 감싸주고자 하는 그런 사랑을 가진 부부는 행복한 부부입니다. 쭈그러졌더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그 부부는 적막한 부부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부부라는 것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새로운 봄의 세계를 향해 찾아가는 것입니다. 육체는 비록 늙었지만 그 내심에 피어오르는 근본적인 사랑은 외적인 것보다 더 멋있습니다. 인간이 그런 사랑을 가져야만 행복할 것입니다. 

 

부자지간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아들딸이 어렸을 때는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면서 애지중지 기르지만 그 자식이 나이가 많아지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더욱더 입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생애와도 바꿀 수 없는 내용을 중심삼고 들이는 그 정성의 가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사랑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아들이 된다면 효자라는 이름을 갖지 않더라도 효자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젊었을 때 이상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될 때는 그 자식이 곧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일생을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적인 요인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어의 몸이 되어 감옥의 철창 안에 있다고 해도 문제가 안됩니다.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이상처럼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영속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은 대상자로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오늘날 우리 인간이 관계를 맺어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진리의 길도 아니요, 소망의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심정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도의 길이 어떤 길이냐? 사람을 좋아하는 이상, 자기 부모를 좋아하는 이상, 자기 처자를 좋아하는 이상으로 신의 세계를 좋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33-85)

 

통일교회가 타교회와 다른 점

 

우리 통일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은 사랑을 입체적으로 퍼부을 수 있는 인연을 제시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본원적인 하나님의 사랑, 세계주의적인 사랑, 그 하나님의 사랑이 타락 이후 오늘날까지 살아 나오는 인간 개개인에게 찾아 들어가 절충되었다면 영원한 한 날을 중심삼고 올라가도 사랑이요, 떨어져도 사랑이요, 자빠져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경지에서는 그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에서 향수의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모두가 형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분신이요,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보면 전부 다 친구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을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사랑의 감정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타교회와 다른 점입니다. 현재 전 영계가 선생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 도처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서는 안됩니다. 환경권을 넘어서 내가 태어난 것도 그분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자랐다는 인식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연된 근본뿌리를 뽑아 버리고 다른 어디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완성을 향해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리는 사랑의 주체적인 입장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봄 절기의 기분이 느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분을 느끼려면 체험 단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33-89)*

 
&&&&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13일 원문 &&&&

심정과 절대적인 신앙 
  
날짜 : 1970. 8. 9(일)
장소 : 한국 부산 동명장여관
  
우리는 타락한 입장에 있지만 남달리 새로운 뜻을 품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뜻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기존 가정이나 사회에서 누구나 흔히 느낄 수 있었던 그런 내용이 아니요, 그러한 사정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확실한 하나의 과제를 앞에 놓고 이 타락한 세상을 판가리할 수 있는 내용을 제시하며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추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내 개인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되고, 내 가정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되고, 어느 사회, 어느 국가, 혹은 세계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된다고 할 수 있는 (우리는)참된 내용을 중심삼고 참된 개인, 참된 가정, 참된 사회, 참된 국가, 참된 세계를 모색해 나가야 됩니다. 
  
참과 사랑
  
참이라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동에서나, 서에서나, 남에서나, 북에서 볼 때 그 방향은 다를지라도 그 모습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참된 하나의 모습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냐? 외형적으로 나타난 자기의 모습이나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환경적인 내용을 가지고 참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 중의 진실로서 모든 것을 규합할 수 있는 절대적인 하나의 표준이 되지 않고는 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참이 정착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자리는 나라는 관념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내 몸과 마음은 수시로 참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이 현실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그 자리는 우리가 흔히 바라듯이 넓고 넓은 세계를 중심삼고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회나 가정을 중심삼고 결정될 수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가정이 있기 전에 먼저 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참이 정착하는 결정적인 자리는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 가운데 있는 무엇을 정착점으로 삼겠느냐? 막연하나마, 사랑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어야 되느냐?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 사랑에 접하게 될 때 영원한 행복이 깃들고, 그 사랑과 관계를 맺게 될 때 어떠한 거리와 환경도 초월하고 시간성을 넘어서 연결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어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대도 그 사랑을 옮길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과거에도 옮길 수 없었고, 현재도 옮길 수 없으며, 미래에도 옮길 수 없는 그런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계를 느끼는 사랑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사랑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봄 절기를 품고 남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쳐흐르는 사랑, 차고 냉랭한 겨울 절기에 있어서는 눈과 얼음을 녹일 수 있는 사랑, 높이로 보나 넓이로 보나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나와 관계를 맺어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안정된 중심의 자리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무한히 감촉되고 감각될 때 그 사랑이야말로 우주와 겨루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그 사랑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시작과 끝이 동일한 절대적인 사랑을 내 심지의 복판에 정한 사람이 있을진대, 그 사람은 비록 개인이로되 세계와 겨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사랑을 느끼고 가졌던 사람이 그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슬픔 중의 가장 큰 슬픔일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슬픔 이상의 슬픔이 없는 것입니다. 또, 불행 중의 제일 큰 불행은 무엇이냐? 그 사랑을 가졌다가 잃어버려서 그 사랑을 다시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런 사랑을 나 자신과 어떻게 결부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이 우주 가운데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겠느냐, 낮은 자리에 있겠느냐? 다시 말하면, 고기압권 내에 있겠느냐 저기압권 내에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그 사랑이 고기압권 내의 중심된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이 고기압권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거기에 찾아갈 수 없습니다. 대등한 고기압권을 갖추지 않고는 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흡수하고 이 사랑과 관계를 맺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고기압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만드느냐? 마태복음 5장 3절을 보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가난한 자가 없는 자 중의 없는 자를 도와주면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부모의 사랑이라든가, 부부의 사랑이라든가, 혹은 자녀의 사랑이라든가 하는 사랑, 인간들이 흔히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사랑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33-74)
  
신앙의 목적
  
모든 종교는 어떠한 길을 찾아가고 있느냐? 민족을 중심삼은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을 초월하여 천정(天情)의 인연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자유로운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험한 골짝길이요, 고독의 길입니다. 또한, 슬픔과 더불어 비장하게 투쟁하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런 길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한 가지, 내 마음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는 우주적인 사랑이 그리워서 그런 길을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다리를 찾아 그 사랑만이 전부일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서 절대자로부터 공인을 받기 위해서 그런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사랑을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있다면 그 경지는 둘의 경지가 아니라 하나의 경지일 것입니다. 동이라든가, 서라든가, 남이라든가, 북이라든가 하는 방향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찾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 스스로 빈 것을 느끼고 나 스스로 충만되지 못한 사실을 느끼던 마음을 가득히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넘쳐흘러서 우주와 더불어 상관되게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무한한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무한한 가치를 지닌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절대적인 사랑과 일 대 일로 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우주를 바라보게 될 때 그 우주는 자기 품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서로 먼 거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상관관계에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무한한 사랑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 사랑은 역사가(도)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시대가(도)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 미래도 그 사랑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경지가 우리에게 필히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흔히, 말하기를 자아완성이라고 합니다. 즉, 인생을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을 완성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 완성한 사랑과 접해야 됩니다. 완성한 사랑과 접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자신이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나 자신이 갖는다는 것은 무한한 사랑과 끊을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자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자식은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환경에 가거나, 아무리 극한 기쁨의 자리에 가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한 그 자식의 마음은 딴 데로 갈래야 갈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 부모의 품에 있는 것이요, 그 부모의 자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어떠한 자리에 가더라도 단 하나밖에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모체로 삼고 일생을 살아간다고 할진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기쁘나, 슬프나, 혹은 어려운 환경에 있더라도 그 사랑을 중심삼고 생각하고 그 사랑을 중심삼고 내일의 희망을 자극시켜 가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가면 부모와 자식간의 그 사랑의 인연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절대적인 사랑의 인연을 맺었으면 어떤 환경에 가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재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연을 말할 때 그 사연은 하나님의 내정과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도의 길입니다. (33-77)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때
  
그러면 도의 길 가운데서 그런 자리에 제일 가까울 수 있는 때가 어느 때냐? 철모르는 유아시기냐, 철이 든 장년시기냐, 혹은 장년시기를 지나 가지고 세상 안팎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는 노년시기일 것이냐? 과연, 그 때가 어떤 때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 그 때는 사춘기시대와 같은 때라는 것입니다. 
사춘기 때는 꽃을 보더라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연장시켜서 전체의 꽃을 자신과 관계맺고 싶어합니다. 또, 특정한 나무면 나무를 감상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상한 인연을 전체의 인연, 즉 모든 자연과 인연지어 가지고 감상하고자 합니다. 그런 내심이 우러나오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무엇인지 모르게 내 전체가 흠뻑 좋아질 수 있는 하나의 사랑의 대상을 그려 가는 때가 사춘기인 것입니다. 
도의 세계에서 인격완성이란 표준이 어디에서 나올 것이냐?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인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인연이 어느 때 맺어져야 되느냐? 사춘기 시기와 같은 그런 때 맺어져야 됩니다. 도의 생활권 내에 있어서 사춘기적인 감정이 떠나게 될 때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한때에 도의 생활이 끝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는 길 앞에는 반드시 한계선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한계선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무한한 세계를 보장받을 수 있고 확고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동기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춘기 때의 소녀들을 보면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웁니다. 왜 웁니까? 거기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자기 나름대로 흠뻑 젖어들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무한한 새로운 인연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상징적이요, 형상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그 가운데 무한한 사랑의 인연이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감정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심정에 새겨두어야 할 문제입니다. 
바닷가에서 바닷물이 파도치는 것을 보게 될 때도 그 파도가 나를 치는 것 같고, 자연을 바라 볼 때도 자연이 전부 다 호흡하는 것 같고, 자신에게 환희를 가져다 주는 것같이 느끼게 됩니다. 기쁠 때 바라보면 최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슬플 때 바라보면 그 슬픔을 자극시켜 가지고 도리어 슬픔 가운데서 다른 새로운 각도의 희망을 자극시켜 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사는 사람, 그런 심정을 가지고 무한한 인연을 추구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무미건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외로운 자리에 나가면 거기에서도 외롭지 않은 무한한 인연이 봄 절기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의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이런 것을 체험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봄철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꽃이 핀 동산에서 사방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과 꽃에 싸여 가지고 그 분위기에 무한히 품겨 들어가면서 무한한 가치를 음미하며 스스로 취하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 보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틀림없이 우주의 동적이고 정적인 맥박과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는 듯한 무한한 힘에 접하는 그런 경지를 느낄 것입니다. 한계가 지어진 몸이라도 그 한계가 지어진 경지에서 무한한 경지에 접해 갈 때 거기서부터 생명과 인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삶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스스로 행하는 것에 대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끼는 그 자리가 완성의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그러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33-79)
  
전체를 대신하는 사랑을 이루어야
  
그 자리는 무슨 지식이나 인식 혹은 외적인 관념을 가지고 넘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랑의 경지가 아니고는 못 넘어갑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눈은 다릅니다. 그리워하는 눈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입니다. 그런 눈을 보게 되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요인이 맞아떨어지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감각권 내에 있어서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할 수 있는 동기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정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정서적인 것을 중심삼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됩니다. 내 손이 움직이면 단지 힘이 소모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 손이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심정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내가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보다 가치 있는 심정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을 하는 데 혼자 있다고 해서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다 친구는 아닙니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찾아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갈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전체를 중심삼고 하나되었다 할 때는 그 전체에게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랑의 대상 찾았다고 할 때, 그야말로 천상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의 대상을 찾았다고 할 때는 그것을 무한히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드러내는 데는 어디까지 드러내느냐? 하늘 끝까지, 무한정의 세계까지 영원히 드러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바탕은 사랑을 갖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어느 한 사람만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일방적이요, 편파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서로가 하나되었다고 할 때는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축복받은 가정이나 뜻 앞에 세움을 받은 개인이 “내가 아무개를 사랑한다.” 하거나 “내가 아무개 자식을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둘이서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세계에서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통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가 자기 나름대로 사랑의 대상을 찾을 때까지는 일방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입장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전체를 대신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의 중심되는 하나의 사랑을 이루어야 됩니다. (33-81)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단순한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또, 모래로 말하면 한 알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체를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한한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랑의 뒷받침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더라도 단순한 후임자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가르쳐 주는 스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르쳐 주는 것을 다 배우고 나서는 선생님과 인연이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에 가장 고귀한 봄 절기와 같은 사랑의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떠나려야 떠날 수 없도록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여러분 자신과 선생님, 또는 선생님 자신과 하나님의 사이에 관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거기에는 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무한한 분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제시해 주었느냐? 통일교회 원리의 내용뿐이냐?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길에 들어가서도 그 죽음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망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들이 죽음 길을 극복하면서라도 어차피 가야 할 본연의 세계를 찾아가는 인생 길에 있어서 자신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애를 거쳐가는 데 있어서 그 생애의 추구점이 있어야 됩니다. 그물로 말하면, 벼리가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인생에 있어 그물의 벼리와 같은 것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닻을 내리게 되면 무한한 세계까지 들락날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심정을 느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는 경지에 도달하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떤 사람이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알려고만 하면 그것이 전파같이 전해 들어옵니다. 이것은 내적인 조건이 성립된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상대적인 인연을 통하여 오는 것은 영속적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내용을 통해서 흘러가야 영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주체적인 내용을 결정지어 주는 것은 상대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체적인 본연의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생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 추구해 나오는 하나님의 인격의 중심이 무엇이냐? 진리가 아닙니다. 그 중심은 심정입니다. 그 심정의 극을 초월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내 죽음의 고통이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이라고 해도 그 죽음의 고통을 잊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품겨서 잠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최후를 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땅에 왔다 간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최고의 선물을 안고 가는 사람입니다. (33-82)
  
사랑의 길, 심정의 길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그 경지는 최고의 경지였던 것입니다. 모든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경지입니다. 이 땅 위의 사망권을 극복할 수 있는 힘에 접하는 그런 자리를 어떻게 모색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봄날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일생 동안 봄날을 노래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나이가 많아도 나이가 많다는 인식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나 마음은 다 그렇습니다. 백 살 살기가 힘들다는 말이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잖아요?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처녀 총각의 마음입니다. 자기 마누라가 쪼그랑 할머니지만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꽃 피었던 그런 시절을 표준으로 생각합니다. 부부로 맺어졌던 그날을 중심삼고 죽을 때까지 그대와 나는 하나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늙었다고 해서 밉게 보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그 인연을 중심삼고 일생 동안 그 느낌을 간직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그것으로 서로의 생애를 감싸주고자 하는 그런 사랑을 가진 부부는 행복한 부부입니다. 쭈그러졌더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그 부부는 적막한 부부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부부라는 것입니다. 꽃을 볼 때, 동백꽃이면 동백꽃은 변할 수 없습니다. 동백꽃으로서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늙는다는 것은 뭐냐? 인간을 중심삼고 볼 때, 늙는다는 것은 새로운 봄의 세계를 향해 찾아가는 것입니다. 육체는 비록 늙었지만 그 내심에 피어오르는 근본적인 사랑은 외적인 것보다 더 멋있습니다. 인간이 그런 사랑을 가져야만 행복할 것입니다. 
부자지간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아들딸이 어렸을 때는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면서 애지중지 기르지만 그 자식이 나이가 많아지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더욱더 입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생애와도 바꿀 수 없는 내용을 중심삼고 들이는 그 정성의 가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사랑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아들이 된다면 효자라는 이름을 갖지 않더라도 효자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젊었을 때 이상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될 때는 그 자식이 곧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일생을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적인 요인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어의 몸이 되어 감옥의 철창 안에 있다고 해도 문제가 안됩니다. 죽음의 교차로가 나타나도 문제가 안됩니다.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이상처럼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영속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은 대상자로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오늘날 우리 인간이 관계를 맺어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진리의 길도 아니요, 소망의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심정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도의 길이 어떤 길이냐? 신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서 인간 세계의 그리움을 박차고 가는 길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이상, 자기 부모를 좋아하는 이상, 자기 처자를 좋아하는 이상으로 신의 세계를 좋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의 길입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좋아해야 하느냐? 이것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도의 세계에서의 느낌은 이렇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느냐? 빛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기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가 그러한 빛을 발하게 되면 잘나지 않은 사람, 즉 못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부부를 보면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저런 미남이 어떻게 저렇게 못생긴 여자와 같이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남자의 눈에는 그 여자가 최고의 미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첫사랑의 인연을 가진 사람, 첫사랑을 자기에게 백 퍼센트 부어 준 그 사람 이상의 상대를 못 찾았기 때문에 그 남자는 그 이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자기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면 그 사람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33-85)
  
통일교회가 타교회와 다른 점
  
우리 통일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은) 뭐냐? 세상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사랑을 입체적으로 퍼부을 수 있는 인연을 제시해 준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하는 남편이 문제가 아니고, 또는 아내가 문제가 아닙니다. 
죽자살자 좋아하는 자리에서도 또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랑은 무한히 주는 사랑입니다. 부딪치고 또 부딪쳐도 끝이 없습니다. 부딪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좋아 죽겠다고 계속 파고 들어가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완성의 경지가 있습니다.
우주의 본원적인 하나님의 사랑, 세계주의적인 사랑, 그 하나님의 사랑이 타락 이후 오늘날까지 살아 나오는 인간 개개인에게 찾아 들어가 절충되었다면 영원한 한 날을 중심삼고 올라가도 사랑이요, 떨어져도 사랑이요, 자빠져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경지에서는 인격의 귀함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 사람은 말을 잘해서 좋다거나, 그 사람의 눈이 비둘기 눈 같아서 좋다거나 하는 것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에서 향수의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모두가 형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분신이요,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보면 전부 다 친구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을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생님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 통일교회가 위대합니다. 근원적인 사랑의 감정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타교회와 다른 점입니다. 현재 전 영계가 선생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 도처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서는 안됩니다. 환경권을 넘어서 내가 태어난 것도 그분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자랐다는 인식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연된 근본뿌리를 뽑아 버리고 다른 어디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완성을 향해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지내보니까 그렇습니다. 원리는 전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주체적인 입장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는 전도하기 위해서 입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제일 수준 높은 것을 체험할 때 제일 안타까운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봄 절기면 봄 절기의 기분이 느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분을 느끼려면 체험 단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33-89)*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13일, 원문

심정과 절대적인 신앙 
  
날짜 : 1970. 8. 9(일)
장소 : 한국 부산 동명장여관
  
우리는 타락한 입장에 있지만 남달리 새로운 뜻을 품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뜻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기존 가정이나 사회에서 누구나 흔히 느낄 수 있었던 그런 내용이 아니요, 그러한 사정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확실한 하나의 과제를 앞에 놓고 이 타락한 세상을 판가리할 수 있는 내용을 제시하며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추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내 개인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되고, 내 가정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되고, 어느 사회, 어느 국가, 혹은 세계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된다고 할 수 있는 (우리는)참된 내용을 중심삼고 참된 개인, 참된 가정, 참된 사회, 참된 국가, 참된 세계를 모색해 나가야 됩니다. 
  
참과 사랑
  
참이라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동에서나, 서에서나, 남에서나, 북에서 볼 때 그 방향은 다를지라도 그 모습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참된 하나의 모습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냐? 외형적으로 나타난 자기의 모습이나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환경적인 내용을 가지고 참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 중의 진실로서 모든 것을 규합할 수 있는 절대적인 하나의 표준이 되지 않고는 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참이 정착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자리는 나라는 관념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내 몸과 마음은 수시로 참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이 현실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그 자리는 우리가 흔히 바라듯이 넓고 넓은 세계를 중심삼고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회나 가정을 중심삼고 결정될 수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가정이 있기 전에 먼저 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참이 정착하는 결정적인 자리는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 가운데 있는 무엇을 정착점으로 삼겠느냐? 막연하나마, 사랑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어야 되느냐?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 사랑에 접하게 될 때 영원한 행복이 깃들고, 그 사랑과 관계를 맺게 될 때 어떠한 거리와 환경도 초월하고 시간성을 넘어서 연결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어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대도 그 사랑을 옮길 수 없는 그런 절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과거에도 옮길 수 없었고, 현재도 옮길 수 없으며, 미래에도 옮길 수 없는 그런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계를 느끼는 사랑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사랑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봄 절기를 품고 남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쳐흐르는 사랑, 차고 냉랭한 겨울 절기에 있어서는 눈과 얼음을 녹일 수 있는 사랑, 높이로 보나 넓이로 보나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나와 관계를 맺어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안정된 중심의 자리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무한히 감촉되고 감각될 때 그 사랑이야말로 우주와 겨루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그 사랑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시작과 끝이 동일한 절대적인 사랑을 내 심지의 복판에 정한 사람이 있을진대, 그 사람은 비록 개인이로되 세계와 겨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사랑을 느끼고 가졌던 사람이 그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슬픔 중의 가장 큰 슬픔일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슬픔 이상의 슬픔이 없는 것입니다. 또, 불행 중의 제일 큰 불행은 무엇이냐? 그 사랑을 가졌다가 잃어버려서 그 사랑을 다시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런 사랑을 나 자신과 어떻게 결부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이 우주 가운데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겠느냐, 낮은 자리에 있겠느냐? 다시 말하면, 고기압권 내에 있겠느냐 저기압권 내에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그 사랑이 고기압권 내의 중심된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이 고기압권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거기에 찾아갈 수 없습니다. 대등한 고기압권을 갖추지 않고는 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흡수하고 이 사랑과 관계를 맺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고기압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만드느냐? 마태복음 5장 3절을 보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가난한 자가 없는 자 중의 없는 자를 도와주면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부모의 사랑이라든가, 부부의 사랑이라든가, 혹은 자녀의 사랑이라든가 하는 사랑, 인간들이 흔히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사랑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33-74)
  
신앙의 목적
  
모든 종교는 어떠한 길을 찾아가고 있느냐? 민족을 중심삼은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을 초월하여 천정(天情)의 인연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자유로운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험한 골짝길이요, 고독의 길입니다. 또한, 슬픔과 더불어 비장하게 투쟁하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런 길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한 가지, 내 마음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는 우주적인 사랑이 그리워서 그런 길을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다리를 찾아 그 사랑만이 전부일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서 절대자로부터 공인을 받기 위해서 그런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사랑을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있다면 그 경지는 둘의 경지가 아니라 하나의 경지일 것입니다. 동이라든가, 서라든가, 남이라든가, 북이라든가 하는 방향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찾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 스스로 빈 것을 느끼고 나 스스로 충만되지 못한 사실을 느끼던 마음을 가득히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넘쳐흘러서 우주와 더불어 상관되게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무한한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무한한 가치를 지닌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절대적인 사랑과 일 대 일로 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우주를 바라보게 될 때 그 우주는 자기 품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서로 먼 거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상관관계에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무한한 사랑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 사랑은 역사가(도)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현시대가(도)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 미래도 그 사랑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경지가 우리에게 필히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흔히, 말하기를 자아완성이라고 합니다. 즉, 인생을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을 완성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 완성한 사랑과 접해야 됩니다. 완성한 사랑과 접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자신이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나 자신이 갖는다는 것은 무한한 사랑과 끊을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자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자식은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환경에 가거나, 아무리 극한 기쁨의 자리에 가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한 그 자식의 마음은 딴 데로 갈래야 갈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 부모의 품에 있는 것이요, 그 부모의 자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어떠한 자리에 가더라도 단 하나밖에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모체로 삼고 일생을 살아간다고 할진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기쁘나, 슬프나, 혹은 어려운 환경에 있더라도 그 사랑을 중심삼고 생각하고 그 사랑을 중심삼고 내일의 희망을 자극시켜 가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가면 부모와 자식간의 그 사랑의 인연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절대적인 사랑의 인연을 맺었으면 어떤 환경에 가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재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삼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연을 말할 때 그 사연은 하나님의 내정과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도의 길입니다. (33-77)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때
  
그러면 도의 길 가운데서 그런 자리에 제일 가까울 수 있는 때가 어느 때냐? 철모르는 유아시기냐, 철이 든 장년시기냐, 혹은 장년시기를 지나 가지고 세상 안팎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는 노년시기일 것이냐? 과연, 그 때가 어떤 때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 그 때는 사춘기시대와 같은 때라는 것입니다. 
사춘기 때는 꽃을 보더라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연장시켜서 전체의 꽃을 자신과 관계맺고 싶어합니다. 또, 특정한 나무면 나무를 감상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상한 인연을 전체의 인연, 즉 모든 자연과 인연지어 가지고 감상하고자 합니다. 그런 내심이 우러나오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무엇인지 모르게 내 전체가 흠뻑 좋아질 수 있는 하나의 사랑의 대상을 그려 가는 때가 사춘기인 것입니다. 
도의 세계에서 인격완성이란 표준이 어디에서 나올 것이냐?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인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인연이 어느 때 맺어져야 되느냐? 사춘기 시기와 같은 그런 때 맺어져야 됩니다. 도의 생활권 내에 있어서 사춘기적인 감정이 떠나게 될 때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한때에 도의 생활이 끝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는 길 앞에는 반드시 한계선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한계선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무한한 세계를 보장받을 수 있고 확고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동기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춘기 때의 소녀들을 보면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웁니다. 왜 웁니까? 거기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자기 나름대로 흠뻑 젖어들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무한한 새로운 인연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상징적이요, 형상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그 가운데 무한한 사랑의 인연이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감정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심정에 새겨두어야 할 문제입니다. 
바닷가에서 바닷물이 파도치는 것을 보게 될 때도 그 파도가 나를 치는 것 같고, 자연을 바라 볼 때도 자연이 전부 다 호흡하는 것 같고, 자신에게 환희를 가져다 주는 것같이 느끼게 됩니다. 기쁠 때 바라보면 최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슬플 때 바라보면 그 슬픔을 자극시켜 가지고 도리어 슬픔 가운데서 다른 새로운 각도의 희망을 자극시켜 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사는 사람, 그런 심정을 가지고 무한한 인연을 추구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무미건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외로운 자리에 나가면 거기에서도 외롭지 않은 무한한 인연이 봄 절기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의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이런 것을 체험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봄철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꽃이 핀 동산에서 사방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과 꽃에 싸여 가지고 그 분위기에 무한히 품겨 들어가면서 무한한 가치를 음미하며 스스로 취하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 보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틀림없이 우주의 동적이고 정적인 맥박과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는 듯한 무한한 힘에 접하는 그런 경지를 느낄 것입니다. 한계가 지어진 몸이라도 그 한계가 지어진 경지에서 무한한 경지에 접해 갈 때 거기서부터 생명과 인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삶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스스로 행하는 것에 대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끼는 그 자리가 완성의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그러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33-79)
  
전체를 대신하는 사랑을 이루어야
  
그 자리는 무슨 지식이나 인식 혹은 외적인 관념을 가지고 넘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랑의 경지가 아니고는 못 넘어갑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눈은 다릅니다. 그리워하는 눈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입니다. 그런 눈을 보게 되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요인이 맞아떨어지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감각권 내에 있어서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할 수 있는 동기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정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정서적인 것을 중심삼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됩니다. 내 손이 움직이면 단지 힘이 소모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 손이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심정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내가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보다 가치 있는 심정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을 하는 데 혼자 있다고 해서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다 친구는 아닙니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찾아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갈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전체를 중심삼고 하나되었다 할 때는 그 전체에게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랑의 대상 찾았다고 할 때, 그야말로 천상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의 대상을 찾았다고 할 때는 그것을 무한히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드러내는 데는 어디까지 드러내느냐? 하늘 끝까지, 무한정의 세계까지 영원히 드러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바탕은 사랑을 갖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어느 한 사람만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일방적이요, 편파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서로가 하나되었다고 할 때는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축복받은 가정이나 뜻 앞에 세움을 받은 개인이 “내가 아무개를 사랑한다.” 하거나 “내가 아무개 자식을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둘이서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세계에서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통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가 자기 나름대로 사랑의 대상을 찾을 때까지는 일방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입장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전체를 대신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의 중심되는 하나의 사랑을 이루어야 됩니다. (33-81)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단순한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또, 모래로 말하면 한 알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체를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한한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랑의 뒷받침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더라도 단순한 후임자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가르쳐 주는 스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르쳐 주는 것을 다 배우고 나서는 선생님과 인연이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에 가장 고귀한 봄 절기와 같은 사랑의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떠나려야 떠날 수 없도록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여러분 자신과 선생님, 또는 선생님 자신과 하나님의 사이에 관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거기에는 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무한한 분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제시해 주었느냐? 통일교회 원리의 내용뿐이냐?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길에 들어가서도 그 죽음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망세계에 널려 있는 우리들이 죽음 길을 극복하면서라도 어차피 가야 할 본연의 세계를 찾아가는 인생 길에 있어서 자신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애를 거쳐가는 데 있어서 그 생애의 추구점이 있어야 됩니다. 그물로 말하면, 벼리가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인생에 있어 그물의 벼리와 같은 것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닻을 내리게 되면 무한한 세계까지 들락날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심정을 느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는 경지에 도달하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떤 사람이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알려고만 하면 그것이 전파같이 전해 들어옵니다. 이것은 내적인 조건이 성립된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상대적인 인연을 통하여 오는 것은 영속적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내용을 통해서 흘러가야 영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주체적인 내용을 결정지어 주는 것은 상대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체적인 본연의 인연이 될 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생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 추구해 나오는 하나님의 인격의 중심이 무엇이냐? 진리가 아닙니다. 그 중심은 심정입니다. 그 심정의 극을 초월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내 죽음의 고통이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이라고 해도 그 죽음의 고통을 잊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품겨서 잠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최후를 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땅에 왔다 간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최고의 선물을 안고 가는 사람입니다. (33-82)
  
사랑의 길, 심정의 길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그 경지는 최고의 경지였던 것입니다. 모든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경지입니다. 이 땅 위의 사망권을 극복할 수 있는 힘에 접하는 그런 자리를 어떻게 모색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봄날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일생 동안 봄날을 노래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나이가 많아도 나이가 많다는 인식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나 마음은 다 그렇습니다. 백 살 살기가 힘들다는 말이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그렇잖아요?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처녀 총각의 마음입니다. 자기 마누라가 쪼그랑 할머니지만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꽃 피었던 그런 시절을 표준으로 생각합니다. 부부로 맺어졌던 그날을 중심삼고 죽을 때까지 그대와 나는 하나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늙었다고 해서 밉게 보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그 인연을 중심삼고 일생 동안 그 느낌을 간직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그것으로 서로의 생애를 감싸주고자 하는 그런 사랑을 가진 부부는 행복한 부부입니다. 쭈그러졌더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그 부부는 적막한 부부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부부라는 것입니다. 꽃을 볼 때, 동백꽃이면 동백꽃은 변할 수 없습니다. 동백꽃으로서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늙는다는 것은 뭐냐? 인간을 중심삼고 볼 때, 늙는다는 것은 새로운 봄의 세계를 향해 찾아가는 것입니다. 육체는 비록 늙었지만 그 내심에 피어오르는 근본적인 사랑은 외적인 것보다 더 멋있습니다. 인간이 그런 사랑을 가져야만 행복할 것입니다. 
부자지간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아들딸이 어렸을 때는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면서 애지중지 기르지만 그 자식이 나이가 많아지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더욱더 입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생애와도 바꿀 수 없는 내용을 중심삼고 들이는 그 정성의 가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사랑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아들이 된다면 효자라는 이름을 갖지 않더라도 효자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젊었을 때 이상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될 때는 그 자식이 곧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일생을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적인 요인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어의 몸이 되어 감옥의 철창 안에 있다고 해도 문제가 안됩니다. 죽음의 교차로가 나타나도 문제가 안됩니다.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이상처럼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영속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은 대상자로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오늘날 우리 인간이 관계를 맺어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진리의 길도 아니요, 소망의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심정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도의 길이 어떤 길이냐? 신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서 인간 세계의 그리움을 박차고 가는 길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이상, 자기 부모를 좋아하는 이상, 자기 처자를 좋아하는 이상으로 신의 세계를 좋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의 길입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좋아해야 하느냐? 이것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도의 세계에서의 느낌은 이렇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느냐? 빛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기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가 그러한 빛을 발하게 되면 잘나지 않은 사람, 즉 못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부부를 보면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저런 미남이 어떻게 저렇게 못생긴 여자와 같이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남자의 눈에는 그 여자가 최고의 미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첫사랑의 인연을 가진 사람, 첫사랑을 자기에게 백 퍼센트 부어 준 그 사람 이상의 상대를 못 찾았기 때문에 그 남자는 그 이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자기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면 그 사람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33-85)
  
통일교회가 타교회와 다른 점
  
우리 통일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은) 뭐냐? 세상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사랑을 입체적으로 퍼부을 수 있는 인연을 제시해 준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하는 남편이 문제가 아니고, 또는 아내가 문제가 아닙니다. 
죽자살자 좋아하는 자리에서도 또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랑은 무한히 주는 사랑입니다. 부딪치고 또 부딪쳐도 끝이 없습니다. 부딪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좋아 죽겠다고 계속 파고 들어가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완성의 경지가 있습니다.
우주의 본원적인 하나님의 사랑, 세계주의적인 사랑, 그 하나님의 사랑이 타락 이후 오늘날까지 살아 나오는 인간 개개인에게 찾아 들어가 절충되었다면 영원한 한 날을 중심삼고 올라가도 사랑이요, 떨어져도 사랑이요, 자빠져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경지에서는 인격의 귀함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 사람은 말을 잘해서 좋다거나, 그 사람의 눈이 비둘기 눈 같아서 좋다거나 하는 것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에서 향수의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모두가 형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분신이요,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보면 전부 다 친구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것을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생님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 통일교회가 위대합니다. 근원적인 사랑의 감정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타교회와 다른 점입니다. 현재 전 영계가 선생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 도처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서는 안됩니다. 환경권을 넘어서 내가 태어난 것도 그분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자랐다는 인식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연된 근본뿌리를 뽑아 버리고 다른 어디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완성을 향해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지내보니까 그렇습니다. 원리는 전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주체적인 입장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는 전도하기 위해서 입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제일 수준 높은 것을 체험할 때 제일 안타까운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봄 절기면 봄 절기의 기분이 느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분을 느끼려면 체험 단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3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