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10일
16 훈독경 3권 10일 신앙자의 각오 1.mp3
신앙자의 각오 (훈독본)날짜 : 1969. 11. 30(일)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 중에서 자기 스스로 영원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루의 생활을 두고 보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무엇을 바라면서 믿고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
아침에 우리는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의 생활에 임하게 됩니다. 하루가 그렇거늘 한 달이 그럴 것이고, 일년이 그럴 것이고, 우리의 생애노정이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바라는 마음, 원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개인생활이 그 무엇을 원하고 그 무엇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나가는 것을 보아서 한 나라면 나라도 그러할 것이요, 세계면 세계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이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이나 하나님은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까지보다도 차후에 찾아오는 그 시간이 더 낫기를 바라고, 지금의 입장보다도 앞으로의 입장이 더 낫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소원하는 자체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모든 마음은 현실의 자기 입장보다도 더 나을 수 있고, 현재의 자기 입장에 무엇인가 플러스시킬 수 있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에 열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열 이상의 것을 바란다고 한다면 내가 추구하는 그곳에는 열 이상의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생사문제나 행·불행의 문제를 자유로이 가려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나 생사 등의 전체적인 문제들이 인간 자신이 그 모든 문제의 해결요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27-93)신앙자가 바라보아야 할 기준
그러면 우리가 신앙의 기준을 중심삼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결의를 하고 각오를 가졌다고 했을 때 우리의 입장은 이미 그 전의 입장이 아닙니다. 현재의 입장을 초월하고 상대적인 입장을 넘어서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을 중심삼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설 때, 거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자가 바라보아야 할 기준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지 상대적인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않고는 행·불행의 요건을 가려서 우리가 바라는 이상을 향해 갈 수 없습니다.그러니까 현실적인 기준 이상의 동기와 현실적인 기준 이상의 결과를 추구하는 입장, 즉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고 추구하는 입장이 신앙자의 입장입니다. 그렇게 볼 때, 신앙자의 생활방법이란 결국은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 이상의 힘, 자기 이상의 동기, 자기 이상의 자리에서 상대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한된 환경에 처해 있는 자신으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제한된 권내를 초월해야 되는 것입니다. 초월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런 입장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거기에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신앙자가 어떤 각오를 하는 데 있어서도 정성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 정성은 지금까지의 상습적인 생활 환경권의 내용만을 가지고는 안되며, 그 이상의 기준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27-95)
신앙자의 생활방법
그러려면 우리의 모든 감각을 거기에 집중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상습적인 생활을 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즉, 이목구비와 촉각 등의 모든 감각기관 전체를 한 중심에 집중시켜 통일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거기에 집중시킬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지 않으면 현재의 입장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누가복음 12:30)고 한 것입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은 아내의 입장에서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아내로서 절대적인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기준,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과 일치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까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믿고 간다는 그 자리는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초월적인 경지에서 인연되는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자로서 새로운 각오를 하고 그 각오 밑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최고의 자리요, 절정을 이루는 분수령과 같은 자리인 것입니다. 그 최고의 자리를 향해 가는 데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전후를 비교하면서 가야 되는데 전보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27-97)신앙자가 취해야 할 입장신앙자의 입장은 단순하다면 지극히 단순한 것이요, 복잡하다면 최고로 복잡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자가 가는 길은 절정을 향한 길입니다. 여기서 그 목표를 향하여 직행하게 될 때는 단순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바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면 수습하지 못할 문제가 벌어집니다. 거기에는 무한한 복잡성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언제나 아침에 나설 때 자기의 마음과 하루의 목표는 어디를 향할 것인지 생각하고 나서야 합니다. 하루를 지내고 나서 “나는 오늘 좋았다. 오늘은 다 행했다. 뜻 앞에 내 면목을 세울 수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이 한 달을 대신할 수 있고 이 한 해를 대신해서 자랑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호흡을 하고 있지만 평상시에는 그것을 잘 못 느낍니다. 또, 자기의 가슴에 맥박이 뛰고 있다고 하는 것이 여실한 사실이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자체 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한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된 사실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도 그것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느껴집니다.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집중해야 느낄 수 있거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마음속 깊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지 않고는 좀처럼 인식하지 못합니다. (27-98)신앙생활과 양심
하나님은 우리를 불행의 길로 안내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행복의 길로 안내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지백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자리에 들어가면 대번에 압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서 좋지 못한 일이 있으면 대번에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기쁠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평범한 삶의 환경을 초월해야 됩니다. 초월하여 거기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끌고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주도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자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외적인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양심을 중심으로 그 이상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합해서 가정을 이루면 그 가정으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27-99)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또한, 사람 사람의 형도 전부 다릅니다. 봄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울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소성이 다릅니다. 동서남북의 사방을 두고 볼 때 인간도 동서남북의 각 방향에 위치할 수 있는 각각의 타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 나름대로 기도하는 데 있어서 은혜가 되는 시간이 서로 다릅니다. 또한, 계절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느냐? 그것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돌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돌기 때문에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장이 달라지는 환경에 따라서 기도하면 기도의 힘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뚜렷한 목표입니다. “나는 기필코 이 길을 가겠다.”고 하는 뚜렷한 목표입니다. 목표를 뚜렷이 정해 놓고 백 번 결의해야 목표 안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 지는 것이지 목표가 희미해 가지고는 아무리 결의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중심이 없는 신앙관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나섰을 때는 거기에 준비한 모든 전체를 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적으로 갈 수 없을 경우에는 거기에 천막을 치고 제2차 훈련을 해 가지고라도 가야 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길이 신앙길입니다. (27-100)어느 길이 주봉으로 직행하는 길이냐
어느 길이 주봉으로 직행하는 길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어떤 골짜기나 산봉우리 혹은 7부 능선, 5부 능선, 2부 능선의 어느 한 곳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다가 가는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소원이야. 이렇게 사는 것이 내게는 보람 있는 생활이야.”라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사람은 결국 그러한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산맥을 추구하고 최고의 영봉을 점령하여 거기에서 바라보이는 모든 것을 관조하면서 무한한 가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희망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믿고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그 하나님한테는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이 있는데 그러한 하나의 기준 앞에 상대자로서 나타날 수 있는 기준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하늘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싸워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그 수많은 교파들을 하나로 통일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싸우는 데 있어서 무엇을 가지고 그 일을 실천해야 하느냐? 말씀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말씀이어야 하고, 그 인격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인격이어야 하고, 그 심정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으면 나와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싶으면 나와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싶으면 나와 사랑하실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야 됩니다. (27-106)신앙은 확실히 알고 해야신앙자는 목표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아무리 자기를 지도하는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감별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게 뭐예요? 이스라엘 민족을 전부 자기의 수중에 넣기 위한 꿍꿍이속을 갖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했는지, 또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신봉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지 그런 것을 다 감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믿고 덮어놓고 교회에 간다고 하는데, 그래 가지고 안심하고 천당 가겠어요? 남이 믿고 가니까 자기도 믿고 간다는 사람은 장애벽에 부딪치면 다 깨져 나갑니다. 아무리 나라가 반대해도 그 이상의 신념을 갖고 있으면 남아질 수 있으되 그러한 신념을 갖지 못하고 있으면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27-110)확실한 각오가 필요한 이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그러고는 “나는 간다. 틀림없이 간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다. 다른 어떤 기준이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할 때는 영계에 가서라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를 개척해 가야지 이대로 지체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죽어야 저 나라에 가서도 지상에 재림하여 협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춘하추동 사시가 변하는 것도 일년권 내에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환경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목표 아래에서 놀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 아래서 놀아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념이 왔다갔다해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신념이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심을 할 때 무엇을 갖고 합니까? 자신만을 믿고 결심합니까? 중심을 추구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해야 되느냐? 그렇게 하는 여하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격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창조물의 가치가 인정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가치가 결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치를 결정짓기 위해서 지금까지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목표에 대해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중심을 세계 이상의 중심으로 알기 전에는 세계를 요리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27-111)신앙자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
신앙길이라는 것은 복잡한 길입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끝까지 가야 할 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번 기운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시 회생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의 길은 가다가 떨어지면 대절벽이기 때문에 소생할 길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은 주봉이면 주봉, 상상봉이면 상상봉을 정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료를 수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려운 고비가 닥치면 그 고비를 피해서 돌아갈 것이 아니라 헤치고 나아가야 됩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지라도 나는 거기서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진지한 입장에서 그 어려움을 내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념을 갖기 전에는 아무리 각오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 길을 가다보면 여러분 앞에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이 여러분을 유인할 것입니다. 달콤하고 귀가 솔깃한 말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여러분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이냐? 자기의 얼굴을 보고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비켜라, 이 요물아! 나는 밤이나 낮이나 이 길을 갈 것이다.” 해야 됩니다. 그거 얼마나 멋집니까! (27-113)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도 굳은 각오가 필요여러분, 역적의 종자가 배반자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배반자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본래부터 배반자인 것입니다. 이제는 정녕 그런 것을 시험당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원수로부터 올 때 나는 자신 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이 들이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참 것을 알았으니 여러분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볼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맹세했다면 진짜인지 테스트를 한번 해보아야 되겠습니다. 참인지, 아닌지는 딱 부딪쳐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굳은 것이고, 어떤 것이 무른 것인지는 부딪쳐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굳은 자인지 무른 자인지는 조금만 고생시켜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굳은 것과 무른 것을 감별하는 곳이 통일교회입니다. 그 시험조건이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원리가 심판하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의 길목을 원리가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이 시험문제인 것입니다. (27-115)나는 시시껄렁하게 이 길을 출발하지 않았다그러면 선생님은 어떻게 했느냐? 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선생님을 잘 몰라 가지고는 안됩니다. 선생님의 가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갈 길이 바쁘니 만큼 여러분은 선생님이 움직이는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수십, 수백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만나러 가는 중심의 자리를 향한 확고한 신념이 선생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신념은 세계가 바뀌어진다고 하더라도 바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을 가는데 있어서 선생님은 그런 절대적인 입장에서 그런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각오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 가도 부작용이 많은데, 이건 데데해 가지고 꽹과리를 들고 두드리는데 박자 맞추고 춤추면 다 되는 줄 알아요? 그런 것을 보면 기분 나쁠 때가 많습니다. 호랑이 새끼를 만들려고 했는데 삵쾡이 새끼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눈과 여러분의 마음이 누구를 믿습니까?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무조건 믿지 마십시오! 믿으려면 분석해 보고 진짜로 믿으십시오! 영계에 들어가서 담판을 짓고 나와서 믿으세요!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믿으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영계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선생님에게는 각오가 서 있습니다. 세계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계적인 시련과 고통이 도래한다고 할지라도 극복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27-117)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는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됩니다. 언제까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가겠다고 딱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출발해야 할 길이 이 길입니다. 이 길을 걸어 나오는 데 있어서 벌써 숱한 수난의 고비를 거쳤습니다. 예수님처럼 30대에 죽는 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옛날에는 불쌍하다고 동정도 했지만 지금은 동정하지 않습니다. 신앙세계에서 그것이 뭐가 힘듭니까? 그만한 각오를 못해 가지고 큰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러한 각오 밑에서 이 길을 개척해 나왔습니다. (27-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