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의 각오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10일)

훈독왕 | 20190905091011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10일


첨부파일 16 훈독경 3권 10일 신앙자의 각오 1.mp3



신앙자의 각오 (훈독본)
날짜 : 1969. 11. 30(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 중에서 자기 스스로 영원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루의 생활을 두고 보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무엇을 바라면서 믿고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

 

아침에 우리는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의 생활에 임하게 됩니다. 하루가 그렇거늘 한 달이 그럴 것이고, 일년이 그럴 것이고, 우리의 생애노정이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바라는 마음, 원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개인생활이 그 무엇을 원하고 그 무엇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나가는 것을 보아서 한 나라면 나라도 그러할 것이요, 세계면 세계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이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이나 하나님은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까지보다도 차후에 찾아오는 그 시간이 더 낫기를 바라고, 지금의 입장보다도 앞으로의 입장이 더 낫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소원하는 자체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모든 마음은 현실의 자기 입장보다도 더 나을 수 있고, 현재의 자기 입장에 무엇인가 플러스시킬 수 있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에 열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열 이상의 것을 바란다고 한다면 내가 추구하는 그곳에는 열 이상의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생사문제나 행·불행의 문제를 자유로이 가려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나 생사 등의 전체적인 문제들이 인간 자신이 그 모든 문제의 해결요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27-93)

신앙자가 바라보아야 할 기준

그러면 우리가 신앙의 기준을 중심삼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결의를 하고 각오를 가졌다고 했을 때 우리의 입장은 이미 그 전의 입장이 아닙니다. 현재의 입장을 초월하고 상대적인 입장을 넘어서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을 중심삼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설 때, 거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자가 바라보아야 할 기준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지 상대적인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않고는 행·불행의 요건을 가려서 우리가 바라는 이상을 향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기준 이상의 동기와 현실적인 기준 이상의 결과를 추구하는 입장, 즉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고 추구하는 입장이 신앙자의 입장입니다. 

그렇게 볼 때, 신앙자의 생활방법이란 결국은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 이상의 힘, 자기 이상의 동기, 자기 이상의 자리에서 상대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한된 환경에 처해 있는 자신으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제한된 권내를 초월해야 되는 것입니다. 초월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런 입장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거기에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신앙자가 어떤 각오를 하는 데 있어서도 정성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 정성은 지금까지의 상습적인 생활 환경권의 내용만을 가지고는 안되며, 그 이상의 기준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27-95)

신앙자의 생활방법

 

그러려면 우리의 모든 감각을 거기에 집중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상습적인 생활을 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즉, 이목구비와 촉각 등의 모든 감각기관 전체를 한 중심에 집중시켜 통일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거기에 집중시킬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지 않으면 현재의 입장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누가복음 12:30)고 한 것입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은 아내의 입장에서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아내로서 절대적인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기준,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과 일치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까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믿고 간다는 그 자리는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초월적인 경지에서 인연되는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자로서 새로운 각오를 하고 그 각오 밑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최고의 자리요, 절정을 이루는 분수령과 같은 자리인 것입니다. 그 최고의 자리를 향해 가는 데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전후를 비교하면서 가야 되는데 전보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27-97)

신앙자가 취해야 할 입장

신앙자의 입장은 단순하다면 지극히 단순한 것이요, 복잡하다면 최고로 복잡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자가 가는 길은 절정을 향한 길입니다. 여기서 그 목표를 향하여 직행하게 될 때는 단순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바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면 수습하지 못할 문제가 벌어집니다. 거기에는 무한한 복잡성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언제나 아침에 나설 때 자기의 마음과 하루의 목표는 어디를 향할 것인지 생각하고 나서야 합니다. 하루를 지내고 나서 “나는 오늘 좋았다. 오늘은 다 행했다. 뜻 앞에 내 면목을 세울 수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이 한 달을 대신할 수 있고 이 한 해를 대신해서 자랑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호흡을 하고 있지만 평상시에는 그것을 잘 못 느낍니다. 또, 자기의 가슴에 맥박이 뛰고 있다고 하는 것이 여실한 사실이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자체 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한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된 사실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도 그것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느껴집니다.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집중해야 느낄 수 있거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마음속 깊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지 않고는 좀처럼 인식하지 못합니다. (27-98)

신앙생활과 양심

하나님은 우리를 불행의 길로 안내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행복의 길로 안내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지백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자리에 들어가면 대번에 압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서 좋지 못한 일이 있으면 대번에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기쁠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평범한 삶의 환경을 초월해야 됩니다. 초월하여 거기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끌고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주도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자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외적인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양심을 중심으로 그 이상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합해서 가정을 이루면 그 가정으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27-99)

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또한, 사람 사람의 형도 전부 다릅니다. 봄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울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소성이 다릅니다. 동서남북의 사방을 두고 볼 때 인간도 동서남북의 각 방향에 위치할 수 있는 각각의 타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 나름대로 기도하는 데 있어서 은혜가 되는 시간이 서로 다릅니다. 또한, 계절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느냐? 그것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돌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돌기 때문에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장이 달라지는 환경에 따라서 기도하면 기도의 힘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뚜렷한 목표입니다. “나는 기필코 이 길을 가겠다.”고 하는 뚜렷한 목표입니다. 목표를 뚜렷이 정해 놓고 백 번 결의해야 목표 안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 지는 것이지 목표가 희미해 가지고는 아무리 결의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중심이 없는 신앙관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나섰을 때는 거기에 준비한 모든 전체를 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적으로 갈 수 없을 경우에는 거기에 천막을 치고 제2차 훈련을 해 가지고라도 가야 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길이 신앙길입니다. (27-100)

어느 길이 주봉으로 직행하는 길이냐

 

어느 길이 주봉으로 직행하는 길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어떤 골짜기나 산봉우리 혹은 7부 능선, 5부 능선, 2부 능선의 어느 한 곳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다가 가는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소원이야. 이렇게 사는 것이 내게는 보람 있는 생활이야.”라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사람은 결국 그러한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산맥을 추구하고 최고의 영봉을 점령하여 거기에서 바라보이는 모든 것을 관조하면서 무한한 가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희망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믿고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그 하나님한테는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이 있는데 그러한 하나의 기준 앞에 상대자로서 나타날 수 있는 기준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하늘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싸워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그 수많은 교파들을 하나로 통일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싸우는 데 있어서 무엇을 가지고 그 일을 실천해야 하느냐? 말씀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말씀이어야 하고, 그 인격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인격이어야 하고, 그 심정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으면 나와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싶으면 나와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싶으면 나와 사랑하실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야 됩니다. (27-106)

신앙은 확실히 알고 해야

신앙자는 목표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아무리 자기를 지도하는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감별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게 뭐예요? 이스라엘 민족을 전부 자기의 수중에 넣기 위한 꿍꿍이속을 갖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했는지, 또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신봉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지 그런 것을 다 감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믿고 덮어놓고 교회에 간다고 하는데, 그래 가지고 안심하고 천당 가겠어요? 남이 믿고 가니까 자기도 믿고 간다는 사람은 장애벽에 부딪치면 다 깨져 나갑니다. 아무리 나라가 반대해도 그 이상의 신념을 갖고 있으면 남아질 수 있으되 그러한 신념을 갖지 못하고 있으면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27-110)

확실한 각오가 필요한 이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그러고는 “나는 간다. 틀림없이 간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다. 다른 어떤 기준이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할 때는 영계에 가서라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를 개척해 가야지 이대로 지체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죽어야 저 나라에 가서도 지상에 재림하여 협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춘하추동 사시가 변하는 것도 일년권 내에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환경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목표 아래에서 놀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 아래서 놀아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념이 왔다갔다해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신념이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심을 할 때 무엇을 갖고 합니까? 자신만을 믿고 결심합니까? 중심을 추구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해야 되느냐? 그렇게 하는 여하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격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창조물의 가치가 인정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가치가 결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치를 결정짓기 위해서 지금까지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목표에 대해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중심을 세계 이상의 중심으로 알기 전에는 세계를 요리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27-111)

신앙자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

신앙길이라는 것은 복잡한 길입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끝까지 가야 할 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번 기운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시 회생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의 길은 가다가 떨어지면 대절벽이기 때문에 소생할 길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은 주봉이면 주봉, 상상봉이면 상상봉을 정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료를 수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려운 고비가 닥치면 그 고비를 피해서 돌아갈 것이 아니라 헤치고 나아가야 됩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지라도 나는 거기서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진지한 입장에서 그 어려움을 내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념을 갖기 전에는 아무리 각오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 길을 가다보면 여러분 앞에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이 여러분을 유인할 것입니다. 달콤하고 귀가 솔깃한 말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여러분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이냐? 자기의 얼굴을 보고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비켜라, 이 요물아! 나는 밤이나 낮이나 이 길을 갈 것이다.” 해야 됩니다. 그거 얼마나 멋집니까! (27-113)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도 굳은 각오가 필요

여러분, 역적의 종자가 배반자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배반자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본래부터 배반자인 것입니다. 

이제는 정녕 그런 것을 시험당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원수로부터 올 때 나는 자신 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이 들이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참 것을 알았으니 여러분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볼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맹세했다면 진짜인지 테스트를 한번 해보아야 되겠습니다. 참인지, 아닌지는 딱 부딪쳐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굳은 것이고, 어떤 것이 무른 것인지는 부딪쳐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굳은 자인지 무른 자인지는 조금만 고생시켜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굳은 것과 무른 것을 감별하는 곳이 통일교회입니다. 그 시험조건이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원리가 심판하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의 길목을 원리가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이 시험문제인 것입니다. (27-115)

나는 시시껄렁하게 이 길을 출발하지 않았다

그러면 선생님은 어떻게 했느냐? 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선생님을 잘 몰라 가지고는 안됩니다. 선생님의 가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갈 길이 바쁘니 만큼 여러분은 선생님이 움직이는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수십, 수백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만나러 가는 중심의 자리를 향한 확고한 신념이 선생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신념은 세계가 바뀌어진다고 하더라도 바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을 가는데 있어서 선생님은 그런 절대적인 입장에서 그런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각오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 가도 부작용이 많은데, 이건 데데해 가지고 꽹과리를 들고 두드리는데 박자 맞추고 춤추면 다 되는 줄 알아요? 그런 것을 보면 기분 나쁠 때가 많습니다. 호랑이 새끼를 만들려고 했는데 삵쾡이 새끼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눈과 여러분의 마음이 누구를 믿습니까?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무조건 믿지 마십시오! 믿으려면 분석해 보고 진짜로 믿으십시오! 영계에 들어가서 담판을 짓고 나와서 믿으세요!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믿으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영계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선생님에게는 각오가 서 있습니다. 세계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계적인 시련과 고통이 도래한다고 할지라도 극복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27-117)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는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됩니다. 언제까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가겠다고 딱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출발해야 할 길이 이 길입니다. 

이 길을 걸어 나오는 데 있어서 벌써 숱한 수난의 고비를 거쳤습니다. 예수님처럼 30대에 죽는 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옛날에는 불쌍하다고 동정도 했지만 지금은 동정하지 않습니다. 신앙세계에서 그것이 뭐가 힘듭니까? 그만한 각오를 못해 가지고 큰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러한 각오 밑에서 이 길을 개척해 나왔습니다. (27-118)

 

&&&&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10일 원문 &&&&


신앙자의 각오 

날짜 : 1969. 11. 30(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 중에서 자기 스스로 영원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루의 생활을 두고 보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무엇을 바라면서 믿고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

아침에 우리는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의 생활에 임하게 됩니다. 하루가 그렇거늘 한 달이 그럴 것이고, 일년이 그럴 것이고, 우리의 생애노정이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바라는 마음, 원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 개인이 그렇거늘 한 나라와 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개인이 연결되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세계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개인생활이 그 무엇을 원하고 그 무엇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나가는 것을 보아서 한 나라면 나라도 그러할 것이요, 세계면 세계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이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천상세계에 계시는 하나님도 역시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 마음을 지니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현시점을 중심삼고 보게 될 때, 인간이나 하나님은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까지보다도 차후에 찾아오는 그 시간이 더 낫기를 바라고, 지금의 입장보다도 앞으로의 입장이 더 낫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금후의 문제입니다. 소원하는 자체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시간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나와 부딪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바라는 모든 마음은 현실의 자기 입장보다도 더 나을 수 있고, 현재의 자기 입장에 무엇인가 플러스시킬 수 있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에 열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열 이상의 것을 바란다고 한다면 내가 추구하는 그곳에는 열 이상의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10의 입장에서 100을 바란다면 90을 어떻게 성취하느냐가 문제입니다. 10의 입장인 나에게 90이라는 힘을 플러스시키지 않고는 바라는 소원을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생사문제나 행·불행의 문제를 자유로이 가려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운명길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해결지을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나 생사 등의 전체적인 문제들이 인간을 중심삼고 벌어지고 있지만 인간 자신이 그 모든 문제의 해결요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세계에 있어서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요구되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앙이라는 문제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27-93)

신앙자가 바라보아야 할 기준

그러면 우리가 신앙의 기준을 중심삼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결의를 하고 각오를 가졌다고 했을 때 우리의 입장은 이미 그 전의 입장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지금도 살고 있는 환경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현재의 입장을 초월하고 상대적인 입장을 넘어서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을 중심삼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입장에 설 때, 거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자가 바라보아야 할 기준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지 상대적인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부터 신앙자의 각오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않고는 행·불행의 요건을 가려서 우리가 바라는 이상을 향해 갈 수 없습니다.

한 나라를 책임진 위정자면 위정자, 세계를 책임진 정치가면 정치가의 입장에서 자기가 관리하고 주관하는 현실의 국가라든가 세계를 바라볼 때 그 세계의 내용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자기의 한계를 느끼고 자기의 힘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큰 일을 맡으면 맡을수록 자신의 주변과 능력만으로 하겠다고 자신을 갖는 사람은 그리 많지 많습니다. 

그래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기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상대적인 요인, 어떠한 절대적인 힘의 기준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힘이 현시점에 있는 자기의 힘 이상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현시점 이상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기준 이상의 동기와 현실적인 기준 이상의 결과를 추구하는 입장, 즉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고 추구하는 입장이 신앙자의 입장입니다. 

그렇게 볼 때, 신앙자의 생활방법이란 결국은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 이상의 힘, 자기 이상의 동기, 자기 이상의 자리에서 상대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한된 환경에 처해 있는 자신으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제한된 권내를 초월해야 되는 것입니다. 초월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런 입장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거기에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신앙자가 어떤 각오를 하는 데 있어서도 정성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 정성은 지금까지의 상습적인 생활 환경권의 내용만을 가지고는 안되며, 그 이상의 기준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27-95)

신앙자의 생활방법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의 모든 감각을 거기에 집중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상습적인 생활을 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 이상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즉, 이목구비와 촉각 등의 모든 감각기관 전체를 한 중심에 집중시켜야 됩니다. 통일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거기에 집중시킬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지 않으면 현재의 입장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누가복음 12:30)고 한 것입니다. 그 “다하라”는 말에는 천주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다하는 데는 또 어느 분야에서 다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은 아내의 입장에서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아내의 입장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느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체의 일부분일 뿐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이 아닙니다. 

한 아내로서 절대적인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기준,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과 일치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까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한 첫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소원, 즉 바라는 것을 성취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믿고 간다는 그 자리는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초월적인 경지에서 인연되는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자로서 새로운 각오를 하고 그 각오 밑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최고의 자리요, 절정을 이루는 자리입니다. 즉, 분수령과 같은 자리인 것입니다. 그 최고의 자리를 향해 가는 데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전후를 비교하면서 가야 되는데 전보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27-97)

신앙자가 취해야 할 입장

신앙자의 입장은 단순하다면 지극히 단순한 것이요, 복잡하다면 최고로 복잡한 것입니다.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목표를 향해 한 길로 곧장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잘못해서 떨어졌다고 하게 되면 천태만상의 곡절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자가 가는 길은 절정을 향한 길입니다. 여기서 그 목표를 향하여 직행하게 될 때는 단순한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직행하는 데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다 일소해 버리고 오직 그 목표만을 위해서 갈 때는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바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면 수습하지 못할 문제가 벌어집니다. 거기에는 무한한 복잡성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언제나 그 경지를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아침에 나설 때 자기의 마음과 하루의 목표는 어디를 향할 것인지 생각하고 나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출발하는 아침보다도 저녁에 돌아올 때 혹은 하루를 지내고 나서 잠자리에 들게 될 때 “나는 오늘 좋았다. 오늘은 다행했다. 뜻 앞에 내 면목을 세울 수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이 한 달을 대신할 수 있고 이 한 해를 대신해서 자랑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치열한 투쟁이 없이는 그런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호흡을 하고 있지만 평상시에는 그것을 잘 못 느낍니다. 또, 자기의 가슴에 맥박이 뛰고 있다고 하는 것이 여실한 사실이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눈이 깜박거린다는 것을 평상시에 느끼느냐? 물론, 고의적으로 깜박거리는 것은 느끼지만 평상시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자체 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한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된 사실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도 그것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느껴집니다.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집중해야 느낄 수 있거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마음속 깊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지 않고는 좀처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 것이냐?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하십니다. (27-98)

신앙생활과 양심

하나님은 우리를 불행의 길로 안내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행복의 길로 안내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지백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라도 괴로운 자리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지백체 모두는 편안한 입장에 있기를 바라고 거기에 부합될 수 있게끔 작용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불편한 자리에 들어가면 대번에 압니다. 공기가 탁한 자리에 가게 되면 대번에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서 좋지 못한 일이 있으면 대번에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해도 된다고 하는 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기쁘고,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좋고, 마음의 해방을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삼아서 자극을 받고 관계를 맺으라고 가르쳐 주는 종교의 교리는 있을 수 있으되, 그 반대의 입장에 서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기쁠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평범한 삶의 환경을 초월해야 됩니다. 보통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 사회의 제반 여건과 상대적인 관계를 갖고 화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초월하여 거기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끌고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주도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자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외적인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양심을 중심으로 그 이상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이지 그 이하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그 이상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한계선을 두고 말하는 것이냐?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남자면 60억 인류 가운데 30억에 가까운 남자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고, 여자면 또 여자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합해서 가정을 이루면 그 가정으로서 갈 수 있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그런 고개들이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가야 할 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넘어야 할 고개가 있을 것인데, 그 고개는 평지가 아닙니다. 최고의 정점인 것입니다. 그 곳을 향해서 가는 데 있어서 곧바로 고개를 넘어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산맥을 타고 따라가야 됩니다. (27-99)

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여러분, 삼각산도 최고봉을 중심삼고 작은 봉우리들이 사방으로 솟아 있고 작은 산맥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습니다. 여러분 각 개인도 그 작은 산봉우리와 같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사람의 소원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 산의 상상봉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려가겠다고 소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려가겠다고 정성들이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려가겠다고 정성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한 단계 더 올라가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찾아 올라가야 할 산봉우리를 향하여 올라가기 위해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어떤 때는 무한히 은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쭉 기도를 해도 계속적으로 무한히 은혜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틀림없이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느냐? 우리의 마음이 하루 가운데도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저녁이 있고 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년에 춘하추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봄과 마찬가지요, 낮은 여름과 마찬가지요, 저녁은 가을과 마찬가지요, 밤은 겨울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사람 사람의 형도 전부 다릅니다. 봄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울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겨울 절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여름 절기와 같은 상대적인 기준과 만나면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겨울 절기형인 사람이 겨울 절기와 같은 입장에 서면 눈이 녹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모두 그 소성이 다릅니다. 동서남북의 사방을 두고 볼 때 인간도 동서남북의 각 방향에 위치할 수 있는 각각의 타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 나름대로 기도하는 데 있어서 은혜가 되는 시간도 다릅니다. 밤이나 새벽에만 기도하는 데 있어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낮, 어떤 사람은 오전, 어떤 사람은 오후에 기도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이와 같이 은혜가 되는 시간이 서로 다릅니다. 또한, 계절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느냐? 그것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돌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돌기 때문에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쪽에 있고, 동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쪽에 있고, 북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쪽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입장이 달라지는 환경에 따라서 기도하면 기도의 힘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뚜렷한 목표입니다. “나는 기필코 이 길을 가겠다.”고 하는 뚜렷한 목표입니다. 이 목표가 흐려질 때 신앙자의 생활은 무너지는 것이요, 아무리 결의를 하고 각오를 해도 목적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됩니다. 목적도 없이 백 번 각오하면 뭐 합니까? 목표를 뚜렷이 정해 놓고 백 번 결의해야 목표 안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지는 것이지 목표가 희미해 가지고는 아무리 결의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가 바라보는 신앙의 목적지가 어디냐? 그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데 있어서 중심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희미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언제든지 교회를 팔아먹을 수 있고, 언제든지 배반하고 그 길을 망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 망하는 것은 괜찮지만 따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고는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중심이 없는 신앙관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산맥을 타면 “나는 저 주봉을 향하여 가겠다. 내 일생을 두고 가겠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하고 가겠다.”고 하면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나섰으면 밤이나 낮이나 그것을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섰을 때는 거기에 준비한 모든 전체를 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투입하는 데 있어서도 있는 정성을 다해 가지고 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적으로 갈 수 없을 경우에는 거기에 천막을 치고 제2차 훈련을 해 가지고라도 가야 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길이 신앙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의 문화와 역사도 수많은 종교를 중심삼고 수습되어 나온 것입니다. (27-100)

어느 길이 주봉으로 직행하는 길이냐

 

어느 길이 주봉으로 직행하는 길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어떤 골짜기나 산봉우리 혹은 7부 능선, 5부 능선, 2부 능선의 어느 한 곳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다가 가는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소원이야. 이렇게 사는 것이 내게는 보람 있는 생활이야.”라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사람은 결국 그러한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산맥을 추구하고 최고의 영봉을 점령하여 거기에서 바라보이는 모든 것을 관조하면서 무한한 가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그 이상을 희망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믿고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입니까? 이 목표가 희미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그 하나님한테는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이 있는데 그러한 하나의 기준 앞에 상대자로서 나타날 수 있는 기준도 하나인 것입니다. 만 우주를 대표한 하나입니다. 둘일 수 없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하늘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싸워야 됩니다. 그런데 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종교를 중심삼고 싸움을 끝낼 수 있느냐? 그런 무엇이 있느냐?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파들이 있습니다. 이 수많은 교파들 가운데 어떤 교파가 절대적인 것인가? 열 교파들 가운데 최고의 교파일 것이냐? 아닙니다. 자그마치 “수많은 교파들 가운데 최고다. 나아가서 이 시대,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최고다.” 할 수 있는 교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그 수많은 교파들을 하나로 통일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통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시키자는 것입니다.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싸우는 데 있어서 무엇을 가지고 싸울 것이냐? 무엇을 가지고 그 일을 실천해야 하느냐? 말씀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말씀이어야 하고, 그 인격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인격이어야 하고, 그 심정은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합해서 지니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으면 나와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싶으면 나와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싶으면 나와 사랑하실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시시하게 너도나도, 누구든지 보따리 싸 가지고 끌고 다니면 되는 게 아닙니다. (27-106)

신앙은 확실히 알고 해야

신앙자는 목표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생명을 투입해 가느니 만큼 그 목표를 자기 생명 이상의 가치로 인정해야 합니다.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가져야 됩니다. 아무리 자기를 지도하는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감별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거기서부터 통일교회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소설이나 세계적인 명작을 쓰는 사람이 성경을 읽게 되면 훌륭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문장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체계가 있나요, 뭐가 있나요? 그냥 이랬느니라, 저랬느니라 하면서 늘어 놓았습니다. 문학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면 까짓 것 몇 달 동안에 만들어 낼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게 뭡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게 뭐예요? 이스라엘 민족을 전부 자기의 수중에 넣기 위한 꿍꿍이속을 갖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했는지, 또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신봉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지 알게 됩니까? 그런 것을 다 감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믿고 덮어놓고 교회에 간다고 하는데, 그래 가지고 안심하고 천당 가겠어요? 그래 가지고는 지당도 못 갑니다. 천당이 무엇입니까? 남이 믿고 간다고 해서 자기도 가는 곳이에요? 남이 믿고 가니까 자기도 믿고 간다는 사람은 장애벽에 부딪치면 다 깨져 나갑니다. 아무리 나라가 반대해도 그 이상의 신념을 갖고 있으면 남아질 수 있으되 그러한 신념을 갖지 못하고 있으면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27-110)

확실한 각오가 필요한 이유

우리가 바라는 신앙의 중심이 이 세계의 어떤 사조나 권력 앞에 밀려 나가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믿고 나가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신앙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리는 절대적인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그러고는 “나는 간다. 틀림없이 간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다. 다른 어떤 기준이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서 죽어 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신념이 변해서는 안됩니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할 때는 영계에 가서라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를 개척해 가야지 이대로 지체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죽어야 저 나라에 가서도 지상에 재림하여 협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영부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생활을 하다가 죽어 보십시오! 지상재림을 할 줄 압니까? 지상재림하는 것을 안다고 해서 누구라도 지상재림할 수 있는 줄 아세요? 그런 것은 여러분보다 영계에 있는 영인들이 더 잘 압니다. 그런데 그 영인들이 왜 못 오느냐? 그것은 그들이 땅 위에서 그러한 신념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서, 그리고 목표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여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의 현재의 입장보다 더 낫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요구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내용을 지닌 처음의 신앙의 중심기준이 불변해야 됩니다. 

춘하추동 사시가 변하는 것도 일년권 내에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환경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목표 아래에서 놀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 아래서 놀아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념이 왔다갔다해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신념이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오가 무엇입니까? 결심입니다. 그러면 결심을 할 때 무엇을 갖고 합니까? 자신만을 믿고 결심합니까? 중심을 추구하고 하는 것입니다. 즉, 중심을 위해서 “나는 한다.” 하는 것입니다. ‘한다’고 하는 것은 ‘했다’와 다릅니다. ‘한다’는 미래와 결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성을 넘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해야 되느냐? 그렇게 하는 여하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격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창조물의 가치가 인정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가치가 결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복귀라는 사명을 중심삼고 창조물의 가치를 결정짓기 위해서 지금까지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목표에 대해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 흘러갑니다. 자기 나름대로 아무리 각오와 결심을 했다고 하더라도 누구든지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리 꽁꽁 싸 매 놓아도 도둑질해 갈 것은 다 해 갑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이 신앙자의 각오를 가져야 됩니다.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중심을 세계 이상의 중심으로 알기 전에는 세계를 요리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인격을 가려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27-111)

신앙자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

여러분, 백운대만 올라가더라도 조난을 당하는 사고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신앙길은 어떤 길입니까? 신앙길이라는 것은 복잡한 길입니다. 제일 겁나는 길입니다. 한번 가다가 실수하면 후퇴해서 다시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것으로 마지막입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끝까지 가야 할 길입니다. 가다 말다 하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한번 떨어지는 날에는 크나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번 기운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시 회생하기 어렵습니다. 보통의 길은 가다가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 다른 길로 피해 갈 수 있지만 신앙의 길은 가다가 떨어지면 대절벽이기 때문에 소생할 길이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산의 주봉에 올라가길 바란다면 밤이나 낮이나 그것을 중심삼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세계에서 천번 만번 가보고 옳은 길이라고 느꼈을 때 비로소 행동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천번 만번 다짐하고 나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다짐하고 나섰기 때문에 가다가 어떤 위험이 닥칠 때 그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서 재료를 수습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은 주봉이면 주봉, 상상봉이면 상상봉을 정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료를 수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려운 고비가 닥치면 그 고비를 피해서 돌아갈 것이 아니라 헤치고 나아가야 됩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운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지라도 나는 거기서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진지한 입장에서 그 어려움을 내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자에게는 제일 험하다는 말, 어렵게 간다는 말, 나쁘다는 말이 필요합니다. 제일 쉽게 간다는 말, 좋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 말이 자신을 망하지 않게 하는 관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은 누구에게나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자, 통일교회의 신자로서 가져야 할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념을 갖기 전에는 아무리 각오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어떠한 일에 부딪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이냐?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그 길을 가다보면 여러분 앞에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람이 여러분을 유인할 것입니다. 달콤하고 귀가 솔깃한 말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여러분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이냐? 자기의 얼굴을 보고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비켜라, 이 요물아! 나는 밤이나 낮이나 이 길을 갈 것이다.” 해야 됩니다. 그거 얼마나 멋집니까! (27-113)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도 굳은 각오가 필요

여러분, 역적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배반자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얼마만큼 심각한가 하는 그 도수에 따라서 누구든지 80퍼센트, 90퍼센트, 백 퍼센트의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느냐? 모두가 배반자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반자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본래부터 배반자인 것입니다. 

이제는 정녕 그런 것을 시험당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원수로부터 올 때 나는 자신 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이 들이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참 것을 알았으니 여러분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볼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이구, 이럴 줄은 몰랐다.” 할 것입니까? 그럴 줄 몰랐다고 할 수 있는 그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러분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 자체가 껄렁껄렁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맹세했다면 진짜인지 테스트를 한번 해보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도 지금까지 그러한 시련과 테스트를 당해 나왔습니다. 참인지, 아닌지는 딱 부딪쳐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굳은 것이고, 어떤 것이 무른 것인지는 부딪쳐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굳은 쇠를 감정하는 데는 그것이 제일 간단한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굳은 자인지 무른 자인지는 조금만 고생시켜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굳은 것이라면 망치로 때려도 차이가 안 납니다. 그렇지만 무른 것은 조금만 힘 주어 때려도 금방 표시가 납니다. 감별법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굳은 것과 무른 것을 감별하는 곳이 통일교회입니다. 그 시험조건이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원리가 심판하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여러분의 길목을 원리가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이 시험문제인 것입니다. (27-115)

나는 시시껄렁하게 이 길을 출발하지 않았다

그러면 선생님은 어떻게 했느냐? 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선생님을 잘 몰라 가지고는 안됩니다. 여기에 선생님을 안다는 사람이 있으면 손 들어 보십시오! 얼굴이야 알지요. 선생님의 가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갈 길이 바쁘니 만큼 여러분은 선생님이 움직이는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적어도 이 길을 출발할 때는 시시껄렁하게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길거리에서 얻어먹고 할 일이라면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데데하게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데데하게 시작했다면 벌써 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깨어질 고비를 수없이 겪어 왔습니다. 지금처럼 이러쿵저러쿵 소문을 내고 말이 많았던 자들은 한꺼번에 도망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십, 수백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만나러 가는 중심의 자리를 향한 확고한 신념이 선생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신념은 세계가 바뀌어진다고 하더라도 바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을 가는데 있어서 선생님은 그런 절대적인 입장에서 그런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배고플 때 밥 먹는 것보다 더 간절한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 가도 부작용이 많은데, 이건 데데해 가지고 꽹과리를 들고 두드리는데 박자 맞추고 춤추면 다 되는 줄 알아요? 그런 것을 보면 기분 나쁠 때가 많습니다. 호랑이 새끼를 만들려고 했는데 삵쾡이 새끼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눈과 여러분의 마음이 누구를 믿습니까?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무조건 믿지 마십시오! 무조건 믿는 것을 나는 원치 않습니다. 믿으려면 분석해 보고 진짜로 믿으십시오! 영계에 들어가서 담판을 짓고 나와서 믿으세요!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선생님이 어떤 사람이라고 내가 직접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믿으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영계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영계에서 알려주기 때문에 여러분이 여기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선생님에게는 각오가 서 있습니다. 세계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계적인 시련과 고통이 도래한다고 할지라도 극복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꼬리가 머리를 끌 수 없습니다. 거꾸로 끌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법은 없는 것입니다. 기차도 맨 앞에 있는 기관실에서 끌게 되어 있지 맨 끝 차간에서 끌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7-117)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는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으면 10년이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까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가겠다고 딱 정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제1차 노정에서 이러한 정신으로 나가겠다는 프로그램을 짜라는 것입니다. 

처녀의 몸으로서 그런 결심을 하려고 했을 때 “아! 나는 30대, 40대가 되어도 결혼을 못 하는 것이 아닌가?”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을 걱정해서는 안됩니다. 통일교회에 결혼하기 위해서 들어왔다면 데데한 것입니다. 결혼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의 선물로 갖다 주시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출발해야 할 길이 이 길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길을 가다 말고 뭐가 어떻고 어떻다고 떠들고 다니더니 얼마 안 되어 시시하게 누더기 보따리 쓰고 앉아 있으니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 한 개인만 망하는 것은 괜찮지만 잘못하면 자기 선조 70대까지 걸리는 것입니다. 선한 선조라고 했던 그 선조들이 지금에 와서 후손의 잘못으로 인해 전부 걸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이러한 일을 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이 여러분보다 못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을 데려간다고 해서 잘될 게 있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도와주고 피땀을 흘리면서 여러분을 구원하려고 이 일을 하는 것이지 여러분의 신세를 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을 걸어 나오는 데 있어서 벌써 숱한 수난의 고비를 거쳤습니다. 예수님처럼 30대에 죽는 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옛날에는 불쌍하다고 동정도 했지만 지금은 동정하지 않습니다. 신앙세계에서 그것이 뭐가 힘듭니까? 그만한 각오를 못해 가지고 큰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러한 각오 밑에서 이 길을 개척해 나왔습니다. (2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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