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3일
환희의 봄 (훈독본)
날짜 : 1971. 4. 4(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아직까지 봄과 같은 역사를 맞이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역사를 맞지 못한 동기는 역사 자체에 있는 것보다도 역사를 움직여 나오고 역사를 형성해 나오는 인간에게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봄을 맞이하지 못한 인류
인류의 시조가 천지가 바라던 봄을 맞이하지 못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 인류의 시조가 타락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타락이라는 그 자체는 모든 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목적하는 바를 향하여 전진해 나가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대해서 후퇴하는 반대적인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운명 가운데서 인류의 시조가 출발했는데 그 출발이야말로 절망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시조의 한 날의 실수로 말미암아 후퇴한 인간이 되어서 목적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운명권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는 선조들이 잃어버린 소망을 다시 회생시켜서 그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정할 수 없었던 운명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만으로는 희망을 가질 수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본래의 주권을 찾아 나가는 역사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한때의 세계적인 사조로서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라고 하는 문제가 인간의 생사를 판결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할 줄 알았지만, 그것들도 우리 인류 앞에 희망의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도 지나가야 됩니다. 이것을 타고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의 시조가 타락했으니까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돌파구를 어떻게 찾아서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 인류가 바라던 새로운 인간의 모습, 인류의 시조가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선한 입장에서 세워야 했던 가정의 모습이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현상권 내의 인류가 바라는 참다운 가정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 놓은 민족이 있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다면 그 민족과 국가와 세계는 오늘날 세계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민족이 되고, 소망의 국가가 되고, 소망의 세계가 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42-309)
인간이 가야 할 종착점
그 세계는 완전한 하나의 세계로 시작되어 발전되어 나가는 세계상이기 때문에 발전되는 그 내용은 완전한 개인을 중심삼고 전체의 동기와 관계를 맺어 가지고 발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단 하나의 방향이요, 그 누구에게도 맞는 것이기에 그 시대에 있는 종족이면 종족,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도 다른 방향을 생각할 수 없는 절대적인 방향으로 귀결될 것은 당연합니다.
그 하나의 세계적인 귀결점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찾아 나가는 소망은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에 놓치고 오지는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다시 돌아가 그 길을 찾아 허덕일 수도 있는 시점에 놓인 것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자리까지 왔던 인간들이 다시 흑암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비참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나머지 우리 인류가 그런 세계로 돌아간다면 희망도 없을 것이고 인간이 바라는 봄이라는 것은 꿈 가운데서도 지닐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하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봄을 맞이하게 하시고, 여름을 맞이하게 하시고, 가을을 맞이하게 하시어서 결실을 거둘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12, 13세기부터 인문사조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16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는 신의 실존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사상까지 나오게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조를 거쳐 나와서 현재는 신을 부정하는 단계를 넘어 신은 죽었다고까지 하는 결론을 짓는 절망적인 한계점에 도달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부정했던 신은 없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잃어버린 신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신은 추방을 당하고 부정을 당하는 입장에서도 그 자리를 뚫고 나오면서 역사해 나왔습니다.
현시점에서 단 하나의 길을 모색해 주어야 할 것이 하나님으로서 하셔야 할 책임입니다. 이런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것이냐? 신이 있다면 종교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시대에 새로운 정신적인 이념을 어떻게 촉구시켜 재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이제부터 종교가 해결해야 할 사명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찾기 전에 먼저 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함과 동시에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렇게 인식한 신으로 하여금 우리 생활권 내의 감정과 생활해 나가는 각자의 인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관계를 맺어 주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합니다. (42-311)
통일교회의 사명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조를 다시 부정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으로 새로운 긍정으로 돌이킬 수 있는 주체적인 힘, 주체적인 동기를 어떻게 발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현대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바라고 나가는 것은 천국을 창건하자는 사상입니다. 오늘날 자기의 일신조차 수습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하여 있는 이 때에 새로운 의미로서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는 사명을 해야 할 종교가 있어야 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종교의 입장을 확고히 세우는 책임을 지고 나가야 할 것이 오늘날 통일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는 신앙을 해야 됩니다. 역사적인 종말 시대에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 운동을 책임지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 신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생활터전을 개척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지금까지의 한계선을 타파해 버리고 그 한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 방안,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방안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기쁨을 주며 자기의 모든 생활권을 넘고 어떠한 극난한 환경까지도 넘어서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종교를 발견할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우리는 인류가 희망하는 봄의 세계를 꿈꾸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종교, 시대를 혁신할 수 있는 종교, 시대의 모든 감각을 새로운 면에서 자극시킬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오늘날 이 현대인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고요히 앉아 명상하는 가운데 신의 실존을 스스로 대변할 수 있는 자체를 갖고 나타나는 신앙자의 대열이 필요합니다.
신(神)과 나와의 관계, 그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부딪쳐 오는 사방의 어려운 사회상을 바라보게 될 때, 거기에 부딪쳐 가지고 스스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타개하고 전진의 일로를 가해 갈 수 있는 자체를 하나님은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 사회에 휘말려서 스스로를 수습하지 못하는 자세가 아니라 현 사회환경을 타개해 버리고, 일소해 버리고 뚫고 나갈 수 있는 주체적인 자세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수십 년 동안 걸어온 사회, 국가, 세계에 남아진 수난 이상의 수난의 길을 걸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수난의 구렁에서 허덕이고 있는 세계를 타파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 연단시키고 훈련시킨 것입니다. (42-313)
통일교회의 현재의 시점
우리는 그런 수난 가운데서 좌절할 것이 아니라 내일의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다짐된 그 소망을 가지고 결의된 그 마음을 가지고 어떤 환경의 침식을 받을 것이 아니라, 침해를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격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수난기간을 새로운 개척의 역량을 키우고, 자제력을 키우고, 환경을 흡수하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적인 시련무대에 여러분을 내세우기 위해 같은 생활권 내에 있는 종족과 민족의 시련무대에 내세워 가지고 연단시킨 것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련은 시련무대에서 쓰러지지 않는 무리를 만들기 위해서 치열한 수난의 과정을 통하여 훈련시킨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결의한다면 지금까지 걸어온 걸음걸이는 내일의 소망의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시련의 무대가 크면 클수록 결의를 다진다면 그것은 내일을 향하여 새로이 출발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동기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때를 맞아 노력했다면 통일교회에 있어서는 민족의 한계선을 넘는 때,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새로운 봄 절기와 같은 시대를 맞는 것입니다.
봄은 겨울의 연속이요, 겨울과 연결되는 때이기 때문에 어차피 한 기간에 있어서는 시련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내일의 소망 앞에 강하고 담대한 자세를 가지고 다가오는 시련을 기쁨으로 소화시켜 나가면 다가오는 시련은 점점 작은 시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겨울이란 생명 자체가 완전한 생명으로 남아지느냐, 못 남아지느냐를 판가름하는 시련기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어떤 하나의 씨에 있어서 과거의 시련이 크면 큰 만큼 그 자체는 땅이 높아지고 하늘이 낮아지는 봄날을 맞이하여 따뜻한 태양볕을 받으면 새로운 싹이 되어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싹이야말로 봄의 주인이 될 것이고, 여름의 주인이 될 것이고, 가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의 현시점은 어떤 때냐? 이 민족과 국가를 대신해서 시련과정을 넘어가는 이때가 겨울을 넘어서는 경계선에 도달한 때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생명력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서부터 한 방향을 향하여 무한정 뻗어 나갈 수 있고, 자의도 그렇다고 할 뿐만 아니라 타의의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주체적인 자체를 어떻게 지니느냐 하는 것이 봄을 맞이하는 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42-315)
봄을 맞는 바른 자세
그럴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다면 그 봄은 나를 위해 찾아온 것이요,그 봄의 가치를 찬양한다는 것은 외적인 봄 자체보다도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를 중심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봄을 봄답게 아름답게 단장하고 봄을 봄답게 자랑할 수 있는 꽃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향기를 풍길 수 있는 꽃이 되어야 하고,또 그런 꽃이 되려면 먼저 생명력을 지닌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역사적인 봄이 우리 앞에 기필코 올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하나의 산 생명나무가 되어 가지고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풍길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었다면 추웠던 지난 겨울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섬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수난을 심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수난을 오히려 기쁨의 요소, 영양으로 섭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역사를 심판하고 시대를 새로이 맞이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나타나야만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생명체를 지닌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데 있어서 더욱이 오래된 식구들은 지금은 과거지사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 내일을 논의하고 내일의 세계에서 자랑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해야 할 때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연단기나 수난기를 흠모하고 자랑하는 것보다는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고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감동된 자기 자신의 권위를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지 않고는 봄날을 맞을 수 없습니다.
겨울을 지나서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가지고 내일의 희망에 벅차서 인류가 잃어버린 소망의 한때를 우리의 때로 맞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몸 마음이 활기에 넘쳐 가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봄이 오게 되면 꽃이 필 것이고, 꽃이 피게 되면 향기가 풍길 것입니다. 그러면 천천만 성도나 천군천사는 물론이요, 하나님께서도 화동할 수 있는 자유의 출발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기쁨의 동산과 같은 봄날을 맞지 못한 비참한 탄식의 소리가 인류역사에 스며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이상을 꽃 피게 할 수 있는 봄 절기의 무리들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 문제를 고심하면서 수난과 역경을 타개하고 수고해 나오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수고를 이어받아 제물이 되어 가면서 싸워 나왔던 것이요, 제물이 되어 가면서 그 목적을 계승해 나온 것이 아니었겠느냐? 그처럼 수많은 인간들이 그러한 봄을 그리워했지만 맞이해 보지 못했던 그 봄을 체휼하고 체득하면서 살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통일교회는 그런 세계로 가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세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42-317)
수난과 시련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의 뜻은 복귀역사를 완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하지 않은 경지, 타락선을 넘은 경지에서 기쁨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소망 가운데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경지, 미래의 전체를 대신한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기쁨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는 내용과 바탕이 되어 있어야 봄을 맞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시조가 타락했던 그 한계선 이하의 기쁨이 아니라 그 이상의 기쁨을 느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위안에도 더할 수 없는 눈물어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난과 시련이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것을 더 자극시키고, 그것을 더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평범한 것도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난의 경지에서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련과 수난 가운데 생명의 가치를 세워 나가는 힘과 소망과 욕구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시련과 수난의 어려움이 어려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기쁨의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소망을 갖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부터 기쁨의 천국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고는 어떠한 소망도 성사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앞으로 다가올 시련무대를 극복할 수 있게끔 연단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연단과정이 기쁨의 자극을 보다 가치 있게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선물로서 준 수난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터전이 되고 내일의 행복을 상속받을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현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천의를 받들어 그 이념과 더불어 환경의 시련을 극복해 나온 사람이 성현입니다.
그 성현의 삶은 비참한 것이로되 그 내심에서 받던 모든 고충이 도리어 기쁨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온 것은 내일의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통일교회, 세계에 보다 빛 될 수 있는 통일교회로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2-319)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
그러면 우리가 수난을 헤쳐 버리고 수난을 깨쳐 버릴 수 있는 자제력과 주체적인 역량을 얼마나 가지고 소망의 천국을 흠모하였느냐? 그것이 사망권 혹은 시련권을 극복할 수 있는 동기가 됩니다. 그러한 동기를 지니고 시련과 부딪쳤을 때 그것을 밟고 넘어서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싸움을 해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봄을 맞이할 때 희망에 벅찰 것입니다.
비록 내일은 망한다고 하더라도 그 얼굴, 그 마음, 그 결의는 희망에 벅찬 새 아침을 맞이하려는 환희에 용솟음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기분을 중심삼고 하나님도 감동할 수 있는 생활적인 기반이 여러분 자신들과 연결되어야 할 때가 아니냐 하는 것을 느껴야 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리는 모습, 아버지와 같이 가겠다고 결의하는 모습이 오늘 통일교회에 맺어져야 합니다.(42-321)
인류를 감화시킬 수 있는 사랑의 모체가 되라
그러면 이 봄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쳐야 되겠느냐? 이 남한 땅뿐만이 아니라 북한 땅까지 이 봄의 영향이 미치게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남한의 힘과 영향이 이북으로 미칠 수 있는 운동을 개시해야 되겠습니다.
그 운동을 개시함에 있어서 물질적인 힘도 있어야겠지만 정신적인 힘이 보다 강해 가지고 이북을 능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제시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북한을 통일시킬 수 있는 봄이 대한민국의 삼천리 반도 위에 찾아올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봄의 깃발을 힘차게 붙들어 얼어붙은 북한 땅을 녹여내고 그들이 봄을 맞이할 수 있게 주체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됩니다. 대한민국의 외적인 무대에서부터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정신적인 무대에서부터 그렇게 해야 됩니다. 여기에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는 하늘의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성사될 것입니다.
봄이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뜨거운 태양의 열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체에 있어서도 통일교단을 중심삼은 이 내부의 결속된 힘이 인류를 감화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사랑의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보다 더 크고 많은 시련이 부딪쳐 오더라도 그 시련을 극복하고 남을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하며, 내적인 자리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자리에서는 봄은 봄대로 남아질 것이고 외적인 자리에서는 여름을 맞이할 수 있고 가을을 맞이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만,봄은 점점 더 확대되어 세계를 점령해 나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주체적인 중심이 결정된다면 그 중심을 통해 인류의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이 환희의 봄으로서 맞이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말할 수 없는 영광의 한 날로서 그 날을 찬양하며 맞이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새로운 봄날의 운동을 세계 도처에 전개시킴으로써 지구성 전체가 꽃동산으로 화하게 하여 어디 가든지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자유 천국이 나타나게 해야 되겠습니다. (42-323)
우리에게 온 봄을 세계까지 연결시키자
여러분 자신은 앞으로 다가올 역사적인 희망의 운세를 맡아 그것을 세계 끝까지 밀어낼 수 있는 주체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하고는 오늘의 생활권 내에서 하나님이 환영하고, 온 세계가 환영하고, 온 인류가 환영할 수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이 봄에 반대되는 일체를 부정해서 그것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때가 될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소망하는 지상의 천국, 인류가 소망하는 지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싸움과 시련의 도상에 있지만 내 마음 가운데 봄이 있고, 내 마음 가운데 여름이 있고, 내 마음 가운데 가을이 있어서 그것이 상대적인 때로 나타나게 될 때는 내가 봄의 주체가 되는 것이요, 여름의 주체가 될 것이요, 가을의 주체가 될 것입니다. 겨울이 찾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력을 가지고 그 겨울을 무난히 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겨울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보호하고, 그 겨울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생명으로 지탱시키는 계절입니다. 생명을 오히려 확실히 결속시키고, 그 존재를 완전히 보호하는 겨울은 될는지 모르지만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겨울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봄을 맞기 위한 시련과 그 극복의 노정이 아무리 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생명체임에 틀림없다는 자각과 스스로의 결의를 갖는 여러분 자신이 되지 않고서는 온 우주가 소망하는 환희의 봄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2-325)
&&&& 천일국 훈독경 제3권 제 3 일, 원문 &&&&
환희의 봄
날짜 : 1971. 4. 4(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아직까지 봄과 같은 역사를 맞이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역사를 맞지 못한 동기는 역사 자체에 있는 것보다도 역사를 움직여 나오고 역사를 형성해 나오는 인간에게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봄을 맞이하지 못한 인류
인류의 시조가 천지가 바라던 봄을 맞이하지 못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 인류의 시조가 타락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타락이라는 그 자체는 모든 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목적하는 바를 향하여 전진해 나가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대해서 후퇴하는 입장에 처하여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목적에 대하여 소망을 주는 입장이 아니라 목적에 대하여 반대적인 입장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운명 가운데서 인류의 시조가 출발했는데 그 출발이야말로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절망된 환경에서 희망의 길을 어떻게 찾아가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인류의 시조도 갈 수 없었던 그 길을 우리 후손들이 타개해 간다는 것은 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시조의 한 날의 실수로 말미암아 후퇴한 인간이 되어서 목적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운명권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 인간이 어떤 목적을 향하여 갈 것인가를 짐작하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관찰할 수 있는 입장에 섰을는지 모르지만, 소망의 기준을 영영 잃어버린 선조로부터 태어난 후손들로서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현재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는 선조들이 잃어버린 소망을 다시 회생시켜서 그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정할 수 없었던 운명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만으로는 희망을 가질 수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떨어진 자리에 있는 인간으로서 직선적으로는 가지 못하더라도 우회하여 본래의 주권을 찾아 나가는 역사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방향을 개척해 나오시면서 역사적인 종족의 분열상을 규명하고 민족의 분열상을 규명해 가지고 이제는 세계가 분열된 운명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결정적인 시대까지 끌고 나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때의 세계적인 사조로서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라고 하는 문제가 인간의 생사를 판결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할 줄 알았지만, 그것들도 우리 인류 앞에 희망의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도 지나가야 됩니다. 이것을 타고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세계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고 넘어가서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인류의 시조가 타락했으니까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돌파구를 어떻게 찾아서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 인류가 바라던 새로운 인간의 모습, 그 모습은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 세계 인류가 바라는 인간상이 될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가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선한 입장에서 세워야 했던 가정의 모습이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현상권 내의 인류가 바라는 참다운 가정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 놓은 민족이 있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다면 그 민족과 국가와 세계는 오늘날 세계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민족이 되고, 소망의 국가가 되고, 소망의 세계가 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42-309)
인간이 가야 할 종착점
그러면 그러한 세계는 어떤 세계냐? 그 세계는 하나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 세계는 완전한 하나의 세계로 시작되어 발전되어 나가는 세계상이기 때문에 발전되는 그 내용은 완전한 개인을 중심삼고 전체의 동기와 관계를 맺어 가지고 발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인간조상의 출발로 말미암아 완전한 사회의 형태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 방향으로 가는 데 있어서 이색적인 방향은 요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단 하나의 방향이요, 그 누구에게도 맞는 것이기에 그 시대에 있는 종족이면 종족,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도 다른 방향을 생각할 수 없는 절대적인 방향으로 귀결될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소망하는 그런 터전이 오늘 이 세계에 다시 회생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되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세계적인 귀결점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의 귀결점은 어디가 될 것이냐? 오늘날 우리가 찾아 나가는 소망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에 놓치고 오지는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다시 돌아가 그 길을 찾아 허덕일 수도 있는 시점에 놓인 것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자리까지 왔던 인간들이 다시 흑암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비참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나머지 우리 인류가 그런 세계로 돌아간다면 희망도 없을 것이고 인간이 바라는 봄이라는 것은 꿈 가운데서도 지닐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하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봄을 맞이하게 하시고, 여름을 맞이하게 하시고, 가을을 맞이하게 하시어서 결실을 거둘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류의 종말 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 나오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인류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12, 13세기부터 인문사조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16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는 신의 실존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사상까지 나오게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조를 거쳐 나와서 현재는 신을 부정하는 단계를 넘어 신은 죽었다고까지 하는 결론을 짓는 절망적인 한계점에 도달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부정했던 신은 없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잃어버린 신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신은 인류에게서 영영 사라져서는 안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추방을 당하고 부정을 당하는 입장에서도 그 자리를 뚫고 나오면서 역사해 나왔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현시점에서 단 하나의 길을 모색해 주어야 할 것이 하나님으로서 하셔야 할 책임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과학을 통하여 이루어진 결과의 세계가 아닙니다. 신이 있다면 어디까지나 부정되었던 종교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시대에 새로운 정신적인 이념을 어떻게 촉구시켜 재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이제부터 종교가 해결해야 할 사명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찾기 전에 먼저 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함과 동시에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렇게 인식한 신으로 하여금 우리 생활권 내의 감정과 생활해 나가는 각자의 인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관계를 맺어 주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합니다. (42-311)
통일교회의 사명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조를 다시 부정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으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의 터전을 갖추어 가지고 사회가 신을 부정하는 그 부정의 환경을 다시 부정하여 새로운 긍정으로 돌이킬 수 있는 주체적인 힘, 주체적인 동기를 어떻게 발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현대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바라고 나가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사상이 아니라 천국을 창건하자는 사상입니다. 오늘날 현시대에 세계 인류가 단말마적인 극단의 세계에 들어와 가지고 자기의 일신조차 수습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하여 있는 이 때에 새로운 의미로서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는 사명을 해야 할 종교가 있어야 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종교의 입장을 확고히 세우는 책임을 지고 나가야 할 것이 오늘날 통일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천국에 가는 것을 소망하는 종교가 아니라 천국을 실현시키려는 종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는 신앙을 해야 됩니다. 역사적인 종말 시대에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 운동을 책임지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믿고 가는 것보다 신을 증거하면서 가야 되겠습니다. 또, 신을 증거하고 가는 동시에 증거된 신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생활터전을 개척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역사적 종말시대에 있어서 요구되는 새로운 종교가 제시할 내용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인류가 지금까지의 한계선을 타파해 버리고 그 한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 방안,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방안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문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神)이 동기가 되어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기쁨을 주며 자기의 모든 생활권을 넘고 어떠한 극난한 환경까지도 넘어서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종교를 발견할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우리는 인류가 희망하는 봄의 세계를 꿈꾸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종교, 시대를 혁신할 수 있는 종교, 시대의 모든 감각을 새로운 면에서 자극시킬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오늘날 이 현대인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고요히 앉아 명상하는 가운데 부딪치는 시련보다도 우리의 모든 생활환경 가운데서 부딪치는 시련 무대, 혹은 교차점에 있어서 신의 실존을 스스로 대변할 수 있는 자체를 갖고 나타나는 신앙자의 대열이 오늘날 인류 앞에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이 바로 그런 모습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20여 년의 역사를 거쳐왔습니다. 20여 년간 바라던 소망이 풀리지 않은 그와 같은 길을 걸어왔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신음하면서 뒤넘이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과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神)과 나와의 관계, 그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그 관계는 오늘날 사회의 어떠한 관계나 인연보다도 강해야 되겠습니다. 신에 대한 결의는 나라에 대한 충신의 절개보다, 부모에 대한 효자의 절개보다, 남편에 대한 열녀의 절개보다도 더 강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부딪쳐 오는 사방의 어려운 사회상을 바라보게 될 때, 거기에 부딪쳐 가지고 스스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타개하고 전진의 일로를 가해 갈 수 있는 자체를 하나님은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 사회에 휘말려서 스스로를 수습하지 못하는 자세가 아니라 현 사회환경을 타개해 버리고, 일소해 버리고 뚫고 나갈 수 있는 주체적인 자세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새로운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기수가 될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 허덕이는 인류에게 새로운 소망의 목적 혹은 어떤 희망의 좌표를 제시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수십 년 동안 걸어온 그 역사적인 수난길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회, 국가, 세계에 남아진 수난 이상의 수난의 길을 걸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수난의 구렁에서 허덕이고 있는 세계를 타파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 연단시키고 훈련시킨 것입니다. 수난길은 그런 한 기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42-313)
통일교회의 현재의 시점
우리는 그런 수난 가운데서 좌절할 것이 아니라 내일의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다짐된 그 소망을 가지고 결의된 그 마음을 가지고 어떤 환경의 침식을 받을 것이 아니라, 침해를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격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수난기간을 새로운 개척의 역량을 키우고, 자제력을 키우고, 환경을 흡수하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5년, 10년, 혹은 그 이상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걸어나온 걸음걸이라는 것은 앞으로 세계적인 시련무대에 여러분을 내세우기 위해 같은 생활권 내에 있는 종족과 민족의 시련무대에 내세워 가지고 연단시킨 것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련은 우리가 자국민을 넘어서 이국민의 시련무대에 나서게 될 때 우리에게 가중되는 시련이 있을까 염려해서, 그 시련무대에서 쓰러지지 않는 무리를 만들기 위해서 치열한 수난의 과정을 통하여 훈련시킨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결의한다면 그야말로 지금까지 걸어온 걸음걸이는 다시 한 번 내일의 소망의 터전 앞에 빛이 될 수 있는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 앞에 다가오는 시련의 무대가 크면 클수록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결의를 다진다면 그것은 내일을 향하여 새로이 출발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동기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국가면 국가,하나의 민족이면 민족을 중심삼고 한 마디를 결정지어 놓고 새로운 세계무대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동기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때를 맞아 노력했다면 통일교회에 있어서는 민족의 한계선을 넘는 때,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새로운 봄 절기와 같은 시대를 맞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시대는 반드시 우리 앞에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봄 절기가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전체가 꽃이 피는 것은 아닙니다. 봄은 겨울의 연속이요, 겨울과 연결되는 때이기 때문에 어차피 한 기간에 있어서는 시련이 있습니다. 그 시련은 봄을 맞이하기 위한 시련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내일의 소망 앞에 강하고 담대한 자세를 가지고 다가오는 시련을 기쁨으로 소화시켜 나가면 다가오는 시련은 강하고 큰 시련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점점 작은 시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간 하루 하루를 생각해 볼 때, 통일교회가 대한민국의 권내에서 시련을 받던 그때는 겨울과 같은 때였습니다. 그러면 그 겨울이란 무엇이냐 할 때 겨울이란 생명 자체가 완전한 생명으로 남아지느냐, 못 남아지느냐를 판가름하는 시련기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어떤 하나의 씨에 있어서 과거의 시련이 크면 큰 만큼 그 시련 속에 남아진 생명력을 가지고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되어 있다면, 그 자체는 땅이 높아지고 하늘이 낮아지는 봄날을 맞이하여 따뜻한 태양볕을 받으면 새로운 싹이 되어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싹이야말로 봄의 주인이 될 것이고, 여름의 주인이 될 것이고, 가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씨를 심은 주인으로부터 사랑받는 실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의 현시점은 어떤 때냐? 이 민족과 국가를 대신해서 시련과정을 넘어가는 때입니다. 이것을 절기로 말하면 입춘을 향하여 겨울을 넘어서는 경계선에 도달한 때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에 연단되었던 여러분 자신들은 이제 새로운 봄을 향하여, 새로운 여름을 향하여, 새로운 가을을 향하여 뻗어 나갈 수 있는 자체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생명력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서부터 한 방향을 향하여 무한정 뻗어 나갈 수 있고, 자의도 그렇다고 할 뿐만 아니라 타의의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주체적인 자체를 어떻게 지니느냐 하는 것이 봄을 맞이하는 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42-315)
봄을 맞는 바른 자세
그럴 수 있는 내가 되어 있다면 그 봄은 나를 위해 찾아온 것이요,그 봄의 가치를 찬양한다는 것은 외적인 봄 자체보다도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를 중심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봄이 왔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기쁨을 자극시키고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꽃이 피고 향기가 풍기지 않는다면 그 봄은 도리어 여름과 가을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봄을 봄답게 아름답게 단장하고 봄을 봄답게 자랑할 수 있는 꽃이 있어야 됩니다. 꽃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향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향기를 풍길 수 있는 꽃이 되어야 하고, 또 그런 꽃이 되려면 먼저 생명력을 지닌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역사적인 봄이 우리 앞에 기필코 올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 자신을 두고 볼 때 여러분 자신은 하나의 산 생명나무가 되어 가지고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풍길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느냐? 만일 그럴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었다면 추웠던 지난 겨울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섬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수난을 심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수난을 탄식의 요소로 흘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기쁨의 요소, 영양으로 섭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체적인 힘을 가진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역사를 심판하고 시대를 새로이 맞이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나타나야만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생명체를 지닌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내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뜻을 중심삼고 나가는 데 있어서 더욱이 오래된 식구들은 지금은 과거지사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 내일을 논의하고 내일의 세계에서 자랑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해야 할 때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춥고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입춘까지 지나가고 봄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꽃피고 향기가 풍기고 생명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연단기나 수난기를 흠모하고 자랑하는 것보다는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고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감동된 자기 자신의 권위를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지 않고는 봄날을 맞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시련과정, 그런 겨울과정에 남아지는 자체만으로는 안되겠습니다. 겨울을 지나서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 가지고 내일의 희망에 벅차서 인류가 잃어버린 소망의 한때를 우리의 때로 맞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몸 마음이 활기에 넘쳐 가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실체가 되지 못하면 봄을 맞이할 수 있는 하나의 생명을 지닌 실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봄이 오게 되면 꽃이 필 것이고, 꽃이 피게 되면 향기가 풍길 것입니다. 그러면 천천만 성도나 천군천사는 물론이요, 하나님께서도 화동할 수 있는 자유의 출발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기쁨의 동산과 같은 봄날을 맞지 못한 비참한 탄식의 소리가 인류역사에 스며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런 비참한 역사과정에 있어서 오늘날 새로운 역사의 목적을 지향하는 어떤 종교의 무리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이상을 꽃 피게 할 수 있는 봄 절기의 무리들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 문제를 고심하면서 수난과 역경을 타개하고 수고해 나오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의 수고를 이어받아 제물이 되어 가면서 싸워 나왔던 것이요, 제물이 되어 가면서 그 목적을 계승해 나온 것이 아니었겠느냐? 또, 그 목적을 계승해 나온 기쁨의 한때는 봄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처럼 수많은 인간들이 그러한 봄을 그리워했지만 맞이해 보지 못했던 그 봄을 우리들이 비로소 체휼하고 체득하면서 살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제부터 통일교회는 그런 세계로 가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기필코 우리를 그 세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42-317)
수난과 시련의 진정한 의미
시련의 고비가 길면 길수록,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시련을 거쳤으면 그 국가와 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해방의 기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된 그때의 환경에서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 해방된 이후의 역사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복귀역사를 완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시조가 타락하던 그 한계선에서 기쁨을 느낄 것이 아니라 타락하지 않은 경지, 타락선을 넘은 경지에서 기쁨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소망 가운데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경지, 미래의 전체를 대신한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기쁨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는 내용과 바탕이 되어 있어야 봄을 맞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시조가 타락했던 그 한계선 이하의 기쁨이 아니라 그 이상의 기쁨을 느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편안한 자리에서 그냥 그대로 사는 사람은 그런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배가 고플 때는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느껴지고, 배가 부를 때는 맛있는 음식도 맛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반대적인 현상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위안에도 더할 수 없는 눈물어린 기쁨을 느낄 수있지만 기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몇 십배 몇 백배의 기쁨이 온다고 해도 고통 가운데서 작은 기쁨을 느끼는 그 기쁨만큼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입장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난과 시련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쁜 것만이 아닙니다. 나쁜 반면에 좋은 것을 더 자극시키고, 그것을 더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평범한 것도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난의 경지에서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옥중생활 가운데나 기근이 극심한 자리에 서게 되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콩 한 알 혹은 밥 한 알도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으로 느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시련과 수난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시련과 수난 가운데 생명의 가치를 세워 나가는 힘과 소망과 욕구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시련과 수난의 어려움이 어려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기쁨의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소망을 갖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부터 기쁨의 천국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고는 어떠한 소망도 성사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앞으로 다가올 시련무대를 극복할 수 있게끔 연단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단과정이 연단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자극을 보다 가치 있게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선물로서 준 수난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수난이 나쁜 것이 아니요, 어려움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터전이 되고 내일의 행복을 상속받을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을 두고 보게 될 때, 역사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그 시대에 있어서 수난의 고비를 극복해 나가면서 그 나라의 소망을 붙들고 싸워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현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천의를 받들어 이 인간세상에서 긍정하는 것을 부정하고 세상의 방향을 바꾸어 소망의 세계를 향하여 자기의 일신을 버리고 그 이념과 더불어 환경의 시련을 극복해 나온 사람이 성현입니다.
그 성현의 삶은 비참한 것이로되 그 내심에서 받던 모든 고충이 도리어 기쁨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온 것은 통일교회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일의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통일교회, 세계에 보다 빛 될 수 있는 통일교회로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2-319)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
그러면 우리는 그 수난 가운데서 얼마나 기쁨을 느꼈느냐? 우리가 수난을 헤쳐 버리고 수난을 깨쳐 버릴 수 있는 자제력과 주체적인 역량을 얼마나 가지고 소망의 천국을 흠모하였느냐? 그것이 사망권 혹은 시련권을 극복할 수 있는 동기가 됩니다. 그러한 동기를 지니고 하루 하루의 생활 속에서 시련과 부딪쳤을 때 그것을 밟고 넘어서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싸움을 해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봄을 맞이할 때 희망에 벅찰 것입니다. 그는 자려야 잘 수 없고 앉아 있으려야 앉아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활개를 펴고 온 천지에 봄이 온다고 자랑하며 스스로 준비하고 다짐하는 모습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내일은 망한다고 하더라도 그 얼굴, 그 마음, 그 결의는 희망에 벅찬 새 아침을 맞이하려는 환희에 용솟음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기분을 중심삼고 하나님도 감동할 수 있는 생활적인 기반이 여러분 자신들과 연결되어야 할 때가 아니냐 하는 것을 느껴야 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 가지고 비로소 환희의 봄날을 맞이했다고 온 우주 앞에 두 손을 들고 찬양할 수 있는 모습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리는 모습,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늘어질 수 있는 모습,그런 자리에서 이제는 아버지를 놓지 않고 아버지와 같이 가겠다고 결의하는 모습이 오늘 통일교회에 맺어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내일의 봄을 향하여 전진하는 통일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42-321)
인류를 감화시킬 수 있는 사랑의 모체가 되라
그러면 이 봄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쳐야 되겠느냐? 이 남한 땅뿐만이 아니라 북한 땅까지 이 봄의 영향이 미치게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려면 적도선 이하로 내려갔던 태양이 적도선 이상으로 올라와야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한의 힘과 영향이 이북으로 미칠 수 있는 운동을 개시해야 되겠습니다.
그 운동을 개시함에 있어서 물질적인 힘도 있어야겠지만 정신적인 힘이 보다 강해 가지고 이북을 능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제시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북한을 통일시킬 수 있는 봄이 대한민국의 삼천리 반도 위에 찾아올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이제 우리는 과거처럼 남한만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북한 5도에 있는 천 삼백만 이상의 북한 동포들을 붙들고 우리의 힘과 역량으로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봄의 깃발을 힘차게 붙들어 얼어붙은 북한 땅을 녹여내고 그들이 봄을 맞이할 수 있게 주체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됩니다. 민족적인 주체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북한 땅까지 합하고, 나아가 아시아의 주체의 모습을 갖추어서 일본과 중국을 중심삼고 아시아 전역에 봄을 맞게 해야 할 주체국가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외적인 무대에서부터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정신적인 무대에서부터 그렇게 해야 됩니다. 여기에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는 하늘의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성사될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남한 땅을 중심삼고 극복해야 했던 시련과정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북한까지도 봄날을 맞게 하기 위한 시련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북한 땅은 지금까지 겨울이었는데, 지금은 겨울과 봄이 맞서는 때입니다. 겨울과 겨울이 맞서는 때가 아니라 겨울과 봄이 맞서는 때이기 때문에 봄이 오면 올수록 겨울은 물러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봄이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뜨거운 태양의 열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체에 있어서도 통일교단을 중심삼은 이 내부의 결속된 힘이 인류를 감화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사랑의 모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보다 더 크고 많은 시련이 부딪쳐 오더라도 그 시련을 극복하고 남을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하며, 거기에 내적인 문제까지 영향을 받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그 봄이 찾아오면 그 경계선에서는 침범을 받을 수 있고 상충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내적인 자리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자리에서는 봄은 봄대로 남아질 것이고 외적인 자리에서는 여름을 맞이할 수 있고 가을을 맞이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만,봄은 점점 더 확대되어 세계를 점령해 나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주체국가,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주체적인 중심이 결정된다면 그 중심을 통해 인류의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이 환희의 봄으로서 맞이할 것입니다.
모든 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수천 년, 혹은 수십만 년 동안 수고를 해 나오신 하나님도 말할 수 없는 영광의 한 날로서 그 날을 찬양하며 맞이할 것입니다. 그 봄을 하나님은 얼마나 바랄 것이며, 영계에 있는 선지선열들은 얼마나 바랄 것이며, 또 통일교회 교인들은 얼마나 바랄 것이며, 북한에 있는 수많은 동포들은 얼마나 바랄 것이며, 세계 인류는 얼마나 바랄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새로운 봄날의 운동을 세계 도처에 전개시킴으로써 지구성 전체가 꽃동산으로 화하게 하여 어디 가든지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자유 천국이 나타나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봄을 이 지구성이 맞지 못하고는 소망의 여름과 가을은 물론이고 우리가 소원하는 본연의 때, 결실의 문명시대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42-323)
우리에게 온 봄을 세계까지 연결시키자
새로운 봄을 출발시켜야 할 기원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여러분 자신은 미래에 다가올 역사적인 운세에 밀려가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역사적인 희망의 운세를 맡아 그것을 세계 끝까지 밀어낼 수 있는 주체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하고는 오늘의 생활권 내에서 하나님이 환영하고, 온 세계가 환영하고, 온 인류가 환영할 수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그런 경계선을 넘어 남한에 봄이 찾아오는 때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봄을 이북까지, 이 봄을 아시아까지, 이 봄을 세계까지 연결시키고 이 봄에 반대되는 일체를 부정해서 그것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때가 될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소망하는 지상의 천국, 인류가 소망하는 지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싸움과 시련의 도상에 있지만 내 마음 가운데 봄이 있고, 내 마음 가운데 여름이 있고, 내 마음 가운데 가을이 있어서 그것이 상대적인 때로 나타나게 될 때는 내가 봄의 주체가 되는 것이요, 여름의 주체가 될 것이요, 가을의 주체가 될 것입니다. 겨울이 찾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력을 가지고 그 겨울을 무난히 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겨울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보호하고, 그 겨울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생명으로 지탱시키는 계절입니다. 생명을 위협하기 위한 겨울이 아니요, 생명을 분립시키기 위한 겨울이 아닙니다. 그것을 오히려 확실히 결속시키고, 그 존재를 완전히 보호하는 겨울은 될는지 모르지만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겨울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울이 오더라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지 않고는 아무리 봄을 맞고, 여름을 맞고, 가을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해마다 새로운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씨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봄을 맞기 위한 시련과 그 극복의 노정이 아무리 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생명체임에 틀림없다는 자각과 스스로의 결의를 갖는 여러분 자신이 되지 않고서는 온 우주가 소망하는 환희의 봄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