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6일
2416 훈독경 제1권 제6일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 1.mp3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훈독본)
- 미국 7대도시 공개 강연회 말씀 -
날짜 : 1972. 2. 3(목)
장소 : 미국 링컨센터
하나님은 실존하는가
오늘 저녁 여러분 앞에 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입니다.
여기 뉴욕에 사는 분들은 “하나님!” 하게 되면 “하나님은 죽었다.” 하는 말을 연상하리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있는데 하나님을 죽었다고 한다면 그 이상으로 죄가 되는 일이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없는데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말씀드릴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라는 제목을 두고 보더라도 여기에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하나의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고,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하나님이 합해 가지고 이루어지는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절대자인 하나님이 혼자 있다면 그 하나님이 있는 자리는 행복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미국의 대통령이 혼자 있으면서 기뻐하고, 웃고 그런다면 그 대통령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혼자 좋아하고 기뻐한다면 그 하나님도 정상적인 하나님이 아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이 아무도 없는 데서 그러면 이상하지만, 조그만 상대 하나를 보고 “하하하” 웃으면서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을 보고 웃는다고 하더라도 그 웃는 하나님을 대해서 미쳤다고 한다면 미쳤다고 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미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존재가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 앞에 먼저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불행이니 비참이니 하는 것들은 상대가 없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대를 좋아한다면 이 세계에서 대관절 어떠한 존재를 좋아할 것 같습니까? 감각이 없는 광물이요? 아닙니다. 식물도 아닙니다. 식물보다는 동물이 조금 관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될 수 있는 중심존재가 무엇이냐 하고 묻게 되면, 그것은 유치원생이라도 사람을 지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면, 사람은 이 피조물 가운데서 최대의 걸작품이라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상을 찾아간다면 인간을 내놓고는 찾아갈 대상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날 이 복잡한 정세 속에서 금후의 미국의 운명이라든가 혹은 세계의 운명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이 있으면 좋겠느냐, 없으면 좋겠느냐 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절대자가 있어서 참은 참으로, 악은 악으로 처단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분이 없다면 금후의 세계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보다도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52-314)
이성성상의 하나님
이 우주는 결과세계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힘이 있기 위해서는 힘이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힘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 것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작용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힘이 있기 전에 작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작용을 하려면 거기에는 힘이 있기 전에 선행의 조건으로 주체와 대상이 절대 필요합니다. 이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는 데서 작용이 벌어지고, 작용이 벌어짐으로써 힘이 존속하는 것입니다.
힘이 있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체와 대상입니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다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들이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서로가 상대적인 내용에 맞아야지 그렇지 않고는 작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이 작용하게 될 때는 주체의 목적과 대상의 목적이 합할 수 있는 기점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작용을 안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일로 외부에 나간다고 할 때 자신이 손해보기 위해서 나가는 놀음은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나올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이익될 수 있는 것을 바라고 자기에게 플러스될 수 있는 무엇을 바라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친구끼리 만나는 데 있어서도, 혹은 좋아하는 데 있어서도 서로가 마이너스될 수 있는 자리, 지금보다도 나빠질 수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 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둘이서 서로서로 합하는 데는 지금보다도 나을 수 있는 서로의 목적을 바라보기 때문에 거기에는 작용이 벌어지고 하나로 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볼 때 힘이 작용하는 데는 이중목적, 즉 주체와 대상간에 서로서로의 목적을 플러스시키는 그러한 내용이 있지 않고는 하나로 합하지도 않고 작용도 안 한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원자면 원자를 두고 볼 때, 원자에는 양자를 중심삼고 전자가 돌고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두 목적을 결합할 수 있는 자리, 주고받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원자형을 형성합니다. 그러니까 전자의 목적과 양자의 목적을 겸한 목적을 중심삼고 합해 있습니다. 크게 보면, 하나님도 존재자입니다. 하나님도 존재한다면 실존체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역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되어 있어서 완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이중의 목적성을 중심삼고 결합된 자리에 서지 않고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도 결국은 주체성과 대상성이 합해서 하나의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는데 1남 1녀더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귀납적으로 추구하면 하나님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을 합한 분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혼자 있어서는 안되겠기 때문에, 대상을 필요로 해서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하나의 남자고 하나의 여자입니다. 우리 사람을 두고 봐도 사람에게는 마음과 몸이 있습니다. 이 마음과 몸이 주고받습니다. 이것이 만일 틀어지게 될 때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한쪽이 기울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합해서 올라가게 되면 기뻐집니다. 이것이 완전히 하나된 남자가 있다면 그는 완전한 남자일 것입니다.
만일 절대자가 있다면 어떠한 남자를 요구할 것이냐? 그러한 남자를 요구할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하나된 여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여자를 만나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대자의 위신을 두고 보더라도 사람을 만나는 데는 최고의 남자, 최고의 여자를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이 찾기를 바라고 하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사람을 하늘도 요구하는 것이요, 우리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보게 되면 아무래도 원인적인 존재가 아닌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존재하고 안 하고를 자유로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원인이 못 되니까 결과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적인 존재도 원인이 절대적이면 절대적인 상대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52-316)
인체의 신비를 통해서 본 신의 실존성
여러분!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잠깐 말해 보자구요. 우리가 쭉 인류의 시조를 찾아 올라가면 최초의 시조가 나올 것입니다. 그 인류의 시조는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 최초의 인간이 땅에 태어나면서 태양이 있어서 눈으로 봐야 된다는 것을 그 자체가 알고 준비해 나왔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가 모르고 나왔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 땅에 나와서 눈이 태양을 볼 수 있게 된 것을 그 태어난 자신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벌써 천체에 햇빛이 있어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눈이 그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을 보면 깜박거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열을 받아서 눈의 수분이 증발함으로 말미암아 축여 줘야 할 것을 알기 때문에 깜박거리는 것입니다. 또, 눈썹은 먼지가 있으니까 이 먼지를 방지해야 할 것을 알고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은 박물학적, 천문학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체 전체를 보면 신비의 왕궁같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냥 그대로 될 수 없다구요.
인간이 태어날 때 그 태어난 자기 자신들은 몰랐지만 그것을 안 분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날 것을 모르고 태어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52-318)
하나님과의 관계로 본 인간의 본연의 가치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다면 우리 인간을 어떠한 자리에 두고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해서 지었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를 알아봅시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다면, 지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지어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 자체에게도 목적이 있습니다. 지어진 사람의 목적과 지은 하나님의 목적이 따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필시, 어떤 일치점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도 바랄 것이고 우리 인간도 바랄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통령이 있다고 합시다. 여기에 온 사람들 가운데 그 대통령보다도 낮아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최고로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분이 있으면 그분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 높은 사람을 중심삼고 하나되었다고 해도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으면 그 분과도 하나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나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그러한 생각을 다 갖고 있습니다. 만약에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여러분도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싶겠습니까, 안 맺고 싶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속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점령하지 못할 때는 안심을 못 합니다. 하나님을 점령하고 하나님의 속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까지도 점령하고 난다면 만사는 다 오케이 입니다. 그분의 사랑만 점령하는 날에는 그분의 것은 내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양심에 우리를 그곳까지 내몰아 주는 작용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럴 수 있는 본래의 인간의 가치적인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어떤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겠습니까? 또, 우리 인간은 어떤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겠습니까? 이와 같이 추구해 볼 때 그 자리는 부자관계, 즉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한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아버지고 아들이면 상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을 두고 볼 때, 그 높은 아버지의 자리에 나도 한번 가고 싶다고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아버지가 안된다고 하면 큰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염려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 즉 내적인 자리에 들어오고 우리 인간 자신은 바깥, 즉 하나님의 몸과 같은 그 자리까지 우리에게 허락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등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보게 될 때, 그 아버지가 귀하다면 하나밖에 없는 그 아버지를 어디에 갖다 건사하겠습니까? 저 먼 데다 두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와 더불어, 나만이 만나고 나만이 좋아할 수 있는 자리에 갖다 두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어디 딴 데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알 수 있는 마음속에다 두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같은 자리에 두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서 사랑받을 수 있게끔 해 주고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인간의 욕망은 또 무엇이냐?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능력을 가진 분이니 그 창조의 능력까지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어 놓고 보니 얼마나 귀여웠는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것까지도, 그러한 묘미까지도 우리 인간이 느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즉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받으려면 하나님은 한 분 가운데 완전한 남성과 여성의 모습으로 계시므로 그것이 갈라져 태어난 완전한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상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상대가 됨으로 말미암아 창조적인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부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창조의 능력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자녀입니다. 그 자녀를 낳음으로 하나님이 자녀 된 인간을 창조하시고 느끼셨던 기쁨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 자녀에 대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제일 좋은 것을 우리 인간 앞에 다 퍼부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어 행복과 만족 가운데 평화스러운 에덴에서 살게끔 우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히 상대되는 입장, 갈라질래야 갈라질 수 없는 행복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습니다. (52-319)
종교의 사명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물은 하나의 목적을 가져야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상대의 입장에 선 인간이 이 땅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었으니까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텐데, 우리를 보게 된다면 이율배반 된 반대적인 목적의 또 하나의 길에 서 있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곧, 우리 인간은 선을 지향하는 양심과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는 사심의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사람에게 있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보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양심작용이 내적인 플러스라고 한다면 사심은 또 다른 하나의 플러스입니다. 그러니까 반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귀한 위업으로 주셨던 사랑의 이념, 절대적인 가치의 이념을 상실해 버리고 오늘날 우리 자체는 반대적인 두 현상세계에서 신음하고 사는 비참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장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인간을 그냥 두지 않고 역사과정을 통하여 재생시키는 운동을 해야 됩니다. 즉, 수리공장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종교입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혹은 민족배경이 다른 기준에 따라서 수많은 종교들을 세워 가지고 규합해 나오는 것입니다. 종교가 바라는 목적은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목적도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려는 종교가 아니고는 오래 남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종교 지도자들은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세계주의자요, 하늘을 중심삼은 세계적인 운동을 제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4대 성인이라고 해서 네 사람을 꼽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석가모니, 공자, 마호메트입니다.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꼽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인이지 성인은 못 됩니다. 지식을 가지고는 생명을 구하지 못합니다. 하늘만이 생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대 성인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전부 다 세계적인 대종교의 종주(宗主)들이 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성인을 존중하면서 하늘은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52-321)
세계적인 중심종교는 기독교
그러면 이 수리공장과 같은 사명을 종교가 하는데, 하나님이 절대자라면 절대자가 제일 좋아하는 종교가 어떠한 종교냐 하는 것을 이 4대 종교들 가운데서 우리는 골라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유교를 보면 하나님에 대해 확실한 것을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선을 행하면 하늘이 복을 주고 악을 행하면 화를 준다는 정도밖에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불교를 봐도 법적인 신은 인정하지만 인격적인 신은 모르고 있습니다. 또, 회교를 보면, 이것은 기독교를 이어받은 중간적인 종교입니다. 이것은 코란경을 받든가, 아니면 칼을 받으라는 무력적인 종교입니다. 그런 것은 하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장한 내용이 다릅니다. 그는 나타나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인류 역사상에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누구를 중심삼고 이것을 이루려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루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들이 되고, 한 몸이 되고, 하나의 신랑과 신부를 이루어 하나의 가정을 이루자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우리 인간 앞에 최고의 가치로 주어졌던 아들의 자리와 동등한 자리, 그리고 창조의 위업과 창조한 그 이후의 기쁨까지도 느낄 수 있는 가정적인 기원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간 것입니다. (52-322)
기독교의 한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 아버지와 한 몸이 되었지만 신랑과 신부의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나라와 유대교가 당시에 예수님과 하나된 자리에서 예수님이 신부를 맞이할 수 있게 했더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상대가 되어 가지고 창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을 가졌을 것인데 그것을 못 이루고 갔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중심한 아들딸이 나와서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새로운 세계가 되었더라면, 이 지구성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늘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나라의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유대교인들이 믿지 못해서 예수님이 죽었지, 그들이 믿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때 이스라엘나라와 유대교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이 이상하셨던 신랑과 신부를 모시고 새로운 출발을 봤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이 흩어지거나 2차대전 중에 6백만 명의 유대교인들이 히틀러한테 학살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이래 처음 나왔던 하나님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자를 쳐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이상의 큰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이 왔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 믿고 있는 기독교를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렇게 나가다가는 이스라엘 민족같이 헤쳐 버리는 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다시 오시는 주님이 이러한 사명을 갖고 오시기 때문에 다시 추방하는 일이 없게끔 단결해 기반을 닦는 운동을 하지 않고는 앞으로 이 세계의 전망은 비참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와서 신부를 맞아 혼인잔치 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 잔치입니다. 인류의 시조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는 타락된 거짓부모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모델로 생각하였던 선한 참부모는 안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했던 것을 끝날에 와서 다시 갖다 맞추어야 됩니다. 그 참부모가 나와서 다시 낳아 주고 다시 접붙여 주는 일을 하지 않고는 세계의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52-323)
새로운 사랑의 이상세계 건설을 위해 출현한 통일교회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무슨 사명을 갖고 오시느냐? 타락하지 않고 선한 부모의 자리에서 완성을 보아야 할 참부모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받는 참부모의 가정에서부터 인류가 다시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재림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들이 이 땅에서 살다가 가정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에서 믿듯이 그저 잘 믿어서 어머니는 천당으로 가고 아버지는 지옥으로 따로따로 헤어져 가는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천국에는 부모로부터 자녀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들어가고, 종족이 들어가고, 나라가 들어가고, 세계가 다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부모를 중심삼은 세계적인 가정이 앞으로 생겨나고 거기서부터 인연 되어 인류의 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사랑의 이상을 중심삼은 새로운 문화와 전통이 이 지구성에 현현하게 될 때 오늘날 이같이 복잡하고 죄악된 세계가 아닌 새로운 지상천국이 됩니다. 그러려면 여기서 여러분이 어떻게 수속을 밟아 넘어가느냐 하는 것을 세밀히 모르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내용을 가르쳐 주는 것을 통일교회의 사명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52-324)
<훈독 소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당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셨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여 모든 것을 상속받아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마음 깊숙한 곳에 두고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계신답니다.
또한 인간에게 당신의 모든 창조능력까지 부여했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발명도 할 수 있지만 그 중에 자녀를 창조하는 것이 최고의 축복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길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때문에 자녀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어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사랑으로 일체될 수 있게 축복하심을 이루어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다짐하게 됩니다.
&&&& 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6일 원문 &&&&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
- 미국 7대도시 공개 강연회 말씀 -
날짜 : 1972. 2. 3(목)
장소 : 미국 링컨센터
하나님은 실존하는가
오늘 저녁 여러분 앞에 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입니다.
여기 뉴욕에 사는 분들은 “하나님!” 하게 되면 “하나님은 죽었다.” 하는 말을 연상하리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있는데 하나님을 죽었다고 한다면 그 이상으로 죄가 되는 일이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없는데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말씀드릴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라는 제목을 두고 보더라도 여기에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하나의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고,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하나님이 합해 가지고 이루어지는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절대자인 하나님이 혼자 있다면 그 하나님이 있는 자리는 행복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미국의 대통령이 혼자 있으면서 기뻐하고, 웃고 그런다면 그 대통령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혼자 좋아하고 기뻐한다면 그 하나님도 정상적인 하나님이 아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이 아무도 없는 데서 그러면 이상하지만, 조그만 상대 하나를 보고 “하하하” 웃으면서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을 보고 웃는다고 하더라도 그 웃는 하나님을 대해서 미쳤다고 한다면 미쳤다고 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미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존재가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 앞에 먼저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불행이니 비참이니 하는 것들은 상대가 없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대를 좋아한다면 이 세계에서 대관절 어떠한 존재를 좋아할 것 같습니까? 감각이 없는 광물이요? 아닙니다. 식물도 아닙니다. 식물보다는 동물이 조금 관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될 수 있는 중심존재가 무엇이냐 하고 묻게 되면, 그것은 유치원생이라도 사람을 지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면, 사람은 이 피조물 가운데서 최대의 걸작품이라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상을 찾아간다면 인간을 내놓고는 찾아갈 대상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오늘날 이 복잡한 정세 속에서 금후의 미국의 운명이라든가 혹은 세계의 운명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이 있으면 좋겠느냐, 없으면 좋겠느냐 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절대자가 있어서 참은 참으로, 악은 악으로 처단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분이 없다면 금후의 세계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보다도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52-314)
이성성상의 하나님
이 우주는 결과세계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힘이 있기 위해서는 힘이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힘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 것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작용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힘이 있기 전에 작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작용을 하려면 거기에는 힘이 있기 전에 선행의 조건으로 주체와 대상이 절대 필요합니다. 이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는 데서 작용이 벌어지고, 작용이 벌어짐으로써 힘이 존속하는 것입니다.
힘이 있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체와 대상입니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다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들이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서로가 상대적인 내용에 맞아야지 그렇지 않고는 작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이 작용하게 될 때는 주체의 목적과 대상의 목적이 합할 수 있는 기점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작용을 안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일로 외부에 나간다고 할 때 자신이 손해보기 위해서 나가는 놀음은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뉴욕의 타임즈스퀘어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집에서 나올 때 “나, 오늘 일전이라도 손해보기 위해 집에서 떠난다.” 하고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올 때는 반드시 자기에게 이익될 수 있는 것을 바라고 자기에게 플러스될 수 있는 무엇을 바라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친구끼리 만나는 데 있어서도, 혹은 좋아하는 데 있어서도 서로가 마이너스될 수 있는 자리, 지금보다도 나빠질 수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 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둘이서 서로서로 합하는 데는 지금보다도 나을 수 있는 서로의 목적을 바라보기 때문에 거기에는 작용이 벌어지고 하나로 합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볼 때 힘이 작용하는 데는 이중목적, 즉 주체와 대상간에 서로서로의 목적을 플러스시키는 그러한 내용이 있지 않고는 하나로 합하지도 않고 작용도 안 한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원자면 원자를 두고 볼 때, 원자에는 양자를 중심삼고 전자가 돌고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두 목적을 결합할 수 있는 자리, 주고받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원자형을 형성합니다. 그러니까 전자의 목적과 양자의 목적을 겸한 목적을 중심삼고 합해 있습니다. 크게 보면, 하나님도 존재자입니다. 하나님도 존재한다면 실존체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역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되어 있어서 완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이중의 목적성을 중심삼고 결합된 자리에 서지 않고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도 결국은 주체성과 대상성이 합해서 하나의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는데 1남 1녀더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귀납적으로 추구하면 하나님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을 합한 분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혼자 있어서는 안되겠기 때문에, 대상을 필요로 해서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하나의 남자고 하나의 여자입니다. 우리 사람을 두고 봐도 사람에게는 마음과 몸이 있습니다. 이 마음과 몸이 주고받습니다. 이것이 만일 틀어지게 될 때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한쪽이 기울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합해서 올라가게 되면 기뻐집니다. 이것이 완전히 하나된 남자가 있다면 그는 완전한 남자일 것입니다.
만일 절대자가 있다면 어떠한 남자를 요구할 것이냐? 그러한 남자를 요구할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하나된 여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여자를 만나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대자의 위신을 두고 보더라도 사람을 만나는 데는 최고의 남자, 최고의 여자를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이 찾기를 바라고 하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사람을 하늘도 요구하는 것이요, 우리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보게 되면 아무래도 원인적인 존재가 아닌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존재하고 안 하고를 자유로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원인이 못 되니까 결과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적인 존재도 원인이 절대적이면 절대적인 상대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52-316)
인체의 신비를 통해서 본 신의 실존성
여러분!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잠깐 말해 보자구요. 우리가 쭉 인류의 시조를 찾아 올라가면 최초의 시조가 나올 것입니다. 그 인류의 시조는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 최초의 인간이 땅에 태어나면서 태양이 있어서 눈으로 봐야 된다는 것을 그 자체가 알고 준비해 나왔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가 모르고 나왔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 땅에 나와서 눈이 태양을 볼 수 있게 된 것을 그 태어난 자신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벌써 천체에 햇빛이 있어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눈이 그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을 보면 깜박거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열을 받아서 눈의 수분이 증발함으로 말미암아 축여 줘야 할 것을 알기 때문에 깜박거리는 것입니다. 또, 눈썹은 먼지가 있으니까 이 먼지를 방지해야 할 것을 알고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은 박물학적, 천문학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썹을 보라구요! 눈썹은 벌써 땀을 흘릴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알고 눈으로 이물질이 들어가면 큰일나겠기 때문에 방파제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서서 다닐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또, 귀를 보라구요! 이것은 벌써 상대의 방향으로 음파를 듣게끔 다 알고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코를 보라구요! 코가 왜 요렇게 되어 있느냐 이것입니다. 입에 땀이 들어가면 안되겠기 때문에 전부 다 입가에 이렇게 방파제를 만들어 놓았다구요. 또, 코안의 코털을 봐요! 전부가 알고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거 자기의 멋대로 그렇게 생겨날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우리의 인체 전체를 보면 신비의 왕궁같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냥 그대로 될 수 없다구요.
인간이 태어날 때 그 태어난 자기 자신들은 몰랐지만 그것을 안 분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날 것을 모르고 태어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52-318)
하나님과의 관계로 본 인간의 본연의 가치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다면 우리 인간을 어떠한 자리에 두고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해서 지었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를 알아봅시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다면, 지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지어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 자체에게도 목적이 있습니다. 지어진 사람의 목적과 지은 하나님의 목적이 따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필시, 어떤 일치점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도 바랄 것이고 우리 인간도 바랄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통령이 있다고 합시다. 여기에 온 사람들 가운데 그 대통령보다도 낮아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최고로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분이 있으면 그분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 높은 사람을 중심삼고 하나되었다고 해도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으면 그 분과도 하나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나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그러한 생각을 다 갖고 있습니다. 만약에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여러분도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싶겠습니까, 안 맺고 싶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속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점령하지 못할 때는 안심을 못 합니다. 하나님을 점령하고 하나님의 속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까지도 점령하고 난다면 만사는 다 오케이 입니다. 그분의 사랑만 점령하는 날에는 그분의 것은 내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양심에 우리를 그곳까지 내몰아 주는 작용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럴 수 있는 본래의 인간의 가치적인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어떤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겠습니까? 또, 우리 인간은 어떤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겠습니까? 이와 같이 추구해 볼 때 그 자리는 부자관계, 즉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한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아버지고 아들이면 상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을 두고 볼 때, 그 높은 아버지의 자리에 나도 한번 가고 싶다고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아버지가 안된다고 하면 큰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염려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 즉 내적인 자리에 들어오고 우리 인간 자신은 바깥, 즉 하나님의 몸과 같은 그 자리까지 우리에게 허락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등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보게 될 때, 그 아버지가 귀하다면 하나밖에 없는 그 아버지를 어디에 갖다 건사하겠습니까? 저 먼 데다 두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와 더불어, 나만이 만나고 나만이 좋아할 수 있는 자리에 갖다 두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어디 딴 데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알 수 있는 마음속에다 두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같은 자리에 두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서 사랑받을 수 있게끔 해 주고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인간의 욕망은 또 무엇이냐?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능력을 가진 분이니 그 창조의 능력까지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어 놓고 보니 얼마나 귀여웠는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것까지도, 그러한 묘미까지도 우리 인간이 느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즉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받으려면 하나님은 한 분 가운데 완전한 남성과 여성의 모습으로 계시므로 그것이 갈라져 태어난 완전한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상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상대가 됨으로 말미암아 창조적인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부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창조의 능력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자녀입니다. 그 자녀를 낳음으로 하나님이 자녀 된 인간을 창조하시고 느끼셨던 기쁨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 자녀에 대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제일 좋은 것을 우리 인간 앞에 다 퍼부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어 행복과 만족 가운데 평화스러운 에덴에서 살게끔 우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히 상대되는 입장, 갈라질래야 갈라질 수 없는 행복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었습니다. (52-319)
종교의 사명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물은 하나의 목적을 가져야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상대의 입장에 선 인간이 이 땅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었으니까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텐데, 우리를 보게 된다면 이율배반 된 반대적인 목적의 또 하나의 길에 서 있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곧, 우리 인간은 선을 지향하는 양심과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는 사심의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사람에게 있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보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양심작용이 내적인 플러스라고 한다면 사심은 또 다른 하나의 플러스입니다. 그러니까 반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귀한 위업으로 주셨던 사랑의 이념, 절대적인 가치의 이념을 상실해 버리고 오늘날 우리 자체는 반대적인 두 현상세계에서 신음하고 사는 비참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장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인간을 그냥 두지 않고 역사과정을 통하여 재생시키는 운동을 해야 됩니다. 즉, 수리공장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종교입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혹은 민족배경이 다른 기준에 따라서 수많은 종교들을 세워 가지고 규합해 나오는 것입니다. 종교가 바라는 목적은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목적도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구하려는 종교가 아니고는 오래 남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종교 지도자들은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세계주의자요, 하늘을 중심삼은 세계적인 운동을 제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4대 성인이라고 해서 네 사람을 꼽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석가모니, 공자, 마호메트입니다.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꼽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인이지 성인은 못 됩니다. 지식을 가지고는 생명을 구하지 못합니다. 하늘만이 생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대 성인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전부 다 세계적인 대종교의 종주(宗主)들이 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성인을 존중하면서 하늘은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52-321)
세계적인 중심종교는 기독교
그러면 이 수리공장과 같은 사명을 종교가 하는데, 하나님이 절대자라면 절대자가 제일 좋아하는 종교가 어떠한 종교냐 하는 것을 이 4대 종교들 가운데서 우리는 골라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유교를 보면 하나님에 대해 확실한 것을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선을 행하면 하늘이 복을 주고 악을 행하면 화를 준다는 정도밖에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불교를 봐도 법적인 신은 인정하지만 인격적인 신은 모르고 있습니다. 또, 회교를 보면, 이것은 기독교를 이어받은 중간적인 종교입니다. 이것은 코란경을 받든가, 아니면 칼을 받으라는 무력적인 종교입니다. 그런 것은 하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장한 내용이 다릅니다. 그는 나타나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인류 역사상에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누구를 중심삼고 이것을 이루려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루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들이 되고, 한 몸이 되고, 하나의 신랑과 신부를 이루어 하나의 가정을 이루자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우리 인간 앞에 최고의 가치로 주어졌던 아들의 자리와 동등한 자리, 그리고 창조의 위업과 창조한 그 이후의 기쁨까지도 느낄 수 있는 가정적인 기원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간 것입니다. (52-322)
기독교의 한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 아버지와 한 몸이 되었지만 신랑과 신부의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나라와 유대교가 당시에 예수님과 하나된 자리에서 예수님이 신부를 맞이할 수 있게 했더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상대가 되어 가지고 창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을 가졌을 것인데 그것을 못 이루고 갔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중심한 아들딸이 나와서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새로운 세계가 되었더라면, 이 지구성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늘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나라의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유대교인들이 믿지 못해서 예수님이 죽었지, 그들이 믿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때 이스라엘나라와 유대교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이 이상하셨던 신랑과 신부를 모시고 새로운 출발을 봤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이 흩어지거나 2차대전 중에 6백만 명의 유대교인들이 히틀러한테 학살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이래 처음 나왔던 하나님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자를 쳐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이상의 큰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이 왔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 믿고 있는 기독교를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렇게 나가다가는 이스라엘 민족같이 헤쳐 버리는 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다시 오시는 주님이 이러한 사명을 갖고 오시기 때문에 다시 추방하는 일이 없게끔 단결해 기반을 닦는 운동을 하지 않고는 앞으로 이 세계의 전망은 비참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와서 신부를 맞아 혼인잔치 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 잔치입니다. 인류의 시조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는 타락된 거짓부모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모델로 생각하였던 선한 참부모는 안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했던 것을 끝날에 와서 다시 갖다 맞추어야 됩니다. 그 참부모가 나와서 다시 낳아 주고 다시 접붙여 주는 일을 하지 않고는 세계의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52-323)
새로운 사랑의 이상세계 건설을 위해 출현한 통일교회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무슨 사명을 갖고 오시느냐? 타락하지 않고 선한 부모의 자리에서 완성을 보아야 할 참부모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받는 참부모의 가정에서부터 인류가 다시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재림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들이 이 땅에서 살다가 가정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에서 믿듯이 그저 잘 믿어서 어머니는 천당으로 가고 아버지는 지옥으로 따로따로 헤어져 가는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천국에는 부모로부터 자녀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들어가고, 종족이 들어가고, 나라가 들어가고, 세계가 다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부모를 중심삼은 세계적인 가정이 앞으로 생겨나고 거기서부터 인연 되어 인류의 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사랑의 이상을 중심삼은 새로운 문화와 전통이 이 지구성에 현현하게 될 때 오늘날 이같이 복잡하고 죄악된 세계가 아닌 새로운 지상천국이 됩니다. 그러려면 여기서 여러분이 어떻게 수속을 밟아 넘어가느냐 하는 것을 세밀히 모르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내용을 가르쳐 주는 것을 통일교회의 사명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5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