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천일국 훈독경 제2권 제 17일)

훈독왕 | 20190506152908

천일국 훈독경 제2권 제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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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 (훈독본)
날짜 : 1965. 12. 7(화)
장소 : 한국 춘성교회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입니다. 


인간의 창조와 타락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엿새 동안에 지은 피조물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과 소망의 대상으로 세우기 위해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이 성장하여 소망을 성취하고 행복을 노래하는 평화의 가정을 만들어서 함께 살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창조해 놓으시고 기뻐하셨지만, 그들이 타락한 연고로 애절한 심정과 간곡한 심정을 지니시고 하나의 승리를 완결을 지을 수 있는 그때를 소망해 나오셨습니다. 아담 해와를 위해 지어 놓으신 피조세계를 바라보시는 것도 좋았거니와 만물을 주관할 아담 해와의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더 좋아하시던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소망과 행복의 터전이 될 수 있었던 아담 해와였고, 만유세계에 있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안될 중심존재인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해서는 안될 아담 해와였고, 슬픈 날이 있어서도 안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러나 한 날의 실수로 말미암아 타락이라는 명사가 붙여졌고, 이로 인해 슬픔이라는 명사가 초래됐고, 하나님이 소망하시던 세계에 있어서는 안될 흑암의 권세가 출현했습니다. 이것은 원통하고 비통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모든 심정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하나님의 전체 소망을 아는 자리에서 타락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것을 완비하고 완성된 자리에서, 전부 다 깨달은 자리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면 하나님의 창조이념, 즉 하나님의 창조위업은 완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전체 내용을 다 상속받은 가치적인 존재로서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었던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자라던 성장과정에서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에 완성된 자리에서 타락했다면 우리가 완성된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천국에 가서도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타락한 때는 미완성의 단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창조위업과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일념 속에서 살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리하여 형성된 세계가 오늘날까지 타락된 후손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요, 이것으로 인해 이 세계가 악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바라셨던 소망은 소망대로 남아져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이제까지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이 슬프신 분인 줄 몰랐고 인간 지으심을 탄식한 하나님이신 줄 절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까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가 인간의 실수로 말미암아 슬픔의 자리에 세워지게 된 것을 몰랐습니다. 


소망의 천국

천국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지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인간을 중심삼고 천국이념을 세우셨으나 인간이 깨어져 나갔기 때문에 천국이념은 이념대로 남아졌고 천국은 내용이 없는 천국, 즉 천국이라는 명사만이 남아지게 되어 하나님은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노래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영광의 하나님이 못 되신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으로 인해 이 땅이 사탄권 내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사탄권세는 천국의 문까지 밀어젖히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휩쓸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무엇을 소망하셨느냐? 하나님의 소망은 아담 해와를 타락하기 전 본연의 모습으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그 복귀의 한 날을 바라보시며 지금까지 나오셨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물에 빠지기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요, 병이 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병이 나기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와서 해야 할 일은 구주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이 세우고자 하는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이냐? 타락 전 본연의 세계요, 하나님이 이상 가운데서 추구하고 그리시던 세계, 완성의 뜻을 이루시어 천하를 그 품에 품고 좋아하실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중에 사모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소망의 천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제일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냐?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두 죽은 자식들이 되어 버렸고, 사탄의 죄악 된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 인간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사랑하며 붙들고 살 혈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인류를 복귀시키기 위하여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와 중심인물

구약시대는 무슨 시대였느냐? 종의 시대였습니다. 종의 종 자리에 있던 인간을 종의 자리로 복귀시켜 나온 시대였습니다. 

 

신약시대는 종을 양자로 복귀시키신 시대였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을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서 양자 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양자는 혈통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양자의 자리에 세우신 다음에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이 와서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듯이 접을 붙여서 양자의 인연을 해방시켜 직계 자녀의 인연을 맺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죽지 않고 이루어야 할 소망이었습니다. 


종의 종에서 종, 종에서 양자, 양자에서 직계의 아들딸로 복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념은 지상천국을 완성하는 동시에 천상천국을 완성시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심정적인 발판을 세우고 그것을 천상까지 닦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본래의 타락하지 않은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지상천국의 이념과 천상천국의 이념을 다 가르쳐 주지 못하고 영적인 구원만을 성사시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양자의 입장에서 하나님한테 기도하던 독생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뜻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은 2천 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소원의 한 날을 찾아왔고 지상에서부터 천상으로 통할 수 있는 지상의 행로를 개척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낙원에 갔습니다. 낙원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합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왜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를 하느냐? 책임완수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예수님은 참부모로 왔어야 했으나 만민에 대해서 참부모의 인연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상재림을 해야 됩니다. 천상재림이 아닌 지상재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왔던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종의 입장에 세워 가지고 양자의 도리와 직계 자녀의 자리를 찾아 세워 예수님과 하나되게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하여 “이제 너희가 낳은 아들딸들은 타락한 세계와 상관없다.”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세우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못 하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지성과 정성을 다하여 당신의 모든 소망을 걸고 지으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할 존재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본연의 아담을 대신할 후아담격으로 왔던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타락과 상관없이 복귀된 아담으로 왔던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후아담이었고, 다시 오시는 재림주님은 3차 아담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과 참부모


어린양 잔치가 무엇입니까? 본래,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너희는 선남선녀요, 천지 대주재의 직계 아들딸로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핏줄기가 이 땅에 생겨나니 기쁘도다.” 하시며 주시는 축복을 받는 것, 즉 하나님의 모든 대유업을 상속받고 성혼의 축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 인간을 종의 종에서 종, 종에서 양자를 거쳐 직계의 아들딸로 복귀시켜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키고 하늘의 승리권을 찾아 승리의 왕자로서 하나님의 성혼 축복을 받는 것이 어린양 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언제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시대를 한꺼번에 복귀시키기를 원하셨지만 그것을 책임질 수 있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복귀의 책임과 가정적인 복귀의 책임은 야곱이 졌고, 민족적인 복귀의 책임은 모세가 졌고, 국가적인 복귀의 책임과 세계적인 복귀의 책임은 예수님이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전체적인 책임을 맡기려고 하셨던 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망과 원통함

예수님은 죽으러 왔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만일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구주가 못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찌하여 예수님을 비참하게 죽여 가지고 구주로 만드셨겠습니까? 살아 있을 때 군왕으로 만드시려고 했습니다. 구주의 과정을 다 지내 가지고 만왕의 왕으로 만드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 만인류의 조상으로 왔던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홀로 보내지 않고 같이 죽었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제자들도 부활했을 것입니다. 만일, 사도들이 부활했다면 기독교는 피 흘리는 종교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영적인 구원만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래 사명은 영육 아울러 구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완결짓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와야 합니다. 그래서 재림이라는 명사는 억울하고 분한 명사입니다. 

실체천국을 이루어야

하나님이 지상천국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뜻이 연장됐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2천 년간 영적으로나마 구원섭리를 통하여 말세의 한 때를 대비해서 나오고 있나니, 오늘 이 때가 바로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는 무엇이 올 것이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천국은 “네 마음에 있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천국만 가지고 되겠느냐? “천국” 하면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인데 나라가 성립되려면 주권이 있어야 되고 백성과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그 뜻은 우선 네 마음에서부터 소망의 천국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소망천국의 내용을 품고 실천천국을 이루기 위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소망 가운데서 천국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에 사도들도 소망의 천국을 품고 예수님을 통하여 실체천국을 이루어야 할 과정이 남아 있었던 연고로 말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원성사의 한 날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4천 년간 준비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 흘리던 복귀의 길을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에 불벼락을 내려 쓸어버려도 시원찮으셨을 것이었지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하며 간곡하게 기도했던 예수님의 기도의 조건을 생각하셨기에 그 민족을 쓸어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어 가면서까지 애절하고 간곡한 기도를 드린 것은 왜 그랬느냐?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지상천국의 이념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정성들여 놓으신 4천 년 역사의 공적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런 역사적인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기도한 예수님의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또 다시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오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죽고 난 후 기독교는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과 종족, 민족, 국가를 다시 세워야 되었던 비참한 역사를 이루어 나왔습니다.


제1이스라엘이 준비한 4천 년 역사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서 한 주권과 국가를 이루어 그것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복귀의 천국을 이루실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깨어졌기 때문에 제2차적으로 개인적인 기독교, 가정적인 기독교, 종족·민족·국가적인 기독교권을 거쳐서 지금까지 세계적인 기독교권으로 복귀시켜 나오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계적 종말시대에 있어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무슨 생각을 가져야 되느냐?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아를 고대해야 됩니다. 주님이 오면 모두 천국에 데려갈 줄 아십니까? 천국에는 그냥은 못 데려갑니다. 천국을 이루어 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은 천국이념을 실현하시던 과정에 있어서 천번 만번 저버리실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이었지만 참고 나오셨습니다. 한 동네를 찾아갔다가 박대를 당하신 하나님이요, 소망의 한을 풀고자 개인의 어려운 투쟁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바라시다가 개인으로부터 배척받으신 하나님이요, 가정을 찾아 나오셨다가 배척받으신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민족과 이스라엘나라를 찾아오셨다가 배척받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로마 앞에 있어서 배척받고 피 흘려서 그 피값으로 섭리해 나오신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2천 년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일국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무대를 갖춰서 오늘날 전세계를 민주세계로 만들 수 있는 터전인 기독교권을 만들어 놓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독교권은 그 방향을 알지 못하고 최후의 절벽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지상천국을 이루려고 했던 예수님의 한을 풀어주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피 흘린 한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랑 신부의 자리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고자 하셨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예수님이 찾지 못했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그 개인을 찾지 못하면 한 가정을 찾지 못하고, 그 가정을 찾지 못하면 한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하고,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하면 한 신랑 신부를 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통일의 용사들은 가야할 복귀의 노정

하나님이 복귀의 길을 더듬어서 개인과 가정을 찾아오셨지만 그 개인과 가정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또 다시 세계를 향하여 가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으시니, 나도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험준하다고 마다할 수 없고, 그 길에 죽음이 있다고 마다할 수 없고, 슬픈 곡절이 있다고 해서 마다할 수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가신 길을 나도 가야 되겠으니 아버지가 어려우면 나도 어렵기를 바라고, 아버지가 슬프면 나도 슬프기를 바라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의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이 조그마한 삼천리 반도를 기반으로 하여 이 민족 앞에 이색적인 운동을 시작해 가지고 세계에 새로운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우리의 이념권 내에 흡수되게 새로운 깃발을 들고 나서자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설 때마다 이 스승은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이 뜻이 정녕 아버지가 세우신 뜻임을 알게 될 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내 아버지요, 내 사정이 되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세우신 전통을 상속받고 그 아버지의 역사와 심정에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가 고통받으면 나도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잠을 자서는 안되고 쉬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가운데는 안식의 한 날을 노래해 온 교단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통일교인들은 쉬지 말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갈보리 산상에서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서도 기도하며 전도한 것처럼 통일교회 여러분은 사망의 어둠이 휩쓰는 천지 가운데서도 전도해야 합니다. 지옥에 가더라도 그 속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을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통일신도들이 지녀야 할 사상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애쓰신 수고에 비하면 우리가 한 곳에 한 자녀를 세우기 위해서 흘린 눈물과 피와 땀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6천 년의 한을 풀기 위해서 복귀의 역사를 재창조의 섭리로서 이끄시며 한 많은 곡절의 노정을 더듬어 오신 것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가고 또 가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선생님을 사랑하고 선생님을 위하는 마음은 좋습니다. 그 정성은 고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민족 앞에 주지 못해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죽어 가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선생님의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선생님을 위해 꽁보리밥을 지어 가지고 오는데 그런 정성이 있거든 삼천만을 위해서, 온 인류를 위해서, 하늘땅 전체를 위해서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여러분은 실제적인 환경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하늘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신도들이 지녀야 할 사상이요, 통일역사가 지금까지 남겨 놓은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 역사를 책임지지 못하고 소모만 시키는 사람은 하늘에 역적이 되는 것이요, 이 역사를 빛내는 사람은 하늘에 충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이루었다는 웃음소리가 삼천리 반도와 온 지구상에 드높이 울려 퍼질 그 날을 위해서 행진하고 또 투쟁해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쉴 새가 없습니다. 가도 또 가고, 자다가도 눈만 뜨면 깜짝 놀라 일어나는 그런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밥을 먹다가도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는 통일신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소망하셨던 천국을 이루어 드리고 예수님과 성신이 못 다 이룬 한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물의 과정을 거쳐나간 천천만 성도들이 지상천국을 못 이룬 복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해원성사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내용을 알고 이 엄청난 사명을 짊어진 우리는 쉴 새가 없습니다. 다리가 부러지더라도, 죽더라도 전력을 다하여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선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눈물과 땀과 피의 가치를 인류와 땅과 하늘이 알아줍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발판을 타고 오십니다. 개인적인 제물시대, 가정적인 제물시대, 종족적인 제물시대, 민족적인 제물시대, 세계적인 제물시대를 거쳐서 섭리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통일신도들은 개인적인 제물시대를 거치고 민족적인 제물의 책임을 다하여 세계적인 제물의 길로 나가야 됩니다. 

아직도 가야 할 복귀의 길

역사는 흘러가도 우리의 책임은 흘러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식하더라도 우리는 안식할 수 없습니다. 필승의 한 날을 세워 놓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후손들 앞에 참소를 받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후손과 민족과 세계를 걸어 놓고 기도하고 정성들여야 합니다. 


직도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복귀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그 앞 단계의 기준까지 닦아 놓고서야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법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죽는 것이 하늘의 필연적인 법도입니다. 우리는 최후에 하늘을 빛내어 민족과 세계가 우리를 따라와서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세계적인 골고다, 천주적인 골고다를 향해서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그 복귀의 노정을 거쳐서 천국을 이루시는 것이므로 오늘도 가고 내일도 또 가야 합니다. 이 길을 가는 데에는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가야 합니다. 부모가 반대하고 형제가 반대하고 동기가 반대하더라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는 한 계속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억천만세가 걸리더라도 가야 하고, 우리의 후손 수천만 대를 통해서라도 이 길은 가야 합니다. (15권 323-344)

 

천일국 훈독경 제2권 제 17일 원문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

 날짜 : 1965. 12. 7(화)
 장소 : 한국 춘성교회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입니다. 복귀라는 말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악의 세계가 되었으니, 이 악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타락하지 않은 선한 본연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즉, 타락 전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와 타락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엿새 동안에 지은 피조물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과 소망의 대상으로 세우기 위해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이 성장하여 소망을 성취하고 행복을 노래하는 평화의 가정을 만들어서 함께 살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창조해 놓으시고 기뻐하셨지만, 그들이 타락한 연고로 애절한 심정과 간곡한 심정을 지니시고 하나의 승리를 완결을 수 있는 그때를 소망해 나오셨습니다. 아담 해와를 위해 지어 놓으신 피조세계를 바라보시는 것도 좋았거니와 만물을 주관할 아담 해와의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더 좋아하시던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소망과 행복의 터전이 될 수 있었던 아담 해와였고, 만유세계에 있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안될 중심존재인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해서는 안될 아담 해와였고, 슬픈 날이 있어서도 안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러나 한 날의 실수로 말미암아 타락이라는 명사가 붙여졌고, 이로 인해 슬픔이라는 명사가 초래됐고, 하나님이 소망하시던 세계에 있어서는 안될 흑암의 권세가 출현했습니다. 이것은 원통하고 비통한 사실입니다. 
인류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슬픔을 당하는 것은 마땅하나 인류시조를 바라보고 소망의 마음을 갖고 나오시던 하나님이 이들로 인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비통한 사실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슬퍼하는 자리에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자리에 서시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하늘땅에 있어서 결코 있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인류시조의 실수로 말미암아 벌어졌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모든 심정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하나님의 전체 소망을 아는 자리에서 타락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것을 완비하고 완성된 자리에서, 전부 다 깨달은 자리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면 하나님의 창조이념, 즉 하나님의 창조위업은 완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전체 내용을 다 상속받은 가치적인 존재로서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었던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자라던 성장과정에서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담 해와는 완성된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완성을 바라고 나가던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만일에 완성된 자리에서 타락했다면 우리가 완성된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천국에 가서도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타락한 때는 미완성의 단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창조위업과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일념 속에서 살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리하여 형성된 세계가 오늘날까지 타락된 후손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요, 이것으로 인해 이 세계가 악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바라셨던 소망은 소망대로 남아져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그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큰 것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슬픔도 크게 되고, 그 하나님의 소망이 지극하면 지극할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내적인 고충이 크게 초래되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이 슬프신 분인 줄 몰랐고 인간 지으심을 탄식한 하나님이신 줄 절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까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가 인간의 실수로 말미암아 슬픔의 자리에 세워지게 된 것을 몰랐습니다. (15-321)

소망의 천국

천국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지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인간을 중심삼고 천국이념을 세우셨으나 인간이 깨어져 나갔기 때문에 천국이념은 이념대로 남아졌고 천국은 내용이 없는 천국, 즉 천국이라는 명사만이 남아지게 되어 하나님은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노래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영광의 하나님이 못 되신 것입니다. 천국은 지금까지 비어 있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타락한 아담으로 인해 이 땅이 사탄권 내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사탄권세는 천국의 문까지 밀어젖히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휩쓸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무엇을 소망하셨느냐? 하나님의 소망은 아담 해와를 타락하기 전 본연의 모습으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그 복귀의 한 날을 바라보시며 지금까지 나오셨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물에 빠지기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요, 병이 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병이 나기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와서 해야 할 일은 구주가 되는 것입니다. 구주가 된 후에는 형님도 될 수 있고, 오빠도 될 수 있고, 우리의 그 무엇이 다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세계가 타락되지 않고 하나님이 이상하신 본연의 세계가 되었더라면 구주로서의 예수님이 필요가 없을 것인데 아직도 이 땅이 죄악 세계에 빠져 신음하고 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주로서가 아니라 형이요, 오빠로서 환영받을 수 있는 세계가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이 세우고자 하는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이냐? 타락 전 본연의 세계요, 하나님이 이상 가운데서 추구하고 그리시던 세계, 완성의 뜻을 이루시어 천하를 그 품에 품고 좋아하실 수 있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왕자요, 공주로 태어났던 아담 해와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져 나갔으니 다시 그 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본연의 욕망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내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소망의 천국을 잃어버린 하나님은 인류에게 소망의 천국을 찾아주시기 위해서 오늘날까지 수고해 나오셨으며, 인류는 오랜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면서 소망의 천국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중에 사모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소망의 천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제일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냐?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두 죽은 자식들이 되어 버렸고, 사탄의 죄악 된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 인간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사랑하며 붙들고 살 혈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인류를 복귀시키기 위하여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그렇게 복귀시키시는 데는 어디까지 복귀시키셔야 되느냐? 직계 아들딸의 자리까지 복귀시키셔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종의 종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종의 종이 무엇이냐? 종의 종은 주인을 가질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있으되 종의 종은 주인이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종의 종 자리에 있는 인간들을 구하시기 위해서 사탄세계에서 종의 종을 빼앗아 오시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해 있는 종의 종을 빼앗아다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하늘 편의 종의 종으로 만들어서 복귀하시는 것입니다. (15-323)

하나님의 구원섭리와 중심인물

구약시대는 무슨 시대였느냐? 종의 시대였습니다. 종의 종 자리에 있던 인간을 종의 자리로 복귀시켜 나온 시대였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도 종이었지 아들은 못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종의 종을 세워 충성의 도리를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역사적인 세계인류를 끌어다가 규합시켜 가지고 세계적인 악한 무대를 하늘 편으로 점령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전시켜 나오셨던 것입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종의 종으로부터 종의 위치로 복귀시키시고 종의 위치에서 양자의 자리로 복귀시키시면서 섭리해 오신 것입니다. 
신약시대는 종을 양자로 복귀시키신 시대였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을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서 양자 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양자는 혈통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양자의 자리에 세우신 다음에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이 와서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듯이 접을 붙여서 양자의 인연을 해방시켜 직계 자녀의 인연을 맺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죽지 않고 이루어야 할 소망이었습니다. 
종의 종에서 종, 종에서 양자, 양자에서 직계의 아들딸로 복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념은 지상천국을 완성하는 동시에 천상천국을 완성시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심정적인 발판을 세우고 그것을 천상까지 닦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본래의 타락하지 않은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지상천국의 이념과 천상천국의 이념을 다 가르쳐 주지 못하고 영적인 구원만을 성사시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양자의 입장에서 하나님한테 기도하던 독생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뜻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은 2천 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소원의 한 날을 찾아왔고 지상에서부터 천상으로 통할 수 있는 지상의 행로를 개척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낙원에 갔습니다. 낙원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합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왜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를 하느냐? 책임완수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예수님은 참부모로 왔어야 했으나 만민에 대해서 참부모의 인연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상재림을 해야 됩니다. 천상재림이 아닌 지상재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왔던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종의 입장에 세워 가지고 양자의 도리와 직계 자녀의 자리를 찾아 세워 예수님과 하나되게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하여 “이제 너희가 낳은 아들딸들은 타락한 세계와 상관없다.”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세우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못 하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지성과 정성을 다하여 당신의 모든 소망을 걸고 지으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할 존재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본연의 아담을 대신할 후아담격으로 왔던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타락과 상관없이 복귀된 아담으로 왔던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후아담이었고, 다시 오시는 재림주님은 3차 아담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오셔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소망의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이루고 천상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노정에서 섭리해 나오신 전반적인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은 복귀도상에 있어서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찾아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혈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악한 후손들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고 타락 이전의 자리로 올라가기를 소망하시며 내일을 희망삼고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믿고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15-325)

예수님과 참부모

하나님은 4천 년간의 수고를 통해 비로소 타락하지 않은 복귀된 소망의 아담형인 예수님을 찾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의 인간들 앞에 있어서 참된 조상이었습니다. 만약, 인간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했더라면 그들이 인류의 참조상이 되었을 것인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창조이상으로서 세우고자 하셨던 인류의 참된 조상의 자리를 아담 해와는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제아무리 잘나고 제아무리 천하를 호령하여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은 너나할것없이 타락한 조상의 혈통을 받고 태어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원통한 사실입니다. 타락한 시조를 가진 인류는 지옥으로 맹주(猛走)하고 있나니, 여기에 하나의 표준을 세워 놓고 참자녀를 품어 줄 수 있는 본연의 부모를 찾아 헤매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4천 년간의 복귀노정을 통해 찾아 나오신 것이 무엇이냐?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본연의 자리를 찾아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란 무엇이냐? 메시아는 어디에서부터 구주가 되어야 하느냐? 인류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참부모의 자리를 잃어버렸으니, 먼저 참부모로서의 구주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양 잔치가 무엇입니까? 본래,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너희는 선남선녀요, 천지 대주재의 직계 아들딸로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핏줄기가 이 땅에 생겨나니 기쁘도다.” 하시며 주시는 축복을 받는 것, 즉 하나님의 모든 대유업을 상속받고 성혼의 축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권을 대행해서 나타나야 할 것이 타락 전의 아담 해와였는데, 이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전부 깨지고 말았습니다. 6천 년 전 이들을 중심삼고 소망의 천국을 이룩해야 할 것이 타락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인간을 종의 종에서 종, 종에서 양자를 거쳐 직계의 아들딸로 복귀시켜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키고 하늘의 승리권을 찾아 승리의 왕자로서 하나님의 성혼 축복을 받는 것이 어린양 잔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내용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거든 기도해 보십시오! 인류가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참부모를 구원완성하여 복귀시키는 날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이 날이 있어야 만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한 인간은 선한 부모 밑에서만 태어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올바른 가정이 형성되는 것이고 올바른 가정이 생겨나야 올바른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과정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 하나님의 소망의 안중에는 무엇이 있었느냐? 아담 해와가 본연의 참부모를 중심삼은 참혈족으로서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룰 것을 바라셨습니다. 그리하여 천국세계를 이루는 것이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상이었는데, 인간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부모가 깨져 나가고 자녀가 깨져 나가서 결국 오늘날과 같은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입장에서 오시느냐? 마태복음 24장에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차 아담은 타락했고 2차 아담은 땅 위에서 뜻을 다 이루지 못했으니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들을 대신하여 3차 아담으로 오십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60억 인류가 하나같이 참부모의 혈통적 인연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현세의 이런 상태로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부모의 인연을 갖고 오시는 분이 재림주님입니다. 그러면 6천 년 역사는 어떤 역사였느냐? 잃어버린 참부모, 즉 아담 해와의 완성된 기준을 복귀하는 역사였습니다. (15-327)

복귀의 노정이란

복귀의 노정이란 무엇이냐? 원래는 구주라는 명사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냥 상담할 수 있는 형제의 입장에서 주님을 모실 수 있어야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요, 복귀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우리가 복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은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한번으로 그만일 텐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3시대를 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생인 구약시대를 거쳤고, 장성인 신약시대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새로 오시는 주님을 표본으로 하여 완성시대인 성약시대를 거쳐가야 합니다. 이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아담 한 사람을 재창조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역사였습니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복귀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이 아벨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연고로 아담가정에서 노아가정으로 밀려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노아 시대에서 아브라함 시대, 아브라함 시대에서 모세 시대, 모세 시대에서 예수님 시대로 연장되어 나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프로에 의해서 전개되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귀의 길을 하나님은 더듬어 나오셨습니다. 
아담가정에서 복귀의 기준을 세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에 1600년을 수고하여 아담가정 대신 노아가정을 불러 세우셨습니다. 노아에게 120년 후에 홍수심판을 하겠다는 것을 예고하실 때 노아 자신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들려오는 것은 명령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1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 “기필코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억울한 내적인 슬픔과 한을 풀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로 자신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노아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묵묵히 하나님과 약속한 내용을 일편단심, 촌시라도 잊지 않는 신념 가운데서 지켜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있어서 노아는 120년 동안 어떻게 해야 했느냐? 복귀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여 제2의 인간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악한 세계에 있어서의 모진 바람과 모진 시련 그리고 모진 환경에 부딪치게 되어도 그것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어떠한 시련에 부딪히더라도 노아는 아담과 같이 천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 서지 않겠다는 그런 확고한 신념의 기반 위에 서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120년 동안 아라랏 산에서 배를 만들던 그 기간은 행복했던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덧없이 세월이 흘러갈 적마다 그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노아를 미친 노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뭐 120년 후에 인류를 심판해?” 하는 조롱과 비소, 억울함과 분함이 휘몰아치던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약속한 그 약속만은 버리지 않고 일념의 신앙심으로 그 환경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 즉 노아의 아내와 자식들까지도 노아를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습니다. 120년 동안 그 일만 하고 다녔으니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노아의 아내가 되고 노아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120년 동안 그러한 일들을 하고 다녔으니 그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랑하던 아내도 노아를 원망했고 사랑하던 자식들도 노아를 원망했습니다. 
원래는 믿어 주기를 바라서 그 가정을 세우셨고, 믿어 주기를 바라서 그 사명을 맡기신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었습니다. 그 가정이 일치단결하여 노아의 뜻을 받들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워지기를 바라셨던 것이 하나님의 바램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정이 하나님의 뜻을 믿지 못하고 반기를 들고 반대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노아는 그러한 자기의 가정을 이끌고 자유와 소망의 한 날, 하나님과 약속한 그 날을 위해서 참고 참으면서 120년을 지내온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셨고 얼마나 억울하셨고 얼마나 분하셨는가 하는 그 내정적인 심정을 모르면서도 그렇게 믿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자신보다도 불쌍한 자리에 서 계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모르면서 말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몰아침을 받고 시달림을 받던 노아를 바라보실 적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비통함이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통할 수 없는 종의 입장이었던 노아였기에 하나님은 그 내적인 사정을 말하지 못하시고 그를 대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15-329)

중심인물들을 통해 섭리하신 하나님의 심정

노아는 40일 홍수심판 위에서 승리의 터전을 마련했지만, 그 후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노아가정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는 깨져 나갔습니다. 온 세계를 심판해 버리고 남겨진 노아가정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뒤넘이치던 광경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에 분함과 원통함이 얼마나 사무치셨겠습니까! 
그럼으로 말미암아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신 하나님이었던 것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노아가정에서 섭리의 뜻이 저끄러짐으로 말미암아 노아 대신 아브라함을 세우시기 위하여 4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일구월심 한마음으로 다시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던가를 오늘날 그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을 세워서 뜻을 해결지으시려고 했지만 그의 제물 실수로 말미암아 연장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3대 하나님이라는 슬픈 명사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세워 뜻을 이루시려던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벌어진 슬픈 그 사정을 바라볼 때 얼마나 비참하셨겠습니까! 당장에 아브라함 일족을 때려부수고 싶으셨던 마음이었지만 소망의 천국을 이루어 나아가셔야 할 하나님의 애절한 심정이 남아 있었던 연고로 또 참고 나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아브라함 자신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와의 싸움에 있어서 승리의 일로를 개척하고 하란 땅 라반의 집에서 21년 동안 고역의 노정을 거쳐 나올 때, 이것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야곱은 몰랐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억울하고 분한 사정에 몰리고 천대를 받고 밟힘을 당하고 원수의 시험을 받더라도 또 다시 가야 할 하나님의 복귀의 노정이 있었음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야곱은 하나님과의 약속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뜻을 위해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라반의 가정 환경 속에서 전부를 복귀시켜 가지고 승리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발붙이실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애급 400년 고역기간을 거쳐 60만 대중을 이끌어 지상천국을 이루고자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다 쓰러짐으로 말미암아 다시 제2세를 수습하여 가나안 7족과 대결해 가지고 승리한 터 위에 천국이념을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지부진하여 가나안 땅을 거치고 역대의 처량하고 비참한 역사노정을 거쳐서 예수님의 시대로 넘어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언제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시대를 한꺼번에 복귀시키기를 원하셨지만 그것을 책임질 수 있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복귀의 책임과 가정적인 복귀의 책임은 야곱이 졌고, 민족적인 복귀의 책임은 모세가 졌고, 국가적인 복귀의 책임과 세계적인 복귀의 책임은 예수님이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전체적인 책임을 맡기려고 하셨던 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점쟁이인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서 예물을 드릴 때 온 예루살렘의 성민들이 소동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오시는 메시아가 사람으로 태어날 줄 몰랐습니다. 교법사나 서기관들 가운데 어느 누가 버선 한 켤레라도 마련해 주었습니까?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해서 옷 한 가지 마련해서 찾아간 사람이 있었습니까? 불쌍한 자리에 오시면 안 되겠다고 초막 대신 거룩한 장소를 예비하고 예물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한 사람이 있었느냐 말입니다. 하늘의 때는 지나가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어찌하여, 4천 년 동안의 긴 역사를 통해서 준비해 온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의 한을 풀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를 알지 못했느냐? 하나님이 4천 년 약속의 주인공으로 보내신 메시아를 이스라엘 민족이 한 사람도 몰랐던 것은 억울하고 분한 사실입니다. (15-331)

예수님의 소망과 원통함

제사장, 서기관, 교법사들은 선민권을 자랑할 줄만 알았지 그들을 세우신 것이 오시는 메시아를 환영하기 위함이요, 그것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본연의 책임이요, 사명인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국가, 이 민족이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사귀 들렸다.”고 하고 바울세불의 괴수라고 했으니, 그 얼마나 엄청난 역사적인 비운이었습니까! 
그들은 빌라도와 짝하여 “유대의 나사렛 예수, 그는 가짜이니 그를 잡아다가 죽여주시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인이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피살당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태복음 26:39) 하는 기도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상에 천국을 완성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를 믿지 않으니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나를 세우신 그 본연의 목적은 천국을 완성시키시는 것인데, 이제 이것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하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사세(事勢)는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태는 틀렸다.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된 것이니 할 수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고 자신의 죽음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왔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선생님이 영계를 통하고 하나님 앞에 담판기도를 해서 안 사실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현세의 기독교 앞에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교회 교회마다 십자가를 걸어 놓은 것을 보면 선생님의 마음속에는 불이 납니다. 원통하고 원통한 십자가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구주가 못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찌하여 예수님을 비참하게 죽여 가지고 구주로 만드셨겠습니까? 살아 있을 때 군왕으로 만드시려고 했습니다. 구주의 과정을 다 지내 가지고 만왕의 왕으로 만드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널려 있는 성도들은 구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군왕이 필요합니다. 즉, 만왕의 왕이 필요합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의 주권 밑에서 하늘나라의 치리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 사람도 그것을 생각하면 분하고 원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최후의 운명 시간에 오른편 강도가 웬 말이었습니까? 왼편 강도가 웬 말이었습니까? 왜 사도들이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처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달렸느냐 하는 것이 원통한 일입니다. 
낙원의 선봉자는 사도들이 아니고 오른편 강도였습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 만인류의 조상으로 왔던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홀로 보내지 않고 같이 죽었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제자들도 부활했을 것입니다. 만일, 사도들이 부활했다면 기독교는 피 흘리는 종교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영적인 구원만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래 사명은 영육 아울러 구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완결짓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와야 합니다. 그래서 재림이라는 명사는 억울하고 분한 명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서 하나님은 천국이념을 품고 당신이 소원하셨던 그 본래의 천국권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지상에 끝날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원이 무엇이냐?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복귀된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 하며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이 이 천국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왔다 간 후 이스라엘 민족은 지지리 고생을 했고 2차대전 중에는 히틀러에게 6백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15-333)

실체천국을 이루어야

하나님이 지상천국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뜻이 연장됐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2천 년간 영적으로나마 구원섭리를 통하여 말세의 한 때를 대비해서 나오고 있나니, 오늘 이 때가 바로 끝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는 무엇이 올 것이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천국은 “네 마음에 있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천국만 가지고 되겠느냐? “천국” 하면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인데 나라가 성립되려면 주권이 있어야 되고 백성과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그 뜻은 우선 네 마음에서부터 소망의 천국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소망천국의 내용을 품고 실천천국을 이루기 위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소망 가운데서 천국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에 사도들도 소망의 천국을 품고 예수님을 통하여 실체천국을 이루어야 할 과정이 남아 있었던 연고로 말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원성사의 한 날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4천 년간 준비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 흘리던 복귀의 길을 걸어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에 불벼락을 내려 쓸어버려도 시원찮으셨을 것이었지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하며 간곡하게 기도했던 예수님의 기도의 조건을 생각하셨기에 그 민족을 쓸어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어 가면서까지 애절하고 간곡한 기도를 드린 것은 왜 그랬느냐?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지상천국의 이념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정성들여 놓으신 4천 년 역사의 공적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런 역사적인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기도한 예수님의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또 다시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오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죽고 난 후 기독교는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과 종족, 민족, 국가를 다시 세워야 되었던 비참한 역사를 이루어 나왔습니다.
제1이스라엘이 준비한 4천 년 역사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서 한 주권과 국가를 이루어 그것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복귀의 천국을 이루실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깨어졌기 때문에 제2차적으로 개인적인 기독교, 가정적인 기독교, 종족·민족·국가적인 기독교권을 거쳐서 지금까지 세계적인 기독교권으로 복귀시켜 나오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계적 종말시대에 있어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무슨 생각을 가져야 되느냐?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아를 고대해야 됩니다. 주님이 오면 모두 천국에 데려갈 줄 아십니까? 천국에는 그냥은 못 데려갑니다. 천국을 이루어 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은 천국이념을 실현하시던 과정에 있어서 천번 만번 저버리실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이었지만 참고 나오셨습니다. 한 동네를 찾아갔다가 박대를 당하신 하나님이요, 소망의 한을 풀고자 개인의 어려운 투쟁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는 그 한 날을 바라시다가 개인으로부터 배척받으신 하나님이요, 가정을 찾아 나오셨다가 배척받으신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민족과 이스라엘나라를 찾아오셨다가 배척받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로마 앞에 있어서 배척받고 피 흘려서 그 피값으로 섭리해 나오신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2천 년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일국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무대를 갖춰서 오늘날 전세계를 민주세계로 만들 수 있는 터전인 기독교권을 만들어 놓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독교권은 그 방향을 알지 못하고 최후의 절벽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지상천국을 이루려고 했던 예수님의 한을 풀어주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피 흘린 한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랑 신부의 자리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고자 하셨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예수님이 찾지 못했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그 개인을 찾지 못하면 한 가정을 찾지 못하고, 그 가정을 찾지 못하면 한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하고,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하면 한 신랑 신부를 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5-335)

통일의 용사들은 가야할 복귀의 노정

오늘날 선생님은 통일교회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나오면서 그 누구보다 핍박을 당하고 이 민족 앞에 저주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통일교회를 이단이라며 핍박하고, 밟고, 천대해 보라는 것입니다. 뿌리는 밑으로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참인가, 누가 허위인가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참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온갖 욕설을 다 들어왔기에 민족을 저주하고 교회를 저주할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이 걸은 길을 알았고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과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을 알았기 때문에 참고 나왔던 것입니다. 죽으라고 감옥에 몰아 넣는다고 해서 쉽게 죽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귀의 길을 더듬어서 개인과 가정을 찾아오셨지만 그 개인과 가정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또 다시 세계를 향하여 가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으시니, 나도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험준하다고 마다할 수 없고, 그 길에 죽음이 있다고 마다할 수 없고, 슬픈 곡절이 있다고 해서 마다할 수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가신 길을 나도 가야 되겠으니 아버지가 어려우면 나도 어렵기를 바라고, 아버지가 슬프면 나도 슬프기를 바라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의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이 조그마한 삼천리 반도를 기반으로 하여 이 민족 앞에 이색적인 운동을 시작해 가지고 세계에 새로운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우리의 이념권 내에 흡수되게 새로운 깃발을 들고 나서자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설 때마다 이 스승은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이 뜻이 정녕 아버지가 세우신 뜻임을 알게 될 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내 아버지요, 내 사정이 되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세우신 전통을 상속받고 그 아버지의 역사와 심정에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가 고통받으면 나도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잠을 자서는 안되고 쉬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가운데는 안식의 한 날을 노래해 온 교단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통일교인들은 쉬지 말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갈보리 산상에서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서도 기도하며 전도한 것처럼 통일교회 여러분은 사망의 어둠이 휩쓰는 천지 가운데서도 전도해야 합니다. 지옥에 가더라도 그 속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을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15-339)

통일신도들이 지녀야 할 사상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애쓰신 수고에 비하면 우리가 한 곳에 한 자녀를 세우기 위해서 흘린 눈물과 피와 땀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6천 년의 한을 풀기 위해서 복귀의 역사를 재창조의 섭리로서 이끄시며 한 많은 곡절의 노정을 더듬어 오신 것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가고 또 가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선생님을 사랑하고 선생님을 위하는 마음은 좋습니다. 그 정성은 고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민족 앞에 주지 못해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죽어 가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선생님의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선생님을 위해 꽁보리밥을 지어 가지고 오는데 그런 정성이 있거든 삼천만을 위해서, 온 인류를 위해서, 하늘땅 전체를 위해서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여러분은 실제적인 환경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하늘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신도들이 지녀야 할 사상이요, 통일역사가 지금까지 남겨 놓은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 역사를 책임지지 못하고 소모만 시키는 사람은 하늘에 역적이 되는 것이요, 이 역사를 빛내는 사람은 하늘에 충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이루었다는 웃음소리가 삼천리 반도와 온 지구상에 드높이 울려 퍼질 그 날을 위해서 행진하고 또 투쟁해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쉴 새가 없습니다. 가도 또 가고, 자다가도 눈만 뜨면 깜짝 놀라 일어나는 그런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밥을 먹다가도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는 통일신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소망하셨던 천국을 이루어 드리고 예수님과 성신이 못 다 이룬 한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물의 과정을 거쳐나간 천천만 성도들이 지상천국을 못 이룬 복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해원성사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내용을 알고 이 엄청난 사명을 짊어진 우리는 쉴 새가 없습니다. 다리가 부러지더라도, 죽더라도 전력을 다하여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선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눈물과 땀과 피의 가치를 인류와 땅과 하늘이 알아줍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발판을 타고 오십니다. 개인적인 제물시대, 가정적인 제물시대, 종족적인 제물시대, 민족적인 제물시대, 세계적인 제물시대를 거쳐서 섭리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통일신도들은 개인적인 제물시대를 거치고 민족적인 제물의 책임을 다하여 세계적인 제물의 길로 나가야 됩니다. (15-341)

아직도 가야 할 복귀의 길

역사는 흘러가도 우리의 책임은 흘러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식하더라도 우리는 안식할 수 없습니다. 필승의 한 날을 세워 놓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후손들 앞에 참소를 받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후손과 민족과 세계를 걸어 놓고 기도하고 정성들여야 합니다. 
아직도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복귀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그 앞 단계의 기준까지 닦아 놓고서야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법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죽는 것이 하늘의 필연적인 법도입니다. 우리는 최후에 하늘을 빛내어 민족과 세계가 우리를 따라와서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여기에 모인 통일교회 청년 남녀들은 모든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불을 질러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선각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이렇듯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나니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세계적인 골고다, 천주적인 골고다를 향해서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그 복귀의 노정을 거쳐서 천국을 이루시는 것이므로 오늘도 가고 내일도 또 가야 합니다. 이 길을 가는 데에는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가야 합니다. 부모가 반대하고 형제가 반대하고 동기가 반대하더라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는 한 계속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억천만세가 걸리더라도 가야 하고, 우리의 후손 수천만 대를 통해서라도 이 길은 가야 합니다. (15-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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