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신경 해설-제16장
제6절 참부모님의 업적
제6절 참부모님의 업적 5, 6 (평화신경 해설 제16장)
5) 레버런 문은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챔피언이다
예수님은 이 땅의 구세주로 보낸 하늘의 황태자요,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고맙게 여겼습니다. 이래도 고맙고 저래도 고맙다는 것입니다. 적수(赤手)로 왔으니 적수로 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에서 왔으니 가는 것도 아버지의 심정을 붙들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인생목표였습니다. (10-293, 1960.11.6)
메시아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잃어버렸던 개인을 완전히 찾을 수 있는 중심존재요, 종족과 민족과 세계와 하늘땅을 완전히 찾을 수 있는 중심존재인데, 그런 분이 태어나는 첫날부터 말구유에서 지내게 됐다는 겁니다. (154-321, 1964.10.5)
오늘의 세계적인 기독교권이 형성된 것은 예수님께서 30여 평생 인류를 위하여 남모르는 수고의 눈물을 흘렸던 그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오늘날까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역사(役事)해 나오신 2천년의 서러움과 한 맺힌 역사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304, 1957.6.30)
타락한 세계에서 아담과 같은 입장의 사람이 비로소 성숙하여 하늘 편 천사장의 자리에 설 수 있는 대표자가 되어서 하늘 편 천사장의 씨를 이어 받아 본연의 씨 이상의 자리에 올라가야만 하나님의 직계 자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아버지가 다릅니다. 요셉이 아닙니다. 하늘 편의 천사장권인데 타락한 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켰습니다. 사탄세계에서 받은 씨를 능가할 수 있는, 하늘 편이 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씨를 심어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정권을 이어야 본연의 아담으로서 인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와 같은 자리에서 혈통적으로 분별된 씨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런 사람은 역사 이래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 중심삼고 사랑의 인연을 통해서 태어난 대표적인 단 한 사람이기 때문에 여기서 독생자란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와서 아기를 낳아 준 게 아닙니다. 사탄이 천사장이지요? 하늘 편에 충신이 될 수 있는, 타락한 천사장 이상의 천사장격이어야 됩니다. 가인이 아닙니다.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가인 아벨 형제를 다 낳더라도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혈통적 터전과 그 씨의 내용이 있어야 됩니다. 타락은 떨어져 내렸지만 다시 올라갈 수 있는, 심정권을 이어서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이어받아 오는 것이 메시아다 이겁니다. 복잡합니다. 그래서 비로소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첫사랑을 받은 맏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불교의 석가모니나 유교의 공자, 회교의 마호메트 같은 분들과 다른 것이 뭡니까? 혈통을 맑혀온 분은 역사 이래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게 다른 겁니다. 석가모니와 예수가 뭐가 다릅니까? 공자와 뭐가 다릅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마호메트와는 뭐가 다릅니까? 예수가 그들과 다른 것은 뭐냐 하면 혈통을 맑히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게 메시아의 특권입니다. 그게 다릅니다. 역사 이래에 이와 같은 역사가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비로소 예수를 중심삼은 기독교의 출발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참아버지의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169-194~195, 1987.10.31)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 이 땅 위에 오셨습니까?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를 대신하고, 또 민족과 교단을 위하여 왔었으나 그가 나아가는 길은 너무도 슬펐습니다. 예수는 그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슬픔이 역사적인 슬픔으로, 시대적인 슬픔으로 연결될 것을 알았기에 또한 미래의 슬픔으로 연결될 것을 알았기에 몸둘 바를 모르고 초조한 심정에 잠겼던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께서 찾아가신 곳이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가 최후의 슬픔을 토로한 곳은 제자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믿고 있는 유태교단도 아니요, 유태나라의 궁중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의논하여 모든 것을 결정짓기 위하여 올라가신 곳은 깊은 밤에 아무도 가지 않는 겟세마네 동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끝날에 있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렸던 눈물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그러한 예수의 제2의 모습을 그리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슬픔을 품고 시대와 미래를 위하여 우셨던 예수, 처참하고 불쌍한 사정에 처해서 세 번씩이나 피땀을 흘리며 우시던 예수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5-201~202, 1959.1.25)
밤이 새도록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시던 예수께서 분하다면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럽다면 말할 수 없이 서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4천년 역사가 하루에 넘어가고,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루아침에 망하고, 4천년 섭리의 터전이 한 시간에 무너지고, 세워졌던 유태 교단이 한 시간에 무너질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가 흘린 피땀은 역사의 거리를 연결시킨 피땀이요, 그가 흘린 피눈물은 역사의 거리를 연결시킨 피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태 백성들은 이러한 내용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5-202, 1959.1.25)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은 선생님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따르겠다고 맹세는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그 비통한 심정을 누가 인계 받고, 누가 이 비통한 피눈물의 사정과 인연을 맺었습니까! 땅 위에는 그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예수께서 홀로 행하고 가셨지, 이 땅 위의 인간 중에는 그러한 심정을 인계받을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하늘을 대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호소는 하늘땅이 터져 나가는 한마디요, 사망세계가 권세를 갖고 들어서려는 것을 저지하려는 비장한 한마디였습니다. (5-202, 1959.1.25)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영육의 부활을 가져오지 못했다 이겁니다. 영적 부활은 가져왔지만, 육적 부활을 가져오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영적 구원섭리의 도리는 세웠지만, 육적 구원섭리의 도리를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절반을 갈라놓은 것이 되었습니다. (196-213, 1990.1.1)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기독교로 보게 된다면, 원래 영적인 구원섭리와 실체 구원섭리를 예수님 당시에 국가적으로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실체적인 구원섭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기독교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오시는 주님으로 선생님을 모셨더라면 영적인 구원섭리와 실체 구원섭리가 연결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못 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이것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영계에 가서 기독교문화권과 모든 종교 문화권을 상속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천상세계에 가서 40일 동안 이것을 상속받고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계에서 대혼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도주로부터 예수님까지 영계에 들어가서 굴복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남긴 것이 신부 교회입니다. 신부 교회를 인수받아야 신부가 설 수 있는 자리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는 재림주는 신부 교회를 인수받아야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기독교가 선생님을 모셨더라면 신부의 자리를 세계적인 도상에서 탕감했을 것이기 때문에 탕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것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탕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신부적인 기반을 가인적인 기반 위에 세워서 라헬적인 기반을 탕감해야 하는 역사적인 과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236-95~96, 1992.11.3)
6) 레버런 문은 성서 및 각 종교 경전의 핵심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챔피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살 수 있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암호입니다. 하늘이 사탄세계에 와서 연락할 수 있는 암호입니다. 비유와 상징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무리 읽어도 모릅니다. 이 암호를 풀 날이 있을 것이거늘, 그러려면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가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 복귀의 이념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의 어떠한 사조나 주의 주장이 그것을 해명할 수가 없으므로 어느 한때에 이 비밀문서를 해명하여 우리들이 가야 할 방향과 목적지를 제시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7-218, 1959.9.13)
타락한 우리들은 참부모의 말씀과 하나님 말씀의 참뜻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말씀을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성경을 2천년 동안 연구했지만 모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씀을 통하여 행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행함과 하등의 관계를 갖지 못한 입장에 있습니다. 말씀의 목적은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나온 기독교라면 이 기독교가 왜 오늘날처럼 되었겠습니까?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의 목표와 말씀을 들은 기독교인들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7-269~270, 1959.9.27)
성경은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쇠사슬에 매어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을 친히 풀어줘야 할 하늘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풀어줄 수 없는 사정이 있기에, 푸는 비결을 눈짓으로 가르쳐 주시며 찾아오셨던 하늘이십니다. 성경은 생명과 사망을 가르는 찰나에는 그 기준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그것을 직접 가르쳐 주지 못하시기에 눈짓으로 가르쳐 주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요? 어느 정도는 됩니다. 그러나 하늘은 사탄 앞에 기필코 승리의 왕자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심정을 통하여 교시하여서 심정을 통하여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왕자를 만들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르쳐 줄 수 없는 자리에서 타락하여 사탄에게 붙들렸기 때문에 그 사탄을 끊고 나오는 방법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호로써 가르쳐 주는 과정이 신앙 노정입니다. 여러분은 몰랐습니다. 무지한 인간들을 찾아오는 데 있어서 알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찾아오지 못하고, 묵시로써 모를 내용을 갖고 찾아 나온 것이 하나님의 입장인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올바른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아 그 배후에 숨겨진 뜻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은 이리로 가려 했지만 하늘은 저리로 가라 하는 것이 신앙의 노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8-344~345, 1960.2.28)
성경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사탄세계 내에 하늘의 정보요원과 수사대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사탄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세계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탄세계를 망치려고 나타났기 때문에 사탄이 잡아 죽이게 마련입니다. 그건 잡아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CIA(중앙정보국)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소련과 한참 극렬하게 서로 대립할 경우 정보원을 보내게 될 때는 CIA 국장이면 국장이 비밀문서를 풀 수 있도록 암호를 풀 수 있게 가르쳐 줘서 연락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암호 문서를 풀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CIA 국장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보낸 요원의 말씀이요, 비유와 상징으로 가르쳐 준 것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 하나님으로부터 풀 수 있는 길을 찾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경을 완전히 해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예수님이 끝날이 되면 성경을 연구하라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서 기도해서 하늘 앞에 가까이 갈 것을 예고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과학적인 하나님이요, 이론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성경 말씀을 하늘을 통해서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면에서도 일치될 수 있는 그런 진리의 체계여야 합니다.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통일교회가 가르쳐 주는 그 내용이 이러한 본의에 일치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성경을 잘못 풀다가는 나라도 망치고 세계도 망치고 하나님의 뜻도 망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74-64~65, 1974.11.12)
원리를 해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리의 길, 아무것도 한 점의 가르침 없는 것을 갖고 어떻게 그러한 중요점을 해결해서 연결지어 여기까지 왔느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한 성서적인 내용, 혈통전환의 계열을 생각해 보았을 경우에 엄청난 내용입니다. 이것을 몰랐을 경우에는 역사가 해결 안 되고 천상세계와 지상세계가 일체화되지 않습니다. 그건 동화같은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서에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성서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 선생님이 탕감복귀, 타락의 문제를 모두 복귀의 조건을 세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일반인이 보았을 경우에는 성서라고 하는 것은 제일 나쁜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러한 말씀을 듣고 보니 천계의 비밀을 바로 해독하는 중요한, 세상 가운데에 없는 단 하나의 귀중한 성스러운 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입니다. (213-335, 1991.1.21)
선생님은 성경만 보고 원리를 찾은 게 아닙니다. “창세기가 타락의 장이면 묵시록은 복귀의 장이다. 이것이 생명나무로서 이렇게 되었으면 생명나무로 복귀되는 거다. 그것이 안 맞으면 성경은 거짓말이다.” 했습니다. 왜? 씨를 심어 가지고 난 것은 씨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맞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오는 순이, 씨에서 움터 나오는 순이 같아야지, 그것이 위로 뻗어야지 옆으로 뻗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맞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오늘날 원리의 가르침은 추리적 방법을 통해서 섭리사관에 일치된다 이겁니다. 명실공히 하나님이 살아 있는 한, 그 하나님이 사랑을 중심삼고 섭리의 뜻을 펴나가고 있는 한 세계는 반드시 그 문화권을 중심삼고 통일시대를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교 중에 주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닐 수 없다 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우리같이 똑똑한 사람은 “기독교의 끝을 뽑아 보자. 뿌리를 뽑아 보자.” 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걸 뽑다 보니 천지창조가 어떻고, 하나님이 왜 사랑을 좋아하나 하는 것들을 밝혀낸 것입니다. (195-140, 1989.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