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절 참부모님의 생애 (평화신경 해설 - 제12장 하나님의 이상가정과 천일국 백성의 소명적 책임)

훈독왕 | 20200907100037

평화신경 해설 - 제12장 하나님의 이상가정과 천일국 백성의 소명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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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절 참부모님의 생애

여러분, 오늘로 88세의 생신을 맞게 되는 레버런 문(Rev. MOON)의 생애는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된 한의 생애였습니다. 제1아담과 제2아담이 실패한 모든 것을 탕감복귀하고 완성해야만 하는 제3아담 된 참부모의 사명은 구세주, 메시아, 재림주의 사명은 물론 모든 종주들의 사명까지도 총체적으로 완수해야만 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주 창조가 그러했듯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는 인류 재창조의 대혁명적 역사였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과도 의논할 수 없는 고독한 생애노정이었습니다. 하나님까지도 돌아 보시지 않아 철저하게 혼자서 찾아가야 하는 가시밭 광야노정이었습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생사의 기로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하늘과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다시 일어서야만 했던 불사조의 모델 성을 세우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일찍이 일본 유학시절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또 해방 직후 공산치하인 평양에서 하늘의 뜻을 전파하다가, 그리고 자유국가로 탄생한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대표국임을 자랑하는 미국에서조차 옥고를 치르는 등, 일생에 여섯 번씩이나 무고한 옥중투쟁을 거쳐야만 했던 레버런 문의 파란만장한 삶, 즉 절대모델성 완성을 위한 그 삶을 어느 누가 이해하는 자 있었습니까? 불쌍하신 하늘을 위해, 그리고 사망권에서 허덕이는 타락인류를 구해 주기 위해 혀를 깨물며 참고 살아온 비참한 생애였습니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본인의 이런 심정의 내연을 들여다보고 한마디만 던져도 본인의 눈물은 폭포수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88세 노인의 나이가 되면 일생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조용히 다음 세계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때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레버런 문의 삶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개인적으로 삶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직도 타락권을 벗어나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는 인류를 구해 주어야 할 참부모로서의 소명적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후천개벽의 시대, 즉 추수의 때가 왔습니다. 본인은 금년에도 여러분을 선도하여 인류복귀의 천주적 혁명을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주저하지 마십시오! 본인의 손을 잡고 천명을 받들어 주어진 소명적 책임을 완수합시다! 하루에도 수십만 명씩이나 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다 속절없이 죽어 가는 현실을 어찌 외면할 수 있습니까? (본문 219~221쪽)

<해 설>

1) 참부모님의 사명 

제1차 아담이 실패했으니 제2아담이 나왔고, 제2아담이 실패했으니 제3아담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연이어서 구원섭리를 하신다는 말입니다. (404-322,2003.2.6) 

아담이 잘못했으니 제2아담 예수님이 와서 풀어야 했고, 제2아담이 잘못했으니 제3아담이 와서 다 풀어 가지고 근본부터 깨끗이 되고서야 천국문이 열려 가지고 낙원과 지옥이 철폐되는 것입니다. (495-291,2005.5.12)

참부모는 구세주입니다. 세상을 구해 줘야 됩니다. 거짓 부모가 세상을 거짓 사랑으로 낳아 놓았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구하는 데는 참부모의 참사랑으로 구해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종교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메시아입니다. 종교를 통일시켜 가지고 참사랑을 중심삼고 가정 정착입니다. 세상이 가정 정착과 평화를 위해서 가고, 종교도 평화를 위해서 갑니다. 평화통일입니다. 제1이스라엘과 제2이스라엘이 가정과 나라 그리고 세계를 중심삼고 실패한 모든 것을 찾는 것입니다. 제1아담, 제2아담을 중심삼고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의 모든 잃어버린 것을 비로소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찾은 기반 위에 서는 것이 참부모입니다. 참부모는 구세주의 왕이요, 메시아의 왕입니다. 참부모는 구약시대·신약시대·성약시대의 왕초입니다. 참부모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의 실체입니다. 참부모는 하나님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참부모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399-178,2002.12.23) 

문 선생은 제1아담의 사명을 완료하고, 제2아담인 예수님의 사명을 완료해서 하나님을 모시고 일체권을 이루어 지상·천상천국을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지금 다하고 있습니다. (498-282,2005.6.8) 

하나님도 자존심, 체면, 위신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복귀노정에서 수고해 나온 제3아담, 재림주님이 고생해 가지고 태산을 넘고 하나님 앞에 넘어왔을 때 “야, 야! 너 그것 그만두고 왕권을 수립해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왕권을 수립해 달라고 했으면 아담 해와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걸 선생님이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믿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406-285,2003.3.12) 

참무모는 뭐냐 하면 부모의 왕입니다. 그다음에 스승의 왕이고, 그 다음에 또 뭐냐 하면 왕의 왕입니다. 3대 주체사상을 중심삼고 정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해서 다 망쳤던 것을 선생님이 제1, 제2, 제3아담을 중심삼고 탕감해서 제4차 아담권을 중심삼고 본연의 절대부모, 본연의 절대스승, 본연의 절대왕권을 수립함으로 말미암아 지상·천상천국이 영존하는 것입니다. (411-227,2003.7.12)

2) 여섯 번의 무고한 옥중투쟁 

아무리 문 선생이 메시아가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더라도 어땠겠습니까? 16세 때, 그때가 지금은 중학교 3학년 정도입니다. 그때는 성숙하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상대권에 서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다고 체휼한 것이 대단합니다. 세상의 귀한 모든 것을 내팽개치더라도 그 이름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단번에 모든 보물을 내버리더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메시아는 그런 존재입니다. 메시아의 관념을 가지고 생애를 넘어갈 수 있는 출발을 언제까지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23세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몇 년입니까? 16세부터 몇 년입니까? 7년, 8년 이내에 해야 됐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생님이 23세 때가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고문이 대단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희생할 수 있습니까? 나라도 못 찾은 사람이 세계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일본을 밟고 넘어가지 않으면 세계로 못 넘어갑니다. 방대한 천지를 밟고 넘어가는 오야다마(親玉; 우두머리)가 메시아입니다. 그 이름을 중심삼고 어디에 가든지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하는 자각을 갖지 않으면 메시아의 이름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377-88,2002.4.30) 

한국이 일본 치하에 있었을 때, 선생님은 몇 번이나 유치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도쿄에 와 있을 때에도 한 달에 한 번은 경찰서에 불려 갔습니다. 그 경찰서가 다카다노바바(高田の馬場) 거리에서 와세다대학의 오른편에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선생님이 한국에 돌아가려고 하면, 한국에 연락이 갔습니다. “아무개가 한국에 돌아간다.” 고 연락이 갔다는 것입니다. 학생이었지만, 그만큼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15-181,1965.10.8) 

일본은 내 원수입니다. 왜정 때 일본의 고등계 형사들한테 무참히 고문을 받았던 장본인입니다. 그때 내가 한마디를 하면 수백 명의 생명이 왔다갔다할 수 있었던 자리에서 독하디 독한 싸움을 했습니다. ‘일본놈!’ 하게 되면 어금니를 악물고 배때기를 째는 데 선두에 서려고 했던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망해서 피난을 갈 때 그 원수를 불러 보따리 싸서 도망가게 해 준 사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것을 가지고 그들을 수습한 것입니다. (50-158,1971.11.6) 

왜정 때 고문을 받으면서도 “쳐라, 이 자식아!” 했습니다. 이런 책상 다리 네 개가 전부 다 부러져도 “쳐라, 이 자식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매를 맞는 법도 연구했습니다. 매를 맞을 때 “아이쿠, 잘못했습니다.” 하면 죽습니다. “쳐라, 이 자식아!” 하면서 몽둥이가 들어오면 ‘음!’ 하고 힘을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안 진다는 것입니다. ‘이 개똥 같은 자식들아, 네 뼈다구까지 가루를 내서 내가 마시겠다! 쳐라, 이 자식아!’ 하던 이상의 강한 정신력으로 나를 쳐댔던 겁니다. 그런 놀음을 했습니다. (61-316,1972.9.3)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후 지금까지 하늘나라의 보좌, 영광된 왕좌에 앉아 가지고 영어살이를 했는데 거기에 미련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땅 위에서 승리하게 되면 사탄세계가 아니고, 지옥과 낙원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른 세계에 옮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탄식의 보좌가 아닌 영광의 보좌에 앉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서 주랑당을 맞아 핏줄이 터져 나가더라도 “나 죽습니다. 도와주소!” 하는 기도를 못 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대동보안서에서 매를 때려 가지고 죽으라고 던져 놓았는데, 3일 만에 살아났습니다. 거기에서도 하나님을 위로했습니다. 내가 피가 나오던 것을 보면서 “이건 예수의 피와 다릅니다.”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 내 뜻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의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천국에 들어가서 불효할 수 있는 소성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389-301~302,2002.8.7) 

내가 공산당에게 고문을 받으면서 ‘이놈의 자식! 내 이 시퍼런 눈을 뜨고 네 일족을 굴복시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하는 것, 네 입으로 증거할 그 날을 갖고야 말 것이다. 내가 죽지 않고 그 날을 볼 것이다.’ 하고 다짐하고 결의했던 사실을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선생님에게 사무친 심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승공’을 들고 나와 천대를 받으며 지금까지 이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명실공히 이제는 국가에서도 우리 단체가 아니면 승공할 길이 없다는 결정적인 기준까지 끌어올린 것입니다. (51-260~261,1971.11.28) 

이북에 있을 때 공산당한테 고문을 받고 쓰러지면서 맹세하던 것을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내 운명의 기백과 기개를 다 바쳐 사나이답게 싸울 수 있는 땅은 이곳이다.” 하며 그 땅을 붙들고 기도하던 것을 선생님은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죽더라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뼈가 없는 무골충 같은 사나이가 아닙니다. 무조건 용서를 구하는 사나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승리를 표방하고 나선 사나이지, 무능력자의 입장에서 무조건 용서를 구하는 사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57-355,1972.6.5) 

내가 삼팔선을 넘어올 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다시 넘어올 것이다.”라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남한 땅을 위해서 내려가는 비참한 사나이의 모습이지만,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라고 결의했습니다. 그때 그런 결의를 표명했기 때문에 그 표준을 중심삼고 아시아와 세계에 우리의 사상적인 기반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지금까지 천신만고의 수난길을 극복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공산당에게 몰리고 고문을 받던 억울한 자리에서 맹세한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다. (51-143,1971.11.18) 

물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십니까? 내가 감옥살이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맛을 압니다. 흥남감옥에 있을 때, 비료공장에서 중노동을 할 때 하루종일 물을 한 사발밖에 안 줍니다. 그러니 살이 부풀어서 짜게 되면 물이 나옵니다. 물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물입니다. (347-54,2001.7.3) 

아침에 밥상을 대하고 먹을 때에도 생각해야 됩니다. 선생님이 흥남감옥에서 보리밥도 아닌 메밀 밥, 3분의 1밖에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메밀밥을 먹으면서도 망해 가는 사람들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굶어죽던 사람을 부활시켜 달라고 기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말만이 아닙니다. 기가 찬 것입니다. (379-215,2002.5.30) 

흥남형무소에서 내 몸무게가 92킬로그램이었습니다. 남들은 60킬로그램도 안 됐을 텐데 어떻게 돼서 그랬느냐? 밥덩이 절반 가지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한 덩이를 먹었으면 당연히 살이 쪄야 했던 것입니다. 정신력이 무섭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 갔습니다. 6개월도 못 가서 쓰러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지도했습니다. 그래서 옥중의 성인이라는 이름을 남긴 사람입니다. 내가 성인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어려운 사람이 나한테 와서 뭐든 도와달라면, 내가 감옥에 있는 식구들의 차입을 뺏어서라도 도와줬습니다. 그것을 빌려 줘 가지고 장사를 자기들이 한다고 해 가지고 그것을 다 갚아 주면서 도와준 것입니다. (453-294,2004.6.14) 

선생님이 20대부터 40대까지는 눈물어린 투쟁기였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모르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고문받던 것을 필생의 탕감노정으로 알고, 그것을 대가를 치러야 할 당연한 노정으로 알고 걸어온 노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국가의 반대를 받고, 교계의 반대를 받고, 삼천만 민중 어느 누가 반기를 들고 반대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서글픈 자리에 몰렸던 역사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59-286,1972.7.27) 

선생님은 이북에 갈 때도 감옥을 표준하고 갔습니다. 감옥에 들어 갈 것을 각오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국에서 통일교회를 시작할 때 서대문형무소를 바라보고 시작했습니다. 형무소에 갔습니다. 미국에 갈 때는 미국의 형무소를 바라보고 갔습니다. “미국 정부와 해결 지어야지!” 하고 말입니다. (138-134,1986.1.19)

선생님은 여섯 번이나 감방에 갔습니다. 많은 고문을 받고 피를 흘렸는데, 그 와중에서도 입을 열고 사과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냐? 팔을 꺾어 봐라!” 한 것입니다. 책상다리, 4개의 각목이 부러져 나가도 아무런 말을 안 했습니다. 그렇게 고문당하고 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피를 흘릴 때는 입이면 입 속에 구멍을 내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호흡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바로 죽습니다. 여러 가지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모두 죽었다고 해 가지고 내버린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259-121,1994.3.27) 

선생님이 자기란 것을 생각했다면 여섯 번이나 감옥에 끌려가서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이 휴양소가 아닙니다. 비참한 곳입니다. 선생님처럼 특별히 사상이나 종교나 도덕적인 관점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로서 박해를 받고 감옥에 끌려갈 경우에는 감방의 수인들에게조차 손가락질을 받고 2중 3중의 박해를 받습니다. 모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박해하는 사람은 하늘적으로 볼 때 탕감조건에 걸립니다. 거기에 만민해방이라는 하나님의 계산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문을 받으면서도 한 방을 맞으면 몇 백만 명을 해방한다는 계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때려라, 이놈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 헌병에게 맞을 경우는 테이블 4개의 기둥이 부러질 때까지 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면, 당당히 선생님이 싸운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그렇게 당당히 싸웠습니다. (247-37,1993.4.21)

3) 인류를 위해 살아 온 비참한 생애 

예수님이 뜻을 이룰 수 없어 “아바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하면서 당신의 뜻보다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룩되지 못한 안타까움을 말했던 그 내정의 뒷 골목까지 파헤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나온 것이 통일교회 교리입니다. 그 내정을 갖고 결의하며 나서게 될 때, 하나님이 동정을 아니 할 수 없는 진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서 개척자의 사명과 선각자의 사명으로 더듬어 오면서도 통일교회 지도자인 문 아무개는 외로운 자리에 부딪치는 것을 일체 말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거는 놀음을 했지만, 나는 외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의 동정도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천지의 대주인이신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기 때문에 아무리 고문을 받아서 피를 흘리고, 몸이 찢기고, 힘줄이 끊어지던 자리에 들어가도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그런 자리에 내세운 당신의 심정은 그 이상 더 애달플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늘을 위로할 수 있는 나라를 찾겠다고 허덕이고 있었으니 아무리 고문이 심해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엇갈린 십자가의 길이 가로놓이더라도, 그 십자가의 길이 나를 패배의 어려움과 절망의 환경으로 몰아넣더라도 나는 거기에서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가겠다고 결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핍박의 길이 문제가 아니고, 죽음의 길이 문제가 아닙니다. 단 한가지 문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것만 알 수 있다고 할진대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죽을 자리에 내버려두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생을 시키더라도 그 자식이 최고 행복의 길을 가게 하려니, 형제들 누구도 참소하지 못하게끔 하여 자연적인 순응의 조건을 세워 가지고 공인을 받게 하려니 남이 가지 못하는 수난 길을 가게 하고 남이 받지 못하는 핍박을 받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65-91~92,1972.11.13)

감옥생활을 해 보면 석방되는 날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릅니다. 나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거 하나가 취미입니다. 형량이 10년이라면 9년 364일이 됐다, 3일 됐다, 60일 넘어갔다, 9년 넘어간다 하는 그게 재미라는 것입니다. 어서 빨리 정월 초하룻날이 돼서 대접은 못 받더라도 돼지가 발자국 소리를 내고 건너간 국이라도 마시고 싶은 것입니다. 돼지 고깃국이 아니라 돼지가 밟고 건너간 국이라도 먹고 싶다는 말입니다. 교도소 같은 데서는 돼지가 건너간 그런 국물을 먹이는 날이 정월 초하룻날입니다. 그러니까 그 국물을 한 번 먹었다, 두 번 먹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아홉 번을 지내나?” 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아홉 번이 지나고 10년이 가까워지면 밤에 잠을 못 잡니다.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나도 감옥생활을 많이 했지만 그렇게 그리워하지는 않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태평이었습니다. 면회를 오겠으면 오고 말겠으면 말고, 배가 고프겠으면 고프고 안 고프겠으면 안 고프라고 한 것입니다. 배가 고픈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배고픈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고문을 받던 자리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매를 맞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매 맞던 것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256-189,1994.3.13)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았습니까? 뜻길에 한치라도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는 길을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을 수 있었던 순간에도 뜻길에 보탬이 됐다 이겁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하는 기도를 나는 못 합니다. 그런 기도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안 합니다. 피를 토하는 고문을 받고 그 피를 내 손에 묻히면서도 “내가 아직까지 죽지 않습니다. 피를 흘린다고 하늘이여, 걱정 마소! 하늘의 지원을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비참합니다. 당신의 해방의 날을 위해서 피를 열 번이라도 흘려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걸 압니다.” 하면서 위로하려고 했습니다. 밤에 달을 바라보나 별을 바라보나 하늘을 바라보면서 서러운 눈물이 천년만년 사무치는 듯 했습니다. 눈물 없이 별 자리를 볼 수 없고 달을 볼 수 없었던 삶을 살았습니다. (281-83~84,1997.1.2) 

선생님의 생애를 두고 보면 감옥도 많이 가서 고문도 많이 받았지만 ‘이 자리에서 죽으면 큰일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랬느냐? 상처를 입고, 몸에 고문 자국을 남긴 자리, 신음하던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문제가 컸다는 것입니다. 그런 탕감복귀의 길을 누가 책임지느냐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죽음을 넘을 수 있는 감동과 충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면, 하늘이 모든 것을 수습해 주던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고문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명을 남기고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봤습니까? 여러분이 지금까지 활동한 것, 정성껏 하늘에 기억될 수 있는 날들을 남겼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적 자리, 그런 체휼적 자리가 10년 전이나 20년 전이었다면 “오늘은 내가 왜 이렇게 됐느냐?” 하는 것을 비교해 봐야 됩니다. 그때 여러분의 심정 기준은 공적인 뜻을 위하여 생각하던 것으로서 오늘날 뜻을 위하는 생각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76-13,19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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