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인간 중심한 평화추구의 한계 4, 5 (평화신경 해설 - 제11장 후천개벽시대의 평화대사 사명)

훈독왕 | 20200610105801

평화신경 해설 - 제11장 후천개벽시대의 평화대사 사명


제3절 인간 중심한 평화추구의 한계


첨부파일 32 평화신경 해설 11장 3절 인간 중심한 평화추구의 한계 4, 5 -1.mp3


4) 레버런 문의 참사랑 실천 

선생님은 여러분과 같은 청춘시대를 다 버렸습니다. 희생했습니다. 이것이 항상 표준이 돼 있다는 걸 알고 그 표준 앞에 부끄럽지 않은 놀음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선생님은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에 대하여, 선생님을 위하는 길에서 눈물을 많이 흘려야 됩니다. 눈물없이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368-78,2002.1.28)

모두 다 ‘저 사람을 따라가야 되겠다.’ ‘저 사람과 같이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 백성이 되고, 하늘나라에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가든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으면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를 못 모셨기 때문에 점심때가 되면 내가 빵이라도 사다 줄 수 있는 마음을 항상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고달프지만 하늘이 도와주기 때문에 판도가 자꾸 넓어집니다. 어디 가든지 나를 위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10년쯤 살다 보면 저 골짜기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공동묘지에 가는 날을 잡아놓고 기다리는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도 나를 위하려 하고, 그 동네의 개까지도 짖지 않고 나만 자꾸 따라다닙니다. 동네에 들어가 소리 높이 외쳐도 개가 짖지 않고 들어와서 슬슬 핥아 줄 수 있게끔 선한 생활을 하게 되면…. 물론 인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다면, 그 주인이 사랑하는 사람이 왔는데 왜 반대하겠습니까? 좋아하고, 그럴 수 있을 정도가 돼야 됩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새도 그렇고,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342-305,2001.1.13) 

선생님은 일생동안 이렇게 바로 누워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옆으로 새우잠을 자는 것입니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것을 어떻게 다 넘어가는 겁니다. 밤에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잘 때도 몇 분에 일어나겠다 하면 틀림없이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시간을 잃지 않기 위한 놀음을 하는 그런 생애를 살았습니다. (346-316,2001.7.2)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가서 매 맞은 자리, 흠 자리를 볼 때 내가 잘못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할 책임을 못했으니 이래야지. 하나님이 나에게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 감옥에 처넣었다. 거기에서 승리해 가지고 나올 때는 복을 주려고 그러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311-157,1999.8.30)

하늘나라에 가는 사람들은 편안하게 가게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생활은 언제나 고달픕니다. 뜻을 이루는 일이 더 고달픕니다. 자기가 편안히 살면 되는데, 편안히 살 수 없습니다. 지금도 발을 벗고 다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왜?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땅 끝에서. 내가 편안히 있는 이 밤에도 북극에서 얼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걸 느끼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돈이 지갑에 있더라도 자기 마음 대로 쓸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내가 수습을 해 주면 전부는 할 수 없으니 대표적으로 해 주는 것입니다. (368-29,2002.1.25) 

5) 하나님의 혈통으로 부활 중생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아담 해와의 후손이 오늘날 인류의 표준이 될 것인데,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인류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 완성해야 할 책임은 누구의 것이냐? 다시 오시는 메시아의 책임입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메시아가 참부모의 자리에서 이들을 다시 낳아 줘 가지고 중생시키는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시는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65-203,1972.11.19) 

메시아가 출발한 것은 무엇이냐? 아담 해와의 가정에서 뒤집어졌기 때문에 가정을 중심삼고 기반을 갖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 가정이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가정보다도 하나님을 더 영광스럽게, 더 훌륭하게 모실 수 있는 효자 효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칙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탕감해 가지고 남는 것이 없습니다. 메시아는 뭐냐 하면, 참사랑을 중심삼은 아버지 자리에서 참사랑의 혈통을 먼저 연결하고, 참사랑의 생명으로 비로소 출발하는 주인 양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메시아요 참부모다 이겁니다. 그 주인 양반을 에덴동산의 아담 해와보다 몇 백배, 몇 천배 이상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혈통적 아기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니까 중생이니 부활이니 하는 것을 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313-226,1999.12.19) 

메시아는 모든 인간을 해방시켜 그들을 이 땅 위에서 거듭나게 하기 위해 오십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거짓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참부모가 그들을 중생시키기 위해 와야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왔을 때, 예수는 그에게 “너는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중생론(重生論)이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가 되었습니다. 중생하려면 인간은 참부모를 맞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짓 부모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짓 부모와는 다른 부모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주는 후(後)아담으로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후아담은 타락한 아담이 아닙니다. 원래 완성하게 되어 있던 아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끝날에 타락하지 않은 아담을 통하여 타락한 아담을 복귀하십니다. (52-125,1971.12.26) 

거짓 자식이 됐으니 참부모의 복중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됩니 다. 그래서 기독교도 중생이라는 말, 부활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뱃속에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내가 희생해 가지고 본연의 생명의 씨인 하나님의 뼛속에 있는 정자와 하나님의 어머니 성품에 있는 난자의 씨를 이어받아 하나님 속에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중생이라는 논리가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 사실인가 검증하고 판단해 나온 사람이 여기 서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393-285,2002.10.6) 

인간이 잘못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다시 태어나려면 잘된 부모를 중심삼고 사랑의 기관이 하나될 수 있는 결혼 기반을 통해 나와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일이 역사상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부모가 나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보내는데, 최후의 재림시대에는 참부모를 보내서 이 모든 틀어진, 병난 곳을 고쳐서 낫게 하여 천국에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입니다. 중생이 뭐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잘못 태어났으니 어머니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대화한 얘기를 성경을 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347-238,2001.7.5)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얘기한 것이 이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하니까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 참부모 한 사람이 와서 세계 사람을 낳을 수 없으므로 접붙이는 것입니다. 하룻저녁에 접붙여 가지고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로 만들 수 있습니다. 4천만도 하루, 일주일 이내에 다 할 수 있습니다. 인류도 40일 이내에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가 퍼지는 날에는 순식간에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48-38,2001.7.6) 

결국 거짓 사랑, 거짓 생명, 거짓 부모로 말미암아 거짓 혈통이 생겼으므로 참부모가 와서 이것을 다시 한 번 탕감복귀, 이것을 부정해서 뒤집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말은 탕감할 때까지 사망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죽을 자리에까지 가더라도, 죽고 나서도 살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죽는 것을 슬퍼하고 도망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영원히 부활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347-178,2001.7.4)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언제 중생했느냐 이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사랑을 중심삼은 새 생명과 새 세계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생이 쉬운 게 아닙니다.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것을 선생님이 개발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탄세계가 갈라져 나갔습니다. 사탄이 복중에서부터 시작했지요? 사탄 아버지로부터 복중에서 타락했으니 이를 복귀하기 위해서도 들어가 가지고 새 아담으로부터 나와야 됩니다.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뱃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을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 됩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보다도 더 사랑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누구보다 더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그렇게 하려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그 말은 십자가를 지면 탕감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219-234,1991.9.8) 

구원섭리는 복귀섭리입니다. 회복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가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이 태어났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접붙이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생(重生)의 원리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생. 도대체 왜 다시 나야 되느냐?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됩니다. 들어가는 데는 그냥 막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탄과 하나님의 공증(公證) 아래 들어갔다 나왔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중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37-99,1985.12.24) 

탕감복귀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 참부모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참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기 위해서는 참부모가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는 혈통적으로 중생하는데도 참부모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137-114~115,198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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