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원본 제1권 66-72쪽
하나님은 나를 앎으로 알 수 있음 (훈독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根本에 対하여까지 알아보려고 하고 있다. 果然 其 自体가 明白하여서 天宙의 全部를 円滿하게 理解하고자 함에서 始作 할 수 있는 것(事実)은 分明하다. 사람은 하나님에서 始作하였으며 萬物도 亦是 하나님으로부터라고 (是定)할 수 있지만 根本되는 하나님은 어떻(如何하)게 始作하였으며 其前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하나님 存在의 根本보다도 実際問題는 第一 가까운데 있는 自己가 問題다. 現実 自己 存在의 根本을 안 後에야 다음 問題가 하나님으로 옮겨져야 할 事実인데 自己의 存在의 根本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存在 如何를 말해봐야 其 自体는, 例를 들면 公式의 根本 單位로 될 自体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單位數로 있는 自体의 問題를 確定하여만 其 公式의 第一步 應用의 始作을 繼續하여 많은(多大한) 基本公式과 連結도 지을 수 있으면서 其 自体의 公式은 勿論 明白하여지는 事実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먼저 한 單位体의 根本公式과 같은 立場에 서 있는 自我의 한 存在만 確定하면 其他의 存在決定은 如実한 結果로서도 推測하여 그에 비춰지는 根本自体를 파악(把得)할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自己가 有냐 無냐 하는 것이 먼저 疑心하여야 할 事実이 根本으로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自己가 있다면 무엇을 보아서 알 수 있는가? 良心을 보아서인가? 그러면 感覚을 보아서인가? 그러하면 体型을 보아서인가? 하는 데에서 問題는 始作인데 良心과 感覚과 体型이 有라고 하면 무엇을 標準잡고 말하는 지를 다시금 吟味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有라고 하는 것과 無라고 하는 것은 最初에 分岐奌을 무엇으로 잡고 있는가가 生覚할 重要問題다. 有하다면 相対가 無하다는 것을 聯想시키는 事実인데 사람들이 有라하는 그 自体는 무엇을 標準하고 始作하게 되며 그 始作은 어느 限度까지 扩大하고저 하는가. 또 그와 反面에 無하다는 것도 어느 정도로 無를 規定하고저 하는가가 問題이다. 無하다면 実体無한 存在는 始作奌을 잡아 주어야 하지 않았는가? 그런고로 사람 自体들이 無라거니 有하거니 하는 것은 어느 한 存在를 일러 有에 處하여든가. 無에 處케 하든가의 実在 存在를 規定 지은 위에서 말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내가 있다고 하는데는 無한 実体에 対하여서 成立되는 名詞다. 그렇다면 無는 어딘가 하나의 可否 存在의 根本決定을 지어주는 한 中心存在은 무엇인가가 要求되는 바인데 이 存在는 自己를 前在條件으로 規定한 基盤 위에서 始作하였기에 有無의 決定的 判結을 내리는 行例가 至今 사람들이 말하는 凡例의 事実이다. 그러므로 이 事実은 自己를 中心하고있는 事実을 生覚하지 않고 他 自体에로부터의 始作奌을 보고자 하는 데서 여러가지 存在의 樣定을 알 수 없게 하는것이 事実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自己가 하나의 無限有와 無限無와의 中間存在이며 하나의 公式 單位体型이라는 事実을 明白히 하는 것이 오늘날(今日) 사람이 짊어진 課業이다.
그러므로 有라고 하는 것은 自体가 良心으로나 感覚으로 体型上으로 実定할 수 있는 事実들을 否定 못함으로 有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有自体는 至今 無의 始作을 決定짖는 基本行動으로 이는 始作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고로 無를 決定한다면 그 決定한 自体가 無의 絶大値를 可決하였는가? 그 無에 対한 程度는 어떠한(如何인)가가 疑問되니 그 無라고 하는 그 奌은 有와의 어떤 距離를 갖고 있는지 大端히 重要한 問題다. 卽 無라고 하는데는 우리가 보고 보이지 않는 程度인지 또 感覚할 수 없는 程度인지 体型을 構成할 수 없는 程度인지 그 立場이 明白한 奌은 어떠한(如何인)가 하면 実在感覚內에 屬하는 데에서만 有無의 出発奌를 잡고 있다. 그러면 사람이 有라든가 하는 것은 実体로서만 問題삼지 말고 無라고 하는데에 있어서 그 無란 우리가 無라고 하는 바는 絶大値가 아니고 有와 連關을 가질 수 있는 存在의 繼續体로서 우리 感覚으(內)로 感觸할 수 없는 範圍 外에 있는 存在라는 것을 말하여 주는 事実이다. 그러므로 이 無라고 하는 것은 더 적은 無에로 나아 갈 수 있는 中間存在임을 알려준다.
그런고로 나를 有로하는 自体를 數로 表示하면 ①이라고 할 수 있다면 無라고 하는 것은 零⓪ 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 ①數字를 보아서 零이 있다고 至今 數学世界에서 보고 있지만 이 零이라는 存在가 數字上으로는 表示되나 実際에 있서는 零이 無가 아니고 零을 象徵하기 爲한 抽象存在와 같은 것이라고 至今은 말할 수 있다. 卽 無에는 無限無를 限定 못하니 그 無의 中心이야 零을 가지고는 表示도 못한다. 그런고로 零을 잡아보면 零이라는것은 數字上으로 理論上 存在라고는 認定할 수 있으나 実際上으로 零이라고 하는 零의 占有 位置에 서 있어 一般的으로 알려지고 있는 零과는 判異한 自体이다. 그런고로 零이라고 現 社会에서 쓰고 있는 것은 有의 小形体의 것이며 더 小로써 無限大로 되어지는 存在의 中間自体임을 아니라 하지(非定) 못한다.
有와 無의 境界線은 卽 하나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나를 잘 알려면 無限有에 始作이면서 無限無의 始作의 基礎를 알아야 할 重大한 問題가 生起는 바이다. 하나와 零의 同一奌이라고 하고 보니 無限有와 無限無의 存在의 第一 中心 據奌의 卽 하나가 零線의 境界奌이다. 그러므로 나 하나는 無限有의 始作의 存在이며 第一 極小有의 存在를 알고 있는 바이면서, 또 無限無에 最大存在라는 其 立場을 取하고 있는 自体가 卽 ① 하나인 것이라고 하는 存在다.
원리원본 제1권
하나님은 나를 앎으로 알 수 있음(한글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근본에 대하여서까지 알아보려고 하고 있다. 과연 그 자체가 명백하여서 천주의 전부를 원만하게 이해하고자 함에서 시작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은 하나님에서 시작하였으며 만물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근본이 되는 하나님은 어떻게 시작하였으며 그 전에는 또 무엇이 있었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하나님 존재의 근본 보다도 실제 문제는 제일 가까운데 있는 자기가 문제다. 현실 자기 존재의 근본을 안 후에야 다음 문제가 하나님으로 옮겨져야 할 사실인데 자기의 존재의 근본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어떻다고 말해봐야 그 자체는, 예를 들면 공식의 근본 단위로 될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단위수로 있는 자체의 문제를 확정하여야만 그 공식의 제일보 응용의 시작을 계속하여 많은 기본공식과 연결도 지을 수 있으면서 그 자체의 공식은 물론 명백하여지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먼저 한 단위체의 근본공식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자아의 한 존재만 확정하면 기타의 존재결정은 여실한 결과로서도 추측하여 그에 비춰지는 근본자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자기가 유냐 무냐 하는 것을 먼저 의심하여야 할 사실이 근본으로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가 있다면 무엇을 보아서 알 수 있는가? 양심을 보아서인가? 그러면 감각을 보아서인가? 그러하면 체형을 보아서인가? 하는데에서 문제는 시작인데 양심과 감각과 체형이 유라고 하면 무엇을 표준잡고 말하는 지를 다시금 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유(有: 있음)라고 하는 것과 무(無: 없음)라고 하는 것은 최초에 분기점을 무엇으로 잡고 있는가가 생각할 중요한 문제다. 유(有)하다면 상대가 무(無)하다는 것을 연상시키는 사실인데 사람들이 유(有)라 하는 그 자체는 무엇을 표준하고 시작하게 되며 그 시작은 어느 한도까지 확대하고자 하는가? 또 그와 반면에 무(無)하다는 것도 어느 정도로 무(無)를 규정하고자 하는가가 문제이다. 무(無)하다면 실체 무(無)한 존재는 시작점을 잡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고로 사람 자체들이 무라거니 유하거니 하는 것은 어느 한 존재를 일러 유(有)에 처하든가. 무(無)에 처하게 하든가의 실재 존재를 규정 지은 위에서 말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내가 있다고 하는데는 무(無)한 실체에 대하여서 성립되는 명사다. 그렇다면 무는 어딘가 하나의 가부 존재의 근본결정을 지어주는 한 중심존재는 무엇인가가 요구되는 바인데 이 존재는 자기를 전제조건으로 규정한 기반 위에서 시작하였기에 유무의 결정적 판결을 내리는 행례가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범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자기를 중심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타 자체에로부터의 시작점을 보고자 하는 데서 여러 가지 존재의 양정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자기가 하나의 무한유(無限有)와 무한무(無限無)와의 중간존재이며 하나의 공식 단위체형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는 것이 오늘날 사람이 짊어진 과업이다.
그러므로 유라고 하는 것은 자체가 양심으로나 감각으로 체형상으로 실정할 수 있는 사실들을 부정 못함으로 유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 자체인 (자아) 는 지금 무의 시작을 결정짓는 기본행동으로, 이는 시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고로 무를 결정한다면 그 결정한 자체가 무의 절대치를 가결하였는가? 그 무에 대한 정도는 어떠한가가 의문되니 그 무라고 하는 그 점은 유와의 어떤 거리를 가지고 있는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즉 무라고 하는데 있어서는 우리가 보고 보이지 않는 정도인지 또 감각할 수 없는 정도인지 체형을 구성할 수 없을 정도인지, 그 입장이 명백한 점은 어떠한가 하면 이 실재 감각내에 속하는 데에서만 유무의 출발점을 잡고 있다. 그러면 사람이 유라든가 하는 것은 실체로서만 문제삼지 말고 무라고 하는데 있어서 그 무란, 우리가 무라고 하는 바는 절대치가 아니고 유와 연관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의 계속체로서 우리 감각으로 감촉할 수 없는 범위 외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여 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무라고 하는 것은 더 적은 무에로 나아갈 수 있는 중간존재임을 알려준다.
그런고로 나를 유(有)로하는 자체를 수로 표시하면 ①이라고 할 수 있다면 무(無)라고 하는 것은 영○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 ① 수자를 보아서 영이 있다고 지금 수학세계에서는 보고 있지만 이 영이라는 존재가 숫자상으로는 표시되나 실제에 있서서는 영이 무가 아니고 영을 상징하기 위한 추상적 존재와 같은 것이라고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즉 무에는 무한무(無限無)를 한정 못하니 그 무의 중심은 영을 가지고는 표시도 못한다. 그러므로 영을 잡아보면 영이라는 것은 숫자상으로 이론상 존재라고는 인정할 수 있으나, 실제상으로는 영이라고 하는 영의 점유 위치에 서 있어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영과는 판이한 자체이다. 그런고로 영이라고 현 사회에서 쓰고 있는 것은 유의 소형체의 것이며 더 소로써 무한대로 되어지는 존재의 중간자체임을 아니라 하지 못한다.
유와 무의 경계선은 즉 하나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나를 잘 알려면 무한유의 시작이면서 무한무의 시작의 기초를 알아야 할 중대한 문제가 생기는 바이다. 하나와 영이 동일점이라고 하고 보니 무한유과 무한무의 존재의 제일 중심 거점이 즉 하나와 영선의 경계점이다. 그러므로 나 하나는 무한유의 시작의 존재이며 제일 극소유의 존재를 알고 있는 바이면서, 또 무한무의 최대 존재라는 그 입장를 취하고 있는 자체가 즉 ① 하나인 것이라고 하는 존재다.
원리원본 제1권(원본 타자본)
하나님은 나를 알므로 알 수 있음
만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根本에 対하여까지 알라 보려고 하고 있다. 果然其自体가 明白하여서 天宙애 全部를 円滿하게 理解코저 함에서 始作이라고는 할 수 있는 事実은 分明하다. 사람은 하나님에서 始作하였스며 萬物도 亦是 하나님으로 부터라고 是定할 수 있지만은 根本되는 하나님은 如何하게 始作하였스며 其前에는 무었이 있섯는가 그 묻는 사람의 많다. 그러면 하나님의 存在의 根本보담도 実際問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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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 갓가운데 있는 自己가 問題다. 現実自己의 存在의 根本를 안 後에야 다음問題가 하나님으로 옴겨지여야할 事実인데 自己의 存在의 根本도 알지못하고 하나님의 存在의 如何를 말한댓짜 其自体은 例를 들면 公式의 根本單位로될 自体를 알지못하고 있는 겄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單位數로 있는 自体의 問題를 確定하여만의 其公式의 第一步應用의 始作를 繼續하여 多大한 基本公式과 連結도 질 수 있스면서 其自体의 公式은 勿論明白하여지는 事実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몬츰 한 單位体의 公式根本과 같은 立場에 서 있는 自我의 한 存在만 確定하면은 其他의 存在決定은 如実한 結果로서도 推測하여 그의 빛처주는 根本自体를 把得할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의 自己의가 有나 無나 하는가 몬츰 疑心하여야 할 事実의 根本으로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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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면 自己가 있다면 무엇보아서 알 수 있는가. 良心보아서인가 그러면 感覚보아서인가 그러하면 体型를 보아서인가 하는 데에서 問題은 始作인데 良心과 感覚과 体型이 有라고 하면은 무었를 標準잡고 말하는지를 다시금 吟味치 않을 수 업다. 사람의 有라고 하는 겄과 無라고 하는 겄은 最初에 分岐奌를 무었스로 잡고 있는가가 生覚할 重要問題다. 有하다면 相対인 無하다는 겄을 聯想식킸는 事実인데 사람들이 有라하는 그 自体은 무었標準하고 始作케되며 그 始作은 어는 限度까지 扩大하고저 하는가. 또 그와 反面에 無하다는겄도 어느 한도가 無를 規定하고저 하는가가 問題이다. 無하다면 実体無한 存在은 始作奌를 잡아 주워야 하지 않엇는가? 그런고로 사람自体들의 無라거니 有하거니 하는 겄은 어느 한 存在를 일러 有에 處하여든가. 無에 處케 하든가의 実在存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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規定지은 우에서 말하는 바를 알러야한다. 내가 있다고 하는데는 無한 実体에 対하여서 成立되는 名詞다. 그러타면 無은 어데에 한 可否存在의 根本決定를 지어주는 한 中心存在은 무었인가가 要求되는 바인데 이 存在은 自己를 前在條件으로 規定한 基盤우에서 始作하였끼에 有無에 決定的判結을 나리는 行例가 至今사람들의 말하는 凡例의 事実이다. 그러무로 이 事実은 自己를 中心하고있는 事実를 生覚지않고 他自体에로부터의 始作奌를 보고저 하는데서 여러가지 存在의 樣定를 알 수 업게 하는겄의 事実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自己가 한 無限有와 無限無와의 中間存在이며 한 公式의 單位体型이라는 事実를 明白히 하는겄의 今日 사람이 질머진 課業이다. 그러무로 有라고 하는겄은 自体가 良心으로나 感覚으로 体型上으로 実定할 수 있는 事実들을 否定 못함으로 有라고 하고있다. 그러타면 有自体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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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至今無에 始作를 決定짖는 基本行動으로 始作이라 않히 할 수 업다. 그런고로 無를 決定한다면 그 決定한 自体가 無에 絶大値를 可決하였는 그 無에 対한 程度은 如何인가가 疑問되니 그 無라고 하는 그 奌은 有와의 얻던 距離를 갓고 있는지 大端한 重要問題다. 卽 無라고 하는데는 우리가 보고 보이지 않는 程度인지 또 感覚할 수 업는 程度인지 体型을 構成할 수 업는 程度인지 그 立場의 明白한 奌은 如何인가 하면은 ??서 実在感覚內에 屬하는 데서만의 有無의 出発奌를 잡고 있다. 그러면 사람의 有라든가 하는 겄은 実体로서 많니 問題하지말고 無라고 하는데에 있서서 그 無란 우리가 無라고 하는 바는 絶大値가 않의고 有와 連關를 가질 수 있는 存在의 繼續体로서 우리 感覚內로 感觸할 수 업는 範圍外에 있는 存在라는 겄를 말하여 준는 事実이다. 그러무로 이 無라고 하는 것은 더 적은 無에로 나아 갈 수 있는 中間存在임을 알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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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고로 나를 有로하는 自体를 數로 表示하면은 ①라고할 수 있다면 無라고 하는 겄은 零⓪ 이라고 하는 겄과 같다. 한나, ①數字를 보아서 零이 있다고 至今數学世界에서 보고 잇지만 이 零이라는 存在가 數字上으로는 表示되나 実際에 있서는 零이 無가 않의고 零를 象徵하기 爲한 抽象存在와 같은 겄이라고 至今은 말할 수 있다. 卽 無에는 無限無를 限定 못하니 그 無의 中心이야 零가지고는 表示도 못한다. 그런고로 零을 잡아보면 零이라는겄은 數字上으로 理論上 存在라고는 認定할 수 있으나 実際上으로 零이라고 하는 零占有位置에 서 있서 一般的으로 알려지고 있는 零과는 判異한 自体이다. 그런고로 零이라고 現社会에서 쓰고 있는 겄은 有에 小形体에 겄이며 더 小로세 無限大하여지는 存在의 中間自体임를 非定 못한다. 有와 無의 境界線은 卽 하나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나를 잘 알려면 無限有에 始作이면서 無限無에 始作의 基礎를 알러야 할 重大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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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題가 生起는 바의다. 하나와 零의 同一奌이라고 하고 보니 無限有와 無限無의 存在의 第一 中心 據奌의 卽 하나가 零線의 境界奌이다. 그러무로 나 한나은 無限有의 始作이 存在며 第一極小有에 存在를 알고 있는 바이면서 또 無限無에 最大存在라는 其立場를 取하고 있는 自体가 卽 ① 한나인 겄이라고 하는 存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