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원본 423-434쪽
厂史的 실두루마리의 原理的 解決은 韓囗에서 始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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厂史的 실두루마리 原理的 解決은 韓囗에서 始作
厂史의 실 무더기는 하나를 端緖로 하야 始作하고 돌고 돌아 지내서 六千年 年限을 두고 도라왔건만 始作된 끝과 終熄되는 끝은 自由롭게 감기어 나온것이 아니매, 틀어지고 웅크러져 始作과 끝을 잡을 수 없는 두루 뭉두리된 厂史의 實相은 누가 歎息치 않으랴. 이 歎息을 햇치려니 現實과 지내온 厂史와는 알 수 없는 흥크러 짐으로 나온것에 대하야 이 두루 뭉두리 된 厂史의 끝을 잡아 終熄點을 찾어 한 自由의 실 무더기로 만드러 보려고 所望하여 나온 바가 歷史的 所望城으로 되어 뜻 있게 왔든 聖賢과 偉人 烈士들은 이 길이 잠겨진 端緖의 한 끝을 잡아 단겨보나 제 멋대로 웅크러진 실무더기는 自由롭게 나에게 한빰의 길이도 融通못하니 이 끝을 잡고 나타났든 偉人 聖賢들은 絶望과 함께 歎息의 惡憂의 根據地로 저주하고만 이 실무더기는 如前히 回傳을 繼續하여 變함없는 하루의 延長으로 웅크러지면서 굴어나오고 있다. 이 흥크러지게된 歷史的 실두루머리를 골라 펴 놓아 自由의 실두루머리로 하고저 함이 歷史的 要求였고 굴러나가는 未來의 要求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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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두루머리가 한 自由端緖로부터 自由 終熄点까지 감길 수 있는 실두루머리를 本來부터의 原理를 갖이고 存在하는 실두루머리의 目的이었건만 存在할 수 없는 흥크러짐의 모양이란 全部 全體에 대하여 存在의 實相이 실두루머리를 슲으게하는 矛盾의 始作이다.
이 始作은 存在하는 価値性을 破壞하야 찾을 수 없는 隘路의 무더기로서 그 眞相으로! 그 眞相은 全部가 원한의 根據地로 되어 死亡의 구렁텅이로 通하게 되는 처랑한 모습으로 変하여 나왔다. 그러면서 人間들은 찾고 찾아 始作된 端緖와 끝된 端緖를 찾아 당기어보니 당기면 당길수록 실무더기는 올모로 되어 한덩어리 罪의 두루뭉시로되어 당기는 者의 멋대로 이 실무더기는 움직이게 되니 끝은 있으나 그 繼續을 연한 실무더기로되 한 갈래 갈래에 연하여 있는 실 모습도 찾어 볼 수 없이 한 두루뭉시라도 보이게 되니 끝을 잡고 있는 者들의 마움대로 끌리어 당기는 두루뭉시의 놀음 놀이가 노알의 歷史의 表現으로 된 現實의 實相(실상)이다.
始作한 첫 끌을 잡으려 할때 유심(唯心)의 문은 열리게 되고 나종의 끌을 잡으려 할때 유물의 (唯物) 문으로 通하게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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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作의 문을 나온 歷史의 出發은 굴기 始作하는 路程을 取하여 꼬부라지고 웅크러진 軌道를 잡아 굴어나와 돌고 돌아 두루뭉수리의 길을 잡고 나오고 있으니 뒤를 도라보아도 흥크러진 실무더기은 앞을 보아도 흥크러진 실무더기니 이 끝 저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한 무더기를 이루어 나종 끝으로 쥐이게 되는것이 唯物의 문으로 起着点을 잡게 되어 있는 바가 歷史的 실두루머리며 人間世界의 실두루머리인바다.
처음 끝을 잡고 있는 者가 唯心이요 나종 끝을 잡고 있는 者가 唯物이니 (사탄) 서로 당기어 이 실두루머리를 自己便으로 갂이 옮겨 놓으려고 하고 있으매 옮기면 옮길 수록 自己에게 가저 놓을 수록 옮겨지는 自體에 대하야 한 끝은 反作用의 原理에 比例되는 力의 反作用을 받게 되니 하나 당기면 相對便이 헤기우고, 相對便이 헤기우면 이 便도 당기어 漸漸 疑心하게 웅크러지는것은 두루뭉시리의 실 무더기 뿐이다.
이것을 풀려하는 人間에게 있어서는 唯心的 끝의 部分과 唯物的 끝의 部分만이 原理 現線인 모양으로 보여짐에 唯心은 唯心編에서 解決向線을 向하여 나오고보면 唯物에 固着되어 당기여 있는 실두루머리를 逢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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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物에서 自由向線을 取하여 찾어 올라가면 唯心便에서 당기고 있는 실두루머리에 逢着하게 됨이니 唯心에서 唯物로 通하야 하는것이 原理의 끝을 가진 連하여 있는 실 두루뭉시리의 路程을 通하여야 만이 되겠고, 唯物에서 唯心에로 通하여야 하는 것이 原理의 끝을 가진 連하여 있는 실 두루뭉시리의 路程을 通하여야 만이 되겠고, 唯物에서 唯心에로 通하여야 하는것이 原理인데 이 두 두루뭉시리된 실무더기를 通하여야 만이 끝에서 끝을 通하는 바인데 이 두루뭉시리의 通하는 길을 찾어 보러니 요길도 고길 같고 고길도 요길 같애 붙잡을 수 없는 形線을 取한 路程이매 通하는 길은 잡을 수 없으매 이 두루뭉시리의 路程은 除하여 놓고 끝만으로 모여주는 그 自體들만으로 갖고 처음과 始作으로서 맺고저 하니 唯心便만으로하고 보면 唯物이 달려오고 唯物便만으로 하고보면 唯心이 달려오고 하는것은 흥크러진 실무더기가 나타날 未知의 路程으로 그 存在를 갖고 있기에 그 取하는 自體들의 始作 끝에는 自然的 膳物로서 보여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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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풀기 위할래는 것이 人間의 理想인 同時에 創造主의 바라는 바의 所望이매 두 끝을 그냥 잡고 있어서는 풀릴바 萬無함으로 한 끝만을 固着시켜 놓고야 만이 다음 끝으로 되푸리 한 路程을 反復하여 풀어 올라가야만이 될바가 至今 실무더기를 풀려고 하는것이 現時的 課業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한 끝을 놓아야 하겠는데는 造物主가 계심으로 뿌리되는 唯心論的 根據를 놓을 수 없는바이다. 이를 놓으면은 中心을 잃어버린 存在物과 같이 居處없는 方向線을 取하여 回傳하다가 破壞를 이루는 것이 原理的 事實이며 葉部인 唯物的 事實이 놓으여야 할 責任이 自然公式原理로 되는바다.
그럼에 두루머리의 現實의 歷史的 潮流는 한 寄着點을 보아야 할바가 要求되는 路程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造物主가 있다 할진대 必然的으로 끝을 잡고 있는 唯物的 固着點은 끊겨 지어야 되는바가 原理로 되는바다. 그렇게 하면 이 실 두루뭉시리는 唯心便으로 옮겨 놓아 創造主인 根本体앞에 나타나게 될 때 이 실 두루뭉시리의 端緖로부터 낱낱이 골라 놓아 歷史的 路程에 펴 놓아 唯物的 根據地까지 一平線路程으로 펴 놓을 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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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卽, 歷史路程을 主管하여왔든 主人公이기에 이런 실무더기의 흥크러진 通路를 움지겨 나왔기에 이것을 풀 수 있는 存在 基本되는 創造前級에 屬하는 하날의 存在가 아니겠는가? 이 目的 課業을 감당하기 위한 그 存在가 歷史的 中心存在며 原理完成할바는 말할 바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 存在는 하날的으로도 中心存在은 또 歷史的 人類에게 대한 中心 存在로 되는바는 事實이다. 人間은 그저 이 歷史的 두루뭉시리를 푸는 그 中心 存在를 所望星으로 하여 그의 뒤를 연하여 푸러야 할 第二次的 立場에 세우려 하여서 創造主는 그 中心 存在로 因하여 풀 수 있으매 뭇 人類에 대하여 이 存在에게 合하여 하나 되라고 要求한 바로 보내신 存在가 卽, 그리스도 예수이었다.
예수는 이 全部의 路程의 目的을 풀 수 있는 길을 다 잡지 못하였기에 再臨이라는 名詞를 남기고 가게 되었다. 그러매 歷史的 모든 人類는 예수를 中心하고 설 수 있게 되매 다시 人類앞에 남어진 根本의 路程을 찾어 주어야 하겠으니 地球上에 나어져 있는 唯物史觀을 通하야 役事하는 사탄의 固着點을 끊어야 할바이니 이것이 끊겨야 만이 하날 (創造主)의 뜻대로 이 실두루머리를 풀 수 있겠으니 이 対業을 取하게 하는것이 終末 審判의 劃期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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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야 한 끝은 끊였으니 하날의 自由 (뜻대로)로 原理路線을 찾아 展開시킬 수 있갔으메, 이 뜻 目的(목적)을 두고 보내심의 그 存在(존재)가 나타나여야 할 再臨主의 存在이다. 이로 因하야 끝에서 끝으로 通 할 수 있는 웅크러진 실무더기를 펴 놓는 自由路程을 建設하는 目的의 完成을 볼 수 있음으로 墮落이 없었든 그 原理的 世界를 門으로 하여 온 人類가 이로 因하야 웅크러졌든 실무더기를 보지 않든 끝에서 끝 通할 수 있는 自由路程을 取할 수 있는 原理를 다시 찾어 이룰 수 있는것이므로 復歸라는 名詞로 完成되어 無限히 通할 수 있는 始作點부터 終熄点까지 通하여 거리낌 없는 向線으로 다시 始作點의 企劃을 보게 될 때에 原理的 路線은 完成됨으로 永遠이라는 바는 自由 原理인 것이다. 이 路線에 선 者는 始作과 끝을 잡는 者로서 처음과 나종을 通할 수 있는 要素로서 알패와 오메가的 理想(을 完成하여 原理脫線없으면 永遠 自由向線에서 活動할 수 있는 解放 存在로 하게 하고저 함이 人類 対하여서 約束하였든 中心 存在로 因하야 始作되는 새로운 主義世界가 展開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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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存在로 因하여 누구나가 解決하지 못하든 엉크러진 실무더기를 햇치어 原理的 路程으로서 建設하려니 歷史的으로 未知였든 端緖的 路程이 보여지어 萬原理와 通 할 수 있는 共通 基點으로 되어야 할바이므로 흥크러진 歷史的 실 두루머리를 解決할 수 있는바이다. 그러니 누구나 이 基盤우에 서서 自由 原理理想을 復得하게 될 때 至今까지의 원한의 根據地도 움직여 나오든 回傳은 変하야 所望의 回傳으로 永遠無限世界로 向進을 始作케 할바가 蟊賊으로 되었다. 只今, 이와같은 根據로 된 原理世界를 目的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至今, 時期的 段階는 어떠한 때인가를 考察하지 않을 수 없는 重要 立場에 서 있음을 忘却하여서는 아니된다.
至今, 보면은 두 路線은 非原理로 出發한 膳物로서 나타나는 結果的 路線이니 原理的 唯心과 非原理的 唯物이 相隔을 取하여 두루뭉시리인 실 두루머리를 中間에 놓고 自己便으로 (右, 左, 上, 下) 당기고 있는 現實的 實相이니 어찌되어야 하는 結論은 各自의 推測으로 맡至今, 地球上에 唯物主義가 나타나여 모든 原理的 眞理라고 말하는 바는 한 끝만 쥐고 두루뭉시리를 中間에 놓고 한 끝의 部分인 엉크러지지 않은 部分을 全部로 알고 있듯이 主張하고 나오고 있는바가 唯物主義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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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 解決해야 할 실 두루뭉시리를 모든 基本의 中心으로 하는 物質格 中心地로 잡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連結되어 있는 唯心的 한 端緖의 立場을 잡지 못하는 末級的 段階에서 論理하는 事實을 摘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主義를 根本的으로 破壞시키어 이 실 두루머리를 通過하여 唯心的 端緖의 起着点을 연하게 하여 주어야 할 使命的 潮流時代가 現潮流的 象徵인바다. 歷史는 始作하였으매 完成의 目的을 向하여 움직이고 있나니 이 右左의 判決을 짓는 때가 原理上에 먼츰 나타난 非原理 世界의 始作의 完成期이다. 그리하야 새로운 原理 世界는 出發을 보아야 할것이 地球上 한 基点을 中心하고 나타나여야 할바가 要求되는 바이다. 여기에 非原理的 時代로부터 原理世界에 드러서게 될 때에는 前에 論한 歷史的 起點은 作定하여야 할바이므로 原理와 非原理와는 相対를 지어 한 線을 境界로 하여 対陣하지 않을 수 없는 中心 線 起點으로 된다. 이 起點의 立場이야 非原理의 最終部의 末路이며 原理와 始作의 起點인 바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世界上에 이 起點地帶는 새 出發의 起點地帶로서 나타나여야 할바가 根本으로 되어야 할바는 사실이다. 그것이 卽, 歷史的 所望의 터요 希望의 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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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 非原理 存在인 사탄과 原理 存在인 하날과 決戰할 勝敗를 決하는 起點地라는 바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 起點地부터 歷史的 새로움의 端緖가 始作 되어야 하는 바가 歷史的 要求로 바라든 所望의 始作이라는 것은 아러야 한다. 至今, 이 起點線上을 分로하여 싸우게 하는 中心起點과 그 線을 世界上에 찾어 보게 될 때에 韓囗이라는 나라를 起點으로 하고 三八線이라는 線을 分立線으로 하여 歷史的 終止符를 찍고저 하는 이터야 말로 人類의 서로움과 悲哀의 기점이 되는 同時에 幸福과 기쁨의 기점이 되어야 한다는 原理的 結論上을 離脫할 수 없음애 그 기점을 向하여는 하날이 總動員하는 기점임은 사실이고, 또, 그와 反面에 惡이 總動員하여 나타나는 起點하여 나타나는 起點임은 사실이다.
이 原理的 対峠戰을 바라보는 世界人間들은 不安으로 바라 보야 할 焦點地라는 것은 事實인 同時에 反面에 希望의 焦點地라는 것도 事實로 되어야 하는바가 事實이매 歷史上에 없는 새로운 사실들이 이 起點地 韓囗을 中心하고 이루어 질바는 이에 더 論할 바 없는 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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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 世界 平和의 새로운 機構로 된 UN은 韓囗에서부터 그 本 出發을 보는 바이고 反対인 共産 衛星國家도 韓囗을 対하여 相衝을 보지 않으면 아니될 歷史的 攝理路程의 根本地로 되기에 이러한 現象을 展開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韓國平和는 世界平和의 起點되는 平和로서 되어야 하며 韓國戰爭은 世界戰爭으로 나타나는바가 結論的 目的으로 되는 바이다. 또 이 韓囗은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을 中心하고 対峠되는 戰爭이매 그리스도의 理想을 出發 볼 수 있는 解決 짓는 根本의 戰爭이며 追放으로 하는 審判 目的 完成하는 根據地이매 聖經完成하여야 할 空中 再臨과 함께 地上 再臨의 目的을 完成하여야만이 하나님이 攝理하여 오든 歷史的 새로운 出發로의 基台 잡을 수 있는 바이므로 하나님을 中心한 世界人은 總合하여 하날 直接主管으로 나타나여야 할 바가 目的이므로 韓囗 戰爭中에 歷史上에 보지 못하였든 그리스도 空中現顯함이(기독교新聞 發表 一九五一年(1951년) 十月(10월) 三十一日(31일) 水) 한 神奇한 일로 世界 사람은 生覺하고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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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韓囗戰爭은 世界戰爭으로 또 韓囗戰爭은 하나님과 사탄의 戰爭으로 旣必코 勝利할 綿羊的 하날便되는 UN機構는 山羊的 共産國家를 敗亡시킨 後에야만이 平和理想을 始作하는바가 原理로 된다. 이것은 사탄이 最後屈服이므로 完成되는 同時에 非原理的 歷史를 終決짓는 바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原理的 平和理想을 中心한 新天新地라는 新世界는 希望의 世界라는 展開로 볼 바가 原理的 根據點으로 되어 있다. 이리하여 흥크러진 歷史的 실두루머리는 終止符를 찍고 始作 끝에서부터 나종 끝으로 通할 수 있는 한 回路的 理想을 完成 할 수 있는 理想論을 中心한 善의 世界의 目的을 中心하여 唯心, 唯物의 分別없는 一體的 目的을 完成하야 円和世界를 建設하야 할 바가 하나님의 바라는 바의 目的이며 또 人類가 질머진 課업으로 되어 있다. (1951年 11월 18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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厂史的 실두루마리 原理的 解決은 韓囗에서 始作
厂史의 실무더기는 하나를 端緖로 하여 始作하고 돌고 돌아 지내서 六千年 年限을 두고 돌아왔건만 始作된 끝과 終熄되는 끝은 自由롭게 감기어 나온 것이 아니매, 틀어지고 헝크러저 始作과 끝을 잡을 수 없는 두루뭉수리된 厂史의 實相은 누가 歎息치 않으랴! 이 歎息을 헤치려니 現實과 지내온 厂史와는 알 수 없는 헝크러짐으로 나온 것에 대하여 이 두루뭉수리 된 厂史의 끝을 잡아 終熄點을 찾아 한 自由의 실무더기로 만들어 보려고 所望하여 나온 바가 歷史的 所望城으로 되어 뜻 있게 왔던 聖賢과 偉人 烈士들은 이 길의 잠겨진 端緖의 한 끝을 잡아 당겨보나 제 멋대로 헝크러진 실무더기는 自由롭게 나에게 한 뼘의 길이도 融通을 못하니 이 끝을 잡고 나타났던 偉人 聖賢들은 絶望과 함께 歎息의 惡憂의 根據地로 저주하고만 이 실무더기는 如前히 回傳을 繼續하여 變함없는 하루의 延長으로 헝크러지면서 굴러나오고 있다. 이 헝크러지게된 歷史的 실두루마리를 골라 펴 놓아 自由의 실두루마리로 하고자 함이 歷史的 要求였고 굴러나가는 未來의 要求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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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두루마리가 한 自由 端緖로부터 自由 終熄点까지 감길 수 있는 실두루마리를 本來부터의 原理를 가지고 存在하는 실두루마리의 目的이었건만 存在할 수 없는 헝크러짐의 모양이란 全部 全體에 대하여 存在의 實相이 실두루마리를 슬프게 하는 矛盾의 始作이다.
이 始作은 存在하는 価値性을 破壞해야 찾을 수 없는 隘路의 무더기로서 그 眞相으로! 그 眞相은 全部가 원한의 根據地로 되어 死亡의 구렁텅이로 通하게 되는 처량한 모습으로 変하여 나왔다. 그러면서 人間들은 찾고 찾아 始作된 端緖와 끝된 端緖를 찾아 당겨보니 당기면 당길수록 실무더기는 올무로 되어 한 덩어리 罪의 두루뭉수리로 되어 당기는 者의 멋대로 이 실무더기는 움직이게 되니 끝은 있으나 그 繼續을 연한(이은) 실무더기로되 한 갈래갈래에 연하여(이어져) 있는 실 모습도 찾아 볼 수 없이 한 두루뭉수리라도 보이게 되니 끝을 잡고 있는 者들의 마음대로 끌리어 당기는 두루뭉수리의 놀음놀이가 (노알의) 歷史의 表現으로 된 現實의 實相(실상)이다.
始作한 첫 끌을 잡으려 할때 유심(唯心)의 문은 열리게 되고 나중의 끌을 잡으려 할 때 유물(唯物)의 문으로 通하게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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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作의 문을 나온 歷史의 出發은 구르기 始作하는 路程을 取하여 꼬부라지고 헝크러진 軌道를 잡아 굴러나와 돌고돌아 두루뭉수리의 길을 잡고 나오고 있으니 뒤를 돌아보아도 헝크러진 실무더기는 앞을 보아도 헝크러진 실무더기니 이 끝 저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한 무더기를 이루어 나중 끝으로 쥐이게 되는 것이 唯物의 문으로 起着点을 잡게 되어 있는 바가 歷史的 실두루마리이며 人間世界의 실두루마리인 바다.
처음 끝을 잡고 있는 者가 唯心이요 나중 끝을 잡고 있는 者가 唯物(사탄)이니 서로 당기어 이 실두루마리를 自己便으로 각기 옮겨 놓으려 하고 있으매 옮기면 옮길수록 自己에게 가져 놓을수록 옮겨지는 自體에 대하여 한 끝은 反作用의 原理에 比例되는 力(힘)의 反作用을 받게 되니 하나 당기면 相對便이 헤기우고, 相對便이 헤기우면 이 便도 당기어 漸漸 疑心하게 헝크러지는 것은 두루뭉수리의 실무더기 뿐이다.
이것을 풀려하는 人間에게 있어서는 唯心的 끝의 部分과 唯物的 끝의 部分만이 原理 現線인 모양으로 보여짐에 唯心은 唯心編(便)에서 解決의 向線(방향선)을 向하여 나오고 보면 唯物에 固着되어 당겨 있는 실두루마리에 逢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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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物에서 自由 向線(방향선)을 取하여 찾아 올라가면 唯心便에서 당기고 있는 실두루마리에 逢着하게 됨이니 唯心에서 唯物로 通해야 하는 것이 原理의 끝을 가진 連하여 있는 실두루마리의 路程을 通하여야만 되겠고, 唯物에서 唯心에로 通하여야 하는 것이 原理의 끝을 가진 連하여 있는 실 두루마리의 路程을 通하여야 만 되겠고, 唯物에서 唯心에로 通하여야 하는 것이 原理인데 이 두 두루마리된 실무더기를 通하여야만 끝에서 끝을 通하는 바인데 이 두루마리의 通하는 길을 찾아 보려니 요길도 고길 같고 고길도 요길 같아 붙잡을 수 없는 形線을 取한 路程이매 通하는 길은 잡을 수 없으매 이 두루마리의 路程은 除하여 놓고 끝에만 모아주는 그 自體들만으로 (갖고) 처음과 始作으로 맺고자 하니 唯心便만으로 하고 보면 唯物이 달려오고 唯物便만으로 하고 보면 唯心이 달려오고 하는 것은 헝크러진 실무더기가 나타날 未知의 路程으로 그 存在를 갖고 있기에 그 取하는 自體들의 始作과 끝에는 自然的 膳物로서 보여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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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풀려는 것이 人間의 理想인 同時에 創造主의 바라는 (바의) 所望이매 두 끝을 그냥 잡고 있어서는 풀릴 바 萬無함으로 한 끝만을 固着시켜 놓고야만 다음 끝으로 되풀이 한 路程을 反復하여 풀어 올라가야만 될 바가 至今 실무더기를 풀려고 하는 것이 現時的 課業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한 끝을 놓아야 하겠는 데는 造物主가 계심으로 뿌리되는 唯心論的 根據를 놓을 수 없는 바이다. 이를 놓으면 中心을 잃어버린 存在物과 같이 居處없는 方向線을 取하여 回傳(轉)하다가 破壞를 이루는 것이 原理的 事實이며 葉部인 唯物的 事實을 놓아야 할 責任이 自然히 公式原理로 되는 바다.
그럼에 두루마리의 現實의 歷史的 潮流는 한 寄着點을 보아야 할 바가 要求되는 路程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造物主가 있다 할진대 必然的으로 끝을 잡고 있는 唯物的 固着點은 끊어져야 되는 바가 原理로 되는 바다. 그렇게 하면 이 실두루마리는 唯心便으로 옮겨 놓아 創造主인 根本体 앞에 나타나게 될 때 이 실두루마리의 端緖로부터 낱낱이 골라 놓아 歷史的 路程에 펴 놓아 唯物的 根據地까지 一平線 路程으로 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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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卽 歷史路程을 主管하여 왔던 主人公이기에 이런 실무더기의 헝크러진 通路를 움직여 나왔기에 이것을 풀 수 있는 存在의 基本이 되는 創造前 級에 屬하는 하늘의 存在가 아니겠는가! 이 目的 課業을 감당하기 위한 그 存在가 歷史的 中心存在이며 原理를 完成할 바는 말할 바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 存在는 하늘的으로도 中心存在는 또 歷史的 人類에게 대한 中心 存在로 되는 바는 事實이다. 人間은 그저 이 歷史的 두루마리를 푸는 그 中心 存在를 所望星으로 하여 그의 뒤를 연하여 풀어야 할 第二次的 立場에 세우려 하여서 創造主는 그 中心 存在로 因하여 풀 수 있으매 뭇 人類에 대하여 이 存在에게 合하여 하나 되라고 要求한 바로 보내신 存在가, 卽 그리스도 예수였다.
예수는 이 全部의 路程의 目的을 풀 수 있는 길을 다 잡지 못하였기에 再臨이라는 名詞를 남기고 가게 되었다. 그러매 歷史的 모든 人類는 예수를 中心하고 설 수 있게 되매 다시 人類 앞에 남아진 根本의 路程을 찾아 주어야 하겠으니 地球上에 나눠져 있는 唯物史觀을 通하여 役事하는 사탄의 固着點을 끊어야 할 바이니 이것이 끊겨야만 하늘(創造主)의 뜻대로 이 실두루마리를 풀 수 있겠으니 이 対業을 取하게 하는 것이 終末 審判의 劃期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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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한 끝은 끊었으니 하늘의 自由(뜻)로 原理路線을 찾아 展開시킬 수 있겠음에 이 뜻 目的(목적)을 두고 보내심의 그 存在(존재)가 나타나야 할 再臨主의 存在이다. 이로 因하여 끝에서 끝으로 通할 수 있는 헝크러진 실무더기를 펴 놓는 自由路程을 建設하는 目的의 完成을 볼 수 있음으로 墮落이 없었던 그 原理的 世界를 門으로 하여 온 人類가 이로 因하여 헝크러졌던 실무더기를 보이지 않던 끝에서 끝을 通할 수 있는 自由路程을 取할 수 있는 原理를 다시 찾아 이룰 수 있는 것이므로 復歸라는 名詞로 完成되어 無限히 通할 수 있는 始作點부터 終熄点까지 通하여 거리낌 없는 向線(방향선)으로 다시 始作點의 企劃을 보게 될 때 原理的 路線은 完成됨으로 永遠이라는 바는 自由 原理인 것이다. 이 路線에 선 者는 始作과 끝을 잡는 者로서 처음과 나중을 通할 수 있는 要素로써 알파와 오메가的 理想을 完成하여 原理 脫線이 없으면 永遠 自由 向線(방향선)에서 活動할 수 있는 解放 存在로 하게 하고자 함이 人類 対하여 約束하였던 中心 存在로 因하여 始作되는 새로운 主義世界가 展開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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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存在로 因하여 누구나 解決하지 못하던 엉크러진 실무더기를 헤쳐 原理的 路程으로써 建設하려니 歷史的으로 未知였던 端緖的 路程이 보여져 萬原理와 通할 수 있는 共通 基點으로 되어야 할 바이므로 헝크러진 歷史的 실두루마리를 解決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니 누구나 이 基盤 위에 서서 自由 原理理想을 復得하게 될 때 至今까지 원한의 根據地도 움직여 나오던 回轉은 変하여 所望의 (回轉으로) 永遠無限世界로 向進을 始作하게 할 바가 蟊賊으로 되었다. 只今, 이와 같은 根據로 된 原理世界를 目的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至今의 時期的 段階는 어떠한 때인가를 考察하지 않을 수 없는 重要 立場에 서 있음을 忘却하여서는 아니 된다.
至今 보면 두 路線은 非原理로 出發한 膳物로써 나타나는 結果的 路線이니 原理的 唯心과 非原理的 唯物이 相隔을 取하여 두루뭉수리인 실두루마리를 中間에 놓고 自己便으로 (右, 左, 上, 下) 당기고 있는 現實的 實相이니 어떻게 되어야 하는 結論은 各自의 推測에 맡기고, 至今 地球上에 唯物主義가 나타나서 모든 原理的 眞理라고 말하는 바는 한 끝만 쥐고 두루마리를 中間에 놓고 한 끝의 部分인 엉크러지지 않은 部分을 全部로 알고 있듯이 主張하여 나오고 있는 바가 唯物主義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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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 解決해야 할 실 두루마리를 모든 基本의 中心으로 하는 物質格 中心地로 잡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連結되어 있는 唯心的 한 端緖의 立場을 잡지 못하는 末(未)級的 段階에서 論理하는 事實을 摘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主義를 根本的으로 破壞시켜 이 실두루마리를 通過하여 唯心的 端緖의 起着点을 연하게 하여 주어야 할 使命的 潮流時代가 現 潮流的 象徵인 바다. 歷史는 始作하였으매 完成의 目的을 向하여 움직이고 있나니 이 右左의 判決을 짓는 때가 原理上에 먼저 나타난 非原理 世界의 始作의 完成期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原理世界는 出發을 보아야 할 것이 地球上 한 基点을 中心하고 나타나야 할 바가 要求되는 바이다. 여기에 非原理的 時代로부터 原理世界에 들어서게 될 때에는 前에 論한 歷史的 起點은 作定하여야 할 바이므로 原理와 非原理와는 相対를 지어 한 線을 境界로 하여 対陣하지 않을 수 없는 中心線 起點으로 된다. 이 起點의 立場이야말로 非原理의 最終部의 末路이며 原理의 始作의 起點인 바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世界上에 이 起點地帶는 새 出發의 起點地帶로써 나타나야 할 바가 根本으로 되어야 할 바는 사실이다. 그것이, 卽 歷史的 所望의 터요 希望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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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 非原理 存在인 사탄과 原理 存在인 하늘과 決戰할 勝敗를 決(정)하는 起點地라는 바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 起點地부터 歷史的 새로움의 端緖가 始作 되어야 하는 바가 歷史的 要求로 바라던 所望의 始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至今 이 起點線上을 分로하여(나눠) 싸우게 하는 中心起點과 그 線을 世界上에 찾아 보게 될 때에 韓囗이라는 나라를 起點으로 하고 三八線이라는 線을 分立線으로 하여 歷史的 終止符를 찍고자 하는 이 터야말로 人類의 서로움과 悲哀의 기점이 되는 同時에 幸福과 기쁨의 기점이 되어야 한다는 原理的 結論(上)을 離脫할 수 없음에 그 기점을 向하여는 하늘이 總動員하는 기점임은 사실이고, 또 그 反面에 惡이 總動員하여 나타나는 (起點하여 나타나는) 起點임은 사실이다.
이 原理的 対峠(峙)戰을 바라보는 世界 人間들은 不安으로 바라보아야 할 焦點地라는 것은 事實인 同時에 反面 希望의 焦點地라는 것도 事實로 되어야 하는 바가 事實이매 歷史上에 없는 새로운 사실들이 이 起點地 韓囗을 中心하고 이루어질 바는 이에 더 論할 바 없는 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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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 世界 平和의 새로운 機構로 된 UN은 韓囗에서부터 그 本 出發을 보는 바이고 反対인 共産 衛星國家도 韓囗에 対하여 相衝을 보지 않으면 아니될 歷史的 攝理路程의 根本地로 되기에 이러한 現象을 展開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韓國 平和는 世界 平和의 起點이 되는 平和로 되어야 하며 韓國 戰爭은 世界 戰爭으로 나타나는 바가 結論的 目的으로 되는 바이다. 또 이 韓囗은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을 中心하고 対峠되는 戰爭이매 그리스도의 理想을 出發 볼 수 있는, 解決짓는 根本의 戰爭이며 追放으로 하는 審判의 目的을 完成하는 根據地이매 聖經을 完成하여야 할 空中 再臨과 함께 地上 再臨의 目的을 完成하여야만 하나님이 攝理하여 오던 歷史的 새로운 出發로의 基台를 잡을 수 있는 바이므로 하나님을 中心한 世界人은 總合하여 하늘의 直接主管으로 나타나야 할 바가 目的이므로 韓囗 戰爭 中에 歷史上에 보지 못하였던 그리스도가 空中에 現顯함이(기독교新聞 發表 一九五一年(1951년) 十月(10월) 三十一日(31일) 水) 한 神奇한 일로 世界 사람은 生覺하고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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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韓囗 戰爭은 世界 戰爭으로 또 韓囗 戰爭은 하나님과 사탄의 戰爭으로 旣必코 勝利할 綿羊的 하늘便되는 UN機構는 山羊的 共産國家를 敗亡시킨 後에야만 平和 理想을 始作하는 바가 原理로 된다. 이것은 사탄의 最後 屈服이므로 完成되는 同時에 非原理的 歷史를 終決짓는 바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原理的 平和 理想을 中心한 新天新地라는 新世界는 希望의 世界라는 展開로 볼 바가 原理的 根據點으로 되어 있다. 이리하여 헝크러진 歷史的 실두루마리는 終止符를 찍고 始作에서부터 나중 끝으로 通할 수 있는 한 回路的 理想을 完成할 수 있는 理想論을 中心한 善 世界의 目的을 中心하여 唯心, 唯物의 分別없는 一體的 目的을 完成하여 円和世界를 建設해야 할 바가 하나님이 바라는 바의 目的이며 또 人類가 짊어진 課業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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厂史的 실두루마리 原理的 解決은 韓囗에서 始作
역사의 실무더기는 하나를 단서로 하여 시작하고 돌고 돌아 지내서 6000년 연한을 두고 돌아왔건만 시작된 끝과 종식되는 끝은 자유롭게 감기어 나온 것이 아니매, 틀어지고 헝크러저 시작과 끝을 잡을 수 없는 두루뭉수리된 역사의 실상은 누가 탄식치 않으랴! 이 탄식을 헤치려니 현실과 지내온 역사와는 알 수 없는 헝크러짐으로 나온 것에 대하여 이 두루뭉수리 된 역사의 끝을 잡아 종식점을 찾아 한 자유의 실무더기로 만들어 보려고 소망하여 나온 바가 역사적 소망성(所望城)으로 되어 뜻 있게 왔던 성현과 위인 열사들은 이 길의 잠겨진 단서의 한 끝을 잡아 당겨보나 제 멋대로 헝크러진 실무더기는 자유롭게 나에게 한 뼘의 길이도 융통을 못하니 이 끝을 잡고 나타났던 위인 성현들은 절망과 함께 탄식의 악우(惡憂)의 근거지로 저주하고만 이 실무더기는 여전히 회전을 계속하여 변함없는 하루의 연장으로 헝크러지면서 굴러나오고 있다. 이 헝크러지게된 역사적 실두루마리를 골라 펴 놓아 자유의 실두루마리로 하고자 함이 역사적 요구였고 굴러나가는 미래의 요구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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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두루마리가 한 자유 단서로부터 자유 종식점까지 감길 수 있는 실두루마리를 본래부터의 원리를 가지고 존재하는 실두루마리의 목적이었건만 존재할 수 없는 헝크러짐의 모양이란 전부 전체에 대하여 존재의 실상이 실두루마리를 슬프게 하는 모순의 시작이다.
이 시작은 존재하는 가치성을 파괴해야 찾을 수 없는 애로의 무더기로서 그 진상으로! 그 진상은 전부가 원한의 근거지로 되어 사망의 구렁텅이로 통하게 되는 처량한 모습으로 변하여 나왔다. 그러면서 인간들은 찾고 찾아 시작된 단서와 끝된 단서를 찾아 당겨보니 당기면 당길수록 실무더기는 올무로 되어 한 덩어리 죄의 두루뭉수리로 되어 당기는 자의 멋대로 이 실무더기는 움직이게 되니 끝은 있으나 그 계속을 연한(이은) 실무더기로되 한 갈래갈래에 연하여(이어져) 있는 실 모습도 찾아 볼 수 없이 한 두루뭉수리라도 보이게 되니 끝을 잡고 있는 자들의 마음대로 끌리어 당기는 두루뭉수리의 놀음놀이가 역사의 표현으로 된 현실의 실상이다.
시작한 첫 끌을 잡으려 할때 유심(唯心)의 문은 열리게 되고 나중의 끌을 잡으려 할 때 유물(唯物)의 문으로 통하게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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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의 문을 나온 역사의 출발은 구르기 시작하는 경로를 취하여 꼬부라지고 헝크러진 궤도를 잡아 굴러나와 돌고돌아 두루뭉수리의 길을 잡고 나오고 있으니 뒤를 돌아보아도 헝크러진 실무더기는 앞을 보아도 헝크러진 실무더기니 이 끝 저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한 무더기를 이루어 나중 끝으로 쥐이게 되는 것이 유물의 문으로 기착점을 잡게 되어 있는 바가 역사적 실두루마리이며 인간세계의 실두루마리인 바다.
처음 끝을 잡고 있는 자가 유심이요 나중 끝을 잡고 있는 자가 유물(사탄)이니 서로 당기어 이 실두루마리를 자기편으로 각기 옮겨 놓으려 하고 있으매 옮기면 옮길수록 자기에게 가져 놓을수록 옮겨지는 자체에 대하여 한 끝은 반작용의 원리에 비례되는 힘의 반작용을 받게 되니 하나 당기면 상대편이 헤기우고, 상대편이 헤기우면 이 편도 당기어 점점 의심하게 헝크러지는 것은 두루뭉수리의 실무더기 뿐이다.
이것을 풀려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유심적 끝의 부분과 유물적 끝의 부분만이 원리 현선(現線)인 모양으로 보여짐에 유심은 유심편에서 해결의 방향선을 향하여 나오고 보면 유물에 고착되어 당겨 있는 실두루마리에 봉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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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에서 자유 방향선을 취하여 찾아 올라가면 유심편에서 당기고 있는 실두루마리에 봉착하게 됨이니 유심에서 유물로 통해야 하는 것이 원리의 끝을 가진 연(連)하여 있는 실두루마리의 노정을 통하여야만 되겠고, 유물에서 유심에로 통하여야 하는 것이 원리의 끝을 가진 연하여 있는 실 두루마리의 노정을 통하여야 만 되겠고, 유물에서 유심에로 통하여야 하는 것이 원리인데 이 두 두루마리된 실무더기를 통하여야만 끝에서 끝을 통하는 바인데 이 두루마리의 통하는 길을 찾아 보려니 요길도 고길 같고 고길도 요길 같아 붙잡을 수 없는 형선(形線)을 취한 노정이매 통하는 길은 잡을 수 없으매 이 두루마리의 노정은 제하여 놓고 끝에만 모아주는 그 자체들만으로 처음과 시작으로 맺고자 하니 유심편만으로 하고 보면 유물이 달려오고 유물편만으로 하고 보면 유심이 달려오고 하는 것은 헝크러진 실무더기가 나타날 미지의 노정으로 그 존재를 갖고 있기에 그 취하는 자체들의 시작과 끝에는 자연적 선물로서 보여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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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풀려는 것이 인간의 이상인 동시에 창조주의 바라는 소망이매 두 끝을 그냥 잡고 있어서는 풀릴 바 만무함으로 한 끝만을 고착시켜 놓고야만 다음 끝으로 되풀이 한 노정을 반복하여 풀어 올라가야만 될 바가 지금 실무더기를 풀려고 하는 것이 현시적 과업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한 끝을 놓아야 하겠는 데는 조물주가 계심으로 뿌리되는 유심론적 근거를 놓을 수 없는 바이다. 이를 놓으면 중심을 잃어버린 존재물과 같이 거처없는 방향선을 취하여 회전하다가 파괴를 이루는 것이 원리적 사실이며 옆부(葉部)인 유물적 사실을 놓아야 할 책임이 자연히 공식원리로 되는 바다.
그럼에 두루마리의 현실의 역사적 조류는 한 기착점을 보아야 할 바가 요구되는 노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조물주가 있다 할진대 필연적으로 끝을 잡고 있는 유물적 고착점은 끊어져야 되는 바가 원리로 되는 바다. 그렇게 하면 이 실두루마리는 유심편으로 옮겨 놓아 창조주인 근본체 앞에 나타나게 될 때 이 실두루마리의 단서로부터 낱낱이 골라 놓아 역사적 노정에 펴 놓아 유물적 근거지까지 일평선(一平線) 노정으로 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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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즉 역사로정을 주관하여 왔던 주인공이기에 이런 실무더기의 헝크러진 통로를 움직여 나왔기에 이것을 풀 수 있는 존재의 기본이 되는 창조전 급에 속하는 하늘의 존재가 아니겠는가! 이 목적 과업을 감당하기 위한 그 존재가 역사적 중심존재이며 원리를 완성할 바는 말할 바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 존재는 하늘적으로도 중심존재는 또 역사적 인류에게 대한 중심존재로 되는 바는 사실이다. 인간은 그저 이 역사적 두루마리를 푸는 그 중심 존재를 소망성(所望星)으로 하여 그의 뒤를 연하여 풀어야 할 제2차적 입장에 세우려 하여서 창조주는 그 중심 존재로 인하여 풀 수 있으매 뭇 인류에 대하여 이 존재에게 합하여 하나 되라고 요구한 바로 보내신 존재가, 즉 그리스도 예수였다.
예수는 이 전부의 노정의 목적을 풀 수 있는 길을 다 잡지 못하였기에 재림이라는 명사를 남기고 가게 되었다. 그러매 역사적 모든 인류는 예수를 중심하고 설 수 있게 되매 다시 인류 앞에 남아진 근본의 노정을 찾아 주어야 하겠으니 지구상에 나눠져 있는 유물사관을 통하여 역사하는 사탄의 고착점을 끊어야 할 바이니 이것이 끊겨야만 하늘(창조주)의 뜻대로 이 실두루마리를 풀 수 있겠으니 이 대업(対業)을 취하게 하는 것이 종말 심판의 획기선(劃期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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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한 끝은 끊었으니 하늘의 자유(뜻)로 원리로선을 찾아 전개시킬 수 있겠음에 이 뜻 목적을 두고 보내심의 그 존재가 나타나야 할 재림주의 존재이다. 이로 인하여 끝에서 끝으로 통할 수 있는 헝크러진 실무더기를 펴 놓는 자유로정을 건설하는 목적의 완성을 볼 수 있음으로 타락이 없었던 그 원리적 세계를 문으로 하여 온 인류가 이로 인하여 헝크러졌던 실무더기를 보이지 않던 끝에서 끝을 통할 수 있는 자유로정을 취할 수 있는 원리를 다시 찾아 이룰 수 있는 것이므로 복귀라는 명사로 완성되어 무한히 통할 수 있는 시작점부터 종식점까지 통하여 거리낌 없는 방향선으로 다시 시작점의 기획을 보게 될 때 원리적 노선은 완성됨으로 영원이라는 바는 자유 원리인 것이다. 이 노선에 선 자는 시작과 끝을 잡는 자로서 처음과 나중을 통할 수 있는 요소로써 알파와 오메가적 이상을 완성하여 원리 탈선이 없으면 영원 자유 방향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해방 존재로 하게 하고자 함이 인류 대하여 약속하였던 중심 존재로 인하여 시작되는 새로운 주의세계가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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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존재로 인하여 누구나 해결하지 못하던 엉크러진 실무더기를 헤쳐 원리적 노정으로써 건설하려니 역사적으로 미지였던 단서적 노정이 보여져 원리와 통할 수 있는 공통 기점으로 되어야 할 바이므로 헝크러진 역사적 실두루마리를 해결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니 누구나 이 기반 위에 서서 자유 원리이상을 복득(復得)하게 될 때 지금까지 원한의 근거지도 움직여 나오던 회전은 변하여 소망의 영원무한세계로 향진을 시작하게 할 바가 모적(蟊賊)으로 되었다. 지금, 이와 같은 근거로 된 원리세계를 목적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시기적 단계는 어떠한 때인가를 고찰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 입장에 서 있음을 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지금 보면 두 노선은 비원리로 출발한 선물로써 나타나는 결과적 노선이니 원리적 유심과 비원리적 유물이 상격(相隔)을 취하여 두루뭉수리인 실두루마리를 중간에 놓고 자기편으로 (우, 좌, 상, 하) 당기고 있는 현실적 실상이니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결론은 각자의 추측에 맡기고, 지금 지구상에 유물주의가 나타나서 모든 원리적 진리라고 말하는 바는 한 끝만 쥐고 두루마리를 중간에 놓고 한 끝의 부분인 엉크러지지 않은 부분을 전부로 알고 있듯이 주장하여 나오고 있는 바가 유물주의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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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해결해야 할 실 두루마리를 모든 기본의 중심으로 하는 물질격 중심지로 잡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연결되어 있는 유심적 한 단서의 입장을 잡지 못하는 미급적 단계에서 논리하는 사실을 적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주의를 근본적으로 파괴시켜 이 실두루마리를 통과하여 유심적 단서의 기착점을 연하게 하여 주어야 할 사명적 조류시대가 현 조류적 상징인 바다. 역사는 시작하였으매 완성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나니 이 우좌의 판결을 짓는 때가 원리상에 먼저 나타난 비원리 세계의 시작의 완성기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원리세계는 출발을 보아야 할 것이 지구상 한 기점을 중심하고 나타나야 할 바가 요구되는 바이다. 여기에 비원리적 시대로부터 원리세계에 들어서게 될 때에는 전에 논한 역사적 기점은 작정하여야 할 바이므로 원리와 비원리와는 상대를 지어 한 선을 경계로 하여 대진(対陣)하지 않을 수 없는 중심선 기점으로 된다. 이 기점의 입장이야말로 비원리의 최종부의 말로이며 원리의 시작의 기점인 바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세계상에 이 기점지대는 새 출발의 기점지대로써 나타나야 할 바가 근본으로 되어야 할 바는 사실이다. 그것이, 즉 역사적 소망의 터요 희망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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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비원리 존재인 사탄과 원리 존재인 하늘과 결전할 승패를 결정하는 기점지라는 바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 기점지부터 역사적 새로움의 단서가 시작 되어야 하는 바가 역사적 요구로 바라던 소망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기점선상을 나눠 싸우게 하는 중심기점과 그 선을 세계상에 찾아 보게 될 때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기점으로 하고 38선이라는 선을 분립선으로 하여 역사적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이 터야말로 인류의 서로움과 비애의 기점이 되는 동시에 행복과 기쁨의 기점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적 결론을 이탈할 수 없음에 그 기점을 향하여는 하늘이 총동원하는 기점임은 사실이고, 또 그 반면에 악이 총동원하여 나타나는 기점임은 사실이다.
이 원리적 대치전을 바라보는 세계 인간들은 불안으로 바라보아야 할 초점지(焦點地)라는 것은 사실인 동시에 반면 희망의 초점지라는 것도 사실로 되어야 하는 바가 사실이매 역사상에 없는 새로운 사실들이 이 기점지 한국을 중심하고 이루어질 바는 이에 더 논할 바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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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 세계 평화의 새로운 기구로 된 UN은 한국에서부터 그 본 출발을 보는 바이고 반대인 공산 위성국가도 한국에 대하여 상충을 보지 않으면 아니될 역사적 섭리로정의 근본지로 되기에 이러한 현상을 전개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한국 평화는 세계 평화의 기점이 되는 평화로 되어야 하며 한국 전쟁은 세계 전쟁으로 나타나는 바가 결론적 목적으로 되는 바이다. 또 이 한국은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을 중심하고 대치되는 전쟁이매 그리스도의 이상을 출발 볼 수 있는, 해결짓는 근본의 전쟁이며 추방으로 하는 심판의 목적을 완성하는 근거지이매 성경을 완성하여야 할 공중 재림과 함께 지상 재림의 목적을 완성하여야만 하나님이 섭리하여 오던 역사적 새로운 출발로의 기대를 잡을 수 있는 바이므로 하나님을 중심한 세계인은 총합하여 하늘의 직접주관으로 나타나야 할 바가 목적이므로 한국 전쟁 중에 역사상에 보지 못하였던 그리스도가 공중에 현현함이(기독교신문 발표 1951년 10월 31일, 水) 한 신기한 일로 세계 사람은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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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한국 전쟁은 세계 전쟁으로 또 한국 전쟁은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으로 기필코 승리할 면양적 하늘편되는 UN기구는 산양적 공산국가를 패망시킨 후에야만 평화 이상을 시작하는 바가 원리로 된다. 이것은 사탄의 최후 굴복이므로 완성되는 동시에 비원리적 역사를 종결짓는 바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원리적 평화 이상을 중심한 신천신지라는 신세계는 희망의 세계라는 전개로 볼 바가 원리적 근거점으로 되어 있다. 이리하여 헝크러진 역사적 실두루마리는 종지부를 찍고 시작에서부터 나중 끝으로 통할 수 있는 한 회로적 이상을 완성할 수 있는 이상론을 중심한 선 세계의 목적을 중심하여 유심, 유물의 분별없는 일체적 목적을 완성하여 원화세계를 건설해야 할 바가 하나님이 바라는 바의 목적이며 또 인류가 짊어진 과업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