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와 零은 境界를 定하지 못함 (원리원본 제1권 72-88쪽)

훈독왕 | 20190209201158

원리원본 제1권 72-88쪽


하나와 零은 境界를 定하지 못함(훈독본)


數字上으로는 零과 ①하나와는 相異位置를 갖고 있지만 実際에 있어서는 同一奌을 離脫못하는 共通路線上의 存在다. 그러므로 実在上으로는 1=零이라고 할 수 있는 程支의 存在들이다.
1= 零
1= 絶大値數 基本數며 有의 基本存在다.
零= 無限無의 絶大値數면서 有의 無限小數의 中間存在다.


그런고로 問題되는 바는 나 한 自体가 重大問題인데 나는 至今 어디서부터 始作하여 잡은 存在라고 하고 싶은가. 그것은 各自의 自由에 맡기기로 하자. 卽 ①에서 始作하였으면 그 하나가 갖고 있는 存在의 実價値를 全部認識하여만 되지 않겠는가가 先決問題다. 卽 無限大와 無限小의 問題보다도 其 中間自体인 하나의 存在의 規定에 큰 難關逢着이라 아니할 수 없는바다.


이 하나되는 自我를 알려면 無限大에 対한 位置부터 無限小의 位置가 갖고 있는 中間存在에 対한 全部를 알아야만 自己에 対한 確実한 規定를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그 存在 全部를 알 수 있서야만 其보다 더 큰 存在애 対한 根據를 解決할 資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도 自己가 있다고 하여 놓고 無한 事実이니 無하다니 하는 바는, 卽 數의 世界에 있어서 零이라하여 絶大無의 存在를 決定한듯이 하고 있는 바와 同一한 生覚으로 되어 있는 바와 한가지다. 없다 할 때는 無限小에까지 倒達한 後 其世界가 自己의 認定範圍內에 들어서게 될 대에는 無에 対한 結論은 可능할 것인데 그곳조차 生覚도 못하고 그저 無라면 自己가 無라고 하는 바가 그낭 無로서 萬事를 解決하여 주는 中心存在로 되는가? 그것은 至極히 어리석은 行動이다.


有라 할진대 其 存在의 價値는 絶對有까지 繼續 存在하고 있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有라고 하는 自己와 無의 中心 立場의 自己에 対하여서 알러고 할 적에 第一 큰 問題는 中心奌이다. 卽 有도 내가 있어야 되며 無도 내가 있어야 된다. 問題에는 決定的 存在는 바로(卽) 自己이다. 이 自己가 至今解決에 수수께끼가 되는 根本問題다. 그런고로 먼저 天宙의 基本單位라고도 할 수 있는 自己를 解得하여라. 그리고 나서 다른 存在가 問題 되는 바이다. 自己를 明白하게 解決하면 其以上의 (対한) 聯關的 事実에 対하여서는 認識할 수 있는 것(事実)이다. 그런고로 自己 하나 알고보면 하나님도 其 存在에 対하여 有無에 対한 問題는 크게 論할 問題도 아니다.


그런고로 알아야 한다는 하나님에 対한 根據의 如何는 먼저 被造体인 自己의 根本에 対한 実感性을 알고 나아가면서 探求하면 第一存在의 確実性은 自然的 意識存在로 계시는 것이다. 그것이 明白한 体驗을 実行하여 찾아 보면 其 自体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絶大有에서 絶大無의 基本存在이므로 어느 面에서도 單位的 路線에서만 서서 左右을 찾으면 그 存在는 自然的으로 体感된다. 그 体感으로써 하나님의 存在에 対하여 確実한 根本問題를 解決할 수 있는 바이다. 왜냐하면 無限大에서 無限小에 通한 共通路程(征)으로 흐르는 無限大이면서 無限小의 힘을 보아 이 힘은 公式과 같은 法理를 通하여 聯絡되고 있으며, 其 어떤 中間立場에서라도 自己만의 其 힘과 感應될 수 있는 單位体로 平衡路上에 서게 되면 無限大에서 無限小에 흐르는 그 感智를 通하여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無限大에서부터 無限小에까지 連關하는 中心動力体이다. 그러면서 永遠을 標準삼고 始作하며 나아간다. 그런고로 사람은 其 中間 存在다. 이 中心存在가 完成하여만 天宙的 公理法則은 円滿化를 가져오게 된다. 卽 하나님은 無에 계셔서 有에로 作用하고 사람은 有에서 無에로 授受作用円滑化를 取하여만 円滿한 存在가 되는 것이 天理이며 創造原理다.
 
이 그림을 보면 사람은 單位的 位置에 居한다. 사람을 通하여만 宇宙와 天宙의 理想이 完成하게끔 지으셨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몸으로 지은 特有의 存在로 지었기 때문이다. 有(+) 無(-)라고 表示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 (-)의 中和体로 되어 있다. (-)는 靈으로 (+)는 肉体로서 合体되었다. 그런고로 사람은 灵과 肉身 합하여서만 完全한 사람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靈을 長成시켜서 灵人体를 完全 造成하면 無의 世界까지 通할 수 있는 中間存在体다. 그런고로 本來 사람은 灵人体를 完成하여야 한다.


그러면 灵人体라면 어떤 構造로 되었는가 하면 灵体, 生命体, 生灵体로 되어 있다. 그러면 肉身에는 肉体와 肉心이 있는 것이 마찬가지로 灵人体에는 生心를 中心하고 灵体를 附殖할 수 있는 基本 터를 이루며 長成하여서 生命体로 나아가 그 生命体가 되어야만 하늘의 한 長成体를 가진 自体로서 活動할 수 있는 것이다. 其 生命体에다 生灵体를 이루어야 本創造理想 灵人体로 되어 있다.


그런데 至今까지 墮落되니 人間들은 灵体에 根本되는 生心까지 保有하는 存在가 적게 먼저 墮落되었다. 이 人間을 灵体를 具成시켜서 長成하여 生命体까지로 目的하고 役事하는 것이 예수그리스의 하고자 하는 것이 믿음(信)과, 信仰生活을 培養하는 目的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오셔서 生灵까지 完成코자 하였으나 전 인간은 주인공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不信하고 보니 未完成하게 되어 生命体級까지 全人間을 長成시켜야 할 責任적 使命이 부여된 환경(部境)이다. 其後 生灵体는 完成体인데 再臨時부터 始作코자 함이 目的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墮落하지 아니 하였으면 肉身의 完成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中心하고 生心은 그 本 路程으로 灵人体 構成을 同(一)時에 倂合하여 完成에로 나아갈 人間들이 墮落으로 因하여 全人間에게(하늘 사람(人)도)는 區分하여 長成시켜서 完成의 貌樣으로 되었다.


第一次 예수는 長成 生命体까지 第二次로 再臨하여서 完成体 生灵体를 注入시켜서 理想적 灵人体를 造成하고자 함이 根本으로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이 始作할 터를 닦고자 하니 旧約役事가 있고, 新約은 그 터 위에 長成하여 全世界에 터를 지어 그 위에다 다시금 完成의 理想 生灵体를 땅과 함께 하늘까지 聯殖시켜 理想적 天宙 完成이 目的으로 되었다. 그렇지 않고 旧約時期부터 절대 뜻를 中心하고 人間들이 侍奉하였으면 直接 뜻을 中心하고 터를 세우면서 理想적으로 展開코자 함이었으나 不信으로 因하여 그 目的이 未達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要求와 救援 要求가 남아지는 뜻으로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求援攝理는 사람을 찾아서 理想적 灵人体를 恢歸하여 本 創造理想를 成事코자 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絶大有의 存在며 絶大無의 存在의 主人公이 卽 하나님이시다. 그러무로 人間은 어느 方向으로든지 極을 찾아 가면 갈수록 하나님에 対한 必(*各)要性를 切々하게 感覚되게 지은 것이 現 天宙萬相이다.


그런고로 사람의 全部가 天宙의 公路를 正當하게 설 수 있는 自我를 찾으면 全体에 対한 中心問題까지 잘 解決을 가져오는 事実은 創造하신 萬相을 共同한 中心에 屬하여 있기에 어느 곳으로 通하든지 其 中心은 연식(聯殖)시켜 이상적 천주 완성이 목적으로 되었다. 그렇지 않고 旧約時期부터 절대 뜻를 中心하고 人間들이 侍奉하였으 直接 뜻을 中心하고 터를 세우면서 理想적으로 展開하고자 함이었으나 不信으로 因하여 그 目的이 未達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要求와 救援要求가 남아지는 뜻으로 되었다.


結局에 終奌를 찾으면 同一한 한 根本原理를 通하여서 作用의 始作되어 있기에 自我自身의 根本原理로 설 수 있는 基本를 찾으면 全部의 中心인 하나님에 対한 問題는 自然的으로 알게된다. 또한 하나님의 根本存在 하심은 実感을 自覚할 수 있게 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自己가 없다고 하면 自己自体로써 自己를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自己自体에 対하여 有라하면 自然的으로 有하신 그 根本存在의 有를 予定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고로 自己가 有하면 自己가 有하기 前의 父母의 有를 찾아지며, 父母가 有하면 先祖의 數十 數百代에 繼續하여서 至今 自我가 存在함를 알 수 있다.


이렇듯 有에서만 有가 始作한다. 無에서는 無이지 有할 수 없는 것이 天理다. 現 科学도 이 天理를 떠나서는 始作과 発展을 못한다. 그리고 自我 以後에도 有할 수 있는 後孫에 対한 有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至今 보이지 않는 後孫을 없(無)다고 말할 수 없다. 말한다면 其自体는 原理의 合格体로 完成格의 存在 못됨을 말하는 것이지 其 根本 原理的으로 보면 後孫도 있게금 有에서부터 모든 萬相은 지어 지었기 때문에 後孫도 必要的 한 公理路程으로 有함을 알 것이다.


보지 못하였다고 其 있어야 할 其 存在들을 否定하면 其 自体의 否定함이 根本 原理的 解決을 주는 否定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런데 其 無라고 否定한다면 그 存在는 天理根本을 反逆하는 行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고로 天宙萬物은 全部가 原理的 有에서 始作함으로 有라고 하는 基本奌에서만 萬原理와 理致의 符合를 볼 수 있으나 無라고 하고 나면 其 根本을 有로 展開하기 어려운(難한) 原理的 結論으로 된다. 그런고로 至今 自我라는 自体는 有無의 한 中心의 存在이면서 그의 作用的 目的으로 有를 全的으로 相対物로 하기 爲한 行動으로 生活하는 바는 잘 体得하는 바의 事実이다. 그러므로 나 自身의 有라는 原理的 存在라는 것은 根本的으로 바로 서게 되(是定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無라고하는 存在는 事実体有에 世界에서는 自我로부터 表示가 되어 있다. 그 自我가 卽 有無의 根據奌으로 하고야 有無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나는 有에 屬하는 同時에 無에로 찾아가는 中間存在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中間存在로써 되어있는 나에게 有無의 根本되는 하나님의 存在에 対하여 疑心하는 것은 卽 自己에 対하여 疑心하는 것과 同一하다. 그런고로 自己가 有無의 根本의 位置이니 卽 創造的原理으로 보아 하나님과 直接同一奌線에 有하는 存在임을 体得하여야 된다.


自我는 有無의 中和体다. 그런고로 사람을 中心하고 계실 神性은 나와 中和性적 關係로써 有에서 無의 世界에 展開의 路程를 通하게 되어 있다.


그런고로 우리가 萬一 無하다고 하는 곳에 處하여 있어서 認識한다면 나에게 有에 対한 認識은 勿論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認識할 수 있는 環境과 그 位置를 갖고 있다는 그곳 스스로가 벌써 認識시켜주는 有에서부터만이 始作되는 바는 至今 누구나 잘 알 것이다. 卽 至今科学世界에 있어서 모든 原理와 公式을 利用하여 應用有에로 展開하게 하는 것도 卽 根本 有가 있는 原理 外 存在함이 有하다는 原則위에서만 始作하여 그 目的達成으로 進級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科学이 発達할 수 있는 바도 前有的 그 原理的 存有가 基本이 되어 그 基本上에서만 그 目的 表示的 発達된 存在를 볼 수 있는 것은 事実이다.


그런고로 無에서 有라는 原理는 本來부터 우리가 세울 수 없다. 無면 無지 有가 되겠는가? 될 수 없는 事実이다. 그러니 唯物論的 原理도 自然 그 末路는 未解決로 되는 것이 原理다. 無가 되니 말이다. 卽 始作이 無니 末도 無로 結果한다. 無라고하는 存在를 세우기 爲하여는 前有存在를 세워 놓고부터인데 이 先有存在는 卽 主觀的으로 보면 自己 或 客觀的으로 본다면 他物이냐가 벌써 先有한 事実를 決定지어 놓고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모든 것의 根本은 有에서 始作하였다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사람은 根本 有라는 存在로부터이며 萬物의 有도 亦是 同一한 바다.


그런고로 어떤 作用의 始作은 有의 作用으로만 始作된다. 認識할 수 있는 모든 關係感覚性이라고 存在하여 나에게 미치고 있는 그 作用은 根本的 有의 作用이 延長化된 存在임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無라는 占有 位置은 視覚 또는 感覚性外의 存在를 두고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우리 自我인 有가 感覚하는 그 感각的 作用은 卽 有에서부터 波及의 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視覚으로 볼 수 있는 圈外에 有에 存在하는 그 自体와 卽 하나님과 우리는 聯關的 한 位에 屬하여 있는 良心의 旣存 有의 存在로부터 우리에게 作用되는 感覚를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사람 하나는 有無의 中和物이 되어 있다. 그런고로 우리가 卽 無我라는 位置를 찾저 들어 가면은 中和体에서 陰陽分立과 같은 作用을 일으키는 것과 한가지로 無認識에로 내려가면 相対的 絶大無에 比例되는 絶大有의 힘과 作用에 相逢를 본다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


사람이 無我에게 찾어 들어 가면은( 卽 感覚無와 認識無에로) 相距的無에 位置에 対比되는 有에 感覚의 認識의 境地는 나타난다. 이것은 修養探中에서 많이 体驗하는 事実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고요하다는 그곳을 찾으면 本心의 作用舞台를 딴 無境에로 存在하는 絶大有의 感覚을 体驗하여 새로운 神奇한 認識权을 찾는 것이 自然的으로 表示되는 듯이 되나 그 原理는 내 自身들의 理想覚性을 取할 수 있으며 그 滿足感를 取할 수 있는 根本적 理想이 有할 수 있는 根本에 屬하여 있는 存在이기 때문에 새로운 快感이 나와 기쁨의 表示로 展開시킨 것 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事実이다.


그런고로 이런 것을 볼 적에 우리는 有에 處하여 있으니 有에 対한 感性이 各面에 理和되어 있는 것과 같은 理由로 되어 있기에 그런(然) 有로부터 伝하여 주는 減力에 対하여 振動感을 느낄 수 없고 또 外力感力에 対하여 消耗的反作用을 함으로 外力有의 感力에 対하여 예민하게 作用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修養이나 祈禱가 이곳에 미쳐주는 外力感力에 対比하여 振動할 수 있는 対応의 存在의 位置를 取하고자 하는 바가 原理로 되어있다. 그러기에 無存의 流인 고요한 곳이 要구된다.


그런고로 누구나 하나님이 계시(有하)다면 無我의 境地에 찾아 들어가면 超自然感力 絶大有의 境地가 있다는 것을 体證한다. 그것은 卽 하나님의 계시(有하)다는 것을 아는 同時에 그 根本有의 作用과 合致한 奌에 내가 서면 내 自体에는 超自然作用의 感力과 実感이 내 現 自我와 聯洛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佛敎의 無我境이라고 하여 찾은 一理도 여기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科学世界의 公理나 公式 같은 것도 間接的으로 그 自体를 接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바로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이와 같이 된 것은 墮落性을 받은 人間임으로 이것이 要求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良心과 生心의 基本은 하나님이니 하나님이 萬物의 絶大單位의 根本이면서 原理의 中心이며 根本이며, 모든 萬相의 單位体 中心이니 이 中心奌인 하나님과 直接 通하게 되면 모든 萬物, 이 絶大單位 內에서 支配받고 存在함으로 生心의 長成体인 灵体를 가지면 其 單位를 直接 所有한 것과 같은 것이, 그 單位는 絶大單位, 하나님의 單位에 한 部分的 基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萬物의 모든 根本을 알 수 있는 곳으로 展開시킬 수 있는 存在니, 卽 사람이다. 그런고로 道通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根本사람의 創造本境을 体得할 때에 느끼는 体驗이다.


以上 理유로 夢示 中에 사람이 未來 것을 아는 바도 外力咸力이 本性減力를 反하기에 알지 못하는 바를 수면(寢)中에 外力감력이 夢中에 자극 없는 本性을 通하여 体感하여 未來의 事実을 아는 바다. 肉의 作用이 이렇게 되니 마음 作用이 이로 因하여 夢知가 새겨지는 것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実体 有의 世界에서 無形의 世界로 連結을 가져야 만이 되게 지음 받았다. 그런고로 有의 끝은 無요, 無의 끝은 有다. 그리하여 自体들은 한 同路를 갖고 있다. 例를 들면 우리 血管을 보면 動脈만을 잡아보면 心臟에서부터 점점 작아져 細管까지 属한다. 끝은 없어지는 程度를 向하여 細分되어진다. 그러면 모세혈관(細管)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끝은 딴 同路인 反対作用 路程으로 通하여 根本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한 作用体를 構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亦是, 이 表示와 같은 것이다. 血管이 작아진다고 하여서 없어(無)하여진다고 結論하는 것과 같은 行動의 사람들이 有無의 結論을 말하는 것과 同一하다. 그런고로 끝 部分 그 自体는 中和의 点이다. 血管도 細分管에서 돌아오는 靜脈部分이 有하여서만이 円滿하지 않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動脈를 有라 하는 것과 靜脈을 無라하는 結論的 事実을 体得할 수 있다.


그런고로 有無는 하나 有에서 始作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有無의 根本体이다. 灵은 有에서 無에로 通할 수 있는 自体다. 그런고로 灵은 有라고 하는 感覺範位 內 存在에 属하지 않고 感覺 外 範圍에 属하여 有의 權位까지 自由로 通할 수 있는 特有한 存在다. 이 性品이, 卽 하나님이 賦與하여 준 특이한 성품(特与性品)이다. 卽 하나님의 性品이다. 그러니 우리 理想世界은 참 自由世界이다. 卽 距離에 支配를 받지 않는 世界며 空間의 支配를 받지 않으며 時間의 支配도 없는 世界다. 그저 生覚과 同時에 結果가 現位하는 自由理想世界다. 이 世界가 하나님을 中心한 世界다.



하나와 영은 경계를 정하지 못함(한글본)


  숫자상으로는 영과 ①하나와는 상이(相異)위치를 갖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동일점을 이탈하지 못하는 공통노선상의 존재다. 그러므로 실재상으로는 1=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지(程支)의 존재들이다.
1 = 영
1 = 절대치 수로 기본수며 유의 기본존재다.
영 = 무한무의 절대치수이면서 유의 무한소수의 중간존재다.
 
그런고로 문제되는 바는 나 한 자체가 중대 문제인데 나는 지금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잡은 존재라고 하고 싶은가. 그것은 각자의 자유에 맡기기로 하자. 즉 ①에서 시작하였으면 그 하나가 갖고 있는 존재의 실제 가치를 전부 인식해야만 되지 않겠는가가 선결문제다. 즉 무한대와 무한소의 문제보다도 그 중간자체인 하나의 존재의 규정에 큰 난관봉착이라 아니할 수 없는 바다. 이 하나되는 자아를 알려면 무한대에 대한 위치부터 무한소의 위치가 갖고 있는 중간존재에 대한 전부를 알아야만 자기에 대한 확실한 규정을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그 존재 전부를 알 수 있어야만 그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근거를 해결할 자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도 자기가 있다고 하여 놓고 무한 사실이니 무하다느니 하는 바는, 즉 수의 세계에 있어서 영이라하여 절대무의 존재를 결정한 듯이 하고 있는 바와 동일한 생각으로 되어 있는 바와 한가지다. 없다 할 때는 무한 소에까지 도달한 후에 그 세계가 자기의 인정 범위 내에 들어 서게 될 때에는 무에 대한 결론은 가능할 것인데 그곳조차 생각도 못하고 그저 무라면 자기가 무라고 하는 바가 그냥 무로서 만사를 해결하여주는 중심 존재로 되는가? 그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유라 할진대 그 존재의 가치는 절대유까지 계속 존재하고 있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유라고 하는 자기와 무의 중심 입장의 자기에 대하여서 알려고 할 적에 제일 큰 문제는 중심점이다. 즉 유도 내가 있어야 되며 무도 내가 있어야 된다. 문제는 결정적 존재는 바로 자기이다. 이 자기가 지금 해결의 수수께끼가 되는 근본문제다. 그런고로 먼저 천주의 기본단위라고도 할 수 있는 자기를 해득하여라. 그리고 나서 다른 존재가 문제 되는 바이다. 자기를 명백하게 해결하면 그 이상의 연관적 사실에 대하여서는 자연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자기 하나 알고 보면 하나님도 그 존재에 대하여 유무에 대한 문제는 크게 논할 문제도 아니다.


그런고로 알아야 한다는 하나님에 대한 근거의 여하는 먼저 피조체인 자기의 근본에 대한 실감성를 알고 나아가면서 탐구하면 제1존재의 확실성은 자연적 의식존재로 계시는 것이다. 그것이 명백한 체험을 실행하여 찾아 보면 그 자체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유에서 절대무의 기본존재이므로 어느 면에서도 단위적 노선에서만 서서 좌우를 찾으면 그 존재는 자연적으로 체감된다. 그 체감으로써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확실한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이다. 왜냐하면 무한대에서 무한소에 통한 공통노정으로 흐르는 무한대이면서 무한소의 힘을 보아 이 힘은 공식과 같은 법리를 통하여 연락되고 있으며, 그 어떤 중간 입장에서라도 자기만의 그 힘과 감응될 수 있는 단위체로 평형노상에 서게 되면 무한대에서 무한소에 흐르는 그 감지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한대에서부터 무한소에까지 연관하는 중심동력체이다. 그러면서 영원을 표준삼고 시작하며 나아간다. 그런고로 사람은 그 중간 존재다. 이 중심존재가 완성하여야만 천주적 공리법칙은 원만화를 가져오게 된다. 즉 하나님은 무에 계셔서 유에로 작용하고 사람은 유에서 무에로 수수작용 원활화를 취해야만 원만한 존재가 되는 것이 천리이며 창조원리다.   

    

이 그림을 보면 사람은 단위적 위치에 거한다. 사람을 통하여만 우주와 천주의 이상이 완성하게끔 지으셨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몸으로 지은 특유의 존재로 지었기 때문이다. 유(+) 무(-)라고 표시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 (-)의 중화체로 되어 있다. (-)는 영으로, (+)는 육체로서 합체되었다. 그런고로 사람은 영과 육신이 합하여서만 완성한 사람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영을 장성시켜서 영인체를 완전 조성하면 무의 세계까지 통할 수 있는 중간 존재체다.


그런고로 본래 사람은 영인체를 완성하여야 한다. 그러면 영인체라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하면 영체, 생명체, 생령체로 되어 있다. 그러면 육신에는 육체와 육심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인체에는 생심을 중심하고 영체를 부식할 수 있는 기본 터를 이루며 성장하여서 생명체로 나아가 그 생명체가 되어야만 하늘의 한 성장체를 가진 자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생명체에다 생령체를 이루어야 본 창조이상 영인체로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타락되니 인간들은 영체에 근본되는 생심까지 보유하는 존재가 적게 먼저 타락되었다. 이 인간을 영체를 구성시켜서 장성하여 생명체까지를 목적하고 역사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고자 하는 것이 믿음과 신앙생활을 배양하는 목적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오셔서 생령체까지 완성코자 하였으나 전 인간은 주인공부터 시작하여 모두가 불신하고 보니 미완성하게 되어 생명체급까지 전 인간을 장성시켜야 할 책임적 사명이 부여된 환경이다. 그 후 생령체는 완성체인데 재림시부터 시작코자 하는 것이 목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타락하지 아니하였으면 육신의 완성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생심은 그 본 노정으로 영인체 구성을 동시에 병합하여 완성으로 나아갈 인간들이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간에게(하늘의 사람도)는 구분하여 성장시켜서 완성의 모양으로 되었다.


제1차 예수는 장성 생명체까지 제2차로 재림하여서 완성체 생령체를 주입시켜서 이상적 영인체를 조성하고자 함이 근본으로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이 시작할 터를 닦고자 하니 구약역사가 있고, 신약은 그 터위에 성장하여 전세계에 터를 지어 그 위에다 다시금 완성의 이상 생령체를 땅과 함께 하늘까지 연식(聯殖)시켜 이상적 천주 완성이 목적으로 되었다. 그렇지 않고 구약시기부터 절대 뜻을 중심하고 인간들이 시봉하였으면 직접 뜻을 중심하고 터를 세우면서 이상적으로 전개하고자 함이었으나 불신으로 인하여 그 목적이 미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요구와 구원 요구가 남아지는 뜻으로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사람을 찾아서 이상적 영인체를 회귀하여 본 창조이상을 성사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유의 존재며 절대무의 존재의 주인공이 즉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느 방향으로든지 극을 찾아 가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필요성를 절절하게 감각되게 지은 것이 현 천주만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전부가 천주의 공로(公路)를 정당하게 설 수 있는 자아를 찾으면 전체에 대한 중심문제까지 잘 해결을 가져오는 사실은 창조하신 만상을 공동한 중심에 속하여 있기에 어느 곳으로 통하든지 그 중심은 결국에 종점를 찾으면 동일한 한 근본원리를 통하여서 작용이 시작되어 있기에 자아자신의 근본원리로 설 수 있는 기본을 찾으면 전부의 중심인 하나님에 대한 문제는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근본존재 하심은 실감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자기가 없다고 하면 자기자체로써 자기를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체에 대하여 유라하면 자연적으로 유하신 그 근본존재의 유를 예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고로 자기가 유하면 자기가 유하기 전의 부모의 유를 찾아지며, 부모가 유하면 선조의 수십, 수백대에 계속하여서 지금 자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유에서만 유가 시작한다. 무에서는 무이지 유할 수 없는 것이 천리다. 현 과학도 이 천리를 떠나서는 시작과 발전을 못한다. 그리고 자아 이후에는 유할 수 있는 후손에 대한 유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보이지 않는 후손을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말한다면 그 자체는 원리의 합격체로 완성격의 존재가 못됨을 말하는 것이지 그 근본 원리적으로 보면 후손도 있게끔 유에서부터 모든 만상은 지어졌기 때문에 후손도 필요적 한 공리노정으로 유함을 알 것이다. 보지 못하였다고 그 있어야 할 그 존재들을 부정하면 그 자체의 부정함이 근본 원리적 해결을 주는 부정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런데 그것을 무라고 부정한다면 그 존재는 천리근본을 반역하는 행동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고로 천주만물은 전부가 원리적 유에서 시작함으로 유라고 하는 기본점에서만 만원리와 이치의 부합을 볼 수 있으나 무라고 하고 나면 그 근본을 유로 전개하기 어려운 원리적 결론으로 된다. 그런고로 지금 자아라는 자체는 유무의 한 중심의 존재이면서 그의 작용적 목적으로 유를 전적으로 상대물로 하기 위한 행동으로 생활하는 바는 잘 체득하는 바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유라는 원리적 존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바로 서게 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무라고 하는 존재는 사실체 유의 세계에서는 자아로부터 표시가 되어 있다. 그 자아가 즉 유무의 근거점으로 하고야 유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나는 유에 속하는 동시에 무에도 찾아가는 중간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중간존재로써 되어 있는 나에게 유무의 근본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은 즉 자기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고로 자기가 유무의 근본의 위치이니 즉 창조적 원리로 보아 하나님과 직접 동일점선에 유하는 존재임을 체득하여야 된다.


자아는 유무의 중화체다. 그런고로 사람을 중심하고 계실 신성은 나와 중화성적 관계로써 유에서 무에 세계에 전개의 노정을 통하게 되어 있다.


그런고로 우리가 만일 무하다고 하는 곳에 처하여 있어서 인식한다면 나에게 유에 대한 인식은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식할 수 있는 환경과 그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그곳 스스로가 벌써 인식시켜주는 유에서부터만이 시작되는 것은 지금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즉 지금 과학세계에 있어서 모든 원리와 공식을 이용하여 응용 유에로 전개하게 하는 것도 즉 근본 유가 있는 원리 외 존재함이 유하다는 원칙위에서만 시작하여 그 목적 달성으로 진급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과학이 발달할 수 있는 바도 전유적 그 원리적 존유가 기본이 되어 그 기본상에서만 그 목적 표시적 발달된 존재를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고로 무에서 유라는 원리는 본래부터 우리가 세울 수 없다. 무면 무지 유가 되겠는가? 그러니 유물론적 원리도 자연 그 말로는 미해결로 되는 것이 원리다. 무가 되니 말이다. 즉 시작이 무니 말도 무로 결과한다. 무라고하는 존재를 세우기 위하여는 전유 존재를 세워 놓고부터인데 이 선유존재는 즉 주관적으로 보면 자기, 객관적으로 본다면 다른 타물이냐가 벌써 선유한 사실을 결정지어 놓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모든 것의 근본은 유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사람은 근본 유라는 존재로부터이며 만물의 유도 역시 동일한 것이다. 어떤 작용의 시작은 유의 작용으로만 시작된다.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관계 감각성이라고 존재하여 나에게 미치고 있는 그 작용은 근본적 유의 작용이 연장화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무라는 점유위치는 시각 또는 감각성 외의 존재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자아인 유가 감각하는 그 감각적 작용은 즉 유에서부터 파급이 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권외의 유에 존재하는 그 자체와 즉, 하나님과 우리는 연관적 한 위에 속하여 있는 양심의 기존 유의 존재로부터 우리에게 작용되는 감각을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사람 하나는 유무의 중화물이 되어 있다.


런고로 우리가 즉 무아라는 위치를 찾아 들어가면 중화체에서 음양분립과 같은 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한가지로 무인식에로 내려가면 상대적 절대무에 비례되는 절대유의 힘과 작용에 상봉을 본다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사람이 무아에게 찾아 들어 가면(즉 감각무와 인식무에로) 상거적 무의 위치에 대비되는 유에 감각의 인식의 경지는 나타난다. 이것은 수양탐중에서 많이 체험하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고요하다는 그곳을 찾으면 본심의 작용무대를 딴 무경에로 존재하는 절대유의 감각을 체험하여 새로운 신기한 인식권을 찾는 것이 자연적으로 표시되는 듯이 되나 그 원리는 내 자신들의 이상각성을 취할 수 있으며 그 만족감을 취할 수 있는 근본적 이상이 유할 수 있는 근본에 속하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새로운 쾌감이 나와 기쁨의 표시로 전개시킨 것 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이런 것을 볼 적에 우리는 유에 처하여 있으니 유에 대한 감성이 각면에 이화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유로 되어 있기에, 그런(然) 유로부터 전하여 주는 감력에 대하여 진동감을 느낄 수 없고 또 외력감력에 대하여 소모적 반작용을 함으로 외력유의 감력에 대하여 예민하게 작용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수양이나 기도가 이곳에 미쳐주는 외력감력에 대비하여 진동할 수 있는 대응의 존재의 위치를 취하고자 하는 바가 원리로 되어 있다. 그러기에 무존의 류인 고요한 곳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나님이 계시다면 무아의 경지에 찾아 들어가면 초자연 감력 절대유의 경지가 있다는 것를 몸소 체증한다. 그것은 즉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그 근본 유의 작용과 합치한 점에 내가 서면 내 자체에는 초자연작용의 감력과 실감이 내 현 자아와 연락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불교의 무아경이라고 하여 찾은 일리도 여기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과학세계의 공리나 공식 같은 것도 간접적으로 그 자체를 접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바로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된 것은 타락성을 받은 인간임으로 이것이 요구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심과 생심의 기본은 하나님이니 하나님이 만물의 절대단위의 근본이면서 원리의 중심이며 근본이며, 모든 만상의 단위체 중심이니 이 중심점인 하나님과 직접 통하게 되면 만물이 절대단위 내에서 지배받고 존재함으로 생심의 장성체인 영체를 가지면 그 단위를 직접 소유한 것과 같은 것이 그 단위는 절대단위, 하나님의 단위에 한 부분적 기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만물의 모든 근본을 알 수 있는 곳으로 전개시킬 수 있는 존재니 즉 사람이다. 그런고로 도가 통한다고 하는 것이 이러한 근본사람의 창조본경을 체득할 때에 느끼는 체험이다.


이상 이유로 몽시 중에 사람이 미래의 것을 아는 바도 외력감력이 본성감력을 반하기에 알지 못하는 바를 수면 중에 외력감력이 몽중에 자극이 없는 본성을 통하여 체감하여 미래의 사실을 아는 바다. 육의 작용이 이렇게 되니 마음 작용이 이로 인하여 몽지가 새겨지는 것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실체 유의 세계에서 무형의 세계로 연결을 가져야 만이 되게 지음 받았다. 그런고로 유의 끝은 무요, 무의 끝은 유다. 그리하여 자체들은 한 동로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 혈관을 보면 동맥만을 잡아보면 심장에서부터 점점 작아져 모세혈관까지 속한다. 끝은 없어지는 정도를 향하여 세분되어 진다. 그러면 모세혈관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끝은 딴 동로인 반대작용의 노정으로 통하여 근본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한 작용체를 구성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역시, 이 표시와 같은 것이다. 혈관이 작아진다고 하여서 없어진다고 결론 짓는 것과 같은 행동의 사람들이 유무의 결론을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고로 끝 부분 그 자체는 중화의 점이다. 혈관도 모세혈관에서 돌아오는 정맥부분이 유하여서만 원만하게 돌지 않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동맥을 유라 하는 것과 정맥을 무라하는 결론적 사실을 체득할 수 있다.


런고로 유무는 하나 유에서 시작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유무의 근본체이다. 영은 유에서 무에로 통할 수 있는 자체다. 그런고로 영은 유라고 하는 감각범위 내 존재에 속하지 않고 감각 외 범위에 속하여 유의 권위까지 자유로이 통할 수 있는 특유한 존재다. 이 성품이, 즉 하나님이 부여하여 준 특이한 성품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러니 우리 이상세계는 참 자유세계이다. 즉 거리에 지배를 받지 않는 세계며, 공간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시간의 지배도 없는 세계다. 그저 생각과 동시에 결과가 현위하는 자유이상세계다. 이 세계가 하나님을 중심한 세계다. 


한나와 零은 境界를 定치 못함.(원문 타자본)


數字上으로는 零과 ①하나와는 相異位置를 갔고 있지만 実際에 있서는 同一奌를 離脫못하는 共通路線上에 存在다. 그러무로 実在上으로는 1=零이라고 할 수 있는 程支이 存在들이다.
1= 零
1= 絶大値數 基本數며 有에 基本存在다.
零= 無限無에 絶大値數면서 有에 無限小數의 中間存在다.
그런고로 問題되는 바는 나 한 自体가 重大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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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데 나는 至今 어데서부터 始作하여 잡은 存在라고 하고 싶은가. 그겄은 各自에 自由로 맛기기로 하자. 卽 ①에서 始作하여스면은 그 한아가 갓고 있는 存在의 実價値를 全部認識하여만 되지 않겠는가가 先決問題다. 卽 無限大와 無限小에 問題보담도 其 中間自体인 하나의 存在의 規定에 큰 難關逢着이라 않히할 수 없는바다. 이 한나되는 自我를 알려면 無限大에 対한 位置부터 無限小애 位置가 갓고있는 中間存在에 対한 全部를 알러만의 自己에 対한 確実한 規定를 할 수 있겠는데 그러타면 그 存在를 全部를 알 수 있서만의 其보다 더 큰 存在애 対한 根據를 解決할 資格있슴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도 自己 있다고 하여 놋코 無한 事実이니 無하다니 하는바는 卽 數世界에 있서서 零이라하여 絶大無이 存在를 決定한듯의 하고있는 바와 同一한 生覚으로 되여있는 바와 한가지다. 업다를 할 땐 無限小에까지 倒達한 後 其世界가 自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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認定範圍內에 들어서게 될 대에는 無에 対한 結論은 可할 겄인데 그곳조차 生覚도 못하고 그저 無라면 自己가 無라고 하는 바가 그낭 無로서 萬事를 解決하여주는 中心存在로 되는가. 그겄은 至極한 어리석은 行動이다. 有라할진대 其存在의 價値은 絶對有까지 繼續存在하고 있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有로하는 自己와 無의 中心立場에 自己에 対하여서는 알러고 할적에 第一 큰 問題의 中心奌이다. 卽 有로 내가 있서야 되며 無로 내가 있어야 된다. 問題에는 決定的存在은 卽 自己이다. 이 自己가 至今解決에 수수꺽기가 되는 根本問題다. 그런고로 먼츰 天宙에 基本單位라고도 할 수 있는 自己를 解得하여라. 그러구만의 딴 存在가 問題로 되는 바의다. 自己를 明白하게 解決하면은 其以上에 対한 聯關的事実에 対하여서는 認識할 수 잇는 事実이다. 그런고로 自己 한나 알고보면 하나님도 其 存在에 対하여 有無에 対한 問題는 크게 論할 問題도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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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고로 알러야 한다는 하나님에 対한 根據에 ?? 如何은 먼츰 被造体인 自己의 根本에 対한 実感性를 알고 나아가면서 探求하면은 第一存在의 確実性은 自然的意識存在로 게시는 겄이다. 그겄이 明白한 体驗을 実行하여 찾저보면은 其自体를 알 수 있다. 웨나하면은 하나님은 絶大有에서 絶大無의 基本存在이무로 어느 面에서도 單位的路線에서만 서서 左右을 찾으면은 그 存在은 自然的으로 体感된다. 그 体感으로써 하나님의 存在에 対하여 確実한 根本問題를 解決할 수 있는 바이다. 웨나 하면은 無限大에서 無限小에 通한 共通路征으로 흘르는 無限大이면서 無限小이 힘을 보와 이 힘은 公式과 같은 法理를 通하여 聯絡되고 있스며 其 얻던 中間立場에서라도 自己만의 其 힘과 感應될 수 있는 單位体로 平衡路上에 서게 되면 無限大에서 無限小에 흘르는 그 感智를 通하여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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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무로 하나님은 無限大에서부터 無限小에까지 連關하는 中心動力体이다. 그러면서 永遠를 標準삼고 始作하며 나아간다. 그런고로 사람은 其中間存在다. 이 中心存在가 完成하여만의 天宙的 公理法則은 円滿化를 가져오게 된다. 卽 하나님은 無에 게서서 有에로 作用하고 사람은 有에서 無에로 授受作用円滑化를 取하여만의 円滿存在로 되는 겄의 天理이며 創造原理다.

이겄를 보면은 사람은 單位的位置에 居한다. 사람를 通하여만의 宇宙와 天宙理想의 完成하게끔 지으셨다 그겄은 사람이 하나님의 몸으로지은 特有의 存在로 지였끼에다. 有 無라고 表示하였다. 그러무로 사람은 의 中和体로 되었다. 는 灵으로 는 肉体로서 合体되였있다. 그런고로 사람은 灵과 肉身 합하여서만의 完全한 사람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灵를 長成식켜서 灵人体를 完全造成하면은 無에 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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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通할 수 있는 中間存在体다. 그런고로 本來 사람은 灵人体를 完成하여야 한다. 그러면 灵人体라면은 얻던 構造로 되었는가 하면은 灵体, 生命体, 生灵体로 되여있다. 그러면은 肉身에는 肉体와 肉心이 있는 것이 함가지로 灵人体에는 生心를 中心하고 灵体를 附殖할 수 있는 基本터를 일우며 長成하여서 生命体로 나아가 그 生命体가 되여만의 하날에 한 長成体를 가진 自体로서 活動할 수 있는 겄이다. 其 生命体에다 生灵体를 일루워야 本創造理想 灵人体로 되어있다. 그런데 至今까지 墮落되니 人間들은 灵体에 根本되는 生心까지 保有하는 存在가 적게 먼츰 墮落되였다. 이 人間를 灵体를 具成싴켜서 長成하여 生命体까지로 目的하고 役事하는 겄이 예수그리스의 하고저 하는겄이 信, 信仰生活을 培養하는 目的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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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무로 예수 오서서 生灵까지 完成코저 하였으나 (???) 不信하고 보니 未完成하게되니 生命体級까지 全人間를 長成시켜야 할 責任使命部境이다. 其後 生灵体은 完成体인데 再臨時부터 始作코저 함의 目的으로 남어있다. 그러무로 사람은 墮落치 않히 하여스면 肉身이 完成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中心하고 生心은 그 本路程으로 灵人体構成를 同一時에 倂合하여 完成에로 나아갈 人間들이 墮落으로 因하여 全人間에게(하날人도)는 區分하여 長成식켜서 完成의 貌樣으로 되였다. 第一次 예수는 長成生命体까지 第二次再臨하여서 完成体 生灵体를 注入식켜서 理想 灵人体를 造成하고저 함의 根本으로 되였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이 始作할 터 닥코저하니 旧約役事가 있고 新約은 그 터 우에 長成하여 全世界에 터를 지어 그 우에다 다시금 完成의 理想 生灵体를 땅과 함끠 하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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聯殖식켜 理想天宙完成이 目的으로 되였다. 그러치만 안앗다면 旧約時期부터 절대 뜻를 中心하고 人間들의 侍奉하였스면은 直接 뜻를 中心하고 터를 세우면서 理想展開코저 함이었스나 不信으로 因하야 그 目的未達成하게 되였다. 그러무로 예수님의 要求와 救援要求가 남어지는 뜻으로 되였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求援攝理은 사람을 찾저서 理想灵人体를 恢歸하여 本創造理想를 成事코저 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絶大有의 存在며 絶大無에 存在의 主人公이 卽 하나님이시다. 그러무로 人間은 어는 方向으로든지 極를 찾저 가면은 갈사록 하나님의 対한 各(*必)要性를 切々하게 感覚되게 지은 겄의 現天宙萬相이다. 그런고로 사람의 全部가 天宙의 公路를 正當하게 설 수 있는 自我를 찾으면 全体에 対한 中心問題까지 잘 解決을 가저오는 事実를 創造하신 萬相을 共同한 中心에 屬하여 있끼에 어느 곴으로 通하던지 其 中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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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局에 終奌를 찾으면 同一한 한 根本原理를 通하여서 作用의 始作되어 있끼에 自我自身의 根本原理로 설 수 있는 基本를 찾으면은 全部의 中心인 하나님에 対한 問題은 自然的으로 알게된다. 또한 하나님의 根本存在 하심은 実感를 自覚할 수 있게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自己가 업다고 하면은 自己自体로써 自己를 업다고 하는 겄과 같은 겄이다. 그러무로 自己自体에 対하여 有라하면 自然的有하신 그 根本存在有를 予定하는 겄를 말한다. 그런고로 自己가 有하면 自己가 有하기 前에 父母에 有를 찾저지며 父母가 有하면은 先祖이 數十 數百代에 繼續하여서 至今 自我가 存在함를 알 수 있다. 이러트시 有에서만이 有가 始作한다. 無에서 無이지 有할 수 업는 겄의 天理다. 現科学도 이 天理를 떠나서는 始作못한다 와 発展 못한다. 그리고 自我以後에도 有할 수 있는 後孫에 対한 有로 알 수 있다. 그러타면 至今 보이지않는 後孫無하다고 말할 수 업다. 말한다면 其自体는 原理에 合格体로 完成格의 存在 못됨을 말하는 겄이지 其根本原理的으로 보면은 後孫도 잇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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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에서부터 모든 萬相은 지어 지였끼 때문에 後孫도 必要的 한 公理路程으로 有함을 알 겄이다. 보지 못하였다고 其 있서야할 其存在들을 否定하면은 其自体의 否定함의 根本原理的解決를 주는 否定이 되는가. 그러치 않은겄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런데 其 無라고 否定한다면 그 存在은 天理根本를 反逆하는 行動이라 않이 할 수 업다. 그런고로 天宙萬物은 全部가 原理的有에서 始作함으로 有라고 하는 基本奌에서만의 萬原理와 理致의 符合를 볼 수 있스나 無라고 하고 나면은 其根本를 有에로 展開키 難한 原理的結論으로 된다. 그런고로 至今自我라는 自体는 有無의 한 中心의 存在면서 그의 作用的目的으로 有를 全的으로 相対物로 하기爲한 行動으로 生活하는 바는 잘 体得하는바의 事実이다. 그러무로 나 自身의 有라는 原理的存在라는 겄은 根本的으로 是定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無라고하는 存在는 事実体有에 世界에서는 自我부터 로부터 表示로 되여 있다. 그 自我가 卽 有無의 根據奌으로 하고야 有無라는 말를 할 수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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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고로 나는 有에 屬하는 同時에 無에로 차저가는 中間存在라는 겄를 알게 된다. 이 中間存在로써 되여있는 내에게 有無에 根本되는 하나님의 存在에 対하여 疑心하는 것은 卽 自己에 対하여 疑心하는 것과 同一하다. 그런고로 自己가 有無의 根本이 位置이니 卽 創造的原理으로 보와 하나님과 直接同一奌線에 有하는 存在임을 体得하여야 된다. 自我은 有無의 中和体다. 그런고로 사람을 中心하고 계실 神性은 나와 中和性적 關係로써 有에서 無에 世界에 展開의 路程를 通하게 되여있다. 그런고로 우리가 若一無하다고 하는 곳에 處하여 있서서 認識한다면 나에게 有에 対한 認識은 勿論 업을 겄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認識할 수 있는 環境과 그 位置를 갔고 있다는 그곳 스사로가 벌서 認識식켜주는 有에서부터만의 始作되는 바는 至今 누구나 잘 알 겄이다. 卽 至今科学世界에 있서서 모든 原理와 公式를 利用하여 應用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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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 展開케 하는겄도 卽 根本有가 있는 原理外存在함의 有한다는 原則우에서만의 始作하여 그 目的達成으로 進級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科学의 発達할 수 있는바도 前有的 그 原理的存有가 基本되여 그 基本上에서만의 그 目的表示的発達된 存在를 볼 수 있는 겄은 事実이다. 그런고로 無에서 有라는 原理는 本來부터 우리가 세울 수 업다. 無에면 無지 有가 되겠는가 될 수 업는 事実이다. 그러니 唯物論的原理도 自然 그 末路는 未解決로 되는것이 原理다. 無가 되니 말이다. 卽 始作이 無니 末도 無로 結果한다. 無라고하는 存在를 세우긔 爲하여는 前有存在를 세워 놋코야인데 의 先有存在은 卽 主觀的으로 보면은 自己 或 客觀的으로 본다면 他物이나가 벌서 先有한 事実를 決定지여 놋코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모든겄의 根本은 有에서 始作하였다는 바를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사람은 根本有라는 存在로부터며 萬物의 有도 亦是 同一한 바다. 그런고로 얻던 作用이 始作은 有의 作用으로만의 始作된다. 認識할 수 있는 모든 關係感覚性이라고 存在하여 나에게 및치려고 있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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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用은 根本的有에 作用이 延長化된 存在임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無라는 占有位置은 視覚 또는 感覚性外에 存在를 두고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우리 自我인 有가 感覚하는 그 感각的 作用은 卽 有에서부터 波及의 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視覚으로 볼 수 있는 圈外에 有에 存在하는 그 自体와 卽 하나님과 우리는 聯關的 한 位에 屬하여있는 良心의 旣 存有에 存在로부터 우리에게 作用되는 感覚를 알 수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사람 한나은 有無에 中和物의 되여 있다. 그런고로 우리가 卽 無我라는 位置를 찾저 들어 가면은 中和体에서 陰陽分立과 같은 作用을 일으키는 겄과 한가지로 無認識에로 나려가면 相対的 絶大無에 比例되는 絶大有의 힘과 作用에 相逢를 본다하는 겄도 알어야 한다. 사람의 無我에게 찾어 들어 가면은( 卽 感覚無와 認識無에로) 相距的無에 位置에 対比되는 有에 感覚의 認識의 境地은 낱아난다. 이겄은 修養探中에서로 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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体驗한는 事実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고요하다는 그곳을 찾으면 本心의 作用舞台을 딴 無境에로 存在하는 絶大有에 感覚을 体驗하여 새로운 神奇한 認識权를 찾은겄의 自然的으로 表示되는 듯의 되나 그 原理은 내 自身들의 理想覚性을 取할 수 있스며 그 滿足感를 取할 수 있은 根本理想 有할 수 있은 根本에 屬하여 있는 存在이기 때문에 새로운 快感의 나와 깁붐이 表示로 展開싴킴겄 밖게 지내지 않은 事実이다. 그런고로 이런겄을 볼 적에 우리는 有에서 處하여 있스니 有에 対感性의 各面에 理和되어 있는 겄과 갖은 理由로 되어 있기에 然有에서부터 伝하여 주는 減力에 対하여 振動感를 닊길 수 업고 또 外力感力에 対하여 消耗的反作用를 함으로 外力有에 感力에 対하여 에민하게 作用 못하는 겄이다. 그러무로 우리 修養이나 祈禱나아 이곳의 및처주는 外力感力에 対比하여 振動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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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対応의 存在의 位置를 取코저 하는 바가 原理로 되여있다. 그러기에 無存에 流 고요한 곳으로 要구된다. 그런고로 누구나 하나님의 有하다면은 無我에 境地에 찾저 들어가면 超自然感力 絶大有의 境地가 있다는 것를 体證한다. 그겄은 卽 하나님의 有하다는 겄을 아는 同時에 그 根本有에 作用과 合致한 奌에 내가 셔면은 내 自体에는 超自然作用에 感力과 実感이 내 現自我와 聯洛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佛敎의 無我境이라고 하여 찾은 一理도 여긔 있는 바이다. 그러무로 科学世界에 公理나 公式같은 겄도 間接的으로 그 自体를 接하게 하는겄과 같은 바로 되는 것를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이와갖치 된겄은 墮落性받은 人間임으로 이겄의 要求되게 되였다. 그러무로 良心과 生心의 基本은 하나님의니 하나님의 萬物의 絶大單位의 根本이면서 原理의 中心이며 根本이며 모든 萬相의 單位体中心이니 이 中心奌인 하나님과 直接通하게 되면은 모든 萬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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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絶大單位內에 支配받고 存在함으로 生心의 長成体의 灵体를 가지면 其單位를 直接所有한 것과 같은 겄의 그 單位야 絶大單位 하나님의 單位에 한 部分的基本으로 되어 있기 되문에 萬物에 모든 根本를 알 수 있는 곳으로 展開식킬 수 있는 存在점 卽 사람이다. 그런고로 道通이라고 하는것이 이러한 根本사람의 創造本境을 体得할때에 늦기는 体驗이다.
 
以上 理로 夢示中에 사람이 未來것을 아는 바도 外力感力이 本性感力를 反하기에 알지 못하는 바를 寑中에 外力감력이 자극업는 本性를 通하여 体感하여 未來이 事実를 아는 바다. 肉의 作用이 없게되니 (???...글자가 너무 적어 알수 없어서 다른분의 사본에것을 인용함. *心作用 理由로 因하여 夢知가 생긔는 것이다.)
그런고로 有에 끝은 무요 無에 끝은 有다. 그리하여 그 自体들은 한 回路를 갖고 있다. 例를들면은 우리 血管를 보면은 動脈만을 잡아 보면은 心臟에서부터 점々 작아지며 細管까지 屬한다. 끝은 업서지는 程度를 向하여 細分되여진다. 그러면 細管은 업서지는 겄의 안이고 끝은 딴 回路인 反対作用路程으로 通하여 根本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한 作用体를 構成하는 겄과 같히 하나님도 亦是 의 表示와 같은 겄이다. 血管이 작어 진다고 하여서 無하여 진다고 結論하는 겄의 같은 行動의 사람들의 有無의 結論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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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겄과 同一하다. 그런고로 끝 部分 그 自体는 中和의 奌이다. 血管도 細分管에서 돌아오는 靜脈部分이 有하여서만의 円滿하지 안은가. 그와 맟찬가지로 動脈를 有라 하는겄과 靜脈를 無라하는 結論的 事実를 体得할 수 있다. 그런고로 有無은 한나 有에서 始作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有無에 根本体이다. 灵은 有에서 無에로 通할 수 있는 自体다. 그런고로 灵은 有라고 하는 感覚範位內存在의 屬하지 않코 感覚外範位에 屬하여 有에 权位까지 自由로 通할 수 있는 特有存在다. 이 性品의 卽 하나님의 付与하여준 特与性品이다. 卽 하나님의 性品이다. 그러니 우리 理想世界는 참 自由世界이다. 卽 距離支配을 받지 않은 世界며 空間의 支配를 받지 않으며 時間의 支配업는 世界다. 그저 生覚과 同時에 結果은 現立하는 自由理想世界다. 이 世界가 하나님을 中心한 世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