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과 세계 - 9. 우리는 왜 고생을 해야 하는 가

참사랑 | 20210504155838

하나님의 뜻과 세계

 

우리는 왜 고생을 해야 하는 가

1975.9.11
한국 중앙수련소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고생을 하는 것은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요건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째서 고생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리가 가르치는 대로 인간은 타락하여 무원리권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형태는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본연의 이상에 따른 기준에서 보았을 경우, 그것은 원리의 내용에 입각한 가치의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다시 창조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대의 방향을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대 방향이 되는 것은 결국 재창조의 길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주체로 하면 각자가 대상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본래 주체와 대상은 동일한 차원에서 이상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상으로 인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첫째 목적은 인간을 기쁨의 대상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목적은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를 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무형세계가 통하게 하려면 하나님 자체가 형태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아담은 어떤 존재입니까? 무형의 하나님이 자기의 형체를 빌어 실체세계의 주체자로 서시게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셋째 목적은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사랑의 이상권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힘을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창조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주체인 하나님으로부터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피조물이 완전해질 때까지 거기에 힘이 더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창조이상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완성된 기준에서 생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완성기준까지 올라가려면 세 단계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장의 기간이면서 하나님이 에너지를 투입하시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 힘이 완전히 투입된 다음에 상대자로 선다면 거기서 비로소 힘이 되돌아오게 됩니다. 힘이 되돌아 오기 위해서는 보다 더 큰 힘이 더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 없이는 하나님이 투입하신 에너지가 되돌아올 길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 자체가 상대자를 만든다는 것은 소모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어떤 것을 존재케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힘을 투입해야 합니다. 힘을 희생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창조본연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창조의 길, 복귀의 길을 거쳐가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희생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재창조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금 이상적인 자기를 완성시키기 위한 힘이 투입되는 길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희생이라는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상대자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희생의 길인 것입니다. 

재창조의 길은 희생의 길 

그것이 원리의 본연의 기준이 되고 있으므로 이상세계, 혹은 완성된 인간을 추구해 나가는 종교에 있어서는 수고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현실 그 자체를 희생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희생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본성이 복귀됩니다. 이른바 자기 나름으로 재창조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 타락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에 있어서는 수고와 고행의 길을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발전의 단계로 볼 때 하나님은 애초에 유형실체세계를 만드시기 전에 천사세계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그 천사세계의 창조는 실체자의 이상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 후 하나님은 천사와 함께 실체의 상대권을 창조하셨는 데, 그 세계가 바로 만물세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천사가 함께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적 기준의 상대권으로 창조하신 것이 천사계입니다. 태초의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감각을 받고 하나님께 가치의 자극을 돌려 드리는 존재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중간적인 천사세계를 창조하셨고, 그 세계를 통하여 자극을 받으려 하셨습니다. 즉, 천사를 상대의 입장에 세우고, 혹은 찬미의 입장에 세우고, 혹은 상담하는 입장에 세워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인간이 창조되어 가는 단계마다 상대적인 감사와 기쁨의 자극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에서도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힘을 소모하는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천사들로부터 찬미, 위로, 기쁨 등을 돌려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천사적 가치와 목적을 완성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목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천사장은 인간에 대해 희망을 갖고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아담이라는 존재는 천사장의 이상의 완성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상의 완성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해와를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과 천사장, 혹은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종적인 관계, 상하 관계입니다. 그들은 한 점에 머물게 됩니다. 천사장이 중심점에 선 곳은 하나님도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중심을 중심으로 함께 횡적 기준을 넓히기 위하여는 상대권을 구해야 합니다. 상대권의 형성은 면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기서 횡적인 기준이 만들어집니다. 종적인 관계를 횡적으로 적용하자는 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과 천사장, 하나님과 아담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모두 완성되면 중심점은 하나에 머물게 됩니다. 그 종적인 하나의 점을 횡적으로 넓히기 위해 해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종적인 사랑이 횡적인 사랑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그러한 입장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입장을 다시 복귀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섭리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천사세계를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천사적인 사명을 먼저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아담의 목적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이상의 완성자로서 상대의 입장에 서면 거기에서 종적인 사랑의 이상이 횡적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중심한 천국입니다. 

해와의 창조 

여러분들도 부모와 종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만약에 부모가 없으면 횡적인 상대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의 실감이 횡적으로 적용되어야 이상적인 상대권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종적으로 하나가 된 뒤에는 반드시 횡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을 주체로 하여 그것을 횡적으로 연결시키고자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해와가 없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종적인 이상에만 머물러 천사계와 같은 입장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실체세계는 횡적 이상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체세계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와는 이런 횡적인 대표자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되었을 경우에는 함께 상대가 되고, 또 주체 대상관계가 됩니다. 일체가 된 기준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은 종적인 주체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중간기관으로서 종횡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영적 이상과 실체적 이상이 이루어집니다. 

아담이 완성되면 하나님께서 투입한 그 힘이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아담의 이상이 하나님께 이끌리는 , 하나님을 찾는 , 그러한 힘의 작용이 되므로 결국 하나님이 투입한 것보다 더 큰 힘이 되어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 자극의 내용이 이른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는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투입한 것 이상의 강한 사랑이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것이므로 거기서 하나님은 기쁨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길에는 희생이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에 대해서는 희생을 하더라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녀에 대한 사랑의 심정이 그 속에 스며 있으므로 아무리 힘을 투입하더라도 그 사랑에 의해 다시금 힘이 되돌아와서 자극이 되기 때문입니다. 힘을 투입하면 할수록 어버이는 거기서 기쁨을 느낍니다. 괴로움을 딛고 넘는 힘의 자극을 받아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녀 사이에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희생을 하더라도, 자기의 생명을 걸더라도 기쁨을 느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한히 투입해도 무한히 기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희생 자체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소모적입니다. 마이너스입니다. 마이너스가 되면서 어떻게 기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현실의 평면적인 입장에서 볼 때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이상 그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째서 사랑을 투입하게 되었을까요? 사랑이 없으면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존재끼리는 희생의 힘을 투입한 이상의 힘으로써 수수작용(授受作用)을 영속시킬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영원이라는 것은 사랑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의 작용으로 보았을 때, 역학(力學)적인 입장에서 말한다면 출력이 입력보다 크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이너스가 될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입력보다 출력이 큰 곳에 이상이 있습니다. 

사랑과 희생 

그러므로 진정한 어버이와 자식, 진정한 부부, 진정한 형제관계가 성립되려면 희생적인 사랑을 실현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이라는 이름이 결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부모의 사랑을 느낍니다. 희생이 되는 부모는 슬픈 입장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거기에다가 자기의 사랑을 플러스시켜 부모에게 되돌려 드리면, 부모는 희생이 되는 것 이상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부란 서로 상대를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부부입니다. 상대자와 함께 간다는 입장에 서면 희생의 힘에 더하여 영속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되돌아옵니다. 그런 인생관과 가정관을 가지고 맺어진 부부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관계는 친구를 위해 서로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랑이 위치를 잡고 서기 위하여는 진정으로 희생을 하고 베풀어 주는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사랑의 배후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가 완성될 때까지 진정한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자가 완전히 완성될 때까지 모든 것을 투입합니다. 자식이 성장하여 결혼할 때까지 부모는 일체를 투입합니다. 부모에 대한 심정권을 알 때까지 모든 것을 희생하고 힘을 투입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심정을 알게 되고 효도를 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부모는 희생한 모든 것을 잊고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 인간이 사랑의 이상을 완성하기 위하여 희생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희생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사랑의 이상은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사랑을 투입해 주시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상적인 자기를 재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업고 자기의 완성을 이루어 나가는 길이 복귀의 길입니다. 

한 명의 아담을 요구한 역사 

하나님이 천사와 인간을 사랑 이상의 본래의 기준 위로 복귀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재창조의 원리를 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우선 천사장권(天使長圈)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상대자가 명확하지 않은 것입니다. 상대권이 명확하면 이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가 하면,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무형실체권을 찾는 입장인 것입니다. 즉, 신앙은 이상적인 실체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천사장권입니다. 과정권(過程圈)에 놓여 있는 입장이 천사장권이므로 그 과정을 통과하는 기간에 있어서 우리는 신앙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황을 통하여 천사장이 가야 할 길을 역사적으로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복귀원리는 종의 종에서 종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종으로부터 양자권(養子圈), 친자권(親子圈)을 거쳐 본연의 완성 기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상적인 사랑을 횡적으로 찾아 세우기 위해서는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신랑 신부의 이상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 완성기준에 도달하려면 천사장 과정, 아담완성과정을 통해 종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횡적인 출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역사는 결국 아담 한 사람을 완성시켜 하나님의 대상 위치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맞이하여 완성된 사랑을 채움으로써 횡적인 중심자의 위치에 서는 것이 신앙입니다. 중심자의 앞에 상대적으로 서는 것이 신부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하나가 되고, 아담과 이브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아담과 이브가 하나되면 사랑에 의해 종횡이 완전히 통일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방 팔방 어디로 가나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한 환경을 우리는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원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이상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말았으니 그를 복귀하기 위하여 재창조섭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탄의 존재입니다. 천사장권이 완성되면 사탄이라는 것은 없어져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사장의 완성은 천사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의 완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완성된 경우에는 천사장 이상이 완성됩니다. 동시에 사탄이라는 존재 위치는 이 천지 우주에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천사장이 미완성권에 있었으므로 사탄도 미완성권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된 경우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아담 완성이 최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아담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고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찾아 세운 분이 메시아입니다. 

타락된 인간이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가려면 천사장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사장은 종입니다. 종을 주인으로 받들고 가지 않으면 안 되므로 종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종의 종으로서 복귀의 길을 가고자 하면 천사장이라는 가짜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종으로서 최고의 이상은 무엇인가 하면, 최고의 주인을 맞이하는 일입니다. 최고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면 자기를 진정으로 위해 주는 주인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이상을 뺏으려 한 것이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은 사랑이 가득한 세계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자기에게 끌어들이려고 한 것이 타락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한다는 조건을 채우려는 곳에는 절대로 복귀의 길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불평 불만은 절대 금물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왜 절대순종을 요구하시는 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체가 기뻐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이상 상대권에 세우고 재창조의 목적을 완성시킴으로써 타락된 요인을 반대로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타락은 애초에 순종하지 않은 데서 시작된 것이므로 그것을 원상대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절대순종하라고 명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불평 불만이 금물입니다. 변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순종만 요구됩니다. 

절대순종은 수고하는 것을 뜻합니다. 수고의 목적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하는 입장에까지 필요한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적인 수고를 통하여 우리는 완성권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이외에는 길이 없으므로 모든 종교는 절대순종에 상응하는 수고의 길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에 있어서는 불평 불만은 절대 금물입니다.

복귀의 길은 절대 희생의 길이며, 울면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절대복종을 하면서도 희망에 차서 기꺼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째서 그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 그 길은 재창조의 길, 희망의 길이므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길은 낙담하면서 가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종교 가운데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종교는 무엇입니까? 목숨을 바쳐 역사과정을 통과한 종교는 세계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입니다. 피를 흘려 세계적으로 발전해 온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에서 하나님 앞에 가장 효도를 한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다스리실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에 있어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얼마나 오랫동안 희생적으로 살아가는 가 하는 것이 자기의 승패를 결정하는 내용이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모이신 하나님이 자식된 인간에게 그런 수고를 시키시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괴로워하시겠습니까? 타락한 이 세상에서도 자기의 자식에게 고생을 시키고 싶은 부모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째서 인간에게 고생의 길을 가도록 지시하시지 않으면 안 될까요? 이런 섭리의 뜻을 이끌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입장은 얼마나 괴로우실까요. 그 입장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정말 서러운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과 일세기 이내의 지상생활에 국한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슬픔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 격려를 드리는 것이 효도의 길이며 충성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놓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불평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우주적으로 천주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불행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비참한 하나님의 입장 

현실적인 자기와 하나님과 인연을 맺고 이를 영속시켜 나가고자 하면 사탄이 중간에서 언제나 그 다리를 폭파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누가 방비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사연을 지상에 있는 인간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과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영계만이 복귀의 목적을 향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천사계의 입장은 비참한 것입니다. 완성될 때까지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입장에 서시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입장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수고를 한다고 해도 한 평생은 불과 몇 십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고생을 많이 한 식구가 있지만 그게 몇 십년쯤 됩니까? 10년도 되지 않는 식구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힘든다든가 괴롭다든가 하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주적인 빚을 지고 변상할 길을 찾지 못하는 비참한 운명길을 가는 것이 타락인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얼굴을 치켜들고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부모에 대하여 효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의 괴로움을 자신이 모두 맡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효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벨은 재창조과정을 통과하는 입장인 동시에, 재창조 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일체적인 입장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수고의 길을 통해 승리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권, 이른바 개인권을 하나님께 돌릴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심정으로 가인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횡적 관계에 있어서 아벨은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타락인간을 대하듯이 계속적으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가인 한 사람을 복귀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벨의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이를 행함으로써 지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었다고 하는 조건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희생의 길을 가는 사람 앞에는 여하한 자도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그래서 아벨의 역사는 피를 흘리는 역사가 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근본사상입니다.

‘제가 세계 전체를 책임지겠으니 하나님 좀 쉬십시오’, ‘저에게 모든 십자가와 모든 탕감의 길을 맡겨 주십시오’ 하는 것이 메시아의 입장입니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최후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모든 십자가를 자기가 홀로 지고 하나님을 쉬게 하겠다는 입장, 즉 메시아의 사명감이 담긴 토로입니다. 영계와 지상세계 혹은 하나님의 심정세계에 있어서 하나님께 괴로움이 있으면 모든 것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메시아는 괴로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괴롭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괴롭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래 가야 백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기간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는 면목이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자랑하는 행위는 타락인간의 신앙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라 

타락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것을 비교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러한 행위의 결과는 불만으로 표출되고 반발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신앙자에게는 불만은 금물입니다. 

신앙생활에 들어섰으면 자신의 생각을 부인해야 합니다. 비교하고 대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 대조를 하겠다고 나서면 불만이 생겨납니다. 그러한 근성은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완전히 부인함으로써 지워버릴 수가 있습니다. 즉, 완전히 심판이 끝났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청산해 버렸다는 것은 완전히 탕감해 버렸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탕감했으므로 재창조되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에서 여러 가지 경전이 씌어진 것이므로 종교의 본질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이루어가기란 힘든 일입니다. 현실적으로 괴롭다고 해서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을 싫어하면 재창조의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희생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때가 되면 그 이상의 가치권에 세울 수 있습니다. 제물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 부인에서 완전 재창조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는 불평이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불평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일인 것입니다. 은혜를 갚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 입장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해 불평을 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의 생애가 그러합니다. 감옥에 끌려가서도, 고문으로 인해 피를 토하는 입장에서도 추호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전 세계가 반대하더라도, 사탄권과 인연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원수권이 남아 있는 한, 한 바퀴를 다 돌 때까지 반대에 부딪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불평을 하지 맙시다. 범사에 감사합시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참된 아들딸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