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패와 현재
1971.12.5
한국 본부교회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가정과 동네와 사회가 있습니다. 나아가 망하는 나라가 있는 가 하면 흥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잘사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울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엇갈리고 상반된 환경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의 자리를 원하는 하나님과 인간
이 세상에는 슬픈 상황을 동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고통의 길을 가고자하는 사람도, 고독한 환경을 희망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즉, 자기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더불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쁨을 찾고, 영광의 자리를 찾고, 뭇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를 바란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의 상황을 통해서나 마음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개개의 사람들이 이러하기 때문에 어떤 가정도 그러한 자리에 서려 하고, 어떤 사회도 다 그러한 자리에 서려 하며, 어떤 나라도 다 슬픈 나라가 아닌 영광의 나라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세계도 그러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인류와 이 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어떤 중심적인 존재가 계시다면, 그분도 역시 슬픈 나날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으실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도 역시 승리와 영광이 깃들 수 있는 가운데서 만물을 치리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바랄 것입니다. 그 최고의 자리란 위험스런 자리나 고독한 자리나 슬픈 자리가 아니라 그 반대의 자리요, 전체와 관계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자리를 추구하신다는 것은 두말할 바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도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계시더라도 고독하고 슬픈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자유로운 자리, 평화가 깃든 자리, 만인이 그 사랑을 영광과 더불어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랑의 길을 찾으실 것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그런 자유스러운 환경, 그야말로 평화의 천국에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욕망
하나님은 어떠한 사랑을 하려고 하실 것이냐? 최고의 사랑을 하려고 하실 것입니다. 하늘 땅이 그 사랑 앞에 머리 숙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하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개인은 어떤 사람일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조용한 가운데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영광을 획득한 개인이 있다면 그는 그 영광이 자기 개인의 영광으로서 끝맺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더 발전되어 보다 고차원적인 영광으로 연속되길 바랍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와 같은 소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도 어떤 개인을 사랑하며 주관하시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개인을 넘어서서 가정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실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 가정이 열이 있다면, 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던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그 열 가정의 한 가정 한 가정을 다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즉, 첫사람을 사랑하던 사랑을 전체에게도 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첫사람을 사랑하던 것보다 낮은 자리가 아닌 더 높은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예로 들어 말한다면, 어떤 남편이 있어서 자기 아내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 아내에 대한 사랑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그 남편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낮을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플러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던 그 자극적 본질을 빼놓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새로운 사랑의 내용을 가중시켜서 새로운 사랑으로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던 진지한 입장보다 못한 자리가 아닌 더 진지한 자리, 더 깊은 자리에서 자식에게 더 가치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이 남편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고 두 사람을 사랑했다면, 두 사람을 사랑한 내용을 빼버리고 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인연을 기반으로 해서 세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랑을 합한 사랑을 가지고 열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야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고 행복스럽지 못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누구나 그렇게 사랑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통해서도 내릴 수 있는 타당한 결론일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이 있다면, 그리한 가정을 중심삼은 종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족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자기 가정을 사랑하면서 체휼된 모든 내용들을 빼버리고 사랑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종족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종족을 진짜로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종족을 사랑하고 나서 민족을 사랑할 때에도, 종족을 사랑한 내용을 빼버리고 민족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종족을 사랑한 것을 모태로 하여, 거기에 플러스시켜 가지고 민족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이 민족, 이 나라는 하늘 땅 가운데 영원히 남아야 할 민족이요 영원히 남아야 할 나라라고 하면서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중심삼고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면,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터전을 빼놓고 사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세계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를 사랑한 이하의 마음을 가지고 세계를 사랑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욕망의 법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한 국가를 사랑한 사람이 세계를 사랑하려고 한다면, 국가를 사랑하던 모든 체휼적인 내용을 가지고 그 이상 사랑하고 싶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욕망이라는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국가보다도 세계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기에, 국가를 사랑하던 내용을 가지고 세계를 더 사랑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세계를 사랑하던 것을 떼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사랑하던 것을 누룩으로 해서, 터전으로 해서 하나님을 세계보다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자리를 찾으실 것인가? 세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자리를 찾으실 것인가, 그렇지 않은 자리를 찾으실 것인가? 이것은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세계보다 더 사랑하는 자리를 찾는 것이 사랑의 욕망의 종착점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렇게 보게 될 때, 자식을 많이 키워 본 부모는 그 무엇인지 모르게 사랑의 심정이 넓고 큰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식을 많이 기른 사람은 원수를 스스로 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무엇인지 모르나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넓은 법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사랑의 주체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나 사랑의 주체되시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칫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는 다 빼놓고 하나님과 자기만의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고 하기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를 바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모시라면 공평한 마음을 가지시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공평하게 사랑을 분배하시고 싶은 마음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부모의 입장에 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될 때, 세계는 빼놓고 자기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는 사람을 하나님은 용납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와 더불어 사랑받겠다는 것은 용납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대한민국과 더불어만 사랑받겠다는 것은 용납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관념을 떠나서 세계와 더불어 사랑받겠다고 해야 될 것입니다.
‘나만 사랑해 주십시오!’ 이것은 본질적으로 용납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나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개인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그 의라는 것은 개인이 먼저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가질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욕망을 가지신다면 그 나라에 대한 욕망과 그 의에 대한 욕망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터전 위에서 사랑을 성립시켜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욕망이나 소원 성취의 길을 다 빼버리고는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만 살기를 원하거나 잘되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잘되더라도 끝내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저들과 더불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만 잘되기를 바라면 망하는 것이고, 저들과 더불어 잘되고 흥하기를 바라면 저들이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저들이나 민족에 남아 있는 한, 나는 저들이나 민족과 더불어 같이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위주로 인륜 도덕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공사(公私)라는 말을 하게 될 때에도 공을 먼저 하게 되어 있지 사를 먼저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공이라는 것은 그대라든가 전체라든가 하는 상대권(相對圈)을 인정해 놓는 데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권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상대권은 공이 거하는 곳이고, 공이 거하는 곳에는 그대들이 있는 것입니다.
참승리는 공적인 승리
그대들이 소원하는 것은 개인적인 소원이 아니고 전체의 소원입니다. 전체가 소원하는 자리를 중심삼고 기뻐하는 자리는 개인의 슬픔으로는 좌지우지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어떤 잔치가 벌어져서 모든 사람이 기뻐할 때에 그 가운데 어떤 개인이 자기에게 슬픈 일이 있다 해서 슬퍼하면 그 자리에서 제거되는 것입니다. 기쁜 날을 맞이했으면 전체에 기쁨을 더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자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개인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기쁜 자리를 삭감시키면 추방당하는 것입니다. 전체의 기쁨을 고취시키고 자극시킬 수 있는 데서만 연속적인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공적인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승패와 현재’인데, 승리는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지금까지 말씀한 견지에서 보면, 자기를 위주한 승리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주한 승리는 자기 개인의 울타리권 내에서는 필요할지 모르나 전체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앞날을 헤아려가는 것입니다. 앞날을 헤아리는 데에 희망이 깃드는 것입니다. 희망도 개인적인 희망이 아닌 전체적인 희망이 깃드는 것입니다. 또 희망을 가진 사람은 지혜로운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벌써 지혜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생활은 어떤 생활이냐? 현재의 승리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승리를 위해서 사는 생활입니다. 현재의 승리도 승리지만 현재의 승리를 어떻게 미래의 승리로 남기겠느냐라고 고심하면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현재의 제한된 개체를 중심삼은 승리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인연된 승리권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체와 인연된 승리권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승리권을 말하고, 공적인 승리권은 전체적인 승리권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이라는 것은 사적인 기준에서는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공적인 기준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선은 전체를 상대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열 사람을 대해야 할 입장이면 열 사람의 상대역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백 사람을 공적인 대상으로 삼았으면 백 사람의 상대역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과 국민을 중심삼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공적으로 살게 되면 대한민국 전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가 아니라, ‘너자 나요 나자 너다’가 됩니다. 애국자의 인연이 여기에서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를 표방하고 나서게 될 때 개인의 승리만 표방하고 나서면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만 승리해 놓고 좋아하면 안 됩니다. 개인적인 승리는 지극히 일반적인 것입니다. 360도에서 1도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개인적인 승리는 지극히 제한된 범위에서의 승리입니다. 그런 승리로는 360도(전체)와 인연을 맺어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는 둘을 위해 있는 단위이기 때문에 하나는 둘과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은 또 셋과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만의 승리는 하나를 셋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다리인 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제한된 다리, 나만을 위한 다리는 될 수 있지만 전체와 인연맺을 수는 없습니다.
희생은 승리의 비결
그러나 개인적으로 승리하더라도 그것을 내 것만으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 앞에 돌리면 개인적인 승리가 공적인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또 하나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생하는 것은 현실무대에 승리를 연결시키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도의 세계의 주인인 하나님이 도의 세계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선의 길을 가려는 사람에게 희생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내 것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바칠 때, 전체를 위해 희생할 때 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희생해야 합니다.
사적 기준을 중심삼고는 공(公)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희생의 과정을 거쳐야 공이 성립됩니다. 그래서 도의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희생이 도의 본질입니다. 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라를 위해 정성을 들이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도 도인인 것입니다. 도인은 자기가 기뻐하기 전에 대한민국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을 위해서 사는 사람, 삼천만이 웃기 전에는 절대로 내가 먼저 웃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일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웃어본 적이 없는 얼굴, 보기 싫고 추악한 얼굴, 찡그린 얼굴이지만 대한민국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을 바라보며 웃지 않고 찡그린, 그래서 보기 싫고 추한 얼굴이라면, 그 얼굴이 보기 싫게 되면 될수록 다 대한민국이 좋아할 수 있는 얼굴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나타난 그 얼굴이 흉할수록 배척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비참할수록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비참하게 된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살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면, 그렇게 될수록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애국정신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모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길이 희생을 각오하고 나서는 길이라는 것은 정당한 이치입니다. 사랑의 길은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는 못 가는 길입니다. 진실되고 심각한 자리에서 희생을 각오하고 나서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 갔다면 그것은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보다 심각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앞에 인계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인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는 슬픔을 맛볼 것입니다.
이렇게 헤아려 볼 때, 우리는 어떠한 자리에서 승리를 원해야 되겠습니까? 개인적인 승리가 귀하냐, 가정적인 승리가 귀하냐 할 때, 가정적 승리가 더 귀하긴 하지만 그것 가지고 동네방네 자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승리를 했다고 해서 동네를 다니며 우리 가정의 승리를 찬양해 달라고 하면, 즉 그 승리가 동네와 아무 상관이 없으면 찬양은커녕 비웃음만 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정의 승리가 그 동네와 인연되게 될 때는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찬양할 것입니다. 그 승리에 절박한 사연이 깃들어 있으면 동네 사람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찬양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보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승리를 표방하고 나서는 사람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공적인 입장에서 살다 가신 예수
예수님이 30여 세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자는 그 말씀을 개인적인 것으로 가볍게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만 독생자냐고 반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입장은 타락인간과는 다른 것입니다. 설사 다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그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 간절해야 되며, 하나님은 공적인 사랑의 주체로 계시면서 그 사랑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을 찾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또, 그런 아들은 이러이러한 본질과 이러이러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안 것을 성사시키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것도 아셨습니다. 즉, 자기 생명을 투입해서라도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런 것을 아시는 입장에서 사(私)가 없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찾는 아들은 세계를 대표한 하나의 사랑의 표상, 하나의 사랑의 주체인 것을 아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표상,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 바라는 보다 공적인 중심이요, 만민이 바라는 공적인 중심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느끼는 자리에서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공포한 것은 지극히 공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독생자의 권위를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독생자로서 사랑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수난의 길, 생명이 엇갈리는 길도 당당히 밀고 나갔고, 그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일념을 다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혼자 돌아가셨지만 혼자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다 공적인 자리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또, 혼자 망하는 입장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사랑을 하늘 세계에 남기고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인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실체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한 내연이 맺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서 나타나고 인간의 사랑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현현하는 것이요, 인간의 사랑이 현현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하나되어 새로운 기독교가 창조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공적인 입장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선이 발전해 가는 길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도 무엇을 위해 사느냐? 밥을 위해 사느냐, 옷을 위해 사느냐, 집을 위해 사느냐? 나는 그것을 위해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를 위해 사느냐? 통일교회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 통일교회보다도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 삽니다. 이것은 공적인 길을 가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단계입니다.
선은 어떻게 발전해 나가느냐? 개인을 전체보다 더 사랑하는 데에서 선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보다 전체를 더 사랑하는 데에서 선이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을 두고 볼 때, 개인이 발전하려면 마음이 몸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마음이 그 개인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몸이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개인이 발전도 하고 사랑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곳에는 , 더욱이나 타락한 우리 인간들은 희생을 가중시키지 않고는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효자라고 할 때, 효자 그 자체를 보면 비참한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칠순 팔순이 다 되셨으니, 그분들이 이제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는 가, 잡수시면 또 얼마나 잡수시겠는 가, 그러니 정성을 다해 부양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목이 메이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효자는 경치가 아름다운 산야를 보면서도 ‘우리 부모님과 더불어 이 산야를 감상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자리는 비참하다면 비참한 자리요, 괴롭다면 괴로운 자리입니다. 눈물 흘리는 그 자체는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불행한 자리냐 할 때, 불행한 자리가 아니라 행복이 깃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눈물 흘리는 생활이 나쁜 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고난을 당하면 희망이 깃든다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하고 입고 싶은 것도 입지 못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염려해 가는 무리가 있다면, 보기에는 비참한 무리인 것 같지만 그 무리에는 영원한 위로의 눈물이 둘러쌀 것입니다. 영원한 찬양과 행운의 노래가 둘러쌀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원한 희망의 천국이 그 앞에 선물로 마련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 불쌍합니까? 불쌍한 것 같고 비참한 것 같지만 승리의 권한을 획득하는 자리, 영광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예수님이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십자가에 달려 사라지고,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어 국민 앞에 규탄받는 비참한 자리에서 쓰러지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 내가 주장한 것은 너희들이 억천만 대를 지나도 꺾으려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철석같았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한 것은 절대적이었다. 내 생명을 버린다 해도 이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자 하나님은 이것을 사실로 공인했다. ’ 이렇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참한 자리에서 돌아가셨지만 거기에서 소망이 솟아난 것입니다. 소망이 절단된 것이 아니라 차원 높은 소망이 그 비참한 자리에서 싹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통일교회만을 위해 살면 망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도 망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안에서만 사랑한다고 하다가 싸움이 벌어지면 수습 방안이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기준으로 여기고 나가다가 싸움이 붙으면 갈라지게 됩니다. 갈라지게 되면 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목적이 나라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면 싸움을 했더라도, 나라를 찾는 길을 또 가야 되겠기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원높은 소망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선 오늘날,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는 서로 자기들의 세계가 최고의 희망이요, 최후의 희망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지 않고 최후의 이상으로 옮겨가는 전단계의 세계라고 했다면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천주주의
그런 관점에서 천주주의를 타이틀로 내세운 통일교회가 그 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만 있다면, 인류에게 이런 자각된 주의를 가르쳐 주고 느끼게 할 수 있는 길만 있다면, 힘은 들지만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매는 맞지만 진정한 애국자는 그 채찍에서 소망을 느끼는 것입니다. 채찍이 강하면 강할수록 애국심은 뼛골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소망을 품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망하는 자리에서도 소망을 품는 사람, 소망을 갖고 망하는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이 땅 위에 승리의 천국을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상입니다. 이렇게 순교의 피로 역사를 엮어온 것이 기독교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승리의 개인을 다짐해 나왔고 승리의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다짐해 나왔습니다. 승리의 천국을 기필코 이루겠다고 하면서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망하지 않은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만의 승리를 추구하면 통일교회도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통일교회를 위주로 한 세계를 꿈꾸시지 않습니다. 세계를 위한 통일교회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통일교회를 세계의 주체로 인정하시더라도 전체를 위한 주체로 인정하시지, 전체를 위하지 않는 개체적인 주체로는 인정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집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고 입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잘되기를 바란다면서 부모가 저금해 놓은 것까지 찾아다 먹으면 되겠습니까? 먹고 싶은 것 먹지 않고 입고 싶은 것 입지 않으면서 자기 집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입니다.
통일교회 식구 여러분이 승리를 표방하고 있고 승리를 고대하고 있는 데, 통일교회가 오늘날 역사 시대에 새로운 파문을 던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새로운 문화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개인만을 위한 사상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개인만을 위한 사상이라면 그 사상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또 가정만을 위한 사상이라면, 민족만을 위한 사상이라면, 국가만을 위한 사상이라면, 세계만을 위한 사상이라면, 하늘 땅만을 위한 사상이라면 그 사상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 땅을 위하는 사상이되 사랑을 중심삼고 하늘 땅을 통일시킬 수 있는 사상이라면 하늘 땅이 깨지더라도 그 사상은 남아질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죽더라도 그 부모가 자식을 사랑했다면 영원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 속에 왜 살아남아 영향을 주겠습니까? 나라에 대한 사랑이라는 명사를 중심삼고 누구보다 애달프고, 누구보다 처량하고, 누구보다 고독한 자리에 서게 되었으나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깃든 부활의 인연
자기들이 바라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갈라지더라도 가정 때문에 갈라졌다면 그것은 한이 됩니다. 즉, 낮은 인연에 의해 갈라지면 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 때문에 갈라진다면 자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는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자기의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지게 되었다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자랑이 됩니다.
또, 세계 때문에 자기들의 사랑이 깨졌다면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최고의 자랑이 됩니다. 그거 이상하지요. 그것이 슬픔이 안 되고 자랑이 되니 말입니다. 당장은 비참하지만 세계를 위해 생사를 결단하면서 헤어지는 석별의 정이라는 것은 세계적인 사랑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추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도 하나님까지 얼굴을 돌려 캄캄한 어둠이 세 시간 동안 천지를 뒤덮었지만, 그 자리에 찾아드는 사랑의 인연이 비참한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죽음의 자리에 처하게 된 자식을 눈을 뜨고 바라보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하며, 눈을 감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부모가 소망하던 세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죽음의 자리에 서면, 죽어서도 부모가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참한 자리이지만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죽음은 비참했지만 새로운 깃발이 들려지고, 새로운 사랑의 흐름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세 시간 동안 캄캄한 어둠이 덮였지만 새로운 부활의 역사가 벌어지고 천국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만을 위해서 죽겠다고 하는 통일교인들은 필요없습니다. 통일교회보다 더 크고 차원 높은 것을 위해 죽겠다고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통일교인인가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길입니다. 또 통일교회가 해야 할 일은 삼천만을 교화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선의 주권을 세울 때까지 우리는 가야만 하는 것이요, 싸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역사시대에 있었던 어떠한 싸움보다 치열하더라도 싸워야 되는 것이요, 이 길이 역사시대에 있었던 어떤 길보다도 고독한 길이더라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생사가 엇갈리는 길이라 하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다가 죽는 다 해도 망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를 휘어잡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께서 하신‘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말씀은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충신은 생명을 바치고 나서 결정되는 것이요, 진짜 효자는 생명을 바치고 나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면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충신, 효자라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뜻을 위한 죽음길도 가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의 말입니까, 사랑의 말입니까? 사랑의 말입니다. 성경에도 역설적인 말씀이 많이 있는 데, 그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입니까? 사리에 맞는 말씀입니다.
얼핏 보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 다는 말이 역설같이 해석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그 나라가 없기 때문에 허황된 것 같이 해석됩니다. 그렇지만 소망이라는 것에는 허황된 것이 몇 퍼센트는 개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허황된 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이 실현되게 되면 그만큼 가치의 비율이 높은 것입니다. 승리할 수 있는 요건이 다 갖추어진 입장에서 승리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못할 일을 했다고 했을 때 표창을 받는 것 아닙니까?
자기의 교회만을 위하라고 하는 지도자, 자기의 교회가 최고이니 자기의 교회 이외의 교회에 가면 안 된다고 하는 지도자는 진정한 지도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봄이 되면 꽃은 자동적으로 피는 것입니다. 씀바귀꽃도 피고, 함박꽃도 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더 심각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면 기독교를 믿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충신과 효자는 만국 사람의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충효의 도리는 만국이 통일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나 안 믿는 사람에게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믿으며 복종하는 사람보다 안 믿으며 충성하는 사람이 더 칭찬받는 것입니다.
이제,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은 통일교회만을 위해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통일교회가 나라를 위해 있는 교회라면,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먼저 나라를 위해 나가 싸워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제시한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실천하지 않으면 통일교인으로서는 낙방입니다. 그런 사람을 통일교인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통일교회를 망치는 무리요, 나라를 망치는 무리입니다.
그것을 실천하고 나면 승리와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밟고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패자의 서러움을 맛볼 것입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슬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는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통일교인들은 삼천만 민족을 위해서 거리에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있거들랑 그 앞에 가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거국적인 활동을 전개하라는 것입니다.
내 사정이 더 공적인가, 교회의 사정이 더 공적인가 할 때, 내 사정이 더 공적이라고 하는 패들은 이미 망해 둔 것입니다. 뜻을 위해 산다는 공적인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선에 서 있는 사람들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후방에 있는 자기의 자녀를 더 중요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망합니다.
승패가 결정되는 때
승자와 패자는 이 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병이 나서 죽은 사람은 순간적으로 발병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병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간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죽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무가 말라 죽을 때도 한꺼번에 말라 죽습니까? 모르는 사이에 나무는 말라 죽습니다. 병균이 우리 몸에 파고 들 때에도 처음에는 한 마리가 파고 들어 번식하는 것입니다. 병균의 세력이 몸의 저항력보다 약할 때는 괜찮으나 병균의 세력이 더 커지면 그 힘이 조금만 커지더라도 우리 몸이 떨꺽떨꺽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눈에 포착되는 때가 언제냐? 지금 이 순간, 즉 현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정을 분별하지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때를 분별하지 못하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이미 이르렀나니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입니다. 즉,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것입니다. 또,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바로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망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승패는 언제 엇갈리느냐? 현재를 밟고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승리의 길이 그에게 없어 승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미래의 승리는 영영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희망을 갖고 싶어도 희망과 더불어 찾아오는 승리를 맞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가가 바라는 승리는 세계적인 승리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 땅을 해방시키자는 것입니다. 하늘 땅만 해방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뜻을 이루지 못하신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리자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기성교회 목사들은 기가 막혀 도망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린다니’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해방시켜 드려야 할 우리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려야 됩니다. 또, 하나님은 해방받으셔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인지도 모르고 구원받겠다고 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영계에 가서 또 전도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지옥에 가 있는 어머니 아버지를 심판받는 데에 가서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계시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아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소원성취하실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아들을 못 찾으면 하나님은 소원을 성취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섭리해 오셨지만 소원성취 하셨습니까? 기독교가 2천년 동안 발전해 나왔지만 소원성취 했습니까? 오히려 기독교가 지금 퇴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소원성취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원하러 가고, 예수님을 구원하겠다고 한다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기분나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어서 와서 구원해 달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원하겠다고 하며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최고의 충신이요, 효자일 것입니다. 그는 충효의 도리를 다하고 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부모를 교육시켜서 박사를 만들어 드리겠다고 하는 아들이 있다면 그가 불효자겠습니까?
통일교회의 사상은 지상천국을 이루자는 것
선생님은 자기를 중심삼고 남과 전체를 평하는 사람보다도 남과 전체를 감정하기 전에‘뜻’을 중요시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잠자리에 있더라도‘뜻’ 하게 되면‘어이구’ 하며 염려하는 사람, 허리 아픈 사람보다 더 큰 한숨을 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같이하는 것입니다. 겸손하라는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도 공적인 자리에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를 가더라도‘너는 어디를 가느냐, 무슨 일을 위해서 가느냐, 그러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일이냐? ’고 반문해 봅니다. 또 나는 ‘내가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선생님 입장에 있으니 공석에 나타나서 말을 하게 되면 위신을 지키기 위해 거룩해야지’ 이러지 않습니다. 나는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체면이고 위신이고 없습니다. 공석에서 책망합니다.
나는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적으로 살려는 한 사람, 천륜을 위주로 살려는 한 사람, 나의 모든 것을 넘겨줄 수 있는 대표자 한 사람만 찾으면 나는 승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이 여러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치가가 아닙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남모르게 슬쩍 하려고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내가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나가더라도 현재의 통일교회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다 뿌리치더라도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통일교회는 대한민국을 거치고 세계를 거쳐서 하늘나라까지 가야 합니다. 하늘나라까지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한 세계적인 대표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국가를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하고 천국을 대신하는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통일교회는 무엇을 맞이해야 하느냐? 통일교회는 기성교회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성교회를 맞겠다고 하면서 기성교회와 싸움을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기성교회를 넘어서 기성교회가 바라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기성교회를 향해‘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천국을 가기 위해서 믿는 다고 하면 안 됩니다.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천국이 건설되어 있다면 천국에 갈 수 있겠지만 지금 천국이 건설되어 있습니까?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해 천국이 깨져 나갔으므로 타락하지 않은 부모가 나오기 전에는 천국이 건설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타락하지 않은 부모를 찾았습니까?
땅 위에 천국을 이루자는 것이 통일교회의 사상입니다. 천국을 메고 가야 합니다. 그것이 최후의 승리의 결정점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이루어 놓았습니까?
우리 교회가 교회 단체로서 이만큼 성장했으면 규범이 있어야 합니다. 통일교회 식구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 가 하는 규범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생활에서부터 공적인 생활에 대한 규범이 있어서 그 규범에 따라 움직여야 할텐데 규범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각 부처가 법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같이 법이 있어야 하는 데 아직까지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의 나라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지나가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어디에다 세울 것인가? 천국을 공중이 아닌 이 땅에 세워야 합니다. 곧 대한민국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천국 만들려고 안 합니다. 대한민국을 천국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보다 안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끝까지 나가면 누가 먼저 지칠 것 같습니까.
통일교인들이 지쳐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천국 만들자는 말도 못하고 있거니와 생각도 못하고 있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더 나은가? 설령 통일교인들이 지쳐 있다 하더라도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들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지쳐 있는 자리라면 그들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예 떨어졌다 하면 그것은 그들보다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언제는 뭐 어떻고 저떻고 하더니 이제는 자기의 아들딸만 데리고 살려고 하니 수작 좋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통일교인 축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신 선생님의 심정
내가 지금 반대받고 있지만 기성교회를 찾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당회장, 총회장 또 대한민국 정부의 무슨 장들을 찾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고자세를 취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직 내 할 일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갈 길이 바쁘기 때문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축복받으려고 하다가 지친 사람들도 있고, 전도한다고 하다가 지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를 따라가다가 감옥에 간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감옥에 간 사람들은 있지만 통일교회를 믿다가 감옥에 간 사람들은 없습니다.
선생님은 청춘시대에 지칠 수 있는 때도 많았지만 지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선생님이 지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안달했는 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냥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들어가 수많은 고문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이시여! 나를 동정하지 마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려운 입장에 서더라도 나는 절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렵게 되면 기도를 안 하는 사람입니다. 일주일이고 한달이고 이야기를 안 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최고의 정성을 기울여서, 하나님이 나를 조건으로 삼아서 어떻게 이 어려운 환경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서 내가 구원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통곡하시고 분해 하고 원통해 하셔서 뒤넘이치게 할 수 있는 길을 어떻게 찾느냐? 다시 말하면 원수의 적진에 적중시킬 수 있는 심정의 폭발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했지, 내가 빨리 나가야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프면 얼마든지 고파 보라는 것입니다. 배고픈 자리에서도 세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탕감복귀노정을 걸어놓고 배고픈 것 이상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여안고 눈물 흘릴 때는 있었지만, 그 자리를 면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평상시보다 더 정성을 들이고 기도했지, 매맞았다고 다리나 허리가 아파 죽겠다고 응얼거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픈 자리에서도 민족을 품고 민족의 수난길을 염려하고,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해원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릴 때는 많았지만, 아이구 못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리밥을 대할 때에도 이 밥은 우리 선조들의 피의 결실이요, 나는 선조들의 피의 결실을 먹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젓가락은 부러진 젓가락이요 밥은 찌꺼기 밥이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위신과 체면을 위해서 가리지 않고 먹었습니다. 보리밥이라도, 선조들의 피의 결정체라고 생각하고 먹었습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입은 다물고 있지만 하나님이 영계를 통해서 전도를 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평양에 가 있을 때에도 나를 잡아넣으려 모략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후손들까지 심판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을 치는 사람은 빨리 망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과 통일교회에 있어서 심각한 현재
그러면 승리는 어디에서 얻느냐?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승리는 영영 없는 것입니다. 나는 돈이나 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죽더라도 이 나라를 위해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더라도 하나님이 보호할 수 있는 그 나라에서 죽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내 나라에서 살다 가지 못하면 그 생애는 비참한 생애가 됩니다. 하루라도 그 나라에서 살다 가야 되겠다는 것이 선생님 일생의 소원입니다. 그 한날을 위해서 수천 날을 희생하자고 생각하면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하면, 대한민국이 못하면 외국으로부터 포위작전을 펼쳐서라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승자는 기쁨을 맛보지만 패자는 서러운 것입니다. 누구와 더불어 기쁠 것인가? 가족과 더불어 싸워 승리했으면 가족과 더불어 기쁜 것입니다. 같이 싸우다 망하면 같이 싸운 전체가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의 문선생은 누구와 더불어 싸우느냐? 나 홀로 싸우지는 않습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싸우고 있고, 천상세계에 가 있는 모든 선지 선열들과 더불어 싸우고 있고, 기독교를 위해 순교한 선열들과 더불어 싸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새로운 세계를 바라고 나오는 도인들이 내 눈 앞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들을 대표한 자리에서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있지만 영계를 통하는 사람은 나와 더불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삽니다. 그래서 거리를 초월해서 내가 움직이고 내가 가는 길을 영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 무수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대표한 입체적인 입장에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싸운 대상은 무엇이냐? 먼저는 개인이었고, 그 다음엔 가정이었고, 그 다음엔 종족, 민족, 국가였습니다. 지금은 어느 단계까지 왔느냐? 종족을 제물삼아 민족과 국가의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여기에 포함한 가정은 영계나 육계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패하는 날에는 나의 이름과 관계되어 있는 지상의 통일교회만 패하는 것이 아니라 도의 인연을 맺고 나가는 천상세계의 성도들 전체가 이 세계의 비운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할 것이냐? 아담 해와의 비참보다 몇백 배 비참한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장성기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완성기라는 한계선이 남아 있으므로 하늘이 손을 대셔서 소망을 줄 수 있었지만, 우리 때는 완성기, 즉 섭리의 종결을 바라보는 때라 만약 패하게 되면, 나 이상 비참한 역사를 수습하고 승리의 터전을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각한 것입니다. 한번 헛디디는 날에는 억천만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각한 자리입니까? 선생님이 심각함을 느낄 때는 부들부들 떠는 것입니다. 그럴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 자리가 하나님이 바라시던 자리요, 이 순간이 복귀역사상 최고로 숨막히는 정상의 순간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인연이 이 자리에서 맺어지고 하나님의 소원과 전체의 소원의 성패가 이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 숨결을 통해서도 억천만의 생명을 죽음의 자리에서 살려 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심각하지 않겠어요? 인류가 찾아나온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말하기 전에 우선 오늘날의 타락세계는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타락한 부모가 먼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타락한 부모로부터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런데 끝날은 타락세계가 하나의 경계선을 넘는 날입니다.
타락의 경계선을 최초로 넘은 한 사람 ― 메시아
이 끝날에 그 경계선을 처음 넘은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그 사람이 없으면 원수의 세계를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재림주입니다.
그러면 첫번째 넘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타락의 인연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타락의 인연을 지니고는 못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경계선을 한꺼번에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타락세계는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로 갈라졌습니다. 윗쪽 반은 민주세계요, 아래쪽 반은 공산세계입니다. 윗쪽은 하늘편이요, 아래쪽은 사탄편입니다. 하나는 마음적이요, 하나는 몸적입니다. 민주세계는 마음적이기 때문에 유심사상을, 공산세계는 몸적이기 때문에 유물사상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계선까지 와서 민주세계도 벽에 부딪쳐 있고 공산세계도 벽에 부딪쳐 있는 데, 어떻게 할 것이냐? 공산세계를 수정해서 넘어갈 수 있느냐? 넘어갈 수 없습니다. 민주세계도 수정해서 넘어갈 수 있느냐? 안 됩니다.
만일 나라만 갖추어 넘어갈 수 있다면 세계의 으뜸국가인 미국이 제일 먼저 넘어갈 것입니다. 또 머리좋은 민족, 즉 유대민족 같은 민족이 넘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는 못 넘어갑니다.
세계의 주도권을 가진 나라도 못 넘어가고, 세계를 공산화시키려는 공산세계도 못 넘어갑니다. 세계가 넘어가려면 어떤 한 나라가 먼저 넘어가야 하고, 어떤 나라가 넘어가려면 어떤 한 민족이 먼저 넘어가야 하고, 어떤 한 종족이 넘어가려면 어떤 한 가정이 먼저 넘어가야 하고, 어떤 가정이 넘어가려면 어떤 한 개인이 먼저 넘어가야 합니다.
어떤 개인이 넘어갔다가 다시 넘어와서 가정을 만들어 가지고 인도해 넘어가야 가정이 넘어갈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이 경계선을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 아닙니다. 결국은 한 사람이 넘어가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그 사람은 민주세계의 한 사람이요, 어떤 특정 국가의 국민의 한 사람이요, 특정 씨족의 한 사람이요, 특정 가정의 한 사람입니다. 그 한 사람이 속해 있는 가정은 세계적인 가정이고, 그 가족이 속한 씨족은 세계적인 씨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책임을 짊어진 사람은 자기가 그러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누구만이 아느냐?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 때’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만이 아시는 데, 아버지가 아시는 그 뜻을 중심으로 가정이 일치된 자리, 같이 화할 수 있는 정상의 자리, 공동운명을 이어받을 수 있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 아버지와 인연이 맺어져 있는 그러한 고차원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을 갖고 오시는 분이 재림 메시아라는 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바라는 재림주라는 것입니다. 그 재림주는 세계를 이기고 오시는 분이 아니고, 싸우며 경계선까지 나오는 분이십니다. 사망선과 생명선의 경계선에서 부딪치는 것입니다. 또, 전체를 대표한 자리에서 홀로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 홀로 부딪치는 데에는 전체를 대표한 승리의 인연이 있는 것이요, 선한 인연이 있는 것이요, 악의 인연도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선한 사람도 관심을 갖는 자리요, 악한 사람도 관심을 갖는 자리입니다. 전체가 관심을 갖는 대표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먼저 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사람이요, 사탄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흥하게도 할 수 있는 사람이요, 사탄을 흥하게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고 사탄의 비밀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주권자라도 그가 사탄과 틀고 돌아가게 되면 넘어가는 것이고, 반면에 그가 하나님과 하나되어 틀고 돌아가면 사탄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승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도 아니요, 사탄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비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을 이기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을 굴복시켰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사탄을 대신한 천사와 씨름해서 이기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탄을 친 것입니다. 왜? 사탄이 먼저 쳤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지더라도 지혜만 있으면 또다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협조 안 해 주셔서 졌지 하나님의 협조를 받으면 지지 않는 다고 하면 또다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지에 야곱을 하늘이 내몰아 친 것은 야곱이 지더라도 또다시 씨름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반대의 입장에 처넣을 때가 가끔 있는 것입니다. 보통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모세도 죽을 자리에 내몰았고, 노아 할아버지도 죽을 자리에 내몰았습니다. 산 꼭대기에서 방주를 짓도록 하신 것은 죽을 자리에 내몬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21년간 도를 닦아 가지고 소원이었던 고향산천을 찾아가니 ‘잘가라, 조심하라’고 해야 할텐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씨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만일 싸우다 지면 21년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악착같았다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이 손 못 놓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이 이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손 놓으라고 한다고 해서 야곱이 그냥 놨겠어요? 야곱은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천사는 심각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야곱은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 대장과 싸울 때 누가 더 심각했겠습니까? 다윗이 더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골리앗 대장은 어린 소년이 돌팔매를 돌리며 자기를 때려잡겠다고 하니 오히려 기가 막혔습니다. 골리앗은 농(弄)으로 다윗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골리앗이 당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사탄에게 승리했다는 영수증을 사탄에게 받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 보았습니까? 사탄에게 영수증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티켓을 누가 주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사탄이 ‘난 더 이상 할 수 없다. 만일 더 덤비다간 뼈도 못 찾겠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나타나면 보따리 싸가지고 달아나버릴 정도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 잡고 공산당과 싸워야 할 기독교와 통일교회
극성맞게 반대하는 사탄은 세계를 갖추고 있으나 나는 하나님 한분만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과 세계가 하늘 길을 가는 한 사람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늘 길을 가는 사람은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심각한 자리에서는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심정이 필요합니다.
선열들에게는 그 가는 길 앞에 부인과 자식들이 귀찮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식이 원수로구나 하는 것을 느껴 보았습니까? 하늘 뜻 앞에 자식을 제물로 바치고 싶은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 위에 서 있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원자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같이 죽겠다고 각오하고 가는 무리입니다.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를 소화한 터전 위에 하나님을 모시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으면 죽어도 안 놓겠다는 것입니다. 6천년만에 만나 뵈었는 데 어찌 놓겠습니까! 하나님이 할수 없으셔서 ‘야야 그러지 말아라, 내려가자’ 하시면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자리를 잡으시게 될 때, 선의 주권국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기독교는 통일교회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신념입니다. 이것을 기성교회 목사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것입니다. 그러나 기가 막혀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하나 되어서 공산당을 때려잡자는 것이 통일교회의 사상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을 수 없습니다. 악의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극성맞게 반대하던 사탄의 나라, 숱한 역사를 엮어온 공산당이 망하는 것을 보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그래야 억천만 대의 한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은 또다시 비참한 투쟁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승리자가 되려면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가 미래의 영광과 미래의 권한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미래의 영광과 권한을 가로막고 있는 사탄을 격파해야 합니다. 사탄을 격파하려면 포위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그 방법밖에는 사탄을 격파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사탄을 때려서 격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을 때려서는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맞고 굴복시키는 전법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위작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희생이 많은 것입니다. 적진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에 비례하는 희생을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을 하는 것이 하늘나라의 전선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고생하셔서 이만한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숨가쁜 최후의 대전을 벌여야 될 때입니다. 세계 모든 국가의 관심이 아시아에 집중돼 있습니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할 수 없지만, 여러분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승자가 되려면 밤에 제대로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밤에 제대로 잠을 자는 사람은 승리의 영광을 쟁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열 시간 자야 할 것을 한 시간만 자고 승리를 위하여 준비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수고를 투입하지 않은 사람과 비교할 때에 그 승리의 환희로 팔을 든 위에 팔을 든 것과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편안하게 싸움을 한 사람은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주체적인 사명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수고의 길, 고통의 길을 걷고 생사지경을 넘으며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여 승리한 사람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 나라의 뜻이 이루어졌을 때, 최고로 기뻐할 사람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아마 통일교회의 문선생이 제일 기뻐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봅니다. 왜 그러냐? 내가 제일 심각한 싸움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각한 순간을 수 없이 걸어 왔습니다. 싸움에 이기고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그 싸움을 책임진 사령관인 것입니다.
낮에 싸움을 한 병사는 밤에 마음놓고 잠잘 수 있지만 사령관은 밤잠을 못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의 운명을 책임진 공적인 자리에서 밤이나 낮이나 이기기 위해 고심하고 수고하고 희생한 사령관에게 승리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은 타당한 것입니다.
전체를 위한 개체의 희생
싸움을 할 때 보면 안 죽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패전하게 되면 사령관은 병사들을 대표해서 최후로 고이 죽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령관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대표자인 자기 하나가 죽음으로써 전체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비록 패장이지만 미래에 존경받을 수 있는 장군이 되는 것입니다. 패했다고 서러운 것이 아닙니다. 패하는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패하는 자리에서도 소망을 남기고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행로에 있어서 패자가 되더라도 패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는 데, 그 길은 만민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희생되는 길입니다. 만민을 위해서 희생의 길을 갈 때는 미래의 선망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천국은 못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 희생정신을 뿌리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년의 한을 품고, 하늘을 걸어 놓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심정에 언제나 사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여러분의 가는 길은 밝게 트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과 선생님이 기도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패자의 서러움을 맛본 사람은 그 누구보다 큰 책임을 졌던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패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일신을 망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으나 통일교회를 패하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전부 희생시키더라도 통일교회의 뜻을 망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틀림없이 알고 계십니까?
삼천만 민족을 살리기 위해 소수의 통일교회의 무리를 죽음의 골짜기에 서슴없이 처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실천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의가 없는 것입니다. 어물어물하다가는 못합니다. 이미 출전 명령을 받았는데 자기의 사정을 중심삼고 못 가겠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패자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사람이요, 그런 마음은 도피자의 마음이요, 후퇴자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즉결처분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중심삼고 볼 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생님은 기가 막히고 비참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처분을 하지 않지만 후손이 할 것입니다. 그게 더 무서운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현재의 자리
이런 등등의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승패가 결정되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현재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까지 나왔는데, 망할 수 있는 운명에 있느냐, 흥할 수 있는 운명에 있느냐? 현재 우리가 망운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생명을 각오하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재 우리가 흥운에 처해 있다면 일시에 원수를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은 역사적인 한을 타파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통일교회는 흥운에 서 있는 데 여러분은 망운에 서 있는 것 아닙니까?
보다 공적인 입장에 서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이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이 길을 나서면서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시시하게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아직까지 최후의 모험은 못해 본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맹세한 기준에 이를 때가 되었는데, 있는 정성과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서 총공격을 명령하지 못했습니다.
최후의 전선이 우리 앞에 전개될 때 우리는 선두에 서서 싸워야 되겠습니다. 내가 나이 50이 넘었지만 선두에 서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통일교회는 이제 흥운권 내에 서게 되었는 데, 이것이 누구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까? 통일교회가 흥운권 내에 들어섰는 데, 이것은 여러분이 들어서게 한 것입니까, 아니면 역사가 가져다 준 것입니까? 역사가 가져다 준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유물이지 여러분의 소유물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선지 선열들의 피의 대가로 말미암아 이룩된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것을 보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소유하려면 역사를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선지 선열이나 선조들이 이 길을 가기 위해 죽임을 당했고, 피눈물을 흘렸고, 억울함을 당했는데, 이것을 대신 책임질 수 있는 책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조들이, ‘당신의 신념과 당신의 모든 것을 보고 기대되어 전체를 맡기니 어서 받으시오’ 해야 이어받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현재의 통일교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에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 역사적인 동참자로서 주체가 되든가 상대가 되든가 둘 중의 하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운명에 우리는 놓여 있는 것입니다.
동참하지 않고 인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동참만 해놓고 다 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살면 역사적인 원수가 됩니다. 골동품도 관리하는 사람의 부주의로 흠을 내면 후대에 비판을 받는 데, 세계적이고 역사적이고 공적인 뜻의 일을 관리하다가 흠을 내면 그 사람은 역사적인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또 길이길이 기억되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가 아닌 나쁜 의미에서 기억되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영원을 두고 참소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다 있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의 뜻을 골동품과 비교하겠습니까? 이것은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문선생과 인연된 사람들에 한해서 특권적으로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때는 역사의 기원이 되는 때요, 인생의 소원의 종착점이 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참부모를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세우신 것도 메시아를 맞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메시아는 어떤 분이냐 하면, 참부모입니다. 또 기독교와 기독교문화 세계를 만든 것은 재림주를 맞기 위한 것인데, 재림주는 제3 아담으로 오시는 참부모입니다.
참부모의 시대에 동참한 자의 가치
참부모가 오실 때가 되어, 세계의 모든 국가는 형제의 인연을 맺어야 되겠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전승국가가 패전국가를 해방시켜 준 것입니다. 이것은 형님된 입장에서 동생을 때려잡았으니 동생에게 복을 빌어 주지 않으면, 오시는 부모에게 벌을 받겠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모든 역사는 참부모를 맞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도 참부모를 찾아 나왔고, 세계도 참부모를 찾아 나왔고, 국가도 참부모를 찾아 나왔습니다. 참부모를 찾는 길을 모색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참부모가 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를 아버지라고 하고 있는 데, 그것은 통일교회에서 아버님이라고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현재 김일성과 우리는 맞서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도 하나님도 서로 내것이라고 하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공판하겠습니까? 인간이 내리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우리의 참부모는 이런 분이라야 됩니다’ 라고 하면서 참부모를 선정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는 이래서 타락한 부모요, 선한 부모는 이래서 선한 부모인 것을 인간들이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도 인류가 선한 부모를 찾아 나온 것을 알고서 자기가 먼저 거짓 부모를 내세워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선한 부모를 들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어디에 귀결되느냐? 참부모를 만나는 데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참부모가 나타나는 것이 역사의 소원이요, 국가의 소원이요, 사상의 소원이요, 섭리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그런 참부모가 나타나는 때는 역사상에 한 번밖에 없는 정점을 이루는 때요, 전무후무한 때인 것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두고 보면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숨 한번 쉬는 기간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재수가 있어 그런지 복이 있어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선조들의 정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조들이 정성을 들이고 또 들였고, 천 사람 만 사람의 인연을 거쳐 돌고 돌아가지고 해가 뜨면 높은 산에 먼저 비추듯이 하늘과 인연이 있어서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인연이 비로소 처음 나온 것입니다. 또, 생명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라와 세계의 주권을 보다 가치있는 내용으로 긍정시킬 수 있는 때도 이 때인 것입니다. 이 때는 역사의 기원이 되는 때요, 희망의 초점이 되는 때요, 영원한 생명의 시발이 되는 때인 것입니다.
타락세계는 미래의 소망을 찾아 나왔지만 미래의 소망의 기준은 이 때인 것입니다. 이 때는 또 참부모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참부모의 심정은 역사의 정점을 이루는 심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부모는 그런 자리에 설 수 있는 규범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을 모를 것입니다.
참부모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역사상 어떤 사람보다 후덕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타락한 자식과 헤어져야 할 운명에 처하더라도 거기에 걸리지 않고, 도리어 울면서 쫓아가 부모의 인연과 천만 세의 한과 더불어 애원하면서 이별하기 싫어 통곡하는 모습이 참부모의 모습인 것입니다.
참부모를 맞을 수 있으려면
그러면 그런 부모를 맞을 수 있는 자녀가 지녀야 할 심정적인 자세와 그 기본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거지 모양이어서야 되겠습니까? 만국의 효자를 대표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세계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각국의 챔피언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종족에서 선출된 챔피언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위한 챔피언이냐? 효자가 되기 위한 챔피언이요, 충신이 되기 위한 챔피언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챔피언이 되어야 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 때를 놓치면 억천만 세의 한을 남길 것입니다. 한 번 때를 놓치고 나면 그 무엇을 가지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거느린 모든 세계와 민족과 종족과 가정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그런 때와 자리는 인계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공산세계를 망하게 하고, 민주세계를 망하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망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초점상에 여러분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의 거동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효자된 사람이 있습니까? 또, 그런 사람이 충신된 일이 있습니까?
통일교회 문선생도 하고 싶은 말 다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아버지!’라는 한 마디를 부르고는 밤을 새우는 때가 많았습니다. 무슨 말을 할 것이냐? 아버지에게 내가 보일 것은 추태요, 기가 막힌 사연이요, 아버지 앞에 서러움을 재촉하는 그 무엇밖에는 없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눈물을 흘린 때도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을 보면 뻔뻔한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 선전하기에 급급한 사내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효자가 아닙니다. 효자는 마음이 앞서는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는 땅을 바라보며 하늘의 은덕이 내게서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비는 마음을 갖는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생활하지 않는 한, 효자가 못 되는 것이요 충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나 역시 하늘 앞에 효자가 되고 충신이 되기 위해서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내가 이단자로 몰렸습니다. 앞으로 우리를 이단자로 몬 사람들은 비참한 자리에서 얻어먹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오면 통일교회는 때를 맞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이 동냥해 먹던 밥 바가지는 황금 바가지가 될 것이며, 흥부 놀부 얘기와 같은 반대적인 역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이 한 때에 여자로 태어났다면 역사를 대표한 늠름한 용사의 부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용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소원하던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충신의 거룩한 자세와 효성이 드높은 아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고 한날의 생활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의 시선은 그런 것을 바라보고 그의 심정은 그런 생활을 할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청춘시대의 곱던 얼굴이 이 뜻을 위해 삶으로써 그을림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나이는 들어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뜻을 위해 살다가 이렇게 늙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한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효자가 되기 위해 병신이 되고 흠집이 생겼다면 그것이 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보면 태양같이 빛나는 것이요, 별같이 자극되는 초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말없이 수고하고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변명하는 사람은 찾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올라가라면 올라가야 하는 것이요, 내려가라면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변명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변명하는 그런 무리를 찾아나온 것이 아니고 그런 무리를 만들기 위해 교육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과 통일교회
이것이 틀리면 모르나 틀리지 않는 다면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 홀로라도 통일교회를 발전하는 운명으로 남기겠다고 다짐하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긴박한 정세하에 있다는 보도를 듣고 있는 데, 준비하지 못한 민족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60년대 70년대부터 이런 때가 온다고 예고했던 것이 여러분의 귀에 생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어쩌자고 통일교회를 원수시해 가지고 오늘날 똑바로 걷지 못하는 입장에 섰느냐 할 때 기가 막힌 것입니다. 알아볼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누더기와 같은 이 민족의 정신 자세를 무엇으로 꿰맬 것이냐? 바늘이 있어야 되고 실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의 용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썩어지지 않고 바로 서야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스승의 생각입니다.
바늘이 못 되겠거든 실이라도 되라는 것입니다. 실은 바늘이 가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내가 바늘이 되어 줄 것이니 여러분은 실이 되라는 것입니다. 실도 흰 실이 되라는 것입니다.
충신이 없으면 악한 사람들을 다시 교육시켜서 충신을 만들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이 현재의 통일교회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아무리 승리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이 망하게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를 우리는 사수해야 될 것입니다. 공산당은 주권자가 제시한 이념을 중심으로 규합되어 있으나 그것은 위압적이요, 공포적이요, 강제적이요, 생명의 위협을 가하여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적 입장, 즉 자유스러운 자리에서 자의에 의해 결의하고 다짐해서 실천해 나가고 있는 데, 실천력이 있어서 그들을 능가할 수 있는 실천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는 문제가 현재 우리가 당면한 과제입니다.
우선 국가의 방위선을 옹호해야 되겠습니다. 국가의 방위선이 지켜져야 민족이 있고 교단이 있고 종족이 있고 가정이 있고 개인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이 무너지면 전부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제일차적으로 공격받을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기도 없는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다윗과 같은 심정을 갖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때에 누구에게 책임을 지우셨느냐? 기성교회냐, 통일교회냐? 내가 알기로는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이길 것이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앞에 내세워야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시요, 승세의 주권자이신 분이 간곡한 마음을 가지고 통일교회 앞에 서실 수 있도록 어떻게 모실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통일교회에 임하셔서 모든 책임을 지고 나서시면 우리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원수를 공격하시게 하느냐 못 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 됩니다. 그것에 의해 승패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4 년 동안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972년까지, 즉 김일성이 60세가 되는 때까지 승패를 결정지어야 할 섭리적인 시점에 와 있습니다. 역사시대에 한 번밖에 없는 섭리적인 전선이 우리의 눈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는 놓여 있는 데, 사나이의 기력을 지니고 있고 젊은 피가 고동치고 있고 사나이의 감정이 용솟음치고 있는 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퇴폐적이고 부패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천운의 자리로 가야 하겠습니다.
그런 기수의 자리에 섰다는 , 소위 통일교회의 용사들인 여러분은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자세가 갖추어져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눈은 무엇 때문에 깜박거리고 코로는 무엇 때문에 숨을 쉬며, 사지백체는 무엇 때문에 움직이고, 밥은 무엇 때문에 먹고 살며, 삶의 목표는 어디에 두고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분석하고 비판을 가해야 되겠습니다.
승리의 한 날을 위해 반성하고 다짐해야
나라의 승패를 가려야 할 우리는 패자의 서러움을 당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민족의 운세와 더불어 승리의 한 날을 다짐하는 내심의 결의와 신념과 각오를 가진 자아를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문제가 지금 현재 통일교회 청년들이 안고 있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몇 푼 짜리 월급에 눈이 팔리고, 한낱 먹을 것을 따라서 입을 끌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전통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에 들어와서 어떤 사람들은 통일교회의 문선생은 애국자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현재 애국자라는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삼천만 민족이 슬픈 자리에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애국자라는 말을 들어도 그는 진정한 애국자라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승리권 안에 서서 당신은 애국자라는 찬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야만, 그 군왕 앞에 책임을 다한 충신이 되고 애국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아직 그 자리까지 나가지 못한 비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가 ‘당신의 마음은 이렇지요’라고 한 마디만 하면 언제든지 목을 놓고 통곡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정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일 것이냐 하고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아직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본부를 중심삼은 여러분에게 혹 선생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나는 위해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를 염려해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갈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이제 내 갈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죽으면 여러분의 갈 길을 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기 전에 여러분이 가야 할 길을 빨리 가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염려하는 것보다 대한민국을 더 염려하고,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대한민국을 더 사랑하고, 세계를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때가 있다면 내 대신 대한민국 백성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삼천리 반도를 바라보며 풀 한 포기나 소나무 한 그루를 붙잡고 선생님 대신 우뚝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망하지 않기 때문에 그도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죽을 고비를 몇십 번 넘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나와 같은 심정을 가지면 일을 안 하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갖고 있는 나는 얼마나 마음이 초조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 못해서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과 통일교회가 책임 못해 이렇게 되었습니다. 3년 전에 이와 같은 환경만 되었다면 이렇게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때를 맞추기 위해, 책임하지 못한 것을 책임하기 위해 배가의 노력을 다짐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망할 수 없습니다. 현재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후퇴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넘어가는 것이 책임이 아니라 넘어가 싸우는 것이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극복해야 되겠습니다. 보고 싶은 것도 극복해야 되겠고, 먹고 싶은 것도 극복해야 되겠습니다.
오로지 승리를 위해 가는 길만이 남은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어려운 것이라도 어렵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렵다고만 생각하면 망해 갈 것입니다. 모든 것을 투입해서 현실을 극복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재도 필요하지만 돈도 필요하고 힘도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 여러분은 선생님이 없더라도 선생님 대신 책임해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어디를 가든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의 현재를 지키는 데 있어서 선생님 대신 책임 다하고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전하는 시대적인 사명을 완결짓기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현재를 극복해야 된다는 것은 절대적 명제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승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바라며 말씀을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