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사랑하면 통일이 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訓讀王 | 20180404125501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6장 사랑하면 통일이 됩니다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종교의 힘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무력 침공했습니다. 지구의 화약고라 불리는 페르시아 만에 전쟁이 터진 겁니다.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때, 나는 ‘기독교 지도자와 이슬람교 지도자를 만나 이 싸움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즉각 양쪽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 땅이 우리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더라도 죄 없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 전쟁은 있는 힘을 다해 말려야 했습니다. 


이라크 침공이 일어나자마자 우리 교회 식구를 중동에 보내 각 종단의 지도자들을 모아 중동회담을 제안했습니다. 중동지역과 별 관계도 없는 내가 나서서 중동회담을 제안한 이유는 종교인이라면 마땅히 세계평화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싸움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분쟁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종교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나는 부시 대통령에게 절대로 아랍권과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상대로 싸움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나라 위에 종교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라크가 공격을 받으면 아랍권이 모두 뭉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라크 침공이 벌어지자마자 시리아, 예멘의 종단장들을 모아 부시와 절대로 전쟁하지 말라는 취지의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미국이 이기든 이라크가 이기든, 폭탄을 쏟아부어 집과 들과 산을 다 부수고 귀중한 생명이 피 흘리며 죽어간다면 무슨 보람과 낙이 있겠습니까? 


중동지역에 위기의 조짐이 보일 때마다 우리 식구들은 전 세계의 유명 NGO와 함께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찾아갑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곳으로 우리 식구를 보내는 일이 편치는 않습니다. 브라질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밭을 갈고 아프리카의 난민촌을 방문하면서도 내 마음은 중동의 화약고로 달려간 식구를 향합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세계에 평화가 정착되어 우리 식구를 죽음의 땅으로 보내는 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2001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두 동강 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를 두고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명의 충돌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돌과 대립의 종교가 아닙니다. 둘은 하나같이 평화를 중시하는 종교입니다. 이슬람 세력은 과격하다는 생각이 편견인 것처럼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도 편견일 뿐입니다. 종교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1994년 우리는 전 세계 종교학자 40여 명을 모아 『세계경전』을 편찬했습니다.『세계경전』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불교를 비롯한 세계 주요 종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비교 연구한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작업을 끝내고 보니 그 많은 종교의 가르침 중에서 73퍼센트는 모두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27퍼센트만이 각 종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종교의 73퍼센트는 동일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터번을 두르고 염주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앞세우는 겉모습은 다르지만 우주의 근본을 찾고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취미만 같아도 좋은 친구가 됩니다. 태어난 고향만 같아도 몇 십 년 같이 지낸 사이처럼 말이 통합니다. 그런데 무려 가르침의 73퍼센트나 같은 종교들끼리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로 통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며 손을 잡으면 될 일을 서로 다른 것들만 내세우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와 사랑을 놓고 다툼을 벌입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곳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도 평화를 내세웁니다.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데도 그들은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믿는 유대교 역시 평화의 종교입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입니다.『세계경전』을 만들면서 우리가 얻은 결론은 세계의 종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르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잘못된 신앙은 편견을 부르고 편견은 싸움을 부릅니다.


9.11테러 이후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 이슬람인도 우리처럼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의 지도자였던 아라파트 역시 평화를 바라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1969년 팔레스타인민족해방기구plo의 의장이 된 후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을 팔레스타인 독립국으로 선포했습니다. 1996년 선거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대통령이 된 그는 하마스 등의 과격단체들의 활동을 막으면서 중동의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중동문제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와 직접 접촉하여 대화를 한 것이 12차례나 됩니다. 


아라파트의 집무실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합니다.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삼엄한 경비병들 사이를 지나 적어도 세 차례 이상의 몸수색을 거쳐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습니다. 터번을 몇 겹으로 둘러쓴 아라파트는 우리 식구들을 만나면 웃으면서 “웰컴” 하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한 관계는 하루이틀에 구축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가 중동평화를 위해 쏟은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목숨을 걸고 분쟁지역에 들어가 종교지도자들과 관계를 맺기까지 우리는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돈도 많이 들고 힘도 많이 들었지요.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아랍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신뢰를 얻어 중동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중재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내가 처음 예루살렘에 발을 디딘 것은 1965년이었습니다. 당시는 ‘6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라 예루살렘이 아직 요르단의 영토일 때였습니다. 나는 예수가 빌라도의 재판정에 끌려가기 전에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렸던 감람산을 찾았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감람교회가 세워져있었습니다. 나는 예수가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2천 년 된 감람나무를 어루만졌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를 의미하는 세 개의 못을 박으며 그들이 하나 되는 날을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하나 되지 않는다면 평화세계는 결코 도모할 수 없습니다. 감람나무에 박힌 세 개의 못은 아직도 남아 있고 평화세계는 여전히 요원합니다.


세상은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실상 뿌리는 하나입니다. 문제는 예수를 둘러싼 해석입니다. 2003년 5월 19일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드렸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받은 은 30냥으로 샀다는 피밭 땅에 예수님이 달리셨던 십자가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23일 종교와 교파를 초월해서 전 세계에서 모인 3천여 명의 평화대사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1만 7천여 명이 예루살렘의 독립공원에 모여 예수님의 머리에서 가시관을 벗기고 평화의 왕관을 씌워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2만여 명이 함께 종교와 종파를 떠나 인류의 평화를 위한 행진을 벌였습니다. 그날 아라파트는 저녁 8시에 맞춰 팔레스타인의 모든 집 앞에 불을 밝히게 함으로써 우리의 평화대행진에 동참했습니다. 전 세계에 인터넷으로 생중계된 그날의 행진을 통해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복권되셨으며 서로 반목하던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가 화해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이슬람의 메카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 다음으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인 알악사 모스크가 있습니다. 그곳은 마호메트가 승천했다고 하는 장소로 이슬람교도가 아니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우리를 위해서만은 그 문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대행진을 마친 기독교인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을 사원 깊숙한 곳까지 안내했습니다. 이슬람 역시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편견과 아집으로 굳게 닫혔던 금기의 문을 열고 이슬람을 소통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일을 한 셈입니다. 


물론 인간은 평화를 좋아하지만, 한편으로는 싸움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순하디순한 소에게 싸움을 붙이고, 닭들이 벼슬을 곤두세우고 날카로운 부리로 연한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물어뜯고 싸우는 것을 보고 즐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놀거라’ 라고 말합니다. 결국 전쟁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은 종교나 인종이 아닌 사람의 심성입니다. 모든 것이 사람의 문제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분쟁의 원인을 과학이나 경제 탓으로 돌리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 자체에 있습니다.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 싸움을 좋아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없애주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를 돌아보십시오. 다들 평화로운 세계를 이상으로 합니다. 모두 하늘나라를 바라고 유토피아를 꿈꾸며 극락세계를 염원합니다. 부르는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인간이 꿈꾸고 바라는 세계는 모두 같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고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종파가 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천국이며 평화의 세계입니다. 인종과 종교로 갈기갈기 찢긴 마음을 말끔히 치유하는 따뜻한 사랑의 나라입니다.


강물은 흘러드는 물줄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세상에 만연한 이기주의는 개인을 망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민족의 발전까지도 발목을 잡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이 평화세계로 나아가는 길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탐욕이 민족의 탐욕으로 번져나가고 탐욕으로 얼룩진 마음이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사이에 분열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탐욕 때문에 일어난 분쟁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이런 분쟁을 없애려면 세상에 널리 퍼진 잘못된 가치관과 사상을 바꾸는 일대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실타래처럼 엉킨 복잡한 문제들은 생각의 혁명이 일어나면 삽시에 해결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민족과 민족이 사랑으로 상대를 먼저 배려하고 협조한다면 현대사회의 문제들은 모조리 풀릴 것입니다.


나는 평생 평화를 위한 일에 몸을 바쳐왔습니다. 평화라는 말만 떠올리면 지금도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고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세계가 하나 되어 평화를 누리는 그날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평화란 그런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말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그리워하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평화는 구체적인 행동이지 막연한 꿈이 아닙니다. 


그동안 평화운동에 매달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고난도 많았고 돈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명예를 위해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온 땅에 견고하고 진정한 평화가 깃든 세계가 이룩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했을 뿐입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결국은 모두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상한 일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데도 평화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평화를 입으로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불러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진리를 제쳐놓고 모른 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평화, 민족들 간의 평화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요즘 종교들은 자기 교파만 제일로 여기고 다른 종교는 무시하고 배척합니다. 다른 종교나 교파에 담을 쌓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종교란 평화로운 이상세계를 찾아가는 커다란 강물과 같습니다. 강물은 드넓은 평화세계에 닿기까지 길게 흐르며 수많은 샛강을 만납니다. 강줄기에 합해진 샛강들은 그때부터는 샛강이 아니라 큰 강물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겁니다. 


강물은 흘러드는 샛강의 물줄기를 내치지 않고 모두 받아들입니다. 그 많은 샛강을 다 끓어 안고 같은 물줄기가 되어 바다로 향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간단한 원리를 모릅니다. 강물을 찾아 흘러드는 샛강들이 이 세상의 수많은 종교와 종파입니다. 샘이 솟아올라 흐르기 시작한 근본은 서로 다르지만 찾아가는 곳은 같습니다. 평화가 넘치는 이상세계를 찾아가는 겁니다.


종교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헐지 않고는 절대로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종교는 이미 수천 년 동안 전 세계의 수많은 민족과 연합해서 커왔기 때문에 문화적 담장이 드높아 그것을 헐어버리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각기 다른 종교가 높은 담장 안에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수천 년을 지내왔습니다. 때로는 세력을 넓히려 다른 종교와 대립하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닌 것에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평화에 있습니다. 국가와 인종, 종교로 찢겨져 서로 헐뜯고 싸우며 피 흘리는 세상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놓고 피 흘리며 서로 싸우는 우리들은 그분을 고통스럽게 할 뿐입니다. 갈기갈기 찢긴 세상은 모두 사람들이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 만들어놓은 것일 뿐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 땅에 실천하는 심부름꾼입니다.


종교와 인종을 한데 어우르는 평화세계를 만들기 위한 길은 한없이 고단했습니다. 때로는 사람에 치이고 때로는 능력에 치이는 일이 수없이 많았지만 나는 그 사명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나와 함께하는 식구들이나 동료들이 너무 힘들어 비명을 지를 때면, 차라리 그들이 부럽기도 해서 “여러분은 가다가 싫으면 돌아설 수도 있고 하다하다 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나 나는 그럴 수도 없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고 그들을 향해 하소연한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200여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많은 나라가 평화를 누리려면 반드시 종교의 힘이 필요합니다. 종교의 힘은 넘치는 사랑에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전하는 종교인이니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는 게 당연합니다.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데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교파에 상관없이 2만여 명의 성직자를 모아 평화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가 함께 모여 평화세계를 찾아가는 방법을 의논하고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을 바꾸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의 목표는 어제도 오늘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하나의 주권만이 있습니다. 전 세계는 하나의 국토, 하나의 국민, 하나의 문화로 합쳐집니다. 하나가 된 세상에 분열과 다툼이 있을 리 없으니 그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소련 땅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십시오


다윈의 진화론은 검증된 진리가 아닙니다. 정신이 물질에서 비롯된다는 그들의 사상은 뿌리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모든 존재는 정신과 물질의 양면을 지닌 통일체입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 이론과 사상은 그릇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일본유학 시절에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들 역시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좋은 친구들이었지만 그들과 나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달랐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국이 광복된 후 각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승공운동을 벌였고, 소련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 전략에 맞서 자유세계를 수호해야 한다고 역대 미국 대통령들에게 직언을 한 적도 있습니다. 내 행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공산국가에서 나를 제거하려고 테러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의 사상과 이념을 반대하는 것이지 그 사람들을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산주의자들까지도 하나로 끌어안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시대의 끝자락인 1990년 4월 소련 모스크바에 들어가 고르바초프를 만나고 그 이듬해 11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은 단순히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내가 가야할 숙명이었습니다. 모스크바Moscow를 영어로 발음하면 머스트 고must go였기 때문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곳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60년이 지나면 서서히 멸망의 징조가 나타나다가, 70년이 되는 1987년이 되면 기진맥진해 쓰러질 것을 예감했습니다. 1985년 댄버리교도소에 면회를 온 시카고 대학의 저명한 정치학자인 몰턴 캐플런 박사를 만나자마자 8월 15일이 되기 전에 ‘소련 공산주의의 종언’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캐플런 박사는 "공산주의의 종언을 선포하라니요? 어떻게 그렇게 위험한 일을 …" 하며 영 내켜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타는 불꽃이 가장 화려한 것처럼 당시는 공산주의 몰락을 예견할 만한 징조가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세를 넓히던 시절이었으니 겁을 집어먹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만에 하나 엉뚱한 선언이 되어버리면 학자로서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레버런 문, 공산주의가 몰락한다는 당신의 이야기는 믿습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공산주의의 종언’이라는 말보다는 ‘공산주의의 쇠퇴’라고 둘러 말하면 안 되겠습니까? "


그의 말에 나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겁이 나도 확신이 있을 때는 용기를 내서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캐플런 박사, 그게 무슨 소리요? 공산주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은 그만큼 분명한 뜻이 있기 때문이요. 당신이 공산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는 날, 공산주의는 그만큼 힘을 잃게 될 텐데 어찌 망설인단 말이요? "


결국 캐플런 박사는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평화교수아카데미 총회에서 ‘공산주의 종언’을 선포했습니다. 감히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중립국인 스위스의 제네바는 소련국가보안위원회KGB의 주무대로 수만 명의 KGB 요원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테러를 벌이는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대회가 열렸던 인터컨티넨탈 호텔은 소련 대사관과 마주보고 있었으니 캐플런 박사가 얼마나 겁이 났을지 충분히 알만하지요. 그러나 몇 년 후 그는 최초로 공산주의의 종언을 예언한 학자로서 무척이나 유명세를 탔습니다.


나는 199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언론인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뜻밖에도 소련 정부는 공항에서부터 국가원수급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탄 자동차가 평소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고 대통령과 국빈들만이 지나갈 수 있는 노란색 황금 길 위를 달렸습니다. 당시는 아직 소련이 붕괴되기 전인 냉전시대였는데도 반공주의자인 나를 극진히 대접해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세계언론인대회에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칭찬하면서 그 혁명은 반드시 무혈혁명이어야 하며 마음과 영혼의 혁명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습니다. 세계언론인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이었지만 사실 내 마음은 고르바초프 대통령과의 만남에 쏠려있었습니다.


당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성공하면서 소련 내에서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매우 높았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대통령은 열 번이라도 만날 수 있는 나였지만 고르바초프를 만나기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가 소련을 개혁해 공산세계에 자유의 바람이 일어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혁의 칼은 그의 등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곧 큰 위험에 빠지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만나지 않으면 천운을 탈 길이 없고, 천운을 타지 못하면 오래 갈 수 없어.”


내가 염려하는 이야기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귀에 들렸던지 그는 바로 이튿날,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궁전으로 나를 초청했습니다. 소련 정부에서 보내준 리무진을 타고 크레믈린 궁전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대통령 접견실로 들어가 우리 내외가 앉고 그 옆으로 소련의 전직 각료들이 둘러앉았습니다.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자신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어떻게 성공하고 있는지를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그리고는 밀실로 들어가 두 사람만의 특별회담을 가졌습니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페레스트로이카로 이미 훌륭한 성공을 거두고 계시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개혁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소련 땅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물질세계만을 개혁하려 한다면 페레스트로이카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공산주의는 이제 곧 끝납니다. 이 나라에 종교의 자유를 불어넣는 것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 이제는 러시아를 개방한 용기로 전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는 세계의 대통령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


종교의 자유라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튀어나오자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적잖이 당황하며 얼굴을 굳혔습니다. 그렇지만 독일 통일을 허락한 사람답게 곧 굳어진 얼굴을 풀며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곧바로 “한국과 소련은 이제 서로 국교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노태우 대통령을 꼭 초청해주십시오” 하며 말을 이었습니다. 덧붙여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면 어떠한 점들이 좋은지도 일일이 설명해주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전에 없이 확실한 어조로 약속을 했습니다. “한소 관계는 순조롭게 발전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나 역시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정치적인 안정과 긴장 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의 수교는 시간문제일 뿐 아무런 장애도 없습니다. 문총재가 제안하신 대로 노대통령도 곧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나는 고르바초프와 헤어지면서 내 손목시계를 풀어 그의 손목에 채워주었습니다. 마치 옛 친구를 대하듯 스스럼없는 내 태도에 당황하는 고르바초프를 향해 “대통령께서 지금 추진하고 계시는 개혁정책이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이 시계를 보면서 나와의 약속을 생각하면 하늘이 분명히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나와 약속한 대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해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한소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은 86년 만에 역사적인 국교를 맺었습니다. 물론 정치는 정치가가, 외교는 외교관이 할 일이지만 때로 오랫동안 막힌 물꼬를 트는 일에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종교인의 역할이 더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서울을 방문해서 한남동의 우리 집을 찾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나 야인이 되어있을 때였습니다. 1991년 8월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는 반개혁파의 쿠데타가 일어난 후 그는 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하면서 소련 공산당을 해체시켰습니다. 공산주의자인 그가 자기 손으로 공산당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우리가 정성껏 준비한 불고기와 잡채를 젓가락으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칭찬하면서 “한국의 전통음식이 무척 훌륭합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권좌에서 물러난 고르바초프와 라이사 여사는 그새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의하던 철저한 공산주의자라이사 여사의 목에서 십자가 목걸이가 반짝였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위대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소련의 서기장직 자리는 내놓으셨지만 이제 평화의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용기 덕분에 전쟁 없이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위해 가장 크고 영원하고 아름다운 일을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신 당신은 평화의 영웅입니다. 러시아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은 마르크스도 아니고 레닌도 아니고 스탈린도 아니고 오직 미하일 고르바초프뿐입니다.”


나는 전쟁 없이, 피 흘리는 일 없이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해체를 이룩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결단을 높이 치하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레버런 문, 나는 오늘 대단한 위로를 받고 갑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힘이 납니다. 나의 남은 인생을 세계평화를 위한 사업에 헌신하겠습니다.”라며 내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이 곧 세계의 통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고 크레믈린 궁을 나오면서 나는 수행 중이던 박보희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나 내렸습니다. "1991년이 넘어가기 전에 김일성 주석을 만나야겠다. 시간이 급해! 소련은 이제 한두 해 안에 끝나고 만다. 문제는 우리나라야. 어떻게든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해."


소련이 붕괴되면 전 세계 공산국가들도 함께 괴멸되므로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렇다면 궁지에 몰린 북한이 어떤 도발을 해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북한은 핵무기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으니 더더욱 불안했습니다. 북한과의 전쟁을 막으려면 북한과 이야기할 수 있는 채널이 있어야 했는데 그때까지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무기에 대한 야욕을 버리고 남한을 선제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한반도는 세계정세의 축소판입니다. 한반도에서 피를 흘리면 세계가 피를 흘립니다. 한반도가 화해하면 세계가 화해를 하고 한반도가 통일되면 세계가 통일되는 겁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핵보유 국가가 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서방국가들은 선제공격이라도 하겠다고 을러대고 있었지요. 이렇게 극한으로만 치닫는다면 북한이 어떤 무리수를 둘지 몰랐습니다. 나는 어떻게든 북한과의 대화 채널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북한과 접촉했던 박보희에게 북한의 김달현 부총리는 “북조선 인민들은 지금까지 문 총재를 국제적인 승공운동의 괴수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수반공의 총수를 환영할 수 있겠습니까? 문총재의 방북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습니다. 그렇지만 박보희는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철저한 보수 반공주의자입니다. 그런 그가 중국을 방문해서 마오쩌둥 주석과 회담을 하고 미국과 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익을 본 것은 중국이었습니다. 침략자로 낙인찍혔던 중국이 일약 세계무대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북한이 세계적인 공신력을 가지려면 문 총재와 같은 보수 반공주의자를 친구로 만들어야 합니다.”라며 북한을 설득했습니다.


마침내 1991년 11월 30일, 김일성 주석이 우리 부부를 초청했습니다. 당시 하와이에 머물던 우리는 급하게 베이징으로 날아갔습니다. 중국 정부가 내준 베이징공항의 귀빈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북한 대표가 나타나 공식 초청문서를 내놓았습니다. 초청장에는 평양의 관인이 선명하게 찍혀있었습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통일교회의 문선명 선생과 영부인, 그리고 수행원 일행을 공화국에 초청합니다. 공화국은 재북 기간 중 그 신원을 보장하겠습니다.1991년 11월 30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무원 부총리 김달현.”


우리 일행은 김일성 주석이 보낸 조선민항특별기 JS215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어느 나라의 대통령에게도 김일성 주석이 특별기를 내어준 일은 없었으니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한 대접이었습니다.


비행기는 황해 바다를 건너 신의주로 올라가서 고향인 정주 상공을 지나 평양으로 갔습니다. 고향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배려해준 것이었습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고향을 내려다보는데 마음이 울렁거리고 폐부 깊숙한 곳이 저려왔습니다. 저게 정말 내 고향인가 싶어서 곧바로 뛰어내려 산으로 들로 뛰어들고 싶었습니다.


평양 순안 공항에는 48년 전에 헤어진 가족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꽃처럼 어여쁘던 여동생들이 초로의 할머니가 되어 내 손을 잡고 미간을 찌푸리며 울부짖었습니다. 일흔 살이 넘은 누님도 내 어깨를 붙잡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셨지만 나는 끝내 울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이러지들 마십시오. 가족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온 사람입니다. 이러지들 마시고 기운을 차리세요.”


40년 만에 만난 형제들을 껴안고 울지 못하는 내 마음은 속으로 폭포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다음 날 평생의 습관대로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했습니다. 만일 영빈관에 감시시설이 있었다면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울부짖는 내 기도가 모두 녹음이 되었을 겁니다. 그날 우리는 평양 시내를 둘러보았습니다. 평양은 주체사상의 붉은 표어로 완전히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3일째 되던 날은 비행기를 타고 금강산 구경을 갔습니다. 구룡연폭포는 한겨울인데도 힘차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금강산을 구석구석 돌아본 후 6일째 되던 날은 헬리콥터를 타고 고향으로 갔습니다. 꿈속에서도 그리워 한 걸음에 내달리던 그 집이 바로 내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한참을 집 앞에 망부석처럼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본래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창고와 축사가 서로 맞물린 사각형 집이었는데 다 없어지고 안채만 남아있었습니다.


내가 태어난 안방으로 들어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보았습니다. 어릴 적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안방과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열고 뒤뜰을 내다보니 예전에 내가 타고 놀던 밤나무는 이미 베어지고 없었습니다. “우리 쪼끔눈이, 배 안고프나?” 하고 어머니가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듯했습니다. 어머니의 무명 치맛자락이 휘익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고향에서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꽃을 바쳤습니다. 흥남감옥으로 나를 찾아오셔서 피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내가 본 그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어머니의 무덤 위에 간밤에 내린 눈이 살포시 덮여있었습니다. 나는 흰 눈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 어머니의 묘에 자란 뗏장을 한참이나 쓰다듬었습니다. 어머니의 거친 손등처럼 무덤 위의 겨울 잔디가 거칠거칠했습니다.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


내가 본래 북한에 가려고 한 이유는 고향에 가고 싶어서도 아니고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 조국의 장래를 놓고 담판을 지으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엿새가 지나도록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해준다는 아무런 언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을 둘러본 뒤 헬기를 타고 순안 공항으로 돌아오자 예고도 없이 김달현 부총리가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내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문 총재님을 영접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장소가 흥남에 있는 마전 주석공관이기 때문에 지금 즉시 특별기를 타시고 흥남으로 가셔야겠습니다.”  


‘주석 공관이 여러 곳 있다고 하던데 하필이면 흥남일까?’ 가는 길에 내가 있던 ‘흥남 질소비료 공장’이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을 보니 예전에 감옥살이 하던 기억이 떠올라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곳 영빈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김일성 주석을 만나러 갔습니다.


마전 주석공관에 들어서자 김일성 주석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싸안았습니다. 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고 김 주석은 공산당의 우두머리지만 두 사람의 만남에 이념이나 신앙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헤어진 형제와도 같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가 통하는 민족의 힘입니다.


나는 다짜고짜 김일성 주석에게 말했습니다.


“김 주석의 따뜻한 배려로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조국에는 생사조차 모른 채 나이 들어 죽어가는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있습니다. 김 주석께서 이산가족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상봉의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나는 우리 고향을 둘러본 이야기를 덧붙이며 동족애에 호소했습니다. 고향 말이 술술 통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습니다. 그러자 김 주석도 “동감입니다. 내년부터는 북남의 헤어진 동포들이 서로 만나는 운동을 시작하십시다.”라고 봄눈 녹듯 대답했습니다.


고향 이야기로 말문을 연 나는 곧바로 핵무기에 관한 의견을 꺼냈습니다. 한반도의 비핵화선언에 합의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협정에 조인할 것을 정중하게 건의했습니다. 그랬더니 김 주석은 “문 총재, 생각을 좀 해보시오. 내가 누구를 죽이려고 핵폭탄을 만들겠습니까? 동족을 죽이려고요? 내가 그런 사람처럼 보입니까? 핵이 평화적인 목적에만 쓰여야 한다는 데 나도 동의합니다. 문 총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으니 잘 될 겁니다.” 하고 선선하게 대답했습니다.


당시는 북한의 핵사찰 문제로 인해 남북관계가 좋지 않아 매우 조심스럽게 제안한 것이었는데, 흔쾌한 대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놀랄 정도였습니다. 말이 잘 통한 우리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이른 점심을 먹었습니다.


“문 총재는 언 감자국수를 아십니까? 내가 백두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절에 참 많이 먹었던 음식입니다. 드셔보시지요.”


“알고 말구요. 우리 고향에서도 즐겨 먹던 음식입니다.” 하며 내가 반갑게 말을 받았습니다.


“허허, 문 총재 고향에서는 별미로 만들어 드셨겠지요. 나는 살기 위해서 먹었습니다. 일본 경찰이 백두산 꼭대기까지 뒤지고 다니니 밥 한 술 젊잖게 먹을 수가 없었어요. 백두산 꼭대기에 감자 빼고 먹을 것이 뭐 있습니까? 감자를 끓여 먹으려다가 일본 경찰이 쫓아오면 감자를 땅 속에 묻어 놓고 달아났지요. 한참 지나 그곳에 돌아와 보면 어찌나 추운지 감자가 땅 속에서도 꽁꽁 얼어버렸어요. 할 수 없이 언 감자를 캐내서 녹인 다음에 가루를 내어 국수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주석님께서는 언 감자국수 전문가십니다.”


“그렇지요. 이걸 콩국에 말아서 먹어도 맛있지만 깻국에 말아도 아주 맛이 좋습니다. 소화도 잘 되고 감자에 끈기가 있어 배도 부르지요. 아, 그리고 문 총재. 언 감자국수는 이렇게 함경도식 갓김치를 얹어 드시는 게 별미외다. 한번 해보시지요.”


나는 김 주석이 권하는 대로 언 감자국수에 갓김치를 얹어 먹었습니다. 고소한 국수와 함께 매콤한 김치가 어우러져 속이 아주 후련했습니다.


“세상에 산해진미도 많고 많지만 저는 그런 거 다 필요 없습니다.고향에서 먹던 감자송편이나 옥수수, 고구마보다 맛있는 게 없습니다.”


“주석님과 나는 입맛까지 서로 잘 통하는군요. 역시 고향 사람끼리 만나니 좋습니다.”


“고향을 둘러보니 어떻습디까?”


“감회가 무량하지요. 제가 살던 집이 남아있어서 잠시 옛 생각을 하며 안방에 앉아보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름을 부르실 것만 같아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저런, 그러니 우리가 얼른 통일이 되어야 한단 말이지요. 제가 듣기로 문 총재는 상당한 개구쟁이였다 하던데 고향에 가셔서 좀 뛰어노셨습니까?”


김 주석의 말에 식탁에 앉았던 사람들이 와르르 웃었습니다.


“나무도 타고 고기도 잡으러 가야 하는데 김 주석께서 기다리신다고 해서 서둘러 왔으니 다음에 다시 불러주셔야겠습니다.”


“그러지요, 그러고 말고요. 그런데 문 총재는 사냥을 하십니까? 나는 사냥을 아주 좋아합니다. 백두산에서 곰 사냥을 해보시면 분명히 반할 겁니다. 곰이 덩치가 커서 미련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꾀쟁이에요. 한 번은 곰하고 딱 일대일로 맞닥뜨렸는데 말이지요, 곰이 글쎄 나를 보고는 꿈쩍도 않는 겁니다. 곰을 피해 달아나면 어찌 되는 줄 아시지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나도 곰을 노려보면서 버텼지요.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자꾸 가는 데 곰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지요. 백두산의 추위가 오죽 유명합니까? 곰에게 먹혀 죽기 전에 얼어 죽을 지경이었지요.”


“아니, 그래서 어찌 되셨습니까?”


“하하, 문 총재 앞에 앉아있는 내가 곰입니까? 사람입니까? 그게 답입니다그려.”


내가 큰 소리로 웃자 김 주석이 느닷없이 말했습니다.


“문 총재, 다음에 오시거든 백두산에 사냥 한번 같이 가십시다.” 


 그래서 나도 얼른 맞받아쳤습니다.


“주석께서는 낚시도 좋아하시지요? 알래스카 코디악 섬에 할리벳이라는 곰만큼 큰 넙치가 삽니다. 우리 그거 한번 낚으러 가십시다.”


“곰처럼 큰 넙치라고요? 그러면 당연히 가야지요.”


사냥이며 낚시며 우리는 취미가 서로 통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할 말이 너무 많아져서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가 서로 지난 이야기하는 것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식당 안을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나는 금강산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습니다.


“금강산을 가보니 정말 명산이더군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관광단지로 크게 개발을 해야겠습니다.”


“금강산은 통일조국의 자산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손을 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잘못 개발해서 명산을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문 총재처럼 국제적인 안목을 지닌 분이 맡아서 개발을 해주신다면 믿을 수 있지요.”


김 주석은 즉석에서 금강산 개발 요청을 했습니다. “주석께서 나보다 연세가 많으시니 형님뻘 되시는군요.” 하자 김 주석은 “문 총재, 우리 이제부터 형님 동생하며 잘해 보십시다!” 하며 내 손을 꽉 잡았습니다.


김 주석과 나는 손을 잡고 복도를 걸어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졌습니다. 나를 보내고 난 뒤 김 주석은 “문 총재라는 사람 참 훌륭하다. 일생 동안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배포도 크고 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친밀함이 느껴지고 기분이 좋아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나중에 다시 만나보고 싶다. 내가 죽은 후에 남북 사이에 의논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문 총재를 찾아라.”하고 김정일에게 신신당부했다니 서로 어지간히 잘 통한 모양입니다.


내가 일주일의 일정을 마치고 평양을 떠나자마자 연형묵 총리를 수반으로 한 북한 대표단이 서울에 왔습니다. 연 총리는 ‘한반도와 비핵화 공동선언’에 조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0일, 북한은 IAEA의 핵사찰협정에 조인함으로써 나와의 약속을 모두 지켰습니다. 목숨을 걸고 평양에 들어가 그만한 성과를 냈으니 참으로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땅은 나뉘어도 민족은 나뉠 수 없다


한반도는 지구에 하나 남은 분단국가입니다. 우리에게는 한반도를 통일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두 동강이 난 조국을 이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한 민족이 둘로 나뉘어 서로의 부모형제를 만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슬픔입니다. 남북을 나누는 38선이나 휴전선은 사람이 그은 것입니다. 땅은 그렇게 나눌 수 있지만 민족은 나눌 수 없습니다. 반백년이 넘게 나뉘어 있으면서도 우리가 서로를 못 잊고 그리워하는 것은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합니다. 백의, 흰옷은 평화의 색입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평화의 민족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이 만주나 시베리아 땅에서 서로를 죽이고 살고 하던 중에도 한국 사람은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일본 사람과 중국 사람은 모두 칼을 가지고 다녔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싯돌을 품고 다녔습니다. 얼어붙은 만주와 시베리아 땅에서 불을 붙이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도의를 소중히 여기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지요.


일제강점기와 6.25사변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은 참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통일되지도 않았고 평화의 국권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국토의 허리가 두 동강 나고 그나마 반 쪽은 공산주의의 어두운 세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민족의 주권을 되찾으려면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남북이 갈라져서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평화통일을 이루어 온전한 주권을 되찾아야만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한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 일컫듯 우리 민족은 세계에 평화를 전달하는 배달부로 태어난 것입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고 이름에는 저마다 타고난 뜻이 있습니다. 백의민족의 흰옷은 낮이나 밤이나 눈에 잘 뜨입니다. 어두운 밤중에 표식으로 삼을 수 있는 색깔은 흰색뿐입니다. 우리 민족은 밤이나 낮이나 세계평화를 전달하고 다니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는 휴전선이 가로놓여 있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휴전선을 제거하면 그 앞에는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더 큰 휴전선이 놓여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온전한 평화를 얻으려면 러시아와 중국이 가로막고 있는 휴전선까지 뛰어넘어야 합니다. 힘들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나는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릴 때에 남김없이 몽땅 흘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속의 찌꺼기까지 몽땅 흘려 내보내야 미련이 남지 않고 깨끗이 정리됩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마지막까지 이겨내고 말끔히 청산해야만 고난이 끝납니다. 무엇이든지 완전히 청산하고 나면 다시 되돌아오는 법입니다. 그렇게 처절한 고통 없이는 민족의 온전한 주권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다들 평화통일을 이야기하지만 내가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때는 반공법과 국가 보안법이 무서워 감히 평화통일이란 말을 사용하기조차 겁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줄곧 평화통일을 주장해왔습니다. 지금도 누가 “어떻게 해야 한반도가 통일됩니까?” 하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남한 사람이 남한보다 더 북한을 사랑하고, 북한 사람이 북한보다 더 남한을 사랑하면 오늘이라도 한반도는 통일이 됩니다.”


1991년에 목숨을 걸고 북한 땅에 들어가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도 모두 그런 사랑의 밑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김일성 주석과 남북 이산가족 상봉, 남북 경제협력, 금강산 개발, 한반도 비핵화,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에 대해 합의했습니다. 반공주의자가 공산국가에 들어가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나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 전 평양의 만수대 국회의사당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주제로 두 시간에 걸쳐 강연을 펼쳤습니다. 그날 내가 북한 지도층을 상대로 힘주어 말한 것은 ‘사랑에 의한 남북통일 방안’입니다. 김일성주의로 무장된 북한의 지도층을 앉혀놓고 내식대로 말해버린 겁니다.


“남북은 반드시 통일돼야 하는데 총칼로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남북통일은 무력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6·25동란도 실패했는데 또 무력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주체사상으로도 남북을 통일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통일이 될까요? 이 세상은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의 힘만으로 어쩌지 못합니다. 전쟁과 같이 악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섭리하십니다. 그러니 인간이 주체가 된 주체사상으로는 남북을 통일할 수 없습니다. 통일된 조국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주의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우리에게 통일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숙명이자 우리 시대에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 때에 조국통일의 성업을 이루지 못한다면 영원히 조상과 후손들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주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남북을 통일하는 데는 좌익도 안 되고 우익도 안 됩니다. 그 두 가지 사상을 조화시킬 수 있는 두익사상頭翼思想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사랑의 길을 가려면 전 세계 앞에서 남침한 사실을 사과해야 합니다! 북한이 남한에 심어놓은 고정간첩이 2만 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자수하라는 지령을 내리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들의 사상을 바로잡는 교육을 하여 남북의 평화통일에 기여하는 애국자들로 만들겠습니다.”


나는 의사당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강력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내 연설을 듣고 있던 북한 측의 윤기복 위원장과 김달현 부총리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습니다. 그런 발언이 내게 어떤 위험을 불러올지 모르지 않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습니다. 단순히 그들을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날 내 연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에게 곧바로 보고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의 뜻을 전달하려 일부러 그렇게 말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마자 수행원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북한 사람들 중 몇몇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느냐고 정색을 하며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연설 내용이 너무 강해서 저들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며 식구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를 왜 왔는가? 북한 땅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할 말을 안 하고 가면 천벌을 받는다. 설령 오늘 연설이 빌미가 되어 김 주석을 만나지 못하고 쫓겨난다 해도 할 말은 해야 한다.”


그 후 1994년 7월 8일 갑자기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남북관계는 최악의 국면이었습니다. 한국 땅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배치되고 미국에서는 영변의 핵시설을 파괴시키라는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금세라도 전쟁이 일어날 듯 상황이 급박했습니다. 북한은 일체의 외문 조문객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는 형제의 의를 맺었던 김 주석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박보희를 불렀습니다.

“지금 바로 조문사절로 북한으로 가라.”

“지금 북한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힘든 것은 안다. 하지만 무조건 들어가야 해. 압록강을 헤엄쳐 건너서라도 반드시 들어가서 조문하고 와.”


박보희는 베이징으로 건너가서 목숨을 걸고 북한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이 “문 총재의 조문사절은 예외로 하여 평양에 모시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평양에 들어가 조문을 마친 박보희를 만난 김정일은 “부친께서 문 총재님이 조국통일을 위해 애쓰고 계신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1994년 한반도는 언제 어디서 펑 하고 터질지 모르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김 주석과 맺은 인연 덕분에 한반도의 핵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때 조문은 단순한 예절에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김 주석과의 만남을 소상하게 소개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는 내 신의가 통한 덕에 그의 사후에 아들인 김정일 위원장도 우리가 보낸 조문사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면 넘지 못할 벽이 없고 이루지 못할 꿈이 없습니다.


나는 북한을 내 고향, 내 형제의 집으로 여기고 찾아갔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주려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이 김일성 주석을 넘어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통했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북한과 우리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지속되어 남북관계가 어려워질 때마다 힘을 다해 물꼬를 트는 역할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김일성 주석과 만나 진실한 마음을 통하며 신뢰를 쌓은 것이 그 뿌리입니다. 신뢰는 그렇게나 중요합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온 후 우리는 북한에서 평화자동차공장을 비롯해 보통강호텔, 세계평화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평양 시내에는 평화자동차 광고탑이 8개나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북한 사람들은 평화자동차 공장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통령과 함께 방북했던 재계 인사들은 보통강호텔에 묵었지요. 북한 땅에서 일하는 우리 식구들은 일요일마다 세계평화센터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일들은 남북의 평화적인 교류와 통일을 위한 평화활동들이지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사업이 아닙니다. 민족적인 사랑으로 남북통일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인 것입니다.


총칼은 거두고 참된 사랑으로


우리 민족을 나눠놓은 것은 휴전선만이 아닙니다. 영남과 호남도 보이지 않는 선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또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은 거류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있습니다. 민단과 조총련을 대립하게 하는 이유는 부모의 고향이 달라서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고향이 어디인지 가본 적도 없는 2세, 3세들까지 부모가 그어놓은 선 안에 웅크리고 삽니다.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서 서로 말도 섞지 않고 학교도 다른 곳으로 다니며 결혼도 하지 않습니다.


2005년 나는 영호남과 재일 한국인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그동안의 계획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민단에서 1천 명, 조총련에서 1천 명의 동포를 서울로 초청해서 영남인 1천 명, 호남인 1천 명과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일본에서 조총련과 민단이 한 자리에 모여 남북의 평화통일을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려운 일을 해낸 만큼 영호남, 민단과 조총련이 한자리에 앉아 서로를 포옹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때 서울을 처음 찾았던 조총련 간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이 어딘지도 확실히 모른 채 냉전 구도의 대리전을 치르며 살아온 세월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하며 주저앉아 통곡했습니다. 그동안 부질없는 마음의 분단선을 긋고 살아온 것이 못내 부끄럽다고도 했습니다.


한반도의 분단과 대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건에는 뿌리가 있는 법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선과 악이 맞서 싸우는 선악 투쟁의 역사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북한을 돕기 위해 소련과 중공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남한도 마찬가지지요. 미국을 비롯한 16개 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했고 의료반을 파견한 나라가 5개국, 전쟁 물자를 지원해준 나라가 20개국이나 됩니다. 세계 역사상 이렇게 많은 나라가 참전한 전쟁은 없습니다.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전 세계 인류가 동참한 것은 한국 전쟁이 공산주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의 대리전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가 세계의 대표가 되어 선과 악의 싸움을 치열하게 치러낸 것입니다.


「워싱턴타임스」를 창간한 지 10년째 되던 1992년, 알렉산더 헤이그 미국 국무장관이 기념식에 참석해서 축사를 하던 중 뜻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입니다. 지휘관이었던 저는 흥남 공격을 맡아 목숨을 걸고 맹공격을 펼쳤습니다. 문 총재께서 공산당에게 잡혀 흥남감옥에 계시다가 그날의 공격으로 해방되셨다는 말씀을 듣고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아마도 문 총재님을 구하려고 제가 그곳에 갔던 모양입니다. 이제는 반대로 문 총재님께서 미국을 구하려고 이곳에 와계십니다.「워싱턴타임스」는 좌파 언론이 여론을 주도하는 워싱턴에서 균형 잡힌 역사관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어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는 신문입니다. 이번에도 확인했듯 역사에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는 6·25동란 당시 유엔군을 총지휘했던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만일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남북이 지금처럼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요지였지요.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놀랐습니다. 그런 주장은 북한 공산당의 입장에서만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희생을 치렀는데도 아직 한반도의 통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이미 통일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통일로 향해 가는 길목엔 장벽이 너무 많습니다. 첩첩이 막힌 장벽을 하나하나 허물며 나아가야 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이 들어도 압록강을 헤엄쳐서 건너가는 정신으로 참고 견디면 통일은 반드시 옵니다.


동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까지 버티던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이 1989년 말 유혈 민중 봉기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정권이 붕괴되자마자 24년 동안 루마니아를 통치했던 니콜라이 차우세스쿠는 그의 아내와 함께 처형되었지요. 그는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던 잔인한 독재자였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독재가 점점 더 강화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정권을 잃을 경우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공포심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렇게까지 막다른 길로 치닫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머지않은 미래에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통일을 이룰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대로, 경제인들은 경제인들대로 통일한국을 대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나 역시 종교인으로서 북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끌어안고 함께 평화를 나눌 수 있는 통일 한국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나는 독일의 통일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왔습니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당시 통일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경험을 들으며 우리에게 적합한 방법을 찾습니다. 그 결과 독일이 평화 통일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동독의 권력자들에게 ‘통일이 되더라도 생명이 위험하지 않다’라는 믿음을 심어준 것이 주효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목숨이 보장되지 않았다면 동독의 통치자들이 그렇게 쉽게 통일의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북한의 통치자들에게 그러한 믿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 출판된 북한을 소재로 한 소설에서 차우세스쿠가 처형당하는 비디오를 수십 번씩 돌려 보며 ‘우리가 정권을 잃으면 저렇게 된다. 절대로 정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는 북한의 통치자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물론 일본 소설가의 상상이지만 그들의 현실적인 고민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해결해주어야 통일이 빨리 옵니다.


한반도에 평화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남한이 북한을 완전히 위할 때 북한은 싸움을 걸지 않고 한반도에는 저절로 평화가 찾아옵니다. 불효자식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은 주먹도 아니고 권력도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힘입니다. 북한에 쌀을 주고 비료를 주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정을 다해 북한을 생각하고 위할 때만 북한도 마음을 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