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4장
4장 우리의 무대가 세계인 이유
목숨을 내놓더라도 갈 길은 간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충청도 갑사로 내려갔습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도 추스르면서 교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위해 기도하기 좋은 숲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때가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라 먹고 살기가 무척이나 힘들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먹고 사는 일이 힘들더라도 훗날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함께 모여 예배드릴 교회도 없는 처지지만 더 먼 앞으로의 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정세를 놓고 봤을 때 일본을 무조건 원수로만 여기고 배척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본 선교활동 계획을 모두 준비한 뒤 갑사 뒷산으로 최봉춘을 불렀습니다.
"너는 지금 당장 현해탄을 건너가야 한다. 죽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한다." 느닷없는 이야기에 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예!" 하고 답하고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란 성가를 부르며 호기롭게 산을 내려갔습니다. 일본에 가서 생활은 어떻게 하고, 선교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최봉춘은 그렇게 담대한 사나이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본과 국교가 열리기 전이라 밀항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밀항은 나라 법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었기에 모든 것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봉춘은 목숨을 내놓다시피 하고 밀항선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다를 무사히 건넜다는 소식을 보내오기까지 다른 일은 일체 접어두고 골방에 들어앉아 기도 정성을 들였습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일본으로 보내는 데 필요한 돈 150만 원은 빚을 내어 충당했습니다. 밥을 굶는 식구들이 즐비한데도 큰 빚을 낼 정도로 일본 선교는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최봉춘은 일본에 닿자마자 체포되어 한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나는 그를 다시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이번에도 일본 경찰에 잡혀 되돌아왔습니다. 겁에 질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보니 그동안 그가 겪었을 온갖 고초가 모두 짐작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지독한 고문으로 부풀어 오른 이마에는 보라색 피멍이 얼룩얼룩 남아있었습니다. 나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혀나가 머리통 속살이 허옇게 드러난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습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 그의 얼굴은 심하게 씰룩거렸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살아온 거야 시시콜콜 말해 뭐하겠느냐. 어서 밥이나 먹어라"하며 그의 앞으로 뜨거운 김이 나는 국밥을 옮겨 놓아주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해 허기졌을 텐데도 최봉춘은 얼른 숟가락을 들지 못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숟가락을 들어 국에 밥을 말아주었습니다. "어서 먹어라.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 정말 마음이 아프구나" 하며 수저에 밥을 떠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최봉춘이 국밥 한 그릇을 다 먹을 때까지 나는 그의 앞을 지키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를 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일본 경찰의 매를 맞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그가 겨우 밥을 넘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지옥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맛보는 따뜻한 밥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를 또다시 일본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고 난 뒤, 최봉춘을 데리고 다시 갑사 뒤편에 올랐습니다. 소나무 숲에 이르자 말없이 굳어지는 내 얼굴을 보고 최봉춘은 겁에 질렸습니다.
"너에게 뭐라 말할 수 없이 미안하다만 오늘 밤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라. 네가 일본 경찰한테 열 번을 잡히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죽음이 코앞에 닥쳐와도 주어진 길은 갈 수밖에 없는 거야. 하루라도 헛되이 낭비할 수 없으니 오늘밤 기차로 내려가라."
"선생님,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저는 못 갑니다. 무서워서 다시는 못 가요."
최봉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겁에 질린 그의 울음소리가 메아리로 번져 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울지 마라, 울음은 너를 약하게 만들 뿐이야. 너는 본래 무서움을 모르던 용감한 사내가 아니었느냐? 겁낼 거 없다. 밀선을 타는 건 너 혼자지만 그렇다고 너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네 곁에는 내가 있고, 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라." 그러나 주저앉은 그는 도무지 일어설 줄 몰랐습니다.
내가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이미 힘이 풀려버린 그의 다리가 사정없이 휘청거렸습니다.
"이 자식!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 정신을 똑바로 차려!"
어깨를 마구 흔들자 비로소 그의 눈에 빛이 돌아오는 듯했습니다.
"얼른 가라! 이건 피할 수 없는 하늘의 명령이야."
"못 갑니다, 선생님.절대로 못 갑니다."
"가야 한다, 어서 가!"
"선생님, 이번에는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못 가겠습니다. 일본 경찰에게 또다시 잡히면 저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다시는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죽어도 세 번은 갈 수 없다는 그의 마음을 알고도 남았지만 나는 그를 사정없이 닦아세웠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가야 하는 것이 그의 몫이듯 두려움에 떠는 그를 어떻게든 보내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습니다. 나는 보내지 말아달라며 호소하는 그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이놈의 자식, 사나이가 한번 맹세했으면 실천을 해야지. 죽더라도 일본에 가서 죽도록 해라!" 하며 소리를 냅다 질렀습니다. 그렇게 무섭게 몰아부쳐야 하는 내 마음이 더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를 보내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두운 밤에 몰래 배를 타고 현해탄의 거센 파도를 건너는 일을 세 번씩이나 시켜야 하는 내 마음도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일본으로 선교를 반드시 가야 하는 때였습니다. 하늘의 때는 사람이 마음대로 미뤘다 당겼다 할 수 없습니다. 그 엄중한 사실을 나도 알고 그도 알고 있었습니다.
최봉춘은 또다시 부산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렇지만 세 번재 밀항도 실패였습니다. 그는 오무라大村 수용소에 갇혀 다시금 한국으로 송환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밀입국자는 일주일 이내에 송환하는 것이 당시 일본의 법이었습니다. 한국행 배를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가는 기차에 오른 최봉춘은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곡기를 끊자 몸에서 열이 났습니다. 일본경찰은 치료를 위해 본국송환을 미루고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그는 그 틈을 타서 병원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생사를 건 3년의 각고 끝에 최봉춘이 일본에 정착한 것은 1958년,우리나라와 일본은 정식 국교를 맺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압제 정치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에 일본과의 수교를 모두 거세게 반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원수의 나라 일본에 밀항을 보낸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을 거부하고 관계를 끊기보다는 일본을 교화시킨 뒤 주체적으로 그들을 끌어 안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일본의 위정자들과 통하는 길을 뚫어 일본을 업어야 하고, 또 어떻게든 미국과 연결 되어야 미래에 한국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내다보았습니다. 최봉춘의 희생 덕분에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데 성공한 후 일본교회는 구보끼 오사미久保木修己라는 뛰어난 청년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에 의해 확고히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이듬해에는 미국으로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밀항이 아니라 당당히 여권과 비자를 받아 보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를 나온 후 나를 잡아가두는 데 일조한 자유당 장관들에게 접촉해서 여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를 반대하던 자유당을 거꾸로 이용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은 너무도 먼 나라였습니다.
내가 그 먼 미국으로 선교사를 보낸다고 하니, 우선 한국에서 교회를 더 키운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며 다들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나라 미국의 위기를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며 식구들을 설득했습니다. 1959년 1월 이화여대에서 쫓겨난 김영운 교수가 처음 미국에 파송되었고, 그해 9월 김상철 선교사가 미국에 도착하여 전세계를 향한 선교 역사의 첫발을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