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3장)

훈독왕 | 20190902175631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3장


3장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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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석 달 만에 나는 무죄로 석방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빚진 자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교회 터를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우리 교회를 지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교회를 불편해하거나 부끄러워한 적도 없습니다. 기도할 자리가 있으면 그걸로 감사할 뿐 넓고 편안한 자리는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식구들이 모여 예배드릴 집은 있어야겠기에 2백만 원의 빚을 얻어 청파동 언덕에 다 허물어져가는 적산가옥을 샀습니다. 스무 평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좁은 집이었는데 깜깜한 굴속 같은 외통길을 한참이나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골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둥이고 벽이고 모두 새까만 때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교회 청년들과 함께 양잿물을 풀어 사흘을 내리 닦아대니 검은 때가 얼추 벗겨졌습니다. 


청파동 교회로 옮겨간 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안방에 꼬부리고 앉아서 새벽 세 시,네 시가 되도록 기도하다가 옷을 입은 그대로 잠깐 새우잠이 들면 또다시 다섯 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7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매일 한두 시간만 자도 졸린 기운 없이 눈이 샛별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할 일이 마음 속에 꽉 차 있으니 밥을 먹는 시간도 아까웠습니다. 밥상을 따로 차리는 일이 없이 방바닥에 밥을 놓고 쪼그린 채로 먹었습니다. '정성을 퍼부어라! 졸음 가운데도 퍼부어라! 지치도록 퍼부어라! 배가 고파도 퍼부어라!' 라고 되뇌며 온갖 반대와 헛소문 속에서도 씨앗을 심는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반드시 거둘 날이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한국에서 거둘 수 없다면 세계에서라도 분명히 거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 년이 지나니 식구들이 4백 명을 넘어섰습니다. 4백 명 식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도를 하다보면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머릿속에 식구들의 얼굴이 후루룩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식구들의 얼굴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기도 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을 주욱 부르는 중에 '오늘 이분이 교회에 오겠네' 하면 그 사람은 영락없이 교회에 왔습니다. 아픈 모습을 보인 사람을 찾아 "어디어디가 아프지 않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아픈 걸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 신기합니다" 하고 식구들이 놀랄 때마다 나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축복식 때의 일입니다. 축복을 앞둔 신랑 신부에게 나는 꼭 순결한가를 묻습니다. 그날도 신랑감에게 물었습니다. "정인가?" 하고 묻자 그가 큰 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정인가?" 그가 또다시 "예!"라고 했습니다. 내가 세 번째 물었을 때도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자네 강원도 화천에서 군대 생활했지?" 신랑감이 잔뜩 겁을 먹은 소리로 "예" 했습니다. "그때 휴가를 받아 서울로 오던 길에 여관에 들었지? 그날 붉은 치마 입은 여자와 탈선했잖아. 뻔히 알고 있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해?" 나는 화를 내며 그를 내쫓았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있으면 숨기는 것까지 다 알게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 신통력에 끌려 교회에 나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능력이 최고인 줄 알고 매달립니다. 그러나 흔히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들은 세상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에 매달리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모든 죄는 반드시 속죄를 통해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능력에 기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교회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나는 더이상 교인들에게 내 마음의 눈으로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식구가 점점 늘어났지만 나는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한 사람을 대하듯했습니다. 어떤 할머니든 어떤 청년이든 그 한 사람만을 상대하듯 정성을 다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든 식구에게서 '문 선생이 대한민국에서 내 이야기를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할머니들은 자기가 어떻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지부터 영감이 어디가 아프다는 것까지 시시콜콜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게 됩니다. 열 시간 스무 시간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듣습니다. 이야기를 청하는 사람의 마음은 절박합니다. 자기를 구할 동아줄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성을 다해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고 내 생명의 빚을 갚는 길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받드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나의 진심도 치열하게 들려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밤새 기도를 하니 마룻바닥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마룻바닥에 내 피땀이 그대로 젖었습니다. 훗날 미국에 머무는 동안 교회 식구들이 청파동 교회를 번듯하게 뜯어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공사를 중지하라는 전보를 쳤습니다. 청파동 교회는 나 개인의 역사가 담긴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 교회의 역사를 그대로 증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제아무리 멋있게 뜯어고친들 역사가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번듯한 꼴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뜻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거기에 전통이 있고 빛이 있으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전통을 존중할 줄 모르는 민족은 망하고 맙니다.


청파동 교회의 기둥에는 '언제 무슨 일 때문에 그 기둥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는가'의 역사가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붙잡고 눈물 흘리던 기둥을 보면 통곡이 나오고 비뚤어진 문짝을 봐도 옛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옛날 마룻바닥이 다 없어졌습니다. 밤새 엎드려 기도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마룻바닥이 없어졌으니 그 눈물자국 역시 사라졌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아픔의 추억입니다. 모양이나 외관은 낡아도 상관없습니다. 세월이 지나 우리에게도 잘 지어진 교회들이 많이 생겼지만 나는 그런 곳보다는 청파동 언덕 위의 비좁고 낡은 집을 찾아가 기도하는 것이 더 편안합니다. 


평생을 기도와 설교로 살아왔지만, 지금도 사람들 앞에 설 때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남의 앞에서 공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중대한 문제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확실한 금을 긋는 결판이자 담판입니다.


나는 아직도 설교 내용을 미리 정하지 않습니다. 미리 준비를 하면 설교에 내 사적인 목적이 끼어들지도 모릅니다. 내 머릿속의 지식을 자랑할 수는 있지만 절절한 심정을 토해낼 수 없습니다. 나는 공석에 나서기 전에 반드시 열 시간 이상 기도를 하며 정성을 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뿌리를 깊게 만드는 것입니다. 잎사귀야 조금 벌레를 먹었더라도 뿌리가 깊으면 괜찮습니다. 말이야 어눌하더라도 진실된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시작하던 무렵 나는 미군들이 입던 점퍼에 검정 물을 들인 노동복을 입고 단상에 서서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설교했습니다.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눈물이 마음 속에서 차고 넘쳐 밖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넘어갈 것같은 날들이었습니다. 옷이 땀에 젖고 머리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습니다.


청파동 교회시절 모든 사람이 고생을 했지만 특히 유효원은 고생을 참 많이했습니다. 폐가 아파 힘들면서도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3년 8개월 동안 강의를 계속했습니다. 먹는 것도 시원찮아서 하루 보리밥 두 끼로 견뎠습니다. 반찬이라야 날김치를 담가 하룻밤 재워 먹는 것이 고작이었지요. 유효원은 곤쟁이젓을 참 좋아했습니다. 방 한쪽 구석에 곤쟁이젓 항아리를 놓아두고는 그걸 한 젓가락씩 찍어 먹으며 힘든 나날을 참아냈습니다. 배가 고프고 지쳐 마룻바닥에 맥없이 누워있던 유효원을 보면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음으로는 소라젓이라도 담가주고 싶었습니다.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내 이야기를 아픈 몸으로 잘 정리해 받아쓰던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저립니다.


많은 식구의 희생에 힘입어 교회는 부쩍부쩍 자랐습니다. 중고등학생으로 구성된 성화학생회는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져다가 전도사들을 먹였습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번호를 정해 번갈아가며 도시락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학생 밥을 먹어야 하는 전도사들은 그 학생이 끼니를 거르고 배가 고플 것을 생각하면서 밥을 입에 물고는 눈물을 쏟기 일쑤였습니다. 밥보다 정성이 갸륵해 모두들 '우리는 죽더라도 뜻을 이루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버텼습니다.


그렇게 힘들어도 전국 곳곳으로 전도를 나갔습니다. 흉측한 소문이 워낙 많아서 어디 가서 통일교라는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해 서러웠지만, 동네 청소도 해주고 일손 없는 집에 식모살이도 하면서 밤이면 야학을 열어 글을 가르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마음이 통할 때까지 몇 달이고 그렇게 봉사하면서 우리 교회는 점점 커나갔습니다. 그 시절 그렇게도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나와 함께 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해가며 교회에 헌신했던 초창기 식구들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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