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이대의 퇴학· 퇴직 사건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3장) u

훈독왕 | 20190902174631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3장


3장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사람


연대와 이대의 퇴학·퇴직 사건


위기감에 휩싸인 연대와 이대는 학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이화여대는 김영운 교수를 비롯한 교수 다섯 명을 해임하고 학생 열네 명을 퇴학시켰습니다. 그중에는 졸업반 학생이 다섯 명이나 있었습니다. 연세대에서도 교수 한 명이 해임되고 두 명의 학생이 퇴학을 당했습니다.


당시 연세대 교목校牧은 "학교에 영향이 안 가도록 졸업 후에 그 교회를 다녀도 되지 않겠느냐?"며 학생들을 회유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학교에는 무신론자도 많고 심지어 무당의 자식도 다니고 있는데 우리가 왜 퇴학을 당해야 합니까?" 하며 크게 항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측에서는 "우리 학교는 사립학교이고 기독교 학교라 얼마든지 임의로 퇴학시킬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학생들을 막무가내로 쫓아냈습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신문에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 퇴학처분은 문제가 있다'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리고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캐나다 기독재단의 후원을 받던 이화여대는 이단이라고 소문난 교회에 나가는 학생이 많으면 재정적인 후원을 받는 데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이대는 일주일에 세 번 있는 채플시간마다 학생들의 출석여부를 확인해서 선교본부에 제출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학생들을 퇴학시키고 교수를 내쫓자 우리를 동정하는 여론도 점점 커져갔습니다. 그것을 뒤집기 위해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헛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헛소문일수록 사람들을 혹 하고 끌어당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헛소문은 또 다른 헛소문을 낳으면서 연대 이대 사건은 엉뚱한 괴담이 되어 1년이 넘게 우리 교회를 괴롭혔습니다.


나는 사건이 그렇게 커지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굳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면 될 것을 공연히 기숙사를 뛰쳐나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필요가 없다며 교수와 학생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왜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저도 은혜를 받고 싶습니다" 하며 되려 나를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모두 학교에서 쫓겨났으니 내 마음도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은 아픈 마음을 달래려 무리를 지어 삼각산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학교에서 내쫓기니 집에서도 눈총을 받고 친구들도 만나길 꺼려하여 마땅히 갈 곳이 없었습니다. 삼각산에 올라가 금식을 하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오로지 기도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방언이 터져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절망의 끝에 섰을 때 나타나시는 법입니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가족들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학생들은 삼각산 기도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삼각산으로 찾아가 금식 기도를 하느라 탈진한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며 위로했습니다.

"퇴학 맞은 것도 억울하고 슬픈데 금식까지 할 것 없다. 양심에 가책을 받을 일을 한 것이 아니면 그 어떤 욕을 먹어도 불명예스러운 것이 아니고,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니 절망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


나중에 졸업반 학생 다섯 명은 숙명여대에 편입해서 겨우 졸업을 했지만 그 사건 때문에 나에 대한 평판은 나빠질 대로 나빠져 버렸습니다. 연대 이대 사건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니 그때까지 출현했던 신흥종교의 온갖 나쁜 소문들이 모두 우리의 소행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시작된 헛소문은 곧 '정말 그렇다'가 되어 우리를 향해 날아들었습니다.


억울한 매를 두결겨 맞으니 정말 아팠습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소리치며 대거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들과 맞서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갈길이 너무 바쁘고 멀었습니다. 싸우고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오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풀릴 것이니 크게 마음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문선명은 벼락을 맞아야 한다'며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내 죽음을 위해 기도하자는 기독교 목사들의 횡포에도 모른 척 했습니다.


그런데 소문은 잠잠해지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점점 더 이상하게 번져나갔습니다. 세상이 전부 들고 일어나 나를 손가락질했습니다. 흥남비료공장의 후끈한 더위 속에서도 정강이 한번 내놓지 않는 나였건만 이런 내가 벌거벗고 춤을 춘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그날부터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정말 벌거벗고 춤을 춘단 말이야?"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 오해가 풀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난 그런 사람 아니다"라고 변명 한마디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을 겪어봐야 하는 법인데, 나를 보지도 않고서 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막말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참았습니다.


연대 이대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 교회는 완전히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내몰렸습니다. '사이비 종교집단'이란 이미지가 내 이마에 딱 박혀버린 것은 물론이고, 기성교회가 하나같이 들고 일어나 나를 처단하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던 1955년 7월 4일, 경찰이 우리 교회로 들이닥쳐 나를 비롯해 김원필과 유효영, 유효민, 유효원을 모두 잡아갔습니다. 기성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권력층과 손을 잡고 정치권에 투서를 넣어 우리 교회를 없애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와 처음부터 뜻을 함께 했던 식구 네 사람이 공연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내 과거를 샅샅이 뒤져 병역기피란 죄목을 찾아냈습니다. 북한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내려와보니 이미 군대 갈 나이가 지나있었던 나에게 병역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씌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