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파 없는 교회, 교회 아닌 교회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3장) u

훈독왕 | 20190902174300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3장


3장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사람


교파 없는 교회, 교회 아닌 교회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는데 욕먹은 만큼 다 살려면 아직도 백 년은 더 살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밥으로 채운 배가 아니라 욕으로 채운 배가 남들보다 몇 배는 될 테니 나는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사람입니다. 평양에 가서 교회를 시작했을 때 나를 그렇게 반대하고 돌을 던지던 기성교회가 부산에서도 역시 나를 반대했습니다. 교회를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부터 시시콜콜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이단, 사이비는 내 이름 앞에 붙는 고유명사였습니다. 아니 내 이름 문선명은 이단, 사이비와 똑같은 말이었습니다.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접두사 없이 그냥 이름만으로 불려본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모진 핍박을 견디다 못해 1953년에는 부산 초막집을 접고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이듬해 5월 장충단공원에서 가까운 북학동에 판잣집을 세내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란 간판을 걸었습니다. 그런 이름을 붙인 까닭은 어떤 교파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또 다른 교파를 만들 생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세계기독교'는 동서고금에 걸친 기독교 전부를 의미하고, '통일'은 앞으로 나아갈 목적성, 그리고 '신령'은 부자관계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영육계의 조화를 암시한 표현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중심의 영계를 배경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통일은 하나님의 이상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나의 이상이었습니다. 통일은 연합이 아닙니다. 연합은 둘이 모인 것이지만 통일이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훗날 우리 이름이 된 '통일교회'는 실상 남들이 붙여준 이름이고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서울교회'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교회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말 그대로 '가르치는敎 모임會'입니다. 종교란 '중심되는宗 가르침敎'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근본적인 것을 가르치는 모임이란 뜻입니다. 교회란 말 때문에 남과 내가 나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특별한 뜻으로 씁니다. 나는 그런 특별한 부류에 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바란 것은 교파 없는 교회였습니다. 참된 종교는 자기 교단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구하려들고, 나라를 희생해서라도 세계를 구하려들고, 또 세계를 희생시켜서라도 인류를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교파가 우선일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없이 교회 간판을 붙인 것일 뿐 언제라도 그 간판을 떼어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교회 간판을 다는 순간 교회는 교회 아닌 것과 구별됩니다. 하나인 것을 둘로 나누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꿈꾸는 일도 아니고, 내가 갈 길도 아닙니다. 나라를 살리고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간판을 떼어야 한다면, 지금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도리가 없어 대문간에 교회 간판을 달았습니다. 좀 높직하게 달면 보기도 좋을 것을 집 처마가 낮아 간판을 달 곳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들 키 높이 정도에 간판을 달아놓으니 아이들이 간판을 떼어가지고 놀다가 그만 두 동강을 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적인 간판인데 버릴수야 없는 노릇이니 그것을 철사로 얼기설기 엮어 못으로 대문간에 단단히 박았습니다. 간판이 그렇게 천대를 받아서인지 우리들도 말할 수 없는 천대를 받았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처마가 낮은 여덟 자 방에 여섯 명이 모여 기도를 하면 서로 이마가 맞닿을 정도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간판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기어들어가는 집 안에서 무슨 세계를 말하고 통일을 꿈꾸느냐고 비아냥댔습니다.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의미도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우리를 미친 사람 보듯 대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괜찮았습니다. 부산에서는 밥을 구걸하면서도 살았는데 예배드릴 방이 있는 지금은 겁날 것이 없었습니다. 미군 작업복에 검정 물을 들인 옷을 입고 검정고무신을 신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당당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서로를 식구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의 우리 식구들은 모두 사랑에 취해 있었습니다. 교회를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가고 싶다'란 생각을 하면 몸이 어디에 있든지 내가 하는 일을 다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내적인 사랑의 전깃줄로 모두 하나가 된 것입니다. 밥을 지으려고 쌀을 안치다 말고도 교회로 달려오고, 새치마를 갈아입는다고 하면서 구멍 난 치마를 입은 채로 달려오기도 하고, 교회 못 가게 머리를 깎아놓으면 민머리를 한 채로 교회로 달려왔습니다.


식구가 늘자 우리는 대학가에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에 대학생은 최고의 지성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선 이화여대와 연세대학교 앞에서 전도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교회와 함께하는 학생들이 늘어갔습니다. 이화여대 음악과의 양윤영 교수와 기숙사 사감인 한충화 교수도 우리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교수들뿐만 아니라 대학생들도 많았는데 그 숫자가 한두 명씩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수십 명씩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이었으니 기성교회는 물론이고 우리들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학가 전도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이화여대와 연세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랐습니다. 마치 봄바람이 휘익 불고 간 것처럼 대학생들의 마음이 한순간에 변해버렸습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하루에 수십 명씩 보따리를 싸들고 나왔습니다. 기숙사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면 "왜요? 왜 못 나가게 하는 거요? 못 나가게 하려면 나를 죽여주시오, 죽여주시오!" 하며 기숙사 담을 넘는 것도 예사였습니다. 내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깨끗한 학교보다도 발 고린내 진동하는 우리 교회가 좋다며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은 종교사회사업학과의 김영운 교수를 우리 교회로 급파했습니다. 캐나다에서 공부를 한 김 교수는 이화여대에서 촉망받는 여성 신학자였습니다. 통일교 교리의 허점을 찾아내 학생들이 우리 교회로 몰려가는 걸 막아보려고 일부러 신학을 전공한 김 교수를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특사 자격으로 찾아온 김 교수는 나를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우리 교회의 열성 신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김 교수까지 우리 교회를 인정하자 이화여대의 다른 교수들과 학생들이 더욱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도가 눈덩이처럼 늘어났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기성교회에서는 내가 교인들을 빼내간다고 또다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난 내 설교만 들으라고 강요하거나, 우리 교회만 다니라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앞문으로 쫓아내면 뒷문으로 들어오고, 문을 닫아걸면 담을 넘어 들어오는 것을 도무지 내 힘으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정작 당황한 건 연대와 이대였습니다. 기독교 재단 학교로서 다른 종파의 교회로 학생들과 교수들이 몰려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