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에 사는 미친 미남자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3장) u

훈독왕 | 20190902173912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3장


3장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사람


우물가에 사는 미친 미남자 


범내골에 토담집을 짓고 교회를 시작했을 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단 세 명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세 명을 앞에 두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천 수만, 아니 인류 전체가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온 세계를 향해 터져나오는 큰 소리로 밤낮없이 내가 깨달은 원리말씀을 전했습니다.


집 앞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물을 길러 오는 사람들 사이에 토담집에 미친 남자가 산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차려입은 꼴은 형편무인지경이고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집 안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듯한 외침이 들리니 그렇게 수군거릴 만도 했습니다. 하늘땅이 뒤집어지고 한국이 세계를 한꺼번에 다 통일한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산 아래로 널리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습니다. 소문 덕인지 우물가에 사는 미친 남자를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무슨 신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오기도 했고 이화여대 교수들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허우대가 멀쩡한 미남자란 소문이 덧보태져서 '미친 미남자'를 구경하려고 놀이삼아 산길을 걸어 올라오는 아주머니들도 있었습니다.


[원리원본]을 탈고하던 날, 나는 연필을 내려놓으며 '이제는 전도할 때이니 전도할 성도를 보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린 뒤 우물가로 나갔습니다. 5월 10일이 늦봄이라 솜을 넣은 한복 바지에 낡은 점퍼를 입고 있으려니 땀이 났습니다. 그때 한 젊은 여자가 이마에 맺힌 땀을 씻으며 우물가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7년 전부터 전도사님을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하고 말을 건네자 그녀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7년 전은 그녀가 하나님의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때였습니다.

"저는 아래 마을 범천교회의 전도사 강현실입니다. 우물가에 미친 사람이 산다고 해서 전도하러 올라왔습니다."


그녀는 내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인사를 마친 뒤 집에 들어온 그녀가 누추한 방 안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둘러보더니 앉은뱅이 책상 위를 눈여겨보고 물었습니다.

"웬 몽당연필이 저리 많은가요?"

"제가 오늘 아침까지 우주의 원리를 밝히는 책을 썼습니다. 그 말씀을 듣게 하려고 하나님이 전도사님을 여기까지 보내신 거지요."

"무슨 말씀을요? 저는 전도할 사람이 있으니 우물가로 올라가보라는 말씀을 받고 왔습니다."


나는 방석을 내어주며 그녀를 앉으라 하고 나도 앉았습니다. 우리가 앉은 자리 밑으로 샘물이 졸졸거리며 흘렀습니다.

"한국 땅은 앞으로 온 세계의 산봉우리와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할 때가 올 겁니다."

내 말에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은 엘리야가 세례요한으로 나타난 것처럼 육신을 쓰고 한국 땅에 올 것입니다"라는 말에 급기야 그녀는 발끈 화를 내며 "예수님이 어디 오실 데가 없어서 이 비참한 한국에 오신단 말이에요?"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계시록을 제대로 읽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저는…."

"고려신학교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란 말씀이지요?"하고 내가 되묻자,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그런 것도 모르면서 전도사님을 기다렸겠습니까? 저를 전도하러 오셨다니 오늘 저를 한번 가르쳐보시지요."


강현실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답게 성경구절을 줄줄이 외며 나를 공격했습니다. 얼마나 야무지게 대드는지 나도 기차 화통같은 소리로 일일이 응대하기 바빴습니다. 토론이 길어지고 밖이 어두워지자 내가 저녁밥을 지었습니다. 반찬이라야 시어삐진 김치뿐이었지만 물소리가 졸졸 나는 방에 앉아 그 밥을 둘이 다 먹고 또다시 토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또 다음날도 계속 올라와 나와 토론을 벌이더니 강현실은 마침내 범천교회를 떠나 우리 교회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몹시 바람이 불던 11월의 어느날 아내가 범냇골의 초막집으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일곱 살짜리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쌀 팔러나가다 평양으로 올라갔던 그해에 태어난 아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있었습니다. 나는 차마 아들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습니다. 반갑다고 얼굴을 부비며 안아줄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망부석처럼 서있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쟁통에 그들 모자가 겪었을 고통이 눈에 선했습니다. 사실 나는 그들 모자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가족을 돌볼 때가 아니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여러번 다짐을 받았던 것처럼 조금만 더 나를 믿고 기다려주면 기쁘게 그들을 찾아나설 수 있었겠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습니다. 초막집은 좁고 남루하지만 이미 우리의 교회였습니다. 여러 식구들이 나와 함께 먹고 생활하며 말씀을 공부하고 있던 터라 그 곳에 내 가정을 꾸릴 수는 없었습니다. 초막집을 둘러본 아내는 몹시 섭섭해하며 산비탈을 내려가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