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내 인생의 큰 스승이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3장) u

훈독왕 | 20190902173627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3장



3장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사람


"자네가 내 인생의 큰 스승이네"


임진강을 건너 서울, 원주, 경주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날이 1951년 1월 27일이었습니다. 부산 바닥은 피난 내려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습니다. 조선 팔도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는지 사람이 살만한 데는 처마 끝까지 다 들어차서 궁둥이 하나 집어넣을 곳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밤에는 숲 속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하고 낮이면 밥을 얻으러 시내로 내려왔습니다. 


그새 감옥에서 깎은 머리가 수북이 자라 있었습니다. 안쪽에 이불솜을 대고 꿰맨 바지저고리가 너덜너덜했고 옷에는 기름때가 배어 비가 오면 빗방울이 또로록 구를 지경이었습니다. 신발도 뚜껑만 달려 있을 뿐 바닥은 거의 남지 않아 맨발로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위로 보나 밑으로 보나 따라지 중의 왕따라지, 거지 중의 상거지였습니다. 일거리도 없고 주머니에 가진 돈도 없으니 동냥밥을 얻어 먹고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나는 항상 당당했습니다. 눈치도 빨라서 한눈에 밥을 안 줄 것 같은 사람에게는 "이봐! 우리같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나중에 복을 받는 거야!" 하고 도리어 큰소리를 치며 밥을 얻어냈습니다. 그렇게 얻어온 밥을 양지바른 데 빙 둘러 앉아 수십 명이 나눠 먹었습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그 사이엔 찌르르한 감정이 통했습니다.


"이거 보게.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인가?"

누군가 반갑게 부르기에 돌아보니 일본유학 시절 내 노래에 반해 평생 친구가 되기로 했던 엄덕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세종문화회관과 롯데호텔을 설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남루한 차림의 나를 덥석 안더니 다짜고짜 자기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가세,어서 우리집으로 가."

결혼한 그는 단칸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좁은 방 가운데 이불 홑청을 걸어 방을 두 개로 나누고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


"자, 이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해보게. 늘 자네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네. 그냥 절친한 친구처럼 지냈지만 내게는 자네가 늘 친구 이상이었어. 내가 자네를 마음 속으로 항상 어렵게 생각했던 것은 알고 있었지?" 


나는 그때까지 친구들에게 내 솔직한 심정을 꺼내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성경을 읽다가 친구들이 오면 얼른 치워놓을 정도로 나를 드러내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덕문의 집에서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이야기는 하룻밤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새롭게 깨달은 것, 38선을 넘어 평양에 가서 교회를 시작한 것, 흥남감옥에서 살아나온 것을 이야기하는 데 꼬박 사흘 밤낮이 걸렸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엄덕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큰 절을 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자네는 이제부터 내 인생의 큰 스승일세. 이 절은 내가 스승에게 바치는 인사이니 받아주시게."

그 후로 엄덕문은 평생의 친구이며 제자로 내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엄덕문의 단칸방을 나온 나는 부산 4부두에서 밤에만 하는 막노동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일한 돈을 받으면 초량역에서 팥죽을 사먹었습니다. 뜨거운 팥죽이 식지 않도록 팥죽통은 하나같이 누더기 이불로 꽁꽁 싸여있었습니다. 나는 팥죽 한 그릇을 사먹으면서 그 통을 한 시간도 넘게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두에서 밤새 일하느라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 사르르 녹았습니다. 


그 무렵 나는 초량의 노무자 수용소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방이 어찌나 작은지 대각선으로 누워도 벽에 발이 닿았습니다. 그래도 그 속에서 연필을 깎아 정성스레 [원리원본]의 초고를 썼습니다. 생활이 구차하다는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쓰레기 구덩이 속에서 살아도 뜻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는 법입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김원필도 별의별 일을 다했습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남은 누룽지를 얻어오면 같이 끓여먹기도 하고, 타고난 그림 소질로 미군부대에 취직해 페인트 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범일동에 있는 범냇골로 올라가 집을 지었습니다. 범냇골은 공동묘지 근처라 돌투성이 골짜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내 땅이라고는 가진 게 없으니 산비탈을 비스듬히 다져 집터를 만들었습니다. 삽도 없어 남의 집 부엌에서 부삽을 몰래 꺼내 쓰고는 주인 모르게 가져다 놓았습니다. 김원필과 함께 돌을 쪼개고 땅을 파고 자갈을 날랐습니다. 흙과 짚을 이겨 만든 벽돌로 벽을 쌓고 미군부대에서 얻은 레이션 박스의 네 귀퉁이를 뜯어 지붕을 얹고 방바닥에는 검은 비닐을 갈았습니다. 

판잣집도 그런 판잣집이 없었습니다. 바윗돌에 기대 지은 집이라 방 안 한가운데 바위가 툭 솟아나와 있었습니다. 바위 뒤로 놓인 앉은뱅이책상과 김원필의 이젤이 살림살이의 전부였습니다. 비가 오면 방에서 샘이 솟았습니다. 앉은 자리 밑으로 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아주 낭만적인 방이었습니다. 비가 새고 물이 흘러가는 냉방에서 자고 나면 콧물이 질질 흘렀습니다. 하지만 단 한 평이라도 그렇게 마음 편히 내 몸을 누일 곳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뜻을 향해 가는 길이었기에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만이 가득했습니다.


김원필이 미군부대에 출근을 할 때면 산 아래까지 따라 나갔습니다.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도 마중을 갔습니다. 그 외의 시간엔 잠도 안 자고 연필을 깎아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원리원본을 썼습니다. 쌀독에 쌀은 없어도 방 안에 연필은 가득했습니다.  김원필은 집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왔습니다. 온종일 일하고 와서 피곤할 법도 한데 "선생님, 선생님!" 하며 나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워낙 잠이 부족한 내가 변소에서 곧잘 조는 것을 알고는 변소까지 따라올 정도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선생님 쓰시는 책에 제가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내 연필 값을 벌려고 미군들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군들 사이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부인이나 애인의 초상화를 그려 가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도화지만한 천에 풀을 먹인 뒤 나무틀에 붙여 그림을 그려주면 4달러를 받았습니다. 


김원필의 그런 정성이 고마워 그가 그림을 그릴 때면 나도 옆에서 묵묵히 도왔습니다. 그가 미군부대에 일을 하러 가고 난 뒤 천에 빳빳하게 풀을 먹이고 나무를 잘라 틀을 짜두었습니다. 퇴근해서 오기 전까지 붓을 다 빨고 필요한 물감을 사다놓았습니다. 그러면 그가 풀을 먹인 천 조각 위에 4B연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처음엔 한 장 두 장 그리던 것이 어느새 이름이 나서 밤에 잠도 자지 못하고 스무 장, 서른 장씩 그렸습니다.


일이 많아지자 뒤에서 훈수만 두던 나도 붓을 들고 나섰습니다. 원필이 얼굴 윤곽을 대강 그려놓으면 내가 입술도 칠하고 옷도 칠했습니다. 함께 번 돈은 연필을 사는 것과 그림 도구를 사는 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 일을 위해 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그 분의 뜻을 알리는 일이 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