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흥남감옥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2장)

훈독왕 | 20190902172637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2장


2장 눈물로 채운 마음의 강


첨부파일 32 자서전 눈내리는 흥남감옥에서 1.mp3


눈 내리는 흥남감옥에서 

감옥에서 음식 다음으로 그리운 것은 실과 바늘입니다. 갖은 노동으로 너덜너덜해진 옷을 꿰매려 해도 실이나 바늘을 구할 수 없어 감옥살이가 길어지면 상거지 꼴이 됩니다. 특히 흥남의 차가운 겨울바람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구멍난 옷을 기우려면 길에 떨어진 작은 천 조각도 그리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쇠똥이 묻은 천이라도 서로 주우려고 난리법석이 납니다. 천은 어떻게든 구하더라도 바늘을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산 가마니를 옮기던 중에 우연히 바늘 한 개가 묻어왔습니다. 시골에서 가져오는 가마니에 어쩌다 덤으로 섞여온 겁니다. 그때부터 나는 흥남감옥의 바느질꾼이 됐습니다. 바늘을 얻은 게 얼마나 기쁘던지 매일같이 남의 바지며 잠방이를 꿰매주었습니다.  


비료공장은 한겨울에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그러니 한여름에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한번도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려 정강이를 내보인 적이 없습니다. 오뉴월 삼복 중에도 반드시 대님을 메고 일했습니다. 남들이 바지를 훌렁 벗어던지고 속옷 바람으로 일할 때에도 나는 단정한 장바지 차림으로 일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고 나면 온 몸이 땀과 비료가루에 범벅이 되어사람들은 대부분 일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옷을 벗어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더러운 물에 몸을 씻었지만 나는 한번도 몸을 내놓고 씻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배급으로 나눠주는 물 한 컵을 반쯤 남겨두었다가 남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일어나 수건에 물을 적셔 닦았습니다. 새벽의 기운을 모아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내 소중한 몸을 함부로 내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입니다.


감옥에서는 서른여섯 명이 한방에 살았는데 비좁은 방구석에 놓인 변기통 옆이 내 자리였습니다. 여름이면 물이 넘쳐 축축하고 겨울이면 얼음이 얼어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이었습니다. 변기통이라야 뚜껑도 없는 조그만 독이었으니 냄새가 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소금국에 메밀 주먹밥을 먹은 죄수들은 걸핏하면 설사병이 났습니다. 

"아이쿠 배야!" 

배를 감싸안고 변기통까지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죄수들이 궁둥이를 까내리기 무섭게 물똥을 후다닥 쏴버리니 변기통 옆에 있는 나는 걸핏하면 똥물을 뒤집어쓰기 일쑤였습니다. 모두가 잠이 든 한밤중에도 배가 아픈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요. 아구구구 하며 다리를 밟힌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면 나는 재빨리 일어나 구석으로 가 앉습니다. 사람들을 밟으며 급히 변기통으로 달려온 사람은 미처 궁둥이를 내리기도 전에 설사똥을 쌌습니다. 억지로 눌러 참다 내지르는 것이니 그 파편이 말도 못합니다. 어쩌다 깜빡 잠이 들어 미처 피하지 못하는 날이면 그대로 뒤집어쓰고 맙니다. 그래도 사시사철 똥물이 튀는 그 구석자리를 내 자리로 알고 살았습니다. '하필이면 꼭 그 자리에만 앉을 게 뭐요? 하고 다른 죄수들이 물어보면 "여기가 젤 편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앉는 게 정말 마음이 편했습니다.


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든지 나와 마음이 통해 친구가 되면 문학이고 예술인 것입니다. 변소에서 변 떨어지는 소리가 아름답고 즐겁게 들리면 그 또한 음악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변기통 옆에 누워있던 나에게 튀기던 똥물도 내 생각에 따라서는 멋진 예술 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시 내 수감번호가 596번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오구륙 번이라고 불렀습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워 천장을 보며 '오구륙, 오구륙..., 하며 혼잣말을 하다가 후루룩 혀를 굴려 발음하면 '오구륙'이 '억울'로 들렸습니다. 나는 정말 억울한 죄인이었습니다.

 공산당은 감옥 안에 '독보회'를 만들어 자아비판을 시키고 보안대를 내세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그날 배운 것을 반성문으로 써내라고 했지만 나는 단 한 장도 쓰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어버이 수령이 우리를 사랑하사 매일같이 이밥을 주고 고깃국을 주고 이렇게 잘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글 따위는 절대로 쓸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죽음이 코앞에 닥친다 해도 무신론자인 공산당에게 반성문을 바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반성문을 쓰는 대신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보다 몇 배 열심히 일했습니다. 1등 노동자가 되는 것만이 반성문을 쓰지 않고도 배겨낼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1등 모범수가 되어 공산당 간부가 주는 상까지 받았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몇 번이나 어머니가 찾아오셧습니다. 정주에서 곧바로 흥남으로 오는 차편이 없어 서울로 내려갔다가 다시 경원선을 타고 스무 시간 넘게 걸려 오시려니, 그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한창 나이에 옥살이 하는 자식에게 먹이기 위해 사돈의 팔촌에까지 쌀 한 줌씩을 얻어 미숫가루를 만들어 오셨습니다. 면회소의 철창 밖으로 아들의 얼굴을 마주한 어머니는 눈물부터 흘리셨습니다. 그렇게도 강인하신 분이 감옥의 아들을 보시자마자 목이 메어 얼굴도 들지 못하시고 계속 우셨습니다. 내 꼴이 너무 험악해서 그랬겠지만 제아무리 강인한 분이라도 고통 받는 아들 앞에서는 그저 나약한 어머니에 지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할 때 입었던 명주 바지를 건네주셨습니다. 입고 있던 관복은 암모니아에 녹아 너덜너덜해져서 속살이 내비쳤지만 어머니가 주신 명주 바지를 입지 않고 다른 죄수에게 줘버렸습니다. 빚을 내서 마련해오신 미숫가루도 어머니가 보시는 눈앞에서 다른 이들 먹으라고 모두 나눠주었습니다. 아들을 먹이고 입힐 마음에 정성을 다해 지어오신 음식과 옷을 모두 다른 이에게 줘버리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우셨습니다. 


"어머니, 나는 문 아무개의 아들이 아닙니다. 문 아무개의 아들이기 전에 대한민국의 아들입니다. 대한민국의 아들이기 전에 세계의 아들이요,하늘과 땅의 아들입니다. 그들을 먼저 사랑하고 나서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 도리임을 압니다. 나는 졸장부 아들이 아니니 그 아들의 어머니답게 행동해주십시오."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을 내뱉었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보는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자다가도 그리워 깨는 어머니이건만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사사로운 모자의 인연보다는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따뜻하게 입히고, 더 배불리 먹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옥 안에서도 사람들과 시간을 틈타 이야기하기를 즐겼습니다. 내 주변에는 늘 이야기를 들으러 모인 사람들로 그득했습니다. 배고프고 추운 옥살이 중에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나눔은 따뜻했습니다. 흥남에서의 인연으로 나는 12명의 동지이자 평생 함께할 식구를 얻었습니다. 그중에도 이북5도 기독교연합회의 회장을 지낸 유명한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이 오가는 위험 속에서 혈육보다 더 뜨거운 정를 나눈 내 뼈와 살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있어서 내 감옥살이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를 도와준 사람들과 평양에 있는 교회 식구들을 위해 하루에 세 번씩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이 바지춤 사이에 숨겨두었다가 나에게 쥐어준 미숫가루 한 줌을 수천 배로 갚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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