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알이 지구보다 더 크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2장) u

훈독왕 | 20190902172328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2장


2장 눈물로 채운 마음의 강


밥 한 알이 지구보다 더 크다 

평양형무소에 갇힌 지 석 달 만인 5월 20일 나는 흥남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하늘 앞에 죄송하고 분한 마음도 있었지만 강도하고 한 조로 묶어놓으니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차로 열일곱 시간이나 걸리는 먼 길을 가면서 가만히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니 설움이 북받쳤습니다. 개울물이 흐르고 굽이굽이 산골짜기가 이어지는 그 길을 죄수의 몸으로 가야 하다니 기가 막혔습니다. 


흥남감옥은 실상 흥남 질소비료 공장의 특별노무자 수용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2년 5월간 고된 강제 노역을 했습니다. 원래 강제노동은 러시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세계의 이목과 여론 때문에 유산계급과 반공산주의자들을 무작정 처단할 수 없어 생각해낸 형벌이었습니다. 강제노동에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힘든 노동에 지쳐 죽을 때까지 일해야 했습니다. 러시아의 제도를 그대로 보고 배운 북한 공산당들은 모든 죄수들에게 3년 동안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말이 3년이지 고된 노동에 지쳐 저절로 죽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의 하루는 새벽 4시 반에 시작됐습니다. 죄수들을 모두 깨워 앞마당에 정렬시키고 불법 소지품이 있는지 몸수색부터 했습니다. 옷을 모두 벗겨놓고 먼지 하나까지 탈탈 털어가며 샅샅이 뒤졌기 때문에 두 시간은 족히 걸렸습니다. 흥남은 바닷가라 겨울이면 벗은 몸에 칼바람이 불어와 살이 에이는 듯 아팠습니다. 몸수색이 끝나면 형편없는 아침을 먹고 십 리 길을 걸어 비료공장으로 향했습니다. 네 줄로 늘어서서 얼굴도 똑바로 들지 못한 채 손을 잡고 걷는 죄수들 주변을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경비원들이 붙어다녔습니다. 만일 줄이 느슨해지거나 손을 잡지 않으면 탈출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가차없는 매질을 했습니다.


흥남은 겨울이면 눈이 사람 키만큼 쌓일 정도로 폭설이 쏟아지는 곳입니다. 눈이 한 길이나 쌓인 겨울날, 추운 새벽길을 걸어가면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얼어붙은 길은 미끄럽기 이를 데 없고 어찌나 매섭게 찬바람이 부는지 머리끝이 곤두섰습니다. 아침밥을 먹었는데도 기운이 없어 자꾸 헛발을 딛기 일쑤였지만, 맥이 풀린 다리를 끌고서라도 일을 하러 나가야 했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길을, 나는 하늘의 사람이란 사실을 되새기며 갔습니다.

비료공장에는 비료의 원료가 되는 암모니아가 산처럼 쌓여있었습니다. 컨베이어를 타고 쏟아져내리는 암모니아는 마치 하얀 폭포수 같았습니다. 막 쏟아져내린 암모니아는 얼마나 뜨거운지 한겨울에도 김이 모락모락 났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열기가 식어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습니다. 산처럼 쌓인 암모니아를 가마니에 퍼 담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습니다. 높이가 20미터도 넘는 거대한 암모니아 더미를 우리는 '비료산' 이라고 불렀습니다. 8백~9백 명씩 큰 광장에 나가 암모니아를 퍼담는 장면은 마치 큰 산을 둘로 쪼개는 형상이었습니다. 


열 명이 한 조가 되어 하루에 1천3백 가마니씩 퍼 담아야 했으니 한 사람의 하루 책임량이 백삼십 가마니나 되었습니다.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면 식량배급이 반으로 줄어버려 죽기 살기로 일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가마니를 옮기려고 철사줄로 바늘을 만들어 가마니를 묶을 때 썼습니다. 도록꼬라고 부르는 운반용 트럭이 지나는 레일 위에 굵은 철사를 올려놓으면 납작하게 눌러져서 바늘 대신 쓸 수 있었습니다. 가마니에 구멍을 낼 때는 공장의 유리창을 깨뜨려 썼습니다. 간수들도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죄수들이 안타까워 공장 유리를 깨는 것을 보고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그 굵은 철사를 이로 물어 자르다가 그만 이가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 지금도 내 앞니를 잘 보면 이가 갈라져 있는데, 흥남감옥에서 얻은 잊을 수 없는 기념품인 셈입니다.


다들 중노동에 지쳐 몸이 여위어 가는데 나는 줄곧 72킬로그램을 유지해서 다른 죄수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체력만은 남부럽지 않던 나도 딱 한번 학질에 걸려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달 가까이 학질을 앓으면서도 내가 일을 못하면 내 몫까지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죄수들 생각에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이 좋은 나를 두고 '철근같은 사나이'라고들 했습니다. 나는 아무리 힘든 중노동이라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감옥이든 강제노동이든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채찍이 제아무리 무섭고 환경이 모질다 해도 가슴에 확고한 뜻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암모니아는 유산硫酸이라고도 불립니다. 일본의 가와사키 철공소에서 일할 때 탱크에 들어가 유산을 청소하다가 독성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여러 명 보았지만, 흥남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혹독했습니다. 유산이 닿으면 머리가 빠지고 피부에서 진물이 날 정도로 해로워서 유산 공장에서 6개월만 일하면 대부분 각혈을 하고 죽어나갔습니다. 손가락을 보호하느라 골무를 끼지만 가마니를 묶다보면 독한 유산에 닿아 금세 구멍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니 입고 있던 옷은 유산에 녹아 다 뭉개져버리고 살이 갈라져 피가 흐르거나 뼈가 드러나는 경우도 예사였습니다. 살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진물이 질질 나와도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살갗에서 진물이 나오는 것은 암모니아 때문에 살이 썩어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물집이 잡히고 진물이 흐르는 곳마다 상처를 내어 죽은 피를 뽑았습니다. 암모니아 공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날마다 내 살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고도 하루에 작은 밥공기로 두 그릇이 채 못 되는 배급을 받았습니다. 반찬은 아예 없고 국은 무청이 든 소금물이 전부였습니다. 국물은 목이 타들어갈 정도로 짰지만 그나마 돌처럼 딱딱한 맨밥을 그대로 넘길 수 없어서 어느 누구도 국물 한 방울 버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밥그릇을 받으면 모두들 순식간에 통째로 입 속에 털어넣었습니다. 자기 밥을 다 먹고 나면 남들이 밥 먹는 모습을 목을 빼고 바라보다가,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남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넣어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흥남에서 나와 함께 지내던 어떤 목사는 "나한테 콩 한 알만 주면 밖에 나가서 소 두 마리를 주겠소" 하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입 속에 있는 밥알까지도 끄집어내 먹을 정도였으니 그때의 배고픔은 그만큼 처절했습니다. 


배고픈 고통은 실제 겪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밥 한 알도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지금도 흥남만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밥 한 알이 그렇게까지 온 신경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겠지만 배가 고프면 눈물이 쏟아지게 밥이 그립습니다. 어머니보다 더 그립습니다. 배가 부를 때에는 세계가 큰 것 같지만 배가 고프면 밥 한 알이 지구보다 더 큽니다. 밥 한 알의 가치가 그렇게 엄청납니다. 


감옥에 들어가던 첫날부터 배급받는 주먹밥의 절반을 떼어 동료들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만 먹었습니다. 그렇게 석 주쯤 훈련을 한 뒤에야 비로소 주먹밥 한 개를 다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몫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배고픔을 견디기가 한결 수월했습니다.


감옥살이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합니다. 죄수의 절반이 일 년 안에 죽어나가는 바람에 매일같이 감옥 뒷문으로 시체를 넣은 널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온몸의 기름기가 다 빠지도록 일만 하다가 죽어서야 겨우 감옥 문밖을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무자비하고 냉혹한 정권이라도 그건 분명 인간의 한계선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죄수들의 눈물과 한이 담긴 암모니아 포대는 항구를 통해 러시아로 옮겨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