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1장
1장 밥이 사랑이다
일본인들은 어서 일본으로 돌아가시오
그렇다고 내가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형님을 도와 농사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농촌엔 계절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논갈이도 하고 밭갈이도 하고 모도 내고 김도 매야 합니다. 김매기 중에 가장 힘든 일은 조밭매기입니다. 씨를 뿌린 후에 세 번은 고랑을 매줘야 하는데 어찌나 힘이 드는지 한번 맬 때마다 허리가 휠 지경입니다. 고구마는 진흙에 심어 키우면 맛이 없고 진흙을 3분의 1 정도 섞은 모래밭에 심어야 달디단 고구마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옥수수를 키우는 데는 인분 퇴비가 가장 좋기 때문에 손으로 똥을 주물러 가루를 만드는 일도 했습니다. 농사일을 돕다보니 어떻게 해야 콩이 잘 되는지 옥수수가 잘 되는지, 어느 흙에 콩을 심어야 하고 팥을 심어야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농사꾼 중의 농사꾼입니다.
평안도는 기독교 문물이 먼저 들어온 곳이라 1930년대, 1940년대에 이미 농지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모를 심을 때는 한 장대에 열두 칸씩 사이를 둬 표시를 하고 두 사람이 여섯줄씩 옮기면서 심었습니다. 나중에 남한에 와보니까 줄을 쳐놓고 한 줄에 수십명씩 들어가 첨벙첨벙 왔다갔다하며 모를 심는데, 참 답답해 보였습니다. 발을 두뼘 너비로 벌리고 서서 재빨리 모를 심는 것이 내가 농사철에 모만 심어주고도 학비 정도는 너끈히 벌어쓸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열 살이 되자 아버지가 나를 동네 글방에 보내셨습니다. 글방에서는 하루에 책 한 장만 떼면 됐습니다. 집중하여 30분 만에 외우고는 훈장님 앞에 서서 조잘조잘 읊으면 그날 공부는 끝입니다. 점심나절 늙은 훈장님이 낮잠에 빠지면 글방을 나와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습니다. 산에 가는 날이 늘어날수록 뜯어먹을 게 어디 있는지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그럴수록 점점 더 먹을 게 많아져 그걸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니 점심이 뭐 필요하고 저녁이 뭐 필요합니까? 그때부터 나는 집에서 점심을 따로 안 먹고 살았습니다.
글방에 다니면서 논어, 맹자를 읽으며 한자를 배웠는데 내가 글씨를 곧잘 썼습니다. 덕분에 열두 살 때부터 글방에서 훈장님을 대신해 아이들이 보고 배울 체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난 사실 글방보다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습니다. 남들은 비행기를 만들고 있는데 공자왈 맹자왈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4월인데 아버지는 벌써 일 년치 수업료를 다 내신 뒤였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글방을 그만두려고 마음먹고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할아버지를 설득하고 삼촌까지도 설득했습니다. 당시 소학교로 옮겨가려면 편입시험을 봐야 했는데, 그러려면 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나는 사촌동생까지 충동질해서 원봉학원에 들어가 소학교에 편입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열네 살이 되던 이듬해, 편입시험을 치고 오산학교 3학년에 들어갔습니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공부를 잘해서 5학년으로 월반도 했습니다. 오산학교는 집에서 이십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확한 시간에 맞춰 걸어다녔습니다. 고개를 넘어갈 때마다 다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차차차차 걸음법으로 빠르게 걸어가면 동무들은 내 뒤를 따라 오기도 바빴습니다. 평안도 호랑이가 나오는 무서운 산길을 그렇게 걸어다녔습니다.
오산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이승훈 선생이 세운 민족학교라 일본말을 가르치지도 않을 뿐더러 일본말을 아예 못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적을 알아야만 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시 편입시험을 쳐서 정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으로 들어갔습니다. 공립학교는 전부 일본말로 수업을 했기 때문에 등교 전날 밤 가타가나 히라가나만 겨우 외운 채로 등교했습니다. 일본말을 전혀 몰라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교과서를 보름 만에 몽땅 외워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귀가 틔었습니다.
덕분에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는 일본말을 유창하게 했습니다. 졸업식날, 자원해서 정주읍의 유지들이 모두 모인 앞에 나가 연설을 했습니다. 감사하다는 축사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어떻고 저 선생님은 어떻고, 학교제도에 이런 문제가 있으며, 그리고 이 시대의 책임자는 이런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등 비판적인 연설을 일본말로 줄줄 해댔습니다. "일본인들은 하루 빨리 보따리를 싸서 일본으로 돌아가라. 이 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조상의 유업이다!" 그런 말을 경찰서장, 군수, 면장 다 모인 앞에서 해댔습니다. 윤국 할아버지의 혼을 이어받아 감히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을 해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단상을 내려올 때 보니 다들 얼굴이 허옇게 질려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일본경찰은 그날부터 나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해서 별걸 다 감시하고 귀찮게 굴더니 나중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할 때 경찰서장이 도장을 찍어주지 않아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일본에 보낼 수 없는 요주의 청년이라며 거절했던 것입니다. 결국 경찰서장과 크게 싸우고 담판을 지은 다음에야 간신히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