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다면 하는 하루울이 고집쟁이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1장)

훈독왕 | 20190824212825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1장


1장 밥이 사랑이다


첨부파일 32 자서전 한다면 하는 하루울이 고집쟁이 1.mp3


한다면 하는 하루울이 고집쟁이 


  아버지는 돈을 빌려주고 떼일 줄은 알아도 받아올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빚을 얻어 쓰고서 갚기로 한 약속은 소를 팔고 집안 기둥을 뽑아 팔아서라도 반드시 지키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작은 꾀로 진리를 움직이지 못한다. 참이란 작은 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꾀로 이룬 것은 몇 년 못 가 드러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채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볏섬을 지고 층계를 성큼성큼 올라가실 만큼 힘이 장사였습니다. 내가 아흔 살이 되도록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체력 덕분입니다.


   찬송가 중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즐겨 부르시던 어머니도 대단한 여장부셨습니다. 이마랑 머리가 두리두리하셨던 모습만이 아니라 곧고 괄괄한 성격도 그대로 닮아 나 또한 고집이 대단하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 셈입니다.


  어릴 적 내 별명은 '하루울이'입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온종일 울어야 끝이 나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한번 울음을 터뜨리면 무슨 일이나 난 것처럼 크게 울어 잠자던 사람들이 다 깨어 나와봐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운 것도 아닙니다. 방 안을 훌떡훌떡 뛰면서 난리를 쳐대 온 몸에 상처가 나고 살이 터져 방 안을 피투성이로 만들 정도로 울어댔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성질이 지독한 데가 있었습니다.


  한번 맘을 정하면 절대 양보를 안 했습니다. 뼈가 부러져도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철이 들기 전의 일입니다. 내가 뻔히 잘못했는데도 어머니가 뭐라 하시면 "아니야! 절대 아니야! 하고 맞섰습니다. 잘못했다고 한마디하면 될 걸 죽어도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 성격도 대단하셨습니다. "어디 부모가 대답하라는데 안 하는 거냐?"며 들이패셨지요. 한번은 얼마나 맞았는지 기절을 해서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내 앞에서 엉엉 우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나는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집이 센 만큼 승부욕도 강해 어떤 일이든 지고는 못 살았습니다. 오죽하면 "오산집 쪼끔눈이. 그놈, 한번 한다면 하는 놈이다"라고 동네 어른들이 다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몇 살 때이던가, 내 코피를 터뜨리고 도망간 아이의 집 앞에 한 달을 죽치고 기다린 끝에 그 부모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떡까지 한 시루 얻어오는 것을 보고어른들도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렇다고 생떼로만 이기려 든 건 아닙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힘도 장사여서 동네에서 팔씨름으로 나를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나보다 세 살 더 많은 녀석한테 씨름에서 진 적이 있었는데 도통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산에 올라가 아카시아 나무 껍질을 벗기며 힘을 길러서는 여섯 달 만에 그 녀석을 이겨버렸습니다.


 우리 집안에는 아이를 많이 낳는 내력이 있습니다. 내게는 위로 형님이 한 분과 누나 셋, 여동생이 셋이나 있었습니다. 어릴 적엔 형제가 많아 참 좋았습니다. 형제들에 사촌들, 육촌들 모두 불러모으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온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기분입니다.


  1991년 말 북한에 잠시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떠나온 지 48년만에 고향에 가보니 그 많던 형제와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누님과 여동생 한 사람만 살아있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처럼 나를 위해주던 누님은 칠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있었고, 그토록 귀엽던 여동생도 이미 육십이 넘어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습니다. 어릴 적에 그 여동생을 참 많이 놀려댔습니다. "효선아, 네 신랑감은 한쪽 눈이 째보다!"하고 달아나면 "뭐라구!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며 쫓아와선 조그만 주먹으로 내 등을 콩콩 때리곤 했습니다. 열여덟 되던 해 효선이는 이모뻘 되는 아주머니의 중매로 선을 보았습니다.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곱게 빗고 분단장을 예쁘게 한 효선이는 집 안팎을 청소하며 신랑감 될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효선아, 너 그렇게 시집이 가고 싶냐?" 하고 놀리자 분 바른 얼굴이 발갛게 물들던 모습이 참 고왔습니다. 북한을 다녀온 지 1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은 나를 보고 그렇게나 섪게 우시던 누님도 돌아가시고 여동생 혼자 남아있다고 하니 어찌나 애달픈지 내 마음이 다 녹아버리는 듯 합니다.


  손재주가 좋았던 나는 양말이나 옷 같은 걸 내 손으로 직접 짜 입었습니다. 추워지면 모자도 쓱쓱쓱 떠서 썼고요. 여자들보다도 솜씨가 좋아 우리 누나들한테도 뜨개질을 가르쳐주고 효선이 목도리도 내가 짜주었습니다. 곰발바닥처럼 크고 두터운 손으로 바느질하기도 좋아해서 속옷도 내가 만들어 입었습니다. 통광목을 갖다놓고 반을 척 접어 본을 뜨고 마름질을 한 다음 바느질하면 나한테 딱 맞게 만들어졌습니다. 어머니 버선도 그렇게 만들어 드렸더니 어머니가 "야,야, 우리 둘째가 장난삼아 하는 줄 알았더니 엄마 발에 딱 맞는구나" 하고 좋아하셨습니다.


   효선이 말고도 그 밑으로 동생이 넷이나 더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열세 명의 형제를 낳으셨지만 다섯 자식을 먼저 보내셨습니다.그러니 어머니의 속이 시커멓게 타버리셨을 겁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자식이 그렇게 많으니 어머니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자식을 시집장가 보내려면 무명을 짜야 했습니다. 목화에서 빼낸 솜을 물레에 넣어 실을 뽑는 것이지요. 그걸 평안도 말로 '토깽이'라고 합니다. 스무 올을 한 세로 잡고 열두 무명사, 열세 무명사…. 자식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할 때마다 광목같이 보드랍고 예쁜 무명이 어머니의 투박스런 손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어찌나 손이 빠른지 남들이 하루에 서너 장 짜는 토깽이를 어머니는 열 장, 스무 장씩도 짜 내셨습니다. 누나를 시집보내느라 정 바쁠 때에는 하루에 한 필도 너끈히 짜곤 하셨습니다. 맘만 먹으면 어떤 일이든 후다닥 해버리는 어머니의 급한 성격을 꼭 닮아 나도 무슨 일이든 후다닥 잘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는 아무 음식이나 잘 먹었습니다. 옥수수도 잘 먹고 생오이도 잘 먹고 생감자, 날콩도 잘 먹었습니다. 이십 리 밖에 있는 외갓집 밭에 덩굴이 뻗어나가는 것이 있어서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지과'라고 했습니다. 그 동네에서는 고구마를 지과라고 불렀습니다. 캐서 쪄주기에 먹어보니 얼마나 감칠 맛이 나던지 고구마를 소쿠리째 가져다놓고 혼자서 다 먹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고구마 철만 되면 사흘이 멀다 하고 외갓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엄마,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하고는 이십 리 길을 단숨에 달려가 고구마를 먹고 오곤 했습니다.


  고향에는 5월에 감자고개가 있었습니다. 겨우내 감자만 먹다가 봄이 되어 보리 추수를 하는 때가 바로 감자고개입니다. 요즘같이 먹기 좋은 납작보리가 아니고 통보리쌀이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통보리를 이틀 정도 물에 불렸다가 밥을 하면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떠도 밥알이 모래알처럼 흩어졌습니다. 그걸 벌건 고추장에 비벼 한입 집어넣으면 보리가 이 사이로 자꾸 삐져나왔습니다. 그래서 입을 꼭 다물고 우물우물 먹던 기억이 납니다.


   청개구리도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홍역을 앓거나 병에 걸려 얼굴이 홀쭉해지면 청개구리를 먹였습니다. 넓적다리에 살이 피둥피둥 오른 커다란 청개구리를 서너 마리 잡아다 호박잎에 싸서 구우면 시루에 찐 것처럼 말랑말랑하면서 참 맛이 있습니다. 맛으로 치면 참새고기, 꿩고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뜸북뜸북하며 벌판을 날아다니던 뜸북새는 물론이고 알록달록 어여쁜 산새알도 많이 구워 먹었습니다. 이렇게 자연에는 하나님이 주신 먹을거리가 지천이라는 걸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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