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분명한 나침반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 1장) u

훈독왕 | 20190824212615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1장 밥이 사랑이다


내 인생의 분명한 나침반


  우리 본관은 전라도 나주 옆에 있는 남평입니다. 문정흘文禎紇 증조할아버지는 문성학文成學 고조할아버지가 낳으신 3형제 중 셋째 아드님이셨습니다. 그 증조할아버지가 또 치국致國, 신국信國윤국潤國의 3형제를 낳으셨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맏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학교도 안 다니고 서당에도 가신 적이 없는 일자무식이었지만, 듣기만 하고도 삼국지를 모두 외울 정도로 집중력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삼국지만이 아닙니다. 누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면 그것을 외워서 줄줄 읊으셨습니다. 무엇이든 한 번만 들으면 다 기억하셨습니다. 할아버지를 닮아 아버지도 4백 쪽이 넘는 찬송가를 모두 외워서 부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조건 베풀며 살라는 증조할아버지의 유언을 잘 따르셨습니다만, 재산을 지키지는 못하셨습니다. 셋째인 윤국 작은할아버지가 집안 재산을 저당 잡혀 몽땅 날리셨기 때문입니다. 그후 집안 식구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한번도 윤국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노름하느라 재산을 없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저당을 잡혀가며 빌린 돈은 모두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해졌습니다. 당시 7만 원이면 상당히 큰돈이었는데 윤국 할아버지는 그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털어넣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영어와 한학에 능한 인텔리였습니다. 덕언면의 덕흥교회를 비롯해서 세 군데 교회의 담임목사를 지낸 윤국 할아버지는 최남선 선생 등과 더불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안했지만, 기독교 대표 16인 중에 덕흥교회 사람이 셋이나 되자 민족 대표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러자 오산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 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윤국 할아버지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만약의 경우 거사에 실패하면 후사를 맡아 달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국 할아버지는 만세를 부르러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에게  태극기 수만 장을 인쇄하여 나눠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3월 8일에 정주군 오산학교 교장과 교원, 학생 2천여 명, 각 교회 신도 3천여 명, 주민 4천여 명과 회합하여 아이포 면사무소 뒷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2년형을 선고받고 의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특사로 출감했지만, 일본경찰들의 박해가 심하여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피신을 다녔습니다. 일본경찰에게 고문을 당한 할아버지의 몸에는 죽창으로 찔려 움푹 팬 큰 흉터가 있었습니다.시퍼렇게 날이 선 죽창으로 두 다리와 옆구리를 찔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윤국 할아버지는 끝끝내 굽히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모진 고문에도 도통 말을 안 들으니 독립운동만 안 하면 군수 자리라도 주겠다는 회유도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 내가 너희 도둑놈들 밑에서 벼슬할 줄 알았느냐?"하며 서슬 퍼렇게 호통을 치셨다고 합니다.


  내가 일고여덟 살쯤의 일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잠시 우리 집에 머물러 계신 것을 알고 독립군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독립자금이 부족해 도움을 요청하려고 눈이 쏟아지는 밤길을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잠든 우리 형제들이 깰세라 우리 얼굴을 이불로 덮으셨습니다. 이미 잠이 달아나 버린 나는 이불 속에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누워 어른들이 나누는 소리에 귀를 귀울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밤중에 닭을 잡고 국수를 삶아 독립군들을 대접했습니다.


  아버지가 덮어씌운 이불 밑에서 숨을 죽인 채 듣던 윤국 할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귓전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죽어도 나라를 위해 죽으면 복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암흑이지만,반드시 광명한 아침이 온다" 라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늘 몸이 불편하셨지만 목소리만은 쩌렁쩌렁하셨지요.


  '저렇게 훌륭한 할아버지가 왜 감옥에 가야 하나? 일본보다 우리가 더 힘이 세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하며 안타까워 하던 심정도 잊히지 않습니다.


  일본 경찰의 괴롭힘을 피해 객지를 떠돌다 연락이 끊어졌던 윤국 할아버지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1966년 서울에서였습니다.


  사촌동생의 꿈에 나타나셔서는 "내가 강원도 정선 땅에 묻혀 있노라" 라고 하셨답니다. 꿈속에서 받은 주소를 찾아가보니 할아버지는 이미 9년 전에 작고하시고, 그 자리엔 잡초가 무성한 무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윤국 할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경기도 파주로 이장해 모셨습니다.


  광복 이후 공산당이 목사들과 독립 운동가들을 가리지 않고 마구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윤국 할아버지는 행여 식구들에게  폐가 될세라 공산당을 피해 38선을 넘어 정선으로 향하셨는데, 우리 식구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첩첩산골인 정선에서 붓을 팔아 연명하시다가 나중에는 서당을 세우고 한문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윤국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던 제자들 말에 의하면 평소에 즉흥적으로 한시를 즐겨 쓰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쓰신 시를 제자들이 모아놓은 것이 130여 수나 되었습니다.


               남북평화 南北平和  


십 년 전에 북쪽 고향을 떠나 월남했노라                  在前十載越南州

유수 같은 세월이 나의 흰 머리를 재촉하네               流水光陰催白頭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려 해도 어찌 갈 수 있으랴        故園欲去安能去

타향에 잠시 머물고자 한 것이 오래 머물게 되었노라  別界薄遊爲久游

고향 갈포 홑옷을 길게 입으니 여름 된 줄 알겠고       袗長着知當夏

비단 부채 흔들면서 이내 가을 닥칠 일을 걱정하네      紈扇動搖畏及秋

남북 사이에 평화가 올 날이 이제 멀지 않았으니         南北平和今不遠

처마 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아 너무 근심말아라        候兒女莫深愁


   식구들을 잃어버리고 산 설고 물 선 정선 땅에 살면서도 윤국 할아버지의 마음은 나라 걱정에 매여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또 '애당초 뜻을 세움에 스스로 높은 것을 기약하고, 사욕일랑 터럭 끝만치도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한문)'는 시구도 남기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신 행적은 뒤늦게 정부당국의 인정을 받아 1977년과 1990년에 대통령표창과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숱한 시련 속에서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일념으로 삼았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는 시구를 지금도 종종 읊조립니다.


   요즘 나이가 들어갈수록 윤국 할아버지의 생각이 점점 더 납니다. 나라 걱정하시던 그분의 마음이 절절이 내 마음을 파고듭니다. 나는 윤국 할아버지가 직접 가사를 붙여 지으신 '대한지리가'를 우리 식구들한테 모두 가르쳐 주었습니다.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한 곡조로 부르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해지는 맛에 요즘도 우리 식구들하고 즐겨 부르곤 합니다.


=== 대한지리가 ===

동반구에 돌출한 대한반도는 동양삼국 요지에 자리를 잡고

북으로는 광활한 만주평야요 동으로는 깊고 푸른 동해로다

남으로는 다도해 대한 바다요 서로는 깊고 누런 황해로다

삼면 바다 수중에 쌓인 해산물 어류 조개 수만종 우리 보배일세

북극단에 종립한 주종 백두산 압록 두만 이대강의 수원이 되고

동서 분류 양해의 주입을 하여 지나 소련 경계가 완연하도다

반도중앙 강원도에 빛난 금강산 세계 공헌 그 이름은 대한의 자랑

남방창해 우뚝 솟은 제주 한라산 왕래하는 고깃배의 목표 아닌가

대동 한강 금강 전주 사대 평야는 삼천만민 동포의 의식보고요

운산 순안 개천 재령 사대 광산은 우리 대한 광채 있는 지중보물일세

경성 평양 대구 개성 사대 도시는 우리 대한 광채 있는 지중 도시일세 

부산 원산 목포 인천 사대 항구는 내외국 무역선의 집중지일세 

대경성을 심중으로 뻗친 철도선 경의 경부 이대 간선 연락이 되고 

경원 호남 양지선 남북에 뻗쳐 삼천리강산 주유 넉넉하도다 

역조의 변천을 말하는 고적 단군기자 이천년의 건도지 평양 

고려시조 태조 왕건 송도 개성과 이조조선 오백년의 시왕지 경성 

이천년의 문명을 빛내인 신라 박혁거세 시조천 명읍지 경주 

산수풍경 절승한 충청 부여는 백제 초왕 온조의 창조 고적지 

미래를 개척하는 대한 남아야 문명의 파도는 삼 해를 친다 

한촌산읍 평민의 머리를 씻어 미래의 세계로 맹진을 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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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