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和堂(천화당)
왜 침묵의 소리가 무엇인지 물음으로써 침묵을 깨는가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 주요 의사소통 수단은 무엇인가? 말하기와 듣기이다. 그런데 통일교인들은 주로 말하기에 중점을 둔 기도를 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청원적인 기도 말이다. 반면, 많은 경우 우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조용히 가다듬으며 하나님께서 스스로 구현하실 수 있는 침묵의 공간을 준비하지 않는다.
우리가 대화할 때 어느 정도의 문구를 말하다 보면 말의 전체 느낌을 좌우하는 침묵의 순간들이 있게 되며, 문장의 마침표도 있게 마련이다. 주의 깊게 침묵의 순간들을 들어 보면 그 침묵이 우리가 앞서 말한 내용에 보다 큰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즉 말을 함으로 상대방과의 관계를 압도하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거부하고 침묵함으로써, 그리고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함으로써 우리는 심오한 그 어떤 것을 수련할 수 있다.
언어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의사소통의 90퍼세트를 무언(無言)의 방법을 통해서 하고 있다. 10퍼센트만이 언어를 이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단순히 말만 하는 기도를 통해 맺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얼마나 제한적인 것이 될 것인가? 우리는 10퍼센트의 관계만을 맺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완전한 용서와 자비의 힘, 즉 우리에게 항상 내려 주고 계시는 완전한 사랑 등을 받을 수 있는--의 전체적인 원천을 두드려 볼 수 있을까? 성경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10)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부활과 희망, 선함의 끝없는 원천이 되는 무한한 지혜를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는 곳, 동시에 하나님이 지니신 깊은 슬픔과 상처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은 바로 깊은 침묵 속에서이다.
이것이 종교를 단순히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인도하려는 '도덕적 가정(假定)' 으로 인식한 칸트에 대한 항변이다. 칸트의 인식 방법에 대한 직접적인 응수이다. 종교적인 경험과 의식 속에는 이성(理性)의 범부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있다. 침묵의 순간, 깊은 기도와 명상, 심신통일 훈련 속에는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해를 완전히 넘어서는, 너무나도 깊고 심오하여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신이 체험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느낄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칸트적 사고, 즉 인간의 모든 경험은 이성의 범주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본질과 대상 간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는 이론은 몸 마음의 심오한 조화나 인간이 신성한 존재와 결합되어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칸트의 환원주의(還元主義)(복잡한 사상 명제 등을 보다 단순하게 바꾸어 설명하려고 하는 주의 - 옮긴이)에 반하여, 우리는 심신통일 훈련을 함으로써 유한적인 인식과 지성을 초월하여 신(神)과 결합할 수 있으며 지고한 선과 사랑, 지 혜의 근원과 우리의 본심을 두드릴 수 있다.
우리는 훈련을 하는 동안 자신이 그 속에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깊고 심오한 침묵의 순간들을 맞이 하게 될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 나 자신과 하나님, 나와 세계, 심지어 나와 밖에 있는 나무 사이에 있었던 모든 경계와 구분이 사라질 것이다. 무한하고 강력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흐르는 본심을 직접 느낄 것이다.
그 침묵은 너무도 심오하며 또한 통찰력을 지닌 것으로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무한한 침묵의 공간이 주는 위엄에 눌려 서 있을 뿐이다. 너와 나의 이원성(二元性)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공간이다.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자신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영역, 몸의 생김 등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대되어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 경험하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한의 영역이다. 이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일체가 됨을 느끼며,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며, 하나님의 고통과 번뇌를 느낄 수 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광대한 시간 속으로 녹아들며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신과 결합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의 심정은 세상의 슬픔과 고뇌를 느끼도록 인도된다. 이러한 형태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세계와 융합되어 있음을 깊이 느끼게 되는데, 즉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 만을 중심한 테두리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와 만물에까지 의식은 확장된다.
죽어 가는 아이를 안고 어르는 어느 어머니의 고통이 너무도 깊게 느껴져 우리는 실제로 그 어머니가 된다. 또한 그녀의 팔에서 죽어 가는 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아버지들을 죽이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노예나 매춘부로 강제로 끌려가는 고통 받는 사람이며, 동시에 노비나 매춘을 사고 파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부유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며, 자유롭기도 하고 억압당하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성의 즐거움인 동시에 불행히도 상처의 일부인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순간,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광활해진다. 순수한 침묵의 순간에는 그러한 느낌을 이성적으로조차 느낄 수 없지만, 기도를 끝내고 나면 방금 경험했던 것들을 적절치 못하게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우리는 그 침묵에 대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묘사해 보려 하지만 결국 그 심오함에 대한 설명으로는 언제나 짧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우리는 변화한다.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평상적 도덕 관념과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저 남자는 흑인이고, 저 여자는 백인이야” “그는 멕시코인이고, 그녀는 한국사람이야” 라고 말한다. 그러나 깊고 심오한 기도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뜻 깊은 고요가 주는 지혜와 침묵 속에서 이런 모든 구별과 구분은 사라지고 모든 사람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본심은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비정하고 무자비한 범죄자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것은 죄를 짓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 입히는 사람을 옹호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떤 누구도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를 유도하는 것은 본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상대방과의 개인적인 원한에서 싹튼 분노, 자기만을 위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동기, 혹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자 하는 소심하고 비겁한 행동 등에서 오는 경우가 대분분이기 때문이다.
본심은 이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마음속의 침묵을 듣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광활하심을 들으며 인류의 모든 면면(面面)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듣는다. 서로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시고 울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침묵에 대답하신다. (실제적인 말씀이라기보다 기도하는 수련 중에, 혹은 수련을 거친 후에 얻는 깨달음을 통해서 배운다.)
심신통일 훈련은 지극히 중요하며 본질적인 것이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거나 좋은 음식을 골라 먹는 것과 같이 우리의 보이지 않는 영적인 몸인 영인체를 위해서도 영양 공급과 운동은 필수적이며 병을 치유하고 건강한 체질로 만들기 위해 영의 근육을 적당히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이 수련 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심신통일 훈련을 통해 소위 '조건반사작용'과 같이 어떤 자극에 대해 자연 반사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잘 수련하고 단련시켜야만 한다. 무술이나 다른 스포츠에서 몸을 익숙하게 훈련시키면 갑작스런 어떠한 공격에도 거의 반사적으로 대응하게 되는 것과 같다. 체계적으로 악한 마음의 습관을 잘라내 버리고 조건반사적인 ‘재 프로그램 장치'를 해 놓음으로써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있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들, 예를 들면 항상 다른 사람에 대해 비평하거나 흥미진진한 일에도 늘 불평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는가? 이런 사람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반대로, 안정되고 평화롭고 잘 조화된 마음의 소유자는 그 주위에 평화와 안정과 화합을 가져온다. 다시 말하자면,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수련을 하면서 마음속의 사탄, 즉 갈등, 초조, 갈망, 미움, 산만함, 분열 등과 만나게 된다. 이기적인 자아는 타락성의 노예와도 같아서 탐욕스럽게 타인의 소유물(의식, 사람 또는 재물 등)을 탐하고, 자신이 하기 싫은 것들(자기중 심적 성향을 바꾸려는 것, 욕심을 삼가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 등)을 강하게 합리화시킨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마음이 매우 이기적인 기반 위에서 작동하고 있음은 자명해진다.
이기적 자아는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나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통과시키는 수동적인 기관은 아니다. 오히려 매우 활동적이며 탐욕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과정에 의해 조금씩 형성된 것으로, 우리는 먼저 이것과 싸워야 한다. 이기적 자아를 평정해야만 한다. 소유하려고 하고 탐하려고 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고요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고요해져 더 이상 자기만을 위한 모습이 아니라면, 이제부터 좀 더 이타적이고 덕을 쌓기 위한 훈련을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