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에게 - 天和堂(천화당) u

훈독왕 | 20200224151516

天和堂(천화당)



독자들에게


2003년 5월 13일, 참부모님께서는 나와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이스트가든 내의 카티지 하우스에 오셨다. 외국에서 막 돌아오신 직후였는데 우리 가정에 들르셔서 은혜롭게도 휘호를 적어 주셨다. '天和堂(천화당)’ 이라고 쓰셨다. 또한 아버님께서는 그 밑에 내 이름과 아내의 이름을 함께 적으신 후 '天愛夫婦(천애부부)’ 라고 쓰셨다.


우리 부부는 그 말씀을 현재 우리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목표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하늘의 무한하신 사랑에 의해 서로를 알게 되었고 서로에게서 축복을 받고 있으나, 아직은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진정한 모델’ 이 되었다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부부로서의 관계를 새롭고 깊게 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그날 참아버님께서 주신 휘호의 중심은 ‘천화당'이다.


참아버님께서는 천(天)을 설명하시면서 ‘두 이(二)' 와 ‘사람 인(人)' 이 합쳐진 글자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길 '두 사람'을 상징하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 몸과 마음을 통일한 후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천국의 모습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것이 조화(調和)를 위한 기반이 되며, 이러한 조화가 일어나면 그 부부는 '천국의 화합을 이룬 장소(天和堂)’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볼 때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통일한 후 우리의 배우자와 하나된다면, 우리 자신이 천국의 현장인 동시에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배우자와 일체 된 관계 속에서 가정을 화합할 수 있는 씨가 나오는 것이요, 가정의 화합으로부터 사회·국가·세계의 화합이 시작된다. 그 날 참아버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이 뜻 깊은 세 글자 '천화당' 의 가르침이 나 자신의 생활에 자극이 되었음은 물론이요,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매일 새벽 2시 30분이면 일어나 몇 시간씩 몸과 마음을 위한 수양을 하는 등 이미 진지하게 수도 생활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나는 세 자녀(지금은 네 명)의 아빠이기도 했다. 나는 때때로 심각한 영적 수련을 동반한 종교적인 생활과 극히 평범한 일상적 생활(예를 들면 집안을 정리한다거나 빨래를 한다거나 아이들 소변 가리기 훈련을 시키는 등) 사이에 양립할 수 없는 큰 차이를 느끼곤 하였다.


나는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양쪽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 그러나 극히 상반되어 보이는 듯한 두 세계 속에 살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볼 때 종교에는 두 가지 형태의 신도가 있었다. 하나는 은둔하여 명상적 생활을 하는 부류요, 또 하나는 가정을 가지고 생활하는 부류였다. 그런데 이 두 유형은 거의 상호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은둔 수도자들의 역할은 가정을 지닌 신앙자들의 역할에서 분리되었다.


기독교, 불교, 유대교, 도교, 힌두교 등의 수도사적인 전통은 명상을 중시한 생활로써 다양하고 열정적인 영적 교육 과정을 추구하였다. 한편, 가정을 가진 사람들의 역할은 엄격한 종교 생활을 적용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과 가깝게 되어 갔다. 즉, 독신인 수사들은 최고 수준의 종교적 수도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그와 같은 수도자들을 따르는 전형적인 평신도가 되었다.


 수사와 수녀들의 독신적 금욕생활과 엄격한 영적 수련, 봉사를 통한 자기 희생적 생활을 통해서 보듯이 수도적 전통의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수사들의 공동체는 모든 개인적인 욕망과 편안함을 버리고 각자의 종교적 믿음에 대한 헌신과 단계별 수양으로 본보기가 되어 왔다.


또한 독신생활의 전통을 유지함으로써 수사들과 수녀들은 소위 학자들이 일컫는 바와 같이 가정을 가꾸며 '세속적인' 일을 하는 일반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여분의 '에너지 자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 여분의 에너지는 여러 역사시대를 지나는 동안 사회를 위한 봉사로 나타나게 되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 (Great Depression) 때에는 뉴욕 지역의 카톨릭 수녀들이 어려운 생활로 인해 버려진 고아들을 맡아 길렀으며, 불교에서도 수도원이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최근의 일례로는 2004년 쓰나미 재해 때에 제일 먼저 피해자들에게 음식과 거처를 제공하며 위로한 사람들이 바로 스리랑카의 수도승들이었다.


 이상의 설명은 접어두고 이제 내 생각을 이야기해 보겠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수도승들의 종교생활과 가정을 가진 일반 사람들의 생활이 통일교인의 생활에서는 완전히 융합되고 하나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종교적' 이며 '영적인 훈련' 의 연장선상에 있어서의 핵심 요소라고 나는 믿는다. 나 자신의 생활을 보면, 한편으로는 심각하게 훈련과 수련을 수행하는 수도자의 길을, 다른 한편으로는 8년의 결혼생활을 통한 네 자녀의 아버지요 남편으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교회를 가거나 종교적인 일을 하고 영적으로 수양을 하고 있을지 모르나, 일단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과 배우자와 더불어 세속적인 일과 세상적인 시간에 묻혀 버린다. 이것이 큰 문제이다! 우리는 사실상 가정에서 신성하거나 종교적인 것들을 빼내어 교회의 일로 내쫓아 버린다. 몸 마음을 통일하고 건전하고 참된 가정을 만듦으로써 세계 평화와 화합, 통일을 이룬다고 믿는 통일교인의 시각으로 볼 때, 이것은 이론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어느 부분에서도, 비록 그것이 가장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될지라도 신성함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


우리는 호흡을 하면서도 어떻게 생명의 숨을 받게 되었는지 느껴 가면서 하나님과 함께 해야만 한다. 길을 걸을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고 생각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때면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무한한 감사를 느껴야만 한다.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것에서부터 신성함을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을 늘려 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종교적 수행의 길이 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감사함과 살아 있음의 은혜에 대한 경외감으로 충만하게 된다. 또한 가장 세속적이고 평범한, 늘 반복되며 자칫 지루해 보이기도 하는 우리의 일상적 삶(특히, 통일교 인에게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속으로 '영적이며 종교적인 수양' 의 정의를 확대시켜 가야 한다.


참아버님께서는 이상세계에서는 어떠한 이념과 종교도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인류는 하나님과 완전한 화합을 이루고 교감하며 살 수 있다고 하셨다. 현재와 같은 종교적 형식이나 의례는 필요 없게 되며, 우리의 일상생활과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하고 보다 가깝게 느끼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결정적인 말씀이다. 특히, 통일교인에게는 단지 아는 것만이 아니라 실천해야만 하는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자녀들의 숙제를 돌봐 주거나, 심지어 어린 자녀들에게 소변 가리는 훈련을 시키면서도 그것을 진지하고 진정한 '종교적이며 영적인 훈련' 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가족과 더불어 좋은 영화 한 편을 보러 간다면 그것을 '종교적 수련'이 되도록 해야 한다. 건전한 상호관계를 통해 배우자와의 관계를 깊이 할 때에도 그것을 '신앙적 수련' 이 되도록 전환시켜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 매 순간순간은 신선하며 새로운 경험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그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일 등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각각의 순간과 하루는 독특하고 귀중하며 새로운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단지 지적이며 지각적(知覺的)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끼고 사는 방법에 대한 전체적인 변형을 요구한다. 이것이 우리가 심신통일 훈련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녀들과 배우자와 같이하는 것을 종교적 훈련이라고 보는 시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진정으로 신성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우리 속에 내재한 타락성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배워야 하고, 지금 바로 이 순간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황홀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자각은 스스로의 심신통일, 몸 마음의 전환을 통해 우선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심신통일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유지시키는 한순간의 호흡이 주는 신성함과 심오함을 경험할 수 있다. 너무도 간단하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하늘이 주신 선물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함을 키울 수 있다. 이와 같이 심오한 종교적 경지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단지 '종교적인 것'으로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하늘이 베푸시는 얼마나 크고 위대한 축복이며 선물인가를 골수에까지 사무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먼저 개인적 차원에서 몸과 마음의 통일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은 개인들이 모여 부부를 이루고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적 수양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강조함 없이 가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참된 가정' 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감에 있어서 개인의 적절한 정신적 훈련 없이 그저 '참된 가정' 이라는 틀에 끼워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화가 나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곤 하는데, 실제로 이것은 스스로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 “네가 잘못된 아이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화를 내는 거야” 라고 말할지 모르나,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조절력 부족을 정당화시키거나 그 위에 가면을 씌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참된 가정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들이 행복하게 보이거나 어떤 의문점도 제시하지 못하도록 강압하려 한다. 가정 내에서도 다른 식구들에게 불화나 불만족의 원인을 돌리기도 하는데, 이러한 예는 끝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보는 모든 문제점은 보다 근본적인 단위이며 가정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을 간과함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통일사상과 다른 여타 종교간에 가장 크게 구별되는 특징의 하나로 가정의 중요성을 들고 있다. 이것이 부분적으로 옳다고 해도, 보다 주요한 통일사상의 전통인 개인완성, 심신통일에 대한 필요성 또는 8단계의 완성(개인, 가정, 종족, 사회, 국가, 세계, 하나님)을 구성하는 첫 단계가 개인임을 잊고 있는 것이다.


즉, 나의 요점은 간단하다. 개인적인 단계에서 먼저 스스로에 대한 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참된 가정'은 만들 수도 없고 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가정의 구성원들이 모두 권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다른 식구들에게 심판의 화살을 쏘거나 또는 쉽게 분노하고 난폭하게 된다면 '참된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마음과 몸을 통일하고 분노와 미움과 원한을 누그러뜨리며 감사함과 더불어 내면의 조화와 기쁨을 키운다면 보다 건강하고 축복된 결혼생활과 가정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지 않겠는가!


솔직히 우리 자신을 돌아다보면, 가정 내에서 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배우자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말만 듣도록 강요하거나, 스스로 내적인 '고통의 장(場)'에 살면서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향한 분노를 키우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잘못된 범죄를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해질 무렵 바닷 가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더불어 춤을 추고 있는 한 남자의 이미지와 같이, 가공된 '행복한 가정' 의 모습이 아닐진대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꿈꾸듯 몽롱한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일이다. 앞에서 묘사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가끔은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은 분명하다. 해변에서 영원히 춤을 추어야 한다면 그것만큼 괴로운 것은 없으리라. 특히 밤이 되어 지치고 추위에 떠는 아이들이 집에 가자고 조르며 울어댈 때면....


통계적으로 볼 때, 폭력은 가족 구성원들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히 일어나곤 한다. 역사적으로도 가족간의 반목과 형제간의 경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가!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공포 중의 하나는 자녀가 부모를,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가정이 불협화음과 부조화의 주요 현장이 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가정이 하나님에게 있어 중요한 만큼 사탄에게도 표적이 되어 왔으며,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사탄이 더 많은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다. 이 책은 수련에 관한 이론적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심신 수련을 실제적이며 체계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훈련을 제시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건전하고 튼튼한 가정을 만드는 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전문 영역(그렇게 불릴 수 있다면)은 부모로서의 역할보다는 몸 마음 통일을 위한 수련에 있다고 하겠다. 큰 아이가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아 우리 부부는 여러분이 이미 경험하였을지 모르는 자녀 교육에 대한 심각한 어려움을 아직은 느끼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적어도 어떤 부분)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득을 주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여러분 개개인의 삶과 가정적 상황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여러분은 아직 미혼일 수도 있고, 몇 명의 자녀를 지닌 중년의 나이일 수도 있고, 또는 축복이 잘못된 경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잘못된 일을 바르게 고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란 항상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삶이 완전히 헝클어져 있다면 그것을 다시 소생시키고 다듬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숨을 쉬고 있으며, 우리의 인생을 보다 풍요롭고 깊게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숨을 쉬고 있는 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천화당(천국 조화의 집)을 만들 수 있다.


나 자신의 생활을 볼 때, 아빠와 남편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엄격한 영적 수련을 해 나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통일교인적'인 생각이요 노력이라고 믿고 있다. 많은 통일신도들이 영적인 훈련을 추구하는 동시에 더 나은 부모와 배우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해 왔다. 개인적인 단계에서 영적인 훈련을 한다면, 우리 자녀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을 어떻 게 영적인 수련과 실습의 연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 배우게 될 것이다. (영적이요 종교적인 훈련의 정의를 어떻게 확대 해석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1) 개인적 차원의 심신통일, 2) 부부 차원의 통일, 3) 가정적 차원의 통일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참부모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개인완성과 참된 가정을 이루는 것보더 훨씬 더 많은 것, 예를 들면 사회 속에서 일하고 참된 국가를 건설하는 등 보다 큰 일을 기대하고 계심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가장 기본적인 일들, 여기에서는 개인적 통일과 참가정을 이루는 것이 세계 평화 등 보다 큰 목적을 이루는 데 도약점이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세계 평화를 이루는 것과 개인의 마음과 몸의 통일, 축복결혼, 가정 안에서 '천화당(천국의 집)’을 건설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겪고 계신 고통의 세계, 그리고 그 구성원인 각 개인이 지닌 고통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변화 없이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는 것, 자신은 바뀌지 않으면서 가정을 새로 만들려는 것, 개인적인 개혁 없이 사회를 개혁하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개혁은 가장 기본적인 단계, 즉 한 남자와 여자가 각각의 마음과 몸을 하나 만든 후 남편과 아내가 되어서 건강하고 튼튼한 '참된 가정'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천화당'을 만듦으로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