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와 딸기 - 넷째 이야기
위하여 살기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의 핵심적 가르침은 위하여 살라 그리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라에 다름 아니다. 이것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현실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 관습적인 견해로는 자아가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구체화됨으로써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와 분리된 것들(구름, 나무, 산 등), 그리고 우리 내부에 있는 것 등과 연결된 분명하고 독특한 실제이며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의 참되고 절대적인 자아와도 똑같이 분리되어 있는지 모른다. 현실의 습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생각, 감정, 가설 등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면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관점은 무엇인가? 단순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계를 해석하거나 재해석하는 의식의 인습적인 양식인가?
다음의 문구를 경청해보라. 위하여 살라. 그리고 당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라. 들었는가? 좀더 가까이 들어보라. 위하여 살라. 그리고 당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라. 당신의 참된 자아는 지금 어디 있는가? 그렇다. 다른 사람 안에 있다.
이 문구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그것이 어째서 때가 왔다는 가르침인가? 만약 이 문구가 사실이라면,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다른 사람들 속에 있으며, 반대로 다른 사람의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은 시각의 변화인 동시에 존재론적인 변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독자는 여기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 보통 우리의 참된 자아가 자신들 속에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주위의 세계와 분리시킨다. 스스로를-적어도 인식 속에서 소우주(小宇宙)인 우리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세상과 격리되어 있다-섬으로 만든다. “내 인생은 내 문제이고 네 인생은 네 문제일 뿐”이라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그것이 자아 또는 참된 자아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이 되어왔다. 여기서 180도 방향을 바꾸어보자.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돌아보자.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주위의 세상과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곧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우리 마음은 독과 미움에 의해 상처받는다-이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책임은 물론 책임의 의미 또한 명확히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이 연결되어 있으며 더 많은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 서로를 묶어주는 연관성이 있다는 것. 그러나 다만 서로를 구별하는 인습적인 생활의 베일에 쌓여 가려져 있을 뿐임을 보여준다.
먹을 것이 필요하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나가며, 고통을 느끼는 등의 자아가 가장 확실한 실재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평상적 인식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가 다른 사람 속에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소위 관습적으로 서술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아라고 불리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관습적인 인식 하에서는(또는 의식의 세계에서는) 나는 분리되어 나타난 개인으로서 분명히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절대적 실재의 차원에서는 참된 자아란 이중성과 다른 사람, 세계와의 분리성을 초월한 하나의 존재이다. 둘 다 실재하는 것이며, 각기 질적인 면에서 독특한 본질을 지닌다.
심오한 가르침인 위하여 살라 그리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라는 문구는 이런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이중성과 일체성이 같이 존재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며(나는 당신을 위해 산다. 즉 이중성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찾아가는 절대적 실재로서 존재한다. 이리하여 나와 네가 하나가 된다.
우리가 이중성을 지닌 일체를 우리의 삶 속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실재하는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로 관습적인 현실의 영역에만 있는 한 우리는 한쪽 면만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전체와 하나가 될 때, 전체는 또한 하나가 된다. 이제 의식의 인습적 현실로 돌아오면, 변화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전에는 제3세계에 있는 굶주린 아이들을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단지 안됐다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양식과 사랑과 목숨을 구걸하는 제3세계의 어린이로 생각한다. 내가 바로 그 어린이인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 실재에서 절대적 자아를 경험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인습적인 의식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필터를 갖게 되며, 그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 우리가 세계와 하나의 관계를 이룬다면, 상호작용을 함에 있어 더욱 동정적이 되며, 더이상 세상을 우리와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친밀한 관계를 지닌 것으로 보게 된다. 그리하여 고통에 찬 세상을 보게 될 때,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배고픔, 자신의 고생으로, 심지어 하나님의 고통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소유권이다. 자신이 소유한 고통에만 집중한다면 절망과 나약함만이 생길 뿐이다. 선택도 조절도 할 수 없는 고통이라 느끼면서. 그러나 다른 이들의 고통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자신과 연결된 것으로 보고 느끼기를 노력할 때,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부터 작동하는 것이며, 다른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경험하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과 다른 사람을 위해 살기를 선택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자신만을 위한 삶은 스스로를 무력하다고 느끼게 한다. 인생이 던져주는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 살기를 선택함으로써 사랑의 본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내적인 힘을 통해 자신에 대한 확신감을 얻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것을 선택했다. 이러한 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진실된 삶, 위하여 사는 삶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