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와 딸기 - 넷째 이야기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
나는 아버님께, 요즘은 숨쉬고 걷는 것 등에 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함도 느끼고 있다고, 또 덧붙여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걸을 때면, 하나님과 같이 걸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만약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분명 다시 걸을 수 있기를 열망하겠지요. 심지어 내가 당연히 걸을 수 있었을 때 감사하지 않았음을 후회하겠지요. 세상에는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병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사람들도 많구요. 숨 안 쉬고 살 수 있을까요? 몇 분도 안 돼 죽고 말 거예요.”
아버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심장 박동도 그렇지”라고 말씀하셨다. 내 기억에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 되어 대화는 간단하게 끝났던 것 같다(2002년 4월 1일 오전 5시 51분, 봄방학 기간 중 아버님과의 대화 중에서).
축복
내가 아버님과 하버드 대학에서 듣고 있는 세계종교 과목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는 도중, 아버님께서 통일교회를 뛰어넘어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을 시작하신 것이 얼마나 비범한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종교 지도자로서 아버님은 그분이 만드신 조직, 작품을 해체하신 것이다.
나는 또한 축복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아버님은 실질적인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축복이야말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축복의 방법이야말로 가장 친밀한 관계인 남편과 아내로부터 시작하여 각 개인과 그룹들 사이에 놓여 있는 종교적⋅역사적⋅윤리적⋅문화적 장벽을 치유하는 의식임을 깨달았다. 내가 “축복을 받지 않으면 다른 무엇이 각기 다른 종단의 신도들에게 공통 요인이 될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이집트의 모슬람인과 한국의 선불교 스님 사이에 공통점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둘 다 인간이라는 점이다. 둘 다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축복을 받는다. 축복을 받음으로써 그들(모든 종교의 참여자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찾을 수 없는, 단체간에 변할 수 없는 제휴의 영적인 다리를 놓는 것이다. 축복 그 자체도 세계의 종교 지도자들이 부부들에게 먼저 축복을 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성혼서약을 선언하심으로 마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세계의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적 전통을 지닌 대표자들을 불러서 초종교적 집회를 통해 그들의 신도들에게 결혼 축복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아버님의 비전은 종교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 축복은 소위 ‘사탄과 연결된 혈통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축복은 모든 참여자들로 하여금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를 통해 초월적인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고백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아버님의 비전에 의해 믿음의 우산을 함께 듦으로써 모든 참가자들을 하나로 묶고 화합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증거할 만한 역사적인 종교의 의식이다.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았다. 보통 우리는 대화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간의 교류는 대화를 통한 것이 기본이다. 이것은 부부관계의 전 기간 동안 배우자와 전화만을 통해 대화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전 생애를 통해 배우자와 대화만을 하고 산다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얼마나 불완전하며 부적절한 일인가! 그런 종류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 것 같은가?
내가 믿건대 만약 종교간의 활동이 깊고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결혼은 우정의, 이해의, 감사의 결혼관계와 같아야 할 것이다. 평화, 이해, 서로에 대한 존경 등과 같은 덕목을 말로만 할 수는 없다. 물론 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때,주고 받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 된다.
축복이란 심오한 지혜를 지니고 있는 정말 훌륭한 모델이다. 진정한 화합은 살아 있는 경험이라야 한다. 참된 감사와 사랑이 살아 숨쉬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진정한 평화의 실체가 되어야 한다. 각 순간을 남편과 아내, 백인과 흑인, 동양과 서양, 북쪽 사람과 남쪽 사람 등이 하나가 되어 살아야 한다(2002년 5월 10일 오후 5시 4분, 15분 전 거실에서 돌아온 후).
연못
연못을 주의 깊게 정신을 집중하여 보고 있노라면 전혀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편안한 눈으로 보면 광활한 푸른 하늘이 보이고, 새들이 가끔씩 지저귀며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집중하여 연못을 보게 되면 단지 표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밑의 심오한 세계를 볼 수 있다. 바위와 물고기들, 전체 생태계를 본다. 항상 집중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만약 1초라도 집중이 깨어진다면 그 밑의 세계는 사라지고 대신 영상들의 환상이 다시 살아나 나의 현실을 지배하게 된다.
그것은 내게 바로 이 순간, 이 모습, 우리의 존재 현실을 비추는 거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적절한 집중이 없이, 단지 느슨한 시선만을 가지고서는,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가 더 깊고 더 심오한 현실을 제압해버린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표면 밑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가? 불행히도 대부분 사람들은 결코 그 밑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그 표면은 우리 집과 자동차, 성공을 위한 몸부림, 애완견 등을 뚜렷하게 반사하고 있다. 우리는 불가항력으로 이런 것들(우리의 게으른 시각으로는 매일 반복되는 생활만을 볼 수 있다)이 전체 세계, 우주 또는 하나님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런데 저변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이 지루한 질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연못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수면 밑 미끌미끌한 경사진 땅, 어둡고 축축하고 추운 곳에서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는다. 물은 우리가 실제 그 속에 들어간다면 공포스러운 것이다. 물에 잠기는 순간 우리의 싸우고 날고 싶은 본능이 저절로 작동하게 된다. 전혀 다른 이질적인 환경 속에 들어감으로써 움직임은 방해받고, 숨도 쉴 수 없으며, 시력도 작동할 수 없게 된다(인간은 정보의 90%를 시각을 통해 받아들인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 우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연못의 실제의 경우이기도 하다. 삶이 불행의 그림자로 변해버린 어린아이들이 있다. 아이의 어머니가 누군가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며 목놓아 울 때, 죽음이 아이의 눈에 베일을 드리우고 있다. 배설물이 득실거리는 더러운 집, 찬 바닥에 홀로 누워서 죽음만을 기다리며 거친 기침을 토하고 있는 우리의 동료들이 있다. 먹을 것이 없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팔다리가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 야위고 가여운 아이가 한 줌의 공기를, 먹을 것을, 생명을 갈구하는 것을 지켜보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통곡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가 지속하는 안락한 생활 저변으로 얼마나 많은 세상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가!그것은 고통과 고민,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얼룩진 어둡고 차디찬 고생길이다. 우리는 공포에 움츠리며, 냉정한 외계의 세계인 연못에 있다.
그런데 공포의 진정한 실체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이다. 하나의 느낌 혹은 여러 상태와 기분이 복합된 것이다. 그러면 정말로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조절하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 자신이다. 표면 밑에 있는 세계, 우리 동료들의 현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염려하고 있는-이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행복(행복? 나중에 논의될 것이다)만을 찾도록 강요하므로-그런 세계이다.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이나 맨해튼에서 살아 있는 송장들이 걸어다니는 것을 보면서 눈을 가리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 방법인가? 영혼의 감옥에서 족쇄를 차고 있는 우리의 형제들을 외면하는 것은 또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이 세계, 우주, 하나님, 또는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는 고통에 대해 망각하는 것은 얼마나 편한 길인가 말이다.
그럼에도 한 가닥 섬광이 보인다. 이 칠흑같이 어두운 물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불꽃이 있다.우리는 자신의 두려움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것을 잘 다스려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여느 때와 같이 공포의 감정에서 도망가는 대신, 용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포용하고, 사랑하고,세상의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추진력으로 삼을 수 있다. 두려움 자체는 변형될 수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꾸준히 투영된 세상의 밑에 있는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고통스런 상태로부터 인류를 구함은 물론, 인간성을 고양시키고 하나님도 모실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세상으로부터 자유의 세상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