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대머리와 딸기 - 첫 째 이야기)

訓讀王 | 20190628211502

대머리와 딸기 - 첫 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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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거미줄로 가득 찬 다락방에 올라가는 것은 언제나 섬뜩한 일이다. 그 곳에 가기위해서는 어지간한 모험을 무릅쓸 용기가 있어야 한다. 소위 용감하다는 사람들도 끝날 것 같지 않은 나무 계단에 맞닿아 있는 천장의 음침한 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움츠리게 하고 만다. 다락문이 삐걱거린다. 순간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한다. “지금 당장 올라갈 필요는 없지. 내일 다시 한번 봐야 겠어”라고 말하며 그냥 잠자리에 들고 만다.

아침이다. 자명종 시계가 울렸으나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불평을 하고 만다. “이건 너무 이르군. 충분히 쉬지도 못했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서 이 시각에는 못 일어나겠어.” 눈을 비비면서 비틀거리며 기지개를 켤 때 진주빛의 영롱한 조각들은 한 줄기 아침 햇살에 할 일 없이 떠다니고 있다. 하품하며 비실거리는 걸음으로 양치질을 하러 간다. “닦자, 닦자, 깨끗이 닦자. 그래야 충치가 안 생기지.” 

양치질하는 친근한 소리와 입에서 풍겨나오는 민트 향기, 그 개,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거야. 이제 준비가 다 되었다. 우리는 아직 젊고 건강하고 앞날은 무궁무진하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라고 말하며 반짝이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본다. 그러나 거울 속에 보이는 것은 세상의 때로 찌들어가는 백발의 음흉한 얼굴! “저건 누구지?” 뜻밖의 침입자에 놀라며 묻는다. 우리는 믿을 수 없기에 “이 거울이 흐릿하군” 하며 더 선명히 보고자 거울을 열심히 문지른다. 심지어 얼굴을 더 세게 닦는다. 

한때 활기 넘치던 젊음과 생기발랄함은 험상궂게 늙어가는 얼굴과 말라 비틀어져 툭 튀어나온 뼈 위에 슬프게 걸려있는 늘어진 피부로 바뀌었다. 희미한 목소리를 듣는디. “너는 네 인생을 낭비하지 말았어야 했다.” 고개를 돌려보면 병원이다. 우리 모두에게 너무 익숙한 병원 냄새,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소독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나?” 그러나  침묵은 허공으로 올라가 기묘한 형태로 퍼져버리고 만다.“ 

침대에 앉아 깜박거리는 형광등 불빛의 냉랭함과 그것이 내는 윙윙거리는 잡음에 몸을 떨고 있다. 믿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후회하며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났다가는 다시 앉아 후회하고, 일어났다가는 또다시 앉아 후회하다 보니 집 꼭대기 다락이 생각났다. “저 계단을 올라갔었어야 했는데, 그냥 잠자리에 드는게 아니었는데.” 이런저런 후회를 하는 중에 다락문이 영화와도 같이 분명한 이미지가 되어 떠오른다. 

우리의 본심이 살고 있는 다락에 올라가는 것은 불행히도 첫 단계에 불과하다. 허리 아픈 것을 참고 힘겹게 올라간 대가로 우리는 어두운 구석에서 벗어나 보물상자가 놓여있는 곳으로 인도된다.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 저 큰 상자가 그것일까? 그렇다. 바로 그것, 그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들어있는 바로 그 상자 말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상자의 안쪽에서 혹은 바깥쪽에서.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아빠와의 관계에 있어서 굉장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데 인생에 더 깊은 만족과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 사회는 우리의 인식을 조정한다. 사회는 우리의 인식을 좋지 않은 먼지와 때로 물들이는데, 우리는 성장하면서 불가피하게 이것을 자신의 도덕적 타락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설득하며 감금하고 있는데, 침묵 속에 서서히 자라나 갑자기 강렬한 소리를 내는 종양과도 같다. 우리는 선과 악이라 간주되는 것을 받아들인다. 성공과 실패, 정상과 비정상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대로 받아들인다. 열거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그에 상반되는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나는 가족 중 막내 아들이었으며 가장 장난꾸러기였다. 알다시피 막내들은 대부분 사랑에 목말라하며 가능한 한 많은 관심을 받고 주의를 끌려고 한다. 여러분이 흔히 생각하는 막내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었다. 부모님께서 여행에 돌아오시면 잠시 몇 분(分)이라도 함께 있어야 마음이 채워지곤 했다. 엄마와는 이것 저것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항상 ‘너무 바쁘거나’, ‘생각할 것이 많은’ 분이었다. 나는 감히 ‘하찮은 질문’으로 아빠를 방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 ‘높았으며’ 나는 너무 ‘낮았다’ (그때는 물론 지금은 더욱더 절실히 느낀다.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분이라는 것을.) 나는 별 생각 없이 아빠에 대해 듣는 바를 인정하였으나 동시에 무관심한 아빠라고 불만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아빠와 의미있는 대화를 가지지 못했던 진정한 이유는 단순하게도 내가 그것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 대화를 시작하니까,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이 완전히 바뀌어감을 알 수 있었다. 누구보다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 부모님이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다와 같은 지혜, 사랑, 진심, 그리고 진정한 관심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 속에는 여전히 뭐라 말할까, 나를 불편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내게 말씀을 하시는 동안 가끔 트림을 하거나 가래를 뱉거나 하시는 것인데, 더욱이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양 매우 태연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건대 이러한 독특한 장면들이 아빠로부터의 깨달음을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다(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트림 냄새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아빠와 가깝게 지내면서 놀랄 만한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는데, 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무엇이 나의 머리를 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빠 엄마는 물론 가까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영원히 변화시킬 만한 이러한 통찰의 순간은 이상하게도 부모님께서 멀리 떠나 계실 때 오곤 했다. 부모님께서 안 계실 때, 내가 그리워했던 것은 훈독회 시간도, 아빠를 수행하여 따르는 많은 사람들도 아닌 사뭇 다른 무엇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아빠가 심각한 묵상을 하실 때 고개를 숙여 턱에 호두 모양을 만드시는 것이라든가 목에서 가래를 뱉어낼 때나 기침을 할 때 혀를 빼는 모습 등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한국 비디오를 보시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아무 부끄럼 없이 방귀를 뀌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한국 드라마에서 애정 어린 장면이 나올 때면 “엄마, 당신은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에요”라고 말하듯 엄마를 향해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으로 지긋한 웃음을 지으시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코속에서 (삐어져) 나와 있는 코털을 잡아 뽑으며 순간 따끔함으로 온몸을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를 향해 화를 내시는 모습도 그리웠다. 많은 식구들 앞에서 우리의 무능력함을 나무라시던 모습, 우리 모두를 집에서 내쫓아버리겠다고 윽박지르시던 모습이 그리웠다. 기뻐하실 때와 기분이 상해 계실 때, 방으로 들어가실 때의 걸음 걸이, 흥분하실 때면 손을 컵 모양으로 만들어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시는 모습 등이 그리웠다. 그리고 심지어 나에게 말씀을 주시던 중에 하시던 트림까지, 모든 모습이 그리웠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좀더 심오한 어떤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자유요, 해방에 관한 것이었다.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어떤 모든 경험,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 다른 사람을 완전히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인정하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든 ‘좋은 것’과 모든 ‘나쁜 것’이 궁극적으로는 인생을, 즉 삶을 만드는 것이다.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 삶 자체를 만드는 것은 감정⋅생각⋅정서⋅의지⋅시련⋅변화⋅자취⋅고난⋅노력⋅경험⋅슬픔⋅행복⋅분노⋅만족⋅침체⋅동정⋅용서⋅고통⋅사랑⋅기쁨 등의 범위 내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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