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와 딸기 - 셋째 이야기
종교를 공부하면서
하버드로 전학한 이후 나는 진지하게 철학, 종교, 심리학, 과학 등의 분야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모든 신앙에서 보이는 하나님, 타다가타가바, 알라, 니빠나,도(道), 심지어 과학 분야의 양자에 이르기까지-에 대해 더 큰 깊이와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우주적 에너지에 대한 믿음이건, 편재하신 하나님이건, 또는 모든 선함에 대한 믿음이건 상관없이,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존재와 그 실존을 나타내는 여러 다른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독특한 것과 같이 하나의 존재도 역시 특별한 차원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차별과 분리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하나의 존재를 각기 하나님, 절대적인 공(空), 알라, 더 높은 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각기 다른 그룹과 파(派)를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느 줄의 한쪽에, 다른 사람을 다른 한쪽에 놓아서는 안 된다. 사실, 줄 자체가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적이 아니다.
한번은 어느 기독교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하나님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성부⋅성자⋅성신으로 계십니다.”
“네, 그렇지요. 그러나 좀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사람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말로써는 설명과 표현을 하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나는 또 50년간 수도를 하고 있는 불교 스님에게로 가서 물었다.
“절대적 공(空)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그것은 기쁨의 빛이며 깨달음의 기운과도 같습니다.”
“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으며 표현을 넘어서 있습니다.”
각각의 신학으로 말하자면 여러 종교들간에 차이가,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정반대의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한 특정 기간을 차지하고 있었던 종교와 그 종교의 본질인 진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현실에서 종교는 어느 시기에 발생되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증언하는 진리는 특정 시간의 개념이 없다. 늘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모든 주요 종교의 전통은 사람을 좀더 깊고 더 사랑하도록, 더 인간적이 되도록 하는 데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각 종교가 지닌 성격은 이 지구상의 개개인이 독특한 것과 마찬가지로 독특하며 특별하다. 하나님을 반어법 또는 직설법으로 표현하든지에 상관없이(긍정적 방법 또는 부정적 방법-이것 저것이다라는 긍정적 용어를 사용하거나 이것 저것이 아니다라는 부정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 모든 종교적 전통은 명료하게 신의 초월성을 가르치고 있다. 종교마다 다양한 전통이 있으나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며 이해하라는 등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주제와 변형의 문제이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삶, 육신생활의 소중함, 사후(死後) 세계에 대한 인정, 보다 인내하고 정직하게 회개하며 동정하는 삶 등은 모든 주요 종교에서 강조하는 근본적인 주제이다. 신학이나 신화, 설화 그리고 종교의식에 있어서는 다양한 변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을 떠받치고 있는 근본 주제는 각 종교 신도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며 서로 돕는 삶을 영위하도록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문화간⋅종교간에 이해와 관용을 이끌 수 있는 큰 희망이다. 종교간의 대화를 통해 평화의 한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러나 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드시 통일, 화합의 실체가 되어야 한다.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함께 경험하고, 수행하며, 서로의 진심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물론 우리가 불가피하게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종교적 성향을 잘 알고 공통의 형제애라는 심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존중하는 일이다. 이것은 자신이 지닌 도덕적 전통의 가치를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다른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 분열보다는 화합의 한 점을 찾아낼 것을 결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 세계에서는 이념간의 분열이 지구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켜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북아일랜드에서는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죽이고 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인과 이슬람인 그리고 기독교인이 서로를 살해하며, 인도에서는 힌두교인과 이슬람 신도 간에 싸움과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 되며,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충분한 것이 아니다. 저변에 깔린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들이 종교적 갈등을 깊게 하는 것이다. 종교적 광신자들이 종교로 하여금 살인과 그 밖의 일들을 정당화시켜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동전의 한 면에 불과할 뿐이다. 종교적인 가르침이 얼마나 많은 살육과 죽음을 단념케 하였으며 피하게 하였는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부터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보면서 네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내 생각으로는 종교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같이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종교야말로 이 세계가 실질적인 평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서로를 사랑하고 보살피며 동정하고 인내와 용서를 배우는 것은 종교의 핵심적 가르침 안에서 가능하다. 종교적인 핵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사랑하게 하고, 인간적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살인하고 강간하고 도둑질하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옥일 것이다.
아버님께서 종종 말씀하시길,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종교가 필요없다고 하신다. 나는 이것이 아버님이 단순히 종교적 전통을 파괴하고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공산주의의 폐악을 되풀이하는 것이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각자 다른 종교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서 차이점보다는 더 많은 유사점들을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 있는 선함(본심)을 근본적으로 인정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교파주의적 사고를 뛰어넘어서 공통된 인간으로의 형제애를 느낄 것을 요구하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양자 에너지의 집합체로서 묶여 있는 영광된 존재이며, 희망과 꿈을 가지고 있고, 인생에 있어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 하고, 어려움을 경험하며, 실수도 하고, 별을 연구하며, 마음에 평화를 갈구하는, 그리고 하나의 존재와 일체가 되고자 하는 그런 모습들이다.
당신을 가깝게 잘 아는 사람들은 당신의 작은 불완전함을 알고 있다. 머리를 긁는 버릇이라거나,춤추는 스타일 등등. 이러한 것들이 당신이 멀리 있을 때에 우리로 하여금 즐거움의 눈물을 흘리며 웃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어떤 두려움이나 심판, 또는 조롱함 없이 완전히 알 수 있다면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위로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주저함도 없이-왜냐하면 우리를 완전히 신뢰하므로-얼마나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했던가를 추억할 수 있다.이렇게 자유로움을 주는 신뢰가 바로 종교들을 화합하는 데 필요한 것이며, 각자의 이념적 위치를 초월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나는 신앙의 체계가 서로 같은 믿음-자신보다 위대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교류함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달에 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했다. 우리는 더 오래 살 것이라고, 행복을 가질 수 있다고, 영원하고 참된 평화와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만약에 믿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러한 목표도 이룰 수 있거나 성취함에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믿음, 인생이랄까, 혹은 심지어 피할 수 없는 슬픔이나 고통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일상적 갈등에 대해 일종의 해독제가 되지 않을까?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듯이, 나는 삶 속에서 우여곡절을 경험했다. 그 경험과 묵상을 통해서 얻은 소견을 일기에 적어놓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인생이란 한 번의 윙크에 지나지 않는다. 한순간에 지나가 버린다. 주의를 기울일 때만이 우리의 인생은 의미롭게 된다. 저 윙크가 주는 무한한 영광의 햇빛을 쬐어라. 다양한 각도를 통해서 보아라. 윙크를 느끼며 그것과 하나가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많은 윙크가 그러하듯이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소위 인생이라 불리는 이것은 매우 귀하고 풍성하다. 그것은 영원 속의 한순간과도 같으며, 광대한 시간의 흐름에 희미한 불빛과도 같으나, 말할 수 없이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순간은 곧 영원한 순간이다. 그것은 영원 자체보다도 훨씬 귀한 영원 전체를 함축한 순간인데, 그 이유는 당신이 그 순간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무한한 감사를 느끼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깨달음은 역설적이게도 나에게 인생에 대해 더 큰 감사를 느끼도록 해준다. 내가 하는 “안녕히 가세요” 또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더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내 아내, 아이들, 그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우리들의 실수를 더욱 의미롭게 만들어준다. 우리 부모님과 형제, 스승, 조언자, 그리고 세계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하나의 존재를 더 심오하게 느끼게 해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게 귀중한 모든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언젠가는 나를 떠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기 있는 동안 나는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풍성하게 해줄 것이다. 나는 죽을 때가 가까워져 후회하며,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써주었어야 했는데” “그 다락에 올라가서 나의 영혼을 찾았어야 했는데” “내 인생을 분노와 원한으로 낭비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살아 있을 때 더 삶다운 삶을 살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죽기 위해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살기 위해 죽는 것이다. 한순간도 낭비하지 말라. 그저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사라지게 하지 말라. 그 대신 찾으라. 모든 종류의 가방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다락으로 올라가라. 그것들을 분류하고, 새롭게 마음을 잡아라. 평화를 만들고, 행복을 찾으며, 영혼으로 하여금 영광된 사랑의 품으로 맘껏 날아가게 하라.
우리는 선택한다.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인생을 선택할 수 있다.
- 인생은 영원이라는 사막 가운데 있는 작은 모래 알갱이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 마음의 바람에 의해 그것이 날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