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와 딸기 - 셋째 이야기
탐구
나는 집에 있을 때, 성지를 오르내리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집약하여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한자(漢字)가 있다면 무엇일까 몇 달 동안 고심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의 한자, 모든 것의 기준이 되며 신성함(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될 수 있는 구심점이 될 단 하나의 한자를 찾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것이 마음 심(心, 한자로 영혼, 마음, 심정 등을 표현하는)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무엇인가가 허전했다.
아빠가 외국에서 돌아오셨을 때, 아빠에게 가장 귀하고 소중한 한자가 있다면 알려주십사 여쭈었다. 이 순간을, 그분의 가르침을, 그분의 지혜를 얼마나 갈망하여 왔던가! 나름대로는 열의를 다해 탐구하였지만, 아직도 석연치가 않았던 것이다. 주저함 없이, 그는 한 글자를 쓰셨다(내가 단 하나의 한자로 압축하여 달라고 부탁드렸으므로).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깨달음의 순간이 오고 있었다. 정성 성(誠)자를 쓰셨다. 아버님께서는, 이 글자는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후에 깨닫게 된 것이지만, 이 글자의 왼쪽은 말씀을 상징하며, 그것은 서양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이 모두 말씀(토라, 성경, 코란)을 믿고 있는 것과 상통한다. 글자의 오른쪽은 이룸을 상징하며, 동양 종교들(불교, 힌두교, 도교, 유교)이 ~이 되고자 하는 신앙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근본적으로 명상을 통한 심리학적 방법을 쓴다).
이 단 하나의 글자에, 오른쪽과 왼쪽, 동양과 서양의 전통이 어우러져 하나의 역동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정성 성(誠)! 정성이 없다면 심장은 그저 피를 보내는 근육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정성을 들이게 될 때, 하나님과 우리는 심정적으로 하나가 되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정성의 유무(有無)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히 떨어질 수도, 하나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아버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글자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는 역동하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모두가 이해하듯이 이 글자는 깨달음을 주지만, 이것은 부분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다음 이야기를 보자. 나는 하나님과 진리 등을 대표하는 글자를 찾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찾고,찾고, 또 찾아 헤맸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나는 정성 성(誠)을 통해 “만약 찾지 않는다면 못 찾을 것이요, 찾아 헤맨다 해도 못 찾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닌, ‘~을 이루는 것’의 문제인 것이다. 평화를 찾아 다니다가, 찾았다고 해도 평화는 한 발 앞선 곳에 있을 뿐이다. 항상 우리의 노력을 헛되게 하면서, 그보다는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더 이상 찾아 다닐 필요가 없어진다.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 “기쁨은 단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기쁨을 지속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평화를 찾아 다니는 것이 아니라, 평화 그 자체가 되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사랑⋅동정⋅용서⋅공감⋅이해⋅덕행⋅박애⋅인내⋅겸손⋅감사⋅친절 등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위의 것들을 찾기만 해서는 결코 이 세상에 실질적으로 실현시킬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그와 같이 이룬다면-아니 매 순간 새롭게 되고,매번 기회가 왔을 때마다 되어야 하지만-이 세상을 실질적으로 더 좋은 곳이 되도록 할 수 있다.
한국말에 정성을 들인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종종 영적 수련을 하거나, 기도, 명상, 헌신 등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이다. 왜 심신통일 수련과정에 정성들이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그것은 심신 수련이란 어떤 특정한 덕목에 대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 용서, 공감, 다른 이들을 위한 삶, 그리고 사랑의 실체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것이다.
자신을 계발하기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무술을 배웠는데 열 살 정도에 그만두었다. 그 대신 나는 스케이트 보드 타기를 즐겼는데,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여름에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무술을 시작했다. 나의 옷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청바지에서 중국식 쿵푸 유니폼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나와 동년배인 친구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보였으며 그들은 나를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생각했다.
나는 여러 사범들과 교수들로부터 지도를 받았으며, 무술의 여러 가지 다양한 기법에 거의 정통하게 되었다. 나는 열의를 다해 최고의 무술을 추구하였으며, 다른 것을, 다른 사람을 원망할 시간이 없었다. 대련할 때에는 보다 유리한 공격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비장의 몸짓과 같은 새로운 기술 배우기에 늘 굶주려 있었다. 내 전세계는 다시 시작한 소모적인 열정에 푹 빠져 있었다. 문자 그대로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소위 진급이라든가 검은 띠 또는 모든 관습적인 틀에 얽매이는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저 단지 위대한 무술가-위협을 받으면 큰 재앙을 가져올, 걸어다니는 ‘화약고’-가 되기를 원했다. 몇 시간을 계속하여 수련했으며, 시간, 속도, 힘 등에 있어 내게 적절한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내곤 했다. 내 마음은 언제나 기술을 넘어서고 있었으며, 하나하나 동작을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각도에서 자세히 연구하면서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반복하여 연습했다. 그렇게 사랑했다.이것이 진짜 사는 맛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보며 비웃었다. 그들이 먼저 시작하지 않는 한,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내게 시비를 걸었었다면 톡톡히 당했을 것이었지만, 나는 건방졌으며, 거만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안 했으며, 마약도 데이트도 하지 않았다. 왜냐는 물음을 들으면, 그저 단순하게, 내 무술 연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갓 시작했었을 때, 내 기억이 맞다면, 평점이 1.6점(4점 만점에)이었던 것이 졸업할 때는 3.33점이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이 더욱 대견해 보였으며, 성공적이고 위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내 자신의 매우 빠른 발전과 그리고 대단한 무술 수준으로의 성장을 보면서 흐뭇해했지만 동시에 자기 중심적 자아를 어마어마하게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학업의 향상은 육체적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서까지 나의 용맹함을 보이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정신적 수양을 나의 ‘자아상(像)’을 더 훌륭히, 더 인상적으로, 더 매력적으로 높이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것은 점점 다른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보다 악마적인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