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제 2부 죄와 구원
9장 하나님의 섭리역사
창시자들, 선지자들과 성인들
하나님은 종교를 세우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섭리를 경륜하신다. 종교는 새 문명 창조를 선도하면서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고양시킨다, 주요 종교는 각각 종교 창시자로부터 시작된다. 문선명 선생은 이러한 종교 창시자를 성인이라고 부르며 예수, 붓다. 공자. 무함마드를 인류의 대표적 4대 성인의 반열에 세운다.
각 창시자는 자신이 창시한 종교의 핵심진리를 선포하는 특별한 분이다. 기독교에서는 다른 종교 창시자들의 두드러진 성업이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무슬림의 신앙은 선지자의 ‘봉인’-마지막 선지자-무함마드의 메시지에 의해서 독특하게 정의된다. 확고한 신앙인은 진리의 기준이요 모범이며 참된 길을 구현하는 하나의 인격체와 마주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갈 자가 없다”(요한복음 14.6)는 선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외에는 성인이 없다”(법구경,254)는 선언이나. “무함마드는 선지자의 봉인”(꾸란 33.40)이라는 선언은 한결같이 동일한 맥락이다. 그러나 문선명 선생은 모든 종교 창시자는 한 하나님이 보낸 분이라고 가르친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진리를 한결같이 증거한다. 모든 창시자는 하나님의 일정한 섭리적인 경륜을 중심하고 각 민족과 문화를 이끌어 하나나의 왕국에 이르도록 준비한다.
그러므로 문선명 선생은 서구 전통이 아벨과 노아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과 선지자들, 그리고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섭리역사 가운데 택함 받은 분들의 명단에 붓다, 공자, 무함마드를 첨가한다.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 모두 자신들이 전통적 혈통의 상속자라고 주장한다. 유대교는 예수님 외에 위대한 랍비의 계승을 추가한다. 이슬람은 예수를 위시하여 이스마엘과 이드리스 등 소수 아랍의 선지자들 이 명단에 첨가한다. 한편, 동양에서는 힌두교가 여러시대에 걸쳐 회생하여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계 정의를 회복시킨 아바타의 계승을 인정한다. 유교는 독자적인 성인 혈통, 곧 우왕, 문왕, 무왕 등을 주장하며 주공 공자를 옛 성인의 지혜와 전통을 회생시킨 분으로 간주한다.
여기서는 성인의 공통적 특성에 대해 다룬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것, 인간과 사회를 보다 높은 이상으로 지양시키려는 열정, 국적과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전혀 차별하지 않는 보편적 성찰, 하나님과 천국, 혹은 보다 높은 존재의 힘에 대한 신앙, 그리고 무지한 사회의 박해와 배척을 감당하려는 의지 등이 여기서 성찰된다. 아래 부분에서 서구의 성서적 전통에 특히 관심을 두면서 이러한 성인과 선지자를 개별적으로 다룬다.
1. 하나님의 챔피언과 메신저
종교경전
의가 쇠하고 불의가 성할때마다 나는 나를 세상에 내어 보내리라. 선을 보호하고 악한 자를 멸하여 의를 새로이 세우고자 나는 시대마다 세상에 오느니라. 바가바드기타 4.7-8(힌두교)
실로 하나님은 그대〔무함마드〕에게 계시를 주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노아나 그 이후 예언자들에게 계시한 것과 같으며, 아브라함이나 이스마엘, 이삭,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그리고 예수, 욥, 요나, 아론, 솔로몬에게 계시한 것과 같으며, 다윗에게 시편을 내린 것과도 같으리라. 그대에게 이미 언급한 선지자들이 있고, 그대에게 언급하지 않은 선지자들이 있도다.…선지자들을 보냄은 복음을 전하고 경고하며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항해서 논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은 권능과 지혜를 가진 분이다. 꾸란 4.163-165(이슬람)
하늘 보좌의 이 새들〔현시자들〕이 모두 신의의 하늘나라로부터 내려보내지고 그들이 모두 그분의 불가항력적인 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일어나는 까닭에, 그들은 하나의 영혼으로, 같은 인격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잔으로부터 마시고, 하나의 같은 나무의 과일을 먹기 때문이다. 이들 하나님의 현시자들은 각각 이중의 지위를 지닌다. 하나는 순수한 관념과 본질적 단일성의 지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일 그들 모두를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고, 그들에게 같은 속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분조차도 “우리는 그분의 사자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밝히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기, 그리고 모두 하나님의 단일성을 알리고자 지상의 백성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구별되는 지위로서 피조물의 세계에 속하며, 그 세계의 제한을 받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현시자들은 각자 뚜렷한 개성, 일정하게 규정된 사명, 예정된 계시, 그리고 특정한 제한점을 가진다.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특별한 속성이 있으며, 일정한 사명을 수행하고, 그리고 특수한 계시를 받는다. 키타브 이 이칸, 152, 176(바하이교)
세속적인 일에 폐를 입지 않고, 사물을 장식하지 않으며, 남을 가혹하게 하지 않게 하고, 여러사람들에게 거스르지 않으며, 천하가 평화롭고 안전하게 되어서 백성이 잘 살 수 있고 남도 나와 함께 먹고 입는 것이 모두 풍족하기를 바라며,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데, 옛날의 도술에는 이러한 경향이 있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말하며) 그들은 이것을 마음의 관대한 행위(心之術)라고 이름 붙였다. 서로 친하게 다 같이 기쁨을 누림으로써 이것으로 온 나라를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정욕을 절제하려는 이상(조화의 마음)의 실현을 중심사상으로 삼았다. 남에게서 모욕을 받아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백성들 사이의 싸움을 멈추게 하며, 공격을 금지하고 무기를 없앰으로써 세상의 싸움을 없애고자 했다, 이러한 주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온 천하를 돌며 위로 설득하고 아래로 가르쳤다. 비록 천하 사람들은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위와 아래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지만 억지로 설득하려 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장자 33 (도교)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다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을 두고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터이니 말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 곳에서 강해지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만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캐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히브리서 11.32-38 (기독교)
다음엔 명성 높은 사람들과 우리의 역대 선조들을 칭송하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큰 영광을 나타내시어 옛날부터 당신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셨다. 그들 중에는 왕권을 가지고 훌륭하게 다스려서 유명해진 사람도 있고 슬기로써 현명한 조언자가 된 사람도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예언자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억에 남지 않고, 마치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았던 흔적이 없으니 그 뒤를 이은 손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들의 업적은 잊히지 않았다.
집회서 44.1-10 (기독교)
말씀선집
하늘이 인간들에게 이러한 섭리의 뜻을 책임지우고 내세우게 될 때에는 중심인물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전체를 지배하여 하늘의 이념권내에 결부시키기 위하여 어떤 한 사람을 세워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 땅을 대해서 시대와 세기 혹은 역사 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찾고자 하시는가.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 전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 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한 사람을 하나님은 찾아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늘땅을 대신하여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하늘의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4.192, 1958.04.20)
예수, 석가, 공자, 그리고 무함마드 등을 역사적 성인이라 하는데, 역사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표준해서 그들의 전통을 이어받기 위한 놀음을 했기 때문에 종교를 중심삼은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이 에 태어나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들이냐? 그 사람들이 땅 위에 살면서 행복하게 그런 놀음을 하고 간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보다도, 그들 모두는 평민보다고 더 불행한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그렇게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본의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바라는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그런 세계를 향해서, 그 것을 따라 살기 위해 그런 생활을 하고 간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개인이 살더라도 하나님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개인의 인격이 어떻게 되어야 된다, 인생살이가 어떠해야 된다 하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정을 중심삼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전통으로 볼 때 가정은 이런 가정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그들은 언제나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회생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전통으로 볼 때, 개인은 이렇고 가정은 이렇고, 사회생활은 이래야 된다는 것을 언제나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95.271, 1977.12.11)
종교의 교주들은 무엇을 중심삼고 가르쳤느냐? 신을 중심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신의 사상과 뜻을 중심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자시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들이 잘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을 위주로 한 세계관, 신을 위주로 한 인생관, 신을 위주로 한 우주관을 선포하다가 간 사람들입니다. (41.329, 1971.02.18)
우주적 원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주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을 위하여 자기 자신 전체를 투입하셨습니다. 또한, 역사를 통해서 제멋대로 사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희생하여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 예언자, 성자 그리고 철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원리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진리를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름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희생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세, 공자, 석가모니, 무함마드,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님도 모두 고난을 받았으며,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박해를 받았던 성현들이었습니다. 인류를 일깨우고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분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했습니다. (234.222, 1992.08.20)
성인이란 말의 성(聖) 자에서 이것은 귀 이(耳)자예요. 이것은 입(口)이고, 이것은 왕(王)입니다. 입이 왕이고 귀가 왕이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입이 왕이고 귀가 왕인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어떤 말을 듣더라도 그걸 좋게 왕의 것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듣지만, 듣자마자 입이 ‘빠바바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일 납니다. 모든 것을 듣지만 말하는 데 있어서 왕입니다. 왕이 한마디 하면 법이 되고, 그 나라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 하면 법이 되는 것입니다. (118.44, 1982.05.02)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 성인은 국경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성인은 민족을 위해 산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종족을 위해 산 사람이 아닙니다. 국경을 초월하여 세계 인류를 위해 산 사람입니다. 내가 죽는 것은 만민을 위해서요, 억조창생의 모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초국가적이요, 초종파적이요, 초인종적인 입장에서 죽는다고 하면서 세계적인 입장에서 온 세계 인류와 인연을 맺고 죽음 길을 판 가리하고 간 사람들이 성인입니다. (38.350, 1972.01.08)
2. 선지자와 성인의 고난과 핍박
종교경전
선지자가 고향과 친척과 가족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다.
마가복음 6.4(기독교)
싸움터의 코끼리가 쏟아지는 화살들을 참아 견디듯, 나도 비난을 참아 견뎌 내리라.
법구경 320(불교)
한 율법학자가 와서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마태복음 8.19-20 (기독교)
사도가 말하였다. “주여, 저희 백성들이 이 꾸란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예언자들에게 죄인들 중의 하나를 적으로 두셨으나. 인도하고 도우시는 분은 그대 주님만으로 충분하리라. 꾸란 25.30-31 (이슬람)
나의 피난처는 어디인가?
어디로 내 발길을 돌릴까?
가족과 종족이 나를 버렸다.
내가 속했던 동네도, 나라의 악한 지배자도
내게 관심이 없구나.
그러면 오, 주여! 어떻게 내가
당신의 동정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아베스타, 야스나 46.1(조로아스터교)
그들의 선조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당신께서 계실 그 곳을 구원하실 뜻으로 특사들을 다시금 보내어 경고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사들을 조롱하였다. 그의 말이면 무조건 비웃었다. 보내신 예언자들을 놀림감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여호와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시게 하고 말았다. 역대기하 36.15-16 (기독교)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우리들의 조상이 어떤 종교를 추종하고 있었나를 알며 그 조상들의 발자국을 따라 인도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니라.
이처럼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너희 이전에는 경고자를 어떤 도시에도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이며, 부유한 자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우리들의 조상이 어떤 종교를 추종하고 있었나를 알며 그 조상들의 발자국을 따라 인도되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느니라.
경고자가 말하길 너희들의 조상에게서 발견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인도를 내가 너희에게 가져왔다고 하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내려진 것을 믿지 못하리라 하더라.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을 징벌하였노라. 보라, 거 부자들에 대한 징벌이 무엇인가를.
꾸란 43.22-25 (이슬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사도행전 7.51-52 (기독교)
말씀선집
인간세계에서 높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높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높이 서서 전체를 보고 그것을 등급으로 만들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들이 추구하고 바라고 존경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높고 큰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미국을 위해서 살겠다는 위대한 미국인과 세계를 위해서 살겠다는 위대한 세계인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더 위대하겠느냐? 위대한 세계인입니다. 같이 살고 같은 생활을 하더라도 높고 더 큰 것을 위하고 더 큰 것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이 위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4대 성인을 역사적으로 모시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라든가 석가모니라든가 공자라든가, 혹은 무함마드라든가 있는데, 그들에게 집이 있었습니까? r들에게 좋은 집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동네를 갖고 살아 봤습니까? 가는 곳곳마다 욕먹고, 죽이려고 하니,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무엇이 위대합니까?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들도 깃들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사람입니까? 공자님은 이웃집 개라고 했습니다. 얻어먹고 다니니 말입니다. 또, 석가세존은 그때 왕의 아들로서 나라도 있고 집도 있고 모든 것이 있었지만 그걸 다 싫어했습니다. 그걸 다 버리고 나와서 산중수도 한 것입니다.
산에 가서 은둔생활을 시작한 거기서부터 석가모니의 출발이 벌어진 것입니다. 집도 없고 나라도 없고 죽어간 그 사람들을 지금에 와서 왜 추앙하느냐?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왜 자랑스럽게 생각하느냐? 그들의 위대한 정의가 과거나 지금이나 다르겠습니까? 또, 미래에 달라지겠습니까? 안 달라집니다. (115.14-16, 1981.10.25)
이 땅에 선지자들이 와서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세상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세상을 따라가지 말라고 막은 것입니다. 나라에서부터 못 간다는 것입니다. 들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부가 ‘ 이게 뭐 이래?’ 이러면서 차 버리고, 별의별 핍박을 다 받고, 사람 취급도 못 받고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세상의 낙오자들…. 세상 사람들이 밀치고 다 도망가니 선지자들은 할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따라가는 가운데서도 세상의 낙오자들, 병신들, 상처 입은 사람들, 세상이 싫다는 이런 사람들을 중심삼고 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그러고 있소?’, 나는 예언자인데, 저들에게 반대 받았기 때문에 이런다‘고 하면서 새로운 인연을, 인간 낙오자들을 중심삼고 새로운 인연을 짓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가 있는 것이다. 낙심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하면서 낙망자를 중심삼고 새로운 희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 다 지나고 못난 사람 다 지나간 다음에 병자, 쓰레기통 같은 사람들이 결국 ‘아이고, 새로운 세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이랬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잘낫다는 어머니 아버지, 잘났다는 아들딸을 가진, 그런 가정을 가진 사람은 없고 사탄에게 갈기갈기, 아빠도 엄마도 혹은 아들도 딸도 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만 있는데, 이 사람들이 이 세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런 말들을 듣고, 거기서부터 인연이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106.176-177, 1979.12.30)
그 시대의 성인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인간들이 가야 할 참된 길을 가르쳤습니다. 성인은 그 시대의 백성들을 위해서 앞으로 올 세계를 가르쳤지만, 무지한 백성들은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너무나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시대의 주권자들은 성인을 잡아 죽이고 핍박하고 몰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성인이 나라를 팔아먹고 나라를 망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를 혼란 가운데 건져내어 미래에 소망의 나라로 만들거나, 어느 나라보다도 고귀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생각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받들지 못하고 쫓아내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인은 만민이 가야 할 길에 대한 도리를 갖췄기 때문에 세계 사람들은 그 도리를 점점 받아들여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나온 것입니다. (39.256, 1971.01.05)
3. 종교 창시자의 전통 고수
종교경전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복음 5.17-18
나〔크리슈나〕는 이 불명의 요가를 비바스바트에게 일러 주었노라, 비바스바트는 마누에게 전해 주었고, 마누는 그것을 익슈바쿠에게 가르쳤노라. 이와 같이 아르쥬나여! 수승한 현자들이 끊임없는 전통 속에서 요가의 지혜를 전해 받았느니라.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요가는 세상에서 망실되었노라. 이 가르침의 비의는 실로 심원하나니, 내가 오늘 바로 그 태고의 요가를 그대에게 말해 주었노라. 왜냐 하면 그대는 나의 친구요 나를 신애하는 자이기 때문이니라.
바가바드기타 4.1-3 (힌두교)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그것을 여호수아에게 인계해 주었다. 여호수아는 율법을 장로들에게, 그리고 장로들은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은 회당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미슈나,아보스 1.1 (유대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해져 오는 것을 기술했을 뿐 짓지 않았으며, 옛 것을 믿고 좋아했다.” 논어 7.1 (유교)
성서에 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그는 진실한 예언자였다. 그가 그의 아버지께 말하였다. “아버지여! 왜 듣지도 보지도 못하며 당신께 효용도 없는 것을 숭배하고 있습니까?”…
그가 그들과 그들이 숭배하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버리고 떠났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삭과 야곱을 주어 그들로 하여 예언자가 되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진실을 말하는 참된 명성을 주었도다.
성서에 있는 모세의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그는 선택받은 예언자이며 선지자였도다. 하나님은 산우편에서 그를 불러 신뢰하기 위해, 하나님 가까이 두셨다. 또한 하나님은 은총을 베풀어 그의 형 아론을 예언자로 삼으셨다.
성서에 있는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그는 약속을 지키는 충실한 자로 예언자이며 선지자였느니라.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 예배를 드리고 자선금을 바치도록 요구하였으니, 주님께서는 그로 인하여 기뻐하셨느니라.
성서에 있는 이드리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그는 진실한 예언자이었느니라.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를 높은 곳으로 올렸느니라.
이들이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푼 예언자들이도다. 그 중에는 노아와 함께 방주에 오른 자가 있었고,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자손이 있었으며, 또한 그 중에는 하나님이 옳은 길로 인도하고 선택한 자가 있노라.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징표가 그들에게 낭송될 때, 그들은 부복하고 경배하여 눈물을 흘렸노라!
꾸란 19.41-58 (이슬람)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성왕․ 주공은 예를 가지고 정치를 성공시켰다. 이들 여섯 명의 군사들 중에는 예를 성실하게 지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예를 밝혀서 의를 얻게 했고, 예를 실천하여 신의가 행해지게 했고, 예를 기준으로 하고 죄를 따졌고, 어진 사람을 표창하고, 다투는 사람에게는 양보하도록 타일렀으며, 백성들에게 오상의 덕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만약 임금으로서 이상과 같은 예를 따르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의 부나 권세를 상실하게 되고, 대중에게 재앙의 존재로 배척받는다. 예기 7.1.2 (유교)
일찍이 헤아릴 수 없는 부처 따라
온갖 도를 구족하게 닦았으니,
심오하고 미묘한 법은
알기도 어렵고 행하기도 어렵도다.
한량없는 억만 겁에
그 도를 모두 닦고 행하여
도량에서 정각을 이루어
내 이미 그 모두를 다 알고 보았노라.
법화경 2 (불교)
말씀선집
우리는 역대의 신앙 선조들이 세운 전통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늘의 혈통을 존중해야 합니다. 노아 할아버지가 120년 동안 하늘을 위하여 충성한 그 정신,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방의 황무지를 돌아다니던 그 정신, 야곱이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급으로 들어가던 그 정신,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의 땅 애급을 버리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을 향하여 총진군하던 그 정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여 새롱누 가나안복지, 새로운 에덴복지를 향하여 달리려던 그 정신은 어디로 갔습니까? 여러분은 전통을 통하여 이러한 정신을 계승해야 되겠습니다.
(8.25, 1959.10.25)
공자님이 나와 가지고 시대를 거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것을 무시하고 역사에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했느냐 하면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전에 있었던 그런 류의 사상을 단지 체계화시키고 일반화시켰을 뿐입니다. (25.93, 1969.09.30)
후손들은 위인이나 성인을 왜 추모해야 되느냐? 그들의 마음속에는 공들인 역사적인 모든 사연이 얽혀 있고, 선의 사연과 곡절이 그 속에 엉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그러한 터전을 통하여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향하는 길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비록 타락의 후손들일망정 인심은 천심과 통하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성인을 추모하고 성인이 걸었던 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요, 자연적인 것입니다. (17.268, 1967.02.15)
부활섭리역사에서 그 사명적인 책임을 맡았던 인물들이 비록 그 자신들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늘 뜻을 위하여 충성을 다 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타락인간이 하나님과 심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터전을 넓혀왔던 것이다. 따라서 후대의 인간들은 역사가 흐를수록 그 이전의 선지선열들이 쌓아 올린 심정적인 기대로 말미암아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더 받게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부활론 2.1)
‘나’라는 개성체는 어디까지나 복귀섭리역사의 소산이다. 따라서 ‘나’는 이 역사가 요구하는 목적을 이루어야 할 ‘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역사의 뜻 가운데 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복귀섭리역사가 오랜 기간을 두고 종적으로 요구하여 나오고 있는 탕감조건들을, ‘나’자신을 중심하고 횡적으로 찾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나’는 복귀섭리역사가 바라는 결실체로서 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역사노정에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위햐여 부름 받았던 선지선열들이 이루지 못한 시대적인 사명들을 이제 ‘나’를 중심하고 일대의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수한 개체가 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인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지선열들을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과 그들을 부르셨던 하나님의 근본 뜻, 그리고 그들에게 맡겨졌던 섭리적인 사명들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상세히 알아야 한다. (원리강론, 후편, 서론 3)
역사시대에 있어서 탕감의 사명을 짊어졌던 선조들의 기백을 상속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이 시대에 당신이 칭찬하고 자랑하실 수 있는 아들의 모습, 딸의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하셨습니까? 아버지, 당신은 내적으로 약속하시고 축복하시며 명령하셨지만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저희 선조들은 번번이 당신의 마음에 못을 박고, 아버지를 고독의 자리로 추방시킨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알게 될 때, 저희들이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인연은 기쁜 일이오나, 사명적인 면에 있어서는 슬픈 내용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선조들이 걸어간 복귀의 한스러운 길을 더듬어 볼 적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30.39, 1970.03.15)
노아
노아는 성서에 나타난 첫 번째 믿음의 조상이다. 홍수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믿으면서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어느 누구에 비견할 수 없는 탁월한 믿음을 보여준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아내나 가족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 노아의 놀라운 신앙을 무척 강조한다. 머지않아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아는 노아가 일반사람들에의 연민을 가진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리를 조롱하고 박해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방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노아의 홍수심판은 아주 오래된 역사적 기록으로 소급된다. 여러 변형이 있는 노아의 홍수심판은 고대 수메르와 바빌론 때까지 약 5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약 7500년 전 흑해지역에 대규모 홍수가 나서 전 문명을 휩쓸었다는 인류학적 증거로 보아 노아의 홍수 심판설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믿는다.
성서의 노아 이야기는 노아의 아들 함의 실수로 끝난다. 문선명 선생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후퇴시킨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한다. 항상 역사를 가정의 관점에서 다루는 문선명 선생은 함의 실수가 노아가정의 일치를 좌저시켰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치명상을 노정하였다고 밝힌다.
1. 노아 홍수
종교경전
여호와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한느 것을 보시고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지어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버리리라.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당 위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없애버리리라. 공연히 만들었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은 이제 막판에 이르렀다. 땅 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저것들을 땅에서 다 쓸어버리기로 하였다. 너는 전나무로 배 한 척을 만들어라. 배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그 배는 이렇게 만들도록 하여라. 길이는 삼백 자, 너비는 오십자, 높이는 삼십 자로 하고, 또 배에 지붕을 만들어 한 자 치켜 올려 덮고 옆에는 출입문을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만들어라.”
창세기 6.5-8, 13-16 (기독교)
노아에게 계시가 내렸다. 너의 백성들 중에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 이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하는 것에 대해 슬퍼하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계시한 대로 우리의 눈앞에서 방주를 만들어라. 그리고 죄지은 자들을 위해 나를 부르지 말거라. 그들은 물에 빠져죽으리라.
그리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있었으며 그의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그의 곁을 지나갈 때마다 그를 조롱하였노라. 그가 말하기를 너희가 지금 나를 조롱하더라도 너희가 지금 조롱하는 만큼 우리가 너희를 조롱할 것이니라.
그리고 너희는 굴욕의 징벌을 받는 자가 누구이며 영원의 징벌이 누구에게 내리는지 알게 되리라.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져 땅의 샘들이 물을 품어 낼 때 하나님께서 말하기를 그 안으로 각 종류 두 마리씩 암수와, 이미 말씀을 그르친 자들을 제외 한 너희의 가족과 믿는 자들을 태워라 하였으며 그리고 소수를 제외하고는 믿으로 그와 함께 사는 자들이 없었노라.
그가 말하길, 이 안으로 타시오, 출범하는 것도 정박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관대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그것(방주)은 산과 같은 파도 속을 항해했다. 노아는 그와 떨어져있는 그의 아들에게 소리쳤다. 오! 나의 아들아 우리와 함께 타자, 불신자와 함께 있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나는 산으로 피난 가겠습니다. 그곳은 물에서 나를 지켜 줄 것입니다. 그(노아)가 말하길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자 이외에 오늘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안전할 자는 없으니라고 하였노라. 그리고 그들 사이에 파도가 몰려와 그는 익사자의 한 명이 되었노라.
꾸란 11.36-43 (이슬람)
그분은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분께서는 정의를 부르짓던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 주셨습니다.
베드로후서 2.5 (기독교)
진실로 하나님께서 노아를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어 가혹한 징벌이 그들에게 오기 전에 너희 백성들에게 경고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말하길, 오, 나의 백성들이여, 진실로 나는 너희들에게 경고자이니라.
하나님을 숭배하고 경외하며 나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정해진 기간까지 너희들에게 유예해 주시니라. 진실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이 오면 유예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들이 알았더라면.
그가 말하길 나의 주님이시여,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의 백성들에게 호소해 왔습니다.
저의 호소로 그들의 도망(진리로부터) 외에 늘어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당신께서 그들을 용서할 것이라고 호소할 때마다 그들은 손으로 귀를 막고 옷을 뒤집어쓰고 (그들의 거부에 대한) 고집을 부리고 오만한 태도를 취합니다.
꾸란 71.1-7 (이슬람)
말씀선집
하나님은 명령을 하실 때, 믿을 자리에서 믿게끔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게끔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노아에게는 120년 후에 이 세계를 심판할 테니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방주를 바닷가에나 강가에 지으라고 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저 높은 산꼭대기에다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에다 지어야 할 터인데 산꼭대기에다 지으라고 하니, 그걸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인류시조가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믿는 입장에 세우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믿는 자를 세우려니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명령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53.93, 1972.02.10)
노아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까? 노아는 산꼭대기에서 배를 지었습니다. 평지면 몰라도 산꼭대기에서 배를 지었다는 것은 상식을 넘어선, 상식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도가 넘어도 형편없이 넘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게 될 때, 정상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노아는 미친 사람에 가까운 행동을 한 것입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에 지어야지. 산에서 배를 지었으니 그것은 상식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것을 명령한 하나님은 농담으로 했겠느냐? 아닙니다. 참기 어려운 길을 생애를 바쳐서 가야 하는 것이 노아의 노정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수난 길보다 평탄한 내용을 가지고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을 바라시는 마음을 가지고 노아에게 120년 동안 수난의 길을 가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노아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긴장된 순간에 있어서 노아가 순응하는 입장을 취할 때, 노아보다 더 기뻐하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노아보다 더 슬퍼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렇듯 기븜과 슬픔을 책임질 수 있는 주인의 자리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자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48.69, 1971.09.05)
만일 여기에 오신 부인들이 노아 할아버지의 부인이었다면 그런 노아를 환영하겠습니까? 아마 그럴 수 있는 부인이 없을 성 싶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매일같이 산에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점심을 싸 줘야 되고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한 준비와 치다꺼리를 틀림없이 해야 될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못 이겨서 며칠 해줄는지 모르지만 한 달도 못 가서 문제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일 년 열두 달도 아니고, 12년도 아니고 120년간 그래야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할머니는 틀림없이 미쳤다고 할 것이며, 영감이 정신 나가도 이만저만 나간 것이 아니라고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정상적인 환경을 따라서 하늘의 뜻을 가려갈 수 있도록 명령을 못 했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이렇게탄다고 가면 하나님은 180도 반대로 가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탄세계의 사람들이 믿어 주는 것조차 싫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탄과 짝했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인정하는 것도 더러움 탄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서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원수가 있으면 그 원수가 하는 것이면 모든 것을 다 싫어 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까지도, 그러나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에서 좋다고 찬양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예 믿지 못하게끔, 아예 바라보지도 못하게끔 역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69.94-95, 1973.10.21)
노아 때를 돌이켜 보면, 1600년 동안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애달픈 심정이 복받쳤지만 참으심의 길을 걸어 나오셨습니다. 어느 한 시간, 한 순간도 잊어버릴 수 없는 인간 대한 서러움이 북받쳤기만, 그것을 다 참고 자신의 슬픔을 대신 만민 앞에 또는 만물 앞에 온전히 나타내기 위하여 노아를 택해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노아를 당시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입장에 세우셨던가, 1600년 동안 인간들이 하나님을 서러움에 사무치도록 했던 것을 노아 한 사람을 세우시어 그가 인간을 대표하여 천적인 서러움과 슬픔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 세워 놓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이나 자기를 불신하고 반대하며 조소하는 인간들 앞에 묵묵히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 120년 후에 이 땅에 심판하겠다는 하늘의 예고를 받게 되었을 때도 그는 하늘 대한 믿음의 도리를 다했던 것입니다. 그를 보고 당시의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이었던 연고로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당시의 사회가 패역하면 할수록 더욱 그 사회를 위해 염려하며 슬퍼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안일을 취하기 위해 허덕이고 있을 때 노아만은 홀로 공의의 법도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으며, 천륜을 염려하였으며, 남이 원치 않는 환경에서 슬퍼하였다는 것입니다.
(3.169-170, 1957.10.25)
2. 함의 실수
종교경전
한편, 노아는 포도원을 가꾸는 첫 농군이 되었는데,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마침 가나안의 조상, 함이 아버지가 벗은 것을 보고 밖에 나가 형과 아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집어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 노아는 술이 깨어 작은 아들이 한 일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받는 종이 되어라.”
창세기 9.20-25 (기독교)
말씀선집
40일 심판이 끝난 직후의 노아의 입장은 천지창조 후의 아담의 입장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창조된 아담과 해와가 서로 얼마나 가깝고 허물한 것이 없는 사이였으며, 또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었던가 하는 것은, 창세기 2장 25절에 그들이 서로 나체로 있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한 후에 스스로 하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나뭇잎으로 가렸었고, 도 하나님이 보실 것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었다(창3:7). 그러므로 그들이 하체를 부끄러워했던 행위는 하체로 범죄하여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정념의 표시오, 하체를 가리고 숨었던 행동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범죄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40일 심판으로 사탄을 분립한 입장에 있었던 노아는 천지창조 직후의 아담의 입장에 섰어야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나체로 있어도 그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 숨으려 하지도 않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으로써, 일찍이 죄를 짓기 전 어디로 가린 데 없이 들어낸 나체 그대로의 인간을 보시면서 기뻐하셨던 그 심정을 탕감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노아로 하여금 나체로 누워 있게 하셨다. 따랏 함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아무 부끄러움 없이 노아를 대했어야 노아와 일체불가분의 뜻 가운데서 죄짓기 전 부끄러움을 몰랐던 아담가정의 입장으로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2.2)
노아 할아버지는 혼자 외로웠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데, 절대 신앙을 가졌지만 가정이 절대 심정일체가 안 됐기 때문에 다 깨져 나간 것입니다. 함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사랑으로 일체가 되었으면 왜 그것을 부끄러워합니까? 심정이 일체 되었으면 벌거벗고 해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벌거벗고 그 옆에 가서 낮잠을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부끄러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 안 된 것입니다. 심정 일체가 안 됐다는 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 옆에 벌거벗고 같이 자고 있으면, 할아버지가 일어나서 그걸 보고는 ‘야, 이놈의 아들, 나를 닮았구나!’하고 축복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268.294, 1995.04.03)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세 가지 유일신 종교의 원류다. 아브라함은 유대임의 조상이며, 기독교에겐 믿음의 조상이며(로마서 4.1-3), 이슬람 신자에겐 메카에 카아바 신전을 세운 사람이며 이스마엘을 통해 아랍인의 조상이 된다. 아브라함은 우상장사의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첫 유일신 신앙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고향을 떠나 전혀 낯선 땅으로 갔다. 그는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 아래 그의 생애와 미래를 하나님의 손길에 맡겼다. 그는 가나안 백성들 가운데 이방인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아브라함의 연민은 위대하였으며, 특히 소돔과 고모라의 문제를 중재할 때 그것이 드러났다.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섭리를 아브라함에게 맡겼으며 구원섭리를 진행하기 위한 지상의 조건을 세우기 위해 아브라함을 동반자로 삼았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모든 행위, 모든 제사, 모든 기도는 중요성을 지닌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주저하지 않고 고향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섭리는 진전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 기록된 중요한 번제에서 비둘기를 둘로 쪼개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섭리는 후퇴하고 연장되었다. 아브라함 가정에서 사라와 하갈사이의 반목이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증오로 계속되고 있다. 아브람함은 자신의 신앙노정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희생시키라고 요구했을 때 그의 시련은 정점에 달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부분에서 다룬다.
1. 아브라함의 절대 신앙
종교 경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조카 롯도 함께 떠났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칠십오 세였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다.
창세기 12.1-5 (기독교)
하나님은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그의 지침서를 주었으니, 하나님은 그를 잘 아느니라. 그 때 그는 그의 아버지와 백성들에게 “여러분이 숭배하는 이 우상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이 때 그들이 “우리 선조들이 이미 그것을 숭배하고 있었음이오”라고 답하였다. 그가 말하였다.“여러분과 여러분의 선조들이 분명히 잘못을 저질렀음이라.”그들이 “당신이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느냐, 아니면 우리를 조롱하고 있느냐?”라고 묻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너희의 주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니, 내가 그 사실의 증인 중에 한 사람이라. 하나님께 맹세하사 나는 너희가 등을 돌리고 떠난 후 너희의 우상들에 계획을 세우리라.”
그리하여 그는 가장 큰 우상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깨뜨렸다. 아마도 그들은 그 가장 큰 우상에게 의지하게 되리라.
그들이 말하였다. “누가 우리의 신들에게 이런 짓을 했느냐? 그는 분명 사악한 자임에 틀림없도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였다. “아브라함이라는 청년이 그것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그들이 말하였다. “그들이 증언하도록, 그를 사람들이 보는 대로 데려오라.” “이 신들을 파괴한 자가 바로 아브라함 당신인가?”라고 그들이 물으니, 아브라함이 답하길, “아니오, 아마도 그 우상들의 우두머리가 그랬으리라. 그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물어보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모여 말하길, “너희가 바로 죄인이로다.”
그러자 그들은 매우 당황하여〔아브라함에게〕말하였다. “당신은 이들이 말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으리라.” 그가 말하였다. “너희는 하나님 대신에 너희들에게 유익함도 해로움도 없는 것을 숭배하고 있느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믿는 당신들이 가련할 뿐이니, 너희는 이를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이들이 말하길 “당신이 원한다면 그를 불 태워 버리고 당신들의 신들을 보호하라.”하였다.
하나님께서 “불아 식어라. 그리고 아브라함을 안전케 하라!”라고 명하였다. 그들은 그에게 음모를 꾸몄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패배자로 만들었도다. 하나님은 그와 롯을 구하고 그들을 백성들을 위해 축복이 내린 땅으로 인도하였느니라.
꾸란 21.51-71 (이슬람)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라. 아브라함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주며, 매우 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그러자 아브라함이 말씀 드렸다. “여호와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젤밖에 없는데,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식 하나도 점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내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내 집의 이 종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이렇게 여쭙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를 이을 사람은 그가 아니다. 장차 네 몸에서 날 네 친 아들이 네 대를 이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그가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
창세기 15.1-6 (기독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마치 타국에서와 같이 약속의 땅에서 거류하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10 (기독교)
말씀선집
아브라함도 아버지 데라의 집에 있어서 혁명적인 요소를 청구했습니다. 그랬지요? ‘이 아비야. 우상이 다 뭐야.’하면서 발길로 우상을 차고 그러지 않았겠어요? 집에 들어갈 적마다 ‘이건 언제 내 손에 의해서…’ 몇 십번 속으로 결의했다는 것입니다.
(151.62, 1962.10.07)
아브라함을 보세요. 우상장사의 사랑스러운 아들로서 어머니, 아버지의 슬하에서 잘 자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가지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너는 데라의 집에서 따나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고하고 내린 명령이 아닙니다. 불러서 바로 내린 벼락명령인 것입니다. 청천의 벽력같은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물쭈물하면 안 됩니다. 떠날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장 떠나야 합니다. ‘아이쿠,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하며 망설이면 안 됩니다. 출발이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발이 그릇되게 되면 천추만대의 역사에 한이 될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탄의 참소조건이 되어 지나온 모든 역사가 부정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게 때문에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나선 사람들은 명령을 받은 즉시 행동하는 것입니다. (43.270, 1971.05.0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빼내려고 하는데, 만일 아브라함의 동역자가 있어서 따라 올까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아니었겠느냐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데 일반 사람도 들을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만 듣는 것입니다. 또, 자기 부모에게 ‘어머니 아버지, 하나님이 나한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는데 그러겠소!’라고 하게 되면 미친 녀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말도 못했을 것입니다.
떠나는 데 있어서도 몇 십 리, 몇 백 리가 아닙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국경을 넘어 애급까지 왔다 갔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부모보다도, 자기 고향보다도, 자기 친척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믿고 하나님을 절대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환경을 헤치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명령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명령을 생명보다 더 중요시했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야간 도망을 했을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아브라함은 집시와 같은 행각의 노정, 정처없이 흘러가는 생활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합은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단연히 끊고 나선 사람입니다. 완전 부정을 기초로 하고 출발한 사람입니다.
(69.95-96, 1973.10.21)
아브라함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우상 장수인 그의 부친으로부터 그를 분립시켰습니다. 그는 가족, 조국, 물질적인 부, 그리고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사탄세계로부터 그를 단절시킴으로써, 그는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단련시키고,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민족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 심지어 원수를 위해서도 울 수 있게 하시면서 섭리를 발전시켰습니다.
(52.52, 1971.12.14)
하늘은 택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끌어내어 그런 자리로 보냈습니다.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몰아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하늘이 세우려던 하늘 주권의 나라가 세워질 한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늘이 축복한 아들딸들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여 악의 세상을 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면서 우리의 선조들은 고국산천을 버리고 나섰던 사실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 원수의 날, 원수의 철망 안에 사로잡혀 있으니 지긋지긋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이 여러분도 느껴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하늘 앞에 완전한 신앙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아브라함을 세운 목적은 무엇인가. 먼 거리에 있는 인간, 전직 가운데 있는 인간, 사탄세계에 있는 인간과 연락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으로 삼아, 이것을 토대로 하여 횡적으로 뻗어나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칫 잘못하면 하늘과 당의 관계가 끊어지겠으니 할 수 없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여 직계의 혈통을 통해서 움직여 나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을 때 그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었으냐. 선민이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너는 사탄세계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화합해서는 안 된다. 너는 선민이니 생활도 다르고, 네가 꿈꾸는 이상도 다르다. 너는 나를 통해서 승리의 한날을 봐야 너의 후손이 살 수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그런 관점에서 이삭을 축복해야 했고, 이삭도 그런 관점에서 야곱을 축복하여야 했으며, 야곱도 그렇게 그의 후대 앞에 축보해야 했습니다.
(7.215-216, 1959.09.13)
2.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
종교경전
“나는 이 땅르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다.” 아브라함이 “내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한 마리씩 나에게 바쳐라.” 그는 이 모든 것을 잡아다가 반으로 쪼개고 그 쪼갠 것을 짝을 맞추어 마주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만은 쪼개지 않았다. 솔개들이 그 잡아놓은 짐승들 위에 날아오면, 아브라함은 이를 쫓고 있었다. 해 질 무렵, 아브라함이 신비경에 빠져들어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똑똑히 알아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창세기 15.7-13 (기독교)
말씀선집
아브라함을 봅시다. 제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소와 양은 전부 다 쪼개고 비둘기는 안 쪼갰는데, 왜 안 쪼갰느냐 이겁니다. 한 번 더 공적으로 생각했던들…. ‘이건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요, 인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하고 한 번 더 생각했으면 비둘기도 쪼개야 된다는 걸 알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93.314, 1977.06.12)
아브라함은 쪼개야 할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에 솔개가 내렸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민족이 애급에 들어가서 400년간 고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구원섭리의 목적은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멸하고 선을 세움으로써 선주권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한 존재를 가인과 아벨로 분립한 후에 헌제해야 했던 것이나, 또 노아 때에 홍수로써 악을 치고 선을 분립했던 것 등의 목적은 모든 선주권을 복귀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물을 쪼개 바치게 함으로써, 아담이나 노아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선악 분립의 상징역사를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고 바침으로 인하여 그것은 사탄 것 그대로를 바친 것이 되어, 결국 그것은 사탄의 소유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 준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3.12)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에 상징적 제물 조건을 세워서 전환하려던 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이삭을 통해서 야곱을 통해서 3단계를 거쳐 가지고 상징, 형상, 실체적 과정을 통해서 전환시점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81.96, 1975.12.01)
3. 아브라함, 이스마엘 그리고 이슬람의 뿌리
종교경전
아브라함의 아내 가래의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마침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이집트인 몸종이 있었다.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내 몸종을 받아 주십시오, 그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이었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이집트인 몸종 하갈을 남편 아브라함에게 소실로 들여보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 십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아브람이 하갈과 한자리에 들었더니, 하갈의 몸에 태기가 있게 되었다. 하갈은 그것을 알고 안주인을 업신여기게 되었다. 그러자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호소하였다. “내가 이렇게 멸시를 받는 것은 당신 탓입니다. 나는 내 몸종을 당신 품에 안겨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몸에 태기가 있는 것을 알고는 저를 업신여깁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당신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사래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몸종인데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 사래가 하갈을 박대하자 하갈은 주인 곁을 피하여 도망치는데, 여호와의 천사가 빈들에 있는 샘터에서 하갈을 만났다. 그 샘터는 수르로 가는 길가에 있었다. 그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여호와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여호와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엇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네 울부짓음을 여호와께서 들어주셨다.”
창세기 16.1-11 (기독교)
아브라함이 말하길, 나의 주님이시여 이 도시(메카)를 평안하게 하여 주사옵고 저와 저의 아이들이 우상숭배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주님이시여, 인간 중에 실로 많은 자가 방황하나이다. 그러므로 저를 따르는 자는 실로 저와 같으며 제게 복종하지 않는 자 또한 저와 같으니, 당신께서는 실로 관대하시고 자비로우시나이다. 우리의 주님이시여, 저는 당신의 신성한 집근처 경작되지 않은 계곡에 나의 자손 일부가 살게 하였나이다. 우리의 주님이시여, 그들이 예배를 근행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을 좋아하도록 만들어 주사옵고 그들에게 과실을 제공해 주시옵소서. 아마도 그들은 감사해 할 것이나이다.
꾸란 14.35 -37 (이슬람)
말씀선집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이삭과 그의 이복형이 되는 이스마엘이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 서 가지고 가인과 아벨이 이루지 못하였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헌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입장에 이삭을 대신 세우시고 이스마엘과 이삭의 입장에는 각각 에서와 야곱을 대신 세우시어 그들로 하여금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는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한 에서와 야곱은 아담을 중심한 가인과 아벨의 입장인 동시에 노아를 중심한 셈과 함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3.2)
아브라함의 첩을 통해서 태어난 이스마엘을 중심삼고 반대적인 입장에서 가인 아벨과 같이 갈라져 나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첩인 하갈이 사라와 싸워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원래는 하나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 되었으면 하나님도 그 일을 안 했을 거라는 겁니다. 첩과 본처와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가 하갈을 쫓아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갈라진 것이 예수시대에 와서도 하나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로 말미암아 좌우는 좌우대로, 전후는 전후대로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나라로 말하면 좌익적인 나라가 생겨났고, 종교적인 면에서는 기독교와 반대적인 종교가 나와 가지고 중동세계를 인도해 나온 것입니다.
(215.253, 1991.02.20)
4. 소돔과 고모라를 위함 아브라함의 타원
종교경전
여호와께서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셨다. ‘내가 장차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아브라함은 강대한 민족이 되고 세상 민족들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복을 빌 것이 아닌가? 나는 그로 하여금 그의 자손과 그의 뒤를 이을 가문에게 옳고 바른 일을 지시하여 이 여호와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려고 그를 뽑아 세우지 않았던가? 그러니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루어주어야 하리라.’
창세기 18.17-19 (기독교)
이렇게 생각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아우성을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너무나 엄청난 죄를 짓고들 있다. 내려가서 그 하는 짓들이 모두 나에게 들려오는 저 아우성과 정말 같은 것인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그 사람들은 걸음을 옮겨 소돔 쪽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냥 여호와 앞에 서있었다.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물었다. “당신께서는 죄 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 죄 없는 사람 오십 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죄 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명만 있으면, 그 죄 없는 사람을 보아서라도 다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시 말했다.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아룁니다. 죄 없는 사람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 “저 곳에 죄 없는 사람이 사십오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사십 명밖에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여쭙자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 “사십 명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또 여쭈었다.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심십 명밖에 안 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삼십 명만 되어도 멸하지 않겠다.”하고 대답하시자 그가 또다시 여쭈었다. “죄송하오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이십 명밖에 안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이십 명만 되어도 그들을 보아서 멸하지 않겠다.”하고 대답하셨다. 아브라함이 다시 “주여, 노여워마십시오. 한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열사람밖에 안 되어도 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랗마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 고장으로 되돌아갔다. 창세기 18.20-33 (기독교)
말씀선집
소돔과 고모라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곳이었고 아브라함이 있는 곳과는 상관계도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하늘의 뜻을 알든 모르든, 그 민족이야 당하게 되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늘 앞에 섭리적인 사명감을 가져서만이 아니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낮이나 밤이나 소돔과 고모라성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내적 심정이 나타나 있는 것이 여기에 쓰인 말씀입니다.
6천년 역사의 종결 시기를 맞이한 오늘날, 여러분들이 편한 잠을 자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자신이 잘 나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알았다가는 큰일 납니다.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라도 지탱해 나가는 것은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배후에서 숨은 뿌리가 되어 피눈물 나는 호소의 재단을 쌓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성중에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가 천상에 사무쳐 하나님과 일문일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무리가 있었다면, 또 그 무리 가운데 아브라함을 알아보는 의인 몇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늘 앞에 간절히 호소하여 소돔과 고모라성이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의인이 있었다는 것을 조건삼아 하나님께 ‘공의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아버지시여, 의인과 악인을 함께 불로 심판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호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이, 자기 혼자만이 소돔 고모라를 대표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을 느꼈을 때 아브라함의 서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1.139-140, 1956.07.01)
이놈의 소돔과 고모라 같은 지옥! 이것을 손대 가지고 이것을 다 해결 못하는 날에는 지상천국은 망치는 것니다. 현재의 세계의 젊은이들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미국이 다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약의 소굴이요, 음란의 소굴이요, 모든 부패의 소굴입니다. 그걸 내 손으로 수습하려고 합니다.
(105.324, 1979.10.28)
이제는 일기책에 선생님이 나를 몇 번 푸쉬했는지 적어놓으세요, 백, 2백, 2천, 2만, 이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생님과 같은 역사가 이어질 것입니다. 선생님이 역사하는 위에 여러분의 이름이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와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일을 하면서, 많은 미국 사라들을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전을 하면 미국의 복이 되는 것이요, 미국이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못한 것을 종식시킬 수 있는 하나의 탕감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 사람들을 보고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미국은 망하더라도 이드을 보고 망하지 않게…’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의인 열 사람만 있으면 용서하겠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미국은 망해야 당연하지만 이런 이들을 중심삼고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3.200, 1979.02.25)
이삭
아브라함이 직면한 신앙의 시험 중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 아들을 묶어 제단에 올린 후 막 죽이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말렸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이 아들이 이스마엘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성서는 이 아들이 이삭이라고 밝히고 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 이삭의 신앙도 아브라함의 신앙처럼 시험을 받았다. 이삭은 앞으로 무엇이 일어날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자기 목숨을 바치더라도 아버지의 소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모범적인 아들이다.
문선명 선생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하나님의 재단에서 죽을 준비를 한 이삭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필요하다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부모의 신앙을 협조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삭의 믿음을 가진 자녀로 기르고 있는가?
종교경전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서 내가 일러 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 가지고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그 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아브라함은 종등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드리고 오겠다.” 하고 나서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예야!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여호와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 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고들 한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큰 소리로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창세기 22.1-18 (기독교)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에 노인으로 분장한 사탄을 만났다.
사탄은 “아브라함, 당신은 어디로 가시는 중입니까?”라고 물었다. 아브라함은 “나는 지금 기도하러 가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장작들과 불과 칼은 왜 가져갑니까?”
“우리는 모리아 산에서 며칠 동안 지낼 것인데 거기서 그것들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 예정입니다.”
“당신은 나이가 많고 또 당신 아내 사라가 낳은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있는데 그런데도 당신 아들을 기꺼이 제물로 바칠 작정이오?”라고 사탄이 조롱하며 물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내게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해야 하오”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번에는 사탄이 이삭에게 다가가서 “이삭아,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냐?”라고 물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러 가는 중입니다.”라고 이삭이 말했다.
“너는 죽고 나서야 그런 지혜를 배우려고 하는가? 네 아버지는 너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데.”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원하신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뜻을 따라야죠.”…
이들이 하늘 뜻을 따르러 가는 길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제가 아직 어리기에, 칼을 보고 제단에서 떨려하여 혹 아버지를 심려끼쳐드릴까 걱정됩니다. 온전한 제물을 바치고 싶지만 저로 인해 제물이 온전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창세기 랍바 56 (유대교)
하나님께서 그(아브라함)에게 훌륭한 아들에 관한 소식을 주었노라.
그(아들)가 성장하여 그와 함께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아브라함)가 말하길, 오, 나의 아들아! 너를 제물로 바치는 꿈을 꾸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아들)가 말하길 오, 아버지! 명령 받으신 대로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신은 내가 인내하는 자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둘이 복종하여 그(아브라함)가 그(아들)를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불러 오, 아브라함아! 너는 꿈에 충실하였구나.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선행ㅇ르 하는 자에게 보답하느니라. 진실로 이것은 분명한 시험이었노라.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희생으로 그를 속죄해 주었노라. 그리고 하나님은 그(그의 좋은 기억)를 후손에 남겨 놓았느니라. 아브라함에게 평화 있으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선행을 하는 자에게 보답하느니라. 참으로 그는 믿음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올바른 사람의 하나인 예언자 이삭의 소식을 전해 주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와 이삭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노라.
꾸란 37.101 -113 (이슬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을 때에 이삭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그가 그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삭에서서 너의 자손이라 불릴 자손이 태어날 것이라”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비유하건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7-19 (기독교)
아브라함은 백발이 되도록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동굴에 안장하였다. 그 동굴은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었는데, 이 밭은 마므레 동쪽에 있었다.
창세기 25.8-9 (기독교)
말씀선집
아브라함은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 백세에 만득자로 얻은 이삭까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거기에 순종했습니다. 그 명령은 역사상에 없었던 하나의 모험적인 조건이 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땅을 대신하고, 천상의 일이나 지상의 일 등 억 천만사를 좌우하는 조건이었는데 이것을 모르면서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그 명령을 받은 후 아들을 제단에 놓고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삼아 칼을 들어 찌르려 했던 아브라함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어느 누가 아브라함의 그런 신앙을 인정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제시한 이 모험적인 행동은 곧 아브라함이 하늘에 속한 몸이고 아브라함의 가족이 하늘에 속한 몸들이니, 아브라함은 물론이요, 그의 가족과 그의 모든 물질까지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 드리는 과정에서 깨닫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아들은 내가 낳았으나 당신 것이오니 당신께 드리겠나이다’ 하는 마음으로 이삭을 번제하려 했고, 현실적인 환경을 타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대 선조들의 신앙의 중심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1.265-266, 1956.12.02)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한 후,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어(창22:2), 그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 하시려는 새로운 섭리를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절대적인 그 믿음과 순종과 충성에서 나온 행동은, 벌써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하였기 때문에 이삭으로부터 사탄을 분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탄이 분리된 이삭은 벌써 하늘 편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에 대한 책망과 이삭 헌제의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울러 강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 헌제에게 성공함으로써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3.1.2
이삭 헌제 때의 그의 연령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을 뿐만 아니라(창22:6), 번제에 쓰일 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그의 부친에게 물어 봤던 것(창 22:7)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때에 이삭 자신이 그것을 협조하였으리라는 사실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뜻에 대한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이삭이, 만일 번제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부친에게 반항하였다면 하나님이 그 이삭 헌제를 받으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충성과 그에 못지않은 이삭의 충성이 합동하여 이삭 현제에 성공함으로써 사탄을 분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헌제를 중심하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첫째로 아브라함은 ‘상징헌제’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그 실수 이전의 입장으로 탕감복귀 해 가지고 그 입장에서 자기의 섭리적인 사명을 이삭에게 인계할 수 있게 되었고, 둘째로 이삭으로서는 그가 뜻 앞에 순종 굴복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늘의 사명을 이어받아, 다음에 ‘상징헌제’를 드리기 위한 믿음을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3.1.2.3)
아버지 앞에 제물로 바쳐져야 할 저희 자신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오니, 아버지께서 몰아서라도, 끌어서라도 제물의 제단까지 저희들을 이끌어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철모르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가는 아브라함에게 그 자식인 이삭이 제물로 쓰일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게 될 때, ‘그것은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던 아브라함의 마음을 살필 적마다, 그 부모의 마음을 살필 적마다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그 얼마나 슬픔이 앞설 것인가를 느끼게 되옵니다.
(48.57, 1971.09.05)
이삭
아브라함이 직면한 신앙의 시험 중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 아들을 묶어 제단에 올린 후 막 죽이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말렸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이 아들이 이스마엘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성서는 이 아들이 이삭이라고 밝히고 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 이삭의 신앙도 아브라함의 신앙처럼 시험을 받았다. 이삭은 앞으로 무엇이 일어날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자기 목숨을 바치더라도 아버지의 소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모범적인 아들이다.
문선명 선생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하나님의 재단에서 죽을 준비를 한 이삭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필요하다면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부모의 신앙을 협조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삭의 믿음을 가진 자녀로 기르고 있는가?
종교경전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서 내가 일러 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 가지고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그 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아브라함은 종등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드리고 오겠다.” 하고 나서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예야!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여호와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 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고들 한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큰 소리로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창세기 22.1-18 (기독교)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에 노인으로 분장한 사탄을 만났다.
사탄은 “아브라함, 당신은 어디로 가시는 중입니까?”라고 물었다. 아브라함은 “나는 지금 기도하러 가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장작들과 불과 칼은 왜 가져갑니까?”
“우리는 모리아 산에서 며칠 동안 지낼 것인데 거기서 그것들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 예정입니다.”
“당신은 나이가 많고 또 당신 아내 사라가 낳은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있는데 그런데도 당신 아들을 기꺼이 제물로 바칠 작정이오?”라고 사탄이 조롱하며 물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내게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해야 하오”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번에는 사탄이 이삭에게 다가가서 “이삭아,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냐?”라고 물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러 가는 중입니다.”라고 이삭이 말했다.
“너는 죽고 나서야 그런 지혜를 배우려고 하는가? 네 아버지는 너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데.”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원하신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뜻을 다라야죠.”…
이들이 하늘 뜻을 따르러 가는 길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제가 아직 어리기에, 칼을 보고 제단에서 떨려하여 혹 아버지를 심려끼쳐드릴까 걱정됩니다. 온전한 제물을 바치고 싶지만 저로 인해 제물이 온전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창세기 랍바 56 (유대교)
하나님께서 그(아브라함)에게 훌륭한 아들에 관한 소식을 주었노라.
그(아들)가 성장하여 그와 함께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아브라함)가 말하길, 오, 나의 아들아! 너를 제물로 바치는 꿈을 꾸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아들)가 말하길 오, 아버지! 명령 받으신 대로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신은 내가 인내하는 자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둘이 복종하여 그(아브라함)가 그(아들)를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불러 오, 아브라함아! 너는 꿈에 충실하였구나.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선행을 하는 자에게 보답하느니라. 진실로 이것은 분명한 시험이었노라.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희생으로 그를 속죄해 주었노라. 그리고 하나님은 그(그의 좋은 기억)를 후손에 남겨 놓았느니라. 아브라함에게 평화 있으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선행을 하는 자에게 보답하느니라. 참으로 그는 믿음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올바른 사람의 하나인 예언자 이삭의 소식을 전해 주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와 이삭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노라.
꾸란 37.101 -113 (이슬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을 때에 이삭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그가 그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삭에서서 너의 자손이라 불릴 자손이 태어날 것이라”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비유하건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7-19 (기독교)
아브라함은 백발이 되도록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동굴에 안장하였다. 그 동굴은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었는데, 이 밭은 마므레 동쪽에 있었다.
창세기 25.8-9 (기독교)
말씀선집
아브라함은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 백세에 만득자로 얻은 이삭까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거기에 순종했습니다. 그 명령은 역사상에 없었던 하나의 모험적인 조건이 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땅을 대신하고, 천상의 일이나 지상의 일 등 억 천만사를 좌우하는 조건이었는데 이것을 모르면서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그 명령을 받은 후 아들을 제단에 놓고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삼아 칼을 들어 찌르려 했던 아브라함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어느 누가 아브라함의 그런 신앙을 인정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제시한 이 모험적인 행동은 곧 아브라함이 하늘에 속한 몸이고 아브라함의 가족이 하늘에 속한 몸들이니, 아브라함은 물론이요, 그의 가족과 그의 모든 물질까지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 드리는 과정에서 깨닫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아들은 내가 낳았으나 당신 것이오니 당신께 드리겠나이다’ 하는 마음으로 이삭을 번제하려 했고, 현실적인 환경을 타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대 선조들의 신앙의 중심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1.265-266, 1956.12.02)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한 후,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어(창22:2), 그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 하시려는 새로운 섭리를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절대적인 그 믿음과 순종과 충성에서 나온 행동은, 벌써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하였기 때문에 이삭으로부터 사탄을 분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탄이 분리된 이삭은 벌써 하늘 편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에 대한 책망과 이삭 헌제의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울러 강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 헌제에게 성공함으로써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3.1.2.2)
이삭 헌제 때의 그의 연령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을 뿐만 아니라(창22:6), 번제에 쓰일 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그의 부친에게 물어 봤던 것(창 22:7)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때에 이삭 자신이 그것을 협조하였으리라는 사실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뜻에 대한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이삭이, 만일 번제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부친에게 반항하였다면 하나님이 그 이삭 헌제를 받으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충성과 그에 못지않은 이삭의 충성이 합동하여 이삭 현제에 성공함으로써 사탄을 분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헌제를 중심하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첫째로 아브라함은 ‘상징헌제’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그 실수 이전의 입장으로 탕감복귀 해 가지고 그 입장에서 자기의 섭리적인 사명을 이삭에게 인계할 수 있게 되었고, 둘째로 이삭으로서는 그가 뜻 앞에 순종 굴복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늘의 사명을 이어받아, 다음에 ‘상징헌제’를 드리기 위한 믿음을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3.1.2.3)
아버지 앞에 제물로 바쳐져야 할 저희 자신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오니, 아버지께서 몰아서라도, 끌어서라도 제물의 제단까지 저희들을 이끌어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철모르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가는 아브라함에게 그 자식인 이삭이 제물로 쓰일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게 될 때, ‘그것은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던 아브라함의 마음을 살필 적마다, 그 부모의 마음을 살필 적마다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그 얼마나 슬픔이 앞설 것인가를 느끼게 되옵니다.
(48.57, 1971.09.05)
야곱
야곱은 성서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자인 동시에 가장 많은 문제를 야기한 사람이다. 그는 영리하고 야망을 가졌지만,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았으며,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챘다. 그러나 하란에서 어려움을 겪고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그는 성숙해졌다. 이로써 그는 그에게 적대적인 형을 선물과 겸손함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곱의 인생반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야곱의 순수한 믿음과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향한 전통을 지키고 영속시키려는 열망을 각지할 수 있다.
문선명 선생은 야곱이 구약성서에서 가장 성공한 섭리적인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의 형 에서와 화해함으로써 야곱은 성서 역사에서 적을 사랑과 희생으로 굴복시킨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문선명 선생은 야곱의 행적을 하나님의 섭리-인간 타락으로 모든 것이 거꾸로 된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한 복귀과정-로 규정하신다. 이런 견해에 의하면 야곱은 섭리적인 차원에서 많은 것을 복귀한 인물이었다.
천사를 굴복시킴으로써 야곱은 천사 루시엘에게 굴복한 아담의 패배를 처음으로 복귀했으며, 그의 형 에서에게 승리함으로써 야곱은 처음으로 가인과 아벨의 실패를 복귀했다. 야곱은 문선명 선생의 모델의 역할자이며, 또한 여하한 역경을 극복하고 과거의 잘뭇을 회복해야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책임을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대부분의 섭리적인 인물에게도 모델의 역할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노력하는 사람’의 의미로써 ‘이스라엘’칭호를 그는 받을만한 인물이다.
1. 야곱과 에서의 경쟁
종교 경전
리브가가 아기를 낳지 못하였으므로 이삭은 여호와께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는데, 뱃속에 든 두 아이가 서로 싸우므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어디 살겠는가!” 하면서 여호와께 까닭을 물으러 나갔다. 여호와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두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달이 차서 몸을 풀고 보니 쌍둥이였다. 선둥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 몸이 털투성이였다. 그래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다. 후둥이는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했다. 창세기 25.21-26 (기독교)
두 아들이 자라나, 에서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질이 차분하여 천막에 머물러 살았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오는 고기에 맛을 들여 에서를 더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하였다. 하루는 에서가 허기져 들에서 돌아와 보니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에서가 야곱에게 “배고파 죽겠다. 그 붉은 죽 좀 먹자” 하였다.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고도 부르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야곱이 형에게 당장 상속권을 팔라고 제안하자 에서는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상속권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먼저 맹세부터 하라고 다그쳐 요구하였다. 에서는 맹세하고 장자의 상속권을 야곱에게 팔아넘겼다. 그리고 에서는 야곱에게서 떡과 불콩죽을 받아먹은 후에 일어나 나갔다. 이렇게 에서는 자기의 상속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창세기 25.27-34 (기독교)
이삭은 늙어 눈이 어두워졌다. 어느 날 그는 큰 아들 에서를 불렀다. “얘야!” “예, 어서 말씀하십시오,” “너도 보다시피 내가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너는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에 나가 사냥을 해다가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 주리라.”
리브가는 이삭이 아들 에서에게 하는 이 말을 엿듣고는 에서가 사냥하러 들에 나간 틈을 타서 아들 야곱에게 귀띔해 주었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사냥 해다가 별미를 만들어 오라 하시면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것을 잡수시고 에서에게 복을 빌어주겠다고 하시더구나, 그러니 야곱아!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여라. 양떼들한테 가서 쌀찐 염소 새끼 두 마리만 끌어 오너라. 내가 그것으로 아버지 구미에 맞게 잘 요리해 줄 터이니 그것을 아버지께 갖다드려라. 그러면 아버지가 잡수시고 세상을 뜨시기 전에 너에게 복을 빌어주실 것이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형 에서는 털이 많고 저는 이렇게 털이 없습니다. 아버님이 저를 만져 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아버님을 노리거나 한 것처럼 되어 복은커녕 도리어 저주를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야곱아,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 어서 가서 염소 새끼나 끌어 오너라.” 어머니의 말대로 야곱은 염소 새끼 둘을 어머니에게 끌고 왔다.
어머니는 남편 구미에 맞게 별미를 만들었다. 리브가는 집에 보관해 두었던 큰 아들 에서의 옷 가운에서 가장 좋은 것을 꺼내어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염소 새끼 가죽을 매끈한 손과 목에 감아준 다음, 장만해 놓은 별미와 구운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들려주었다. 야곱은 아버지한테 들어가 “아버지!”하고 불렀다. 아버지 이삭이 “오냐, 네가 누구냐?” 하고 묻자 야곱이 대답하였다. “저는 아버님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아버님 분부대로 요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어서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 해다가 만든 요리를 잡수시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이삭이 아들에게 물었다. “에서야!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잡아왔느냐?” “아버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짐승을 금방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삭은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서인지 만져보아야겠다.” 하면서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 가까이 온 야곱을 만져보고 이삭은 중얼거렸다. “말소리는 야곱의 소린데 손은 에서의 손이라!” 그는 야곱의 손에 형 에서의 손처럼 털이 많았으므로 야곱인 줄 모르고 그에게 복을 빌어 주기로 하였다. 이삭은 “네가 틀림없는 내 아들 에서냐?” 하고 다짐하였다. 야곱이 “예,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이삭은 “에서야! 사냥한 것을 이리 가져오너라. 내가 먹고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 주리라” 하였다. 야곱이 가져다 바치는 요리와 술을 먹고 마신 뒤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에서야. 이리 가까이 와서 나에게 입을 맞추어 다오”하였다.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삭은 야곱이 입은 옷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 복을 빌어주었다.
“아! 내 아들에게서 풍기는 냄새, 여호와께 복을 받은 들 향기로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리신 이슬로 땅이 기름져 오곡이 풍성하고 술이 넘쳐나라. 뭇 백성은 너를 섬기고 뭇 족속들은 네 앞에 엎드리리라. 너는 네 겨레의 영도자가 되어 네 동기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에서는 아버지가 야곱에게 복을 빌어준 일로 야곱을 미워하였다. 에서는 속으로 “아버지 상을 입을 날도 멀리 않았으니, 그 때 동생 야곱을 없애버리리라” 하고 마음먹었다. 리브가는 큰 아들 에서가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놓고 일렀다. “큰일 났다. 형 에서가 너를 죽이지 않고는 속이 풀리지 않을 모양이다. 그러니 야곱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곧 하란으로 몸을 피해 라반 아저씨를 찾아가거라. 네 형의 분이 풀릴 때까지 잠시 외삼촌댁에 가 있으라 ”
창세기 27.1-29, 41-44 (기독교)
말씀선집
본래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장자여야 되는 것입니다. 차자가 하나님의 뜻을 상속받게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장자의 자리에 사탄의 아들이 먼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차자의 자리에서 장자를 바꿔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상속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야곱과 에서에게 있은 일과 같은. 역사에 없는 모순된 일을 경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102.177, 1978.12.24)
하나님의 세계에는 본래부터 장자가 축복받게 돼있지 차자가 축복받게 돼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차자의 자리에서 장자권을 찾아오지 않고는 하늘나라 아들의 자리에 설 수 없을 뿐 아니라 축복 받을 수 있는 원리 기준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에…. 야곱이 지혜로운 것이 뭐냐? 형님이 사냥 갔다 온 다음에 배가 고플 것을 알고 죽과 떡을 줘 가지고 장자권을 샀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아버지가 반대하더라도 장자 권한을 찾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타락한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는 것입니다.
(131.180-181, 1984.05.01)
야곱은 ‘내가에서 형보다 몇 배 더 끈기 있고, 아버지 어머니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모든 형제들보다도 잘하게 되면 장자가 되는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를 섬기거나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형제를 사랑하고 일족을 대하는 데 있어서 에서보다 야곱이 낫다 할 때는 모든 사람은 그 형, 에서를 집어치워 버리고라도 야곱을 형님으로 하겠다고 하는 이론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걸 바라보았습니다. 야곱은 참 약은 사람입니다. 그건 뭐냐 하면 야곱은 출발과 끝을 바라보고 싸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끝을 바라보고 먼 곳을 바라보고 싸운 사람이요, 에서는 당장의 현실을 보고 싸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108.96, 1980.06.29)
그래서 형님의 장자의 기업을 떡과 팥죽을 주고 사 가지고 이것을 전부 빼앗는 놀음을 해야 되다는 것입니다. 양가죽을 팔에다 두르고 자기 아버지를 속여 가지고 축복을 받았는데, 이것이 왜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있었느냐 하는 것을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거 왜 그래야 되는냐? 하나님의 상속을 받기 위해서는, 상속을 받으려면 장자의 자리에 나가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이 본래의 창조이상의 원칙인 것입니다. 창조원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빼앗는데도 그냥 그대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형님이 동생에게 팔았습니다. 팔았던 것을 동생이 찾는 것입니다. 야곱이 나쁜 것이 아니라 에서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나쁜 것이 아니라 에서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기업을 팔다니!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대를 묶어 상속 받는 것을 야곱은 엄청나게 바랐었고 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장자의 자리, 장자의 자리에 나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한 후에 에서를 만났는데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서가 야곱을 죽이지 않고 환영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 위에 장자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는 횡적인 이스라엘권이 성립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타락세계가 어떻게 됐느냐 하면, 장자로서 타락한 세계가 태어났는데 차자인 하늘편의 야곱이 나타나서 장자의 기업을 빼앗는, 또 다른 장자가 이 땅 위에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 이스라엘은 장자권 세계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또 다른 장자와 같은 입장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두 장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유대 나라, 선민권과 사탄세계의 이 로마를 중심한 전 세계가 언제나 대결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자리에서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민권은 무엇이냐? 개인에서부터 ,가정에서부터, 전부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는 것입니다.
(102.177-178, 1978.12.24)
장자권은 복귀되고 아버지로부터의 축복은 야곱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너무나도 화가 나서 전에 가인이 그렇게 했듯이 야곱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55.112, 1972.04.01)
2. 삼촌 라반 집에서 야곱의 고역
종교경전
하루는 라반이 야곱에서 물었다. “네가 내 골육이라고 해서 내 일을 거저 해서야 되겠느냐? 품삯을 얼마나 주면 좋겠는지 말해 보아라.” 그런데 라반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큰딸은 레아요, 작은 딸은 라헬이었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지만 라헬은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뻐서 야곱은 라헬을 더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는 칠 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드릴 터이니 작은 따님 라헬을 달라고 청하였다. 라반은 “다른 사람에게 주느니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낫겠다” 하면서 같이 살자고 하였다. 그로부터 야곱은 라헬에게 장가들 생각으로 일을 했다. 칠 년이라는 세월도 며칠밖에 안 되듯 지나갔다. 그만큼 그는 라헬을 좋아했던 것이다.
마침내 야곱은 라반에게 기한이 다 찼으니 라헬을 아내로 맞아 같이 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라반은 그 고장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청해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밤이 되어 라반은 딸 레아를 야곱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야곱은 그와 한자리에 들었다. 이 때 라반은 딸 레아에게 자기의 계집종 질바를 몸종으로 주어 거느리게 하였다.
아침이 되어 야곱이 눈을 떠보니 어이없게도 그것은 레아였다. 야곱은 라반에게 항의하였다. “삼촌이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저는 라헬에게 장가들려고 삼촌 일을 해드린 것이 아닙니까? 왜 저를 속이시는 것입니까?” 라반은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딸을 큰딸보다 먼저 시집보내는 법이 없네”하며 부탁하였다. “초례 기간 한 주일만 채우면 작은 딸도 주지, 그 대신 또 칠년 동안 내 일을 해주어야 하네.” 야곱은 그 말대로 한 주일을 채웠다. 그제야 라반은 야곱에게 딸 라헬을 아내로 주었다. 라반은 딸 라헬에게 자기 계집종 빌하를 몸종으로 주어 거느리게 하였다. 야곱은 라헬과도 한자리에 들었다. 그는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하였다. 그는 또 칠 년 동안을 라반의 집에서 일해야 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내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야곱은 사람을 라헬과 레아에게 보내어 그의 양떼가 있는 들로 불러내어 의논하였다. “당신들의 아버지가 나를 보는 눈이 전과 같지 않소, 그러나 내 아버지의 하나님께서는 내 곁을 떠나신 적이 없었고, 내가 얼마나 힘을 다해서 당신들의 아버지를 섬겼는지를 당신들만은 알 것이오. 그런데 당신들의 아버지가 나에게 손해를 입히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소, 그래서 장인이 점박이를 삯으로 정해 주시면 양들이 모두 점 있는 새끼를 낳았고, 줄무늬 있는 것을 삯으로 정해 주시면 양들이 모두 줄무늬 있는 새끼를 낳았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들 아버지 가축을 거두어 나에게 주셨소. 양들이 암내를 낼 즈음에 나는 마침 꿈에, 줄무늬나 점이 있거나 얼룩얼룩한 숫염소들이 와서 교미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아.’ 하고 나를 불렀소. 내가 ‘어서 말씀하십시오’ 했더니, ‘고개를 들어 보아라. 교미하는 숫염소는 모두 줄무늬 있는 것, 점박이, 얼룩진 것들뿐이다. 나는 네가 라반에게 당한 일을 다 안다. 나는 네가 석상에 기름을 붓고 나에게 서원을 했던 베델의 하나님이다. 어서 이 땅을 떠나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셨소.”
라헬과 레아가 대답하였다. “아버지 집에서는 우리에게 돌아올 몫을 더 바랄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마치 남처럼 여겼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팔아먹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할 돈도 혼자 가로채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에게서 빼앗아주신 재산은 어디까지나 우리 것이요, 우리 자식들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십시오.”
창세기 29.15-30, 31.3-16 (기독교)
말씀선집
야곱은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샀고, 후에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하란 땅으로 가서 외삼촌 집에서 21년 동안 종처럼 일했습니다. 외삼촌은 그에게 라헬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7년 후에 야곱을 속여 레아를 주었습니다.
여러분 같았으면 대번에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무 소리 않고 또 7년을 더 일하여서 결국 라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외삼촌 라반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야곱을 속였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가장 외로운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지만,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1년 후에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모든 것을 도로 찾아서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52.64, 1971.12.22)
그러면 가족과 친척으로부터 쫓김 받고 거부당하는 입장에 선 야곱이 어떻게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가? 하늘 앞에 축복받은 축복을 잊지 않고 세상이야 변하든 어떻게 되든 나는 변할 수 없다는 하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늘이 믿어주지 않아도 나는 나의 가정이 모두 믿도록 하겠다, 또 축복의 유업을 찾아 이루어 가지고 하늘이 섭리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하는 믿음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통하여 세우려 했던 그 천륜의 뜻을 계승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21년 만에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139-140, 1958.03.30)
지금 여러분은 야곱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에게 있다’ 하는 입장에 서 가지고 부모 형제의 반대를 받고 집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부모들이 반대하고 형제들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손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어디로 가느냐? 어디로 가는냐는 것입니다. 여기가 아닙니다. 여긴 못 오는 것입니다. 야곱이 집 떠나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었어요? 하란에 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다른 곳에 가는 것입니다.
(67.123,1973.05.27)
3. 야곱과 천사의 씨름
종교경전 바로 그 날 밤, 그는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그들을 데리고 개울을 건넌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그리고 야곱은 혼자 뒤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타나 동이 트기까지 그와 씨름을 했다. 그분은 야곱을 이겨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를 다치게 되었다. 그분은 동이 밝아 오니 이제 그만 놓으라고 했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복을 빌어 주지 않으면 놓아 드릴 수 없다고 떼를 썼다. 일이 이쯤 되자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이 말을 듣고 야곱이 말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분은 “ 내 이름은 무엇 대문에 물어 보느냐?” 하고는, 야곱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야곱은 “내가 여기서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다. 그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브니엘을 떠나 때 해가 떠 올랐다.
창세기 32.24-31 (기독교)
말씀선집
천사가 왔을 때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망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느냐, 아니면 복을 주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느냐? 물으니 복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그 대답에 ‘복을 주려면 주지 왜 못 주느냐’고 하니 그것은 책임분담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냥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야곱이 씨름을 해서 이기지 않으면 복을 못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못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조건을 걸고 나섰을 때에 야곱은 ‘오냐, 좋다. 내 손가락이 빠지고 내 팔이 빠져도 결코지지 않겠다’ 고 결심하고, 칼로 쳐도 놓지 않고 목을 잘라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했겠습니까? 밤새껏 했습니다. 네가 죽기 전에는 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도 입회하고 사탄도 입회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결정을 짓는 그 마당에서 야곱은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천사가 환도뼈를 치고 다리를 꺾어 버려도 야곱은 놓지 않았습니다. 네가 죽고 내가 죽고 둘 다 죽는다 해도 못 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야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은 ‘천사가 지금 사탄을 대표해서 싸우고 있으니 굴복하지 마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으니, 얼마나 초조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채웠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지나서 최후의 결단을 짓게 되었을 때 천사가 아무리 뿌리쳐도 놓지 않으니 거기서 하나님도 공인하고 사탄도 공인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런 입장에서 서 가지고서야 천사가 공인해서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천사 앞에 승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을 때 천상 세계에서는 어찌했느냐? 졸였던 마음을 풀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마음 가운데 쌓였던 슬픔의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 하고 부르는 그 음성 속에는 2천년 동안 쌓인 사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위해 20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목을 끌어안을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이,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 인연을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20.229-230, 1968.06.09)
야곱이 하란에서 그렇게 끈기 있게 21년 동아 참는 훈련을 안 했으면 얍복강에서 졌다는 것입니다. 21년 동안 싸웠던 모든 것이 오늘 이 시간에 승패가 결정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야곱은 끈기 있게 최후까지…. 저력을 거기서 길렀다는 것입니다. 그 후 에서를 굴복시키고서야 부모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입니다.
(67.126-127, 1973.05.27)
타락이 뭐냐? 천사한테 굴복당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천사를 굴복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겨 놓으면 영적 사탄의 지배를 받는 천사장의 실체도 굴복시킬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야곱을 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씨름을 하는데 21년 한 이상의 힘을 다해서 싸운 것입니다. 21년 동안 축복받은 이상의 정력을 다해서, 히을 다해서 싸운 것입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죽더라도 나는 뜻을 이루어야 되겠다는, 몸뚱이는 희생시키더라도 뜻을 이뤄야 되겠다는 신념이 강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사탄이 축복해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무엇에게 이겼습니까? 천사입니다. 전 천사세계에게 이겼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의 야곱이 가는 길은 하나님이 원조할 뿐만이 아니라 천사세계도 여기에 굴복하고 원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이겼으니, 영적 사탄이 지배 못하게 되었으니 에서도 굴복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92.285, 1977.04.18)
그러면 천사는 왜 야곱을 축복하기 전에 그의 환도뼈를 친 것일까요? 인간의 타락행위는 몸의 그부분, 즉 환도뼈를 잘못 씀으로써 초래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죄를 범했던 부분을 침으로써 탕감은 완수되어졌던 것입니다. 즉, 구약성서에 있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라고 하는 법칙이 행해진 셈입니다. 그런 까닭에 천사는 야곱을 축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55.113, 1972.04.01)
4. 야곱과 에서의 화해
종교경전
야곱은 에돔 벨세일 지방에 있는 형 에서에게 머슴들을 앞서 보내면서 형 에서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시켰다. “이 못난 아우 야곱이 문안드립니다. 그간 라반에게 몸 붙여 살다가 보니 이렇게 늦었습니다. 지금 저는 황소와 나귀와 양떼가 생겼고 남종과 여종까지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형님께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아무쪼록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 머슴들이 다녀와서 야곱에게 고하였다. “주인님의 형님 에서께 다녀왔습니다. 에서께서는 지금 사백 명 부하를 거느리고 주인님을 만나러 오십니다.”
야곱은 덜컥 겁이 나고 걱정이 되어 일행과 양떼와 소 떼와 낙타 떼를 두 패로나누었다. 에서가 한 패에 달려들어 쳐 죽이면 나머지 한 패라도 피하게 해야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고 나서 야곱은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저에게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면 앞길을 열어 주마고 약속하신 여호와여! 당신께서 이 종에게 베푸신 한결같으신 사랑을 저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 강을 건널 때 제가 가진 것이라곤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저를 형 에서의 손에서 건져 주십시오, 에서가 와서 어미들과 자식들까지 우리 모두를 죽여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당신께서는 ‘네 앞길을 정녕 열어 주고 네 자손이 바닷가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불어나게 해주마’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날 밤 그는 거기서 묵으며 자기 소유 가운데서 형 에서에게 선물로 보낼 것을 골라내었다. 암염소 이백마리, 숫염소 이십 마리, 암양 이백 마리, 숫양 이십 마리, 젓을 빨리는 낙타 삼십 마리와 딸린 새끼들, 암소 사십 마리, 황소 십 마리, 암나귀 이십 마리, 수나귀 사십 마리. 야곱은 이것들을 따로 한 떼씩 떼어 종들의 손에 맡기며, 앞서 가되 떼와 떼사이에 거리를 두라고 일렀다. 야곱은 앞장설 종에게 이렇게 지시하였다.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너는 누구의 종이냐? 어디로 가는 중이냐? 네가 몰고 가는 이것들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이것들은 당신의 종 야곱의 것입니다. 형님 에서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야곱은 뒤에 오십니다.’”
야곱은 둘째, 셋째, 그리고 나머지 떼를 몰고 가는 자들에게도 에서를 만나면 꼭 같은 말을 하도록 일렀다. 특히 “당신의 종 야곱은 뒤에 오십니다”라는 말을 잊지 말라고 일렀다. 선물을 먼저 보내어 에서의 마음이 풀어진 다음에 만나면 행여 자기를 반겨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야곱은 선물을 먼저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을 천막에서 묵었다.
야곱이 고개를 들어 보니 마침 에서가 사백 명 부하를 거느리고 오는 것이었다. 그는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자녀들을 나누어 맡긴 다음,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자녀를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에게서 난 자녀를 다음에, 그리고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서 따라오게 하였다. 그리고 야곱은 앞장서서 걸어가다가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형에게 나갔다. 에서는 마주 뛰어 와서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자들과 아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들은 너와 어찌 되는 사람들이냐?” 야곱이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과분하게도 이 못난 당신의 종에게 주신 자식들입니다” 하고 대답하는데,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자식들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려 절했다. 또 레아와 그의 자식들도 앞으로 나와서 절하고 요셉과 라헬까지 나와서 엎드려 절했다.
에서가 물었다. “내가 오다가 만난 가축 떼들은 웬것들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형님께서 저를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아! 내 살림도 넉넉하다. 네것은 네가 가져라.” 하고 굳이 사양했지만, 야곱은 야곱대로 받아 달라고 사정하였다.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저를 아우로 여기시거든 제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형님이 저를 이렇듯이 사랑으로 맞아 주시니 형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 32.3-33.10 (기독교)
말씀선집 장자의 자리, 장자의 자리에 나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한 후, 에서를 만났는데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서가 야곱을 죽이지 않고 환영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 위에 장자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는 횡적인 이스라엘권이 성립된 것입니다.
(102.178, 1978.12.24)
그는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의 모든 종들과 재산을 형 에서에게 주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벌어 모았던 모든 것을 형 에서에게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형 에서를 벌하지 말고 자기에게 축복하신 것처럼 형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에서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
(52.65, 1971.12.22)
아벨이 가정에 돌아와서 장자의 직분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한다면 누가 공인해야 되느냐? ‘네가 장자의 기업을 내 대신 들고 나갔으니, 네가 하늘이 축복을 받아야 된다’는 이런 싸인을 누가 해줘야 되냐 하면 가인이 해줘야 됩니다. 가인이 싸인 하지 않고는, 가인이 인정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서가 인정하지 않고는 야곱이 축복을 못 받는다 그 말입니다.
야곱이 나가서 21년 동안 뭘 했느냐? 자기편을 만들었습니다. 종족을 만들고…. 이것을 만약 안 하면 안 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가인보다 우세한 기반을 닦아 가지고 가인을 소화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축복해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계속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도 많고, 양(洋)도 많고, 모든 면에서 가진 것이 가인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어머니한테 인연을 두고, 아버지한테 인연을 두고 물건도 보내고 자꾸 그랬다는 것입니다. 형님한테 자꾸 물건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동생이 무섭구나. 하나님이 동생을 진짜 축복하셨구나. 장자의 기업을 내가 판 것이 잘못했구나. 그렇지, 내가 잘못했으니 내가 동생보다 못했구나. 이제 동생이 오게 되면 내가 반대해서 안 되겠다. 환영해야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벨과 같이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전통의 길입니다. 이와 같은 공식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106.183-184, 1979.12.30)
에서는 야곱이 하란에서 21년 동안의 고역을 마치고 하늘 편 처자와 재물을 취하여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그대로 그를 사랑하고 환영하였기 때문에(창33:4)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담가정의 가인과 아벨, 또 노아가정의 셈과 함이 실체헌제에 실패하였던 것을 탕감복귀 할 수 있게 되었었다.
이와 같이 에서와 야곱이 실체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실체기대를 탕감 복귀하여 나온 종적인 역사노정을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노정 중 이삭가정에서 비로소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에서를 태중에서부터 미워하셨다고 로마서 9장 11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같이 그는 야곱에서 굴복하여 자기의 책임분담을 다하였기 때문에 복귀한 가인의 입장을 설 수 있게 되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만 그가 복귀섭리의 탕감조건을 맞추어 나아가는데 있어서 사탄편인 가인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입장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기대 3.2)
야곱이 소망의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서 평화의 이상을 찾아나가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세계적인 이상세계를 찾아가기 위해서 가인 아벨을 복귀하기 위한, 혹은 에서와 야곱이 하나 되는 노정을 거쳐서 부모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서 세계적인 주권국가의 세계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67.136, 1973.05.27)
요셉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후 요셉은 높은 지위에 등극하여 자신의 형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에 왔을 때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 줄 기회가 생겼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으로 쫓겨났고 그들과 결정적으로 화해한 사건은, 동생 야곱과 형 에서의 일생동안 반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하늘의 인물이 막강한 권좌에 등극한 사례이다. 야곱과 달리, 요셉은 형들에게 보복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 권력으로 자신의 형들을 쩔쩔 매도록 해서 지난날 그들 자신의 범죄를 자인하게 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요셉은 자신의 형들을 용서하고 도와주었다. 그것은 요셉의 형들이 자신의 아버지 야곱을 진심으로 보호하는 선한측면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문선명 선생은 요셉의 기구한 인생, 그리고 요셉과 자신의 형들과의 우연한 만남 자체가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적인 경륜의 일부였다고 밝힌다. 특히, 형들에게 관용을 베푼 요셉의 동기를 중시하면서 문선생님은 종교 지도자로서 그것을 기독교 ‘형제들’에게 받은 자신의 박해에 적용한다.
1. 꿈꾸는 자 요셉
종교경전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길, 오, 나의 아버지시여, 저는 꿈에서 열하나의 별과 해와 달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에게 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말하길, 오, 나의 아들아, 너의 꿈 이야기를 너의 형제들에게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너에 대해 음모를 꾸밀 것이니라. 사탄은 인간들에게 분명한 적이니라.
이와 같이 너의 주님은 너를 선택하여 여러 일들의 의미를 가르쳐주시고 이전의 너의 두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과 같이 너와 야곱의 가족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었노라. 너의 주님은 참으로 전지하시고 현명하시노라. 실로 요셉과 그의 형제에게 추구하는 자들의 징표가 있느니라.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아버지에게는 우리보다 요셉과 그의 형제(벤자민)가 더 사랑스럽다. 우리는 집단인데도 불구하고, 실로 우리 아버지는 분명히 잘못하심이라.
요셉을 죽이거나 다른 땅으로 쫓아내라. 그러면 너희들의 아버지 얼굴은 너희들을 향하게 될 것이고 그런 후 너희들은 올바른 사람들이 될 것이니라.
그들 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요셉을 죽이지 말라. 그러나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그를 우물에 던져라. 그러면 어떤 대상이 그를 건져 올릴 것이니라.
그들이 말하길, 오, 우리의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요셉에 관해 저희를 믿지 않으십니까. 저희는 그가 잘되길 바라나이다.
내일 우리와 함께 보내시어 그가 스스로 즐거워 하고 놀게 하십시오, 참으로 저희가 그를 보살피겠나이다.
그가 말하길, 너희가 그를 데려간다고 하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하며 너희가 그를 보살피지 않을 때 늑대가 그를 잡아먹을까 두렵도다.
그들이 말하길, 우리가 강한 집단(그를 보호하기에)인데 늑대가 그를 잡아먹는다면 우리는 패배자일 것입니다.
그들이 요셉을 데려가 그를 깊은 우물 밑바닥으로 내던지려고 결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요셉)에게 계시를 주었다. 너는 그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너를 알지 못할 것이니라. 그들은 저녁에 울면서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왔다.
그들이 말하길, 오, 우리의 아버지시여, 우리들은 요셉과 짐을 놓고 달리기를 하였는데 늑대가 그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해도 당신께서는 우리를 믿지 아니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짓 피가 묻은 그의 옷을 가지고 왔다. 그가 말하길, 아니다 너희들 스스로 꾸민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니 인내하는 것이 좋겠구나. 하나님만이 너희들이 진술한 것에 대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이니라.
그리고 대상들이 와서 물을 길어 올리는 자를 보냈고 그는 물통을 내렸다. 그가 말하길, 좋은 소식이오! 여기 소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물건처럼 감추었노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한 일을 모두 알고 있노라.
그들은 그를 싸구려로 불과 몇 푼의 은화로 팔아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그에게 적은 가치만 부여했을 뿐이다.
꾸란 12.4-20 (이슬람)
말씀선집
요셉이 꿈꿀 때, ‘열한별과 해와 달이 나한테 경배 하더라’고 했지요? 미래에 될 것이 꿈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다 되었습니다. 그거 다 그렇게 됐지요?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꿈들이 다 있습니다. 꿈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꿈꿔 본 사람 손들어 봐요. 꿈을 꾸었는데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꿈, 3년 이상 가도 안 잊히는 꿈은 하늘의 계시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꿈 꿔 본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오는 데도 레버런 문을 몰라보고 통일교회를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벌써 통일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옛날에 동양 사람이 와 가지고, 오색 인종이 전부 다 모여 가지고 레버런 문을 따라가는 것을 봤습니다. 본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일들이 왜 벌어지느냐? 그것은 전부 영계에서 인간을 교육하기 위한 방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단계에서 교육하기 위한 방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가르쳐 주는 방법도 하나님이 가르쳐 주느냐, 천사들이 가르쳐 주느냐? 계급에 따라 전부 다릅니다. 여러 계습을 통해서 가르쳐 줍니다. 자기 조상이 나타나서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것을 분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91.274, 1977.02.27)
2. 감옥에서 왕궁으로의 요셉 노정
종교경전
그(요셉)가 성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와 지식을 주었노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선행을 하는 자에게 보답하느니라.
그가 머무르고 있는 집의 여인이 그의 진실성을 거부하고 그를 유혹하려 하였다. 그녀는 문을 닫고 말하길, ‘자 이리 오시오’하니 그가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피난처를 구합니다. 진실로 그분(당신의 남편)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나의 삶을 가장 좋게 해 주셨습니다. 진실로 나쁜 일을 하는 자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녀가 그를 탐하였으므로 그도 그녈르 탐하였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주님의 증표를 보지 못했다면.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로부터 악과 성적 불법 행위들을 멀리했노라. 진실로 그는 성실한 하나님의 종이니라.
그리고 두 사람은 문 앞까지 쫓고 쫓기며 그녀는 뒤에서 그의 옷을 찢었노라. 그때 그 둘은 그녀의 주인이 문에 있는 것을 발견했노라. 그녀가 말하였다. ‘그대의 아내에게 악을 행하려 한 자에 대한 벌이 투옥이나 가혹한 처벌 외에 무엇이오?’
그가 말하였다. ‘그녀가 나의 뜻에 거역하여 나를 유혹하려 하였습니다. 그때 집안의 한 사람이 증언하기를 만일 그의 옷이 앞에서부터 찢어져 있아면 그녀의 말이 사실이고 그는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의 옷이 뒤에서 찢어져 있다면 그녀는 거짓말을 했고 그는 진실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옷이 뒤에서 찢어진 것을 보았을 때 그가 말하였다. ‘진실로 이것은 너희 여인들이 꾸며낸 것이라 너희들의 계교가 참으로 크구나.’
요셉이여, 이곳에서 물러나라. 그리고 (부인이여) 그대는 그대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라. 그대는 진실로 죄인이니라.
그 도시의 여인들이 말하였다. ‘아지즈의 아내는 노예 소년을 강제로 유혹하려 했으며 그녀가 그에게 사랑에 빠졌으니 우리는 그녀가 명백히 잘못되었음을 보고 있소.’
그녀는 그녀들의 험담을 듣고 그녀들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연회를 준비하였다. 그녀들 각각에게 칼을 주고 그녀가 (요셉에게) 말하였다. ‘그녀들 앞으로 나아가라.’ 그녀들은 그를 보자 그를 찬탄한 나머지 그들의 손을 베면서 말하였노라. ‘ 하나님, 우리를 지켜주소서! 이분은 인간이 아니고 고귀한 천사이시오.’
그녀가 말하였노라. ‘당신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이 바로 이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강제로 그를 유혹하려 하였고, 그러나 그는 죄로부터 자신을 보존하였소. 그러나 그는 죄로부터 자신을 보존하였소. 이제 내가 말하는 것을 그가 행하지 않으면 그는 투옥되어 초라한 자들 중의 한 명이 될 것이오.
꾸란 12.22-32 (이슬람)
그 때 술잔을 드리는 시종장이 파라오에게 아뢰었다. “오늘에야 제 잘못이 생각납니다. 언젠가 폐하께서 소신과 빵 구워 올리는 시종장에게 노하셔서 경호대장의 댁 감옥에 집어넣으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소신과 그는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두 꿈의 내용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 대 거기에는 그는 경호대장의 종이었습니다. 저희들이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는 그 꿈을 하나하나 풀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해몽해 준 대로 소신은 복직이 되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매달려 죽었습니다.”
파라오는 곧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불러오라고 영을 내렸다. 그들은 서둘러서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가 면도하고 옷을 갈아입고 파라오 앞에 나서자 파라오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꿈을 하나 꾸었는데 아무도 풀 사람이 없다. 그러던 중에, 너는 꿈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푼다는 말을 내가 들었다.”… 요셉이 파라오에게 대답하였다. “저에게 무슨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폐하께 복된 말씀을 일러주실 이는 하나님뿐이십니다.”
파라오는 요셉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나는 꿈에 나일 강 가에 서 있었다. 난데없이 살이 찌고 잘 생긴 암소 일곱 마리가 강에서 나와 갈대풀을 뜯는 것이었다. 이어 암소 일곱 마리가 뒤따라 나왔는데 나는 이집트 온 땅에서 그렇게도 볼품없고 여윈 소는 처음 보았다. 그런데 여위고 볼품없는 그 소들이 먼저 나온 살찐 일곱 마리 소를 잡아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잡아먹고도 여전히 볼품없어서 그것들이 다른 소를 잡아먹으려니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 대 마침 나는 깨어났다가, 다시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줄기 하난에서 이삭 일곱이 돋아나 토실토실 여물어 갔다. 그러나 곧 뒤이어 돋아난 일곱 이삭은 샛바람에 말라 여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마른 이삭이 잘 여문 일곱 이삭을 삼켜버렸다. 내가 이 이야기를 마술사들에게 했으나 그 뜻을 일러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폐하의 꿈은 결국 같은 내용입니다” 하고 요셉이 파라오에게 말하였다. “앞으로 될 일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잘 생긴 암소 일곱 마리는 일곱 해를 말합니다. 잘 여문 이삭 일곱도 일곱 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꿈은 결국 같은 내용입니다. 뒤따라 나타난 마르고 볼품없는 일곱 암소나 샛바람에 말라비틀어진 일곱 이삭도 일곱 해를 말합니다.
이것은 흉년이 일곱 해 계속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폐하께 이미 말씀드린 것같이 폐하께서 하실 일을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올 일곱 해 동안 이집트 온 땅에는 대풍이 들겠습니다. 그러나 곧 뒤이어 흉년이 일곱 해 계속될 것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언제 배불리 먹은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옛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흉년으로 나라는 끝장이 납니다. 이렇듯이 뒤따라오는 흉년은 하도 심해서 배부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 같은 꿈을 두 번씩이나 꾸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어김없이 하시기로 정하셨고 또 지체 없이 그대로 하시리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을 뽑아 세워 이집트 온 땅을 다스리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나라 일을 감독할 자들을 세우시어 풍작이 계속되는 일곱 해 동안 이집트 땅에서 나는 것을 그 오분의 일씩 받아들이도록 조처하십시오. 앞으로 올 좋은 세월 동안 온갖 식량을 거두어들이셔야 합니다. 폐하의 권한으로 밀을 거두어들여 도시들에 식량을 저장하도록 하십시오, 그 식량은 이집트 땅에 일곱 해 계속될 흉작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온 나라가 기근으로 망하는 일을 면할 것입니다.”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는 이 제안이 좋아보였다.…그리하여 파라오는 자기 신하들에게, “우리가 이처럼 신통력을 지닌 사람을 어디서 찾겠느냐?” 하고는 요셉에게 부탁하였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주셨으니 너만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나의 온 왕궁을 네 수하에 두겠다. 내 백성은 다 네가 시키는 대로 따를 것이다. 내가 너보다 높다는 것은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파라오는 요셉에게 “네가 너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운다”고 하였다.
창세기 41.9-41 (기독교)
말씀선집
메시아는 반드시 나라를 중심삼고 와야 됩니다. 사탄세계가 나라를 단위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벨 나라를 중심삼고 가인 나라들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야곱가정에 있어서 요셉의 역사와 마찬가지입니다. 열 한 형제가 전부 그를 죽이려고 했고, 애급에 팔아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애급에 가서 총리대신이 되어서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그 일족이 전부 망하게 될 때 살려주게 되자 그들이 전부 굴복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권 가족 기반이 복귀된 것입니다.
(139.300, 1986.01.31)
감옥에 가는 사람들은 사탄세계에서 누구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들이냐? 자기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공적인 것을 파괴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사탄세계에서는 그런 사람을 싫어하고, 또 하나 싫어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본래 원수이니 하늘 편 사람이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 두 종류의 사람이 그 주권 하에서, 체제하에서 반대를 받고 감옥에 가서 죽고, 희생해 온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하늘 편의 사람을 세워 가지고 사탄세계의 그물을 끊어 버리고 하늘세계의 그물을 만들어서 사랑의 밧줄에 전부 이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세계가 아무리 어떻게 하려고 하더라도 꼼짝 못하고 손을 댈 수 없는 하늘편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요? 손을 댔다가는 손해배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백성들을 너희가 사랑하는 이상 하늘 사랑 기준에서 사랑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잡아넣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몇 천만 배의 손해배상을 무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본래 사탄은 참된 하나님의 사랑권의 지배를 받고 거기에 속해 있는 자신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랑 앞에서는 하나님이 살아 있는 한, 하나님 눈 앞에서 행차하지 못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만약에 피해를 입혔다면 역사를 두고 영원을 두고 변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시대에 하나님은 그런 하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을 하늘의 공의의 자리에 세워 이 땅 위의 사탄세계에서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게 하여 죽게 하는 것입니다. 맞아 죽거든 천년만년 역사를 두고 손해 배상을 물어야 되기 때문에, 맞는 기반을 통해서 종교라는 기반을 세계적으로 확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논리적 근거를 알아야 됩니다.
(167.305-306. 1987.08.20)
3. 요셉과 형제들의 만남과 화해
종교경전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고 있느냐? 내가 들으니 이집트엔 곡식이 있다더라. 그러니 내려가 곡식을 사오너라. 어떻게든지 살아야지 이러고 있다가 그냥 죽을 수야 없지 않느냐?” 그래서 요셉의 열 형은 이집트로 밀을 사러 떠났다. 그러나 여곱은 요셉의 아우 베냐민만은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 베냐민이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다른 사람들 틈에 끼여 곡식을 사러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에 요셉은 이미 그 땅의 통치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바로 그 땅 온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책임자였다. 요셉의 형들은 도착하는 길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을 했다.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보면서도 남을 대하듯이 거칠게 말하였다. “너희는 어디서 온 자들이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가나안 땅에서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고 형들이 일허게 되리라 꾸었던 꿈을 생각하면서 을러메었다. “너희들은 간첩이지? 이 땅의 허점을 살피러 왔지?” 그러자 형들은 변명을 늘어 놓았다. “아닙니다. 나리, 소인들은 그저 양식을 사러 왔을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자식입니다. 우리는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간첩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였다. “그럴 리가 없다. 너희는 틀림없이 이 땅의 허점을 살피러 왔어.”
그들이 대답하였다. “소인들은 본래 열두 형제였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들인데, 아버지는 지금 가나안 땅에서 계십니다. 막내 동생은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동생 하나는 없어졌습니다.” “내 말이 틀림없다. 너희는 간첩이야.” 하고 요셉은 을러메었다. “너희들 시험해 봐야겠다. 너희 막내 동생을 이리로 데려오지 않고서는, 파라오가 살아 계시는 한, 여기에서 절대로 나갈 수 없다.
그러나 땅에 기근은 심해만 갔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곡식은 떨어져 가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그들의 아버지는 다시 가서 양식을 좀 더 사오라고 하였다.… 너희 동생도 데리고 어서 그 어른에게로 돌아가거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어른으로 하여금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 바란다. 그래서 남기고 온 그 아이와 베냐민을 돌려보내 준다면 오죽이나 좋겠니! 하지만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잃었지 별수 있겠느냐?‘ 그리하여 그들은 선물을 마련하고 돈을 갑절로 준비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길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가 요셉 앞에 섰다.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온 것을 보고 자기 집 관리인에게 일렀다. “이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가거라. 짐승을 잡고 상을 차려라. 이 사람들은 나와 함께 점심을 먹을 것이다.”
그런 뒤에 요셉은 자기 집안 관리인에게 시켰다. “저 사람들 자루에다 양식을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채워주러어라. 그리고 자루마다 그 아귀에 자기들이 가져온 돈을 도로 집어넣어 주는데 막내의 자루에는 그가 가져왔던 양식 값과 함께 내 술잔도 함께 넣어라. 이 은잔 말이다.” 그는 요셉의 분부대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들은 나귀를 이끌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그 도시에서 나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은 자기 집안 관리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빨리 그들의 뒤를 쫓아가라. 그리고 그들을 따라잡거든 이렇게 호통을 쳐라. ‘너희는 왜 배은망덕 하느냐? 어쩌자고 은잔을 훔쳐 왔느냐? 그것은 바로 내 주인께서 따라 마시는 잔이요 점을 치시는 잔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사람으로선 못할 짓을 했단 말이냐!” 그가 그들을 따라잡고 그대로 호통을 치자 그들은 “나리, 어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소인들이 그런 짓을 하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며 이렇게 장담하는 것이었다.
“저번에 자루 아귀에서 나온 돈을 가나안 땅에서 나리께 갖다 드리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나리의 상전댁에서 은이나 금을 훔치겠습니까? 소인들 중 누구한테서라도 그것이 나오면 그를 죽여도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까지 나리의 종으로 삼으셔도 좋습니다.” “그래, 너희 말대로 하자. 은잔이 나오는 자루 임자는 나의 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야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들은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는 저마다 풀었다. 관리인이 맏아들에서 시작하여 막내 아들에 이르기까지 뒤지자.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왔다. 그러나 모두 옷을 찢으면서 저 마다 나귀에 짐을 싣고 그 도시로 되돌아갔다.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러보니 요셉은 아직도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그 앞에 엎드리자 요셉은 “이 따위 짓을 하다니! 나 같은 사람이 점도 못 칠 줄 알았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어찌 입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변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하면서 유다가 아뢰었다. “하나님께서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잔이 나온 이 아이나 우리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른의 종이 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잔이 나온 사람만 내 종이 되고 너희 나머지는 아버지에게 평안이들 올라가거라.” 그러자 유다가 그에게 나아가 다시 아뢰었다. “어른, 소인이 어른께 긴히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 노여워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어른께서는 파라오에 못지 않으십니다. 어른께서 소인들에게 아비나 동생이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저희는 늙은 아버지가 있고 그가 늘그막에 얻은 아이가 있다고 아뢰었습니다. 그 아이와 한 배에서 난 형은 죽고 그 아이만 남았는데, 아버지는 그 아이를 애지중지한다고 아뢰었습니다.
어른께서는 그 아이를 직접 눈으로 보게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 아이가 만일 아버지를 떠나면 아버지는 숨이 넘어갈 형편이어서 아버지를 떠날 수 없다고 어른께 아뢰지 않았습니까? 그 때 어른께서는 소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막내 동생을 데리고 내려오지 않고서는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저희는 어른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올라가서 그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후에 저희 아버지께서는 다시 가서 식량을 좀 사오라 하셨지만, 저희는 내려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막내 동생이 함께 가다면 내려갈 수 있지만, 함께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른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말씀입니다. 그랬더니 어른의 종 저희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나에게 아들 둘을 낳아 준 아내가 있었던 것을 다 알 것이다. 그런데 한 아이가 없어졌을 때 나는 그 녀석이 틀림없이 짐승에게 당했다고 생각했었다. 그 후로 아직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너희가 만일 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데려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만난다면 그 때엔 이 늙은 백발이 슬퍼하며 지하로 내려가는 꼴을 보겠느냐?’ 이제 그 아이 없이 어른의 종 저희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십시다. 아버지의 목숨은 그 아이의 것과 하나로 얽혀 있으므로 아이가 없는 것을 보면 곧 숨이 넘어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인들은 어른의 종 저희 아버지로 하여금 백발로 슬퍼하며 지하로 내려가시게 하는 격이 됩니다. 만일 그 아이를 아버지에게 도로 데려가지 못한다면 소인이 평생 아버지에게 죄인이 되리라 다짐하고는 그 아이를 제가 책임지고 나섰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아이 대신 소인을 남겨두시어 어른의 종을오 삼으십시오. 그러나 그 아이만은 형들과 함께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 아이 없이 제가 어떻게 아버지에게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저는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시종들 앞에서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길 없어 “모두들 물러나라” 하고 외쳤다. 이렇게 요셉은 모든 사람을 물리고 나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알렸다. 그가 우는데 울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이집트의 모든 사람에게 들렸고, 파라오의 집에도 들였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털어 놓았다. “내가 바로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형제들은 그의 앞에서 너무나 어리둥절하여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자, 그제야 가까이 옆으로 갔다. 요셉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이집트로 팔아 넘겼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집트로 팔아 넘겼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땅에 기근이 든 지 이태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밭을 갈아 곡식을 거두려면 다섯 해가 더 지나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파라오의 어른으로, 그 온 집안의 주인으로 삼으시고 이집트 전국을 다스리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지체 말고 어서 아버지께로 올라가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이라하고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를 온 이집트의 주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로 내려오십시오.’”
창세기 42.1-45.9 (기독교)
말씀선집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 열두 형제 가운데 열한 번째 되는 요셉을 애급에 팔려가게 해서 죽을 고생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통일교회가 다윗과 같은 자리에서, 요셉과 같이 희생하는 입장에서 천대받고 있지만 하늘은 이들을 세워서 나라와 세계를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자기 생경이나 모든 것을 희생해서 나라와 세계를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자기 생명이나 모든 것을 희생해서 나라와 세계를 복귀해 드리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런 무리만이 하나님의 컨셉과 일치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선생님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끝까지 격파해 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용서한 것은 부모를 용서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통일교회가 요셉입장에서 볼 때 미국이 원수지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봐서라도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46.124-125, 1986.06.08)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를 받아 애급으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지만, 그곳에서 바로의 꿈 해몽을 해주어 가지고 애급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이때, 온 세상에 흉년이 들어 애급 사람뿐만이 아니라 각국 사람들이 곡식을 사러 오는데 그 사람들 중에 자기의 형님들도 있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인 그 형님들을 봤을 때 요셉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렇지만 요셉은 그들이 자기와 한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지간이고, 자기가 부모 곁을 떠나 외지에서 생활할 때 그래도 부모를 모셨고, 부모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으며, 부모의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을 거쳐 갔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48.312, 1971.09.26)
요셉도 열한 형제가 반대했습니다. 죽이려고 했지만 그걸 하나 만들지 않으면 애급의 부모를 살려낼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딱 요셉과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애급에 들어가서 모든 기반을 닦아 가지고 열한 형제를 살려주는 놀음을 한 것입니다. 선생님도 기독교가 망하게 된 것을 살려주는 놀음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딱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요셉과 같은 책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37.27, 1986.01.01)
요셉이 애급에 찾아온 열한 형제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없었을 때 그래도 부모를 공양한 것이 형제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반대하여 온 기성교단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래도 통일교회가 나오기 전에 하나님을 받들어 모셔 온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뜻길, p.74)
모세
모세는 궁중의 안락한 생활에서부터 미디안 광야의 어려움까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무모한 날로부터 광야에서 오랫동안 헤매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해 고통스런 투쟁을 할 때까지, 모험적인 삶을 체험하였다. 이스라엘 동족에의 모세의 열렬한 사랑과 전능하신 하나님에의 확고한 믿음, 이 두가지가 항상 모세의 모든 발길을 인도하였다.
성서는 모세 홀로 하나님을 ‘정면으로’ 알았다고 말한다. 문선명 선생은 모세의 내적 생활을 특히 주목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곤경에 직면해 있을 때 하나님의 비통한 심정을 모세는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들을 해방시켜 가나안에 국가를 건설하려는 하나님의 불타는 의지도 감지하였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한 어떤 희생도 극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력하였다.
1. 모세의 민족해방 열망
종교경전
세월이 지나 모세는 성년이 되었다. 그는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동족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때 마침 이집트인 하나가 동족인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는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그는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그 이집트인을 쳐 죽여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이튿날 다시 나갔다가 이번에는 히브리인 둘이 서로 맞붙어 싸우는 것을 보고 잘못한 자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 하고 나무랐다. 그 사내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이듯이 나를 죽일 작정이오?” 하고 대들었다. 모세는 일이 탄로 났음을 알고 두려워 하였다. 파라오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의 손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달아나 그 곳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출애굽기 2.11-15 (기독교)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 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하며 그것을 보러 오는 것을 여호와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시고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 여호와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gpt 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스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 가고자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온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어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가 되리라. 너는 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다음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나님 여호와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어서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르셨다‘ 하며 이렇게 전하여라. ‘나는 너희들을 찾아와서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너희를 이집트의 억압에서 끌어내어 가나안족, 헷족, 아모리족, 브리스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기로 작정하였다.’”
출애굽기 3.1-17 (기독교)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어서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너를 죽이려고 찾던 자들이 다 죽었다.” 모세는 아내와 아들을 나귀에 태우고 이집트로 돌아갔다.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집트로 돌아가거든, 내가 너에게 시킨 온갖 이적을 파라오 앞에서 보여라. 그러나 나는 그로 하여금 억지를 부려 내 백성을 떠나보내지 않게 하리라. 그러면 너는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일렀건만 너는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들어라, 내가 이제 너희 맏아들을 죽이리라.’” 모세가 길을 떠나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밤을 묵는데 여호와께서 찾아오시어 그를 죽이려고 하셨다. 시뽀라가 돌칼로 제 아들의 포경을 자르고 그것을 모세의 발에 대며 말하였다. “당신은 피로 얻은 나의 신랑입니다.”그러자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주셨다. 그래서 시뽀라는 “할례를 베풀어 피 흘려 얻은 신랑”이라고 말하였다.…
모세와 아론은 돌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아론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백성 앞에서 증거들을 보여주었다. 백성들은 믿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시어 자기들이 당하는 괴로움을 살펴주셨다는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였다. 출애굽기 4.19-31 (기독교)
그리고 그들 후에도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의 징표와 함께 파라오와 그의 우두머리들에게 보내었으나 그들은 오만하게 행동하였노라. 그들은 죄스러운 백성이었노라.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진리가 도래했을 때, 그들은 “이것은 분명 마술이로다!라고 말하였다.… 그 백성 중 일부 사람들 외에는 모세를 믿지 아니하니, 파라오와 그의 수장들의 박해가 두려워서였다. 파라오는 지상의 폭군이며 실로 과도한 자였다. 모세가 말하길, “나의 백성들이여,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한다면 그분에게 의탁하라”하니, 그들이 말하길 “하나님께 의탁하나이다. 주여, 저희를 사악한 무리의 유혹에 들디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로써 불신자들로부터 구하여 주소서….”
모세가 말하였다. “주여, 당신께서 파라오와 그의 무리들에게 현세의 영광과 부를 주었나이다. 주여, 그들이 참혹한 징벌을 볼 때까지 그들을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하시고, 주여, 그들의 부를 멸하시고 믿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의 기도에 응하니 곧은길로 가고, 무지한 자의 길을 따르지 말라.”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바다 건너 저편으로 인도하셨다. 파라오와 그의 무리들이 집요하고 맹렬한 기세로 그들을 추격했으나. 물의 재앙이 그들을 덮쳤다. 파라오가 말하길, “이스라엘 자손들이 믿는 신 외에 다른 신을 믿지 않겠으며, 나 또한 순종하는 자 가운데 있겠나이다.” 하더라. 이제사? 이전에 너희는 거역했으며, 부정한 자들 가운데 있었느니라. 오늘 하나님이 너희 몸만 건져내니, 너희가 너희 이후에 오는 자들에게 징표가 되도록 함이라. 실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표에 부주의하더라.
꾸란 10.75-92 (이슬람)
말씀선집
모세는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에 머무는 동안 영화롭게 입고 먹고 환희에 넘치는 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궁중에 머무는 동안 시종일관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그 생활의 어느 한 순간에 있어서도 이스라엘민족을 염려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애급에 있는 이스라엘민족 중에서 모세 혼자서만 그 민족이야 알든 모르든 하늘을 향한 충성심은 변치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모세가 혈기 당당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급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애급인을 때려죽인 모세의 의분심은 그 순간에 충격 받아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게 될 때, 모세는 40년 동안 하늘을 향하여 애달픈 마음으로 민족을 위해 호소하였던 내적 슬픔의 심정이 폭발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선민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억제 할 수 없는 의분심이 솟아나 애급인을 때려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에 행동의 내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세의 행동에는 섭리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울분에 못 이겨 애급인을 쳐 죽인 것은 이스라엘민족의 운명을 염려하고 책임진 입장에서 죽인 것이고, 그것은 애급인이 이스라엘민족을 박해한 죄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민족을 위해 염려하는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모세를 오해하고 애급인을 쳐 죽인 것을 폭로함으로써 모세는 자기의 행동이 탄로 난 것을 알고 할 수 없이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141-142, 1956.07.01)
미디안 광야에서 생활하던 모세는 바로 궁중에서 호화롭게 살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바로와의 딸이 자기를 위하여 모든 청을 다 들어 줄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았던 지난날의 부귀영화를 다 잊었습니다. 그리고 양치는 옷을 입고 양떼를 몰고 다니는 무명의 목동의 신세였지만 그 양떼를 바라보며 옛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그리워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양떼를 몰고 나디지만 언젠가는 양떼를 몰고 가듯이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다는 사무칭 마음으로 하늘 앞에 호소했던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먹으나 굶으나 자나 깨나 노심초사 그 모든 정성을 다하여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을 위해 염려하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애급의 박해와 도탄 중에서 고역을 당하는 이스라엘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 뼈가 녹는 듯한 슬픔을 느꼈으며, 하늘을 향하여, ‘여호와여! 나를 보셔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호소의 정성이 지극한 모세를 60만 대중을 애급땅에서 이끌어내는 지도자로 세웠고, 남이 볼 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미디안 광야에서 일개 목동의 생활을 하던 모세를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숨은 뿌리의 절개를 계승받게 했고 민족의 대표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1.142-143, 1956.07.01)
광야의 온갖 풍우에 시달리는 서글픔을 맛본다할지라도 그것을 다 밀어제치고, 민족으로부터 몰림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을 붙들었던 모세의 변치않는 결심이 있었던 연고로, 민족이 어려운 사정에 처하고 모세가 그런 고난의 환경에 들어갔을지라도 민족이 단결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요, 하늘을 모세를 세워 섭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39, 1958.02.23)
그 뒤 모세가 옮긴 발걸음은 모두 모험적인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초월한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을 품었기 때문에 그의 삶 전체도 초현실적인 것이요, 바라보는 것도, 나가 싸운 것도 초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모세가 바로 궁중으로 가게 될 때, 하나님이 가라하신 그 길을 가는 모세를 축복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모세의 가는 길을 막고 모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자신의 명령을 받고 가는 모세를 가로막고 죽이려 하셨는가?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내용이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고개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미 각오한 몸이었으니 죽든지 살든지 뜻 하나만 이루어지기를 비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가로막고 사탄이 가로막는 시험의 조건을 넘어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로 궁중에서 초현실적이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하여 10여 차례 이상의 이적 기사를 일으켰던 모세는 4천년 역사상에 없었던 우주적인 모험의 혁명가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모세는 어떤 사람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뜻을 대한 초현실적인 믿음으로 60만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모세의 생애 전체는 초현실적인 모험의 행로였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267, 1956.12.02)
2 율법을 전수하고 히브리인의 광야노정을 인도한 모세의 고난
종교경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있는 이 산으로 올라와 머물러 있어라. 내가 이 백성을 가르치려고 훈계와 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너에게 주리라.” 모세는 자기의 시종 여호수아를 데리고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장로들에게 일러두었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돌아 올 때까지 여기 앉아 기다리시오, 아론과 후르가 그대들과 함께 여기에 남아 있을 터이니, 사건이 생기거든 그들에게 가서 판단해 달라고 하시오,”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었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나이 산 위에 머물러 있어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뒤덮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레째 되는 날 그 구름 속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마치 그 산봉우리를 태우는 불처럼 보였다. 모세는 구름을 뚫고 산으로 올라가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다.
출애굽기 24.12-18 (기독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내가 율볍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를 모른다. 어떤 고생, 어떤 노력이라도 나는 율법을 위해 참아내었다. 사십 주야를 나는 하나님과 같이 지냈다. 나는 살아 있는 피조물들인 천사들, 스랍들과 함께 있었다.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었다. 내가 고생을 통하여 율법을 배운 것처럼 너희들도 고생을 하면서 율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너희들이 고생으로 율법을 배운 것처럼 너희 후손에게도 고생 가운데 율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시프레 신명기 (유대교)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은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나이 산 사이에 있는 씬 광야에 이르렀다. 이집트를 떠난 지 한 달째 되는 보름날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온 회중은 이 광야에서 또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다.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서 고기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출애굽기 16.2-3 (기독교)
사십 주야가 끝나는 날 여호와께서 나(모세)에게 계약이 적힌 두 개의 석판을 주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일어나라. 속히 이곳에서 하산하라. 왜냐하면, 네가 이집트에서 데려온 백성들이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가르쳐준 길에서 벗어나서 딴 길로 가는 데는 너무나도 잽싸다. 그들은 우상을 만들었다.… 나 혼자 있게 하라. 나는 저들을 멸망시키고 하늘 아래에 저들의 이름을 지워 없애버리리라. 나는 저들보다도 훨씬 강하고 큰 한 국가를 네게 이루어 주겠노라.” 나는 산에서 내려 왔다. 산은 여전히 불길에 횝싸여 있었고 두 개의 계약 석판은 나의 양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보았다. 너희들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거슬러서 죄를 짓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였다. 너희는 송아지를 만들었다. 너희는 너무도 빨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길을 벗어났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안고 있던 두 석판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내어던져 버렸다. 그리고 난 후에 나는 예전처럼 사십 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나는 그 동안 한 모금의 물이나 한 조각의 빵도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희가 범한 죄가 컸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해 버리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께 기도를 하였다. "오,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백성이요 당신의 선민인 자들을 멸하지 마옵소서. 저들은 당신의 큰 은사를 통하여 속죄 받은 자들입니다. 저들은 당신께서 놀라우신 능력의 손길로 이집트로부터 구해낸 자들입니다. 당신의 종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기억하옵소서, 이 백성의 완고함을 보지 마시고, 죄를 보지 마시옵소서, 당신께서 우리를 이끌어내었던 그곳의 사람들이 ‘여호와는 자기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갈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그는 자기 백성들을 미워하고 광야에서 살해해 버렸기 때문이야’라고 말하지 않게 하소서, 이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이요, 당신의 유산입니다. 그들을 당신의 놀라우신 힘과 편 팔로 이끌어 주소서.”
신명기 9.11-29 (기독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나이 이제 백스무 살이 지나 다시는 일선에 나설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너는 이 요르단 강을 건너지 못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몸소 앞장서 건너가셔서 저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없애주시고 너희로 하여금 그 땅을 차지하게 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너희의 앞장을 서서 건너갈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그들의 땅을 해치우시고 쓸어버리셨듯이 그들도 해치우실 것이다. 이렇게 그들을 너희에게 넘겨주시거든 너희는 나에게 받은 명령대로 어김없이 그들을 해치워야 한다. 힘을 내어라. 용기를 가져라. 무서워하지 마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몸소 함께 진국하신다. 너희를 포기하지도 아니하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신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수아를 불러내어 온 이스라엘 앞에서 일렀다. “힘을 내어라. 용기를 가져라. 여호와께서 이 백성의 선조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으로 이 백성을 이끌로 들어갈 사람은 바로 너다. 저 땅을 유산으로 차지하게 해줄 사람은 바로 너다. 여호와께서 몸소 너의 앞장을 서주시고 너의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너를 포기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기도 마라.”
신명기 31.2-8 (기독교)
말씀선집
모세가 한 생명을 들어 전 민족의 생명을 구원하는 산 제물로 삼으려고 몸부림친 것을 그 민족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친구가 되어 주셨고, 하나님만이 아버지로서 그를 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40일간 먹을 것을 잊어버리면서도 다시는 아버지께서 슬픔과 비운의 심정을 갖지 않게 해 드리겠다는 책임감을 느껴, 있는 정성을 다해 호소함으로써 이스라엘민족을 부활시킬 수 있는 말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쁨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남모르는 가운데 배후에서 슬픔의 제물이 된 자가 있었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것을 알았던들 광야에서 60만 대중이 쓰러지는 일은 면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라도 그들이 모세의 십계명을 받들고 하늘의 서러운 심정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 자기들의 몸은 제물 될지라도 굽히지 않고 나가겠다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광양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3.287, 1958.01.19)
애급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야 했던 모세도 바로궁중에서 40년 동안 남이 모르는 심적인 고민을 하면서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정신에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애급사람을 때려죽인 것이 광야에서 처량한 목자의 생활을 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처한 모세는 애급 궁중의 호화로웠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더리어 미디안 땅에서의 고역생활이 닥친다 하더라도 변치 않는 마음을 품고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는 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야의 온갖 풍우에 시달리는 서글픔을 맛본다 할지라도 그것을 다 밀어제치고, 민족으로부터 몰림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을 붙들었던 모세의 변치않는 결심이 있었던 연고로, 민족이 어려운 사정에 처하고 모세가 그런 고난의 환경에 들어갔을지라도 민족이 단결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요, 하늘은 모세를 세워 섭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38-39, 1958.02.23)
모세가 하늘로부터 허락하신 바의 약속을 받고 애급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는 기쁨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그 기쁨에만 만족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생애를 바치겠다고 하늘 앞에 호소하던 그 뜻이 이루어져 민족의 살길을 개척하게 되었지만 그러한 기쁨에만 만족해 있지 않고, 이제부터 제2의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겠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모세는 자기를 중심삼고 행동하지 않았고, 조그만 일이나 큰일이나 어느 한 가지 일이라도 하나님과 인연을 맺지 않고 수행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모세가 포악한 바로 궁중에 들어가 그들의 신 앞에 10회 이상의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이스라엘민족을 험난한 광야로 이끌어 나오게 되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민족은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가는데 있어서 모세의 마음이 곧 자기들의 마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바로 궁중으로부터 구출해 준 모세와 마음이 달라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와 하나 되지 못하여 천륜에 어긋나는 길을 감으로써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렇게 멸망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들은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하늘 앞에 호소했던 숨은 정성의 발판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을 이끌고 애급을 탈출한 그 날로부터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자기들을 위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세의 수고와 고생을 알아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모세는 광야에서 갈라졌고,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엎드러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민족이 모세를 불신했던 역사적인 사실이 오늘날 끝 날의 성도들에게도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민족과 자신이 하나 되지 못하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때 모세는 불신하는 민족을 책망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부족을 하늘 앞에 호소했습니다. 즉, 그는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이 민족이 어찌하여 허락하신 땅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책임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를 제물삼아 민족의 멸망의 길을 막아 주시옵소서!’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숨은 정성의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이스라엘민족의 모세가 남모르는 애달픈 마음을 가지고 금식하는 것이 모세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는 것임을 알았던들 그들은 모세의 40일 금식 기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불신의 놀음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들이 민족의 축복을 대신한 모세가 하나의 숨은 제물로서 하늘 앞에 바쳐지게 될 때 모세의 마음을 동정하고 그의 수고를 염려해 앞에 호소할 수 있었던들, 그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가 홀로 민족을 대표하여 외로운 길을 갔던 것과 같이 예수님도 그러한 길을 가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희생과 모세의 민족을 대표한 제물의 노정을 통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 가정을 대표하여 사탄의 참소조건을 막았고 모세가 민족을 대표하여 사탄의 참소조건을 막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인류를 대신해서 홀로 사탄의 모든 참소조건을 막아야 했고 승리적인 탕감의 발판을 닦아야 했습니다.
(1.143-145, 1956.07.01)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될 텐데, 요단강가에서 천막을 치고, 이제는 다 왔으니 여기서 천년만년 살아야 할 텐데 하고 있으니 이 천막을 깨뜨리고 밟아 치우고, 강으로 처넣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는 모세가 와서 불을 사르고 전부 다 차 버려야 됩니다. 처넣어야 됩니다. 물을 처넣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단강 물이 깊은 줄 알았더니 눈을 뜨고 보니 깊지 않습니다. 무르팍밖에 안 올라 오는 것입니다. 시내를 건너가서 죽어야 됩니다. 3분의 2의 몸뚱이가 땅을 붙들고 거기서 쉬어도 괜찮습니다. 그거 사탄이 못 가져갑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죽어도 성공입니다. 우리 땅에 들어서서…, 그게 길고 긴 40년간 노정의 목적입니다.
요단강도 안 보이는 광야 복판에서는 모세보다 먼저 가면 죽습니다. 그때는 모세가 나를 따라오라고 했지만, 요단강이 보일 때는 ‘먼저 가라’하는 것입니다. 이게 멋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다 건너가고 모세만 못 건너갔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모세가 ‘아, 저주를 받을 무리야! 나를 버리고 갔구나, 죽을 것들! 멸망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 나는 죽어도 좋으니 너희들은 영원히 축복 받으라’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하나님, 나보다 용맹한 저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저들의 장래를 보호하소서! 얼마나 희망찬 저들이오!’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 훌륭한 지도자로다! 네 기도대로 해주마! 너는 편안히 영면 할지어다’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죽음입니까!
(189.249-250, 1989.04.09)
성경의 여인들
하나님의 섭리의 경륜에 여인들의 위대한 신앙과 헌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들로부터 예수의 생애 중 중요한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상당한 개인적 대가를 치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노력한 여인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옛날 여자의 삶은 쉽지 않았지만 이러한 여인들은 하나님에의 강한 믿음을 유지하면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애써왔다.
남편 아브라함을 돕기 위해 사라는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였으며 심지어 바로의 여자가 되는 모험을 받기도 했다. 밧세바는 자기 남편을 죽인 다윗 왕의 아내가 되었는데 다윗 왕에 충성함으로써 죽은 남편을 영예롭게 해야 한다는 일관된 태도로 고통을 삼켰다.
한편, 리브가는 아들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택함 받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들을 돕기 위해 남편을 거역했다. 야곱과 에서와 같은 입장에 있었던 라헬과 레아는 자매간의 경쟁관계로 서로 다투었다. 다말과 마리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혼외 자식을 낳기 위해 자기의 삶을 묵묵히 걸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의 헌신적 모범을 보였는데 이는 열 두 제자들의 삶보다 더 나은 사례로 꼽는다.
문선명 선생은 이런 여인들의 각별한 삶을 관통하는 맥락을 읽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혈통을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에 선택된 여인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위대한 신앙적 기반을 통해서 여자 이브의 실수를 복귀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현실을 도전할 환경에 처하게 하였음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1. 사라
종교경전
마침 그 지방에 흉년이 들었는데, 그 흉년이 너무나 심하여 아브라함은 이집트에 몸 부쳐 살려고 옮겨간 일이 있었다. 이집트 땅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아브라함이 아내 사래에게 당부하였다. “나는 당신이 정말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오,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당신의 남편이라고 해서 나를 죽이고 당신만 살려둘 것이오, 그러니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 덕으로 죽음을 면하고 대접도 받을 것이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 들어갔다. 이집트인들이 보기에 그의 아내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집트 왕의 신하들은 그를 보고 왕 앞에 나아가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사래는 왕궁으로 불려들어갔다. 아브라함은 그 덕분에 대접을 받고 남종들과 여종들, 양떼와 소떼, 암나귀와 수나귀, 그리고 낙타를 여러 마리 받았다. 그러나 왕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불러들인 벌로 온 가족과 함께 여호와께 무서운 재앙을 받았다. 왕은 아브라함을 불러 꾸짖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일을 했느냐? 왜 그를 네 아내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 이 여자를 네 누이라고 속여 내 아내로 삼게 하였는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데리고 당장 물러가거라.”
이집트 왕은 부하들에게 명하여 아브라함을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함께 내어보냈다.
창세기 12.10-20 (기독교)
말씀선집
아브라함이 떠나자고 할 때 어서 가자고 했던 사라 같은 사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바로 앞에서는 남매 사이라고 하자고 했을 때 사라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놈의 영감, 그렇게 고생을 시켜서 끌어내더니만 이제는 여편네는 그만두고 오빠라고 부르라네’ 이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소나기가 와도 그냥 갔을 것입니다. 집시의 무리가 된 그들에게 누가 밥 한 그릇이라도 갖다 주었겠습니까? 오늘은 이쪽으로 내일은 저 쪽으로 돌아다니는 그런 생활을 했는데, 그렇게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사라는 아브라함을 대해 ‘이놈의 영감, 밤에 보다 낮에 보나 아침에 보나 재수 없는 영감이 됐어.’ 그런 주제에 또 남편인 자기를 오빠라고 부르라니…. 이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수난을 거쳐 나오는 가운데서도 사라는 아브라함의 소망의 길과 일치될 수 있어서, 아무런 상충도 없이 하나 될 수 있어서, 아무런 상충도 없이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이상적인 주체가 있을지라도 이상적인 상대가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주체인 아브라함 앞에 이상적인 상대가 나왔는데 그 이상적인 상대를 치려고 할 때는, 완전한 이상적인 주체 앞에 완전한 이상적인 상대형이 있는데 이것을 치려 할 때는 하나님께서 ‘야 이놈!’ 하실 수 있습니다.
(49.144, 1971.10.09)
아벨보다 못한 노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요, 노아보다 못한 아브라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무엇이 노아보다 낫느냐? 아브라함의 아내는 아브라함이 남매처럼 행동하자고 했을 때도 ‘예!’하며 따랐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마누라, 당신하고 나하고 형제처럼 행동 합시다’ 할 때 그의 아내는 반대하는 입장에 섰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가정은 노아 가정보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정은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은 그렇게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제멋대로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하나 된 어머니 사라의 품에서 자란 이삭은 목이 잘리게 되는 자리에서도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 가정은 노아 가정보다 나왔던 것입니다.
(46.322, 1971.08.17)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서, 아담가정의 입장을 탕감 복귀하는 상징적인 조검은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섭리노정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미완성기에서 아직 남내가 같은 입장에 있었을 때에 천사장이 해와를 빼앗아 감으로 인하여, 그의 자녀들과 만물세계까지 사탄의 주관 하에 속하게 되었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우려면,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남매와 같은 입장에서 처 사라를 사탄의 실체인 바로에게 빼앗겼다가 그의 처의 입장에서 다시 그녀를 찾아옴과 동시에, 전 인류를 상징하는 롯과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제물을 찾아오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창 14:16). 아브라함의 이러한 노정은 후일에 예수님이 오셔서 걸어야 할 전형노정이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3.1.2.1.)
2. 리브가
종교경전
리브가는 이삭이 아들 에서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는 에서가 사냥하러 들에 나간 틈을 타서 아들 야곱에게 귀띔해 주었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사냥 해다가 별미를 만들어 오라 하시면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것을 잡수시고 에서에게 복을 빌어주겠다고 하시더구나. 그러니 야곱아!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여라. 양떼들한테 가서 살진 염소 새끼 두 마리만 끌고 오너라. 내가 그것으로 아버지 구미에 맞게 잘 요리해 줄 터이니 그것을 아버지께 갖다드려라. 그러면 아버지가 잡수시고 세상을 뜨시기 전에 너에게 복을 빌어 주실 것이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형 에서는 털이 많고 저는 이렇게 털이 없습니다. 아버님이 저를 만져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아버님을 놀리기나 한 것처럼 되어 복은커녕 도리어 저주를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야곱아,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 어서 가서 염소 새끼나 끌어 오너라.”
창세기 27.5-13 (기독교)
에서는 아버지가 야곱에게 복을 빌어준 일로 야곱을 미워하였다. 에서는 속으로 ‘아버지 상을 입을 날도 멀리 않았으니, 그 때 동생 야곱을 없애버리리라’ 하고 마음먹었다. 리브가는 큰아들 에서가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놓고 일렀다. “큰일 났다. 형 에서가 너를 죽이지않고는 속이 풀리지 않을 모양이다. 그러니 야곱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곧 하란으로 몸을 피해 라반 아저씨를 찾아가거라. 네 형의 분이 풀릴 때까지 잠시 외삼촌댁에 가 있거라. 네 형의 노여움이 풀려 네가 한 일을 잊을 만하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데려오마. 한꺼번에 너희 두 형제를 잃고서야 내가 어떻게 살겠느냐!” 리브가가 이삭에게 호소하였다. “헷 여자들이 보기 싫어 죽겠습니다. 만일 야곱이 이 땅에 사는 저 따위 헷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면 무슨 살맛이 있겠습니까?”
이삭은 야곱을 불러들여 복을 빌어주며 단단히 일렀다. “너는 아예 가나안 여자에게 장가들지 마라. 너는 바딴아람의 브두엘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라반 아저씨의 딸 하나를 아내로 삼아라.”
창세기 27.41-28.2 (기독교)
말씀선집
역사시대에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 재산, 역사적 전통이나 모든 것을 끊고 대대적인 혁명, 하늘의 사랑의 길을 찾기 위해서 대혁명을 하는 하나의 여성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데 있어서 자기 어머니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조차, 축복조차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기업을 빼앗아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 맏아들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작은 아들과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기업을 빼앗는 놀음이 세상에 있습니까? 그것을 보면 야곱도 사기꾼이요, 어머니도 거짓말쟁이입니다. 이게 왜 성경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왜 이렇게 출발해야 되느냐 이것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축복을 빼앗고, 장자의 기업을 빼앗았다는 것은 모든 세상을 찾아오는 조건으로 하나님이 허락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세계에 가서 공개적으로 ‘야야, 너, 내가 모든 기업을 빼앗으러 왔으니, 나한테 의논해서 싸인 해라’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네가 한 대로 나도 해야 된다. 네가 한 대로 나도 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네가 한 대로 나도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빼앗아 갔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찾아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사탄이 어떻게 빼앗아 갔느냐? 거짓말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담을 속였습니다. 아들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아들과 아버지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남편까지 속였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한다, 이놈의 자식아!’ 하며 빼앗아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 편이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삼고 여자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탄과 해와가 하나 돼서 타락했으니 하나님과 여자가 하나 되어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사탄과 하나 되어 아담을 끌고 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여자가 하나 되어 남자를 끌어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리브가와 야곱이 하나 되어 여기로 끌어오는 자리입니다. 자기 아들과 남편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다 이해가 됩니다.
(105.118-120, 1979.10.04)
에서가 어머니와 야곱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불만을 갖는 한 그 가정은 영원히 하나 안 됩니다. 에서와 아버지를 굴복시켜야 됩니다. 자연히 ‘찬양합니다.’하게 해야 됩니다. 아들인 에서도 , 아버지인 이삭도 찬양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본연의 자리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니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어머니가 정성과 수고로 눈물을 흘리고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백 번 사죄하고 천 번 사죄해서 용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야곱이 나타날 때 그 아버지의 마음, 에서의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같이 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여기서 자연굴복이라는 논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가인의 입장인 에서와 사탄편의 입장인 아버지를 자연 굴복시키지 않고는 복귀가 안 됩니다.
그러려면 그 어머니가 야곱의 몇 백배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야곱이 돌아와도 에서가 죽이지 않겠다고 몇 번을 다짐하고, 몇 번씩 되풀이하여 맹세를 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얼마나 에서를 안팎으로 감화시켰겠습니까? 어머니는 그러한 책임을 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244.240-241, 1993.02.14)
해와가 타락할 때 사탄을 중심삼고 하나 되었습니다. 그러면 해와는 어떤 존재로, 어떤 입장에 섰느냐? 하나님을 부정하고 남편을 부정하는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가는 데는 남자가 먼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사탄세계의 아버지와 같고 사탄 세계의 남편과 같은 이런 것을 반대하는 여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여자가 아니고는 이리 돌아 올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공식을 중심삼고 종교는 발전해 나오는 것입니다.
본래의 종교는 남자의 종교가 아니라 신부의 종교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이 종교 생활하는데 언제나 남자들은 반대하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에서는 언제나 사탄이 반대하고 남자들이 반대하기 마련입니다.
(89.208, 1976.11.22)
3. 라헬과 레아
종교경전
여호와께서는 레아가 남편에게 차별 대우 받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셨다. 그러나 라헬은 아기를 잉태하지 못하였다. 레아는 마침내 임신하여 아기를 낳았다. 그리고는 “여호와께서 나의 억울한 심정을 살펴주셨구나.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겠지” 하면서 아기 이름을 르우벤이라 불렀다. 레아는 또 임신하여 아기를 낳았다. 그리고 “내가 차별 대우를 받아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나에게 또 아들을 주셨구나!” 하면서 아기 이름을 시므온이라 불렀다. 그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아들을 셋이나 낳아드렸으니 이제는 남편이 별수 없이 나한테 메이겠지”하면서 아기 이름을 레위라 불렀다, 그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내가 여호와를 찬양하리라”하면서 아기 이름을 유다라 불렀다. 그 뒤 얼마 동안 레아는 아기를 낳지 못했다.
한편, 라헬은 야곱에게 아기를 낳아주지 못하게 되자 언니를 시새우며 야곱에게 투덜거렸다. “저도 자식을 갖게 해주셔요. 그러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어요” 야곱은 라헬에게 화를 내며 야단을 쳤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태를 닫아 아기를 못 낳게 하시는데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그러자 라헬이 말하였다. “저에게 몸종 빌하가 있지 않습니까? 그의 방에 드셔요. 빌하가 혹시 아기를 낳아 제 무릎에 안겨줄지 압니까? 빌하의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 당신의 혈통을 이어드리고 싶어요.” 라헬은 몸종 빌하를 야곱의 소실로 들여보냈다. 야곱이 그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빌하가 마침 임신하여 야곱의 아들을 낳았다. 라헬은 “하나님께서 내 사정을 바로 보살펴 내 호소를 들으시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하면서 아기의 이름을 단이라 불렀다. 라헬의 몸종 빌하가 또 임신하여 야곱에게 두 번째로 아들을 낳아주었다.
라헬은 “내가 언니와 겨루는데 하나님께서 편들어주셔서 드디어 이겼구나!” 하면서 아기 이름을 납달리라 불렀다. 보리를 거둘 때가 되어 르우벤이 밭에 나갔다가 자귀나무를 발견하여 어머니 레아에게 갖다드렸다. 라헬이 이것을 알고 레아에게 졸라댔다. “언니 아들이 캐어 온 자귀나무를 좀 나누어 주구려” 그러나 레아는 “네가 나에게서 남편을 빼앗고도 무엇이 부족해서 이제 내 아들이 캐 온 자귀나무마저 달라느냐?”하며 역정을 내었다. 그러자 라헬은 “언니 아들이 캐온 자귀나무를 주면 오늘 밤 그분을 언니 방에 드시도록 하리다”하였다. 저녁때가 되어 야곱이 밭에서 돌아오자 레아가 나가서 맞으며 “당신은 오늘 제 집에 드셔야 합니다.”하며 자기 아들이 캐 온 자귀나무로 치른 값을 해달라고 하였다. 야곱은 그 날 밤 레아와 한자리에 들었다. 하나님은 레아의 호소를 들으시고 레아에게 아기를 점지해 주셨다. 그리하여 레아는 야곱에게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아주었다. 레아는 “내가 남편에게 내 몸종을 드린 값을 이제 하나님께서 갚아주셨구나” 하면서 아기 이름을 이싸갈이라 불렀다. 레아가 다시 임신해서 여섯 번째로 야곱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 레아는 “하나님께서 이렇듯이 나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다니, 내가 남편에게 아들을 여섯이나 낳아드렸으니 이제는 그분이 나를 위해주시겠지” 하면서 아기 이름을 즈불룬이라 불렀다. 그 후 레아는 또 딸을 낳고 이름을 디나라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라헬도 돌보시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셨다. 마침내 라헬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는 “하나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셨다”하면서 아기 이름을 요셉이라 부르고 “여호와께서 나에게 아들을 하나 더 점지해 주시면 오죽이나 좋으랴!”하였다.
창세기 29.31-35, 30.1-24 (기독교)
말씀선집
야곱이 하란에 가서 21년을 거치면서 7년 동안 라헬을 얻으려고 수고했는데 아버지인 라반이 사탄편인 레아를 갖다 품겨 줬습니다. 야곱이 복귀할 수 있는 아담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레아를 통해 타락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레아를 품고 넘어가서야 라헬을 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전체 섭리를 보게 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두 여자가 나타납니다. 타락한 여자와 복귀도니 여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레아가 동생 라헬의 사랑을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사탄편의 대표인 라반을 중심삼고, 구원섭리에 있어서 사탄이 레아를 품고 라헬의 갈 길까지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두 여자의 사랑싸움이 야곱가정의 문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랑을 중심삼고 가인 아벨과 사탄이 출발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입장과 라헬적인 목적을 따라가는 본연의 세계에서 가인이 나타나서 자기 중심삼은 사랑은 차지하기 위한 놀음을 한 것과 마참가지의 형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사탄이 먼저 주도권을 쥐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상을 파괴시키고…. 이것이 2천 년 후에 야곱 가정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탕감복귀입니다.
탕감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탄 편인 아버지가 레아 편에 서 있는데, 어머니는 사탄 편을 이기기 위해서 레아와 라헬을 하나 만드는 놀음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아벨(야곱)을 세워 가지고 가인(에서)을 구슬리고 이삭을 굴복시키기 위해 내적으로 얼마나 고충을 받았겠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시대에서 라헬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야곱이 라헬과 레아와 하나 된 자리에서 라헬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형님이 자연 굴복해야 됩니다. 형님 100퍼센트 굴복해서 동생을 장자와 같이 모시고 형님같이 모셔야 합니다. 거꾸로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244.239-240, 1993.02.14)
지금 미국 여자 가운데 행복한 여자들이 있습니까? 전부 레아와 라헬과 같은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도수를 넘어 평준화되어서 프리섹스까지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이 시기하는 것을 중심삼아 하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같은 자리에 서야 될 입장에 있으니, 사랑을 중심삼고 수평 기준에 놓이다 보니 프리섹스와 같은 개념이 들어온 것입니다.
사랑싸움 때문에 레아를 중심삼은 종들 세 여인이 10아들을 낳고, 라헬은 2아들을 낳으니 이것이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대, 가인세계와 아벨세계로 완전히 갈라진 것입니다. 가정에서 사랑분쟁이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대로 갈라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10지파와 2지파가 서로 원수가 되어 싸워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244.248-249, 1993.02.14)
4. 다말
종교경전
유다는 맏아들 에르에게 아내를 얻어주었는데 그의 이름은 다말이었다.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의 눈 밖에 나서 죽었다. 유다는 오난에게 이르기를 형수에게 장가들어 시동생으로서 할 일을 하여 형의 후손을 남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오난은 형수와 한자리에 들었을 대 정액을 바닥에 흘려 형에게 후손을 남겨주지 않으려 하였다. 그가 한 이런 짓은 여호와의 눈에 거슬리는 일이었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도 죽이셨다. 그러자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들 셀라가 어른이 될 때까지 친정에 돌아가 홀몸으로 기다려다오.” 그마저 형들처럼 죽을까봐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말은 친정에 돌아가 살게 되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었다. 유다는 상을 벗은 다음,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올라갔다. 한편 다말은 시아버지가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올라온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과부의 옷차림을 벗어버리고 너울을 써서 몸을 가리고 딤나로 가는 길가에나임 성 문에 나가 앉았다. 셀라가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도 자기를 아내로 데려가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다는 그 여자가 얼굴을 가린 것을 보고 창녀려니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길가에 있는 여인에게로 발길을 돌리며 수작을 건넸다. “너한테 들러 가고 싶구나. 어서 가자.” 그 여인이 바로 자기의 며느리라는 것을 알았을 리가 만무하다. 다말은 화대로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었다. “내 양떼 가운데서 새끼 염소 한 마릴르 보내마.”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그걸 보내주실 때까지 담보물을 맡겨주세요”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그가 물었다. “무슨 담보물을 주어야 하나?” 그 여자가 대답했다. “당신의 그 줄 달린 인장과 잡고 있는 지팡이면 됩니다.”그래서 그것을 주고 한자리에 들었는데 마침 그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는 돌아가 너울을 벗고 과부 옷차림으로 바꾸었다.
석 달쯤 지나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창녀 짓을 하여 아이까지 가졌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유다는 그를 끌어내어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다말은 끌려 나오게 되자 시아버지에게 전갈을 보냈다. “이 물건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나는 그의 아이를 배었습니다. 이 줄 달린 인장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보아주십시오,” 유다는 그 물건들을 알아보고 “그 애가 나보다 낫구나! 내가 내 아들 셀라에게 그 애를 아내로 맞게 하지 않았으니…”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몸을 풀 때가 다 되어 그의 태에 쌍둥이가 들어 있는 것이 나타났다. 그런데 몸을 막 풀려고 하는데 한 아이가 손 하나를 내밀었다. “이 아이가 먼저 나온 놈이다.” 산파는 그 손을 잡아 진홍 실을 매두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손을 안으로 다시 끌어 들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아우가 나오자 “이 밀치고 나온 놈!” 하고 산파가 말하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지었다. 뒤따라 손에 진홍 실을 맨 형이 나오자 그의 이름을 제라라고 지었다.
창세기 38.6-30 (기독교)
다말은 제사장의 딸이었다. 그녀의 성품이 순결하고 자제력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시아버지와 관계 맺는 것을 일부러 꾸몄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다말은 덕 있는 여성이었으며 창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시아버지 유다에게 접근한 것은 심오한 뜻과 지혜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한 죽은 남편들을 향한 충심에서 한 행동이었다. 하늘이 그녀를 도와 곧바로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깊은 뜻을 알고서 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다윗, 솔로몬, 나아가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유대 왕국의 씨가 뿌려진 두 여인이 있다. 그들이 다말과 롯이다. 이 두여인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첫 번째 남편을 잃었고, 남편을 대신하기 위해 비슷한 길을 걸었다. 다말은 유다가 죽은 남편들의 가장 가까운 근친이었기 때문에 유다를 유혹했다…롯은 보아스를 유혹했는데, 룻기 3장 7절에 “롯이 살그머니 다가가서, 보아스의 발치를 들치고 누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여인으로부터 유대왕국의 씨가 이어졌고,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두 여인 모두 신앙심의 발로로 한 행동이었고, 죽은 남편들을 향한 예를 지켰다. 이는 모두 혈통을 이어 앞으로 올 하늘 세상을 준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조하르 1.188a b (유대교)
말씀선집
야곱의 아들 가운데 유다지파가 있습니다. 유다는 넷째 아들입니다. 유다의 첫째 아들이 결혼했는데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이어받아 대를 이어주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아들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형수를 이어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벌을 주어서 죽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셋째 아들은 꼬마입니다. 셋째 아들은 어리기 때문에 이 형수가 유다지파의 대를 이을 가망성이 없으니 큰일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말이 대를 이르려면 어느 계통을 이어야 되겠습니까? 유다지파의 계통을 이으려면 갓난 애기밖에는 없으니 자기는 다 늙어 죽겠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혁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무었을 하느냐? 하나님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내 집 망신이든, 내 무엇이든 생각지 않는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창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자기 시아버지가 농사지으러 왔다 갔다 하는 길가에 나가서 자기 시아버지 유다를 꼬여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렇게 관계를 맺고는 기념품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지팡이를 주고, 도장과 도장 끈도 주고, 염소를 주니 그 예물을 받고 아기를 베어 키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한 5, 6개월이 되어 다말의 배가 점점 불러 오니까, 동네 사람들이 유다에게 당신의 며느리 되는 사람이 과부인데 이렇게 아기를 배었으니 돌로 쳐 죽여야 된다고 공론을 했습니다. 그때 ‘이 애기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니, 이 지팡이의 주인이요, 도장과 도장 끈 주인이요, 이 예물을 준 사람이라고 해서 유다에게 갖다 주어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았습니다.
비정상적인 길을 가는 여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새로운 혈통이 뻗어 나온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는 것입니다. 몸을 먼저 바치면, 그것은 순수하게 백 퍼센트 사탄 것입니다. 백 퍼센트 사탄 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걸 부정하는 입장에 서면 그것이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여자, 사탄편의 여자가 아니고 하늘편의 여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것을 전부 부정해 버리고 하늘 편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에 일치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말을 통해 가지고…. 다말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러한 곁갈래에 서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해와가 자기 아버지를 속이고, 자기 남편을 속인 것과 마찬가지로 다말은 자기 아버지 유다와 자기 미래의 남편, 셋째 아들을 다 부정하고 그 놀음을 한 것입니다. 딱 마찬가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라고….
(92.286-288, 1977.04.18)
‘하나님이여, 당신의 축복권을 흠모하고 또 당신의 축복의 대를 잇기 위해서 제가 이러는 것이오니, 하나님이여! 용서하십시오, 제가 비록 천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만 이 불륜의 소행을 터로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을 수 있는 기반이 유다 가문에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저는 아무런 요한이 없습니다’라고 다말은 틀림없이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 절실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다말은 생사를 개의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한 맺힌 뜻을 이뤄드리기 위해 그 죽음의 상황까지도 극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다말의 뜻 대한 충절은 실로 놀라운 것이지만, 바로 이러한 자리에서만이 섭리역사를 펴 나오실 수가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사정이었습니다.
(110.222-223, 1980.11.18)
사탄의 거짓 사랑의 씨가 해와의 태중에 뿌려져서 악의 생명이 태어났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태중에까지 들어가서 분별해 놓지 않고서는 하늘의 아들이 태중에서 탄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승리에 의해서도 아직 분별되지 아니한 잉태에서부터 사십대까지의 기간도 사탄 분립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책임을 맡은 위대한 어머니가 다말입니다.
다말은 선민의 혈대를 이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매춘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인 유다를 맞아 쌍태아기를 가졌습니다. 아기들이 태어날 때 먼저 손을 내밀고 나오려던 장자 아기가 다시 들어가고, 동생이 되어야 할 차자 아기가 형이 되어 먼저 태어났으니 그가 베레스입니다. 다말의 태중에서 장자와 차자가 싸워 분립되는 태중복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 위에 선민의 혈족을 보아 2천년 후에 로마 제국의 국가기준을 대치할 이스라엘 국가적 터 위에 메시아가 잉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씨가 준비된 어머니의 태중에, 사탄의 참소 없이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국가적 승리의 터전이 조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 성모 마리아가 섭리의 주류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277.205-206, 1966.04.16)
5. 라합
종교경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니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 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복음 1.1-6 (기독교)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시띰에서 정탐원 둘을 밀파하며 예리고 지역을 살펴보고 오라고 일렀다. 그의 지시를 따라 그들은 예리고로 가서 라합이라는 창녀의 집을 찾아가 거기서 묵었다. 누군가가 예리고 왕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아룁니다. 이스라엘 사람 몇이 이 땅을 정탐하러 오늘 밤 이리로 왔습니다.” 예리고 왕이 라합에게 전갈을 보냈다. “너를 찾아 네 집에 온 자들을 내놓아라. 그들은 이 온 지역을 정탐하러 온 자들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두 사람을 숨겨두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저에게로 오기는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왔는지는 몰랐습니다. 어둑어둑해져서 성문이 닫힐 때쯤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급히 쫓아가시면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여자는 그들을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가 지붕에 널어놓은 삼대 속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정탐원들은 아직 자지 않고 있었는데 라합이 지붕 위로 올라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여호와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겁에 질려 있습니다. 내가 당신들을 잘 봐드렸으니, 당신들도 내 가문 사람들을 잘 봐주겠다고 이제 여호와를 두고 맹세해 주십시오,…라합은 그들을 창문에서 밧줄로 내려주면서 일렀다.
여호수아 2.1-15 (기독교)
말씀선집
어머니가 둘째 번 되는 것도 원리적 입장에서 타당하다는 이론이 성립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책임을 못 하니 하나님도 할 수 없이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다말이 나오고 롯이 나오는데, 다말도 첩 행동을 했고 롯도 첩 행동을 했다는 것니다. 그 다음에 기생 라함은 창녀입니다. 창녀와 같은 부류가 역사적 배후에 이런 파국이 돼 있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1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92.292, 1977.04.18)
마태복음에 라합이 나옵니다. 라합이 어떤 사람입니까? 기생이지요? 그런데 그녀가 누구를 도와주었습니까? 정탐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원수의 국가를 위한 일인데, 모험을 한 것입니다. 하늘의 공의의 뜻을 위해서는 모험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과 모든 환경, 그리고 자기의 특권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역사는 거기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30.196, 1970.03.22)
6. 밧세바
종교경전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침대에서 일어나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다윗이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니, 사령은 돌아와서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 밧세바인데 남편은 헷 사람 우리야라고 보고하였다. 다윗은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다가 정을 통하고는 돌려보냈다. 여인은 마친 부정을 씻고 몸이 정결한 때였다. 밧세바의 몸에 태기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가 임심했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자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헷 사람 우리야를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요압이 우리야를 다윗에게 보냈다. 우리야가 당도하자 다윗은 요압과 병사들의 안부를 묻고 싸움터의 형편도 알아보고 나서 집에 돌아가 푹 쉬라고 하였다. 우리야가 어전에서 물러나올 때 왕은 술상까지 딸려 보냈다. 그러나 우리야는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대궐 문간에서 근위병들과 함께 잤다. 다음날 다윗은 우리야가 집에 돌아가 자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우리야에게 물었다. “그대는 먼 길에서 돌아온 몸이 아닌가?‘ 우리야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온 이스라엘 군과 유다 군이 야영 중입니다. 법궤도 거기에 있습니다. 제 상관 요압 장군이나 임금님의 부하들도 들판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집에 가서 편히 쉬며 먹고 마시고 아내와 더불어 밤을 지내다니,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날이 밝자 다윗은 요압 앞으로 편지를 써서 우리야에게 주어 보냈다. 다윗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써다. “우리야를 가장 전투가 심한 곳에 앞세워 내보내고 너희는 뒤로 물러나서 그를 맞아죽게 하여라.” 요압은 성을 지켜보고 있다가 강병이 지키고 있는 데를 알아내어 그 곳으로 우리야를 보냈다. 그러자 그 성에서 적군이 나와 요압의 군대를 쳤다. 다윗의 부하들은 쓰러지고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
우리야가 전사했다는 전갈을 받고 그의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곡을 했다. 곡하는 기간이 지난 다음, 다윗은 예를 갖추어 그 여인을 궁으로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그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다윗이 한 이일이 여호와의 눈에 거슬렸다.
나단은 이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윗은 식음을 전폐하고 배옷을 걸친 채 밤을 새우며 어린 것을 살려달라고 맨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애원하였다. 늙은 신하들이 둘러서서 일어나라고 했으나, 그는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더불어 음식을 입에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기는 마침내 칠 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다윗에게 아기가 죽었다는 것을 차마 알리지 못하고 수군거렸다. “아기가 살아 있을 때에도 우리말을 듣지 않으셨는데,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면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른다.”
다윗이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니 밧세바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여호와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
사무엘하 11.2-27, 12.15-18, 24 (기독교)
말씀선집
밧세바는 솔로몬의 어머니인데, 그 밧세바가 끝까지 다윗 왕을 미워했느냐/ 만일 그랬다면 그녀는 솔로몬의 어머니가 못 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로 내쫓고 계획적으로 자기를 점령했지만, 그렇게 된 것을 운명으로 돌림과 동시에 그것을 도리어 하늘의 크나큰 뜻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쁜 의미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크나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고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자기 남편이 희생되더라도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고 기도한 열녀였다는 것입니다.
밧세바는 자기 남편이 죽었지만 그 남편이 충신되기 위해서는 그 일신이 망하는 것은 물론이요, 아내인 자기까지도 군왕을 위해서 바쳐지는 것을 기쁨으로 알아야 한다는 고차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밧세바는 남편이 그런 의미에서 ‘내가 군왕을 위해 일신을 다 바치고, 정성과 절개를 다 바치고 가는 것이 본 남편에 대한 의리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고 다윗 왕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솔로몬 왕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40.97, 1971.01.24)
솔로몬의 어머니는 누구였던가? 밧세바입니다. 밧세바는 어떠한 여자였던가?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다윗 왕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것입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해서 솔로몬이 되었는가? 우리야의 아내는 어떠한 입장인가 하면 둘째 부인입니다. 이들을 타락하기 전의 에덴동산의 그 위치에 세워 놓고 볼 경우, 다윗은 아담의 입장, 우리야는 천사장의 입장이 됩니다.
천사장의 아내는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해와의 입장입니다. 천사장이 아담의 상대자인 해와를 타락시켜 끌고 갔습니다. 사랑으로 점령하여 훔쳐 간 것입니다. 그것을 탕감하려면 그러한 삼각관계에 다시 돌아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와 같은 원리적 기준에 입각한 조건을 세운 기대 위에서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하늘의 사랑을 받는 영광의 아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영광의 아이인 것입니다.
(35.168, 1970.10.13)
7. 마리아
종교경전
여섯 달 만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께로부터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보내심을 받아서,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천사가 그 집 안에 들어가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은혜를 입은 이여, 기뻐하라. 주께서 너와 같이 계신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몹시 놀라 이 인사가 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다시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다,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위대한 분이 될 것이요, 지극히 놓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이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며, 그는 영원하도록 야곱의 후손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요,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그때 마리아가 “나는 남편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보아라. 네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는 소문이 났으나, 그는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 한 일이 없다.“ 그래서 마리아가 ”보십시오, 저는 주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천사는 마리아를 떠나갔습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유대 산골에 있는 한동네로 서둘러 가서,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아기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고, 그대의 태속에 있는 열매도 복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석 달쯤 있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누가복음 1.26-42, 56 (기독교)
천사들이 말하길, 오 마리아여! 하나님께서 말씀의 기쁜 소식을 네게 주시노라. 그의 이름은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 예수이며 현세와 내세에서 빛날 것이고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될 것이니라.
그는 요람에 있으면서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고 의로운 인물이 될 것이니라.
그녀가 말하길, 주여! 저에게 손을 댄 남자가 없는데 어떻게 아들을 가질 수 있나요, 그가 말하길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창조하신다. 어떤 것을 결정하시고 되라 하면 되는 것이니라.꾸란 3.45-47 (이슬람)
이므란의 딸 마리아의 그녀의 정절을 지켰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그 속에 불어 넣었느니라. 그녀는 주님의 말씀과 성서들을 믿었으며 신앙심 깊은 자이었느니라.
꾸란 66.12(이슬람)
말씀선집
리브가와 다말의 전통을 이어가지고… 그리고 2천 년후에 그 뜻을 이어받은 것이 누구냐 하면, 마리아입니다. 성모 마리아입니다. 뜻을 위해서 혁명하는 여자가 나와야 합니다. 천사로 말미암아 타락된 것이니 천사장이 와서 해와를 협조하는 것입니다.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믿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사탄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타락했으니, 이 천사장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잉태할 것이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는 그 말을 믿고 모험을 한 것입니다.
그 때 마리아의 입장은 요셉과 약혼한 입장이었는데,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해와가 약혼한 입장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이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오누이지만 앞으로 결혼할, 약혼 관계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천사가 끌고 가서 타락했으니 천사가 끌고 가 하나님 앞에 복귀하는 것입니다. 딱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전통을 어어받았으니 해와가 타락할 때 행동한 그 내용과 마찬가지로 자기 아버지를 속이고 자기 남편을 속이는 놀음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남편한테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모르게 했습니다. 그때에는 처녀가 아기를 베면 돌무더기 돼 가지고…. 생명을 내 놓고 아기를 배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브가로부터, 다말로부터 이어받은 심정적 터전을 중심삼고 예수를 베었으니 역사적 모든 탕감 기원을 완성한, 그 복중에서 태어나는 아들에 대해서는 사탄이 아무리 참소하려 해도 참소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복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92.289-290, 1977.04.18)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자기의 몸을 통하여 메시아가 태어난다는(눅1:31) 가브리엘 천사장의 놀라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처녀의 입장에서 아가를 가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당시의 규례였지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절대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친족이요 존경받는 대제사장 사가랴에게 상담했습니다. 사가랴 가정에서는 그 부인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임신한 세계요한을 태중에 지닌 채, 마리아에 대하여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눅 1:42-43)하고 예수님의 잉태를 증거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와 사갸랴와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메시아의 탄생을 제일 먼저 알게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잘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야 할 중대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사가랴 부부는 마리아를 자기들 집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가랴 가정에서 잉태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사이는 어머니 쪽으로 종자매관계였지만 섭리 상으로는 언니(가인)와 동생(아벨)의 관계였습니다. 사가랴 앞에서 엘리사벳의 도움을 받은 마리아는 레아와 라헬이 야곱 가정에서 모자가 일체 되지 못했던 것을 국가적 기준에서 사가랴 가정을 통하여 탕감하는 조건까지 세우면서 예수님을 탄생시켜야 했습니다. 역사 이래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씨, 참 아버지가 되어야 할 씨가, 준비된 어머니의 태중에 사탄의 참소조건 없이 착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첫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독생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의 법에 의해 용인될 수 없고 또 상식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마리아가 해내야 했습니다. 세 사람이 모두 영적으로 감동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에 따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소원임을 무조건 믿고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77.206-207, 1996.04.16)
8. 막달라 마리아
종교경전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로 가셨다. 그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어있었다.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장차 예수를 넘겨 줄 가룟 사람 유다가 말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요한복음 12.1-5 (기독교)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는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라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 14.6-9 (기독교)
주간의 첫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문을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뛰어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로 가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려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분이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너는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내가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자기가 주를 보았다는 것과 주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였다.
요한복음 20.1-18 (기독교)
말씀선집
어찌하여 기독교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남아졌는가? 천추만대에 그의 이름이 전하여 내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소개하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엔 한낱 천한 여자의 몸으로서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총각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로 닦았다는 사실을 어느 누가 용납하겠습니까?
제자들까지 비웃고 가롯 유다가 항의하고 전체가 반대하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복음이 소개되는 곳에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기념될 것이라 하셨던가? 예수님에게는 사랑하는 제자 또는 수많은 사람보다도 그 시간에 있어서 막달라 마리아의 정성이 자신이 하나님께 있는 정성을 다 바친 것과 같은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친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가정과 남편이 있었고, 고유한 구약사상을 중심한 유대교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을 다 도외시하고, 즉 자신의 사회적인 위신이나 체면을 생각지 않고 죽은 총각 예수의 무덤을 찾아 헤매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4.107, 1958.03.16)
예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하늘을 향해 호소할 때,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졸고 있던 세 제자의 모습과,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친적인 천적인 가치를 알고서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드림으로써 부활하실 주의 영광을 확인해 드릴 때, 그 마리아의 행위를 비웃고 막아선 제자들의 모습을 대하신 그 심정이 예수님의 원한이 되었음을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길을 가시면서 서러운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만은 그런 예수님을 위로하고 염려하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신한 예수님의 천적인 내적 심정을 체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에게 축복을 내리셨고, 환희의 은사로 그녀를 하나님의 뜻 앞에 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2.212, 1957.05.26)
돌아가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 사람은 비록 인간들이 보기에는 미약한 존재였지만 그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고을에서 쫓기고 저 고을에서 비난받고, 가는 곳곳에서 조소를 일신에 받고 다니던 총각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따르던 마리아였습니다. 이런 간곡한 마리아 앞에 예수님은 부활의 몸으로써 나타났으니 이는 끝 날에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갈 길을 보여준 표상인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생활을 했던가?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입을 것, 먹을 것 전부를 잊어버리고 일편단심 그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생사를 초월하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따르던 그녀의 행로는 끝 날의 성도들이 걸어야 할 노정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지금도 이 땅 위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심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을진대 그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6년천 섭리에 어린 눈물이 감돌 것이요, 하늘 앞에 무한히 빚진 자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4.258-259, 1958.06.29)
8. 막달라 마리아
종교경전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로 가셨다. 그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어있었다.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장차 예수를 넘겨 줄 가룟 사람 유다가 말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요한복음 12.1-5 (기독교)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는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라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 14.6-9 (기독교)
주간의 첫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문을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뛰어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로 가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려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분이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두셨는지를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모시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너는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내가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자기가 주를 보았다는 것과 주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였다.
요한복음 20.1-18 (기독교)
말씀선집
어찌하여 기독교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남아졌는가? 천추만대에 그의 이름이 전하여 내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소개하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엔 한낱 천한 여자의 몸으로서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총각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로 닦았다는 사실을 어느 누가 용납하겠습니까?
제자들까지 비웃고 가롯 유다가 항의하고 전체가 반대하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복음이 소개되는 곳에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기념될 것이라 하셨던가? 예수님에게는 사랑하는 제자 또는 수많은 사람보다도 그 시간에 있어서 막달라 마리아의 정성이 자신이 하나님께 있는 정성을 다 바친 것과 같은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친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가정과 남편이 있었고, 고유한 구약사상을 중심한 유대교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을 다 도외시하고, 즉 자신의 사회적인 위신이나 체면을 생각지 않고 죽은 총각 예수의 무덤을 찾아 헤매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4.107, 1958.03.16)
예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하늘을 향해 호소할 때,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졸고 있던 세 제자의 모습과,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친적인 천적인 가치를 알고서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드림으로써 부활하실 주의 영광을 확인해 드릴 때, 그 마리아의 행위를 비웃고 막아선 제자들의 모습을 대하신 그 심정이 예수님의 원한이 되었음을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길을 가시면서 서러운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만은 그런 예수님을 위로하고 염려하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신한 예수님의 천적인 내적 심정을 체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에게 축복을 내리셨고, 환희의 은사로 그녀를 하나님의 뜻 앞에 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2.212, 1957.05.26)
돌아가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 사람은 비록 인간들이 보기에는 미약한 존재였지만 그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고을에서 쫓기고 저 고을에서 비난받고, 가는 곳곳에서 조소를 일신에 받고 다니던 총각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따르던 마리아였습니다. 이런 간곡한 마리아 앞에 예수님은 부활의 몸으로써 나타났으니 이는 끝 날에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갈 길을 보여준 표상인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생활을 했던가?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입을 것, 먹을 것 전부를 잊어버리고 일편단심 그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생사를 초월하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따르던 그녀의 행로는 끝 날의 성도들이 걸어야 할 노정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지금도 이 땅 위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심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을진대 그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6년천 섭리에 어린 눈물이 감돌 것이요, 하늘 앞에 무한히 빚진 자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4.258-259, 1958.06.29)
붓다
문선명 선생은 붓다를 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인정한다. 붓다는 생애는 진리를 찾기 위해 가정과 친구를 버리고 떠난 모든 사람들의 전형적 모델이다. 붓다는 깨우침을 위해 자신들의 부인과 자녀, 가정, 그리고 부와 권세를 버리고 구도의 길을 찾아 나선 후 젊은 사람들을 교화하는 과정에 박해를 받기도 했다. 붓다와 많은 북교신자들이 경험한 지복의 상태가 붓다를 우주의 정상으로 이끌었다, 모든 사람들은 붓다의 영적 수행을 본받는다면, 행복한 상태를 찾게 될 것이다.
1. 진리 수행을 위해 속세를 떠난 붓다
종교경전
부모가 그것을 원치 않아 눈물로써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고타마는 머리칼과 수염을 자르고, 가사를 걸치고 집을 떠나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디가 니카야 1.115 (불교)
샤카족의 왕은 현자 아시타로부터 왕자가 지복을 구하여 숲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을 드고 이를 염려하여, 왕자로 하여금 애욕을 탐닉하게 하여 출가할 뜻이 그에게 일어나지 않게 하려 했더라. 부왕은 곧 모든 신하들에게 분주를 내려 우의(羽儀)를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다니는 길을 다시 손보고, 또 여러 가지 더러운 것과 늙은이나 병자나 쇠약한 이나 빈궁에 괴로워하는 이들을 모두 치워서 태자가 그것을 보고 불쾌한 마음 일으키지 않게 하였다. 그 때에 정거천왕(淨居天王)이 갑자기 내려와 길 곁에 있으면서 쇠약한 노인의 형상으로 변하여 이 세상을 싫어하는 마음 우러나게 하였나니, 이에 태자는 그 노인의 꼴을 보고 놀랍고 괴이하여 어자(御者)에게 물었다.
“저 이는 어떠한 사람인가? 머리는 희고 등은 굽으며 눈은 어둡고 떨면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비틀 걸음 걷나니, 이는 그 몸이 갑자기 변함인가? 본래 받은 성질이 스스로 그러한가?”
어자가 마음으로 망설이면서 감히 진실을 말하지 못할 때, 이에 정거천왕은 신력을 부려 그로 하여금 참을 고백하게 하였다.
“빛깔은 변하고 기운은 허약하여 근심은 많은데, 즐거움은 적으며, 기쁨을 잊고, 모든 근(根)은 허물어지나니, 이것을 늙고 쇠한 모양이라 하나이다. 저 이도 본래는 어린애로서 어머니 젖으로 자라났으며, 소년 시절에는 장난쳤으며, 단정히 젊었을 때는 오욕을 즐겼나니, 그러나 세월은 흘러 몸뚱이 말라지고 지금은 늙음으로 허물어졌나이다.…젊음으로 늙지 않음이 없건마는 온 세상이 알면서도 구하나이다.”
태자는 늙고 쇠함의 괴로움을 듣고 두려움에 온몸의 털이 일어섰나니, 마치 번개치고 천둥치는 소리를 듣고 뭇 짐승이 두려워 달리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두려움에 떨면서 길이 한숨 쉬네. “마땅히 빨리 수레를 돌려 돌아가자. 늙음은 닥치거니 이 동산 구경이 무엇이 즐거우랴.” (두 번째 성 밖 구경에서 왕자는 질병으로 신음하는 이를 보고 또한 큰 두려움 마음이 생겨 몸과 마음이 함께 떨리니, 마치 물결 속의 달과 같았네, 세 번째 성 밖 구경에서 마치 왕자는 마침내 슬퍼 한탄하며 따르는 시체를 보게 되었더라.)
왕자가 물었다. “이것은 어떠한 가마이기에 꽃과 깃발로 장엄하게 꾸미고 따르는 사람들은 근심하고 슬퍼하며 머리를 흩트리어 울부짖고 따르는가?” 하늘 신은 어자를 통해 대답하였다. “이것은 죽은 사람, 모든 근(根)이 무너지면 목숨이 끊어지고, 마음은 흐트러지고, 염식(念識)이 떠나며, 정신은 가고, 몸뚱이는 말라빠져 뻣뻣이 굳어 마른 나무 같나니, 일가친척과 모든 벗들은 은혜와 사랑이 본래부터 얽혔지만 이제는 모두 보기 싫어해 빈 무덤 사이에 가져다 버립니다.” 태자는 죽음이라는 이 말을 듣고, 슬프고 아픈 마음이 맺히어 물었다. “오직 이 사람만 죽는 것인가. 천하 사람이 다 그러한가?” “온 천하가 다 그러하나니, 내개 처음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어, 어른이나 어린이나 또 젊은이는 몸이 있고 무너지지 않는 것 없나이다.”
태자는 마음으로 놀라고 슬퍼하여 수레 앞 가로 나무에 몸을 엎치고 숨길이 끊어질 듯 탄식하였다. “세상 사람이 어이 이리 한결같이 잘못인가? 이 몸의 없어짐을 환하게 알건마는 그래도 생각 없이 함부로 놀려 하네, 마음은 말라빠진 나무, 돌이 아니거니, 일찍이 덧없음을 걱정하지 않았구나.” “수레를 돌려 돌아가자, 다시 이와 같이 놀 때가 아니니라. 목숨 끊겨 죽는 것이 기약없거니 어떻게 마음대로 함부로 놀겠는가?”
여러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제각기 마음대로 앉게 하시고 자신은 잠부나무 그늘에 단정히 앉아 바르게 생각하고, 모든 것의 나고 죽음과 일어나고 멸하며 덧없이 변하는 것을 관찰 할 때, 마음은 안정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오욕은 구름인 듯 사라져 버렸다.
머트러운 생각이 있고 자세한 생각이 있는, 눈물이 없는 선에 들어가, 욕심을 떠나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 삼매를 바로 받았도다. 늙음, 병, 죽음으로 무너지는 이 세간은 참으로 수고롭고 괴롭다. 몸이 맞도록 큰 괴로움 받건만, 사람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늙음, 앓음, 죽음을 싫어하나니, 이야말로 큰 근심거리 아닌가? 나는 이제 훌륭한 법을 찾고 있거니, 마땅히 세상사람 같지 않아서, 스스로 늙음, 앓음, 죽음에 얽매이면서 도리어 다른 사람 미워하지 않으리라.
왕자는 단정히 앉아 깊이 생각하다가 곧 바른 법에 대한 생각을 얻었나니, 마땅히 어떠한 방편을 지어 소원대로 길이 집을 나갈 수 있는지 생각하였다.
아슈바고샤, 불소행찬 3-5 (불교)
그런데 그 때 마가다국의 고귀한 가문의 훌륭한 젊은이들이 세존의 가르침을 받으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경명하고 비난하며 이 사실을 널리 퍼뜨렸다. “저 은둔자 고타마는 우리를 무자식으로 만듦으로써 잘 살아가고 있다. 저 은둔자 고마타는 우리를 과부로 만듦으로써 잘 살아가고 있다. 저 은둔자 고마타는 우리의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고도 잘 살아가고 있다. 이제 또 누구를 꼬여내 갈까?”
비나야 피타카 1.43 (불교)
어느 때 석가모니 부처께서 코삼비 마을에 머물고 계셨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그를 원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악한 자를 뇌물로 꼬여 부처에 관한 거짓된 이야기가 온 동네에 두루 퍼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일이 있자 그의 제자들은 탁발 걸식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고 온갖 학대가 뒤따랐다.
아난다가 부처께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마을에 더 이상 머물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나이다. 우리가 머물 수 있는 훌륭한 마을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나이다. 이 마을을 하루 속히 떠나는 것이 좋을 듯하나이다.”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아난다야, 다른 마을도 이와 같다면 그때는 어찌할까?” “그러면 우리는 또 다른 마을로 옮겨갈 수 있나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아난다야, 그와 같은 길에는 끝이 없으리라. 차라리 여기에 그대로 남아 학대와 비난이 잠잠해질 때까지 참아 견디는 편이 나으리라. 그런 연후에 우리가 다른 마을로 가도록 하자. 세상에는 득실이 있고 비방과 명예가 있으며, 찬사와 학대가 있고, 고통과 즐거움이 있느니라. 그러나 깨달음을 연 자는 이러한 바깥일들에 끌려 다니지 않느니라. 순식간에 다가오는 시상일이니, 또 순식간에 우리를 떠나리라. 공연한 일로 걱정하지 말거라.”
법구경소(불교)
말씀선집
석가 같은 양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출가해서 참의 도리를 찾아 모든 것을 극복해 나서면서 세계 인류와 더불어 살고 공의의 법도인 천륜을 세우려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겠다고 고독단신으로 나선 것입니다. 그 걸음 앞에는 개인의 눈물바다가 막고, 가정의 눈물바다가 막고, 나라의 눈물바다가 막고, 인류의 눈물바다가 막고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도의 길을 찾아 가는 성인의 걸음은 가장 비참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101.151, 1978.10.29)
육신의 낙을 즐기는 속인의 기쁨은 청빈을 즐기는 도인의 기쁨에 미칠 수 없으리라.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는 구도의 행각을 즐긴 것은 비단 석가뿐이 아닐 것이다.
(원리강론, 총서)
석가는 어떤가? 왕자의 자리를 버렸기 때문에 왕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 왕족을 숭배하는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258.87, 1994.03.17)
성인치고 그 나라에서 핍박 안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인도의 석가는 그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인생은 고해라 하며 진리의 길을 찾기 위해 왕자의 자리도 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불교가 인도에서 나왔지만 인도에는 불교인이 많지 않습니다. 성인치고 그 나라로부터 대접받은 성인은 없습니다. 성인을 대접해 준 나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핍박을 했습니다.
(39.255-256, 1971.01.15)
2. 붓다의 각성
종교경전
보살은 악마에게 항복받은 뒤, 뜻이 더욱 굳건하고 마음은 안온하며, 제일의(第一義)를 구하기를 다하고, 깊은 묘한 선정에 들어갔나니, 자유자제한 모든 삼매, 차례차례로 나타나 앞에 있네.
초저녁에는 바른 정에 들어가 과거의 생을 생각했나니, 어느 곳에서 어떤 이름으로, 그리고 지금 여기에 태어나 있다고, 이와 같은 백 천 만의 죽고 난 것을 그는 환히 알았네,
바르게 깨친 이는 결코 바르게 깨달아 마쳤나니, 생이 다하면 늙음과 죽이 멸하며,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취가 멀하면 유가 멸하며.
이와 같이 정각을 이루신 뒤에 부처께서 세간에 나오셨나니, 바른 소견 등의 여덟 가지 길은 넓고 크며 편편하고 곧은 길이네,
부처RP서는 다시 이레 동안을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 청정하여 보리수를 관찰할 때,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눈을 깜짝 않았네, “나는 이 보리수 의지하여 오랫동안 소원 이루었거니, 나 없는 법에 편안히 머무르리.”
아슈바고샤, 불소행찬 14 (불교)
이 집 지은 이를 찾아 삼사라를 헤매었지만 찾지 못한 채 여러 생을 보냈다. 태어남이란 다만 거듭거듭 괴로움이었다.
오, 이 집 지은 자여! 이제 그대를 아노라. 그대는 다시 집을 짓는 일 없으리, 서까래는 부러지고 들보도 내려앉았도다. 나의 마음 탐착을 떠나고 갈에는 이미 사라졌느니.
법구경 153-154 (불교)
하늘과 땅에서 오직 나만이 존귀한 자이다.
디가 니카야 2.15 (불교)
이것을 알아라. 여래께서 때때로 이 세상 가운데 오시니. 그는 죄악된 필멸자들을 구제하는 이요, 신들과 사람들의 스승이요, 청정한 부처로서 비길데 없는 정각에 들어 더없이 복되고 지혜와 선으로 충만하여, 모든 세간의 일들을 낱낱이 헤아려 아는 이로다…. 연설이나 정신으로 펴신 그의 진리는 그 기원에 있어서 수승하고 그 과정에 있어서도 수승하며, 또한 그 완성에 있어서도 수승하다. 그가 이루는 존귀한 삶은 모든 방면에서 무구청정하며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하다 하느니라.
디가 나카야 13, 테빗자 숫타 (불교)
말씀선집
여러분이 90각도가 되어서, 이와 같은 자리에 있는 내가 되어서 우주에 공명되는 참사랑, 내적인 하나님 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해 가지고 하나 되게 될 때 우주가 다 자기 것이 되고,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 모든 전체가 나에게 달렸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같은 사람도 그런 자리에서 느꼈기 때문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로 가능한 것입니다.
(178.299, 1988.06.12)
도를 통한 사람은 마음에 강력한 힘이 옴으로 말미암아 그냥 그대로 놓아두더라도 몸은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몸의 지배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러한 작전을 펴 나오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통일교회도 지금 그러한 공식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자연히 인간으로서 가야 할 고차적인 자리,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자각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라고 말한것처럼 자기의 권위에 미칠 사람이 없습니다. 홀로 스스로의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영광된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지은 피조세계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상속받을 수 있게 되니 홀로 높다고 자각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까지 가서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살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38.270-273, 1971.02.08)
공자
끊임없는 전란의 시기에 태어난 철인 공자는 당시의 고통을 넘어서 평화로운 세계의 기초가 되는 보편적 도덕 원리를 추구했다. 그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이 나라 저 나라를 유랑하면서 그의 이상에 관심을 갖는 통치자를 찾아 나섰다. 그는 비록 계속 거절당했지만 하늘은 자신을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해 쓸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긍정적인 자세를 늘 갖고 있었다. 비록 그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공자의 가르침은 동아시아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문선명 선생은 ‘하늘’이라고 부른 하나님에 대한 공자의 믿음과 보잘것없는 환경을 뛰어넘어 보다 높은 진리를 한 마음으로 추구하는 공자를 존경한다. 문선명 선생은 공자를 예수와 짝을 이루는 성인으로 간주한다. 공자는 천국의 사회적 관계의 외적 형태에 대해 가르쳤고, 예수는 천국의 내적 정신을 가르치고 체현했다.
1. 소명의식을 지닌 채 고난과 좌절을 겪은 공자
종교경전
(위나라의 읍인)의의 변경지기가 공자를 뵙고자 청하며 말했다. “군자가 이곳에 오시면 제가 모두 찾아 뵈었습니다.” 공자의 수행원이 그를 안내해 면회를 시켜 주었고, 그는 나오면서 말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벼슬을 잃었다고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천하에 도가 없어진지 오래이기 때문에 하늘이 선생님을 목탁으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논어 3.24 (유교)
그 사람됨이 분발하여 먹기를 잊으며,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어서 늙음이 장차 이르게 될 줄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논어 7.18 (유교)
말씀선집
공자님은 수천 년전 춘추 전국시대의 노나라 사람이었지만 그는 몇 나라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어려운 환경, 혼란한 사회상을 바라보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를 중심삼고 형제가 없더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참다운 길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 시대에 몰리면서도 감사하면서 미래를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살았기에 그는 전국시대를 넘어 사상적으로 중원 대륙을 통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시아를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해 남겨질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닦게 된 것입니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마음, 참된 것을 주고 싶어 하는 그의 갈구와 욕망이 결국 그의 인격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공자의 가르침이 나온 것입니다.
(33.290, 1970.08.21)
공자의 도리는 노나라의 혼란한 시대에 있어 그 나라의 치리 방법도 되겠지만 ,자기 나라와 같은 혼란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후대의 만민들이 거쳐가야 할 인생의 도리를 모색한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32.260, 1970.07.19)
역사시대의 성인들 가운데 예수도 핍박받았고, 공자도 상가집 개라는 말을 들으며 핍박받았고, 불교의 석가모니도 핍박받았고, 무함마드도 핍박받은 것입니다. 그런 핍박받던 모든 사람들이 성인이 된 것은 이 원칙에 있어서…. 역사가, 시간과 때가 지나감에 따라서 자연히 자기 때로 옴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기 마련입니다. 이 원칙에서 역사가 움직여 나가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189.205-206, 1989.04.06)
2, 공자의 종교적 신앙
종교경전
공자께서 광지방에서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을 때, 말씀하셨다. “문왕은 이미 돌아가 버렸지만, 그가 남긴 문화는 나에게 전해져 있지 않느냐? 하늘이 그의 문화를 없애버리려 했다면 후세 사람들이 그 문화의 혜택을 받고 동참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하늘이 그 문화를 없애지 않고자 하고 있는 이상, 광 지방의 몇몇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논어 9.5 (유교)
공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논어 3.13 (유교)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제(祭)를 올리시되 반드시 공경히 하셨다.
논어 10.8 (유교)
백우(伯牛)가 병을 앓자 공자가 문병을 가서 창문으로부터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이런 병에 걸릴 일이 없는데, 운명인가 보다! 이러한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러한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논어 6.8 (유교)
공자가 말하였다. “백성의 의로움(義)을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한다면 지혜(知)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6.20 (유교)
공자가 말했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공(子貢)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은 전하겠습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사계절이 운행되고 온갖 만물이 생장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논어 17.19 (유교)
말씀선집
사람만을 중심삼고 나온 성현은 없습니다. 인류만을 중심삼은 도리로 출발한 성현은 없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에 ‘위선자(僞善者)는 천보지이복(天報之以福)하고, 위불선자(爲不善者)는 천보지이화(天報之以禍)니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즉,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 갚아 주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화로써 갚아 준다는 말입니다. 공자가 이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중심삼고 도리의 기준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막연하나마 하늘을 제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성현의 반열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32.261, 1970.07.19)
도의적인 출발을 중심해서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 하늘을 중심삼고 인간은 바른 길을 가며, 가정생활의 전통을 바로잡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살고 사랑의 관계를 제멋대로 하는 사람들은 나쁘다고 하고, 이 사랑의 도리를 세워 나오기 위한 것이 인간세계에 종교도 나타난 것입니다.
유교가 그런 것입니다. 예식에 있어서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내용을 가르쳐 준 사람이 공자입니다.…그런 분을 통해서 외적인 인간의 도의적인 면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그것은 뭐냐 하면, 천사장형입니다. 그래서 도의적인 측면에서 세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295.174, 1998.08.28)
예수
문선명 선생은 나사렛 예수를 모든 종교 창시자 중 최고의 성인으로 간주한다. 문 선생님은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철저하게 연구했다. 예수님에 관한 그분의 설교가 여러 권의 출판물이 될 만큼 많다. 그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모든 것을 완성했다는 일반적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예수님을 이해하지 않는다.
문선명 선생님이 살아서 지상천국을 건설해야 하는 보다 큰 사명을 지녔다고 인식한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열망이 좌절되고 재림 때까지 천국 건설이 지연되었으며, 따라서 인류는 수세기에 걸쳐 고통과 투쟁 등이 공전되는 상황에서 생활해야 했다. 문선명 선생은 성서 구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개인적 성품, 사역의 준비, 예수님의 가족과의 관계, 그의 사역노정, 십자가, 그리고 그의 부활 등을 이러한 렌즈를 통해서 성찰한다.
문선명 선생은 예수를 ‘슬픔의 사람’으로 여긴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삼십년 동안 예수님은 가족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적지 않은 오해와 따돌림을 당했다. 당시 모든 유대 남자는 이십 대에 결혼하는 관습으로 비춰볼 때, 예수님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특별히 성스러운 모습으로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의심스러운 출생으로 상처입고 결혼할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을 시작할 무렵 특히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보듯이, 자신을 영접하도록 유대 백성을 준비한 하늘의 모든 노력은 이미 수포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전하고 싶었던 천국 건설의 복음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모호한 비유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영적 정치적 운동을 주도하고 이 세계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예수님의 의도는 결코 밝힐 수 없었다.
그의 사역에 반대하는 세력이 중대될수록 예수님의 슬픔도 한층 더 커졌으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또 다른 대안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에는 자신만 남겨놓은 채 도망가고 흩어지는 제자들의 나약함에 예수님의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예수님은 자신이 본래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채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그 이후의 수많은 세대들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필사적인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그 때까지 군중들은 그를 계속 거부하였으며, 죽음밖에는 다른 길이 없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류를 향해 온 정성을 기울인 예수님의 사랑은 변할 수 없기에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죽이는 적들까지 용서한 사실은 역사를 바꾼 지축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1. 죄악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종교경전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 모든 징벌과 모든 아픔을 고쳐 주셨다.
마태복음 4.17.23 (기독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디모데전서 1.15 (기독교)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 (기독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편히 쉬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멍에는 메기 편하고 내가 너희에게 지우는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28-30(기독교)
예수께서 그 집에서 식사를 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한 식탁에 앉게 되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들의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들으시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10-13 (기독교)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들을 흩어버린다. 그가 달아나는 것은 삯군이 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내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우리 안으로 인도해야 하겠다. 그리하면 그 양들도 내 음성을 듣고 마침내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0.11-16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님의 생활은 전부 자신의 책이모가 사명을 완수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책임을 땅 위에 완수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30여 평생의 생애는 영원불변의 실적, 책임을 다한 실적을 이 땅위에 이루어 놓은 생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믿음의 복음이, 남아 있는 이상 그의 생애도 남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일대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적인 면에서도 책임을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역사해 오신 뜻에 대해서도 홀로 책임을 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의 책임을 대신하여 나서는 이가 이 땅 위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1.37, 1956.05.16)
우주적인 의문을 해명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셔야 했던 것이고, 해결되지 않은 인간들의 죄를 해결해 주기 위해 예수님은 오셔야 했던 것이며,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인류의 이러한 의문과 사망과 죄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4천년 역사과정에 오셨던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위해 진실된 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자기를 초월하여 우주적인 의심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셨고, 자기 일신의 영광을 초월하여 우주의 영광을 위하여 수고하셨으며, 자기의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한히 희생하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 일관된 마음과 생활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를 대표하여 하늘 앞에 제일의 선봉자로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인 의심의 장벽을 헤치고 나서서 자신 있게 ‘나를 믿으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3.14, 1957.09.08)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버지를 찾아갈 자가 없다’ 이것이 얼마나 당당합니까? 좁은 길입니까, 큰 탄탄대로입니까? 그리고 ‘나는 진리’라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진리입니까? 답답한 진리입니까? 모든 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전부 환영하고, 모든 것이 좋다고 하고, 모든 것의 잼대가 될 수 있다고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이라고 할 때, 죽어서 시들어 가는 생명입니까. 발전하는 생명입니까? 그것을 어떤 곳에서 환영을 해야 됩니까?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106.13, 1979.11.04)
이상세계니 혹은 하나의 통일세계니 하는 것은 미완성한 상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무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성한 분, 완전히 아는 한 분을 이스라엘에 보내어 그 나라 사람들과 접촉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보내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주권 국가 형성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시작해야 되고, 예수님과 그 나라 백성이 완전히 하나 되어야 가능합니다. 즉, 메시아를 모시어 미완성한 개인이 완성되는 수속과 가정이 완성되는 수속과, 민족, 국가가 완성되는 수속을 전부 예수님의 뜻을 받아서 일체화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를 통해서 메시아를 맞은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위해서 보내신 것이기 보다도 메시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 되게 하여 세계를 구워하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54.41, 1972.03.10)
2. 예수 : 하나님의 아들, 말씀의 실체
종교경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3.16 (기독교)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한다는 말이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않느냐?…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6-11, 19-20 (기독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 주신 것을 보았고, 또 그것을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요한일서 4.9, 14-16 (기독교)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셨습니다.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으며,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요한복음 1.1-15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님은 이 땅위에 태어나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역사 이래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데는 자신이 아니고는 안 되다는 결정적인 선포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최고의 기준을 설파했고, 그 자리에 섰다고 자부하고 나선 이는 단 하나 예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하나님은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너희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며 하나님과 자신과의 일체를 말했습니다.
(53.231, 1972.02.28)
예수님은 독생자입니다. 독생자가 뭐냐?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사랑인데 그 사랑을 처음으로 몽땅 받을 수 있는 대표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독생자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구세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가르쳐 줬습니다. 그것은 나를 통하지 않고는 사랑의 인연이 연결 안 되다는 말입니다.
(146.168, 1986.06.15)
예수님이 한 말씀 중에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라고 하신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잘했습니까, 잘못했습니까? 잘했습니다. 이 말이 바로 인간으로서 성공을 거둔 말입니다. 인정을 중심삼고 천정과 천륜에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말씀을 종교적인 문제를 걸고 했습니다. 그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신랑 신부의 관계 이상 가까운 관계가 있습니까? 또, 부자의 관계 이상 가까운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신도들과는 한 형제다’라고 했는데 이 이상 더 가까운 관계가 있습니까? 이 말은 무엇을 중심삼고 말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가정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정서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모든 것을 종합해 가지고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9.41-43, 1971.01.09)
성경 말씀 가운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14: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 인간들 앞에 무엇을 예시시킨 것인가. 이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 말씀이 그대로 하나님의 심령에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만, 말씀을 잃어버린 사람도 역시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이 말씀을 인간들에게 주신다는 것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망하던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3.318-319, 1958.02.02)
예수님은 사탄의 핏줄을 전환시킨 깨끗한 내적 혈통적 터전 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시대에 처음 나오신 분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과 한 몸이다’라고 하셨고,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수가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종교 지도자가 있다 하더라도 역사적인 사탄의 더러운 피를 맑혀서 혈통을 전환시키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고 태어난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석가도 공자도 무함마드도, 그 누구도 이러한 배겨을 받아서 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분이 이 땅 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인류 앞에 있어서 희망중의 희망이요, 생명의 새로운 기원과 부활을 맞을 수 있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53.205-206, 1972.02.21)
3. 예수 : 참사랑, 원죄 없는 제2 아담
종교경전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음 산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기독교)
진실로 하나님에게 예수는 아담과 같으니라.
꾸란 3.59 (이슬람)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디모데전서 2.5 (기독교)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고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심을 얻었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히브리서 5.7-9 (기독교)
하나님께서 오,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네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나와 나의 어머니를 두 신으로 섬기라 하고 말하였느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길, 당신께 영광 있으소서, 말할 권리도 없는 제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제가 그런 말을 하였다면 당신은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제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아시지만 저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옵니다. 감추어진 것을 아시는 분은 당신뿐이옵니다.
제가 그들에게 말한 것은 당신께서 저에게 명령하신 대로 나의 주님이자 당신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제가 그들 속에 머물고 있는 동안 저는 그들에 대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저를 죽게 하신 후부터는 당신께서 감시자이시며 모든 것에 대한 증인이십니다.
꾸란 5.116-117 (이슬람)
말씀선집 아담과 해와가 창조이상을 완성하여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은 원죄가 없는 선한 자녀가 되어 지상천국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의 악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악한 자녀들을 번식하여 지상지옥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타락한 인간들은 원죄가 없는 자녀로서 거듭나기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낳아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면 아니 된다. 그러면 타락한 우리들을 원죄가 없는 자녀로 다시 낳아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선한 부모는 누구일 것인가? 원죄 있는 악의 부모가 원죄 없는 선의 자녀를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의 부모가 타락인간들 가운데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모는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따라서 그는 타락한 자녀들을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지상천국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참 버지로 오셨던 분이시다.…예수님은 아담으로서 못 이루셨던 참 아버지로 오셨기 때문에 성경은 그를 후아담이라고 하였고, 영존하신 아버지라 하였다.
(원리강론, 기독론 4.1.1)
예수님도 가치적인 내용을 통해서 보게 될 때 우주와 생명과 바꿀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그 생명에는 사랑이 있고 이상이 통하게 돼 있습니다. 생명과 이상이 자동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생명이 약동하고 이상을 중심삼고 생명이 약동하게 돼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와 위치를 알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높고, 우리 인간은 죄인이고 피조물이니, 가치가 없고, 예수님은 하나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연결됩니까?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사람 편에 서야지 하나님 편에 있으면 어떻게 되냐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중보가 있으니 그는 곧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죄인이 어떻게 갑니까?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 뜯어 정리해 놓아야 됩니다. 이론적으로 타당하게 전부 정리해 놔야 합니다. 그는 죄 없는 사람이요, 우리는 죄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교류될 수 있고, 생명과 교류될 수 있고, 이상과 교류될 수 있는 분입니다.
(68.80-81, 1973.10.20)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 혹은 성자들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어떠했을까? 공자나 석가 같은 양반들은 어떠했을까? 공자나 석가 같은 양반들은 어떠했을까? 성인이 뭐냐? 몸과 마음이 우리는 한 시간에 몇 백 바퀴 돌아가는데, 그런 사람들은 한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물어 보겠습니다. 예수가 남잔가요, 여잔가요? 남자입니다. 그 남자가 여자를 보게 되면 생각이 어땠을까요? 여자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 틀림없이 여자이기 때문에, 자연이치로서 플러스, 마이너스가 만나면 인력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128.78. 1983.06.05)
4. 그리스도 강림 준비와 세계 요한의 책임
종교경전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가 5.2 (유대교)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한 것과 같이, 세계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계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계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고 살았다.
마가복음 1.2-6 (기독교)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 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조차 없고.”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되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 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다’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계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6-34 (기독교)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며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요한을 두고 무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였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 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들이고자 하면, 요한 바로 그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복음 11.2-15 (기독교)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서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어 보게 하였을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하고 고백하였다.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엘리야요?”하고 물으니, 그는 “아니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예언자요?”하고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하고 대답하였다.
요한복음 1.19-21 (기독교)
말씀선집
이 사탄세계에 아무 준비도 않고, 기반도 닦지 않고 메시아를 그냥 보내 주면 원수 사탄은 그를 잡아 죽일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역사를 통하여 종교를 세운 것입니다. 그 종교 가운데서도 주류적인 종교를 세워 가지고 하나님 편으로 갈라내어 사탄과 대항해서 이기는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형성하여 그 기반 위에 메시아가 완전히 하나 될 수 있는 국가적 기반을 갖추어 메시아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한 터전이 이 이스라엘, 승리했다는 의미의 이스라엘 나라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74.59-60, 1974.11.12)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 앞에 메시아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수많은 선지자를 연결시켜서 그것을 전달해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바라고 있는 이스라엘민족 앞에 약속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님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메시아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와 하나 되지 못하고 메시아를 잡아 죽였다는 사실, 이것은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입니다.
(73.218, 1974.09.18)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부르시어 저들을 보호 육성하시고, 때로는 그들을 고난과 시련으로써 인도하셨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시어 위로하시며 장차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굳게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막과 성전을 지음으로써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하시고, 동방박사, 시므온, 안나, 세례 요한 등을 보내시어 메시아의 탄생과 그의 현현을 널리 증거 하셨던 것이다.
특히 세계 요한에 대해서는 그가 잉태될 때 천사가 나타나서 증거 한 사실을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고(눅1:13), 그가 출생할 때 되어진 기사는 당시의 유대 성주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눅1:63-66). 뿐만 아니라 광야에 있어서 그의 수도생활은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하고 생각게 할 정도로 놀랄만한 것이었다.(눅3:15), 하나님이 이렇듯 위대한 세례 요한까지 보내시어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 하게 하셨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원리강론,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1.3)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빋고 있는 유대교 신자들이 전부 예수와 하나 되었다면 누가 예수님을 잡아 죽이겠습니까? 누가 잡아 죽이겠느냐 말입니다. 그렇게 됐으면 어떻게 되느냐? 고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도가 되고 제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발바닥과 같은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까? 베드로와 같은 무식 장이들과 세리와 창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74.153, 1974.11.28)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례 요한에게 직접 교시하셨고, 세례 요한 자신도 도 그렇게 증거 하였으며…. 그러나 그는 무지로 인하여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야 할 그의 목숨마저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희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중심이 하늘 편에 있었을 때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증거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영적인 역사가 끊어지고 인간 세례 요한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의 무지는 더욱 더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례 요한은 특히 옥중에 들어가게 된 후부터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인간 세례 요한의 눈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도 역시 엘리야가 오기 전에 나타난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하고 질문하여 그 의심을 풀어 보려 하였다. 이러한 세계 요한의 질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3절 내지 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분개심에 격한 경고의 내용을 가지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눅1:75), 그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고난어린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을 출발하실 때, 하늘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것을 증거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의 은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계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자기가 바로 메시아라는 대답을 하시지는 않았다.
(원리강론,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2.3)
마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했습니다. 한 번은 제일 크다고 하고 한 번은 제일 작다고 하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선지자의 사명은 뭐냐 하면 메시아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선지자들은 보지도 못하고 예언을 통해서 메시아를 증거 했지만 세례 요한은 눈으로 직접 보고 증거 했기 때문에 선지자 중에서는 제일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 있는 제일 작은 옛날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고 다 모시고 있는데 세례 요한은 모시는 데 있어서 제일 꼴찌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위해서 태어나고 죽어도 메시아를 위해서 죽어야 할 텐데, 시시하게 헤로디아의 연애 사건에 말려들어 목이 베여 죽었습니다. 그게 세례 요한의 갈 길입니까?
12절에 어떻게 돼 있습니까?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암만 부정하려고 해도 미스터 문의 말이 옳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예수님 때까지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고 힘쓰는 자가 약탈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수제자가 누가 됐느냐? 틀림없이 세례 요한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열두 제자 70문도가 전부 세례요한의 일당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교와 직렬로 통해서 제사장과 서기관을 다 하나로 묶을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였습니다.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주는 예수님 앞으로 사람들이 다 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이르니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해야 되고 나는 망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례 요한이 겸손한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같이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흥하면 자기도 흥하고 예수님이 망하면 자기도 망해야 될 텐데, 다른 길을 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게 된 것은 세례 요한 때문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믿지 못하겠으면 하나님에게 담판기도를 해보십시오,
(69.139-140, 1973.10.23)
5. 그리스도 강림의 세계적 준비
종교경전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하였다.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 왕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지를 그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통치자들 가운데서 가장 작지 않다. 네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일 것이다.’” 그 때에 헤롯은 그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캐어묻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하기를 “가서, 그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하였다. 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떠났다. 그런데 마침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그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복음 1.2-11 (기독교)
고대 동방의 아이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 지혜는 아브라함이 첩의 아들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 지혜는 아브라함이 첩의 아들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창세기 25장 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에게도 한 몫씩 나누어 주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을 동쪽 곧 동방 땅으로 보내어서, 자기 아들, 이삭과 떨어져서 살게 하였다.” 시간이 흐르며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받은 이 지혜를 많이 따르게 되었다.
조하르 1.100b (유대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마태복음 8.11 (기독교)
말씀선집
인도의 불교권, 중국의 유교권, 조로아스터교권 등 여러 종교 단체가 동양 제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각 종교의 영통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227.81, 1992.02.10)
초림 때에는 하나님이 그의 선민을 위하여, 메시아가 강림하시기 430년 전에 선지자 말라기를 보내시어, 메시아가 강림하실 것을 예언케 하시고,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쇄신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선민으로서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셨다. 한편 이방인들 간에 있어서는, 이와 거의 동시대에 인도의 석가모니(565-485 B.C)로 하여금 인도교를 발전시켜 불도의 새로운 터전을 개척케 하셨고, 희랍에서는 소크라테스(470~399 B.C)로 하여금 헬라문화시대를 개척케 하셨으며, 또 동양에서는 공자(552-479 B.C)로 하여금 유교로써 인륜도덕을 세우게 하시는 등, 각각 그 지방과 그 민족에 적응되는 문화와 종교를 세우시어, 장차 오실 메시아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심령적인 준비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와 같이 준비된 터 위에 오셔서, 기독교를 중심하고 유대교를 수습하고 헬라문화 및 불교, 유교 등의 중교를 포섭함으로써, 그 종교와 문화의 전역 하나의 기독교문화권 내에 통합하려 하셨던 것이다.
(원리강론,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연장시대 6)
예수님도 아시아계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걸 탕감복귀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서구문명은 로마를 중심삼고 반대로 온 것입니다. 본래 예수님이 죽지 않았으면, 인도의 불교권, 극동 아시아의 유교 종교권이 기독교를 중심삼고 통일권을 먼저 이루어야 했습니다. 종교권이 통일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종교권에 서 있는 최고의 지도자는 영계와 통하기 때문에, 앞으로 하늘이 가는 방향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라를 수습하여 로마에서 독립해 가지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권이 가나안을 복귀해서 분배된 그 땅이 통일되었다 할 때는 틀림없이 아시아가 흡수됩니다.
(229.174-175, 1992.04.12)
6. 가족의 오해
종교경전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셨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자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까?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친척과 가족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다.”
마가복음 6.1-4 (기독교)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에 돌아와서,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누가복음 2.41-51 (기독교)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하였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였다. “여자여,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1-4 (기독교)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마가복음 3.31-35 (기독교)
말씀선집
처녀가 아기를 배서 낳은 것을 기독교인들은 성신이 잉태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까? 그때는 동생들도 저주했고, 동네에서도 전부 다 손가락질을 했고, 동네 아이들의 마사거리가 되어서 쫓겨 다니고 도망 다니던 그런 예수였을 것입니다. 33살이 될 때가지 장가를 못 간 예수라는 것입니다. 사생아인인데다 전부에게 천대받는 사람이니 누가 딸을 예수의 색시로 주겠다고 그러겠느냐는 것입니다.
(243.42-243, 1993.01.17)
예수가 자신이 사생아인 것을 몰랐을 것 같습니까? 다 알았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싸웠습니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 볼 때 대답을 안 하니, 자기가 살려 준 것을 중심삼고 싸운 것입니다. 요셉이 물어 봤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성신으로 잉태했다!’하면, 살려 주었는데 무슨 수작이내?’하며 요셉이 믿었겠느냐 그 말입니다. 예수를 놓고 부처끼리 싸우고, 아들딸을 낳아 가지고도 계속 싸움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어서 예루살렘의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 부모가 아들을 버리고 사흘 동안 갔다가 찾아와서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하니.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느냐?’고 했습니다. 그것이 불평이었습니다. 어미 아비가 사흘 동안 아들을 버려두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내용을 감춰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가 막힌 말입니다. 그것을 전부 다 찬양하고 있으니….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믿고 천국 간다고 하지만,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결혼을 못 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요, 세례 요한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235.237-238, 1992.09.20)
목수인 요셉의 일을 협조해 주면서도 편안한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심정은 무한한 곡절의 노정을 거쳐 왔다는 것입니다.
(7.334, 1595.10.18)
마리아까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결혼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해 버린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 한 것도, 가장 귀한 섭리의 요정인 예수님의 신부 맞는 일에 등한시하고서 먼 친척의 혼인잔치를 도우려는 마리아를 책망한 심정이 표출된 것입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이냐?”(마12:48)하신 말씀도 이런 기준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272.210, 1996.04.16)
18세면 결혼하게 돼 있고, 20세면 결혼하게 돼 있는데 왜 33세까지 결혼 못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7살에 자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담이 16세에 타락했기 때문에 이걸 복귀하기 위해서 ‘나는 이러이러한 과정을 거쳐 가지고 결혼해야 합니다’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7살, 30살까지 세 번씩 결혼할 것을 말했는데 어머니가 들어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266.193, 1994.12.25)
십자가를 지시게 된 직접적인 동기도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하고 유대교인이 반대할 데에 있다기보다는 요셉의 가정에서 그러한 축복의 한날을 갖지 못한 데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한날을 가졌더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30.173-174, 1970.03.22)
7. 광야에서의 3대 시험
종교경전
그 뒤에 예수께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시러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셨습니다. 밤낮 40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떡이 되라고 해 보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사자들에게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소”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도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다시 악마는 매우 높은 산으로 예수를 이끌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이며 “당신이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아, 물러나라! ‘주 너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드디어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습니다.
마태복음 4.1-11 (기독교)
말씀선집
광야노정의 3대 시험에서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키고 최후의 승리를 한 곳도 높은 산 꼭대기였습니다. 택함 받은 세례 요한과 그 일당에게 배척을 받고 유대민족에게 배반을 당하고 찾아가는 광야노정의 걸음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 땅 위에 어느 누구도 체휼하지 못한 슬픈 심정을 가지고 걸었던 걸음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하늘의 독생자요, 4천년 역사를 해결할자요, 또한 그 시대와 천추만대의 후대 앞에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표적으로서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백성도 뒤로 하고, 교단도 저버리고, 택한 세례 요한도 요셉가정도 남겨 두고 친구도 없이 홀로 광야로 나가던 서글픈 심정을 우리들은 회상치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결심을 하고 나선 예수는 40일 금식을 하면서 그 한 장소에서 무엇을 회상하였던고, 옛날 선조들이 걸어 나온 슬픔의 노정을 자기 일신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누구보다 절절히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 시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뜻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장한 심정을 품고 나선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선조보다도 확고한 각오를 하고서 사탄을 그 작중에 쥐고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광야에 나가셨던 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산장에 홀로 섰던 예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5.194-196, 1959.01.25)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사탄으로부터 몇 가지의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40일 금식기간에 먼저 먹을 것으로 시험받았습니다. 사탄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굶주린 인간들에게는 희소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부정하고 자신이 먹을 것 때문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살아가는 실제 생활권내에 있어서 모든 조건을 사탄 앞에 잃지 않았다는 입장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인간은 물질을 중심삼은 투쟁역사를 거쳐 왔는데, 예수님께서 사탄의 제1차적인 시험에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물질을 중심삼은 투쟁역사를 종결시키게 되었던 것을 여러분을 알야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어떠한 시험을 받게 되었던가,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이끌려 교회의 성전 꼭대기에 서게 되었는데, 거기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4:6)”라는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민족과 유대교를 지도할 수 있는 종교이념을 갖고 나타나신 예수님에게 ‘뛰어 내리라’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유대교적인 습관과 그들의 주장 앞에 굴복하여 그들의 지도자의 입장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다음엔 무슨 시험이 있었습니까? 사탄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꼭대기에 올려놓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우주적인 이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세워드리기 위해 사탄의 그러한 요구를 일축해 버리셨던 것입니다.
(3.122-123, 1957.10.13)
8. 예수님의 비유적 가르침
종교경전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13.31-34 (기독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마태복음 13.10-13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30여 평생 눈물을 흘리시며 서러운 고난의 길을 가시면서 말씀을 선포하신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첫째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인연을 회복하기 위함이었고, 그 다음엔 인간에게 천국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천국을 소개하실 때 말씀으로 소개하신 것입니다. 즉, 진리로써 천국을 소개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인간과 영원불변의 인연을 맺기 위한 말씀, 이 땅에 천국이념을 건설하기 위한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에게 내려주신 것입니다.
참다운 진리를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맺어주기 위해 오셨고, 참다운 진리를 인간들에게 증거 하기 위해 진리를 가지고 오셨던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과 온 피조만물이 소망하는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인연을 회복하기 위해 진리를 선포해 주셨지만, 그 진리와 인연을 맺어야 할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 선포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된 진리의 말씀이 인간들에게 백퍼센트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인간들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와 상징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진리를 소개해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인간들은 역사과정을 거쳐 오면서 많은 지식을 동원하여 감추어진 진리의 관문을 찾아 나왔던 것입니다.
이제 역사의 종말세대가 되면 인간들이 내외적으로 찾아 나오던 신령과 진리가 만날 때가 올 것고, 또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는 참된 신자로 서게 될 것이며, 예수님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진리도 완전히 소개될 것입니다.
(2.126-127, 1957.03.17)
9. 제자를 모으고 천국을 가르친 예수
종교경전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복음 4.18-22 (기독교)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0.37-39 (기독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래하였다. 잔치 시간이 되어, 그는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하고 말했다. 또 다름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오,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그 종이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저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하였다. 그런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14.16-24 (기독교)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는 내버려진 가지처럼 말라버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아 불에 던져 태운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명령을 지키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4-11 (기독교)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진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복음 10.16-20 (기독교)
말씀선집
민족 앞에 저버림을 당한 예수님은 노동자 모양으로 나타나서, 어부의 친구 모양으로, 그들과 사정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고, 심정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고, 소원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시어서 그들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기를 각오하고 이루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싸우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심적인 내용과 심적인 이념을 갖고 증거하고 싸우셨던 연고로 베드로와 같은 어부들이 따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식한 제자들을 택해 놓으시고 3년 동안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세우시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하며 봉사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세워 놓으시고 봉사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12제자를 택해 놓으신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소망이 크셨습니다. 유대교단을 움직이고, 제사장들과 모든 서기관들을 주관하기 위하여 하늘이 보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의 이념은 컸고, 그가 가진 욕망도 컸고, 그의 심적 기준도 높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실체이념을 갖고 하나의 개척자의 입장으로 나타났던 예수님을 몰라보았던 당시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타락 직후의 아담 해와 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먹을 것이 생겼다 할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제자들을 찾으셨으며, 입을 의복이 있으면 자기가 헐벗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편안한 자리가 있으면 제자들을 그 자리에 두시고 자기는 천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5.225, 1959.02.01)
종교를 믿는 것은 구원받겠다는 것이요, 구원받겠다는 것은 완성의 자리에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인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세상 사탄권내의 어떠한 사랑보다도 믿는 종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맹세하고 나서는 길이 종교의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 이상의 사랑의 자리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사탄세계를 이겨야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사탄세계 이상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이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의 어머니나 혹은 아들딸이나 처자나 남편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누구보다도 자기를 사랑치 않으면 아버지의 아들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사랑으로부터 드러나야 거기서 출발하기 때문에, 메시아의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하늘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피적인 원리적 조건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93.326, 1977.06.17)
배고픈 사정으로 책임자와 심정적 유대를 맺을 수 있지, 옷 입는 것으로, 사는 것으로, 교제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핍박을 받고, 쫓겨 다니고, 그러면서 밤낮없이 일을 해야 되고, 책임분량은 많으니까 안 할 수 없고, 밤낮 뛰어다니면서 그저 너도 울고 나도 울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는 일 외에는 심정적 유대를 이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못 하는 날에는 일본이고 한국이고 지구고 뭣이고 없습니다. 선생님과 심정적 유대는 어떻고, 참부모와 심정적 유대는 어떻고 하는데, 그것을 어디서 찾을 것 같습니까? 찾아보십시오, 없습니다.
그저 쫓겨나고, 부모한테 납치를 당하고, 매를 맞고 그저 이래야 되는 것입니다. 책임자들이 다 그렇게 해 나왔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 여기서 새로운 연결이 이루어지고 세계가 반대해도 끊을 수 없는 유대가 벌어지고, 심정적 가치의 기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런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94.233, 1977.10.01)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계시나, 재림하셔서 주실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초림 때와 똑같은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초림 때에 있어 하나님은 메시아가 오셨다는 소식을 제사장이나 교법사들에게는 주시지 않고 이방의 점성술자와 순진한 목사들에게 주셨던 것이니, 마치 친 자식이 무지하기 때문에 의붓자식에게 뜻을 준 것과 같은 격이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소식도 진부한 신앙태도를 묵수(墨守)하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보다는 도리어 평신도들이나 그들이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이교도 혹은 양심적으로 사는 불신자들에게 먼저 계시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초림 때에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이 선민인 유대교의 지도층이 아니고 그 하민(下民)이나 이방인들이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의 재림 시에도 선민 된 기독교의 지도층들보다 평신도나 비기독교인들이 먼저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예비한 잔체에 참석할 자는 미리 청함 받은 손님들이 아니고, 한길에서 만나는 대로 불러들여진 사람들일 것이라고 개탄하셨던 이유는 바로 여기게 있었다.(마22:8~10)
(원리강론, 재림론 4)
10. 이적기사에도 불신을 받음
종교경전
사도들이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따로 조용한 곳으로 가서 잠시 쉬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오고 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배를 타고 조용한 곳으로 향하여 떠났갔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육로를 돌아 그곳에 먼저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큰 무리를 보시니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날이 저물어감으로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여기는 빈들이요, 날도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보내어 근처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가서 저마다 무엇을 사먹도록 하시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반문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떡 이백 데나라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이 먹도록 줄까요?” “너희에게 떡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알아본 후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사람들을 떼를 지어 푸른 풀밭 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백명씩 혹은 오십명씩 떼로 줄지어 앉았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린 후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만족하게 먹고도 떡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은 것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떡을 먹은 사람은 남자만 오천명이었습니다.
마가복음 6:30-40(기독교)
제자들이 말하기를, 오 마리아의 아들 예수여! 당신의 주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식탁을(음식이 차려진_ 내려주실 수 있습니까? 하였을 때 그가 말하기를 너희가 믿는 자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들이 말하기를, 그것을 먹기 바라며 우리의 가슴이 만족하기를 바라고 당신이 우리에게 한 진리의 말씀을 알기를 바라며 우리가 그것을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말하길, 우리의 주이신 하나님이시여! 우리들에게 하늘에서 식탁을 내려주셔서 우리들에게 최초이며 최후의 축제일로 하여 당신으로부터의 증거로 해주시옵고 우리에게 생계를 지원해 주시옵소서. 당신께서는 최고의 후원자 이십니다.
꾸란5.112 - 114(이슬람)
그들이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를 만나서 말하였다.“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 그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은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마지막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너희가 인자가 전에 있던 것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누구이며, 자기를 넘겨 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업삳고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
요한복음 6:25 - 67(기독교)
말씀선집
하나님 앞에 예수님은 어떠한 변명도 조작도 없이 자기 자체를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대신한 뜻이라면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발자취를 인계 받는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30여년의 생애를 거치면서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다가 굶주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즉석에서 5병2어로써 5천여 무리를 먹이는 기적도 베풀었습니다. 생명도 소개하였고, 사랑도 소개하였고,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전체를 다 소개해 주었던 것입니다.
(4.83. 1958.03.09)
복귀의 노정을 걸어가신 예수님께서 이적 기사를 행하신 것은, 기뻐서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쁘고 편안하여서 이적 기사를 행하신 줄 안다면 큰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동정을 안해줄 수 없는 서글픈 사정에 처하여 손을 들어, 아버지시여! 하고 부르게 될 때 여기서 이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극히 슬픈, 뼈살이 녹아지는 슬픈 장면에서 외치는 그 한 사정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이 이적 기사였습니다.
이적 기사를 예수님이 태만해서 혹은 좋아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벳세다 들에서 5천여 무리가 ‘예수여! 당신은 우리의 구세주여, 택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이십니다.’라고 손에 손을 흔들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처럼 이익이 될 수 있는 입장일 때는 찾아왔으나, 시일이 지나 예수가 자기들과 심적 기준이 달라지고, 사정이 달라지고, 표준이 다른 경지에로 한발자국 더 나아가니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걸어온 실천노정에 있었던 현상입니다.
(5.227~228, 1959.02.01)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가 5병2어의 기적을 보여줄 때에는 자신의 메시아요, 민족을 구해주는 구세주로 믿었는데, 정작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는 다 버리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가 하늘을 대한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 즉 하나님에 대해 사무친 심정을 지니신 분이요, 전체의 섭리역사를 책임지고 오실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사정을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또 먼저 따르던 무리들을 따라 민족 전체가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3.291. 1958.01.19)
11. 인류를 위해 흘린 예수의 눈물과 불신에 대한 애통, 믿음이 약한 수제자
종교경전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아래 엎드려서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예수께서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은 “주님, 와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 11:32 - 36 (기독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잔과 접시와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눈 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마태복음 23:23 - 28(기독교)
그들은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시며 괴로워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그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 비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예수께서 세 번째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넉넉하다.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마가복음 14:32 - 41(기독교)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제사장의 하녀 가운데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노려보고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부인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바깥뜰로 나갔다. 그 하녀가 그를 보고서, 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예수와 한패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인하였다.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 당신이 갈릴리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일 거요.”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새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서 엎드려 울었다.
마가복음 14.66 - 72(기독교)
말씀선집
자기를 위하는 하나님이 참사랑을 가졌다고 말 할 수 있겠느냐? 자기를 없애 버리고 전체를 위하는 하나님이 참사랑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오늘날 타락한 인간을 대해 가지고 울면서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좋아도 눈물이 나고 슬퍼도 눈물이 나지요? 그럼 ‘엉엉’ 울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다 할 때 ‘하하’ 하겠습니까, 어떻겠습니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찾으면서도 울고, 찾고 나서도 둘이 붙들고 ‘엉엉’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겠습니까? 눈물을 흘리고, 콧물을 흘리고, 입물 흘리는 자리에서 눈물만 흘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침이 나오고 코가 나오고 눈물이 나와야 됩니다. 그렇게 한번 울어 봤습니까? 진짜 슬프게 울면 눈물 나오고 콧물 나오고 입물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땀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울어보지 않았으면 참사랑을 찾지 못합니다.
(102.163-164, 1978.12.17)
하나님의 섭리는 이 사탄세계에서 전쟁하는 섭리입니다. 싸움하는 섭리입니다. 예수님도 가만히 잘 사는 유대교인들에게 와서 전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이니 ‘외식하는 사람’이니 했습니다. 전부 전쟁입니다. 아, 유대인들 잘 한다, 교법사들 잘 한다, 율법사들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제사장들 다 훌륭하다. 그랬으면(예수님을) 죽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무함마드나 공자 같은 사람들이 전부 그렇게 했으면 달라졌을 것입니다.
(95.276 - 277 1977.12.11)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예비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반대하는 것이 슬픔이 아니요, 유대교 교인들이 반대하는 것이 슬픔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3년동안이나 따랐던 제자, 그 사랑하는 제자들이 믿어야 할 때에 믿지 못하고, 증거 해야 할 때에 증거하지 못하고,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하고, 죽어야 할 때에 죽지 못했던 그 한 사실이 예수님에게 가장 큰 서러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3.142, 1957.10.18)
예수님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따른 자가 누구였던가. 예수님의 열두 사도가 아닙니다. 그 열두 사도 가운데 세 제자도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따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인간들에게 소개했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셨던 예수님 이었지만 인간들과 사랑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천륜의 사랑의 말씀을 전하였고 사랑에 불타는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 이었지만, 붙잡고 ‘내 아들아, 내 아버지!’ 하며 부자의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자들은 졸고 있었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세워가며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그 심정과 사정을 여러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의 말씀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사랑하려야 사랑할 데가 없었습니다.
(3.58, 1957.09.22)
예수님은 슬픈 30여년의 생애를 보냈사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3년의 공생애가 있었으나 누가 그의 심정을 알았사오며, 누가 그의 사정을 알았사옵니까?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희로애락을 같이하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하고 외로울 때 같이 외로워하며 스승이라고 모시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스승이 죽음의 길을 갈 것을 염려하여 간곡한 심정으로 하늘을 붙들고 호소해야 할 제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고 반문하는 처지에 있었으니.
(7.45 1959. 07.12)
이 땅 위에 어느 누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사옵니까? 수심에 잠긴 그 모습을 보고 마음깊이 사무쳐 오는 하늘의 슬픔을 체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하늘은 이러한 인간들을 놓고 탄식할 수 밖에 없었음을 아옵니다. 하늘의 심정을 알아 ‘주여!’ 하고 부르는 제자 하나도 갖지 못한 예수님께서 의심으로 점철된 생애노정을 가셔야 했고, 또한 의심을 받으며 그 서글픈 생애의 종말을 맞아야 했던 슬픔을 이 시간 저희들이 마음으로 동정할 수 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간곡한 하늘의 심정을 품고, 하늘 전체의 위업을 품고 인간을 찾아오셨으나 인간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자기들 멋대로 대하였고 배척할 대로 배척하였사옵니다. 외로운 자리로 몰아넣을 대로 몰아넣었사옵니다. 그러나 슬픔에 잠기고 탄식의 자리를 여지없이 밟아나오시면서도, 예수님은 그러한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생명의 동산을 향한 한길을 개척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끌고 겟세마네동산을 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처참한 가슴 앞에, 믿음직한 제자 하나 없었던 서글픈 사정을 저희들이 알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이 사신 것을 알지 못하였던 제자들, 이런 제자들을 남겨 두고 한 생애를 종결지어야 할 입장에 있던 예수님의 심정, 생애의 전부를 인간을 위하여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생애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처절한 심정에 잠기어 하늘을 염려하시던 예순의 마음을, 저희들이 이 시간 동정할 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5.137 - 138, 1959.01.11)
12. 그리스도의 열정과 십자가의 고뇌
종교경전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번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하면서 예수께 항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셨다.
마태복음 16.21-23 (기독교)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밖으로 나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그 곳에 이르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들에게 돌을 던져 닿을 만 한 거리에 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 오면 내게서 이 잔을 걷어 가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무리 한 떼가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는 자를 앞장세우고 나타났습니다. 그가 예수께 와서 입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려 하느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지는 사태를 보고 “주님, 우리가 검을 쓸까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대세사장의 종의 오른편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만 두어라”하고 말씀하시고 그 사람의 귀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들과 장로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검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으니 나를 강도로 보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었으나 너희가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의 때요 어두움이 지체하는 때가 되었다” 그 때에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를 모욕하고 때리며 눈을 가리고 물었습니다. “자, 그대를 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시오” 그들은 계속하여 예수께 무례한 짓을 했습니다.
새벽에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 예수를 그들의 의회로 끌고 가서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요, 내가 물을지라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인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게 될 것이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라는 것은 너희가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직접 그의 입으로 나오는 말을 들었으니 이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소?”하고 말했습니다.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고소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그릇되게 하여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하고 증언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네가 말한 대로다”하고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끌고 나가다가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따르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 여자들은 그를 생각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예수께서는 여자들을 돌아다보시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자녀를 위하여 울어라. 보아라. 사람들이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과,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한 태와 멎을 먹여 본 적이 없는 가슴이 복되다’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산에다 대고 ‘우리를 덮어 버려라’하고 말할 것이다. 나무가 푸른 계절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하거늘 하물며 나무가 마른 계절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냐?”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사형장으로 예수와 함께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함께 끌려간 죄수도 하나는 그의 오른편에, 하나는 그의 왼편에 달았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그들은 예수의 옷을 제비뽑아 자기들끼리 나누었습니다. 군중은 서서 쳐다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조롱하며 “이 사람이 남을 구원했으니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자기도 구원하게 하라”하고 말했습니다. 군인도 또한 예수를 희롱하면서 가까이 가서 신 포도주를 드리고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거든 자기 자신을 구원하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머리 위에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쓴 패가 있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달린 죄수 중의 하나는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당신 자신을 구원하고 또 우리를 구원하시오”하고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날카롭게 반박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낮 열두시쯤 되었을 때에 어두움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해가 빛을 잃고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누가복음 22.39-23.46 (기독교)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하셨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는 뜻이다.
마태복음 27.46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께서 죽으러 왔다는 것이 본래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되어진 것이냐, 돌변지사냐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돌변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알아봅시다. 누가복음 9장 30절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말씀할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결정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2절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돌아가실 것을 말하니 베드로가 예수께 ‘주여 그러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할 때,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예수가 죽으러 온 거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 말이 죽으러 온 메시아의 말인데 죽지 말라고 하니, 베드로에게 그렇게 지적한 것이 아니냐며 죽으로 왔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이미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십자가의에 돌아갈 것을 결정한 후의 말씀인 것을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죽으러 왔다면 가룟 유다를 두둔했어야지, 너는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그런 말은 모순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죽으러 왔다면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없다 이겁니다. 만일 죽으로 왔다면 왜 하나님 4천 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그렇게 고생시킨 터전 위에 보냈을까요? 강도들한테 보내 주면 대번에 잡아 죽일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육과 영을 중심삼고 영적 세계는 물론이지만 실체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의 발판이 없어지고 유대교의 발판이 없어져, 예수님 혼자 할 수 없으니 십자가에 죽어서라도 제2차의 소망의 길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라가 반대하고 교회가 반대하니 십자가에 가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불가피하게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73.218-220, 1974.09.18)
예수님의 길은 한결같이 찢기고 몰리고 쓰러지는, 십자가를 진 처참한 걸음이었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까? 무모한 악당들이 채찍을 들어 내모는 처지에 몰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만일 예수가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그도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제자를 뒤에 놓고 기도할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한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자기의 사정도 딱 하나, 자기 일신은 민족의 제물이요, 인류의 제물이요, 천륜의 제물인 것을 알았던 것이빈다.
이런 것을 아신 예수님은 자신의 슬픔도 슬픔이거니와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 나타났으나 민족 앞에 배반 받은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을 더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황태자요, 만 우주의 주인공이요,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예수가 ‘처참한 십자가의 운명이 웬일입니까? 하고 탄식하려면 이 우주를 동원하여 탄식할 수도 있었으나 탄식할 수 없는 자기 자신임이 느껴졌기 때문에, 몰리는 자리에 세게 된 것을 오히려 하늘 앞에 면목 없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교단을 규합하고 민족을 규합시켜 하늘의 왕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아버지 품에 안겨드려야 할 책임을 짊어졌던 예수님은, 그 사명을 뒤로 미루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 원망할 어떤 무엇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잔을 피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신 것도 자기 일신이 죽는 것이 서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일신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서러움과 하늘의 서러움이 가중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쓰러지면 후대의 세계 인류 앞에 가중될 십자가가 남아지고, 그로 인해 슬름의 역사가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골고다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죽음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골고다의 길을 가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골고다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뿐만 아니라 더 어려운 길이 남아질 것을 아신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양손 양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자리, 가시 면류관을 쓰는 자리에 선다하더라도 이것이 자기에게 그쳐지지 않을 것을 아신 예수님은 하늘을 향하여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십자가의 길이 다 끝났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울며 염려하는 마음의 호소와 하늘과 통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수 많은 선지선열들이 하늘 앞에 저질렀던 모든 잘못을 짊어지고, 하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자기자신을 산 제물로서 하늘 앞에 바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죽어가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장에 노아 때 이상의 심판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예수님이 민족을 붙들고 죽고, 교단을 붙들고 죽고, 십자가를 붙들고 죽는 연고로, 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어 나오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시적인 인연이 후대의 인간, 남아진 이스라엘 민족과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배반하는 후대의 교단과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고 붙들어 나오고 계십니다.
(378.314, 2002.05.21)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면서 심히 지쳤을 때, 그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간 구레네 시몬 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이스라엘민족 가운데에도 이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방사람인 구레네 시몬만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종교가 되지 못하고, 이방의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아 나가겠다는 여러분은 꿈에서라도 구레네 시몬과 같은 행동을 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어야 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변명할 수도 있었고 반박할 수도 있었으나 묵묵히 순응하여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3년 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한 사도들은 온데간데 없고, 생각지 않았던 이방의 구레네 시몬이 당신을 대신하여 처참한 입장에 서게 될 때, 이를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은 민망함이 컸을 것이고, 슬픔에 슬픔을 더했을 것입니다.
만일 12사도 중에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며 죽음의 고난도 잊고 도리어 그를 동정하면서 당신의 아픔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여 예수님은 슬픔에 슬픔을 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2.2740275, 1957.06.16)
예수님은 로마 병정이 창으로 자기의 옆구리를 찔렀어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저들 대신해 죽어 갑니다. 저들 대신해 희생하겠습니다.’ 하는 정신을 가지고 완전히 참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없던 새로운 세계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역사를 보더라도 역사상에 모든 원수는 원수로 갚으라고 가르쳐 주었지,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라고 선언한 것은 단 한 분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 하나님이 바라는 세계가 거기서부터 샘솟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거기서부터 샘솟기 시작한 것입니다.
(130.232-233, 1984.01.29)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갔을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원수의 아들딸이 자기의 독생자를 잡아 죽이는 판국인데도 그들을 원수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잡아 죽이는 입장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넘어가야 하는 하나님의 심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도 하나님과 아담의 기준을 넘어가려니, 하나님이 사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 자신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병정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패스했기 때문에 사탄이 분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사탄을 사랑했다는 전통적인 정신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참소하지 못하고 분리된 것입니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를 중심삼고 사탄분립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언제나 개인적, 가정적으로 사탄 편을 사랑했다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안 됩니다. 죽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따라서 기도해 줄 수 있는 놀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귀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순교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와 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저와 같은 자들을, 하나님이여, 구해 주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천사장을 사랑해야 할 원칙이 있기 때문에, 그 원리 원칙 기반을 완전히 복귀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사탄을 본래 천사장과 같은 자리에서 사랑했다는 입장, 그런 자격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244.154-155, 1993.02.01)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세계에서 가장 몰리는 입장에 서셨던가? 또 하나님이 모른다 하는 입장에 서셨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셨던가? 이것은 인간이 천륜을 배반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아담이 배반한 것을 탕감복귀 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개인적으로 버림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버림받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하였습니다. 자신 앞에 어떠한 죽음과 고생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을 소화시키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원수들도 그를 지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배척하고 민족이 배척하여 죽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서도 변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부활의 문이 열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하늘이 여러분을 배척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아버지를 붙들고 섬길 수 있는 각오를 지녀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부활의 은사권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4.114-145, 1958.03.30)
13.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예수
종교경전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별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나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이사야 53.3-6 (기독교)
율법을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람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조물은 이런 의식으로 깨끗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만,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보다 나은 희생제사로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성소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십니다.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 하였다고 하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애시려고 시대의 종말에 오직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히브리서 9.22-26 (기독교)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자기르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올리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11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님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이스라엘의 장래를 책임지고 몰고 나가려고 하다가, 아니 갈래야 아니 갈수 없는 운명의 길을 갔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뿔뿔이 흩어질 때, 예수님은 자기 일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까지 하나님을 위해 충성해 온 어떤 사람보다도 더 지극한 정성과 강한 책임감과 뚜렸한 목적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간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그 길을 간 것입니다.
(35.23, 1970.09.27)
형제나 혹은 누가 사탄의 꾐에 빠졌을 때, 그 타락한 형제를 되찾아 오려고 하면, 사탄은 그를 아무런 조건 없이 가게 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형제를 되찾기 위해서는 사탄이 그 형제를 되돌려 주는 것보다 더 좋다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을 사탄에게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되찾아 오는 것보다 사탄이 더 좋다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을 사탄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형제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 형제를 대신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한 형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희생적인 형제가 제2의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타락한 형제는 그런 조건에 의해서만 해방될 수 있습니다.
(52.20, 1971.12.14)
제물은 반드시 피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를 보기 좋아 하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조건을 세우게 하지 않는 한, 즉 죽었다는 입장에 세우지 않고는 살려낼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물을 희생시켜 피를 흘리게 해 가지고 지금까지 역사시대를 연결해 나온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를 제물로 탕감조건을 세워 용서해 주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키워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그 위에 메시아를 보냄으로써 신약시대를 맞고 메시아를 중심삼은 승리적 국가를 만들려고 했는데, 이 메시아를 믿지 낳게 되니 메시아가 대신 실체의 제물이 되어 죽은 것입니다. 양은 상징적인 것이고, 양을 잡아 제물을 바친 터전으로써 만들어 놓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구약시대의 열매와 마찬가지이므로 그러한 구약시대의 열매들이 예수와 하나 되었어야 될 것인데 그것이 안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실체 제물로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54.252-253, 1972.03.25)
사탄의 본질은 교만과 혈기입니다. 이런 성질로 세상 사람을 대하는 사탄이었으나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못나서 온유 겸손한 입장에 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최고로 높을 수 있고 영광을 누릴 수 있었느나. 예수님은 이것을 다 버리고 온유 겸손한 입장에 서신 것입니다. 사탄이 이런 예수 그리스도와 대결하여 싸우려 했으나 사탄에게는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 할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끝까지 온유 겸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본질이 교만과 혈기에 반대되는 온유 겸손을 갖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또 엄연히 천리법도가 있는 것을 아는 사탄이기 때문에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온유와 겸손을 들고 나서게 되면 사탄세계도 자연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아시는 예수님은 사탄이 하지 못한, 사탄이 할 수 없는 온유 겸손의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온유 겸손한 입장에 서야 중심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엇을 보여주셨는가 하면, 순종과 복종입니다. 순종은 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명령에 따르는 것이고, 복종은 응할 수 없는 환경에서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신하는 인가들에게 이런 순종과 복종의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 역시 사탄의 본질, 사탄의 모든 생활적인 요소를 가로막기 위한 것입니다.
(3.187-188, 1957.10.27)
예수님이 어떠한 심정으로 사탄을 굴복시킨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불쌍하시고 만민도 불쌍하고 만물도 불쌍하다는 심정입니다. ‘아들딸을 잃어버린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셨으며, 주인을 잃어버린 만물이 얼마나 불쌍하겠으며, 자기의 가치와 목적과 위치를 잃어버린 인간이 얼마나 불쌍하겠는가!’하는 폭발적인 심정이 있었기에 사탄이 물러갔던 것입니다.
(9.181, 1960.03.08)
14. 예수를 배척한 인류의 비극
종교경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3.37 (기독교)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9.41-44 (기독교)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안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8 (기독교)
“다른 비유 하나를 들어 보아라. 어떤 집주인이 있었는데 그가 포도원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났다. 열매를 거두어들일 철이 가까이 왔을 때, 그는 그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의 종들을 잡아서,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쳤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들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똑같이 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하였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그들끼리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포도원 바깥으로 쫓아내어 죽었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올 때, 저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 없이 죽이고, 제 때에 그에게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마태복음 21.33-41 (기독교)
말씀선집
2천년 동안의 역사를 통하여 위대하고 영광된 자리에 올려놓은 예수님은 누구나 다 믿을 수 있지만 몰려다니고 조롱받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온 목사라든가 기독교 신자들이 믿을 수 있습니까? 그때의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여러분만 못해서 예수를 잡아 죽인 줄 압니까?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는데 한 사람도, 유대교인 가운데 한 사라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이 지금 기독교 교인들만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지독한데….
(69.100, 1973.10.21)
예수께서는 하늘의 서글픈 심정을 갖고 쓰러져가는 민족을 찾아 주셨사옵고, 그들이 불쌍히 여기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그들을 찾아 주셨사오나, 택한 민족이라 자칭했던 이스라엘민족은 하늘이 보내신 메시아와 준비하신 세례 요한을 자기들 멋대로 대접하여 역사적인 슬픔의 그늘에 숨겨버렸다는 사실을 오늘 저희들은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 여기 모임 당신의 아들딸들로 하여금 그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희들보다 못해서 하늘을 배반한 것이 아니었고, 하늘을 위하는 심정이 저희들만 못해서 하늘의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 시대에 대한 소망이 부족하였고, 새로운 메시아의 이념을 갖고 오실 주님의 모습이 클 것으로 알았는데 정작 나타난 메시아가 너무도 초초하고 불쌍하고 형편없이 작은 모습이기에 그들이 배척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 한 자체가 어떠한 자리에 처해 있는가를 살피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오늘 저희들은 흔히 역사적이 이스라엘민족을 비방하고, 역사적인 당신의 사정을 비판하기 좋아하나 그때의 사정이나 오늘날의 사정이 차이가 없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그때에 있었으면 그들과 같은 무리였을 것이며, 저희들이 그 시대에 있었으며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었을 것을 자인하는 마음을 각게 해주시고…
(284-285, 1959.02.220)
이스라엘 민족 앞에 메시아가 온 목적은 사탄권을 때려 부수고 인류를 하나님 앞에 찾아오기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탄주권을 그대로 남겨놓고 인류를 남기고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나서는 예수님은 겟셋마네 동산에서 피어린 투쟁의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의로 십자가에 가는 날에는 4천년 동안 준비했던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유대교인이 망하고, 세례 요한과 그의 사도들이 하늘에 빚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담판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육과 영을 중심삼아 가지고 영적 세계는 물론이지만 실체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의 발판이 없어지고 유대교의 발판이 없어져, 예수님 혼자 할 수 없으니 십자가에 죽어서라도 제2차의 소망의 길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라가 반대하고 교회가 반대하니 십자가에 가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불가피하게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4천 년의 기반 위에 보냈던 메시아의 십자가에 돌아간 것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끌려가서 십자가에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다 잃어버린 자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교회도 잃어버리고, 세례 요한도 잃어버린 자리입니다. 거기에는 12사도도 전부 배반한 자리요, 나중에 오른편 강도까지도 죽어간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도 예수님 된 사람이나 하늘 편 된 사람이 없는, 다 잃어버린 자리였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십자가의 자리에는 기독교도 없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독교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부활하신 뒤 오순절 이후 출발한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라 사탄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요, 부활은 사탄의 승리가 아니라 영적 하나님의 승리를 말한 것임을 여러 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73.220-221, 1974. 09.28)
15. 예수의 부활
종교 경전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는냐?”
요한복음11.25-26(기독교)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이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이니다.
고린도린서 15.14-22(기독교)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여인들은 무덤을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예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그 때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여인들이 두려워 엎드려져서 얼글을 땅에 대고 있는데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왜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고 있는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낳고 다시 살아 나셨다. 갈릴리에 계셨을 때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인자가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달렸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여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일을 낱낱이 알렸습니다. 그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인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그 말이 정신없는 말로 들려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날 그들 중의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가면서 이즈음에 일어난 모든 사검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은 이야기가 무었이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때 글로바라는 사람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면서 최근 며칠 사이에 거기서 된 일을 당시만이 모른단 말이요?”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무슨 일이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일이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행위나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고,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달았소,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요.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어떤 여인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고, 그 여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으나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오, 그래서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이 몇이 무덤에 가보니 역시 그 여인들이 말한 것과 같았으나 그분을 보지는 못했다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미련하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구나! 그리스도가 마땅히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영광에 들어가서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전체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때에 그들은 그들이 가려던 동네에 거의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행을 더 계속하시려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를 만류하여 말했습니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무르도록 하십시다.” 예수께서 그들과 같이 머무르려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하실 때에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때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설명해 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았던가?” 그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길을 떠나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또 함께 하던 사람들이 모여 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길에서 된일과 떡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 그렇게 불안해하며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 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하시면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믿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해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운 생선 한 조각을 드리니 예수께서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에서 비롯되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손을 들어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항상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누가복음 24.1-53 (기독교)
말씀선집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민족을 위해 기도하셨고, 자신은 죽어서라도 책임을 완수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셨으므로 하나님은 그러한 예수님을 부활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사탄은 감히 참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내용의 가치를 지닌 인격체가 되면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2.141, 1957.03.17)
사탄은 자기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그가 4천년 역사노정을 두고 목적해 왔던 바를 달성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신 하나님은 그 대가로써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시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서 죄악인간들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되었는가? 사탄이 이미 그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탕감복귀 원칙에 의하여 하나님에게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입장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사탄이 최대 실권행사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최대 실권행사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여기서 사탄이 그의 최대 실권행사로서 예수님을 죽인 것에 대한 탕감조건으로 하나님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시어 죽은 예수님을 부활시키고, 온 인류로 하여금 그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접붙이어(로마서 11잘 24절)중생케 하심으로써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이었다.
(원리강론, 모세와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3.3.1.1)
예수님은 죽어서도 흩어진 제자들을 염려했고, 무덤의 3일 동안에도 이 제자들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해변가로 제자들을 찾아다니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책임감이 없었던 그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어려운 자리에서 배척한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은 부호라 수에 먼저 갈릴리로 찾아가셔서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의 고개를 넘을 때 변하지 않는 제자들로 세워 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인격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당시의 제자들과 그 이후의 수많은 성도들, 2천년이 경과한 오늘날 우리들까지 책임지셨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전체의 역사였습니다. 하늘의 뜻은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므로 예수님은 전 인류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38, 1956.05.16)
주님에게는 유대 나라를 중심삼고 사탄나라를 빼앗아 오고 사탄을 굴복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데, 4천년 닦아온 터전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나라를 잃고 교회를 잃고 택한 사람을 다 잃고 혼자서는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제2 방안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반을 잃지 않고 죽지 않았으면 영과 육을 중심삼고 나라와 세계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사탄세계와 사탄주권을 빼앗아 가지고 하늘나라로 돌아갈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기반이 없어졌으니 할 수 없이 하나님은 제2차적인 방안인 영적 구원만이라도 성립시킬 수 있는 길을 닦지 낳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영적 구원의 길을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74.153, 1974.11.28)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다신교가 성행하는 아라비아에 살았지만 유일신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도로서 부름에 응답했다.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부터 성서 내용을 알았지만 그가 살았던 지역의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은 다신교를 믿는 지배 부족들에 맞설 영정이나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에게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무함마드는 메카의 거리로 나가 아무나 듣도록 이슬람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는 박해를 받고 망명생활을 했지만 지지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은 지배적인 종교에 맞서 새로운 신앙을 옹호해주는 메디나에서 환영받았다. 무함마드는 하나님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악에 대해서는 조금도 타협할 줄 몰랐다. 문선명 선생은 그를 탁월한 종교창시자의 한 분으로 존경한다.
1. 무함마드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
종교경전
오, 예언자여! 우리는 그대에게 증인으로서, 기쁜 소식의 전달자로서, 또한 경고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허락에 따라 소환되어 불을 밝히는 등불로서 보냈느니라.
꾸란 33.45-46 (이슬람)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도이자 최후의 예언자이도다.
꾸란 33.40 (이슬람)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말씀하지 않으시고 계시를 통해서, 또는 장막 뒤에서, 그리고 사도를 통하여 말씀을 전하신다. 이는 그분께서 뜻하시고 허락하신 것이라. 실로 그분은 고귀하고 현명하시도다, 이제 하나님은 그분의 명령으로 그대(무함마드)에게 계시하다니, 그대는 이전의 성서가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광명으로 만드시어 그분이 뜻하시는 자들을 인도하도록 하였도다. 실로 그대는 인간을 바른 길,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리라.
꾸란 42.51-52 (이슬람)
한 라마단 달에… 하나님이 그의 종복에게 임무와 자비를 내려주신 그날 저녁,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해 주었다. 하나님의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그가 비단 덮개에 무엇가 적힌 글귀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와서 ‘읽어라!’라고 외치니, 내가 ‘나는 읽을 줄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나를 숨 막힐 듯이 압박하여 다시 나에게 ‘읽어라!’라고 외쳤다. 내가 다시 ‘읽을 줄 모른다’고 하자, 그는 나를 다시 숨 막힐 듯이 압박하며 나에게 읽으라고 외쳤다. 내가 다시 ‘읽을 줄 모른다’고 하자 그는 세 번째로 숨 막힐 듯이 압박하며, 다시 ‘읽어라!’고 외쳤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엇을 읽을 수 있으리까?’라고 겨우 대답하였는데, 그렇지 않으며 그는 다시 나를 압박할 것 같았다. 그가 말하였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은 응혈로써 인간을 창조하셨다.
읽어라! 주님은 가장 자비로우신 분,
펜으로 가리킴을 주시고
인간에게 모르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도다.’
꾸란 96.1-5 (이슬람)
말씀선집
성인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살 수 있는 힘을 개발하여야만 하며, 그러한 능동적인 힘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세계주의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만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소크라테스보다는 무함마드가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9.31, 1971.01.09)
무함마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 즉 회교는 종합적인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구약을 모두 끌어다가 만든 종합적인 종교이지만 그것도 역시 신을 위주한 것입니다. 아라비아 민족에게 적당한 내용을 밑받침에 가지고 신을 중심으로 신에 의한 절대적인 참의 인간을 구상하고 찾아 나갔다는 것입니다.
(39.316, 1971.01.06)
2. 이슬람을 세우기 위해 박해와 고난을 극복한 무함마드
종교경전
펜과 그들의 기록에 걸어 맹세하사 그대가 미치거나 미혹된 자가 아님은 주님의 은총 때문이니라. 진실로 그대는 고상한 성품의 소유자로다. 머지 않아 그대도 보게 될 것이며, 저들도 보게 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미친 자임을. 실로 그대 주님은 그분의 길에서 방황하는 자와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다.
꾸란 68.1-7 (이슬람)
오, 믿는 자들이여! 너희들에게 군대가 공격해 왔을 때의 하나님의 은총을 상기하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대항하여 너희가 보지 못하게 태풍과 군대를 보냈느니라. 하나님은 너희가 하는 것을 보시느니라.
그들이 너희의 위와 아래로부터 오고 너희의 눈이 어지러워지고 심장은 목까지 올라오고 하나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믿는 자들은 시련을 겪고 심하게 동요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을 그들의 분노와 함께 쫓아 보냈나니 그들은 어떤 이익도 얻지 못했노라. 하나님은 전쟁터에서 믿는 자들에게 충분하노라. 하나님께서는 강하시고 전능하시노라.
꾸란 33.9-25 (이슬람)
말씀선집
오늘날 성인이라는 반열에 선 사람은 신의 살림살이를 중심삼고 꿈꾼 사람들이지, 인간의 이상을 중심사고 살림살이를 꿈꾼 사람은 하나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종교의 종주(宗主)였다는 것입니다. 예수, 공자, 석가모니, 무함마드 같은 사람, 그렇지요? 그들은 인간의 살림살이를 꿈꾼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살림살이보다 더 차원이 높은 이상적인 살림살이의 본체가 되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늘을 중심삼고 이상을 그려 나왔던 분들이 아니냐?
(61.67, 1972.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