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 제2부 죄와 구원 - 제7장 구원, 해방, 각성

훈독왕 | 20180116090231
세계경전 - 제2부 죄와 구원

제7장 구원, 해방, 각성

은총

인간은 인간성의 타락과 타락한 환경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인생의 목표와 목적을 이루기가 어렵다. 그러나 신앙의 길에는 우리를 든든히 지켜줄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 때문에(인생행로에)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여러 경전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최우선이라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 왜냐하면 은총이 없다면 길을 잃고 비참한 상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미약한 신앙인에게도 그를 격려하기 위해서 은총이 내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의 구원자라는 구절들을 선택했다. 은총은 한 개인의 태도나 공적에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은총은 선한 일을 통해 얻은 공적을 훨씬 넘어선 것이며, 어려운 삶을 견디거나 선한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구원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는 탕자의 두 가지 비유로 등장하는데, 하나는 신약성서의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불교 경전 법화경의 이야기이다. 이 두 이야기의 가르침은 어떤 면에서 약간 다르지만 방황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이라는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에 의하면 필사적으로 아들을 찾아 헤매고 수년에 걸쳐 자신의 아들을 완전히 회복시키려는 아버지를 묘사한 불교의 비유는 인류역사를 통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노고를 기술하는 것과 상통한다 할 것이다.

1.구원에 필요한 은총
 
종교경전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헤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8-9(기독교)

  이부 후레이라가 사도의 말을 전하였다. “누구도 자신의 행위만으로 천국에 들 수는 없느니라.” 이에 어떤 이가, “하나님의 사도여, 당신도 해당됩니까?”라고 묻자 “나도 마찬가지다. 다만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자비로써 감싸주셨다”라고 대답하였다 
무슬림하디스(이슬람)

[고행자들의]온갖 법복을 갈아입음으로써, 또는 베다의 학습이나 명상에 의하여, 또는 불존의 실천 수행을 통하여 그를 성취한 자는 아무도 없었도다. 나낙이 말하노니, 다만 그의 은총으로 우리가 깨달음을 얻어 거룩하게 되리라. 
아디 그란트, 가우리 바완 아카리,M.5, p251(시크교)

최고아는 높은 학식으로 성취되는 바가 아니며, 경전의 교설을 들음으로써 얻어지는 바도 dks다. 그는 오직 그가 택하는 자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을 뿐이다. 최고가은 그가 스스로 택한 자에게 그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3.2.3:카타 아파니샤드 1.2.23(힌두교)

비록 너희가 가슴이 찢어지도록 부르짖고, 끊임없는 흐느낌으로 눈이 아프게 된다 해도, 또한 이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고행의 삶으로 나아간다 해도, 너희의 이러한 끈질긴 노력은 진실과 종교의 길로 너희를 인도하는 그 분의 선의와 친절, 그분의 박애와 베푸심, 그리고 그분의자비와 자선의 작은 부분도 보상하지 못하리라. 
나흐줄 비라가, 설교57(시아파 이슬람)

세상의 기초가 놓이던 때부터 주비된 구원의 계획이 없었더라면 죽은 자의 부뢀도 없었을 것이나, 구원의 계획이 이미 준비 되었으니. 이미 알려진 죽은 자의 불활이 있으리라.
몰몬경, 앨마서 12.25(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헤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리스도를 세워 그의 피로 속죄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로마서3.23-25(기독교)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지해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지배할 것이 아닙니까? 로마서 5.17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
고린도후서12.9(기독교)

업의 사슬에 얽매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다만 그의 은총으로 이 업보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느니라. 스리마드 비카바캄 11.2(힌두교)

모든 사람들은 신의 은총을 웒ㄴ다. 은총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내리기를 바랐던 아브라함도 그 자신이 은총을 필요로 하였다. 창세기 랍바 60.2(유대교)

당신의 권능으로, 오, 주여!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라.
아베스타, 야스나 34.15(조로아스터교)

말씀선집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온 세계를 사탄 마귀가 주관하는 세계가 되었으니 이 세계가 지상지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세계보다도 강력한 하나의 나라를 세워서 사탄세계의 나라를 흡수하는 책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시키기 위한 중심존재로 보낸 것이 메시아요, 이것이 메시아사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게 될 때 본래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곳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나라의 터전을 바라보고 찾아오는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구원섭리의 세상이요, 구원섭리의 역사시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남의 본래의 뜻으로 볼 때 이 구원섭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없었던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73.203-204, 1974.09.18)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이 땅에서 이루셔야 할 뜻이 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말할 자리에서도 망하지 않고 남아져온 것이다. (뜻길, p.74)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역사적으로 자랑할 수 없는 대 악당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복귀해야 할 심정적인 인연이 있기 때문에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예수를 거쳐 지금까지 참아 오시면서 구원섭리를 해 오셨습니다. 이런 은사를 생각하며 우리들은 현재 심정의 인연이 아닌 역사적인 심정의 인연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 합니다. (16.236, 1966.06.19)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아무런 내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타락한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우리 눈은 속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오관 감정은 전부 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지만, 공의의 법을 가지고는 상대할 수 있는 내용이 절대 없지만, 사랑의 법을 가지고는 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149.38-39,1986.11.01)

구원의 근본 기점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접촉점입니다. 거기에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하난에서 열까지 하나님의 혈통과 관계없는 인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원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원죄를 제거하는 데는 혈통적인 것이 근본적으로 존재합니. 혈통적인 것은 타락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35.159, 1970.10.13)

아버님! 오늘의 나를 내 한 자체 속에서 찾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역사를 대신하고 전체 우주를 대신하고 미래의 세계를 대신하여 천륜의 뜻 앞에 부끄러운이 없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시며, 그런 아들달이 된 것을 자랑할수 있는 기쁨의 영광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2.280, 1957.06.23)

 2. 탕자를 위한 은총

종교경전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내 몫을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후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낭비했다. 돈을 쓸 대로 다 썼는데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 아주 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워 보려고 했으나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그는 제정신이 들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그 많은 품꾼은 양식이 풍부하여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겠구나. 나는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 이렇게 말하겠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가 집에까지 가려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하여 견딜 수 없어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하였다. “어서 좋은 옷을 꺼내어 내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손에 끼우고 그의 발에 신발을 신겨라.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잔치를 베풀고 이날을 즐기자. 내 다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그래서 잔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큰 아들이 받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음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려오므로 종하나를 불러 “ 이것이 무슨일이냐”하고 물어 보았다. 

종이 대답했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집에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여 아버지께서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와서 그를 달랬으나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저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며 한 번도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는데,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지내느라고 아버지의 재산을 다 먹어버린 그 아들이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군요?” 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아, 너는 늘 나와 같이 있고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인데, 네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아니할 수 있느냐?" 
누가복음 15.11-32, 탕자의 비유(기독교)

비유하건대, 어떤 이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하여 다른 지방으로 나가 다니기를 십년, 이십 년, 또는 오십 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곤궁해져 사방으로 의식을 구하러 떠돌다가 우연히 고향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일찍이 아들을 찾아 나셨다가 이를 이루지 못하고 어느 도성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가세가 날로 번창하고 한량없는 재물과 금은보화가 창고마다 가득하였습니다.

그때 빈궁한 아들이 이 마을 저 마을, 이 지방 저 지방을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살고 있는 도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한 시도 아들을 잊고 산 적이 없으되, 아들을 떠나보낸 지가 오십년이 되도록 다른 이들에게는 일체 이것을 말하지 않았고, 다만 속으로 탄식하기를 “재물은 차고 넘쳐 금은보화가 차고에 가득한데, 내 몸은 늙고 자식은 찾을 길이 없으니, 문득 내가 죽으면 나의 재물도 흔적 없이 흩어져 버리리라. 유산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는 까닭이다. 만약 내가 살아생전에 아들을 만나 재물을 줄 수 있다면 무한히 즐거워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때 빈궁한 아들은 품을 팔며 떠돌다가 우연히 아버지가 사는 집에 이르렀습니다. 대문 밖에 서서 멀리 문 안쪽에 있는 주인을 바라보니, 사자좌에 걸터앉아 보배로 만든 받침에다 발을 올려놓고 많은 바라문과 무사들과 거사들이 다 그를 공경하여 시립해 모시는데, 천만 냥이나 되는 진주와 영락으로 몸을 치장하였고, 하인들이 흰 불자(拂子)를 들고 좌우에 시위하고 있었습니다. 궁한 아들은 그 주인이 큰 세력을 가진 것을 보고는 곧 두려운 마음이 일어 그 곳에 온 것을 후회하며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는 필시 왕이거나 혹은 왕과 동등한 지위의 어른인가 보다. 이곳은 내가 품을 팔아 삯을 받을 곳이 아니다. 차라리 다른 가난한 마을에 가서 힘대로 일을 하여 의식을 구하는 편이 나으리라. 만일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물다가 눈에 띄어 붙들리기라도 한다면, 강제로 나를 잡아 부릴 것이다”하고 황급히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 때 부유한 장자(아버지)는 사자좌에서 즉시 아들을 알아보고 마음이 크게 기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창고에 가득한 재물을 이제 건해 줄 데가 생겼구나. 내가 늘 아들을 생각하였으나 만날 수가 없더니 이제 홀연히 스스로 왔으니 내가 심히 원하던 바이로다. 내가 비록 늙었으나 아들을 아끼는 마음은 변함이 없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늙은 아버지는 곧 사람을 보내어 급히 좇아가서 그를 데려오도록 분부하였습니다. 그때 명을 받은 하인이 달려가서 붙드니 궁한 아들이 놀라 울부짖으며 원망하기를,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왜 잡아가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하인은 더욱 급하게 붙들며 강제도 데려가려하였습니다. 이때 궁한 아들은 생각하기를 “죄 없이 붙들려가게 되니 필경 죽게 되리라”하고 더욱 놀라 기절하여 땅에 쓰러지니, 아버지는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하인에게 분부하기를 “그 사람은 필요 없으니 억지로 끌고 오지 말고 냉수를 얼굴에 끼얹어 깨어나게 하고 다시 말하지 말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이 용렬한 줄을 알았고, 아들이 자기의 호귀 함을 어려워 할 것을 알고는 필시 아들임을 알았으나 하나의 방편으로 자기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명을 받은 하인이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너를 놓아 줄 터이니 마음대로 가거라”하자, 궁한 아들은 몹시 기뻐하며 땅에서 일어나 가난한 마을을 찾아가 의식을 구하였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아들을 데려오고자 하여 한 방편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리하여 행색이 초췌하고 보잘 것 없는 두 사람을 은밀히 불러 이렇게 분부하였습니다. “너희들은 그 사람에게 가서 저기 품 팔 곳이 있는데 품삯은 곱으로 주겠다고 하여라. 그래서 그가 만일 허락하거든 데리고 와서 일을 시키도록 하라. ‘만일 무슨 일을 할 것이냐’고 묻거든 분뇨를 치우는 일인데 너희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일한다고 하여라.” 즉시 두 사람은 궁한 아들을 찾아 가서 주인이 시킨 대로 말하였습니다. 그 때 궁한 아들은 먼저 품삯부터 받고 와서 함께 분뇨를 치며 머물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일을 보고 가엾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방 안에서 문틈으로 멀리 아들을 바라보니, 몸은 야위어 초췌하고 먼지와 분뇨로 더럽혀져 더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영략과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를 벗어 버리고, 때 묻은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흙과 먼지를 몸에 묻히고, 오른 손에 분뇨 치는 바가지를 든 채 조심스럽게 일꾼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일하여 게으름을 피운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하며, 그러한 방편으로 또한 아들에게 가까이 하여 말하기를 “딱하구나, 이 사람아, 자네는 여기서만 일하고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아예 말아라, 품삯도 차차 올려줄 터이고 소용되는 온갖 그릇, 쌀, 밀가루, 소금, 식초 따위도 걱정하지 마라. 늙은 일꾼도 있어 필요하면 붙여줄 터이니 마음을 편히 하고 있어라. 기실 나는 자네의 아버지와 같으니 다시는 염려하지 마라. 왜냐하면 나는 늙은이요 자네는 아직 젊었으며, 자네는 일할 적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속이거나 성내거나 원망하는 말이 없어서 도무지 다른 일꾼들과 같지 않더구나. 이제 부터는 내가 낳은 친아들처럼 생각하리라”하였습니다. 그 후 장자는 그에게 이름을 다시 지어 주고는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그 때 아들은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매우 기뻤으나, 여전히 자기를 머슴살이하는 비천한 사람이라 여기며 이십여 년을 분뇨만 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서로 알고 믿게 되어서 허물없이 드나들면서도 궁한 아들은 여전히 본래 있던 곳에 기거하였습니다.

장자는 병이 들어 스스로 죽을 때가 멀지 않음을 알고 궁한 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에게는 지금 금은보화가 많이 있어 창고마다 가득하다. 그곳에 있는 모든 재물과 받고 갚아야 할 것들을 모두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라. 나의 마음이 이러하니 부디 내 뜻을 거절하지 마라. 왜냐하면, 이제는 나와 그대가 다를 것이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더욱 마음을 써서 소홀함이 없게 하라” 하니, 이 때 궁한 아들은 즉시 그 분부를 받고 여러 가지 금은보화와 모든 창고를 맡았으나 밥 한 그릇이라도 가지려는 생각이 없었고, 거처하는 곳도 본래 있던 곳이었으며, 용렬한 마음은 아직도 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이 점점 나아져서 큰 뜻을 갖게 되고 지난날의 못났던 생각을 뉘우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죽을 때가 임박해 오자 아들을 시켜 친척과 국왕과 대신과 무사들과 거사들을 모이게 하고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아이는 내 아들이요 나의 소생인데, 어떤 도성에서 나를 버리고 달아나서 여러 곳을 유랑하기를 오십 년이었소. 이 아이의 본명은 아무개요. 내 이름은 또한 아무개요. 그 때 고향에서 근심이 되어 찾느라 애를 쓰던 터였는데,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소. 이 아이는 진실로 내 아들이며 나는 이 아이의 아비요. 지금부터 내 소유의 모든 재산을 다 이 아이의 소유가 되며, 이전부터 출납하던 것도 이 아들이 알아서 할 것이요.”
이때 궁한 아들은 전혀 뜻밖에 아버지의 그러한 말을 듣고 크게 환희하며 생각하기를, “나는 본래 무심하여 아무런 바라는 바가 없었으나 이 엄청난 보배 창고가 저절로 들어왔다”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큰 재물을 가진 장자는 곧 여래이며, 저희는 부처님의 아들과 같사와, 여래께서는 언제나 저희를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세 가지 고통에 얽힌 까닭에 생사고해에서 온갖 괴로운 번뇌를 받으면서도 미혹하고 아는 바가 없어, 하찮은 일들에 탐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오늘 저희로 하여금 모든 희론(戱論)의 찌꺼기를 버리게 하시었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열반에 이르는 하루 품삯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얻고서는 마음이 크게 환희하여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고 말하기를, “불법 가운데서 부지런히 정진한고로 얻은 바가 매우 크다”하였습니다. 세존께서는 저희들 마음이 하찮은 일들을 좋아함을 아시고 방편으로 저희들의 근기에 맞추어 말씀하셨건만, 그래도 저희는 참으로 부처의 아들인 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말하기를 “본래부터 희구하는 마음이 없는데, 이제 법왕의 큰 보배를 저절로 갖게 되어 불자로서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이제야 다 얻었다”하나이다.
법화경4, 탕자의 비유(불교)

말씀선집 

부모는 아들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면 ‘이놈의 자식, 잘 갔구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을 용서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아들이 사형수가 되어서 죽는 시간을 어머니가 안다면 통곡을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을 다 변경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을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면, 생명을 바쳐서라도 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변치 않는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에 사형장에 끌려가는 아들을 용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참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보다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자동적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을 능가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91.148, 1977.02.06)

사망권내에 있는, 천만 번 죽어 마땅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늘의 수고가 있음을 조심스럽게 살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사망권내에 있는 우리를 찾아 주실 때 세상의 무엇보다 귀한 것을 갖고 찾아 주시고, 사망권내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 열며하는 마음과 애달픈 심정을 갖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를 사망권에서 빼앗아 오실 때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빼앗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6.115-116,1959.04.12)

핍박을 받았다고 보따리 싸고, 중심자와 마음이 안 맞는다고 보따리 싸고, 부부끼리 마음이 안 맞는 다고 이혼하겠다고 하는데, 아무리 인간세계가 그러하여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태연자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천만 사연이 끓고 있지만 태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입을 열어서 그 사정이 통할 수 있는 말을 하게 된다면 천년만년 통곡할 수 있는 사연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통곡하는 것입니까. 아닌 것입니다. 인류를 위해서 눈물을 지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124.60, 1983.01.23)

하나님은 부모의 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세상에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부모의 아들가운데 불구자가 있는데 그가 부모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그 얼마나 비참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백을 사랑해도 백만큼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하나의 사랑도 알지 못하는 자리에 서 있는 자식을 대하는 부모, 그렇지만 자식을 사랑 안할 수 없는 부모, 언제나 줘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사랑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한 아들을 보게 될 때 백을 기울인 사랑을 가진 부모는 백 이상 몇 배의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단 하난의 사랑을 가지고 자식을 사랑하려 할 때, 그 사랑을 대할 수 있는 자식을 갖지 못한 부모는 그 이상 슬픔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상 기가 막힐 것이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백만한 사랑을 주려고 할 때 백 이상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자로서 혹은 아들로서 딸로서 나타나게 될 때 그 부모는 얼마나 기쁠 것이냐. 천을 준 이상의 기쁨을 그 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반대의 여건이 성립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자기가 주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자식을 갖지 못한 부모는 불쌍한 것입니다. 그 것이 한번만이 아니라 영원히 그런 자리에 서게 된다면 그 부모는 불쌍하고 비참할 뿐만이 아니라, 기가 막힐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 세상에서 미루어 보게 될 때, 만일에 하나님이 부모의 자리에 있다면….

인정과 천정이 연결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어떠한 자리일 것이냐. 아무리 우리가 찾아 올라가봐도 하나님은 부모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식의 자리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스는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 인간에 대하여 자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부자 관계의 기준이 어떠한 것이냐? 타락선 이하이냐, 타락선 이상이냐 할 때, 이것은 타락선도 될 수 없는 것이요, 타락선 이상의 자리일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된 안간들을 놓고 봐도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 이하의 부자관계의 사랑이지만 그 부자관계의 그 사랑을 가지고도 우리가 기가 막힌다고 말할 수 있는데, 타락하지 않은 자리에 있는 부모가 불효자식을 맞았다면, 그 부모는 얼마나 기가 막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주변에서 부자간의 사랑이라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볼 때 그 배후를 가히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타락선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자식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얼마나 강하였겠느냐. 타락선 이상의 자리에 섰던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62.19-20,1972.09.10)

사랑하는 아버님! 6000년 동안 섭리해 오시면서 어리석고 부적한 저희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주신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을 이 시간만이라도 느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3.258-259,1958.01.12)


용 서
 
죄악과 무가치한 것에 물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거나, 악행에 의해 더럽혀진 우리가 참된 내적 본성을 실현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의 간구자들은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면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죄를 용서하고 싶어 하신다. 우리를 사랑하는 부모가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 역시 그러하다.

여기 첫 구절은 하나님의 용서와 관용의 본성을 표현한다. 결론 부분은 정화의 한 과정으로서 죄를 청산하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용서

종교경전  

자신에 대해 죄를 지은 나의 종들이여!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 하나님은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니, 실로 하나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꾸란 39.53(이슬람)

네 죄악을 씻어 내 위신을 세워야겠다. 이 일은 나 밖에 누가 하겠느냐?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 버리리라.
 이사야 43.25(기독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속죄를 받아 죄에서 풀려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서 온 것입니다.   에베소서 1.7-8
 
일생의 죄악으로 물들인 자라 하더라도 굳은 결심으로, 신실한 믿음으로 오직 나에게 신애(信愛)를 바치게 하라. 나는 이 세상에 그 어떤 죄잉ㄴ도 보지 못하나니, 사람은 본래 거룩한 것이니라. 사람의 본성이 이러하나니, 그는 곧 마음을 의롭게 하여 영원한 평안에 이르니라. 알지어다, 오, 쿤티의 아들이여! 나를 믿고 경애하는 자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바가바드기타 9.30-31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담의 자손들아, 너희가 나를 찾고 나에게 간구할 때, 나는 너희가 한 일을 사해 주고 개의치 않으리라. 아담의 자손들아, 너희의 죄가 하늘의 구름에 이른다 해도 나에게 사함을 구하면, 너희를 사해 주리라. 아담의 자손들아, 너희가 이 땅만큼 큰 죄를 짓고 나에게 와서 나에게 비견할 어떤 상대도 두지 않는다고 하면, 이 당만큼 크게 그 죄를 사해 주리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42(이슬람)

 아미타불의 명호를 염하라. 끊임없는 목소리로 이와 같이 염불하되 신실하게 하도록 하라. “나무아미타불”을 끊임없이, 다만 십 염불하라. 십 염불의 공덕으로 이를 염불할 때마다 팔천만 겁 동안 생사의 윤회 속에서 지은 죄악을 씻으리라
 관무량수경 3.30(불교)
 
작열하는 아그니여!
우리의 죄를 태워 없애라.
우리에게 부를 허락하시라.
훨훨 타올라 우리의 죄를 몰아 내시라.
비옥한 논받과 멋진 집과 재물을 위하여
우리가 그대에게 공물을 바치나니
훨훨 타올라 우리의 죄를 몰아내시라….
그리하여 아그니의 장려한 불기둥이 
도처에 두루퍼지라.
훨훨 타올라 우리의 죄를 몰아내시라.
그대의 얼굴은 모든 방면으로 향해 있으니 p334
그대는 어느 곳에나 스며 있도다.
훨훨 타올라 우리의 죄를 몰아내시라
 리그베다 1.97.1-6(힌두교)

말씀선집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죄지은 것을 다 용서해 주신 것도 ‘너는 아직 죄인이다’하는 마음이 있으면 용서해 주었겠습니까. 끝까지 긍휼히 보는 마음이 있으니까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41.333, 1972.02.18)

크게 용서해 주는 것도 그 사람의 사정을 백퍼센트 알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정을 아시기 때문에 인간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2.220, 1957.05.26)

어떤 부모에 있어서 ‘당신 아들이 회개한다고 해도 죄지은 것을 언제나 들고 나와서 자식에게 항거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지, 자식이 회개한다고 해서 용서해 주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돼’ 하는 그런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도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그런 사랑앞에는 참소를 못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완전한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하늘 앞에 참소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 앞에는 사탄이 자연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 못 할 법이 없습니다.
 (62.52 1972.09.10)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우리 조상의 부끄러움을 알았고, 그런 조상이 역사를 통해서 부끄럽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부끄러운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랑할 수 있는 나 자신이냐? 그렇게 못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부끄럽게 만들고 그렇게 죄 된 수욕을 당하게 한 후손이요, 그러한 가운데 자랐고 그러한 자리에 있었던 내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나를 그분이 용서하고 그분이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분이 기뻐할 수 있고 그분이 부끄러움을 잊고, 죄 된 것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내 자신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66.18, 1973.03.11)


 2. 정화
 
종교 경전 

그 날은 너희의 죄를 벗겨 너희를 정하게 하는 날이므로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모든 잘못을 벗고 정하게 되리라. 레위기 16.30 (기독교)
 
하나님, 선한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주소서.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사옵니다. 이 몸은 죄 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마음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니 지혜의 심오함을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정화수를 나에게 뿌리소서! 이 몸이 깨끗해 지리이다. 나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소서. 꺾인 내 뼈들이 춤을 추리이다.
당신의 눈을 나의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허물을 없애 주소서. 하나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주소서. 시편 51.5(기독교)

탄원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왕실이나 나라에 한 점의 죄도 없게 하소서.
신이시여! 정화의 힘을 내리시어
한점의 죄까지도 씻어 주소서.
바람이여! 그 근원지로부터 불어와
하늘의 구름을 걷어 주시고,
아침과 저녁의 안개까지도 걷어 주소서.
항구에 정박한 배가 그 몸체를 움직여
광활한 바다로 흘러들듯이,
강 너머 드넓은 품밭이
단칼의 낫에 베어지듯이
그럼에도 높은 산에서 낮은 언덕으로
떨어지는
물살 센 내에 처하시는
세오리스히메 신이시여!
이 죄와 더러움을 흔적 없이
광활한 바다로 흘려 씻어 주소서.
씻긴 우리의 죄를 
광활한 바다의 물결 속에 거하는 
하야아기쓰히메 여신이시여!
그 넓고 거대한 입을 열어
이 죄와 더러움을 삼키소서.
이것이 삼켜지면
호흡이 이루어지는 곳에 거하는
이부키도누쉬 신이시여!
힘찬 한 숨으로 이를 불어 버리소서.
이것을 저 세상으로 날려 버리면
하야사스라히메 여신이시여!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흩어 버리소서.
이렇게 해서라도 모든 영역의 죄를 
왕실의 관료들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나라 안의 모든 죄까지 
씻어 주소서 엔기시키 8(신도)
 
말씀선집 

태초부터 참사랑이상의 절대 기준을 세워 놓고 당신 스스로 그 이상에 절대복종하시면서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온갖 황톳물과 찌꺼기들을 다 받아들여도 완전 정화해 =내는 바다처럼, 창조원칙을 벗어난 인간세계를 완전한 선으로 정화하실 참사랑의 절대 주체로 참사랑의 상대 세계를 위하여 의연히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00.80, 2002.12.27)
 
이제 엎드린 뭇자녀의 마음을, 아버님! 성별해 주시옵소서. 각자의 심령 심령마다 성별의 손길로 역사해 주시어서 개체 개체의 마음 몸을, 아버지, 드러내 주시옵고 일일이 성별해 주시어서, 옳지 못한 모든 요소를 제하여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겠사오니, 아버님이여, 친히 분별의 주인공이 되어 주시옵고, 심정의 주인공도 되어 주시옵소서.
(1162-163, 1956.07.11)


속죄 

 어떤 사람이 죄를 청산하기 위해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죄는 제거될 수 없다. 이것이 속죄의 개념이다. 하나님은 법도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의 대상은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므로 속죄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범죄를 누감아 주고 싶어도 사탄의 참소가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기 때문에 사탄의 참소는 죄인을 더욱 곤경에 처하게 한다. 그러므로 죄를 깨끗이 청산하며, 완전한 용서와 하나님과의 유대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어던 희생적 행위가 요구된다.
 
기독교는 대속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희생되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궁극적 속죄다. 즉, 죄없는 인간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은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여러 상황에서 대속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보다 큰 원칙의 한 모범을 보인 것이다. 사제가 신도들의 죄를 위해 희생물을 바치거나, 선한 사람이 공ㄱ동체의 죄를 위해 그 생명을 바치거나, 또는 애국자가 국가의 제단에 그의 피를 흘리는 것 등이 그 예다. 이 경우처럼 정의로운 개인의 희생이 수많은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게 한다.

1. 속죄의 원리

종교 경전
 
이 세상을 치유하고자 하실 때, 주 하나님은 병들고 고통 받는 자들 가운데 의로운 한 사람을 치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 모두를 치유하신다.
그러나 그 의인이 그로 인해 고난 받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편’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덕 있는 이들에게 먼저 징벌을 내려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덕 있는 자 위에 군림하기 위해 세상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조하르5.218a(유대교)

아론은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로 황소를 드려 자기의 죄와 자기 집안의 죄를 벗기는 예식을 올려야 한다. 그리고 숫염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만남의 장막 문간, 여호와 앞에 세워 놓고 숫염소 두 마리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여호와께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아자젤에게 보내야 한다. 아론은 여호와의 몫으로 뽑힌 숫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리고 아자젤의 몫으로 뽑힌 숫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세워 두었다가 속죄 제물로 삼아 빈들에 있는 아자젤에게 보내야 한다.… 아론은 속죄 제물로 바치는 백성의 숫염소를 죽여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황소 피를 뿌렸던 때와 같은 식으로, 속죄판 위와 속죄판 앞에 뿌려야 한다. 이렇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을 저질러 탄 부정이나 지은 죄를 벗기는 예식을 올려 성소를 정하게 해야 한다. 아론은 그 살려 둔 염소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온갖 잘못과 일부러 거역한 온갖 잘못과 일부러 거역한 온갖 죄악을 고백하고는, 그 모든 죄를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 대기하고 있던 사람을 시켜 그 염소를 빈들로 내보내야 한다. 그 염소는 그들의 죄를 모두 지고 황무지로 나간다.… 이것은 너희가 길이 지킬 규정이다. 일곱째 달에 들어 그 달 십일이 되면 그 날은 너희의 죄를 벗겨 너희를 정하게 하는 날이므로,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모든 잘못을 벗고 정하게 되리라.
레위기 16.6 -30 (기독교)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나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은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이사야53.4-6(기독교)


말씀선집 

구약시대는 이스라엘 선민권으로 말미암아 시작됐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피 흘리게 하는 읫기을 통해 자기들이 속죄의 길을 찾아왔는데, 그 근본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주인인데,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물건인데 이걸 두 쪽으로 갈라서 한편은 하나님이 소유하고 한편은 사탄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을 지금까지 몰랐습니다. 
(309.203, 1999.05.30)
탕감이라는 말은 무엇이냐? 어떤 사람이 100년 동안 탕감해야 할 죄를 지었다면 그거을 다 치르려면 그 인간 자체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구해 주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백년 걸려서 탕감해야 하는데 다 못 하겠기 때문에, 또 그 사람이 못 하고 죽으면 아무것도 안 되니까 살아서 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기간으로 1년이라든가 혹은 10년이라든가 하는 단축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될 수 있는대로 1년을 취하려고 하는데 사탄은 10년으로 하자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너 하자는 대로도 하고 내가 하자는 대로도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고 합니다. 그러면 사탄도 ‘예스’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탕감복귀하는데 있어서도 사탄은 많은 것으로 때리려고 하고 하나님은 작은 것 가지고 용서해 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원리적 법도를 주장하는 사탄의 입장도 옳고, 원리적인 입장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주장도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여기서 사람을 중심삼고 사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겁니다. 그것이 원리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111.147, 1981.02.10)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불초한 이 모습들, 수많은 선지자들과 성인들이 쌓아온 피의 제단으로 이내 속죄 받을 수 있게 된 놀라운 은사를 받고도 감사할 주르 모르는 과거의 생활을 다시 한번 뉘우치면서, 실적을 갖고 아버지 앞에 드릴 수 있어야 할 터이니데 빈 손들고 나온 것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9.161 1960.05.08)
 
하나님이 지금까지 참아 나와서 세계적인 발전을 할 때까지 두입한 그 희생의 모든 여건들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을 위한 것도 아니요, 기독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결국은 나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메시아를 보냇 십자가에 돌아가게 한 것도 결국은 그 메시아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다시 이것을 연장하여 재림이라는 사상을 중심삼고 새로운 기독교의 체제를 횡적으로 확대시켜서, 세계적인 범위까지 발전시켜서 끝 날까지 이끌어 온, 하나님이 기독교를 발전시킨 역사도 누구때문인 것이냐? 나를 위한 것입니다. 결론이 전부나에게 귀결되는 것입니다.
(77.47 1975.03.30)

영계에 가는 사람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자기의 명대로 살고 가는 사람과 자기의 명대로 못 살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명대로 못 살고 가는 사람에는 벌을 받아서 빨리 죽는 사람과 민족이나 세계의 죄를 탕감하기 위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어떠한 동네에서 손꼽히는 30대의 젊은이 세 사람만 죽게 되면 그 동네에는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중이면 문중에서도 기대를 받던 장대 같은 젊은이 세 사람만 죽게 되면 그 문중에는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즉, 탕감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과 법칙은 어디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 사람의 가치를 지닌 한 존재를 중심적인 자리에 세워서 천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게 했을 때, 천 사람이 그 사람의 은덕 앞에 감동하여 그 사람을 위하고, 그 사람의 생애를 본받고, 그 사람처럼 살겠다고 하게 되면, 그 민족은 그 사람과 같은 혜택권내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충신의 사상을 본받으려 하고, 성현의 사상을 본받으려 하는 것도 그들과 같은 혜택권내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작년에도 여러 사람이 영계에 갔지만 금년에도 여러 사람이 영계에 갈 것입니다. 말은 안 했지만 선생님은 벌써 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왜 그러냐? 한 단계 넘어갈 때 반드시 탕감을 치러야 되기 때문입니다. (33.11, 1970.07.28)
우리는 상복을 입고 복귀의 사명을 다하는 제사장들이 되든가, 혹은 제관(祭冠)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과거를 해개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사장이 되어야 하니, 여러분의 민족이 시련의 길을 걸을 때 동참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하는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들은 민족적인 시련을 가는 데 있어서 자기 개인을 위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13.265, 1964.04.12)


 2.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한 속죄
 
종교 경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 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길을 참으시는 가운데지금 이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어 주신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3-26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닐, 하나님R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인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10-11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하난ㅁ의 선한 말씀과 잧아 올 세상의 권능을 경험한 사람들은, 타락하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해서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4-6(기독교)

말씀선집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이었나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록막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나 하면, 죄라는 것이었습니다. 죄악은 만민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고,하늘의 생명을 생명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여 영생의 의 중심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1.167 ,1956.07.11)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다’는 그히 작은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예수님과 독같은 죽음을 거쳐 다시 살았다는 구원의 큰 혜택을 받게 된다. 한편, 우리는 몇 방울의 물을 머리에 떨어뜨려 세계를 받았다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예수님과 성신에 의하여 중심된 입장을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성만찬에서 한조각의 떡과 한잔의 포도주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성체를 먹었다는 커다란 가치의 혜택을 받기도 하는것이다.
(원리강론, 후편 서론1.1)

기독교인들은 전지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사랑의 많으 하나님이시키에 천번 만번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교회에서 기도하고 나오기가 무섭게 싸움을 합니다. 교회란 이런 식으로 죄 지은 후에 홰개하는 회개당이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왜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한번 지은 죄는 용서하지 못하시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천리의 공법을 파탄시킨 죄는 용서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죄가 용서된다면 우주의 사랑의 법도는 근본적으로 파탄되고 사랑을 휘하여 창조된 이 세계는 혼란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 자체까지 침해했는데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재차 수정해서, 복귀의 역사를 거쳐 타락하지 않았다는 기준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기준에 의해 사탄을 추방하고 제2의 이상적인 인물을 찾아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데 6천년이 걸린 것입니다 (19.161, 1968.01.01)


각 성
 
깨달음은 무지의 어둠을 제거하는 것이다. 여러다른 전통에서 궁극적 실재를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 깨달음은 내적 지혜의 직관적 파악이거나 말씀의 진리에 의한 조명, 혹은 초월적 실재의 직접적인 이해로 표현될 수 있다. 한편, 잘못된 사고방시과 헛된 욕망으로 모호해진 진리 자체가 깨달음을 통해 서 갑자기 드러나기도 한다. 세상의 삶에 더럽혀져 멀었던 마음의 눈이 참 실재의 광경을 보고 열리게 된다. 깨달은 사람은 그가 얻은 지식에 따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때의 삶은 그 전과 같은 수 없다.

여기엔 진리를 인식하는 이성적 깨달음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마음을 깨닫게 하고 무지의 어둠에서 잃어버렸던 길을 환히 밝혀준다. 문선명 선생은 기독교 전통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전환하여 가르친다.

둘째 문단의 구절은 깨달음을 자아실현,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는 내적 경험, 또는 내면의 하나님 발견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구원의 경험을 기술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보편적인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열리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받기 때문에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일 수 있다. 잘못된 모든 것을 털어냄으로써 깨달은 마음은 신적 마음의 기준과 일치하므로 강력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문선명 선생은 누구나 온전함 또는 완성의 길을 가면서 그런 경험을 체험하도록 촉구한다. 그는 어떤 개명에 의한 지식이나 신앙도 내면의 하나님의 현현을 대체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끝으로, 영적 오관을 열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듣고 감각할 수 있는 무속신아의 깨달음이 있다. 

어느누구라도 적절한 훈련을 거치면 이러한 지식과 영적 에너지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1. 참 진리의 빛
 
종교경전 

그리고 일러 가로되 진리가 도래하고 거짓이 멸망하리라. 실로 거짓은 멸망하리라. 실로 거짓은 멸망하게 되어 있노라. 꾸란 17.81(이슬람)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두움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8.12(기독교)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 옵니다. 
시편119.105(기독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8.32(기독교)

거룩한 스승께서 말씀으로 불을 밝히셨도다.
이로써 자아의 신전에 어둠이 걷히고
보화로 가득 찬 놀라운 방이 활짝 열렸도다.
이를 바라보매 우리가 놀라 몸을 떠나니,
그 장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도다. 아디 그란트, 비라발, M.5, p821(시크교)

본성으로 복귀하는 것을 상도라 하고, 
상도를 아는 것을 총명이라고 한다.
상도를 모르면 허튼 짓을 저지르고
흉악한 재화를 초래하게 된다.
영원한 상도를 알고 실천하면
관대하게 포용할 수가 있고,
관대하게 포용하면 공평무사하게 되고,
공평무사하면 넓게 두루 통하고,
넓게 두루 통하므로 하늘이라 하겠고,
하늘의 경지는 곧 무위자연의 도이며,
도를 따르니 영구할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도덕경 16(도교)

스승이시여! 놀랍고도 불가사의합니다. 스승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운 듯하고 감추어진 것을 밝히 드러내 보임과 같고, 길 잃고 방황하는 자에게 길을 일러 주는 것과 같고 어둠 속에 등불을 내다 걸어 눈 있는 자가 삼라만상을 환히 보게 하는 것과 같이, 세존께서는 온갖 방편으로 가르침을 밝혀 주셨습니다. 우다나 49(불교)

그들이 예언자에게 내려진 계시를 들었을 때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가득 차는 것을 너희는 보게 되리라.이는 그들이 진심을 알았기 때문이니라. 그들이 말하기를, 주여, 저희가 믿사오니 저희를 증언자로 기록하여 주시옵소서. 꾸란5.83(이슬람)
말씀선집 
타락인간에 있어 앎은 생명의 빛이요 또한 소생의 힘이 된다. 그리고 무지느 s사망의 그늘이요 또한 파멸의 요소인 것이다. 무지에서는 어떤한 정서도 일어날 수 없으며, 무지와 무정서에서는 어떠한 의지도 생길 수 없다.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 지.정.의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될 때, 거기에 인간다운 인간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하여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하시려고 애써 오신 애달픈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원리강론, 총서)
 
오늘의 세계는 영적인 대 각성이 필요한 때를 맞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세계 모두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새로운 이해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만나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질 수 없는 본연의 간계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234.241, 1992.08.22)

여러분이 깨고 보면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나서 그 부모를 붙들고 눈물지을 수 있는 그날을 재림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나면 내 앞에는 인류가 6천년 동안 슬퍼한 슬픔을 대신하여 슬퍼하신 참부모님이 계셨다는 것, 나를 찾아 천년을 헤매신 참다운 부모님이 계셨다는 것, 내가 슬퍼하기 전에 나를 대하여 슬퍼하신 하늘이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심정에 사무쳤던 모든 사실이 한날에 전개될 때, 비로소 나는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할 수 있고 하늘은 나를 대하여 아들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 날이 바로 최후의 깨는 날인 것입니다. 그때는 역사적인 소망의 심정과 그 외의 일체가 내 일신의 가슴 속에 찾아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의 기쁨은 하나님의 전체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기쁨이요, 그때의 감정은 인류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것입니다.
(6.155, 1959.04.19)


 2. 내적 각성
 
종교경전 

브라흐만은 일체만유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니, 그는 행위요 지혜이며 지고선이다. 가슴 속 내밀한 곳에 숨겨진 그를 아는 자, 그는 이 땅에서 무지의 사슬을 끊으리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2.1.10 (힌두교)
 
심장의 황금 도성에, 부분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랑의 주가 거한다.
그를 빛들의 작렬하는 광선으로 알아라.
태양도 빛나지 않으며, 달도 별도 빛나지 않는다.
번갯불의 섬광도 없고 대지에 불도 붙지 않는다.
주는 모든 것에 의하여 반영된 빛이다.
주가 빛날 때, 모든 것이 그를 따라 빛난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2.2.10-11 (힌두교)

하나님은 하늘의 땅의 빛이라. 그 빛을 비유하사 벽 위의 등불과 같은 것으로, 그 안에 등불이 있으며, 그 등불은 또한 유리 속에 있도다. 그 유리는 축복받은 올리브기름으로 별처럼 빛나도다. 그것은 동쪽 있는 나무도 아니요 서쪽에 있는 나무도 아니니라. 그 기름은 불이 닿지도 아니하나 더욱 빛나 빛 위에 빛을 더하도다.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는 자를 그 빛으로 인도하시며 사람들 위에 비유를 보이시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심으로 충만하시노라. 꾸란 24.35 (이슬람)

때가 얼룩진 거울이
깨끗해졌을 때 빛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체화된자는
자아의 본질을 보는 순간에
하나로 통일되며, 그의 목표가 성취되며,
슬픔에서 벗어난다.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2.14(힌두교)

품속에 있는 영원한 자아는 이 세계가 그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는 다리요 경계선이, 밤과 낮도 그 경계선을 넘나들지 못하며, 늙음도 죽음도 그 경계선을 가로지르지 못하며, 슬픔도 기쁨도 선행도 악행도 그 경계선을 건너지 못한다. 모든 사악함이 그를 피해 달아 나느니, 그는 모든 악을 여의어 있는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그 경계선을 가로질러 영원한 자아를 서우치한 자는 그가 혹 소경일진대 눈을 뜰 것이며, 그가 혹 큰 상처를 입었을진대 씻은 듯이 나을 것이며, 혹 그가 고뇌 속에 있을 진대 이를 벗어나리라. 그 경계선이 험루어질 때 밤은 낮이 되느니, 브라흐만의 나라는 빛인 까닭이니라. 찬도그야 우파니샤드4.1.2(힌두교)

명이라는 비구가 타이유산 만큼이나 멀리서 육조를 뒤따르고 있었다. 육조께서 명이 오고 있는 것을 알고 바위 위에 가사와 발우를 내려놓고 말하였다. “이 가사는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억지로 빼앗는다고 빼앗아지는 바가 아님을 알라. 만일 그대가 그것을 가져가려 한다면 지금 그것을 취하라.” 명 비구는 그것을 취하려 하였으나 태산같이 무거워 꼼짝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그가 소리쳤다. “저는 법을 구하러 온 것이지 가사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부디 저에게 당신의 드높은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 순간 비구 명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가?” 이 말은 듣고 비구 명은 문득 깨달음에 들었다. 그의 온 몸이 땀에 흠뻑 젓었다. 그가 흐느껴 경배하며 말하였다. “스승께서 방금 저에게 내리신 신묘한 말씀과 그 신묘한 뜻 이에 이보다 더 깊고 신묘한 것이 있나이까?”육조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것은 전혀 비밀스런 것이 아니니라. 그대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성찰하게 될 때, 보다 깊고 신묘한 것은 무엇이나 바로 그곳에서 발견되느니라.” 무문관23(불교)

말씀선집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본신이 그릇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든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러분이 딴 것 보고 물어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심에게 물어 보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 귀한 것과 하나 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본심과 하나 될 때 자기 일신의 모든 것을 알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전계발이라든가 본심의 마음 문을 맞춰야 된다는 것입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맞춰야 됩니다. 이러한 심전계발이 본성계발인 것입니다. 생활 가운데서 그것을 중심삼고 나가려면 영계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07.216-217, 1998.11.21)
 
현재 여러분이 대하고 있는 스승이나 그가 가르치는 기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본심을 찾아서 마음의 귀를 통하여 천륜의 부르심을 듣고, 마음의 눈릉 통하여 신성을 보고, 마음의 촉감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지나온 6천년의 역사과정을 그대로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참으로 귀한 것이 하늘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들의 마음도 그에 못지 않게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상대할 수 있는 높은 가치기준을 세우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고, 마음의 핵심을 찾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천륜앞에 설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날까지 여러분 나름대로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 나왔다고 하겠지만 ‘여러분은 과연 자랑할 무엇을 갖고 있습니까?’ 반문한다면 ‘나는 자랑할 것을 갖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여러분들 가운데 하늘 앞에 자랑할 무엇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으 그것을 본심을 통하여 자랑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천륜을 대신하여 영원한 이상을 입증할 수 있는 긍휼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생활한다면, 여러분들은 절대로 어긋날 길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흔히 관념적인 세계와 그런 상대로부터 위안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타락했지만 인간들은 본래부터 영원하신 천성과 통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마음 가운데는 창조이상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악을 벗고 완서하여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무한히 기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신앙자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 혹은 불교도들이 참선을 통해 무아의 경지를 찾아가는 목적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마음의 핵심이 될수 있는 요소를 깨우치자는 것입니다 
(2.192-193, 1957.05.19)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은 어디서 가르치느냐? 그 공명의 한 가운데에 들어가면 하나님과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천년만년의 역사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모지를 옮겨지는 비참한 인생의 말로를 쳐다보면서, 서로 고민하는 인간의 생애를 되풀이하는 고통의 경지를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하는…. 이것이 각자에게 지워진 숙제입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공명권에 들어가는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23.357, 1991.11.20)
 
마음과 몸이 대등하기 때문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몸둥이를 약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득세해 가지고 약하게 된 몸뚱이를 몇 달 동안 끌고 넘어가게 되면 몸둥이를 다시 올려놓아도 올라올 수 없게 습관화되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자기가 계획하는 모든 일이 하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잘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냥 놔두어도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양심을 위주로 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생애를 엮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 생활의 목적입니다. (38.270-272, 1971.01.08)


 3. 제3의 눈이 열림

종교경전 

나는 눈이 멀어 이 세상의 사물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위로부터 빛이 올 때 그것은 나의 마음을 깨우친다. 마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나는 볼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력을 통해 나는 나의 부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그 중심에 조그만 공간이 있는 하나의 성소인 바, 거기에 위대한 영이 거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눈이다. 이것은 위대한 영의 눈인데, 그것에 의해 그 분은 모든 것을 보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분을 본다. 만일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위대한 영을 볼 수 없다.
블랙엘크(미주 원주민종교)

깨달음은 무당이 느끼는 신비한 빛으로 이루어진다. 무당은 갑자기 그의 몸에서, 머리에서, 두뇌 속에서, 불가해한 탐색 빛, 빛나는 불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눈을 감고서도, 어둠 속에서 사물과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곧 일어날 사건을 볼 수 있고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당은 미래와 타인의 비밀을 볼 수 있다.

무당 후보자는 그의 오두막집 의자에 앉아서 영혼을 부르며 오랜 시간 기다린 후에 이 신비한 빛을 감지할 수 있다. 그가 그것을 처음으로 경험할 때 그것은 마치 그가 있는 집이 갑자기 일어서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해서 마치 대지가 거대한 평언인 것처럼 그는 산을 꿰뚫고 그이 전면을 멀리 본다. 그래서 그의 눈은 대지의 끝을 볼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더 이상 그에게서 감춰질 수 없다. 그는 멀리 있는 사물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먼 이국에 감춰져 있거나 죽은 자의 땅에 올려지거나 내려 보내진 영혼, 도둑맞은 영혼을 찾아낼 수 있다. 이글룰릭 에스키모족 무당의 가르침(미주 원주민 종교)

말씀선집
 
성경에 나오는 묵시록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생님이 영계를 알기 때문에 상헌 씨를 영계에 보내서 세계의 사람들을 단시간 내에 복귀하기 위해서 영계의 실상을 보고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실로 믿게 된다면 이 인류는 순식간에 자기의 갈 기릉ㄹ 다 정리하고 고개의 문턱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을 수 있는 본성의 심성이 계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몸 마음이 하나로 공명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육신이 보는 세계밖에 모르고 영계를모릅니다. 오관을 넘어 십관을 계발해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직접적인 관계, 참사랑과 관계를 맺어야 공명되지, 자기들 사랑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사랑의 파괴입니다. 어둡습니다. 그 사랑은 하면 할수록 어둠에 묻혀서 절연체가 묻으면 전기가 통하지 않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399.220, 2002.12.24)
 타락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신련과 진리로써(요4:23) 그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쳐서 그의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여 나간다. 그런데 진리에 있어서도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종교에 의한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과학에 의한 외적인 진리의 두 면이 있다. 따라서 지능에도 내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내적인 지능과 외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외적인 지능의 두 면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지능은 내적인 진리를 찾아 종교를 tdnj 나아가고, 외적인 지능을 외적인 진리를 찾아서과학을 세워 나가는 것이다.

신령은 무형세계에 관한 사실들이 영적 오관에 의하여 영인체에 영적으로 인식되었다가 이것이다시 육적 오관에 공명되어 생리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진리는 유형세계로부터 직접 인간의 생리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도 영육 양면의 과정을 거쳐서 오개 된다.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이 합해야만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적 과정에 의한 신령과 육적 과정에 의한 진리가 완전히 조화되어 심령과 진능이 아울러 깨우쳐짐으로써, 이 두 과정을 통해 온 양면의 인식이 완전히 일치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피조세계에 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지에 빠진 인간으로 하여금 신령과 진리에 의하여 심령과 지능을 아울러 깨우치게 함으로써,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를 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이러한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서 그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높아지게 되는 것이므로, 그를 깨우치기 위한 신령과 진리도 또한 점차로 그정도를 높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지만, 무지한 상태로부터 점차 복귀되어 나아가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나 방법은 시대를 따라 달리 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1)


해 방
 
세속적 욕망과 집착의 족쇄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경험하는 영적 자유가 해방이다. 그것은 개인의 외적 환경과 관계없이 일어날 수 있는 자유의 내적 경험이다.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사는 사람은 욕망, 탐닉, 나쁜 관계의 비참한 속박에 빠질 수 있지만, 성인은 감옥에서도 자유롭다. 기독교 경전은 기독교인의 자유에 해한 상대적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는 개인을 넘어선다. 예수는 죄인들의 해방과 자유의 왕국에 대해 말했다. 사람이 사랑과 헌신하는 정신으로 살 때 서로 자유로울 수 있다. 가정과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중심한 삶의 내적 자유를 즐긴다면 그들은 자유롭게 살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선명선생은 남을 해방하는 것도 우리 자신의 자유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해방은 사회, 국가, 세계 그리고 하나님의 영역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유대교의 커발라 교리는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불꽃’을 해방시키는 일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이 불꽃이 일어나 하나님과 다시 결합한다는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인간의 고통과 억압은 하나님을 슬픔과 고통의 족쇄에 묶기 때문에 하나님의 해방은 인간의해방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해방은 하나님을 해방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해방되었을때 인간도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1. 내적 자유의 상태
 
종교경전 

내면에서 행복을 찾고 내면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오직 내면에서 빛을 구하는자, 그러한 요가행자는 신과 하나 됨을 얻어 범열반(梵涅槃)에 이른다.
바가바드기타5.24(힌두교)
 
욕망은 사람을 세속에 붙들어 매는 사슬이요 족쇄이니, 이를 끊어 벗어나기란 어렵다. 그러나 욕망을 초월하고 집착을 넘어선 자는 세간에 얽매이거나 윤회에 떠내려가지 않으며, 걱정하지 앟고 무엇을 구하여 애태우는 일도 없다. 숫타 니파타948(불교)
 
드높은 곳에 있으며, 또한 지극히 낮은 곳에 있는 그가 보일 때, 가슴에 채워진 족쇄는 풀어지고 모든 의혹이 사라지며, 모든 행위는 업을 짓기를 멈춘다.
문다카 아파니샤드 2.2.8(힌두교)
 
그러하오, 자유함을 얻은 저 바라문,
그의 삶이 즐거워라.
오욕갈이 그를 더럽히지 않으니
속박을 벗어나 타는 번뇌를 잠재우며,
가슴 속의 고뇌를 통어하여
일체의 장애를 파하였어라.
마음의 고요함을 얻은 자의 삶은 
행복하여라 앙굿타라 니카야 1.137(불교)
 
그대 자신을 열라. 자유로운 공간을 이루라.
그의 굴레로부터 갇힌 자신을 해방시키라.
자궁에서 자유롭게 된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모든 길에서 움직임에 자유로워라. 아타르바 베다 6.121.4(힌두교)
 
주는 곧 영이십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17(기독교)
 
일체의 업의 물듦에서 벗어난 영혼은 곧장 위로 떠올라 우주의 구극에 이른다. 업의 사슬이 일순에 툭 끊어지고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위로 상승하는 본래의 성질에 자기를 맡겨 높이 떠오른다. 해탈된 영혼은 온갖 존재의 양태를 덮어씌우며 사방팔방으로 내몰던 카르마의 엄습을 모두 여의었으므로, 위로 상승하는 자기의 본질을 발현하여 마침내 우주의 구극에 이른다.
라트나카란다스라바카차라 10(자이나교)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불며,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다 이와 같다 요한복음3.8(기독교)
 
일체의 망상과 번뇌를 끊어 버리고 의식에 탐착하지 않는 그런 자의 열반은, 마치 허공을 나는 새의 발자취처럼 텅 비어 아무 흔적도 없는 까닭에, 더듬어 알아보기가 어렵다.
법구경 93(불교)
 
가슴에 주의 명하심을 품은자는
진실로 살아 있는 지반-무크타(살아있는 해탈자)라 하리.
그에게 즐거움과 슬픔이 다르지 않고,
황금과 한줌의 흙이 다르지 않으며,
감로와 독약이 또한 그러하리.
명예와 불명예가 다르지 않고,
비천한 자도 존귀한 자도 또한 없도다.
나나트가 말하노니, 그와 같이 행하는 자는 진실로 지반-무크타라 하리.
아디 그란트, 가우리 수크마니 9, M.5, p275(시크교)

말씀선집 

종교에서는 오늘날 인간 세상은 하나님이 해방한 해방군 내에 선 거싱 아니라 도리어 반대의 사탄 마귀에 의해서 타락된 세계, 즉 구속된 세계에 처해 있다고 봅니다. 통일교회도 그렇고, 기성교회 역시 그렇게 봅니다. 
 
우리 인간은 그 무엇엔가 모르게 지금까지 구속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에게 있어서도 여러분의 마음과 몸은 둘이 싸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이 둘의 싸울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인간에게는 인격이니, 인간완성이니, 인간해방이라는 명사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85.227,1976.0.03)
축복받고 좋은 길을 따라 나가다 보면 참사랑의 맛을 알게 되고 그 기쁨에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그 길을 가게 된다면 하나 되게 되므로 하나 된 가운데 느끼는 맛이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실존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떠헥 느끼느냐? 지금까지 몸과 마음의 투쟁이 그치고 옛날에 자기 제일주의로 생활하던것이 완전히 없어지고 하나님이 원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전체를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이런 관점에 섬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참사랑이 영원히 계속됨으로써 천상세계의 하나님의 기쁨이 내 생활 가운데 드러나게 되어서 전에 느끼지 못하던 만족, 행복감과 전체 내용이 관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해방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329.301-302, 2000.08.11)
 
몸은 그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세계는 어떠한 관이 없습니다. 우주관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음보다 더 큰 것은 심정의 세계입니다.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제재도 받지 않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재재를 받습니다. 마음은 상대적인 조건 여하에 의하여 제재를 받지만 심정의 세계는 제재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무엇이 제재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태산 같은 장벽이 앞을 막아도 꺾지 못합니다.
 
하늘의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끝 날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천국은 네 마음에 있고 천국은 네 심정에서부터 이루어지나니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음에 있느니라’는 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심정으로부터 이루어지나니라’하고 결론 맺어야 됩니다.
(7.246, 1959.09.20)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나니라”(고후3:17)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자유의 신이요, 해방의 신이요, 통일의 신이신 우리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여러분 자신의 심정에 어떤 시련도 초월할 수 있는 자유의 심정이 어떻게 해야 스며들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모든 시련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는 해방의 기점은 어떻게 찾아질 것인가, 우리의 이념의 중심이 바라는 통일된 안식의 시간은 언제쯤 찾아질 것인가 하는 것이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도 자유스런 입장에 계시지 못하고 해방의 자리에 계시지 못하고 통일된 위치에 계시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이 땅에서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되 그 자유는 우리가 누려야 할 참된 자유가 못되는 것입니다. 해방을 말하고 있으되 그 해방은 완전한 해방이 아닙니다. 통일을 주장하고 있으되 그 통일 역시 온전한 통일이 아닙니다. 인류사회는 씨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부족, 민족을 거쳐 국가로 통일해 나왔지만, 그런 부분적인 통일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한 연고로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 받은 우리들도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자유,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해방, 우리가 바라는 완전한 통일은 하나님이 자유로울 수 있고, 하나님이 해방과 통일의 주인공이 되는 날이 와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유와 해방과 통일이 바로 인간들이 바라는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기준이라는 것을 우리는 논리적인 견지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세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이념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중과 통할 수 있는 자유의 입장에 있었거나, 해방된 입장에 있었거나, 통일된 입장에 있었다면 이 땅에 혁명이나 혁신이란 명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해방과 완전한 통일이 이룩된 그 기준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와 해방과 통일의 움직임이 외적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문예부흥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4.316-317, 1958.10.12)

 2. 우주적 해방
 
종교경전 

예수께서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셨습니다.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의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아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습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 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 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에게 쏠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4.16-21(기독교)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0-23(기독교)

말씀선집 

해방은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순응하는 것으로 자유환원 운동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는 것입니다. 위아래나, 좌우나, 전후나 모든 것이 평등한 가치에서 방향을 취해 모가 없어져 둥글둥글하게 된 통일적 세계가 됐다는 것입니다. 해방이 되면 할아버지도 좋아하고, 할머니도 좋아하고, 싸우던 아버지도 좋아하고, 앵앵거리면서 바가지를 긁고 입을 물고 싸우려 하던 어머니도 좋아하고, 그다음에 아들딸, 손자, 백사람, 천사람, 만사람, 나라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만세를 부르는 것입니다. (341.161-162,2001.01.01)

북한을 해방하자는 게 쉬운 일입니까?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될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북한을 해방하기 전에 네 자신이 해방됐는가 물어봐야 됩니다.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 5단계를 넘어선 그 자리에서 남북해방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87.126, 1989.02.05)
이 땅 위에 모든 탕감의 노정, 하늘땅이 가로막혀서 엇갈린 방향으로서 아래가 위가 되고 위가 아래가 된 입장에서, 하나 되어야 할 모든 만물이 완전히 갈라지는 역사과정을 거쳐서 산산조각으로 분립된 이 모든 사실을,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타나서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재창조의 lf을 거쳐 가지고, 지극히 작은 미물로부터 광물로부터 동물로부터 인간세계, 천상세계 전체가 갈라진 모든 것을 잇기 위한 재창조의 수고, 종교권 이스라엘나라를 중심삼아 가지고 역사적인 선조를 통해서 이것을 때워 메우기 위해 수고해 나온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 사랑을 중심삼고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아서, 광물세계로부터 식물세계로부터 동물세계로부터 인간세계로부터 천상세계의 하나님과 참부모가 일체권을 이루어 천상. 지상에 자주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본연의 해방적 창조주 이상, 창조 이상가정에 천지부모가 일체가 되시어서 이제 천상세계 지상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통일화할 수 있게지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407.27-26, 2003.05.04)
 
역사를 통하여 인간은 자기들의 해방과 구원을 찾아 외쳐 왔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황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해방이 필요 없고 항상 기쁨에 취해 계시는 분이십니까? 역사적으로 죄아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켜봐 오신 부모로서 하나님의 심정이 해방의 기쁨을 누리실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상과 천상에 이상가정, 이상천국이 이루어지는 정도에 다라 하나님의 심정도 해방되고 석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도 참사랑의 가정생활을 통해 배방, 석방 받게 되고, 만물 또는 그러한 인간을 통해 해방, 석방되며 나아가 영계도 해방되는 것입니다 (447.140, 2004.04.30)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체 구원을 넘어서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뿐 아니라 지옥까지 해방시켜 영계까지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해방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섭리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즉 지옥을 거쳐 영계까지도 해방시키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내 뜻을 다 이루었다. 찬양할지어다. 내 사랑의 주관세계로 하나의 세계가 되어 전진할 지어다’하고 축복할 수 잇는 이상적 완성의 선포의 날을 갖는 것입니다. (114.78, 1981.05.17)


공, 열반
 
불교에서 말하는 내적 평화의 궁극적 상태인 공, 즉 열반은 자아, 열정, 그리고 욕망이 없는 상태다. 그것은 사고나 언어, 인식의 어떤 지적 개념도 넘어선 상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공에는 가득함, 담대함,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스럽고 놀라운 상태다. 문선명 선생은 공의 상태를 ‘영점’이라고 부른다. 그는 공의 신비로운 느낌을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공허한 공의 상태에계신 하나님과 공명 관계로 설명한다. 문선명선생은 남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비우는 적극적인 방법을 가르친다. 자기를 내주는 것, 남을 위해 사는 것, 주기 어려울 때도 주는 것, 이러한 실천이 명상과 마찬가지로 영점으로 이끌 수 있다. 
 
종교경전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지혜의 눈으로 이 이치를 볼 때 괴로움을 싫어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p.350법구경 279(불교)
 
도를 터득한 인물은 명성을 듣지 않고, 지극한 덕을 지닌 인물은 명성을 지니지 않고, 위대한 인물에게는 자기가 없다. 장자17(도교)
 
이기심이 있는 곳에 그대가 있을 수 없고, 그대 있는 곳에 이기심 없다
아디 그란트, 마루 키 바르, M.1, p.1092(시크교)
 
토라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자와 함께 한다. 탈무드, 소타21b(유대교)
 
높은 천계의 평야는 여기 또는 저기에 있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어떤 변칙이나 넘침도 없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의 몸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생각과 열정을 여읜 가슴 속의 상태이다. 인베 마사미치, 신대구결(神代口訣)(신도)
 
이것은 평화요, 이것은 수승한 것, 즉 모든 충동의 적멸, 모든 편견을 벗어버림, 욕망으 소멸, 평정, 멈춤, 열반이다. 앙굿타라 니카야 5.322(불교)
 
사람이 모든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나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을 때, 그는 지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최상의 자유 속에 있다. 그는 거기에 머무르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얻어맞은 불꽃과 같다. 불꽃 속에서 그것은 사라지고 없으며, 더 이상 아무 것도 그것에 관하여 알려질 수 없다. 그것은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난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불꽃 속에서 그는 사라지고 없으며, 아무것도 더 이상 그에 관하여 알려질 수 없다.
 
사람이 사라지고 없을 때, 그대가 그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에 관하여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거기에 없다. 그대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존재 양태들과 모든 현상이 제거될 때, 모든 형태의 묘사 또한 제거되고 없다
숫타 니파타 1072-1076(불교)
 
이미 세속의 여정을 마치고 근심과 걱정을 떠나 모든 속박을 끊고 자유를 얻은 사람 그에게는 털끝만한 고되도 없다. 마부에 의하여 잘 길들여진 말처럼 모든 감관이 잠잠하고 교만과 번뇌를 끊어버린 사람은 신들조차도 그를 경애한다.
 
대지처럼 너그럽고 잘 수양된 사람은 하를 내는 법이 없다. 그는 마치 흙탕에 휘둘리지 않는 호수같으며 그와 같이 평정심을 지닌 사람에게 윤회는 없다.
 
바른 지혜를 얻도 오명을 여이었으며 완전한 평온과 부동심을 지닌 자 그의 마음은 고요하고 그의 말은 고요하며 그의 행동 또한 고요하다.
 
사특한 믿음 없이 절대를 깨달아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욕망을 버린 사람 그는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법구경90, 94-97(불교)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또한 그러하다. 사리자여, 이모든 사물은 그 성질이 공하여 셩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고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 시각의 영역도 없고 의식의 영역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 함까지도 없다.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없어짐,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반야심경(불교)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女優)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이가 많은 데도 얼굴빛이 어린 아이와 같으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여우가 ”나도를 얼었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 남백자규가 ”도는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말하였다.
여우가 대답했다. “아, 어찌 되겠소? 당신은 그런 사람이 못 되오, 복량의(卜梁倚)란 사람은 성인의 재질은 지니고 있었지만, …그에게 도를 가르쳐 주기로 하였소. 사흘이 지나자 천하를 잊게 되었소. 천하를 잊게 된 후에 도를 그대로 지키며 7일이 지나자 만물을 잊게 되었소, 만물을 이지게 된 후 에도 도를 그대로 지키며 9일이 지나자 삶을 잊을 수 있게 되었소. 이미 삶을 잊게 된 후 아침 햇살처럼 밝은 깨달음이 열렸소. 깨달음이 열린 후 유일무이한 도의 경지를 볼 수 있게 되었소. 도를 볼수 있게 된 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잊게 되었소.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초월한 후에는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소. 삶의 욕망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으며, 삶의 욕망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하오. 그는 모든 것을 보내지도 않는 것도 없고, 맞아 들이지 않는 것도 없으며, 파괴하지 않는 것도 없고, 생서시키지 않는 것도 없소. 그런 것을 두고변화 속의 영녕(瓔寧)이라고 하오. 영녕이란 변화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오.” 장자6(도교)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한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움직임을 거쳐 그침으로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오직 양변에 머룰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건가.
한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추어 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참됨을 구하여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잠시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없느니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p.352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양단을 알고 자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좁은 견해로 여우 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혼침(昏沈)함이 좋지 않느니라. 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건가.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동일함이라.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미혹함은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끼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으니라.
한결 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그 까닭을 없이하면,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 건가. 구경하고 궁극하여,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며 일체가 멀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돠.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재빨리 상응코자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로 들어옴이라. 종취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밥이 바로 눈앞이로다.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만약 이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 되느니라.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뭘 걱정하랴. 믿는 마음은 둘 아니요, 둘이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로다. 승찬, 신심명(불교)
 
말씀선집 

완전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나’라는 개념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279.146, 1996.08.04)
 
몸뚱이를 때려 잡아서 만년 일방통행을 하게 되면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온 것도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한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의 세계, 영의 자리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 되면 못 느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무의 경지에 왜 들어가야 되느냐? 거기서 유의 유를 중심삼고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상대가 나나나 가지고 화합할 수 있는 데서 유를 백 퍼센트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의 경지요, 영점 자리에서라는 것입니다. (256.212, 1994.03.13)

하나님은 왕 제로(Zero)의 자리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려면 dfj분들이 제도 포인트보다 더 낮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살이 되어서 그 왕 제로의 자리를 보호할 수 있든지 해야 됩니다. 왕 제로의 자리가 마음의 위치라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살의 위치이기 Eoas에 그 제로 포인트를 보호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적인 것을 찾기 위해 불교에서는 참선이라는 것을 통해서 양심이 무엇이냐 해서 마음의 밑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230.134, 1992.05.01)
 
인간은 ‘나’라는 주장을 어디서부터 했을까요? 별수 없이 타락한 세계의 미국이면 미국의 백성으로서 교육받은 자기의 역사적인 전통이라든가 국가적 전통을 중심삼고 ‘나’라는 의식을 갖게 된것입니다. 창조이상적인 의시기권 내에 설수 있는 하나님 자신이 내 것, 내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갖고 있는 ‘나’라고 하는 개념은 하나님의 본래 창조이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우리는 자신을 완전 부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개인으로서 완전한 나의 자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자기를 영점에 놓고 자기를 완전 부정하는 길밖에 없스빈다. 그 자리라야 몸과 마음이 완전통일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상태에서 창조를 하셨을 것 같습니까?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된 자리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절대사랑과 절대신앙을 중심삼은 절대투입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이익이나 사정을 생각할 수 있는 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백 퍼센트 주고도 또 주는 위하는 사랑의 시원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나’를 어디서 찾겠습니까? 참사랑을 실천하는 삶에서라야 가능합니다. 자신을 완전히 영점에서 부정하고 가정을 위하고 세계인류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되면‘참된 나’는 자동적으로 찾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귀섭리, 구원섭리의 길을 걷고 있는 인간들의 피하지 못할 운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내세우며 나를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나긴 역사의 뒤안길에서 참된 나를 말하수 있는 자식을 잧아 한에 얽힌 복귀섭리를 해 오신 하나님의 싱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함부모 나를 주장할 수 업는 것입니다 (3.256.298-301,2001.10.21
체휼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흠모하는 그런 입장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되느냐? 이 문제가 문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되느냐? 이 문제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되느냐? 주체가 확정돼 있지만 내가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오관으로 알듯이 그렇다 하는 것을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오관으로 알듯이 그렇다 하는 것을 확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디서부터 살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그 주체로부터 살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살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로부터 살펴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 자체를 중심삼고 볼 때, 나라는 존재는 몸과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있는데 몸을 중심삼고는 이것을 살필 수 엇습니다. 결국은 마음을 중심삼고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무리 인간들을 두고 볼 때, 그 마음 자체가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전부 같으냐? 그 바탕은 같을지 모르지만 마음자체는 소성(素性)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하나의 원형을 그린다 하게 되면, 수평선을 그어 가지고 여기서 1도2도 해가지고 쭉 십자를 그음으로 말미암아 360도의 원형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수평선을 긋고 하나의 수직선을 긋는 여기서 90각도의 분별의 도수가 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우리 마음이 원형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 이것을 어떻게 긋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수평선은 긋는 사람에 따라 그 수평선의 형태는 각각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본 성도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0도에서부터 360도를 그어 나가는 데는 반드시 도수는 이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수가 가산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360도 형태와 우리 마음이, 마음 바탕이 이런 원형이라면 그 각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전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우리 얼굴이 다르고 우리 취미가 다르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다른 거와 마찬가리로 그 도수를 그릴 수 있는 평행선과 수직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되어 있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돼 있고, 그것이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도수를 맞추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영점자리를 찾아야 됩니다. 영점자리가 어디냐? 그것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체에, 그 마음의 심성을 이와 같이 표시하면 반드시 영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점이 있어서 그 영점 자체를 수평선으로 한다면 그 수평선을 중심삼고 어떠한 수직선이 그어질 것입니다. 하늘이 주체라면 그 주체 앞에 내가 대상적인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주체되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대상으로서 감응할 수 있는 바탕을 반드시 주었기 때문에 평면적인 마음 바탕의 기준 앞에 수직으로 향하는 그러한 방향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평선을 보게 된다면, 이것은 평면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이 수직으로 서게 되면 이 수직선의 기준이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점 기준을 어떻게 맞추느냐하는 것입니다. 이쪽으로 가면 반드시 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 영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발전소에 가 보면 미터기가 많이 있습니다. 미터기에 영점 기준과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가감의 조정을 해서 그 방향이라든가 힘이라든가 양의 기준을 잡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영점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점 기준은 어떤 자리냐?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참선을 하는 사람들이 무아경이라든가 하는 말을 쓰는데 그것도 역시 그런 경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영적 기준에 접근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되게 되면 반드시 자기의 수평선 기준이 반응할 수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76.125-127, 1975.02.02)


영적 합일

영적 합일은 종교적 신비주의자의 최종 목표다. 이러한 합일의 경험은 심오하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합일되고 모든 존재와 합일되며 주체와 대상, 아는 자와 알려진 자의 모든 차이가 해소된다.

신비적 합일은 전통적 종교에서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특히 무한자 하나님은 가장 성스럽다 할지라도 피조물과는 절대적으로 구분도어야 한다는 비타협적 유일신 신앙인 아브라함 계열 종교에서 그렇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 경전은 지복의 직관, 즉 하나님의 현현으로 먹격자를 변화시키는 직관에 대해 말한다. 이슬람에서 무함마드 자신으로부터 유래한 전통은 수피 신비주의자의 합일의 경험과 연관된다.

문선명 선생은 이 모든 다양한 합일의 경험을 긍정한다. 그는 사랑의 삶을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에 가까이 갈 수 있으며, 하나님 체험을 공유하고, 하나님의 몸의 일부분이 되어 움직이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 신비롭게 하나 됨을 경험한다.

1. 하나님과 합일

종교경전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않느냐?
요한복음14.10(기독교)
하늘과 Ekdd l나를 담고 있지 않지만, 나의 신실한 종복들의 마음이 나를 담고 있도다.
수흐라바르디 하디스(이슬람)
 
언제나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른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복음15.4-5(기독교)
 
강들이 바다로 흘러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름과 형태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이름과 형태를 여의며, 궁극적 존재, 자명한 자, 무한한 자를 실현한다. 브라흐만을 아는 자는 브라흐만이 된다. 문다카 우파니샤드3.2.8-9(힌두교)
 
그를 명상하며 물질적 의식을 초월하다. 그러면 그대는 우주의 주와 하나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두 번째가 없는(영원한)일자인 그와 하나 될것이다. 그 hr에서 그대의 모든 욕망들이 실현될 것이다.
그대는 항상 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진리이다. 그대는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한다.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 1.11-12(힌두교)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고리도후서3.18(기독교)
 
빛나지만 감추어진 참된 자아는 심장 속에 거한다. 움직이는 것, 숨쉬는 것, 열리거나 닫혀있는 모든 것이 참된 자아 속에 산다.
그는 사랑의 원천이며, 그는 생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알려질 수 잇다. 그는 삶의 목표이니, 이 목표를 실현하라. 문다카 우파니샤드2.2.1(힌두교) 
 
모든 붓다 여래는 그 몸이 자연의원리(법계신)인 분이므로, 그는 일체 존재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붓다를 자각했을 때, 당신이 붓다에게서 보는 32상과 80종 호를 지니는 것은 실로 당신의 것에 대한 그 마음이다. 요컨대, 붓다가 되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다. 아니, 실로 당신의 마음은 곧 붓다이다.
 관무량수경17(불교)

저절로 샘솟는 환희에 신묘한 선율이 일며, 거룩한 말씀에 나의 가슴은 즐거움을 느끼고 그 즐거움이 영원하도다. 저절로 일어나는 깨달음의 동굴 속에서 나는 망아에 드나니, 안락하고 높은 자리에 거하게 되도다. 방ㅎ황은 끝나고 고향(참된 나)에 돌아왔으니, 나의 모든 소망이 이루어졌어라.
신을 섬기는 자들아! 나는 자신을 완전히 이루었도다. 스승께서 신비로운 광채에 싸인 지고자의 형상을 허락하셨느니라. 
그는 스스로 왕이요, 또한 만백성이며, 지극한 해탈을 얻은 이요, 지락을 즐기는 이라. 영원한 정의의 보좌에 앉으신 그로 인하여 모든 고통과 울부짖음이 사라지도다. p.356
내가 본 대로 그의 모습을 전하노라. 이 비밀을 전해 받은 자만이 그것의 기쁨을 얻으리라. 빛이 그의 거룩한 광채에 녹아듦에 환희가 오나니, 주의 종 나나크는 유일 편만한 지고자의 형상을 보았도다. 아디 그란트, 마즈,M.5,p97(시크교)
 
말씀선집
    
거대한 하나님이지만 인간은 소우주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 거대한 하나님이 내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을 받아야만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런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무한히 크신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그 속에 흠뻑 들어가야만 하나님도 작용하신다는 것입니다. (31.210, 1970.05.31)
 
여러분의 마음과 몸이 통일되는 그 자리가 그런 곳입니다. 그곳이 내 영원한 삶의 터전입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까지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사랑을 중심하고 타락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최고 목표입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294.98, 1998.06.14)
 
우리는 동물적인 인간을 박차 버리고 인간적인 인간을 통해서 신적인 인간세계로 돌아가자 하는 것이종교이상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계까지 도달하자는 것입니다. 신성을 지닌 인간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성한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영원한 행복을 찬양하며 살수 있는 인간이 되자는 것입니다. (117.37, 1982.01.31)
 
평면적인 대표자는 인간이며 입체적인 대표자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일체화하고 영원히 결부하는 끈, 결부되는 결실점, 그 맺는 중심점이 이른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를 가진 인간 자체도 하나님이 임재 하시어 일체가 될 때의 그 심정, 체휼경(體恤境), 그 감정은 무한한 사랑에 자신이 일치되었다고 하는, 최대의 행복감을 느끼는 경지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최고의 행복의 경지인 것입니다. 그런 행복한 경지의 이상세계, 선한 세계, 선한 창조이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애정에 싸여 하나님과 일체가 됐다고 하는 것을 심감하는 세계, 그런 세계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이 창조이상인 것입니다. 
 
이 소망이 결국은 사랑을 중심으로 한 소망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도 사랑의 환경을 떠나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생애를 통하여 그런 것을 실감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 거기에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의해 모든 것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해 하나님과인간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해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하여 인간과 세계가 하나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입니다. (35.157, 1970.10.13)
 
오직 사랑만이 모든 장벽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참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육체적·영적인 피조물에 대한 지배가 가능합니다. 철저히 남을 위해서 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이 되며,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바가 자연히 인간에게 전달 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을 공명시키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소리굽쇠가 함께 공명하듯이 인간과 하나님은 항사 함께 공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201.206, 1990.04.09)

능력의 주체이신 아버지시여, 생명의 원동력이 되시는 아버지시여, 사랑과 심정의 근본이 되시는 아버지시여, 저희들은 당신 앞에 하나의 실체로서, 하나의 가지와 잎과 같은 입장에서 일체를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이 슬퍼하시면 저희도 슬퍼해야 되겠사옵고, 당신이 기뻐하시면 저희도 기뻐해야 되겠사옵고, 당신이 바쁘게 일하시면 저희도 바쁘게 일해야 되겠사옵니다. 이런 면에서 당신과 더불어 모든 생활환경을 접해 나가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42.59, 1971.02.21)


 2. 사랑으로 합일된 하나님과 인간

종교경전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이르시길 “내 종복은 내가 그에게 부여한 의무 이상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말지라. 그럼에도 내가 그를 사랑하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여전히 필요 이상의 공덕을 나에게 바치도다. 내가 그를 사랑할 때, 나는 그가 듣는 청각이 되고, 그가 보는 시각이 되고, 그가 두드리는 손이 되고, 그가 걷는 다리가 되리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38(이슬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8.35, 38-39
 
말씀선집   
 
완전한 통일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94.263, 1977.10.01)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꽉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전부가 충만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기쁨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95.39, 1977.09.11)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줄을 누가 끊을 것이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생명의 원천이요, 행복의 원천이요, 평화의 원천입니다. 여러분이 영적 체험을 해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24.325, 1969.09.14)
 
만약 이 축이 연결됐더라면 인간과 하나님은 사랑으로 일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체된 관계는 그 무엇이 작용을 해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지할 수 없습니다.

처녀 총각들이 청춘기, 사춘기가 되어 연애하고 사랑을 하게 되면 죽자 사자하는 요사스런 문제를 일으키지요? 그렇게 서로 붙들고 죽음 길을 자처해서 가거늘,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의 줄에 매여 그 사랑의 맛을 본 사람이 갈라질 것 같아요? 여러분, 봄에 벌이 꿀맛을 처음 보는데, 이 꿀맛을 처음 본 벌은, 그 꿀맛을 본 벌은 꽁무니를 잡아당겨 꽁무니가 쭉 뽑아져도 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맛을 느낀다면 어디를 가요? 가다가 되돌아와서, 또 거기에 가서 붙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137.57, 1985.12.18)

사랑만이 모든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이상적 수직선을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걸 알아야 됩니다. 사랑은 소유권이 있고, 사랑은 동위권이 있고, 사랑은 동참권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내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내 것이요, 하나님의 천주가 내 것이라는 소유 관념을 가진 당당한 그런 가치적 존재가 나이기 때문에 여러분 각자는 자기를 천하에 자랑하고 싶은 이런 욕망의 본성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79.169, 1988.08.01)

역사적인 서러움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곳에 머물든지 하나님의 눈물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듯을 아고 그 분의 아들딸이 되기 위하여 싸우게 될 때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 자리에 찾아오셔서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서러움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의 일신에 있는 동시에 이 나라, 이 세계, 이 만물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청산 짓고 하나님의 기쁨을 복귀해 드리는 운동을 전개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우리에 있어서 생명의 중심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는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하여 눈물짓는 생활을 하게 될 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대신자의 사명을 다할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사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명사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천륜의 슬픔을 체휼하고 만물의 탄식을 밟고 올라서서 하나님의 사정을 직접적으로 통할 수 있는 참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겉으로는 망할 것 같지만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대받고 쫓김 받더라도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후계자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남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에 대해서 원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분들을 위해 흘린 눈물을 통하여 탕감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남보다 먼저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며 눈물 흘리 수 있는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여러분을 위해 먼저 눈물을 흘리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여러분은 그 모든 사람들이 식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40.60-63, 1958.03.02)

아버지? 하늘과의 참다운 심정적인 관계가 이 자리에서 맺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오니, 당신의 손길로 친히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고, 아버지의 양팔로 저희들을 당신의 사랑의 품에 품어 주시옵소서. 얼마나 고대하시고 소원하셨던 일이었습니까? 이제 그 심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사옵고, 그 애달픔을 가히 짐작할 수 있사옵니다.
 (9.160-161,1960.05.08)


3. 만물과 합일

종교경전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보고 모든 존재 속에 있는 자신을 보는 자는 두려움을 여의다.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보고 모든 존재 속에 있는 자신을 보는 자는 슬픔을 여의다. 삶의 다중성이 어떻게 그 통일성을 본 자를 속일 수 있겠는가?
 이샤 우파니샤드6-7(힌두교)

붓다에게 말씀하셨다. “무상 정등각의 성취를 통하여 나는 털끝만한 법도 얻은 것이 없다. 이것은 평등하여 거기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 금강경22-23(불교)

브라흐만과의 접촉으로부터 오는 무한한 즐거움은 무거운 죄악의 짐을 벗어버리고 자기 자신 안에 학립된 자에 의하여 쉽게 얻어진다. 그들은 모든 존재 안에서 자아를 보며, 자아 안에서 모든 존재를 본다. 명상을 통하여 전일된 의식으로써 그들은 동등한 눈으로 모든 것을 본다.

나는 모든 존재 속에서 나를 실현한 자들 속에 항상 있다. 모든 생명을 나의 현현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나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존재의 감슴 속에 있는 나를 송배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들은 나에게로 온다. 그들이 어디에 살든, 그들은 내속에 거한다.

다른 사람들이 마치 자기 자신인것 처럼 그들의 즐거움과 고통에 감응할 때, 그는 최상의 영적 합일의 상태에 도달한다. 바가바드기타 6.28-32(힌두교)
태초에는 무(無)만이 있었다. 존재하는 것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이것으로부터 하나(一)가 생겨났는데, 하나는 있어도 아직 형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물은 하나(一)를 얻음으로써 생겨났는데, 그것을 일러 덕(德, 개성을 드러내는 힘)이라고 하였다. 아직 형체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구분(음양구분)이 생겨 바야흐로 조금의 틈도 없이 사물에 깃들었는데….

본성이 잘 닦여지면 덕으로 되돌아가고, 덕이 지극한 데에 이르면 태초의 상태와 같아진다. 같아지면 곧 텅 비게 되고 텅 비게 되면 곧 커지게 된다. 새가 부리를 놀려 우는 상태와 합치되듯이 무심해지는데, 새가 부리를 놀려 우는 상태와 합치된다는 것은 천지와 합치되는 것을 뜻한다. 그 합치되는 상태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해서 마치 어리석고 혼미한 것만 같다. 이것을 일러 현묘한 덕(玄德)이라하며, 위대한 순조로움(大順)과 완벽하게 같다고 한다. 장자12(도교)

말씀선집 
   
하나님도 숨을 쉰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호흡을 하는 그것이 우주의 박자를 맞추기때문에 사랑을 중심삼고 우주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여기까지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호흡권내에 들어가서 휙 넘어가는 것입니다. (201.191, 1990.04.01)

모든 이목구비 등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껴지는 감가, 즉 직관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믿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을 가져 보아야 합니다. 그런 시간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개인의 생활을 중시한 사람들은 잘 못 느끼지만, 은혜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늘 보는 만물이 옛날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늘 새롭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보아도 새롭고, 저녁에 보아도 새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서서히 물결쳐 올 때는 신비스러움을 입체적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30.134, 1970.03.21)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기를 원할진대, 여러분이 바라보는 물건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이 있으니 그 물건을 내 것으로, 천지의모든 존재물을 내 것으로 품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마음입니다. 최고의 도(道)를 통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의 마음에 소유된 사람입니다. 
 
나는 새 한 마리나 향기를 풍기는 꽃 한포기를 보고도 마음으로 영원히 노래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간 마음이 사람은 만물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가누데 있는 것입니다. (8.182, 1959.12.13)
나는 의식세계를 넘어선 창조목적의 세계를 원합니다.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거기서 무궁무진한 평화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그 존재가치를 찬양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보는 것도 그러하고 느끼는 것도 그러하여 인간이 비록 작은 존재로되 ‘한 개체가 움직일 때마다 천지가 움직이고, 하나님의 심정이 움직이고 영원한 생명이 움직이니 놀랍소이다?’하는 피조만물로부터의 찬양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p359(9.320, 1960.06.19)


치유


타락한 인간의 상태는 영혼의 허약과 질병에 비유돼 왔다. 타락한 인간의 심정은 근심과 고통으로 무겁다. 그러므로 구원은 허약한 영혼을 치유하고 참된 잠재성을 실현하여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종교의 가르침은 구원의 측효약으로 간주되고, 진리를 가르쳐준 창시자는 탁원한 의사로 비유된다.


그러나 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 사이에는 정신-신체 의학적인 인과관계도 있다. 따라서 육체적 건강은 정신적 건강의 복된 부산물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능력은 기적을 일으켜 늙은 여성이 아기를 낮고 소경이 눈을 뜨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치료하고 마귀를 쫓기도 했다. 부처도 그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많은 종교 성인들도 그랬다.


문선명 선생은 질병의 역적 원인을 하나님과 일치시켜 하나님의 치료 능력을 도모할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는 또한 치료 능력의 무분별한 사용데 대해 경고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기적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1. 육신과 영혼의 치유


종교경전 

  

“너 이스라엘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을 등어 순종하고, 그가 보기에 바르게 살며 그 명령에 귀에 담아 모든 규칙을 지키면, 이집트인들에게 내렸던 어떤 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아니하리라. 나는 여호와, 너희를 치료하는 의사이다.”
 출애굽기15.26(기독교)



내가 아플 때 그분께서 치료해주시니라. 꾸란 26.80(이슬람)

 

내가 눈으로, 가슴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인 잘못은 무엇이나, 
또는 지나침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브리하스파티여? 치유하시라.
자비로운 세상의 주시여? 야주르 베다36.2(힌두교)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자백하고, 서로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나음을 받게 하십시오.야고보서5.14-16(기독교)

 

오? 위대한 신이여,
나를 창조하신 분,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신이여,
당신은 오직 한 분,
지금 나의 아이가 병중에 있으니,
나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 주소서. 아누아크족의 기도(아프리카 전통종교)

 

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분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 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 주신다. 이틀이 멀다하고 다시 살려 주시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리니, 우리 다 그 분앞에서 복되게 살리라.  호세야.6.1-2(기독교)
정각자 부처는 비길 데 없는 의원이니… 억겁을 통하여 거룩한 가르침의 묘약을 찾아 완전하게 하셨다, 이들을 펴실 모든 방편들을 배워 익혔으며, 깨달음을 여는 묘법의 전능을 구족하셨으니, 일체중생의 고뇌를 능히 낫게 할 수 있도다.
 대방광불화엄경37(불교)

 

이분, 거룩한 이는,
의로써 자신의 영혼 속에
만유를 치유하는 능력을 지니고,
맹세한 벗처럼 모두에게 자비를 펴신다.
오, 지혜의 주여! 아베스타 야스나 44.2(조로아스터교)

 

지금 나의 이 병은 무시이래로 쌓여온 망망전도(茫茫顚倒)와 허망한 번뇌로부터 생겨난 것이니, 궁극적으로 병이라 칭할 실상은 없다. 무엇을 일러 이 병을 구제한다 하는가? 이기심과 소유욕을 여의게 함이다. 유마경5(불교)

 

무거운 고뇌의 산 제물이 되어
온갖 질병으로 육신은 병들고,
희비의 교차 속에서 가정과 가족의 온갖 문제들에 에워싸인 자여,
평안이나 안식도 없이 사방팔방으로 헤매는 자여-
마땅히 지고한 그를 염하라
그대의 몸과 마음에 평화가 오리니.
 아디 그란트, 스리 라가, M.5, p.70(시크교)

 

율법의 말씀은 완전한 치료약과 같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큰 상처를 입혀 놓고 그에게 석고붕대를 두르게 하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내 아들아! 이 서거고붕대가 네 상처를 감싸고 있는 한 너는 좋아하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고 차거나 더운 물에 목욕할 수 있다. 그래도 너는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석고붕대를 제거해 버리면 상처가 악화될 것이다.” 바로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들아! 나는 너를 죄악으로 기우는 성향을 가지도록 창조하였다. 그러나 나는 죄악을 해소시킬 약으로 율법을 창조하였다. 네가 율법과 함께 하는 한, 죄악성은 결코 너를 점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율법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그 때는 죄악의 힘에 네 자신이 내동댕이쳐 질 것이다. 그리고 죄악의 행위가 너를 거스르며 너를 괴롭힐 것이다.” 탈무드, 키두신

 

신에게 순종하고자 하는자,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 신에 보다 가까이 가조자 하는자, 그리고 회개하고자 하는 자는 성령의 불에 의한 깊은 영적 정화를 위한 세계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대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집접적으로 그대들의 세 가지 자아를 통하여 참된 빛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그대들이 치러야 할 대가를 적게 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이 세계는 참 빛의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불안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고세이겐(마히카리)

 

말씀선집   


문 총재를 만나서 든 병은 고칠 수 없습니다. 그건 문총재의 진단과 처방 방법을 따라가는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계가 통일이 안 될 수 없습니다. 처방의 그 약재가 뭐냐, 참사랑이라는 약재입니다. (190.57, 1989.06.18)

 

병이 나면 병언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고, 주사를 맞아야 하고, 조제한 약을 먹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병원과 약을 공급하는 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믿으면 이 싸움판을 말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337.57, 2000.10.22)
 
지금까지 타락세계에서는 악이 발전하는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악한 사람이 더 잘 살고, 무엇이든지 강한 사람이 더 잘 살 수 있는 때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왕권즉위식과 더불어 절대적인 성령이 역사하는 시대로 들어온 이후에는 절대적인 선이 발전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절대적인 선을 중심하고 원리적인 삶을 사는 자가 잘 살 수 있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식인 우리가 질병과 고통, 불행, 그리고 죄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직접 역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흥진님 영계 메시지, 2002.01.01)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생소를 받아가며 기쁘게 살아야 될 인간이 날 때부터 불완전한 개체로서 불안과 질병을 갖고 태어났던 것입니다. 다시 마래서 인간은 날 때부터 죄악으로 출발되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악의 혈연과 관계됨으로써 항상 누시엘로부터 침범을 받을 수 있는 요인이 형성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전혀 예상치않았던 병든 모습, 먼저 영적으로 병들고 다음 누시엘의 침범에 의해 육체가 병든 모습이 되었습니다.



모든 병의 70-80페센트가 영적 요인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20-30페센트가 육체의 과로나 환경의 요인에 의해 병이 생기지만 이러한 병들은 인간의 비참한 상태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 인류의 범죄자 누시엘2.2, 199903.07)

 

누구든지 병에 걸렸으면 그 병의 원인을 알고 그 원인을 치료함으로써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 이론적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일본의 역사에서 그것을 해결하겠다고 생각해본 사람도 없고, 지금도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계에도 없습니다.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사탄만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인류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알고 있더라도 바로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대표하는 구세주라든가 종교권이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인류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367.293, 2002.01.24)

 

병이 났다면 병중에 제일 무서운 병이 무엇이냐? 하나님까지도 제일 무서워하는 병, 이것이 타락병입니다. 타락병, 여러분은 그 타락병에 걸렸습니까, 안 걸렸습니까? 타락병에 걸린 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암’하면 다 무서워하지요? 그 암에 걸려도 처음에는 모릅니다. 거의 죽데 돼야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대도 이것은 죽기 전에 압니다. 그렇지만 이 타락병은 죽기 전에도 모르는 것입니다. 죽어야 비로소 안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고입니다. 타락병에 걸렸다는 것을 지금까지 그 누구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p363(92.186, 1977.04.10)



2. 기적


종교경전   


엘리사는 집 안에 들어가 죽은 아이가 자기 침대에 누워 있는 거승를 보았다. 엘리사는 방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방안에는 둘 뿐이었다. 그는 여호와께 기도드리고 나서 침대에 올라가 아이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자기의 입을 아이의 입에, 자기의 눈ㄴ을 아이의 눈에, 자기의 손을 아이의 손에 포개었다. 이렇게 아이 위에 엎드리자 아이의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하였다. 엘리사는 일어나서 방 안을 이리로 한 번, 저리로 한 번 걷도 나서 다시 침대에 올라가 아이 위에 엎드렸다. 그러기를 일곱 번 거듭하자 아이가 재채기를 하면서 눈을 떴다 열왕기하4.32-35


나(예수)는 맹인과 문둥이를 고치고 하나님의 허락으로 죽은 자를 소생시키노라. 
 꾸란3.49(이슬람)

 

큰 무리가 예수를 에워싸 떠밀면서 따랐습니다. 그리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는 동안 고생을 많이 했고 자기 소유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으며, 도리어 병은 심해졌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 뒤에서 예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옷만 만져도 나으리라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몸소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무리를 둘러보시면서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 떠밀고 있는데 누가 만졌느냐고 물으십니까?”하고 제자들이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둘러보시며 옷 만진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께 나아와 엎드려 사실대로 다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안히 가라. 그리고 이 병에서 놓여 건강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24-34(기독교)

 

오후 세 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사람들이 메고 왔습니다. 이 사람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학 위하여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두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구걸 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라”하고 말하니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으려고 두 사람을 쳐다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리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뛰어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도행전 3.1-8(기독교)

 

모든 이의 길잡이요 대자대비하신 세존께서 아자타사트루 왕을 위하여 월광삼매에 드셨다. 삼매에 들자 비길 데 없는 빛이 쏟아져 나왔다. 청정하고 서늘한 빛이 왕에게로 나아가 그의 온 몸을 비추었다. 온 몸에 두루 퍼져 있던 몹쓸 종기들이 씻은 듯이 나았으며 숨 막히더 s고통도 사라졌다. 화농한 종기의 아픔이 가시고 온 몸에 신선한 원기가 충만함을 느끼며 왕이 부처에게 말하였다. “이 빛이 어디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를 비추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며 모든 종기들을 씻은 듯이 낫게 하여 온 몸이 편안해 집니다.” 부처께서 대답하셨다. “오, 위대한 왕이여! 이것은 천상 가운데 천상의 빛입니다. 이 빛은 흘러나오는 근원이 가이없으며… 다만 구제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는 곳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 왕이여! 전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 몸과 마음을 모두 능히 고칠 수 있는 의원이 없다’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이 빛이 쏟아져 나와 그대의 육신을 낫게 하고 그런 연후에 그대의 마음까지도 낫게 합니다.” 대반열반경 575-576(불교)

 

예수의 시대처럼 지금의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신체 치료는 신성원리의 작용으로 일어난다. 신성원리 앞에서 죄와 질병은 인간 의식 속에서 실재성을 잃고, 마치 어둠이 빛에게, 그리고 죄가 회개에게 자리를 내어 주듯이 자연스럽고, 그리고 필연적으로 사라진다. 그때처럼 지금의 이 능력의 역사는 초자연적이 아니라 최고의 자연적이다. 이 역사는 임마누엘, 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곧 인간의시기 속에 나타나기조차 하는 거룩한 영향의 징표이다.  과학과 건강xi(크리스천 사이언스)
 
그 때에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시니, 그가 말을 하고, 보게 되었다, 그래서 무리가 모두 당황하여 “이 사람은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귀신을 내쫓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마태복음12.22-24(기독교)
 
기적을 행하는 것에서 위험을 보았으므로, 나는 그것을 몹시 싫어하고 혐오하며 거부한다. 디가 니카아 9.66(불교)
 
사람은 기적에 의존하면 안 된다. 비록 거룩하신 그 분이 한 때 기적을 행하셨다 할지라도 당장 의지해서는 안된다. 기적은 매일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위험에 부딪힌 사람은 그전에 축적되어 왔던 능력을 다 소진시켜 해결하려해야 한다.
 조하르1.111b(유대교)



말씀선집    

 

아브라함의 아내는 백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감을 가지면 역적으로 감동을 받아서 대번에 임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283.126-127, 1997.04.08)


여러분이 마음과 몸이 하나 되는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보지는 못하지만 그 힘은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이적이 벌어집니다. 병도 낫고, 무슨 이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사랑을 지녀야 하느냐? 참사랑! 여러분은 참사랑이 뭔지 모릅니다. 참사랑이 뭡니까? 하나 되어서, 절대적으로 하나 되어서 묶어질 수 있는 그런 작용이 참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부부들이 됐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재까닥 하나 되는 겁니다. 그 후 손을 펴게 되면 불이 나오며, 별의 별 기적이 다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청중이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이 운동에서 격파하는 것보다 더 재미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얼어붙은 인간들, 죽은 익나이 살아나는 겁니다. 그것이 무슨 힘이냐 하면, 참사랑의 힘입니다. 참사랑의 힘으로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참사랑이 어떤 것인가 하면, 운동하면 할수록 점점 커 가는 겁니다.


참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육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몸뚱이를 죽이는 것입니다. (282.230, 1997.03.26)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냅다 밀면 모든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불쌍한 사람이나 병난 사람을 만났을 때 자기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여서 눈물과 더불어 그를 붙들고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런 것을 하기 싫어합니다.… 그 보다는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진리는 만고의 불변이요, 이적기사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일시가 만고를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252.258, 1994.01.01)


죽은 사람을 살리는 데는 영인체를 다시 불어넣으면 살아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시체가 부패해 버리면 안 됩니다. 살이 없어지면 안 됩니다. 3일간이라든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영을 불러들이면 소생합니다. 그것은 취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성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영을 불렀으면 그것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을 보상한다든지, 아니면 그것에 따라 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세 사람, 네사람이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영적 가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천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15.176, 1965.10.07)



정련의 불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은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가짐을 갖춘 사람은 인생의 시련과 도전을 자신의 신앙을 순수하게 하고 결점을 고치며 성격을 수련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시련은 우연히 아니라 자녀를 훈련하고 교육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제15장 ‘시험’ 참조)이 아닐까?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면 시련에 직면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된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불에 비유하고 있다. 문선명선생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으나 사실살 심판은 진리로 우리를 정련시키는 기회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에 백 퍼센트 합일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심판의 목적은 구원에 있지 정죄함에 있지 않다. 


1. 불 심판


종교경전  

 

그 하나마저도 불 속에 넣어 찌꺼기를 거르고, 순은과 순금을 갈라내듯 하리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대답하고, 내가 그들을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면 그들은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사’고 하리라. 스가랴13.9(유대교)


마치 대화재가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수 있듯이 부처의 자비의 장은 모든 번뇌를 불살라 없앤다. 대방광불화엄경10(불교)

 

타오르는 불꽃이 장작을 재로 만들 듯 지혜의 불은 모든 업을 태워 재로 만드나니, 불같은 지혜보다 이 세상을 정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느니라.
 바가바드기타 4.37(힌두교)



비유컨대 마치 타오르는 불길이 마른 섶을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버리듯이, 자신의 가장 내밀한 자아에 몰입하여 일체의 외계 대상에 미혹되지 않는 구도자는 업으로 이루어진 자기의 육신을 뿌리째 흔들어 약하게 하고, 마침내 마랄 죽게 만든다.
 사만타바드라, 아프타미망사 24-27(자이나교)

 

순결을 그대의 용광로로 삼고
인내를 대장간으로 삼으라.
거룩한 스승의 말씀은 그대의 모루며
참 지혜는 그대의 망치라.
신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풀무로 삼고
이로써 금욕의 불을 지피라.
사랑의 도가니에 자비로운 신을 녹이라.
다만 이와 같이 그대가 말씀 속에 
거듭나리라. 아디 그란트, 자푸지 38.M.1, p8(시크교)
“하나님의 오른손에서부터 불길같은 법이 이스라엘을 위해 뻗쳐 나왔다”(신명기33.2).  토라의 말씀은 불에 비유된다. 불과 토라의 말씀은 둘다 하늘에서부터 주어졌고, 또 둘다  영원한 성질을 가졌다. 불을 가까이 하는 자는 불로부터 유익을 얻게 되고, 불을 멀리하는 자는 얼어 죽데 된다. 사람의 율법에 대한 관계도 이와 같다. 율법 안에서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율법은 생명을 주고, 율법을 멀리하는 자에게 율법은 사망을 안겨다 준다.
 시프레 신명기(유대교)

 

아무도 이미 닦아 놓은 터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터를 놓을 수 없습니다. 누가 이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며,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 날은 불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은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마치 불 속을 거쳐서 살아나오듯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1-15(기독교)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예레미야 23.29(기독교)

 

우리가 불로 황금을 시험하고 황금으로 우리의 종복을 시험하도다.
 바하울라의 숨겨진 말씀, 아리비아어 54(바하이교)

 

말씀선집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여러분이 백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하기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로는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하겠다고 하지만, 용광로에 들어가 가지고 부정한 것은 다 태워 버리고 금만 남아야 되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을 통해 360도 회개해서 회개의 눈물과 콧물이 뒤집어씌우더라도 그 속에 있는 나는 아직까지 완전하다고 볼수 없는 것입니다.  (320.235, 2000.04.06)

 

예수님 때도 그가 심판주로 오셔서(요 5:22; 9:39) 불로써 심판하신다고 예언되어 있고, 또 누가복음 12장 49절에는 예수님이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는 말씀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님이 불로써 심판하신 아무 흔적도 우리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비유하신 것임에 틀림없다. 야고보서 3장 6절에 ‘혀는 곧 불이요’라고 한 말씀에 의하여, 불 심판은 곧 혀의 심판이요, 혀의 심판은 곧 말씀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니, 불 심판은 곧 말씀심판임을 알 수 있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3.2.2)

 

여러분이 알고 잇는 것은 사탄과 관계되어 있는 말씀이요, 지금 여러분이 추구하고 생각하는 사상체계라는 것은 사탄과 관계된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모든 구성요소는 어떠한 것이든 인간을 중시하고 나타난 것이기에 타락권내를 벗어나지 못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새 말씀을 가지고 모든 것을 혁신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래의 말씀에 그냥 화해 가지고 같이 갈 수 있느냐?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종래의 말씀은 완전히 결렬되고 청산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탄세계에서 갖고 있던 사탄적인 관념과 믿음 및 습관까지도 모두 일소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기준의 말씀을 중심삼고 전통을 세워야 됩니다.  p.366(21.327-328, 1969.01.01)


참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절대 투입해야 합니다. 자기이름, 자기모양 사진, 옷까지 전부 불살라 버려야 합니다. (398.328, 2009.12.17)

 

아버지! 인간적인 사(私)된 것을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나 자기 나름의 탈을 쓰고 자기 나름의 주의 주앙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21.132, 1968.11.17)


2. 하늘의 훈련

  

종교 경전 

 

아들아, 여호와께서 타이르시는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의 꾸지람을 달게 받아라. 여호와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꾸짖으시되 귀여운 아들에게 매를 드는 아비처럼 하신다.
 잠언 3.11-12(기독교)

 

여호와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람이 산다는 것이 제 마음대로 됩니까? 사람이 한 발짝인들 제 힘으로 내디딜 수 있습니까? 그러니 여호와여, 화가 나서 매를 드셔도, 죽여 버리셔야 되겠습니까? 그저 법대로 다스려 주십시오.
 예레미야 10.23-24 (기독교)

 

사람들이 “우리는 믿나이다”라고만 말하면 시험을 받지 않고 (편히) 남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이미 그들 이전의 사람들을 시험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말하는 자와 거짓을 말하는 자들을 아시니라.
 꾸란 29.2-3 (이슬람)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망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5 (기독교)

 

깨달음을 여는 길에서 만나는 고통은
다만 끝이 있으리니,
이것은 마치 큰 고통을 없애려
배를가르는 고통과도 같으니라.
의원도 병을 몰아내려고
쓴 약, 모진 처방을 쓰지 않을 수 없고,
나도 온갖 고통을 없애려면
약이 되는 고통을 다만 참아야 하리.
 샨티데바, 보살행의 도 7.22-24 (불교)


말씀 선집


나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고 시련은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지난날을 바로 체휼시키기 위함이다.그러므로 고난이 닥칠 때에는 기뻐하고 감사하라. 그것은 곧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이다.  (뜻길, p.317)

 

메시아 이름 하나를 찾고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레버런 문이 메시아라고 발표하고 나니 세상이 야단입니다. 나라가 야단이고, 세계가 야단이고, 영계로부터 지상 전부가 야단이고, 어머니 아버지 할 것 없이 몽둥이를 들고 나서서 ‘이놈의 자식, 사실이야? 문중에 이런 수치가 어디 있어? 문중에서, 족보에서 잘라 파 버려야 되겟다’하고 야단한 것입니다. 홀로 해 나왔습니다. 메시아는 둘이 아닙니다. 극단의 자리에까지 홀로 그 이름의 실체를 갖춰서 끝까지 부정하지 않고 실낱같은 것이라고 거기에 달려 있어야, 모가지가 끊어지지 안호 달려 있어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개념을 자기 자신이 신앙으로 세울 때까지 얼마나 몸부림쳤겠습니까. 그러한 환경에 더해 가정에서의 환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에 3년 동안 흉년이 들었습니다. 집안이 문제지, 먹는게 문제지, 동내방네 아무개 집안 망했다고 그러지, 형님이 미치지, 누님이 미치지, 열세 사람중에서 여섯 사람이 일년에 죽어 나갔습니다. ... 그것이 왜 그렇게 됩니까. 메시아 관념을 갖지 말라고 몰아치는 것입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니 우리 집안이 이렇게 망한다’ 하고 씌울 수 있는 조건을 전부 우리 가정에 퍼붓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통일교회 믿기가 어렵다고 말하는데,통일교회 믿기가 뭐가 어렵습니까? 내가 쓰러졌습니까? 통일교회 간판 두고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377.25-26,2002.04.28)


아버지의 성상대로 빚어주시사 당신의 뜻을 맡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허락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2.241,1957.06.09)



도움과 구원



비탄과 위험과 억압을 당하게 되면 신앙인은 하나님의 도움에 의지한다. 위기에 처할 때, 전쟁에 임했을 때, 또는 죽음에 직면할 때, 무신론자조차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구원을 받은 사례들이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성서는 참된 힘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있으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의 힘이나 동맹, 또는 제물에 의존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 도움에 대한 간구를 표현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이 견고한 피난처라고 기술하고 있다. 역사상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즉, 성서에서 홍해를 건넌 모세, 바울의 감옥에서의 탈출, 그리고 꾸란에서 트렌치 전투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고난에 처한 사람을 구제할 준비가 되어 있고, 구제할 수있는 신적 자비심을 지닌 관세음보살에 대해 불교신자가 찬양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시킨다.


문선명 선생은 여러 차례, 특히 북한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 그는 사람들이 헌신과 신앙의 마음을 가질 때만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나님 사랑의 심정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그러나 사탄의 참소로 하나님이 보호하실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전에 스스로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


1. 고난에 처한 자에 대한 도움
 
종교 경전 


여호와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시편 23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지킨 자에게 그분은 하나의 길을 마련하시고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양식을 주시리라.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 누구든 그분으로 충족하리라. 실로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 분이시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에 일정한 한계를 두셨노라.
 꾸란 65.2-3 (이슬람)

 

여호와를 저의 피난처라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의 요새로 삼았으니,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리라.
어떤 재앙도 네 집을 가까이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ㄹ 두고 천사들을 명하여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행여 너 돌부리에 발을 다칠세라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고 가리라.
 시편 91.9-12 (기독교)

 

그것은 권세나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 내 영을 받아야 될 일이다.
 즈가리야 4.6

 

나와 하나 되라, 그대는 나의 은총으로모든 고난을 이기리라.
 바가바드기타 18.58 (힌두교)

 

힘없고 비천한 사람들
위대한 이에게 몸을 기대면, 또한 번성하리.
미미한 물방울 깊은 못에 녹아 하나 되면,
어느 세월에 말라 없어질까?
고결한 말씀의 귀한 보배
여호와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장정들고 비틀거리겠지만,
여호와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 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 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 하리라.
 이사야 40.28-31 (기독교)

 

왕들아, 너희가 대군을 거느렸다고
이길 성 싶으냐?
힘 좀 있다 해서 궁지에서 살아날 성 싶으냐?
군마만 믿다가는 살아나기 어렵고,
대군을 거느렸다 해서 사지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여호와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그 사랑을 바라는 자들을 지켜보시며
죽을 자리에서 목숨을 건져 주시고,
굶주릴 때에 살려 내신다.
여호와는 우리의 도움, 우리의 방패,
우리는 애타게 그분을 기다린다.
 시편 33.16-20 (기독교)

 

말씀 선집 


운명의 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나님도 사랑을 인연 맺을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없다면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권력이 필요합니까? 지식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단 하나 가지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길을 가지고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다는 특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특권을 가지고서 조정하면 운명의 길도 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불행한 자리로 간다면 불행한 자리로써 끝날 것이냐? 그것이 그 불행한 자리를 좋게 만들 수 있는 조건으로서는 끝날는지 모르지만 불행한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길을 찾아가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해도 행복이요, 행복하다고 하면 더 행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기 위해서 불행의 세계의 파도를 헤치고 거슬러 가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멋지게 생각하실 것이냐? 선생님은 그런 생각을 하고,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매를 맞을 때에도 ‘때려라 이놈의 지식들아, 쳐라 이 지식들아, 그 수가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하나미의 사랑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됩니까? 그럼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의 운몀 길을, 틀어지는 인생의 운명 길을 우리는 비로소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단 하나가 무엇인가? 우리 인생길은 믿을 수 없는 길이요, 허황한 길이요, 불안한 길이요, 그 다음엔 죽음의 고리를 묶는, 비참한 죽음의 고비를 넘는 길이지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고,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고, 이것을 보호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는 없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살고 죽는 모든 것을 하나나님과 같이할 수 있는 것이요, 보다 가치적인 내용을 지닌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길이야말로, 이러한 자리야말로 우리 인생 누구나가 찾아가야 할 길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67.175-176,1973.06.03)


우리의 마음은 찾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전파도 아무 곳에서나 작용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수신기가 있는 곳에서만 작용하는 것입니다. 상대기준이 있으면 어디서든 작용을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다운 양심과 참다운 심정적인 기준, 하늘의 심정적인 터전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어디 가든지 어느 때든지 억울하고 슬픈 자리에서도 자기도 모르게 살 길이 생깁니다.

 

오해받는 자리에서도 살 길이 생깁니다. 그 살 길은 좋은 자리에서는 그렇게 많이 안 생깁니다. 역사적인 혁명, 역사적인 발견, 역사적인 성곡을 했다는 사람 가운데 평탄한 자리에서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죽음과 직면한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자리에서 여러분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 하늘 앞에 서려면 반드시 곡절에 부딪칩니다. 물질적인 곡절과 인간을 중심삼은 사정과 심정적인 곡절에 부딪칩니다. 거기서 내 갈 곳이 이곳이라고 부르짖고 나가게 될 때, 수많은 사정과 곡절에 부딪쳐 허덕이는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대표자가 되는 것입니다.  (7.333-334,1959.10.18)

 

이 이상도 참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야, 아무개야. 더 이상 참지 마라, 그 길을 더 가지 마라’ 하고 정지시키는 것이 복귀의 자리입니다. 감사와 찬송의 마음을 가지고 참고 견디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눈물을 흘리며 찾아오셔서 ‘세상 가운데에 너 같은 아들이 어디에 있으며, 딸이 어디에 있겠느냐? 지금 네가 하는 일을 딴 사람에게 시키겠다’ 하시면 그를 안식의 자리, 하늘땅에 없는 복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옮겨놓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4.29,1971.05.04)


하나님은 어디서 역사하시고, 사탄은 어디서 참소하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반드시 두 가지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뜻을 이루는데 있어 하나님이 협조할 수 있는 지점까지는 인간의 힘으로 올라가야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협조해 주시는 것은 어떤 지점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을 넘어서야만 하나님이 협조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하에서는 협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식이 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더라고 은사의 시대가 있었으면 반드시 핍박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반드시 사탄이 공격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73.268-270.1974.09.29)

 

당신이 걸어오신 길을 따라와 보니 십자가의 길이었사옵니다. 그러나 남이 알지 못하는 그 길을 개척자의 심정으로몸부림치며 따라와 보니 그길이 망하는 길이 아님을 알았사옵니다. 인간들은 조롱하였으나 당신은 격려하셨사옵니다. 수많은 백성들과 수많은 인간들은 반대하였으나 당신은 앞에 서서 위로해 주셨사옵니다. ‘내가 있고 영계에 있는 천 천만 성도들이 네 갈 길을 옹호한다’ 고 하시며 몇 번이고 권고하셨던 것을 저희는 알고 있사옵니다.
 (16.50,1965.12.26)



2. 위험과죽음에서 구원

 

종교경전 


오, 너희 믿는 자들이여! 너희에게 베풀어 준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라. 적군이 너희를 공격하여 왔을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보지 못한 폭풍과 군대를 보냈느니라. 실로 하나님은 너희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고 계시노라. 보라, 그들이 너희의  위와 아래로 공격하여 왔을 때, 눈은 몽롱하여 지고 심장이 목구멍까지 고동쳐 오르자, 너희는 하나님에 대한 무익한 생각들을 일으켰느니라. 그때 믿는 자들은 시련을 받았고 격렬하게 동요되었노라. .. 그리고 하나님께서 격노한 불신자들을 물리치시니, 그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노라. 믿는 자들은 하나님만으로도 전쟁에서 충분하였으니, 하나님은 강하시고 전능하시노라.
 꾸란 33. 9-25(이슬람)

 

그제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러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나는 여호와를 찬양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여호와는 힘 있게 나를 붙드시어
나를 살려 주셨다.
내 하나님이시니,
어찌 찬양하지 않으랴.
나의 선조의 하나님이시니,
어찌 우러르지 않으랴.
여호와는 용사,
그 이름 여호와이시다.
파라오의 병거와 군대를 
바다에 처넣으시니,
빼어난 장교들이 홍해에 빠지더라.
깊은 바다가 덮치니,
깊은 물 속에 돌처럼 잠기더라.
여호와여, 당신의 오른손이 힘차
영광스럽습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오른손이 
원수를 짓부쉈습니다.
무서운 힘으로 당신은 적수를 꺾으셨습니다.
불타는 분노로 당신은 원수를 검불처럼
살라 버리셨습니다.
당신의 세찬 콧김에 바닷물이 쌓였고
물결은 둑처럼 일어섰으며,
바다 속 깊은 데서 물이 엉겼습니다.
원수는 장담하였습니다.
‘내가 그들을 따라 잡아
약탈하고 내 욕망을 채우리라.
칼을 뽑아 들고
이 손으로 쳐부수리라.‘
그러나 당신께서 바람을 일으키시자
바다가 그들을 덮어 버렸습니다.
모두들 거센 물결 속에 납덩이처럼
잠겼습니다.
여호와여, 신들 중에 당신 같은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거룩하며 영광스럽겠습니까?
당신께서 해내신 놀라운 일에
모두들 두려워 떨며 찬양을 드립니다.
출애굽기 15.1-11 (기독교)

 

그래서 이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간수는 이런 명령을 받고, 그들을 깊은 감방에 가두고서, 그들의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니,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문들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서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로 알고, 칼을 빼서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큰소리로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하고 외쳤다.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두 분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16.23-30 (기독교)

 

팔이 묶인 채 내가 군중들 가운데 내던져지고, 코끼리는 난폭하게 막대기로 내몰렸도다. 코끼리가 도망쳐 울부짖으며 선언하였다. “이 넘어진 자에게 나는 제물이 되리니, 주여, 당신만이 내게 힘을 내릴 수 있나이다.” 카지는 코끼리 부리는 자에게 코끼리를 몰아대라고 윽박질렀다. “네 이놈! 사정없이 내몰아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찢어 발겨놓을 테다!” 그러나 신을 명상하고 있던 코끼리는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느니, 그의 가슴에 주가 임하셨음이로다. 사람들이 물었다. “이 거룩한 작 무슨 죄를 저질렀단 말이오?
무슨 잘못을 범했기에 수족이 묶여 코끼리에게 짓밟히도록 내던져 졌단 말이오?“
코끼리는 둘러선 군중들에게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무지한 카지는 이를 헤아려 알지 못하였으니, 이와같이 세 번이나 억지 명령을 내렸도다. 
카비르가 이르노니, 주는 나의 수호자라!
그의 종의 삶은 다만 그와 더불어 있느니라.
 아디 그란트, 가운드, 카비르,p.870(시크교)
묘상을 갖추신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그 일을 거듭 묻고자하나이다.
이 보살을 왜 관세음이라 하나이까?
묘상을 구족하신 세존께서 게송으로
무진의 보상에게 대답하셨다.

그대는 곳에 따라 마땅히 응하는
관세음의 행을 들어라.
큰 서원은 바다와 같이 깊어
헤아릴 수 없는 겁을 통하여
여러 천억 부처님을 모셔 받들며
청정한 큰 서원을 세웠느니라.

내, 그대를 위하여 간략히 설하리라.
그 이름을 듣고 몸을 친견하여
마음에 생각하고 헛되게 아니하면
세상 모든 괴로움을 능히 멸하리라.

가령 어떤 이가 그대를 해칠 뜻을 내어
큰 불구덩이에 밀어 떨어뜨려도,
관세음의 거룩한 힘을 염하면
불구덩이가 변하여 못이 되리라!

혹 큰 바다에 표류하여
용과 악귀를 만나도,
관세음의 거룩한 힘을 염하면
사나운 물결도 집어 삼키지 못하리라...

혹은 원적에게 포위당해
각기 칼을 빼어 들고 해치려 해도
관세음의 거룩한 힘을 염하면
모두 자비심을 일으키게 되리라.

어쩌다가 국법에 걸려들어
형장에서 참수 당할 처지에 놓여도,
관세음의 거룩한 힘을 염하면
칼날이 조각조각 부서지리라....

참된 관세음이려! 청정 관세음이려!
한량없는 지혜의 관세음이려!
늘 원하옵고 앙모하나니!

오, 더없이 맑고 맑은 지혜의 광명이시여!
오, 어둠을 몰아내는 지혜의 태양이시여!
오, 풍재와 화재의 정복자시여!
당신의 장려함이 세상에 가득하도다!
 법화경 25 (불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절박한 순간, 사망의 자리에 생명의 구조선으로 나타나십니다. 
 (6.152,1959.04.19)

 

우리는 백 퍼센트 어리석은 자리에 섰지만, 백 퍼센트 이상 지혜로운 하나님이 친구가 되고 무한한 영계의 선조들이 나의 동반자가 되고 후원부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고맙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선에서 모험의 자리, 골리앗 앞에 다윗이 나서는 그 기분을 참 잘 압니다.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치면 네가 갈라지지 내가 갈라지지 않는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다 보니 진짜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203.192,1990.06.24)

 

레이건도 총 맞고, 교황도 총 맞았지만 안 죽었습니다. 그러니 레버런 문도 그럴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여건이 마련이 돼 있다는 것입니다.(116..155,1981.12.27)
협력 받기 위해서는 발표해야 됩니다. 발표해 가지고 사탄이 협조해 주면 하나님도 협조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이 협조해 주면 인간이 협조해 주기 때문에 사탄은 물러가야 됩니다. 메시아하고 하나 되고 하나님하고 하나 되게 되면 자기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사탄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이 접하고 가정이 접하고 국가가 접하고 세계가 접해서 환영하면 사탄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지권을 놓고 사탄이 인간을 피 흘리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됩니다. (329.287,2000.08.11)

 

사탄이 하늘나라 사람을 철망으로 묶어 놓으면... 하나님은 때가 되면 아무리 쇠사슬로 묶어 왔다 하더라도 사탄나라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그 묶어 놓은 모든 책임을 사탄에게 추궁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와서 구해 갈 수 있습니다. 때가 오면 하늘이 전부 데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가 오면 하늘이 전부 데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 끊어 버리고 데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죽어라도, ‘나는 태어나기를 하늘나라 백성으로 태어났고, 살기를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았고, 철망은 썼을망정 죽더라도 하늘나라에서 죽는다’ 하게 될 때 틀림없이 영계의 하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도리어 모든 사람이 잘 싸웠다고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98.162,1978.07.16)

 

여러분들의 최고의 복은 하늘나라에 가서 받는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위해서 감옥에가는 날이 희망의 날이요, 쇠고랑을 차도 희망의 날이 라는 것입니다. 휘파람을 불고 가는 날에는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다 준비해 놓고, 나를 만나서 가르침을 받을 준비를 다 하고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배달해 줄 사람도 다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까마귀를 시켜서 먹었다는 것은 약과라는 것입니다. 공산당을 시켜 가지고 먹을 것을 갖다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계를 통해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103.207,1979.02.25)

 

1950년 8월 1일, 백 대 이상의 B-29기가 총공격하여 흥남공장을 크게 폭격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잇었을 뿐 아니라 선생님으로부터 직경 12미터 이내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겠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두 선생님 주위에 있도록 일렀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중에서 가만히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폭격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금후의 이상세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귀의 사명을 하는 사람을 영계에 데리고 가면 하나님에겐 천주적인 손해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방비해 주고 싶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흥남 감옥에 있었을 때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매일 감상문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에 있어서는 할 만큼하고 있었으니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가 좋다고도  쓰지 않았고, 나쁘다고도 쓰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백지를 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전법을 취해 왔던 것입니다. (35.189,1970.10.13)

 

이북에서 유엔군이 제일 먼저 상륙한 곳이 흥남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쁘게 구해야 할 한 아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산당들은 그 전전날 한 감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밥을 준다고 꼬여서 전부 데리고 나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이려고 그러는 줄은 모르고 밥을 준다 하니 그것을 얻어먹겠다고 서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벌써 그것을 알았습니다. ‘너희들은 마지막 길을 가는구나! 그렇지만, 난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너희들은 다 죽더라도 난 죽지 않는다. 어떠한 참사의 비운이 거쳐 가는 자리에서도, 총살을 당해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난 결코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1950년 10월 12일 형기가 7년 이상인 죄수 한 70명 정도를 30리쯤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형기는 5년이었기 때문에 그 다음, 다음날이 내가 끌려갈 차례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바쁘셨을 것입니다. 13일 밤거리를 내다보니 벌써 사태가 달라졌습니다. 유엔군이 흥남에 상륙했다는 것입니다.그러니 공산군들은 보따리 싸기가 바빴습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10월 14일 공산군이 물러가자 우리는 감옥에서 빠져나와서 이남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22.129-130,1969.02.02)



역전과 복귀

 

구원은 경우에 따라 거대한 역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재편성하려는 의도를 표명할 때, 부자와 권력자들이 더 이상 정직한 사람들과 하나님을 외경하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못할 때, 우리는 거대한 역전을 목격한다. 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길은 세속적 길과 반대라는 것을 인식한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방향을 180도 전환해야 함을 깨닫는다. 성서는 이러한 내적 역전을, 생명을 얻기 위해 가지를 죽이는 것이며, 광명을 얻기 위해 흑암을 찾는 것이며, 성스러움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통해 구원은 곧 복귀라는 개념이 도출된다. 복귀는 나쁜 습과, 그릇된 사고방식 및 행동양식, 그리고 부패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과 참된 원리에 따라 본래의 생활방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본래의 상태로 역전이라는 주제에 관한 중요한 표현 중 하나가 불교의 연기법(Paticcasamuppada)교리다. 이 교리는 단순히 인과관계의 법칙이 아니라, 멸망으로 유도되는 모든 원인을 되돌려야 한다는 통찰이라 함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탕감을 통한 복귀의 가르침 아래 이 주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신다. 탕감은 넓은 의미로 반대의 길을 택함으로써 잘못을 복귀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성격을 전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그것은 범죄로 인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손해배상을 하는 행위, 본래 내 잘못이 아니었을지라도 형제의 우애를 복복하기 위해 자신이 책임지는 행위등 다양한 관계로 확대되는 것이다. 탕감은 인간 타락으로 인한 원죄의 역전, 즉 완전한 복귀와 함께 이행된다.


1. 대 역전


종교 경전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신다. 사회적 명성을 추구하는 자에게 사회적 명성은 달아나고, 사회적 명성에 초연한 자에게는 사회적 명성이 그를 찾아다닌다. 환경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환경이 그를 귀찮게 얽어매지만, 환경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자에게는 환경이 제자리를 지키게 된다.
탈무드, 에뤼빈 13b (유대교)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16(기독교)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마태복음 23.12(기독교)

 

천도는 마치 활시위를 메기는 것 같다.
높은 데는 누르고 낮은 데는 돋운다.
남는 것은 줄이고 모자라는 것은 보충한다.
하늘의 방식은 남는 것을 줄이고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 준다.
(그러나) 인간의 방식은 그렇지 않다.
모자라는 것을 축내어 남는 것을 받들게 한다.
남는 것으로 천하를 받들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오직 도를 터득한 사람이니라.
도덕경 77 (도교)

 

힘 있는 용사의 활은 꺾이고 비틀거리던 군인은 허리를 묶고 일어나게 되리라.
배불렀던 자는 떡 한 조각 얻기 위하여 품을 팔고 굶주리던 사람은 다시는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 남매를 낳고 아들 많던 어미는 그 기가 꺾이리라.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신다. 여호와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게도 하시며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신다.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뒹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땅의 밑동은 여호와의 것, 그 위에 세상을 지으셨으니, 당신을 따르며 그 걸음걸음을 지켜 주시지만 불의하게 살면 앞이 캄캄해져서 말문이 막히리라. 사람이 제 힘으로는 승리하지 못한는 법, 여호와께 맞서는 자는 깨어지리라.
사무엘상 2.4-9 (기독교)

 

말씀 선집


섭리노정은 구원노정이고, 구원노정은 복귀노정이고, 복귀노정은 창조노정입니다. 일단 공장만 만들어 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최초의 피조물이 가지고 잇던 관념은 하나님의 관념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관념은 없었습니다.

 

제로 관념이었습니다. 우리도 복귀노정, 재창조 노정에 있어서 영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생명을 그렇게 잘라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연의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역사에 있어서 악한 자가 위에 있었습니다. 본래는 선한 자가 올라가고 악한 자는 내려가야 됩니다. 방향이 바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올라가고 선한 자가 내려가던 것과 반대로 선한자가 올라가고 악한 자가 내려가는 그 교차점이 제로 포인트입니다. 지금이 그렇게 교차되는 때라는 것입니다.
(218.1870188,1991.07.28)



2.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복귀

종교 경전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목숨을 잃는 사람은 보존할 것이다. 누가복음 17.33 (기독교)

 

구부러지면 도리어 온전할 수가 있고,
굽으면 도리어 곧게 뻗을 수가 있고,
움푹 패어지면 도리어 찰 수가 있고, 
낡으면 도리어 새롭게 될 수가 있고,
적으면 도리어 많이 얻을 수가 있고,
많으면 도리어 망설이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인 도를 지킴으로써 천하의 모범이 된다.
도덕경 22(도교)
내가 너희에게 법을 설하노라.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에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음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에 저것이 멸한다.
맛지마 니카야 2.32 (불교)

 

오, 캇차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갈망과 탐착과 업습에 묶여 있다. 그러나 비구는 갈망하여 탐착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으며, 번뇌와 타성을 끊으며 자기를 고집하는 편견에 붙잡히는 법이 없다. 그는 존재에서 일어나는 것이란 다만 악이며, 존재에서 멸해지는 것도 다만 악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확신은 다만 그 자신 이외의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 캇차나여! 이것을 일러 바른 믿음이라 한다.
오, 캇차나여! 사물이 실유를 지닌다고 설하는 것, 또는 이에 대하여 사물이 실유를 지니지 않는다. 고 설하는 것은 다만 단견의 소치이며, 여래는 이러한 단견들에서 벗어나 다만 중도를 설한다.

무명을 인연으로 하여 행이 있고,
행을 인연으로 하여 식이 있고,
식을 인연으로 명색이 있고,
명색을 인연으로 하여 육입이 있고, 
육입을 인연으로 하여 촉이 있고,
촉을 인연으로 하여 수가 있고,
수를 인연으로 하여 애가 있고,
애를 인연으로 하여 취가 있고,
취를 인연으로 하여 유가 있고,
유를 인연으로 하여 생이 있고,
행을 인연으로 하여 늙음, 죽음, 슬픔, 비탄, 불행, 비통, 절망이 있다. 이로써 이 모든 불행이 일어난다.

그러나 무명이 멸할 때 행이 멸한다.
행이 멸함에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함에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함에 육입이 멸하고,
육입이 멸함에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함에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함에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함에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함에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함에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함에 늙음, 죽음, 슬픔, 비탄, 불행, 비통, 절망이 멸하니, 이로써 모든 불행이 사라진다. 상윳타 니카야 22.90 (불교)

 

일체만유의 밤에 현자는 빛으로 깨어 있으며, 온 세상이 낮이라 부르는 것이 현자에게는 칠흑 같은 무지의 밤이니라
바가바드기타 2.69 (힌두교)

 

밝게 나타나는 도는 마치 어두운 듯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나는 듯하다.
평탄한 도는 마치 기복이 심한 듯 하고,
가장 높은 도는 골짜기 같고,
가장 흰 빛은 마치 검은 빛 같다.
도덕경 41(도교)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것들, 마져지는 것들, 의근이 머무는 대상들, 이 모든 것들은 예외없이 즐겁고 유쾌하며 마음을 끄는 것이다. 그들이 있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현상적 존재들을 행복의 원천으로 여기며 신처럼 떠받든다. 이들이 사라질 때, 사람들은 이를 일러 고통이라 한다. 현상적 존재의 지멸은 우리 아리안들에게 행복의 원으로 여겨진다. 실상을 보는 이들의 이러한 통찰은 세상 사람들의 미혹된 소견들과 정반대이다. 다른 이들이 행복의 원천이라하는 것들을 우리는 고통이라 말하며, 다른 이들이 고통으로 여기는 것을 우리는 행복으로 여긴다. 실로 깨우치기 어려워, 무지한 자들이 그 속엥서 갈팡질팡하는 이 가르침을 직시하라.
상윳타 니카야 4.127-128 (불교)

 

말씀 선집


하나님의 뜻 길을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여기서 탕감법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탕감법은 양면이 결부돼야 됩니다. 탕감은 무슨 방법이냐 하면 부정방법입니다. 반대의 방법입니다. 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사탄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우리는 사탄을 부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73.94,1974.08.04)

 

무엇이든지 그 본연의 위치와 상태 등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본래의 위치와 상태에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어떠한 조건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세우는 것을 ‘탕감’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 명예나 직위나 건강 들을 원상대로 회복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노력이나 재력 등의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서로 사랑하던 두 사람이 어찌 되어서 미워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하자. 여기서 이들이 다시 서로 사랑하던 원상태에로 복귀하려면, 그들은 반드시 서로 사과를 하는 등의 어떠한 조건을 세우리 않으면 안된다. (원리강론. 후편 서론 1.1)



3. 본연의 상태로 복귀

 

종교 경전


만일 그대가 어떤 매듭을 풀려면, 먼저 어떻게 그것이 꼬이게 되었는지 않아야 한다.
수능엄삼매경 (불교)

 

일체중생은 자신의 본심이 하나로 혼용되 본래의 청정한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느니라.
수능엄삼매경(불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리사욕을 억제하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다. 하루라도 자기를 누르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로 돌아갈 것이다.”
논어 12.1.1 (유교)

 

언제나 법도를 알고 지키는 것을 바로 현덕이라고 한다.
현덕은 깊고 위대하다.
세속과 반대이면서 만물과 더불어
도에 복귀한다.
그리하여 도와 크게 순합할 수가 있다.
도덕경 65 (도교)

 

그것은 마치 작은 숲을 지나고 큰 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가던 사람이 이전 사람들이 지나갔던 오래된 길을 보는 것과 같다. .... 그 사람이 왕자에게 말한다. “주인이시여, 저는 숲을 지나가고 있을 때, 어떤 오래된 길, 이전 사람들이 지나갔던 길을 보았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저는 오래된 도성의 폐허들과 고대 왕자의 영토를 보았는데, 그곳에는 정원들, 동산들, 우물들, 벽의 주춧돌들, 명승지가 있었습니다. 주인이시여, 그 도성을 회복하소서.” 그때 왕자 또는 그의 신하는 그 도성을 회복하고, 그래서 그 도성은 번창하게 되며, 건강하게 노년에 이를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대의 길, 이전 시대에 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고대의 길을 보았다. 상윳타 니카야 2.106 (불교)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해서 들어 왔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1-22(기독교)

 

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음탕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그런 자들이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뱀이 하와에게 다가오며 그녀를 유혹하여 성관계를 맺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시나이 산에서 마주쳤을 때는 호색적 기질이 사라졌지만, 그러나 시나이 산에 서 보지 않았던 우상 숭배자들에게는 호색적인 기질이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탈무드, 샤바트 145b-146a (유대교)

 

메시아가 오실 때, 거룩한 그 분은 상처(아담의죄)를 치유해주실 것이다. 나아가 세상의 상처 또한 치유해 주실것이다. 창세기 랍바 10.4 (유대교)

 

말씀 선집


복귀의 길은 인간 편에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복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탕감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탕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탕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은 탕감하지 않고는 갈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병이 낫기 위해서는 병난 사람이 싫은 약이라도 그저 입을 악물고라도, 쓰더라도 먹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약은 대체로 단 약이 없습니다. 쓴것이 진짜 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길은 탕감하지 않으면 못 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92.254-255,1977.04.18)

 

이제 새로운 아들딸을 만들어 내야 될 텐데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이냐? 여러분이 태어나는 데는 수많은 조상을 통해서 태어났지만, 거꾸로 전부 올라가야 됩니다. 거꾸로 올라가서 우리 인류의 타락한 조상이 아니라 참된 조상의 문을 통해서 하나님에까지 들어가야 됩니다. 기독교의 사상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사상을 대표한 것입니다. 그 사상의 골자가 뭐냐 하면, 부활입니다. 다시 사는 것입니다. 중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96.40,1978.01.01)

 

아담 해와가 물에 빠져 버린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전 인류가 똑같은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정리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근본 뿌리까지 내려가서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48.149,1993.08.01)

 

타락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말씀에 불복함으로써 하나님적 인격과 사랑을 구현한 개인과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사탄과 짝하여 그의 말에 굴복함으로써 사탄적 인격과 사랑을 이룬 악의 세계를 형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원상으로 복귀하려면 반대로 사탄을 배척하고 잃었던 하나님을 찾아서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천적인 인격과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88.209,1976.09.18)

 

아버지! 역사적인 모든 사정들이 오늘날 저희의 일신에 엉켜 있사오니, 그것을 끊고 해방의 중심을 갖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의 입장에 서서 아버지 앞에 경배할 수 있는 기쁨의 한 자체로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1.345,1956.12.30)



중생

  

예수님은 “거듭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은 세속적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킨다.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함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한다.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이 두 번 태어나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모든 세대가 타락의 부정적 결과를 경험하는 것은 인간 혈통의 자리가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인간 타락으로 인해 사탄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고 인간의 거짓 아버지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인간생명을 악마가 지속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원죄가 없는 남자로 아버지를 대표하는 구세주를 , 어머니를 대표하는 성령을 보냈다. 구세주와 성령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동양의 종교는 흔히 영적 열망의 길에 들어서는 거을 두 번째의 영적 탄생으로 이해한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종교적 가르침을 받으면 “두 번 태어난다”고 한다. 그들은 생물학적 부모를 통해 감각세계에 태어났지만 그들의 영적 중생 후의 삶은 본성에 근거한다. 그러나 문선명 선생은 원죄의 혈통으로부터 우리를 끊기 위한 구세주의 사역에만 엄격히 적용되는 기독교 교리에 근거해서 중생을 설명한다. 그는 부활이라는 개념 아래 종교적 진리의 가르침을 통한 넓은 의미의 영적 전환을 중생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문선명 선생은 중생을 얻기 위함 조건으로 회개와 세속적 길의 포기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는 중생과정을 새로운 가지에 접붙이기 전에 낡은 가지를 잘라내야 하는 접붙임으로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모든 잘못되 것을 잘라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지닌 새로운 가지에 접붙이게 된다. 나무가 적절하게 접붙여 졌으면 새로운 가지는 새로운 열매를 맺을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혈통을 번식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일지라도 그 수혜자에게는 책임과 헌신이 요구된다.




1. 하나님의 아들딸로 새롭게 태어남
   
종교 경전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의회 의원이었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내가 네게 다시 나야 한다고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한복은 3.1-7 (기독교)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으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인간의 의욕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13 (기독교)

 

스승이라 함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의무와 이에 따른 지식을 나누어 주는 자를 일러 말함이니, 그는 마땅히 주의 뜻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가르침을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진리로 거듭남이 지선(至善)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만 몸을 주었을 뿐이니라.
아파스탐바 디르마 수트라 1.1(힌두교)

 

비구들이여! 나는 구원에 응하며, 언제나 청정한 손을 지닌, 더 이상 미혹한 생을 받지 않을 마지막 몸을 입은 바라문이다. 더할 나위 없는 내과의원이요 외과의원이다. 너희는 나으 참된 후손들이다. 나의 입에서 태어났고 진리에서 태어났으며, 진리로 만들어진 후손들이다. 진리의 상속자요 영적인 상속자이지, 육적인 상속자가 아니다.  
이티붓타카 101(불교)


말씀선집  

 

왜, 어째서 우리에게 신생(新生)이 필요하냐? 그것은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이 가져온 선물입니다. 그러면 결국 타락은 무엇이냐? 타락한 부모로부터 내가 이어받은, 그런 출생을 한 것이 타락도딘 입장에 선 것이 됩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나는 타락된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타락된 사랑 가운데 태어났다 하는 그런 확신, 그러한 느낌을 스스로 완전히 느끼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95.82, 1977.11.01)

 

타락이 뭐냐? 사랑의 진리를 잘못 가진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이 서구사회에서는 타락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타락으로 사랑의 핏줄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출발점이 달라졌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구원섭리니 무엇이니 하는 것이 해석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이 불완전한 하나님으로 서야 되었던 것입니다.   (193.53,1989.08.20)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중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3:3). 중생이라는 말은 거듭난다는 뜻이다. 그러면 인간은 왜 중생해야 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타락인간이 중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담과 해와가 창조이상을 완성하여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다면, 그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은 원죄가 없는 선한 자녀가 되어 지상천국을 이우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의 악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악한 자녀들을 번식하여 지상지옥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타락한 인간들은 원죄가 없는 자녀로서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낳아 주신 것은 부모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러면 타락한 우리들을 원죄가 없는 자녀로 다시 낳아서, 하나님으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선한 부모는 누구일 것인가?


원죄 있는 악으 부모가 원죄 없는 선의 자녀를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의 부모가 타락 인간들 가운데에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므로그러한 부모는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따라서 그는 타락한 자녀들을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지상천국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참아버지로 오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장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중생) 하사 산 소망이 이게 하시며” 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아담으로써 못 이루셨던 참아버지로 오셨기 때문에 성경은 그를 후아담이라고 하였다(고전 15:45), 영존하신 아버지라 하였으며(사 9:6), 또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어 그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부모로 오시는 예수님 앞으로 돌이키게 함으로써, 그들로 자녀가 되게 하시겠다고도 말씀하셨다(말 4:6).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에도 아버지으 영광으로 오시리라(마 16:27)고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타락한 자녀들을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해서는 참아버지와 함께 참어머니도 계셔야 하는 것이다. 죄악의 자녀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그 참어머니로 오신 분이 바로 성신이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신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은 참어머니로서, 후해와로 오신분이시기 때문에, 그를 여성신으로 계시 받은 사람이 많다. 그리고 성신이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성신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은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위로와 감동의 역사를 하시는 것이며(고전 12:3), 또 해와가 지은 죄를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죄를 씻는 역사를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남성이시므로 하늘(양)에서, 성신은 여성이시므로 땅(음)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원리강론, 기독론 4.1.1)



2. 옛 모습을 단절해야 할 중생

 

종교 경전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노예의 영을 받은 거이 아니라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영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자녀라면 상속자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할 사람이 됩니다.    
로마서 8.14-17(기독교)

 

무릇 육으로 난 인간은 아담이 타락한 때로부터 하나님의 적이요,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맡겨 육으로 된 자기를 버리고 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성도가 되며, 어린 아이같이 되어 유슨하고 온유 겸손하며, 인내하며 사랑이 충만하여, 주께서 인간에게 합당하다 여기어 내리시는 모든 것에, 어린 아이가 그 부모에게 하듯 기꺼이 순종하지 아니할진대, 영원토록 하나님의 적이 되리라.                   
몰몬경,  모사이야서 3.19(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이 동일한 사람들은 이 모든 단점의 장막에 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러한 관습에 속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영광의 현시자의 손에 들린 확신의 잔에 담겨 있는 불멸의 믿음을 한모금 마시자마자 변형되어 그들의 동족을 위해, 그들의 본체, 그들의 생명, 그들의 믿음,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그들의 양보는 너무 압도적이고, 무아경의 환희에의 도취는 너무 앙양되어서,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들의 눈에 무가치한 것으로 변해 버렸다. 이 사람들이 ‘재생’ 의 신비를 예증하는 것이 아닌가?...                                
확신의 서, 155(바하이교)

 

말씀 선집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는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44.100,1993.01.31)

 

기독교 사상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주류사상입니다. 성령이 찾아와서 혹은 구세주와 관계를 맺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을 하기 위해서 성령이 필요하고 성령이 와야 되느냐? 결국 하늘로 데리고 가자, 하늘로 데리고 가자는 것입니다. 선한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첫 번째 과제가 회개입니다. 
(99.75-76,1979.09.01) 

 

부활은 인간이 그의 타락으로 초래딘 죽음, 즉 사탄 주관권내에 떨어진 입장으로부터, 복귀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 주관권내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과정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회개하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좀 더 선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부활한 것이 된다.  (원리강론, 부활론1.3)

 

저희는 어차피 악에서 태어난 몸이기 때문에 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두 번 태어나야 할 운명, 이것은 비참한 것이옵니다. 세상에서도 의붓 부모의 자식으로 생활하는 것은 지극히 억울한 것이 아니옵니까? 우리는 의봇아들의 정도가 아니라, 원수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본연의 부모를 찾아가야 하는데, 그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저희들은 사탄의 화살과 사탄의 창검의 공격을 무수히 받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저희들은 이렇듯 몸을 얽어매고 있는 끈들을 끊고 가야 하겠사옵니다. 입으로 끊든지, 힘으로 끊든기, 얽어매고 있는 자들과 부딪쳐야 되겠습니다. 
 (27.162.1969.12.07)



3. 예수와 성령을 통한 중생

 

종교 경전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였다. 그 때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나더니, 각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 곡 주 우리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1, 38-39(기독교)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고, 순종하지 않고, 미혹을 당하고, 온갖 정욕과 향락에 종노릇 하고, 악의와 시기심을 가지고 살고, 남에게 미움을 받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류를 사랑하심이 나타났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 주심고 성령으로 새롭게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디도서 3.3-7(기독교)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또한 “오십시오!” 하고 외치십시오, 목이 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
요한계시록 22.17(기독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운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복음 6.53-58(기독교)


말씀 선집 


선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지상의 수직 사랑인 해와를 중심삼고 관계를 맺었다 하는, 본래의 하나님, 완성된 남자와 일체가 디어 해와와 관계를 맺었다 하는, 사랑의 심정권의 수립에 의해서 처음으로 영적인 기준으로 있으면서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조건적 사랑에 의해서 우리들은 영적 부활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 완성은 아닙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중생, 다시 태어난다는 말의 뜻입니다.
 (379.190,2002.05.29)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신부되시는 성신의 사랑이 일체가 된 사랑이 나의 뼈와 살과 하나 돼야 합니다. 즉,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사랑의 심정 기반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중생 받아야 된다고 말하지만, 여러분들이 중생 받으려면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해야 됩니다. 타락권내에서, 즉 사탄의 사랑권 내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사랑보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루어지는 사랑이 더 차원 높지 않는 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14.28,1981.05.14)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유래를 모르고 지금 야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무엇입니까? 타락하지 않은 완성된 아버지의 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인데 아버지 혼자 혈통을 상속해 줄 수 있습니까? 없으니까 어머니를 찾아오는데 이것이 일들 신부를 찾아오는 어린양잔치의 혼인날이라는 것입니다. 
 (193.57,1989.08.20)

 

오늘날까지 기독교에 있어서 성령은 어머니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영인 성령을 통과하여 아버지 영, 즉 예수의 영을 통과하여 영적 기준에서 새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어머니의 태내에서 태어난 셈이지만 다시 한걸음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보면, 생명의 기원은 아버지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태내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혈통은 교차하고 복귀되었지만, 이 경우 아직 아버지를 맞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은 어머니의 영인 성령의 힘에 의해 생명의 근원, 즉 생명의 기원인, 아버지이신, 와야 할 그리스도의 앞으로 돌아갈 것을 소망하며 기다려 온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에 이미 아들 딸의 생명은 모두 아버지인 아담의 몸속에서 하나의 씨알로 출발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즉, 아들이나 딸이 될 씨알은 아버지의 몸속에 있는 것입니다.


 (55.117-118, 1972.04.01)



부활


성서에 죽은 자의 부활이 예언되어 있으며 꾸란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ㅂ고된 미래의 삶에 대한 약속이 있다. 부활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죽은 자가 사후 세계로 영혼이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영원한 삶의 영역으로 영혼을 승화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이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새 삶의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니라 새 삶의 질적 변화를 수행하는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부활을 통해 죽음의 영역인 지옥에 갇힌 존재에서 하나님 품 안의 축복받은 존재로 영적으로 끌어올려 진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새 삶, 곧 부활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죽이기, 확고한 신앙, 심지어 순교 등의 조건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 완전하게 관계를 맺기  위해서 사탄의 관계를 끊고 자신을 ‘죽이는 것’ 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의 전제조건으로 십자가에서 제물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시련에 직면할 수 있다. 예수님이 외견상 로마인의 손에 희생되어 패배한 것처럼 보였으나 승리한 것은 하나님이 패배를 뒤집고 죽음까지도 승리와 생명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성서는 모든 정의로운 영혼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말세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서는 144,000의 거룩한 무리가 ‘첫째 부활’ 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후 세계에서도 영혼들이 미래의 해방의 날이 올 때까지 흑암 속에서 견디며 악조건에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세주가 출현하여 사탄을 무리치고 지옥에 가두는 그 날 천상과지상의 모든 여혼들이 부활의 자유와 새 삶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선명 선생이 분명히 밝힌 것처럼, 첫째 부활은 다른 사람의 노력의 대가로 특정 신앙인에게 영원한 은총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거룩한 사람들은 바울이 ‘마지막 물리칠 원수는 사망’ 이라고 말한 것처럼, 한 영혼이라도 죽음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도록 악의 모든 권세를 물리치는 투쟁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1. 사망에서 생명으로


종교 경전 


외치는 자가 가까운 곳에서 외치는 날에는 귀를 기우리라. 그들이 진리의 소리를 듣게 되는날 그 날이 무업에서 나오게 디는 날이니라. 진실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기도 하고 죽음에 이르게도 하니 우리에게 돌아오리라.
대지가 그들 주위에서 갈라지는 날 그들은 서둘러 나와 모이게 되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에게 쉬운 일이니라.
 꾸란 50.41-44(이슬람)

 

여호와께서 손으로 나를 잡으시자 여호와의 기운이 나를 밖으로 이끌어내셨다. 그래서 들 한가운데 이끌려 나가보니 거기에 뼈들이 가득히 널려있는 것이었다. 그분이 나를 그리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들 바닥에는 뼈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말라 있었다.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것 같으냐?” 내가 “주 여호와여, 당신께서 아시옵니다.” 하고 아뢰니, 그분이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마른 뼈들아, 이 여호와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여호와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되리라.’”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여호와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여호와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여호와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에스겔37.1-14(기독교)

 

그들이 말하길, 우리가 정말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이렇게 부서진 뼈가 되었는데도. 그들이 말하길, 그러면 그것은 손해 보는 복귀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마디 외침일 뿐이다. 그러면 그들은 깨어날 것이니라.
 꾸란 79.10-14(이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2(기독교)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11.25-26(기독교)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라도
나는 하나님을 뵙고야 말리라.
 욥기 19.25-26 (기독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요한복음 12.24-25(기독교)

 

하나님의 징표를 그대는 황량한 대지에서 볼 수 있노라. 하나님이 그 위에 비를 내리면 곧 생기로 가득 차 약동하노라. 대지를 소생시킨 분은 죽은자도 소생시킬 수 있는 분이시리라. 진실로 그분은 만물을 지배하시는 분이니라.
 꾸란 41.39(이슬람)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42-45 (기독교)


말씀 선집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이 목숨이 끊어져서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타락으로 인한 죽음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성서가 의미하는 부활이라고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이미 타계한 성도들의 부활은 곧 흙으로 분해되었던 그 육신이 다시 원상태로 살아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창조원리에 의하면 이러한 죽음은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 아니다. 원래 인간이란 노쇠하면 그 육신은 자연히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한 번 흙으로 분해되어버린 육신은 다시 원상태로 부활할 수도 없으려니와, 영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 영인체가 다시 육신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이 그의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 즉 사탄 주관권내에 떨어진 입장으로부터 복귀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 주관권내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그 과정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회개하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좀더 선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부활한 것이 된다.


성서에서 부활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품속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한편,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게 된 것이 사망이요, 여기서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혈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창 2:17)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된 아담과 해와는 죽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외형적인 아무런 변이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었다면 불안과 공포로 인하여 순간적으로 그들의 안색이 변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인간으로 부활된다 하더라도 그의 외형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신으로 중생한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에 비하여 분명히 부활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그와 강도를 비교해 본다면, 하나는 하늘편의 사람으로서 중생한 정도만큼 부활한 입장에 있고, 또 하나는 지옥에 가야 할 사람으로서 죽은 입장에 있지만 그들의 회형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예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사망으로부터 생명에로 옮겨져서 부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기 전 사망한 상태에 따라 있을 때나 예수를 믿고 생명에로 옮겨짐으로써 부활한 후나 그의 육체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할 인간으로 오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외형으로 본 예수님은 타락인간에 비하여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만일 그에게 다른 것이 있었다면 당시의 측근자들이 그를 믿고 따르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부활로 인하여 사탄의 주관을 벗어나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타락인간이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주관을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심령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령의 변화에 의하여 인간의 육신도 사탄이 우거하는 전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성전으로 사실상 성화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신도 부활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악한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 왔던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용하게 되면, 그 건물의 외형에 있어서는 하등의 변화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성스러운 건물로 변화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다.  (원리강론, 부활론 1.3-4)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죽기 전까지는 내것이지만 죽은 후에는 하나님 것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락한 혈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까지는 우리의 생명 전부는 사탄편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과으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한 시대를 지내지 않고는 다른 시대를 맞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고 한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죽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세계의 타락한 혈통을 이어받은 생명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을 위해 죽으려는 사람은 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역설 같지만 타락과 복귀의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복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의 정상적인 논법입니다.  (297.265,1998.12.19)



성경은 결론적으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내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권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걸 부정하면 부활이 벌어집니다. 예수님도 자기 생명을 부정했기 때문에 부활할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켜 준 것입니다.  (307.167.1998.11.08)
(p.387


2. 성인의 부활 : 첫째 부활

 

종교 경전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기독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에 두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5.22-26(기독교)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서 있었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 큰 천둥소리와도 같은 음성이 하늘로부터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음성은 거문고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노랫가락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보좌와 네 생물과 그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땅으로부터 속량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 밖에는, 아무도 그 노래를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로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정절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드리는 첫 열매로 속량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찾을 수 없고, 그들에게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4.1-5(기독교)

 

나는 또 한 천사가 아비소스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용, 곧 악마요 사탄인 그 옛 뱀을 붙잡아 결박하여, 아비소스에 던지고 닫은 다음에, 그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 동안 가두어 두고, 천 년이 끝날 때가지는 민족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그 뒤에 잠시 동안 플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과,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하께 천 년동안 다스렸습니다. 그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요한계시록 20.1-6(기독교)


말씀 선집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구경하기 위하여 지으셨다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습니다. 온 신경을 일ㄴ간에게 기울이고 6천년 기나긴 시련의 세월을 거쳐 오면서 인간을 대하여 섭리해 나온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직접적인 하늘의 가족, 즉 식구의 인연, 부자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무수한 수고의 고비를 넘고 넘어, 오늘도 이 길을 달음질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가정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의 식구로서 등장하여 그 식구의 위신과 가치를 아버지 앞에 나타내는 그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날이요 재림의 날일 것입니다.  (7.265,1959.09.27)

 

‘첫째 부활’ 이라 함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가 시작된 이후 재림역사에 의하여서 맨 처음으로 인간이 원죄를 벗고 창조본연의 자아를 복귀하여 창조목적을 이루게 하는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 신도들의 유일한 소망은 ‘첫째 부활’ 에 참여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재림주님이 강림하시게 될 때, 맨 먼저 그를 믿고 모시고 따라 복귀섭리노정의 전체적이며 또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시는 그의 일을 협조함으로써, 모든 인간에 앞서 먼저 원죄를 벗고 생령체급 영인체를 이루어 창조목적을 완성한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복귀섭리를 완수하시기 위해서는,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하늘 뜻을 받들고 나오다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모든 성현들의 처지를 탕감복귀 할 수 있는 대신자들을 재림주님이 그 일대에서 횡적으로 찾아 세워 사탄세계에 대한 승리의 기대를 닦아 놓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재림주님이 오셔서 찾아 세워야 할 성도들이 그 전체 수가 바로요한계시록 14장 1절 내지 4절과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기록되어 있는 14만 4천 무리인 것이다. 
 (원리강론, 부활론 1.2.7)  



2. 사랑: 영생의 토대
 

종교 경전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의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을 하는 사람입니다. 살인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으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요한일서 3.14-16

 

말씀 선집 


사랑은 영원하길 바라지요? 그건 절대적 사랑과 하나되어야 됩니다. 그 절대적 사랑과 하나 되려면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됩니다 근본 하나님의 뿌리에서부터 절대적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절대적인 사랑에는 영원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이며 인간은 상대라면 하나님이 영원히 사니 사랑의 상대, 일체된 인간도 영원히 살아야 되는 것은 이론적이요, 논리적인 결론입니다. 참사람에서만이, 절대적인 사랑에서만이 영생이 존속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251.120,1993.10.17)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 되어 있으면 세상이야 망하든 뭐하든 걱정을 안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칼을 붙들고 하나 못 되게 하더라도 그 칼이 무섭지 않습니다. 죽어서라도 간다는 이런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생애를 중심삼은 그 생애만이 아닙니다. 영생이 그렇게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히 바라게 되어 있습니다. 현세의 생활보다도 영생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본체가 하나님이므로 하나님이 본체의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플러스 됐으면 마이너스가 되는 것입니다. 마이너스 위에 마이너스가 안 오고 플러스가 붙어야 됩니다. 그래서 큰 하늘과 거기에 상대적인 것이 하나 되어 돌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플러스만 붙게 되면 여기를 따라서 크는 것입니다. 자식이 크고 전부 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인간생활의 완성 표준을 중심삼고 그것이 하나의 씨와 같이 되어서 순환운동을 해서 춘하추동 사계절을 통해 열매 맺히는 것입니다. 씨가 다시 씨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수증기가 되어 가지고 조화를 부리지만 나중에는 수증기로 돌아와 담수로 돌아오는 거와 마찬가지 이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돌기 위해서는 이중적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80.88-89,2002.06.05) 



아버지는 저희 자신을 입증할 수 있고, 저희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거 할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신념뿐만 아니라 체휼적인 자리에서 아버지와 나는 전후관계, 좌우관계에 있음을 입증하고 그런 입장에서 영원히 같이 있었고, 영원히 같이 살고 있고, 영원히 같이 살 것이라는, 변함없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 논증의 기원을 스스로 세울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되겟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참된 길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40.350,1971/02.11)



우주적 구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은 한계가 없다.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은 온통 그의 자녀 모두를 구원하기만을 바랄뿐이다. 이러한 경전 구절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광대함을 찬양하며 결국 모든 인간을 껴안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불교에서 절대 진리의 근본 복적도 모든 감각적 존재를 해방시키는 것이며, 특히 대승불교 경전은 모든 존재를 구원하기 위한 아미타불의 보살 서원에서 자비의 보편성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의 중심점을 통해 모든 인류의 구원이 실현될지 모른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창세기 12.3)고 말했다. 오직 한 길로 하나의 종교를 믿는 사람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선교 활동을 강력히 촉구하게 된다. 반면에 하나님은 모든 나라에 수많은 선지자와 성현을 보내어 그 지역 문화에 적합한 방법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현실화한다.


구원이 세속적인 삶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린 것이라면 지옥이나 말세의 심판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공정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정의롭다면 어떻게 사악한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반대로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은혜롭고 자비롭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피조물을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 받게 하실수 있는가?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는 문선명 선생은 우리 자녀 중 하나가 유죄 선고를 받은 범죄인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느낄지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녀 대신에 우리 사진이 교수대에 오를지라도 자녀를 구하고자 할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최상의 자유를 누리게 하고 우리의 삶도 거기에 상응하도록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방법에 조응하지 못한다면 구원의 길이 어렵게 된다는 점을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구현될 것이므로 마침내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고 지옥도 텅 비게 될 것이다.
 

종교 경전 


부처께서 설하시는 법은 언제나 한 맛으로 온 세간이 널리 구족함을 얻어 점차로 수행하여 도의 열매를 얻게 하느니라.  법화경 5 (불교)


나날이 어버이의 마음은
구제할 준비만을 생각하고 있다. 친필 14.35(천리교)


주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후서 3.9(기독교)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국가들이 회개하기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래서 모든 백성을 당신의 품 안으로 이끌려 하신다.  민수기 랍바 10.1 (유대교)


나는 그대가 모든 피조물의 주 되시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의 교육자임을 증언합니다. 나는 그대의 능력이 전 우주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그리고 땅의 무리가 결코 그대를 실망시킬수 없으며, 만 백성과나라의 주권이 그대가 그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제지할 수 없음을 입증합니다. 나는 그대가 전 세계의 쇄신과 전 세계 백성의 일치, 그리고 그곳에서 사는 모든 사람의 구원 외에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바하울라 저서들의 낙수집 115(바하이교)


오, 주여! 우리가 당신께, 정의의 주께
절하며 제물을 드립니다.
오, 주여! 당신 같은 이 중에
통찰력 있는 사람의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까닭에,
선한 마음으로 당신의 영토에 있는
일체만물의 운명을 성취하소서
 아베스타, 야스나 34.3 (조로아스터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죄인이라도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고 사는 것을 나는 기쁘게 여긴다.“  에스겔 33.11(기독교)

 

온 세상 모든 인간들아, 머리를 돌려 나에게로 와서 구원을 받아라. 나만이 하나님, 다른 신은 없다. 내가 나의 이름을 걸어 맹세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틀립이 없다. 내 말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만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민족들이 제 나라 말로 나에게 신앙을 고백하리로다.  이사야 45.22-23 (기독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지침과 진리의 종교를 내리시어, 모든 종교 위에 군림하게 하셨도다. 그러나 많은 불신자들은 이를 부정하노라.
 꾸란 9.33 (이슬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창세기 12.3(기독교)


하나님은 그대를 복음의 전달자와 경고자로서 진리와 함께 보내셨다. 실로 어떤 백성 중에서도 경고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노라.  꾸란 35.24(이슬람)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나에게 있어 에티오피아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 -여호와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것이 나라면, 블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오고 시리아 백성을 키르에서 데려온 것도 내가 아니겠느냐? 아모스 9.7(기독교)


일체 중생이 모두 열반에 들기까지 여래는 스스로 멸도에 들지 않느니라. 
 유마경 4 (불교)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 주는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고 잘라버리지 아니 하고, 등불이 깜박거린다고 꺼버리지 아니 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이사야 42.1-4 (기독교)


내가 비길 데 없는 서원을 세우고 구극의 길인 보리에 이르고자 하나니, 만일 이 서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단코 내가 열반에 들지 않겠나이다.
나는 무량겁을 통하여 일체중생에게 불법을 전하리니, 만일 제도되어야 할 중생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결단코 내가 열반에 들지 않겠나이다.
내가 열반에 들 적에 만일 시방세계 어느 한 곳에라도 나의 이름이 들리지 않는 곳이 있다면 결단코 나는 열반에 들지 않겠나이다.
내가 거룩한 길을 닦으리니, 드높은 길을 열망하여 이기의 마음을 없애고 바른명상에 들어, 바른 지혜를 이루어 신들과 인간 세상의 스승이 되겠나이다.
나의 놀라운 권능은 더없는 빛으로 모든 불국토를 낱낱이 비추어, 삼독의 어둠을 남김없이 몰아내고 고통 받는 모든 중생 건지오리다.
 무량수경 9.1-5: 중서게(불교)


말씀 선집

 

이 죄악의 세계는 인간이 서러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도 서러워하시는 세계인 것이다.(창6:6).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설움의 세계를 그대로 방치하실 것인가? 기쁨을 누리시려고 창조하셨던 선의 세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설움이 가득한 죄악의 세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설움이 가득한 죄악의 세계로 영속할 수밖에 없이 되었다면, 하나님은 창조에 실패한 무능한 하나님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필코 이 죄악의 세계를 구원하시지 않은 수 없는 것이다.


타락은 물론 인간 자신의 과오로 말미암아 되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란 결과도 있을수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이 결과에 대하여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지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잘못된 결과를 창조본연의 것으로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2.1)


우리는 여기서 종교의 뜻, 구원섭리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섭리의 뜻은 전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아들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때려죽일수 없고 지옥 보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섭리는 사탄세계 내에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구해 가지고 사탄을 추방하고 . 사탄세계 내에 사탄만 남게 하고 사람이라는 종자는 전부 하나님이 데려가자는 것입니다. 
 (80.283,1975.11.02)


하나님이 보좌에 계신다 하면, 지옥에 가서 죽겠다고 하면서 ‘나를 살려 주소’ 하는 영인들을 볼때 하나님이 ‘야! 너는 그래도 싸다’ 하고 생각하시겠어요, ‘저것들 불쌍하다’ 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지옥을 해방해야 되는 것입니다.
 (98.116, 1978.05.07)


자기 자식 중에 살인강도가 되든가, 국가의 범죄를 짓고 사형을 받는 아들이 있다 합시다. 아들이 죽을 자리에 갈 때 그 부모가 따라가서 ‘너 죽을 자리에 갔으니 잘 죽어라. 잘 가라’ 하는 그런 부모가 있습니까? 그 아들을 붙들고 죽는 자리에 같이 동참하려고 하는 것이 부모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계속된다 하게 되면 부모가 그걸 바라보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영원히 벗겨 주려고 허우적허우적 그렇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일수록 영원히 죽는다 하면 영원히 벗겨 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걸어 죽어간다 하면 영원을 걸고 살려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질 것이고, 자기의 수고를 앞세워 움직여 나갈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은 불쌍한 분입니다.

 

지옥문을 닫더라도 그 영원이 죽어가는 것을 볼때 하나님이 ‘아이고 좋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벗겨 주려고 안달복달하는 것입니다.그래야 하늘 부모의 입장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까지 해방해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62.51,1972.09.10)


기독교인 14만 4천 무리만 천국에 올라가고 나머지 인류를 심판한다고 하는 것은 독단주의입니다.  (245.97,1993.02.28)


통일교회의 구원관은 남편은 천국에 보내고 부인은 지옥에 보내자는것이 아닙니다. 둘 다 천국에 가자는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 아버지를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또 아들딸도 데리고 천국에 가자는 것입니다.
 (34.395,1970.09.20)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자연 굴복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강제 굴복시켜서 할수 있으면 몇 천 년이 뭡니까? 몇주일, 몇 주간에도 할 수 있습니다. 기가 막힌 걸 알아야 됩니다.  (394.16,2002.10.06)


타락인간에 있어서도 그 어느 한 자녀라도 불행하게 되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 그 부모의 심정이거늘, 하물며 하늘 부모로 계신 하나님에 있어서랴. 베드로후서 3방 9절을 보면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져야 할 이상세계에 지옥이 영원한 것으로 남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8장 29절을 보면, 예수님 당시에 바로 사탄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끝 날에 있어서도 때가 이르면 악영인들까지도 각각 동급의 지상의 악인들에게 재림하여 그들이 뜻을 위하여 나아가도록 협조함으로써, 결국 오랜 기간을 경과하면서 점차적으로 창조목적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통일될 것이다.  (원리강론, 부활론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