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 2부 죄와 구원 - 제6장 악, 죄, 그리고 인간의 타락

훈독왕 | 20171227164916

세계경전 - 2부 죄와 구원

 

제6장 악, 죄, 그리고 인간의 타락 
 
인간의 타락
        
아브라함 계통의 신앙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가는 초기단계에서 타락했다고 가르치고 있고, 그것과 유사한 믿음이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 기독교는 인간의 타락을 원죄라는 교리로 연결시키고 있다. 원죄는 아담과 해와가 저지른 죄로서 모든 인류에게 유전되어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단절을 야기했는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편, 이슬람에서는 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모든 인류와 함께 용납된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타락으로 인해 사탄이 생겼으며 소수만이 견딜 수 있는 시련을 모든 인간이 겪에 되었다고 한다. 
          
끝으로, 유대교에서는 이런 믿음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부문에서 논한 구절들은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이 세상에 저주가 생겼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첫 인간 조상의 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부정하는 다른 구절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인간 타락은 우주의 순수한 근원과 현재의 고통스런 상태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말한다. 다음은 종교가 성립할 수 있는 논리적 요건들이다. 1)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자이다. 2) 창조목적은 선이다. 3) 악은 실재하며 창조목적과 배치된다. 이러한 논리는 기독교,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에서 주장하고 있다. 불교에는 이런 창조 교리가 없으며, 물질을 근본으로 여기며 동시에 자기실현을 위해 극복해야 할 제약으로 여기는 힌두교 역시 이런 교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종교들은 악의 업보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은총으로부터 벗어난 최초 타락에 대한 교리를 갖고 있다.
          
성서와 꾸란의 구절은 인간의 타락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사탄, 누시엘 또는 이블리스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뱀은 종종 부적절한 성행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도록 충동질한다. 문선명 선생은 인간의 타락은 부도덕한 성행위였다고 직설적으로 지적하면서, 타락은 하나님의 참사랑에 대한 인간의 순수성에 해악을 끼쳤다고 가르친다. 악의 근원을 성적 범죄라고 설명하거나 암시하는 것은 그리스 신화, 불교 신도, 그리고 아프리카 전통에도 나타난다.
        
1. 아담과 해와의 범죄
       
 종교 경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 하시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하나하나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다 주시고는 그가 무슨 이름을 붙이는가 보고 계셨다. 아담이 동물 하나하나에게 붙여 준 것이그대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아담은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그 가운데는 그의 일을 거들 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오시자 아담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남편도 받아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볼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여호와 하나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물으셨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에게 속아서 따먹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너는 저주를 받아, 죽기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굼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아담은 아내를 인류의 어머니라 해서 해와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업혀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었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나님은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창세기 2.15-3.24 (기독교)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창조하여 형상을 주고 천사에게 명하였다. “아담에게 부복하도록 하라.” 이에 천사들은 부복하였으되 이블리스는 불복하여 부복하는 자 중에 있기를 거절하였다. 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다. “내가 너에게 명하여 부복하라 하니 무엇이 이를 못하게 하느냐?” 이블리스가 말하였다. “내가 그보다 낫습니다. 당신께서는 나를 불에서 창조하셨고, 그를 흙에서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내려가라. 네가 여기서 거만하지 않도록 함이라. 나가라, 너는 가장 비천한 존재이니라.” 그때 그가 탄원하였다. “그들이 부활하는 날까지 저를 유예하여 주소서.” 그러자 하나님이 “네가 유예 받는 자 가운데 있으라” 하시도다.
         
그가 말하였다. “당신께서 그 길에서 나를 쫓았으니 나는 그들이 당신의 올바른 길을 걷지 못하도록 기다려 거짓말을 하리라. 그런 다음 내가 그들 앞뒤에서 또한 그들 좌우에서 그들을 방해하리니 당신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당신께 감사하지 않음을 알게 되리요.” 이에 하나님이 경고하셨다. “이곳으로부터 나가라. 저주받은 자여, 추방된 자여! 그들 가운데 너를 따르는 자 있다면, 그들 모두로 지옥을 채우리라.”
        
“아담아, 너와 네 아내가 낙원에서 거주하며, 너희가 원하는 대로 좋은 것을 즐기되, 이 나무에 가까이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해악과 과오로 빠져들리라.”     
그러자 사탄이 그들에게 속삭여 유혹하고 깨닫지 못했던 그들의 모든 수치를 그들 앞에 들추어내며 말하였다. “그대의 주님께서 이 나무를 금하심은 너희가 천사가 되거나, 영생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도록 함이라.” 또한 그는 맹세하여 그들 두 사람에게 그들의 진실한 조언자라 하더라. 이렇게 하여 유혹에 의해 그들은 그 나무의 열매를 맛보았고, 이때 그들의 수치가 명백히 드러나니, 그들은 낙원의 나뭇잎으로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님이 그들을 불렀다. “내가 너희에게 이 나무의 열매를 금하고 사탄은 너희의 적이라 이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말하였다. “주여! 저희가 저희를 욕되게 하였나이다. 당신이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지 아니하고,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분명 길 잃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다. “적의를 가지고 지상에 내려가라. 그곳이 너희가 얼마동안 사는 장소며 생계수단이 되리라. 그곳에서 너희가 살고 그곳에서 너희가 죽을 것이로되, 최후에 그곳으로부터 너희가 부활되리라.”
       
아담의 자손들이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의상을 주셨으니, 너희의 부끄러운 곳을 감추고 아름답게 꾸미도록 하여라. 그러나 정의의 의상, 그것이 최고이니라. 이는 곧 하나님의 징표이니, 그들은 여기서 교훈을 얻으리라.
         
아담의 자손들이여! 사탄이 너희의 선조를 유혹하여 그들의 의상을 빼앗아 부끄러운 곳을 드러내게 하여 너희 선조를 천국으로부터 추방케 하였으니, 그가 너희를 유혹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그와 그의 무리는 너희가 그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너희를 보고 있느니라. 실로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만 사탄을 친구로 두었으니라.     
꾸란 7.11-27 (이슬람)
        
죄를 짓고 사람 앞에 감춘 일이라도 있었던가? 악한 생각을 가슴 깊이 숨긴 일이라도 있었던가? 욥기 31.33 (기독교)
         
왜 성서에는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었다” [창세기 3.21]라는 구절이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창세기 2.25]라는 구절 다음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았는가? 이것이 너희에게 사악한 존재가 아담 내외를 유혹한 것이 죄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뱀은] 아담과 해와가 본래적으로 약혼한 관계인 것을 알고서 해와에 대해 음욕을 품었다.    
미드라시 랍바, 창세기 18.6 (유대교)
         
뱀이 해와를 따라가 말했다. “여인의 영혼은 북쪽에서 나왔다. 고로 나는 재빨리 그녀를 유혹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혹했는가? 뱀은 해와와 성적 관계를 맺은 것이다.    
바히르 199 (유대교)
        
그때 사악한 뱀이 심사숙고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뱀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가 가서 아담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뺏어야지. 그리고 내가 세상의 왕이 되어야지.”    
탈무드, 아보스 드 랍비 나단 1 (유대교)
         
 말씀 선집   
     
인류의 타락이 나무 열매를 따먹은 결과일 수 있겠습니까? 아담 해와의 타락은 하나님의 참사랑 이상을 저버린 불륜의 범죄입니다. 지켜야 할 계명이 필요했던 타락 전 아담 해와는 미완성 단계, 즉 성장기간에 타락했습니다. 뱀으로 표시된 천사장의 유인을 받고 해와가 영적으로 타락하고, 그 해와가 아담을 유인하여 때 아닌 때에 선악과를 따먹는 육적인 타락을 하고 만 것입니다.
       
본연의 동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기쁘게 뛰놀며 살던 아담 해와가, 사망을 무릅쓰고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범죄는 잘못된 사랑의 범죄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류 조상의 첫사랑의 결합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완성이기도 하므로, 마땅히 하나님도, 아담 해와도, 우주 만상도 역사를 통하여 환희와 축복 속에 취하는 행복한 잔치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혈통이 인간 속에서 시원을 이루면서 정착하는 행복한 의식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체를 가리고 나무 뒤에 숨어서 불안에 떨었습니다. 천도를 거역하는 거짓 사랑, 거짓 생명, 거짓 혈통의 근원을 만든 불륜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아담 해와의 후손인 전 인류는 자자손손 태어날 때부터 원죄가 있게 됩니다. 인류가 개체 속에 마음과 몸의 상충을 모순으로 느끼게 됨도 타락에 근원 했고, 사랑의 질서가 문란한 사회 속에서 본심이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감도 모두 여기에 연유했습니다.   
(277.200, 1996.04.16)
          
선악과는 열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열매입니까? 열매를 중심삼고 억천만세의 인류가 신음합니까? 이렇게 파탄의 자리요 싸우는 투쟁의 노정에서 신음하는 현상을 이룰 수 있는 열매를 하나님이 왜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지금 레버런 문이 말한 사랑의 내용을 중심삼은 열매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이론적인 길에 가까운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선의 사랑과 악의 사랑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그 사랑의 열매입니다.    
(128.87, 1983.06.05)
          
창세기 2장 25절을 보면, 범죄 하기 전 아담 해와는 몸을 가리지 않은 채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한 후에는 벗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하체를 가리었다(창 3:7). 만일 선악과라는 어떠한 과실이 있어서 그들이 그것을 따먹고 범죄를 하였다면, 그들은 필시 손이나 입을 가리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은 허물을 가리는 것이 그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손이나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리었었다. 따라서 이 사실은, 그들의 하체가 허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이 하체로 범죄 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욥기 31장 33-34절에는 내가 언제 아담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담은 타락한 후 그의 하체를 가리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곧 아담이 가리었던 그의 하체가 허물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의 하체가 어찌하여 허물이 되었을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담이 하체로써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세계에 있어, 뻔히 죽을 줄 알면서 저지를 수도 있었던 행동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식하라(창 1:28)하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랑으로 인하여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두고 볼 때 사랑은 가장 귀하고 가장 거룩한 것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사랑의 행동을 천시하여 온 것은 그것이 바로 타락의 원인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도 또한 음란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리강론, 타락론 1.3.2)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을 받도록 창조되었다. 따라서 사랑은 피조물의 생명의 근본이요, 행복과 이상의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많이 받은 존재일수록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으로 창조된 천사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해와를 대할 때, 그가 아름답게 보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해와가 루시엘이 유혹에 끌려오는 빛을 보였을 때, 그는 해와로부터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자극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누시엘은 죽음을 무릅쓰고 더욱 해와를 유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랑에 대한 과분한 욕망으로 인하여 자기의 위치를 떠난 누시엘과,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고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바란 해와가(창 3:5-6) 서로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게 되었으므로, 그로 인한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그들로 하여금 불륜한 영적인 정조관계를 맺게 하였던 것이다.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면 서로 그 대상으로부터 그의 요소를 받도록 창조된 원리에 의하여(창 3:7), 해와는 누시엘과 사랑으로써 일체를 이루었을 때, 누시엘의 요소를 받았던 것이다. 즉 첫째로 그는 누시엘로부터 창조목적에 대한 배치로 말미암은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공포심을 받았고, 둘째로는 자기가 본래 대해야 할 창조본연의 부부로서의 상대자는 천사가 아니고 아담이었다는 사실을 감득 할 수 있는 새로운 지혜를 그에게서 받게 되었던 것이다.   
 (원리강론, 타락론 2.2.1)
          
해와가 천사장에게 겁탈을 당할 때,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고 싫어하면서 천사장의 유혹에 끌려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포가 기쁘고 꽃이 상춘을 바라듯 사랑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세포가 사그라지고 심정이 사그라진 자리에서 찡그리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33.330, 1970.08.23)
        
하나님에게 있어서 해와는 미래의 부인이었다. 왜냐하면 아담은 하나님과 일체요, 곧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의 부인을 사탄에게 침범당한 것이다.    
(22.208, 1969.02.04)
        
이 때 불륜한 정조관계에 의하여 천사장과 일체를 이루었던 해와는 아담에 대하여 천사장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은 해와의 눈에 매우 아름답게 보여졌다. 그리하여 해와에게 있어 아담은, 자기를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의 대상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래서 해와는 자기를 유혹하던 천사장과 똑같은 처지에서 아담을 유혹하였다. 아담이 누시엘과 같은 입장에 서 있었던 해와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일어났던 비 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아담으로 하여금 창조본연의 위치를 떠나게 하여, 마침내 그들은 육적인 불륜한 정조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아담은 해와와 일체를 이룸으로써, 해와가 누시엘로부터 받았던 모든 요소를 그대로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요소는 다시 후손에게로 연면히 유전되어 내려온 것이다. 해와는 타락되었다 할지라도, 만일 아담이 타락된 해와를 상대하지 않고 완성되었더라면, 완성한 주체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 대상인 해와 하나에 대한 복귀섭리는 대단히 용이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마저 타락하였기 때문에, 사탄의 혈통을 계승한 인류가 오늘날까지 번식하여 내려온 것이다. (원리강론, 타락론 2.2.2)
        
2. 인간 타락의 비극적 결과
          
 종교 경전    
     
이마나[신]께서 사람들과 함께했던 그 옛날에 죽음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죽음이 땅에 내려오려 할 때마다 신께서 사냥개를 보내어 쫓으셨다. 어느 날 죽음은 개에게 쫓겨 좁은 공간으로 몰리고 곧 잡혀 죽게 되었다. 그러나 한 여인을 발견하고 자신을 숨겨 주면 그녀와 그 가족들에게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여인은 입을 벌리고, 죽음은 재빨리 입 속으로 숨어 버렸다. 
          
신께서 그녀에게 와 죽음을 보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부인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신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시고 그녀가 죽음을 숨겨 주었으니 머지 않아 죽음이 그녀와 자녀들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죽음은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후투족의 전승 (아프리카 전통종교)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사탄편 아닌 성령의 자녀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온 인류의 후손은 사탄편에서 태어났기에 영원성이 없다. 그리고 한 개체 안에 ‘다른 편’ 요소를 간직하고 있기에 짧은 생밖에 살지 못한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하늘 모습을 본받아 영원히 사는 천사들과 같은 성령의 자녀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고 에덴 동산 밖에서 자녀를 낳았기 때문에 그 뜻은 뿌리 내리지 못하였다. 조하르, 창세기 61a (유대교)
         
아담 해와 타락 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피부를 감쌀 의복을 지어주셨다. 창세기 3장 21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본래 그들은 최고 중의 최고의 영광인, 빛의 옷을 입고 있었다. 
        
천사들도 그 빛을 즐기러 오곤 하였다. 시편 기록에 의하면 “주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시편 8장 5절)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죄 지은 후에는 영혼을 위한 그 빛이 사라지고, 결국 육신을 위한 가죽 옷만 남게 된 것이다. 조하르 1.36b (유대교)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두 신은 오노로고 섬에 내려 오셔서 신성한 기둥을 세워 넓은 궁전을 세웠다. 이 때 이자나기 남신이 여신인 이자나미에게 “그대 신체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라고 물었다. 여신은 “나의 신체는 점점 완전하게 되어 가는데 채워지지 않는 곳이 한 곳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이자나기 신이 말하기를 “나의 신체는 점점 완전하게 되어 가는데 완전히 남는 곳이 한 곳 있습니다. 그러니 이 내 신체에 남아도는 곳이 한 곳 있습니다. 
         
그러니 이 내 신체에 남아도는 곳을 그대 신체의 채워지지 않은 곳에 넣어 메워 국토를 낳을까 생각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묻자, 이자나미 신은 “그것은 좋은 일이지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나와 그대가 이 신성한 기둥을 돌다가 만나면 부부의 인연을 맺읍시다”라고 이자나기 신이 말하였다. “그대는 오른쪽으로부터 돌아서 만나시오. 나는 왼쪽으로부터 돌아서 만날 것이니.”
          
이렇게 합의하고 그들이 돌고 있을 때 이자나미 신이 먼저 “아, 얼마나 멋진 남성인가!”라고 말하자 뒤를 이어 이자나기 신이 “아, 얼마나 멋진 처녀인가!” 라고 말한 후, 남신은 여신에게 고하기를 “여자가 먼저 말을 한 것은 좋지 않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둘은 성혼의 장소에서 결혼하여 불구의 자식 ‘히루고’를 낳았다. 그를 갈대로 만든 배에 태워 보냈다.
        
그 후 두 신이 상의하였다. “지금 우리가 낳은 자식은 불길했소. 역시 하늘의 신이 계신 곳에 가서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곧 함께 티카마노하라에 올라 하늘의 신의 가르침을 구했다. 하늘의 신의 명령에 따라 사슴의 어깨뼈를 태워 점을 쳐서 물어보니 “여자가 먼저 말을 한 것이 좋지 않았다. 돌아가 다시 한 번 고쳐 말하라”라는 말씀이었다.    
고지키 4.1-6.1 (신도)
         
 말씀 선집   
     
타락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가정에서 타락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악과 따먹은 것입니까? 가정적으로 타락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겠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어서 원죄가 생깁니까? 아버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죄라는데 선악과가 무엇이기에 천대 만대 후손이 죄인이 됐겠습니까? 이것은 혈통적 관계입니다. 혈통적으로 죄의 뿌리를 심어 놓으면 유전 법칙에 의해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사랑 문제 뿐입니다. 그릇된 사랑이 타락의 원인입니다.    
(23.167, 1969.05.18)
        
사랑으로 성숙해야 하는데 사랑으로 말미암아 고장이 났을 때는 하나님도 물러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낸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사고가 났다, 사랑의 사고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문제되고 인간이 문제되고 역사가 문제되고, 우주의 대사건으로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고 사랑의 사고라는 것입니다. (128.87, 1983.06.05)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모든 것을 알게 될 때 모든 것에 통합니다. 지상세계의 평면적인 사실 뿐만 아니라 영안이 열려 가지고 입체적인 세계인 영계의 사실까지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보고 대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지각이 발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기 전에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 타락이 무엇입니까? 부륜의 인연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137.129, 1986.01.01)
         
하나님이 ‘그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은 어떤 것이냐? 아담 해와가 16, 17, 18세가 되면 자연히 사춘기가 돼 가지고, 눈이 마음대로 가는 게 아니라 해와는 남자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남자는 해와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야! 내가 찾아보고 구하다 보니 너로구나, 너, 너, 너!’ 이럴 수 있는 자리에 가야 됩니다. 그때는 사춘기이므로 몸과 마음이 하나 되었겠습니까, 안 되었겠습니까? 눈을 들여다보니 신비로운 눈이고, 코를 대하니 전기가 오고, 이게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때 아담의 마음과 몸이 하나 되었겠습니까, 안 되었겠습니까? 하나 되었을 것입니다.
          
남자 여자가 비로소 우주에 선을 내세워서 몸과 마음이 하나 되게 할 때 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입니다. 완전히 피어 가지고 향기가 납니다. 향기가, 그 향기는 우주의 향기이기 때문에 우주 만물이 ‘흐흠!’ 하는 것입니다. 땅이나 어디나 전부 그 향취 맡느라고, 코가 길어지고 몸뚱이가 늘어져 가지고 야단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흠―야! 이거 이상하다. 이상하다!’ 고 합니다.
          
하나님도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당하는 것입니다. 휘―익 돌아 가지고 끌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끌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제 출동시대가 됐구나. 행차하자!’ 그런다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가 핵이 되었다면 하나님도 목을 매고 여기서 떠날 수 없습니다. 떠난다면 몸뚱이만 떠나지 발은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떠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태어난 남자 여자도 전부다 이 끈을 가지고 여기서 또 만나면 또 붙고, 또 붙고, 또 붙고···. 이래서 가정으로부터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 하나 된 여기서 후손들이 태어나면 휙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됩니다. 얼마나 멋있는 우주입니까? 그렇게 되면 위대한 곳이 됩니다. 그것이 지상천국이고 참세계입니다.
         
그러한 것이 못 되고 타락되었으니 반대의 세계가 되어 전부 갈라지는 겁니다. 이런 원칙으로 볼 때, 고장이 났을 때는 아무리 세상에 사람이 많다해도 산산조각으로 갈라져서 분립된 인간상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세의 세계가 꽉꽉 그렇게 되어 있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타락되었다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세계라는 것은 정당한 결론이라는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서부터 전부 갈라졌기 때문에 신도 없고,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세계도 없는 혼란상이 빚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현세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여기서 자기 자신으로서는 절대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이상이 없습니다. 인간들 자체로서는 이상을 그렸댔자 그건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찾아, 여기서 다시 하나님을···. 그런데 ‘신은 없다. 신은 죽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멸망이다. 희망이고 무엇이고, 유토피아니, 이상이니 다 집어치워라. 그건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128.88-90, 1983.06.05)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이 종적인 사랑이 되고,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뼈와 같고, 아담과 해와는 살과 같은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자리에서 내적인 부모가 되고 아담 해와는 외적인 자리에서 외적인 부모가 됩니다.
         
내적 외적 부모가 하나 된 그 자리가 사랑으로 엮어져서 내적 부모를 모시게 되고 외적 부모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의 결탁에 의해서 참부모, 완성한 인간이 성사될 것이었습니다. 사랑과 결탁되지 않으면 완성 인간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연의 우리의 조상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연의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한테서 우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신성을 지닌 사람에 의해서 우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을 띤 하나님의 성품도 갖고, 인성을 띤 하나님 앞에 종적인 부모의 성품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 해와의 완성은 하나님의 사랑에 묶어져야 나오지 이것이 묶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적인 사랑과 횡적인 육적 사랑이 한 점에서 묶어진 것이 바로 우리 조상의 혈통의 뿌리입니다. 거기가 우리 조상의 혈통입니다. 거기서 전 인류가 생겨나야 했습니다. 타락 때문에 남자 사랑, 여자 사랑, 하나님 사랑이 다 갈라졌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남자의 사랑, 여자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묶어지지 않았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남자 여자는 사랑으로 자동적으로 묶여집니다. 왜 남자 여자가 하나 되려고 합니까?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하나 된 후에 무엇을 하려고 그러겠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184.71. 1988.11.13)
         
3. 성적 사랑의 타락
     
 종교 경전   
     
비구들이여, 이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 우주 주기를 마감하는] 대홍수가 물러가고 대지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 대지의 표면에 신들의 음식보다 더 향긋한 냄새가 나는 엷은 막이 있었다. 그 엷은 막의 맛이 어떠했던가? 그것은 마치 입 속에 녹아드는 포도주의 맛과 흡사했다. 그런데 그때 아바스바라 천계의 신들이 서로 말했다. “잠부드비파에 지금 대지가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우리 가서 그것이 어떻게 생겼나 보고 오도록 하자.” 이에 어린 신들이 세상으로 내려와 대지의 표면에 이 엷은 막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찍어 맛보았다. 어떤 신들은 이러기를 여러 번 하여 이 엷은 막의 많은 양을 먹게 되었는데, 이들은 즉시 그들의 권능과 광채를 잃어버렸다. 그들의 몸은 무거워졌고 그들의 본질은 또한 뼈와 살로 변하였고, 마침내 그들은 마법을 잃어 더 이상 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엷은 막을 거의 먹지 않은 신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직도 공중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었다. 마법을 잃어 날지 못하는 신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우리는 지금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도다.
          
마법을 잃었으니 여기 대지 위에 머무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가 날 수 없으니 천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까닭이다.“ 이에 그들은 대지에 머무르며 대지를 덮고 있던 그 엷은 막을 먹고 살았으며, 서로의 아름다움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열정적이었던 자들은 여성이 되었으며, 이들 신들과 여신들은 서로 자신들의 욕망과 쾌락을 채웠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이 처음 시작될 때 온 세상에 사랑의 탐닉이 두루 퍼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실로 오래되고 또한 지속적인 것이다. 그리고 여인이 세상에 나타난 것도 또한 실로 오래된 것이어서 다만 그들의 일이 아님을 알아라.
          
천계로 다시 올라갈 수 있었던 신들이 내려다보고 어린 신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알고 세상에 내려와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대들은 어찌 이와 같이 타락 행위를 즐거워하는가!” 지상의 신들이 스스로 생각하였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고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찾아야겠다.” 이에 그들은 자신들을 감출 집을 짓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집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남편과 아내들의 이 일을 보고, 그와 같은 부부들이 증오하고 경멸하며 왼손으로 그들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밀며 그들을 몰아내어 버렸다. 그러나 언제나 그들은 두 달 혹은 석 달 후면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그들을 주먹으로 때리거나 욕설을 퍼붓고 또는 땅에 내동댕이치기도 하였으며, 몽둥이나 돌멩이로 때리며 흙을 퍼붓기도 하였다. “가서 너희 자신들의 몸뚱이를 감추어라! 가서 너희 자신들의 몸뚱이를 잘 감추어라!” 이것이 오늘날 처녀들이 혼인할 때 꽃이나 금 은 또는 천 조각이나 쌀로 세례를 받으며, 사람들이 신부에게 꽃이나 금 은 등을 던지며 “신부여, 평화와 행복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 하고 외쳐대는 까닭이다. 비구들이여, 옛날에는 악행이란 바로 이러한 일들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일들이 선으로 여겨짐이 또한 놀랍지 않은가?    
증일아함경 34, 기세경 (불교)
         
 말씀 선집   
     
인간이 타락할 때 사랑 때문에 타락했기 때문에 이 성기가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종교에서는 간음하는 것을 제일 무서운 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성 개방이 악마의 지옥 팽창주의입니까, 천국 팽창주의입니까? 지옥 팽창주의입니다. 지상지옥이고 천상지옥입니다. 이것은 전부 멸망하는 것입니다. (261.304, 1994.07.24)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연결되느냐? 위로부터 오는 사랑은 제일 가까운 거리, 참된 사랑이 가는 길은 전부 직단거리를 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종적인 사랑, 위에서부터 아래로 오는 사랑은 직단거리로 통일되게 될 때 90각도가 아니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직단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종적인 하나님과 직단거리가 성립되면 거기에 대해서 인간의 참사랑도 직단거리로 통하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삼고 볼 때 횡적인 남자 여자도 반드시 수평이 되어서 수직에, 90각도에 갖다 맞출 때 그것이 사랑의 결착점이며 90각도를 중심삼은 정착지라는 것입니다. 그걸 몰랐다는 것입니다. 타락이 뭐냐 하면 이 각도가 틀어진 것입니다. (218.219, 1991.07.29)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서 인간의 죄의 뿌리가 음란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명백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죄의 뿌리가 혈연적인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원죄는 자자손손에게 유전되어 왔다. 그리고 죄를 벗으려고 하는 종교마다 간음을 가장 큰 죄로 규정하여 왔으며, 이것을 막기 위하여 금욕생활을 강조하여 온 것이니, 이것도 죄의 뿌리가 음란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기 위한 속죄의 조건으로서 할례를 행하였던 것은, 죄의 뿌리가 음란에 의하여 악의 피를 받아들인데 있었기 때문에, 타락 인간의 몸으로부터 그 악의 피를 뽑는다는 조건을 세워서 성별하기 위함이었다.
        
수많은 영웅 열사와 국가들이 멸망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음란에 있었던 것은, 음란이란 죄의 뿌리가 항상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발동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로써 인륜도덕을 세우고, 제반 교육을 철저히 하며, 범죄를 빚어 내는 경제사회제도를 개선함으로써 다른 모든 죄악들은 이 사회로부터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되면서 날로 안일한 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증대되어가고 있는 음란이란 범죄 만은, 그 누구도 막을 길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에서 이 범죄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없는 한, 결코 이상세계는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재림하시는 메시아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죄의 뿌리가 어디까지나 음란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원리강론, 타락론 1.5)
    

 

가인과 아벨
          
역사상 최초의 살인은 인간의 타락 바로 뒤따라 일어났다. 사실은 형제 사이의 갈등은 부모로부터 연유한 정황 탓일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다. 그 이야기는 인간이 재산, 재능, 사랑, 행운, 그리고 이 경우처럼 축복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성서는 아벨을 정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한다. 꾸란은 아벨을 형인 가인과 싸우지 않기 위해 무기 들기를 거부하는 평화의 사람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한 전승이 나온다. 아벨형 인간은 선하고 믿음직한 반면, 가인형 인간은 사납고 무신론적이며 폭력적이다. 그러나 문선명 선생은 근본적으로 가인과 아벨은 형제라고 가르친다. 게다가 그들 둘 다 잘못을 저질렀다. 선택받은 자인 아벨의 교만이 가인의 증오를 불러왔으며 가인의 증오 역시 죄악의 역사를 초래하였다.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은 가인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복귀의 과정을 촉진하려는 것이었다고 가르친다. 가인과 아벨은 가인이 아벨에게 굴복함으로써 아담이 천사장에게 잘못 주관 받은 부모의 잘못을 복귀할 수 있었다. 이 복귀섭리가 성공했다면 살인은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았을 것이다.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가인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폭력을 사용할 수도 겸손하게 동생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아벨 역시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선택 받은 자의 지위를 자랑할 수도 선택 받지 못한 형에게 연민을 갖고 그를 위로하며 기운을 북돋아 줄 수도 있었다. 이러한 가인과 아벨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전쟁과 평화가 결정될 수 있다.
        
종교 경전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때가 되어 가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여호와께 예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을 드렸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가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가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제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그러나 가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고 하시면서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자 가인이 여호와께 하소연하였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나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 주마. 가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일곱 곱절로 법을 내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여호와께서는 누가 가인을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 주셨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물러나와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창세기 4.3-16 (기독교)
         
그리고 아담의 두 아들 이야기를 드려주리니, 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자 그들 중 한 사람의 것은 수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의 것은 수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가, “내가 너를 살해하리라” 하니, 다른 하나가 “하나님은 신을 경외하는 자만 받아들이신다.” 고 하더라.
        
이어 “네가 나에 대항해 손을 뻗쳐 나를 죽인다해도, 나는 너에게 손을 뻗쳐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니, 나는 만물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다. 내가 믿건대, 너는 나에 대한 죄악과 네 자신의 죄악을 함께 지고 지옥의 거주자가 되리라. 이것이 악행자에 대한 응보이니라.” 결국 자기의 영혼이 그를 자극하여 그의 형제를 살해하니, 길 잃은 자의 무리에 들고 말았도다.
        
이때 하나님께서 한 마리의 까마귀를 보내어, 까마귀로 하여 어떻게 땅을 파고 처참한 그의 형제의 시체를 매장하는가를 보여 주시도다. 그가 말하였다. “오! 슬프도다. 내가 이 까마귀보다 못하구나. 내가 내 형제의 시체를 묻어야 하다니.” 그리고 그는 후회로 가득 차더라.     
꾸란 5.27-31 (이슬람)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런 제물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는 의인이라는 증언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을 두고 증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 믿음을 매개로 해서 아직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 (기독교)
         
아담 해와가 자녀를 낳았을 때 그 첫째 열매는 뱀의 아들이었다. 해와가 두 사람과 관계했기에, 모두에게서 잉태를 하였고, 두 자녀를 낳았다. 두 아들 모두 각자 아버지를 본받아 태어났기에 그들의 영혼은 갈라졌다. 한 아이는 이쪽으로 다른 아이는 반대쪽으로, 성품 역시 반대였다. 가인 편에는 늘 악한 부류가 함께해, 그를 통해 악령, 악마, 무당들이 접근했다. 아벨 편에는 자비로운 이들이 많았으나 모두가 이로운 이들은 아니었다. 좋은 포도주와 나쁜 포도주가 섞여 있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셋이 나온 후에서야 비로소 온전한 인류가 나온 것이다. 셋은 모든 의인들의 첫째 조상이 되었다.
          
가인은 아벨을 적대하고 그를 죽였다. 이는 가인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다주는 사마엘 편의 천성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가인은 여자 문제로 아벨을 시기했다. 창세기 4장 8절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다” 고 나와 있다. 여기서 ‘들’이란 여성을 상징한다. 본문에 따르면 가인이 자신의 제물이 열납 되지 않아 화가 났다고 하나 이것은 부차적인 이유였다.    
조하르 1.36b (유대교)
         
말씀 선집 
     
아담가정에서 비롯된 가인과 아벨의 투쟁 역사는 인류 역사를 몽땅 전쟁과 갈등의 역사로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작게는 인간 개개인의 몸과 마음의 갈등으로부터 크게는 국가와 국가가,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가 물본주의와 신본주의로 갈라져 대립 투쟁해 나왔습니다.     
(평화신경, 평화메시지 1.20, 2005.09.12)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만 주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주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과 사탄이 불륜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탄이 인간의 주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은 통제력, 지배력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원리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것이 불륜의 사랑이더라도 사탄은 인간에 대하여 그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창조원리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의 본래의 주인이므로 결국 하나님과 사탄은 함께 인간에 대하여 그 소유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둘로 잘라서 하나님과 사탄이 나누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리적 관점에서 인간을 둘로 분립하기 위한 어떤 규칙을 정한 것입니다. 
        
즉, 내적 존재로서의 하나님과 외적 존재로서의 피조물이라는 입장에서 내 외의 관계와 주체 대상의 관계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 분립의 규칙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과 해와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통하여 분립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은 사탄을 표시하는 표시체이고, 아벨은 죄없는 아담의 입장을 표시하는 표시체입니다. 차남을 하나님은 내적 입장에 세운 것입니다. 아벨은 악의 요소가 적은 쪽, 바꾸어 말하면 아담과 해와 사이에 맺어진 제2의 사랑을 표시하는 표시체인 것입니다. 아벨은 두 번째 사랑의 열매입니다. 가인은 첫 번째 사랑의 열매이며, 사탄을 표시하는 표시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차남인 아벨을, 해와와 천사장과의 관계보다도 해와와 아담과의 관계가 더 가까우므로 하나님 편에서 취한 셈입니다. 그런데 본래의 명령계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담,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천사장에게 이르는 것이 순서였으므로, 이 경우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벨에게로, 아벨로부터 가인에게로 이르는 순서로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복귀의 위치요, 관계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먼저 이 공식을 복귀함으로써 잃어버린 원리를 되찾아 가는 것입니다. 타락행위에 의해 인류의 혈통은 교차되었습니다. 사탄의 피가 인류의 혈통을 점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귀는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차남 아벨이 장남의 장자권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두 형제를 내세워서 장남의 장자권을 복귀하는 섭리를 행하려 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의 위치로 내려가야 하며, 아벨은 가인의 위치, 즉 장남의 위치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행위는 아담과 해와 때의 타락행위의 반복입니다. 즉, 복귀된 입장은커녕 다시 천사가 아담을 주관한 입장에 서고 만 것입니다. (55.109-110, 1972.04.01)
        
아담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중간 위치에 처해 있었던 타락인간을 하늘 편으로 분립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해서 타락인간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만 했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비 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 없으므로 선 악 두 성품의 모체가 된 아담을 선 성품적인 존재와 악 성품적인 존재로 둘로 갈라 세우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두 아들을 각각 선악의 표시체로 분립시킨 후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대할 수 있는, 즉 한 주인 상대의 원리적인 입장에 세워 놓고 제각기 제물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모두 해와의 불륜한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해와를 중심하고 맺어진 두 형의 불륜한 사랑의 행위들을 조건으로 가름하여 가인과 아벨을 각각 상이한 두 표시적 입장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가인은 사랑의 첫 열매이므로 그 첫째 번 것이었던 천사장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 하는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고, 아벨은 사랑의 둘째 열매이므로 그 둘째 번 것이었던 아담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 하는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의 세계를 사탄이 먼저 점유하였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앞서 사탄이 먼저 비 원리적인 입장에서 그 원리형의 세계를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이 맏이를 세워서 장자의 기업을 계승시키려고 하셨던 원리적인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도 둘째 것보다도 맏것에 대한 미련이 더욱 컸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사탄은 그때 이미 피조세계를 점유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보다 미련이 컸던 장자 가인을 먼저 취하려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탄이 미련을 갖고 대하는 가인보다도 아벨을 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가? 아벨은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히 11:4)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셨다(창 4:4). 그리하여 아담가정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타락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조건만 성립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신다는 것을 교시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 것은 가인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가인은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졌으므로 하나님이 그 제물을 취하실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가인 자신이 세우지 않은 한, 하나님은 그것을 취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써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편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그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교시하신 것이다.
          
천사장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던 아담을 사랑하지 못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타락성’ 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해서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사랑하여서 하나님의 입장과 같은 입장을 취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천사장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웠던 아담을 중보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아담의 위치를 취하려다가 타락되었기 때문에, ‘자기 위치를 떠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해서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중보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천사장은 자기를 주관해야 할 인간, 즉 해와와 아담을 역 주관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주관성을 전도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따라서 인간이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해서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에게 순종 굴복하여 그의 주관을 받는 입장에 섬으로써 주관성의 법도를 바로 세워야 했던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선한 뜻을 하나님은 아담에게 전하고, 아담은 또 해와에게 전하고, 해와는 다시 천사장에게 전하여 선을 번식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천사장은 따먹어도 좋다는 불의의 뜻을 해와에게 전했고 또 해와는 그것을 아담에게 전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죄를 번식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해서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서있는 아벨의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여 아벨로부터 선의 뜻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는 입장을 조성해야 했던 것이다.··· 인간이 항상 좋은 지도자나 친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보다 하늘 편에 가까운 아벨형의 존재를 찾아 그와 하나 됨으로써 하늘 앞에 가까이 서고자 하는 천심에서 일어나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온유겸손이 기독교 신앙의 강령이 된 것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아벨형의 인물을 만나 그를 통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하기 위함이다. 개인에서부터 가정, 사회,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는 반드시 가인과 아벨의 두 형의 존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창조본연의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인형의 존재가 아벨형의 존재에게 순종굴복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 인류가 그에게 순종 굴복해야 할 아벨적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는 것이다(요 14:6).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천사장이 인간을 타락케 하였던 타락성 본성을 반복하게 되어 아담가정이 세워야 했던 ‘실체기대’는 세워지지 않았다. 따라서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리강론, 복귀기대섭리시대 1.1-2)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린 후 아벨의 제물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을 안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려 때려죽였지만 여기에는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리기 위해 준비할 때부터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니 순간적으로 아벨에 대한 미움이 생겨 그를 때린 것이 아니고, 그 일에 부딪치기 전부터 아벨이 미워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3.205, 1957.11.01)
         
여러분은 가인과 아벨이 다 같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을 때,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의 입장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하나님의 입장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인에게 하늘의 입장을 대신했던 아벨을 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 가인의 제물을 취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적인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공평한 입장에서 그들을 대하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3.205, 1957.11.01)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갈라서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를 받은 데 대해서 가인이 나도 하나님에게 소개해 달라고 하여 완전히 절대 신앙·절대 사랑·절대 복종하는 마음으로 하나 돼야만 들어가게 돼 있는 것입니다.    
(378.206-207, 2002.05.12)
         
하나님께서 아벨을 세우신 이유는 가인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을 가인에게 송두리째 주는 동시에, 자기의 사랑까지도 보태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래의 아벨의 입장인 것입니다.    
(18.277, 1967.06.12)
         
아담가정에서 실체기대를 승리하기 위해서 가인과 아벨이 하나 되어야 하는 섭리를 하실 때,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을 받게 되었는데, 이에 아벨이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니까 사탄이 참소하여 가인에게 혈기를 부리고 이성을 잃게 하여 동생 아벨을 살해하도록 역사했습니다.     
(374.12-13, 2002.04.04)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마음과 몸이 통일되고 조화되는 기준을 잃어버리고 갈등을 일으키면서 자기모순 속에 살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 안에서 벌어지는 마음과 몸의 갈등과 투쟁은 가정·사회·국가·세계로 확대되어 내려왔습니다. 형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범죄도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역사 이래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결과 전쟁은 본질적으로 보다 악한 가인편과 보다 선한 아벨 편 간의 싸움이었습니다.   
(299.105, 1999.02.06)
         
가인과 아벨이 하나되지 않고 갈라져서는 안 됩니다. 한편은 바른손이고 한편은 왼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내 하나님인 동시에 네 하나님이시오, 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의 입장에서 서로 서로 아벨 적인 존재를 찾아 모시며 가인 적인 입장을 피하기 위한 최대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3.207-208, 1957.11.01)
        
아담 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통곡했겠습니까? 그것이 세계적으로 벌어질 텐데 어떻게 하느냐 이것입니다. 본래는 형님이 동생을 아버지 대신 사랑해야 하는데 이게 웬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406.26, 2003.03.02)
        
아담 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뿔사, 큰일 났구나! 그 일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한 것입니다. 아담 해와도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원하는 것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끝 날에 형제, 형님과 동생이 싸우는 이 판국에서, 한 곳은 천국에 한 곳은 지옥 가는 데 있어서 형장에 나가 죽기를 바라는 하나님이 아니었고, 형장에 나가서 아들딸들이 사형 받기를 바라는 부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책임질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을 아신 하나님입니다.    
(295.63, 1998.08.17)
   


악마와 그 활동
          
모든 종교의 경전은 악마의 존재와 그 세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악마의 우두머리는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사탄, 누시엘, 이블리스, 마라, 사마엘, 바알세불, 앙그라 마이뉴 등등이 그것이다. 그 중 일부는 인간의 타락과 악의 근원에서 언급했다. 악마는 인간의 마음이 사악한 일을 하도록 끌어당기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이성론자들은 악마의 실재를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20세기 역사와 그로 인한 공포를 살펴보면 서로에게 악한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능력은 이성을 넘어선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악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어둡고 불안하게 하는 영이 실재한다는 것과 그가 아직도 교활하게 배반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이 인류역사에 잘못과 불행을 가져오는 보이지 않는 적이며, 우리 안에서 감각, 상상력, 정욕, 유토피아적 논리, 혹은 삶의 과정에서 주고받는 무질서한 사회적 접촉을 통해 활동하고 있다.”
         
악마의 덫은 다양하다. 경전의 가르침에 의하면 한 사람이 작은 악을 행하려는 욕망을 가졌을 때 악마는 그에 대해 호소하며 그가 더 큰 잘못을 하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와 달리 종교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특히 신앙에서 큰 진전을 이루려 할 때 악마의 유혹을 경험한다. 
         
일부 종교 - 주로 조로아스터교 -에서 신과 악마는 영원히 맞수이지만 악마의 힘을 인정하는 믿음이 이원론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의 선함을 가르치는 일신교들은 악마는 결과적 존재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원래의 자리에서 떨어져 하나님의 원수가 된 천사라고 가르친다. 문선명 선생은 천사 누시엘의 타락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이루어졌고, 그때 누시엘은 인간에 대한 주관을 주장하는 강력한 악마인 사탄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다음 구절들은 악마의 성격과 여러 가지 유혹, 그리고 인간을 붙잡기 위해 누시엘이 사용한 전략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탄을 극복하는 열쇠는 이기심, 교만, 탐욕, 관능적 쾌락의 추구 등 사탄의 모든 성향을 우리 자신이 정화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영원성을 주축으로 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1. 천사의 타락
     
 종교 경전  

 

그래서 그 큰 용, 곧 그 옛뱀은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데, 온 세계를 미혹하던 자입니다. 그 용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땅으로 쫓겼습니다. 요한계시록 12.9 (기독교)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 떨어지다니! 네가 속을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높은 하나님의 별들 위에 두고 신들의 회의장이 있는 저 북극 산에 자리 잡으리라. 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 그런데 네가 저승으로 떨어지고 저 깊은 구렁의 바닥으로 떨어졌구나! 이사야 14.12-15 (기독교)
          
그리고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일러, “아담에게 부복하라”하니 이블리스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부복하였다. 이블리스는 “흙으로부터 창조한 것에 부복하란 말이요?”라고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당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피조물]이 바로 당신이 나보다 더욱 명예롭게 하신 자요? 당신께서 나를 부활의 날까지 유예하여 주신다면, 확실히 나는 그의 후손들을 소수만 제외하고 모두 지배하리요.”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가라! 그들 중에 너를 따르는 자 있다면 실로 지옥이 너희를 위한 보상이 되리라. 실로 충분한 보상이! 네가 할 수 있는 너의 목소리로 그들 중 누구라도 유혹해 보라. 그리고 너의 기병과 보병으로 그들을 공격하여 그들의 부와 자손을 공유하고 그들에게 약속해 보라.” 그러나 사탄은 그들에게 기만에 불과한 헛된 약속을 할 뿐이라. 꾸란 17.61-64 (이슬람)

나, 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 사탄은 태초부터 있던 자니, 저가 내 앞에 와서 이르기를, ‘보소서, 내가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는 당신의 아들이 되겠사오며, 내가 모든 인류를 구속하여 한 사람도 잃지 아니하리니, 반드시 내가 이를 행하리다. 그러므로 당신의 영예를 내게 주소서’ 하였더라.
          
그러나 보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 곧 태초부터 나의 사랑하는 자요, 선택된 자가 내게 말하되,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리하여 영광이 영원토록 당신의 것이 되옵소서!’ 하는지라.    
이에 사탄이 모반하여 나,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미 부여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멸하려 하였고, 나의 권능을 자기에게 줄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저는 나의 독생자의 권능으로써 던져짐을 받게 하였더라.
         
이에 저가 사탄이 되었나니, 참으로 악마요, 모든 거짓의 아비라. 인간을 미혹케 하며, 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많은 자를 자기의 뜻대로 포로가 되게 하였느니라.“    
값진 진주, 모세서 4.1-4 (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또 자기네가 통치하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그 큰 날의 심판에 붙이시려고, 영원한 사슬로 매어서 어둠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위의 성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음란함에 빠져서 다른 육체를 좇았으므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유다서 6-7 (기독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주인이요, 우리 인간은 그분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천사는 주인의 종이 되고 그 아들딸의 종도 되는 것입니다. 천사 중에서도 하나님 앞에 제일 가깝고 아담 해와와 제일 가까운 존재로서 그들의 사연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아담 해와를 창조하기 전에는 천사장과 의논하면서, 심부름을 시키면서 창조의 위업을 이루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천사장이란 흡사 무엇과 같은가 하면, 부잣집의 종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주인의 아들딸, 철모르는 아들딸 앞에도 종의 입장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53.331, 1972.03.06)
          
하나님은 천사세계를 창조하시고(창 1:26), 누시엘(사 14:12)을 천사장의 위에 세우셨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복의 기관이 되었던 것같이 누시엘은 천사세계의 사랑의 기관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자녀로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종으로 창조된 누시엘보다도 그들을 훨씬 더 사랑하시었다.
     
사실상 누시엘은 인간이 창조되기 전이나 후나 조금도 다름없는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자기보다도 아담과 해와를 더 사랑하시는 것을 볼 때 그는 사랑에 대한 일종의 감소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침부터 노동을 한 일꾼이 자기대로의 상당한 노임을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와서 적게 일한 일꾼도 자기와 똑같은 노임을 받는 것을 볼 때 자기가 받는 노임에 대한 감소감을 느꼈다고 하는 성서의 예화(마 20:1-15)와 같은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사랑의 감소감을 느끼게 된 누시엘은, 자기가 천사세계에서 가졌던 사랑의 동일한 것을 인간세계에 대해서도 그대로 가져 보고자 해와를 유인하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이 곧 영적 타락의 동기였다.   
 (원리강론, 타락론 2.2.1)
         
창세기 3장 14절을 보면,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를 저주하시어 배로 다니고 또 종신토록 흙을 먹으리라고 하셨다. 다리로 다니지 못하고 배로 다닌다는 것은, 천사가 창조본연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비참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흙을 먹는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쫓겨남으로 말미암아(이사야 14장 12절),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요소를 받지 못하고, 죄악의 세계에서 악의 요소를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리강론, 타락론 1.4)
         
2. 악마의 행적
     
 종교 경전   사탄들이 누구에게 내려오는지 내가 너희에게 일러 주리요? 그들은 모든 위선자와 사악한 자들에게 내려오리라. 그들은 귀를 기울이나 그들 대다수는 거짓말쟁이들이니라. 꾸란 26.221-223 (이슬람)
       
사물들에 탐착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마라가 그 옆에 서 있다.     
숫타 니파타 1103 (불교)
          
너의 으뜸가는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는 혐오이며, 셋째는 기갈, 넷째는 애착이다. 다섯째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는 두려움, 일곱째는 의혹, 여덟째는 허식과 아집이다. 부정하게 얻은 재물과 칭찬과 명예와 명성···. 오, 마라여! 이것들은 너의 병력이다. 사악한 악마의 철병이다. 용감한 영웅이 아니고서는 그를 이겨 물리칠 수 없으니, 그들을 싸워 이기지 못하고는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숫타 니파타 436-439 불교
          
우리는 혈육을 가진 인간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지배와 권력과 이 시대를 다스리는 암흑의 세력과 하늘에 있는 허다한 악한 영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2 (기독교)
     
그 사악한 지배자는 자신의 가르침으로 말씀을 거스리고 삶의 계획을 훼손합니다. 실로 그는 내게서 선한 생각의 고귀한 목표를 앗아갑니다.     
아베스타, 야스나 32.9 (조로아스터교)
        
하나님은 사탄이 욕망을 꾸미고, 그의 욕망을 위해 무익함이 조성될 때가 아니면, 그대 이전에 사도나 예언자를 보내지 않으셨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던진 무익함을 제거하고 그분의 징표를 확립하시니, 하나님은 지식과 지혜로 충만하도다. 그분은 마음이 병들고 굳어버린 자들은 사탄이 던진 유혹으로 시험하도다. 꾸란 22.52-53 (이슬람)
         
하나님의 사도가 말하였다. “너희 중에 정령(악귀)이 따라다니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다.” 이에 교우들이 물었다. “당신께서도 마찬가지입니까?” 사도가 대답하였다.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령에 대항해 나를 보호하여 주시니, 나는 정령의 손길에서 안전하도다.”     
무슬림 하디스 (이슬람)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서 생겨났습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짓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악마의 일을 멸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여기서 밝히 드러납니다. 곧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3.8-10
          
너희는 너희의 아비인 마귀에서 났으며 또 아비의 욕심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며 진리 안에 서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거짓말은 그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요한복음 8.43-45 (기독교)
          
 말씀 선집  

 

타락이 무엇입니까? 사탄에게 지배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아담 해와를 중심 삼고 태어난 모든 후손들은 사탄의 지배권 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역사는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168.300, 1987.10.01)
          
악마는 자기를 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독재자들은 자신을 위하라고 한 것입니다.  (222.139, 1991.10.28)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선악을 분별하면서 진리를 찾아가야 합니까? 자신을 중심한 마음을 버리고 항상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성서에서도 ‘높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나라에 가면 그러한 인간의 본질이 남을 위하도록 되어 있는 것임을 더욱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찌하여 자기만을 위하려는 마음으로 만사에 임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천륜을 배반한 천사, 다시 말하면 사탄과 혈통적인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2.138, 1957.03.17)
         
사탄이 참소해서 관계 맺을 수 있는 조건이 죄라고 했는데, 결국 창조원칙, 본래의 우주의 근본 원칙에 반대되는 입장에 선 것입니다. 인간은 대상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주체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위하는 데에서 존재의 가치가 있고 존재의 기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의 출발은 사탄 자신도 그렇고, 해와 자신도 ‘내가 주체가 돼 보자. 내가 중심이 되자’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원칙은 대상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대상을 부정하고 ‘나를 위해 있어라’ 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악의 기원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악한 사람은 ‘나를 위하라. 전부 나한테 와서 굴복해라’ 고 합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때려 부숴야 되고 예수님도 이것을 때려 부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하지 말라. 자기 이익을 구하지 말라. 남을 위해서 희생하라. 봉사하라’ 고 한 것입니다.  (69.84, 1973.10.20)
        
타락이란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종적인 참사랑 아래서 횡적으로 참사랑을 완결 짓지 못하고 천사장의 침범을 받아 거짓된 횡적 사랑을 이룬 것입니다. 이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잃게 되었고, 인간은 마음과 몸이 모순되어 갈등을 겪는 고장난 생명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악마는 횡적 사랑의 조건을 빌미로 삼아 개인에서부터 세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부당하게 관장하여 오고 있습니다. (198.158, 1990.02.01)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게 되면 “사탄 마귀는 너희 아비”라고 예수님이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결과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 타락한 결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해와를 꼬였고 해와는 아담을 꼬여 서로서로 속이는 비극의 역사가 출발했다는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73.202-203, 1974.09.18)
        
해와가 천사장과 하나 되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천사장은 사탄 마귀가 되었고 사탄의 핏줄을 이어받게 된 것입니다. 해와를 중심 삼고 볼 때, 본래 태어나야 할 아담 해와의 아들들은 장자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차자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할 텐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해와의 한 몸을 중심 삼고 사탄한테 끌려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본래의 창조원리 가운데서 사랑을 중심 삼고 볼 때 사랑은 소유물 확정을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인연을 맺으면 반드시 그 사랑을 중심삼은 주체와 대상은 서로서로의 소유권이 결정되게 돼 있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적 기준을 중심삼고 볼 때 해와가 타락한 것은 무엇입니까? 천사장 세계를 중심삼고 새로운 사랑의 인연을 맺는 소유권 결정을 지은 것입니다. (110.216, 1980.11.18)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지 못하고, 사탄이 우거하는 전이 되어 그와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을 갖지 못하고 악성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악성을 가진 인간이 악의 자녀를 번식하여 악의 가정과 사회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타락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지상지옥이다. 
         
지옥인간들은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유대를 이룰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서 체휼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는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자행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지상지옥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육신을 벗은 후에는 천상지옥으로 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 주권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사탄주권의 세계를 이루게 되었다. 사탄을 세상 임금(요 12:31), 또는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1.2)
          
저희들의 주인이신 아버지께서는 주인이 되지 못하셨고, 당신의 원수인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아 사탄이 주관하는 흑암 권내로 저희들이 끌려내려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사실인가를 다시 한 번 저희들이 회고하면서 이 지구상에서부터 수많은 영인들이 머무는 영계에 이르기까지 억 천만세에 원수 되었던 사탄을 추방하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시며 참된 인류의 소원이었음을 이 시간 저희들이 명심해야 되겠사옵나이다.
         
아버님, 사탄의 권위와 권세의 터전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생활 가운데에서 느끼지 못하는 저희들이옵나이다. 시간 시간을 보내면서, 한 날 한 날을 지내면서도 사탄의 권세와 권한이 저희들의 생활권내에 얼마나 침투해 있으며, 저희들의 생활 무대에 얼마나 침투해 있는가를 지금까지도 느끼지 못한 저희들의 신앙생활이었음을, 아버님, 생각하게 되옵나이다. (19.184-185, 1968.01.07)
         
3. 고발하는 사탄
     
 종교 경전   타락 후 인간은 수많은 무리의 악령과 징벌의 사자들에게 끌려갔다. 그 앞에서 아담은 공포로 몸이 오그라들었다. 솔로몬은 신비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늘은 그를 왕좌에 세우셨고 온 세상이 그를 경외했다. 
         
그러나 그 역시 죄를 짓자 악하고 벌주는 영들에게 끌려갔다. 소중한 소유물을 빼앗기고 고문 받을 상황에 처하자 솔로몬은 두려워하였다. 분명 인간은 자신의 행업에 따라 저 세상의 사자에게 이끌려 간다. 사자가 선할지 악할지는 자기가 걸어온 지상 삶에 달려있을 것이다. 조하르 1.53b (유대교)
        
하루는 하늘의 영들이 여호와 앞에 모여 왔다. 사탄이 그들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 사탄이 대답하였다. “땅 위를 이리저리 돌아 다니다가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그래,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하고 말씀하시자, 사탄이 여호와께 아뢰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신께서 친히 그와 그의 집과 그의 소유를 울타리로 감싸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해 주셨고 그의 가축을 땅 위에 번성하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의 소유를 모두 네 손에 붙인다. 그러나 그의 몸에만은 손을 대지 마라.” 이에 사탄은 여호와 앞에서 물러나왔다. 욥기 1.6-12 (기독교)
        
그 일[심판]이 결정되었을 때 사탄이 말하였다. “명백히 하나님이 너희에게 진실의 약속을 하셨기에 나도 너희에게 약속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나에게는 너희에 대한 아무런 권능이 없도다. 내가 너희를 부르니, 너희가 응답하였을 뿐이라. 그러니 나를 비난하지 말고 너희 자신을 책망하라.” 꾸란 14.22 (이슬람)
        
 말씀 선집   
     
사탄은 욥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듯이(욥 1:9), 항상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여 지옥으로 끌려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탄도 그의 대상을 취하여서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써 수수작용을 하지 않고는 사탄 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탄의 대상은 영계에 있는 악영인들이다. 그리고 이 악영인들의 대상은 지상에 있는 악인들의 영인체이며, 지상에 있는 악인들의 영인체의 활동대상은 바로 그들의 육신이다. 따라서 사탄의 세력은 악영인들을 통하여서 지상인간의 육신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2장 8절에는 사탄이 가롯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하였고, 또 마태복음 16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가르켜 사탄이라고 하셨다. 한편 이러한 악영인체를 마귀의 사자라고 한 기록도 있는 것이다.(마 25:41).
        
지상천국을 복귀한다는 것은 전 인류가 사탄과의 상대기준을 완전히 끊고 하늘과의 상대기준을 복귀하여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사탄이 전혀 활동할 수 없게 된 세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말세에 이르러서 사탄을 무저갱에 가둔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사탄의 상대자가 없어지므로 사탄이 활동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리강론, 타락론 4.2)
          
하나님은 환영하지만 사탄이 안 놓아준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본래 당신에게는 창조원칙에 의해서 사랑으로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비법적인 사랑의 길, 비법적인 자리에 섰지만 아담 해와를 사랑한 것이 틀림없소. 사랑은 본래 주관성의 원칙이 아니요? 내가 아담 해와를 사랑했으니 주관할 수 있는데, 당신이 그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데려 가오’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128.91, 1983.06.05)
         
하나님이 사탄에게 ‘본래 사람은 사탄 너에게 참소 받게 돼 있지 않지 않느냐? 본래 사람은 사탄 너한테 참소 받고, 너한테 구속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않느냐? 하면, 사탄이 말하기를 ’그거 다 알고 있소.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영원히 주장하게 돼 있지 않습니까? 사랑의 인연이라는 것을 원리적 입장에서 보면, 사랑하게 되면 영원히 그 사람 앞에 예속되는 것이 사랑의 법도가 아니요? 라고 하면서 자기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리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간을 내가 만들고 내 아들딸이 돼야 할 것인데 네가 불법적으로 인연을 맺지 않았느냐? 합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습니다. 원리적 법도를 주장하는 사탄의 입장도 옳고, 원리적인 입장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주장도 옳다는 것입니다.   
 (111.147-148, 1981.02.10)
         
하나님께서도 지금까지 내적으로 사탄을 상대하여 싸우고 계시며, 외적으로는 악한 사람을 상대해 싸우고 계시지만 그것은 무례한 싸움이 아니요, 법을 벗어난 싸움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리 법도를 벗어나서는 절대로 싸우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이와 마찬가지로 천리원칙을 벗어난 싸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끝 날에 우주적인 싸움을 해야 할 때에도 천륜의 법도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법을 중심삼고 싸울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사탄도 역시 무례한 법을 세워서 천륜을 벗어난 싸움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의 조건을 세워놓고 사탄과 싸우게 될 때,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면 사탄이 참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법도를 벗어날 때, 용서없이 사탄이 참소한다는 것입니다. (2.176-177, 1957.04.14)
         
4. 선악에 대한 인간의 선택
     
 종교 경전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창세기 4.6-7 (기독교)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시오. 여러분의 대적 악마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베드로전서 5.8 (기독교)
        
쾌락을 탐닉하고 감관의 욕구를 삼가지 않으며, 음식에 절제가 없고, 방일하고 무기력한 자는 악마가 그를 쉽게 정복한다. 마치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이.
        
육신의 부정함을 깊이 생각하고 감관의 욕구를 능히 삼가며, 음식에 절제가 있고 꿋꿋한 믿음으로 힘써 정진하는 자는 악마도 그를 정복할 수 없다. 마치 바람이 바위산을 어찌할 수 없듯이.    
법구령 7-8 (불교)
        
사람들이여, 실로 하나님의 약속은 진실이거늘, 현세의 삶이 너희를 유혹하지 않게 하고 유혹자가 하나님에 관해 너희를 속이지 않게 하라. 실로 사탄은 너희의 적이거늘, 그를 적으로 대하라. 그가 모으는 자들이란 지옥의 거주자들과 함께 할 자들이도다.     
꾸란 35.5-6 (이슬람)
         
믿음을 가진 자들이여, 사탄의 자취를 따르지 말라. 사탄의 자취를 따르는 자에게 사탄은 항상 죄악과 비행을 범하도록 하느니라. 만일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없었다면, 너희 가운데 그 누구도 결코 순수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원하시는 자를 순정케 하셨으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니라.     
꾸란 24.21 (이슬람)
         
믿음을 가진 자들이여, 사탄의 자취를 따르지 말라. 사탄의 자취를 따르는 자에게 사탄은 항상 죄악과 비행을 범하도록 하느니라. 만일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없었다면, 너희 가운데 그 누구도 결코 순수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원하시는 자를 순정케 하셨으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니라.   
꾸란 24.21 (이슬람)
         
과연, 근원적인 두 영이 있습니다. 이들은 상호 모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알려진 쌍둥이입니다. 생각에서, 말에서, 행동에서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두 영입니다. 이들 중에서 자비로운 영은 언제나 바른 선택을 하지만 해로운 영은 그렇지 못합니다.
        
더욱이 처음에 이 두 영이 나타났을 때 이들은 삶과 죽음을 있게 했고, 이제 마침내 최악의 것은 거짓된 자들의 것으로, 최상의 생각[하늘]은 진실된 자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이 두 영 중에 거짓된 영은 언제나 최악의 것을 선택하여 이루려 하나, 반석 위에 선 바로 그 덕 있는 영은 진리를 선택하며, 거짓 없는 행위로 끊임없이 지혜의 주를 만족시키는 자도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아베스타, 야스나 30.3-5 (조로아스터교)
          
이스라엘 민족이 시나이 산 앞에 섰을 때, 뱀의 불순함이 그들에게서 빠져나갔다. 그리하여 육욕이 멈추고 결국 생명나무에 접붙여질 수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저 높은 곳을 향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하늘빛과 지혜를 받게 되었다. 주 하나님은 거룩한 이름이 적힌 띠를 둘러주셔서 이전처럼 사탄이 힘을 발휘하고 해코지 할 수 없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죄를 짓고 금송아지에 경배하자, 그들은 강등되고 하늘빛을 잃어버렸다. 거룩한 이름의 띠도 빼앗기고 다시 이전처럼 마귀 사탄의 공격에 놓이게 되었다.    
조하르 1.52b (유대교)
          
마음의 여여한 본바탕이 참된 부처요,    
삿된 견해와 탐, 진, 치 삼독이 마라이다.     
바른 견해로 깨달음을 얻으면     
내 속에 부처가 거하며,    
내 본성이 삼독에 짓눌려 압도되면    
악마에 사로잡힌 자라 일컬어지리라.    
그러나 내 마음의 바른 견해가 빛을 발하여     
삼독을 몰아내면     
악마가 곧 참된 부처로 변하리. 육조단경 10 (불교)
         
 종교 경전   하나님은 가장 공적인 분이요, 사탄은 철두철미 자기 중심한 사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88.209, 1976.09.18)
        
우주에서 사람보다도 사람의 주체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제일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왜 사람의 주체되는 신은 안 가지려고 할까요? 사탄은 욕심이 많은데 하나님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 불변, 절대 유일, 절대 영원입니다. 하나님은 변할 줄 모릅니다.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보고 암만 가지라고 해도 하나님은 참이기 때문에 못 갖습니다. 사탄이 참을 소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암만 가지려고 했댔자 허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욕심이 많은데 왜 사람보다도 사탄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을 까요? 그걸 대답하라면 곧잘 할 것입니다. 하늘편의 반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지만 사탄은 변하고, 하나님은 유일하지만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지만 사탄은 순간적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렇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나 하나님은 어째서 사람을 필요로 합니까? 사람은 두 성격, 두 세계의 소질을 들고 날 수 있는 중간 입장에 있다는 논리를 여기서 완전히 확정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할 수 있고 순간적인 사람은 사탄 편입니까, 하나님 편입니까? 또, 집에서 자꾸 분열을 일으키고 자꾸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 사탄 편입니까, 하나님 편입니까?
        
미래를 보고, 세계라든가 전체, 영원을 바라보고 오랜 역사를 두고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먹고 살면 되지, 오늘만 좋으면 되지’ 하고, 또 자식을 위해야 할 부모인데도 불구하고 그 부모의 입장을 망각하고 술을 마시고 자기를 중심 삼고 취하게 된다면 그것은 악에 속하고, 사탄에게 속합니다.
         
그래, 술을 먹는 사람은 그 자신이 행복합니까, 불행합니까? 먹는 자체는 행복할 것입니다. 술을 먹으면 춤도 추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영원을 지탱시키지 못합니다. 며칠 가다가 맙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환경적 여건에 파탄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환경적 여건이 보호를 못 받고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에 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24-243-244, 1983.02.20)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권 내에 있다는 이 관념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타락권 내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일상생활의 생활의식으로 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계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생각 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161.218, 1987.02.15)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악마는 24시간 여러분을 통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종적인 자리에만 있기 때문에 마음 외에는 활동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사방의 360도로 그리고 언제나 활동할 수 있으니 우리는 사탄의 활동 앞에 지게 돼 있습니다.  (200.227, 1990.02.25)
         
인간의 타락이후 서서히 전개되었던 악령의 역사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급격하게 변하게 되었고, 지상에서 악령들의 활동들이 크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하늘 뜻을 찾아 나온 중심인물들이 사탄의 정체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고, 죄의 뿌리인 원죄를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사탄도 여유를 가지고 자기 중심한 세계를 꾸준히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부모님께서 지상에 오신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사탄의 정체와 죄의 뿌리인 원죄가 음란죄임을 밝히셨으며 심지어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시지 않았던 내용인 사탄의 성향까지 파악해서 사탄이 더 이상 지상에서 발붙일 수 없도록 탕감조건을 세워가면서 복귀섭리역사를 승리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사탄도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영계의 악령들을 동원시켜서 지상인의 몸속에 있는 한영인(恨靈人)들과 합세하여 과거의 원한에 대한 자극을 주어서 지상인들을 괴롭히는 악령역사를 강화했습니다. 
        
사탄은 이들을 불러서 자극을 주어 원수를 갚게 하고 그들이 당한 만큼 또는 그 이상의 원한과 고통을 준 조상의 후손들에게 앙갚음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사탄은 축복가정에게 언제나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조건에 걸리는 생활을 하게 되면 악령들을 집어넣어서 축복가정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왔습니다.
          
본래 축복가정들은 참부모님과 심정일체를 이루고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으로 생활을 하면 사탄이 침범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원리적으로 행동하여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이 잡히면 침범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지상의 축복가정들은 참부모님의 승리적 기대만을 의지한 채 자신의 생활을 깊이 돌아보는 일에 소홀히 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주는 행동은 혹시 한 적이 없는가?’, ‘그러한 타락성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를 깊이 도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더욱 악으로부터 정화시켜 창조본연의 참자녀의 모습으로 거듭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흥진님 영계 메시지, 2002.01.01)

 


 
     
죄에 대한 성서의 의미는 ‘과녁을 빗나간 것’이다. 따라서 죄는 인간이 삶의 참된 기준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가를 의미한다. 죄를 이해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에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살인, 도둑질 성적 부도덕, 거짓말과 마약섭취 같은 전형적인 악행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죄를 비난한다. 둘째, 죄의 의미는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남에게 해를 입히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보다 미세하게 죄를 이해한 것인데, 일상생활에서 남과 충돌하는 행동의 동기와 방법에 대해 자기반성을 하게 한다. 죄는 마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속박하고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방해한다. 죄를 이해하는 세 번째 방법은 죄를 어디에나 스며 있는 결함과 타락 같은 인간의 일상적 조건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선명 선생은 모든 죄는 하나님과의 본래적 관계를 끊어놓고 인간을 소외와 투쟁의 상태에 남겨 놓은 인간 타락의 결과라고 가르친다.
         
1. 죄의 의미
       
종교 경전 
     
누구든지 산목숨을 죽이고 거짓을 말하며, 남의 아내를 탐하며, 술에 빠진 자는 바로 이 세상에서 자신의 뿌리를 파고 있는 자이다.    
법구경 246-247 (불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스스로 속지 마시오. 음란한 자나 우상 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욕심 부리는 자나 술주정꾼이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6.9-10 (기독교)
         
황금을 약탈하는 자, 술 마시는 자, 스승의 침상을 더럽히는 자, 브라흐만을 살해하는 자, 이들 제 부류에 속한 자들은 지옥불에 떨어지리라. 이들과 사귀는 자들도 또한 마찬가지니라. 찬도그야 우파니샤드 5.10.9 (힌두교)
          
무함마드가 말하기를 “간음을 행한 자는 신자가 아니니라. 도적질한 자는 신자가 아니다. 음주를 한 자는 신자가 아니니라. 그에게 눈을 치켜 떴다고 그의 물건을 빼앗는 자는 신자가 아니니라. 남을 기만하는 자는 신자가 아니니라. 그러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부카리 및 무슬림 하디스 (이슬람)
         
라훌라야, 만일 네가 몸으로 짓는 행위를 원한다면 그것을 다음처럼 숙고하라. “내가 몸으로 짓고자 하는 행위는 나를 해롭게 할 수도 있고 남을 해롭게 할 수도 있으며, 나와 남을 모두 해롭게 할 수도 있으니, 이와 같은 행위는 사투르고 의롭지 못하여 그것을 행함도 고뇌이며 그 결과도 또한 고뇌일 뿐이리라.” 만일 이와 같이 여긴다면, 라훌라야, 그 행위는 결단코 삼가야 하느니라. 맛지마 니카야 1.415 (불교)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구해내지 못하시겠느냐?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겠느냐?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나님 사이가 갈라질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가려 너희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사야 59.1-2 (기독교)
          
비유하여 마치 걸음을 옮길 수 없는 앉은뱅이처럼 선악의 과보로 된 족쇄에 채워지고, 옥에 갇힌 수인처럼 자유를 잃어버린···. 마이트리 우파니샤드 4.2 (힌두교)
        
말씀 선집 남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한 데서 모든 죄악이 발생했습니다. 도둑질이 왜 나쁩니까? 그 도둑질은 내가 하고 싶어서 했는데 그게 나쁜 게 무엇입니까? 하나의 옷에도 희생의 대가가 들어가 있고 봉사의 대가가 들어가 있습니다. 공적인 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가져왔기 때문에 죄입니다. (105.92-93, 1979.09.30)
          
이제부터 지켜야 할 철칙이 뭐냐 하면, 첫째로 죽을 일이 있더라도 핏줄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사 조치를 잘못해서 인권을 유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평등합니다. 인권을 차별하거나 유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책임자들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인사 조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안 맞는다고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공금을 도둑질하지 말라, 공금을 마음대로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입니다. (342.298-299, 2001.01.13)
        
죄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것이 죄라고 하는데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원수가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니 원리원칙에, 법도에 어긋나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걸려드는 겁니다. 예수님은 태어기를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자리를 벗어난 입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죄가 없는 분입니다. 사탄의 주관권내에서 사탄과 접하는 것이 원죄인데 예수님은 사탄의 참소 조건 뿐만 아니라 모든 조건을 넘어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에 원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22.257, 1969.05.04)
        
사로 사랑하는 사람이 오늘 좋아하다가 내일 갈라지는데 무슨 평화가 있고, 무슨 통일이 있고, 무슨 자유가 있느냐 이겁니다. 그러한 사랑은 파괴의 동기요,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사탄이 반대로 이용해서 이 인류를 파괴시키고, 인류의 이상을 파괴시키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인 무기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서 진짜 평화를 빼앗아 가고, 진짜 자유를 빼앗아 가고, 진짜 통일을 빼앗아 가는 원수의 전략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전통을 지닌 사랑, 원인과 결과가 통할 수 있는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그것은(문란한 사랑) 악이요, 원수요, 용납할 수 없는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원수요, 용납할 수 없는 죄라는 것입니다. 죄 중에 무슨 죄냐? 제일 무서운 죄라는 것입니다. 원수 중에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시정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원수요 죄로 취급하기 때문에 들이쳐서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망하게 되는 것이 원리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태리의 폼페이 시(市)를 가 본 사람도 있겠지만, 그 도시가 망하게 된 것도 문란한 사랑의 사회생활 때문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그래서 멸망한 것입니다. 로마도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역사관으로 미루어 볼 때, 미국도 그러한 사랑을 시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104.141, 1979.04.29)
         
2. 죄의 침투
     
종교 경전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1.8 (기독교)
         
나는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지 않으리라.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실로 인간은 죄악에 물들기 쉬우니라. 꾸란 12.53 (이슬람)
          
유대사람이나 헬라사람이나 다 같이 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고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비뚤어졌다. 모두가 쓸모없게 변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로마서 3.9-12 (기독교)
        
땅에서 생겨난 것이거나 혹은 하늘에 있는 신들이나 그 어떤 피조물들도 프라크리티의 세 가지 자성을 여의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바가바드기타 18.40 (힌두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까지, 참으로 인(仁)을 좋아한 사람이나 불인을 미워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인을 좋아한 사람은 더할 것이 없으나, 불인을 미워한 사람은 불인이 자기 몸을 덮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만약 하루라도 인을 위해 힘을 쓸 수 있다면, 그만큼 인이 실천되었을 것이다. 나는 힘이 모자라 인을 실천 못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아마 있을 법도 하나, 내가 본 바에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논어 4.6 (유교)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편 51.5 (기독교)
          
말씀 선집 
     
인간세상에서 영원히 변하려야 변할 수 없고 갈리려야 갈릴 수 없는 하나의 완전한 의리를 완성하여 하늘과 땅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의리의 관계를 맺은 사람이 있느냐고 할 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서 종교를 세워 놓고 그 도리 앞에 영원히 갈라질 수 없는 자신을 세웠느냐고 할 때, 이것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인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천륜 앞에 역시 영원히 하나 될 수 있고, 어떤 무엇이 가르려야 가를 수 없는 하나 된 입장에 있느냐고 할 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느낄 것입니다. (4.135, 1958.03.30)
          
신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신을 닮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선한 하나님이라면 우리 인간들도 선한 이간들이 되어야 할 텐데, 선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상당히 복잡하고 선하지 않은 인간이 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간격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깨끗한 옷을 입었는데, 여기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그것을 잘라 버리든가, 털어 버리든가, 보기 싫으니 처단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한 하나님의 끄트머리에 이 더러운 인간이 붙어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 인간은 성경을 모르더라도 더럽혀졌다는 것입니다. (92.58, 1977.03.13)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파탄 당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고, 또 하나님이 우리 인간 앞에 아무리 오려야 올 수 없는 간격이 생겨 버렸습니다. 벽이 생기고 국경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까지 갈 수 없는,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인간이 갈 수 없는 그 벽, 넘을 수 없는 그 벽, 그것이 무슨 벽입니까?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벽이 못 되었다는 사실이 종교인들에게 문제가 아니 될 수 없습니다.
        
이 벽이 우리 개인의 마음과 몸 사이에 들어와 끼게 되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말할 수 없는 역사적인 환경으로 말미암아 엮어진 벽이 들어와 끼게 되었습니다. 가정이 그러하고,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 온 영계와 육계, 소위 일반적으로 말하는 하늘나라와 지옥, 천국과 지옥 사이에도 이런 담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담을 제거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아무리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계신다고 하더라도 땅 위에 선 우리들은 담의 고개, 포위된 이 선을 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비극입니다.   
(135.268, 1985.12.15)
         
아담 해와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아담 해와가 관계되어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할 것인데 종과 하나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핏줄을 이어받아야 할 이 인간들이 종의 핏줄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니 타락한 인간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해도 실감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91.242, 1977.02.23)
        
타락한 아담 해와가 상대의 인연을 맺어서 출발한 그 가정은 하나님과는 전연 관계가 없습니다. 그 가정은 하나님이 지극히 슬퍼하는 터전이 되었고, 반면에 원수인 사탄이 모든 권리를 주장하고 모든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타락론을 통해서 배웠을 것입니다. 타락은 개인과 개인, 즉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말미암아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비단 한 남자와 한 여자에 한한 것만이 아니고 역사적이요 천주사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46.196, 1971.08.15)
          
아직도 인류는 우리의 조상 되는 아담 해와로부터 전수받은 타락성의 노예가 되어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금식과 금욕, 그리고 엄청난 희생의 고난 길로 일관하다가 떠난 성인 현철들의 고백이 그것을 증거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백은 아직도 지상계에서 같은 길만을 답습하고 있는 제자들과 신도들, 그리고 후손들에게 애처로운 호소로 날아들고 있습니다.(447.160-161, 2004.05.01)
     
     
유전죄와 업보
         
종교는 종종 인간의 운명과 천부적 재능의 차이를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결과로 설명한다. 그것은 과거 자신의 삶의 업보이거나 후손에게 내려온 조상들의 죄라는 두 가지로 이해된다. 이런 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행위를 속죄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선업을 쌓기 위해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인내심을 갖고 견디도록 인도한다.
          
업보는 행동을 의미하는데 더 구체적으로 한 개인이 이 세상이나 과거의 삶에서 저지른 행동을 의미한다. 윤회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현재 삶을 다음 생애에서 자업자득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종교들은 한 사람의 상황이 업보에 의해 얼마만큼 결정되는가의 여부에 따라 견해를 달리한다. 
         
힌두교는 업보에 따라 개인의 현재 삶이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재산, 인종, 성별 혹은 카스트의 불평등은 당연한 것이며, 사실상 우주는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공정한 것이다. 한편, 불교는 업보가 결정적 원리라는 점을 부인한다. 업보는 한 인간의 삶을 조건 짓는 24개 요인(파카야) 중 하나로서 다른 조건들이 갖춰지면 업보는 나타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 신자는 정신적 수련과 명상 훈련을 통해 자유를 얻고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 나고자 한다.
         
동양과 서양의 대부분의 종교는 죄가 혈통을 통해 유전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개인은 육체적 특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가풍, 태도, 개성까지 물려 준 자기 조상의 죄를 짊어지고 있다. 조상들의 삶은 미래 세대의 경험에도 영향을 미쳐 수세기까지 전해질 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유전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명한 사람은 자손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녀들을 위해 선업을 남길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유전죄가 어떻게 유전되며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적지 않은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1. 과거 삶의 유산
        
종교 경전 
     
나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가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출애급기 20.5-6 (기독교)
          
우리가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또한 우리 자신이 지은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리그 베다 7.86.5 (기독교)
       
죽음에서 여전히 처벌받지 아니한 죄가 남아있다면, 판결은 자손에게로 연장된다. 잘못과 폭력에 의해 다른 이들의 돈을 가져갔다면, 계산되어 그것의 총액을 아내와 자식과 그 가족들이 점차 죽을 때 그들에게서 빼게 된다. 만일 그들이 죽지 않으면 그들의 사악한 착복의 값만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물, 불, 도둑, 강도, 재산의 손실, 질병 그리고 독설(중상) 등으로부터 재앙이 있게 된다. 태상감응편, 4-5 (도교)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작은 조롱박 약통 속으로 들어갈 만큼     
능력이 있는 자여!    
당신은 자녀를 잊고 있었는가?    
당신은 아내를 잊고 있었는가?    
사람이 뿌린 악의 씨앗은    
그의 후손이 거두게 된다.    
무자비하게 반드시 보복을 받을 것이다.    
아무리 늦어질지라도 보복은 때가 되면 올 것이다.      
요루바족의 노래 (아프리카 전통종교)
        
현세에서 모든 자손의 운명은 그의 선조와 다를바 없도다. 죽음이 파멸을 그만두게 할 수 없고, 생존자가 그들의 죄악을 포기하지 않도다. 인간은 각자 서로의 전철을 밟고 있나니, 무리마다 국가마다 그들의 길을 고칠 생각도 않고 종말을 맞는구나.   
나흐줄 발라가, 설교 86 (시아파 이슬람)
         
의로운 자, 얼마나 행복한가! 그만 홀로 덕이 있지 않고 자녀들까지 그 덕이 상속되는구나. 그 자녀의 자녀들도, 저 마지막 세대에도 그 덕이 미치는구나. 아론은 나답과 아비후처럼 화형당해 마땅한 아들들이 있었으나, 그 아버지의 덕으로 인해 이들이 목숨을 건졌다.
        
죄지은 자, 얼마나 애처로운가! 그 죗값을 호로 치르지 않고 자녀들까지 물려주는구나. 그 자녀의 자녀들도, 저 마지막 세대에도 그 죗값이 미치는구나. 가나안의 많은 아들은 랍비 가말리엘의 몸종이었던 타비 같은 운명을 타고났으나, 그들 조상들의 죄로 그 복의 기회를 잃었도다.     
탈무드, 요마87a (유대교)
         
톳데야의 아들 수바가 세존께 여쭈었다. “오, 고타마여, 사람들과 사람들로 태어난 존재들 가운데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수명이 길고 어떤 사람은 수명이 짧으며, 어떤 사람들은 질병에 시달리고 어떤 사람들은 질병이 없으며, 어떤 사람은 용모가 추하고 어떤 사람은 용모가 아름다우며, 어떤 사람은 권세가 없고 어떤 사람은 권세가 많으며,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어떤 사람은 부유하며, 어떤 사람은 비천하고 어떤 사람은 고귀하며, 어떤 사람은 우둔하고 어떤 사람은 총명합니다. 사람들과 사람들로 태어난 존재들 가운데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오, 젊은이여, 사람들은 업을 자신의 것으로 지니며, 그 업의 상속자들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들이며, 그 업을 친척으로 하는 자들이며, 그 업을 의지 처로 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을 천하고 귀한 신분으로 가르는 것은 바로 그 업입니다.”
        
“오, 젊은이여,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가 산 생명을 죽이는데, 잔인하여 손에 피를 묻히고 살육에 전념하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자비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과 그 결과로 그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는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다시 태어납니다. 그가 몸이 파괴되고 죽은 후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나지 않고, 만일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어디에 태어나든 수명이 잛습니다. 산 생명을 죽이고 잔인하여 손에 피를 묻히고 살육에 전념하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하여 자비심이 전혀 없는 행동은 수명이 잛은 운명으로 귀결됩니다.”
     
“한편, 오, 젊은이여,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산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감으로써 살생을 완전히 여윕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수명이 긴 운명으로 귀결됩니다.”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본성적으로 살아있는 존재들을 괴롭힙니다. 그와 같은 행위와 그 결과로 그는 어디에 태어나든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화를 잘 냅니다. 어디에 태어나든 그는 용모가 추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어디에 태어나든 그는 용모가 아름답게 태어납니다.”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질투가 심합니다.··· 어디에 태어나든 그는 권세가 없는 운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질투가 전혀 없습니다.··· 어디에 태어나든 그는 큰 권세를 지니는 운명을 타고납니다.”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고행자나 바라문에게 보시를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태어나든 그는 가난한 운명을 타고납니다.··· 여기 어떤 여자나 남자는 보시를 넉넉하게 합니다.··· 어디에 태어나든 그는 부유한 운명을 타고납니다.”
        
“오, 젊은이여, 그러므로 사람들은 업을 자신의 것으로 지니며, 그 업의 상속자들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들이며, 그 업을 친척으로 하는 자들이며, 그 업을 의지 처로 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을 천하고 귀한 신분으로 가르는 것은 바로 그 업입니다.”  
맛지마 니카야 3.202-206 (불교)
         
반발적 마음은 자유의지에 조정되지 않고 완전히 자극-반응에 기초하여 작용하는 마음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의식, 목적, 사상, 신체, 행동을 넘어 강압과 통제력을 발휘하는 마음의 한 부분이다. 기억의 흔적은 반발적 마음에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정신이상과 심인성 질병의 유일한 근원을 여기서 찾았다.    
론 허버드, 사이언톨로지 0-8 (사이언톨로지)
       
말씀 선집 
     
수많은 역사시대를 거쳐 오면서 수많은 우리 조상들이 죽어 갔지만 전체의 중심을 세워 가지고 전체에 좋을 수 있는 것, 전체의 이익을 생각했더라면, 지금까지 백년 이내에 살던 사람들이 그렇게 했더라면 천년이 가더라도 그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개인 중심삼고 그러다 전부 다 망했습니다. 자꾸 떨어집니다. 전체를 망쳐 버린 것입니다. (200.91, 1990.02.24)
         
인류역사상 죄의 양이라고 하면 엄청납니다. 아담 해와의 근본적 죄가 있고, 줄기의 죄 등 여러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심이 되는 죄의 뿌리가 있습니다. 뿌리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변의 뿌리도 있고 줄기의 뿌리도 있습니다. 줄기도 작은 줄기가 커질 때까지 적어도 거기에는 한두 개의 가지에서 시작해서 수만 개의 가지가 있는데, 이렇게 많은 가지들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전체의 양을 보면 방대합니다. 인류가 그렇게 많은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느냐? 그 방대한 죄의 양이 모두 여러분 일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58.84, 1994.03.17)
       
대관절 사람이 누구를 닮아서 이 모양입니까? 아버지를 닮았다면 그 아버지는 누구를 닮아서 그 모양입니까? 할아버지 할머니를 닮아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자꾸 올라가면 인간의 종지조상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인간 조상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조상은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됐습니까?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엄마 아빠를 닮게 마련입니다. 그 부모를 닮지 않았다면 몇 대 조상의 성품이 숨겨져 있다가 유전법칙에 의해서 어머니 아버지의 성품과 합하여서 한 인간이 생겨난 것이지 아무 근원도 없는 무관한 자리에서 그렇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혼자에 의해 자신이 되어 가는 줄 알겠지만 이미 여러분 조상세계의 양반들이 많이 왔다 갔습니다. 수천 대의 조상들을 나쁘게 얘기하면 안 되겠으니 ‘사장님’ 이라고 합시다. 수많은 사장을 종합한 총 사장으로서 남아진 것이 여러분 개체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를 들으니 기분 좋지요? 이렇게 멋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수천수만 대의 조상들의 갖가지의 모양, 자격, 가치들을 모아 놓은 것을 박물관에 전시해 놓은 전시품들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여러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이 세계 앞에 ‘우리의 후손이 이렇다’ 하며 전시품으로 세워 놓은 것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봤습니까? 이 천지간에 남자와 여자는 많고 많지만, 개인 자체를 두고 볼 때 자기 선조들의 모양을 전체로 총합해서 열매를 맺어 태어난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41.139, 1971.02.14)
        
여러분의 조상들이 전부 다릅니다. 가는 길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악한 사람 선한 사람이 섞어져서 흘러가는데 올라가고 내려가고···. 지금 그 열매와 같은 여러분 자리가 전부 한 자리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데, 하나님이 만일 ‘인류는 평등하고, 같다’ 고 하신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모릅니다. 타락이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있다면 모르지만, 타락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야 할 운명에 있는 인간에 대해서는 평등이라는 관념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과 천국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는 이론을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보면 수천 계급이 생길 수 있습니다. 땅 위에 흩어져 있는 이 계급, 여기에 머물러 있는 계급과 같은 것이 오늘날 인류역사에 모든 사람들의 배경을 중심삼고 현재와 미래를 통해서 생겨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땅 위에 이와 같은 계급이 생기면 영계도 이와 같은 계급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영계도 많은 그룹으로 되어 있고, 계급적으로 분열이 되어 있습니다. (91.269-270, 1977.02.27)
         
2. 악한 업보의 단절
         
종교 경전 
     
현명한 비구는 이제 이전 생의 업의 과실들을 거두어야 함을 알고 있네.     
그것이 많든 또는 아주 적든 시기와 증오의 마음에서 또는 충동적으로 행한 행위들은 요구되는 그 결과를 맺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말며, 충동적으로 행해서는 안 되리라.     
현명한 비구는 훌륭한 결실을 맺지만, 지식은 벌을 부르는 길을 남기리라.     
앙굿타라 니카야 3.33 (불교)
         
만일 그들 선여자 선남자들이 이런 형태의 경전을 배우고 독송하고 남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더라도 오히려 수모를 당하고 모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 중생은 전생에서 지은 나쁜 업들로 악도에 떨어져야 하겠지만 현금에서 그런 모욕을 받음으로 해서 전생에 지은 나쁜 업들이 소멸되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강경 16 (불교)
        
나의 아버지는 웃제니의 상인이었으며, 나는 그의 외동딸로 사랑과 자애 속에 구김살 없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사캐타로부터 갑부 상인이 나에게 중매인을 보내왔으며, 나의 아버지는 나를 그 집의 며느리로 보냈습니다.
        
나는 마치 하녀처럼 몸소 남편을 섬겼습니다. 손수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외동아들에게 하는 것처럼 남편을 사랑하고 교만하지도 않으며 일찍 일어나고 게으르지도 않은 부덕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나를 싫어했습니다. 남편이 시부모님께 말했습니다. “저는 이시다시와 더불어 같은 집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녀가 저를 그르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가 싫습니다. 나는 그녀를 떠나려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시부모님께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뭘 잘 못 했느냐? 뭘 어쨌는지 솔직히 말해 보거라.” 내가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나쁜 짓도 안 했습니다. 남편에게 해로운 짓도 하지 않았으며, 남편의 결점을 입에 올린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저를 미워하는데, 전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근심에 휩싸인 시부모님은 아들의 뜻에 따라 나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며 말했습니다. “자식 지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름다운 여신을 잃는구나.” 그래서 나의 아버지는 다시 두 번째 부유한 집안으로 보냈습니다. 전 남편의 집안에서 받아갔던 지참금의 절반을 지불했습니다. 나는 그의 집에서 한 달을 살았는데, 마치 노예처럼 부지런히 그를 섬겼지만, 그 역시 나를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나의 아버지는 자신을 제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훈육할 수 있는 탁발 수행자에게 말했습니다. “누더기과 발우를 버리시고 내 사위가 되어 주십시오.” 그 또한 반달쯤 함께 살다가 나를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간청했습니다. “악은 실로 제가 한 행위(나의 불행으로 이끄는 업)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없애겠습니다.” 그러자 나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어라. 최상의 진리를 얻어라. 지고무상한 분들이 얻었던 평안을 얻어라.” 나는 부모와 친척들에게 인사드리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출가한 지 이레째 되던 날 나는 세 가지 명지를 얻었습니다.
          
내가 지금 과거 일곱 생을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입니다. 이 불행이 결실을 맺게 된 업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잘 듣기 바랍니다. 나는 전생에 에라캇차에 사는 부유한 금세공업자였습니다. 젊은 기분에 나는 다른 사람의 아내와 간통을 했습니다. 그 뒤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오랫동안 솥에 삶기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나온 뒤에 나는 암 원숭이의 태내로 들어갔습니다. 태어난 지 이레만에 나는 무리의 우두머리 원숭이가 나를 거세시켰습니다. 그것은 전에 내가 남의 처를 범한 응보였습니다. 그 뒤 나는 신다와 숲에서 죽었으며, 애꾸눈에 절름발이인 산양의 태내로 들어갔습니다. 다시 거세를 당했으며, 벌레에게 뜯어 먹히며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이 또한 전에 남의 아내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나는 소장수 소유의 암소로 태어났습니다. 구릿빛 암소의 송아지로서 나는 열두 달 후에 거세당했으며 쟁기와 수레를 끌었으며, 결국 눈이 멀고 고생도 심해 병이 들었습니다. 이것 역시 전에 남의 아내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죽었으며, 가난하고 빚이 많은 짐마차 꾼의 가정에 딸로 태어났습니다. 빚을 갚기 위하여 나는 대상(隊商)의 우두머리에게 팔렸는데, 그는 서럽게 울고 있는 나를 집에서 끌고 나갔습니다. 그 후 내가 열 여섯 살이 되자, 기리다사라는 이름의 그 집 아들이 내가 혼기에 이른 것을 알고 나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본처가 있었는데, 후덕하고 온갖 훌륭한 성품을 지닌 여인으로 남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녀에 대하여 나는 적개심이 일었습니다. 이 모든 불행들은 지난 업의 과보였으며, 나는 항상 하녀처럼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버렸습니다. 이제야 나는 그것을 없앴습니다.     
테리가타 400-447, 이사다시 수트라 (불교)
         
책임을 다했다고 곧장 하늘로부터 보상받을 것을 기대하지 마라. 너의 죄가 아직 다 면해지지 않았을 수 있으니, 대신 자녀에게 아무것도 상속해 주지 못함을 부덕하게 여겨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들의 선행에 보상을 바랐다면 어떻게 의로운 자의 씨가(한 예로, 이스라엘 민족) 전승될 수 있었겠는가? 출애급기 랍바 44.3 (유대교)
          
말씀 선집 
     
수천 년 동안 선조들이 슬픔의 성벽을 쌓아 왔사온데, 이 성벽이 날이 가면 갈수록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많은 꾀를 내어 이 성벽을 높이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인류가 선조들이 저질러 놓은 이 원한의 성벽을 헐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사옵고, 또한 우리도 그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 일신이 서러운 길을 가신 것이 예수님의 서러움인 줄만 알았는데, 그 서러움이 저희들의 서러움으로 남아 있음을 알게 될 때, 이제 눈물 흘리며 하늘 향해 나아가야 할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옵니다. (1.305-306, 1956.12.23)
         
죄에는 원죄가 있고, 자범죄가 있고, 연대적 죄가 있고, 죄에는 원죄가 있고, 자범죄가 있고, 연대적 죄가 있고, 조상에서 이어받은 상속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걸 청산하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됐더라도 각자의 탕감길은 남아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왔다고 다 그냥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죽으면서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지지리 못나게 고생하고 가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전부 탕감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바치고라도 가야 된다는 그 전통 기준은 마찬가지이지만 가는 길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251.131, 1993.10.17)
         
죄라는 것을 원리강론에서는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천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에는 원죄, 자범죄, 유전죄, 연대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지상인들은 죄라고 하면 자범죄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원죄는 물론이거니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죄가 있고, 자신이 직접 죄를 짓지는 않았어도 연대적 책임으로 갖게 되는 연대죄가 있습니다.
          
타락인간을 한마디로 말하면 육천년의 인류역사에 의한 선악의 결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후손들은 선한 성품과 악한 성품을 물려받는데 선보다는 악이 많은 세계권에 살다보니 더 많은 악의 성품과 그 죄가 후손들에게 대물림 되어 악순환을 낳고 있습니다.
          
지상인들의 몸속에 많은 악령들이 붙어 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자범죄와 조상의 죄가 유전되어 나타난 결과를 말합니다. 죄는 사탄의 타락성을 통해 상대성을 띤 결과이기 때문에 죄에는 반드시 사연이 있고, 관련된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만약 조상들이 과거에 지상에 살면서 잘못하여 상대방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어 한이 맺히게 하였다면, 그 한 맺힌 영인들은 고통을 주었던 조상들의 후손에게 달려붙어 복수를 하려하고 그의 후손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죄의 결과가 질병과 이를 통한 고통인 것입니다. 현대 지상인이 갖고 있는 질병의 90퍼센트 이상은 조상의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후손들에게 나타난 질병과 고통의 내용을 보면 과거 그 조상들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상들이 공금을 유용했거나 남의 재산을 훔친 경우나 피해를 준 경우는 그 후손의 위장 계통에 질병이 나타납니다. 
         
음란죄를 지은 경우에는 그 후손이 탈선하거나, 생식기와 관련된 질병이나 불임 증세와 이혼하는 가정이 많이 나타납니다. 자신이 상대방을 잘못 보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상대방에 대해 잘못 들어서 말을 잘못하게 되면 심정을 유린한 죄가 성립되어 그 후손 중에 장님이나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곧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고 아픔을 준 육신의 해당 부위에 질병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죄값이 무거울수록 불치병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조상들이 지은 죄를 현재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 탕감조건을 쌓아 청산하지 못하게 되면 그 죄는 다시 후손에게 유전됩니다. 차후에 지상인이 영계에 와서 후손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이 그 죄를 청산해주었더라면 후손들이 저 고통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후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흥진님 영계 메시지, 2002.01.01)
          
우리 조상들이 죄를 많이 졌으면, 내가···. 여자 남자 또 얼마나 죄를 많이 졌겠습니까? ‘에이!’ 이랬는데 그걸 탕감 못했으면 후손들 앞에도 내가 제물 되어 깨끗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못난 남자라도, 못난 여자라도 세상에 미인 미남 이상으로 잘 살겠다, 이렇게 해서 탕감해야 됩니다. (116.151, 1981.12.27)
          
6천년이나 슬픔의 제단이 연속된 데에는 선조들의 잘못이 있어서인 줄 아옵니다만, 오늘날 저희들이 또 책임 못하여 슬픔을 후대에 넘겨줄까봐 두렵사옵니다. 오늘 저희가 저희 일대에서 비운의 역사를 막고 하늘의 심정을 여기서부터 수습하여 새로운 기쁨의 심정으로 바꿔 놓아야 할 책임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을 배웠사오니, 이 시간 머리 숙인 저희들, 아버지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8.262-263, 1960.02.07)

 


연대적 죄와 역사적 죄
        
개인은 그가 속한 국가, 인종, 종족과 종교 등의 집단에 피할 수 없이 연대되어 있다. 그들의 개인적 삶이 유죄이든 결백하든 간에 개인은 집단의 운명에 따라 번영과 고통이 달려 있다. 그 공동체에 퍼진 악―전쟁, 기근, 전염병, 그리고 만연된 마약 사용―은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문선명 선생은 이를 연대적 죄라고 부른다. 
      
인간은 연대적 죄를 인식하고 그 죄값을 치러야 할 책임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에 의해 억압받고 심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하는 노력을 통하여 연대적 죄를 갚을 수 있다. 그리고 희생과 사랑으로 연대적 죄를 해결할 수 있다.
     
종교 경전 비유하건대, 마치 독사가 우글거리는 호수에 사는 물고기처럼, 사악한 자들의 무리 가운데 거하는 자는 그가 비록 경건하고 고결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악행으로 그 또한 더불어 고통을 겪느니라. 라마야나, 아란야 칸다 38 (힌두교)
      
하나님이 사람에게 징벌을 내리게 될 때, 그들 중 정의로운 자는 그 징벌에 부닥치게 되나, 후일 그들의 행위에 따라 부활되리라.    
부카리 및 무슬림 하디스 (이슬람)
     
너희 모두는 서로에게 보증인이 된다. 이 세상 영원토록, 너희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의 의인이 지닌 공적으로 너희 모두가 살고, 한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모든 세대가 고통을 받게 된다.      
탄후마 (유대교)
      
공평은 뒤로 제쳐놓았고    
정의는 얼씬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실은 대중 앞에서 짓밟혔고    
정직은 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실함이 종적을 감추고     
악에서 발을 뺀 자가 오히려 약탈당합니다. 이사야 59.14-15 (기독교)
      
“여호와의 노여움이 속에서 부글거려 저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거든 너의 분노를 당장 쏟아놓아라. 거리를 쏘다니는 아이들이나 젊은 녀석들의 무리나 가리지 말고 그 녀석들에게 쏟아놓아라. 그러면 아비 어미, 할미 할아버지까지 모조리 붙잡혀 가리라.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밭과 아내들도 함께 넘어가리라. 내가 친히 손을 들어 이 땅 주민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남을 뜯어먹는 놈들, 예언자 사제 할 것 없이 모두 사기나 치는 것들, 내 백성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해 주면서 ‘괜찮다, 괜찮다’ 하는구나. 사실은 괜찮은 것이 아닌데. 그렇듯이 역겨운 짓을 하면서 부끄러운 줄이나 알더냐? 부끄러워했으면 괜찮고 창피한 줄이나 알았으면 괜찮다. 그런 것들이라, 모두 무더기롤 쓰러져 죽으리라. 내가 혼내주러 오는 날 모두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예레미야 6.11-15 (기독교)
      
말씀 선집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갖고 만민을 구하기 위해 오셨는데, 그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하나의 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이 사람과 저 사람, 이 모임과 저 모임, 이 사회와 저 사회, 이 국가와 저 국가 사이에 하나이 철망같이 짜여 있는 죄라는 것이었습니다.   
(1.167, 1956.07.11)
     
미국은 수많은 사람을 주였습니다. 미국이 역사적인 죄를 전부 탕감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미국이 동양 사람을 위해야 됩니다. 인디언들을 여기서 학살하고 흑인들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들은 동양 사람입니다. 전부 오늘날 이 시대에 탕감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101.337, 1978.11.12)
     
요즘에는 운동을 하고 뛰는 데는 절반 이상이 흑인입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백인은 물러가고 흑인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만일 이 사람들 앞에 통일교회의 사상만 갖게 하면 백인은 뚝뚝 떨어집니다. 백인들이 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들은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흑인들에게 복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손해 안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흑인들은 낙심하지 마십이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도와준 사람이 흑인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흑인입니다. 끝 날이 오면 흑인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상적으로 위대한 사상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91.219, 1977.02.20)
 


이기적 욕망과 타락성
     
정념, 탐욕, 선망, 증오, 정욕, 이런 감정은 사람을 눈멀게 하고 파멸로 이끌어 영혼을 좀 먹게 한다. 대부분의 주요 종교는 지나친 욕망이나 이기적 욕망 때문에 고통과 악이 생긴다고 가르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욕망을 사성제의 두 번째 원리로 집약했고, ‘갈애’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갈애는 족쇄다. 심정에 독이 되고 마음을 현혹시키며 우리를 악행의 길에 묶어둔다.
        
모든 종교가 이기적 욕망을 해악과 여러 고통의 원인으로 보고 있지만 이기적 욕망을 인간의 심리와 연관시켜 설명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모든 종류의 욕망을, 심지어 존재 자체를 위한 욕망도 악행과 속박의 근원으로 여겨 거부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등의 일신교나 시크교와 힌두교의 일부 경전은 악한 육체적 욕망을 선을 위한 건강한 욕구 또는 하나님을 향한 욕망과 구별한다.
         
중국의 종교는 오직 지나친 욕망과 이기적인 욕망만을 비난한다. 욕망이 도(道)와 조화를 이룬다면 욕망 자체는 선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은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선을 위한 열망을 가지도록 욕망을 창조했지만 인간 타락의 결과 이기적인 것으로 변질된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아담과 이브가 타락할 당시 사탄적 성질과 태도가 그들 안에 심어졌기 때문에 이기적인 욕망은 ‘타락성’의 표현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의 본성이 타락됐고 참된 소명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을 여러 경전이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동물 수준, 심지어 그 이하로 전락되었다. 우리는 내적 모순에 포위되어 교만, 폭력, 탐욕, 그리고 정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1. 이기적 욕망과 정념
     
 종교 경전   이것이 고통의 뿌리에 대한 거룩한 진리, 곧 고성제이다. 재생으로 끌고 가는 것은 갈애요, 그것은 탐욕과 밀접하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또한 지금 저기서 펄펄 뛰는 쾌락을 구하느니, 이름하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과, 존재에 대한 갈망과, 생성에 대한 갈망과, 비존재에 대한 갈망이 그것이다.     
상윳타 니카야 56.11: 전법륜경 (불교)
          
욕망과 증오와 미혹은    
사악한 자의 가슴에서 일어나 그를 해친다.    
마치 대나무를 시들어 죽게 하는 열매가      
그 대궁에 열리듯. 이티붓타카 45 (불교)
         
시험을 당할  때 아무도 “내가 당하는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고 말하지 마시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으시지도 않고 또 사람을 시험하시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 욕심에 이끌려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야고보서 1.13-15 (기독교)
          
무엇 때문에 여러분 사이에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욕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내어도 자기 것이 되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시기해도 얻을 수 없으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1-3 (기독교)
         
아르주나가 말했다. 오, 크리슈나여! 무엇에 내몰리어, 스스로 원치 않을지라도 악을 행하게 됩니까? 마치 무력으로 강요하듯이 우리를 내몰아 대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주께서 말씀하셨다. 격정에서 일어나는 욕망이 그것이며 분노가 또한 그것이니라. 알지어다! 이들이 만인을 위협하는 적임을.    
불꽃이 연기에 휩싸여 가려지듯, 거울이 먼지로 더러워지듯, 태아가 자궁 속 깊은 곳에 막으로 덮여 있듯, 그와 같이 이 세계는 욕망으로 가려져 있나니 이는 지혜의 뿌리 깊은 숙적이니라.    
이 영원한 적에 의해 모든 감각과 의근이 미혹에 허덕이며, 지혜는 가려져 있나니.     
바가바드기타 3.36-40 (힌두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논어 9.17 (유교)
        
여자가 유혹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아니,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     
돈이 유혹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토지가 유혹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진짜 유혹물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다.     
오, 주 구헤스와라여! 알라마 푸라부, 바차나 91 (힌두교)
         
이 몸에 숨은 도적이 다섯이니    
색욕, 분노, 탐욕, 집착, 이기심이 그것이라.    
아디 그란트, 소라트, M.3, p.600 (시크교)
          
그물에 걸리듯 감각적 쾌락에 눈멀고    
갈애의 덮개로 씌워져     
죽음 그물의 아가리 속에 든 물고기처럼    
스스로 삼가지 못한 이들,    
그들은 늙음과 죽음의 여정에 몸을 맡긴다.   
마치 젖먹이 송아지가 어미를 따라가듯.  우다니 75-76 (불교)

     
 말씀 선집   
     
우리 경계선 가운데 제일 위험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곁길로 가기 쉬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살이에 있어서 무엇이냐 이겁니다. 가만히 한번 꼽아 봅시다. 그것은 외적과 내적으로 우리가 기를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보게 되면 상대적 관계에서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뭣인가 한번 꼽아 봅시다. 그게 뭡니까? 돈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엔 무엇이냐 하면 권력입니다. 대개 이렇게 잡습니다. 그러한 돈이라는 것이 나를 잡아당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뭣 때문에 끌려가느냐? 내가 거기에 유혹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내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바로 욕심,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욕심이냐? 이 욕심은 나쁩니다. 나를 위한 욕심입니다.  (90.12. 1976.12.05)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래의 의미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그 욕망이 선보다도 악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를 맺는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심은 이러한 욕망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악을 지향하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어두움을 헤치고 생명의 빛을 찾아 고달픈 길을 더듬고 있는 인생이다. 옳지 못한 욕망을 따라가서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누려본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욕망을 채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게 된다. 자식에게 악을 가르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제자에게 옳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어디 있을 것인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심에서 오는 것이다. (원리강론, 총서)
          
인간은 하나님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기뻐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시기 질투 교만과 같은 타락성으로 결함 있는 실체라면 어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기뻐하실 수 있겠는가? (뜻 길, p.194)
         
외적인 몸을 중심삼은 사랑이 내적인 마음을 중심삼고 이상적인 영원한 생명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여 나오는 역사의 결과가 빚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외적인 사랑, 즉 사탄의 사랑을 제거하고 거기에 본연의 내적인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상속받아서 몸과 마음을 규합시켜야 됩니다. (20.179, 1968.06.09)
     
2. 타락성
     
 종교 경전   
     
하나님은 사람을 순하게 만드셨는데 사람들은 공연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전도서 7.29 (기독교)
          
미망과 카르마의 힘은 실로 악마가 내몬 것이니, 본래 청정한 사람의 마음이 온갖 사악함을 즐거워하도록 유도한다.    
쿤다쿤다, 판차스티카야 38 (자이나교)
          
사탄이 말하였다. “나는 당신 종복 중에서 일부를 데려가, 그들을 방황케 하고 그들에게 그릇된 욕망을 심어줄 것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하나님의 참된 피조물을 변질되게 하리라” 하더라. 그러나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탄을 벗으로 택하는 자는 누구든 실로 명백한 손실을 맛보리라. 사탄은 그들에게 약속하여 그릇된 욕망을 심어 줄 것이나, 그의 약속은 기만에 불과하리라.     
꾸란 4.118-120 (이슬람)
         
무시이래로 축적된 거짓된 감각으로 너의 마음이 병들고 미혹되어, 온갖 욕망과 집착과 나쁜 습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미혹된 마음에서 진아와 비아, 혹은 참과 거짓에 대한 자의적인 상념이 생사윤회의 영원한 흐름을 따라 일어났다. 이러한 그릇된 상념은 너의 본마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감관이 만들어낸 이전의 거짓된 망상 때문에 그릇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본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미혹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수능엄삼매경 (불교)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극히 작다. [사람은 천성으로 인의의 덕을 지니고 있다.] 일반 사람들은 천성의 인의를 내버리고 오직 군자만이 그것을 잘 간직한다.     
맹자 IV. A.19 (유교)
          
사람의 마음은 세상 어떤 것보다도 거짓으로 가득차 있고, 절망적일 정도로 부패해 있다. 누가 이런 사실을 알 수 있겠느냐? 예레미야 17.9 (기독교)
        
하나님께서 그분의 징표를 준 사람의 소식을 그들에게 낭송하여 전하라. 그러나 그는 그 말씀들을 흘려버리니, 사탄이 그를 유혹하여 방황하는 자가 되었느니라. 하나님이 뜻하신다면 하나님은 그를 들어올릴 수 있었지만 그는 속세에 기울어 그의 욕망을 따랐음이라. 그리하여 그를 한 마리의 개에 비유하였으니, 만약 그대가 개를 내쫓아도 그 개는 혀를 내밀고, 그대가 그 개를 내버려두어도 그의 혀를 내밀고 있음이라. 이는 하나님의 징표를 믿지 않는 자와 같음이라···.    
그들은 마음을 가졌으나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가졌으나 이를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도다. 그들은 짐승과 같이 더욱 방황하게 되리니, 그들이야말로 부주의한 자들이니라. 
꾸란 7.175-179 (이슬람)
          
한 점 신의 사랑도     
불태우지 않는 저 사람,    
나나크여, 알지라. 그의 속세의 옷은     
개나 돼지의 그것보다 조금도 낫지 않음을!    
아디 그란트, 샬로크, M.9, p.1428 (시크교)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 준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  이사야 1.2-3 (기독교)
         
 말씀 선집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실현하시려는 인류역사의 첫날,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은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류의 조상이 될 일남일녀(一男一女)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이ㅡ 성전이 되지 못하고 악마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악마는 이기주의의 본산입니다.   
 (219.116-117, 1991.08.28)
         
타락된 인간은 만물보다 거짓된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다(렘 17:9).    
 (원리강론, 후편 서론 1.2.1)
         
여러분, 대양을 다니는 큰 배가 파손될 위험이 생기게 될 때, 그 배 안에 살던 쥐새끼들이 전부 닻줄을 타고 육지로 도망간다는 얘기 들어 봤습니까? 미물에 지나지 않는 동물도 미래의 자기 생사권을 가져갈 줄 아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꼴뚜기 새끼와 같이 되었습니다. (215.53, 1991.02.06)
        
내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완전히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이 갈라져서 한번도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본질적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중심삼은 사랑의 세계에는 교육이 없습니다. 스승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스승입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벌써 아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 되면 우주가 딱···. 전부 우주의 축소체입니다. 다 아는 것입니다.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윤리 도덕이 필요 없습니다. 보십시오. 동물의 세계에 무슨 윤리 도덕 교육을 합니까? 자기들끼리 다 보호하고, 생리적으로 자기 족속을 연결시켜서 살 줄 아는데, 만물의 영장은 왜 그렇습니까? 타락했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162.223, 1987.04.12)
         
우리는 타락성을 갖고 있습니다. 타락성의 4대 조건이 무엇입니까? 교만과 시기와 혈기와 거짓입니다. 교만, 질투, 혈기, 거짓, 이것이 타락성입니다. 여러분도 그걸 벗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150.126-127, 1960.09.04)
          
타락성 본성이 생기게 된 근본 동기는 천사장이 아담에 대하여 질투심을 갖게 된 데 있었다. 그러면 선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된 천사장에서 어떻게 되어 사랑에 대한 질투심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인가? 원래 천사장에게도 그의 창조본성으로 욕망과 지능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천사장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오는 그것보다 크다는 것을 비교하여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며, 또 그에게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자동적으로 질투심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투심은 창조본성으로부터 유발되는 불가피한 부산물로서, 마치 빛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물체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완성되면 이러한 부수적인 욕망으로 인하여서는 결코 타락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을 충당함으로써 일어나는 자기 파멸에 대한 고통이 더 클 것을 실감하게 됨으로써, 그러한 범행은 감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락성 본성을 대별하면 넷으로 가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사장이 타락하게 딘 동기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도리어 시기하여 해와의 사랑을 유린한데 있었다. 군왕이 사랑하는 신하를 그의 동료가 그 군왕과 같은 입장에서 같이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는 성품은 바로 이런 타락성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의 위치를 떠나는 것이다. 누시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하여, 천사세계에서 가졌던 것과 동일한 사랑의 위치를 인간세계에 있어서도 가지려 하였던 불의의 욕망으로 인하여, 자기의 위치를 떠나 타락하게 되었다. 불의한 감정으로 자기의 분수와 위치를 떠나 행동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타락성 본성의 발로인 것이다. 
          
셋째는 주관성을 전도하는 것이다. 인간의 주관을 받아야 할 천사가 거꾸로 해와를 주관하였고, 또 아담의 주관을 받아야 할 해와가 거꾸로 아담을 주관하게 된 데서 타락의 결과가 생겼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위치를 떠나서 주관성을 뒤바꾸는 데서부터 인간사회의 질서는 문란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이러한 타락성본성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넷째는 범죄행위를 번식하는 것이다. 만일 해와가 타락한 후에 자기의 범죄를 아담에게 번식시키지 않았다면 아담은 타락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해와만의 복귀는 용이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해와는 이와 반대로 자기의 죄를 아담에게도 번식시켜 그를 타락케 하였다. 악인들이 동료를 번식시키려는 성품은 이와 같은 타락성 본성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원리강론, 타락론 4.6)
         
이제 모든 타락성 근성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먼저 소유권, 자기를 중심삼은 소유욕으로 출발하였고, 그 다음에는 거짓말을 하였고, 그 다음에는 부조리한 정조의 길을 갔고, 그 다음에는 모든 하늘의 것을 빼앗는 강탈의 길을 갔고, 그 다음에 아들시대에 와서는 죽이는 길을 갔습니다.
          
역사시대의 모든 독재자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거짓말 한 자요, 불륜적인 사랑의 길을 마음대로 행한 자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강탈한 자요, 모든 선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인 자들임을 생각할 때, 이와 같은 역사적인 오점의 길을 저희들은 가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사랑으로 소화시키는 하늘의 전통을 고이 이어받아 자기 스스로 싸우기를 원하옵니다.    
 (121.257-258, 1982.10.27)


     
내적 투쟁
        
현실적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내적 충돌 현상에 직면해 있다. 인간이 이러한 내적 모순에 사로잡혀 있는 한, 신성적 자아를 실현할 수 없으며 온전한 상태를 이룰 수도 없다. 역설적으로 세속의 삶에 빠진 인간은 뚜렷한 죄의식을 제외하고는 그들 내부의 싸움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살아 갈 것이다. 반면, 양심적인 삶이나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문선명 선생은 인간의 내적 모순은 인간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가르친다. 그는 하나님이 그런 모순을 가진 인간을 창조할 리가 없으며,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선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인간도 완성을 이룰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간의 내적 모순은 타락으로 인해 인간성이 왜곡됐다는 증거다. 타락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투쟁도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종교 경전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장본인은 나 자신이라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죄일 것입니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욕은 내게 있으나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행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선을 행하려는 내게 악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으나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가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로마서 7.15-24 (기독교)
          
나는 무엇이 선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을 애써 행하지 않으며,
무엇이 악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또한 그것을 금하려 하지 않도다.    
마치 내 가슴에 어떤 거룩한 혼이 있어 나를 내몰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언제나 그렇게 행하느니    
오호라, 나는 몹쓸 사람이로다. 마하바라타 (힌두교)
      
랍비 이삭이 말하였다. “사람이 악으로 기울기 쉬운 경향은 날마다 새로운 변화를 가지면서 사람을 괴롭힌다. 그래서 성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 된 생각만 하였다.’ ”(창세기 6:5). 그리고 레위의 아들인 랍비 시므온은 이렇게 말하였다. “악을 지향하는 마음은 날마다 사람에 대하여 항거할 강력한 힘을 모은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려고 애를 쓴다. 만약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악을 행하는 세력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분께 큰 축복이 있기를.”     
탈무드, 키두신 30b(유대교)
     
천신, 인간, 아수라, 야차, 건달마, 그리고 일체의 중생들이 시기와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에, 비록 그들이 “우리가 의좋게 미워하지 않으며 해치거나 악의를 품는 일 없이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할지라도, 여전히 증오와 악의와 원한에 찬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다.     
디가 니카야 2.276 (불교)
     
모든 사악은 목에 채워진 쇠사슬과 다르지 않다.    
아디 그란트, 소라트, M.1, (시크교)
     
적과 적이 서로 치고받으며 싸우고 원수끼리 물어뜯으며 싸운다 해도 사악한 마음이 저지르는 해악보다는 그래도 덜하다. 법구경 42 (불교)
     
실로 하나님은 조금도 인간을 잘못되게 하지 않으시나 인간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도다.  
꾸란 10.44 (이슬람)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마태복음 26.41 (기독교)
     
자신의 영원한 실재를 알고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기의 벗이며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기의 적인 까닭이다.
      
드높은 자아로 자기를 정복할 때    
친구로서의 자아를 지니지만,    
만일 스스로 영원한 자아의 실재를 그칠 때    
자아는 실로 적과 같이 대항해 오리라.  바가바드기타 6.5-6 (힌두교)
          
예언자가 선포했다. “우리는 작은 성전(聖戰, 알지하드 알-아스가르)에서 큰 성전(알 지하드 알-아크바르)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하나님의 예언자시여, 무엇이 더 큰 성전입니까?‘ 하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약한 자신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니라.“
         
 말씀 선집    
     
사람은 본래 악을 피하고 선을 추구해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선한 세계를 세우고 악한 세계를 제거하기 위하여 언제나 달려가고 있지만, 그 반면 내 자신 속에서 악한 마음이 선한 마음을 향하여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우리가 잘 느끼고 있습니다. 선한 마음을 강하게 들고 나오면 나올 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악한 마음이 언제나 대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6.51, 1970.11.15)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의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그 욕망이 선보다도 악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를 맺는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심은 이러한 욕망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악을 지향하려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본심이 지향하는 욕망을 따라 선을 이루려는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도인들의 생활이지만,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본심대로만 살다 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 라고 하였으며, 또 인간의 이러한 참경에 직면하였던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2-24)라고 개탄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선한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것과는 반대로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심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상반된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간의 모순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 모순성을 갖게 될 때에는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된 인간 자체는 바로 파멸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존재도 모순성을 내포하고서 생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지닌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상태를 일컬어 기독교에서는 타락이라고 한다.    
(원리강론, 총서)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마음입니다. 양심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하늘의 의를 위해 존재합니다. 양심은 항상 선을 향해 달리려 합니다.여기에 몸은 반항을 합니다. 몸은 자기만 편하고자 하고, 이기적이며, 본능적 요구에 따라 욕망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양심은 이 몸을 질책하여 마음에 순응케 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항상 피나는 갈등과 투쟁이 한 몸 안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219.118, 1991.08.28)

     
지금 우리의 생명의 씨를 어디서 받았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받았습니까, 사탄에게서 받았습니까? 사탄에게서 받았다는 것을 어느 눅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심은 사탄의 씨가 아니라 본연의 이상적인 생명의 씨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상충이 벌어졌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 편에 서고 몸뚱이는 사탄 편에 서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몸 마음의 통일을 가져오지 않는 한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235.203, 1999.09.20)
          
인류역사에 종교가 필요하다면 그 종교로 말미암아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 육신을 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역사가 망했고, 육신으로 말미암아 사회가 망했고, 육신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육신은 원수의 모태요, 죄악의 근본 뿌리라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18.322, 1967.08.13)
     
나, 나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수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과 몸이 하나 못 된 것이 원수입니다. (128.108, 1983.06.05)
     
이 몸뚱이는 사탄의 무대가 되어 있습니다. 몸뚱이는 사탄의 무도장이 되어 있고, 마음은 하나님의 무도장이 되어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몸 마음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혈통을 중심삼고 자연히 하나 되는 것입니다.    
(235.203, 1992.09.20)

    
대부분의 종교가 인간 삶에서 무지를 악의 근원의 하나라고 여긴다. 하나님과 인생의 목적에 대해 무지하면 인간 가치에 혼동을 야기하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모든 형태의 방종과 부도덕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이슬람에서는 ‘알라를 망각’ 하면 사람들이 인생행로에서 벗어나고 영혼을 잃게 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무지가 자아를 미망으로 이끌고 결국 망상(모하)을 갖게 한다고 가르친다. 많은 경전들이 세속적 삶을 오염시키는 환상적 목표와 허영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사람이 지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철학을 접하게 되는데, 분명히 말해서 어떤 철학도 진리를 완벽하게 밝히지 못한다. 타당한 통찰이라도 잘못된 견해가 섞여 있어서 가치의 혼란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고, 회의주의와 무신론으로 이끄는 경우도 있다. 문선명 선생에 의하면 이는 인간 타락에서 유래한 근본적 무지의 결과다. 공산주의와 투쟁을 해온 20세기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특히 이런 현대적 형태의 무지인 공산주의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여기의 결론 부분의 구절들은 인간의 영적 무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구절들에서 무지는 통찰력을 흐리게 하는 가리개로 묘사한다. 부처는 나방이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것처럼 사람들이 이 세상의 환상적 허무에 빠져든다는 비유를 사용하였다.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이러한 무지(아비댜)는 사람들을 생과 사의 수레바퀴(삼사라)에 묶이게 하며 궁극적 실재를 찾는 대신 쾌락을 추구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는 이 주제에 대해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문선명 선생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만연한 무지는 인간을 영적 진리에 눈멀게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알 수 없게 한다고 말한다.
     
1. 하나님에 관한 무지
    
종교 경전 
     
하나님을 망각하는 자들처럼 되지 말라. 만일 그리하면 그분은 그들 자신의 영혼을 망각하도록 하느니라. 꾸란 59.19 (이슬람)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지 않고 감사도 드리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허황하여 그 분간 없는 마음이 어두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고 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자가 되어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발 가진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 욕정대로 서로 자기들의 몸을 욕되게 하며 더럽히는 것을 그들의 자유에 맡겨 두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숭배하며 섬겼습니다. 그러나 영원하도록 찬송을 받으실 분은 창조주 뿐입니다. 로마서 1.21-25(기독교)
     
어리석은 자들, 제 속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들 하면서, 썩은 일, 추한 일에 모두 빠져서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여호와,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보시며 혹시나 슬기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 찾는 자 혹시라도 있는지 이러저리 두루 살피시지만 모두들 딴길 찾아 벗어나서 한결같이 썩은 일에 마음 모두어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언제나 깨달으랴, 저 악한들.
떡 먹듯 나의 백성 집어삼키고 하나님은 부르지도 않는구나. 
시편 14.1-4 (기독교)
       
누구든지 다른 이에 대하여 악을 행하려는 자는 신을 기억하지 않는다.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하늘을 알지 못하는 자는 덕에 대해서도 순수하지 못하다. 도에 통달하지 못한 자는 어떤 일도 잘 하지 못한다. 도를 알지 못하는 자는 불쌍하구나! 
장자 11 (도교)
         
하나님을 부정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감히 거짓말을 못할 것이다. 안식일에 랍비 르우벤이 티베리아에 있을 때 한 철학자가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스런 사람은 누구입니까?” 랍비 루우벤이 대답하였다. “창조주를 부정하는 사람이다.” 철학자가 “어째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랍비 르우벤이 대답하였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결코 살인하지 않을 것이며, 간음하지 않을 것이며,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에게 거짓 증언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기 전에 이러한 십계명을 부정하는 자는 결코 없는 법이다. 십계명의 내용과 같은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는 자는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토세프타 셰부오트 3.6 (유대교)
         
악귀적인 사람은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은 하며,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순결도 선행도 진리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도 천칙도 도덕이나 윤리도 없다. 육적 쾌락이야말로 인생의 전부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견해를 고집하면서 미망에 빠진자들은 보잘것없는 지혜로써 악한 마음으로 잔인한 행위들을 일삼으니 그들은 결국 세상을 파멸시키는 세상의 적이 된다.
위선과 자만, 그리고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미망 속에 살며, 채워질 줄 모르는 욕망을 좇아 부정한 목적으로 만사를 행한다. 오직 죽음으로써 끝이 날 한없는 근심에 자신을 맡기고서도 욕망의 충족을 최고로 삼아 이것뿐이라고 확신한다.
온갖 음모와 근심의 사슬에 얽매이고 노여움과 탐욕에 이끌리여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부정한 수단으로 재물을 쌓으려 애쓴다.
그들은 말한다. “오늘은 이것을 얻었고 내일은 저것을 얻으리라. 이것은 내 것이며 저것도 또한 내 것이 되리라. 저 적은 내가 멸하였고 다른 적들도 또한 멸하리라! 나는 신과 같지 않은가?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도다. 나는 성공한 자요 강한 자니 행복한 자로다. 나는 부자이며 고귀한 사람이니, 나와 견줄 자 감히 누군가? 나는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칠 것이며 자선을 베풀리라.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의 관용을 즐기리라.” 무지에 의해 미혹된 자들의 행위는 이러하다. 자신의 탐욕에 얽매이고 미망의 그물에 걸려 육욕을 탐닉하는 그들은 어두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리라.
바가바드기타 16.7-16 (힌두교)
         
말씀 선집 
     
지금까지의 출발 기준이 무지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이라든가 인간의 정착 기지가 가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으로부터 세계까지 엉망진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325.220, 2000.07.01)
     
일반인들에게는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먹느냐, 어떻게 차리고 사느냐 하는 문제, 이것이 중심입니다. 물론 인간관계에서 인륜도덕에서 서로가 발전하고 좋을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민족과 국가와 세계의 문화 배경의 차이에 따라서 도덕 기준이라든가 사회제도가 전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된다면 오늘날 역사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가야 할 본연의 기준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표준으로 세워 나가는 인륜 도덕들이 여러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로 수습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본래 인간이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살다가 본래의 갈 길, 본연의 세계에 근거해서 우리가 태어나 가지고 살다가 가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이것이 확실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영계가 있는지 없는지,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140.122-123, 1986.02.09)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고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다 보니, 그들이 세워 놓은 이상적 환경에서 죽기 전에 누구보다도 잘살아 보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세계적인 환경에서 행동을 해보고, 한번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향락에 떨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윤리, 도덕 등 모든 것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가치관의 상실이라는 것도 유만부동이지, 역사적 전통까지도 거부하고, 가정의 부모와 형제 부부라는 가정제도까지 전부 파탄시켜 놓았습니다. 모두 개인적 향락을 위해 모든 상대적 여건을 제거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의 향락을 즐기려는 데 부모가 있어서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향락의 길을 걸어가려는데 그 여편네가 있어서 반대하니 여편네를 얻지 않는 것입니다. 전부 다 하루하루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172.15-16, 1988.01.03)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지향하는 하나의 목적세계, 하나의 이상세계를 실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그와 같이 모르는 자리에서 타락한 선조를 중심삼고 대를 이어 태어난 인간들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140.14, 1986.02.01)
         
인간이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 양면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 있어서도 내외 양면의 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생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내세와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 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무지이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물질세계의 근본은 무엇이며, 그 모든 현상은 각각 어떠한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원리강론, 총서)
         
영적인 무지는 종교로써 타락인간 가운데 잠재해 있는 그 본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이 보이지 않는 원인적인 세계를 찾아 나아감에 따라 점차 일깨워져 왔다. 그러나 종교는 누구나가 다 긴절한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면의 계발은 어느 특수한 인간에 있어서는 비약적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대단히 완만한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영적인 면에서는 고대인이나 대차 없는 인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원리강론,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연장시대 7.2.2)
     
미국에 와서 놀란 것은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 제기랄)’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쁜 말을 할 때나 놀랄 때나 욕할 때 ‘지저스 크라이스트!’ 하는데 그것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복 준다는 말입니까, 화 준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생각과 자기들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젊은 놈들은 전부 연애하고 성개방이니 뭐니 해가지고 마음대로 놀고 싶은데 하나님은 안 된다고 하니 좋아하지 않습니다.
(91.22, 1977.01.16)

     
2. 잘못된 견해
        
종교 경전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
이사야 5.20 (기독교)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릇된 소견을 지닌 자들은 죽어 악도에 떨어진다.
두려울 것 없는데 두려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바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릇된 소견을 지닌 자들은 죽어 악도에 떨어진다.
잘못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잘못이 있는데 없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소견을 지닌 자들은 죽어 악도에 떨어진다. 법구경 316-318 (불교)
         
도가 없어지자 후에 덕이 있게 되었고,
덕이 없어지자 후에 인이 있게 되었고,
인이 없어지자 후에 의가 있게 되었고,
의가 없어지자 후에 예가 있게 되었고,
예는 충과 신이 희박해져서 나타난 것이며, 모든 혼란의 시초이다. 
도덕경 38 (도교)
         
말씀 선집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랴. (원리강론, 총서)
         
인간이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살아야 하고, 일일의 생활을 주도 받아야 할 입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혹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없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죽었다. 우리 인간세계에서 하나님을 쓸어 버려야 되겠다’ 고 하는 비참한 역사적인 환경이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계에 전개되어 왔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만들었습니까, 우리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135.268, 1985.12.15)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심각한 문제점들, 가치 체계의 혼란, 도덕적 퇴폐, 마약과 테러, 전쟁과 대량학살, 인종문제, 인권과 부의 균배문제, 무신론에 입각한 공산주의 문제 등등 수많은 병폐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신을 떠난 인류가 무신론에 입각한 물본주의(物本主義), 무신론에 입각한 세속적인 인본주의, 향략주의 등에 편승하여 당도한 세기말적인 종착점입니다. 이 모두는 이 세대의 정신적·영적 고갈과 신앙심의 쇠퇴에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135.221, 1985.11.16)
        
나는 인본주의를 송두리째 배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인본주의가 철저한 무신론에 입각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창조주의 창조의 의의가 부인되면 인간은 한줌의 흙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기껏해야 인간은 하나의 기계로 간주될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범한 오류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도 없으니 인간은 기계나 동물과 다를 바 없고, 거기에 도덕이 있을 수 없고, 영혼이나 영생을 인정하지 않으니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무책임해지고,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갖은 포학을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34.232, 1992.08.22)
        
3. 영적 무분별과 환상
         
종교 경전 
     
불신자들은··· 넓고 깊은 바다의 암흑 속에 심연과 같으니라. 파도 위에 파도가 그 위를 덮으며, 구름이 덮이고 암흑의 층이 겹치도다. 그가 손을 내밀어도 그것을 볼 수 없나니,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지 못한 자, 그에게는 아무런 빛도 없느니라.
꾸란 24.40 (이슬람)
          
이 세상은 깜깜한 어둠 속과 같아 여기서 명료하게 가려보고 아는 이가 드물다. 그물에서 벗어나는 새가 드물 듯이 천상에 오르는 이가 심히 적다. 법구경 174 (불교)
         
이 광대무변한 우주는 하나의 수레바퀴, 브라흐만의 수레바퀴라. 생사윤회 하는 일체만유가 그 위에 있나니, 돌고 돌아 멈추어 서지 않도다. 개아가 스스로 주에게서 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한, 생사 윤회의 사슬에 얽매여 영원히 그 수레바퀴를 돌고 돌 것이니라.
무상한 것과 영원한 것, 나타나 보이는 것과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진 이 우주를 강대한 주가 지탱하고 있나니, 개아는 주를 망각한 채 쾌락을 탐하여 속박 속에 있도다.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 1.6-8 (힌두교)
        
어느 때 세존께서 사밧티 교외의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먹을 뿌린 듯 어두운 가운데 등불이 타오르는 곳에 앉아 계셨다. 온갖 부나비들이 타오르는 등불 속에 날아들어 몸을 태워 죽으며 다시없는 재난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시던 세존께서 그 속에 담긴 뜻을 헤아려 아시고 이러한 우다나를 노래하셨다.
사람들이 허둥대며 휙휙 지나가지만 
그 본질에 이르지는 못하네.
점점 새로운 속박을 더할 뿐
등불에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뛰어드는구나. 우디나 72 (불교)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럽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생각과 양심까지도 다 더러워졌습니다. 
디도서 1.15(기독교)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생각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까닭입니다.
고린도후서 4.4 (기독교)
          
어둠 속에 살고 있지만 스스로 지혜롭고 박식하다고 생각하는 바보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 온통 비뚫어지고 그릇된 길을 따라 끝없이 돌고 도는구나.
카타 우파니샤드 1.2.5 (힌두교)
        
말씀 선집 
     
여러분 중에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절망의 구렁 가운데 사로잡힌 자가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상세계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또, 흑암 속에서 상하, 전후,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무질서한 혼미와 와중에서 중심을 망각하며 천륜의 법도를 유린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도 역시 천성의 이상동산과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2.246-247, 1957.06.09)
         
천지가 캄캄해지고 지옥으로 변해 버려 하나님까지도 없어져 버린 처절한 세계가 되어 버린 사실은 인간은 지금까지도 모르고 살아온 것입니다. 원수의 핏줄이 생명선인 줄 착각하고 거기에 목을 걸고 살아가는 군상들이 오늘 타락의 후예 된 인류의 처량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지상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비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가슴이 얼마나 비통하셨겠습니까?
(평화신경, 평화메시지 1.18, 2005.09.12)
         
60억 인류가 청맹과니가 되어 한 치 앞을 못 보면서도 하늘의 진리를 놓고는 모두가 분명하지 못한 철학자나 신학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가슴에 한을 심어 나온 역사였습니다.
(447.165-166, 2004.05.01)
         
불행하게도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영적 오관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면서 살고, 육적 오관을 통해서는 만물을 자유자재로 주관하며 동시에 영계와 육계를 대표한 참된 주인이요, 참된 부모요, 참된 왕이 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으로 인해 영적 오관이 완전히 마비가 되어 버린 청맹과니의 입장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육적 오관에만 의지하고 살아야 할 반쪽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모되는 하나님을 볼 수도, 음성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게 되었으니 어찌 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으며, 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433.193, 2004.01.27)
     
인간들에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은 아버지의 사랑과 인연 맺지 못한 것이요,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본연의 양심을 잃어버린 것이며, 그 심정과 양심이 화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 화합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한 것임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타락한 연고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감각이 저희에게서 떠나갔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여 만상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저희들에게서 없어졌사오니, 아버지, 그 심정을 회복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6.298-299, 1959.06.14)
  


우상숭배와 물본주의
         
문자 그대로 형상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대체한 거짓 가치에 맹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꾸란에서 우상은 악령과 사탄으로 간주되며, 이들을 숭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다. 성서에서 우상은 인간의 가공물이며 신성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는 물질주의의 한 형태이며 역으로 인간의 권력이나 부에 대한 잘못된 의존도 우상숭배의 한 형태다. 우상숭배를 보다 영적인 개념으로 보면 이기주의와 세속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잘못된 실재와 연결되면 우리를 참된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성서의 금송아지 이야기는 주신제 의식에 따른 우상숭배를 기술한 것이다.
        
20세기에 민족주의, 인종주의, 특히 물질주의 우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사로잡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문선명 선생은 물질주의를 현대의 우상숭배라고 명백히 지적하고 하나님의 가장 큰 ‘골칫거리’의 하나로 간주한다. 이 주제에 대한 문선명 선생의 고전적 경전의 가르침에 대한 현대적 가르침이다.
          
종교 경전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 아자르에게 말하였을 때(를 기억하라), 아버지께서는 우상을 신으로 삼으시나이까?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백성들이 커다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을 아옵니다. 꾸란 6.74 (이슬람)
     
우상의 혐오스러움을 피하고 거짓된 말을 피하라. 하나님을 숭배하고 그분과 어떤 것도 관련시키지 말라. 하나님에게 무엇이든지 관련시키는 자는 하늘에서 떨어져 새가 낚아채거나 바람이 휩쓸어 버릴 것이니라. 꾸란 22.30-31 (이슬람)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어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은 사람이 은붙이 금붙이로 만든것,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런 것을 만들고 의지하는 자들도 모두 그와 같으리라. 
시편 115.3-8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뱃속을 하나님으로 삼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 생각합니다. 빌립보서 3.18-19 (기독교) 
 
너희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교도의 신을 예배하지 말라[시편 81.10]. 사람의 육체 속에서 ‘다른 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악마적인 충동이다.
탈무드, 샤바트 105b (유대교)
     
자기 뜻대로 우상을 두는 자를 그대가 보리니, 하나님은 그를 방황케 하시고, 그의 귀와 마음을 봉하여 버리고, 눈을 덮어 버렸도다. 하나님 외에 누가 그를 인도하리오! 그럼에도 너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느냐? 꾸란 45.23 (이슬람)
 
백성들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아론에게 몰려와 청하였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너희 아내와 아들달의 귀에 걸린 금고리를 나에게 가져오라” 하고 대답하자 백성이 모두 저희 귀에 걸린 금고리를 떼어내어 아론에게 가져 왔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수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고 모두들에게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어 온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 그 신상 앞에 제단을 만들고 “내일 여호와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하고 선포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친교제물을 바쳤다. 그러고 나서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 출애급기 32.1-6 (기독교
     
말씀 선집 

    
우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을 저버리고 다른 무엇을 숭상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문명이라는 우상 아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은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물질을 우상화하고 그 문명의 노예가 되어, 자기의 생명의 중심이 어디 있으며 자기가 갈 방향과 위치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고 있으며, 하늘을 찾아가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는 옛날 아합왕에게 사로잡힌 이스라엘 무리와 같습니다. (6.31. 1959.03.15)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이냐? 마음을 중심삼아야 하는데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지도 않는 물질주의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교육 현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전부 물질문명 위주의 교육에 치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하고 훌륭한 이 마음을 눈에 보이는 돈 때문에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제는 마음이 없다고 부정하는 자리, 그리고 하나님도 없다고 부정하는 자리까지 흘러가고 있습니다.
(19.287, 1968.03.10)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뭐냐 하면, 이상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진리세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주의니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신본주의입니다. 신본주의가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인본주의가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물본주의가 떨어져 나왔습니다. 전부 갈라놓은 것입니다. 전부 갈라놓고 죽여 버렸습니다. 없애버렸습니다. 이것만 남았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사람에게는 물질이 있고, 마음이 있고, 영(靈)이 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는 물질이 있고, 인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신이 같이 하나 되었어야 할 텐데, 하나 못 된 것입니다. 이것만 하려니 사람에게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필요하고, 인본주의도 필요하고, 물본주의도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갈라져서는 안 됩니다. 전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종교는 이런 것을 포괄한 하나의 자리에서 이러한 모든 것을 갖추어 가지고 전체를 이루어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연결돼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문화의 수준과 정도가 높으니, 물질보다 인간이 높고 인간보다 하나님이 높으니, 전부 하나님께 지배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배받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 신본주의를 중심삼고 인간을 무시했습니다. (인간을) 무시하니 휴머니즘이 나온 것입니다. 또, 지금은 휴머니즘을 중심삼고 신본주의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이 휴머니즘도 물질을 중심삼고 전부 떨어져 내려 가고 있습니다. 인본주의자들은 돈이면 전부라는 것입니다. 사람이고 뭣이고 인간이고 뭐 가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제일이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주의세계에서 살아보고 ‘물질이 만능이 아니라 사람이 필요하다. 인간 본성을 찾아야 되겠다’ 고 지금 그러고 있는 현실입니다. 부딪치게 되니 지금은 다시 인간을 찾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전부 물질을 중요시하고 돈 벌다 보니, 공산주의가 와서 공산주의 좋다고 해서 전부 해줘보니, 아무것도 아니고 일하나마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이기 때문에 ‘아이구, 인간이 무엇이냐’ 하며 도리어 모든 것이 파탄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부가 세금으로 빼앗아 가지, 뭐 전부 나라가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인간이 뭐냐? 인간을 찾아보자. 아이고, 그러려니 신이 다시 필요하다’ 이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때가 그럴 수 있는 경계선에 들어왔습니다. 요즘 미국 청년들이 그러잖아요? 히피, 이피, 별의 별 놀음 다 해보고 종교를 찾아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이구, 사람이 무엇이냐? 인간의 가치가 뭐냐?’ 그리하여 종교를 다시 찾아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103.227-228, 1979.03.01)    

 


 고통
     
부처의 사성제 중 첫째는 인간 존재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고통은 잘못된 집착을 통한 자아로부터 생기는 일종의 질병과 같은 인간의 조건이다. 다른 경전처럼 불경은 고통을 이 세상을 뒤덮은 우주적 불이라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힌두교에 의하면 인간은 과거 행위의 결과에 따라 삶과 죽음의 끝없는 순환을 거치게 되어 있다.
         
성서에서 여러 측면에서 불교 경전과 같은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전도서는 인간의 일이 헛되다는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욕망을 다 충족시키는 사람은 없으며, 일단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이와 유사한 것이 중국 경전에도 있는데 중국 경전은 사람이 가장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사람의 행동은 격렬해지거나 배반하거나 폭력적으로 끝나게 된다고 기술한다.
       
기독교의 원죄론도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인생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비슷한 견해를 전달하고 있다. 문선명 선생은 끝없는 불행에 빠진 인간 타락에 대해 슬퍼하며 인간 타락이 가져온 결과를 설명한다.
           
1. 슬픔의 세계 
        
종교 경전 
     
고성제란 다음과 같다. 태어남이 고통이요, 늙음이 고통이요, 질병이 고통이요, 죽음이 고통이요, 슬픔과 괴로움과 절망이 또한 고통이라,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것이 고통이요, 원한 있는 이와 만나는 것이 고통이요, 바라는 바가 채워지지 않음이 고통이라. 필경 집착으로 가득한 오온은 본래 고통이라.
상윳타 니카야 56.11 (불교)
          
땅에서 불행이 솟아나는 일 없고 흙에서 재앙이 돋아나는 일도 없으니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내는 것, 불이 불티를 높이 날리는 것과 같다네.
욥기 5.6-7 (기독교)     
     
이 세상은 감관들의 접촉으로 불타오르며 고뇌에 빠져 스스로 한탄하네.
내 것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이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무상하리라.
변하여 다른 것이 되는 것 그것이 만유의 본성인 것을 그러나 그 속에 빠져 즐거워하네.
기쁨 속에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을 품은 것은 무엇이나 고통이라.
우다나 32 (불교)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불타고 있는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불탄다. 보이는 형상들이 불탄다. 눈으로 짓는 인상이 불탄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감각들은 눈으로 짓는 인상으로 인하여 일어나느니, 그것 또한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는가? 욕망의 불로 타고 증오의 불로 타며 미혹의 불로 탄다. 내가 말하노니, 그것은 태어남으로 불타고 늙음으로 불타며 죽음으로 불타며 슬픔, 비탄, 고통, 고뇌, 낙심으로 불탄다.
       
귀가 불탄다. 소리가 불타며 듣는 의식이 불타며 귀가 짓는 인상이 불탄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감각들이 귀로 짓는 인상으로 인하여 일어나느니, 그것도 또한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는가? 욕망의 불로 타고 증오의 불로 타고 미혹의 불로 불타고 있다. 내가 말하노니, 그것은 태어남으로 불타고 늙음으로 불타며 죽음으로 불타며 슬픔, 비탄, 고통, 고뇌, 낙심으로 불탄다.
       
코가 불탄다. 냄새가 불타고···.
혀가 불탄다. 맛이 불타고···.
몸뚱이가 불탄다. 접촉되는 대상들이 불타고 접촉하는 의식이 불타며 접촉하는 의식이 불타며 접촉하는 감각이 불타며···.
의근이 불탄다. 상념들이 불타고 상념하는 의식이 불타며···. 무엇으로 더불어 불타는가? 욕망의 불로 타고 증오의 불로 타며 미혹의 불로 탄다. 내가 말하노니, 태어남으로 불타고 늙음으로 불타며 죽음으로 불타며 슬픔, 비탄, 고통, 고뇌, 낙심으로 불타고 있느니라.
상윳타 니카야 35.28, 불의 설법 (불교)
     
파리드여,
나는 혼자만이 슬픔을 지녔다고 여겼더니
슬픔은 지천에 널렸도다.
내가 높은 지붕에서 굽어보았거늘
집집마다 슬픔의 불길로 휩싸였도다.
아디 그란트, 샬로크, 파리드, p.1382 (시크교)    
     
말씀 선집 
     
본연의 동산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사망의 세계에 떨어져 흑암과 싸웠사옵고, 원수들의 장중에 사로잡혀 탄식과 절망 가운데 있었사오나 본연의 마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양심을 통하여서는 본연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6.291, 1959.06.14)
          
타락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오늘날 어떠한 세계에 처해 있느냐? 행복한 세계가 아닌 불행한 세계에 처해 있고, 기쁨의 세계가 아닌 슬픔의 세계에 처해 있으며, 감사하며 사는 세계가 아니고 원망하며 사는 세계에 처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런 불행한 세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결코 여러분 앞에는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불행한 자신임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빼어낼 수 없는 비통한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탄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증거입니다. 또, 여러분에게는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지요? 이것은 본연의 에덴동산을 향해 나가지 못하도록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철망을 씌워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생명이 없는 사망의 세계이며, 절망과 암흑의 세계입니다. 인간들은 원래 생의 가치를 노래하면서 살아야 할 입장에 있었고, 생명을 중심삼고 영원한 하나님의 이상과 화동할 수 있었던 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상 앞에 설 수 있는 소망이 끊겨져버린 가운데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246, 1957.06.09)
         
전체가 악에 접할 수 있는 요인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악이 가는 길에서 교육은 필요 없습니다. 교육을 받지 않고도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악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이기 때문에 교육을 받지 않고도 누구든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의 길을 가게끔 교육할 필요성이 있습니까? 스스로 그렇게 됐기 때문에 오늘날 인륜도덕을 중심삼고 양심의 표준 앞에 가려가라고 교육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중심삼고 교육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교육의 표준에 입각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악한 것은 배우지 않고도 누구든지 다 할 수 있고, 누구든지 다 만점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언제나 선하라 하고 마음은 언제나 선한 사람이 되라고 쉬지 않고 나를 자극시키고, 나에게 권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선한 내가 되었습니까?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오늘도 탄식이요, 내일도 탄식이요, 이 해도 탄식이요, 청춘시대도 탄식이요, 중년시대도 탄식이요, 노년시대도 탄식이니, 탄식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악한 것으로 끝장을 보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36.57, 1970.11.15)
          
인간의 타락으로 역사는 슬픔으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그 출발점에서 가장 슬픈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과 생명과 모든 것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행복과 생명과 모든 것이 인간으로부터 잘려 나가 버리고, 인간은 깊은 절망과 어둠과 불행 속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완전한 절망과 어둠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요, 부모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슬픔이 인간이 느낀 것보다 말할 수 없이 더 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52.36, 1971.12.12)  
     
2. 인생무상
         
종교 경전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전도서 1.2-3 (기독교)
        
주님을 불신하는 자를 비유하사, 그들의 업적이란 폭풍우 치는 날 폭풍에 휘날리는 재와 같으니, 그들이 얻은 것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니라. 진실로 그것은 목표에서 멀리 벗어난 방황이로다. 꾸란 14.18 (이슬람)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향상과 여러 가지 세속적인 것드에 대하여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달콤한 설탕을 입힌 유혹적인 과자 같은, 그러나 그 속에 지독한 쓴맛으로 가득한 이 부패한 세계에서는 그 어떤 향상도 없다. 그것은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것을 잡으려 해보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요가 바시슈타 (힌두교)
         
황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고 해도 사람의 욕망에 만족은 일어나지 않는다.
법구경 186 (불교)
         
욕망이란 이를 탐닉함에 의해서는 결코 잠잠해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마치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쏟아 부으면 그 불꽃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라.
마누법전 2.94 (힌두교)
          
미혹된 자는 자신의 고통을 삭여내기 어렵나니, 이는 갈애에 꺼들어 음란을 일삼는 까닭이요, 마침내 그는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심한 고뇌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리라. 아차랑가 수트라 2.74 (자이나교)
         
술에 취한 사람처럼 미망의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악령 들린 사람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큰 뱀에게 물린 사람처럼 감각의 대상에 물려 허덕이며, 어두운 밤처럼 격정으로 앞이 캄캄하며, 요술처럼 미혹되고, 꿈처럼 거짓되며, 바나나 속처럼 무기력하며, 광대처럼 찰나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그림 속의 사물처럼 보기에는 그럴싸하다고··· 그들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 마이트리 우파니샤드 4.2 (힌두교)
         
나 설교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며 하늘 아래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알아보자 지혜를 깨치려고 무척 애를 써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괴로운 일을 주시어 고생이나 시키신다는 것을 알기에 이르렀다.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 구부러진 것을 펼 수가 없고, 없는 것을 셀 수 없지 않는가!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왕 노릇 한 어른치고 나만큼 지혜를 깊이 깨친 사람이 없다. 나만큼 인생을 깨쳐 지혜를 얻은 사람이 없다.” 나는 이렇게 자신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어리석고 얼빠진 일인지 알아보려고 무척 애를 써보았지만, 그것 또한 바람을 잡는 것 같은 일이었다. 어차피 지혜가 많으면 괴로운 일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아지는 법이다.
         
그래서 향락에 몸을 담가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 보았더니 그것 또한 헛된 일이었다.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았고 누리고 싶은 즐거움을 다 누렸다. 스스로 수고해서 얻은 것을 나는 마음껏 즐겼다. 나는 이렇게 즐기는 것을 수고한 보람으로 알았다.
         
그러나 내가 이 손으로 한 모든 일을 돌이켜보니, 모든 것은 결국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 하늘 아래서 하는 일 가운데 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왕위에 오르는 사람이래야 선왕들이 이미 한 일밖에 더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혜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리석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했다. 빛이 어둠보다 낫듯이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지혜로우면 제 앞이 보이고 어리석으면 어둠속을 헤맨다고 했지만, 그래 보아야 둘 다 같은 운명에 빠진다는 것을 나는 안다.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운명에 빠진다면 무엇 때문에 지혜를 얻으려고 했던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이것도 또한 헛된 일임을 깨달았다.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모든 일은 잊혀지고 말리라.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산다는 일이 싫어졌다. 모든 것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라,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나에게는 괴로움일 뿐이다. 나는 하늘 아래서 애쓰며 수고하는 일이 모두 싫어졌다. 힘껏 애써 얻어 보아야 결국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하는 것, 그것을 물려받아 주무를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 그런데도 내가 하늘 아래서 지혜를 짜고 애를 써서 얻은 것을 물려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라. 나는 하늘 아래서 수고한 모든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고 돌아보기도 싫어졌다.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제아무리 애를 태우며 수고해 본들 돌아올 것이 무엇이겠는가? 날마다 낮에는 뼈아프게 일하고 밤에는 마음을 죄어 걱정해 보지만 이 또한 헛된 일이다.
전도서 1.12-2.23 (기독교)
          
위대하신 상제님은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
포악하신 상제님은
그 명령이 편벽되고, 
하늘이 백성을 낳게 하셨으나
그 천명을 믿을 수만은 없어라.
모두가 시작은 좋아도
유종의 미를 거둔 사람은 드물도다. 시경 255 (유교)
        
기교를 가지고 힘겨루기를 하는 사람은 시작할 때는 정당하게 겨루지만 끝에 가서는 음흉하게 수작을 부린다. 그리고 꼭 이기겠다는 경쟁심이 커지면 결국에는 간교한 꾀를 많이 부린다.
예절을 따라 술 마시는 자들도 처음에는 질서정연하게 마시나 끝판에는 난잡해지고 심해지면 이상한 쾌락을 심하게 좇는다. 모든 일도 역시 같다. 처음에는 선량하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야비하게 되고, 처음에 조촐했던 것들이 나중에는 거창하게 확대되게 마련이다.
장자 4 (도교)
       
말씀 선집 
     
인간이 행복을 찾아가는 데는 어떤 행복을 찾아갈 것이냐? ‘인간이 어떤 유형의 행복을 찾아가든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백년밖에 더 되나. 청춘시대라는 것은 한번밖에 없는데 젊을 때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놀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죽는 것이 그럴 듯한 인생이지’ 하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했지만, 나중에 가면 모두가 허사입니다.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몇 해 안 가서 모든 것이 다 싫증난다는 것입니다.
(41.144, 1971.02.14)
          
지금까지 종교는 내세를 찾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기에 필사적이었으며, 심령적인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행복을 멸시하기에 몸부림쳐 왔다. 그러나 끊어버리려야 끊어버릴 수 없는 현실과, 떼어버리려야 떼어 버릴 수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육신의 행복욕은 끈덕지게 도인들을 붙들어 오뇌의 골짜기로 몰라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인들의 도의 생활에도 이러한 모순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모순성을 지닌 도인생활의 파멸, 이것이 바로 오늘의 종교인들의 생태인 것이다. (원리강론, 총서)
          
우리가 돈을 벌어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죽도록 해 가지고, 20대를 지나서 30대, 40대, 50대, 60대, 한 30년을 노력하지 않으면 백만장자가 될 수 없다고 볼 때, 60대에 가서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60대가 되면 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돈이 좋아서 60세가 되도록 벌어 놓고 보니 은퇴를 해야 됩니다. 은퇴 연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백만장자가 된 입장에서 그 돈더미를 바라볼 때 희망적이겠습니까, 절망적이겠습니까? 과거를 생각할 때, 기가 찬 사실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 놓고 나서 그 돈을 번 그 자체를 가만히 생각할 때,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느라고···. 여기서 무슨 대학을 가서 박사가 되고 뭐가 되고 야단을 합니다. 수건을 동여매고, 밥도 잘 못 먹고, 놀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쉬지도 않고 밤을 세워 가면서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땄다고 합시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가 되어서 세상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자신을 가만히 보면 비참한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노벨상 수상자가 되고,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좁은 전문분야입니다. 이 넓은 세상 가운데 조그만 굴을 뚫어 그 분야에 대해서 알아 가지고 이 울타리 가운데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전체를 보게 될 때, 자기는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무엇을 안다고 자랑을 하지만 지극히 작은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안다는 것, 지식이 인간에게 행복을 갖다 주고 인간에게 안일을 갖다 주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학교에 들어가서 유명한 교수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같이 분필이나 잡고 무얼 쓰고, 무얼 맡고 이러고 일생 동안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필 가루를 먹으면서 큰소리를 쳤지만 그 분야에서나 큰 소리를 하지, 세계에 무슨 영향을 미치고, 대번에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그런 건 하나도 모릅니다. 세계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의 뜻이니 뭐니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의 뜻이니 뭐니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보다 더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지식이 있다고 해도 일생 동안 그저 책벌레로, 자기에 대해서 자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가 그 분야에서 말 한마디 하면 그걸 주어다 모아서 또 비교 연구하고, 그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주장했다는 게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또 유명한 학자가 됐으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거기에 내 생명을 투입하고 내 전체를 투입하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권력입니다. 어느 누구나 이 나라의 대통령이 한번 되었으면 하고 꿈을 꾸지요? 무엇이 한번 되었으면 하고 꿈을 꿉니다. 권력, 힘, 그런 힘을 쥐어 봤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게 만년을 갑니까? 여기 미국 대통령은 4년 동안 권력을 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과정에서 눈을 한번 깜박이는 것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먹고, 춤을 추고, 뭐가 어떻고, 그거 미치광이 같은 기분이라는 것입니다. 좋다고 해도 한번 거기서 딱 끝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가 찾아와 가지고 그것을 알아줍니까? 도리어 평민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98.82-85, 1978.04.30) 


3. 눈물의 길
        
종교 경전 
     
키사 고타미라는 여인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가 죽었다. 슬픔에 젖은 그녀는 아들을 안고 온 이웃을 다니며 약을 구하러 쫓아 다녔다. 사람들이 말했다. “아이는 이미 죽었는데, 저 여인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
       
마침내 키사 고타미 여인이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나는 당신에게 아이를 낫게 할 약을 줄 수는 없소.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있는 의사를 내가 아오. 샤캬무니 부처를 찾아가시오.”
     
키사 고타미는 부처에게 매달려 울부짖으며 간청하였다. “주여! 스승이시여! 내 아들을 낫게 할 약을 내려주소서”
부처께서 대답하셨다. “나에게 한 웅큼의 겨자씨를 가져다 주시오.” 여인이 기뻐하며 그것을 마련해 오마고 대답하자, 부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겨자씨는 아들이나 남편 또는 부모나 친구 중 아무도 잃은 자가 없는 집에서 가져와야 하오.”
        
불쌍한 키사 고타미는 겨자씨를 구하러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녀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말했다. “자, 여기 겨자씨가 있소, 가져가시오.” 그러나 그녀가 “당신 집에서는 아들딸이나 부모형제를 잃은 적이 없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그녀에게 대답하였다. “아! 살아있는 자는 오히려 드물며 죽은 자가 많으오. 부디 뼈에 사무치는 우리의 슬픔을 상기시키지 말고 가시오.”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지 않은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키사 고타미는 지치고 낙심하여 어두운 길을 가다가 어느 언덕에 주저앉았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에는 가가호호 등불이 켜지다가 점점 꺼져갔다. 마침내 온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그녀는 문득 사람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켜졌다가 다시 꺼지는 등불처럼, 왔다가는 필경 돌아가야 하는 운명임을 깨달았다. “슬픔에 잠긴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죽음에 예외가 없거늘, 이 황량한 골짜기에 온갖 이기심에 찌든 이를 불멸로 인도하는 길이 있거늘.”
       
아들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을 훌훌 털어버린 키사 고타미는 죽은 아들을 숲속에 묻고 부처께로 다시 돌아갔다. 그에게 귀의하여 마침내 법 안에서 평안을 찾았다.
붓다고사, 겨자씨의 비유 (불교)
 
말씀 선집 
     
눈물의 역사의 기원을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하면, 그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했겠습니까? 타락하게 될 때 아담 해와가 먼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흘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 해와가 눈물을 흘린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 자기들의 슬픈 사정을 중심삼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흘린 눈물은 누구를 위해 흘렸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천도를 어김으로써 추방당해야 할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된, 자식된 아담 해와를 바라보며 흘린 눈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위해 흘린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자식을 위해 흘린 눈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그 자체는 비참한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그 자체는 비참한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눈물의 역사가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도 눈물의 시작을 먼저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게 될 때 인간도 비참한 것이요, 하나님도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흘리는 눈물은 인간 자신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건 응당 흘려야 할 눈물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눈물의 역사는 인류의 시조로부터 시작되어서 눈물의 발판은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나왔습니다. 그러한 비참한 자리에서 전쟁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가 반복하면서 역사는 발전되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개인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받아서 눈물을 흘리는 역사로부터 가정이 피해 받고, 민족이 피해 받고, 세계가 피해 받아 눈물을 흘리는 역사가 거듭된다는 것입니다. 
      
눈물의 역사를 걷어치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슬퍼하고, 자기 가정을 위하여, 자기 민족을 위하여, 자기 국가를 위하여, 자기 세계를 위하여 슬퍼하고 난 이후에야 새로운 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있지, 이것을 위해 슬퍼하지 않고는 선의 세계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타락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세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면 세계적인 입장에서 맨 밑창에 떨어진 인간이 이것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야 됩니까? 그러려면 이 세계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중심삼고, 자기 일이라든가 자기 가정이라든가 자기 국가라든가 혹은 자기의 주의와 주장을 중심삼고 슬퍼하는데 이 세상을 극복해 나가야 됩니다. 반대로 가야 됩니다. 반대의 길을 가야 되는 것은 틀림없는 결론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정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항상 눈물에 젖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대적인 입장에서 슬퍼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행복한 곳은 어디입니까? 자신이 눈물을 극복하는 길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여 넘어간 자리에 행복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류시조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눈물의 역사를 하나님과 인간이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눈물이 시작하지 않았던 자리이니 우리는 이 모든 눈물의 세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을 초월해서 넘어가지 않고는 행복의 기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그 입장을 극복해서 우리는 전진해야 하고, 이 슬픈 눈물의 고개, 이 인간의 눈물의 고개뿐만 아니라 하늘이 흘린 눈물의 고개를 넘어가야 할 운명이 오늘날 인간이 가야 할 운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두 종류의 눈물의 고개를 다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불쌍하냐 하는 이런 고통의 와중에서 스스로 몸부림치며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러므로 남이 모르는 가운데 인생문제라든가 자기의 일생의 문제를 중심삼고, 이 사회 문제, 전체의 문제를 걸고 고민하고 눈물을 흘리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고,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스스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시대에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고민도 하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인생의 축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눈물을 극복함과 동시에 이 세계의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을 극복시킬 수 있는 길이 없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자기 스스로 인생문제를 고민하고 이 세계문제를 고민해서 눈물을 흘린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근원을 뒤집어 놓아야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슬픈 눈물을 흘린 고비뿐만 아니라, 세계가 눈물 흘렸던 고비뿐만 아니라, 세계가 눈물 흘렸던 고비뿐만 아니라, 하늘이 눈물을 흘렸던 고비를 돌려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돌려놓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되 자기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자기 편, 자기를 중심삼고 눈물을 흘리는 역사를 가지고는 새로운 이상세계로 전진하는 데 아무런 보탬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타락한 아담 해와 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여기서 하늘이 슬퍼했던 또 다른 하나의 영역을 우리는 발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눈물을 흘렸다면 인간이 하늘이 흘린 눈물의 경지를 넘어가지 않고는 인류의 행복의 기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이라는 주체를 발견하고 그가 눈물을 흘렸던 그 경지 이상의 곳을 내가 탐지하여 그런 곳을 가겠다고 하는 욕망을 지녀야 됩니다.
(94.306-310, 1977.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