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 신비 (세계경전 - 제1부 하나님과 창조 - 제1장 하나님)

訓讀王 | 20180218065310

세계경전 - 제1부 하나님과 창조 - 제1장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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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형, 신비


하나님은 무형이며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어떤 개념도 초월하고, 감추어져 있으며 불가사의하다. “나의 생각은 너의 생각이 아니며 또한 너의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 유일신 종교 전통에서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진술하기 위함이다. 무한자인 하나님은 형상화함으로써 유한자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언어나 사유개념도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동양 종교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어떻게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 순수정신의 원천이며 전지한 초월적 존재를 감지할 수 있을까?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이 무형이며 눈에 보이지 않으며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여기에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시사한다. 즉,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로만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보이는 인간의 형태로 자신을 현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무지 속에 방치하지 않으며, 종말에는 자신의 가슴 깊이 감추어 둔 사정 모두를 드러낸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을 완전히 실현하게 되며, 지상에서 하나님의 구현체가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종교 경전


어떤 시각으로도 그 분을 인식할 수 없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다. 그분은 모든 것을 감지하고 알고 계시도다.
꾸란 6.103(이슬람)

말로 표상해 낼 수 있는 도는 항구불변의 본연의 도가 아니며,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실체의 이름이 아니다.
무명은 천지의 시초이며, 유명은 만물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항상 무에서 오묘한 도의 본체를 관조해야 하며, 또 유에서 광대무변한 도의 활용을 살펴야 한다.
무와 유는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며, 오직 이름만이 다르다. 이들 둘은 다 같이 깊고 그윽하다. 이들은 끝없이 깊고 그윽하며 모든 도리나 일체 변화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도덕경 1(도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의식의 그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사의 자아는
카스트나 종족 속에 귀속되는 일이 없으며,
이목이나 수족을 지니지도 않는다.
현자들은 말하노니,
크고 작은 일체만유 속에 편만하며,
영원불변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이,
그가 곧 불멸의 자아이니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1.1.6(힌두교)

궁극적 영혼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원도 아니며 삼각형도 아니며 사각형도 아니며 구형도 아니다. 그는 검지도 않고 푸르지도 않고 붉지도 않고 노랗지도 않고 희지도 않다. 그는 좋은 냄새도 아니며 싫은 냄새도 아니다. 그는 톡 쏘거나 쓰지도 않으며, 시거나 달지도 않다. 그는 딱딱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으며,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으며,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며, 까슬까슬하지도 않고 매끈하지도 않다. 그는 몸이 없다. 그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는 집착에서 자유롭다. 그는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니며 중성도 아니다. 그는 청정한 지식이며 직관이다.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어떤 비유도 없다. 그는 무형의 존재이다. 그는 어떤 용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를 파악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는 소리도 아니고 형태도 아니며 맛도 아니고 촉각도 아니다. 단지 나는 너무 많이 말한다.
아차랑가 수트라 5.126-40(자이나교)

샤리푸트라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며, 감각, 표상작용, 행동, 의식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야심경(불교)

하나님께서 너도 모르게 너를 보살피셨다.
이사야 45.15(기독교)

자네가 하나님의 신비를 파헤칠 수라도 있단 말인가?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더듬을 수라도 있다는 말인가? 하늘보다도 높은 그것에 어떻게 미치며 저승보다도 깊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 신비는 땅 끝처럼 아득하고 그 무한하심은 바다처럼 넓다네.
욥기 11.7-9(기독교)


모든 것을 드러내는 지성, 그것은 무엇에 의해 드러내지는가? 누구에 의해 아는 자가 알려지는가? 참된 자아는 “이것은 아니다. 저것은 아니다”(내티, 내티)로 묘사된다. 그것은 불가해하다. 그것은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쇠퇴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쇠퇴하지 않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결코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 사랑하는 이여, 아는 자는 누구에 의해 알려져야 하는가?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 4.5.15(힌두교)

형상으로 나를 보았거나
소리로써 나를 찾았던 자들은
그릇되게 정진한 것이니
그 사람들은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금강경 26(불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여호와의 말씀이시다. 이사야 55.8(기독교)

그러므로 하나님에 필적할 것을 만들지 말라. 실로 하나님은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라.
꾸란 16.74(이슬람)


모세가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자 여호와께서는 대답하셨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여호와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여호와께서 이르셨다.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으라.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 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
출애급기 33.18-23(기독교)

그러므로 너희는 깊이 명심하여라. 여호와께서 호렙의 불길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아무 모습도 보지 못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는 남자의 모습이든 여자의 모습이든 일체 어떤 모습을 본떠 새긴 우상을 모시어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모습이나 공중에서 날개 치는 어떤 새의 모습이나,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어떤 동물의 모습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물고기의 모습도 안 된다. 눈을 하늘로 향하여 해와 달과 별 등 하늘에 있는 모든 천체를 보고 그 앞에 엎드려 예배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서도 안 된다. 그런 것들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만천하 다른 민족들에게 주어 섬기게 하신 것들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도가니 같은 이집트에서 건져내시어 오늘 이렇게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신명기 4.15-18(기독교)

태초에 신이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내일도 계실 것입니다.
그 누가 신의 형상을 만들 수 있으랴?
신은 무형이시며,
당신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십니다.
머물지 않고 사라져 버리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바로 그 말씀!
그래서 신이십니다.

그미족의 찬가(아프리카 전통종교)

말씀 선집


여러분들은 영계에 가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하나님은 에너지의 본체이기 때문에 영계에 가서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5.193, 1979.10.21)

하나님은 어떤 형태도 지니지 않습니다. 크다고 하면 무한대요, 작다고 하면 무한히 작은 분이십니다. (35.157, 1970.10.13)

사랑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사랑이 딱 네모로 돼 있으면 네모로 된 사람만 좋아합니다. 사랑은 공기와 같이 형태가 없기 때문에 어느 형태든 다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공기와 같이 크고 둥그런 것을 참사랑으로 길게 빼게 되면 천리, 만리 죽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공기는 ‘아이구! 이거 왜 잡아당기느냐’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너무 잡아 당겨서 뚝 끊어지더라도 ‘그러면 얼마나 좋겠느냐. 어서 끊어지게 해 다오’ 그런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다른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 개념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공기와 같은 형태의 사랑이 딱 끊어지면 그것을 끌고 가는 하나님은 몸뚱이로부터 그 사랑을 감아 나갑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길게 만들어야겠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167.115, 1987.07.01)

하나님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걸 생각해 봤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근수로 달면 몇 근이나 되겠습니까? 몇 억만 톤이 될까요? 무겁다면 갖고 다니려면 큰일이지만 하나님은 무형이시기 때문에 이상적입니다. 무형이기 때문에 지갑에 넣고 다녀도 무게가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또 무형이기 때문에 아무리 좁은 데 가더라도 가져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아무리 좁은데도, 바늘귀보다 더 좁은 데도 인간이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 크다 하면 큰 데도 마음대로 운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36.107, 1985.12.22)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온 천하를 요리하시는 하나님이 여기 있다고 합시다. 힘으로 말하자면 태백산도 날려 버리고 지구성도 구멍을 낼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인데, 그러한 하나님을 여러분의 눈으로 보면서 살라고 한다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안 보이길 잘했다는 것입니다. 보이면 여러분은 신경이 쇠약해져서 한 시간도 못 산다는 것입니다.(38.245, 1971.01.08)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주인이 되자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따라잡으려고 해도 따라잡지 못하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제일 편리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 노릇할 수 있으면 바람직한 것입니다. 210억 광년이나 되는 우주를 ‘내 품 안에 안겨라’ 해서 몸뚱이를 가진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노릇 해먹겠습니까? 하나님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의 거리가 얼마나 멀겠습니까? 몸뚱이와 마음이 찾아가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하나님이 볼 때도 한심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지혜로운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중앙에서 마음대로 거동할 수 있는 무형적 존재로서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제일 편리하겠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무형이므로 존재세계를 마음대로 뚫고 오더라도 조금도 지장을 안 느낍니다. 여러분의 몸뚱이에 하나님이 와서 마음대로 지나가더라도 여러분은 모릅니다. 하나님이 꾸벅꾸벅 조는 여러분의 몸뚱이를 마음대로 밟고 지나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이 제일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되었다는 논리가 가당합니다.

여러분은 공기가 통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공기가 통하고 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공기가 통하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은 무형의 신으로 계시는 것이 최고 편리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큰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이 우주를 보자기로 싸고도 남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형의 하나님이지만 무형의 하나님의 마음은 이 우주도 작다고 보고, 더 큰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현현하여 지적하고 간섭하신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면서 살라고 한다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신경쇠약에 걸려 하루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엄청난 양의 공기가 여러분의 몸속을 드나드는 것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무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과하고 역사하심을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것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38.168, 1986.01.21)

천주의 대주재 되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눈에 보이게 된다면 그 하나님을 서로 빼앗겠다는 싸움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이 싸움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기를 잘 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보였다면 미국과 소련이 서로 자기 하나님이라고 싸우겠습니까, 안 싸우겠습니까?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 싸움을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하사, 이런 싸움이 있을까봐 무형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기를 바라는 것은 망령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안 보이기를 잘했다는 것입니다. (41.287, 1971.02.17)

여기에는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섭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생각과 섭리를 대하고 있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것이 현장에서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이 늘 문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이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 전에도 계셨고 타락 이후에도 계시지만, 지금 섭리를 대하고 있는 하나님의 생각은 타락한 인간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언제나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하나님이 타락한 세계에 들어와서 일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을 중심삼고 인간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 이상하던 생각을 중심삼고 하나님화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구원섭리 운동이라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됩니다. (161.110, 1987.01.11)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하나님이십니다. 무형의 하나님이 유형의 하나님으로 현현하기 위한 것이 창조이상이라 할 때, 하나님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체도 되지만, 또한 보이는 세계의 실체가 되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98.106, 1999.01.01)

여러분들은 영계에 가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인다구요. 여러분, 힘이 보입니까? 힘이 보여요? 하나님은 에너지의 본체이기 때문에 영계에 가서도 볼 수 없다 이것입니다. 체(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 세계를 지도하고 주관하기 위해서는 실체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냐?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어서 지상에 살다가 천상에 가게 되면 아담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아담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하하하’ 웃는 것은 하나님이 ‘하하하’ 웃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우주가 ‘하하하’ 웃는 것입니다.

무형의 하나님이 실체를 쓴 하나님으로 등장하시기 위한 것이 인간 피조세계 창조라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무형의 하나님이 실체의 하나님으로 등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남극과 북극과 같은 극을 그려야 하나의 자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내적이고 이건 외적이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하나님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원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것이 비로소 도는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5.193-194, 197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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