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3부 인생의 여정
제18장 겸손과 자기부정
겸손
겸손한 자세는 하늘과 가까이 하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탁월한 지성, 부, 높은 지위, 그리고 칭찬 등에 의한 자만심은 구도자의 길을 가로막는 장해물일 뿐이다. 진정한 겸손은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비판하고, 불평 없이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의 입장과 다를지라도 하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자세이다.
겸손은 진실과 정직을 요구한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어린아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어런이의 순수한 반응과 삶의 수용 태도는 종종 가면을 쓰고 원한과 편견으로 살아가는 복잡한 어른들의 성향과 반대이다. 어떤 경전에는 한 낱의 숨결, 한 줌의 흙, 벌레의 먹이에 불과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상한 존재인가를 깊이 명상하고, 특히 겸손 미덕을 함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 또 다른 역설이 있다. 겸손하며 낮아지려는 자가 교만하며 높아지려는 자보다 더 존경받고 번영한다는 것이다. 사탄의 온갖 공격을 받았지만, 결국 겸손하며 낮은 자리에서 승리한 예수님의 사례가 그것이다. 선과 악의 관계는 겸손과 교만의 관계와 같다. 문선명 선생은 겸손은 에덴동산의 생활원칙이며 하나님과 일치되는 덕목이며, 반면 교만은 사탄의 진영에 정착하게 한다고 하신다. 문 선생님은 또 다른 인용 구절 - 오르막과 내리막의 자연 순환 과정 - 을 예시하며, 교만하여 정상에 오르면 내리막길밖에 없지만, 겸손하여 아래에 내려가면 오르막길밖에 없다고 하신다.
1.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종교 경전
믿음을 가진 자가 승리하리니, 그들은 겸허히 예배드리고 쓸데없는 언사를 피하고, 희사금을 바치며, 자신을 정결히 지키는 자들이로다.
꾸란 23.1-5(이슬람)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5.5(기독교)
만일 그대가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자존심을 버려라. 심지어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자존심도 그대를 가로막아 버린다, 마치 큰 먹구름에 가려지는 것처럼.
카수가 신사의 신탁 (신도)
사람들은 경멸하여 나의 뺨을 돌리지 말고 이 땅위를 거만하게 걷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거만함을 사랑하지 않으시노라. 겸손한 걸음으로 걸을 것이며 소리를 맞추어 말하라. 가장 듣기 싫은 소리는 당나귀 소리이니라.
꾸란 31.18-19(이슬람)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다 나의 거싱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시다. “그러나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
이사야 66.2(기독교)
지금 이 유랑의 때에는 성전 붕괴 전보다도 성령이 우리를 더 자주 찾아오신다. 어떤 한 왕이 있었다. 그는 권좌에서 쫓겨나 떠돌이로 내몰렸다. 유랑하며 헤매다가 그는 한 가난한 자의 집에 갔다. 거기서 왕은 평민들의 음식과 거처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그 대접은 여전히 왕의 입장에서 받은 것이었다. 점점 그는 마음이 가벼워졌고 조정에서 간신들과 담소를 나누듯 집주인과 친군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지금 우리와 같이 유랑하시는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와 같이하고 계신다.
메지레치의 도브 바에르(유대교)
겸손하라.
남을 해치지 말라.
거짓을 버리고 모든 것을 인내하라.
지성으로 스승을 공경하며 몸 마음을 고결하게 지키라.
고요함 속에 꿋꿋하며 자기를 다스려라.
아만을 벗어 버리고 무상한 감각적 대상들에 초연하며 필멸자의 나약함을 직시하라.
바가바드기타 13.7-8(힌두교)
모든 인류는 아담의 자손이고 아담은 흙에서 창조되었도다.
티르미디 하디스 (이슬람)
지극히 불쌍한 영혼을 가진 자의 최후는 벌레와 같은 신세가 된다.
미슈나, 아보스 4.4(유대교)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알아주시옵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염려해 주시옵니까?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라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시편 144.3-4(기독교)
다음 세 가지를 반성해 보아라. 그러면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 네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미래에 누구 앞에서 심판받을지를 말이다. 너는 과거에 악취가 풍기는 빗물로부터 왔으며, 지금은 먼지 벌레 구더기가 득실대는 곳으로 향하고 있고, 미래에는 왕 중에 왕, 거룩하신 그분 앞에서 심판받을 것이다.
미슈나, 아보스 3.1(유대교)
선지자가 이르기를 “천국의 거주자들이 얼마나 겸손하고 연약한지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지 않았더냐? 그들이 신앙을 맹세할 때 하나님이 그들의 맹세를 받아 주리라. 지옥의 거주자들이 얼마나 잔인하며 힘이 세고 오만한 자라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지 않았더냐?
부카리 하디스(이슬람)
말씀 선집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온유 겸손, 금식, 희생, 수교의 토대 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288.228, 1997.0326)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스스로를 강조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온유 겸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희생 봉사를 강조하는 거예요. 그거 왜 그래야 되느냐? 본향 땅의 법칙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본향 땅을 찾아가는 나그네와 같은 신세이므로 본향에 가서 살 그 법도에 알맞게 훈련시키려니,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희생하라는 이런 교훈을 가르쳐 온 것입니다.
(77.190, 1975.04.06)
사탄의 본질은 교만과 혈기입니다. 이런 성질로 세상 사람을 대하는 사탄이었으나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세사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또한 엄연히 천리법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탄이기 때문에,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온유와 겸손을 들고 나서게 되면 사탄세계도 자연히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아시는 예수님은 사탄이 하지 못한, 사탄이 할 수 없는 온유 겸손한 입장에 서야 중심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예수님이 각르치신 온유 겸손, 순종과 복종, 희생과 봉사에 비추어 보고 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권내에서 실천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면 아직까지 사탄의 종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187, 1957.10.27)
하늘나라의 생명록을 한번 점검해 보니까, 어떤 사람이 기록되어 있느냐 하면 못난 사람들이 전부 다 기록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107.21, 1980.02.21)
본래 에덴동산은 싸움이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서로가 자기를 높이는 세계가 아니라 겸손과 사랑이 깃드는 세계였습니다.
(98.31, 1978.04.08)
개인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에게 있어서 자기만을 주장할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사랑으로 어머니의 뱃속, 난자로부터 자라 태어날 때 99.999퍼센트가 어머니의 뼈와 피, 살입니다. 그리고 0.001퍼센트 아버지의 정자 하나가 합해져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기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 자기 자신만이란 개념은 없었던 것입니다.
(299.119, 1999.02.07)
타락은 악이 먼저 출발하여 올라간 것이므로 악을 끌어내리고 선을 끌어올리는 작전을 해야 됩니다. 이 작전을 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걸 알아야 됩니다. 먼저 교만을 때려잡아야 됩니다. 타락은 하나님을 제쳐 놓고 자기가 높아지고자 한 데서 되었습니다. 사탄의 본성이 거기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높아지겠다는 것, 환경이야 어떻든 질서야 어떻든 법도를 무시해 버리고 자기만을 주장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거기에는 의리도 없고 법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법도를 따라 법대로 사는 사람을 어떻다고 합니까? 교만하다고 합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정직은 바를 정(正)하고 곧을 직(直)입니다. 바르고 곧다, 똑바르다는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뭐냐? 똑바른 것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과 악은 무엇으로 가르느냐? 법으로 가르는 것입니다. 교만은 법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법도를 무시하고 위치와 환경을 무시하며 행동하는 것을 꺾어 놔야 합니다. 교만을 제어하고 겸손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37.129, 1970.12.23)
높은 데 올라가서 몸과 마음이 하나되게 할 수 있는 길을 없습니다. 밟혀야 됩니다. 선생님도 높아질까 봐 하나님이 지금까지 40년을 발로 밟아 버린 것입니다. 자꾸 밟아 버리니까, 높아지려는 것이 짓이겨져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삼천리반도에 돌아다니던 저 옛날의 김삿갓처럼, 욕을 먹고 밟히고 천대받으면서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걸 다 소화할 수 있고 그걸 다 기쁘게 소화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됩니다.
(144.255, 1986.04.25)
나는 복 달라고 기도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돈 주소’ 그러지 않았습니다. 고생을 덜 했다고 생각하고 더 고생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걸 좋아하는 겁니다. (102.314, 1979.01.21)
2.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겸손한 마음
종교 경전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8.1-3(기독교)
무릇 육으로 난 인간은 아담이 타락한 때로부터 하나님의 적이요,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맡겨 육으로 된 자기를 버리고 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성도가 되며, 어린아이같이 되어 유순하고 온유 겸손하며 인내하며 사랑이 충만하여, 주께서 인간에게 합당하다 여기어 내리시는 모든 것에 어린아이가 그 부모에게 하듯 기꺼이 순종하지 아니할진대 영원토록 하나님의 적이 되리라.
몰몬경, 모사이야서 3.19(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대인이란 갓난 아이의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맹자 IV. B.12(유교)
이 세상에 있는 궁전의 기둥들은 넓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겸손해야 한다.
아라키다 모리타케, 세상에 대한 백편의 시(신도)
말씀 선집
이 세계에서 하나님이 역사할 때 어떤 사람을 추리느냐? 잘난 사람들은 세계를 움직이려는 욕심을 갖고 세계를 중심삼고 자꾸 날뛰고 있는데도 그들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못난 사람, 맨 낙오자를 추리는 겁니다. 상(上)이 아니고 하(下)라는 겁니다. 하(下)도 맨 하(下)다 이겁니다. 그것밖에 길이 없다는 겁니다.
(102.300-301, 1979.01.21)
예수님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타나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유대교계의 지도층의 영적인 무지를 개탄하시는 동시에, 무식하나마 어린이들같이 순진한 신도들에게 하늘의 일을 교시하여 은혜를 내려주신 것을 감사하는 말씀이었다.
그 때와 동시성의 시대인 오늘의 한국 교계에 있어서도 그와 동일한 사실들이 더 고차적인 것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하나님은 어린이같이 순진한 평신도층을 통하여 끝 날에 관한 하늘의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계시로써 알려주시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내용을 발표하면 교직자들에게 이단으로 몰려 추방을 당하게 되므로 그에 관하여는 일체 발표하지 않고 비밀에 부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계의 실정이다.
마치 제사장과 교법사들이 그러했듯이 오늘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서의 문자를 풀이하는 지식을 자랑하고 많은 신도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것으로 낙을 삼으며, 그 직권행사에 만족하고 있을 뿐, 끝 날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전해 모르고 있으니 실로 이보다 더 통탄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원리강론, 재림론 3.3-4)
세상에서 물든 일체의 의식이나 주의나 관념을 아버지 앞에 내어 놓고 어린애와 같은 마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빚으시는 대로 다시 빚어질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드리고자 하오니 받아주시옵소서. 삼위신이 운행하여 주시옵소서.
(7.12,1959.07.05)
아버님,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을 거듭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천태만상의 사정을 품고 온 이들이 그 사정을 다 털어놓으면 아버지께서 아니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다 털어놓고 굶주린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으 흠모하는 것과 같이,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아버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20.11, 1968.03.31)
3. 자신은 낮은 자리에 다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종교 경전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소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빌립보서 2.3(기독교)
스스로 선하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나 알지어다, 선이 그대를 피해 달아남을.
스스로 모든 이의 발가락의 때만 못하다고 여기는 자는 나나크가 말하노니, 실로 청정하다 함을 얻으리라.
아디 그란트, 가우리 수크마니, M.5, p278(시크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논어 14.32(유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바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누가복음 18.10-14(기독교)
스스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밝게 드러난다.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스스로 뽐내지 않기 때문에 공이 더욱 인정된다.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지속되게 된다.
대저 오직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 그와 다툴 수 있는 상대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옛 사람들 말에 이른바 ‘굽은 나무는 수명을 온전히 다 산다’ 고 한 것이 어찌 헛말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히 함으로써 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도덕경 22(도교)
남성적 힘을 쓸 줄 알면서도, 여성적인 겸허와 유약을 지키면, 천하의 물을 모아서 흐르게 하는 골짜기가 될 수 있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므로 영구불변하는 무위의 덕에서 떨어지지 않고, 영아같이 소박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명백하게 알면서도 유현한 도를 지키면, 천하의 모범이 될 수 있다. 천하의 모범이 되므로, 영구불변하는 무위의 덕을 어기지 않고, 무궁무진한 도에 복귀할 것이다.
현세의 영광을 누릴 수 있으면서, 도리어 하천한 자리를 지킬 수 있으면 천하의 골짜기가 되므로, 영구불변하는 무위의 덕이 충족하게 되고, 따라서 소박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도덕경 28(도교)
궁밭 북쪽에 어두운 바다가 있다. 바로 천지이다. 거기에 고기가 있어 너비가 수천 리이며, 길이는 아무도 모른다. 그 이름은 곤이다.
또 새가 있으니 그 림은 붕이라 한다. 붕새의 등은 태산과 같고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회오리바람을 치고 구만 리 높이 날아올라, 구름기운을 끊고 푸른 하늘을 업고 남쪽으로 향하여 남명으로 가려고 한다.
참새가 비웃으며 말한다. “그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나는 날아 올라가도 몇 길을 가서 내려와 쑥대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이것 역시 날아오를 만큼 난 것이거늘 그는 또 어디를 가려는 것일까?
이것이 크고 작음의 구분이다. 그러므로 한 관직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자나, 한 지방을 잘 다스릴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 또는 덕이 한 나라의 임금에 받아들여져 한 나라에 고적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저마다 제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장자 1(도교)
말씀 선집
악이 발동할 때 선이 가만히 있는 것은 선은 악과 더불어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악이 지나간 후에 선은 나타나는 것이다.
(뜻길, p.36)
자기가 낮은 데 있고, 다 높은 데 두려고 하면 걸릴 데가 없습니다.
(230.35, 1993.04.15)
인간이 오만해져서 자기 자신을 높은 자리에 두었을 때 악이 출발하였습니다. 오만함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겸손해지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기뻐하는 입장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오만해지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희생의 자리에 세우고 우리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면서 활동해야 합니다.
(52.302, 1972.01.09)
자기를 해명하려고 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를 해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해명당하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거기에는 일언반구, 어떠한 제시의 내용이 없습니다. 해명 당하는 입장입니다. 잘했어도 잘했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백퍼센트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이 볼 때는 하나입니다. 내가 백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삼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찾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절대적인 신앙을 기점으로 해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자기를 절대 부정하는 자리입니다. 자기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절대적인 신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만사를 중심삼고 거기에 긍정하면서 신앙 길을 간다고 할 때 절대적인 신앙이 나올 것 같습니까? 이러한 근본 문제를 놓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을 보게 되면 하루의 생활권내에서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하는 습관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대해서 당당하다’ 고 합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당당할 수 없습니다. 나를 공인하는 어떤 상대적인 요인이 없어 가지고는 절대적 신앙기준도 못 갖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기준도 갖지 못했는데 절대적 신앙기준을 극복하고 난 후에야 이뤄질 천국이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왜 그러냐? 그 자리에는 사탄이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46.79-80, 1971.07.25)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협조를 받아 자랑하겠다면 좋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자랑하겠다!’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다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341.11, 2000.12.29)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너희들은 나를 사랑해라! 나를 위해서 희생해라!‘ 하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하여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는 당신이 먼저 애기 똥을 치우고, 어머니 아버지 똥을 치우고, 먼저 희생 봉사하고 온유 겸손한 교육의 교재가 되고 센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16.68, 1981.12.20)
모든 생애를 전부 다 희생시키더라도 거기에서 부족함을 깨닫고 더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자기를 책하면서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끝까지 남아지더라는 겁니다. 뜻을 배반하고 떠났던 사람과, 그 다음에는 중간적인 입장, 아직까지 세상과 격리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세상인이나 마찬가지로 중간 입장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과, 그 다음에 뜻을 위한다는 입장에서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조금이라도 했으면 그것을 자랑하려고 하는 사람과,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을 뜻적인 입장에서 자기 자체를 살피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면서라도 부족함을 느끼는 이런 네 종류의 사람을 두고 볼 때 남는 사람은 맨 나중의 사람입니다.
(89.232, 1976.12.01)
미국이 어떤지 알겠습니까? 그런 미국 국민 앞에 여러분들이 서쪽에 있으면 동쪽이 필요하고, 남쪽에 있으면 북쪽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가르쳐 주느냐? 그거 통일교회 레버런 문이 가르쳐야 됩니다. 그래서 레버런 문이 뭘 하자는 겁니까? 미국이라는 나라는 역사적 결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원인에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 돌아가야 됩니다. 여기까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을 재발견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서쪽에 미국이 제일 큰데, 이 큰 미국이 더 크게 되면서 돌아갈 것이냐, 작게 되면서 돌아갈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작게 되면서 돌아가야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왜 겸손을 배워야 되느냐? 원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너무 겸손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을 주장해야 됩니다. 겸손만 해서도 안 됩니다. 강하고 전진해라! 그게 뭐예요? 결과로 가라 이것입니다. 이게 올라가면 내려가야 되고, 내려가면 올라가야 됩니다. 이거 올라가려면 높아져야 됩니다. 높아져야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117.93, 1982.02.14)
다른 뺨까지 돌려대라
예수님은 한쪽 뺨을 맞았으면 다른 쪽도 대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모욕과 비난을 아무 불평 없이 견뎌내고 복수심마저 떨쳐버리라는 가르침이다. 죽음까지도 감수하라는 비저항의 가르침은 자아주관에서 엄청난 의미를 띠고 있다. 악당에 똑같은 방식으로 응답할 때 악당은 다시 우리를 공격하고 지배할 수 있다. 공격자에 대한 증오심은 오직 피해자의 복수심만을 증폭시킬 뿐이다. 그렇게 하면 영적 에너지와 자기 균형을 상실해버린다. 그러나 반대자의 모욕과 비난에 대해 자신의 호의를 한결같이 돌려주고 정신을 집중하면, 원수의 증오심도 소화하고 영적 독립심과 주체성을 고수할 수 있다. 모욕을 받을지라도 자신의 영적 주체성을 고수할 때 비로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영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어떻게 비정항의 윤리가 정의와 화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 경전들은 하나님은 다른 쪽 뺨까지 대는 무리들의 편에 서라고 명시한다. 문선명 선생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예로 들어 가장 잔인한 고문과 죽음에 처한 한 사람의 굴복이 어찌하여 역사상 엄청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 역시 수많은 모욕에 부딪힐 때 다른 쪽 뺨까지 대시는 분이라고 하신다. 인간들의 경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어떠한 굴욕에 직면하더라도 자신의 절대성을 견지하며 자신을 배신한 천사장까지 사랑하는 분이다. 하나님도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신다. 그러나 그 방법은 오직 참사랑의 원칙을 통해서 사탄을 자연 굴복시키는 것이다.
종교 경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말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돌려대고, 누가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주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라.
마태복음 5.38-41(기독교)
설사 그대에게 주먹질하는 자라도 되갚음 하려 하지 말라. 다만 그의 발에 입 맞추라.
아디 그란트, 샬로크, 파리드, p.1378(시크교)
복수할 마음으로 남을 모욕하기보다는 모욕을 당하는 사람, 아무런 대꾸 없이 비난을 듣는 사람, 여호와의 사랑 힘으로 선한 일을 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갖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밝히는 태야’ 같다.
탈무드, 요마 23a(유대교)
불자들아! 만일 남들이 욕하거나 법을 비방하거나, 또는 승가를 매도한다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성을 내거나 악의를 품지 말라. 만일 그로 인하여 너희가 성을 내거나 해칠 마음을 낸다면 그것이 너희의 고요한 마음을 흩트려 놓을 것이니라.
디가 니카야 1.3(불교)
상해도 앙갚음도 없게 하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32(이슬람)
승리는 원한을 낳는다. 패자가 고통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마음이 평화로운 자는 승패를 버리고 행복하게 산다.
법구경 201(불교)
모욕과 학대에도 불구하고 성내지 않고 견디어내는 사람, 그의 힘센 군대가 인내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법구경 399(불교)
하나님보다 더 자신이 들은 모욕을 잘 참는 자가 없도다.
부카리 및 무슬림 하디스(이슬람)
주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해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후서 3.9(기독교)
수행승들이여, 양쪽으로 날이 선 톱으로 천한 도둑들이 사지를 갈라놓는다 할지라도, 만약 그의 마음에 적의가 일어난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기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우리는 악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하며, 악한 말을 내뱉지 말아야 하며, 선한 의지와 증오를 여읜 생각으로 자애로운 마음을 내야 할 것이다. 그 도둑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온 세상을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고 적의나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만일 그대들이 톱의 비유에 대한 이 교훈을 항상 마음에 새긴다면, 과연 그대들에게 견딜 수 없는 어떤 조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맛지마 나카야 1.129(불교)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겨 두시오. 성서에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보상하겠다고 주께서 말씀 하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 원수는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 그렇게 하면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얹은 것이 되리라” 했습니다.
로마서 12.19-20(기독교)
어떤 사람이 부처의 선법을 듣고 이를 욕하고 대들면 다만 그를 선으로 대할 것이요, 꾸짖거나 화내지 말라. 그가 나를 욕했지만 내가 받지 않았으니 그가 스스로 가지고 돌아갈 것이며 화는 그의 몸에 미치리라.
사십이장경 7(불교)
말씀 선집
나의 어린 두 소년이 싸울 때 보면, 분하지만 참고 단방에 해치우고 싶겠지만 그런 기분을 다 포용하는 마음으로 그만두는 쪽이 있습니다.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양보해 줍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라든가 혹은 옆에 있는 사람이 누가 더 선하냐를 판단할 때, 관용으로 용서하고 포용한 사람이 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100.84, 1978.10.08)
과거의 역사적인 위인들, 성인들 중에 와서 그 시대에 핍박을 안 받은 사람 있습니까? 그렇게 역사 과정에서 반대 받게 될 때, 내가 옳다고 변명한 사람들은 성인 축에 못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역사와 더불어 그런 비난을 받고 한을 품었지만, 묵묵히 입을 다물고 갔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시대의 승리자로서 다시 등장한 것은 왜냐? 악과 더불어 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0.34, 1975.10.04)
예수님이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한 것은 완전히 주기 위해서는 오른편 뺨을 맞으면서 왼 뺨까지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돌아오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게 되면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까지도 복을 빌며 죽어갈 수 있었던 것도 완전히 투입하고 완전히 주고 가자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수의 나라까지도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나중에는 로마제국까지 기독교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방향을 역사적으로 뒤집어 놓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69.88, 1973.10.20)
세 번 때려서 승리한 사람이라도 열 번 양보하는 사람에게는 굴복당하고 맙니다. 예수님도 그런 법을 지켜 왔던 겁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그렇잖습니까? 선한 사람은 자기를 희생하려고 합니다. 주먹 잘 쓰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매를 맞고도 사랑으로 포섭하려고 하고, 티 없이 넘어서서 그 가정까지도 희생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나님이 그래서입니다. 우주의 중심 되는 그 분이 그렇게 나감으로 말미암아 선의 표준이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한 길을 통해서 선의 세계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는 종교인들은 종교 자체, 믿는 사람 자체를 희생해야 되고 종교 단체를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101.69, 1978.10.28)
여러분은 이런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아, 하나님이여, 선조들이여, 나를 반대하는 사람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반대하지 못하게 하소’ 이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보다는 불쌍한 사람을 구해 주겠다고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복을 빌어 줘야 된다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가인 아벨이 하나 되는 자리를 언제나 취하기 위해서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거기에 하나 된 그 자리를 취하면 내가 망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보면 뉴욕 타임즈가 나의 원수요, 워싱턴 포스트가 나의 원수인데 신문에 낼 것 있으면 뉴욕 타임즈에 내주고 워싱턴 포스트에 내주라고 합니다. 그거 이상하지요? 나는 언제나 완성한 아벨 자리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승리한 아벨 자리에 서겠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욕을 먹으면서도 꾹 참고 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십니다.
(89.114, 1976.10.04)
사탄이 하나님께 ‘하나님! 애초에 저를 천사장으로 세우셨을 때에는 일시적인 사랑으로 세우셨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사랑을 위해 세웠습니까?’하고 질문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생각해 봐요.
하나님은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서 세웠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일시적인 사랑으로 세웠다고 하면 일시적인 하나님이 됩니다. 영원히 사랑한다고 하는 기준을 갖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탄 앞에 하나님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탄이 아무리 반대해도 그를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무저항주의자’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이 지구상에 천국이상의 세계를 성취할 때까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타락하여 사탄이 된 천사장을 사랑해야 합니다.
(316.79, 2000.02.10)
하나님은 당장이라도 사탄이나 인간을 전부 다 쓸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의 전능성이 깨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이 하나님을 대해 가지고 말하기를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요? 이러한 죄 때문에 하나님은 깨져 나가는 분이요?’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범을 안 받기 위해, 사탄이 화살을 쏘게 된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네 힘을 다하고 네 모든 것을 다하더라도 결국은 내가 지은 판도권 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입장에 세워야 될 것이 아니냐. 기가 막힌 장면이요, 용서할 수 없이 참을 수 없는 장면이지만, 기가 막히니까 참아야 되겠고, 참을 수 없더라도 참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하나님의 권위가 생겨나고, 그러므로 하나님다운 자리, 하나님의 전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이 모른다고 한번 뒤집어 박았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면 우주는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도 다... 하나님이 생각을 다시 해서는 안 되는 그런 비참한 하나님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인내가 얼마나 귀하다는 걸 알았을 것입니다. 인내가 얼마나 귀하냐? 이렇게 보게 되면 인내는 재출발의 동기요, 재창조의 동기가 될 수 있다 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참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언제나 저길 점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76.219-220, 1975.03.02)
참회
참회는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본연의 자신을 찾아가는 첫 단계이다. 죄와 집착, 그릇된 견해 등을 한결같이 인정하고 극복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신앙 길을 출발할 수 있다. 우리에게 축적된 죄와 기만은 하나님 실존의 인식, 감지를 왜곡시키는 장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죄 사함과 인간의 헛된 망상 제거의 전제조건은 무엇보다 참회이다. 하늘은 뉘우치는 자의 삶에 다시 한 번 은사를 베푸시는 것이다.
참회 내용을 기도를 통해서 조목조목 열거해야 한다. 가슴에서 타져 나오는 통성과 통한의 눈물의 기도, 과거의 잘못을 총 탕감하는 강렬한 의지의 기도, 그것이 참회다. 그 후 용서와 해방, 새로운 통찰이 삶의 방향성을 설정해 줌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참회다.
문선명 선생은 참회란 개인적 죄상을 후회하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인은 역사적 열매로 태어난 존재이며, 나아가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대표한 존재다. 따라서 개인을 넘어서 조상들의 잘못, 국가의 잘못, 세계의 잘못까지 모두 참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참회를 통해 보다 심오한 경지로 들어가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이상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무한히 품고 싶었지만 우리의 마음에 안착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곡절과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내용 모두를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회를 통해서 영혼의 깊은 곳에 스며든 내적 자아를 발견하는 여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1. 죄의 인정, 고백, 그리고 참회
종교 경전
진실로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와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자를 사랑하시도다.
꾸란 2.222(이슬람)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복음 3.2(기독교)
하나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터지고 찢어진 마음을 경멸하지 아니하십니다.
시편 51.17(기독교)
악을 감추면 악이 악을 끌어당겨 불어나리라. 그러나 스스로 악을 숨기지 않고 뉘우치면 죄가 말라 죽으리라. 이런 까닭에 모든 부처들이 이르기를, 지혜로운 이는 죄악을 감추지 않는다고 하였느니라.
반열반경(불교)
후회하지 않게, 또는 애석하지 않게 미리 걱정하고 ‘잘못이나 실책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은’ 오직 한계를 지킴으로써 이루어진다. 또 미리 겁내고 허물을 없게 하는 일은 오직 ‘잘못을’ 후회함에 있느니라.
역경, 계사전 1.3.4(유교)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이사야 64.6(기독교)
선의 뜻대로 생각했어야 하고, 신의 뜻대로 말했어야 하며, 신의 뜻대로 행동했어야 하리라.
만일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며,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죄를 뉘우치노라.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회개하며, 온 마음으로 남김없이 회개하노라.
파테트 6(조로아스터교)
우리의 죄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우리의 악행은 끝이 없으니,
오, 주여!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으리는 극악부도한 죄인이니 헤어날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오, 주여! 경애하는 주여!
당신이 저울질한 우리의 행위는 당신의 궁전 어느 곳에도 둘 곳이 없을 것이로되,
구루의 은총으로 우리를 용서하시어 당신과 하나되게 하소서.
아디 그란트, 샬로크 바드히크, M.3, p.1416(시크교)
나는 자신의 죄에 대해 자문합니다. 오, 바루나여,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나는 그것을 묻고자 지혜로운 자들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현자들은 모두 나에게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위대한 신 바루나가 너에게 화가 났다.”
오, 신아여, 그런데 당신이 당신의 악사와 친구를 파멸시키고자 했던 나의 가장 중대한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 신이여, 누가 전혀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아는지 나에게 말해 주십시오. 그래서 곧장 부복하여 내가 용서를 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리그 베다 7.86.3-4(힌두교)
베로 내가 정토에 대한 참된 믿음에 귀의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슴에는 온 마음을 다하는 성실함이 없었네.
속임수와 거짓이 내 몸 속에 있으며, 내 영혼에는 청정한 빛이 없도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사람들은 근면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영혼에는 탐욕과 분노, 그리고 의롭지 못한 기만으로 가득하며, 그들의 몸속에는 거짓되고 교활한 승리감이 가득하도다.
내 가슴속의 악이 너무 강하여 나는 그것을 극복 할 수 없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은 뱀의 독과 같으니, 이 독이 섞인 나의 의로운 행위들조차도 거짓된 행위라고 불러야 하리라.
내가 그와 같고 나의 영혼에는 아무런 진실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이름의 공덕, 깨달은 그의 선물은 설사 나는 단지 나라 할지라도 나의 말을 통해 온 세계에 두루 퍼지네.
내 영혼에는 아무런 자비심도 없네.
내 벗의 선행은 내 두 눈에 달갑지 않네.
만일 자비의 방주, 무한한 지혜의 거룩한 약속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겠는가?
그 마음의 뱀의 독 같은 교활함과 기만으로 가득찬, 나는 의로운 행위를 실천할 수가 없네.
만일 우리 아버지의 선물에 귀의처를 찾지 않는다면,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
신란(불교)
말씀 선집
‘회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그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희생하고 봉사해야 할 도리에 어긋난 모든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105.92, 1979.09.30)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와서, 맨 처음 이스라엘 민족 앞에 경고한 것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99.75, 1978.09.01)
여러분들도 잘 알지만, 부모한테 잘못한 자식이 그 잘못된 것을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물이라는 걸 흘려야 됩니다. 눈물이라는 것을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지은 녀석이 있으면 어느 나라나 벌을 주는 것입니다. 몽둥이로 칩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그런 벌이... 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치는 것입니다.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뭘 하느냐?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겁니다. 모든 분야에서 제재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눈물을 흘리는 데는 많은 아픔을 느껴야 됩니다. 자기가 잘못한 데 대해서, 죄지은 데 대해서 그것을 매 맞는 것 이상, 고통 받는 것 이상 아프게 느끼지 않고는 회개의 길이 있을 수 없다 하는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99.77, 1978.09.01)
여러분은 회개했습니까? 회개도 못한 사람이 누구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회개했다는 공인을 받지 못해 가지고 누굴 구해 줍니까? 어떻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죄지은 것을 용서도 안 받고 죄를 판결할 판사가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느껴봤습니까? 역사적인 죄를 짊어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지은 역사적인 죄를 짊어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세계적인 현재의 죄를 짊어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미래의 죄까지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3대 죄를 짊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99.90, 1978.09.01)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천륜의 원칙을 파괴하고 하늘과 인간의 인연을 유린하고 인간과 만물의 인연을 파괴한 죄, 심정문제에서 지은 죄를 용납해 주십시오’ 해야 됩니다. 그렇게 히개함으로써 용서받고 승리하여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다면 만사는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회개자를 찾아 나오십니다.
심정을 통한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물건이 자기 것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심정을 통한 사람은 세상의 어떤 물건을 가져오고 가져가도 아버지에게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천국 세계에서는 이웃집에 가서 말없이 먹고 싶은 것 좀 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정적으로 연결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심정을 유린한 죄 이상 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한 죄인이요, 만물의 심정을 거부한 죄인이요, 심정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게 한 방해꾼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고 심정을 걸어 놓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9.185, 1960.05.08)
요즈음 미국으로 말하면 뭐 민주주의의식이고 사람은 다 마찬가지인데 누구는 뭐 어떻고, 자유인데, 부끄러움이 어디 있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게 어디 있느냐는 사상이 강하지요? 여러분들은 부끄러운 것을 생각해 봤습니까? 여러분이 죄된 의식을 한번 가져 봤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역적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역적의 아들이라면 당당하겠습니까? 또, 강도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당하겠습니까? 그 다음에는 또 말할 수 없는, 짐승 같은 치욕을 느끼는 불륜한 사랑관계를 갖고 있으면 당당하겠느냐는 말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그런 죄를 졌다면, 그런 죄를 진 사람의 아들딸이라면, 그런 후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얼굴을 들고 ‘아, 나에게는 자유가 필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또 ‘나는 이 자리에서 그냥 그대로 자리 잡아야 되겠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누구를 막론하고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은 당연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떳떳하고 자유롭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나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든가 거꾸로 뒤집어지든가, 청산하는 문제가 있어야 됩니다.
(66.14, 1973.03.11)
부족한 저희들, 어찌 아버지 앞에 나올 수 있는 저희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하늘을 대하여 얼굴을 들 수 있겠사옵니까? 저희 자신들은 천만번 죽어도 마땅한 존재들이고, 죄악의 형틀에 사로잡혀 심판의 고난을 당해 마땅한 인간들이옵나이다. 그러기에 저희들, 이 시간 아버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바라고, 아버님의 은사를 바라며 스스로를 직고하는 마음으로 엎드렸사오니, 저희 가진 모든 것을 아버님께 내놓고 옳지 못함이 있거든 모두 청산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2.168, 1957.04.14)
2. 국가적 죄의 회개
종교 경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은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며 나를 찾고 나쁜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리하면 나는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해 주고, 그 사는 땅에 다시 생명을 주리라.
역대기하 7.14(기독교)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굉장히 큰 도시로서 돌아다니는 데 사흘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가 하루 동안 돌아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이 말에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듣고 니느웨 임금도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의 뜻을 모아 니느웨 시민들에게 아래와 같이 선포하였다.
“사람이나 짐승, 소떼나 양떼 할 것 없이 무엇이든지 맛을 보아서는 안 된다.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굵은 베옷을 입혀라.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라.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남을 못살게 굴던 나쁜 행실은 모두 버려라. 하나님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우리를 멸하시려던 뜻을 돌이키실지 아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었다.
요나 3.3-10(유대교)
말씀 선집
지금까지 종교가 다루고, 더욱이 기독교가 다루어 온 것은 개인적인 회개입니다. 개인적인 회개에 치중했지만, 사회라든가 국가라든가 그 이상의 차원에 대한 회개에는 치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라든가 선지자들을 볼 때 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자기 회개보다도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회개시키는 데에 주력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99.75, 1978.09.01)
여러분, 회개했습니까? 여러분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조상들의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그 다음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눈물은 두 종류입니다. 구해 주기 위해서, 회개시키기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두 가지 눈물을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회개가 벌어집니다.
(99.90, 1978.09.01)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면서 먼저 인간에게 무엇을 믿게 하셨는가? 즉, 재창조의 역사를 출발하시기 전에 먼저 무엇을 우리에게 체휼케 하셨는가? 그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먼저는 우리 일신을 대하여 서러워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하셨습니다. 다음에 자기 가정 사회 종족 국가 세계 더 나아가서는 천륜을 위하여 서러워하는 마음이 솟아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4.51, 1958.03.02)
3. 진정한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수반함
종교 경전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진실로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되리라.
꾸란 25.71(이슬람)
잘못했으면 즉시 꺼리지 말고 고쳐라.
논어 1.8.4(유교)
누구든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잘못된 것으로 알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고백함으로써 고치고 장차 그것을 삼간다면 영원한 법에 따라 번성하게 될 것이다.
디가 니카야 1.85(불교)
어떤 사람이 죄를 회개한 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랍비 유다가 이에 대해 말하였다. “두 번씩이나 원죄를 범하게 하는 대상이 자기에게 가까이 있을 경우에는 그 대상을 멀리 하여라.”
랍비 요세 벤 유다가 말하였다. “만약 범죄를 범하게 될 경우에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는 용서를 받게 되지만 네 번째에는 용서받지 못한다.”
탈무드, 요마 86b(유대교)
잘못을 범하고 그것을 속죄한 자는 그 죄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오직 ‘나는 이제 더 이상 그와 같이 행하지 않으리라’는 결단으로 마침내 청정함을 얻으리라...
부지불식간에 혹은 알면서도 잘못을 범하느니, 그 질책받을 일은 두 번 다시 행하지 말라. 죄를 벗어 마침내 청정함을 얻으리라.
자신의 행위에 마음이 즐겁지 못하거든 이를 고쳐 행하고 또 고쳐 행하라. 양심에 걸림이 가실 때까지 죄를 벗어 마침내 청정함을 얻으리라.
마누법전 11.231-234(힌두교)
말하라, 자신에 대해 죄지은 나의 종들이여! 하나님의 자비에 실망하지 말지니, 그분은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도다. 진실로 그분은 관대하시고 자비로우시도다. 징벌이 너희에게 도달하기 전에 회개하여 그분께 회귀하고 복종하라. 그 후에는 너희가 구원받을 수 없나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그 징벌이 갑자기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너희 주님으로부터 너희에게 계시된 훌륭한 것을 따르라. 이는 누구라도 “아, 슬프도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고 조롱한 자 가운데 있게 되었을 텐데”라고 하거나, 또는 그 징벌을 보게 될 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의로운 자들 가운데 있게 될 텐데!”라고 말하지 않게 함이라.
꾸란 39.53-58(이슬람)
너희의 회개를 마지막까지 미루지 않기를 바라노라. 영생을 준비시킬 목적으로 주어진 이 생이 지나며, 보라! 우리가 생을 누릴 동안 시간을 활용하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어두운 밤이 다가오느니라.
너희가 긴박한 위기에 처하고 난 뒤에는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고 할 수 없으리라. 참으로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없으리니, 이 생애에서 너희 육신을 다스린 그 영이 영원한 세상에서도 너희 몸을 다스리리라.
보라! 너희가 죽기까지 회개를 미루면 너희는 악의 영에 사로잡힌바 되어 악마가 너희를 저의 것으로 하며...
몰몬경, 앨마서 34.33-35(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말씀 선집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을 중심삼고 선악의 분기점과 공사의 분기점에서 안팎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에는 사적으로 빠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는 사적인 생활이었다고 회개하며 다시 이를 악물고 공적인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러다가 또 참지 못하고 또 다시 사적인 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가 사적인 쪽으로 들어서는 때가 많게 되고, 그러다 보니 공적인 선(善)과 멀어지는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인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회개해야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31.242, 1970.06.04)
기쁨의 날을 맞이하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어찌하여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고, 어찌하여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그 입장을 알지 못했던가! 하며 회개하고 분통해 해야 합니다. 이렇게 지난날의 자기 생활을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그냥 그대로 동참하고자 하면 안 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3.330, 1964.04.14)
여러분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회개입니다. 이것 못하고 가면 안 됩니다.
(99.110, 1978.09.01)
남을 심판하지 말라
세계의 경전들은 우리 중 누구도 실수로부터 자유롭거나 완벽한 자가 없기 때문에, 비록 타인의 실수가 명백할지라도 그의 잘못을 함부로 심판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모든 경전의 가르침은 네 눈의 나뭇가지를 제거하기 전에 남의 눈의 반점에 대해 뭐라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한다. 문선명 선생은 세 번의 법칙을 말씀하신다. 남을 심판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세 번 되돌아보라는 뜻이다. 나아가 남을 바로잡으려 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사랑하고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종교 경전
심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되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너희도 판단될 것이요, 남을 헤아리는 대로 너희도 헤아려질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그대의 눈에서 티를 배어 주겠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7.1-5(기독교)
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내 잘못은 보기 어렵다. 남의 잘못은 키질하여 왕겨 까부는 듯하고, 내 잘못은 날랜 포수가 제 몸 숨기듯 한다.
남의 잘못을 보는 이는 늘 제 잘못만 재촉하니 잘못은 늘 제몫일 뿐.
법구경 252-253(불교)
비열한 자는 언제나 남의 잘못을 찾고자 안달하느니, 설사 그것이 겨자씨보다 작을지라도 그에게는 태산보다 크게 보이느니라. 그러나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는 모르는 체 눈을 감아 버리나니, 설사 그것이 태산처럼 클지라도 겨자씨보다 작은 것으로 여기려 하느니라.
가루다 푸라나 112(힌두교)
네가 동료의 입장에 서 보기 전까지는 결코 동료를 심판하지 말라.
미슈나, 아보스 2.5(유대교)
계란 바구니를 들고 있는 사람은 돌 위에서 춤을 추지 않는다.
부지족의 격언(아프리카 전통종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남의 선미한 점을 도와 이루게 하고, 남의 사악한 점은 선도하여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소인배는 이와 반대이다.”
논어 12.16(유교)
]어찌하여 당신은 형제를 판단합니까? 왜 형제를 멸시합니까?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서에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나를 하나님이라 할 것이다” 라고 기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우리는 각각 자기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14.10-12(기독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보고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돌아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으며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요한복음 8.3-11(기독교)
참으로 도의 길을 가는 이는 세상을 잘못 보지 않으니, 남의 허물 들추어낼 때 그 일 또한 내 허물인 까닭이다. 남이 그릇되게 행할 때 내 허물인 양 덮어 감싸야 하리, 남의 허물 들추어낼 때 그 일 또한 내 허물인 까닭이다. 이와 같이 남의 허물을 내 것인 양 하면 번뇌를 끊으리라. 미워하는 마음으로 속상하지 않고 사랑으로 애태우지 않으면 편히 잠들어 누우리라.
육조단경 2(불교)
남을 비방하고 자기를 찬양하며 남의 미덕을 애써 모르는 체하지만, 자기는 갖추지도 못한 장처를 자랑하나니, 이로써 스스로 비천하게 되리라. 자기에게는 엄격하지만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며, 나의 장점을 즐거워하되 스스로 갖추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기나니, 이로써 스스로 존귀하게 되리라.
탓트바르타 수트라 6.25-27(자이나교)
말씀 선집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단점이 무엇인가 하면 나뭇가지처럼 이리저리 전부 다 뻗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처음에는 속도가 빠르게 잘도 봅니다. 무엇을 보면 척 벗겨 놓고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며 평은 잘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잊고 있다는 겁니다. 평을 하려면 먼저 자기를 3배 이상 평하고 나서 그것의 3분의 1만 평하라는 것입니다.
(25.93-94, 1969.09.30)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3년 이상 연구하라.
(뜻길, p.193)
내가 마음으로 누가 어떻다고 평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인 내가 책임을 못 했는데 어떻게 남에 대한 평을 하겠습니까?
(89.268, 1976.12.04)
하늘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았다 할진 대는 여러분은 공분의 심정을 갖고 하늘을 대신하여 사탄과 싸울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자신을 중심삼고 심판하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됩니다. 이와 같이 허락하신 은사를 입은 자가 자기를 중심삼고 즐기려 하거나 자신을 중심삼고 남을 심판하려 한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므로 허락하신 뜻 길을 걸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2.201, 1957.05.19)
내 성격이 짧으면 이 면을 메우기 위해서는 남의 간증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들어서 자기 것으로 흡수해서 보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체험담을 들어라! 들어 가지고 남이 말한 그것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하는 것은 사탄편이 되든가 하늘편이 되든가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비판했다 할 때는 사탄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든가 둘 중의 하나로 갈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내가 발전하는데 있어서의 암이라는 것입니다. 사탄편이 됐던 녀석이 하나님 편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생활 있어서 가는 데에 직행을 절대 못합니다. 지그재그로 간다는 것입니다.
(76.141, 1975.02.02)
나 자신을 보라는 겁니다. 상대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나 자신을 봐라 이겁니다. 상대에게 욕을 하기 전에 나 자신에게 욕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 만점, 둘 만점, 셋 만점만 되게 되면, 다음에는 여러분 마을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당장에 돌로 때려죽이려 할 때, 죄 없는 사람이 있으면 돌로 때려죽이라고 하자 다 도망간 것입니다.
(118.245-246, 1982.06.06)
자기부정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심은 잘 보지 못한다.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선행과 거리가 멀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이기심으로 더럽혀져 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밖으로 노출되어 무자비하게 공격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말하는 선은 가식적이고 덧없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자기 긍정과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공허함과 상실로 끝난다. 자기부정은 죽음과 상실로 우리를 이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풍요로운 삶으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역설에 부딪힌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은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가르침은 모든 세계적 수준의 종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내용이다.
문선명 선생도 자기부정의 가치에 대해 강조하신다. 그는 인간 타락에 대한 자신의 통찰력을 기반으로 하여 삶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인간이 이렇게 역설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신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과 이타주의적 성격을 구현하도록 지으셨는데 타락으로 인해 우리는 사탄의 영향을 받았다. 사탄의 본성은 완전한 자기중심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릇된 요소로 오염된 자신을 부정하는 어려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종교 경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원할 것이다.
마가복음 8.34-36(기독교)
목과 마음에 내 것이라는 생각 없고 그것이 없어진다고 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사람, 그를 진짜 수행승이라 부른다.
법구경 367(불교)
모든 이기적인 욕망들을 던져 버리고 아무런 갈망 없이 행하는 자, ‘나’라는 생각이나 ‘내 것’이라는 생각을 여읜 자는 평안을 얻으리니, 죽음의 골짜기를 빠져 나와 불멸에 이르리라.
바가바드기타 2.71(힌두교)
도인은 명성을 얻지 않고, 지인은 덕을 내세우지 않고, 대인은 자기를 없게 한다.
장자 17(도교)
이기심 있는 곳에 그대 있을 수 없고 그대 있는 곳에 이기심 없다. 가르침을 들은 이여, 숙고하라, 이 설명할 수 없는 명제를.
아디 그란트, 마루키바르, M.1, p.1092(시크교)
율법은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자에게 함께한다.
탈무드, 소타 21b(유대교)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참으로 성자의 흐름에 든 자가 ‘나는 예류(預流)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나는 예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습니다. 만이 흐름에 든 자가 ‘나는 예류과를 증득했다’는 생각을 낸다면 그것은 참으로 그에게 자아에 대한 집착이 생긴 것이고, 중생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개아에 대한 집착이 생긴 것입니다.”
금강경 9(불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그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요한복음 12.24-25(기독교)
기억할지니,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는 이를 피할 수 없으며, 불사를 열망하는 자도 결코 이것을 이룰 수 없도다.
나흐줄 발라기, 설교 43(이슬람)
사람의 아들아! 나를 사랑하거든 너 자신을 외면하고, 나의 기쁨을 바라거든 너의 기쁨을 생각지 말아라. 그래야 네가 내 안에서 죽을 수 있고 내가 영원히 네 안에서 살 수 있는니라.
바하울라의 숨겨진 말씀, 아라비아어 7(바하이교)
백척간두에 앉아 있는 그대, 비록 그대는 도에 접어들었다고 할지라도 아직 참된 구도자가 아니다. 장대 끝에서 나아가라. 시방에서 그대의 온 몸을 낱낱이 드러내 보이게 되리라.
무문이 풀어서 말한다. 만일 그대가 백척간두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 자신을 돌아본다면 닦여지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으리라.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말해 보라. 과연 어떻게 그 백척간두에서 발을 내디딜 것인가?
무문관 46(불교)
안연이 인(仁)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를 누르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다. 하루라도 자기를 누르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로 돌아갈 것이다.”
논어 12.1.1(유교)
이 몸은 물거품 같다는 것을 알고 그것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덧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육욕(악마)의 꽃 화살을 꺾어버리고 저승의 염라대왕의 시야를 벗어나리라.
법구경 46(불교)
말씀 선집
절대적인 신앙은 자기를 긍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를 주장할 수 없는 부정의 자리이다.
(뜻길, p.292)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제일 문제가 무엇이냐? ‘나’라는 원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수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기도해 오고 열심히 노력해 온 전부는 나를 승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사탄이 따라오는 줄이 있다면 그 모든 줄을 완전히 끊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주실 같은 것이 쭉 세계에 달려 있습니다. 그걸 면도칼 같은 것으로 싹 잘라 버려야 되겠습니다.
(122.13, 1982.10.31)
예수님 같은 분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느냐? 예수님은 살기를 바라고, 중심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좋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개인을 위주로 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를 망쳤다면, 그 반대의 길이 아니고서는 살릴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역설적인 말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개인을 존중하고, 개인을 보다 중심된 가치적 존재로 인정하는 이 세상을 타파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라’ 할 때 전부 흩어져 갑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를 높여 주겠다’고 할 때 다 좋아합니다.
(67.182, 1973.06.10)
자기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 타락입니다. 이 몸뚱이는 부정을 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의식한 사탄 악마를 제거하고, 위할 수 있는 입장에 섬으로써 하나님에게 귀의하는 것이 종교를 통한 구도의 길이요, 사랑의 이념을 통해서 통일해 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214.65, 1991.02.01)
사탄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있기에 시기와 질투, 과분한 욕심, 혈기도 나오는 것이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 ‘나’ 자가 붙은 것은 다 사탄이다. 자기 자신을 비웃고 심판하라. 사탄은 언제나 나로부터 제일 가까운 자, 제일 좋아하는 것을 통해서 침범해 온다.
(뜻길, p.321)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은 자기로 끝나는 것이요,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이 존속하는 방법은 내가 주체의 자리에서더라도 전체의 대상을 위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 인물이 되겠다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계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적 인물이 된다면 그는 세계적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상 권을 짓밟아버리는 세계적 주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 주체는 세계를 빛내기 위한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공적인 길은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자기를 부정한다고 해서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상대가치에서 자기를 찾고자 하는 데서부터 선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이 발전하는 원칙적인 법도요 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57.63, 1972.05.28)
아시아는 지금까지 탕감만 해왔고, 여러분들은 잘 살아 왔습니다. 옛날의 종교는 탕감을 해야 되었기 때문에 갖고 있는 것을 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전부 다 서구사람들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세우고 물질을 가지니 아시아와 딱 반대라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자기를 중심삼고 물질을 갖고 보니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결여됐다는 것입니다.
(97.67-68, 1978.02.26)
자기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성장해 온 그 기준을 인정하는 이상, 영원히 하나될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민족과 하나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전문분야 이외의 사람과도 하나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될 수 있는 간다한 방법은 무엇이냐 하면 절대 무시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부정함으로 말미암아 어디든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360.192, 2001.11.16)
육적 욕망의 통제
모든 종교에서 궁극적 실재를 갈구하는 구도자는 욕망을 통제하고 육신의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혹독한 자기 통제, 금식, 몇 시간의 참선수행 등을 통해 몸을 치고 몸의 힘을 약하게 하는 것은 모두 육적 욕망에 대항하고 궁극적으로 이것을 제압하는 좋은 방법이다.
사람에게 가장 큰 도전은 성욕 주관이다. 예수님은 유혹에 대해 무자비할 것을 가르치셨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너의 눈을 뽑아버려라.” 실제로 불교의 한 비구니는 자신의 죄는 아니지만 상대방의 죄를 뽑아내기 위해 이렇게 했다고 전해진다. 불교에서는 육신을 하나의 액체와 수액, 담즙, 분뇨 등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로 봄으로써 ‘육신의 메스꺼움’에 대해 명상하는 수행을 장려한다. 이것은 반대 성을 바라볼 때 생기는 성적 욕구를 수그러들게 하기 위함이다. 문선명 선생 역시 몸을 ‘사탄의 무도회장’이라고 여기며 몸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통해 성욕을 자제할 것을 충고하신다.
자아주관과 관련된 말씀은 제12장 ‘자아주관’에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완벽한 자아주관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문선명 선생은 이것이 인간 타락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라고 설명하신다. 자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극단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따라서 종교는 몸을 치고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강도 높고 무자비한 방법들을 개발해 왔다. 몇몇 종교에서는 이러한 수행이 수도원 제도로 체계화되기도 하였다. 모두가 이 길을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목적을 향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1. 육적 욕망의 제어
종교 경전
사랑하는 이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대항하여 싸우는 육적인 정욕을 멀리하시오.
베드로전서 2.11(기독교)
땅에 속한 지체들, 곧 음행과 부정과 욕정과 악한 정요과 탐욕을 죽여 버리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이런 자들 가운데 살면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들, 곧 격분과 분노와 악의와 모독과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 같은 것들을 버리시오.
골로새서 3.5-8(기독교)
주님께서 주신 명확한 징표에 의지하는 사람이 그들 자신의 욕망을 따르면서 그들이 행한 사악함에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같을 수 있겠는가?
꾸란 47.14(이슬람)
오직 육욕을 완전히 근절할 때 우리는 폭력을 버릴 수 있다.
아차랑가 수트라 4.45(자이나교)
소박함을 나타내고, 순박함을 지키고,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망을 적게 한다.
도덕경 19(도교)
마음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욕망들이 포기될 때 필멸자는 불멸을 얻는다네.
가슴을 짓누르는 모듬 매듭들이 풀릴 때 필멸자는 불멸을 얻는다네, 여기 바로 이 생에서.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 4.4.7(힌두교)
빛과 어둠처럼 즐거움과 고통은 일상사임을 알고 다만 자신의 마음과 욕망을 다스리라.
아차랑가 수트라 2.78(자이나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경계해야 할 일이 세 가지 있다. 소년기에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색을 경계해야 하며, 장년기에는 혈기가 굳세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기에는 혈기가 쇠진해지니까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
논어 16.7(유교)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세 가지란 어떤 것들인가? 즐겁다는 느낌, 괴롭다는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다는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즐겁다는 느낌은 괴로움이라고 알아야 한다. 괴롭다는 느낌은 독화살이라고 알아야 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다는 느낌은 덧없다고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에 대해 실로 이렇게 알았을 때 그 비구는 성자이며 올바로 깨달음이라고 일컬어진다.
이티붓타카 47(불교)
말씀 선집
마음과 몸이 대등하기 때문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몸뚱이를 약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득세해 가지고 약하게 된 몸뚱이를 몇 달 동안 끌고 넘어가게 되면 몸뚱이를 다시 올려놓아도 올라올 수 없게끔 습관화 되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자기가 계획하는 모든 일이 하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잘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냥 놔두어도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양심을 위주로 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생애를 엮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 생활의 목적입니다.
(38.272, 1971.01.08)
종교는 어떻게 해야 몸뚱이를 때려잡을 것이냐 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제로 구속해야 합니다. 몸뚱이가 하자는 것은 전부 다 용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극장가에는 가지 말라, 서울에 가거든 종삼 거리는 다니지도 말라’고 하며 전부 막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처녀의 궁둥이를 따라다니지 말라. 처녀들은 남자를 전부 도둑놈으로 알고 곁눈질하지 말라’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처녀들은 연애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또 통일교회 총각들은 연애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강제로 연애하지 말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하고 싶으면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강제로 못하게 하면 더 합니다. 자기들이 해보고 스스로 나가 자빠져야 하는 것입니다.
몸뚱이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선을 향해 가는 길은 극복을 요합니다. 몸뚱이의 욕망을 잡아서 모가지를 비틀라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교만을 좋아합니다. 전부 자기를 위하려고 합니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식입니다. 몸뚱이는 그런 것을 원합니다.
(39.193, 1971.01.10)
젊은 녀석들, 여자를 보게 되면 유혹되고 싶은 생각 끊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듣던 것 끊어 버리고, 세상에서 좋다는 것, 이거 전부 다 일시에...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몸을 치라는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참된 종교일수록 몸을 희생시키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종교 역사를 봅시다. 고행을 시키고 희생봉사해라! 합니다. 왜 그러느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 가고 싶거들랑 인간 지옥세계에 가서 천국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비참한 세상이요, 행복한 세상이에요? 비참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비참하고 혼란하고 혼돈된 세계가 행복한 세계가 되려면 다 밥 먹고, 그저 놀고, 술 마시고, 춤추고 그래 가지고 그 행복한 세계가 언제 이루어집니까? 더 비참해집니까, 덜 비참해집니까? 더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론을 내야 됩니다. 이런 비참한 행복한 세계를 찾으려는 사람은 더 비참한 길을 뚫고 넘어가야 됩니다. 더 비참한 데서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없거들랑 하나님도 없고 다 없는 것입니다.
(91.286-287, 1977.02.27)
몸을 치는 것은 사탄을 없애자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몸을 침으로 말미암아 그 몸을 누가 점령할 수 있는가 하면 성신이 점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몸을 치는 것은 성신이 몸을 점령하게 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 몸을 치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을 치는 것이 되므로 내 몸을 침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치고 사탄을 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점령했던 것을 대신 성신이 점령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1.126, 1956.06.27)
2. 몸에 대한 혐오감과 부패한 감각
종교 경전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그 꺼지지 않는 불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체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저는 발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마가복음 9.43-47(기독교)
지바카의 싱그러운 망고 숲으로 걸어가는 수바 비구니를 한 사나이가 막아섰다. 수바 비구니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섰는데, 내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선생님, 남자가 승가에 속한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닌 줄 압니다.”...
“그대는 젊고 아름다우며 고결하다. 출가자의 삶에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그 가사를 벗어던지고 이리로 오라. 꽃이 만발한 숲 속에서 함께 즐깁시다... 만일 당신이 나의 말대로 따라 준다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안락한 생활의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갑시다...”
“당신은 썩어 없어질 연약한 육신, 주검으로 가득찬 이 거짓된 망상에 흘린 나머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함부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대의 눈은 숲 속의 암사슴 혹은 요정의 눈과 같습니다. 그대의 눈을 바라보노라면 애욕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불타오릅니다...”
“오, 어리석은 자여! 눈먼 소경이여!... 사람의 눈이란 속이 텅 빈 나무의 가랑이에 있는 자그마한 공과 같은 것이며, 엷은 막으로 된 거품이며, 끈적거리는 물방울을 흘리기도 하고, 눈곱으로 더럽혀지기도 하며, 온갖 측면들이 눈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혼합물, 그것이 바로 눈이 아니더이까?”
마침내 수바 비구니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눈을 뽑아 그에게 주었다. “자, 여기 당신의 눈을 가지시오.” 그녀는 마음의 모든 집착을 여의었기에 아무것에도 어긋나지 않았다.
사나이의 애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곧 수바 비구니에게 용서를 빌었다. “오, 계행이 청정한 여인이여! 거룩한 여인이여! 이와 같은 일은 다시 없으리. 그대는 나의 그릇된 마음을 밝히 일깨워 주었도다. 타오르는 불기둥을 끌어안았으며, 사나운 독사를 움켜쥐었도다. 부디 나를 용서하시기를 빕니다!”
사나이로부터 벗어나 수바 비구니는 깨달은 자들의 수장이신 부처께로 갔다. 그곳에서 부처의 거룩한 덕성을 보고 여인의 눈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테리가타 366-399, 수바 지바캄바바니카 수트라(불교)
비구들이여, 몸은 자아가 아니다. 만일 몸이 자아라면 이 몸은 병에 걸리지 않아야 할 것이며, 우리는 몸에 대해 “내 몸을 그와 같이 두자. 내 몸을 그와 같이 두지 말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은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병에 걸리며 또한 우리는 몸에 대해 “내 몸을 그와 같이 두자. 내 몸을 그와 같이 두지 말자”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몸은 영원한가, 아니면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고통인가 즐거움인가? [세존이시여, 고통입니다.] 그러면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본래 변하기 쉬운 것, 그것을 놓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과연 적합한가? [세존이시여, 실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모든 사람들은 과거에 있었거나 미래에 있거나 또는 현재에 있는 모든 것, 안이나 바깥, 미세하거나 조대한 것, 저급하거나 탁월한 것,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그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겨야 바른 통찰이다.
상윳타 니카야 3.68(불교)
사악한 생각이 사라짐을 즐거워하고 육신의 방종을 관하며 늘 생각이 깊은 자는 악마의 속박을 끊으리라.
법구경 350(불교)
입은 침과 이 사이에 낀 이똥으로 가득한 그릇.
코는 콧물과 코딱지와 타액이 흐르는 계곡, 눈은 눈곱과 눈물이 고인 오물 그릇.
몸뚱이는 똥, 오줌, 허파, 간으로 채워진 가죽 부대.
눈이 흐린 자는 여인을 보지 않으며 다만 그녀의 몸뚱이를 탐한다.
자손을 이으려고 융기된 구멍들을 지닌 이 더러운 몸뚱이, 어리석고 미혹된 자들은 이를 쾌락의 대상이라 부른다.
본디 더러운 씨앗으로 생겨난 그것을 더러운 줄 알면서도 어찌 그대는 그것을 갈망하며 탐하는가. 다만 피와 살을 섞으려 덤비는가?
땀에 젖은 살갗으로 싸인 더러운 살덩어리, 그 위에 눕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다만 여인으 오줌보 위에 누워 있느니.
나가르주나, 보의 화환 149-157(불교)
물러가라, 내 그대를 증오하나니!
그대, 어리석은 이여! 내 옷깃을 잡지 말라.
암소는 스스로 목숨을 걱정하고
푸주한은 족이지 못하여 애를 태우누나!
경건한 이들은 선행이 부족함을 염려하고,
사악한 이들은 죄악을 생각하누나.
나는 나의 영혼을 걱정하고 그대는 탐욕을...
에이, 이 육신은 싫어라!
냄새나는 오물단지, 오줌통,
걸어다니는 뼈다귀, 화농한 고름 덩어리!
이러한 육신을 애착하여
어찌 그대는 자신을 파멸로 인도하는가?
아카마하데비, 바차나 15와 33(힌두교)
말씀 선집
이 눈과 코와 귀와 입과 손 모두는 두 길을 접촉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보는 눈은 악마의 눈이 되는 것이요, 나를 위해서 맡는 코는 악마의 코가 되는 것이요, 나를 위해서 듣는 귀는 악마의 귀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앞에 놓든가 세계를 앞에 놓든가 하늘땅을 닾에 놓고, 횡적으로는 세계를 앞에 놓고 종적으로는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앞에 놓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위하는 눈을 가지고 보아야 됩니다. 그 눈은 자기의 장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공부하는 것은 나라를 살리기 위한 것이요, 만민의 해방을 위한 것입니다. 위하는 것입니다.
(214.66, 1991.02.01)
저녁에 돌아와 가지고 얼굴을 씻게 될 때에 거울을 보고 ‘요놈 눈, 코, 귀, 손, 발, 이놈이 언제나 문제야’ 하면서 ‘너 오늘 죄된 놀음 안 했어?’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눈으로 보고, 말로 하고, 행동으로 하고, 뭐 권력으로 한 그런 것을 전부 다 싹싹싹싹 따돌려 권고해 가지고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122.266, 1982.11.21)
이놈의 눈깔이 원수입니다. 이놈의 귀때기가 원수입니다. 이놈의 콧대가 원수입니다. 이 입이 원수입니다. 생각이 원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을 만들고, 하나님의 귀를 마들고, 하나님의 코를 만들고, 하나님의 입을 만들고, 하나님의 손발을 만들어서 언제나 하나 될 수 있어 가지고 세계를 위해 살 수 있는 나를 찾아야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옥과 하늘의 경계선이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면 천국이요, 왼쪽으로 가면 지옥입니다. 왼쪽으로 가면 지옥 왔다 갔다 합니까, 안 합니까? 뜻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위해 죽든 살든 가자! 아직까지 여기에서 일생 동안 이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세 종류 가운데 어떤 종류에 속합니까?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이 세 종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다 알 것입니다. 절대 모르지 않습니다. 여기(A) 있을 거예요, 여기(B) 있을 거예요, 여기(C) 있을 거예요? 다 에이(A)라고 하니 욕심들은 많습니다. 힘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부 반대입니다. 지금까지 본 것의 백 퍼센트 반대입니다.
젊은 녀석들, 여자를 보게 되면 유학하고 싶은 생각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듣던 것 끊어 버리고, 세상에서 좋다는 것, 이거 전부 다 일시에...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몸을 치라는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참된 종교일수록 몸을 희생시키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종교 역사를 보세요. 고행을 시키고 희생봉사해라! 그거 왜 그러느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91.286, 1977.02.27)
여자들에게 유혹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얼굴이 예쁘게 생겼으면 ‘나 이 얼굴 싫다. 아이구!’하며 반대의 태도를 취해야 됩니다.
(116.19, 1981.12.01)
여러분이 분통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자신의 몸뚱이가 악마의 무도장이 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마들의 사랑의 자리가 돼 있습니다. 악마의 사랑을 통해서 악마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피가 지금 내 몸뚱이에서 본연적 인격을 유린하기 위하여 천년만년 살고지고 하는 힘의 세력권으로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청산하는 데는 나라에서도 청산할 길이 없습니다. 나 자신이 해야 됩니다.
(214.285, 1991.02.03)
나 자체에는 사탄의 피가 들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탄의 소유욕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탄이 들어와 있다, 자기 중심삼은 사탄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나’라는 존재 가운데 사탄의 사랑과 사탄의 욕심과 사탄 자체가 나를 감투 씌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사탄을 뽑아내야 됩니다. 사탄의 핏줄을 뽑아내고, 사탄의 욕망을 뽑아내고, 자기중심적인 사탄의 요소를 빼 버려야 됩니다. 무엇을 가지고 뽑아 낼 수 있느냐?... 하나님이 종교를 세우고, 복귀섭리, 구원섭리를 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이것을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115.42, 1981.10.28)
종교는 몸이 좋아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부 버려야 합니다. 먹는 것도 버리고, 자는 것도 버리고, 좋아하는 것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먹고 자고 좋아하는 것을 다 버리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본래 먹고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육신을 통해서 사망의 행로가 되었으니 이것을 추방하라는 것입니다. 몸에 폭탄을 터뜨리라는 것입니다. 원자탄을 터뜨리라는 것입니다. 전부 점령하라는 것입니다.
몸은 높임받기를 좋아하고 편안한 자리를 좋아합니다. 또한 울뚝불뚝한 것을 싫어하고 포동포동하고, 매끈매끈하고, 폭신폭신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 몸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투실투실한 것, 울뚝불뚝한 것, 딱딱한 것 등 몸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몸은 높아지기를 좋아하고 남의 돈을 빼앗아서라도 잘 먹으면 좋아합니다. 남이야 어찌되든 잘살면 좋아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근성을 전부 때려 부숴야 합니다.
(18.66, 1967.05.21)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돌아다니고 해와는 그늘 아래서 울고불고 할 때 벗고 사니까 천사장이 봐 주면서 업고 다니고 앉아 가지고 무릎에 앉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식기가 닿고 그러는데 사방에서 동물들도 새께 치는 것을 보게 되면 ‘저렇게 해 가지고 새끼 치는구나’하는 것입니다. 한번 ‘응’ 하고 힘만 주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의 생식기가 맞닿으면 사람들은 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타락한 때에 그렇게 돌아간다는 겁니다.
여러분 남자들에게 여작 그렇게 대면 가만히 있겠어요, ‘응’ 하겠어요? 최고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와서 생식기를 만질 때 그것이 일어서요, 안 일어서요? 남자들? 그게 일어서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무리 미인을 앉히더라도 그 생식기가 일어서서 막대기 같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됩니다. 탕감복귀입니다. 그게 탕감입니다. 만약에 미인이 앉아서 그것을 강제로 집어넣는다면 차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려 버려야 됩니다.
(285.201-202, 1997.05.04)
부와 재물에 초연한 삶
부와 소유물은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을 얽어매는 족쇄와 같다. 탐욕과 물욕, 증가하는 자기 중심한 욕망 등이 우리를 이끄는 것들이다. 부의 집착은 ‘모든 악의 근원’ 이라고 교시되어 왔다. 그리고 물질주의는 인간의 영성 계발에 엄청난 장애물이 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하늘 향한 길에서 부와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승려들과 수녀들은 전형적으로 청빈한 인생을 영위할 것을 맹세했다. 일반인들 역시 보다 큰 선을 위해 자기의 부를 희생함으로써 집착에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자선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다른 이들은 병든 가족을 간호하기 위해 좋은 직장도 포기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한 헌신에 뛰어든다. 이들은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초조함을 버리고, 봉사와 베풂을 위해 물질을 모음으로써 마음의 평화와 새로운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문선명 선생은 무소유의 가르침을 참사랑 철학과 관련시켜 말씀하신다. 하나님 사랑은 독점을 배제하는 심적 태도에서 시작한다고 하신다. 반면,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소유물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한다. 이 원리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국가 복지와 지구성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몰락의 원인인 돈
종교 경전
비방하고 중상하는 자들에게 고통이 있으리라.
그들은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계산하고 그의 부가 그를 영원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느니라.
꾸란 104.1-3(이슬람)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데모데전서 6.10(기독교)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여호와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신명기 8.3, 마태복음 4.4(기독교)
자신의 부유함을 추구하지 말고 성공을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것은 자신의 천성을 버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 29(도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기독교)
부유함은 어리석은 자를 황폐케 하지만 피안을 추구하는 자들을 다칠 수는 없다.
어리석은 자는 향락의 욕망으로 남과 함께 스스로를 망친다.
법구경 355(불교)
그들은 말한다. “나는 오늘 이것을 얻는다. 내일 나는 저것을 성취할 것이다. 이 재물은 네 것이며 저것 또한 내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내 적들을 무찔렀으며 다른 적들 또한 쳐부술 것이다. 나는 신과 같지 않은가?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향수한다. 나는 성공했다. 나는 강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부자이며 지체가 높다. 누가 나와 비견할만한가? 나는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으며 나의 관대함에 흡족해한다.” 무지에 미혹된 자들의 행태는 이와 같다. 스스로의 탐욕에 속박되고 미혹의 그물에 사로잡혀 전일되지 못한 마음에 휘둘리며 그들은 어두운 지옥에 떨어진다.
바가바드기카 16.13-16(힌두교)
그들은 상품이나 오락을 보게 되면 너를 남겨두고 그쪽으로 흩어지나니, 말하라,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오락과 상품보다 더 좋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공급자이시니라.
꾸란 62.11(이슬람)
재산이 많으면 그만큼 먹여 살릴 사람이 많은 것, 그러니 많은 재산은 눈요기밖에 될 것이 없다. 막일을 하는 사람은 많이 먹든 적게 먹든 단잠이나 자지만, 부자는 아쉬운 것 없어도 뒤척이기만 하며 제대로 잠을 못 이룬다. 하늘 아래서 나는 기막히게 억울한 일을 보았다. 일껏 재산을 모아놓았는데 그 재산 때문에 우환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불운이 닥쳐 재산이 달아나 제 몸에서 난 아들에게도 물려줄 것 하나 없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처럼 알몸으로 돌아가더라. 일껏 수고해서 얻은 것을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하니, 이 또한 기막힌 노릇이다. 사람은 세상에 올 때처럼 빈손으로 갈 것뿐이라, 바람을 잡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전도서 5.10-15(기독교)
그대는 다만 행동할 권리를 지닐 뿐이며 결코 행동의 결과에 대한 것은 아니다. 보상을 위한 행위는 결코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행위의 포기를 원해서도 안 된다. 아르주나여, 자신 속에 확립된 사람으로서 이기적인 욕망 없이 성공과 실패를 평등하게 여기며 이 세상에서 행동하라, 수련은 완전한 평등심이 때문이다.
집착 없는 태도를 귀의처로 삼아라. 그러면 풍부한 영적 앎을 누릴 것이다. 결과를 행위의 동기로 삼는 자들은 가련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행하는 것의 결과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이 하나로 통일될 때 모든 허망한 염려는 사라진다. 잘된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염려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가바드기타 2.47-50(힌두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나는 원한다’ 는 욕망과 ‘나는 가질 것이다’ 라는 욕망을 버려라! 만일 이들을 여읜다면 그대는 자신을 안내하는 바른 눈을 갖추어 이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숫타 니파타 706(불교)
우리가 불로 황금을, 황금으로 우리 종들을 시험하노니 이 세상일에 몰두하지 말라.
바하울라의 숨겨진 말씀, 아라비아어 54(바하이교)
말씀 선집
돈이라는 게 추한 것입니다.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입니다. 똥을 묻혔다고 사람이 나빠지지 않지만, 돈을 잘못 쓰면 똥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선생님은 돈을 안 씁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안 쓰는 것입니다. 돈을 쓸 수 있으면 다 줘 버립니다.
(381.304, 2002.06.17)
돈이 있으면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다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이 중요하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돈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가질 때 돈의 사랑의 주인이 되고 싶으냐, 돈의 권력의 주인이 되고 싶으냐? 돈이 필요하지만 전체를 위해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116.18, 1981.12.01)
세계평화는 평화로운 국가가 먼저 있어야 됩니다. 국가의 평화는 가정의 평안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소망해온 권력이나 부귀나 지식이 평화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행복은 사랑의 소유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요, 외적인 생활의 편리에 따라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참사랑과 더불어 있을 때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도 무한한 행복도 참사랑으로 남을 위하고 베풀 때, 그리고 그 베푼 것이 전체를 돌아 다시 찾아올 때만 확실하게 얻게 되는 것입니다.
(294.69, 1998.06.11)
하나님이 상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소유관념이 없습니다. 자기 소유관념이 있으면 백 만큼 소유하면 백 이상 가치 있는 것을 못 줍니다.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쓸 돈이다. 이것은 내몫이다.’ 하는 것은 사탄 편의 사고방식입니다.
(287.265, 1997.10.05)
인류는 전쟁과 고통이 없는 평화의 세계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보다는 오히려 점점 심해 가는 물질만능주의 경향과 함께, 국가 권력과 종교가 바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속에 청소년들의 퇴폐, 가정파탄, 마약과 에이즈 등은 인류의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294.61, 1998.06.11)
저물어 가는 20세기의 모든 선진국들은 지금 모두 한결같은 고민 속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원인은 선진국들이 모두 물질문명의 극치를 구가하다가 이제는 그 물질문명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고 마음을 지배하다 보니 인간의 영혼이 물질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사랑의 몰락입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도시에는 고층누각이 늘어섰지만 인간의 마음은 사막과 같이 거칠어지고 거기에서 참사랑의 오아시스는 찾을 수 없으니 인간생활은 삭막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참사랑이 없으니 인간이 이기주의만 무성하게 되었는데이 이기주의의 최대의 피해자는 아름다운 대자연입니다.
본인은 본 평화회의의 한 주제로 지구, 인간 환경의 회복에 관한 토의를 포함시켰습니다마는 우리의 자연환경은 이제 파괴될 대로 파괴되고, 물과 공기는 오염되었으며, 인류를 보호해 주던 오존층까지 파손되어 있으니 이대로 가면 인류는 스스로 구축한 물질문명 때문에 자멸을 면치 못할 경기까지 이를 것입니다.
물질문명의 극도의 피해는 모든 국가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의 파괴에 있습니다. 가정은 사회의 세포입니다.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수십조의 세포 하나하나가 건전하면 그 몸은 건전한 몸이지만, 그 세포가 파괴되면 그 몸 전체가 약해지고, 결국은 그 몸도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지구상에서 참다운 가정제도가 파괴되어 간다는 것은 곧 세계인류 전체의 파멸이 멀지 아니함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본래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창조하셨던 것과는 정반대의 위치를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21세기는 어차피 하나님이 뜻하시는 본연의 세계로 돌아가는 세기입니다. 물질문명의 시대는 가고, 정신과 마음이 주인이 되는 정신문명의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21세기가 이제 5년 후로 임박해 있는 것입니다. 이때, 개발도상에 있는 국가들은 개발국들의 전철을 밟지 말고, 선진국을 교훈삼아 물질문명의 함정 속에 빠짐이 없이 마음과 정신이 주인 되는 세계로 직접 돌입하여 주기를 열망하면서 절규하고 싶었던 충고의 내용이었습니다.
(271.95-96, 1995.08.23)
2. 희사와 안분지족(安分知足)
종교 경전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마태복음 19.21-24 (기독교)
내가 있는 바와 같이 만일 중생들이 베풀고 나누어주는 일과 과보를 알고 있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 혼자 즐기지는 않을 것이며, 인색의 때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거기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 입 또는 한 조각의 음식이 남아 있다 해도, 만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나누지 않고 혼자 먹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티붓타카 18 (불교)
누가 부자인가? 자신의 몫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자이다.
미슈나, 아보스 4.1 (유대교)
뛰어난 인물(大人)은 모습과 형체를 말할 것 같으면 커다란 하나의 세계(大同)에 융합되어 있고, 커다란 하나의 세계와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없다. 자기가 없는데(無己) 어떻게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겠는가?
장자 11(도교)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1-13(기독교)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였다. 그리고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니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시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니 말며,
마가복음 6.7-8(기독교)
이것이 토라의 길이다. 극히 적은 소금과 물에 의지해 살아야 하고, 땅에 눕고 고난을 겪을 것이며 동시에 토라를 지키며 살 것이다. 이렇게 하는 그대는 행복한 자이며 토라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미슈나, 아보스 6.4(유대교)
공자가 말하였다. “어질다, 안회여! 한 그것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고서 누추한 거리에 사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
논어 6.9(유교)
우리가 모스크에서 하나님의 사도와 함께 앉아 있었을 때, 무사브 이븐 우마이르가 남루한 모피 외투만을 걸친 채 우리에게 왔다. 하나님의 사도가 그를 보자 그는 과거의 풍요로움을 회상하며 흐느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당신들 중 하나가 아침에 외출할 때 입는 외투와 저녁에 외출할 때 입는 외투가 서로 다르고, 접시가 다 비워지기도 전에 다른 접시가 날라져 옥, 당신의 집을 카바를 꾸미듯 꾸미는데 어떻게 당신들과 함께 할 수 있으리오?” 이에 대한 대답을 듣고 나서 그는 다시, “하나님의 사도시오! 그렇다면 앞으로는 예배를 드릴 여유와 필요한 모든 것을 얻게 되고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군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도가 대답했다. “아니요, 당신에게는 그때보다 오늘이 훨씬 나을 것이오.”
티르미디 하디스(이슬람)
말씀 선집
자기 재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재산은 하늘의 재산입니다. 하나님의 것이요, 위하는 사람들의 것이지, 자기를 위하는 재산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건 망하는 것입니다.
(399.18, 2002.12.18)
여러분, 모두 손수건 갖고 있지요? 그 손수건이 자기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금까지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틀렸다는 것입니다. 내게 속한 모든 땅, 집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남편, 아내, 아들딸을 내 아들딸, 내 아내, 내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것이 타락 후에 계승된 병폐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수천년 동안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유권을 부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물에 대한 소유권을 전부 다 부정해야 합니다.
(293.172, 1998.05.25)
천주주의자는 세계까지 제물 삼아야 됩니다. 자기 소유라도 그것을 미련 없이 깨끗이 다 바치고, 그 다음에는 제단까지 필요 없습니다. 제단까지 같이 번제, 불살라 버려야 됩니다. 자기 소유는 없는 것입니다. 제사장 노릇을 깨끗이 해야 돌아서게 될 때 지금까지 제사 드린 승리의 실적이 돌아서는 그 뒤에 달리는 것입니다. 하늘이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342.227, 2001.01.12)
잘 사는 미국을 전부 긁어서라도 아프리카에 갖다 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91.24, 1977.01.16)
돈을 모으되 그 모은 돈은 가지고 내 아들딸 잘 먹이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딸에게 주기 전에 세계를 위해서 주었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 아들딸은 세계를 위한 아들딸이기 때문에 먼저 세계에 주고 나서 아들딸에게 주어야 됩니다. 내 가정보다는 먼저 민족을 위해서 주고 난 다음에 가정을 위해 주려고 하면, 하나님은 내 가정과 나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딸을 먹여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려고 해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기에게 있는 재산 전부를 나라를 위하여 주고 세계를 위하여 주면 희생해 나가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자동적으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26.52-53, 1969.10.18)
경제는 결과입니다. 전부 결과가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결과문제로써 원인을 보는 사람은 없다 이겁니다. 돈이 왜 필요하냐? 돈으로 그저 먹고 살고... 그게 아닙니다. 이게 원인가 이 세계와 하나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 관념이 없습니다. 내가 결과니까 원인을 좋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어머니 아버지를 봉양하고, 우리 식구를 봉양하고, 나라를 위해서 애국하려니 돈이 필요하다, 이게 얼마나 우주적인 관인데, 뭐 나라고 식구고 부모고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도 그 돈을 갖고 있는 걸 좋아하고 부모들도 좋아하고 형도 좋아하고 다 좋아하면 나도 좋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 싫어하는데 나만 좋아하면 그건 망하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이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아야 그것이 우주가 다 좋아하는 것이 되지, 다 좋다 그러지 않고 ‘나만, 나만’ 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117.101-102, 1982.02.14)
모세는 호화로운 바로궁중에서 생활했지만 ‘이놈들!’ 하고 민족을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었기에 민족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뜻길, p.82)
지금까지 선생님의 입장은 세상에서 보게 되면 최고의 입장에 서 있지만 낮은 자리에 가도 그런 균형을 맞추는 겁니다. 아기면 아기들 친구가 되어 주고, 학생이면 학생의 친구, 할머니 할아버지면 할머니 할아버지, 종교인이면 종교인, 학자면 학자, 어디 가든지 균형을 취해 주는 겁니다. 훈련을 해서 세계적인 균형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적인 중심자가 되고 세계적인 주체자가 되는 것입니다.
(299.171, 1999.02.15)
출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가족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지만, 종종 영적 구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정과 가족을 등지고 떠난다. 어떤 섭리적인 인물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런 일을 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경우가 그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수도원 생활의 초기단계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가슴 아픈 이별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신앙자의 출가는 가족의 갈등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기족들이 그의 신앙 길을 가로 막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랑하는 부모와 배우자로부터 반대 받을 것을 예상하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가 따를 수 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이에 대해서 문선명 선생은 가족과 친구와 이별은 복귀 길을 가는 데 있어 필요한 과정이라고 하신다. 그것은 타락한 세상의 습관적인 거짓 사랑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전기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종교 경전
내가 세상의 평화를 주려고 온 줄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그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복음 10.34-37(기독교)
오, 믿는 자들이여! 너희 아버지와 형제들이 믿음보다 불신을 택한다면 그들을 너희 벗으로 삼지 말라. 그들은 죄인들이니라. 말하라. 만약 너희 아버지와 자식, 형제와 아내, 씨족과 너희가 획득한 재화, 너희가 중단될까 두려워하는 교역, 사랑하는 보금자리들이 하나님과 그의 사도들, 그리고 하나님의 길에서 투쟁하는 것보다 더욱 귀중하다면, 하나님이 그의 명령을 주실 때까지 기다려라. 하나님께서는 불신하는 무리를 인도하시지 않도다.
꾸란 9.23-24(이슬람)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마라. 미운 사람과도 만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법구경 210(불교)
이웃을 믿지 말라. 벗이라고 기대지 말라. 네 품에 안겨 자는 아내라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아들이 아비를 우습게보고 딸이 어미에게 거역하며 며느리가 시어미와 맞서는 세상, 식구끼리 모두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나만은 여호와를 우러르고 하나님께서 구해 주시기를 기다리리라. 나의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라면서.
미가 7.5-7(유대교)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노아의 아내와 롯의 아내의 예를 보이셨다. 그 둘은 우리의 두 의로운 종 밑에 있으면서도 그들을 배반하였노라.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느니라. 그녀들에게 말하여지길 지옥으로 들어가는 자들과 함께 불속으로 들어가거라.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파라오 아내의 예를 보이셨다. 그녀는 말하길, 주여 저를 위해 낙원 안 당신 곁에 집을 지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를 파라오와 그의 소행으로부터 구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불의를 행하는 백성으로부터 구하여 주시옵소서.
꾸란 66.10-11(이슬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창세기 12.1(기독교)
내 이름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을 버린 사람은 여러 갑절의 보상을 받을 것이요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9.29(기독교)
하나님의 길을 위해 그의 집을 떠나는 자는 지상에서 수많은 넓은 은신처를 찾게 되리라. 또한 하나님과 그의 사도를 향해 그의 집을 떠나 이주 중에 목숨을 잃는 자는 그의 보상이 하나님께 있나니, 하나님은 관대하시고 가장 자비로우신 분이도다.
꾸란 4.100(이슬람)
누구든지 내게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를 버려야 한다. 또 자기 목숨까지라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26(기독교)
너의 집 식구, 너의 동기들이 너를 헐뜯으며 배신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그들이 정답게 말을 걸어오더라도 믿지 마라.
예레미야 12.6(유대교)
그때 상가마지 장로가 세존을 뵙고자 사밧티로 왔다. 그러자 상가마지 장로의 아내였던 여인은 상가마지 장로가 사밧티에 왔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제타 숲으로 갔다. 그녀가 상가마지 장로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말을 걸었다. “제게는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사문이시여! 저와 아이를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말했지만 상가마지 장로는 침묵하고 있었다. 여인은 두 번, 세 번 이렇게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침묵했다. 여인이 아이를 상가마지 장로 앞에 세우고 “사문이시여! 이 아이는 당신의 자식입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상가마지 장로는 그 아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여인은 얼마쯤 가다가 뒤돌아서서 상가마지 장로가 아이에게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자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문은 자기의 자식에게조차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구나.” 그녀는 돌아와서 아이를 데리고 떠나갔다.
우다냐 5-6(불교)
그대의 부와 아내를 포기하라. 그대는 출가자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 토한 것처럼 싫은 것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가우타마여, 항상 주의하라!
그대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떠나고, 그대가 모은 엄청난 부를 버려라. 두 번 다시 그들에 대한 욕망을 품지 말라. 가우타마여, 항상 주의하라!...
이제 그대는 가시가 말끔히 치워진 길, 위대한 길에 들어섰다. 바른 길로 걸어가라. 가우타마여, 항상 주의하라!
웃타라디야야나 10.29-32(자이나교)
착한 사리풋타여! 부양해야 할 양친이 있고, 부양해야 할 처자가 있고, 거두어야 할 하인들과 여러 일꾼들이 있을 때, 내가 어찌 힘써 정진할 수 있었겠는가? 친구나 동료를 위해 해줘야 할 일이 있고, 찾아 온 손님을 위해 해줘야 할 일이 있고, 조상에게 드려야 할 제사가 있고, 신들에게 드려야 할 제사가 있고, 왕을 위해 해야 할 의무가 지워져 있을 때, 또한 이 육신이 구하는 바를 고분고분 따라갈 때, 내가 어찌 힘써 정진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난자니여! 가령 어떤 이가 자신의 부모나 처자 때문에 거룩한 수행을 닦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런 연유로 니라야 지옥의 문지기들이 그의 목을 잡아끌고 지옥으로 데려가게 된다면, 그때 만일 말하기를 “부모와 처자, 그리고 다른 일들 때문에 거룩한 수행을 닦지 못하였나이다” 한다면 그에게 무슨 소용 있을까?
맛지마 니카야 2.186-187(불교)
친구를 동정한 나머지 거기 얽매이게 되면 본래의 뜻을 잃고 사된 마음이 일어난다. 벗을 두어 사귐에 이러한 우려가 있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마땅히 혼자서 가야 하리.
처자에 대한 탐착은 마치 서로 엉켜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 숲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붙는 것처럼 그들에 끌려 다니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마땅히 혼자서 가야 하리...
무리 가운데 끼면 유희와 환락의 욕망이 일어난다. 또한 자녀들에 대한 지극한 애착이 생긴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이 싫다면 무소의 뿔처럼 마땅히 혼자서 가야 하리...
처자나 양친에 대한 탐착도 버리고, 재물과 곡식에 대한 욕망도 버리고, 친척이나 벗에 대한 욕망도 다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마땅히 혼자서 가야 하리.
지혜로운 자는 무엇이 집착인 줄 알고, 그곳에는 즐거움도 없고 안락함도 없으며 다만 괴로움이 있을 뿐임을 알며, 그것은 필경 고기를 낚는 낚시 바늘인 줄로 알고 무소의 뿔처럼 마땅히 혼자서 가야 하리.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그물을 찢고 나오듯이, 이미 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마땅히 혼자서 가야 하리.
숫타 니파타 37-62(불교)
말씀 선집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어미나 처자나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못 된다’ 고 했는데, 이 말은 공식입니다. 그러면 반대인 자가 누구냐? 자기를 제일 많이 사랑했던 순서대로, 자기를 더 사랑하던 사람의 순서로 반대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네 집안 식구가 원수’ 라는 말이 우주적인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92.207, 1977.04.10)
예수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는 말을 했기 때문에 반대를 받았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반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반대를 받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 원죄를 끊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의 피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봅아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내 어미가 원수고 내 아비가 원수고 내 아내, 내 아들딸이 원수란 말이지 않습니까?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원죄가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원죄를 중심삼은 몸들이 서로 사랑하는 날에는 이 원죄가 끊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원수라는 것입니다.
핏줄이라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 연결되므로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 전부 다 180도 돌아서야 되는 것입니다. ‘다 필요 없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로 해야 되겠다’ 이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79.160, 1975.07.20)
남편이 제일이고 아내가 제일이고 내 아들딸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제일이라는 자리가 사탄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리에서의 제일이라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남편의 사랑을 부정해야 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아내의 사랑을 부정해야 합니다. 자식의 사랑을 부정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만이 대할 수 있는 것이 본래의 인간인데, 여러분 몸뚱이에 사탄이 장난한 흔적이 있는 한 여러분은 본래의 사랑의 이상을 몸 마음에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140.24, 1986.02.01)
하늘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서는 세상의 첫사랑보다도 높은 사랑을 하늘을 중심삼고 느끼는 자리를 찾지 못하고는 하늘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사랑의 자기의 상대를 종심삼아 가지고 생명을 바치니 생명문제니, 그 다음엔 물질문제니, 그 다음엔 지식문제니, 그 다음엔 권력문제니, 전부가 문제 됩니다. 죽자 살자 하고 둘이 연애결혼한 사람이 하늘의 뜻 앞에 들어오려면 일주일 이내에 이걸 버릴 수 있는 사랑권을 찾아가야 됩니다.
(102.19-20, 1978.11.19)
이 세계를 어떻게 복귀하느냐? 개인을 중심삼고 여기에 심는 것입니다. 반대가 되어서 끌고 나가야 됩니다. 탈출해야 됩니다. 그래서 불교 같은 고차적인 종교는 출가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해서는 안 되고 형님 누나를 사랑해서도 안 됩니다. ‘그 부모나 형제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나의 제자가 못 된다’는 성경의 말이 역설적 논리지만 그것은 하늘 길을 찾아가는 순리적 논리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81.212-213, 1988.10.03)
아버님! 제가 아버지 앞에 부끄러움을 갖지 않는 것은 아버님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인간의 위신을 여지없이 포기해 버렸고, 아버님의 위신과 아버님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의 어떠한 위치와 어떠한 환경과 어떠한 입장도 다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당신은잘 아시옵니다.
세계를 통하여 그 누구도 가지 못하던 사연의 길을 찾아야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역사과정에서 당신은 낱낱이 위로하였고, 낱낱이 붙들면서 ‘이 길을 가는 너 이상 외로운 자가 이 땅 위에 없다. 다시 가야 할 외로움이 남아 있다.’ 라고 권고하시던 아버지의 그 음성을 잊을 수 없사옵니다.
(159.61, 1968.01.28)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을 뒤에다 두고 고독의 길을 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하늘의 길을 찾아가고, 나라 없는 운명의 길을 찾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나도 핏덩이 자식을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이북 땅을 향했던 역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고, 하늘의 명령이 있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안 가려고 몸부림치면서 하루 이틀은 고민도 컸지만, 그 고민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정을 알았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64.148, 1972.10.29)
여러분도 가정을 붙들고 얼마나 몸부리쳐 왔습니까? 자기 아들딸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 돼지 새끼도 그렇습니다. 목석같이 둔한 사람도 그런 겁니다. 나 레버런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딸을 사랑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입니다. 예민한 사람입니다. 일가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감옥을 방문할 때, 내가 눈을 부릅뜨고 아무개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 어머니 살아 있지 않습니다. 돌아간 것을 안 지금은 ‘불효 했구나’하고... 그렇지만 그 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고 일가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세계를 위해 하나님의 뜻, 천리를 대신해서 했습니다.
(168.148, 1987.09.13)
세속의 분별
세속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삶과 비견할 수 없다. 쾌락과 부, 명예, 물질적 안정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영적 구도의 길에 방해가 된다. 속세를 향한 열정과 집착은 단순히 정신적 산만함을 넘어서 영혼을 지옥까지 끌고 간다. 그러므로 경전에는 세상과 세상의 가치에 순응하지 말라는 수많은 충고가 담겨 있다.
현명한 사람들은 세속적 성취를 하나의 망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러한 쾌락에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언제나 세상의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하늘이 주시는 영적 감동을 음미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보다는 영적 성장을 그 업적으로 이해한다.
어떤 종교에서는 수도원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속세와 분별을 시도한다. 그러나 도덕적 권고나 교회의 가르침으로 이루어지는 수도생활과 세속적 생활의 경계선은 그리 분명하지 않다. 속세에 묻혀 살지만 결코 세속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흔히 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은 세상의 지배적 가치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살고 있다.
1. 세속적 방식을 따르지 않음
종교 경전
여러분은 이 세대의 풍조를 다르지 말고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시오.
로마서 12.2(기독교)
클 길 가에 버려진 오물더미 속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뿜으며 연꽃이 피어나듯이, 정각을 이룬 자의 제자는 버려진 오물 같은 무지한 중생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지혜로 밝게 빛난다.
법구경 58-59(불교)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또 사람이 무엇으로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6.26(기독교)
한 사람이 사도에게 와서 말했다. “오, 알라의 사도여! 내가 할 수 있다면, 알라가 나를 사랑하도록 하는,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도록 하는 일을 가르쳐 주소서.” 그가 답하였다. “이 세상을 단념하라. 그리하면 알라가 너를 사랑하실 것이고,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버려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너를 사랑할 것이다.”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31(이슬람)
천박한 목표를 즐거워 말라. 게으름 피우며 건들거리지 말라. 그릇된 소견을 좇지 말며 세간의 근심 걱정에 휩싸이지 말라.
법구경 167(불교)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기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요한복음 17.14-18(기독교)
세속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무 집착, 완전한 자족, 일체의 소망을 버림, 그리고 인내, 이들은 스스로의 감각을 제어하고 최고아에 대한 바른 지혜를 실현한 자의 확고한 표징이니라
스스로 이 세상의 덧없는 것들에 탐착하지 말라. 세속적인 대상에 끌려 다님은 악을 증장할 뿐이니라.
마하바라타, 샨티 파르바 329(힌두교)
막힘(否): 군자가 보고서 덕을 검약(儉約)하여 난을 피한다. 작록(祿)으로써 영달하지 말아야 한다.
역경 12(유교)
성인은 하늘을 본받고 진리를 귀하게 여기고 세속에 구속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는 반대로 하늘을 본받을 줄 모르고, 인간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을 괴롭히고, 진리를 귀중히 여길 줄 모르고, 자질구레하게 세속에 끌려 변화를 거듭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만족하지 못한다.
장자 31(도교)
(천하에 시초가 있어 그것이 천하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미 그 어머니[道]를 얻으면 그 아들임을 알고, 이미 그 아들임을 알고 다시 그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면, 몸이 다하도록 위태로비 않을 것이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 몸이 다하도록 수고롭지 않을 것이다.
그 구멍을 열고 그 일들을 보태면, 몸이 맞도록 구원되지 못한다.
도덕경 52(도교)
비말라키르티는 비록 범부의 흰 옷을 입고 있었으되 사문의 청정행을 받들며, 비록 가정에 있더라도 욕계, 새계, 무색계, 삼계의 욕망에 끌려 다니지 않으며, 처자와 시중드는 여자이이를 두었으되 청정한 마음으로 금욕을 행하며, 권속을 두었으되 항상 멀리 여의기를 좋아하며, 비록 좋은 옷을 입었으되 고결함을 잃지 않으며, 비록 음식을 먹으나 언제나 법열로써 몸 마으을 지탱하며, 만일 바둑이나 장기의 노름에 이를지라도... 문득 그로써 사람을 제도하고 온갖 일을 다스려서 비록 세속의 이익을 얻으나 그로써 기뻐하지 않으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자 네거리나 길모퉁이에 몸을 나타내어 바른 법으로 다스려 일체를 구호하느니라.
유마경 2(불교)
말씀 선집
언제까지나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타락한 세계의 인연을 그냥 그대로 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하나님이 가시는 동기의 길, 하나님께서 가시는 목적의 길을 우리가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21.102, 1968.11.17)
세속적인 세계에서는 돈이 필요하고, 지식이 필요하고, 힘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한테 연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갖고 연결됩니까? 참사랑입니다.
(270.308, 1995.07.23)
사람들은 어떤 걸 제일 좋아하느냐? 전부 가짜를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는 바로 걸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꾸로 온다면 그 얼굴을 보면 잘생겼는데 병신입니다. 그런데 병신 중에도 거꾸로 온다는 것입니다. 병신이 아닌데 거꾸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오게 되면 바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 온다는 것입니다. 발 대신 손을 짚고, 발이 하늘로 올라가게 하고 걸어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환영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병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병신이라면 그런 병신을 다 환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망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성공하고 성공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망하고,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난 것이요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못난 것이요, 어렵게 살겠다는 사람은 부자가 되는 것이요, 부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어렵게 산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학교에 가서 꼴찌라고 생각하면, 꼴찌니까 열심히 하면 일등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입니다.
(102.251, 1979.01.14)
시간의 한계성을 초월한 무한한 세계에서 오는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땅 위의 어떠한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공포까지도 제압하고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인의 길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이나 욕망의 일체를 거부하고 당당히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길에서 승리한 자는 개인적인 싸움에서 승리했듯이 가정에 대해서 그러하고 민족, 국가, 혹은 세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문제에서 승리한 자입니다.
(7.97, 1959.07.19)
우리는 변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게 우리의 재산이자 자랑입니다. 이것은 억천만 금이나 세상의 무슨 권력이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돈 몇 푼에, 권력에, 여자한테 팔려 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싸구려 물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왕좌에 올라가서 변하는 일생을 보내는 것보다 변치 않는 거지 생활을 택하겠습니다.
(124.253, 1983.02.20)
여러분이 이 길을 가면서 자신의 물질에 대한 소유욕과 자녀에 대한 소망과 남편 또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애착심까지 빼앗기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그런 애착심을 붙들고 세계를 넘어서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과 자녀의 사랑, 그리고 자신을 중심한 소망 등의 인정적인 모든 조건을 끊어버릴 때에야 여러분은 세계적인 제물의 고개를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2.118, 1957.03.10)
끝 날에는 이상세계가 오기 전에 심판이 와야 됩니다. 이 삼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적인 사정과 인연을 그냥 그대로 품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흐르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박차고 뒤로 돌아서서 길을 피해 가는 사람이라야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새로운 이상적인 출발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종교는 이러한 내용을 중심삼고 ‘세상을 버려라.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라. 세상을 가까이하지 말라. 세상과 화하지 말라. 세상과 절단하라. 부정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각심(覺心)을 키우라’고 가르쳐 온 것입니다. 현재를 밀고 나갈 수 있고, 미래를 타개하고, 과거를 수습할 수 있는 이러한 각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종교는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21.136-137, 1968.11.17)
사탄의 피를 받은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피를 받은 사람은 자기를 위주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중심한 기독교 문화권이 저렇게 개인주의 국가가 되어서 인본주의, 요즘에는 세속적인 인본주의라고 해서 세계의 혼란상을 중심삼고 말초신경을 자극해서 행복을 찾아간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전부 다 문등병자가 되어 벼랑에 떨어집니다. 남녀들이 밤낮으로 안고 품고 좋아하며 야단하지만 에이즈(AIDS)에 걸려서 다 말라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187.241, 1989.02.11)
2. 세속적 안락의 부정
종교 경전
임금의 화려한 수레와 같은 이 세계를 보라. 어리석은 사람은 이 속에 빠지나 지혜로운 사람은 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법구경 171(불교)
쾌락은 금과 은에, 여자에, 그리고 온갖 즐거운 대상들에 있으며,
쾌락은 안락한 침대에, 호화로운 저택에, 그리고 감미로운 음식에도 있다.
이 모든 쾌락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어찌 신의 거룩한 이름이 가슴에 깃들기를 바랄까?
아디 그란트, 스리 라가, M.1, p.25(시크교)
힐렐이 자주 말하곤 하였다. “고기가 많을수록 벌레가 많이 들끓고, 부가 많으수록 걱정이 많고, 여자가 많을수록 유혹이 많고, 여자 하인이 많을수록 호색이 짙고, 남자 하인이 많을수록 도둑질이 성행하고, 율법이 많을수록 생명이 차고 넘치며, 근면할수록 지혜가 많아지고, 의논을 많이 할수록 이해심이 많아지고, 자선이 많은 곳일수록 큰 평화가 찾아든다.”
미슈나, 아보스 2.8(유대교)
이 세상의 하천은 오염되고 그 우물은 혼탁하도다. 그 겉치레와 모습은 화려하나 온통 유해할 뿐이로다. 그것은 급격히 종말로 치닫는 기만, 급속히 꺼져가는 빛, 저무는 그림자, 그리고 미약하고 의지할 곳 없는 보호벽이로다. 그것은 너무나 기만으로 가득 차서 그것에 관심 갖기를 싫어하고 그것의 기만 정도를 모르는 자가 그것에 현혹당하여 그것에 만족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도다. 그때 그것은 그들에 대한 관심을 거의 보여주지 않고 그들을 함정에 빠뜨려 사로잡아 그들 목에 죽음의 밧줄을 묶고 그들의 무덤으로 끌고 가도다.
나흐줄 발라기, 설교 86(이슬람)
사랑에서 걱정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사랑에서 벗어난 자는 근심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친애에서 걱정이 생기고 친애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친애에서 벗어난 자는 근심이 없거늘 어지 두려움이 있겠는가.
집착에서 걱정이 생기고 집착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집착에서 벗어난 자는 근심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욕정에서 걱정이 생기고 욕정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욕정에서 벗어난 자는 근심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망집에서 걱정이 생기고 망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망집에서 벗어난 자는 근심이 없거늘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법구경 212-216(불교)
음행이나 더러운 행위나 탐욕은 그 이름조차도 여러분의 입에 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에게 합당한 것입니다. 더러운 말이나 어리석은 말, 또는 상스러운 농담은 여러분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감사에 찬 말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음행하는 자나 행실이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숭배자여서 그리스도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속받을 몫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헛된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이런 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식들에게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과 짝하지 마십시오.
에베소서 5.3-7(기독교)
“나 여호와는 거룩하다. 너희는 내 것이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기 20.26) 내가 거룩하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하라. 내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에 너희도 세상으로부터 분리 되어라. “나는 너희를 뭇 백성 가운데서 갈라내어 내 것으로 삼았다.”(레위기 20.26) 만약 너희가 너 자신을 다른 백성과 분리한다면 너는 내게 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느부갓네살의 백성이 될 것이다. 랍비 엘리에젤이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나는 돼지고기를 먹을 마음이 없으며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여인과 성관계를 할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그가 ‘이런 행위를 하고 싶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금지하셨으니 어떻게 그런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응답으로 성서에는 ’나는 너희를 다른 국가들로부터 갈라내어 내 백성으로 삼았다‘라는 말씀이 있다.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자는 하늘나라를 받게 된다.”
시프라 93b(유대교)
말씀 선집
사악한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우리를 행복의 문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올무와 사망의 함정으로 몰아넣습니다.
(47.49, 1971.08.19)
천정과 인정은 엇갈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좋다고 하는 데에는 하늘이 없는 것이요, 하늘이 좋다고 하는 데에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좋다고 하는 데에 추파를 던지고 박자를 맞추어 가는 종교는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51.187, 1971.11.21)
대립된 선악의 세계라는 입장에서 볼 때, 몸뚱이에 끌려가면 악한 세계가 되는 것이요, 마음에 끌려가면 선한 세계가 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마음이 몸뚱이를 완전히 지배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절대시하게 되면 사탄세계와 분립된 자리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립된 선악의 세계이기 때문에 분별된 자리에서 선을 위주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개인의 생활을 거친 사람은 영계에 가서 선주권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지 말라고 해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36.82, 1970.11.15)
책임분담 가지려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책임분담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탄의 정, 사탄의 인정, 사탄의 핏줄을 받아서 정의 인연 가운데 태어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왜? 아담이 책임분담노정을 갈 때 사탄의 정을 다 안고 갔습니까? 대답해 보세요. 사탄이 무슨 정을 갖고 왔습니까? 안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뭐예요? 책임분담을 찾아가기 위해서 사탄세계의 정을 다 끊었습니까, 안 끊었습니까? 못 끊고 책임분담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정을 해야 됩니다.
(139.250, 1986.01.31)
역사적인 위인이나 선각자들은 세상의 즐거움이나 만족을 얻으려 한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이념을 향하여 약속된 한 곳을 목적지로 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서는 탐험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7.87, 1959.07.19)
사탄세계와는 영원히 달라야 됩니다. 180도 달라야 됩니다. 사탄세계에서 프리섹스니 호모섹스니 레즈비언이니 마약인 술을 마시고 하는 것과는 전부 반대입니다. 사탄이 얼마나 하늘을 희생시키고 선한 사람을 희생시켰는가, 사랑의 길을 중심삼고 역사에 얼마나 비통한 범죄의 사실을 남겼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44.148-149, 1993.02.01)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들은 ‘야, 왜 데이트를 안 해? 나가 데이트해라! 하지만, 레버런 문은 ’데이트하지 말라! 여자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합니다. 누가 사탄 편이고, 누가 하나님 편입니까?
(122.263, 1982.11.21)
고행, 수도생활, 그리고 금욕생활
속세로부터 완전히 자신을 분리하고자 하는 사람은 은둔을 선택하거나, 수도승이나 수녀의 삶처럼 독신생활을 주장할 것이다. 불교와 자이나교, 로마 가톨릭과 기독교 정교에서는 최고의 종교적 성직을 독신생활을 하는 승려, 수녀, 그리고 신부로 여기고 있다. 금욕주의는 힌두교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일생 동안 금욕생활뿐만 아니라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인생의 말년을 고독한 독신생활로 보내는 브라만들의 전통이 있다. 기독교의 수도원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여성에 대한 사랑보다 귀하게 여겨 청빈과 순결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이들에게 환경적 조건을 지원하기 위해 제도적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슬람에는 수도원 체제가 없다. 그러나 라마단 기간에 한 달 동안 이어지는 금식을 통해 폭넓은 금욕생활을 실천한다. 금식과 철야기도는 음식과 잠에 대한 육욕을 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과거에 영적 엘리트 소수자들만이 향유했던 전통적 수도원 체제와는 달리, 일반인들도 쉽게 행할 수 있는 금욕생활의 실천이다. 태국과 스리랑카의 젊은 남성 불교도들은 보통 가정을 꾸리기 전에 6개월 동안 수도원 훈련을 받는다.
육욕을 억제할 것을 강조하시는 문선명 선생도 몸 마음 통일을 이루기 위한 수도원의 수행은 높이 평가하신다. 독신생활을 하는 신부들과 인간 창조 시에 가정이상을 꿈꾸셨던 하나님의 이상 사이에는 분명 어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절의 마지막 부분에는 지나친 금욕적 삶에 대해 비판하는 몇 가지 구절들을 실었다. 이런 비판은 금욕을 실천하는 거의 모든 종교에서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지나친 금욕주의는 동정심이 결여된 인성으로 발전될 수 있다. 수도원 생활은 하나님이 경륜하시는 풍부하고 생산성 넘치는 사회와 결코 유비할 수 없을 것이다.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은 인간의 타락으로 잘못된 결혼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금욕과 독신생활을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까지 언급하신다. 마지막으로 결혼이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고 더 이상 독신 훈련이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과거의 독신생활은 고귀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종교가 독신생활보다 결혼의 가치를 더 고양시켜야 할 때가 도래했다. 변화하는 해수면의 높이는 수도원과 독신생활이 사라지고 있음을 암시하며, 이것은 모든 종교세계에서 감지되고 있다.
1. 수도자의 고행
종교 경전
비유하여 공중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백조를 앞질러 갈 수 없는 것처럼, 속가에 사는 자는 이를 떠나 숲 속에서 초연히 명상하는 성인이나 수행자에 미치지 못한다.
숫타 니파타 221(불교)
탁발걸식을 계속하라. 숲에 머물라. 절식하라. 필요한 말만 하라. 곤궁을 참아 견디어 내라. 수면을 극복하라. 수승한 자세로 모든 이와 벗하라. 그러나 집착하지 말라.
밧타케라, 무라차라 981(자이나교)
남을 비방하지 말라. 해치지 말라. 바라제 목차에 따라 자신을 지키며, 음식의 적절한 양을 알며,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떨어져 지내라. 드높은 삼매에 전심하라. 이것이 깨달음을 이룬 자들의 가르침이다.
우단 43(불교)
궁극의 해탈을 얻기 위해 버리지도 않고 버려지지도 않은 고독한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아무런 동반자도 없이 홀로 다니게 해야 한다. 그는 불도 거처도 가져서는 안 되며,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목적을 향한 흔들림 없는 자세로, 온 마음을 신에게 집중하고 명상하며 음식을 얻으러 마을로 가야할 것이다. 탁발을 위한 질그릇, 거처를 위한 나무 밑동, 누더기, 독거, 모든 것에 대한 평정심은 해탈을 얻은 자의 징표이다.
죽음을 환영하게 해서도 안 되며 삶을 환영하게 해서도 안 된다. 마치 하인이 주는 대로 받는 월급을 기다리듯이 자기에게 정해진 때를 기다리게 해야 한다. 발밑을 살펴 청정해진 곳을 디디게 하며, 천으로 걸러 청정해진 물을 마시게 해야 한다. 진실에 비추어 청정해지 말을 내뱉게 하며, 마음의 청정을 유지하게 해야 한다. 거친 말을 참아내게 하고, 어느 누구도 욕하게 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의 몸을 위하여 어떤 사람의 적이 되게 해서도 안 된다. 화난 사람에게 화로 대응하게 해서는 안 되며, 욕을 먹을 때 오히려 욕한 자를 축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일곱 문에 흩어져 있는,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게 해서도 안 된다.
자족하며 요가 자세로 앉아서 홀로 거하며 감각적 쾌락을 완전히 삼가며 오직 자신을 벗으로 삼아서 그는 해탈의 지복을 희구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하루에 한 번 탁발을 나가게 해야 하며, 많은 양을 탁발하려고 애쓰게 해서는 안 된다. 먹을 것에 집착하는 고행자는 다른 감각 대상에 대해서도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적게 먹고, 조용한 곳에서 서고 앉음으로써 설사 감각이 그 대상에 끌리더라도 스스로 삼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자신의 감각을 제어하고 집착과 증오를 없앰으로써,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음으로써 그는 불멸에 적합하게 된다.
마누법전 6.42-60(힌두교)
말씀 선집
무엇을 죽이고자 하느냐? 이 몸뚱이를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식을 해라, 기도를 해라, 잠을 자지 말라,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라, 희생 봉사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차적인 종교, 천주교 같은 데서는 신부와 수녀들이 독신생활을 하고 있으며, 불교도 고차적인 종교로서 독신생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젊은이들은 어떠하냐? 종교에서는 몸뚱이를 정복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정반대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는데, 미국 젊은이들의 생활은 이러한 생활과는 완전히 먼 거리에 있습니다. 사탄세계에 포위되고 또 포위되어서 지옥 밑창에 들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지옥의 밑창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몸뚱이를 쳐야 되느냐? 이것이 사탄의 무대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15.236, 1991.02.20)
몸뚱이가 크면 그 다음에는 양심을 밟아 치우는 겁니다. 힘없는 나를 밀어재끼는 것입니다. 양심이 그걸 주관해야 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요걸 몰랐기 때문에, 이것이 자기 스스로에서 정지 안 될 때까지는 계속하는 걸 모르기 때문에 중세 기독교에서 고행을 했고 수많은 종교들이 도를 닦느라고 야단했습니다. 그런데도 중단되는 이유는 이 원칙 규범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 원수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는 겁니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는 겁니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런 원수인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평정 안 되면 계속해야 됩니다. 계속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254.222, 1994.02.13)
플러스와 플러스는 상반입니다. 서로 반발하고 밀어내는 것입니다. 사탄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플러스 입장인데도 마이너스 입장에 서지 않고 플러스 입장에 서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도의 생활에서는 금욕주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편, 즉 악에 속한 플러스적인 면을 쳐서 마이너스적인 입장으로 전화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4.23, 1958.02.16)
종교는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부 버려야 합니다. 먹는 것도 버리고, 자는 것도 버리고, 좋아하는 것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정욕, 식욕, 수면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먹고 자고 좋아하는 것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먹고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좋아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육신을 통해서 사망의 행로가 되었으니 이것을 추방하라는 것입니다. 몸에 폭탄을 터뜨리라는 것입니다. 원자탄을 터뜨리라는 것입니다. 옥살 박살시켜 전부 점령하라는 것입니다.
몸은 높임받기를 좋아하고 편안한 자리를 좋아합니다. 또한 울뚝불뚝한 것은 싫어하고 포동포동하고 , 매끈매끈하고, 폭신폭신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 몸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투실투실한 것, 울뚝불뚝한 것, 딱딱한 것 등, 몸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몸은 높아지기를 좋아하고 남의 돈을 빼앗아서라도 잘 먹으면 좋아합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 잘 살면 좋아합니다. 그러한 근성을 전부 때려 부숴야 합니다. 높아지기를 좋아하는 몸을 낮추어라, 온유겸손해라, 희생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18.67-68, 1967.05.21)
2. 금식
종교 경전
칠월 십일은 죄 벗는 날이다. 그날에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단시하며 여호와께 제물을 살라 바쳐야 한다.
레위기 23.27(유대교)
오, 믿는 자들이여! 너희 선조들에게 규정되었듯이 너희에게도 단식이 규정되었으니, 너희는 기꺼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리라... 라마단 달에 지침과 구원의 분명한 징표로서, 인류에 대한 인도로서 꾸란이 계시되었도다. 그러므로 그 달 집에 있는 너히 모두는 단식을 행하라. 아프거나 여행 중인 자는 다른 날 부족한 날수를 채워라. 하나님은 너희에게 고통을 주시고자 함이 아니고, 너희를 편하게 하고자 하시도다. 그 날수를 채우고 하나님을 찬미하라. 그분은 너희를 인도하시고 너희는 기꺼이 감사하게 될 것이니라.
꾸란 2.183-185(이슬람)
나의 아들아, 너는 동료에게 어떤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로 나는 네게 금식할 것을 권고한다.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조상들은 모든 종류의 축복을 보내고 있다. 노력해서 이 축복을 받아라. 전사장들 중의 한 분, 우리 조상 중의 한 분이 너를 불쌍히 여길 수 있게 하여라. 그러면 어느 날[생명의] 길을 따라 여행할 때 너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이고 장애물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어떤 문제도 없이 네게 바라는 상을 추구할 수 있다. 그때 영예는 너의 것일 것이다. 어떤 문제점도 접하지 않고 너는 그것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전쟁의 힘은 전쟁을 통제하고 있는 우리 조상들에게 소유되어 있다. 그리고 만일 경건하게 네가 죽기로 네 자신에게 갈급해한다면, 그때 그들은 네게 축복을 내릴 것이다. 지금 만일 네가 네 발을 지치게 하지 않는다면, 만일 네가 네 얼굴을 숯으로 검게 칠하지 않는다면, 네가 네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축복은 노력 없이 획득되지 않는다. 대지의 창조자에 의해 창조된 영혼들 중의 하나가 너를 불쌍히 여기게 노력하라. 그 영이 말하는 무엇이든지 간에 일어날 것이다. 만일 네가 너를 강호하기 위해 한 영혼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너는 전혀 대수롭지 않게 될 것이며, 사람들은 너를 별로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위네바고족 아버지의 훈계(미주 원주민 종교)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보기 싫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어라. 그래서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데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보시게 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16-18(기독교)
말씀 선집
종교에서는 몸이 원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몸이 원하는 것, 몸이 좋아하는 것이 뭐예요? 편안한 자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반대로 고통의 길을 가라 이겁니다. 그 다음에는 뭐예요?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것을 먹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금식을 해라’ 합니다.
(140.25-26, 1986.02.01)
세상에 배고픈 것처럼 처량한 것이 없습니다. 배고픈 것을 넘어서 배고픈 이상 하나님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일주일 금식을 통일교인들은 다 합니다. 금식하면서 열두 시가 되기 딱 10분 전 되면, ‘아이구 9분 남았다. 아이구 8분 남았다. 아이구 1분, 60초 남았구나. 아이구 똑딱, 똑딱... 아이구 20초 남았다. 아이구...’ 하다가 열두 시 땡 하게 될 때 ‘아이구, 밥이야!’ 하며 밥을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했습니까? 밥 먹고 싶은 것보다 하나님을 더 그리워했습니까? 배고픈 것을 생각하는 이상 하나님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그렇기 때문에 30대까지 배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밥이 얼마나 먹고 싶으냐 하면, 옆에서 밥 소리를 하면 입이 이렇게 벌려집니다. 그럴 적마다 ‘바-압’ 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임’ 하는 것입니다. 이 배고프다는 그 힘이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지 못하게 다 막아 버립니다.
(94.294, 1977.10.09)
우리 생활에 하나님의 사랑을 접붙이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생님이 겁내는 것은 몸뚱이입니다. 몸뚱이가 원수라는 말입니다. 이 몸뚱이를 중심사고 최고의 3대 진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밥 먹는 것입니다. 밥 먹는 것은 참입니다. 배고플 때 밥 먹고 싶은 건 진리입니다. 문제는 먹는 것이 나를 완전히 점령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먹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배고픈 이상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몸뚱이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랑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40일 동안 금식했습니다. 다른 모든 도인들도 금식을 합니다.
두 번째는 잠자는 것입니다. 잠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잠을 극복하면서, 잠을 이길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잠이 올 때에도 잠을 넘어서 잠자는 것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흠모해야 합니다. 수많은 도인들은 잠과 싸우면서 정성을 들였습니다. 잠이 원수이기 때문에 칼로 다리를 찌르고, 별의별 짓 다하는 것입니다. 잠을 능가할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흠모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7, 8년 동안을 하루에 평균 두 시간도 안 잤습니다. 배고픈 경계선을 넘어야 하나님의 사랑이 접근할 수 있으며, 잠자고 싶은 경계선을 넘어야 하나님의 사랑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94.293, 1977.10.09)
3. 독신생활
종교 경전
모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들어서 된 고자도 있고, 또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 이 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마태복음 19.12(기독교)
부활할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마태복음 22.30(기독교)
성적 쾌락에 빠진 사람에게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멀리 달아난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르치고 있다. 그것은 그 속에 있는 비천한 성품이다.
숫타 니파타 815(불교)
나는 여러분이 염려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쓰게 되므로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나 처녀는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려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씁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를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지 여러분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품위 있게 살면서 마음에 헛갈림이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32-25(기독교)
이기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서 그들은 심지어 가정과 가족에 억지로 연루되지도 않는다... 홀로 거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번잡한 군중을 멀리하며 그들은 오직 나(끄리슈나)를 추구한다.
바가바드기타 13.9-10(힌두교)
나는 신들과 사람들과 동물들과의 모든 성적 쾌락을 포기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결코 육체적인 욕망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굴복하도록 원인을 제공하지도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굴복하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차랑가 수트라 24(자이나교)
자식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재물과 곡식, 친지들에 대한 모든 욕망들을 버리고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 니파타 60(불교)
말씀 선집
인류 시조가 원수의 올무에 걸려 가지고 그 권내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권내에서 이루어진 가정이 하나님의 공인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종교에서는 독신생활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여러분들도 아들딸 많이 낳았는데 독신생활을 했어야지요.
이것은 통일교회의 문선생의 말이 아닙니다. 종교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불교도 그렇지 않습니까? 천주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거 왜 그러는 줄 압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가니까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참된 조상이 되어야 했던 분들이 아직 결혼식을 못 해봤습니다. 그런데 태어나지도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있는 인간들이 결혼식을 합니까? 타락한 후손으로 태어난 아들딸들은 전부 구원의 손길을 거쳐서 복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본래 우리 인간에게는 종교니, 복귀니, 기도니, 무슨 구세주니 하는 것들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는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21.45-46, 1968.09.01)
지금이 타락한 세상은 하늘이 찾아오는 섭리역사의 배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서 종교의 길을 갈 때는, 이미 있던 사회제도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자리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종교는 없습니다. 부정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긍정으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완전 부정으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산중수도를 하고 기독교 역시 사회생활에서 이탈되는, 물론 사회제도 안에서 살지만 가정을 못 가지는 이런 독신생활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금욕생활을 하는 동시에 그 다음에는 모든 혈기를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좋아할 수 있는 모든 요건을 전부 다 부정하는 자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뿌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155.288, 1965.11.01)
원리로 볼 때 세상의 남자들은 천사장의 후손이기 때문에 결혼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신생활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본연의 부모가 결혼을 못해 봤는데, 껄렁껄렁하고 시궁창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제멋대로 사랑을 합니까? 그런 사랑은 비법입니다. 그래서 고차적인 종교가 독신생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5.203, 1969.10.04)
천사가 무슨 상대가 있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종교에 있어서는 독신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비구승이 원칙입니다. 대처승은 불합격자입니다. 사실은 기독교회 목사들, 전부 불합격자들입니다.
(62.257, 1972.09.25)
천사장이란 어떠한 존재냐? 천사장에게는 상대의 인연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 ‘한 여인이 일곱 형제를 남편으로 삼고 살다가 죽은 후에 저 나라에 부활할 때에 그 일곱 남편 중 누구의 여인이 되겠느냐? 하고 사두개 교인들이 예수에게 물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기를 ’영계에서는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다.‘ 고 말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느냐 하면, 천사장권 복귀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상대의 인연을 갖지 못한 것이 천사장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가 찾아 나온 것은 무엇이냐? 천사장 사명권내에 서 있기 때문에 상대의 인연을 부여할 수 없는 것이 종교가 걸어 나온 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홀로 사는 독신생활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50.193, 1971.11.07)
4. 금욕 문제: 사랑의 결핍
종교 경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2-3 (기독교)
만일 어떤 이가 나행을 하고··· 푸성귀나 야생 쌀 혹은 니바라 씨앗으로 연명하며 ··· 거친 대마로 웃을 지어 입고, 어떤 다른 고행을 한다 해도 지, 정, 의의 어느 방면에서도 지복의 경기는 그에 의해 실천되거나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사문이나 바라문의 지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카사파여, 비구가 노여움을 모르고 그 어떤 악의도 지닐 줄 모르는 사랑의 마음을 닦은 이후로 비구가 극악한 죄악들을 떨쳐 버리고 몸 마음에서 자유함을 얻어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것을 깨달아 실현하게 된 때 그때부터 오, 카사파여! 비구가 사문이라 불리고 바라문이라 불리었도다!
디가 나카야 1.167, 카사파 시하나다 숫타(불교)
어떤 고행자들은 위선과 이기적인 동기를 중심삼고 가증된 수행을 일삼는다. 그들은 자신의 순수한 육신을 괴롭히며 내적 자아를 병들고 멍들게 한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세력과 열정을 맹신하면서 악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바가바드기카 17.5-6(힌두교)
오, 형제여! 색을 탐하는 마음과 이기적인 아집을 마땅히 거두어들이라. 금욕과 고행으로 다만 이 거친 육신을 말라 시들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단지 시든 육신을 들어 그대는 스스로 고행자임을 찬양받으려 하는가?
니시타바샤 3758(자이나교)
온갖 성스런 제 의식을 드리고도 이를 뽐내는 마음이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 수고로울 뿐이니 헛되고 헛되도다.
온갖 힘겨운 고행을 하고도 이에 우쭐거리는 마음 있다면, 다만 천계와 지옥을 오가며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비의 마음을 내지 못하니, 어찌 신의 나라에 들 수 있겠는가?
아디 그란트, 가우리 수크마니 12, M.5, p.278(시크교)
만다파라라는 고행자가 있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서원을 세운 성자였으며, 율법에 밝은 자들 가운데 가장 수승한 고행자였다. 또한 그는 일생 동안 금욕과 고행을 통해 스스로의 감각을 통어하였던 성자들의 길을 준행하였다. 육신을 벗은 후 그가 조상들의 세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자신 행위의 과보들을 그것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스스로가 행한 고행을 통해 내생의 세계들을 얻었다 할지라도 아무런 보상도 없는 세계들을 얻었으므로 그가 천계의 사자들에게 물었다. “내 고행으로 얻은 이 세계들이 어찌하여 나에게 닫혀 있는가? 이것이 내 행위들의 결과들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바 내가 어디에서 실수하였던가?”
그들이 말했다. “사람은 제 의식들과 베다의 학습과 자손의 덕택으로 태어난다. 이를 의심하지 말라. 그대는 고행을 행하였던 자요 또한 제 의식을 뜻 맞게 잘 수행하였던 사제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대는 자손이 없다. 이 세계들이 그대에게 닫혀 있는 것은 바로 자손이 없는 까닭임을 알라. 자손은 푸트, 즉 은둔자라 불리는 지옥에서 그의 아버지를 구한다. 그러므로 오 브라흐민이여! 자손이 끊이지 않도록 노력하라.”
마하바라타, 아디 파르바 1.220(힌두교)
우리(하나님)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보내어 그에게 복음을 주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사랑과 자비를 심었도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즐거움만을 구한다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하지도 않았던 수도생활을 만들어 내었으며, 그들은 올바로 그것을 지키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보상을 주려니와 대다수는 사악한 무리에 들고 말더라.
꾸란 57.27(이슬람)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잔치의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이니 그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마태복음 9.14-15(기독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고운 모시옷을 입게 하셨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요한계시록 19.7-8(기독교)
말씀 선집
그러면 어찌하여 불교와 천주교에서는 독신을 강조하느냐? 그것이 전적으로 인간의 행복의 터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땅 위의 어떠한 종교도 행복의 터전이 무엇이라고 제시해 주지도 않았고, 가정의 기틀을 중심삼은 계획도 없었거니와 그 가정 자체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런 가정이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독신을 강조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간들이 순결하고 올바른 가정을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23.15, 1969.05.11)
하나님이 영원하다면 이것도 영원이요, 이 자식 자리도 영원이 되는데, 단지 이것이 깨져 나갔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갖다 맞추고 싶겠습니까, 안 맞추고 싶겠습니까? 그거 원하겠습니까, 안 원하겠습니까? 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하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까, 죄입니까? 거룩한 겁니다. 오늘날 타락한 세상이 생겨난 이후에 이런 거룩한 사랑을 해본 부부가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이걸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종교의 목적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구원이 뭐냐 하는 걸 몰랐다는 것입니다. 다 몰랐습니다. 딴 나라인 줄 알았습니다. 천상천국에 가 가지고 뭐 이렇게 천국 가서 ‘그럴 줄 알았던 것입니다. 천국은 다 준비되어 있다고, 벌써 전부 준비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모두 자기에게 있다 이겁니다. 천국에 맞는 사랑의 남자 여자가 될 수 있느냐? 여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지금까지 몰랐습니다.
(92.225-226, 1977.04.17)
천국은 부부가 가야 되는 것이요, 가정이 가야 되는 것이요, 가정뿐만이 아니라 가정의 팔촌 등 일족이 가야 되는 것이요, 그 국가 전체가 가야 되는 것입니다. 전체가 갈 수 있는 그 세계가 천국이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일교회가 가는 길입니다. 통일교회는 개인 구원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동결혼식도 이 원리원칙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해야 됩니다. 오늘날 합동결혼식이 조롱의 대상이요, 구경거리로 알고 있지만, 내용을 알고 보니까 기가 막힌 놀음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사장권 종교시대에는 장가가야 돼요. 안 가야 돼요? 못 갑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천국에서도 결혼시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비구승이 승리하느냐 대처승이 승리하느냐 할 때, 대처승이 승리할 때가 왔다는 겁니다. 구교의 신부 수녀가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천주교도 그냥 그대로 가다가는 전부 다 지옥에 가게 됩니다. 지금의 친지운세는 신랑 신부의 인연을 찾을 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도 시집 장가를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할 때가 왔기 때문에 시집 장가가는 것을 반대했다가는 그냥 그대로 몽땅 망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50.61, 1971.10.31)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도 결혼시켜 줘야 되고, 불교 승려도 결혼시켜 줘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제 다 망합니다. 전부 다 바람잡이, 프리섹스의 장소가 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사탄이 점령해서 남자 여자에게 전부 다 바람을 넣어 가지고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레버런 문 앞에서 신부 수녀가 결혼하고, 불교의 비구승이 선생님 앞에서 몇 백만 쌍이 한꺼번에 축복받는다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망합니다. 그냥 다 꺼지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일부 신부들이 바람피우고, 그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다 때가 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조수(潮水)가 들었을 때 그 물을 먹지 않으려면 자꾸자꾸 따라가야 됩니다. 그 물길을 따라 자꾸 뒤로 돌아가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빠져 죽지 않으려면 그들이 결혼해서 안 된다는 것을 무너뜨리고 뒤로 돌아가야 됩니다.
(246.24, 1993.03.23)
고차원적인 종교일수록 독신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인류의 부모가 될 수 있는 분이 아직 결혼식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신을 주장한 것입니다. 종교라는 종교는 전부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역사시대에 통일교회라는 종교가 나와서 결혼을 인정하고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도 이제는 대처승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비구승을 주장하다가도 짝을 맺어 가지고 대처승이 돼 버립니다. 천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도 결혼을 부정하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집니다. 대부분 교회를 떠납니다. 참부모가 결혼한 1960년부터 그런 시대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때부터 전부 달라지고, 사탄세계는 프리섹스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탄세계는 프리섹스를 통해서 파괴공작을 해 들어가고, 종교 권에서는 결혼시대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244.148, 1993.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