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제3부 인생의 여정
제16장 기도와 숭배
기도
대부분의 경전에서 기도는 종교생활의 필수적 요소로 꼽는다. 이 장에 발췌한 구절들은 기도의 효능에 대한 논의와 기도 방식에 대한 지침들이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내면을 하나님께 드러내어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회개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도움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우리는 기도 내용을 실천하고 신앙생활을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가르침과 하나 될 때, 하나님을 절대 순종한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하나님도 우리가 기도 속에서 선하게 살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드러낼 때, 우리를 절대 신뢰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친구나 부모의 실체적 관계처럼 우리는 기도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실체적 관계를 형성하며 생활할 수 있다.
기도는 타락성을 자극하는 악행과 유혹에 대항하는 본성의 방어벽을 쌓아준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정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면 우리의 내외적 생활이 한결같이 정화된다. 기도의 맛을 알면 알수록 영혼이 살찌고 전체 삶까지 밝아진다. 기도는 사랑을 추구하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려는 양심이 신성한 힘을 얻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인격의 성숙과 정신의 안정을 누리게 된다.
이글의 몇 구절들은 기도하는 방법을 조언해 주고 있다. 철야기도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기도 생활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는 정직하게 임해야한다. 심중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하고 진실한 대화가 기도다. 기도 뒤에는 반드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위선자와 기도는 어던 결과도 수반되지 않는다. 최고의 기도는 자신의 안위보다 남의 복지를 위한 기도다. 문선명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해드리는 기도가 최고의 기도다. 이 책의 첫 장을 열면 몇 몇 대표적인 기도문을 마주할 것이다.
1.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종교 경전
당신의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네 기도에 응답하리라.”
꾸란 40.60(이슬람)
여호와는 당신을 부르는 자에게, 진정으로 당신을 부르는 자에게 가까이 가신다.
시편 145.18(기독교)
나(하나님)의 종복들이 그대들에게 나에 관해 물었을 때 나는 실로 그들 가까이 있으며, 나는 나에게 간구하는 자의 모든 탄원의 기도를 듣고 있노라. 꾸란 2.186(이슬람)
너의 걱정을 여호와께 맡기어라. 주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시편 55.22(기독교)
조물주여, 프라자파티여! 그대 이외에는 이 일체만유를 포용한 자 없도다. 간구하여 우리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시라. 우리를 부의 정복자 되게 하시라.
리그베라 10.121.10(힌두교)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가복음 11.24 (기독교)
여러분 중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라은 기도하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찬송하시오. 여러분 중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기도를 드리게 하시오.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구원할 것이며, 주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다면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위해 기도하시오. 그리하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니 삼년 육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고, 또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내려 땅이 그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13-18 (기독교)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항상 기도하라. 너희가 반드시 주시리라 믿으면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을 아버지께 나의 이름으로 구하면, 보라! 너희에게 주시리라. 너희와 가족과 더불어 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구하여 너희의 처와 자녀들이 복 받게 하라.
몰몬경. 제 3니파이 18.19-21 (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말씀선집
기도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과 더불어 말하자는 것입니다.
(270.17. 1995.5.3)
기도만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기도를 했으면 실천해야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공약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공약이니 이것은 맹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했으면 반드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매일 같이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한 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10년이고 20년이고 기도하는 자세로 만나기를 그리워하고 찾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40.299.1971.2.7)
기도는 무엇이냐? 기도는 비는 것인데, 비는 것이 뭐냐 하면 주체 대상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건 무슨 주체 대상관계냐? 사랑의 주체 대상관계입니다. 그런 관계를 이루는 걸 표준해 가지고 우리는 빌어 나가야 됩니다. 내가 할 자신이 없거들랑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극이 안 생기거든 기도하는 것입니다.
(112.54. 1981.3.29)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힘을 받습니다.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벌어진다는 전망을 다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은 어떻게 하고 어떤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이다’하고 가르쳐 줍니다. 그걸 알아야 여러분들이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서만 그 길을 개척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4.111-112. 1979.4.15)
기도할 대는 그야말로 금식을 하고, 무릅을 끓고, 고통스러워도 참아야 됩니다. 고통스러워도 참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희생하더라도 참으며 가야 되겠습니다. 희생 길을 환영하며 가야 되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죽을지언정 나는 가야 되겠습니다. 내가 배가 고파 죽을지언정 나는 가야 되겠습니다. 내가 배가 고파 죽을지언정, 배고파 죽을 기경에 가서도 나는 하나님을 붙들고 죽겠습니다.’ 해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맹세요, 선언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내 스스로 판단하고 내 스스로 결정하고 내 스스로 선포했으니, 그랬으면 사랑을 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기도한 대로 실천하여 한고비 넘고, 두 고비 넘고, 세 고비를 넘게 되면 하나님도 두고 보다가 ‘이 녀석은 됐다’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112. 54-55. 1981.3.29)
어떤 사람을 정해 놓고 정성들여 기도하면 그 사람이 찾아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정성을 들이게 되면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자석을 가지고 끌어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끌려옵니다. 기도를 하고 ‘오늘은 내가 누구를 저 아파트에서 만날 것이다’하고 정성을 들이게 되면 그곳으로 나옵니다. 그런 힘이 있습니다.
(104.113. 1979.4.15)
내가 여기에서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런 세계를 위한 것입니다. 이럴 때는 이게 단계가 많습니다. 단계가 많은 것입니다. 기도를 이루면 여기서부터 이루어 이렇게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들어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복이 어떤 사람은 요만큼 왔는데 이걸 잘라 버린다는 겁니다. 그런 역사입니다. 세계적인 문제를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여러분들이 열심히 정성들이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전부 공산세계부터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기 이것이 아벨권이라면 이건 가인권이고, 가인권이 아벨을 향해서 들어오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기도를 할 때는 일생이 아니라 몇 천 년 후에 이루어질 것을 지금부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런 기도를 합니다. 선생님이 일생에 이런 기도를 이루어질 것을 지금부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이루어 주는 것이 아니라, 몇 천 년까지 끌고 가다가 이루어질 때 통일교회는 그 기도를 이룰 때까지 망하지 않습니다. (104. 110-111. 1979.4.15)
2.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기도
종교경전
예배는 수치와 부정한 행위를 억제해 주리라. 그리고 하나님을 염원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니라.
꾸란 29.45 (이슬람)
색을 탐하는 마음이나 노여움 또는 증오의 마음이 일거든 다만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하라. 마침내 진에를 여의게 되리라.
법화경 25(불교)
인간과 비신앙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기도에 대한 포기라.
무슬림 하디스(이슬람)
낮의 두 끝과 밤이 가까워 오는 시각에 일상 예배를 근행하라. 실로 선행은 악행을 제거하리니, 이는 기억하는 자를 위한 교훈이니라.
꾸란 11.114(이슬람)
말하라. 나는 가호를 구하노라. 인류의 주님에게 인류이 왕에게 인류이 신에게 은밀하게 속삭이는 악으로부터 인간의 가슴에 속삭이는 진과 인간들 중에.
꾸란 114(이슬람)
말씀선집
기도가 뭐냐 하면 정화, 자기 정신을 정화시키는 데 필요로 한 것입니다. 정신을 정화시키기 위해 연단하는 방법으로서, 정신통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181.325.1988.10.3)
기도는 내가 가는 방향이 틀렸을 대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45.247.1971.7.4)
기도하는 사람들은 실수를 안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 압니다. 기도의 맛을 알게 되면 밥맛보다 맛있고 어떤 취미보다도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좋고 나쁜 것을 대번에 알게 됩니다.
(128.172.1983.6.12)
여러분이 하루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적을 알고 보이는 적을 가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19.146.1968.1.1)
그렇게 해서 마음 세계가 몸을 완전히 굴복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양심이 힘을 얻어 종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되면 사탄은 도망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길을 닦는 것이 기도생활입니다. 몸 마음이 하나되어 하나님과 연결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임재 함으로써 사탄은 완전히 몸뚱이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229.7.1992.4.9)
3. 심정에서 우러나는 기도
종교경전
녹스는 모든 것을 위한 광택제가 있으니 마음의 광택제는 하나님을 염원하는 것이다.
티르미디 히디스(이슬람)
“ 네 마음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섬겨라.” (신명기 11.13)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기도다.
시프레 신명기 41(유대교)
나를 자유롭게 해 주시오.
나는 진심으로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내가 진심으로 그대에게 기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그대에게 기도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알고 나에게 관대할 것입니다.
보란족의 기도(아프리카 전통종교)
내 바위, 내 구원자이신 여호와여,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시편 19.14(기독교)
늘 자신을 시험하게 하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자에게는 기도하게 하라.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기도하지 말게 하라.
탈무드, 베라코트 30b (유대교)
지성으로 드리는 모든 기도 가운데 주를 합당하게 찬미하는 은총이 주어진 스승께 드리는 기도가 으뜸이다.
아디 그란트, 마루 아슈트파디, M.5.p. 1018 (시크교)
당신은 마음속에 진실을 기뻐하시니 지혜의 심오함을 나에게 가르쳐 주소서...
정화수를 나에게 뿌리소서, 이 몸이 깨끗해지리이다.
나를 씻어주소서, 눈보다 더 희게 도리이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소서, 꺾인 내 뼈들이 춤을 추리이다.
당신의 눈을 나의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허물을 없애 주소서.
하나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 주소서.
당신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을 거두지 마소서.
그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도로 주시고 변치 않는 마음 내 안에 굳혀 주소서.
죄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빗나갔던 자들이 당신께로 되돌아오리이다.
하나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 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 얕보지 아니하시니.
시편 51.6-17(기독교)
사람들은 신에 의해 이 당에 출생하도록 허락되었다. 따라서 한 개인의 마음이란 신의의지와 교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을 평온케 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의축복이 임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먼저 진심을 다하여 기도해야 한다. 신의 가호하심을 얻으려면 정직의 토대를 쌓아야 한다. 이같이 할 때 각자의 원래의 순수한 마음이 근원적이며 심오한 길로 각성되어 갈 것이다.
이세신궁의 두 신에 관한 기록(신도)
기도는 용기 있는 행동이다. 용기가 없다면 어찌 미천한 인간이 왕 중의 왕 앞에 기도를 드릴 수 있겠는가?
브레슬로브의 나흐만 (유대교)
말씀 선집
기도할 때 딴 데 하지 말고 본심에서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공중을 보며 하지 말고 마음보고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308.16-17. 1998.11.21)
기도할 때는 배고픈 어린 아이가 젖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18.185. 1967.6.6)
기도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변덕스러운 데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깊숙한 곳, 하늘 대표한 곳, 경계선에서 먼 중앙지에 가 가지고 기도해야 된다는 말은 지극히 타당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이냐? 자기 생애의 간절하고 중요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깨끗이 하고, 이 경계선과 관계없는, 영원히 사탄과 관계없는 자리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123.80, 1982.12.12)
정성을 안 들이면 안 됩니다. 왔다 갔다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아버지를 어떻게 모셨습니까? 내가 부모를 모시는 데 있어서 가정적 대표입니까, 사회적 대표입니까, 종족적 대표입니까, 민족적 대표입니까, 국가적 대표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내 눈물이 어디가지 흘러 퍼지느냐가 문제입니다. 이게 공식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늘 부모를 모시는데 있어서 눈물이 없어 가지고는 회개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라를 생각할 때 눈물이 쏟아지고, 세계를 생각할 때 통곡이 벌어집니까?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늘이 그러고 있는데, 주체가 그러고 있는데 회적 기준이 그 동위권에 서야 됩니다. 일체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171.19.1987.12.5)
기도가 뭐냐 하면 동에 있는 사람이 중앙선을 통해서 구형을 따라서 돌 수 있는, 원형을 그릴 수 있는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느냐? 나는 생명권에, 하나님이 있는 자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왜 하느냐? 이 중앙점에 맞추자는 것입니다. 중앙점을 중심삼고 원형을 그리기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고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171.14. 1987.12.5)
4. 기도의 방법
종교경전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마태복음 6.7-8(기독교)
하나님께 간구함에 겸손하고 드러나지 않게 하라.
꾸란 7.55(이슬람)
오, 믿는 자들아! 예배를 드리러 일어났을 때 너희 얼굴과 두 손을 팔꿈치까지 씻을 것이며, 머리를 쓰다듬고 두 발을 발목까지 닦을 것이니라. 너희가 불결하다면 자신을 스스로 깨끗이 하라. 너희가 아프거나 여행 중일 때, 도는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 그리고 여성과 접촉이 있었을 때는 물을 찾을 수 없다면 깨끗한 모래 먼지로 너희 얼굴과 손을 닦아라. 하나님은 너희가 어떤 곤경에 처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도다. 그러나 그분은 너희를 정결케 하고자 하심이라. 그분은 너희에 대한 그분의 은총을 완전하게 하고자 하심이니, 너희는 그 분께 기꺼이 감사를 드릴지어다.
꾸란 5.6(이슬람)
기도는 역사적 문서를 읽는 것처럼 재차 암송되어 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 탈무드, 베라코트 4.3 (유대교)
위대한 영은 어디에나 있다. 그는 우리의 마음과 심정 속에 있는 무엇이든지 듣는다. 그래서 그에 진짜 기도는, 참된 기도는 무엇이냐? 인내와 희생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을 극복해 나가는 자는 기도를 완성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기도를 이룬 자리로 나가는 것입니다.
(112.53. 1981.3.29)
큰소리로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블랙 엘크(미주 원주민 종교)
말씀선집
기도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땀을 흘리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112.55. 1981. 3.29)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는 게 좋습니까? 자세를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는 겁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꿇어 앉아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이 몸은 구속을 해야 됩니다. 몸의 고통과 불편을 극복할 이상의 심각한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 심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갑니다.
(104.111. 1979.4.15)
기도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에 대한 서약이고, 선서이며, 선언입니다.
(240.35. 1992.12.11)
정성이 끊어지기를 바라는 개인도 없고, 가정도 없고, 민족도 없고, 세계도 없고, 우주도 없는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누구든지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았던 것을 보고하고 살 것을 선언해야 됩니다. ‘아버지, 오늘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했으면 ‘오늘 이걸 이루었습니다’하고 보고해야 됩니다.
(308.211. 1999.1.5)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자기 사정을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서 보고하니까 보고하는 것이 실적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남겨질 보고이기 때문에 하늘은 간섭을 하고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다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무서운 것입니다. 말없이 기도하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 후대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233.105.1992.7.30)
도의 출발은 어디서부터인가? 기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장소는 대개 어디냐 하면 산입니다. 산중에서도 고독한 산, 지극히 외로운 산, 이런 자리에서부터 닦아 나오는 것입니다.
(157.13. 1967.2.1)
5. 기도는 쉬지 말고 밤낮으로
종교경전
너의 주님을 찬양하라. 해 뜨기 전과 해지기 전에. 그리고 밤 시간도 찬양하고 하루의 경계선에서도, 그리하면 너는 기쁨으로 만족하리라.
꾸란 20. 130(이슬람)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7(기독교)
좋은 생각 주시는 여호와님 찬미하오니 밤에도 좋은 생각 반짝입니다.
시편 16.7(기독교)
가장 진실한 관경은 동트기 직전에 보인다.
티르미디 및 다리미 하디스(이슬람)
랍비 요하난이 말하였다. “하루 종일 기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기도자는 결코 기도의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 탈무드. 베리코트 1.1(유대교)
겉옷에 감싸인 그대여! 밤에는 얼마간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예배시에 일어나 있어라. 밤의 절반으로 하든가 그것을 좀 더 단축해도 좋다. 그리고 구란을 진중하게 낭송하라. 하나님은 그에게 중요한 말씀을 주리라. 밤의 기도는 실로 그 효과가 더욱 돋보이고(찬미의)말이 더욱 확연하리라. 실로 낮에는 해야 할 일이 많도다. 주님의 이름을 염원하고 혼신을 다해 스스로 현신하라.
꾸란 73. 1-8 (이슬람)
말씀 선집
더욱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 역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타락한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루 24시간 모든 방향에서 타락한 인간을 유혹하고 괴롭힙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오로지 한 방향에서, 즉 정신의 수직적인 방향에서만 힘을 미칠 수 있습니다.
(201. 208. 1990.4.9)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내 할 일은 내가 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전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그것이 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몇 년마다 자기가 원하는 기도가 달라지고 제목이 달라지면서 발전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이면의 생활을 여러분이 기도생활을 통해서 갖춰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04.112.1979.4.15)
기도생활을 하면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옵니다. 그 경지가 창세전 하나님의 생각의 경지입니다.
(29.321. 1970.3.13)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기도를 많이 하면 혼자 생활하더라도 절대 외롭지 않습니다. 기도는 호흡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영적으로 상당히 밝아집니다. 또한 상당히 예민해지고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 생깁니다. 기도에는 희생이 개재되는 것이며 정성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30.283. 1970.4.4)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심정의 보급창고입니다. 시간이 없으면 하는 일을 통해서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27.89. 1969. 11.26)
완전한 인격자가 되면 생활 자체가 기도이다. 많은 기도를 하여 무한한 영력에 접하라.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 생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뜻길. p.189)
6. 이타적 기도
종교 경전
자신이 같은 상황에 있을지라도 동료를 위해 기도하는 자가 제일 먼저 응답을 받으리라.
탈무드. 바바 캄마 92a (유대교)
그들의 의와 선한 마음이 당신에게 합당하다고 할만한 청정한 사람들은 그들의 소망을 이루리니, 오, 지혜의 주여! 그들이 그것을 성취하게 하소서! 나는 압니다. 선한 목적에 합당한 기도만을 당신이 거두어들인다는 것을.
아베스타, 야스나 28.10 (조로아스터교)
가부좌로 앉아 일체중생이 선에 굳게 뿌리 내려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얻도록 일심으로 간구해야 하리. 마음을 모으고 또 모아서 일체중생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도록 일심으로 간구해야 하리. 선정을 닦을 때 일체 중생이 여실한 진리를 보아 영원히 대립과 논쟁에서 벗어나도록 일심으로 간구해야 하리.
대방광불화엄경 11(불교)
말씀 선집
기도를 많이 하면 혼자 생활하더라도 절대 외롭지 않습니다. 기도는 호흡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영적으로 상당히 밝아집니다. 또한 상당히 예민해지고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 생깁니다. 기도에는 희생이 개재되는 것이며, 정성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30.283. 1970. 4.4)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와 뜻에 다르는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104.109. 1979. 4.15)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복받겠다기보다 하나님 앞에 내가 위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야 돼요. 그 복을 받기 원한다면 그것은 나를 위함입니다. ‘나라와 세계를 위해 복을 주소서‘하고 기도하시오. 그런 기도는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126.339. 1983.5.1)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이것이 선생님의 가르침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또 자기의 기도가 위로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91.117. 1977.2.3)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자기를 위한 기도는 맨 나중에 합니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 기도하게 되면 누구를 위하여 기도해야 되느냐? 먼저는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주인을 만나는 시간이니, 주인의 복을 먼저 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후 예수를 위하여 기도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해야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압니다. 예수를 위하여 기도해야 역사적인 예수의 심정을 압니다. 그 다음에는 지금까지 기독교계에서 뜻을 위하여 싸워 나온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타락이후 아담으로부터 지금가지 수많은 선지자들이 간 걸음걸음을 더듬으면서 ‘제가 이들을 해원하는 제물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린 후 선지자들 앞에 ‘나는 그대들의 한이 땅 위에 남아있는 것을 알고 그 한을 품고자 하오니 협조해 주시오’ 하면서 눈물 흘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 후에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천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7. 328-329. 1959.10.18)
나의 몸을 바쳐서라도 하나님 앞에 승리의 일점을 더하겠다고 하는 입장에서 기도를 올릴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책임지시고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용인한 길을 걸어오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있는 그 장소까지 오시려면 많은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같은 비참한 입장에 서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은 직접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외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활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내 자신이 희생하는 입장이나, 상심한 입장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참된 마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입장에 서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시인하시게 되고 또 동정하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정으로 계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18.269. 1967.6.12)
명상
명상은 장애물로 덮여 있는 마음을 정화시켜 내면의 궁극적 실재에게 개문하는 것이다. 명상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모든 명상법의 공통점은 방황하는 감정과 잡념을 순화시켜 참된 본성이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요컨대 명상이란 정숙과 순수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신체적 감각 자극을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전에서 명상이란 동야 종교의 수행, 수련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에서도 명상은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 신비주의자, 수도자, 수피, 카발리스트 등 모두는 수행자들을 신적 영성과 일체를 향한 고차원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명상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명상시간은 마음을 안정, 정화시키는 동시에 영적 감각을 높게 고양시킨다. 다라서 기도의 전단계로서 명상이란 침묵의 기도이며, 효과적 영적 기도기술이며, 명상기간을 의미한다.
명상에 대한 주제는 너무도 방대해서 평생 동안 수행해도 그 끝을 보기 어렵다. 이 장에서 다루는 내용에는 사유의 정화법, 호흡 집중법, 고차적 집중력 양성법, 자신의 몸과 생각 감정의 경계를 허무는 훈련, 성스러운 형상의 시각화, 그리고 초자연적 광경에 대한 샤머니즘적 요청 등이 포함되어 있다.
1. 주일(主一)적 집중
종교 경전
참선이란 생각과 감관의 활동을 제어하고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이다.
나가르주나, 보의 화환437(불교)
수레바퀴의 살이 중심축에 모여 있듯이 온 몸의 동맥들이 만나는 곳, 심장의 연꽃 속에 그가 사나니 그를 옴으로 염하라. 그리하면 그대가 쉽게 어둠의 바다를 가로질러 건너가리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2.26(힌두교)
형기에 올라타고 하나인 도를 지키고 이탈하지 않을 수 있다면 정기를 집중하고 흐트리지 않고 유연한 자세로 영아 같을 수 있다면, 마음속의 거울을 말끔히 씻어 닦고 흠이 없게 할 수 있다면 (만물을 낳고 키울 수가 있다)
도덕경 10(도교)
그때 세존에게서 멀지 않는 곳에 어떤 비구가 다리를 포개고 몸을 아주 꼿꼿하게 펴고, 전생의 과보로 생겨난 바늘에 찔리는 듯한 아주 고통스런 아픔을 견디며, 그러나 올바른 생각과 지혜로써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 세존께서 그 비구를 바라보시고 이러한 우다나를 노래하셨다.
모든 업을 불사르고 지난 세상에서 지은 티끌을 떨쳐버린 또는 ‘나의 것’이라는 생각도 없이 마음을 흩트리지 않는 저와 같은 비구에게는 굳이 다른 이와 이야기 나눌 필요도 없다.
우다나 20(불교)
삼백 육심 뼈마디와 사만 팔천 털구멍의 온 몸을 일깨우라. 큰 의혹의 마음을 내고 다만 무지에 마음을 모으라. 이를 나날이 힘써 정진하라.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의 생각도 여의고 ‘무엇이 들어있다’거나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는 상대적인이니 개념들도 짓지말라. 그것은 마치 벌겋게 달아오른 쇠구슬을 삼키는 것과 같아 설사 뱉어내려 해도 뱉어낼 수 없으리라. 이때까지 축적된 온갖 미망된 사념들이 일순에 사라지고, 내외 혹은 주객의 이원이 동시에 사라지느리라, 그대는 이것을 알리라. 꿈을 꾼 벙어리처럼 다만 홀로 알게 되리라. 그 때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대전환이 일어나리니, 깜짝 놀란 가운데 문득 천계를 볼 것이며 속계의 일들을 떨쳐버릴 것이니라.
무문관 1(불교)
내가 명상 가운데 들어 있는 한, 동물이나 인간 혹은 신에 의해 야기되는 일체의 재앙을 나 스스로 감내하리라, 내가 명상에 들어 있는 중에 나는 내육신과 모든 음식들과 모든 욕망들을 버리리라. 집착, 혐오, 공포, 슬픔, 즐거움, 걱정, 자기연민... 신, 구, 의의 삼업에서 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리리라. 또한 일체의 성적 유희를 삼가리라.
삶과 죽음, 얻음과 잃음, 승리와 패배, 만남과 이별, 친구와 적, 즐거움과 고통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나는 한마음으로 평등하게 대하리라.
지식이나 통찰력을 얻음에 있어서나 바른 행위를 닦음에 있어서도 그 주인은 나 자신의 영혼이며, 업의 유입을 부르는 것도, 이를 멈추게 하는 것도 또한 나의 영혼이다.
유일하며 영원한 것은 나의 영혼이니, 이는 바른 지혜와 직관으로 충만하다. 내가 겪는 그 외의 다른 모든 상태들은 나에게 외적이다. 그들은 집합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 이러한 집합들도 인해 내 영혼은 고통을 겪나니 나는 신, 구 의의 삼업에서 이 모든 집합들을 끊으리라.
이로써 내가 평정심과 나의 참 모습을 얻으리니, 바라건대 이 여여함이 내게서 떠나지 않아 내가 곧 열반에 들리라.
시마이카 파타(자이나교)
말씀 선집
도의 길을 찾기 위하여 산중 수도하는 것도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 각오 밑에 거기에 대비되는 외적인 각오, 청산조건을 구비해 놓고 어떤 것에 부딪쳐도 나간다는 자신, 맨 밑창에 떨어져도 심신을 지탱할 수 있는 자신을 가져야 되니다. 그렇지 않고는 달릴 수도 없고 경주 마당에 나설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주 마당에서 하나의 종목을 택해 달려야 할 경주자이니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변치 않는 신념을 갖고 연단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자의 태도, 달리는 자의 태도, 도의 길을 가는 자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자나 깨나 그 목표를 정복하기 위한 결의에 불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7.135. 1959.8.9)
2. 우주적 리듬에 맞추어 호흡하기
종교 경전
정신은 사방으로 통해 흐르고 안 가는 곳이 없다. 위로는 하늘에 닿고 아래로는 땅에 서린다. 그 정신은 만물을 변화하고 육성하지만 그 형상을 알 수 없다. 따라서 동제, 즉 하늘과 같은 것이라고 이름한다. 순수 소박하게 하는 길은 오직 정신을 지키는 것이며, 정신을 잘 지키고 잃지 않고, 내가 정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된 정신을 통해 천륜에 합하게 된다.
장자 15(도교)
나는 나누어지지 않으며,
나의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으며,
나의 시각은 나누어지지 않으며,
나의 들음은 나누어지지 않으며,
나의 들숨은 나누어지지 않으며,
나의 날숨은 나누어지지 않으며,
나의 산포되는 숨은 나누어지지 않으며,
나의 전체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아타르바 베다 19.51.1(힌두교)
상체의 이 세 부분을 곧고 견고하게 유지하며, 마음과 함께 감각들이 심장 속에 들어가게 하며, 지혜로운 자는 브라흐만이라는 배로써 공포를 일으키는 거센 물결을 넘어야 하리라.
자신의 호흡들을 여기 몸속에 억누르고, 자신의 움직임을 통제한 후에, 우리는 두 콧구멍으로 아주 가는 숨을 쉬어야 하리라. 흉포한 말들에 매인 마차처럼,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마음을 전일되게 제어해야 하리라.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 2.8-9 (힌두교)
말씀 선집
새벽이라도 일어나서 기도하라. 기도할 때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동맥과 정맥, 여기에서 천지의 조화가 벌어진다고 상상한다면 심장의 근원을 생각하라. 그러면 건강도 좋아진다.
(27.87. 1669.11.26)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에 기뻐하셨던 그 심정을 어떻게 느껴야 됩니까? 여러분이 이러한 것을 체휼하려면 동산에 앉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가 지도록 사색을 해야 합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는 권내에 빠져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숨을 길게 들이쉬면 이 우주의 공기가 생명력을 가지고 쑥 몰려올 것입니다. 이렇게 우주의 생명력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나 자신이 숨을 내 쉬면 모든 존재가 새롭게 각성하고, 깊이 잠들면 만물이 상대적으로 화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리가 만유를 통치할 수 있는 절대자의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만물과 상대적인 관계를 갖추어야 여러분이 숨을 내쉬면 만물이 받아들이고 들이쉬면 만물은 내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중심삼고서 만물과 주고 받는 관계를 맺으면 이 우주가 서로 주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관계에서 멈추지 말고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자연의 형태와도 같고 우주 자체와도 같을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게 될 때에 거기에서 비로소 우주의 화동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29.133. 1970. 2.26)
코는 아담 해와를 상징합니다. 사람 가운데 제일 먼저 가는 게 코입니다. 코는 언제나 앞장서 갑니다. 눈은 하늘을 상징하는데, 코는 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입까지도 포함합니다. 코가 그렇습니다. 코 자체를 보면 여기서부터 우주입니다. 이게 하늘로 통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게 센터입니다. 모든 것의 센터가 됐다 이겁니다. 그래 가지고 코에서부터 이렇게 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물까지도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입은 뭐냐 하면 만물입니다. 이가 32개입니다. 이것은 사팔은 삼십이(4*8=32)입니다. 이것(4)은 사위기대를 말하고, 이것(8)은 세상을 말하고, 새로운 출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른 두 개가 있는 것입니다. 입은 만물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또 콧구멍이 둘이 있습니다. 둘이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 가지고는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코는 안 통하는 데가 없습니다. 눈으로 통하기도 하고, 귀로 통하기도 하고, 다 통하기도 하고, 귀로 통하기도 하고, 다 통합니다. 그러니 코를 꽉 쥐고 후욱 하면 바람이 다 ... 바른 쪽 콧구멍은 남자고, 왼쪽 콧구멍은 여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숨 쉬는 구멍이다 이겁니다. 무엇을? 사랑의 공기를 마신다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면 그렇게 돼 있습니다. 공기가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여기서 이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호흡할 수 있는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남자 여자 상대를 두는 걸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 감기 걸릴 때 콧구멍이 하나 막히지요? 둘 다 막힐 때는 죽는 것입니다. 이 때는 입으로 숨 쉬어야 됩니다. 숨 쉬는 것이 만물을 통해서, 세상을 통해서 숨 쉬는 게 있고, 코를 통해서 숨 쉬는 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물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118.112. 1982.5.9)
3. 마음을 진정하고, 고요한 상태에 들어가 자신을 비움
종교 경전
모든 감각들이 적정 속에 고요해질 때, 의식이 잠들때, 지성이 동요하지 않을 때, 그 때 그는 구극의 경계에 이르니라.
카타 우파니샤드 2.6.10(힌두교)
흔들리고 산만한 마음이 그 만족을 찾아 방황할 때마다 그것을 내면으로 인도하라. 그것을 자아에 고정되게 다잡아라. 항구한 기쁨은 마음이 고요한 자에게 찾아온다. 자기 의지의 흠에서 벗어나서 통일된 의식을 지닐 때 신과 하나가 된다.
바가바드기타 6.26-27 (힌두교)
지혜로운 자는 말을 마음에 굴복하게 하며, 마음이 인식하는 자아에 조복하며, 인식하는 자아를 위대한 자아에 조복하며, 위대한 자아를 적멸 속의 자아에 또한 조복해야 하느니라.
(카타 우파니샤드 3.13(힌두교)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시편 46.10(기독교)
욕망의 입을 막고, 욕심을 문을 닫고,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마음의 엉킴을 풀어 헤치고, 눈부신 빛을 부드럽게 누르고, 진세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이것을 현동이라 한다.
도덕경 56(도교)
허의 극치에 도달하고 정을 돈독히 간직하라. 만물이 다 같이 자라지만, (도를 터득한) 나는 만물이 근원에 되돌아감을 볼 수 있다.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나, 결국은 모두 근원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정, 즉 고요라 하고, 그것을 복명, 즉 본성으로 복귀한다고 말한다. 본성으로 복귀하는 것이 상, 즉 상도이며, 상도를 아는 것을 명, 즉 총명이라고 한다.
도덕경 16(도교)
자존자(아트만)는 우리의 감각들이 바깥으로 향하게 뚫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안이 아니라 바깥을 본다. 그러나 불멸을 추구하는 어떤 지혜로운 자는 시선을 안으로 돌려서, 안에 있는 자아를 보았다.
키타 우파니샤드 4.1(힌두교)
자기를 제어한 지혜로운 자들, 영혼에 만족하여 고요하고 외진 곳에서 명상과 고행을 실천하는 자들은 모두 불순함을 떨쳐버리고 불멸에 이르는 해탈의 길을 통해 참으로 존재하는 것, 불변의 자아를 실현한다.
문디카 우파니샤드 1.2.7-11 (힌두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사랑하고, 지선에 가서 머무름이다. 멈출 줄 알아야 안정이 되고, 안정이 되어야 조용해지고, 조용해져야 평안하게 되고, 평안해야 깊이 생각하게 되고, 깊이 생각을 해야 얻을 수가 있다. 모든 사물에는 본말과 시종이 있으니, 선후를 알면 도와 가까워질 수가 있다.
대학(유교)
자리에 누워 반성하라. 고요를 깨지 마라.
시편 4.4(기독교)
말씀 선집
우리 마음 쓰는 것,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훈련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러기에 명상이니 혹은 기도니 하는 것도 그러기 위한 한 수양 방법입니다. 마음의 수양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67.178. 1973.6.10)
여러분의 마음 세계가 수평선이 된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 참선이라든가 기도라는 것은 수평선 자리입니다. 자기의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공명권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종적인 세계의 파장이 와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296.203-204. 1988.11.9)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 혹은 불교도들이 참선을 통해 무아의 경지를 찾아 들어가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요소를 깨우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기준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마음의 중심을 천륜 앞에 세운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경배드리며 할렐루야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193-194. 1957.5.19)
오늘날 도의 세계, 종교의 세계에서는 마음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깊은 마음의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참선하는 사람들도 마음이 무엇이냐, 도대체 마음이 무엇이냐 하면서 마음의 깊은 골짜기를 찾아 들어갑니다. 마음의 골짜기, 그 깊은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면 인간 시조가 타락하기 전단계의 마음, 그 마음이면의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게 되면 하늘과 인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세계로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하늘과 인연 맺을 수 없습니다. 세상 그대로를 품고는 하늘을 모실 수 없고 하늘과 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영육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마음과 몸을 중심으로 볼 때 마음과 몸이 하나 된 자리에서 그 세계를 추구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세계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몸의 세계를 부정해야 됩니다. 백 퍼센트 부정해야 됩니다. 세상과 격리되고, 세상과 이별하고, 세상을 뒤로 하고 몸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제거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반대의 길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종교의 길입니다. 본 거점으로 돌아가려면 잃어버린 본 거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본 거점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는 그 세계를 탐구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21.37-38. 1968.9.1)
신앙자로서 제일 주의할 것이 무엇입니까? 일을 대하는 데 있어서 사소한 일이든 큰일이든, 어떤 일을 막론하고 개인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팽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팽팽하게 공기를 넣어 완전히 둥글게 된 공과 같은 마음 자세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찌그러지지 않고 완전히 팽팽한 공과 같은 마음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불안한 마음이라든가 혹은 개인의 욕심을 중심삼은 사된 마음을 가지면 둥그런 공과 같은 마음에 모가 생깁니다.
이 마음이 돌 때에는 평면적으로 전부다 접촉되어야 할 텐데, 모가 생기면 모난 끝부분부터 접촉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를 원활히 자극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반대적인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런 입장에 처하면 처할수록 우리의 양심은 가책을 받고 양심의 기준이 점점 삭감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원만한 공처럼 팽팽한 마음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에 어떠한 자극이 들어오면 마음 전체가 공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유 진동수가 서로 같은 음차 두 개를 놓고 하나를 울리면 다른 하나는 치지 않아도 그 음파에 자극되어 같은 진동수로 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공명체가 될 수 있는 원만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한 주체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영적인 파동을 감지하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명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것을 그리며 명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명상을 할 때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그 마음을 둥글게 해서 하나님이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본성과 내 본성이, 봄 절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봄 절기의 주체 되는 하나님과 더불어 그 성품이 완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완전히 공명될 수 있는 마음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이렇게 공명되는 내용을 중심삼고 자기가 요구하는 목적을 대하게 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같이하십니다.
(40. 278-279. 1971.2.7)
4. 주의 집중 : 모든 사고와 감정의 자각
종교 경전
비구들이여! 여기 한 길이 있느니라. 이 길은 일체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고통을 없애며, 고뇌와 비탄을 물리치며, 올바른 길을 걷게 하며, 마침내 열반에 들게 하는 길이니, 이를 일러 마음이 늘 깨어있게 하는 네 가지 관법이라 하느니라. 이 네 가지란 무엇인가?
여기 어떤 비구가 있어 그는 몸의 몸을 관하나니,.. 느낌의 느낌을 관하나니,... 의식의 의식을 관하나니,.. 이는 이 세상에서 온갖 탐욕과 낙담을 다 극복하여 불타는 열망과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잘 다스려 삼가는 까닭이다.
그러면 비구니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의 몸을 관하는가? 그는 숲으로 들어가서 다리를 포개고 앉아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우고 한 점에 온 마음을 집중하고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고르게 한다. 안으로 길게 들이쉬는 숨에는 ‘내가 숨을 길게 들이쉰다’는 것을 알고, 밖으로 길게 내 쉬는 숨에는 ‘내가 숨을 밖으로 길게 내 쉰다’는 것을 알며, 밖으로 짧게 내 쉬는 숨에는 ‘내가 숨을 짧게 내쉰다’는 거을 안다. ‘온 몸을 체험하여 내가 숨을 내쉬리라’하며 이로써 자신을 다스리고 단련하느니라.
게다가 또한 그 비구는 그가 가고 있을 때 ‘나는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서 있을 때 ‘나는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며, 그가 앉아 있을 때 ‘나는 앉아 있다’는 것을 알며, 그가 누워 있을 때 ‘나는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 자신의 몸이 처한 바를 늘 깨어 알고 있느니라.
게다가 또한 그 비구는 생각하기를 ‘이 몸뚱이는 머리털과 살갗에 난 털, 손톱, 발톱, 치아, 피부와 그 밑에 있는 살집, 근육, 뼈마디, 골수, 콩팥, 염통, 갈빗대, 늑막, 허파, 지라, 위장, 큰창자, 작은창자, 똥오줌, 쓸개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질, 타액, 점액, 활액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그 비구는 죽은 지 하루나 이삼일이 지난 시체가 부풀고 썩고 검푸르게 변해 관 속에 던져진 것을 바라볼 때, 이 광경을 자기의 육신에 비추어 ‘진실로 내 몸뚱이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곧 썩어 저와 같이 던져지리니, 이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있는 바가 아니로다‘ 하고 생각하느니라. 그러면 비구니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느낌의 느낌을 관하여 사는가? 그는 즐거운 기분을 체험할 때 ’나는 즐거운 기분을 느낀다‘는 것을 알며, 고통스런 기분을 느낄 때 ’나는 고통스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을 알며,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기분을 느낄 때 ’나는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기분을 느낀다‘는 것을 아느니라.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의식의 의식을 관하며 사는가? 비구들이여, 그는 갈망을 지닌 의식을 갈망을 지닌 줄로 알고, 갈망을 여읜 의식을 갈망을 여읜 줄로 알며, 노여움을 지닌 의식을 노여움을 지닌 줄로 알며, 무지로 가득한 의식을 무지로 가득한 줄로 알며, 무지를 없앤 의식을 무지로 없앤 줄로 알며···.
그러면 비구가 어떻게 상념의 상념을 관하며 사는가? 비구들이여, 그는 장애가 되는 다섯 상념들에서 상념들을 관하며 사느니라. 감각적 욕망이 일어날 때 ‘나에게 감각적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각적 욕망들이 사라질 때 ‘나는 아무런 감각적 욕망도 없다’는 것을 아느니라. 노여움이 있을 때 그 노여움을 알며, 게으름이 있을 때 그 게으름을 알며, 혼란과 근심이 있을 때 혼란과 근심이 있음을 알며, 의혹이 일어날 때 의혹이 일어남을 아느니라.
비구들이여, 진실로 이와 같이 마음 다스리기를 칠년 동안 끊이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두 가지 과보 중의 하나를 받으리니, 그는 이승에서 최상의 지혜를 얻어 깨달음에 들거나 혹 탐착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는 불환과를 얻어 최종의 천상에서 해탈을 이루어 지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맛지마 니카야 1.55-63, 사티팟타나 수트라(불교)
일체의 현상적 분별들을 버리고 위없는 정등각에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상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소리, 맛, 냄새, 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법에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비법에 머무르는 마음도 내지 않아야 하며, 어떤 것에도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금강경 14(불교)
말씀 선집
마음에도 문이 있습니다. 심문이라고 하지요. 그 문이 언제나 한 면으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자체가 돌고 있기 때문에 그 문도 이동합니다.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신이 있으면 신을 중심삼고, 플러스면 플러스를 중심삼고 마이너스 입장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각도, 방향이 틀리게 되면 이것은 작용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의 문 심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기도를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해보면 시간에 따라 느낌이 다릅니다. 새벽 한 시에 기도하는 것과 세 시에 기도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건 여러분이 체험해 보면 압니다. 신비스런 깊은 경지에 들어가서 기도해 보면 기도하는 시간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아요? 아침에 느끼는 것과 대낮에 느끼는 것과 저녁에 느끼는 것과 밤에 느끼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감정을 가지고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상대적인 면의 느끼는 감도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데도 어떤 시간에 잘 되는지를 알아야합니다. 기도가 잘 되는 시간, 그것은 하나님과의 감응의 도가 가깝다는 것입니다. 잘 된다는 거기를 점점 들어가게 되면 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문과 인간의 마음의 문이 딱 맞아서 같이 어느 기준까지만 맞추어 돌아가는 날에는 하나님이 느끼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마음을 중심삼고 마음을 닦아야 됩니다. 마음의 상태를 우리가 찾아봐야 됩니다. 원래는 이 기준에 영점에 있어야 할 텐데 타락했기 때문에 이것이 180도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도수가 영점에 있어야 할 텐데 제멋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돌려서 정상적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점에 여기 있는 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시계바늘 가는 방향으로 돌아서 가야 하는데 이것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이 영점을 중심삼고 이렇게 움직이면 마이너스적 감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렇게 (시계바늘 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가면 천년 가도 안 됩니다. 이것은 되돌아와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도 목적의 때에 대해서는 끝 날이다, 말세다 하는 것을 다 가려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전해 내려온 종교는 이렇게 가면 되지만, 이 자리에 와 머물러 있으면 이렇게 돌아가면 되는데, 만일 반대로 여기 있으면 이 종교는 끝 날이 되면 멸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각도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 자리로 가려면 반대의 길을 가게 되는 현상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벌어진 종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 다 이렇게 섞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려서 가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우리 마음의 세계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마음도 선한 마음이 있음과 동시에 악한 마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의 마음이 ‘아! 나는 선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마음 자체도 선하지 않다 이겁니다.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악한 마음 권, 악한 사탄 권에 감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선한 권내의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천태만상의 차이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이 영도를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 문을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과정에서 언제나 주의해야 할 것은 마음문이 열리는 때를 알아서 하늘의 마음 문과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준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이 시간이 마음의 문에 맞는 시간이 아니냐? 혹은 학생이면 공부하는 이 시간이 혹시나 그런 때가 아니냐? 혹은 내가 세상을 잊고 재미있게 노는 그 시간이 그런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언제나 수시로 찾아 맞추는 생활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심도를 가려가면서 마음 문을 열게 하고, 그래서 하늘이 향하는 문과 어떻게 일치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76.127-129, 1975.02.02)
5. 시각화와 환상
종교 경전
안개, 연기, 태양, 불, 바람, 개똥벌레들, 번개, 수정, 달, 이것들은 브라흐만의 현현이 일어나는 전조들이다.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 2.11(힌두교)
그때 부처께서 바이데히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부인이여, 그대와 중생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여 서쪽을 생각하시오. 어떻게 관하는지 설명하겠습니다. 모든 중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아니고 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가 지는 것을 볼 것이니, 단정히 앉아서 서쪽을 똑똑히 보도록 하시오. 그러고 나서 해를 명상하기 위해 생각을 움직이지 말고, 곧 지려는 해가 마치 서쪽하늘에 매달린 북과 같음을 보도록 하시오. 그래서 해를 보고 난 후에도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그 영상이 한결같이 분명히 보이도록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러 해를 관하는 일상관이라 하며 또한 첫째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다음에 물을 생각하시오. 물이 맑아서 투명함을 생각하여 그 영상이 분명하게 남아서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물을 보았으면 다음에 얼음을 생각하시오. 그 얼음이 투명하게 비침을 보고 나서 다시 유리를 생각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생각 다음에는 유리로 된 땅의 안팎이 환히 꿰둟어 비침을 생각하시오. 그리고 그 밑에는 금강과 칠보로 된 황금의 기둥이 유리 같은 대지를 팔방으로 받치고 있습니다. 또한 그 황금의 기둥은 팔모로 이루어지고 그 낱낱의 면마다 백 가지 보배로 구며져 있으며, 알알의 보배구슬에서는 일천 가지 광명이 빛나고, 그 한 줄기의 광명마다 팔만 사천의 빛이 있어 유리의 대지에 비치는 것이 마치 억 천의 해와 같이 빛나서 눈이 부시어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광명탑 위에는 온갖 보배로 된 천만의 누각이 있으며, 광명탑의 양편에는 각기 백억의 꽃송이로 꾸며진 화려한 깃발과 헤아릴 수 없는 악기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찬란한 과염ㅇ에서 저절로 여덟가지 맑은 바람이 일어나서 무량한 악기를 울리면, 그 선율은 자연히 인생의 진리를 아뢰어, 괴롭고 공허하고 무상하고 무아한 소리를 연주합니다. 이와 같이 분명히 생각하고 보는 것을 일러 물을 생각하는 수상관이라 하며 둘째관이라 합니다.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그 영상이 흩어져 스러지지 않도록 하여 다만 잠잘 때 외에는 항상 이 일을 기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와같이 생각하면 극락세계를 대강은 보았다고 하겠으나, 더욱 깊이 관조하여 마침내 삼매를 얻으면 실제로 저 극락세계를 분명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 갖추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일러 땅 생각하는 지상관이라 하며 셋째 관이라 합니다. 관무량수경 9-11(불교)
내가 나의 환상 추구를 시행하기 전에 오이니카가 막사, 이니피, 정화의 집에서 나 자신을 정화해야 했다. 굿 랜스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돌에 들소뿔 국자로 얼음처럼 찬 물을 퍼부었다. 아주 큰 ‘쉿’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순식간에 자욱한 마른 흰 증기에 휩싸였다. 굿 랜스가 기도했다.
그는 옛날 말을 사용했다. “이 증기는 우주의 거룩한 숨결이다. 얘야, 혹실리야, 너는 다시 네 어머니의 자궁에 있다. 너는 다시 태어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우리 수우족이 대초원을 방랑하던 그 시대로 들어가서 매우 오래된 노래 두 곡을 불렀다. 갑자기 나는 대대로 내려오는 지혜로 인해 슬기로워지는 것 같았다.
나의 친족인 이 사람들이 큰 소리로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오두막집이 거대한 손에 잡혀 있는 것처럼 흔들렸다. 그것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떨고 있었다. 우리 밑에 있는 대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조상님이 여기 계셔”라고 굿 랜스가 말했다. “영혼들이 여기에 있다. 독수리의 지혜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믿었다. 담뱃대가 건네졌다.
우리는 네 차례 담배를 피웠다. 마지막 담뱃대가 돌아간후에 굿 랜스가 내게 말했다. “혹실라야, 너는 정화되었다. 너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다. 너는 지금 준비되었고 거기에 올라가 굼을 소리쳐 부를 만큼 강하다.
우리의 환상 구덩이는 땅에 파인 L자 모양의 구덩이이다. 그것은 먼저 곧바로 내려가고, 나무의 부리 아래로 깊숙이 짧은 수평적 통로로 이루어져 있다. 너는 그 통로의 끝에 앉아 금식을 한다. 성인은 어디에서나 하루에서 나흘까지 금식을 한다. 내 경우에는 내가 이틀 낮 이틀 밤 동안 음식이나 물을 먹지 않고 홀로 거기에 머무르도록 결정되었다.
처음 몇 시간이 가징 힘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과 쥐죽은 듯한 고요 속에 나는 움직이지 않고 거기에 앉아 있었다. 팔과 다리가 마비되었다. 나는 듣거나 보거나 느낄 수 없었다. 내 영혼은 육체에서 거의 이탈되어 기억과 산만과 생각을 가졌으나 살도 뼈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가 다시 보고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에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시간 감각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낮인지 밤인지 몰랐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길조차 없었다. 나는 기도를 하고 또 했다.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물을 마시고 싶었으나 계속해서 기도했다. 대략 추측컨대 두 번째 날 저녁이 될 무렵, 나는 내 눈앞에 있는 바퀴들을 보았다. 하나의 불타는 듯한 둥근 테를 이루었다가 다시 찬란한, 많은 색깔의 원형들로 갈라지고, 내 눈앞에서 춤추듯 너울거리고, 다시 하나의 입과 두 눈을 가진 원형, 하나의 큰 원형으로 뭉쳐졌다.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으로부터의 목소리, 그것은 묶여 있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처럼 말하는 새 소리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었다. “그 둥근 테를 기억하라. 오늘 밤 우리가 너를 가르칠 것이다”라고 그 목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조그만 환상 구덩이를 걸어 다니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나는 구덩이를 나와서 다른 세계, 사슴과 들소 때가 노니는 야생 화초로 덮여 있는 대 초원의 정화의 집 앞에 서 있었다.
한 남자가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발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손에 딸랑거리는 두 개의 방울을 가지고 나를 향해 안개 속을 부유하여 날아왔다. “얘야, 네 부족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과장하지 말라. 항상 너의 환상이 네게 말한 것을 말해라. 결코 속이지 말라”라고 그는 말했다. 그 사람은 깃털로 장식된 구형의 수사슴 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나의 별무늬 누비 이불속으로 돌아올 때, 돌과 담배 끈으로 된 약품 꾸러미를 꼭 붙들고 그 사람을 만지려고 손을 뻗쳤다. 여전히 나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 둥근 테를 기억하라.” 나는 더 이상 겁내지 않았다. 누가 내게 말하고 있든지 간에 해롭지 않았다.
갑자기 번개를 동반한 숯처럼 새까만 구름이 내 앞으로 뻗쳐 왔다. 그 구름은 더 넓게 확산되었다. 그것에서 날개가 돋아나더니 그것은 독수리가 되었다. 그 독수리는 내게 말했다. “내가 네게 힘을 준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네 부족을 위해 사용해라. 이것은 네 것이 아니고 부족 공통의 것이다.” 나는 회색 말을 타고 나를 향해 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샐비아로 만들어진 둥근 테를 한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안개 속에서 머리칼과 말뚝으로 덮여 있으나 형체가 확실하지 않은 이상한 생물이 부유해 왔다. 그는 내게서 내 약품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나는 그와 맞붙어 싸워 그것을 지켰다. 그는 내 약품을 빼앗지 못했다. 그 사람 또한 사라졌다.
갑자기 누군가 나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얘야, 일어나라.” 나의 아버지와 아저씨가 내게 와 있었다. 이틀간의 낮과 밤이 지난 것이다.
리어나드 크로도그, 수수족의 환상 추구(미구 원주민 종교)
말씀 선집
점점 상대적 입장에 서면 무슨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입체적인 느낌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옵니다. 옛날에는 겨울 같은 기분만 느꼈는데 가을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고, 가을 같은 기분만이 아니라 여름같은 기분도 느껴지고 봄 같은 기분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 우주가 돌고 있는 것처럼 마음도 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면서 춘하추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의 세계도 돌면서 그와 같이 변화하는 감도를 느끼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것이 일년을 두고 보면 사시, 춘하추동이 있지만 일 년을 축소한 것이 하루인데 하루에도 춘하추동이 있습니다. 아침은 봄에 해당하는 것이요, 낮은 여름에 해당하는 것이요, 저녁은 가울에 해당하는 것이요, 밤은 겨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춘하추동의 계절적 형태가 하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침이면 아침을 두고 보더라도 봄 같은 계절도 그렇습니다. 거기에서도 봄 같은 아침을 느끼고, 여름 같은 것을 느끼고, 가을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고, 겨울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큰 것은 큰 것을 중심삼고 단위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작은 것도 상대적인 그 단위의 형태를 각자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느껴지는 느낌이 언제나 같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니다. 계절을 따라서 자기가 봄이다 하는 것을 알면 좋지만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여름절기다 하는 것을 알면 좋지만 그걸 모른다는 것입니다. 혹은 겨울이다 하는 걸 모릅니다. 이것을 많은 체험을 통해서 많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아! 지금 때가 어느 때에 처해 있구나!’ 하는 것을 가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느냐? 우리나라 말에 암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무심코 길을 가는데 어떤 좋은 집 담 벽에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을 때, 새는 날아갔지만 푸드덕 새가 날아가는 그 자체를 보게 될 때, 그 사실을 통해서 암암리에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그런 형태가 전개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암시적 조건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말하는데, 무엇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지나가게 되면 어떠한 형태가 벌어지느냐 하면, 몽시 같은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꿈 가운데 일어나는 일인데 꿈도 깊은 잠 가운데서의 꿈이 아닙니다. 비몽사몽간입니다. 바울 같은 양반도 비몽사몽간에 3층천을 체험했습니다. 꿈 같기도 하고 굼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꿈 안에 있는지 사실 안에 있는지 모릅니다. 옆에서 누가 말하는 것을 다 들으면서도 비몽사몽간에 그런 현상이라든가 혹은 음성이라든가 하는, 이 오관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감각이 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종합해서 어떤 방향의 인연을 나에게 연결시키기 위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과학적인 면에서 종합해보라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매일매일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검토해 보십시오.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잊을 수 없는 몽시 같은 것은 백 퍼센트 적중합니다. 그런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몽사몽간에 누구하고 얘기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면 사람, 물건이면 물건이 그 꿈 가운데 인연돼 있지만 그것이 사실 가운데서 실체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꿈 가운데서 누구하고 노래를 하고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꿈 가운데 노래가 아니고 옆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가 그 노래였다, 이런 사실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영적 차원에서 마음 상태가 공명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지극히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이 어디에 나타나느냐? 공중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과 내가 둘이라는 것을 압니다. 다른 존재인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음이 아직까지 존재성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몸뚱이한테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마음이 존재성을 확립해 가지고 또 다른 하나의 주체다 하는 그런 인격적인 차원의 자리가 형성되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다르다는 것입니다.
차원이 높아지게 되면,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공명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원 높은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을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맨 첫 단계에서는 암시와 같은 사실들이 여러분의 생활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자는 이런 막대한 자료를 수집해야 됩니다.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심코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언제나 배고픈 자의 심정이 돼야 합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그렇게 찾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그 자체는 뭐냐? 내가 언제나 주체가 되든가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확정적인 주체요, 확정적인 대상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나 찾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면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혹은 대상적인 존재가 나타나면 대번에 압니다. 내가 누굴 전도할 사람이 있으면 대번에 안다는 말입니다. 괜히 마음이 좋아서 간다는 것입니다. 그걸 심파(心波)라고 하지요? 마음의 파장이 있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을 보게 되면 고기 장사 하는 사람은 푸주 냄새가 나지요? 그렇잖아요? 천(옷감) 장사 하는 사람은 천 냄새가 납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하는 사람의 태도는 전부 다 나와 더불어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타락은 무엇이냐 하면 모든 관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관계, 본연의 인간에 대한 관계, 본연의 신에 대한 관계를 전부 절단해 버린 것입니다. 절단된 관계의 세계를 우리가 다시 접속시키기 위해는 언제나 내 자체가 이걸 접속시킬 수 있는 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작용을 해야만 이 관계가 개척되지, 접속시키고자 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 한 이 환경은 개척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을 찾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기도하고 나면 ‘아, 오늘 좋은 일이 있다’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니까 그냥 좋은 일이 나타나겠지’ 이게 아닙니다. 그걸 찾아야 됩니다. 이러한 생활태도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체휼과 실천이라는 것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비몽사몽간에 이런 사실이 벌어집니다.
(76.129-133, 1975,2,2)
여러분들이 철야기도 같은 것 하지만? 정신을 하늘로 전부 다 올리고, 세상물정을 다 잊어버리고..., 그런 경지 이상의 자리에 들어가자 그 말입니다. 그런 경지 이상의 자리에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찌꺼기가 전부 다 침체되면 맑은 물이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잠은 우리가 정신수양 해 가지고 정신을 올리고 나쁜 의식을 전부 다 내리자는 것입니다. 자는 경지,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여러분이 고단하고 그러면 잠들락 말락 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 때는 다 듣습니다. 다 보입니다. 듣기는 듣지만 확실히 듣지 않고 보기는 보지만 확실히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벌어지느냐? 꿈과 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대 무엇인가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철야기도를 하고 모든 육욕을 단절시키고 정신을 통일해서 자꾸 올림으로 말미암아 장래에 자기의 갈 길이라든가 이런 것이 보이고, 그 다음에 그것이 습관화 되면 전체를 조정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만 하면 눈 뜨고도 볼 수 있고 다 들을 수 있는 경지까지 들어갑니다. 두 가지를 보고, 두 가지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91.275, 1977.2.27)
그 단계가 높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그 다음엔 여러분에게 계시라든가 지시라든가 하는 것이 벌어져요. 계시라는 것은 우리가 분석해야 됩니다. 지시라는 것은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계시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석을 해야 됩니다. 무엇을 가르쳐 줄 때도, 가르쳐 주는 데는 음성으로 들려주기도 하지만 환상으로도 보여 줍니다. 좋은 봄날을 맞이하여 사슴 한 쌍이 시냇가에서 생수를 마시면서 먼 산을 바라본다. 이런 환상은 지극히 행복스러운 소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밭을 계발하기 위한 하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우리 마음의 밭이라는 것이 유리 판 같이 평평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울퉁불퉁하다는 것입니다. 형은 수평같은 면을 가졌지만 그 자체는 울퉁불퉁하다는 것입니다. 울퉁불퉁한 여기에 하늘의 감도가 반사되어 가지고 오게 되면 빛의 굴절과 마찬가지로 들어오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반사돼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부 다 가리려니 그런 놀음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부분 부분을 계발하려니 그런 역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시는 단계를 지나게 되면 묵시 단계입니다. 여러분, 묵시록 알지요? 하루 종일 영계에 들어가서 체험을 한다든가, 저 나라의 세계가 어떻다든가... 전부 다 그런 세계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활적인 감정권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체휼적인 신앙을 안 가지고는 위대한 하늘의 뜻의 결과 세계를 우리의 생활무대에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을 갖지 않는 신앙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역사를 합니다.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힘이 전기 작용과 마찬가지로 들어옵니다. 여러분이 체험을 해 봤으면 알겠지만, 고압에 접한 것과 같은 힘이 찾아 들어오게 되면 우리 의식보다 강한 힘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건 딴 세계의 의식입니다. 초자연적, 초인적인 의식적인 감정이 찾아들게 되면 우리 몸, 이 육신이라는 것이 타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연의 심성, 본연의 하나님의 신성에 반발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 앞에 어떤 신의 성품이 강력하게 들어와도 자연적으로 순화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어오는 데는 플러스, 마이너스와 같이 음파도 강약으로 전파되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그 힘도 한꺼번에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게 들어왔다 약하게 들어왔다 이러면서 개척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진동이 벌어지고 자기의 의식이 없어지고 영적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자꾸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몸뚱이가, 육성이라는 것이, 타락성 그 자체가 전부 순화되어 가지고 자연히 백퍼센트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현상이 없이 역사 이상의 자리에 들어가서 하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다 받으면서도 감쪽같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과정을 거쳐서 순화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단계적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암시라든가 몽시라든가 계시라든가 지시라든가 하는 이런 과정을 여러분이 거쳐야 합니다.
그런 체휼 단계에 들어가면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을 명령합니다. 누구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할 텐데 책망의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가끔 벌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이건 미치광이로 취급받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할 줄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체휼적 신앙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그 체휼적 신앙을 가지고 마음으로 느낀 것을, 체휼한 것을 가지고 실험을 통한 체험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체휼과 실천,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필요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76.133-136, 1975.2.2)
찬양
예배는 열성적으로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 최고의 방법은 찬송과 찬양을 통해 하늘을 찬미하면서 심정적 힘을 발산하는 것이다. 찬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자연적 표현이다. 찬송가와 성가는 그 가사에 시적이고 가슴에 와 닿는 목소리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어떤 신학적 담론보다도 우리 영혼을 깊게 울린다.
찬송할 때 우리는 마치 하늘 천사들의 합창소리를 듣는 신비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영적으로 고양된다. 성스러운 음절과 주의 신성한 이름을 되풀이하는 찬양을 통해 우리 마음은 궁극적 실재, 하나님에게 맞춰지고 그 신비로운 힘을 불러낼 수 있다.
1. 찬양의 가치
종교 경전
그분은 영원히 살아계시고 그분 외에 신은 없도다. 그 분께 구하고 그 분게 신실한 경배를 드리나이다. 만유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꾸란 40.65(이슬람)
나는 아노라, 지혜의 주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주들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 내게 지극한 선이 됨을. 그들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섬기고 찬양하며 그들 앞에 나아가리라.
아베스타, 야스나 51.22(조로아스터교)
즐거움 : 선왕이 보고서 악을 지어 덕을 높여서 성대하게 상제께 올려 조고를 함께 배향한다.
역경 16(유교)
하나님께 가장 좋은 네 마디는 ‘하나님께 영광을, 하나님께 찬미를, 하나님 외에 신은 없도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이다.
무슬림 하디스(이슬람)
사람이 수행의 삶을 추구하여 모든 고행주의가 가리키는, 모든 베다들의 칭송하는 말, 그것을 내가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것은 “옴”이다. 실로 이 음절은 불멸의 브라흐만이다. 실로 이 음절은 지고무상의 목적이다. 이 똑같은 음절을 아는 자는 실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카타 우파티샤드 1.2. 15-16(힌두교)
‘옴’이라는 말의 요소는 제4위와 세 요소들, 즉 A,U,M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각성상태는 철자 A이며, 몽면 상태는 철자U이며, 숙면상태는 철자M이다. 제 4위는 어떤 요소도 없으며, 다루어질 수 없으며, 현상들의 지멸, 두 번째가 없음이다.
만두키야 우파니샤드(힌두교)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통해 모든 붓다들은 항상 ‘나무 묘 호 렌게 교’라는 다섯 음절의 씨앗으로 불성을 얻었다.
니치렌(불교)
만일 사람이 끊임없는 노력으로 수많은 이름을 지닌 무한한 지고존재인 우주의 주를 찬양한다면, 만일 그가 바로 그 불멸자에 대한 명상하고 그를 찬양하며 그에게 예배드리고 공물을 바치며 신애로써 매일 숭배한다면, 만일 그가 매일 비슈누에 대한 찬가를 노래한다면, 무시무종이며 세계를 주관하는 전체 우주의 위대한 주, 그는 모든 불행을 거두어갈 것이다.
마하바라타 아누샤사나 파르바 254(힌두교)
말씀 선집
노래는 하나님과 화합하는 근본 재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할 때는 도취되는 기분을 느껴야 합니다.
(16. 289. 1966.7.31)
감동해서 부르는 노래가 최고의 절규이고 심령이 담긴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여기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17.22. 1966.11.6)
기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과 더불어 말하자는 것입니다. 특별히 앉아서 기도하는 것보다도, 자기 생활을 통해서 하늘과 더불어 동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기도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말로 하는 기도보다는 노래 기도가 감동적이고, 자기 자신을 신비경으로 빨리 끌어올리는 것을 즉각적으로 체험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 감정을 넣어서 ‘하나님 아버지!’하고, 깊이 통할 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하는 것이 노래라는 것입니다.
(270,19, 1995.5.3)
스님들도 목탁을 두드립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노래도 합니다. 이것들이 다 조건입니다.
(308. 218. 1999.1.5)
곤충도 하나님, 창조주를 찬양하고 새도 찬양하고 고기도 찬양하고 짐승도 찬양하는데 이놈의 인간이 찬양 못 하는 것입니다. 동물드이나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먹고 사는데 인간은 도적질 하듯이 거짓말을 하고 먹고 살고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 안 됩니다. 반대되어야 합니다. (269.171. 1995.4.17)
아버지 앞에 찾아진 아들딸로서 아버지와 영원히 동거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일과 아버지의 사상과 아버지의 소원을 이룬 자로서 기쁨과 영광의 노래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다운 자식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5.280. 1959.2.22)
2. 찬양의 노래와 시
종교 경전
온 세상이여, 여호와께 환성을 올려라. 마음도 경쾌하게 여호와를 섬겨라. 기쁜 노래 부르며 그분께 나아가라. 여호와는 하나님, 알아 모셔라. 그가 우리를 내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 그의 백성, 그가 기르시는 양떼들이다.
감사기도 드리며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노래 부르며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기도 드려라. 그이름을 기리어라.
여호와님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그 미쁘심 대대에 이르리라.
시편 100(기독교)
그대 모두를 찬미하라, 목청 돋우어 노래하라! 믿는 자들아! 그대들의 노래를 부르라. 아이들도 또한 찬미하게 하라. 무너뜨릴 수 없는 요새 같은 이, 그에게 찬미 드리라. 비올은 감미로운 곡조를 뜯어내라. 류트는 웅장한 가락이 울려 퍼지게 하라. 해금은 잉잉거리며 심금을 울리나니, 인드라께 우리의 찬양이 높이 들려 올려졌도다.
리그 베다 8.69.8-9(힌두교)
나의 하나님, 나의 임금님, 내가 당신을 높이 받들며 언제까지나 당신 이름 찬양하오리이다.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기리며 언제까지나 당신 이름 찬양하오리이다. “높으시어라, 여호와, 끝없이 찬미 받으실 분, 그 높으심, 측량할 길 없음이여.”
당신의 업적 세세에 전해지고 찬란한 그 공적 대대손손 알려지리이다. 당신은 명성, 그 찬란함, 이룩하신 놀라운 일 전하고 또 전하리이다. 당신의 무서운 힘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며 나는 당신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리이다. 끝없이 어지신 일들 기억하며 사람들은 당신의 정의를 기뻐 외칠 것입니다.
시편 145.1-7 (기독교)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노라.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모두를 아시는 분이시며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이시니라.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노라. 왕이시며 성스러우시고 평안하시고(모든 결함으로부터 자유로우시고) 안전을 제공해 주시는 분이시며 잘 지켜주시는 분이시며 전능하시며 강하시며 지고하신 분이시니라. 그들이 대등한 것으로 견주는 것보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니라. 창조주이시며 조물주이시고 모양을 부여하시는 분이시니라. 그분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 있으며 하늘과 당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분을 찬양하노라. 그분은 전능하시며 현명하시노라.
꾸란 59.22-24 (이슬람)
신령의 권능으로 너희 모두 함께 오라. 유일이며 모든 이의 반가운 손님이신 천계의 주께로, 태고적 사람, 그는 오늘 우리가 오기로 바라도다. 모든 길이 그를 향해 있나니, 그는 실로 유일자로다.
오 인드라여! 만인에게 찬미 받는 이시여! 여기 우리 모두는 그대의 것이니이다. 방황하던 우리가 부의 주관자인 그대에게 매달렸도다!
오, 노래를 사랑하는 주!
오직 그대만이 우리의 찬양을 받나이다. 대지가 만물을 품어 사랑하듯 우리의 이 모든 간구를 어여삐 여기소서.
찬미받아 마땅한 이, 인간을 지탱하는 그대, 아름다운 찬미에 힘차게 되며 크게 고무되는 이, 날마다 찬미되는 불멸의 유일자, 관대한 인드라께 우리의 웅장한 찬미가 전해졌도다.
인드라를 향한 우리의 찬미가 천계의 빛과 하나되어 나아가도다. 신부가 아름다운 신랑을 포옹하듯 인드라의 은총을 구하여 그들은 관대한 유일자를 에워쌌도다.
사마 베다 372-375 (힌두교)
말씀 선집
한없는 은사를 나에게 주시고 영원한 그 생명 참 기쁜 일일세
나 이제 즐겨하며 항상 찬송 하리 큰 영광 높이 돌려 늘 보답하리라
한기쁨 찾으니 내 마음 즐기어 새 소망 높여서 늘 찬송하리라
나 이제 즐겨하며 항상 찬송하리 큰 영광 높이 돌려 늘 보답하리라
무한한 새 생명 나에게 넘치고 영원히 즐길 복 참 감사뿐일세
나 이제 즐겨하며 항상 찬송하리 큰 영광 높이 돌려 늘 보답하리라
택하신 큰 은사 이 몸은 감사코 성심을 다 들여 몸 굽혀 절하세
나 이제 즐겨하며 항상 찬송하리 큰 영광 높이 돌려 늘 보답하리라.
(성가 6장, 성원의 은사. 1953)
저 멀리 비춰주는 영광의 광채 힘차게 소생하라 자유의 생령
이강산 저골까지 깨어 일어나 소생의 그 광채를 길이 빛내리
소생의 그 광채를 길이 빛내리
불러서 찾으려는 영광의 존재 위대한 그 모습은 천주를 품고
깨어난 그 생령이 어디 있는가 찾으시는 그 모습을 어이 모시리
찾으시는 그 모습을 어이 모시리
사망에서 깨어난 내 한 존재가 깨워준 그 자체에 품겨 안길 때
영원한 그 사랑과 위로의 소리 길이길이 즐기며 영광 누리라
길이길이 즐기며 영광 누리라
영광에 안긴 것도 그의 은사요 사랑에 취케 함도 그의 은사니
높이고 또 높여서 갚으려 하나 부족함의 이 마음 어이 금하리
부족함의 이 마음 어이 금하리
(성가 3장, 영광의 은사, 1950)
헌신
헌신이란 하늘에게 사랑으로 경배한다는 의미다. 성경의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주 하나님을 섬기라’는 구절처럼 사랑은 헌신과 희생을 통해 표현되는 결단력 있는 행동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볼 때 헌신이란 기본적으로 충직한 행동과 뜻에 대한 희생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또한 정서적 체험이다. 헌신적인 예배는 즐겁고 격양된 찬미와 찬송,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끊임없는 갈급함으로 채워진다. 강력한 종교적 자각 형태는 특히 힌두교와 시크교의 박티(박애) 전통과 수피 이슬람 신도들과 하시드 유대교인들의 춤과 찬양에서, 그리고 오순절 교회의 성령의 분출 등에서 재현되고 있다.
많은 경전에서는 이 신비로운 감정들이 신랑에 대한 신부의 숭고한 사랑이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구약의 솔로몬의 찬가와 힌두 전통의 라다와 크리슈나 또나 시타와 라마 간의 사랑에서, 예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신앙에서 이러한 감정들이 나타나고 있다. 문선명 선생은 남녀의 합덕과 천지의 합덕 사이에 근본적인 관련성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다.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 한의 심정적 요소를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자 하는 열망에 새롭고 부차적인 해답의 열쇠를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이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된 환경에 사신다면, 하나님과 정서적 교감을 원하는 갈급한 마음은 결국 하늘의 슬픔을 체험하는 단계까지 우리를 이끌 것이다. 문선명 선생의 기도는 눈물과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아픔을 알게 되면 우리는 세상의 형제자매들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고통을 덜어드리기 위해 행위 하게 된다. 이러한 심오한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우리의 심정과 행동은 하나 되는 것이다.
1. 하나님과 그의 뜻에 헌신하는 행위
종교 경전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린도전서 10.31(기독교)
너의 모든 행동이 하늘 위한 것이 되게 하라.
미슈나, 아보스 2.17(유대교)
가장 훌륭한 행위는 하나님을 위해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증오하는 것이라.
아부 다우드 하디스(이슬람)
그분은 영원히 살아계시고 그분 외에 신은 없도다. 그분께 구하고 그분께 신실한 경배를 드리나이다.
꾸란 40.65 (이슬람)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신명기 6.7-9 (기독교)
한 개의 잎사귀든 꽃이든 과일이든 물이든 청정한 마음의 신애로 바치면, 나는 그 사랑스런 공물을 받는다. 그대가 먹는 음식이든, 그대가 행하는 희생제든, 그대가 베푸는 도움이든, 심지어는 그대의 고통까지도, 그대가 행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바치는 봉헌으로 하라. 그러면 그대는 업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이다.
바가바드기타 9.26-27(힌두교)
사랑과 믿음으로 사는 자는 거룩하도다. 생각을 통하여, 말과 행동을 통하여, 양심을 따라서 그는 의를 증장시키나니, 지혜의 주께서 선한 마음으로 그의 나라를 허락하시는도다. 내가 간구하여 이 상을 받으리라.
아베스타, 야스나 51.21(조로아스터교)
말씀 선집
충효정신과 송죽 같은 절개는 앞으로 이루어질 지상천국의 중추적 사상과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니 그 나라를 위해 영원히 충성해야 하고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이니 그 아버지께 영원토록 효도해야 합니다.
(100.253. 1978.10.19)
그저 아무렇게나 일해야 되느냐?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지금이 어떠한 때인데 이때에 가야 할 곳은 어떤 곳이라는 목적관이 뚜렷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입장을 대신하려니.. 하나님 대신 자가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이고, 그러한 자리를 대신했다는 사실을 자기가 확신하면서 그 다음부터 하나님 뜻의 길을 따라 어디로 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70.257-258, 1974.2.13)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을 갖고 오느니 만큼 우리가 완전한 무엇을 투입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우리 한국의 격언이 있지만 그건 천리를 통한 말입니다. ‘정성을 다 들인다’하는 그 정성들인다는 거기에는 안팎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또, 언행심사와 모든 실천, 안팎의 모든 우리 양심 생활권까지도 몽땅 합해 가지고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게 정성이라 이겁니다. ‘정’은 정신을 말합니다. ‘성’은 말씀 언변에 이룰 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팎의 모든 것을 이루어 가지고 바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돼야 감천입니다. 하늘이 감동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감동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느냐? 그 사람을 생각하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생각이 늘 머물게 되면 거기에는 사랑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전체의 생각이 거기에 머물게 될 때는 사랑이 여기에 연결됩니다. 생각하는데 사람의 마음이 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는 입장에 서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듯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정성으로 모든 것을 바쳐 드리면 하나님의 사랑을 비로소 여러분들이 느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타락했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정성을 들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찾아오는 것이고 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78.31-32. 1975.5.1)
정성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는 사탄 혈통이 절대 근절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 비통한 역사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부리가 박힌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전부 뽑아 드릴 수 있느냐? 더 깊이 들어가서 뽑으려니까 더 느껴야 됩니다. 하나님은 자만 나는 대낮같이 일어서서 제일 어려운 일을 하는 이러한 입장에 서지 않고는 타락했을 때의 하나님의 심정보다도 몇 백 배 어려운 자리에 서지 않고는 뽑을 수 없다는 마음을 언제나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308.208-209, 1999.1.5)
2. 하나님을 위한 사랑과 동경
종교 경전
모든 존재 속에 거하는 지고한 주, 모든 피조물의 참된 자아는 전심의 신애를 통해 실현될 것이다.
바가바드기타 8.22(힌두교)
모든 숨결에서, 지극히 미세한 것에서도 주를 기억하는 자들, 언제나 가슴속에 주의 이름을 새겨 가진자들, 나나크가 말하노니, 그들은 축복을 받으리니, 완전한 신앙자로다.
아디 그란트, 바르가우라. M.5.p.319(시크교)
차코라 새가 푸른 달빛을 갈망하듯, 연꽃들이 찬란한 아침 햇살을 원하듯, 꿀벌이 꿀을 얻고자 꽃을 찾아다니듯, 오, 주여! 나의 가슴이 그대를 애타게 원합니다.
바사반나, 바차나 364(힌두교)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까? “네 하나님이 어찌 되었느냐?” 비웃는 소리를 날마다 들으며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 이것이 나의 양식입니다.
시편 42.1-3(기독교)
사랑하는 당신이여, 제가 무엇을 더 말해야 하겠습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다시 태어나서나 당신은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사랑의 올가미는 나의 가슴을 당신의 발에 묶습니다. 나의 마음은 오직 당신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쳤습니다. 이 가정에서 저 집에서 누가 실로 나의 것입니까? 내가 누구를 내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혹독하게 추웠으며, 나는 당신의 발아래에 귀의합니다. 나의 두 눈이 깜박거리는 동안에,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합니다. 나는 내 가슴이 죽었다는 것을 압니다. 찬디다시가 말하노니, “내가 실에 꿰어 목에 걸고 있는 시금석.
찬디다사(힌두교)
한 번은 크리슈나의 양어머니 아쇼다가 어린 크리슈나를 품에 안고 있던 중에 갑자기 화덕 위에 끓어 넘치고 있는 우유를 내려놓으려고 황급히 그를 땅에 내려놓았다. 이에 아기는 화가 나서 굳은 우유가 들어 있던 항아리를 깨버리고 방구석에 있던 치즈를 들어 얼굴에 짓이겼다. 그리고는 구워 놓은 빵을 원숭이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와 이 광경을 보고는 그를 심히 꾸짖었다. 또한 나무절구에 그를 동여매어 벌주려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밧줄이, 비록 충분히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짧아 보였다. 이에 그녀는 밧줄을 좀 더 가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너무 짧았다. 그녀는 찾을 수 있는 모든 밧줄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크리슈나를 묶을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양어머니 아쇼다를 매우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크리슈나는 내심 미소 지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어머니가 완전히 지키고 어쩔 줄 몰라 허둥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묶이도록 허락했다.
시작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으며, 만유에 편재하여 무한하며, 전지전능한 크리슈나라 할지라도 그는 오직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 때문에 그녀에 의해 자신이 묶이도록 허락한 것이다. 그는 전능하신 주요 만유의 주시며 일체만물의 주재자시다. 그러나 그는 그를 신애하는 사람들에게 속박되도록 자신을 허락하시느니라.
스리마드 바가바탐 10.3(힌두교)
말씀 선집
얼마나 하나님을 흠모하고 사모하였느냐? 현재의 내 입장을 전부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몽땅 바쳐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느냐 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완전한 플러스 앞에 대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에 대해서 직행해 오는 것입니다. 순수한 직행의 행로를 통하여서 그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를 향해 돌진해 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마이너스는 새로이 후방에서 밀어주는 반대의 작용을 일으킬 것입니다.
(36.100, 1970.11.22)
이념은 만민에게 통할 수 있지만 실체는 하나밖에 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념을 믿었다고 하는 신앙자는 많지만 실체를 믿었다고 하는 신앙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그대의 마음이며, 그대의 서러움이 내 서러움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날까지 맺혀진 하늘의 원한의 심정, 뼈골이 녹아지는 듯한 서러운 심정을 느껴봤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디를 가든 하늘을 대하여서는 자기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졸도할 정도의 심정을 갖고 이 땅 위에서 3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4.126, 1958. 3.23)
오늘날 우리는 신앙이라는 말을 걸어 놓고 고대하고 있으나, 그러한 단계를 넘어서 생활적인 신앙을 해야 되겠습니다. 즉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식구, 하늘과 같이 생화하는 백성,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즐길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으며,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역사과정의 수많은 우리 선조들 앞에 신앙이라는 말을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해 고대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 자리에서 싸우고 있는 신앙자라로서의 그 자체가 아니라 끝 날까지 남아져 아버지와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셨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고대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대하신 것은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사라져 갈 수 있는 나, 신앙을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할 수 있는 나, 사망권을 벗어나 생명권내에서 부활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고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 수 있는 그런 나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이 고대하던 나, 그 나를 그리워할 줄 알고 그 나를 찾기 위하여, 그 나를 만나기 위하여 허덕이는 여러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6.84-85, 1959.3.29)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붙들고 6천년의 역사적인 서러움에 사무친 심정을 위로하고 해원해 드리는 것입니다. 서러운 아버지의 가슴을 붙들고 아버지를 부르게 될 때에 그 한마디의 말로써 갈라졌던 천지가 다시 인연 맺어질 것입니다. 이런 기준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 할 때는 하나님의 서러움은 여러분으로부터 떠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조건에서 여러분은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3.58, 1957.9.22)
배가 고픈 것이 슬픔이 아니옵고, 환경에 몰려 억울한 자리에 선 것이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것, 그 이상의 슬픔이 없는 것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자리는 아무리 없는 자리일지라도 무한히 있는 자리요, 아버지가 계시는 자리는 지옥의 중심일지라도 천국으로 화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저희들은 죽으나 사나 있어야 할 곳은 아버님이 계신 곳밖에 없는 것을 아옵니다.
(43. 135. 1971.4.25)
3. 신랑을 위하는 신부로서 하나님에의 헌신
종교 경전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사랑하는 임 그리워 애가 탔건만, 찾는 임은 간 데 없어 일어나 온 성을 돌아다니며 이 거리 저 장터에서 사랑하는 임 찾으리라 마음먹고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였네.
성 안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을 만나 “사랑하는 나의 임 못 보셨소?” 물으며 지나치다가 애타게 그리던 임을 만났다네.
나는 놓칠세라 임을 붙잡고 기어이 어머니 집으로 끌고 왔다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바로 이 방으로 들어왔다네.
아가 3.1-4 (유대교)
내 손에 거울처럼,
내 머리에 꽃처럼,
내 눈에 코흘처럼,
내 입에 땀불처럼,
내 가슴에 사향처럼,
내 목에 목걸이처럼,
내 육신에 황홀경처럼,
내 가정에 사랑처럼,
새에게 날개처럼,
물고기에게 물처럼,
생물에게 생명처럼,
당신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말하소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실로 당신은 누구입니가?
비디야파티가 말하노니, “그들은 서로입니다.”
비디야파티(힌두교)
거룩한 어머니 주 없이 어찌 사오리까?
만유의 주 당신에게 영광의 있기를!
내가 당신을 찬양하나니
당신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나이다.
신부는 주를 애타게 갈망하여
온 밤을 깨어 그를 기다립니다.
내 가슴을 사로잡은 주,
그만이 나의 고뇌를 헤아려 아나니,
주 없는 내 영혼은 괴로움과 고통 속에 있나니,
그의 말씀 구하고 그의 밭에 닿기를 원하옵니다.
주여, 자비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당신의 품에 들게 하소서.
아디 그란트, 사랑, M.1.p. 1232(시크교)
나의 임이 속삭이는 소리,
“나의 귀여운 이여, 어서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이여, 이리 나와요. 자, 겨울은 지나가고 장미는 활짝 걷혔소. 산과 들엔 꽃이 피고 나무는 접붙이는 때 비둘기 꾸르륵 우는 우리 세상이 되었소. 파란 무화과 열리고 포도 꽃향기가 풍기는 철이오. 나의 귀여운 이여, 어서 나와요. 나의 어여쁜 이여, 이리 나와요” 바위 틈에 숨은 나의 비둘기여! “벼랑에 몸을 숨긴 비둘기여, 모습 좀 보여줘요. 목소리 좀 들려줘요. 그 고운 목소리를, 그 사랑스런 모습을.”
아가 2.10-14(유대교)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시게 되어 식사하실 때에 한 여인이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 향유를 에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있던 이들 몇이 분내어 “왜 이렇게 낭비하는 가? 이 향유를 팔면 삼백 데라리온 이상을 받을 수 있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 텐데...” 하고 서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나무랐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만두어라. 왜 그녀를 괴롭히느냐? 그가 내게 한 일은 아름답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있지를 않을 것이다. 이 여인은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계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일도 전해져서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 14.3-9(기독교)
오 라마여!... 나는 그대와 더불어 있기를 간구합니다! 설사 내가 호화로운 수레를 타고 그대 가가이에서 이제 더 이상 쉴 수 없다 해도, 그대를 따라감에 아무런 피곤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와 함께 있다면 쿠샤 풀도, 거친 갈대도, 억새풀, 가시 돋친 찔레덤불이라도 양털처럼 포근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나를 뒤덮는 흙먼지도 전단향보다 감미로울 것입니다.
오 경애하는 나의 주여! 풀을 깔고 그대 옆에 누워 잠들 때 비단금침도 부럽지 않나니, 무엇이 나에게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나뭇잎이나 풀뿌리, 나무 열매들, 그것이 무엇이든 적거나 많거나 간에 그대의 거룩한 손으로 거두어 몸소 나에게 주시는 것들은 불로불사의 감로처럼 감미로운 것입니다!... 그대와 함께 있는 곳, 그곳이 곧 천계이며, 그대를 떠나 사는 곳, 그곳이 곧 지옥이라 할 것이니, 이보다 더한 진리는 없는 줄로 압니다!
라마야나 아요드야 칸다 30(힌두교)
말씀 선집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내 몸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내 심정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본연의 세계는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 할지라도 남편이 부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부인이 그 남편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부인이 하나님을 남편보다 더 사랑한다고 해서 왜 하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사랑, 어떠한 내용을 초월한 주체적인 입장에 계신 하나님은 내 몸의 영원한 주인입니다. 몸둥이의 영원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품, 그 동산에 있으면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내 마음의 영원한 주인, 내 심정의 영원한 주인이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7.255. 1959.9.20)
여자들의 소망은 그렇잖습니까? ‘저 남자면 나는 죽어도 좋다’ 할 수 있는 남자를 얻게 되면 천하에 무엇도 필요 없습니다. 못 먹어도 그만, 잘 먹어도 그만, 울어도 그만, 죽어도 그만입니다. 그 이상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최고 욕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는 것인데, 이 사랑을 점령함으로 말미암아 이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왕의 왕권을 갖는 것입니다. 왕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전부 욕심을 부여한 것은 그 목적을 만민 공통으로 부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연적 이상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작용을 하는 것은 자연적 이치입니다. 그러니 그게 우리가 자연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다 이겁니다.
신인애,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이, 종횡이 하나 되느냐? 하나님은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수직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승천한 이후에 성신이 왔습니다. 성신은 어머니 사랑입니다. 기독교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종교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만나기 위해서는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권을 이겨야 됩니다.
그런데 종교가 얼마나 희생을 많이 당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을 평면적으로 획득하기 위한 것이 지상천국, 재림이상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재림주를 보내서 중심으로 세워 가지고 횡적으로 판도를 전개시키는 것입니다. 이중으로 되는 것입니다. 완성한 이중적 모든... 몸 마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되는 것입니다. 남자의 몸과 여자의 마음이 상대를 이뤄 가지고 천지조화의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심으로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입니다.
(252.120-121, 1993.11.14)
타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정을 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을 논하지 못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들딸을 대할 수 있는 심정은 갖고 있지만, 그 심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그 사람들을 찾아 세우는 역사를 하시는데, 그것이 구원역사요, 그 사람들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보내심을 입은 자가 구주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정을 바라야 되겠고, 또 하나님의 심정을 바라기 전에 내 한 자신은 어떻게 살아나가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먼저 모시는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높고 귀한 것을 대하여는 머리를 숙이고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했을망정 높고 귀한 하늘의 심정을 대하여 모시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지음 받은 인간의 본연의 심정입니다. 따라서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모심의 생활을 해보지 못한 자는 천국과 하등의 인연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8.291, 1960.2.14)
아버지 오늘 아버지의 심정동산에서 저희들의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고, 모든 생각이 움직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심정은 무한한 사랑의 심정인 것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아버님의 심정은 무한히 슬픈 심정이옵고, 무한한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도 저희들은 알았습니다.
한없이 슬프신 아버님, 한없이 수고하신 아버님, 지금도 한없이 마음을 졸이시는 아버님, 그 아버님이 창조주이시고, 그 아버님이 온 만상의 주인공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아버님이 당하시는 그 한없이 슬픔이 저희 가슴에 스며들게 하여 주시옵고, 한없는 분함과 원통함이 저희의 심중에 흘러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을 체휼한 자, 몸 둘 곳을 몰라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할 슬픔에 잠기게 하여 주시옵고, 그 마음을 수습할 수 없어 하늘인지 땅인지 모르는 채 통곡하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정성을 다하고 이 몸 마음을 다 드려 그 심정 앞에 부족함이 없다 할 수 있는, 인정받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들은 하늘이 어떠한 물질을 주는 것을 원치 아니하옵고, 사정을 알아주는 것을 원치 아니하옵고, 은혜를 주는 것을 원치 아니하옵니다. 그보다는 은혜를 주신 후에 연락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그 내정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슬펐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고통의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8.262, 1960.2.7)
순수한 의도
섬김의 뿌리는 심정에 있다. 섬김의 행위로 우리를 이끄는 의도가 바로 섬김의 가치를 결정한다. 처음에는 신앙과 복종이 외적인 형태로만 표현되지만, 결국 본래의 내면적 의도는 외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에는 순수한 심정과 신실한 마음이 요구된다.
속세에서 삶도 우리의 의도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전에 다가가 ‘누가 주의 언덕을 오르겠는가?’ 라는 성가를 부를 때 그들은 말하였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그들은 도덕적으로 정의롭게 살라는 하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았다고 말이다. 언제나 순수한 의도에서 하나님 섭리를 세속적 관심보다 우선적으로 섬길 때 마음의 순결성이 길러지는 것이다. 마음과 몸을 다하여 하나님에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이바지하겠다는 순수한 의도를 지닐 때 우리는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유지하며 천문이 개문된다. 순결한 정성의 반대 개념의 이해를 위해서 제15장 ‘위선’ 을 참고하라 . 정성의 역할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12장 ‘정성과 성실’ 을 참고하라.
1.마음의 순수와 성실
종교 경전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태복음5.8(기독교)
사람은 지성의 순수함을 통해 청정하게 된다. 그 후 명상 중에 그는 부분 없는 ‘그’를 본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3.18(힌두교)
어떤 사람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여호와께 복을 받고 하나님께 구원 받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며 야곱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시편2.4.3-6(기독교)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내 앞에 나아오는 그대들은 모두 거짓 없이 순하고, 안팎으로 정결하고 거울처럼 진리를 반영하는 마음으로 기원해야 한다.
텐만구 신사의 신탁(신도)
비록 내가 벌겋게 단 철공밖에 먹을 것이 없다고 해도, 깨끗지 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치는 제 아무리 거창한 공양물이라도 결코 나는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비곡 내가 구리를 녹인 만한 뜨거운 불 위에 않을망정 더럽혀진 마음을 가진 사람의 처소는 결코 찾지 않으리라.
하치만 신사의 신탁(신도)
나의 형제여! 순결한 마음은 거울과 같으니, 사랑의 빛과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절연으로 그것을 깨끗이 하여라. 그래야 참된 태양은 그것 속에서, 그리고 영원한 아침의 여명 속에서 빛날 수 있느니라.
일곱 골짜기와 네 골짜기, 2.1(바하이교)
성실(이흐산), 너희가 하나님을 경배할 때 너희가 그분을 보는 것처럼 하라. 비록 너희가 그분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분이 너희를 보리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2(이슬람)
성실함(마카토)은 신의 마음이다. 따라서 신에게 예배드릴 때 만일 우리가 성실한 마음을 지닌다면 신은 확실히 응답할 것이다.
가이바라 에켄, 신기훈(신도)
주 하나님을 따르려 하는 자는 사소한 문제에 걱정할 시간이 없다. 창조자 하나님을 늘 섬기려 할 때 허영은 끼어들 시간조차 없다.
이스라엘 바알 셈토브(유대교)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요한계시록3.15-16(기독교)
말씀 선집
복의 영원한 고향은 하나님의 심정이므로 하나님의 심정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사람이 되어야 그곳에 하나님의 복이 운행한다.
(뜻길,p.213)
하나님은 정성 안 들인데는 움직이지 않으신다.
(뜻길,p.23)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자신을 위하여 사는 아들딸이 되지 말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2.300,1957.06.30)
극복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은 수단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슨 재간 가지고도 안됩니다. 오직 정성으로만 극복할 수 잇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얼마만큼 정성을 들여 모셔봤느냐? 얼마만큼 정성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 했느냐. 얼마만큼 정성들이는 감동을 통해서 느끼려고 했느냐, 또 그러한 체휼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42.228,1971.03.14)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내 할 일은 내가 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켜야 됩니다. 밤이나 낮이나 전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그것이 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104. 112, 1979.04.15)
앞으로 참된 아들딸들이 들여야 할 정성은 어떤 정성이냐? 현실적인 생활 무대에서의 정성이 아니라 소망의 정성, 영광의 정성, 충성의 정성, 모심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정성을 남기고 가야만 천국이 내 천국이 되고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7.245.1967.01.29)
어떤 주의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혹은 어떤 사랑을 위하여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일으키는 진리를 찾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천륜과 아무런 가치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핵심을 찾아들어가 6천년동안 선조들로부터 죄악의 혈통을 통하여 이어받은 더렵혀진 마음을 다시 씻어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니라” 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러분들은 마음을 다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2.194.1957.05.19)
2.예배의 기준으로서 성실
종교 경전
형태에 따라 상을 반영하는 깨끗한 거울처럼 붓다의 축복의 나라로부터 보상은 우리의 심정에 따라 얻어진다.
대방광불화엄 10(불교)
수행승들이 점심식사 전에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였을 때 세이료의 위대한 호겐께서 대나무밭을 가리켰다. 두 수행승이 동시에 가서 두 개의 발을 말아 올렸다.
호겐께서 말했다. “한 사람은 얻었고 한사람은 잃었다.”
무몬이 주석한다. “나에게 말하시오. 누가 얻었고 누가 잃었소? 만일 그대가 그 비밀을 꿰뚷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그 스승이 틀린 곳을 알 수 있을 것이요. 그러나 내가 강력하게 경고하건대 얻음과 잃음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마시오.”
무문관 26(불교)
행위는 다만 의도의 산물이니 모든 사람은 그가 의도한 대로 행하도다. 그리하여 알라와 그의 사도에게 향하고자 하는자. 그의 이동은 알아와 그의 사도를 향하게 되고, 세속적 이득을 취하고 여자와의 결혼을 탐하는 자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
알나와위 하디스 40선1(이슬람)
다르마는 더러움이 없으며 모든 오염에서 벗어나 있다. 설사 열반이라 할지라도 어떤 것에 집착하는 자는 다르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얼룩에 관심이 있다. 다르마는 어떤 대상이 아니다. 다르마를 하나의 대상으로 추구하는 자는 다르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에 관심이 있다….다르마는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다. 그것을 안전한 피난처로 향유하는 자는 다르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피난처에 관심이 있다. ….다르마는 교제가 아니다. 다르마와 관계하고자 하는 자는 다르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에 관심이 있다.
유마경6(불교)
말씀 선집
여러분들은 여기에 왜 앉아 있습니까? 내가 좋은 말씀듣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앉아 있습니까, 미국을 훌륭하게 만들고 교회를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 앉아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두 번째가 아니라 첫 번째라고 해야 옳은 말이지요? 선생님의 말을 듣고 두 번째로 하지, 웃는 것을 보니 그게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118.46,1982.05.02)
오늘날 자체 이익을 위하여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복받겠다고 믿는 사람들을 복 받으면 하나님 그만 믿는다는 겁니다. 복 받는 것이 목적 아닙니까? 좀 잘 살면 그 다음에 다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세계에 복을 주겠다고 하면서 믿어야 됩니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127.27,1983.05.01)
영계가 보면 옛날에 순교한 신도들 가운데 ‘내가 이렇게 순교해야만 천당에 갈 수 있지’ 했던 사람들은 천당에 못 갔더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아버님께서 나를 찾아오기 위해 수난 길을 걸으셨고, 피를 흘렸고, 주님께서도 이와 같이 희생하고 갔으니, 나는 천만분의 일이라도 그 분의 은덕을 갚기 위해서는 어떠한 길이라도 가겠다.’고 하면서, ‘그 은덕을 갚을 수 있는 지리에 내가 동참할 수 있는 영광의 한 때를 맞은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하면서 죽은 사람은 영락없이 천국에 갔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를 위해 죽은 것입니까? 자기를 위해 죽었습니까, 남을 위해 죽었습니까? 하늘땅을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믿고 죽어야 천당가지’ 이것은 누구를 위해 죽은 것입니까? 자기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주장해서는 절대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41.355,1971.02.18)
여러분에게 ‘정성을 들여라, 정성을 들여라!’ 하는데, 왜 그러냐? 정성을 들일 때는 자기 하는 일을 가지고 정성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가지고 정성을 들이게 되면, 하나님이 세계에 햇빛을 수평으로 비추려고 하는데 수평으로 비추지 말고 내게로만 비추어 달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기도한다는 마음을 언제나 가지고 정성 들여야 됩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정성들이는데, 하나님이 자신이 지금 역사를 통해서 얼마나 정성을 많이 들였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308. 200-201, 1999.01.05)
하나님의 슬픔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고통 받을 때 같이 고통 받고 하나님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인류를 붙안고 나오시는 하나님은 혼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혼자 억울함을 당하고 혼자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고통 당할 때 그 고통을 같이한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이 슬퍼할 때 슬픔을 같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고통이 심했고, 슬픔이 심했습니다.
(11.95-96, 1961.02.12)
아버님의 마음을 저희의 마음으로, 아버지의 사정을 저희의 사정으로, 아버지의 소원을 저희의 소원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저희의 원수로, 아버님의 이 싸움을 저희의 싸움으로 하여서 아버지의 소원을 성취해 드릴 수 있는 승리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사랑하는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5.213, 2959.02.01)
헌금과 십일조
헌금이란 신앙과 헌신의 물질적 표현이다. 고대의 동물 헌제는 사라진 지 오래이며, 이제는 그것이 헌금과 십이조 또는, 탁발승에게 하는 시주로 대체되었다. 유형을 떠나서 모든 헌금은 신앙적 심정의 외적 표현이다. 본질적으로 헌금이란 자기 자신을 대신해 바치는 것이다. 세계의 종교경전은 제물을 바칠 때 최고로 귀한 것을 기꺼이, 아쉬움이나 집착 없이 바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헌금의 성서적 기준은 개인 수입의 10분의 1을 바치는 십일조다.
1.순수하고 헌신적인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
종교 경전
너희가 좋아하는 것을 베풀 때 참다움을 얻으리라. 너희가 베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도다.
꾸란 3.92(이슬람)
모든 제 의식은 천계로 가는 나룻배이니라.
사타파타 브라흐마나 4.2.5.10(힌두교)
인간의 제물을 먹는 영은 그에게 생명을 되돌려준다.
요루바족의 격언(아프리카 전통종교)
우리(하나님)은 너희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식으로 희생물을 정하였으며, 그 속에 너희에게 좋은 것이 있느니라. 그것을 나란히 세웠을 때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라. 그리고 옆으로 넘어졌다면 그것을 먹어라. 그리고 가난한 자와 구걸하는 자에게도 먹여라. 이와 같이 우리는 그것을 너희에게 복종시켰으니 아마도 너희는 감사할 것이니라.
그것의 고기와 피는 하나님에게 도달되지 않느니라. 그러나 너희의 경건함이 도달 되니라. 이와 같이 너희가 인도된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미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그것을 너희에게 복종시켰노라. 그러니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꾸란 22.36-37(이슬람)
잡초는 논밭을 망치게 하고 애욕은 사람들을 망치게 한다. 그러므로 애욕을 여읜 이에게 드리는 보시는 충성한 결실을 가져오리라.
잡초는 논밭을 망치게 하고 증오는 사람들을 망치게 한다. 그러므로 성냄을 여읜 이에게 드리는 보시는 충성한 결실을 가져오리라.
잡초는 논밭을 망치게 하고 미혹은 사람들을 망치게 한다. 그러므로 미혹을 여읜 이에게 드리는 보시는 풍성한 결실을 가려오리라.
잡초는 논밭을 망치게 하고 욕망은 사람들을 망치게 한다. 그러므로 욕망을 여읜 이에게 드리는 보시는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리라.
법구경 356-359(불교)
공물의 봉헌이 곧 신 브라흐만이다. 신에 의해 신의 거룩한 불에 바쳐진 공물도 신이다. 신의 일인제 의식에 몰두하는 자는 신에게 이른다.
어떤 요가행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제사를 드리며, 어떤 요가행자들은 신의 제단 위에 이기심 없는 헌신과 봉사를 드린다. 어떤 요가 행자들은 모든 감각적 즐김을 고행의 불 속에 태워 제사지내며, 어떤 요가행자들은 감각적 대상들을 감관의 불에 바쳐 승화시킨다. 어떤 요가행자들은 모든 감관의 행위와 생기의 작용을 지혜의 길에서 불타는 자제의 불에 바친다.
어떤 이들은 제물을 제사의 공물로 바치고 고행이나 수련을 또한 제사로 바치기도 한ㄷ. 어떤 이들은 맹세하고 경전의 학습과 지식으로써 제사를 드리며 명상으로써 제사 드리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들숨과 날숨을 고르게 하여 그들의 생기를 제사지내며, 어떤 이들은 단식으로 그들의 생기를 바친다. 이들은 모두가 제사를 아는 자들이며 이로써 자기의 죄과를 멸한 자들이다.
바가바드기타4.24-30(힌두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는 조상이 앞에 계신 듯이 하고, 산천의 산을 모실 때는 신이 앞에 있는 듯이 하다. 이에 대해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음과 같다.”
논어 3. 12(유교)
한번은 랍비 므이르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성서에는 제물을 바치는 것이 여호와를 기쁘게 해드린다는 내용도 있고, 또 하나님께서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므이르가 대답하였다. “그것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봉헌에 합당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바라이타 칼라 8(유대교)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마가복음12.41-44(기독교)
무엇을 베풀든 믿음으로 베풀어야 하며 믿음 없이는 하지 말아야 한다. 기쁜 마음으로 겸손하게, 친절하게 베풀어라.
티앗티리야 우파니샤드 1.11.3(힌두교)
거룩한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그대의 공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라. 다만 청정한 마음으로 기꺼이 제사를 드리라. 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머물게 하라. 제사드리는 이가 전념할 일은 다만 제사뿐임을 알고 다만 그 일에 전념하라. 이로써 그대는 여기에 편안히 머물러 사악함을 버리게 되리라.”
숫타 니파타, 맛지 숫다 506(불교)
사람이 희생제를 드리러 갈 때 성난 마음이 아니라 평온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그는 최소한 하루동안 머물러야만 한다. 만약 그날 싸웠거나 그 마음속에 성냄이 있으면 그는 병을 얻게 되고, 그 제사와 그 가문의 말씀은 깨어지고 만다.
루이족의 속담(아프리카 전통종교)
여호와께서 예언자 하깨를 시켜 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이 무너졌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집에서 사느냐?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돌아보아라. 씨는 많이 뿌렸어도 수확은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성이 차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아무리 벌어들여도 밑빠진독에 물붓기다. …..산에 가서 나무를 찍어다가 나의 성전을 지어라. 나는 그 집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다.”
학개1.3-8(유대교)
많은 신도가 다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그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로부터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를 팔아서 그 값의 얼마를 따로 떼어 놓았는데, 그의 아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떼고 난 나머지를 자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그때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였다.” 아나니아는 들으시오.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사탄에게 홀려서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얼마를 몰래 떼어 놓았소?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의 것이 아니었소? 또 팔린 뒤에도 그대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할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요? “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그 자라에서 쓰러져서 숨졌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
사도행전4.32-5.5(기독교)
말씀 선집
제물을 누가 드리느냐? 구원받겠다는 사람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몸 대신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과 제물과 나와 셋이 하나 되어야 됩니다. 거기에는 간격이 없어야 합니다.
(274.199-200, 1995.11.03)
우리 신앙노정은 반드시 탕감해서 복귀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탕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 제물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내 전체를 대신해서 드리는 조건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내적이라면 제물은 외적인 것으로서 그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하나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67.113,1973.05.27)
제물과 그것을 드리는 사람은 별개가 아닙니다. 심정을 통해서는 하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은 사람이 사랑하는 물건이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물건이 아니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물건인 동시에 그 사람의 피와 살을 대신한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제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귀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47.285, 1971.08.30)
‘양을 잡는 나는 양 대신 절대 순종자가 된다. 소를 잡는 나는 소 대신 절대 순종한다. 절대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런 소신을 가져야 됩니다. 사람이 이런 것을 원하기 때문에 ‘내가 이런 동물을, 만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가 이런 사람이 된다는 대신으로 피를 바치는 것이니 이것을 전부 내 대신 받아 주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입니다. 그래서 이런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97.289,1978.03.26)
여러분에게 귀한 것이. 재신이 있으면 ‘내 재산을 세계를 위해서 정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며 그것을 그리워해 봤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는 겁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원하면 말입니다.
(308.206,1999.01.05)
본래 모든 만물은 참사랑을 한 주인의 소유가 되는데, ‘너 사탄은 참사랑을 하지 못했고 나는 참사랑을 했기 때문에 이 모든 만물을 나에게 전수해 줘야겠다’고 할 때 사탄도 그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데 사탄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해야 됩니다.
사탄세계에서 십일조를 찾아와야 합니다. 여기에 10수는 하늘 편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십일조에 대한 것을 찾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탄세계에 가서 찾아오는 겁니다. 나는 인류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사탄 너보다 낫다고 하는 입장에 서가지고 전부 다 찾아오는 것입니다.
(128. 101,1983.06.05)
정성들여 모든 돈이든 무엇이든 제단에 놓고 제물로 드리고 나서는 그것을 후회하면 벌 받는 것입니다. 차라리 드리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나니아 부부의 얘기를 알지요?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절반은 감추고 절반만 갖고 와 가지고 ‘그것이 다’라고 하다가 벌 받은 것입니다. ‘다’ 라는 말은 바치나 안 바치나 다 바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감추었으면 거기데 대한 대가를 받기 때문에 벌 받는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제물 된 사실에 미련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의 소유적 내용을 가지고 생각하는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연들이 있으면 때가 되기 전에 다 청산해야 합니다.
(122.22-23, 1982.10.31)
여러분이 교회에 헌금할 때 어디에서 막걸리를 사 먹다 남은 돈을 헌금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돈은 더러움을 탄 것입니다. 또 시장에 가서 뭘 사다가 남은 돈으로 헌금을 하게 되어도 하나님은 거기에 같이하시지 않습니다.
(48.86, 1971.09.05)
요즘에 기성교회에서는 헌금을 잘한다고 장로 시키고 집사 시키고 한다는데 우리 통일교회는 그러면 안 되겠습니다. 헌금은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나서, 나라 대신 세계 대신 내 생명을 엇바꾸는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166.319, 1987.06.14)
오늘날 기성교회에서 헌금할 때 주머니 가지고 다니지요? 여러분이 거지 패입니까? 우리 통일교회도 헌금을 그렇게 받나요? 무슨 조리대 가지고 받습니까? 나갈 때 전부 저 문 앞에다 모아 놓는 겁니다. 전부 정성들이고 은혜 받고 가는 대가로서 감사헌금 하게 말입니다.
(166.319,1987.06.14)
2. 십일조
종교 경전
땅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든,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여화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바칠 거룩한 것이다.
레위기 27.30(기독교)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만일 제가 이 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여 주시고 저를 짘켜 주셔서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고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만 하여 주신다면, 저는 여호와님을 제 하나님으로 모시고 제가 세운 이 석상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그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8.20-22(기독교)
소든 양이든 목자가 지팡이로 거느리는 모든 짐승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께 거룩한 것으로 바쳐야 한다. 좋고 나쁜 것을 고르지 못하고 바꾸지도 못한다. 그것을 기어이 바꾸려고 하면 그 바꾸려는 것 둘이 다 거룩한 것이 되어 물러낼 수 없게 되리라.
레위기27.32-33(기독교)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나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 천벌 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주는지 갚아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
말라기3.8-10(기독교)
아들은 아비를 어렵게 알고 종은 주인을 어렵게 아는 법인데 나를 아비로 어렵게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를 주인으로 어렵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 사제들에게 말하였다. ‘너희 사제라는 것들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다.’ 그랬더니, 너희는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말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너희는 제단 위에 더러운 빵을 바치면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제단을 더럽히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여화와의 제사상쯤이야 아무러면 어떠냐고 하는구나.
눈이 먼 짐승을 제단에 바치면서도 잘못이 없는 말이냐?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바치면서도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너희는 내 제단에 공연히 불을 피운다. 그러지 못하도록 아예 문을 닫아걸었으면 좋겠구나. 너희가 하는 짓이 나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말라기1.6-11(기독교)
말씀 선집
십일조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제물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전체를 바친다는 뜻을 지닙니다. 아버지께 전체를 바치지는 않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를 정성들여 바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를 바침으로써 남은 아홉도 거룩한 물건으로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를 바치며 사는 사람은 절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의 창고가 불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1.240,1970.06.04)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시간까지도 십일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150.219,1961.04.15)
한국 백성으로 태어났으면 이 나라 앞에 세금을 바칩니다. 이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그 다음에는 하늘에 십일조를 냅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자기 나라를 위해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사장, 레위 족속을 위해서, 제사장으로 세우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늘수로서 주는 것입니다.
(150.219-220,1961.04.15)
십일조는 모든 면에 있다. 학교도 열 교실 중에 한 교실은 불쌍한 자녀들을 위한 무료봉사의 교실로 써야 한다.
(뜻길.p.340)
십일조라는 것은 제일 정성을 들인 숫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물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드린다면 어떤 아들을 제물로 드려야 되겠습니까? 미운 아들? 소망이 없는 아들? 그런 아들은 제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아들이어야 합니다. 왜 그러냐? 제물은 ‘나’ 대신이기 때문입니다. (48.85,1971.09.05)
자기가 쓰는 돈 중에 얼마를 헌금해서 그것으로 교회가 지탱된다는 것은 지극히 좋은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지극히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생활보다도, 자기 전체보다도 먼저 해야 될 텐데, 그거 몇 퍼센트 바친다는 관념으로 인하여 자기 생활이 위주요. 하나님이 다음단계에 서는 것이 상습화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둘째가 되면 맨 꼴찌가 되어버립니다.
우주를 창조하고 절대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교인들이 푼돈이나 내는 걸 보고, 거지한테나 던져주는 그런 돈을 좋아하면서 ‘너희들은 사랑스런 종교인이다’하며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사탄 앞에 위신이 서겠습니까? 안 섭니다 헌금 바구니를 돌리면서 돈을 받는 것은 간판 붙은 거지의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96.101,1978.01.02)
의식
하나님께서 다가가는 수단으로서 모든 종교에 의식을 제정하게 되었다고 문선명 선생은 말씀하신다. 따라서 모든 종교 의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과 그에 따른 상세한 지침에 따라 진행되는 종교의식은 먼저 하나님과 신앙적 토대로 닦고 간 선지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다.
세계각지에서 하늘에 경배하고 존경심을 표현하는 다양한 종교 의식과 의례에 대해서 그 가치를 평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안식일처럼 성스러운 시간을 지키는 의식, 성만찬 또는 성스러운 식사 의식, 할례의식, 세례식, 성지 참배, 형상과 상징에 경배하는 의식, 유대교의 음식 규정 등 몇 가지 유형의 의식들을 소개하고 있다.
1.전례와 숭배
종교 경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마태복음 18.20(기독교)
힘과 영광을 여호와께 돌려라. 민족들아, 지파마다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라.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여호와께 돌려라.
거룩한 광채 입으신 여호와를 경배하여라. 온 땅은 그 앞에서 무서워 떨어라.
시편96.7-9(기독교)
나의 진정한 본질을 여실히 앎으로써 견실하게 나를 섬기는 자가 진정으로 나를 신애하는 자이니라. 너희에게 나를 일깨워 주는 상징이나 성상들로 나를 숭배하라. 또한 내가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나를 신애하는 자들의 심정으로 나를 숭배하라…경전들에 규정된 예법과 의식을 준행하되 그들의 내밀한 정신을 망각하지 말지어다.
스리마드 바가바탐11.5(힌두교)
여호와께서 당신의 거룩한 전에 계신다. 온 세상은 그의 앞에서 잠잠하여라.
하박국2.20(유대교)
우리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소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면 우리는 늘 있던 결과를 얻게 됩니다.
요루바족의 격언(아프리카 전통종교)
모든 이슬람 예배는 도덕을 지향한다. 기도는 수치스럽고 옳지 못한 행위를 자제하게 하고, 자신을 베푸는 일은 부를 감소시켜 탐욕으로부터 그들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금식은 인내와 결의 속에 교훈을 주고, 성지순계는 어려움과 고난에 대한 인내와 모든 피조물의 동등함과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평화의 뿌리를 양성하는 가운데 있는 훈련과정이라.
알 가질라. 이흐야 울룸 엘딘 130.1(이슬람)
왕손가(王孫賈)가 물었다. “안방 신에게 잘 보이기 보다는 차라리 부엌 신에게 잘보이라고 하니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 공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논어3.13(유교)
말씀 선집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제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자기 과거를 하나님께 보고하고 속죄해야 합니다. 고로 예배시간은 자유가 없는 시간입니다.
(11.163, 1961.06.24)
천군 천사 옹위하는 가운데 환희의 심정으로 이 한 시간 경배 드리는 이 자리가 전체의 생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하나의 복의 기관적인 제단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7.12,1959.07.05)
이 자리가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지성소가 되도록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심정에 접하고, 아버지의 사정에 어리고, 아버지의 소원에 화하여 당신만이 주관할 수 있는 거룩한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21.132, 1968.11.17)
2.안식일
종교 경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 ‘안식일은 나와 너희 대대에 걸쳐 세워진 표이니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여호와임을 알리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다. 이날을 범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그날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겨레에서 추방당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은 여호와를 섬기는 거룩한 날이니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 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대대로 지킬 영원한 계약으로 삼아야 한다. 여호와가 엿새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은 쉬며 숨을 돌렸으니,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가 된다.”
출애굽기 31.12-17(기독교)
안식일 초를 켜는 일은 거룩한 선민의 여인들에게 허락되었다. ….이 평화의 성소(거룩한 쉐키나가 거하는 곳)는 세상을 지키는 여인과 같으며, 거룩한 등불인 영혼들은 그녀 안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집안의 여인이 촛불을 켜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하여 여인은 스스로를 바른 곳으로 이끌어 자신의 참된 일을 완수하기 때문이다. 여인은 그 일이 영광임을 알고 열정과 기쁨으로 안식일 초를 켜야 한다. 나아가 배움과 경건의 빛을 밝히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기 위해 자라날 거룩한 자녀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자격을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또한 온 힘을 다해 남편의 장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식을 지킴에 있어서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조하르 1.48b(유대교)
말씀 선집
이런 주일 경배시간 같은 것은 엄숙하고 귀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날입니다.
(21.76,1968.10.20)
안식일은 편히 쉬며 잠자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잠자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안식일은 하나님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해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영계에 가서 하나님을 중심하고 천국을 이루면 영원한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에서 시작됐고 영원히 존재하기에 영원한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을 잃어버린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물론 선생님도 하나님도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20.330, 1968.07.14)
통일교회 축복가정들은 매주일 경배식을 갖습니다. 경배식을 하는 날은 성일을 말합니다. 성일을 중심삼고 우리가 성식(聖食)이라는 아침을 먹는 것입니다. 그건 타락함으로 아담 가정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그와 같은 거룩한 성식을 나누어 드리지 못했던 한을 풀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그러한 경배식과 더불어 축하하는 소원의 마음을 가지고 그런 식을 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80.289, 1997.02.13)
3.성찬식
종교 경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드시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빵을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고린도전서 11.23-25(기독교)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피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시십시오. 주님의 몸은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7-29(기독교)
말씀 선집
기독교는 예수의 핏줄입니다. 성찬식에서 포도주는 예수의 피요. 떡은 예수의 몸뚱이입니다. 피살을 연결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핏줄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예수의 핏줄을 이어 받았으면 원수를 사랑해야 되는데, 기독교인들이 원수를 사랑하는 면이 있습니까? 그것은 가짜입니다.
(322.262, 2000.05.21)
성주식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보자면 성찬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찬식에서는 살고 피 대신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타락했으므로 예수님의 몸을 받는 것으로, 새로운 육체를 수육(受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성주식은 인간이 타락한 행로와 반대의 방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다.
(35.210, 1970.10.18)
4.할례
종교 경전
너희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라. 이것이 너와 네 후손과 나 사이에 세우 내 계약으로서 너희가 지켜야 할 일이다. 너희는 포경을 베어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다. 대대로 너희 모든 남자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네 후손이 아닌, 네 집에서 난 씨종이나 외국인에게서 돈 주고 산 종이라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그러면 내 계약이 영원한 계약으로서 너희 몸에 새겨질 것이다.
창세기 17.10-13(기독교)
말씀 선집
아담 때의 혈통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례가 있었던 것입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에서 피를 뽑는다는 것입니다. 아담 때에 남자의 생식기를 통해서 사탄의 피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탕감하기 위해서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할례입니다.
(277.264-265, 1996.04.18)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할례라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양부를 째 가지고 피를 뽑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축복권내에 있기 위해서는 성별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축복권내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 왔기 때문에 그 피를 빼야 탕감복귀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는 이, 눈은 눈, 피는 피, 귀는 귀의 탕감법이기 때문에 그 피를 빼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54.144,1972.03.22)
5.세례와 목욕의식에 의한 정화
종교 경전
물이여! 나에게 있는 모든 죄,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 내가 내뱉은 저주, 입 밖으로 낸 거짓을 모두 씻어내어라.
리그베다 10.9.8(힌두교)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 하나하나가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38(기독교)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의 죽음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것임을 여러분이 알지 못합니까? 우리는 그의 죽음에 함께 참여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힌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에서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에서 그와 연합한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우리 몸을 없이하여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벌써 죄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우리가 살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신다는 것, 다시 말하면 죽음이 결코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죽은 것은 죄에 대해 단 한번만 죽은 것이며, 그가 지금 살아계신 것은 하나님께 대해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산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6.3-11 (기독교)
말씀 선집
우리는 몇 방울의 물을 머리에 떨어뜨려 세례를 받았다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예수님과 성신에 의하여 중생된 입장을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성만찬에서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성체를 먹었다는 커다란 가치의 혜택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원리강론, 후편서론 1.1)
더러운 몸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세례인 것입니다. 할례로 생식기를 정결하게 한 다음에 몸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그것을 사랑의 길로 연결하느냐가 문제입니다.
(277.265, 1996.04.18)
성수(聖水)는 승수(勝數)와 비슷합니다. 그 승수가 무엇에서 승리했느냐? 사탄 혈통을 물로 성별했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의 피를 제거하고 하늘의 혈통을 소개 받은 것입니다.
(215.346, 1991.03.01)
6.순례와 성지
종교 경전
너희 가운데 남자는 누구든지 일 년에 세 번, 과월절과 추수절과 초막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고르신 곳에 와서 그분의 얼굴을 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빈손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뵈러 오면 안 된다. 모두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복 받은 만큼 예물을 들고 와야 한다.
신명기16.16-17(기독교)
그날이 오면, 그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오리라. 유대 백성도 함께 돌아오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울며 돌아와 저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으리라.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물어 찾아오며 ‘ 영원한 계약을 다시는 저버리지 말자’ 고 서로 다짐하리라.
예레미아 50.4-5(유대교)
하나님아 아브라함에게 성스러운 집의 터전을 마련해 주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어떤 비견도 할 자도 나에게 두지 말며, 순례하는 자와 허리를 구부리는 자, 머리를 숙여 경배하는 자를 위해 나의 집을 신성케 하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순례를 행하도록 알려라. 그들은 걸어서, 또는 야윈 동물을 타고 먼 곳에서 너희에게 오게 되리라. 그들은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목격할 것이며, 정해진 날에 그분이 그들에게 내려주신 가축에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고(희생시켜), ‘그리하여 먹고, 어렵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먹이도록 하여라.’ 그런 다음 청결의식을 행하고 그들의 맹세를 완수하도록 하며 옛날의 집(카바신전)을 순례하도록 하라.
꾸란 22.26-29(이슬람)
순례는 잘 알려진 달들에 있다. 그러므로 순례의 의무를 행하는 사람은 성교 범죄 싸움을 해서는 아니 되노라. 너희가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께서 아시노라. 준비하거라(순례 여행을). 그러나 가장 좋은 준비는 경건함이니라.
꾸란 2.197(이슬람)
설사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들이 여기에 예배드리러 온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바람을 분명히 들어줄 곳이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신탁(신도)
말씀 선집
미국 젊은 사람들이 미국을 위해서 슬픈 것을 참고. 눈물을 참고 간다고 하면 이 미국이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참하게 되는 그런 길을 가게 되면 앞으로 세계박물관은 물론이고 하늘 나라의 박물관에 가는 겁니다. 내가 목숨을 잃게 될 때까지 공적인 슬픔과 눈물을 흘리고 죽겠느냐. 편안히 살다가 죽겠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저 높은 히말라야에 갖다 묻어 놓더라도 세계 사람들이 몰려와 울고 갈 것입니다.
오지 말래도 오는 것입니다. 예수가 골고다에 끌려가 죽을 때 기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며…,그거 무서운 것입니다. 그게 사실인지 알게 뭡니까, 보다 하늘을 위하고 땅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서 보다 큰 문제를 걸고 자기 생명을 바쳤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97.104-105, 1978.03.01)
선생님 고향이 이북의 정주인데 여러분들, 정주에 가 보고 싶지요? 왜 가보고 싶습니까? 그곳에 가면 선생님이 할 얘기가 많습니다. 나의 어렸을 때의 일화가 많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한번 가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보지 않으면 영계에 가서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사상을 지닌 사람들은 그곳을 회교의 메카와 같이, 기독교의 예루살렘같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34.67. 1970.08.29)
7.상징, 성상, 그리고 성물
종교 경전
그대에게 나를 상기시키는 상징들이나, 신상들로 나를 숭배하라.
스리마드 바가버탐 11.5(힌두교)
그때 아마테라스 신은 수많은 마가다마와 구사나기 검과….자신을 동굴에서 꾀어낼 때 쓰였ㄷㄴ 거울을 초대 천황에게 맡기면서 말씀하셨다. “이 거울을 나의 영으로 생각하고 지녀라, 그리고 그대가 나를 예배하듯 그것을 예배하라.”
고지키 39.2-3(신도)
향 기름 이미 다 타고 난 뒤에 금병에 그 뼈를 주워담았네. 법계가 다하지 않은 것처럼 금강 같은 지혜 열매는 움직이기 어렵기가 수마산과도 같아 저 힘센 가루다 새도 능히 움직여 옮기지 못하거니, 그런데 그 보배 병에 있으면서 세상에 응해 널리 퍼졌네.
부처께서는 훌륭하고 높은 법 얻었기에 마땅히 일체 공양을 받을 만하고 이미 죽지 않는 곳에 이르렀거니, 믿는 이도 또한 그 따라 편안하리, 그러므로 모든 하늘과 사람 마땅히 모두 다 언제나 공양하라.
아수바고샤, 불교행찬 28.69(불교)
쉬바 신께 드리는 제의식인 푸자는 만유에 대한 자비심에서 행해져야 하느니라. 현자들은 또한 이와 같이 말하는도다. 좌대는 쉬바의 반려 파르바티를 나타내며, 그의 남근 상징은 모든 의식 있는 존재를 나타냄이다. 주 쉬바께서 여신 파르바티를 포옹하여 영원히 하나되어 있음과 마찬가지로 남근 상징은 영원히 좌대 위에 박아 세워져 있느니라,…신앙인은 그의 남근 상징을 모셔놓고 열여섯 가지 규정된 행위로써 이를 섬기나니, 이들은 다음과 같다. 기도, 자리를 제공함, 물을 봉한함, 발로 씻어줌, 신비적인 제 의식으로서 입가심할 물을 봉헌함, 기름부음, 의복, 향수, 꽃, 향료, 등불, 음식을 봉헌함, 타는 불을 흔들어 경배함, 빈랑나무 이파리를 바침, 엎드려 절함, 예물드을 내려놓음과 종례…, 드려진 제사에 일치하여 쉬바께서는 은혜를 베수시느니라.
시바 푸라나.비드예슈바라상히타 11.22-35(힌두교)
말씀 선집
이 세계 인류 가운데서, 죄악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 가운데서 부모를 사랑하는 진정한 효자가 있다면 그 효자 중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참부모님에게 효도할 수 있는, 역사의 기록을 깨뜨리고 나서겠다는 그런 하늘의 아들딸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정성을 표시하려니 우리는 상대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단이 필요하고, 기도하는 장소가 필요하고, 무슨 불상이 필요하고, 그렇게 됩니다. 혼자 있으면 정성들일 제단이 필요하고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제물은 언제나 거기 있으니까, 제물을 갖다 놓으면 십 년이고…, 가만 놔두면 가만히 있습니다. 사람은 도망가지만 말입니다. 사람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도 제물은 가만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은 일이 있게 되면 돌아와 가지고 사진을 보든가 그 제물을 대해서 ‘ 내가 이렇게 하여 기쁜 날을 맞이해서 감사하니 그 표시로서, 내가 기쁜 상징으로서 무엇을 하나 아버지 앞에 드립니다.’ 이렇게 하고 하늘 앞에 정성들인 물건, 제물의 대가를 바쳐야 됩니다. (123.189,1983.01.01)
오늘날 불교에서는 불상을 모셔 놓고 복을 빌고 있는데, 주체와 대상의 외적인 차이는 참으로 천지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느껴지는 감정을 통하는 모든 것을 하늘과 같이 알고 믿고 대하면 하늘은 그 마음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루어 주시기에, 여기에서 소원 성취하는 말이 생겨납니다.
(6.342,1959.06.28)
십자가에 달고 다니면 기독교인인 것을 표시하지요? 부모님 사진을 갖고 있으면 참부모 아들딸을 상징합니다. 상징, 형상,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소생, 장성,완성의 소생권 내에 들어가기 때문에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사진은 전부 다 종족적메시아가 만들어 줘야 됩니다.
(212.111, 1991.01.02)
8.식사 예법: 음식을 신성하게 함
종교 경전
너희는 하나님께서 역겨워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너희가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이런 것들이다. 양, 염소, 사슴, 노루, 꽃사슴, 들 염소, 들소, 들 양, 산 염소 같은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이면 먹을 수 잇다. 그러나 새김질하는 짐승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이라도 다음과 같은 것은 먹지 못한다. 낙타, 토끼, 사반은 새김질을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부정한 것들이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부정한 것이다. 이런 것들의 고기는 먹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주검은 건드려도 안 된다. 물에 사는 것 가운데 너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 지느러미도 없고 비늘도 없는 것은 먹지 못한다. 그것은 부정한 것이다.
정한 새는 어떤 것이든지 먹을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새는 먹지 못한다. 독수리, 수염수리, 흰꼬리수리, 검은 소리새, 각종 붉은 소리개, 각종 까마귀, 타조, 올빼미, 갈매기, 각종 매, 부엉이, 따오기, 백조, 사다새, 흰 독수리, 가마우지, 고니, 각종 푸른 해오라기, 오디새, 박쥐 등이다 날개 돋친 벌레도 부정한 것이니 먹으면 안 된다. 정한 날 벌레는 먹을 수 있다.
무릇 저절로 죽은 것은 먹지 못한다. 그런 것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머무는 떠돌이들에게나 먹으라고 주든지 외국인에게 팔든지 하여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몸 바친 거룩한 백성이 아니냐?...너희는 염소 새끼를 제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
신명기 14.3-21(기독교)
사람이 합당한 방법으로 동물을 죽이고 고기를 먹는 것과 동물을 교살하고 그 고기를 먹는 것중에서 무엇이 하나님께서 염려하실까? 사람이 부정한 짐승이나 깨끗한 짐승을 먹는 것 중에서 무엇을 하나님께서 염려하실까? “지혜를 얻으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만 거만하면 자기만 해를 입는다.”
(잠언9.12)
그러므로 너희는 율법의 명령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세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깨달아라.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무슨 잘못이 있으랴. 여호와의 말씀에 무슨 티가 있으라.’
(사무엘하 22.31)
오 사람들이여! 땅 위에 있는 것 중 허용되고 좋은 것만을 먹도록 하여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금하신 것은 죽은 고기와 피, 그리고 돼지고기 및 하나님 이외의 이름으로 도살된 것이니라. 그러나 욕망과 탈법에 의해서가 아닌 필요에 의해 불가피하게 (먹게)된 경우는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느니라.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관대하시고 자비로우시니라.
꾸란 2.168.173(이슬람)
말씀 선집
우리 통일교회는 세상 어디에 가더라도 부모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먼저 잡수시오!’ 하면서 첫 번 것을 내놓은 다음에 식사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런 생활을 해 왔습니다. 어디에 가서 앉더라도 성별해서 앉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선생님이 없었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236.338.1992.11.09)
여기 옷이 있으면 자기 옷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옷이요. 부모님의 옷이요. 우리 형제들의 옷인데 내가 대표적으로 입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랑할 수 없습니다.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 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 밥이요. 부모님이 준 밥이요. 형제들이 준밥이라는 것입니다. 밥을 잘 먹고는 ‘아! 기분좋다.’ 하는 내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먹고는 미안해서 ‘세계의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는 이 시간에 굶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얼마나 고생하겠나? 내가 대표적으로 먹었으니 대표적으로 일할 수 있는 책임을 더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생가가 하기 때문에 고생한 사람이 불평하지 않고 고맙게 생각하고 따라오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10년, 20년, 일생을 따라오더라도 싫어하지 않는 건 선생님이 그런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는 일은 실패할 것 같지만 반드시 성공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40년간 역사에 없는 일을 많이 해 나온 것입니다.
(161.231,1987.02.15)
우리가 먹고 입고 하는 것들을 중심삼고 성별하기 위해 성염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수확한 것을 성염으로 성별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디 있고, 자유로운 판도는 어디에 있으며, 이 백성이 서로 서로가 딛고 사는 대지를 찾아갈 적마다 성별하지 않고 살수 있는 땅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이 성별의식을 할 때 성염을 쓸 적마다 ‘이놈 사탄’ 하며 이를 갈아야 됩니다.
(48.252, 1971.09.19)
1997년 7월 7일 7시 7분 7초에 ‘천지부모천주안식권선포’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성인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주일만 성찬을 먹었지만 그 선포 이후에는 하루 세끼 삼식, 모두 성찬을 먹고사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모든 만물을 사랑으로써 대하면서 먹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이런 성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성찬을 먹고 삶으로 말미암아 병도 안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도 병도 안 난다는 것입니다.
(285.300,1997.06.29)
의례를 넘어서
지나치게 종교적 의례에만 의존하다 보면, 실제 행동이나 지식과는 동떨어진 엄숙한 기운만 팽배할지도 모른다. 의례는 결코 경건한 마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신과 일대일로 하나되는 경험들을 대체 할 수 없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종교 내부에서부터 의식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어떤 종교의 창시자가 겉으로는 다른 종교의 의식주의를 강하게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씀은 본질적으로 자기 종교 신도들에게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문선명선생도 지나친 의식주의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시며, 두 가지 내용을 덧붙여 말씀하신다. 첫째, 의식이 다른 종단과 신앙 사이에 벽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하나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일이다. 모두가 하나되어야 할 이 시대에 의례적 장벽은 초월되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한 경건한 신앙적 의식 자체가 언제나 그분의 심정과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내적 지혜까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죽음에 사용된 저주받은 형틀이자, 이땅에 지상천국을 이루려던 뜻을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예수님의 수천년의 슬픔과 좌절의 근원인 십자가에 대해 많은 기독교인은 그것을 구원의 상징으로서 이해하고 받들고 있다.
고대 종교적 의식의 중심에는 동물헌제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 거의 없어졌다. 많은 종교가 여전히 헌신적 신앙 활동을 중시하고 연구하며 경전에 나타난 고대 제사의식의 핵심을 소중히 여기고 있지만, 더 이상 같은 형식의 제사의식을 행하지는 않는다. 탈무드에서는 이웃에 대해 자비를 베푸는 것이 속죄양을 통해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부처님은 동물 헌제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으로 인해 악한 업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 대신에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돌보고 탁발승에게 보시를 베풀면서 충족될 수 있는 영적 봉헌의 의미를 가르친다.
1. 최선의 의례는 사랑의 마음과 의로운 행동
종교 경전
높이 계시는 하나님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 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사람아.
여호와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미가 6.6-8(유대교)
삼백 항아리의 훌륭한 음식으로 하루에 세 차례식 제사지낸다 해도 한순간의 자비행이 가져오는 공덕의 한 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가르주나, 보의 화환283(불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여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밖에는 먹지 못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 조차도 주인이다.”
마가복음 2.23-28
옛날 조상신들 가운데 하나가 후손의 영토에서 배회하다가 스루가 지방의 후지 산에 도착했을 때 마침 저녁 무렵이 되었다. 그는 후지 산 신의 거처로 가 하룻밤을 묵을 수 있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후지산의 신은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햇가 일을 신께 바치는 날인지라 저의 가솔들은 정결과 금욕을 하라는 금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재워 준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닐 듯 싶습니다. 날이 날인만큼 이렇게밖에 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신은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조상이다! 그런데도 나를 묵게 해줄 수가 없다고? 그렇다면 나는 그대가 사는 이 산에 봄이나 겨울이나 눈이 내리도록 할 것이며, 일 년 내내 안개와 추위가 이 산을 덮도록 하여 아무도 그대에게 제물을 바치러 이 산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겠다!”
이 말을 마친 뒤 그는 히타치 지방에 있는 쓰쿠바 산에 올라가 하룻밤 묵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쓰쿠바 산의 신은 “오늘 밤 우리는 햇과 실을 바치기 위해 금욕을 하게 되어 있지만 당신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군요”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방문객을 공손히 모시고 음식과 거처를 제공했다.
그러자 이 조상신은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나에게 참으로 극진하구나, 또한 그대의 사당도 얼마나 위엄이 가득한가. 이제 그대는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더불어 영원히 번성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대에게 영원토록 제물을 바치기 위해 오리라. 그대의 자손들이 끝없는 평안을 누리며 살리라.”
그리하여 후지산은 연중 언제나 눈이 덮여 사람들은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와 반대로 쓰쿠바 산은 오늘날까지도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게 되었다.
히다치노쿠니 후도기(신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를 차린들 무엇 할 것이냐?”
논어 3.3(유교)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목욕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성스런 강물에 몸을 적신다 하여 사람이 청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법과 진실이 있을 때 비로소 그가 청정해지느니, 그를 일러 바라문이라 하느니라.
우다나 6(불교)
당신이 시작하여 거룩하게 된 사랑과 믿음을 거짓으로 따르는 행악자들, 그들은 선한 마음에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오, 주여! 그들에게서 의를 거둬들이시라.
그 야수들이 우리에게서 물러설 때까지!
아베스타, 야스나 34.9(조로아스터교)
얕은 공덕을 쌓으며 길을 가지 않는 미혹된 사람들은 그 공덕을 쌓음이 곧 길을 가는 것이라 여기나니, 탁발걸식과 제사로 쌓은 공덕이 아무리 크다 해도 죄악의 근원이 우리들 마음의 삼독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육조단경 6(불교)
분별없는 사람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하며 경전의 화려한 말에 사로잡혀 있는 신학자들은 단지 덧없는 결과를 지니는 말들을 내뱉는다. 그들의 말은 제의 행위를 통한 보다 나은 내생을 약속하고, 온갖 제사들을 강조하며, 향락과 권력을 추구한다.
이 사람들의 마음은 천계에 대한 욕망과 시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권력과 향락에 매달린며 스스로의 말에 속아 산다. 그들에게는 만족을 지닌 아무런 지식도 없으며, 삼매 속에 확주하는 지식도 없다.
바가바드기타 2 42-44(힌두교)
말씀 선집
모든 종교인은 깊은 자기 성찰의 내적 기대위에서 굳세게 일어나, 온갖 비리가 난무하는 현실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뜻의 지상실현을 위하여 창의적인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인간과의 관계는 경전이나 예배의식 안에서만 관계가 아닙니다. 신의를 품고 24시간 생활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자각된 마음속에 거하시면서 인간과 함께 생활하시기를 소원합니다. (135.222, 1985.11.16)
여러분이 아무리 예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아무리 예수의 얼굴을 만져보고, 아무리 예수와 같이 다니고, 아무리 예수와 같이 살았다 하더라도 심정이 통하지 않으면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만지고, 심정을 통하여 같이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10.200, 1960.10.2)
하늘을 추앙하는 사람은 많사오나 하늘을 위하여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적사옵니다. 저희들은 하늘을 위하여 책임을 져야만 되겠사옵니다. 하늘길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사오나 그 길에 놓여 있는 가시밭길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아옵니다.
아버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억 천 만세 수고하셨사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하늘의 길, 참된 길을 가기 위해서 넘어가야 할 수고의 길을 피해가려 하고, 저희의 슬픔과 고통도 아버지 앞에 맡기려 하고 있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16.15, 1965.12.26)
2. 시대의 변화에 따라 관습적 예식은 순수한 헌신의 형태로 대체됨
종교 경전
어느날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예루살렘에서 왔을 때 랍비 여호수아가 그를 따라가 무너진 성전을 보았다. “애통하도다,” 랍비 여호수아는 울부짖었다. “이스라엘이 죄 사함을 받던 이곳이 쓰레기 위에 놓여 있구나!” “나의 자녀여,” 랍비 요하난이 말했다. “슬퍼하지 마라. 성전만큼 우리 죄를 사해 줄 다른 것이 있느니라. 그게 무엇인가? 자애를 베푸는 행위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호세아 6.6)
탈무드,아보스 드 랍비 나단6(유대교)
어느 때 세존께서 사밧티 근처 제타 숲 아니타핀다카 동산에 계셨을 때의 일이다. 그 때 바라문 웃사에 쓰일 오백 마리의 암소와, 오백 마리의 군마와, 같은 숫자의 송아지와 양과 염소들이 말뚝에 매여 있었다. 준비를 마친 바라문 웃가타사리라가 세존께 다가가 절을 하고 예에 따른 인사말을 건넨 후 한 쪽 옆에 앉았다. 그가 세존께 말하였다. “불을 피울 준비를 하고 제단을 쌓는 것은 큰 공덕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스승이시여, 고타마시여 진실로 저는 불을 지피고 제단을 쌓아 올리는 이 제사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스승께서 부디 저의 행복과 자손만대의 복리를 위해 가르침을 내려 주소서.”
“바라문이여! 불을 지피고 제단을 쌓는 이는 희생제의를 드리기 전에 결과적으로 죄악인 세 자루 사악한 검을 세우느니라. 불을 지피고 제단을 쌓는 이는 희생 제의를 드리기 전에 이미 생각하기를 ‘희생 제의를 위해 그와 같이 많은 암소아 군마와 송아지와 염소와 양들을 죽여야겠다’하나니, 공덕을 쌓고자 생각하되 그는 이미 사악한 업보를 쌓고, 선을 행하리라 생각하되 그는 이미 악을 짓고 있으며, 행복에 이르는 길을 구하노라 생각하지만 그는 이미 불행의 길에 들어서 있느니라. 이로써 그는 먼저 이와같이 사악한 생각의 검을 세우게 되느니라. 바라문이여! 희생 제의를 드리기 전에 ‘그와 같이 많은 암소와 군마와 송아지와 염소와 양들을 잡아야겠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다시 사악한 말의 검을 세우게 되느니라. 게다가 또한 바라문이여! 희생 제의를 드리기 전에 그는 스스로 나아가서 ‘그들을 잡아야겠다’고 말항며 이를 행함으로써 그는 또한 사악한 행위의 검을 세우게 되느니라.
‘바라문이여! 이들 세 가지 불이 존중되고 숭상되고 존경될 때, 이들은 필경 최상의 행복을 가져오리라. 그 셋이란 무엇인가? 덕망 있는 자의 불과, 재가자의 불과, 선물을 받을 만한 자의 불이다. 무엇을 일러 덕망 있는 자의 불이라 하는가? 생각하건대, 자신의 부모를 명예롭게 하는 자를 일러 덕망 있는 자의 불이라 하느니라. 생각하건대, 자신의 아들들과 그 외의 식솔들과 하인들, 심부름꾼들을 명예롭게 하는 자를 일러 재가지의 불이라 하느니라. 바라문이여! 생각하건대, 나태와 자만을 버리고 매사에 인내하고 유순한 은둔자들과 신심이 돈독한 이들을 일러 상을 받을 만한자의 불이라 하느니라. 이들 세 가지 불이 존중되고, 숭앙되고, 공경되며, 잘 받들어질 때 이들은 최상의 행복을 가져오리라.“
망굿타라 니카야 4.41-45(불교)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선언한다. 친교제에다가 번제를 보태어 바치고 그 고기를 처먹어라.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데려 내올 때, 내가 번제와 친교제를 바치라고 한 번이라도 시킨 일이 있더냐? 나는 내 말을 들으라고만 하였다. 그래야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고 하였다. 잘되려거든 내가 명하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고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듣기는 커녕 제멋대로 악한 생각에 끌려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외면하였다.
예레미야 7.21-24(유대교)
어떤 장소에서나 나의 이름으로 제물은 태워서 바쳐진다.(말라기 1.11) “‘어떤 장소에서든지!’ 이 말이 가능한가?“ 랍비 요나단의 이름으로 랍비 사무엘 벤 나마이가 말하였다. ”이 말씀은 어떤 곳에 있든지 토라 연구에 자신을 몰두시키는 학자들을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그것을 그들이 내 이름으로 제물을 바치고 태우는 것으로 간주한다.’“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아! 여호와의 집에서 밤새워 모시는 사람들아! 모두들 여호와를 찬양 하여라.” (시편 134.1) “밤새워 모시는 자들아‘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랍비 요하난이 말하였다. “이 말씀은 밤을 새워가며 율법 연구를 하는 데 자신을 바치는 학자들을 언급한 것이다. 성서는 그것을 그들이 성전 봉헌에 종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탈무드, 메나호트 110a(유대교)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거쳐서, 오직 한 번 지성소에 드러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룩하여 주셨습니다.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깨끗해져서 그들이 거룩하게 되거든,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 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서서, 직무를 행하고, 똑 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오직 한 번으로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 아래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한 번 자기를 바치심으로서 거룩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셔서 그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도 우리에게 증언하여 주십시다.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그날 이후에, 내가 그들에게 세워 줄 언약은 이것이다. 나는 내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다가 주고, 그들의 생각에다가 새겨 줄 것이다.” 그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난 그들의 죄아 그들의 불법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죄와 불법이 용서되었으니 죄를 사하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히브리서 9.11-14. 10.11-18(기독교)
다섯 가지 위대한 제물, 숭고한 제의식이 있나니, 그것은 만물을 위한 제물, 인간을 위한 제물, 조상을 위한 제물, 신을 위한 제물, 브라흐만을 위한 제물이다. 날마다 일체중생에게 음식을 제공하는것, 그것은 만유에 대한 제물이다. 매일 손님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 그것은 사람에 대한 제물이라 하나니, 물 한 잔을 마시게 하는 것도 이에 속한다. 날마다 제사에 필요한 공물을 마련하는 것, 그 것은 조상에 대한 제물이라 하나니, 물 한잔 떠받드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날마다 신에게 오물을 드리는 것, 그것을 일러 신에 대한 제물이라 하나니, 땔나무를 마련하는 것도 이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브라흐만에 대한 제물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날마다 행하는 거룩한 학습을 말한다.
사타파타 브라흐마나 11.5.6.1-3(힌두교)
말씀 선집
죄를 지었으면 죄를 지은 양에 해당할 수 있는 것을 씻어야 됩니다. 표백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표백할 수 있는 수고, 표백할 수 있는 재료가 절대 필요합니다. 탕감조건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섭리를 지금까지 몰랐습니다. 제물이 뭐냐 하면 탕감조건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개한 사람들은 사람을 잡아서 제물로 삼고, 동물을 제물로 삼고, 별의별 놀음을 다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전부가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보호를 받고 살 수 있는 물건들, 그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과 더불어 동화돼서 살 수 있는 이 세계 가운데 모든 무리들이 피를 흘려야 됩니다.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겁니다. 피가 뭐냐 하면, 거짓 사랑, 거짓 생명, 거짓 핏줄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피가 더렵혀졌기 때문에 피를 뽑아야 됩니다.
(374.21.2002.04.04)
인간시조가 타락하여 ‘믿음의 기대’ 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말씀 대신의 조건물로 세운 것이 제물이었다. 그런데 모세 때에 이르러서는 제물을 조건물로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던 복귀기대섭리시대는 지나가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위한 ‘상징헌제’는 필요 없게 되었던 것이다.
(원리강론, 모세와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2.1.1.2)
종교를 통일해야 됩니다 기독교가 교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파를 전부 불살라야 됩니다. 간판을 떼어비리고, 기독교의 십자가를 다 떼어버려야 됩니다. 그 운동이 벌어져야 됩니다.
(399.100-101, 2002.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