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제3부 인생의 여정
제15장 신앙
신앙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참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쉽게 느끼거나 체험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진리 역시 쉽게 이해되고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만을 믿고서 목적 없이 허황된 욕망과 잘못된 개념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다. 인간은 어둠 속에서 인도해줄 별이 필요하다. 그 별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곳을 가르쳐주는 별이며, 이것이 곧 신앙이다. 신앙은 종교적 신념과 하늘의 계명에 따라 살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종교에서 가르치는 신조는 몇 단어로 표현되지만 그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게 바른 길로 이끌어준다.
신앙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도 구원할 수 없는 타락 인간들과 다시 관계 맺으려는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신앙과 일을 비교한 사도 바울의 이야기처럼 일본의 불교 성자 신란도 비슷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또 다른 하나의 힘’에 의탁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순수하며 자기 본위의 이기심에 물들지 않은 신앙이다. 신앙자의 자신감이나 신앙하는 능력 자체에는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문선명 선생은 인간은 누구나 죄에 찌들어 있고 죄악의 혈통을 타고 났기 때문에 자기만의 노력으로 죄를 탕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하늘과 관계에서 유일하고 가장 합당한 원칙은 하나님의 사랑, 즉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신앙은 하늘과 상호 관계 속에서 성숙되고, 믿음과 신실함으로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려주신 하나님의 실존을 깨달으면서 어려운 역경까지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앙의 주체로 모실 때, 과연 내가 하나님께 의지하듯 하나님도 똑같이 나를 믿고 의지하실 수 있을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두 마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어떤 날은 신앙을 지키고 다른 날은 그 신앙을 저버리기도 한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남아질 수 있는,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 완결성과 극기의 자세가 필요하다(제12장 참고). 하나님도 큰 사명을 받아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문선명 선생은 ‘절대신앙’을 강조하신다. 고난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절대신앙이다. 그것은 또한 사적 욕구에 타협하지 않는 신앙이다. 핍박과 비극, 상실을 경험하게 되면 신앙이 약한 자는 흔들릴 수 있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간청으로도 포기시키지 못하는 것이 절대신앙이다. 자신의 주인을 부정했던 베드로처럼 신앙이 약한 자는 위험한 상황에서 도망가거나 심지어 신앙을 다 잃어버린다. 그러나 절대신앙을 가진 이는 산을 넘고 어떤 역경이라도 이겨내며 죽음까지도 극복하여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다.
1. 믿음:신앙의 출발점
종교경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3.16 (기독교)
믿음이란… 알라와 천사들, 경전들과 사도들, 그리고 최후의 날을 믿는 것이며, 선이건 악이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이니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2 (이슬람)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두 분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말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29-31 (기독교)
오, 사람들이여! 나는 너희 모두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예언자이니라.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배하시는 분이시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으며 생명을 주시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이시노라.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예언자를 믿으라. 그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는 문맹이니 그러하면 너희들은 인도되리라.
꾸란 7.158 (이슬람)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아니다.
논어 20.3.1 (유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외롭다고 여기셨다.
창세기 15.6 (기독교)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야, 누가 아브라함의 종교를 배반하리요? 하나님은 현세에서 그를 선택하셨으니 내세에서 정의로운 자들 가운데 있게 되리라. 주님께서 그에게 “복종하라”고 명하셨을 때, 그는 “만유의 주님께 복종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이를 그의 자손들에게도 부과시키고, 야곱도 또한 그러했도다. “나의 아들들아,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종교를 선택하셨으니, 너희들은 귀의자로서 생을 마쳐야 하느니라.” 야곱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너희가 지켜보지 않았느냐?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내가 죽은 후 너희는 무엇을 섬기려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당신의 하나님이며 당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스마엘, 그리고 이삭의 하나님을 경배하겠나이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복종하나이다.” 그들은 지나가버린 사람들이라. 그들은 그들이 얻은 것이 있으며, 너희는 어희가 얻은 것이 있을 것이니, 너희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질책 받지 아니할 것이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였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 되어라. 그러면 너희는 올바른 길로 인도되리라.” 말하라, “아니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종교를 따르도다. 그는 가장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였으며, 우상 숭배자가 아니었도다.” 그리고 너희가 말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야곱,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 계시된 것과 모세와 예수가 계시 받은 것과 사도들이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것을 믿나이다. 우리는 그들 사이를 구별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할 따름입니다.”
꾸란 2.130-136 (이슬람)
믿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라, 그러면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리라.
숫타 니파타 1146 (불교)
마음에서 우러나는 뜻으로
믿음은 이루어져 있나니,
빛은 믿음을 타고 오도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기도하누나.
아침에 믿음, 한낮에 믿음, 해질녘에 믿음.
오, 믿음이여! 우리에게 믿음을 내리소서!
리그 베다 10.151.4-5 (힌두교)
믿음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극의 근원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인해 신앙인은 환희로써 진여를 엄하게 된다. 둘째는 부처의 수많은 딱월한 덕성들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인해 신앙자는 언제나 그 덕성들을 염하고, 그들을 가까이에 품어 지니며,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들을 공경하며, 이러써 자기의 선한 품성을 증장시키며, 일체를 포용하는 밝은 지혜를 구하게 된다. 셋째는 법의 드높은 유익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인해 신앙인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온갖 가르침들을 끊임없이 마음에 간직하며 실천하게 된다. 넷째는 승가에 대한 믿음이니, 자기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모두 유익하게 하는 실천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수행승들에 대한 믿음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으며, 바른 수행을 닦는 이들의 가르침을 잘 들을 수 있게 된다.
대승기신론 (불교)
헤아려 알 수 없는 나의 믿음, 누가 이를 말과 글로 퍼내려 한다면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붓과 종이로도 그려낼 수 없으며, 직관으로도 그 비밀을 꿰뚫어 드러낼 수 없다.
숭엄하고 청정한 신의 이름은 다만 믿음이 굳은자가 이루리라.
믿음으로 의식과 지성이 전일되며, 깨달음의 진면목이 낱낱이 드러나 보인다.
믿음으로 이승에서 지은 죄를 씻으며, 또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리니,
숭엄하고 청정한 신의 이름은 다만 믿음이 굳은자가 이루리라.
믿음으로 모든 장애가 사라지며, 신과 더불어 그의 나라에 높이 들리우리라.
믿음이 굳은 자는 사악한 무리들에 빠져 방황하지 않으며,
다만 참된 믿음으로 꿋꿋이 서리니, 숭엄하고 청정한 주의 이름은 다만 믿음이 굳은자가 이루리라.
아디 그란트, 자푸지 12-15, M.1,p.3 (시크교)
말씀선집
원래 신앙은 각자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직접적으로 맺어지는 종적인 관계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리강론,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 1)
종교생활은 왜 하느냐? 나보다 차원 높은 힘의 투입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 방향을 어디로? 오늘날의 타락한 세계가 아니라 차원 옾은 이상적 목적의 방향을 향해서 종교생활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론적 근거가 서지 않는 것입니다.
(89.76, 1976.07.11)
신앙의 기준은 돈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요, 이 땅의 무슨 영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한한 가치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심되는 표준을 하나님에게 두고 나가는 것이 신앙길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일체를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8.131, 1973.07.29)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심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념을 갖기 전에는 아무리 각오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다가 어떤 일에 부딪치게 되면 나의 신념은 어떠헥 될 것인가?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27.114, 1969.11.30)
어떻게 해서 아담이 타락하게 되었는가? 불신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불신이 제일 원인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불신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이걸 밟고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 조상이 타락한 그 선 이상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절대 신앙을 해야 됩니다.
(126.35, 1983.04.10)
복귀의 길을 가려면 메시아가 필요한 것이고, 병이 낫기 위해서는 조건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귀하는 데는 의사가 필요하고, 다음에는 조건물이 필요하고, 기간이 필요합니다. 의사가 ‘약을 사흘은 먹어야 합니다, 일주일간 치료를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병난 사람은 메시아 대신, 구주 대신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주가 하는 말, 의사가 하는 말을 자기의 말 이상으로 믿어야 합니다.
(63.183-184, 1972.10.14)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의 대상,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엔 뭐냐? 신앙의 주체 되는 하나님은 사람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엇갈려요,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문전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 자신이 남겨야 할 하나의 골수적인 사상을 지니고 생사를 같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59.237-238, 1972.07.23)
어떤 병폐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으면 모든 복을 내 것으로 만든다’ 이런 사상을 가졌기 떼문입니다. 이런 사상이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다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공 없이 전부 내 것 만들겠다는 사람들뿐입니다. 그것이 도둑놈이지요. 도둑놈 심보입니다. 도둑놈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는 어째서 그렇게 갔느냐?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나라와 환경이 안 되었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갔습니다.
(124.296, 1983.03.01)
하늘은 무엇을 고대하느냐? 신앙자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자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6.84, 1959.03.29)
나는 과연 신앙자의 태도를 갖추고 있습니까. 소망의 마음을 세워 나오기 위한 신앙이었습니까. 그것을 바라던 나였습니까. 묵은 믹음을 갖고 다 될 줄 알고 모든 것을 해결 짓고자 하면 그 길을 못 갑니다. 바른 신앙의 태도를 지니고 가야 할 우리인 연고로 이제 우리에게 사망의 위력이 부딪혀 온다 할지라도 그 사망의 힘을 청산하고도 남음이 있어야겠습니다. 남아지는 흔적이 있어야겠습니다. 내 정열도 그렇고, 내 충성도 그렇고, 내 노력도 그렇고, 내 참는 데도 그렇고, 내게 속한 모든 것이 남아지는 분야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상속의 제1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6.92) 1959.03.29)
2.신앙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
종교경전
여러분은 은혜 가운데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10 (기독교)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신앙을 좋아하게 하셨고 너희 마음에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시었으며 믿지 않는 것과 사악함 그리고 불복을 혐오하도록 하시었느니라. 이러한 자들이야말로 옳은 길을 걷는 자들이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와 은총이니라.
꾸란 49.7-8 (이슬람)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에게로 올 수 없다.
요한복음 6.65 (기독교)
그분은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평온함을 내려 보내신 분이시니라. 그들의 (현재)믿음에 믿음을 좀 더 깊게 하시려고.
꾸란 48.4 (이슬람)
모든 의무들을 포기하고 오직 나만을 귀의처로 삼아라. 내가 그대를 과거의 모든 죄에서 건져주리니 슬퍼하지 말라.
바가바드기타 18.66 (힌두교)
여러분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을 맺으려고 합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은 다 허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참말로 허사였습니까? 여러분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러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움으로 여겨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7.11 (기독교)
“만일 심지어 선한 사람도 정토에 다시 태어날 수 있는데, 사악한 사람은 얼마나 더 많이 그렇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이와 반대로 생각한다. ’만일 심지어 악한 사람이 정토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선한 사람은 얼마나 더 많이 그렇겠는가?‘ 언뜻 보기에 이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미타불의) 본래 서원이나 타력에 대한 믿음에 어긋난다. 그 이유는 자력에 의지하면서 공덕 있는 행위를 하는 자는 타력에 의지하지 않으며 타력에 의지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본래 서원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력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타력을 믿을 때 그는 진정한 보상의 나라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자기 열정의 그물에 걸린 우리는 아무리 힘든 고행이나 선행을 한다 해도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을 알고 우리의 처지를 긍휼히 여겨 아미타불은 악한 사람들에게 불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 서원을 했다. 그러므로 타력에 의지하는악한 자는 확실한 구원의 대상이다.
신란, 탄니쇼 (불교)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어디서나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를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씁하셨다. “‘할 수 있으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내가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마가복음 9.17-24 (기독교)
말씀선집
역사적인 곡절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우리 자체들의 한스러운 입장을 해명하고 찾아 세워야 할 부자의 인연을 해명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무슨 소망이니, 무슨 천국이니, 무슨 이상세계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혈통을 받은 우리, 죄악역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죄악권내에 속하여 생활하면서 그 환경을 넘어설 수 없는 우리, 이러한 우리인데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 이것은 우리가 노력한다 해도 할 수 없기에 심정을 걸어 놓고 믿으라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전한 목음입니다. 무슨 조건을 걸어 놓고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심정을 통해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7.52-53, 1959.07.12)
천상의 심판은 어디에서 결정되어질 것인가? 여러분들이 하늘을 위한 공로와 수고가 많다고 해서 뽐낼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결정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정과 예수님의 심정이 여러분 자신의 몸에서 체휼되고 결실되어 그것이 하나님이나 예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된 그것만이 영생불사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4.107, 1958.03.16)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포발적이고도 자극적인 힘을 가지고 뜻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가고자 하는 여력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하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힘이 없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분리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에게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솟구치고 인류와 더불어 자기의 생명을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늘에 속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로되, 자체를 위주한 사랑과 자체의 가치를 자랑하는 생명력으로 끝난다면 자신에게서 이미 하나님은 이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32.22, 1970.06.14)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우리는 이것을 찾아 헤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구원섭리를 해 오신 하나님도 이것을 찾으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 말씀을 잃어버린 인간, 실체를 잃어버린 인간, 인간은 왜, 무엇 때문에 사랑과 말씀과 실체를 잃어버렸는가?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려면 인간의 믿음의 조건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믿음을 조건으로 해서 인간을 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밎음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인간을 구원섭리 하신다는 것입니다.
(5.37, 1958.12.14)
하나님은 어떤 심정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이 무한히 믿어줄 수 있는 만물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 무한히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 무한히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구태여 신앙이란 명사가 필요 없는 일체적인 이념권내에서 그와 우리가 몸과 마음의 관계와 같은 불가분의 일체성을 갖추어서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도 하늘을 대해 변함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일체적인 입장에 서서 믿음이라는 명사까지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인간을 믿어주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히 믿어주고자 하시려던 하나님의 그 마음에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4.71, 1958.03.09)
보잘 것 없는 모습이옵고,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분석하여 볼 때 아버지께 그 무엇을 돌려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저희들이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자녀의 인연을 맺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는 저희들 자체를 보시고 슬픔과 기쁨의 분기점에서 저희들을 대하여 나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잊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24.245, 1969.08.24)
3. 하나님을 믿고 생활하기
종교경전
권능과 자비를 가진 분께 의지하라. 그분은 예배를 위해 홀로 서 있을 때나 엎드려 예배하는 자들 속에 있을 때나 항상 너희를 보고 계시도다. 실로 그분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보시도다.
꾸란 26.218-220 (이슬람)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믿어라.
잘날 체하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여호와께 여쭈어라.
그가 네 앞길을 곧바로 열어 주시리라.
잠언 3.5-6 (기독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기독교)
랍비 시므라이가 말하였다. “613항의 말씀이 모세에게 주어졌다. 그중에서 365항은 하지 말할는 명령으로서 1년 365일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리고 248항은 하라는 명령인데, 이것은 사람의 숫자에 대항되는 말씀이다. 다윗왕이 이를 줄여서 11개 말씀으로 줄였고[시편15], 이사야는 6개로[이사야63.15], 미가는 3개로[미가6.8], 다시 이사야는 2개로 줄여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선행을 하라고 하였다. 아모스는 1개의 말씀으로 줄였다. “나[여호와]를 믿어라, 그러면 살리라.” 하바꾹도 한 말씀으로 줄였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탈무드, 마코트 23b-24a (유대교)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복음 7.21 (기독교)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17 (기독교)
나는 말한 대로 행하며 언행에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한다.
당신의 양 손에 천칭과 저울을 잡으시고
오, 나의 주여!
만일 나의 말과 행동이 설사 보리 한 알 무게만큼이라도 어긋나면 나를 파버리고 가소서,
오, 꾸달라 상가마!
바사반나바차나 440 (힌두교)
말씀선집
하늘은 어떤 믿음을 원하는가? 예수님이 나를 믿으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믿듯이 하나님도 자신을 아들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5.180, 1959.01.18)
여러분이 지금 신앙의 주체되시는 주님을 믿고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 믿음의 조건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걸어놓고 예수님과 관계와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과 믿음의 관계를 맺은 그 터 위에서 하나님의 실존까지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쑤님을 믿으면 이와 같은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3.19, 1957.09.08)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예수가 좋아하는 것만 믿어야 합니까, 예수가 싫어하는 것도 믿어야 합니까? 예수가 싫어하는 것은 방어하고 좋아하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싫어하는 것은 뭐냐? 사탄과 죄악입니다.
(124.294, 1983.03.01)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이 이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랑으로 삼고 천주에 그것을 외칠 수 있는 심정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딸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중심삼고 그 기반이 선 것을 자신이 자연히 느낄 수 있는 자신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22.205, 1969.02.04)
이제 하늘이 있다 할진대, 우리는 주체이신 하늘이 대상인 내 개체를 100퍼센트 신임해 주는 그 한날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그 목적에 대해 100퍼센트 신념을 가지고 그 한 곳을 찾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또 100퍼센트의 신념을 가지고 돌진할 수 있는 방향성을 갖추어야겠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인류가 해결해야 할 최후의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의 환경을 넘어가야 할 인간이기에 하나님은 이것을 해결하는 어떠한 조건을 세워 나왔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역사 노정에서 어떻게 섭리해 오셨던가. 인간 시조가 타락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믹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6.209-210, 1959.05.17)
아무리 자신이 있더라도 가만히 있어 가지고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기성교회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어떻고 지상의 천국이 어떻고 해도,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쓸데없는 말입니다. 자신을 가졌지만 믿고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 자신을 가졌지만 조금 적당히 행동하는 사람, 자신을 가지고 생명을 걸고 용맹을 가진 행동을 하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은 누구를 좋아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원합니까?
(92.312-313, 1977.04.24)
체휼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요건이 뭐냐? 주체와 대상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체다’ 하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하나님은 내 일을 망각할 수 없다. 방관할 수 없다. 여기에 같이 계신다 하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앞서서 감사할 수 있는 생활이 이루어질 때, 거기에는 하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맨 처음엔 느껴지지 않지만 어느 단계에 들어서면 분명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58.312, 1972.06.25)
비록 사탄세계에 산다 할지라도, 하늘에 대한 절개와 지조는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르고 있는 아들딸을 아버지의 자식으로 여겨 왔습니까? 더 나아가서 나와 내 상대가 아버지의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까? 내 부모, 내 선조, 내 민족, 내 나라를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까? 무지한 이 땋 위의 인간들을 하늘이 이러한 표준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8.85, 1959.11.08)
오늘 여기에 모인 자녀들, 부디 아버지께서 ‘너는 나의 소망의 존재요, 내가 믿을 수 있는 자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는 모습들이 되거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1.101, 1956.06.06)
4. 개인적 욕망과 환경에 물들지 않는 절대 신앙
종교경전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을 향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해도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7.20 (기독교)
한 알 겨자씨만틈의 신앙을 가슴에 품은 자는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지나 한 알 겨자씨만큼의 교만함을 가슴에 지닌 자는 천국에 들지 못하느니라.
무슬림 하디스 (이슬람)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주님, 내가 먼저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허락해 주십시오”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누가복음 9.59-62 (기독교)
천계를 여행하는 자들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은 처계, 즉 그 두 세계로 날아오른다.
사타파타 브라흐마나 9.2.3.27 (힌두교)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창세기 19.26 (기독교)
“내 옷은 낡고 해어졌다. 나는 머잖아 벌거숭이가 될 것이다.” 또는 “나는 새 가사를 얻을 것이다” 출가 수행자는 이와 같은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어떤 때는 옷이 한 벌도 없을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몇 벌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건전한 규율임을 알기 때문에, 현명한 출가 수행자는 그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웃타라디야야나 수트라 2.12-13 (자이나교)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8-39 (기독교)
말하라. 나의 기도, 나의 헌신, 나의 생명, 나의 죽음이 모두 온 세상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위함이라고.
꾸란 6.162 (이슬람)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데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호와 안에서 환성을 울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하박국 3.17-18 (유대교)
말씀선집
우리가 이 땅 위에서 그런 사명을 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보고와 우리의 요구를 기다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밀사의 입장에서 시급히 원하는 것을 보내 달라고 하면 백방으로 모험을 극복하면서라도 보내 주려고 할 것이 아니겠느냐.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그런 신념을 갖고 하나님의 특권적인 영광의 아들딸인 것을 인식하면서 ‘내가 이것을 원하니 이루어 주소’하면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287, 1973.01.01)
신앙 길에서는 자기주장, 자아관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재적 신앙이라는 것은 자아관념이 하나도 남지 않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절대적으로 믿는다 할 때는 나 자체에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요인이 하나도 없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 되겠다고 하는 거기에는 자기주장을 할 것이 없습니다. 주체가 요구하는대로 완전히 일치해야 합니다.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일쳔의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46.82, 1971.07.25)
노아 할아버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 정상적인 입장에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야! 너 120년 동안 산에다 방주를 지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방주를 지으라고 하시려면, 바닷가에 짓게 하시든지 강가에 짓게 하셔야 할 텐데, 저 끝 쪽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전부 다 그렇게 섭리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 대해서도 우상장사를 하는 맨 괴수의 아들을 끌어냈던 것입니다.
(70.64, 1974.02.08)
자기를 해명하려고 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를 해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해명당하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잘했어도 잘했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백퍼센트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이 볼 때는 하나입니다. 내가 백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삼고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찾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절대적인 신앙을 기점으로 해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자기를 절대 부정하는 자리입니다. 자기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절대적인 신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만사를 중심삼고 거기에 긍정하면서 신앙길을 간다고 할 때 절대적인 신앙이 나올 것 같습니까?
이러한 근본 문제를 놓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을 보게 되면 하루의 생활 속에서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하는 습관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당당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당당할 수 없습니다. 나를 공인하는 어떤 상대적인 요인이 없어 가지고는 절대적 신앙기준도 못 갖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 기준도 갖지 못했는데 절대적 신앙기준을 극복하고 난 후에야 이뤄질 천국이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왜 그러냐? 그 자리에는 사탄이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46.74, 1971.07.25)
사랑이 어디서 연결되기 시작합니까? 절대적인 제로가 되는 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나’라는 개성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는 것도 절대적인 주체와 대상이 서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 자기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로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으로 하나 되는 데는 자기가 없고,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나 되는 데도 자기가 없습니다. 이둘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완전히 하나 되는 것입니다.
(279.146, 1996.08.04)
하나님이 창조할 때 절대적인 신앙 위에서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말하게 되면 말하는 대로 대상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넉인 신앙 위에서 발언했다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신앙 위에서 짓는 그 대상은 절대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실체가 내 몸의 몇 천만 배 귀한 것이 되기를 바라니만큼 내 사랑 전부를 투입한 것입니다. 절대 하나 된 자리에서 투입했다는 것입니다.
(273.298. 1995.10.29)
5. 역경과 신앙
종교경전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십시오.”
마태복음 26.39 (기독교)
하루는 욥의 아들과 딸들이 맏형의 집에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한 심부름꾼이 욥에게 뛰어와서 고하였다.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었는데 스바 사람들이 달려들어 모두 약탈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꾼들을 모조리 칼로 쳐 죽였는데 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양떼와 일꾼들을 모두 불살라버렸습니다. 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는 것이었다. “갈대아 사람 세 무리가 달려들어 낙타 떼를 모두 약탈해 가고 일꾼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주인님의 자녀분들이 맏형님의 집에 모여서 먹고 마시는데 광야에서 모진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퉁이를 쳐서 무너뜨렸습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깔려 죽었고 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제야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입을 열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여호와께서 주셨던 것, 여호와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 죄를 짓지 않았고 하나님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욥기 1.13-22 (기독교)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말리며 말했다. “네가 나가 저 불레셋 놈과 싸우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싸움으로 몸을 단련해 온 자인데 너는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 아니냐?” 그러나 다윗은 굽히지 않았다. “소인은 아버지의 양을 쳐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 새끼를 한 마리라도 물어 가면 소인은 한사코 뒤쫓아 가서 그놈을 쳐 그 아가리에서 양 새끼를 빼내곤 했습니다. 그놈이 돌아서서 덤벼들면 턱수염을 위어잡고 때려죽였습니다. 소인은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습니다. 저 불레셋의 오랑캐놈도 그렇게 해치우겠습니다. 살아 계씨는 하나님께서 거느리시는 이 군대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자를 어찌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사무엘상 17.33-36 (기독교)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예언자와 함께 투쟁하라는 수라(꾸란의 장)가 내려졌을 때 그들 중의 부자들은 너에게 요청하기를 ‘우리는 (집에 있는) 잔류자들과 함께 남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느니라. 그들은 뒤(집)에 잔류하는 그들(부녀가)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였느니라. 그들의 가슴은 닫혀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느니라. 그들의 가슴은 닫혀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예언자 그리고 그 예언자와 함께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재산과 그들의 생명을 바쳐 투쟁하였노라. 이런 자들에게 축복이 있을 것이며 그들은 번성하리라.
꾸란 9.86-88 (이슬람)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제사장의 하나 가운데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노려보고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바깥뜰로 나갔다. 그 하녀가 그를 보고서, 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예수와 한패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인하였다.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갈릴리 사암이니까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일 거요.”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엎드려서 울었다.
마가복음 14.66-72 (기독교)
말씀선집
자기의 이상적인 상대를 얻어 가지고 결혼하여 재미있게 살다가, 남편이 죽었다, 아내가 죽었다 할 때 ‘아이고! 나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됩니다. ‘아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왜 아내를 데려가고, 왜 남편을 데려갔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게 무슨 일이 생기려고 이런 일이 생겼는가?’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서 귀한 걸 빼앗아 간다면, 빼앗아 간 하나님은 더 귀한 것을 주기 위한 하나님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그런 것입니다. 탕감복귀원칙을 생각하면, 탕감이라는 것이 참 고마운 말입니다. ‘이러한 고빗길을 탕감할 자는 나밖에 없으니까 나를 택했구나!’ 하며 고맙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그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면 놀아워한다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을 두고 볼 때,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04.106, 1979.04.15)
절대신앙! 요즘 선생님의 기도가 이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절대신앙입니다. 죽으면서라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감옥은 예사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기를, ‘할 수만 있으면 이 자리를 나에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그 아버지 뜻을 위해서…. 객사의 시체로 쓰러졌더라도 자기를 위해 죽지 않고 아버지를 위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영예스러운 사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점을 알겠습니까?
죽는 자리에서도 대담해야 됩니다. 죽는다고 떡 눈감고 ‘난 죽었다’하고 있으면 벌써 딴 세계에 옮겨 놓더라는 것입니다. 비약이 벌어지더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그렇게 발전해 왔습니다. 그렇게 발전한 것입니다. 기가 차고 기가 막히고, 사방이 꽉 죄이고, 땅에 들어갈 수도 하늘로 솟구쳐 올라갈 수도 없는 그 자리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밟고 넘어서면 휙 비약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틀림없이 현현하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하나님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꿈같은 역사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공약대로 하시는 분입니다.
(126.38-39, 1983.04.10)
우리 인류의 조상이 불신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이걸 밟고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 조상이 타락한 그 선 이상으로 올라가야 됩니다. 절대적인 신앙을 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신앙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죽을 때까지, 죽고 나서도, 죽으면서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126.35, 1983.04.10)
세상에는 지금 기독교가 다 무너져 내리고, 미국도 그 큰 나라가 다 흔들거리는 그러한 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변하지 않는 하나님, 전체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대상을 찾아야 되겠느냐? 시류에 같이 보조를 맞춰서 춤추는 사람은 안 됩니다.
변하는 사람이요 변하는 세상이지만, 그런 사람과 세상이지만 나는 안 변한다 하는 사람, 다음에는 세상이 다 망하고 없어지더라도 나는 안 망한다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믿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렇다 하는 확정된 다리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66.47, 1973.03.18)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의 뜻을 부르짖고, 하나님의 이념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는 자신이 확고부동해지는 데 있습니다. 역사적인 슬픔이 나를 점령할 수 없고 시대적인 역경이 내 마음과 몸에 확고히 서 있는 기반을 점령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신념이 없는 한, 그러한 위치를 갖추어 놓지 않는 한, 제아무리 역사적으로 풍성을 하였고 시대적으로 자신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하늘은 그를 믿고 섭리할 수 없고, 그를 세워 시대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12.304, 1963.08.11)
전도
대부분의 종교는 복음전도, 곧 타인을 구원으로 이끌고자 진리를 전파하는 전도를 장려하고 있다. 진리의 증거라는 종교적 계명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사랑은 진리가 사람을 해방해 주고 보다 차원 높은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라는 확신을 터로 하여 타인의 영생을 염려하는 마음이다.
전도는 ‘너의 및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라’와 같은 성구로부터 시작한다. 신앙인은 선행과 이타심을 통해 살아 있는 신앙을 실천하며 타인을 감동시키고 설교와 교리적 가르침에 의해 인생을 선도해야 한다. 복음전도는 때때로 반대에 부딪히기도 한다. 전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순수한 마음과 고결한 행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종교경전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복음 28.18-20 (기독교)
지혜와 친절한 설교로 주님의 길로 초대하라. 가장 공손한 방법으로 논쟁하라. 주님은 그분의 길을 벗어난 자와 바른길로 나아가는 자를 가장 잘 알고 계시도다.
꾸란 16.125 (이슬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대 비구들이여, 길을 떠나라. 대중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행복을 위해, 세상에 대한 자비심에서 신들과 인류의 복지와 이익과 행복을 위해 떠나라! 둘이 함께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그 처음도 선하고 중간도 선하고 끝도 선한 가르침을 널리 전하여라. 정신에 있어서나 문자에 있어서나 모두 완전무결하고 청정한 삶을 알게 하라. 눈에 한 점 욕정의 먼지도 없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알아듣는 몇몇 중생들이 있을 것이다.”
비나야 1.21 (불교)
빛의 주들이시여, 꿀벌의 달콤함으로 나를 가득 채우소서. 그리하여 내가 대중에게 그 장려한 말을 전하게 하소서.
아타르바 베다 6.9.2 (힌두교)
할렐이 말했다. “아론의 제자가 되어라. 그는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며 그들을 법 가까이로 인도해 줄 사람이다.”
미슈나, 아보스 1.12 (유대교)
나를 신애하는 자들에게 이 지극한 비밀을 가르치는 자는 나에게 지고의 신애를 바치는 것이니,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나로 나에게 올 것이니라. 나에게 믿음과 사랑을 바치는 자들 중에 그보다 더 나에게 사랑스런 일을 하는 자는 없으며 그보다 더 나에게 사랑받는 자도 또한 없을 것이니라.
바가바드기타 18.68-69 (힌두교)
남을 구제하면 제 몸 구제받는다.
친필 3.47 (천리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또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출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및을 사람 앞에 비추어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4-16 (기독교)
나는 아라한의 덕성을 구족하고 그들의 열 가지 힘과 전능을 갖추어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하리.
어리석음과 노여움과 탐욕으로 불타는 일체중생을 내가 몸소 구제하여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리.
대방광불화엄경 36 (불교)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여러분에게 권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해 오청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시오.…
우리가 하는 일이 비난받지 않게 하려고, 우리는 어떤 일에서나 어느 누구도 걸려 엄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을 생활로 보여 주었습니다. 극심한 환난과 곤경에서도 변함없이 참았습니다. 우리는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폭동을 겪고, 괴로운 노동을 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굶주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때에도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임을 보였습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휘두릅니다. 우리는 영광도 받고 수치도 당합니다. 우리는 비난도 받고 칭찬도 받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합니다.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합니다. 죽은 것 같으나 보시오, 살아 있습니다. 벌 받은 것 같으나 죽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슬퍼하는 것 같으나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것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없느 srjt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은 넓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여러분의 마음이 좁아진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좁힌 것입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말하듯이 말합니다. 여러분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마음을 넓히시오.
고린도후서 5.20-6.13 (기독교)
만일 네가 타인에게 결핍된 어떤 진리를 알고 있거나 보물을 가지고 있다면, 가장 친절하고 선의 말로 그들에게 네 소유를 나누어 주어라. 만일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만일 그것의 목적이 달성된다면 너의 목표도 성취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거절한다면 내버려 두고 하나님이 그를 인도하시도록 간구하라. 네가 그를 불친절하게 대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리의 자식에게 보낸 편지, 15 (바하이교)
예수께서 이들 열 둘을 내보내실 때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 떼에게로 가거라. 다니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내쫓아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아무 성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곳을 떠낼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래서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오게 하여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성읍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읍보다는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Ep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어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덮어둔 것이라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마태복음 10.5-27 (기독교)
비구들이여! 두 가지 보시가 있다. 물질적인 재물의 보시와 정신적인 진리와 보시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보시가 수승하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나누어 가짐이 있다. 물질적인 재물을 나누어 가짐이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두가지 나누어 가짐 가운데 진리를 나누어 가짐이 또한 수승하다.
이티붓타가 98 (불교)
도를 터득한 성인의 좋은 말은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좋은 행동은 남을 높은 경지에 올릴 수 있다. 착하지 못한 사람도 [역시 도에서 나왔으니] 어찌 버릴 수 있겠느냐? 그런고로 천자를 모시고 삼공을 설치하여 [나라를 세웠을 때], 큰 구슬이나 삼두마차를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릎을 꿇고 임금에게 도를 바쳐 올리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옛날부터 도를 귀중히 여기는 이유는 무엇이냐? 도를 지키면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비록 죄를 지어도 면할 수 있다고들 하지 않더냐? 그러므로 도를 천하에 가장 귀하게 여기느니라.
도덕경 62 (도교)
말씀선집
우리가 원리로 전도하는 것은 ‘사랑 찾기 운동’을 하는 것이다. 심정의 세계는 시공을 초월한다. 말씀도 기도도 궁극에는 사랑을 위한 것이다. 완성은 사랑의 이상을 이루는 것이다.
(33.69, 1970.08.08)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한 때가 있다고 할 때, 과연 그 때는 어느 때냐? 간절한 심정으로 하늘을 증거할 수 있는 때입니다. 선한 사람을 통하여 사망 세계의 인간을 살려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그 심정을 해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대신 살려주는 책임을 지고 싸우며 하나님의 심정을 선포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하늘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그 사람 앞에 넘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끼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8.259, 1960.01.17)
전도란 사탄세계를 버리고 웃으면서 하늘 길을 따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을 보게 되면 전도한다고 그저 그 사람이 좋아하든 안 하든 강제로 ‘오소. 오소’하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영물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떤 한 사람을 두고 기도해 보고, 한번 실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고, 그를 뜻 앞에 세우기 위해서 아픈 심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려 보라는 것입니다.
(50.279, 1871.11.08)
전도는 아버지 대신 일어버린 자식을 찾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10.219, 1960.10.14)
전도는 남의 자식을 자기 아들딸 이상, 자기 백성 이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형제 대신, 자기의 자식 대신, 사탄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인 아벨의 기준을 중심삼고 아벨이 승리하는 동시에 가인도 하늘나라에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93.281, 1994.06.11)
천국에 가는 길은 형제를 하나님과 같이 사랑하는 데서 열립니다. 여러분들은 선생님을 따라가고자 하는데, 그 마음으로 형제를 따라 같이 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이렇게 볼 때, 천국에 제일 높게, 빠르게, 좋게 인도하는 자는 하나님도 아니요, 선생님도 아니요, 형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66.125, 1973.04.18)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그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랑으로 삼고 천주에 그것을 외칠 수 있는 심정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딸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22.205, 1969.02.04)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영생을 알아야 되고, 참사랑을 알아야 됩니다. …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이 세 가지를 교육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체험을 하고 얘기해야 합니다. 사실을 가지고 얘기해야 합니다. 들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늘 편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고, 중심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을 얼마만큼 이런 세계에 가담시켰느냐, 사탄세계를 소화시켰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돈이 아닙니다. 지식이 아닙니다.
(205.130-131, 1990.07.29)
아버님! 부디 서구에 널려 있는 모든 통일교회의 무리, 아시아 혹은 오대주에 널려 있는 모든 무리들이 당신의 심정을 따라 촛불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대해를 향해 선 등대의 사명을 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그러한 사명들이 이들 앞에 짊어지워져 있는 것을 알고 오늘 내일 미래를 향해서 단지 사랑의 화신체로서 당신의 깊은 심정을 증거할 수 있는 증거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86.91, 1976.03.07)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의 인간들로 말미암아 억울함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들을 염려하여 눈물을 흘리셨던 것돠 마찬가지로 끝 날에 그럴 수 있는 성도가 믿는 성도들 가운데 많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선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잘 모셔야 합니다. 악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 이상 더 염려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개인이 되어서 그러한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까지 짊어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참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254-255, 1956.11.25)
내가 말할 수 없이 뒤로 가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심정이 앞에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게 뭐냐? 자꾸 나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가면 수많은 군중이 모여 들어도 다 교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완전히 코치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가 말하는 소리니까, 자기 귀에도 들립니다. 자기가 말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 경지에 이르면 말하면서 제스처를 해도 참 자연스럽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어떤 표정을 하더라도 그것이 다 자연스럽습니다. 어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일을 해야 생명의 운동이 벌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96.168, 1978.01.03)
주위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물이니까 안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그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척 보게 되면 처음 봤는데 언젠가 봤습니다. ‘저 사람을 어디서 봤나?’ 이런 사람은 절대로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지요? 척 볼 때 ‘어디서 만났는데?’ 하게 됩니다. 아무 데서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렇습니다. 그 삶을 놓치면 안됩니다. 절대 여러분에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럴 때는 내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대하던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대번에 달라붙어야 됩니다. 그러면 떠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동지들을 묶어 나가는, 심정의 기반을 넓혀 나가는 방법입니다. 그런 내용이 많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까운 축복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308.213, 1999.01.05)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 전도하지 말라 해도 반드시 전도하게 됩니다. 전도하는 일이 제일 충격적이요, 새로운 것을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열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놓고 진지하게 대화하면 열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교회에 와서 기도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발전할 때, 반드시 나 자신도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 자신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30.154, 1978.03.21)
새벽에 일어나서 자기가 맡은 책임지역을 위해서, 그 동네를 위해서 기도하며 눈물짓고…. 그 길은 영계와 영적인 인견을 맺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이 동네를 내려다보면, 전부 지옥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 이런 심정이 되면 하나님 대신 자기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공명력이 들어가게 되면 영계가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96.282, 1978.02.13)
아버님! 잠들어 있는 이 민족을 깨우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어둠에 삼켜 들어가는 전 세계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 호소할 수 있는 아들들 되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2.335, 1957.08.04)
소망
신앙생활에서 소망은 필수적인 전제요소이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시각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구현하기 위해서 역사를 운행하신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이 세계의 폭력과 억압, 가난과 슬픔을 종결하겠다는 하나님의 계시가 인류역사에 역동적으로 전승된다. 인간은 일생동안 자신들의 소망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죽음 이후의 삶, 곧 영원한 세계에서 새 삶을 누리겠다는 소망을 항상 품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런 소망을 갖도록 창조하셨으며, 그 소망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더욱 가깝게 인도해 준다.
문선명 선생은 긍정적이고 소망에 찬 태도로 종교적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할지라도 확고한 희망과 목표를 견지하면서,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희망을 춤고 영원한 가치에 마음을 고정시켜야 한다. 소망의 횃불을 들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그리고 그 외에 히브리서에 언급된 ‘보이지 않는 것들에의 믿음과 소망의 확신’을 품수한 인간의 발자취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왕국을 실현하겠다는 소망에 벅차 있어야 한다. 특히 메시아 재림 시대에 문선명 선생의 삶은 그 전형이 될 것이다.
종교경전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장정들도 비틀거릴 것이다: 그러나 주임 안에서 소망을 지난 자들은 자신들의 활력이 소생할 것이다.
이사야 40,30 (기독교)
계시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해진다.
잠언 29.18 (기독교)
여호와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그 사랑을 바라는 자들을 지켜보시며
죽을 자리에서 목숨을 건져주시고 굶주릴 때에 살려내신다.
여호와는 우리의 도움, 우리의 방패, 우리는 애타게 그분을 기다린다.
그분 안에 우리의 기쁨이 있고 우리의 믿음은 거룩하신 그 이름에 있다.
우리가 이렇게 당신만을 기다리오니, 여호와여, 한결같은 당신 사랑 베푸소서.
시편 33.18-22 (기독교)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올바른 일을 해야 하며 또한 주님을 섬길 때는 다른 어떤 것도 섬겨서는 아니 되노라
꾸란 18.110 (이슬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실상 옛 조상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좋은 증언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곧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생기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런 제물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는 의인이라는 증언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을 두고 증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 믿음을 매개로 해서 아직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옮겨 가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옮겨 가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는 증언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닌ㅁ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을 지시하셨을 때에 경외심을 가지고 방주를 지어서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른 의를 유업으로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마치 타국에서와 같이 약속의 땅에서 거류하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리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약속해 주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또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자손들이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네가 본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맑혔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도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은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1.1-16, 12.1-2 (기독교)
그리하여 당신께 희망합니다. 오, 주여, 곧 당신 권능의 승리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상숭배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며 거짓된 것들을 완전히 멸할 것입니다.
세상이 당신의 권능 아래 완성되고 인류가 당신의 이름을 경외하는 법을 배울 날을 고대합니다. 지상의 사악한 무리가 당신 앞에 회개할 그날을 고대합니다.
만민이 당신 앞에 무릎 꿇고 그들 혀로 충성을 맹세할 것을 깨닫게 하소서. 오, 주여, 당신 앞에 그들이 경배하고 당신의 이름에 영관 돌리게 하소서. 만민이 당신의 왕국을 깨닫고 당신의 주권이 그들 위에 빠르게 영원히 세워지기를 기원하나이다. 당신의 주권으로 영원한 영광 속에 거하시길 기원하나이다.
매일 기도문, 알레루 (유대교)
말씀선집
희망은 소생과 통하는 것이요, 모든 발전과 통하는 것이요, 승리와 통하는 것이요, 흥함과 통하는 것입니다.
(64.311, 1972.11.12)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희망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68.131, 1973.07.29)
하나님의 영원한 소망이 남아 있는 한, 오늘 우리에게도 영원한 소망이 남아 있습니다.
(1.99, 1956.06.06)
미래를 위해서 살고, 공부도 미래를 위해서 하고, 미래를 위해서 투쟁하고, 미래를 위해서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97.242, 1978.03.19)
인간은 일생 동안 온갖 소망을 품고 살지만 나중에는 죽음에 부딪쳐 자기가 품었던 소망의 전부를 버린 채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기를 바라고 내일도 살기를 바라며 새로운 소망을 찾아 헤매고 있으나 죽음에 부딪치게 될 때 소망을 갖지 못한 채 절망하면서 최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중심삼고 볼 때 소망을 가진 듯 하지만 죽음의 고개를 넘을 수 있는 소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소망을 갖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생의 본으로 알고 죽어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죽음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소망을 찾아 그 소망을 즐기면서 갈 것이냐? 이것이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오늘날 세상만사는 다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가정도 지나가고 국가도 지나가고 세계 혹은 어떤 주의도 지나가고 마는데, 최후에 남아져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죽음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하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인생의 패배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태어나면서부터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일체의 소망을 거부하고 생활하면서 인간적인 것 일체를 거부하고, 인간 세상의 소망이 아닌 새로운 하늘의 소망,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사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인간적인 소망을 중심삼고 살고 있는 지상의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소망을 갖고 죽음의 고개도 넘을 수 있고, 영원한 세계를 흠모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무한히 애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땅 위의 어떤 소망을 품고 살 것이 아니라 죽음 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을 품고 영원한 소망의 세계를 꿈꾸며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45-46, 1959.03.22)
고생 가운데 참고, 수난 가운데 인내하며 하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풀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의 마음을 민족이 하나되어서 역사를 통하여 계승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민족 같으면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고 하며 자기들을 저주하는 하나님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168.52, 1987.09.01)
평화의 나라를 향하여, 평화의 천국을 향하여 가야 할 소망의 아들딸이 늠름하고 활기찬 자세를 갖추어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고, 악의 세력 앞에 패배의 자극을 받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상의 권한으로 천만년 이것을 징벌하고도 남을 수 있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고 하늘의 정병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33.273, 1970.08.16)
오늘은 참부모님 선포의 날입니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고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정말적인 세상이지만, 하나의 희망이 싹텃는데 그것이 바로 참부모라는 것입니다.
(202.341, 1990.05.27)
차디찬 엄동의 설한 풍아
잔인한 네 손을 걷어차라
춘풍은 이르러 꽃향기 날리고
숨죽은 강산에 불을 켜라
아무리 잔인한 설한 풍도
사리지는 운명의 한때로다
춘풍은 이르러 꽃향기 날리고
숨죽은 강산에 불을 켜라
깨어라 봄 나비 종달이 새
적막한 강산에 애들픈 꿈
춘풍은 이르러 꽃향기 날리고
숨죽은 강산에 불을 켜라
(성가 15장)
증거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문제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세석족인 사람들이 하는 것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주관하고 경륜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게 필요한 것을 언제든지 주실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생활필수품, 돈 등을 걱정하는가? 하나님은 인간 운명의 설계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노력의 결과를 염려하고 걱정하는가? 영생의 차원에서 볼 때 우리의 죽음조차도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하나님은 공중에 새, 땅에는 백합을 창조해 주신 것처럼, 우리가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의’를 추구·실현하는 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직 이타심을 지니고 하나님의 창조목적 구현을 열망할 때 천국평화의 열쇠를 지닐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과 인간의 수수작용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덧붙여 설명하신다. 하나님이 긴간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듯. 하나님도 자신의 요구와 상황을 염려해 주고, 하늘의 슬픔을 위로해 드리는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문선명 선생은 하늘의 고통을 나누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했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하나님의 비참한 심정을 체휼한 사람)은 인간의 슬픔과 고민을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에 비교할 때, 인간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심각한 고통에 처하였을지라도 하늘의 슬픔을 위로하고 하늘의 고통을 공유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의 깊은 심정을 체휼하면서 하늘의 증거와 보호를 체감하게 된다.
종교 경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산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릴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25-33 (기독교)
수많은 동물들이 자기들의 양식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노라. 하나님은 그것들과 너희들을 위해 베풀어주시니라. 그 분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전지하시니라.
꾸란 29.60 (이슬람)
역에서 이르기를 “이리저리 자주 왕래하면 벗만이 네 생각을 따를 것이다.” 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천하가 돌아감은 같으나 길은 다르며, 이치는 하나이나 생각은 백가지이니,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역경, 계사전, 2.5.1 (유교)
하늘과 땅을 비추는 태양이나 달처럼 무한한 나의 주여,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지닐 수 있습니까?
만요슈 20 (신도)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4.11-13 (기독교)
모든 이기적인 집착을 신에게 바친 자들은 물에 젖지 않고 깨끗하게 떠다니는 연꽃잎과 같다. 죄악은 그들을 더럽힐 수 없다. 스스로의 이기적인 욕망을 버렸기 때문에, 봉사의 길을 따르는 자들은 자기 정화를 위해 몸, 감관들, 그리고 의근으로 행위를 한다. 의식이 전일된 자들은 행위의 모든 결과들을 포기하고 지고의 평안을 얻는다.
바가바드기타 5.10-12 (힌두교)
세존께서 밧디야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밧디야여, 그대는 숲에 가서 나무 아래에 가서 혹은 인적 없는 곳에 가서나 항상 ‘즐겁다, 참으로 즐겁다’라고 우다나를 노래한다는데,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 우디나를 노래하는 것인가?”
스승이시여, 제가 이전에 가장으로서 왕의 지복을 누리고 있을 때는 궁궐과 도성 안팎의 경비가 아주 튼튼했습니다. 스승이시여, 이와 같이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두려움에 떨고 근심과 공포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숲에 가서나 나무 아래에 가서나 혹은 인적 없는 곳에 가서나 공포가 없으며 떨리는 일도 없고 근심도 없고 무서움도 없습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산야의 짐승들처럼 평온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로 항상 ‘즐겁다, 참으로 즐겁다’라는 우다나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다나 19-20 (불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로마서 8.28(기독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밤늦게야 잠자리에 드는 것도, 먹으려 애쓰는 것도 다 헛되고 헛되니 여호와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잘 때에도 배불리신다.
시편 127.1-2 (기독교)
삶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육지로 가도 외뿔소와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전쟁에 나가서도 무기의 새를 입지 않는다. 외뿔소도 그 뿔을 들이받을 여지가 없고, 호랑이도 그 발톱을 둘 여지가 없으며, 병기도 그 칼날을 들이댈 여지가 없다. 대저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그 죽음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덕경 50 (도교)
“그것은 권세나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 내 영을 받아야 될 일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시다.
스가랴 4.6 (기독교)
만일 주께서 그의 권능을 보잘것없는 개미에게 준다 해도, 수백만 힘센 약탈자 무리를 단숨에 쳐부수리. 그가 몸소 죽음으로 내몰지 않은 모든 이들을 그의 강한 팔에 거두어 안으리. 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수고로움은 헛되리라. 그 외 누구도 구원자나 파괴자가 아니며, 오직 그만이 만유의 수호자로다.
오, 사람들이여! 왜 그다지도 괴로워하고 있는가? 나나크가 말하노니, 그대의 이해를 넘어선 주를 염하라. 놀랍고 놀라운 그를 염하라.
아디 그란트, 가우리 수크마니 17, m.5, pp.285-28 (시크교)
형벌로 발을 잘린 자가 법도에 구애받지 않는 것은 비난과 명예 같으 srjt을 잊었기 때문이다. 죄수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죽음과 삶을 잊었기 때문이다. 반복하여 마음속으로 부끄러울 게 없게 되면 사람을 잊게 된다. 사람을 잊게 되면 하늘과 하나가 된 사람(天人)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공경하여도 기뻐하지 않고, 그를 모욕하여도 성내지 않는다. 이것으 오직 하늘의 조화와 합치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 23 (도교)
대저 술에 취한 사람이 수레에서 떨어지면 다치기는 해도 죽지는 않는다. 뼈나 관절은 다른 사람과 같지만 상해를 입는 것이 남과 다른 것은 술 취한 사람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레에 탔다는 것도 모르고, 수레에서 떨어졌다는 것 역시 모른다. 죽음과 삶, 놀람과 두려움이 그 마음속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어떤 사물에 부딪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술에서 정신의 온전함을 얻고서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자연으로부터 온전함을 얻은 자야 어떻겠는가! 성인은 자연에 머물고 있어서 그 무엇도 그를 해칠 수가 없는 것이다.
장자 19 (도교)
말씀 선집
통일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우리 노동시간이 8시간입니까? 24시간입니다. 24시간 일하지 않고는 양심적으로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르냐. 저 세상 사람은 8시간 일하고도 집도 사고, 가정용품도 사고, 생활도 넉넉히 하는데 우리는 24시간 일해도 집도 없고, 살림도 못하고, 그저 고생만 죽도록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릅니까. 여러분 다른 거 알겠습니까? 얼마나 다릅니까? 180도 다릅니다.
그래 가지고 절망하고 있느냐, 희망을 갖고 있느냐? 문제는 그것입니다.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랑입니다. 레버런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레버런 문 자랑할 게 웝니까? 천하에 무서운 게 없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데는 천하에 무서운 게 없습니다. 얼마나 당당하냐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107.83, 1980.04.06)
하나님을 위하고 하늘땅을 위해서 소화하고, 내 나라와 내 종족과 내 가정과 내 상대를 위해서 소화한다 하는 생각을 해야지, 나를 위해서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위해서 소화하고 살게 되면 모든 것이 완성된 세계로 끌려가는 것도 나 때문에 끌려가기 때문에 내가 안가려고 도망가더라도 뒤로 끌려가도 끌려가는 것입니다. 천국 가다가 도망가더라도 끌려갑니다. 그거 얼마나 안심이 되고 편안해요!
일생 동안 자기를 중심삼고 살면 ‘아이구, 이것도 안 됐구나! 저것도 안 됐구나!’ 하면서 전부가 걱정입니다. 그렇지만 위해서 10년, 20년 살게 되면 모든 것이 내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꾸 위하다 보면 나는 진공상태로 되기 때문에 참이 찾아 들어옵니다. ‘참된 거기에 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따라오고, 창조주도 그걸 바라기 때문에 내게 속한다.’ 이게 이론적입니다. 그래서 완전소화를 바라는 사람은 완전시대를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203.102, 1990.06.17)
낮과 같이 밝고 기쁠 때는 하늘이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명랑해야 됩니다. 언제나 감사하고, 기분 나쁜 것이 있으면 빨리 제거하고 얼른 잊어버리십시오. 그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거 왜 그러느냐? 하늘을 대할 수 있는 시간적 거리를 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자기 혼자 ‘아이구’ 이러는 것보다도 종교가 인간에게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이것 다 맡아 주소. 하나님이여! 이것 전부 다 알아서 처리해 주소’ 전부 다 하늘 앞에 보고하고는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인의 생활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많이 접할 수 있는 시간을 갖자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지금부터 그려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접근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을 많이 갖자는 것입니다.
(91.272-273, 1977.02.27)
사람 사람끼리 모이는 곳은 풀려다가 도리어 엉클어지는 일이 벌어지지만, 하늘을 중심삼고 모이는 곳은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이 풀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다.
(7.13, 1959.07.05)
여러분이 여기서 장사를 하든가 전도를 하든가 뭘 하든가 간에 기도하고 정성들이고 가게 되면 벌써 보여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가 하는 것까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척 나서게 되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 자꾸 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곳에 가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 페험을 하는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69.288, 1974.01.01)
선생님은 피를 토하고 죽는 경기에서도 이를 악물고 싸워 나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피를 토하는 자리에 가서도 ‘아버지! 나를 살려주십시오!’ 안 그랬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난 졸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나약한 자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죽더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것이니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런 기도를 하려고 했지, ‘아이고! 나 못 살겠습니다. 나 고생시키지 말고 놓아 주십시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기도 배워 본 적이 없고, 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하나님이 다 알고 있습니다.
(93.321, 1977.06.12)
감사와 은혜
감사하는 마음은 일상적 신앙생활의 원동력이다.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는 언제나 하늘의 영광과 권능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항상 감사한다. 가족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고, 식탁 위에 놓인 음식에 감사드리는 지극히 단순한 가정생활의 이 관습은 아이들이 감사함을 배우는 출발점이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부족함을 보완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언제 어디서든 느낄 때 감사할 내용은 더 많아진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상황을 성장을 위한 기회로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보다 높은 사랑과 봉사의 경지로 인도하려는 하늘이 주신 선물로서, 우리는 수용할 수 있다. 감사의 생활은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우리의 생활에 불평할 여지는 거의 없다. 불평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을 분리시켜 우리의 인성을 해치는 영혼의 독버섯이다.
그동안 나를 사랑해 주고 정성들여준 모든 분들—부모님, 선생님, 형제자매, 배우자—의 은혜를 상고해보면, 그리고 내 삶을 지탱하고 보호해 준 모든 것들—흙, 물, 공기, 그것의 부산물, 태양, 지구, 달의 공전 및 자전, 음식을 차려준 요리사, 경찰관과 소방관, 병원과 의사, 가정의 가전제품, 자동차 등등—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감사할 내용들이 끝없이 증대할 것이다. 어느 측면에서 볼지라도 우리 모두는 생명의 원천이자 자비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빚진 삶을 누리고 있다. 이 은혜들을 과연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범사에 감사하는 자세와 남에게 베푸는 미덕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이다.
1.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감사
종교 경전
오, 너희 믿는 자들이여! 우리〔하나님〕가 너희에게 부여한 좋은 음식을 취하고 너희가 경배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분께 감사할지어다.
꾸란 2.172 (이슬람)
하나님께서는 믿는 이들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게 하시려고 음식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4.3-5 (기독교)
아브라함으로 인해 그가 대접했던 모든 여행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회자되었다. 여행자들이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베풀 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먹었던 음식은 내 것인 줄 아느냐? 진실로 너희가 먹었던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당신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축복하라.
탈무드, 소타 10b (유대교)
밤을 두어 너희를 쉬게 하고, 낮을 두어 보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실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와 풍요로 가득 찬 분이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도다. 너희를 위해 대지를 안식처로 하고 하늘을 지붕으로 하여 너희에게 형체를 주되 가장 아름다운 형체로 만드셨도다. 그리고 순수하고 좋은 양식을 주셨으니, 그 분이 바로 하나님, 너희의 주님이시도다! 만유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꾸란 40.61,64 (이슬람)
오, 아들아!
교만하지 말고 신의 사업에 놀라운 영력을 지닌 신들을 도와라.
오곡과 울창한 초목들조차도
위대한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 신의 축복의 덕분이니라.
아침저녁, 네가 음식을 들 때마다 도요우케 신의 축복을 기억하라.
세상 사람들아.
천지의 신들의 축복.
이것 없이 어찌 하루 낮 하루 밤조차 존재할 수 있으랴.
수많은 선조들의 은혜를 잊지 말아라.
대대로 선조들은 우리들의 우지가미, 씨족신이니라.
모토오리 노리나가, 고귀한 창에 관한 백편의 시 (신도)
쓸모없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입은 은혜를 망각한다. 이와 같은 배은망덕은 인색한 사람들에게 적합하지만,… 훌륭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입은 은혜를 마음에 새긴다. 이와 같은 사려 깊음은 최고의 사람들에게 어울린다.
앙굿타라 니카야 1.61 (불교)
우리가 친절을 베푼 사람이 감사함을 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소유물을 빼앗아가 버리는 강도보다 더 나쁘다.
요루바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번영할 때는 자기들의 신께 영광을 돌리고, 역경에 처할 때는 신을 저주하는 자들과 같이 너희는 되지 말라. 기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늘 감사하라!
메킬타 출애굽기 20.20 (유대교)
말씀선집
선한 사람은 음식을 대해서도 먼저 하늘, 다음은 땅, 그 다음은 인류를 생각하고 나서 먹는다.
(뜻길 p.30)
신앙생활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과 내가 타락한 인연을 넘어 하나의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좋은 입장에 처해야만 감사해야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좋은 때만 우리를 위해 수고해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수고하실 것을 다짐하고 나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기 위해서는 내 대신 일하시며 싸워 나오신 하나님을 좋은 자리에서 감사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자리에서 더욱더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중한 십자가 도상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원칙을 이해하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29.338, 1970.03.14)
저희들이 아버지의 정성을 아는 아들이라면 잠을 자다가 일어나도 죄인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릴 수 없는 민망한 마음으로 엎드리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아침 밥상을 대하는 자리에서 내가 이 밥을 먹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는 자신이 되게 하시옵고, 점심 밥상을 대할 때에는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남겼는가 하는 물음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자책하는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저녁 밥상을 대할 때에는 하루를 청산 짓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루를 보냈는가를 자문할 수 있는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것으로서 하루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것으로서 이 시간까지 왔는가, 또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를 생각하게 될 때, 가치 있게 지내야 할 하루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빈 몸을 가지고 세상의 마음을 지닌 하루가 아니었나를 생각하며 침상에 누워 아쉬워하며, 아버지 앞에 눈물로써 사죄하고 침상에 누울 줄 아는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매를 맞는 자리에서도, 피를 토하는 자리에서도 감사의 생활을 해야 되겠사옵니다. 수많은 선조들이 그러한 자리에서 아버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인 서러운 한의 심정을 품고 오신 아버지에게 효(孝) 중의 효의 도리와 충(忠) 중의 충의 도리를 다해야 할 저희들인 것을 아옵니다. 여기에서 내가 원망과 불평을 가지고는 그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고, 그러한 자신을 발견할까 두려워하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는 불쌍하고 약한 사람이지만 이런 사람 이상 무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감사하며 생활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한 남자 앞에 맺어진 아내가 부족할지라도 생애를 통하여 봉사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 아내를 주신 것을 감사해야 되겠고, 혹은 자식이 나에게 십자가의 일생을 주어도 그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을 감사해야 되겠으며, 환경이 나에게 생애를 가눌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더라도 그것을 어떠한 조건을 세워서라도 감사의 인연으로 남기고 쓰러지겠다고 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아버님의 사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29.348-349, 1970.03.14)
저희들이 만나게 된 이 인연은 저희들의 능력으로 만난 것이 아니오라, 아버님을 중심삼고 수천만 대의 선조가 다리를 놓고 그 터전을 넓히고 넓힌 공적으로 말미암은 것이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날 수 있는 한 날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신 모든 은사를 저희들이 감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39.78, 1971.01.09)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참고 견디기만 하고 ‘아이쿠, 힘들어라’ 하면 되겠습니까? 참고 견디더라도 참고 견디는 것 같지 않게끔 감사하며 찬송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데도 감사한 마음과 찬양하는 마음을 갖고 참고 견뎌야지, 불평하면서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오다가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데는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 가지고는 참지 못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밑받침되지 못하면 참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같이하시지 못합니다.
(44.28-29, 1971.05.04)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님입니다. 피, 생명, 혈통이 연결되어서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인연의 결속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든가, 하나님의 생명이라든가, 하나님의 혈통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눈물겨운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골수가 흐느낄 것 같은 아픔을 느껴 본 적이 있느냐 말입니다. 산천초목을 바라볼 때 자신의 갈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하나님한테 감사하는 마음을 하루에도 한두 번씩 느껴 보지 않으면 본래의 심정세계와 통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371.115, 2002.02.24)
선생님이 가르쳐 준 다음에 안 하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여러분들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레버런 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지옥이요, 불평 안 하고 감사하며 가면 천국입니다. 불평할 것을 감사하며 가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96.122, 1978.01.02)
감사는 어느 때에 해야 되느냐? 쉽고 좋을 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감사의 심정을 중심삼고 오늘 이 현재를 하나님이 비교 심판하고 있다는 거예요. 법정에서도 그렇잖습니까? 법정에서 판사, 검사들이 구형할 때, 그걸 고맙게 받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형을 감해 주려고 하는 것이 판사의 심정이요, 검사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104.279, 1979.06.01)
2. 위하는 삶으로 보답하는 하나님과 자연과 조상에게 진 빚
종교 경전
인간은 모두가 신의 대물이다. 무엇으로 알고 쓰고 있는가?
친필 3.41 (천리교)
사람이 태어날 때 누구를 막론하고 신들과, 현자들과, 조상들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빚도 또한 함께 생겨난다.
그가 희생 제의를 바칠 때 그것은 관련 있는 신들에 대한 빚을 갚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제의를 드리거나 공물을 마련할 때 그가 하는 행위는 바로 신들을 위한 것이다.
그가 베다를 낭송할 때, 그것은 관계있는 현자들에 대한 빚을 갚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행위는 그들을 위한 것이다. 베다를 낭송하는 사람은 현자들의 보고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일컬어지는 까닭이다.
그가 공물을 바치고자 할 때, 그것은 관계있는 조상들에 대한 빚을 갚는 것이다. 그와 같은 그의 행위는 그들을 위한 것이다. 이에 그들의 자손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가 집에 찾아온 이들을 기쁘게 할 때, 그것은 관계있는 사람들에 대한 빚을 갚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손님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준다면, 그가 행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행하는 자는 참된 일을 하였으며, 그는 모든 것을 얻었고 또한 모든 것을 정복한 자이다.
사타파타 브라흐마나 1.7.2.1-5 (힌두교)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다.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애원하기를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였다.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 그를 놓아 주고 빚을 삭쳐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기를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마태복음 18.23-34 (기독교)
말씀 선집
생명이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본전을 다 찾자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머니 아버지가 본전을 전부 다 찾아가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만물이 전부 다 ‘내 것 다오’ 할 때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생명의 근본 되시는 하나님도 생명을 돌려 달라고 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부 내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는 빚더미 위에 올라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빚을 갚았습니까? 빚을 갚으려고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빚진 사람은 감사해야 합니다. 빚 준 사람이 달라고 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빚진 자가 빚을 탕감 받고서 자기가 빚 준 자를 빚을 갚지 않는다고 벌주는 사람을 도리어 벌하는 성경 말씀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의 이치11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빚진 사람으로서 빚을 갚으려니 할 수 없이 우리가 남을 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위하는 데서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조건 받았으니 남을 위해 무조건 넘겨주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93.193, 1977.05.29)
신앙자로서 제일 중요한 자세는 무엇이냐? 빚진 자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빚져 봤습니까? 빚진 것이 없으면 빚을 좀 져 가지고 단련해 보십시오. 빚진 자의 수고가 어떻구나 하는 것을 알아보십시오. 빚을 갚지 못하는 자리에 서 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비참합니다. 한 푼이라도 빚을 지면 그 조건으로 멱살을 잡힐 수 있고, 근본적으로 인격을 부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거기에는 인격이 없습니다.
(43.108, 1971.04.25)
‘하나님, 걱정 마시고 합시다’라고 권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타락한 인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지쳤습니까? 몸부림치며 나오신 그 하나님이 얼마나 지쳤겠느냐는 말입니다. ‘걱정 마소. 제가 해 주겠습니다’ 해야 말이라도 그게 좋습니다. 모든 것을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도 ‘야, 그놈 그거 훌륭한 녀석이구나. 그 녀석 장래성 있는 녀석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환드레이징 하러 나갈 때, ‘하나님, 오늘 장사 잘되게 해 주소’ 하는 이런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 오늘 백 불을 벌었습니다. 내 당신을 위해서 정성껏 벌었기 때문에 바치는 데도 정성껏 바치니 오늘날 역사상에 어떠한 사람들이 헌금한 것보다도 더 귀하게 받으십시오’ 하면 하나님도 ‘음, 그 녀석 쓸 만한데’ 하며 좋아하는 것입니다.
(93.22, 1977.05.08)
하늘의 복을 받기 위해 너희는 무엇으로 그 값을 치르겠는가? ‘효자의 피 끓는 사랑으로 갚겠나이다!’ 해야 한다.
(뜻길 p.353)
아무리 초조하고 아무리 처량하고 아무리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는 저희들이라 할지라도 저희들보다 더 불쌍한 아버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앞에 저희가 제물이 되어 저희보다 더 불쌍하신 아버님을 위로해 드려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25.41, 1969.09.28)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에의 두려움은 긍정적인 정서다. 이러한 정서가 우리로 하여금 나쁜 일을 멀리하게 하고 옳은 일을 하도록 주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처벌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범죄를 저지르는 성향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 실재를 부정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때로는 그들은 종교적 도덕규범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제거되어야 할 족쇄와 같다는 현대 이론을 거론하면서 자신들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문선명 선생님은 타락으로 인해 공포 자체가 부정적인 정서로 자리 잡았고, 공포가 인간의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할 때 인간은 온갖 종류의 자기 중심적 행동을 드러내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향한 고도의 경외심, 숭배와 두려움, 하나님의 시봉심은 인간의 본질적 요소이다. 이러한 경외심이 우리 삶의 단계와 단계를 인도해 주는 것이다. 이 마음은 또한 자신의 삶과 존재목적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항상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한 동역자라는 의미와 가치관을 형성하는 추동력이 된다.
1. 도덕적 행위의 자극으로서 하나님에의 두려움
종교 경전
오, 믿는 자들아!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분이 경외되어야만 하는 만큼(그분에게 복종하고 그분에게 감사하며 항상 그분을 기억함으로써). 그리고 귀의자로서 죽지 않으면 아니 되노라.12
꾸란 3.102 (이슬람)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잠언 9.10 (기독교)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만큼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라!
탈무드, 베라코트 28b (유대교)
“이 백성이 거룩하다고 하는 온갖 것을 거룩하다고 하지 마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떨지 마라.” 너희가 거룩히 받들어야 할 분은 만군의 여호와, 너희가 두려워하여 떨 분도 그분이다!
이사야 8.12-1313 (기독교)
하나님은 최고의 말씀을 성서로 내려 보내 주셨느니라. 그것의 각 부분들은 서로 닮아 있고(보상의 약속으로) 짝으로(처벌의 경고로) 되어 있도다. 그것으로부터(그들이 그것을 읽거나 들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피부는 떨리지만, 곧 그들의 피부와 그들의 가슴은 하나님을 향한 염원으로 부드러워지노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이며, 이것으로 원하는 자를 인도하시느니라.
꾸란 39.23 (이슬람)
비구들이여, 두 가지 밝은 것들이 세상을 보호한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 그 둘이다. 만일 이 두 가지 밝은 것들이 세상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마치 염소와 양, 수탉과 수퇘지, 개와 자칼의 경우처럼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티붓타카 36 (불교)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이르렀다.
요한계시록 14.7 (기독교)
그날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이집트 군대로부터 건지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인들이 해변에서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그 큰 팔을 펴시어 이집트인들을 치시는 것을 보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
출애굽기 14.30-31 (기독교)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우리는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3.14-19 (기독교)
말씀 선집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범죄를 하게 되었던 것은 실상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어디까지나 관념적이요, 실감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성을 실감하는 자리에서 범죄한 인간은 부득이 지옥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는 천법을 안다면, 거기에서 누가 감히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인가?
(원리강론, 총서)
아담과 해와가 완성기에 이르러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이전에, 즉 아직 10대 청소년일 때, 천사장은 해와를 꾀어 간음했습니다. 그리하여 천사장은 사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 역시 타락한 해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타락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바로 이렇게 불륜의 씨를 뿌림으로써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 불륜의 관계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특히 10대 청소년들은 성적 타락의 희생자가 되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사회는 성경 속의 소돔과 고모라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불륜한 사랑을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를 두려워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징벌이 임박했습니다.
(201.206-207, 1990.04.09)
해와는 하나님의 천리 법도가 본래 아담이 남편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아담 품에 돌아가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피할 줄 알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사랑을 중심삼고 공포와 자주성이 결탁되어 결국은 아담까지 사랑에 무릎 꿇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공포와 자기 주장하는 혈통의 역사가 이어져 끝 날에 와서는 개인주의 세계 판도로 망국지세계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256.230, 1994.03.13)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고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하체를 가렸는데, 오늘날 미국의 젊은이들은 공원에서 별의별 짓 다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복귀할 수 있는 가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는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회개할 마음은커녕 부끄러운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95.149, 1977.11.11)
2. 존경과 경외
종교 경전
여호와께서 당신의 거룩한 전에 계신다. 온 세상은 그의 앞에서 잠잠하여라.
하박국 2.20 (유대교)
지옥의 불길은 다음 두 눈에 들어가지 아니 하니 하나님의 길에서 항상 깨어 있는 눈과 하나님을 경외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젖어 있는 눈이니라.
다리미 하디스 (이슬람)
보이지 않는 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거룩한 존재들,
얼마나 위엄 있고 멋진가,
결코 가볍게 다루어질 수 없도다!
토오리 노리나가, 고귀한 창에 관한 백편의 시 (신도)
진실하게 믿는 자라면 하나님의 이름이 말하여질 때 그들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하나님의 징표가 그들에게 읽혀질 때 그들의 믿음이 더욱 깊어져 그들의 주님에게 의탁하는 자들이며, 예배를 준수하고 우리(하나님)가 그들에게 제공한 것을 (자선으로) 사용하는 자들이니라. 그들이야말로 진정하게 믿는 자들이며, 이들에게는 주님으로부터의 영예로운 등급과 용서와 명예로운 지급품(파라다이스)이 있을 것이니라.
꾸란 8.2-4 (이슬람)
신을 경외함은 중하고도 중하다.
자만은 허망하며 떠들썩하기만 하나니,
그처럼 커다란 경외의 무게 아래를 걸어라.
거룩한 은총으로 신의 지혜를 얻으리라.
경외하지 않는 자는 그 누구도 존재의 대양을 넘어설 수 없다.
신을 경외함으로써 공포에 짓눌린 삶이 거룩한 사랑으로 아름다워지리라.
신을 경외함으로써 공포의 불이 인간 안에서 빛을 발하리라.
신을 경외함에 사랑이 숭고한 아름다움을 갖추리라.
신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말은 다만 잘못되고 헛된 것이며,
그 뼈대와 모양을 만들기 위한 일격은 모두 눈을 멀게 하니…
신을 경외함으로써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리라.
다른 모든 두려움을 없애버리는 신에 대한 경외,
어찌 이를 두려움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대 외에는 아무런 안식처도 없으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대의 뜻이로다.
만일 신이 아닌 다른 것이 두렵다면, 그것은 다만 마음의 불안일 뿐임을 알라.
아디 그란트, 가우리, M.1. p.151 (시크교)
말씀선집
아버님! 저희들은 아버님의 슬픈 역사 노정을 회상하면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사옵고, 수고하시는 아버지의 성상을 대할 적마다 황공한 마음 금할 길 없사옵니다.
(6.329, 1959.06.28)
천년 한 가운데 수난 길을 자기 자체를 제어하면서 입을 다무시고 인내해 온 그 하나님을 존경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진짜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을 여러분이 가져야 됩니다. 내가 그 이상 참더라도 아버지의 전통을 후대 천년만년에까지 남길 수 있는 중심 조상이 되겠다는 결의를 해야 됩니다.
(363.254, 2001.12.25)
입은 가졌어도 말하지 않고, 말을 잘못하여 천도를 어길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는 길이 이 길입니다. 왜? 하나님 때문입니다. 말할 줄 몰라서 말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할 줄 몰라서 불평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67.316, 1973.07.22)
보통 사람은 원망하고 낙망하고 하늘을 저주할 텐데도 불구하고, 하늘을 경외하고 하늘을 위하여 다시 다짐할 수 있는 이런 자리에 서게 될 때 하늘은 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데리고, 소수의 무리를 가지고 세계를 복귀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사정과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93.217, 1977.06.01)
인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오늘날까지 당신께 감사할 줄 몰랐고, 보답할 줄 몰랐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도 그럴수록 언젠가는 다 주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슬픈 역사를 이끌어 오신 아버지의 내심을 저희들은 살피게 되옵니다.
오늘 아버지의 슬펐던 마음을 털어놓고, 세계를 대신하여, 역사를 대신하여, 천주를 대신하여 주고 싶으셨던 심정을 토로하는 이 시간, 당신 앞에 전체를 받아서 전체를 줄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지 못할까 두려움을 느끼는 당신의 아들딸이 이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35.289, 1970.10.25)
의심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앙은 불가피하게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비현실적인 신앙적 교리, 신앙생활에서의 도전, 오늘날 세속적 환경 속에 만연한 회의주의로 인해 인간의 의심은 점점 더 불거져 나온다. 신앙의 바다를 건너는 신앙인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쌓이면 그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져 심지어는 침몰하게 된다. 마치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데 실패했다는 일화에서처럼 말이다.
어떤 의구심이 들었을 때 그것을 극복할 책임은 각자에게 있다. 물론 이성적으로도 풀리지 않는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을 찾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단계를 뛰어넘어 살아 있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종교 경전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서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께서 오시어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하고 인사하셨다. 그런 다음에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 하고 말씀하셨다. 도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대답하니,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한복음 20.24-29 (기독교)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였다.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다.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니 예수께서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마태복음 14.24-31 (기독교)
어떤 수행승이든 스승에 대해 의심이 생기고 혼란에 빠지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그의 마음에 열의가 일어나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적용해 보려 하지 않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음에 열의가 일어나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적용해 보려 하지 않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하려 하지 않는 그에 의해 제거되지 않게 되는 첫 번째 정신적 장애요소이다.
또 만일 이 정신적인 장애요소가 제거되지 않는다면, 이 수행승은 담마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고 … 교단에 대해서 의심을 품으며 … 수행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 그러면 이 담마와 수행을 통해 그가 성장하고 지혜를 넓히고 성숙되는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맛지마 니카야 1.101 (불교)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하십시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 1.5-7 (기독교)
만일 우리(하나님)가 너에게 내려 보낸 것 중에서 너에게 의심이 있다면, 네 이전의 성서들을 읽었던 자들에게 물어 보거라. 진실로 너의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너에게 왔노라. 그러므로 의심하는 자들 속에 있지 말거라. 그리고 하나님의 징표를 거부하는 자들 속에 있지 말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잃은 자가 되리라.
꾸란 10.94-95 (이슬람)
말씀 선집
하나님을 믿어요, 하나님을 알아요?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요? 하나님이 생명이 있다면 생명을 믿어요, 알아요? 하나님의 혈통이 있다면 하나님의 혈통을 믿어요, 알아요?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습니다. 추상입니다. 실재와 관계없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359.87, 2001.11.06)
신앙과 현실에서 신앙이라는 것은 막연하지만 믿을 수 있는 것이며 현실은 확실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신앙은 변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66.49, 1973.03.18)
항시 신앙이 클 때는 현실이 작게 보이고 신앙이 작아질 때는 현실이 커 보이게 된다.
(뜻길 p.325)
여러분이 처해 있는 주위환경으로부터 갖게 된 의심을 내려놓고 ‘아버지시여, 저희 몸 마음에서 이것을 제하여 주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악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아버지나 어떤 신앙의 주체자 앞에 그냥 그대로 내맡길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심정만이라도 마음의 중심에 세우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여러분은 신앙 길을 걸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찾아오실 때 어떤 조건을 제시하시느냐 하면, 신앙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믿음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의심을 갖게 하는 환경을 타파하고 믿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야 하며, 죄악의 환경을 정리하고 선의 환경을 만들어야 하며, 사망의 환경을 타파하고 생명의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과 관계된 이런 모든 우주적인 의심을 걸머지고 ‘하나님이여, 나 이제 우주에 대한 모든 의심을 가지고 나왔사오니, 당신과 나 사이에 천륜적인 인연이 있다고 한다면, 나를 버리시지 않을 당신으로 알고 있사오니, 이 모든 의심을 받아 해명해 주소서’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맡겨버릴 수 있는 배짱도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그 자체도 성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진실로 자기가 부딪친 우주적인 의식의 한계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성실성을 갖고 하늘 앞에 ‘아버지여! 하나님이시여!’라고 부를 때는 아버지도 그를 대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사람을 대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3.11-13, 1957.09.08)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 우리는 그 하나님을 우리 일상생활에서 실증으로 볼 수 있어야 하며 세계가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부각시켜야 합니다.
(120.100, 1982.10.05)
위선
어떤 사람이 종교적 교리에 따라 탁월한 도덕적 기준에 입문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항상 위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위선자들은 내적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겉으로 도덕적이며 종교적 성향을 보이면 동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교회로부터 혜택을 받기 때문에 종교를 갖기도 한다.
종교는 신앙인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이슬람의 성전, 불교의 엄격한 금욕의 가르침 등 종교적 삶은 상당한 영적 훈련을 요구한다. 하지만 위선자들은 이런 측면들은 회피하면서 외관상으로만 정의롭게 드러나 보이려고 한다. 그들은 계명을 따르려는데 어떤 수고의 대가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 결실이 없으며 저급한 영적 상태에 머물게 된다.
게다가 이러한 위선이 종교에 만연하면 종교인들의 기준마저 퇴락하게 되고 종교가 오명을 쓰게 된다. 역사를 연구한 문선명 선생님은 기독교 정신이 가난의 팽배와 인종차별을 인정하고 이것을 정당화하려는 부유층의 위선과 부합했을 때 그 근본정신이 변질되었고, 이것이 19, 20세기 물본주의 사상을 팽창하게 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고 하신다.
이에 대해 그는 종교가 참된 정신을 회복할 때 지구상에 항구적 평화가 정착하고 영적 문명을 재창조할 수 있다고 교시하신다.
종교 경전
위선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으라!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마태복음 23.27-28 (기독교)
사악한 품성을 지닌 자는 비록 경건한 이들의 외양을 애써 흉내 낼지라도, 만일 자신을 통어하여 위선된 내면을 멸하지 못하면 세세토록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
우타라디야야나 수트라 20.43 (자이나교)
율법의 말씀으로부터 어떤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는 자기 파멸을 돕고 있는 셈이다.
미슈나, 아보스 4.7 (유대교)
신실한 자가 바친 허물을 착복하는 비도덕적이고 무절제한 사람이 되느니보다 화염처럼 사람을 태워버리는 불에 달군 뜨거운 쇠공을 삼키는 것이 더 낫다.
법구경 307 (불교)
제자들로부터 재물을 꼬여내는 스승은 흔하다. 그러나 그들의 고뇌를 덜어주는 스승은 드물도다.
쿠라나바 탄트라 13 (힌두교)
꾸샤풀도 잘못 만지면 손을 베듯이 잘못 든 수행자의 길은 그를 지옥의 길로 이끈다.
법구경 311-312 (불교)
재앙이 있으리라.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그들은 그들의 (정해진 시간의) 예배를 태만히 하는 자들.
보이기 위한 (사람들에게) 자들. 그리고 자선을 거부하는 자들이니라.
꾸란 107.4-7 (이슬람)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덧없는 공물로 신에게 드리는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의로운 마음으로 기도하라. 그러면 신은 그대의 간청을 들어주실 것이다. 바보는 성마른 열정으로 의로운 길을 따르지 않으면서 신의 가호를 얻고자 하는 자이다.
신도 우덴 후츠조슈 (신도)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마태복음 6.1 (기독교)
오, 믿는 자들아! 비난과 위법행위로 인해 너의 자선을 헛되게 하지 말거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자와 그리고 하나님과 최후의 날을 믿지 않는 자들처럼, 이것은 흙을 씌운 바위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비가 오면 모두 벌거벗겨지니라. 그들은 그들이 얻은 것 중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인도하지 아니하노라.
꾸란 2.264 (이슬람)
상등의 의를 지닌 사람은 그것을 하되, 행위를 인식하지 않는다.
상등의 예를 지닌 사람은 그것을 하되, 이에 응하지 않으면 팔을 잡아끌면서 이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도덕경 38 (도교)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누가복음 4.23 (기독교)
어리석은 자여, 머리 장식이 무슨 소용인가?
그대의 영양 가죽옷이 무슨 소용인가?
그대의 속은 더러운 열정으로 가득 찼네.
거죽만 번지르르 치장했구나.
법구경 394 (불교)
사람들 중에는 믿는 자가 아니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최후의 날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노라.
그들은 하나님과 믿는 자들을 속이려 하나 그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속지 않으며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노라.
그들의 가슴에는 병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더 증가시키셨노라. 그들의 거짓말로 인해 그들에게 가혹한 벌이 있노라.
그들에게 지상에서 해악을 저지르지 말라고 말하면 그들이 대답하길 우리는 단지 평화를 도모하는 자들일 뿐이라고 하노라.
실로 그들이야말로 해를 끼치는 자들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노라.14
꾸란 2.8-12 (이슬람)
말씀 선집
그를 이용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여서는 절대로 도의 기준이 서지 않는다. 진실되게 주어라.
(뜻길, p.300)
본인은 세계와 인류의 앞날에 대한 오랜 성찰과 기도를 통하여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하나님의 열정적인 소망과 강한 성령의 역사를 느껴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가 기필코 새로워져야 하고 종교지도자들이 범세계적으로 단결할 뿐 아니라 참회와 참된 봉헌의 자세를 가다듬는 범종교적 확청운동, 실천봉사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교시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달라져야 합니다. 새로운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고, 도처에서 생활신앙·실천신앙의 기치가 높이 휘날려야겠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들 앞에 살아계신 신을 증거 하는 산 신앙의 불길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세계는 종교를 통한 정신혁명, 사랑과 자비에 의한 큰 화합으로써만 성취되는 것입니다.
(135.222, 1985.11.16)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대체 종교가 뭐냐? 내 몸에서 투쟁하는 하나의 사탄의 근거지를 청산 짓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게 종교의 사명이다 하는 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 오늘날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다 커버해 버리고 상대세계의 선을 찾고 다른 곳의 악을 분별하겠다고 하는데 그런 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31.23, 1984.03.11)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참사랑 없는 신앙생활이나 이기심을 바탕으로 본연의 인권을 짓밟고 부정을 저지르는 일들도 모두 극복돼야 합니다.
(400.95, 2002.12.27)
온 인류가 한 부모의 후예임을 교리로써 가르치고 또 그와 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 국가의 바로 그 국민들이 다만 피부의 빛깔이 다름을 인하여 그 형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게 된 현실이다.
(원리강론, 총서)
모든 종교인들은 이 세대의 영적 기반의 결핍에 대하여 책임을 절감하고 깊이 통회해야 하겠습니다. 긴 종교 역사 속에서 종교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르게 증거 하는 일에 부족했고, 사랑의 실천을 등한히 함으로써 무신론이 만연하고 또 공산주의가 세계에 팽배해 있음을 뼈저리게 자책하는 종교인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모든 종교인은 깊은 자기성찰의 내적 기대 위에서 굳세게 일어나 온갖 비리가 난무하는 현실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뜻의 지상실현을 위하여 창의적인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인간과의 관계는 경전이나 예배의식 안에서만의 관계가 아닙니다. 신의를 품고 24시간 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자각된 마음속에 거하시면서 인간과 함께 생활하시기를 소원합니다.
(135.222, 1985.11.16)
이단
신앙 길에서 이탈하는 최대의 함정은 사탄, 즉 이단의 유혹이다. 주요 종단의 경전에는 이 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설(異說)’은 다른 의견이라는 뜻인데 하늘이 종교 창시자에게 계시해 주는 원래 지혜는 어느 누구의 의견으로 수정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한 종교들이 초기에는 정통 집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박해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창시자 사후에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주류 종교에 종파적 분파적 이단이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적인 진전에 따라 주류 종교를 에워싼 이단들은 점점 사라지는 반면, 진정한 종교는 창조적 위상을 새롭게 확보하게 된다. 어느 시대 어디에서든 주류 종교의정통적 흐름 속에서 이단이 승리했다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비록 이단의 가르침에 신학적인 매력이 있을지라도 언제나 이단이 이단으로 규정되는 데는 보편적 이유가 존재한다.
이 장에 발췌된 경전 구절에서는 사악한 선지자와 이단자의 조속한 동기를 비난한다. 이들은 세속적 목적을 위해 종교를 이용한 위선자들이다(물론 정통교리를 따르는 스승들도 동일한 과오를 범하지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단의 가르침을 사탄과 악령의 역사라고 비난하고, 다른 이들은 이단이 가져오는 타락한 결과들, 방탕한 삶, 탐욕, 그리고 불화의 씨 등등의 요소들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러나 데바다타의 예처럼 어떤 이단들은 정통 종교의 길보다 더 강도 높은 금욕, 혹은 극단적인 믿음의 기준을 제시하며 인간 본질을 적지 않게 기만하고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몇몇 구절에서는 종파 분열과 신앙공동체를 붕괴시킨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단적 요소를 강공한다.
종교 경전
거짓 예언자들은 삼가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엉큼한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것이다.
마태복음 7.15-16(기독교)
하나님의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종국에는 종교를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기만하여 이용하고, 대중 앞에 양가죽을 쓰고 유순하게 보이려는 무리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의 말은 사탕보다 더 달콤하나 그들의 마음은 늑대의 마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그들이 나를 기만하려 하느냐? 아니면 나에게 오만하게 행동하려 하느냐? 나는 스스로 맹세하건대, 지혜로운 자를 방황하는 자들 틈에 버려두는 자를 재판하리라.’”
티르미디 하디스 (이슬람)
여러분 가운데에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로 이끄는 이단을 몰래 끌어들이고 자기들을 사신 주를 모른다고 하며 그들 자신 위에 멸망을 빨리 오게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방탕을 따를 것이며,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당할 것입니다. 또 그들은 탐욕을 품고 그럴듯한 말로 여러분을 팔아 이름을 남길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은 지체하지 않으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2.1-3(기독교)
마지막 때가 되면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에 마음을 빼앗길 것입니다. 그것은 양심에 화인을 맞은 거짓말쟁이들의 위선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4.1-2
하나님은 모든 예언자들에게 인간 혹은 정령으로 된 사탄을, 서로가 서로를 기만하여 거짓을 조성하게 하심이라.
꾸란 6.112 (이슬람)
악마 마라는 보디사트와에게 바른 길이 아닌 가짜를 상세하게 설명하려 한다.
대반야경 382(불교)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고린도후서 11.14(기독교)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3-4(기독교)
만약 허위가 진리와 분리되어 보여 질 수 있었다면 진리를 구하는 자는 쉽게 그것을 구별하여 허위를 멀리 할 수 있었으리라. 또한 진리가 허위와 뚜렷이 구분되어 나타났다면 사람들은 쉽게 종교를 비판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들은 진리를 허위와 혼동하기 시작했고, 사탄이 이런 상황을 이용해 추종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게 되었다. 단지 내면적이고 합리적인 명상의 길을 통한 하나님의 도움으로 고매해진 사람만이 그 함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다
나흐줄 발라가,설교 55(이슬람)
악마 마라는 거짓 스승의 모습으로 오리라. 와서 말하기를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것을 버려라! 방금 들은 것도 버려라,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라 방랑자의 노래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네게 가르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고 부처의 말씀이니라.”
만약 이 말을 듣고 어떤 보살이 몸을 떨며 정신이 아득해진다면, 그는 여래에 의해 점지된 자가 아니며 완전한 깨달음에 든 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를 통어하는 아라한과 비구는 자기가 굳게 믿는 자 이외의 그 누구도 따르지 않는다. 그는 법을 바로 그의 눈앞에 두었기 때문이다.
팔천송반야 17.2(불교)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아니, 여기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흘릴 것이다.
마태복음 24.23-24(기독교)
그들의 종교를 분리하여 분파를 이루고 각각의 무리가 그들의 교의에 즐거워하는 자가 되지 말지어다.
꾸란 30.32(이슬람)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그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갈라디아서 1.6-9(기독교)
이 세상에서 한 가지 일이 일어나나니 이 일은 많은 중생에게 불행을 가져오며 신들과 인간에게 슬픔과 고통을 가져온다. 이 한 가지 일이란 무엇인가? 승단의 분열이다. 승단이 분열할 때 비구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며 서로 매도하고 비장하며 배신하고 배척하게 된다.그로 인해 불화하는 사람들은 화합을 이루지 못하며 하나였던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일어난다.
이티붓타카 11(불교)
데바닷타는 몇몇 벗들을 선동하여 말하였다. “자 우리가 세존께 가서 이렇게 말하면서 다섯 가지 방책을 청하도록 하자.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욕망을 자제하여 자족할 줄 알며 사악을 물리치고 매사에 방일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이를 위해 다음의 다섯 가지 방책을 택하심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다섯 방책이란 이러합니다. 비구들은 일생 동안 반드시 숲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마을에 거하는 자는 죄악이 그를 더럽힐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탁발 걸식을 행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식사를 위한 초대를 받아들이는 자는 죄악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누더기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재가자가 보시하는 가사나 장삼을 받아 입는 자는 죄를 범할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나무 아래에 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지붕을 만들어 그 아래에 거하는 자는 죄를 범할 것입니다. 그들은 생선이나 육식을 금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생선이나 살코기를 먹는 자는 죄를 범할 것입니다.’ 필경 은둔자 고타마는 이 다섯 가지 방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압도하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데바닷타의 벗들이 대답하였다. “이들 다섯 방책으로써 은둔자 고타마의 집단에 분열을 조장하여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대를 존중하여 사람들이 내핍과 금욕 생활을 높이 평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데바닷타와 그의 벗들이 부처께 다가가서 이 다섯 방책에 대한 문제를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데바닷타야. 숲 속에 머물고자 하는 이는 숲 속에 머물게 하고, 마을 가까이에 머물고자 하는 이는 마을 가까이에 머물게 하고 탁발 걸식을 원하는 이는 탁발 걸식하게 하고, 초대에 응하고자 하는 이는 초대에 응하게 하고, 넝마를 걸치고자 하는 이는 넝마를 걸치게 하고, 재가자가 주는 가사 장삼을 받고자 하는 이는 가사 장삼을 받게 하고....”
데바닷타는 세존께서 이 다섯 방책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알고 기뻐하며 또한 의기양양하게 되었다. 그는 라자그하에 들어가 세존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셨던 다섯 방책을 그곳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이에 신실한 믿음이 없었던 자들은 데바닷타와 그의 친구들이 매우 계율에 철저한 줄로 여겼으며, 또한 세존께서 그들의 이와 같은 가르침을 허락하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믿음이 굳은자들은 데바닷타가 승단의 분역을 조장하고 있음을 알고는 이 사실을 세존께 알렸다. 이에 세존께서 데바닷타에게 말하였다.
“데바닷타야, 승단에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 승단의 분열은 실로 엄중히 다스려져야 함이 분명하다. 화목한 승단을 고의로 갈라놓는 자는 영겁으로 지옥 불에 던져지는 고통을 받으리라. 그러나 분열된 승단의 화합을 도모하는 자는 영겁으로 천계에서 다함없는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
비나야 피타카 2.192-198(불교)
말씀 선집
여러분이 나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원수가 나타납니다. 신앙적인 원수가 나타나고 경제적인 원수가 나타날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는 우리 통일교회 식구 식구끼리 서로 원구로서 나타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여러분이 까딱 잘못하는 그 순간을 노려 여러분을 가인의 길로 몰아낼 것입니다. 그러한 원수를 물리치고 가인의 입장에 사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여러분은 일신의 안일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야 되겠습니다.
(3.212,1957.11.01)
통일교회의 원리를 알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이해 혹을 붙이겠다는 것은 사기꾼이요, 도둑놈입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자기 복지를 만들겠다는 것은 도적놈이고 사기꾼입니다. 그 원리 말씀이 자기들 것이 아니라 하늘 것입니다. 선생님이 발표한 원리를 자기 것으로 이용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한 별의별 놀음의 집단을 만들어서 사는 요사스러운 패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사기꾼입니다. 그 몸뚱이는 에스겔 골짜기의 죽은 뼈다귀와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죽었습니다.
(346.57,2001.06.21)
타락인간은 하나님도 사탄도 모두 대할 수 있는 중간위치에 있기 때문에 선신의 역사인 경우에도 악신의 역사를 겸행하는 때가 있다. 또 악신의 역사도 어느 기간을 지나면 선신의 역사를 겸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원리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분별하기가 곤란하다. 오늘날에 있어 많은 교역자들이 이에 대한 무지에서 선신의 역사까지도 악신의 것으로 몰아 하늘 ‘뜻’ 에 상반되는 처지에 서게 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현상이 점점 많아지는 오늘날에 있어서 선신과악신의 역사를 잘 분간하여 분립할 수 없는 한 영통인들을 지도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원리강론, 타락론4.4)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되었던 인간이 복귀섭리에 의하여 소생 구약시대를 지나 장성 신약시대의 완성급까지 복귀되어 인간시조가 타락되기 전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시대를 말세라고 한다. 이 시대는 아담과 해와가 타락되기 직전,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그 때를 세계적으로 복귀하는 시대이므로 지상에는 영통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발세에 하나님의 영을 많이 부어 주시마고 약속하셨던 것(행 2:17)은 바로 이러한 원리적인 근거에 의하여서만 그 이유가 해명되는 것이다.
말세에는 ‘너는 주라’는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흔히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재림주인 줄로 알고 바른 길을 찾아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피조세계를 주관하는 주가 되라고 축복하셨다.(창 1:28),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이 복귀섭리에 의하여 장성기의 완성급 까지 영적으로 복귀되어서,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기 직전의 입장과 맞먹는 심령기중에 달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피조세계의 주가 되라고 축복하셨던 그 입장을 복귀했다는 뜻에서, ‘너는 주라’는 계시를 주시는 것이다.
말세에 들어서 이와 같이 ‘너는 주라’는 계시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신앙이 독실한 성도들은, 예수님 당시에 그의 앞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던 세례요한과 마찬가지의 자리에 서게 된다.(요 1:23).
따라서 그들에게도 각자가 맡은 바 그 사명분야에 있어서 재림하실 예수님의 앞길을 곧게 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각자의 사명분야에 있어 재림주님을 위한 시대적인 대신 사명자로 택함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주’라는 계시를 내려 주시는 것이다.
영통인들이 ‘너는 주라’는 계시를 받았을 때 이와 같은 원리적인 사정을 알지 못하여 자기가 재림주인 것으로 잘못 알고 행동하다가는 그는 반드시 적그리스도의 처지에 서게 된다. 말세에 적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리라고 예언하신 이유는 실상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통인들은 모두 제각기 통하고 있는 영계의 위치와 계시의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고전 15:41), 피차가 상충적인 혼란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영통인들은 사실상 모두 동일한 영계를 찾아 나아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대하고 있는 각자의 환경, 위치, 특성, 심령 정도 등 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에게 나타나는 영계도 각각 다른 모양으로 인식되어 상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복귀섭리의 뜻을 받들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각각 섭리의 부분적인 사명을 담당하고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만을 맺고 있기 때문에 다른 영통인들과의 횡적인 관계를 알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각자가 받고 나아가는 하늘의 뜻이 각각 다른 것같이 여겨져서 상충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각자로 하여금 복귀섭리의 목적을 달성케 함에 있어서 그들이 제만큼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격려하시기 위함에 있어서 ‘네가 제일이라’는 계시를 주시기 때문에 횡적인 상충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맡은 부분적인 사명 분야에 있어서는 사실상 그가 제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계시를 내리시기도 하는 것이다.
(원리강론, 부활론 2.2.6)
여러분은 천국이 뭔지 모르고 있지만 천국은 간단한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아버지고 모든 만민은 아들딸로서 큰 가정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교파도 없고 나라도 없고 민족도 없습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레버런 문은 교파타파입니다. 종파 타파입니다. 국가 타파입니다. 하나의 형제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344.47,2001.03.01)
하나님과 논쟁하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할 수 있다. 단순한 헌신과 맹목적 신앙만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요구할 때, 스스로 도전해 보았지만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잠시 멈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자신의 확구한 입장을 포기하지 않은 채 우리는 하나님께 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과연 더 나은 방식은 없는지에 대해 논쟁하기도 한다. 우리는 세계의 경전에서 하나님과 논쟁한 선지자나 성현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은 의심에 가득 찬 자, 무신론자, 혹은 신앙 없이 불평하는 자 등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참다운 정의심을 발휘하여 하나님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분으로 여긴다. 그들은 하나님 진리와 그의 현존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을 갈구한 불타는 정열의 소유자들이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논의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하나님이 좀 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다른 신을 섬겼을 때,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며 자기 민족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무함마드도 50개의 의무 기도 항목을 5개로 줄여 줄 것을 간청하기 위해 하나님과 논쟁을 펼쳤다. 고난은 죄에 대한 대가라고 배워 온 욥은 자신이 분명히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과 논쟁했다. 탈무드의 한 현인은 하나님께 인간 자유의지의 가치에 대해 명분을 밝혀 주시라고 주장했다.
이런 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과거의 성현들과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온전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확고한 신념과 정의감에 기초하여 하늘에 도전하였다. 유한적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하나님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고결한 양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서 정통 교리에 도전하면서 목숨을 걸고 논쟁을 펼쳤다.
종교 경전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아우성을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너무나 엄청난 죄를 짓고들 있다 내려가서 그 하는 짓들이 모두 나에게 들려오는 저 아우성과 정말 같은 것인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그 사람들은 걸음을 소돔 쪽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냥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물었다. “당신께서는 죄 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 죄 없는 사람 오십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죄 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창세기 19.20-25(기독교)
사십 일이 지난 다음 여호와께서 나에게 계약 조문을 새긴 돌판 두 개를 주셨다. 그러고는 이렇게 이르셨다. ‘일어나 여기에서 당장 내려가거라. 네가 이집트에서 구출한 네 백성이 저렇게 못된 짓을 하고 있구나. 내가 명령한 길을 저렇게도 쉽사리 버리고 우상을 부어 만들다니. .... 말리지 마라. 내가 저들을 멸하여 하늘 아래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게 하리라. 그리고 저들보다 강하고 많은 민족을 너에게서 일으키리라.’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없애버리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 앞에 사십 일간 밤낮으로 엎드려 있으면서 이렇게 빌었다. ‘나의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크신 힘으로 이 백성을 건져내시고 주의 것으로 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하오니 이 백성을 멸망시키지 마소서. 주께서는 이 백성을 강한 손으로 구출해 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의 종이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해서라도 이 백성이 고집이 세고 바탕이 나빠서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습니다마는 부디 못 보신 체 해 주소서.’
자칫하면 주께서 구출해 내시기 전에 우리가 살던 땅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약속해 놓고 약속한 땅에 저들을 데려가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여호와도 무능하구나, 또는 데려다가 광야에서 죽여 버리는 것을 보니 퍽이나 미웠던가 보군’ 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주의 백성이 아닙니까? 주께서 당신의 것이라고 하여 몸소 팔을 뻗으시고 크신 힘으로 구출하신 백성이 아닙니까?
신명기 9.11-29(기독교)
사도님이 말씀하였다. “천사가 나를 (하늘로)들어 올렸을 때 하나님은 나의 백성들을 위해 하루 50차례의 예배를 규정하셨다. 이 규정을 가지고 돌아올 때, 모세 곁을 지나가게 되어 그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 백성을 위해 하나님은 얼마나 규정하셨나요? ‘50차례의 예배를 규정하셨어요’ 라고 내가 대답하자, 모세는 ‘주님께 다시 돌아가시오. 당신 백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하나님 앞으로 가니 그분이 그 횟수를 반으로 줄여 주셨다. 그런 후 모세 옆을 지날 때 그에게 ‘횟수가 반으로 줄었소’ 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자 그는 ‘주님께 다시 가시오. 당신 백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다시 하나님 앞으로 가자 그분은 그 횟수를 또 반으로 줄여 주셨다. 모세에게 돌아와서 새로 줄여주신 횟수를 알려주자, ‘주님께 도로 가시오. 당신 백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라고 되풀이하였다. 내가 다시 하나님 면전에 나타나자 그 분이 나에게 말하셨다. ‘그렇다면 5차례의 예배가 되도록 하라. 그러나 내 눈에는 50차례의 가치가 있으니, 내 앞에서 규정되어진 것이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되니라.’ 내가 모세에게 왔을 때 그는 다시 주님께 가라고 했지만, ‘주님 앞에 가기를 내가 부끄러워 하노라’ 라고 대답했다.
부카리 하디스(이슬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정복할 때 나는 잃었고, 내가 정복당하였을 때 나는 얻었다. (노아때에) 홍수로 그 세대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내가 지은 세상을 멸망시켰는데 잃은 것이 없겠느냐? 그와 마찬가지로 바벨탑 세대들에게 대해서도 똑같다. 소돔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똑같다. 그러나 금송아지를 만든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던 모세가 나를 이겼다. 그리고 나는 얻은 것이 있으니 내가 이스라엘을 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페시크라 랍바티 32b-33a(유대교)
나는 이를 악물고 목숨을 내걸고 맞서리라. 어차피 그의 손에 죽을 몸, 아무 바랄 것도 없지만 나의 걸어온 발자취를 그의 앞에 낱낱이 밝히리라.
이렇게 그의 앞에 나설 수 있음이 곧 나의 구원 일는지도 모르는 일, 위선자는 감히 그의 앞에 설 수도 없다네. 그러니 나의 말을 신중히 들어주세. 내가 진술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나 이제 재판받을 마음 준비가 다 되어 있네. 무죄로 풀려날 줄도 알고 있네. 그러나 만일 그 누가 나타나 나의 죄를 입증한다면 나는 말없이 사라져 버릴 것일세.
하나님, 두 가지 부탁만 들어주소서. 그리하시면 나도 당신 앞에서 숨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주먹을 거두어 주소서.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어 두려워 떨지 않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어서 말씀하소서. 서슴없이 답변하겠습니다. 아니면 내가 말씀 드리겠사오니 대답하여 주소서.
나에게 죄악이 있다면 얼마나 있다는 말씀입니까? 반역죄가 있다면 어찌하여 알려주시지 아니하십니까? 어찌하여 나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이 몸을 원수로 여기십니까?
욥기 13.14-24(기독교)
랍비 엘리에젤이 성결의식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주기 위해 세상에 있는 모든 주장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그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엘리에젤이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나의 주장이 법에 합당하다면 이 구주 콩 나무가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자 구주 콩 나무가 정원에서 삼백 규빗이나 뛰어올랐다. 현자들이 응답하였다. “강물로부터는 아무런 증거도 얻어낼 수 없다네.” 엘리에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나의 주장이 법에 합당하다면 이 강물이 증거 할 것이다.”
그러자 강물이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현자들이 응답하였다. “학원의 벽으로부터는 아무런 증거도 얻어낼 수 없다네.”
다시 엘리에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나의 주장이 법에 합당하다면 이 학원의 벽이 증거할 것이다.” 그러자 벽이 흔들리고 무너질 것 같았다. 랍비 여호수아가 벌떡 뛰면서 벽을 꾸짓었다. “현자의 제자들이 법에 대한 논쟁을 하는데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냐?” 랍비 여호수아에 경의를 표해 벽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랍비 엘리에젤에 경의를 표해 현자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늘까지 논쟁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다시 랍비 엘리에젤이 현자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나의 주장이 법에 합당하다면 하늘이 증명해 줄 것이다.” 거룩한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왔다. “왜 너희는 랍비 엘리에젤과 논쟁을 벌이느냐. 엘리에젤이 주장하는 모든 내용은 다 법에 합당하느니라.” 그러나 랍비 여호수아가 다시금 일어나서 “이 목소리는 하늘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야”라고 외쳤다.
신명기 30.12(기독교)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랍비 나단이 엘리야 예언자를 만나서 그에게 물었다. “거룩하신 분께서, 그분께 축복이 있으시기를, 랍비 여호수아의 비난을 들었을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껄껄 웃으시며, ‘나의 철부지 어린이들이 나를 이기더군. 나의 철부지 어린이들이 나를 이기더군’” 하고 말씀하셨다네.
탈무드,바바 메치아 59a-b(유대교)
말씀 선집
이스라엘민족이 모세를 불신함으로써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받들지 못했던 것과 같은 두려운 일이 끝 날의 성도들에게도 벌어질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자신이 하나 되지 못하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때 모세는 불신하는 민족을 책망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부족을 하늘 앞에 호소했습니다. 즉 그는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금식기도하면서 ‘아버지여, 이 민족이 어찌하여 허락하신 땅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책임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를 제물삼아 민족의 멸망의 길을 막아 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1.144,1956.07.01)
만일 한 달 동안 매일 열 시간씩 열심히 일했는데도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했을 때는 열다섯 시간 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배가 되는 곱 시간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네 시간을 더해서 스물 네 시간을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거들랑 ‘하나님 도와주어야 되겠습니다.’ 라고 하나님하고 뿔대질(양이나 염소들이 뿔로 들이 받는 모양)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뜻인 동시에 당신의 뜻이 아니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잖소?’ 하면서 심각하게 하나님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올라가면 하나님도 올라가고, 여러분이 내려가면 하나님도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54.325,1972.03.31)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온 걸음이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여, 저를 배반하시옵소서’ 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탕감복귀 하는 것입니다. ‘저를 모른다 하시옵소서. 최후의 수난의 때까지 당신이 저를 몰라본다 하더라도 저는 효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이 길은 응당 제가 가야 할 길입니다.‘ 라고 하는 결의로 나서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 안 도와주더라도 그의 후손은 영원히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31.49,1970.04.12)
중세는 봉건제도와 로만 카톨릭의 세속적인 타락으로부터 오는 사회 환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억압되어 그 자유로운 발전을 기할 수 없게 된 때였다. 원래 신앙은 각자가 하나님을 찾아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직접적으로 맺어지는 종적인 관계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과 승려들의 간섭과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그 규범은 당시 인간들의 신앙생활의 자유를 구속하였고 그 엄격한 봉건계급제도는 인간의 자주적인 신앙 활동을 속박하였던 것이다.
창조원리에 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을 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완수함으로써만 완성되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또 인간은 자유의지로써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개성을 완성함으로써 인격의 절대적인 자주성을 갖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 인격의 자주성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중세사회에 있어서의 교황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교황과 승려의 세속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없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중세인들이 인본주의를 부르짖게 됨에 따라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규범에 반항하게 되었고, 인간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봉건계습제도와 교황권에 대항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또 인간의 이성과 이지를 무시하고 무엇이든지 교황에 예속시키는 데서만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고루한 신앙생활에 반발하게 되었으며 자연과 현실과 과학을 무시하는 둔세적(遁世的), 타계적(他界的), 금욕적(禁慾的)인 신앙태도를 배격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마침내 중세 기독교인들은 교황정치에 반항하게 되었다.
(원리강론, 메시아 재강림 준비 시대 1.2)
기도로써 신령한 것을 감득할 수 있는 성도들은 새 시대의 섭리를 심령적으로 알게 되므로 낡은 시대의 진리 면에서는 상충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신령을 따라 새 시대의 섭리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는 구약성서에 집착된 인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마음에 느껴지는 신령을 따라간 사람들뿐이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말세에 있어서 극심한 심령적인 초조감을 면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막연하나마 신령을 감득하여서 마음으로는 새 시대의 섭리를 따르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에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2)
시험
어느누구나 신앙생활을 할 때 시험을 받는다. 경전 기록에도 나타나듯이 위대한 신앙인들은 여러 차원의 혹독한 시험을 체험하였다. 아브라함은 10회 이상의 신앙 시험을 통과했다. 사탄은 가족과 재산을 잃을 것을 구실로 욥을 시험했다. 메카의 우상 숭배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할 때, 무함마드 역시 여러 가지 극심한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중대한 시험을 받으셨고, 십자가의 길로 가는 도중에도 한 차례 큰 시험을 받았다. 힌두교와 불교의 유명한 성인들 역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험을 받았지만 그들은 절대적 신앙으로 그것을 극복했다. 어느 누구든 시험을 극복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그의 인격과 정신은 성숙되고 견고해진다. 그리고 시험이 있기 전 후에는 언제나 영광이 따르기 마련이며, 시험을 통해서 영광을 받고 유지할 만한 자격이 조건 지어진다.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과 사탄의 거래에 대한 욥의 성구를 자주 인용하면서 신앙인들이 시험을 극복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신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천도에서 일탈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주권을 전수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사탄으로 하여금 일정한 섭리적인 인물에게 시험할 기회를 허락하실 수밖에 없었다. 사탄은 언제나 인간이 자신에 속한 자들임을 표시하며, 조금이라도 이기심 발휘의 징후가 있는지를 무섭게 탐색한다. 따라서 가장 진실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자만이 이 시험을 극복할 수 있다.
때로는 초현실적 상황을 대처해야 할 시련도 적지 않다. 모세와 키드르의 유명한 꾸란의 경구, ‘푸른 인간’은 그런 시험을 대표한다. 모세는 상식을 초월한 사건을 믿어야 했지만 결국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리고 힌두교의 라마야나에서 라마의 부인, 시타는 그녀의 정절을 명징하기 위해 불구덩이 장작에 뛰어드는 시험도 등장하며, 불교경전에서 한 구도자는 낭떠러지 절벽에 몸을 던져 죽음을 극복하는 시험도 등장한다. 결국, 그들 두 사람은 신체적 어떤 상처도 없이 그 시험을 무난히 통과했다. 그리고 아들의 제물헌제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는가? 마지막으로 여기서는 문선명 선생의 생애에서 나타난 몇 가지 시험들도 설명되고 있다.
1. 신앙인에 대한 사탄의 시험
종교 경전
하루는 하늘의 영들이 여호와 앞에 모여왔다. 사탄이 그들 가운데 끼여 있는 것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 사탄이 대답하였다. “땅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그래,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는 없다” 하고 말씀하시자, 사탄이 여호와께 아뢰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신께서 친히 그와 그의 집과 그의 소유를 울타리로 감싸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셨고 그의 가축을 땅 위에 번성하게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보십시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의 소유를 모두 네 손에 부친다. 그러나 그의 몸만을 손을 대지 마라.” 이에 사탄은 여호와 앞에서 물러 나왔다.
하루는 욥의 아들과 딸들이 맏형의 집에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한 심부름꾼이 욥에게 뛰어와서 고하였다.··· “주인님의 자녀분들이 맏 형님의 집에 모여서 먹고 마시는데 광야에서 모진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퉁이를 쳐서 무너뜨렸습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깔려 죽었고 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제야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러고는 땅에 엎드려 입을 열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여호와께서 주셨던 것, 여호와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 죄를 짓지 않았고 하나님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또다시 하늘의 영들이 여호와 앞에 모이는 날이 왔다. 사탄이 그들 가운데 끼여 있는 것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 사탄이 대답하였다. “당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는 없다. 그는 여전하지 않으냐?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다 헛일이었다.” 그러자 사탄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가죽을 가죽을 바꿉니다. 사람이란 제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법입니다.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뼈와 살을 쳐보십시오. 제가 보장합니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를 네 손에 부친다. 그러나 그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마라.” 사탄은 여호와 앞에서 물러나오는 길로 곧 욥을 쳐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심한 부스럼이 나게 하였다.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토기 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도 요지부동이군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그러나 욥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욥기 1.6-2.10 (기독교)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마태복음 4.1-4 (기독교)
한때 히말라야에 진리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세상의 어떤 값진 보배에도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는 천계의 복락에 대한 애착도 없었으며, 그는 다만 마음의 모든 미혹들을 없앨 수 있는 가르침을 구하였다. 그러자 천계의 신들이 그의 열망과 신실함에 감동하였으며, 그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신들 중의 하나가 악마로 몸을 바꾸어 노래하며 히말라야에 나타났다. 모든 것은 무상하네, 모든 것은 나타났다가 스러지네.
진리를 찾아 나선 그가 이 노래를 들었는데, 얼마나 즐거운지 마치 갈증난 그가 시원한 샘을 발견한 것 같았으며, 또한 노예가 전혀 예기치 않게 풀려난 기분이었다. 그가 생각했다. “드디어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매었던 참된 가르침을 구했다.” 그는 그 목소리를 따라갔으며, 마침내 무시무시한 악마에게 이르렀다. 불안한 마음으로 그 악마에게 다가가서 그가 말했다. “내가 금방 들었던 그 거룩한 노래를 불렀던 것이 당신입니까? 만약에 그게 당신이라면, 부디 나머지 부분을 좀 더 불러보시오.” 악마가 대답했다. “그렇소, 그 노래는 내가 불렀소. 그러나 나는 먹을 것이 생기기 전까지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가 없소. 나는 무척 굶주렸소.”
그 사람은 악마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그 노래는 나에게 거룩한 의미를 지닙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 가르침을 찾아다녔소. 그런데 나는 단지 그 일부만 들었소. 부디 좀 더 들을 수 있게 해주시오.” 악마가 다시 말했다. “나는 무척 굶주렸소. 만일 사람의 따뜻한 피와 살을 먹을 수 있다면, 그 노래를 끝까지 부를 것이오.” 그 가르침을 들은 후에 자기의 몸을 줄 수 있다고 악마에게 약속했다. 그러자 악마가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불렀다.
모든 것은 무상하네, 모든 것은 나타났다가 스러지네. 생사를 넘어설 때 완전하 적정이 있네.
이 노래를 들은 후, 그는 주위에 있는 바위와 나무에 그 가사를 새긴 후에 조용히 한 나무 위로 올라가 악마 앞에 자기 몸을 던졌다. 그러나 악마는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에 광휘에 둘러싸인 한 신이 그 사람의 몸을 받았다.
대반열반경 424-433 (불교)
미래의 붓다가 최상의 지혜를 얻고자 보리수 아래에 앉았을 때 온 세계는 기뻐하였으나 선법의 적 악마는 공포를 느꼈다. 욕계천의 신인 까마는 애욕을 지배하면서 꽃화살을 가졌으니 해탈의 적인 악마라고 불린다. 그의 세 아들인 혼동, 유괘, 자만과 그의 세 딸인 애욕, 즐거움, 갈망이 고민하는 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까마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이 성자는 결연한 갑옷을 입고, 용맹의 활과 지혜의 화살을 가지고 내 나라를 정복하려 하니 내가 걱정하노라. 만일 나를 정복하여 해탈을 설하면 나의 영토는 공허로 화할 것이니다.”
그리하여 꽃화살을 손에 잡고 세상을 미혹할 다섯 개의 화살을 들고 보리수 아래로 다가갔다. 왼손을 화살 끝에 대고 화살을 만지면서, 윤회의 저편으로 건너려고 앉아 있는 성장에게 악마는 말했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끄사뜨리아여! 해탈의 길을 버리고 (끄샤뜨리아로서) 그대 자신의 의무를 행하라. 무력으로써 낮은 세계들을 정복하고 또한 높은 세계들을 얻도록 하라! 이것은 이전의 왕들이 행한 길이니, 이 길을 따르는 것은 명예로운 길이다. 왕족으로 태어난 자의 걸식은 비난받아 마땅하리라.”
그러나 그와 같이 말했을 때도 석가족의 성자는 까마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그러자 까마는 그를 향해 꽃화살을 쏘았으며, 또한 그의 세 아들인 혼동, 유괘, 자만과 그의 세 딸인 애욕, 즐거움, 갈망을 그 앞에 두었다. 여전히 그 성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굳건함을 잃지 않았다. 그와 같은 그를 바라본 악마는 놀라며 근심스레 중얼거렸다.
“그는 심지어 이 꽃화살을 맞았는데 꿈쩍도 않는다.··· 그는 이미 모든 느낌에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일까? 나의 꽃화살도 소용없고, 향락의 화살도 소용없으며, 그를 유혹하기 위해 보낸 내 딸 라띠도 무용지물이다. 마군의 힘으로 해치워야겠다.”
그리하여 악마는 마군을 모아 창과 몽둥이와 칼과 곤봉을 들고 둘러쌌다. 그들은 멧돼지, 물고기, 말, 당나귀, 낙타, 호랑이, 곰, 사자, 등 온갖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외눈에 입이 여럿이고 머리가 셋인 자도 있었는데, 그는 곤봉을 치켜들고 성자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어떤자는 그 위에 산더미같이 불타는 짚을 던져 올렸다. 이와 같이 그의 몸과 마음에 온갖 공격이 가해지고, 무기가 소나기처럼 그에게 쏟아져 내렸지만, 석가족의 성자는 조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으며 굳은 결심에는 어떤 미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공중에 있는 거룩한 어떤 것이 분노하는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악마여, 무의미한 짓을 그만두어라. 악한 마음을 버리고 너의 거처로 돌아가라. 이 성자는 움직일 수 없느니라.”
아슈바고샤, 붓다차리타 13 (불교)
말씀 선집
여러분이 나아가는 노정에 있어서 사탄의 시험이 많을 것입니다. 영계를 통하는 사람은 많은 시험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탄이 자신의 시험에 인간이 쓰러지면 ‘너희는 이래 가지고 되겠느냐’ 하고 참소하면서 여러분의 갈 길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3.210, 1957.11.01)
시험은 반드시 패스해야 합니다. 그걸 왜 패스해야 합니까? 그럼으로 말미암아 한 단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밤과 낮이 교차되는 것입니다. 밤의 시대에서 낮의 시대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갈 수 있는 겁니다.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5.250-251, 1983.03.27)
성경에는 또한 사람 제물의 노정을 걸어간 욥의 일생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수 있는 축복권내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축복과 자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어떻게 욥이 축복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께 항의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할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사탄은 먼저 그의 축복받은 모든 물질을 쳤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쳤습니다. 그 다음에는 욥의 육신까지 쳤습니다. 그러자 욥의 모든 친구와 이웃 사람들이 욥을 비웃고 조롱했으며 사랑하는 부인까지 욥을 비난했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이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물질과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버린 욥의 입장, 또 친구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부인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그 입장을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자기 몸을 기왓장으로 긁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욥이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명상할 수 있었고, 그 괴로움을 넘어 하나님 편에서 병자의 심정을 체휼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욥이었기 때문에 그는 잃어버린 만물과 자녀를 다시 얻을 수 있었고, 하늘로부터 더 큰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2.114-115, 1957.03.10)
사탄도 본래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탄 자신도 자기가 가야 할 본연의 길, 이 우주가 하나 될 수 있는 본연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탄이 되었는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참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참사랑 대신 자기를 위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사랑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건 내 사람이 아니라, 당신 것이다’ 하며 하나님게 돌려줍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사탄도 안다는 것입니다.
참사랑이라는 것은 개인과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주와 통하려면 세계를 넘어가야 합니다. 가정을 넘고 국가를 넘고 세계를 넘어가야 됩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참사랑을 가진 참사람이라는 것은 이걸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당신의 사람을 이 땅 위에 보냈을 때, 사탄세계에 보냈을 때 당신 나라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핍박하는 모든 기준을 넘고 넘어 세계의 국경까지 넘어서 하늘까지 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되오.’ 합니다.
사탄이 하나님한테 ‘그래야 될 거 아니요’ 하면 하나님은 ‘그렇다!’ 하고 대답합니다. ‘위하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전체를 위해서 가는 사람은 당신 나라에 속하는 것이지만, 자기를 위하든가 이 권내의 무엇을 중심삼고 위하는 것은 내가 관계할 채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124.64-65, 1983.01.23)
사탄도 원자재를 테스트 물건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원자재가 되었느냐 안 됐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을 반대하게 되면 사탄이 ‘하나님, 이것은 컨셉이 있으니 원자재로 못 돌아 갑니다. 나에게 보내서 지옥으로 쳐 넣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공식을 알기 때문에 욥 같은 사람은 열 번씩이나 시험을 하더라도 감사하고,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니, 나는 아무 것도 없다’ 고 하며 언제나 영점을 취했던 욥이 몇 백 배, 몇 천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시대의 승리적인 상징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욥을 열 번씩 들이 패도 ‘감사합니다.’ 하며 영의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사탄이 떨어져 가지고 재부흥,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 되었던 것입니다.
(246.20-21, 1993.03.23)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사탄으로부터 몇 가지의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40일 금식기간에 먼저 먹을 것으로 시험받았습니다. 사탄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굶주린 인간들에게는 희소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부정하고 자신이 먹을 것 때문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살아가는 실제 생활권내에 있어서의 모든 조건을 사탄 앞에 잃지 않았다는 입장을 세웠던 것입니다.
(3.121, 1957.10.13)
선생님은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일생 동안 핍박을 받아 가면서 전부 세웠습니다. 사탄이 있는 총력을 기울여서 반대했고,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반대하던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별의별 반대를 다했습니다. 사탄이 ‘욥이 축복을 해주니 하늘 앞에 충성을 하지, 치기만 해보소, 그러면 하늘을 저주하지요’ 라고 한 것처럼 선생님도 몇 번씩 사탄에게 당했습니다. 얼마나 사지로 몰아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앞에서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게끔 핍박받으면 하나님이 협조 안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극복해 넘으면 뒤에서 다 협조해 주는 것입니다. 다 준비를 해 놓고 하나님이 떠나는 것입니다. 준비를 해 놓고 하나님이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선두에 서 가지고 싸워 이기면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런 작전을 해온 것입니다. 다해 놨으니 하나님이 떠나야 됩니다. 내가 나가서 사탄세계의 반대하는 것을 다 물리치면 다음에 떠나는 것입니다.
(117,160-161, 1982.02.28)
레버런 분이 아무리 어떻고 뭐 하나님이 사랑하지마는 인간 책임 분담하는 과정에 탕감노정을 가는 데는 하나님이 협조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이 사탄을 이기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과 사탄세계를 이기고 나가야 할 것이 본래의 아담에게 허락된 이상권이었는데, 그 이상권을 내가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탕감하게 하려면 내보내야 됩니다. 도리어 옷을 벗기고 전부 다 내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밥도 안 먹이고 내쫓아야 됩니다. 그래 놓으면 사탄이 갖다 입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입혀 주게 되면 거 멋지다는 것입니다. 절대 못 빼앗아 갑니다. 사탄편 사람이 옷을 입혀 준다는 것입니다. 사탄과 사탄 편 사람이 옷을 입혀 놓으면 벗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으면 하나님도 안 벗기지만 사탄도 못 벗깁니다. 그 싸움입니다. 그래서 고생하고 핍박받으면 사탄세계가 나에게 옷 입혀줍니다. 옷 벗고 그저 매를 맞으면 옷 입혀주는 사탄편이 생겨납니다. 이런 싸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편이 생겨나게 됩니미국에서 레버런 문을 반대하다 보니 미국에 뜻있는 사람들이 레버런 문편이 많이 됐습니다. ‘레버런 문을 왜 이렇게 반대해, 아무 죄도 없는데! 미국에 필요한 사람인데! 이놈의 자식들 안 되겠다!’ 하고 자꾸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편이 되면 사탄이 끌어갈 수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 편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 편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강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참소할 도리가 없습니다.
(124.304-305, 1983.03.01)
내가 레버런 문의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겠다. 이러면서 테스트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 흥진이가 간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 인류를 더 사랑하느냐, 네 아들을 더 사랑하느냐?’ 이걸 테스트하는 겁니다. 그 사탄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거느리는 나라, 혹은 반대하는 미국, 반대하는 소련까지도 해방하려고 합니다. 흥진이가 갔다 하더라도 그를 통해서 영계를 동원해 지상을 동원할 수 있는 천적인 승리의 기반이 닦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치라고 해도 안 치고 후퇴할 때가 옵니다.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제물을 통해서 하늘을 영광스럽게 하고, 인류를 영광스럽게 하고, 사탄세계의 모든 것까지도 바꿔치는 조건을 찾아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새로운 전환시대가 오게 됩니다. 사랑이 모든 사망을 지배할 수 있는 시대로 바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때라는 것입니다.
사탄 자신도 ‘당신은 과연 하늘의 사람이요’ 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죽은 자리에 내세우고도 눈물을 안 흘리고 공의의 자리에서 자랑스럽게 가는 것을 볼 때 사탄마저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망권이 하늘의 생명을 쳤지만 사랑의 힘을 가지고 다 커버해 넘어갑니다. 흥진이는 갔지만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랑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130.162-163, 1984.01.08)
사탄이 아무리 시험하고 달려들어도 자기를 희생시키고 나가면 문제없다. 자기를 변명하고 나설 때에는 사탄이 온다.
(뜻길, p.319)
2. 시련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음을 입증하는 것
종교 경전
우리(하나님)는 너희 중에서 분투하는 자들과 인내하는 자들을 우리(하나님)가 알 때까지 너희를 시험할 것이니라. 그리고 너희들의 소식도 시험할 것이니라.
꾸란 47.31 (이슬람)
여호와여, 샅샅이 캐어보고 알아보소서. 속속들이 내 마음 뒤집어보소서.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쳐다보면서 당신의 진리 따라 살았습니다.
시편 26.2-3 (기독교)
우리(하나님)는 두려움과 배고픔, 그리고 재산과 생명, 수확을 줄임으로써 너희를 시험할 것이니라. 인내하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으리라.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으며, 우리는 그분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 그런 사람에게 주님의 축복과 자비가 있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이 인도되는 자들이니라.
꾸란 2.155-157 (이슬람)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 (기독교)
모든 생명은 죽음을 맛본다. 우리(하나님)는 악과 선을 시련으로 주어 너희를 시험할 것이며 너희는 우리(하나님)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꾸란 21.35 (이슬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열 번의 시험을 치렀다. 그 모두를 인내했다는 것은 그의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슈나, 아보스 5.4 (유대교)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창세기 22.1-2 (기독교)
그들을 데리고 개울을 건넌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그리고 야곱은 혼자 뒤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타나 동이 트기까지 그와 씨름을 했다.
그분은 야곱을 이겨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환도 뼈를 다치게 되었다. 그분은 동이 밝아오니 이제 그만 놓으라고 했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 없다고 떼를 썼다.
일이 이쯤 되자 그분은 야곱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겨루어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이 말을 듣고 야곱이 말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분은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하고는 야곱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창세기 32.24-30 (기독교)
라바나가 죽은 후에 라마가 시따를 데리러 사람을 보냈다. 수개월 동안 외로움과 고통을 겪은 후에 시따가 간절한 마음으로 도착했을 때, 그녀의 남편은 운집한 군중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녀는 왜 자신의 바깥주인이 언짢고 냉정하게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라마가 불쑥 말했다. “나의 일은 끝났다. 이제 나는 당신을 구했다. 나는 내 임무를 완수했다. 이 모든 노력은 당신이나 나에게 개인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것은 익슈바꾸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이며, 우리 조상들의 규약과 가치를 명예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났으므로 나는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낯선 사람의 집에 완전히 혼자 머물렀던 여자를 정상적인 가정생활에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관습에 어긋난다. 우리의 재결합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살 곳을 찾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나는 어떤 형태로도 당신을 속박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후 시따는 주저앉았다. “나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고 그녀가 울부짖었다. “나는 당신의 승리로 우리의 고난이 끝났다고 여겼는데···! 그래야 한다.”
그녀는 락슈마나를 손짓으로 불러서 명했다. “지금 당장 바로 이 자리에 불을 피워라.” 락슈마나는 주저하며 자기 형이 그녀의 명을 철회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묵인하는 것 같았다. 락슈마나는 장작을 모아 불을 지피자 금방 훨훨 타올랐다. 불길이 점점 더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동안, 모든 군중이 지켜보며 몸이 굳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라마는 단지 지켜볼 뿐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따가 불로 다가와 그 앞에 쓰러지듯 엎드리며 말했다. “오 아그니여, 위대한 불의 신이여, 나의 증인이 되소서.” 그녀는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불꽃의 한복판에서 불의 신이 시따를 안고 일어나서, 축복의 말과 함께 그녀를 라마에게 주었다. 이제 온 세상 앞에 자기 아내의 순결을 입증한 라마는 아내를 포옹하며 환영했다.
라마야나 윳다 칸다 118-120 (힌두교)
말씀 선집
뜻을 알고 만 3년을 넘길 때에는 큰 시험이 따른다. 마치 3년간 주를 따르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던 것과 같다. 그러한 입장을 각자가 탕감복귀해야 할 순간이다.
(뜻길, p.321)
일 년은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봄절기와 같은 은혜를 받는 기간이 있고, 여름절기와 같은 은혜가 자라는 기간이 있고, 가을절기와 같이 은혜의 열매를 맺는 기간을 거쳐 겨울과 같은 시험이 닥쳐온다. 시험을 감사히 여겨라. 시험은 사탄과 우리를 분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시험은 겨울절기에 해당되는 것이니 참고 넘으면 봄과 같은 새로운 은혜를 받게 된다.
(뜻길, p.322)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사를 내리시려 할 때는 그 은사를 전후하여 사탄의 참소를 막기 위한 시험을 반드시 하시는 것이다. 모세노정에서 예를 들어보면, 모세에게는 바로궁중 40년의 시련을 거치 후에야 제1차 출애급의 은사가 허락되었던 것이고, 또 미디얀 광야 40년의 시련이 있은 후에야 하나님은 제2차 출애급의 은사를 내리셨던 것이다(출 4:2-9).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는 시험이 있은 후에야(출 4:25) 3대 기적과 10재앙의 이적을 내려 주셨고(출 7:10-), 3일 노정의 시련이 있은 후에야(출 10:22)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은사가 있었다(출 13:21). 한편 홍해의 시련을 지난 후에야(출 14:22) 만나와 메추리의 은사(출 16:13)가 있었고, 아말렉과의 싸움으로 인한 시련(출 17:10)이 있은 후에야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은사(출 31:18)가 있었다.
(원리강론,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 2.3)
인간은 원래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었는데, 천사장으로부터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함으로써 타락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란에서 처자와 재물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여 가정적으로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탄과 생명을 걸고 싸우는 시련에서 승리해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것은(창 32:25-28) 바로 이러한 시련을 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천사를 사탄의 입장에 세워서 야곱을 시험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을 불행하게 하시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천사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하는 시련을 넘게 함으로써 아벨의 입장을 확립케 하여 가정 복귀 완성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천사가 이러한 시련의 주체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천사세계도 하늘편으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원리강론, 모세와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1.2)
야곱이 환향할 때 천사를 야곱에게 보내어 최후의 결정을 지어야 하는, 야곱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어야 했던 하나님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천사가 환도 뼈를 치고 다리를 꺾어 버려도 야곱은 놓지 않았습니다. 네가 죽고 내가 죽고 둘다 죽는다 해도 못 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했을 것 같습니까? 7시간 이상 했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야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은 ‘천사가 지금 사탄을 대표해서 싸우고 있으니 굴복하지 마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으니, 얼마나 초조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채웠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지나서 최후의 결단을 짓게 되었을 때에 천사가 아무리 뿌리쳐도 놓지 않으니 거기에서 하나님도 공인하고 사탄도 공인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런 입장에서 서 가지고서야 천사가 공인해서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천사 앞에 승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을 때 천상 세계에서는 어찌 했느냐? 졸였던 마음을 풀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마음 가운데 쌓였던 슬픔의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 하고 부르는 그 음성 속에는 2천 년간 쌓인 사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위해 20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목을 끌어안을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이,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 인연을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20.229-230, 1968.06.09)
하나님까지도 레버런 문을 들이쳤습니다. ‘이 자식아! 너는 이단자이지! 나는 너를 몰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암만 선생님에게 별스럽게 해도 나는 하나님의 꽁무니를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꽁무니가 뭔지 압니까? 당신이 암만 그래야 나를 꺾지 못하오. 선생님은 하나님과 40일간 싸움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반대하시니 하나님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반대하고, 공자가 반대하고, 석가가 반대하고, 무함마드가 반대하고, 전부가 하나되어 영계 전체가 반대했습니다. 40일 동안을 싸우면서 양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4백 년이 지나가도 양보 안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보니 사태가 틀렸거든요. 그러니 결재 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0일 동안에 결재를 안 하면 안 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선생님을 따라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레버런 문은 하늘과 땅에 있어서 최고의 승리자’라고 선포했습니다.
(161.41-42, 1987.01.01)
3. 시련으로 인격을 연마하고 굳건한 신앙을 세움
종교 경전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는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여호와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이 떨어진 일이 없었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자기 자식을 잘되라고 고생시키듯이 그렇게 너희를 잘되라고 고생시키신 것이니 이를 마음에 새겨두어라.
신명기 8.2-5 (기독교)
맹자가 말하였다. “순(舜)은 밭두렁 가운데서 발탁되었고, 부열(傅說)은 공사장에서 뽑히었으며, 교격(膠鬲)은 소금을 파는 가운데에서 등용되었고, 관중(管仲)은 옥에 갇혔다가 등용되었고, 손숙오(孫叔傲)는 바닷가에서 등용되었고, 백리해(百里奚)는 저자거리에서 등용되었다.”
맹자 VI. B.15 (유교)
내가 받은 여러 가지 엄청난 계시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두고 이것이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7-10 (기독교)
인생은 언덕과 같다.
창조자 마우는 그것을
가파르고 미끄럽게 만들었다.
그것 좌우로 깊은 물이 있어
한번 오르기 시작하면 뒤돌아갈 수 없다.
너는 네 머리에 짐을 지고 올라야 한다.
사람들은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험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시험의 장이다.
풍족의 노래 (아프리카 전통 종교)
그들은 우리(하나님)의 종 한 사람을 발견하였노라. 그에게 우리(하나님)는 자비를 베풀었음며 지식을 가르쳐 주었느니라. 모세가 그에게 말하길, 내가 그대를 따르겠으니 당신이 배운 바른 지식을 나에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가 말하길, 그대는 나와 함께 인내할 수 없을 것이니라. 너의 경험을 넘어서는 일에 대해 네가 어떻게 인내할 수 있겠느냐? 그(모세)가 말하길,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내가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에서든지 당신에게 불복종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말하길, 만일 네가 나를 따르겠다면 어떤 것도 나에게 질문하지 말거라. 내가 너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기 전까지는. 그리하여 그 둘은 출발하여 얼마 후 배를 타자 그가 배에 구멍을 뚫었노라. (모세가) 말하길, 당신은 이 안에 탄 사람들을 빠트리게 하려고 구멍을 뚫었소? 실로 그대는 나쁜 일을 하였소!
그가 말하길, 그대는 나와 함께 인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그(모세)가 말하길, 내가 잊은 것을 꾸짖지 마시고 잘못된 나의 행동으로 인해 나를 심하게 대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그 둘은 출발하여 얼마 후 한 소년을 만났고 그가 그 소년을 죽였노라. 그(모세)가 말하길, 당신은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아니한 무고한 생명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실로 그대는 끔찍한 일을 범하였소!
그가 말하길, 그대는 나와 함께 인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그(모세)가 말하길, 이후 만일 내가 어떤 것이라도 물어본다면 나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당신은 나에게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둘은 출발하여 얼마 후 어떤 마을에 도착하여 그곳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하였으나 그 사람들은 그 둘을 손님으로 대접하기를 거절하였느니라. 그 둘은 손님으로 대접하기를 거절하였느니라. 그 둘은 거기서 무너지려고 하는 벽을 발견하고 그가 벽을 고쳤느니라. 그(모세)가 말하길, 만일 당신이 원했다면 그것에 대한 보수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오.
그가 말하길, 이것으로 나와 너는 헤어지게 되노라. 네가 인내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설명해 주겠노라. 그 배로 말하자면 그것은 바다에서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었노라. 내가 그것에 구멍을 뚫은 것은 그들 뒤에 왕이 있어 모든 배를 강제로 빼앗으려 하였기 때문이었노라.
소년의 경우는 그의 부모가 믿는 자였으나 그가 거역과 불신으로 그 둘에게 말썽을 부릴 것을 우리가 염려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그 둘의 주님께서 그 둘을 위해 그보다 더 순수하고 다정한 자식으로 바꿔 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벽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그 마을의 두 고아 소년의 것으로서 그 밑에는 그 둘의 재물이 있었노라. 그 둘의 아버지는 의인이었으므로 너의 주님께서는 그 둘이 성년이 되면 주님의 자비로 그 재물들을 꺼낼 것을 바라셨노라. 그래서 나는 그것을 행하였으며 이것이 네가 인내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설명이니라.
꾸란 18.65-82 (이슬람)
거룩하신 그 분은 인간을 보고 기뻐하실 때 그를 고통 속에 집어넣으신다. 이사야 53장 10절에서는 “주 하나님이 그를 보고 기뻐하시며 그를 병들게 하셨다.” 고 나와 있다. 그대는 비록 그가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은 이를 행하실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가 보답으로 자신의 영혼까지 바칠 것인지 보기 위함이었다.” 불순한 제물도 제단에 올리려면 동의를 얻어야 한다. 고난을 주려거든 그 역시 동의가 있어야 한다. 고난을 받아들인 자에게 무슨 보답이 있는가?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혜가 (토라의 지혜가) 영원히 그와 함께 할 것이다. “주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서 번창할 것이다.”
탈무드, 베라코트 5a (유대교)
말씀 선집
신앙생활을 통하여 시험을 많이 당하고 거기에서 승리의 기반을 닦아 하나님이 믿으실 수 있는 튼튼한 반석을 만들라.
(뜻길, pp.321-322)
자신의 환경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늘이 같이 하신다.
(뜻길, p.286)
하나님은 희망의 중심, 생명의 중심입니다. 그러한 주체자이니 우리도 그러한 주체자 앞에 상대가 되기 위해서는 주체와 같은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하는 것을 한번 테스트해 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었나, 안 되었나를 알기 위해서는 고생의 자리에 쳐넣고, 슬픔의 자리에 처넣고, 고통의 자리에 처넣어야 됩니다. 시험과 시련은 나를 못살게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하나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는 조건적 내용이 됩니다.
(66.45, 1973.03.18)
가고 가는 길이 험하다 하오리까? 저희들의 마음을 아버님의 그 심정의 애달픔에 비할 수 없사옵고, 저희의 억울함을 첩첩이 가로놓인 사탄권을 걸으신 아버님의 그 발자국에 비할 수 없음을 알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험한 길을 가면서도 하늘 뜻을 책임지기 위한 사명감이 저희의 마음에 용솟음치게 허락하여 주시고, 슬퍼하면서도 아버님의 슬픈 역사의 친구가 되어 당신의 노정에 동반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역사적인 고통을 같이 느끼어 고통 받는 심정에 동반하여 친구가 될 수 있고, 아버지의 내적 슬픔의 친구가 되는 동시에 외적 슬픔의 친구가 되어 영원한 아버지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4.293-294, 1958.09.14)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변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변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험하실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변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편에서 보게 된다면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하시고 ‘가라 오라’ 하는 변덕쟁이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을 택하려면 최고로 변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테스트를 하여 변하지 않아야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66.46, 1973.03.18)
옛날 6·25사변이 일어났을 때 피난길에서 내가 이런 것을 많이 봤습니다. 어머니가 다섯 살짜리 자식을 업고 나섰는데, 철이 없으니까 전쟁이 나서 피난 가는 줄도 모르고 어디 간다 하니까 콧노래를 부르며 좋다고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업고 가다 보니 엄마가 힘이 빠져서 아이를 내려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 싫어, 나 업어 주지 않으면 안 가, 업어 줘, 업어 줘’ 합니다.
이럴 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업어 줘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업어 주면 둘 다 죽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걸아가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안 걷겠다고 하면 위협을 하고, 뺨을 때려서라도 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피난처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부모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버리고 가겠습니까, 죽이겠습니까? 아니면 강제로라도 끌어서 데리고 가겠습니까? 어떤 방법이 제일 좋겠습니까? 버릴 겁니까? 죽일 겁니까? 그것이 다 싫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끌고 가야 됩니다. 귀를 잡아 째든가 콧구멍을 꿰어서라도 끌고 가야 됩니다.
(32.256, 1970.07.19)
내 비록 나이가 들어 늙었지만 젊은이들 앞에 미래상의 힘의 원천으로서 보여 줄 수 있도록 하늘의 힘이 같이할 것을 알고 이날도 전진을 다짐하였사오니, 이들을 지키고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원하옵건대 모진 바람이 이들 앞에 불어치게 하소서. 폭풍과 태풍의 바람결이 이들을 스쳐가고 몰아치게 하시옵소서. 그 풍상 가운데 어엿이 남아 승자의 모습을 갖춘 반석 같은 젊은 청년 남녀들이 되어 삼천리반도 대학가로부터 출발을 시작한다 할 때, 이 대한민국의 미래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다가올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121.187, 1982.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