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 제1부 하나님과 창조 - 제5장 죽음 이후의 삶과 영계
저 세계로의 통로
죽음의 순간에 내생으로 가는 통로는 거의 투시할 수 없는 신비에 싸여있다. 임상적인 죽음에서 되살아난 사람들에 의해 의사죽음의 체험들에 관한 서적들은 어떤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터널을 지나 다른 세계로 가는 것, 빛의 존재를 만나는 것, 아주 따뜻함을 느끼는 것, 사랑을 받는 것 등을 말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의 첫 단계를 체험했을 것이다. 그 통로가 어떻게 끝나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어느 정도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사후에도 무언가가 존속한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죽은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계속하여 스스로 의식적이고 지각력을 갖고 있는 존재인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죽음은 보다 고차적인 존재인 단계로 옮겨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번데기에서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것처럼, 그것은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이다. 편안한 자궁의 세계를 떠나야 하는 태아의 출생에 비유하여, 문선명 선생은 그것을 두 번째 출생이라고 부른다. 출생 전까지 자궁이 태아를 양육하지만 자궁이 파괴되고 태아가 지상의 삶을 위해 그곳을 떠나는 것처럼, 죽음 이전까지 육신은 영혼을 양육하지만 육신이 그 수명을 다할 때 영계에서 태어나기 위해 지상계를 떠난다.
그러므로 삶의 세 단계, 즉 자궁의 수중 세계, 지상 존재의 공기 세계, 사랑의 대기를 숨쉬는 영계가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두려워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영혼의 생일로 기념되어야 한다. 핵심 문제는 과연 우리가 그 세계에서 편안하게 존재할 수 있는 영적 품성을 지닌 영혼을 합당하게 준비했는가 하는 점이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 뿐이다.
1. 제2의 탄생
종교경전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3-55(기독교)
자신의 영혼이야말로 참된 자아임을 아는 자는 죽음을 자신의 영혼의 육체적인 환생으로 여긴다. 마치 헌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처럼 생각한다.
푸자파다 사마디샤타카 77(자이나교)
삶을 군살이나 혹이 매달린 것처럼 생각하며 죽음을 종기를 짜거나 터진 것처럼 여긴다.
장자6(도교)
너희는 너희가 방출하는 정액을 보았느냐.
그것을 너희가 창조하였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창조하였는가.
하나님은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라도 죽음을 이르게 할 수 있으되 좌절하지 아니하며
너희의 양상을 바꾸어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상으로 재창조하시니라.
너희는 최초의 창조를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 일을 교훈으로 삼지 않는가
꾸란 56.58-62
삶이 있고 죽음도 있으며, 나감이 있고 들어옴도 있다. 들어오고 나감이 있지만 그 형체를 볼 수 없는 것을 일러서 천문(天門조물의 문)이라고 한다.
장자 23(도교)
이 세계가 모태에서 평혼했던 동안 태아의 세계와 다른 것처럼 천상세계는 이 세계와 다르다. 하나님이 그 영혼에 임재하실 때, 그 영혼은 불멸에 가장 어울리고 천상에서 거주하기에 적합한 형태를 가지게 되리라.
바하울라 저서들의 낙수집 81(바하이교)
은사슬이 끊어지면 금그릇이 떨어져 부서진다. 두레박 끈이 끊어지면 물동이가 깨진다. 그렇게 되면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전도서 12. 6-7(기독교)
사람이 꿈을 꾸다가 각성상태로 깨어나는 것처럼 그는 이생에서 내생으로 나아간다. 사람이 막 죽으려 할 때 지성으로 이루어진 자아를 태운 미세신은 신음하며 괴로워한다. 마치 무거운 짐을 실은 달구지가 그 짐에 눌려 신음하듯이, 노쇠하거나 질병 때문에 그이 몸이 야윌 때, 죽어가는 그 사람은 자신을 사지에서 분리한다. 마치 망고나 무화과 또는 반얀 열매가 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그가 왔던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새로운 거처로 서둘러 가며, 거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또 다른 몸을 받는다.
그의 몸이 차츰 약해지고 분명히 의식을 잃어가고 있을 때, 죽어가는 그 사람은 그에 관한 자신의 감각들을 모으고, 감관들의 힘을 완전히 끌어들이면서 자신의 심장 속으로 내려간다. 그는 더 이상 형태나 색깔을 볼 수 없다.
그는 보지도 않고 냄새 맡지도 않으며 맛을 보지 않는다. 그는 말하지도 듣지도 않는다. 그는 생각하지 않으며 인식하지 않는다. 육신에서 분리된 모든 감관들이 그의 미세신과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때 신경들이 모이는 심장의 한 점이 자아의 빛으로 밝아지며, 그 빛에 의해 그는 눈을 통하여 또는 정수리의 문을 통하여 또는 몸의 다른 어떤 틈새를 통하여 떠난다. 이와 같이 그가 떠날 때 생명이 떠난다. 생명이 떠날 때 활력의 모든 기능들이 떠난다. 자아는 의식적인 생태로 남으며, 죽어가는 그는 자신의 거소로 간다. 이생에서 한 행위들과 그들이 남긴 잠재인상들이 그를 따라간다.
한 풀잎 끝에 도달한 자벌레가 다른 하나의 풀잎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의식 없는 몸을 떠난 자아는 다른 한 몸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
금세공장이가 오래된 금장신구를 녹이고 두드려서 보다 새롭고 아름다운 다른 장신구를 만드는 것처럼, 몸을 버리고 그것을 의식 없는 상태로 남겨둔 자아는 새롭고 더 나은 형태, 즉 조상들의 형태, 천계 악사들의 형태, 신들의 형태, 또는 천계나 지상의 다른 형태를 취한다.
브리하드아린야카 우파니샤드 4.3.34-4.4.4(힌두교)
말씀선집
나도 하나님 닮고 싶고, 하나님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닮게 하고 싶다는 관념을 갖는 것은 필연적 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을 닮고 싶고, 하나님은 나를 데려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다시 하나님과 닮을 수 있는 체를 입고 태어나야 됩니다. 그렇게 태어나는 날을 하나님도 고대할 것이고, 인간도 고대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는 날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죽음을 환영해야 되겠느냐, 환영하지 말아야 되겠느냐? 환영해야 됩니다. 죽는 데 뭣 때문에 죽을 것이냐 할 때 ‘하나님의 참사랑을 위해서 죽겠다.’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벗는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의 활동권에 내가 동참하기 위해서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 죽는 것인데, 인간세계에서는 ‘아이구, 죽는다’ 하고 야단하는 것입니다. 제한된 사랑권 내애서 무제한의 사랑권 내로 돌입할 수 있는 기쁨을 맞을 수 있는 순간이 죽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이 제2의 출생의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육신이 난 날을 기뻐하겠습니까, 제2의 무한세계의 사랑을 위해서 활동할 아들로 태어나는 그 시간을 기뻐하겠습니까?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여러분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해달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16.172, 1982.01.01)
사람은 소생,장성,완성시대를 거칩니다. 복중 물세계, 지상 지구성 세계, 천상 공중 세계에서 삽니다. 다시 말하면 복중 물 시대, 지상에 태어나서 사는 100년 땅 시대, 날아가는 공중시대, 이렇게 3시대를 거칩니다. (297.257, 1998.12.19)
복중에서 탯줄로 숨쉴 때와 마찬가지로 공기 파이프인 콧구멍을 준비해 가지고 터져 나올 때 바뀌서숨쉬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이 세계에서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태어나서 해야 할 것은 사랑을 체휼하는 일입니다. 사랑이라는 공기를 들이마셔야 됩니다.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사랑의 공기를 들이마셔야 됩니다. 사랑의 공기를 공급받아서 다 거쳐 가야 됩니다.
한 가정에 애기로 태어났다가 사인 커브와 마찬가지로 올라갔으면 다 꺼져 가는 겁니다. 아기로 태어났다가 커서 그다음에는 분해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기로 태어났다가 아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떻게 되느냐? 제2복중세계를 차버리고 제3사랑의 호흡기관에 연결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 형제의 사랑을 차 버리고 대우주의 하나님 본체에 화한 사랑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영계는 사랑의 공기입니다. 사랑의 공기로 꽉 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이 지상세계에서 사랑의 숨을 쉴 수 있는 파이프 장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의 체험이 필요하고 영적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호흡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39.213-214, 1986.01.31)
여러분들이 어머니 복중에서 나올 때 얼마나 힘들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 주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아기를 낳을 때 이렇게 낳게 했을까요? 그저 쉽게, 말하듯 쉽게, 맛있는 음식을 먹듯 쉽게, 향수 냄새가 나듯 쉽게, 그저 좋아서 입을 벌리고 ‘하하하’ 하고 아기를 낳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그렇게 안 낳게 하고, 땀을 흘리며 죽는다, 산다 하는 경계에 서서 낳게 했습니까? 빛나는 사랑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날 때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생명 보따리가 태인데, 거기에 달린 줄을 다 파탄 시키고 차 버리고 집어 던지고, 끊고 나올 때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 ‘나 죽는다. 나 죽었다. 나, 다 파괴되는 구나. 나 죽었다’ 하는 게 불행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불행의 경계선이 아니라 행복의 출발이었다 하는 것을 태어나서 압니다.
그러나 아기가 죽는 줄 알게 되면 배 안에서 영원히 살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중에는 오늘날 지상에서 영원히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안 죽겠다고 한다는 겁니다. 이걸 걷어차고 다시 한 번 요동이 벌어지고 ‘아이구, 나 죽는다!’ 이러다 보니 후다닥 뛰쳐나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영계, 무한한 세계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시간적 공간적 차원의 세계를 탈출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한한 하나님의 힘이 있는 끝에서부터 끝까지 순식간에 왕래합니다. 태양빛보다도 빠르고 무엇보다도 빠릅니다. (107.42-44,1980.01.20)
그러면 배꼽에 달린 탯줄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잘라 버려야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공기의 세상에서는 영인체가 몸뚱이에 붙어 태아처럼 육신을 빨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육신이 늙게 되면 버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태아가 태어나 어머니 아버지 앞에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영인체가 영적 아버지인 영원한 하나님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은 원리원칙입니다.
태아가 태어나 어머니 아버지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지상 세계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사랑을 같이할 수 있는 지상 세계에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무한한 세계를 통할 수 있는 부모되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영계에 태어나야 합니다. (297.258-259,1988.12.19)
영계는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영계에 들어가면 머리 위에 있는 숨구멍과 세포로 호흡하게 됩니다. 영계에서의 공기는 지상의 공기가 아니고 사랑입니다. 호흡을 통해서 사랑의 요소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 살 때도 밥만 먹어서 는 안 됩니다. 밥만 먹고 물만 마시고 산다는 것은 밥주머니와 물주머니를 채우는 일일뿐입니다. 결국 그러다가 죽어간다는 말입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의 우리의 모습은 제2의 우리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기간에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사랑의 인격을 형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우리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고아가 무엇입니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왜 고아라고 부릅니까? 영계와 영원히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외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으로 사는 사람을 불쌍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제2의 호흡을 하던 육체에 연결된 이 기관을 깨뜨려버리고 사랑의 요소를 이어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차피 육신을 깨뜨리고 나가야 됩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의 사랑, 자녀의 사랑, 이 모든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의 내적인 구조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 때에만,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복중에서 정상적인 아기로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서도 잘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97.260, 1998.12.19)
잠자리가 처음에 유충이 되어 물속에서 헤엄치고 다니다가 땅위에 올라와서는 한동안 기어 다닙니다. 그 다음에는 훌훌 날아다니며 땅에서 기어 다닐 때 먹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하던 벌레를 잡아 먹습니다. 천하를 자기 무대로 삼고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곤충류 가운데는 3단계 세계를 거치는 것이 많습니다. 곤충하게 되면 대개 날개가 있습니다. 곤충도 물에서, 육지에서, 공중에서 사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이 날개가 있느냐, 차원이 높은 날개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제2출생의 복된 관문입니다. (297.261-262, 1998.12.19)
2. 사후 생의 첫 순간
종교경전
지금 당신이 지니고 있는 몸은 성향과 기질로 이루어진 심체라고 부른다. 당신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를 지니지 않으므로, 어떤 소리가 들리든 어떤 빛이나 광선이 오든, 또는 이 셋이 오든, 그것은 당신을 해칠 수 없다. 당신은 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환영들은 당신 자신의 사유 형태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곧 사후의 바르도(사후의 중간 영계)임을 인식하라
티베트 사자의 서 (불교)
세상을 떠날 때 영혼은 어떤 여정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선택받은 영혼들을 위한 찬란한 그 길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에서 행업이 영혼의 갈 길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거룩한 그분을 향하고 주를 향한 갈구함으로 가득 찬 사람은 영혼이 길을 떠날 때 이승에서 주어진 힘에 따라 더 높은 권을 향해 이끌릴 것이다.
조하르 1.99 a-b(유대교)
영생을 준비시킬 목적으로 주어진 이생이 지나며, 보라! 우리가 생을 누릴 동안 시간을 활용하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어두운 밤이 다가오느니라.
너희가 긴박한 위기에 처하고 난 뒤에는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고 할 수 없으리라. 참으로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없으리니, 이 생애에서 너희 육신을 다스린 그 영이 영원히 세상에서도 너희 몸을 다스리리라.
몰몬경, 앨마서 34.33-34(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죽음의 순간에 나만을 염하는 이들은 나에게 오리니, 이를 의심치 말라. 마지막 순간에 마음속에 기리는 것, 그것이 죽는 자의 운명을 결정하나니, 이는 그들이 언제나 그 상태에 젖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나를 염하라…
죽음의 순간에 나를 염하라. 모든 감각의 문을 닫고 의근을 가슴속에 가두라. 명상에 잠겨 모든 생명력을 정수리에 집중시키라. 이러한 상태에서 거룩한 소리 ‘옴’을 반복하라. ‘옴’은 불멸의 브라흐만을 의미하느니라. 죽음의 순간에 나를 염하라. 그대는 육신을 벗고 궁극의 경지를 얻으리라.
바가바드기타 8.5-7, 12-12(힌두교)
말씀선집
가다가 자동차 사고가 나서 대번에 즉사했을 때 자기가 죽은 줄 모릅니다. 영계에 가면 ‘아이고, 이상한 곳에 왔는데? 여기가 우리 동네보다 더 낫네. 없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있네’ 그러는 겁니다. 광활한 천지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죽은 줄 모른는 것입니다. 자기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보고 싶어야 나타나지 부르지 않으면 안 나타납니다. 혼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계에 가게 되면 영계에서 안내하는 사람들이 와서 가르쳐 줍니다. ‘당신이 저승에 왔다. 죽었다, 죽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인식되지 않습니다. 꿈같이 아스라이 자동차하고 부딪친 것은 느껴지는데 죽었다는 생각은 안 하게 됩니다. 거기 가서 죽은 것을 모르고 있으니 어벙벙합니다. 감을 못 잡습니다. 자기 집에 가려고 ‘나 고향에 가야 할 텐데’하면서 고향에 가려고 합니다. 지상 고향에 갈 수가 있습니까? 고향에 갈래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와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몇 대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가 와서 ‘너는 지상세계가 아니고 영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아, 영계가 이런 데로구나’ 하는 것입니다.(194.41-42, 1989.10.15)
우리의 인생살이가 비단 70년 일생으로 끝난다면 별 문제지만, 영원한 문제를 중심삼고 살아 나간다 할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영계가 있고, 사후에 영계에 가게 된다면 무엇을 가지고 생각할 것입니까? 그 세계는 광대한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 들어가면 대번에 느끼게 됩니다.
이 땅에서 민족간의 차별이 있고, 배후에 문화적인 격차라든가 상충적인 생활상, 부대끼며 살고있는 거기서도 자기를 내세워 가지고 모든 것을 수습하고 싶고,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가치를 남기고 싶었던 과거지사가 그 옛날에 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 가서도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환경이 자기가 측정하고 자기의 생각권 내에 자유로이 흡수할 수 없는 방대한 세계면 세계일수록 더더욱 그리워지는 것이 고향 땅, 혹은 지구성의 살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영계에 가서 영원한 세계를 그려 가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언제 가서 그것을 잊어버리겠습니까?
그 세계에 가서 만나는 사람은 전부 생소한 사람입니다. 그런 생소한 환경에서 내가 만일 홀로 섰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생각하게 될 때 자기가 그리는 사람, 지난날의 마음 가운데 뺄 수 없는, 정서적인 면의 관계를 맺었던 모든 인연들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영계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됐겠느냐?’는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187.285-286, 1989.02.12)
내가 만일 사랑의 길을 찾아가다가, 그러한 사랑의 주체를 중심삼고 찾아가는 길에서 불행히 죽었다고 생각합시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죽을 때 ‘나는 사랑의 길을 찾아가다가 죽습니다.’ 라고 생각할 겁니다.
‘내가 이 사랑으로 인해 죽기 때문에 이 사랑은 내 원수로다’ 이렇게 생각 안 한다는 겁니다. 죽으면서 죽음을 잊고라도 사랑을 품고 죽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품에서 죽는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은 불행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깨진 것이냐? 아닙니다. 사랑의 주체인 하나님이 ‘너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랑을 위해서 죽었구나’ 하며 그 가치를 보다 나은 가치로 인정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 사랑해야 할 길을 위해서 죽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떨 것 같습니까? 부부끼로도, 남편 위해서 죽은 아내를 남편이 만났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혹 형제지간에 형이 동생을 위하고, 동생이 형을 위해서 죽었다 할 때, 그 죽었던 형과 동생이 만났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살아서 만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그것보다 덜 좋아하겠느냐, 더 좋아하겠느냐? 죽지 않고 만나서 사랑하던 것과 서로가 주기 위해 죽어 가지고 만났을 때 사랑의 강도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죽지 않고 만나서 사랑하는 차원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겠느냐?’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위해서, 선생님 때문에 죽었는데,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고 이 다음에 죽어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가?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서 죽음이 문제가 되겠느냐? 죽음까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의 길을 찾아 간다고 해서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높은, 보다 가깝고 보다 영원할 수 있는, 보다 하나 될 수 있는 사랑의 세계로 돌입하는 하나의 관문이 된다고 행각하게 될 때, 그 죽음이 무서운 것이냐?
그런 경지를 찾아가는 사람은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자리를 발견하고, 그러한 길을 확정지어 가는 사람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면 그 행복한 사람에게 동정 받아야 되겠습니까, 동정해야 되겠습니까? 그 사람을 동정해 줘야 되는 건 틀림없는 것입니다. (67.173-174, 1973.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