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문화의 전통교육에서는 덕목을 키우는 것을 기본적으로 강조했다. 곧 영혼을 살찌우고, 문명인으로서 인격을 형성하고, 선한 시민을 양성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오늘날 학교 교육은 복잡한 현대 직업사회에서 필요한 기술과 기술적 지식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인성 교육과 가치관 교육은 푸대접을 받고 있다. 테오도르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인간의 마음을 기르는 규범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사회의 위험인물을 길러내는 것이다.” 세계의 경전들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교육의 근본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문선명 선생은 교육을 3단계로 구분하신다. 첫째, 심정 교육은 이타적 사랑을 위한 정서적 토대를 형성하는 교육이다. 둘째, 윤리 교육은 바람직한 관계 형성에 필요한 윤리성을 가르친다. 셋째, 학문 기술 교육은 이 두 기초교육 위에 확립되는 교육이다. 앞의 두 단계의 교육은 상당 부분 가정에서 부모의 책임 아래 이루어진다. 물론 학교도 부분적으로, 특히 인성 교육과 결혼 교육에 관해서는 일정 부분 책임을 할 수 있다. 개인의 성격과 결혼생활 문제가 직장의 업무 수행에도 밀접하게 관련된 점을 고려할 때, 이 같은 교육 목표는 현대 학교교육의 직업 지향적 교육방식과 반드시 모순된다고는 할 수 없다.
1. 교육의 근본목적: 덕성 개발
종교 경전
청소년기의 자녀를 적절하게 교육하지 못한다면 부모는 단지 아이의 적일뿐이다... 지식은 사람을 정직하고 덕 있게 하며 사회에 대한 애정을 지니게 만든다. 사람이 친구와 친척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배움이다. 지식은 거룩한 것들 중에 가장 거룩하며, 신들 중에 신이며, 왕관 쓴 자들의 존경을 호령한다. 만일 지식을 잃어버린다면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가정의 비품과 가구는 도둑들이 가져갈 수 있지만 최고의 보물인 지식은 훔쳐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루다 푸라나(힌두교)
참된 배움은 마음에 인류에 대한 봉사를 새긴다.
아디 그란트, 아사, M.1, p356(시크교)
지혜를 갖는 목적은 참회하고 선행을 행하기 위함이다.
탈무드, 베라코트 17(유대교)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가 문(文)을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단속한다면 또한 도(道)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논어 6.25(유교)
사물이 연구된 후에 지식이 이루어지고, 지식이 이루어진 뒤에 뜻이 정성스러워지며, 뜻이 정성스러워진 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이고, 몸이 닦인 후에 집안이 안락해지고, 집안이 안락해진 후에 나라가 다스려지며, 나라가 다스려진 후에 천하가 태평해진다.
대학(유교)
반야는 그를 훈육하고 바꾸며, 그는 더 이상 노여움이나 자만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적의도 악의도 그를 흔들어 놓을 수 없으며, 심지어 이런 악한 성향조차도 없다. 그는 사려 깊고 우호적이다... 어떻게 이 반야가 보살의 훈육과 마음 닦음을 위해 마련되었는가 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팔천송반야 3.51-54(불교)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일러준 이 말을 너희의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두어라. 너희의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이것을 너희의 자손들에게 깨우쳐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신명기 11.18-19(기독교)
지혜가 부르지 않느냐? 슬기가 목청을 돋우지 않느냐? 지혜가 길가 언덕에서 부르고 슬기가 네거리에 자리 잡고 목청을 돋운다. 마을 어귀 성문께 대문 여닫히는 곳에서 외친다.
“사람들아, 내 말을 들어라. 사람의 아들들아. 내 말을 들어라. 풋내기들은 처세하는 길을 배우고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바로잡아라. 들어라. 나는 곧은 말만 하고 바른 소리만을 입 밖에 낸다. 내 입은 진실만을 말하고 내 혀는 그른 소리를 꺼린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옳은 말뿐 내 말엔 잘못이나 거짓이 없다. 어진 사람은 내 말을 밝히 알고 지식 있는 사람은 내 말을 옳게 여긴다. 네가 받아야 할 것은 은이 아니라 내 교훈이고 순금이 아니라 지식이다. 지혜는 붉은 산호보다도 값진 것, 네가 원하는 그 무엇을 이에 비하랴.”
잠언 8.1-11(기독교)
말씀 선집
우리가 생활하는 데 있어서 자기 개체의 목적을 중심삼고 그것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도 전체의 목적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 지금까지 교육이나 도덕이 지향해 나오는 표준인 것입니다.
(24.212, 1969.08.17)
‘만민은 선한 것을 바라고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기 전에 사람을 위해라, 전체 인류를 위해라, 사람을 사랑해라, 사람을 위해 살라, 사람을 위해서 태어났다’ 하는 교육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64.20, 1972.10.22)
좋은 마음을 가지고 희생을 하는 사람은 좋게 된다는 것이 막연하나마 일률적으로 교육의 목표가 되어 있고 교양의 목표가 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인간은 떨어진 자리에서 보다 높은 한 점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하늘은 불가피하게 그런 것을 일대일의 자리에서 세밀하게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암암리에 상징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쳐 준 것이 오늘날 선을 행하라는, 적선하라는 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65.118-119, 1972.11.05)
악한 사람이 되는 데에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교육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악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대번에 악해질 수 있습니다. 대번에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이 되라고 교육을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한 사람이 되려면 자동적으로 되어지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선을 따라 행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가는 길은 서로 상반된 길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기 위해 가는 사람들이 가는 길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39.23, 1971.01.09)
이상적인 사회나 나라는... 교육은 모든 문명의 이기들을 활용하여 받되 지식교육, 체육, 기술교육은 물론이요, 축복가정을 터로 한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을 우선함으로써 천도를 따르는 선민을 기르는 교육이 된다.
(269.156, 1995.04.17)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자녀 교육의 재료가 나와 있어야 합니다. 또 형제 교육의 재료, 그 다음에는 부부 교육의 재료, 부모 교육의 재로, 그리고 가정이 어떻게 자라겠다는 교재, 종족이 어떻게 자라나겠다는 종족적 재료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233.336, 1992.08.02)
가정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학교입니다. 자녀들은 가정에서 부모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교육, 정서교육을 통해 심정의 깊이와 폭을 키웁니다. 이것은 자녀의 인격을 만드는 주춧돌이 됩니다. 또한 가정은 자녀에게 미덕과 규범을 교육하는 학교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은 정서교육과 규범교육을 받은 터 위에 지식교육, 체육, 기술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 천도입니다.
(271.80, 1995. 08.22)
우리가 태어날 때 어떻게 태어납니까?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고 태어날 때, 신랑 각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딸로 태어나서 사랑의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 부모는 아들딸에게 무슨 교육을 해야 됩니까? 지식교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교육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 하나 되는 교육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좋아하는 어머니 아버지이고, 또 어머니가 좋아하는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어머니이고, 둘 다 좋아하는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 아버지이고,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좋아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봐도,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봐도 사위기대입니다. 전부 사위기대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모두 사위기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의 기원이 어디냐?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모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담 해와는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아담 해와의 가치 기준의 설정은 어디서부터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교육에서부터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교육을 받는 데는 어느 때까지 받느냐? 아버지가 아는 모든 가치의 기준을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말하면 성숙할 때까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기록이 성서에 있습니까? 사랑 받았다는 얘기는 없고 기분 나쁘게 타락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51.172, 1969.10.03)
2. 교육은 마음을 확장하고 새로운 발달 가능성을 열어감
종교 경전
널리 배우고 익히며 절제하고 훈련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숫타 니파타 261(불교)
지식보다 더 큰 재산이 없고, 무지보다 더 큰 빈곤이 없으며, 문화보다 더 큰 유산이 없도다.
나흐줄 발라가, 어록 52(시아파 이슬람)
공자가 말하였다. “성품은 서로 가까우나 익히는데 따라서 서로 멀어지게 된다.”
논어 17.2(유교)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32(기독교)
토라를 연구하는 데 힘쓰는 자, 자유를 얻을 것이다.
미슈나, 아보스 6.2(유대교)
말씀 선집
공부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잠자기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도 처음부터 공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함으로써 자기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36.120, 1970.11.22)
사람들은 누구나 훌륭한 아들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교육해야 될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학교가 많은데 거기에서 교육하면 된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육은 일생 동안 해야 됩니다.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부모가 정성들여 키운 자식에게 가문을 맡길 때, 즉 그 대산자로 세울 때는 부모의 마음과 일치되게끔 하여 그 부모의 인연을 따라가게 하면서 대신자로 세우는 것이 상례입니다.
(24.257, 1969.08.24)
‘아! 우리 아들딸을 공부시켜야 되겠다. 공부해야 출세한다’ 고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아야 출세한다’ 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귀하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144.130, 1986.04.12)
세계 모든 나라의 교육제도에서, 경쟁에서 승리한 자만이 획득할 수 있다는 경쟁의 장점과 이에 가장 적합한 삶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평화로운 공존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건전한 인간의 노력을 잠식하는 전염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현재 인류는, 지성인 사이에서 그러한 경쟁의 강조가 바뀌고 있으며, 생존을 위해 협동이 불가결한 요소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비춰 볼 때, 교육의 목적과 교육 철학은 심층으로부터 변혁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74.109, 1974.11.22)
지식 탐구
지식 탐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의무다. 교육과 꾸준한 학습은 그 사람을 보다 높고 고귀한 존재로 고양시켜 준다. 이번 장에는 지식 탐구의 여러 가지 측면에 대해 다룬 구절들을 실었다.
첫째, 진리 탐구는 종교적 의무다. 그러한 탐구가 우리를 진리가 시작된 우주의 근원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둘째, 학습의 중요한 효과는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포함해 무지의 범위를 깨닫는 것까지가 여기에 포함된다.
셋째, 지식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해한 후 소화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모든 시각으로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꼼꼼하게 노력한다.
넷째, 탐구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과학을 포함한 모든 종교와 문화까지도 포용해야 한다.
이번 장에 실린 문선명 선생의 말씀 일부는 교수, 과학자 모임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 외에 개인적 진리 탐구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1. 하나님과 신적 원리는 이해의 출발점
종교 경전
믿음이 없다면 지식은 있을 수 없으며, 지식이 없으면 덕행은 있을 수 없다. 덕이 없다면 구제는 있을 수 없으며, 구제가 없다면 완성(열반) 또한 있을 수 없다.
웃타라디야야나 수트라 28.30(자이나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잠언 9.10(기독교)
만일 여러분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넉넉하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시오. 그리하면 얻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1.5(기독교)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 멸망할 자들인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닙니다. 우리는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영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2.4-7(기독교)
진리는 길이다. 진리는 자기 의지를 여읜 성자들에 의해 도달되는 삶의 목표이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3.1.6(힌두교)
옳게 닦는 수행자는 이 세계를 정복하고 지옥과 천상을 벙복하리라. 옳게 닦는 수행자만이 잘 설해진 법문을 엮을 수 있다. 마치 솜씨 있는 여인이 고운 화환을 엮듯이.
법구경 45(불교)
말씀 선집
철학이 추구하는 목표, 즉 진리를 통하여 최후의 목표를 추구해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초월자 혹은 절대자가 개재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절대자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모든 학문이나 모든 존재의 가치의 기원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오한 자리에서는 반드시 이와 관계를 맺고 참을 통하여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24.318, 1969.09.14)
진리를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연과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입니다. 자연계에서 이 원리는 우주만물 만상의 근원입니다. 인간에서 이 원리는 그 영성(靈性)과 육성(肉性)의 조화를 통한 인격을 완성하고 진, 선, 미를 실현하도록 인도하는 참사랑의 절대가치입니다.
본인은 여태까지의 신본주의나 인본주의, 그리고 물본주의의 주장들이 상호 화해할 수 없는 가치들의 상충만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의 원리, 절대가치의 미완성적이고 일면적인 표현이요, 불완전한 주장이었다고 봅니다. 인간과 현실세계의 여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주의나 주장들을 뛰어넘어 전체를 수습할 수 있는 절대가치, 하나의 원리를 찾아야 합니다.
절대가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까지 다다릅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수긍하는 것은 자연계 및 인간계에 항구적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바탕 위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가치들은 절대적 가치의 토대 위에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70.268, 1987.11.27)
2. 너 자신을 알라
종교 경전
원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니라. 지혜를 얻은 자는 풍요로운 좋은 것을 얻은 것이니라. 그러나아는 자 외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노라.
꾸란 2.269(이슬람)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자신을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도덕경 33(도교)
맹자가 말했다. “군자가 도에서 깊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함은 스스로 도를 터득하기 위해서이다.”
맹자 IV. B.14(유교)
나는 내가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스스로의 마음에 의해 격리되고 파묻혀서 방황한다.
진리의 첫 자손이 나에게 왔을 때, 나는 그 동인한 말의 일부를 얻었다.
리그 베다 1.164.37(힌두교)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체하는 것이 최상이요,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하는 것이 병이다.
도덕경 71(도교)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알면 그만큼 그는 지혜롭다.
그러나 어리석으면서 지혜롭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다.
법구경 63(불교)
말씀 선집
지금 여러분들의 위치를 모르면 항해할 때 위도 경도가 몇 도인지도 모르고 가는 것과 딱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알고 자기가 방향을 잡아야 됩니다. 자기가 갈 길을 잡아야 됩니다.
(120.303, 1982.10.20)
수면제 같은 것 먹고 자살하는 사람 많이요?... 그럼 왜 죽느냐? 내가 애 태어났는지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죽느냐, 애 태어났느냐 하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철학의 입문에서 첫째로 묻는 것이 인생이 무엇이냐, 그 다음에 인간이 왜 태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222.70, 1991.10.28)
인간들은 선의 욕망을 일으키는 본심이 무엇이고 이 본심을 거슬러 악의 욕망을 일으키는 악한 마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성을 갖게 하여 파멸을 초래케 한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 등의 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선의 욕망을 따라 본심이 지향하는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 무지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선과 악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원리강론, 총서)
진리는 영원불변의 중심을 갖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선악을 분별하면서 진리를 찾아가야 되겠습니까? 자신을 중심한 마음을 버리고 항상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성서에서도 높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2.138, 1957.03.17)
알고 보니 무수한 면에서 ‘아이구 부족하구나’ 하는 것이 좋은 선물이다.
(뜻길, p.81)
3. 교사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포괄적 연구에 의해 이해하라
종교 경전
소문이나 전통 또는 권위에 의해서 오도되지 말아야 한다. 종교 경전들의 권윙 의해서, 단순한 논증이나 추론에 의해서, 현상들에 대한 숙고에 의해서, 또는 관념에 의해서 오도되지도 말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스승이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것이 유해하고 그릇되며 악한 것임을 스스로 알 때, 그것을 버려라... 그리고 그대가 어떤 것이 유익하고 선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앙굿타라 니카야 1.190-191(불교)
지식의 탐구는 모든 무슬림에게 부과된 의무이니라.
이븐 마자흐 및 바이하키 하디스(이슬람)
온 정력과 정신을 기울여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은 다르다
그들은 옛 성현들의 지혜를 탐구하고 예언을 연구하는 데 자기 시간을 바친다.
그는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보전하고 비유의 깊은 뜻을 파고든다.
그는 격언의 숨은 뜻을 연구하고 난해한 비유를 푸는 데 흥미를 느낀다.
그는 벼스렝 올라 군주들을 섬기고 통치자들 사이에서 중책을 맡는다.
외국을 두루 여행하며 인간 사회의 좋은 것과 나쁜 긋을 체험으로 안다.
집회서 39.1-4(기독교)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앎이 없이는 생길 수 없다.
(원리강론, 총서)
말씀 선집
여러분은 자신에게 희미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확실한 진리에 의한 방향이 없이는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설사 누가 여러분에게 어떠한 새로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그냥 그대로 믿지 말고 반드시 여러분보다 아벨적인 사람과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3.212, 1957.11.01)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철인들과 성현들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려고 각각 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인 개척의 길로 나섰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모두 오늘의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이제 다시 냉철히 생각해 보자. 어느 철인이 우리의 고민을 풀어 주었으며, 어느 성현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우리의 갈 길을 뚜렷이 보여 주었던가? 그들이 제시한 주의와 사상이란 것은 도리어 우리들이 해결하고 가야 할 잡한 회의와 수많은 과제들을 제기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 시대의 많은 심령들에게 비쳐 주던 소생의 빛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어느덧 꺼져버리고, 이제는 타다 남은 희미한 불똥만이 그들의 잔해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을 대하여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랴.
(원리강론, 총서)
내가 이 길을 나설 때에도 ‘하나님 있습니까?’ 하고 끝까지 케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실히 알고 출발했습니다.
(13.201. 1964.03.15)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기성교회같이 성경만 보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방대한 잼대로 재고, 얼만 들췄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실험하는 사람이 혹시나 이것이 맞지 않을까 해서 얼마나 실험하고 갖다가 맞추고 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진리, 원리를 찾아낸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선생님이 많이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93.69, 1977.05.01)
철부지한 선생님을 하늘이 가르쳐 줄게 뭐야? 하늘이 못 살게 얼마나 야단했겠느냐 이겁니다. 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한다는 것과 우주의 근본은 부자의 관계라는 것, 그 두 가지밖에는 가르쳐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다 풀어내야 됩니다.
그래서 원리의 세계, 부자의 관계, 부자는 세상에 핏줄을 가진 그 부자가 아닙니다. 새로운 근원에서부터 풀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원리를 모르면 안 됩니다. 내가 근본을 다 밝혔습니다. 그것이 전부 우주의 법입니다. 천법입니다.
(376.315, 2002.04.29)
나는 성경을 볼 때 ‘이것이 무엇일까’ 하고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년, 2년, 3년이라도 정성들입니다. ‘아, 그것은 이렇게 된 것이구나’ 할 때까지 뿌리를 뽑는다는 것입니다.
(35.38-39, 1970.09.27)
4. 주제에 대한 모든 측면의 탐구
종교 경전
군자는 두루 사랑하고 당파를 만들지 않으며, 소인은 당파를 만들고 두루 사랑하지 않는다.
논어 2.14(유교)
나는 마하비라에 대한 좋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며, 또한 카필라나 다른 스승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나는 다만 참으로 이치에 닿은 설법을 받아들일 뿐이다.
하리바드라, 로크탓트바니르나야 38(자이나교)
군자가 걱정할 일이 셋이 있다. 아직 못 들었을 때는 혹 듣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이미 들었으면 배우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이미 배웠으면 실천하지 못할 것을 걱정한다.
예기 18.2.2.20(유교)
벤 조마는 말했다. 누가 현명한 자인가? 그는 모든이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이는 시편의 가르침과 같다. “나의 모든 스승들로부터 나는 지혜를 얻었노라.” (시편 119장 99절)
미슈나, 아보스 4.1(유대교)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견해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열등한 것으로 얕보는 것, 이것을 지혜로운 자는 족쇄라고 부른다.”
숫타 니파타 798(불교)
하나의 철학적인 의견을 이해하려면 다른 소견의 포괄적 학습을 통해 하라.
아차랑가 수트라 5.113(자이나교)
말씀 선집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수많은 스승들의 훌륭한 교훈을 전부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나와 박사가 되어서라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자들의 모든 지식을 전부 다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여 그 종합적인 가치를 스스로의 생명 요소로 삼아서, 여기에 색다른 하나의 새로운 선의 실체로서 등장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 있으며, 세계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35.327-328, 1970.11.01)
여러 가지 연구 분야에서의 지식이라는 것은 서로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데, 자칫하면 학자들은 자기 자신의 연구 분야에만 고착하는 경향을 가지기 쉽습니다. 극단적인 전문화는 그것을 추구하는 개인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사소한 의미만을 주는 지식을 마련하게 됩니다. 발견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학자로 하여금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고 싶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피상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종교인들은 특히 르네상스 이후 과학의 발전에 의해서 위협을 받아 왔습니다. 그렇지만 소위 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발전하는 지식과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실히 과학은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크게 공헌해 왔습니다.
한편 인간과 우주의 신비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종교와 과학은 두 가지가 다 영감과 논리와 관찰을 통해서 우주와 인류를 존재하게 한 그 원인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기원과 목적에 관한 그와 같은 고찰은 우리 인간이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계속되어 나왔는데, 그것은 또 우리의 그칠 줄 모르는 에너지 원(源)을 형성시켜 나오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20세기의 우주학자와 생물학자들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관심사에 관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95.202-203, 1977.11.25)
지혜는 연구와 배움에 의하여 단계적으로 얻어지는 지식과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인 영감에 의하여 얻어집니다. 인간의 사악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서는 영감이 개발될 수 없습니다. 지혜 중의 지혜는 하나님의 심정과 이상을 아는 것입니다.
(219.105-106, 1991.08.26)
전통
세대를 거쳐 축적된 지혜가 전통이다. 전통은 역사 연구, 대중 의례와 가정 속에서 전해지는 경구와 민담 등을 통해 이어져 내려온다. 이 최고의 교육 자료들 중 일부에는 선하고 자기희생적 모범적 삶을 살다간 평민들과 위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오늘날과 같이 유명인들의 문화와 명성이 재빠르게 교체되는 시기에 전통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전통 자체의 종요성만은 간과될 수 없다.
가정은 전통의 중심에 서 있다. 부모는 가르침과 선례를 통해 자녀에게 그들의 가치와 규범을 전수해 준다. 바람직한 부모는 자녀들이 부모의 길을 따르거나 심지어 부모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지도한다. 굳건한 가정적 기초를 통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지혜를 전수해 주며 그 전통을 유지시키고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종교 경전
전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야칸족의 격언(아프리카 전통종교)
나희는 네거리에 서서 살펴보아라. 예부터 있는 길을 물어보아라. 어떤 길이 나은 길인지 물어보고 그 길을 가거라. 그래야 평안을 얻으리라고 하였지만, 너희는 그대로 하기 싫다고 하였다.
예레미야 6.16(기독교)
쌓임(大畜): 군자가 볼 때 옛 성현들의 말씀과 지나간 행실을 많이 알아서 덕을 쌓는다.
역경 26(유교)
시종 당신만을 염하며,
자신의 영혼이 진리와 완전히 일체를 이룬
거룩한 이들의 행적뿐만 아니라
자비로운 이의 가르침들을
깊이깊이 생각합니다.
아베스타,야스나 34.2(조로아스터교)
격언[전승된 지혜]이 없다면 언어는 살 없는 뼈요 혼 없는 몸이다.
줄루족의 격언(아프리카 전통종교)
야곱과 굳은 언약 맺으시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법을 주실 때, 후손들에게 그 법을 가르치라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명령하셨다.
뒤이어 태어날 후손에게도 대대로 알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들도 일어나서 자손에게 이야기하여 그들의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이 이루신 장한 일들을 아니 잊어버리고 분부하신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시편 78.5-7(기독교)
아들들아, 너희는 아비의 훈계를 듣고 슬기를 깨치도록 마음을 모아라. 내가 너희에게 전해 주는 교훈은 값진 것이니 이 가르침을 잊지 마라. 내가 아버님 슬하에서 어머님께 귀여움을 받던 시절에 아버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던 말씀이다. “내 말을 명심하고 내 훈계를 지켜라. 그래야 네가 복되게 살리라. 지혜를 얻고 슬기를 깨쳐라. 내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잊지 말고 그 말을 어기지 마라.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 지혜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슬기를 사랑하여라. 그 슬기가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
잠언 4.1-6(기독교)
말씀 선집
선은 순식간에 되는 법이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과거로부터 이어받아 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학교에 가서 배워야 됩니다. 뭘 배웁니까? 자고로 역사를 통하여 선의 길을 닦기 위하여 희생한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다가 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희생하고 간 사람들의 역사적 사상을 이어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50.101, 1971.11.06)
그 나라가 흥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역사를 상속받아야 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역사를 상속받을 수 있는 데 상속 받는 데는 어릴 적부터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옛날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나무로 말하면 새순과 마찬가지이므로 역사적인 잔액을 그냥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옛날을 좋아하는 것은 그러한 뜻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코를 질질 흘리며 우는 애기들에게 ‘울지 않으면 옛날 얘기 해 주지’ 하면 금방 울음을 그치고 ‘해줘’ 합니다. 거 참 좋아하거든요. 젖을 먹는 시간 외에는 그것이 제일 좋은 모양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역사를 상속받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천지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8.188, 1970.01.11)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교재가 필요합니다. 나라를 대표해서 가르치려면 나라를 대표한 교재가 필요한데, 그 교재의 재료를 어디서 가져올 것인가? 그 재료는 그 나라를 위해서, 그 백성을 위해서 희생하고 누구보다 고생한 선한 군주와 선한 백성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백성 중에서도 고생한 백성이어야 합니다.
(65.216, 1972.11.19)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이 연결될 수 있는 가망성이 있다면 무엇일 것인가? 무슨 전통이 있다면 무엇일 것이냐 이것입니다. 돈입니까, 지식입니까?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돈 가지고는 내려갑니다. 지식은 없더라도 올라갈 수 있는 그 무엇이 하나 있다면 무엇을 거기다 남겨 두고 싶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정을 영원히 이렇게 똘똘 뭉쳐 하나 될 수 있게 만들기 위한 전통이 있어야 하고, 나라를 똘똘 뭉쳐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전통이 필요하고, 세계를 똘똘 뭉쳐서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전통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사랑을 중심삼은 내용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가정에 있어서는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영원을 그리는 그러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의 사랑이 있다면 그 부모의 사랑은 한 때만 있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을 영원히 이어받으려면 이어받을 수 있는 전통 기반인 자녀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걸 완전히 이어받아서 더 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옛날보다는 나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 대해 교육할 때 ‘너는 나보다 나아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나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은 사람이 되라! 이렇게 강요하는 놀음이 부자지간에 있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라고 할 수 있는 놀음을, 원동력을 일으킬 수 있는 놀음을 누가 해야 되느냐?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됩니다.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그저 할 것을 못하게 하고, ‘네가 이런 사람이 돼야 된다’ 라고 딱 해 가지고 자기보다도 더 잘 되라고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그 길로 때려 모는 것입니다.
(95.49, 1977.10.23)
선생님은 일생 동안 그런 싸움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싸워 온 모든 기반을 공짜로 여러분들이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 대신 전통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죽어도 이렇게 죽고 살아도 이렇게 사는 전통을 이어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전통을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 아들에게, 여러분 남편에게, 여러분 아내에게 교육을 해야 됩니다. ‘우리 남편은 훌륭한 분, 우리 아내는 훌륭한 분’ 이라고 존경해야 됩니다. 부부가 그렇게 되어 가지고 아들딸들 앞에 교육을 해야 됩니다. 올바른 교육을 해야 됩니다. 그 다음 올바른 교육을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실천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3대 원칙입니다.
(113.303-304, 1981.05.10)
경전과 해석
경전은 종교적 지식의 기초다. 모든 고등종교는 창시자가 깨달은 신적 진리와 영적 가르침을 기반으로 정초되었고, 그것이 곧 경전으로 수록되었다. 그러므로 경전은 신앙인들의 삶을 이끌어주는 근간이 된다. 한편, 새로운 개념과 혁신적 신학적 사상이 등장했을 때 경전은 이들을 평가할 수 있는 불변의 기준이고도 하다. 규칙적인 경전 학습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하고 지혜를 얻기 위해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경전을 정확하게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경구 의미에 대한 불일치는 그동안 신앙공동체에서 끊이지 않는 분쟁과 분열을 초래해 왔다. 그 한 원인은 경전이 비유와 상징적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유와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적 분별력과 때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논쟁은 경전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할 것인가, 시대적 풍조에 따라 고려할 것인가이다. 종교는 늘 경전의 문자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영적 통찰력에도 개방적이어서 그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불교 용어로 ‘뗏목’ 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 뗏목을 타고 질곡의 바다를 건너 축복받은 저 땅을 향해서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는 도구라는 의미다. 그러나 경전에 써진 그대로만 의미를 이해하면 앞으로 영적 성장에는 짐이 되기도 한다. 과거의 해석은 새로운 해석에 양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예수님 때처럼 경전 자체가 걸림돌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 장은 하나님의 무한한 진리를 유한한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경전의 한계를 지적하며 마무리하고 있다. 예수, 부처, 그리고 기타 종교 창시자들은 하늘의 진리에 대해 자신들이 알았던 일부만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당시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따라 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권에 살았다. 문선명 선생은 모든 경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 완성을 향한 인류를 선도하기 위해서 시대적인 때와 장소에 따라 허락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하신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하늘의 진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세계는 과학시대에 걸맞게 표현된 새 진리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1. 경전의 규칙적 탐구를 통한 교훈 습득
종교 경전
당신의 법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자나 깨나 나는 그 말씀을 되새깁니다.
시편 119.97(기독교)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그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유능하게 하고 온갖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4-17(기독교)
현자들이 거룩한 말씀에서 보았던 행위들은 세베다성전에 명쾌히 언명되어 있나니,
그대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아, 익혀 준행하라!
이것이 선생의 세계로 가는 그대들의 변함없는 길임을 잊지 말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1.2.1(힌두교)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신명기 6.6-9(기독교)
우리[하나님]는 진리로서 꾸란을 계시하여 그것은 또 진리로서 전해졌니라. 하나님이 그대[무함마드]를 보냄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죄인들을 경고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꾸란을 수시로, 부분적으로 계시함은 너희가 사람들에게 점차적으로 낭송할 수 있게 함이라. 하나님은 그것을 단계적으로 계시하였도다. 말하라. 너희가 그것을 믿거나 말거나 이전에 지식을 자고 있던 자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낭송될 때, 겸손하게 부복하고 경배하여 말하였도다. “우리 주님께 영광이 있으소서. 실로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도다!” 그리고 그들은 엎드려 흐느끼니 그들의 겸손함이 증대되도다.
꾸란 17.105-109(이슬람)
법화경을 읽고 외어 깨우치는 이, 그는 부처의 장엄으로 자신을 장엄하게 하는 이요, 여래께서 어깨로 업어주는 이니라.
법화경 10(불교)
나는 너희에게 신뢰를 주노라. 너희가 그것에 집착하는 한 잘못되지 않으리라. 그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린 밧줄이니 바로 꾸란이다.
다리미 하디스 1(이슬람)
경전과 그것의 취지에 온 마음을 전일하라. 이로써 생사의 윤회가 멎으리라.
아차랑가 수트라 5.122(자이나교)
거룩한 말씀이 스승이며, 이에 대한 지극한 명상으로 내가 그의 제자가 되리니,
불가해한 그의 가르침에 침잠함으로써 내가 미망의 사슬에서 벗어나리라.
아디 그란트, 람칼리 싯다 고슈티 M.1, p.943(시크교)
토라에 힘쓰는 자,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나아가 전 세계는 그에게 빚질 것이다. 그는 친구, 사랑받는 이, 만인의 연인, 인류의 연인으로 불릴 것이다. 그는 겸손함과 경건함의 옷을 입기 때문이다. 토라는 그를 정의롭고 경건하며 올곧고 신실한 사람으로 인도한다. 뿐만 아니라 죄를 말리하고 덕에 가깝게 인도해 준다.
미슈나, 아보스 6.1(유대교)
한 무리가 하나님의 집에 모여 하나님의 책을 연구하고 함께 공부할 때, 하나님이 현현하시고자 자비가 그들을 감싸고 천사들이 그들을 둘러싸도다. 하나님은 그분의 것 가운데 그들을 기억하리라.
알 나와위 하디스 40선 36(이슬람)
두 사람이 함께 앉아 나누는 말이 토라를 따르는 것이면, 쉐키나가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미슈나, 아보스 3.2(유대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마태복음 18.20(기독교)
말씀 선집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앎이 없이는 생길 수 없다. 우리가 경전을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진리를 알아서 믿음을 세우기 위함이다.
(원리강론, 총서)
그러므로 부활섭리를 하시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책임분담으로서의 섭리를 위한 말씀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타락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으로서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만 그 뜻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원리강론, 부활론 2.1)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면 ‘내 말을 듣고 도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것은 불에 태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왜 말씀을 믿지 않으면 심판하느냐? 에덴에서 말씀을 믿지 않아 불신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을 제거하고 이 이상 될 수 있는 믿음으로 말씀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능가할 수 있는 믿음이 없어 가지고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구약성경을 믿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될 때 메시아로 선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믿어야 됩니다.
(69.128, 1973.10.23)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는 제일 슬픈 것을 보아야 합니다. 천국에 대한 내용이나 묵시로 같은 것은 빼놓더라도 제일 슬픈 것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의 가까운 친구가 되려면 그 사람의 제일 슬픈 사정을 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를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내용의 말씀을 여러분이 찾아나가야 됩니다. 그런 말씀이 이 땅 위에 나타나 여러분이 그 말씀을 듣게 될 때는 뱃속에서부터 한없는 설움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뱃속에서부터 통곡이 우러나올 것입니다. 열흘, 백날, 천날 울어도 한없이 울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말씀이 이 땅 위에 나와야 하나님의 복장을 들춰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찾아야 됩니다.
(10.137, 1960.09.18)
하나님이 원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어느 세계를 가든지 훈독회를 해야 합니다. 마을에 찾아가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훈독회입니다. 훈독회를 좋아하면 천국 갑니다. 훈독회를 열심히 하면 영계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훈독하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영계에 있는 신령이 재림하고 영인 재림협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훈독은 영계를 동원하는 길이 됩니다. 성령의 역사도 가정을 바로 세우고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훈독회를 해야 합니다. 훈독회하는 목적이 말씀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닮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훈독회를 통하여 참가정이 하나 되는 것처럼 우리도 훈독회를 통하여 참가정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321.32, 2000.02.14)
2. 비유로 가르치는 경전
종교 경전
우리(하나님)는 이 꾸란 속에 사람들을 위해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했노라, 그들이 충고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꾸란 39.27(이슬람)
일체중생이 그 마음속에 온갖 다양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역량에 따라서 그러한 욕망들이 다양한 추론들, 우화적 표현들과 방편들로써 극복될 수 있는 다양한 법을 설하였다.
법화경 2(불교)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에, 예수의 주위에 둘러 있는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그 비유들이 무슨 뜻인지를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이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마가복음 4.10-12(기독교)
‘리그 베다’ 의 그 불멸의 존재, 모든 신들이 거하는 에테르 같은 자아를 모르는 자에게 ‘리그 배다’ 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직 그것을 아는 자들만이 만족 속에 머문다.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 4.8(힌두교)
성서의 이야기들은 토라에 덧입혀진 옷들일 뿐이다. 그것들을 토라 자체로 이해하는 이들이여, 안타깝도다!
조하르, 민수기 152a(유대교)
그 분은 너에게 성서를 내려주신 분이시니라. 그 안에는 성서의 근간을 이루는 분명한 말씀과 (여러 해석을 할 수 있는) 불명료한 다른 것들이 있노라. 빗나간 마음을 가진 자들은 불명료한 것들을 채택하여 혼란을 구하고 멋대로 해석하노라. 그러나 하나님과 단단한 지식의 토대를 가진 자 이외에 참 해석을 하는 자는 없으며 그들이 말하기 우리는 우리의 주님으로부터 온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 이외에 아무도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노라.
꾸란 3.7(이슬람)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마음대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원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20-21(기독교)
만약 네가 네 마음의 거울에서 악의 먼지를 닦아 낸다면, 너는 모든 섭리에서 명백해지는 만유를 포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계시된 상징적 언어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신성한 지식의 신비를 깨닫게 될 것이다.
카타브 이 이칸 68-69(바하이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암시하여, 어느 시대 어떤 환경의 사람이든지, 자유롭게 그 지능과 심령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시대적인 요구를 깨닫도록 하시기 위하여, 모든 천륜의 중요한 문제들을 상징과 비유로써 교시해 나오셨다(요 16:25). 그러므로 성서는, 각각 그 정도의 차는 있지만, 모든 해석자들에게 상이한 관점을 세워 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교파가 분열되는 주요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 관점을 어디에다 두는가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원리강론, 재림론 2.1)
오늘날 신랑이 신부를 찾아 나오기 위한 편지체로 쓰인 성경의 말씀에는 암호가 많습니다. 왜 암호로 말씀했는가? 심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누구나 다 풀지 못합니다. 못 풉니다. 신랑 신부만이 풀 수 있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한 자만이 풀 수 있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못 풀게 돼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암호의 정체가 무엇이뇨? 신랑이 올 수 있는 문을 여는 비결인데, 그 비결은 무엇인가. 심정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어린 아기를 품고 젖을 먹일 때나 그 자식의 머리가 세어서 백발이 되었을 때나 같습니다. 그 심정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성경에 숨어 있는 모든 심정의 근원을 헤쳐내야 되겠습니다.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데는 학, 박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암만 해석해도 학설은 지나나고 지나갑니다. 심정은 논리로써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론으로도 체휼할 수 없습니다. 체계로써 방향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심정은 천륜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이란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심정의 흐름과 느낌을 갖고 해석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학, 박사가 주장하는 현대의 신학사조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심정의 세계는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왈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합니다.
(8.305-306, 1960.02.14)
옛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연은 제1의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제2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엮어온 성경을 보면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을 보고 선생님이 얼마나 머리를 흔들었는지 압니까? 그것은 점쟁이들이 점하는 것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래서 사실의 내용을 판단하고 전후사정을 가려내려면 힘이 들기에 성경보다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세계가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20.271, 1968.07.07)
구약성경의 말라기는 신약성경의 계시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책이냐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사탄나라에 의해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이 세계에 하나님이 정보원을 보내어 그를 통하여 뜻을 발전시켜 사탄세계를 들이받고 사탄을 추방하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낼 적마다 사탄이 잡아 죽인 것은 사탄이 주관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종교인, 더욱이 유대교인과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준 사탄세계에 대한 정보원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싸우게 될 때에 서로가 원수의 나라에 정부의 정보원을 알게끔 해서 보냅니까? 전부 비밀리에 암호를 가지고 통고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암호는 이것을 지시한 CIA의 국장 한 사람밖에 모르는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암호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끝 날에 대한 것은 천사도 모르고 자기도 모른다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끝 날에 암호를 풀 수 있는 또 다른 예언자를 보내는 것은 틀림없이 이론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모스 3장 7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그의 은밀한 뜻을 그의 종 선지자에게 나타내지 아니하고는 섭리하자 않으신다는 것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하고 직접 통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와야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 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밀실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담판기도 하라고 가르쳐 줬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성경은 암호로 기록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을 함부로 풀다가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성경에 대해서 기독교는 뭘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주님의 뜻을 받들어야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자들이 ‘내가 믿고 천국가자, 나 혼자 구원 받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의 책임은 내가 구원받는 것도 물로 목적이 되겠지만 그 구원을 받아 세계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73.207-208, 1974.09.18)
3. 영혼의 통로에 불과한 경전의 문자에 집착하지 말자
종교 경전
주 마하비라께서 가우타마에게 말했다. “다르마가 현자들에 의해 직접 현시되지 않을 때, 그것은 말이라는 쇠 그물을 통해 나타난다. 추측은 그 창문을 덮는 쇠 그물이다. 다양한 종파와 학파는 그와 같은 간접적인 통찰에서 나온다. 기우타마여, 그대에게 제시된 길은 현자의 직접적인 길이다. 부지런히 정진하여 다르마를 보는 현자가 되어라.”
웃타라디야야나 수트라 10.31(자이나교)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린도후서 3.6(기독교)
마하마티여,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나 딸이 언어에 집착하지 않도록 잘 유념하게 하여라. 언어란 그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는 문자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을 쳐다보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라. 어떤 사람이 손가락 끝으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그 손가락 끝이 곧 가리켜지는 대상이라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말이라는 그 손가락 끝에 바로 그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며, 손가락 끝에 불과한 말에 집착하는 성향 때문에 궁극적 실재를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 손가락 끝을 보면서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스스로 열심히 정진하여 의미 자체를 파악하도록 하여라.
능가경 76(불교)
통발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있으면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게 된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기 위해 있으며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를 잊게 된다. 말은 생각을 전하기 위해 있으며 뜻을 알고 나면 말을 잊게 된다. 나도 어찌하면 말을 잊은 사람을 만나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까?
장자 26(도교)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여행 중이었다. 그는 큰 물결이 넘실대는 강을 만났다. 이쪽 언덕은 위험하지만, 건너편 언덕은 안전하고 위험이 없다. 건너편 언덕으로 가는 나룻배도 없었고 다리도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 강은 폭이 넓고 수량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쪽 언덕은 위험으로 가득하지만, 저쪽 언덕은 안전하고 전혀 위험이 없다. 건너편으로 가는 배도 없고 또한 다리도 없다. 만일 내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모아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노력하여 저 언덕으로 건너가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모아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저어 안전하게 건너편 언덕으로 건너갔다.
건너편 언덕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생각했다.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뗏목의 도움으로 나는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노력하여 안전하게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내가 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간다면 좋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가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건너편으로 건너가 언덕에 닿았을 때, 만이 그가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뗏목의 도움으로 나는 두 손과 두 발로 열심히 노력하여 안전하게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이 뗏목을 뭍에 끌어올려 놓거나 정박시켜놓고 어디든 가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뗏목과 유사한 가르침을 설했다. 나의 가르침은 건너기 위한 것이며, 결코 짊어지고 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 가르침이 뗏목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설사 선법이 대해서조차도 집착을 버려야 한다. 선법에 대해서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악한 일들에 대해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맛지마 니카야 1.134-35(불교)
말씀 선집
타락된 인간은 신령에 대한 감성이 극히 둔하기 때문에, 대개 진리 면에 치중하여 복귀섭리 노정을 따라 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은 흔히 낡은 시대의 진리 관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복귀섭리가 새로운 섭리의 시대에로 전환하고 있어도 그들은 이 새 시대의 섭리에 쉽게 감응하여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집착되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신약시대의 섭리에 호응할 수 없었던 역사적인 사실은 이것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나 기도로써 신령한 것을 감득할 수 있는 성도들은 새 시대의 섭리를 심령적으로 알게 되므로, 낡은 시대의 진리 면에서는 상충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신령을 따라 새 시대의 섭리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는 구약성서에 집착된 인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마음에 느껴지는 심령을 따라간 사람들뿐이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말세에 있어서 극심한 심령적인 초조감을 면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막연하나마 신령을 감득하여서 마음으로는 새 시대의 섭리를 따르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에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령 적으로 이러한 상태에 처한 신도들이 그들을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주는 새 진리를 듣기만 하면, 신령과 진리가 동시에 그들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쳐서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요구를 완전히 인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마론 5.2)
4. 경전은 하늘 진리의 한정된 부분을 교시
종교 경전
만일 땅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펜이고 바다와 일곱 대양을 더하여 그것을 돕는다 하더라도 (잉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할 수 없으리라. 실로 하나님께서는 강하시고 현명하시니라.
꾸란 31.27(이슬람)
통찰력 있는 바라문에게 모든 경전들이란 사방에 홍수가 났을 때 물탱크 정도에 불과하다.
바가바드기타 2.45-46(힌두교)
항아리에 담긴 바닷물은 바다라고 부를 수도 없고 바다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다만 바다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절대 진리에서 나온 하나의 교의는 진리라고 부를 수도 없고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비디야난디, 탓트바르타슬로카바르티카 116(자이나교)
말은 네 방면에서 가늠된다.
지혜로운 자는 이 네 구분을 아는 통찰을 지닌다.
비밀 속에 감추어진 세 방면은 아무런 움직임도 야기하지 않는다.
네 번째 방면은 사람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리그 베다 1.164.45(힌두교)
우리가 가진 토라는 하늘 지혜의 불완전한 형태이다.
창세기 랍바 17.5(유대교)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16.12-13(기독교)
모든 시대에 성서가 있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삭제하시며 원하시는 대로 확정지으시니 성서의 근원이 그분에게 있노라. 우리(하나님)가 그들에게 약속한 것의 일부를 너에게 보여준다거나 또는 우리(하나님)가 너를 불러들인다고 해도 너는 오직 메시지를 전 달할 뿐이며 계산은 우리가 할 것이니라.
꾸란 13.38-40(이슬람)
홀로 명상 중에 있던 존자 말룽키야풋타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견해들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제쳐두고 배척하셨다. 즉 세계는 영원하다든가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계는 무한하다든가 세계는 무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육체는 육체고 영혼은 영혼이라든가, 성자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성자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세존께서는 이에 대해 내게 말씀하지 않았다. 세존께서 이에 대해 나에게 소상하게 일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말룽키야풋타야, 만일 어떤 사람이 독이 진하게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나 친척들이 와서 그를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런데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이 전사계급인지 바라문계급인지 평민인지 아니면 천민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의 이름과 성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 중간인지 알기 전까지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의 피부색이 검은지 거무튀튀한지 노란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또는 그가 ‘나는 나를 쏜 사람이 어떤 마을이나 읍내 또는 도시에서 왔는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말룽키야풋타야, 그러면 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알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룽키야풋타야,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세존께서 세상이 영원하다든지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든지 하는 등에 대해 나에게 설명해 주기 전에는 세존 밑에서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로부터 그 설명을 얻기 전에 죽을 것이다.
종교적인 삶은 세계가 영원하다든가 세계가 영원하다는 교의에 의지하지 않는다. 세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교의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가 영원하다든지 세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교의를 가지든 아니든 태어남, 늙음, 족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있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지금 여기서 파괴할 것을 가르친다... 그와 같은 견해들에 대해 답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고, 종교의 본질과도 무관하며, 욕정에 대한 혐오나 억제, 지멸, 적정, 초세간적 능력, 궁극적 지혜, 그리고 열반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맛지마 니카야 1.426-431(불교)
말씀 선집
신령과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지만, 무지한 상태로부터 점차적으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나 방법은 시대를 따라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이 아직도 몽매하여 진리를 직접 받을 수 없었던 구약 전 시대에는 지닐 대신으로 제물을 드리게 하셨고,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짐에 따라 모세 때는 율법을, 예수님 때는 복음을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지 않고, 그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 14:6).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진리 되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어서 그 말씀을 받는 대상에 따라서 그 범위와 정도와 방법을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의 문자는 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요,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입각해 볼 때, 신약성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있어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대단히 저급하였을 대의 인간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 주셨던 하나의 과정적인 교과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사람들은 깨우치기에 알맞도록 주셨던,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비유 또는 상징적인 표현 방법 그대로를 가지고 현대과학 문명인들의 진리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의 지성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보다 고차적인 내용과 과학적인 표현 방법에 의한 것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1)
이성적 지식과 영적 지혜
이성적 지식과 구원과 교화를 위한 영적 진리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세상의 유용한 이성적, 개념적 지식들이 영적 구도자들에게 항상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지식이 지나치면 도리어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얻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깊게 파인 골이 있는 것처럼, 현세 철학의 개념적 체계와 종교의 영적 진리 추구에도 그런 간격이 존재한다. 세속적 학습을 중시하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세계의 경전들은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지 점검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주제는 배움의 습득 방식이다. 이성적 지식을 습득하는 사람들은 감각 자료의 인식과 이론의 합리적 체계화를 통해 지식을 학습하는 반면, 영성에 밝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 대한 직관과 감수성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다. 이성에 의존하는 것은 영적 구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많은 종교 수행, 예를 들어 선불교의 수행에서는 이성 차단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선불교에서 한 수도자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하자. 이 사람이 질문으로 혼란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때는 모든 해답이 개념적 이해를 넘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러나 문선명 선생은 이성과 영성 두 길 모두가 천국에 이르는 길이며, 둘 사이의 균형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세속적 지식과 종교적 진리의 대립에 대해 다시 언급하고 있다. 특히, 영적 지혜를 통해 방향성이 정립되지 않았을 때 무분별한 과학기술이 초래할 수 있는 병페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과학과 모든 속세의 지식들은 문선명 선생의 말씀 ‘절대가치’를 통해 갈 길을 인도받아야 한다. 절대가치란 온 인류와 모든 존재자를 이롭게 하는 하나님의 참사랑이다.
1. 구원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성적 지식
종교 경전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관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압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고린도전서 8.1-3(기독교)
방금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은 진실로 나를 꾸짖으셨다.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책을 보는 것이므로 광야의 어디로 떠나라. 책은 네가 가 f길을 방해하므로 너의 앞날은 처량하기 때문이다. 네가 백인처럼 사는 것을 보니 아무런 환상도 네게 나타나지 않을 것 같구나.“
델리웨어족의 증언(미주 원주민 종교)
책을 쓰려면 한이 없는 것이니 너무 책에 빠지면 몸에 해롭다.
전도서 12.12(기독교)
지식으로 쌓은 수천수만의 공적도 저승길을 동반하지 않으리라.
아디 그란트, 자푸지 1. M.1, p.1(시크교)
참된 목적으로 자아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이다. 그 외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무지이다.
바가바드기타 13.11(힌두교)
신의가 있는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신의가 없다.
선량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선량하지 못하다.
진실로 앎이 있는 사람은 박식하지 못하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도덕경 81(도교)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 중에서 오직 마음만이 주인이로다.
이런저런 해석을 따라 형상들을 파악함으로써 그것은 미혹되며 실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네. 이 세상의 모든 철학들은 정신적 날조에 지나지 않네.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교의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네.
대방광불화엄 10(불교)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0-25(기독교)
랍비 엘리자르 히스마가 말했다. “새를 제물로 바치고 여성을 정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천문학과 기하학은 부차적 지식일 뿐이다.”
미슈나, 아보스 3.23(유대교)
예언자와 성현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고 거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마이모니데스, 당황한 자들의 지침서 1.32(유대교)
인간의 철학은신을 인간처럼 만들어 왔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인간을 신처럼 만든다. 전자는 실수이고 후자는 진리이다. 형이상학은 물리학을 넘어선다. 그리고 물질은 형이상학적 전제나 결론에 들어오지 않는다. 형이상학의 범주는 오직 하나의 기반인 신성한 정신에 놓여 있다.
과학과 건강, 269(크리스천 사이언스)
말씀 선집
인간의 머리를 중심삼고 이상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뜻길, p.173)
종교의 기원은 철학의 기원과 다릅니다. 철학은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길이지만, 종교는 하나님을 만나 가지고 생활하기 시작하는 길입니다.
(189.70, 1989.03.19)
도서관마다 즐비하게 꽂혀 있는 경서나 철학 서적들을 섭렵한다고 해서 몸과 마음의 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447.163,2004.05.01)
하나님이 알기 위해서 지은 게 아닙니다. 창조이상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걸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창조이상의 뜻, 우리 이상의 목적은 지식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건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14.130, 1986.04.12)
학생 여러분들, 이제 알았으니 이제부터 서울대학에 다닌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난 뭐 훌륭하게 안 봅니다. 일년 동안 공부한다 생각해도 한 주일에 닷새 잡으면 오칠은 삼십오(5X7=35) 서른 다섯 시간, 100날 잡으면 7백 시간입니다. 이것을 24시간으로 나눠 보면 얼마 됩니까? 그래 봐야 며칠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거 가지고 자랑하고, 주제넘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좋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사랑은 순식간에 배울 수 없습니다. 사랑의 실천력이라는 것은 영원을 기준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장구한 세월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1년, 2년에 패스할 수 없습니다. 10년, 20년, 30년, 40년 가도 졸업장을 탈 수 없습니다. 차원이 자꾸 높아져서 뒤로 돌아와 닿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학문을 하게 되면 박사 학위를 딸 수 있지만, 사랑의 철학 과정이라는 것은 무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싫증나고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재미있고 세상의 무엇보다도 행복하고 감사하고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113.324-325, 1981.05.10)
절대적 가치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 정서와 결부되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 자체가 목적이며, 완성이며, 최고가치인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베푸는 사람이 기쁘고, 그것을 받는 사람이 또한 기쁜 것입니다. 원래 사랑은 본성으로 느낌으로써 개체 안에서 싹이 트고 체휼되는 것이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세계는 인식을 통해서 계발되지만 정(情)의 세계는 계발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가치는 지식의 차원이 아닌 절대사랑의 차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1원인자는 우리의 인식 영역 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서적 차원에서 감응 체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입체적 내용이 결핍된 가치는 영원불변하지 못하며 언젠가는 흘러가고 맙니다. 현재까지 여러 갈래의 주의와 사상들은 일면으로는 인류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만, 오히려 인류의 사상체계를 오도하고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끌지 못한 면도 많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 가치체계의 재평가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102.59-60, 1978.11.25
2. 영적 지혜의 습득
종교경전
신에 대한 신앙은 붙들리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격언(신도)
어떤 비구가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없다.” 무몬은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이 오묘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그대는 사유의 길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무문관 1(불교)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복음 4.24(기독교)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물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에서 배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말로 합니다. 곧 신령한 것으로 신령한 것을 설명합니다.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요, 그런 사람은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런 일들이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 분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2-16(기독교)
지식은 다섯 가지, 즉 감관지, 경전을 통한 시식, 투시, 텔레파시, 그리고 전지이다. 이 다섯 가지 지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앞의 두 가지는 간접적인 지식이며, 나머지 세 가지는 직접적인 지식이다. 감관지에서는... 단지 불명료한 것들에 대한 파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투시, 텔레파시, 전지는 직접적인 지식이며, 그것은 감관이나 경전이라는 매개물 없이 생생한 방식으로 영혼에 의해 지각된다.
탓트바르타수트라 1.19-29(자이나교)
말씀 선집
원래 참사랑은 경험을 통해서 얻고, 체휼을 통해서 알게 되어 있습니다. 참사랑은 말이나, 글, 혹은 일반 교육을 통해서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기로 지음 받은 아담 해와는 성장하면서 단계적 생활을 통해서 경험으로써 참된 자녀의 심정, 참된 형제의 심정, 참된 부모의 심정을 체휼하여 완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전체적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창조목적을 완성한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228.209, 1997.03.13)
대개 우리 사람을 보게 되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진리로써 어떤 것을 탐구해서 이치에 맞으면 인정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부정하는 타입의 사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이치보다는 감으로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우리 통일교회 술어로 말하면 영적이다, 지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의 사람, 지적인 면의 사람, 영적인 사람은 내적인 면에서부터 느껴서 외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이요, 지적인 사람은 외적인 면에서부터 느껴서 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가는 종류요, 하나는 들어오는 종류입니다. 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대개 기도를 싫어합니다. ‘아 기도, 기도가 무슨 필요 있느냐?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어떻게 하노?’ 실감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그걸 딱 생각하면 미신 같고, 믿을 수 없고 자기 자체가 부정되는 것 같고, 이런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건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이론을 따져서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 동시에 나면서부터 ‘하나님!’ 하는 말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좋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게 되면 밥을 안 먹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감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개 영적인 운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지성적인 사람은 못 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봅니다. 대개 신앙세계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미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이야 어떻든 느끼는 대로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해보는 것입니다.
하다 보니 그것이 실천하는 환경에 백중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럼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일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하늘의 영적 벼락을 한번 맞고 나서 돌아버렸습니다. 그러니 외적으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내적으로 이렇게 폭발적인 느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부를 부정하고 그것을 존중시한 것입니다. 거기서 새로운 기독교의 혁명의 기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이 두 종류가 있는데, 나는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개 영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크지만 진리면에서는 뾰쪽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처음에는 굵지만 끝이 뾰쪽해지면 이것은 시종여일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못 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반드시 굴러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진리는 크지만 영적인 면이 이렇게 작다면 이것이 영원히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하는 생활을 우리는 해야 됩니다.
기도와 진리, 영적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행을 만들어서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와 육계를 조정해야 됩니다. 영적 세계의 중앙에 서야 될 것이요, 진리 세계의 중아에 서 가지고 중심적 자리에서 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76.136-137, 1975.02.02)
타락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신령과 진리로써(요 4:23) 그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쳐서 그의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여 나간다. 신령은 무형세계에 관한 사실들이 영적 오관에 의하여 영인체에 영적으로 인식되었다가 이것이 다시 육적 오관에 공명되어 생리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진리는 유형세계로부터 직접 인간의 생리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도 영육 양면의 과정을 거쳐서 오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이 합해야만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적 과정에 의한 신령과 육적 과정에 의한 진리가 완전히 조화되어 심령과 지능이 아울러 깨우쳐짐으로써 이 두 과정을 통해 온 양면의 인식이 완전히 일치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피조세계에 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5.1)
3. 영적 지혜의 결핍과 고도로 발달한 지식의 위험
종교 경전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생활을 해서,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거든, 여러분은 헛되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아니라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3.13-17(기독교)
지식에는 거룩한 것과 사악한 것 두 종류가 있을을 진정 알지라. 하나는 거룩한 영감의 샘에서 솟아나오나, 다른 하나는 헛되고 모호한 사상의 반영일 뿐이라. 거룩한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사악한 지식의 동인은 이기적인 욕심의 속삭임이라.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이 네게 가르쳐 주시리라”라는 원리에 의해 안내 된다. 다른 하나는 “지식은 인간과 그 창조주 사이의 가장 비통한 장막이다”라는 사실의 확인일 뿐이다. 거룩한 지식은 인내와 열망과 참된 이해의 결실과 사랑을 낳는 반면, 사악한 지식은 오만과 허영과 자만심만을 낳을 뿐이라.
키타브 이 이칸 69(바하이교)
위에 있는 자가 진심으로 지혜만을 좋아하고 도를 알지 못한다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어째서 그러함을 아는가? 대체 활, 쇠뇌, 그물, 수살, 덫, 새를 잡는 올가미 등을 이용하는 지혜가 많아지자 새는 하늘 위에서 어지럽게 날게 되었다. 낚시, 미끼, 그물, 반두, 통발 등을 이용하는 지혜가 많아지자 물고기는 물속을 어지럽게 헤엄치게 되었다. 덫, 그물, 올가미, 토끼그물, 함정 등을 이용하는 지혜가 많아지자 짐승은 늪 속을 어지럽게 뛰어다니게 되었다. 지혜, 거짓, 비방, 원한, 위선, 교활, 견백(堅白)의 궤변, 논쟁, 동이(同異)의 궤변 등이 많아지자 세상의 습속은 그 변론에 현혹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천하는 언제나 큰 혼란에 빠지는데 그 죄는 지혜를 좋아하는 데 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알지 못하는 일을 추구할 줄은 알면서도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일을 추구할 줄 모른다. 모두 그가 좋지 않게 여기는 일을 비난할 줄을 알면서도 그가 이미 좋다고 생각한 일을 비난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세상은 크게 혼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위로는 해와 달의 밝음을 가리고 아래로는 산과 강의 정기를 소멸시키며 가운데로는 4계절의 변화를 무너뜨렸다.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는 벌레에서부터 퍼덕거리며 날아다니는 새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 본성을 잃고 만다. 지혜를 좋아한다는 것이 이토록 천하를 혼란하게 하다니 참으로 심하도다!
장자 10(도교)
말씀 선집
우리는 오늘날의 제 과학과 철학들이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해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자연과학이 해온 위대한 약속들은 번번이 악한 방향으로 쓰여 졌고, 인류의 참된 행복만을 위해서 쓰이지 못했습니다.
사회과학 분야도 이기적이고 당파적인 정권들의 영향 하에 너무 부패되어서 많은 경우에 역기능을 발휘하여 왔습니다.k 철학 역시 선이나 인간의 궁극적 이상을 향한 위대한 추구를 포기해버린, 생명을 잃은 학문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학자들의 무기력과 소극적 자세로 말미암아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연구 업적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적극적인 지도를 요하는 세계의 요청에 응해야 한다고 봅니다. 세계는 바른 가치관에 의해서 주체역량을 행사하는 학자들의 책임성 있는 실천을 요구합니다.
(170.269-270, 1987.11.27)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창조목적에 부합하는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원래 거대한 가치관을 소유해 온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가치관을 무시하고 과학의 만능성을 믿고 그것을 만병의 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과학기술은 점점 공해를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과학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단순한 수단이며 목적일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영과 육의 결합체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육적 생명을 바탕으로 해서 가치 있는 인생, 곧 사랑과 진리와 선과 미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편의적으로 말하자면 과학기술은 영적 생활에 부합되고 육적 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치 있는 생활을 강조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과학은 도리어 가치관의 파괴를 가져오며 오늘날과 같은 공포와 불안의 현실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 불안한 현실에서 인간을 구하는 것은 진정한 가치관을 추구하고 발견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은 말할 것도 없이 절대가치에 기인한 이 가치관에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절대가치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진리와 선과 미가 곧 절대가치입니다. 결국 과학기술의 악용에 따르는 피해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은 과학 자체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방향에 그 기술을 응용할 때에 가능합니다.
(106.53, 1979.11.23)
케임브리지에 갔더니 옛날 고전 서직이 몇 만권 있다고 자랑하고 그래서 그걸 공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하고 가만히 보니, 공부하는 사람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지키는 사람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힘의 시대가 지나간 다음에는 지식이, 지식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시대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전부 공부 잘하는 녀석이 출세하고 세계를 움직인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공부, 공부 그랬지요? 다음에는 요즘에 와서는 돈, 돈. 지식보다도 돈, 돈 합니다. 학자가 열심히 머리가 빠지도록 공부를 해도 월급이 적으니 노동자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학자 해서 뭘 하느냐 이렇게 돼 가는 것입니다. 돈이 세계를 지배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빠지도록 공부해서 뭘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 벌고 돈 많이 받으면 좋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시대가 지나가고 지금은 돈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사탄이 제일 원하는 세계입니다.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도 그렇습니다. 세상 지식, 과학을 알다 보니 하나님에 대해 다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철학이, 지식의 왕등골 같은 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이 전부 무신론이 되었고, 신학 자체도 하나님이 죽었다고 합니다.
종교는 머리와 같은데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조상이 원숭이다. 하나님이 조상이 아니라 원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고 원숭이가... 하나님이 조상인데 변해 가지고 원숭이가 조상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거 얼마나 떨어졌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볼 때 ‘하하, 이거 좋구나!’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러니 방망이를 들고 ‘이놈의 힘아, 이놈의 지식아, 이놈의 물질아’ 하며 들이 때려 부수고 싶다는 것입니다.
(99.103-104, 1978.09.01)
스승
스승은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 언행일치의 선례를 보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수준 높은 행위가 뒷받침 된 윤리적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전수해 주어야 한다. 성숙된 신앙과 풍부한 경험, 학생 개개인의 기질과 흥미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지도하는 분별력까지 스승이 갖추어야할 자질이다. 스승은 자신의 임무가 단순한 지식 전수를 넘어서, 학생들이 삶에 대한 목표를 갖도록 독려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가장 위대한 스승은 부모의 심정을 갖고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듯이 제자들을 훈련하는 사람이다.
가르침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스승은 궁극적 스승, 곧 하나님의 동참자 자리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스승은 가진 것이 없어도 배움을 원하는 이들이 있다면 자신까지 희생해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가르침을 행할 때 언제나 하나님께서 내 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씀을 대신 하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맥락에 따라 마지막 단락에서 가르침을 하늘이 주신 소명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선명 선생께서 목회자들에게 해주신 설교 방법에 대한 조언들도 담고 있다.
1. 훌륭한 스승의 자질
종교 경전
스승들은 합당한 방법으로 그를 훈육한다. 그들은 그가 윤리규범을 확고히 지키게 한다. 그들은 모든 과목의 내용에서 빈틈없이 가르친다. 친구와 동료들에게 그를 잘 소개하고 칭찬한다. 모든 곳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이와 같이 남쪽 방향은 제자에 의해 보호되고 안전하게 된다.
디가 니카야 3.185-91, 시갈로와다 수트라(불교)
아무도 그대가 어리다고 해서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도리어 그대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이들의 본이 되십시오. 내가 갈 때까지 성경을 회중 앞에서 낭독하는 일과 권면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십시오. 그대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들의 모임에서 그대가 안수를 받을 때에 예언으로 그대에게 주신 그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이 일들을 실천하고 그것에 전심전력을 다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하십시오. 그대와 그대의 가르침을 살피십시오. 이런 일을 계속하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12-16(기독교)
비구들이여, 스승은 제자를 그의 아들로 여기며 제자는 스승을 자신의 아버지로 여겨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스승과 제자가 서로 공경하고 존중하며 함께 거함으로써 불법을 닦고 실천함에 큰 진전이 있으리라.
비나야 피타카, 마하박가 3.1(불교)
공중을 날아다니는 흰 깃 왜가리가 끊임없이 둥지 속의 어린 새끼들을 생각하며 온 마음을 그곳에 두듯, 참된 스승은 가슴속에 제자를 품어 잊지 못하며 그로 하여금 신의 사랑에 몰입하게 한다.
아디 그란트, 가우리, M.4(시크교)
공자가 말하길 “덕을 닦지 못한 것, 배움을 강구하지 못한 것, 의를 듣고 옮길 수 없는 것, 착하지 못함을 고칠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근심거리다”고 하였다.
논어 7.3(유교)
말씀 선집
교수들의 단호한 결심과 명확한 가치관에 의한 후진교육이야말로 이 시대의 요청일 뿐 아니라 가르치는 자의 기본자세이기도 합니다. 이점에서는 종교 지도자와 교수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자식을 전달하고 또 연구결과를 교육하는 것만이 아니고 인생을 책임 있게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130.16, 1983.12.18)
나 자신을 좋건 없이 바쳐서 의지할 수 있고, 내 마음과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의지할 수 있으며, 자신을 전부 맡기고도 안심할 수 있는 하나의 목자를 지상에서 맞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천상의 심정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을 인간 앞에 직접적인 관계로 맺어 놓은 것이 부자의 관계입니다.
(4.168, 1958.04.06)
스승은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주인 된 마음을 가지고 내 집을 지키듯 학교를 지키고 학생들을 내 아들딸같이 교육해야 합니다.
(203.308, 1990.06.27)
스승은 부모 대신 사랑으로 제자들을 교육해야 됩니다. 영원한 사랑을 가지고 교육해야 됩니다. 그 학급에서 만나는 그때의 인연만은 아닙니다. 자기가 가르쳐 준 제자에 대해서 일생 동안 잊을 수 없어야 됩니다. 이럴 수 있는 사랑의 인연을 맺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자기의 모든 지식을 사랑과 더불어 연결시키는 스승이 참된 스승입니다. 무슨 생활방편으로 월급을 받기 위해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못 이겨서 안 가르쳐 줄 수 없는, 자기가 생활의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가르쳐 줘야 되겠다는 그런 스승이 되어야 됩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서 자신의 지식을 항상 사랑으로 전수해 주고, 또 그걸 받고 싶은 그런 사제지간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참된 스승이요, 참된 제자입니다.
(127.17, 1983.05.01)
여러분의 학교에 어떻게 하든 자기 제자들에게 올바른 사상을 전수시키기 위해 애쓰는 스승이 있다면, 그는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면서 여러분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권고할 것입니다. ‘나를 위해 순응하지 말고 나라에 대해 순응하라. 나를 위해 잘하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 잘 하기를 바란다.’ 하고 말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그 스승이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어 놓을 것입니다. 이렇게 스승은 자기의 생애를 바쳐서 제자들을 위하여 정성들이고, 부모는 자신의 가치보다도 국가와 세계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자식을 위해 정성을 들이면 그 승의 제자와 그 부모의 아들딸들은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될 것입니다.
(25.98-99, 1969.09.30)
교수들은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사람은 부모를 통하여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개인의 성격과 인격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랑의 학교입니다. 자녀들은 가정에서 부모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교육, 정서교육을 통해 심정의 깊이와 폭을 키웁니다. 이것이 자녀의 인격을 만드는 주춧돌이 됩니다. 또한 가정은 자녀에게 미덕과 규범을 교육하는 학교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은 정서교육과 규범교육을 받은 터 위에 지식교육, 체육, 기술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천도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참사랑을 베푸는 참부모가 되는 동시에 참스승이 되어 심정교육, 규범교육을 바로 시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비록 부모가 참스승임을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자녀는 부모로부터 있는 그대로를 닮고 배우게 됩니다. 부모의 역할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베푸는 참사랑과 부모의 사랑의 생활을 닮으면서 사랑의 인격이 형성되고 영성이 개발되는 것입니다.
(271.80-81, 1995.08.22
2. 학생의 가치를 드러내는 스승
종교 경전
공자가 말하길 “육포 한 속(束, 10개) 이상을 가지고 와서 예를 행한 자에게 내가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논어 7.7(유교)
나는 청년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가난한 집 아이들과 부유한 집 아이들을 똑같이 대한다. 돈을 낼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무료로 가르쳐 준다. 나는 또한 어부이기에 오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이 집으로 가져갈 물고기를 한 마리씩 건네준다.
탈무드, 아니트 24a(유대교)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어 놓고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해서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해서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찍어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누가복음 12.6-9(기독교)
도를 터득한 성인은 노상 모든 사람을 살려 쓴다. 고로 아무도 보리지 않는다. 또 성인은 모든 물건을 잘 활용한다. 고로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습명이라 한다. 그런고로 착한 사람은 착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착한 사람의 거울이라 하겠다. 스승을 높이지 못하거나 제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즉 겸허하지 못하면 비록 안다고 해도 크게 미혹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바로 오묘라 한다.
도덕경 27(도교)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깨닫고 있는 자, 이는 학자라 - 그를 따르라.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잠자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 - 그를 깨우라.
아무것도 모르나 자신이 아무것도 모름을 아는 자는 무지하도다. - 그를 가르치라.
아무것도 모르나 자신이 아무것도 모름을 모르는 자는 악마라. - 그를 피하라.
알 가잘리. 이흐야 울룸 알 딘 59.1(이슬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알지 못해 분발하지 않으면 나는 그를 깨우쳐 주지 않고, 표현하지 못해 더듬거리지 않으면 나는 일러주지 않는다. 한 모퉁이를 가르쳐서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 만큼 반응하지 않으면 나는 더 가르쳐 주지 않는다.”
논어 7.8(유교)
나는 나의 스승으로부터 많은 율법을 배웠고 동료들로부터 더 많은 율법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제자들로부터는 모든 율법을 배우게 되었다.
탈무드, 타아니트 7a(유대교)
세 사람이 길을 갈 때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논어 7.21(유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너희들은 나를 위해 있어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아빠가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엄마 아빠를 위해서 있어라’ 하는 것과 ‘엄마 아빠는 너희들을 위해 있다’ 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참된 부모의 입장입니까? 교사가 학생에게 ‘너희들은 내 월급 보따리를 보급하기 위한 창고다. 그러니 돈을 안 가져오면 모른다’ 하고 야단하는 것과, ‘돈을 안 가져와도 좋고 내가 굶어도 좋으니 너희들을 위해서 나는 가르친다’ 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참된 선생님의 입장입니까?
(104.210, 1979.05.06)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심코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언제나 배고픈 자의 심정이 돼야 됩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그렇게 찾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결국 그 자체는 뭐냐? 내가 언제나 주체가 되든가 대상이 되든가 입니다. 확정적인 주체요, 확정적인 대상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나 찾고 있다는 사실은 시험이라는 것은 학생들이 다 아는 문제를 내느냐, 모르는 문제를 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짜로 일들을 내기 위해서는, 여기에 오십 명 가까이 있지만 이 오십 명이 모를 제목을 뽑는 것입니다. 그것을 문제없이 해치우게 되면 그 교수 분하고 상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보기만 해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에 테스트를 해봐도 누구도 몰랐는데, 그 문제를 푸는 어떤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후계자가 될 수 있는 평가의 기준이 벌이지는 것입니다.
(66.45, 1973.03.18)
하나님은 선생님을 대해서 잔인한 하나님입니다. 맨 아래에서 올라가서 여기 레버런 문이 없으면 하나님이 외로우니... 무슨 시험, 무슨 다 해봐도 그 시험에 패스하고 그렇기 때문에 믿지, 시험을 패스하고 또 시험할 것이 남은 것이 있다면 믿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박사 학위를 주는 지도 교수가, 논문을 잘 썼으면 그 박사가 ‘내가 선생으로 모시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가야 박사 전체가 사인하고 역사에 자랑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교수도 ‘내가 잘 했다’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320.251, 2000.04.16)
3. 하나님과 함께 가르침
종교 경전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6-8(기독교)
그러나 이것이 너희에게는 증언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명심해서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생각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모든 적대자들이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겠다.
누가복음21.13-15(기독교)
눈으로 보는 자가 격언을 남긴다.
이갈라족의 격언(아프리카 전통종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아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설사 듣는다 해도, 대부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에 대해 말하는 자는 놀랍다. 그것을 배우는 자는 총명하다. 훌륭한 스승에게 배워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복되다.
무지한 자가 가르칠 때, 자아에 대한 진리를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확실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을 때 자아에 대한 견해는 각기 다양하기 때문이다. 가장 미묘한 것보다 더 미묘하며, 모든 논리를 초월한다. 자아와 브라흐만을 하나로 아는 스승에게 배움으로써 헛된 이론을 떨쳐버리고 진리를 얻는다.
언설은 그를 드러낼 수 없다. 마음은 그에게 도달할 수 없다. 두 눈은 그를 볼 수 없다. 실로 그를 안 성현들에게 배우는 것을 제외하고, 어떻게 그가 파악될 수 있겠는가?
카타 우파니샤드 1.27-8, 2.6.12(힌두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참사랑을 중심삼은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참사랑을 중심삼은 참스승입니다.
(203.237, 1990.06.26)
여러분이 단에 설 때 ‘내가 단에 선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선다' 는 생활철학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이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자리에서 성인을 대표한다. 나라님을 대표한다. 국민을 대표한다 하는 자리에 서서 선언하는 교육을 해야 됩니다. 나를 본받아라! 본받는 데는 지식이 아닙니다. 나라와 더불어, 성인의 도리와 천리와 더불어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정서적 터전 위에서...
(148.277, 1986.10.11)
기도생활을 하면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 경지가 창세전 하나님의 생각의 경지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경지에서 ‘이렇다’ 하는 내용을 갖고 설명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입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피조물을 창조하시던 입장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반드시 그 말씀과 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9.321, 1970.03.13)
이 세계는 좋은 스승을, 좋은 선생을 원하고, 좋은 부모를 원하는 것입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았으면 최고 부모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요, 최고 교사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도 충만하고 지식도 충만하니 그 누가 끌어 갈 수 있느냐? 사탄이 젊은 사람들을 전부 빼앗으려고 ‘야, 전부 하버드 대학 가라!’ 다음에는 또 ‘사랑하는 사람 찾자!’ 그러지요.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 미국식 사랑은 무슨 사랑일까요? 그것은 틀림없이 사탄이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뭐냐? 하나님이 진짜 선생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고, 하나님이 진짜 어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뭐냐 하면, 무지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지 때문에 타락 했습니다. 타락이 무엇이냐? 자기를 사랑하겠다고 한 것이 타락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사랑을 요구했기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자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하자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102.233, 1979.01.01)
제자의 도리
학생은 가르침을 받으려면 훌륭한 스승을 찾아 그분의 훈련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단순한 자식 수혜자 단계를 넘어 바른 제가가 되어야 한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교육의 핵심적 부분이다. 훌륭한 교육이란 훈련과 지도과정을 통해 학생의 전반적 존재를 구성하고 형성하는 데 관여한다는 의미다.
동양종교에는 스스로가 제자 관계의 전형이 성립되었다. 이 종교들은 말보다 실질적 체험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의학과 다른 학문처럼 오랜 견습기간을 거쳐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하는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단락이 끝날 때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능력차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육이 지능보다 심정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 포도주로 우리를 채워 주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포도주를 담을 포대가 낡았다면 결국 다 터져 버릴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에 당신의 씨를 심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우리 심정의 밭이 돌 같다면 그 씨는 뿌리내리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구도를 걷는 학생들의 최대 과제는 마음의 파편들을 제거해 심정의 밭이 영적 진리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1. 훌륭한 스승의 제자 되기
종교 경전
아무튼 바른 행위에 대해 의문이 있다면, 간특하지 않고 훌륭한 판단을 하며 진리에 헌신하는 위대한 사람들의 실천을 따라야 한다.
타잇티리야 우파니샤드 1.11.4(힌두교)
너의 집이 지혜로운 자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게 하고, 그들 발에 묻은 먼지로 너를 덥고, 그들의 말로 네 마른 목을 축여라.
미슈나, 아보스 1.4(유대교)
길을 알지 못하는 이는 그것을 알고 있는 이에게 묻나니, 들어 그것을 알게 되느니라.
곧장 가는 길을 들어 아는 것, 진실로 이것이 배움의 축복이다.
리그 베다 10.32.7(힌두교)
경외와 물음과 섬김으로써 이것을 알리니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 다가가라. 공경과 헌신의 마음으로 그에게 구하라. 그대에게 지혜를 가르쳐 줄 것이니라. 지혜를 얻으면 그대는 다시는 이와 같이 미혹되지 않으리니.
바가바드기타 4.34-35(힌두교)
내 허물을 지적하고 꾸짖어 주는 어진 사람을 만났거든 그를 따르라.
그는 감추어진 보배를 찾아준 고마운 분이니, 그를 따르라.
그런 사람을 따르면 좋은 일이 있을 뿐 나쁜 일은 결코 없으리라.
남을 훈계하고 가르쳐 깨우치라.
사람들을 불의로부터 구하라.
이와 같은 사람을 선인은 사랑하고 악인은 미워할 것이다.
법구경 76-77(불교)
나는 생각마다 부처의 예를 따르리라. 설령 끝없는 허공이 끝나고, 삼계와 그곳에 사는 모든 존재들의 업과 그들의 슬픔이 끝난다 해도, 내가 부처의 예를 따르고 실천함에는 끝이 없느니라.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생각을 지니며, 신, 구, 의로 짓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도 지치거나 싫증내는 일이 없으리라.
보현행원품(불교)
일어나라! 깨어나라! 위대한 사람에게 가서 배워라, 그 길은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그러므로 지혤운 자들이 말하기를 , 통과하기 어렵고 건너기 어렵다고 했다.
카타 우파니샤드 1.3.14(힌두교)
안연이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선생님의 덕은 우러러보면 더욱 높게 보이고, 뚫어 파면 더욱 굳으며, 앞에 보인 듯이 하다가 홀연히 뒤에 있는 듯하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순차적으로 사람을 유도해 계발시키신다. 학문으로 나를 넓게 해주시고, 예절로 나의 행동을 잡아 주신다. 그만 배우려 해도 그만둘 수 없게 잘 가르쳐 주시므로 나도 모르게 나의 재능을 다해서 좇아가 배우나, 그래도 또한 앞에 우뚝 새로운 지표를 세워 놓으신다. 자꾸만 좇아가지만 끝내 좇아갈 방도가 없다.”
논어 9-10(유교)
그대의 견해가 그대 스승의 것과 같을 때, 그대는 그대 스승의 장점을 깎아내린다. 그대의 견해가 그대 스승의 것을 능가할 때, 그대는 그를 이을 만한 자격이 있다.
무문관 17(불교)
말씀 선집
이 땅에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자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 예수님의 순수한 성품을 소유한 자가 있습니까? 그를 찾아 친구로 삼으십시오. 어디 고결한 자가 있습니까? 글 따르십시오. 어디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고 화동시키는 자가 있습니까? 그를 따르고 모셔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생명의 길을 찾을 것입니다. 또 그분을 따르고 모셨다는 조건으로 심판을 모면할 것입니다.
(2.318, 1957.07.07)
심정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심정의 골짜기 길은 고통스럽고 처참한 길입니다. 스승을 요구하되 지식의 스승을 요구하지 말고 심정의 스승을 요구해야 합니다. 심정의 골짜기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눈물입니다. ‘자기’ 는 없어집니다.
(9.81, 1969.04.12)
선생님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는지 압니까? 어떻게 여러분이 글을 잘 쓰고, 시를 잘 짓고, 명필이 되었습니까? 전부 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알았습니까? 그게 여러분의 것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에 전부 다 선생님으로부터 상속받은 것입니다.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식이나 학문은 사랑하지만, 이것을 전수해 주기 위해 무한한 공을 들인 선생님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사람은 부모에 대해서 은덕을 입은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스승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스승은 제2의 부모입니다. 동양에서는 스승을 제2의 부모라고 합니다.
(104.278-279, 1979.06.01)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여러분을 지긋지긋하게 고생을 시켜 효자 충신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안 가겠다면 후려갈겨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와 너의 생활에 있어서 이것을 아는 사람과 부자관계에 있으면, 형제관계에 있으면, 사제관계에 있으면, ‘부모님 뼈를 가르시오.’, ‘형님 뼈를 가르시오.’, ‘스승님 뼈를 가르시오.’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발길로 차서 현재의 비참함을,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시키는 것이 사랑입니다.
(49.304, 1971.10.17)
‘야, 야, 야, 너 그거 힘든 일할 것 없다. 적당히 하면 되는 거야. 힘든 공부할 필요 없다고. 적당히 해라’ 하는 선생님이라면 그런 선생님은 가짜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선생님이 좋습니까? 왜 그러는 거냐를 생각해봅시다. 지금을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미래를 위해서 그러는 겁니까? 이렇게 하면 장래는 틀림없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93.232, 1977.06.05)
유효원 협회장은 선생님을 따라 나오면서 나를 위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선생님을 많이 생각해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유협회장을 생각하면 ‘그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방에 누워 있다가도 새벽이면 만나고 싶은 정에 이끌렸고, 전해 받은 쪽지 하니까 지도 생명의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내연의 뒷받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런 협회장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33.83, 1970.08.09)
2 자아를 적절히 계발하지 않는 이해는 근원에 이르지 못함
종교 경전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다가 넣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누가복음 5.37-38(기독교)
처음에 그 말을 따라 그 도리를 헤아려 보면, 이미 일정한 법(방법)이 있다. 그러나 만일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면 도가 헛되이 행해지지 않는다.
역경, 계사전, 2.8.4(유교)
마음속에 주인이 될 만한 것이 없으면 [도는] 거기 머물지 않고, 밖에 올바름이 없으면 도는 실행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에서 나가는 도를 밖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인은 나가지 않고, 밖에서 들어오는 도에도 주인 노릇할 만한 것이 안에 없으면 성인은 그것에 의거하려 하지 않는다.
장자 14(도교)
보지만 베다의 말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 듣지만 그녀(베다의 말)를 듣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에게 그녀는 남편에게 잘 차려 입은 사랑스러운 아내 같은,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 보인다.
리그 베다 10.71.4(힌두교)
너희는 이제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무슨 뜻을 지녔는지를 들어라.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가에 뿌린 씨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자갈밭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또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 사람이야말로 열매를 맺되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낸다.
마태목음 13.18-23(기독교)
상등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힘써 그것을 실천한다. 중등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마음에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다. 하들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그것을 크게 비웃는다. 그들에게 비웃음을 받지 않는다면 도라 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도덕경 41(도교)
말씀 선집
선생님도 가만 생각하니, 고생을 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그저 못살게 고생한 것이 뭐냐 하면, 결국은 마음 하나 크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뭐 떤 거 없습니다. 딴 거 없더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크게 해서 뭘 하느냐? 하나님이 들어와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발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발을 집어넣으려는 데 발이 들어오지 못하게 딱 닫혀 있거든요. 그럴 때는 왼발로 차는 것입니다. 이 발로 차는 것입니다. 자꾸 차다 보면 자꾸 늘어나는 겁니다. 자꾸 찬다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한 발이 들어가던 것이 두 발이 들어가고, 두 발이 들어가서는 손이 들어가고, 머리도 처넣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늘어나면 무척 큰 겁니다.
선생님이 우리 어머니를 보게 되면, 홀쪽하던 배가 애기가 있어서 열 달쯤 되면 자꾸 커집니다. 그거 무엇이 그렇게 늘어났다 줄었다... 조그마한 자궁이 말입니다. ‘아휴, 사람 그거, 10파운드 가까운 아기를 물에 담고 크니 얼마나 잘 늘어나겠나? 내 마음 보따리는 그거보다 더 잘 늘어나겠지’ 생각해봤습니다. 자, 여자들의 자궁이 늘어나지 않아서, 애기가 있는 자궁이 늘어나지 않아서 죽는다고 생각해 봤습니까? 그런 것은 생각도 안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과 같은 생명의 씨가 내 마음 보따리에 딱 떨어져서 자라기 시작하면 하나님만큼 클 텐데, 그렇게 큰 하나님을 포괄할 수 있는 내 마음 보따리가 안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납니다. 사람도 큰일 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석 달쯤 자라다가 더 못 커서 유산이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자라다 말고 낙태할 수 있는 마음 보따리에 들어가겠습니까? 거기에 씨를 심겠습니까?
(110.326, 1981.01.04)
배움과 실천
진리를 알고 나서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지식은 신기루처럼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참된 지식은 개념적인 것이 경험적인 것으로 변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이 말은 특히 어려운 수행 과정을 요구하는 종교와 도덕 가르침에 적용된다. 자신을 현명하고 신앙 깊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행동은 달리하는 사람이 바로 위선자이다. 언행일치야말로 진실한 개인의 핵심 자질이다.
스승은 가르치기 전에 먼저 경험해야 한다. 동양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실천하지 못한 지식을 뽐내지 않기 위해 언제나 과묵하고 말을 삼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사업이나 모든 분야에서도 지도자에게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청년시절 온갖 힘든 일을 경험했던 지도자는 부하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기 때문에 그들의 존경과 충성심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종교 경전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지 마시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감상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를 보고 가서도 제 모양이 어떠한가를 곧 잊어버립니다.
야고보서 1.22-24(기독교)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울지라도 이를 행하지 않는 방종한 사람은 다만 남의 소를 세고 있는 목자일 뿐 참된 수행의 열매를 얻지 못한다.
외울 수 있는 경전이 비록 적을지라도 가르침을 따라 행하고 탐욕과 증오와 무지에서 벗어나 바른 지혜와 걸림이 없는 마음으로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의 일에도 탐착하지 않는 이는 마침내 수행의 참된 과실을 얻으리라.
법구경 19-20(불교)
너희의 입 안에 머물러 있는 지식은 매우 피상적이다. 진정한 지식의 장점과 가치는 너희가 실천하는 것이리라.
나흐줄 발라가, 어록 90(시아파 이슬람)
배우는 것이 최고가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 으뜸이다. 말이 많을수록 죄가 많아진다.
미슈나, 아보스 1.17(유대교)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면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엄청날 것이다.
마태복음 7.24-27(기독교)
부활의 날 하나님의 눈에 가장 하위에 있는 자는 그의 지식으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한 식자이니라.
다 리미 하디스(이슬람)
자공이 군자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행하고 그 후에 말하느니라.”
논어 2.13(유교)
무엇이 진리인지 아는 남자나 여자는 알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열심히 실행해야 하며, 그것을 그와 같이 실행해야 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아베스타, 야스나 35.6(조로아스터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가 한 말에 창피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게 실천하기란 어렵다.”
논어 14.21(유교)
말씀 선집
마음 자체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행동해야 하느냐? 행동함으로 말미암아 중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언행일치라는 말은 마음을 대신한 말과 함께 행동이 일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48.89, 1993.08.01)
배운 것은 실천을 하라는 것입니다. 실천은 입체적이요, 종적 횡적이요, 사방팔방으로 넓고 깊습니다. 그것은 저 나라에 가서 생활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하기 위한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248.166, 1993.08.01)
인간은 자유의지와 그에 의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 드리는 실체대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스스로 노력하여서, 그 뜻대로 생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여 그 뜻을 알아 가지고, 그 뜻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1.1)
선생님이 실천하지 않고는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134.203, 1985.07.20)
이제 우리가 할 것은 뭐냐? 교육입니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체험을 하고 얘기해야 합니다. 사실을 가지고 얘기해야 합니다. 들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늘 편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고, 중심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205.130, 1990.07.29)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생각하기는 자기가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고 앞으로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책임자가 되겠다고 할 때는 30세 전까지 전부 경험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것이 선생님이 체험하고 난 결론입니다. 그러려면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모든 재료를 체험을 통해 많이 얻어야 됩니다.
노동판에 가서 일하라는 얘기를 하게 될 때는, 자기가 옛날 어느 때에 심각한 입장에서 흙짐을 지어야 되고 목도를 해야 하는 그런 자리에서 일했던 심정을 느끼면서 그런 얘기를 하게 되면 청중들은 심각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전문가는 자기가 경험한 기반 위에서 모든 것을 풀이하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65.302-303, 1973.03.04)
선생님이 갖은 고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체험한 후 결론을 짓게 된 것입니다. 말뿐이 아닙니다. 실험을 해봤습니다. 실험을 다 해보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