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세계로의 통로 2 (세계경전 - 제1부 하나님과 창조 - 제5장 죽음 이후의 삶과 영계)

훈독왕 | 20180327071411

세계경전 - 제1부 하나님과 창조 - 제5장 죽음 이후의 삶과 영계


 저 세계로의 통로


2. 사후 생의 첫 순간

종교경전


지금 당신이 지니고 있는 몸은 성향과 기질로 이루어진 심체라고 부른다. 당신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를 지니지 않으므로, 어떤 소리가 들리든 어떤 빛이나 광선이 오든, 또는 이 셋이 오든, 그것은 당신을 해칠 수 없다. 당신은 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환영들은 당신 자신의 사유 형태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곧 사후의 바르도(사후의 중간 영계)임을 인식하라
티베트 사자의 서 (불교)

세상을 떠날 때 영혼은 어떤 여정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선택받은 영혼들을 위한 찬란한 그 길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에서 행업이 영혼의 갈 길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거룩한 그분을 향하고 주를 향한 갈구함으로 가득 찬 사람은 영혼이 길을 떠날 때 이승에서 주어진 힘에 따라 더 높은 권을 향해 이끌릴 것이다.
조하르 1.99 a-b(유대교)

영생을 준비시킬 목적으로 주어진 이생이 지나며, 보라! 우리가 생을 누릴 동안 시간을 활용하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어두운 밤이 다가오느니라.
너희가 긴박한 위기에 처하고 난 뒤에는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고 할 수 없으리라. 참으로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없으리니, 이 생애에서 너희 육신을 다스린 그 영이 영원히 세상에서도 너희 몸을 다스리리라.
몰몬경, 앨마서 34.33-34(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죽음의 순간에 나만을 염하는 이들은 나에게 오리니, 이를 의심치 말라. 마지막 순간에 마음속에 기리는 것, 그것이 죽는 자의 운명을 결정하나니, 이는 그들이 언제나 그 상태에 젖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나를 염하라…
죽음의 순간에 나를 염하라. 모든 감각의 문을 닫고 의근을 가슴속에 가두라. 명상에 잠겨 모든 생명력을 정수리에 집중시키라. 이러한 상태에서 거룩한 소리 ‘옴’을 반복하라. ‘옴’은 불멸의 브라흐만을 의미하느니라. 죽음의 순간에 나를 염하라. 그대는 육신을 벗고 궁극의 경지를 얻으리라.
바가바드기타 8.5-7, 12-12(힌두교)

말씀선집


가다가 자동차 사고가 나서 대번에 즉사했을 때 자기가 죽은 줄 모릅니다. 영계에 가면 ‘아이고, 이상한 곳에 왔는데? 여기가 우리 동네보다 더 낫네. 없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있네’ 그러는 겁니다. 광활한 천지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죽은 줄 모른는 것입니다. 자기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보고 싶어야 나타나지 부르지 않으면 안 나타납니다. 혼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계에 가게 되면 영계에서 안내하는 사람들이 와서 가르쳐 줍니다. ‘당신이 저승에 왔다. 죽었다, 죽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인식되지 않습니다. 꿈같이 아스라이 자동차하고 부딪친 것은 느껴지는데 죽었다는 생각은 안 하게 됩니다. 거기 가서 죽은 것을 모르고 있으니 어벙벙합니다. 감을 못 잡습니다. 자기 집에 가려고 ‘나 고향에 가야 할 텐데’하면서 고향에 가려고 합니다. 지상 고향에 갈 수가 있습니까? 고향에 갈래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와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몇 대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가 와서 ‘너는 지상세계가 아니고 영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아, 영계가 이런 데로구나’ 하는 것입니다.(194.41-42, 1989.10.15)

우리의 인생살이가 비단 70년 일생으로 끝난다면 별 문제지만, 영원한 문제를 중심삼고 살아 나간다 할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영계가 있고, 사후에 영계에 가게 된다면 무엇을 가지고 생각할 것입니까? 그 세계는 광대한 세계입니다. 그런 세계에 들어가면 대번에 느끼게 됩니다.

이 땅에서 민족간의 차별이 있고, 배후에 문화적인 격차라든가 상충적인 생활상, 부대끼며 살고있는 거기서도 자기를 내세워 가지고 모든 것을 수습하고 싶고,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가치를 남기고 싶었던 과거지사가 그 옛날에 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 세계에 가서도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환경이 자기가 측정하고 자기의 생각권 내에 자유로이 흡수할 수 없는 방대한 세계면 세계일수록 더더욱 그리워지는 것이 고향 땅, 혹은 지구성의 살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영계에 가서 영원한 세계를 그려 가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언제 가서 그것을 잊어버리겠습니까? 

그 세계에 가서 만나는 사람은 전부 생소한 사람입니다. 그런 생소한 환경에서 내가 만일 홀로 섰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생각하게 될 때 자기가 그리는 사람, 지난날의 마음 가운데 뺄 수 없는, 정서적인 면의 관계를 맺었던 모든 인연들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영계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됐겠느냐?’는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187.285-286, 1989.02.12)

내가 만일 사랑의 길을 찾아가다가, 그러한 사랑의 주체를 중심삼고 찾아가는 길에서 불행히 죽었다고 생각합시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죽을 때 ‘나는 사랑의 길을 찾아가다가 죽습니다.’ 라고 생각할 겁니다. 

‘내가 이 사랑으로 인해 죽기 때문에 이 사랑은 내 원수로다’ 이렇게 생각 안 한다는 겁니다. 죽으면서 죽음을 잊고라도 사랑을 품고 죽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품에서 죽는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은 불행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깨진 것이냐? 아닙니다. 사랑의 주체인 하나님이 ‘너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랑을 위해서 죽었구나’ 하며 그 가치를 보다 나은 가치로 인정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 사랑해야 할 길을 위해서 죽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떨 것 같습니까? 부부끼로도, 남편 위해서 죽은 아내를 남편이 만났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혹 형제지간에 형이 동생을 위하고, 동생이 형을 위해서 죽었다 할 때, 그 죽었던 형과 동생이 만났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살아서 만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그것보다 덜 좋아하겠느냐, 더 좋아하겠느냐? 죽지 않고 만나서 사랑하던 것과 서로가 주기 위해 죽어 가지고 만났을 때 사랑의 강도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죽지 않고 만나서 사랑하는 차원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겠느냐?’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위해서, 선생님 때문에 죽었는데,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고 이 다음에 죽어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가?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길에 있어서 죽음이 문제가 되겠느냐? 죽음까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의 길을 찾아 간다고 해서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높은, 보다 가깝고 보다 영원할 수 있는, 보다 하나 될 수 있는 사랑의 세계로 돌입하는 하나의 관문이 된다고 행각하게 될 때, 그 죽음이 무서운 것이냐?

그런 경지를 찾아가는 사람은 죽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자리를 발견하고, 그러한 길을 확정지어 가는 사람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면 그 행복한 사람에게 동정 받아야 되겠습니까, 동정해야 되겠습니까? 그 사람을 동정해 줘야 되는 건 틀림없는 것입니다.  (67.173-174, 1973.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