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전 - 제1부 하나님과 창조
제1장 하나님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인간은 어떻게 궁극적 실재를 알 수 있는가? 철학자들은 항상 이 문제에 대해 탐구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비록 이와 같은 논의는 이 선집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떤 종교의 경전에서는 이 논의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어디엔가 남겼으며, 만일 사람들이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이르는 첫 번째 길은 피조물 속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찾는 것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연구하면 할수록 자연을 설계한 어떤 제작자의 존재를 증거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발명가인 토머스 에디슨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단언하건대, 우주에는 우주적 지성이 충만해 있다. 이 세계의 배후에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은 채 자연의 신비함과 긴밀하게 교감한다든가 과학을 탐구한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초월적인 우주적 지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나님에 이르는 두 번째 길은 하나님의 실재를 감지할 수 있는 내면적 자아를 통해 도달하게 될 명상의 길이다. 하나님은 지성이 아니라 신비로운 방식으로 감지된다. 블래즈 파스칼은 “하나님은 이성이 아니라 심정으로 감지된다.”고 말하였다. 문선명 선생도 하나님을 가장 본질적인 인류의 부모라고 가리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부모를 아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직접 체휼해야 한다.
하나님에 이르는 세 번째 유형은 초자연적인 길이다. 극소수의 특정한 사람들만 이러한 초자연적인 원천에 접근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와 같은 체험을 한 사람들을 신뢰할 만한 종교적 지도자로 간주한다. 그들이야말로 영적 세계를 여행한 종교의 창시자들이다.
1. 피조물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흔적
종교 경전
하나님에 관해 알 만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밝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 말하자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창조물을 통해 분명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핑계할 여지가 없습니다. 로마서 1.19-20(기독교)
하나님은 대지 위에, 그리고 그들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예증들을 보여 주리니, 그들이 그것이 진리임을 깨달을 때까지라. 꾸란 42.53(이슬람)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그분이 흙에서 너희를 창조하여 인간으로 번성케 하심이니라.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너 자신으로부터 너희 배필을 창조하여 배필과 함께 안주케 하심이니라. 또한 너희들 마음속에 사랑과 자비를 주셨으니, 생각하는 백성을 위한 분명한 징표이니라.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천지를 창조하고 각기 다른 너희의 언어와 피부색을 만드심이니, 실로 그 속에는 자각하는 백성을 위한 분명한 징표가 있느니라.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너희가 밤에는 숙면을 취하고 낮에는 그분의 은혜로부터 양식을 구하게 됨이거늘, 실로 그 속에는 듣는 백성을 위한 분명한 징표가 있느니라.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너희에게 공포와 희망을 갖도록 번갯불을 보이심이며, 하늘에서 비를 내리어 죽은 대지를 소생케 하심이니라. 실로 그 속에는 지혜 있는 백성을 위한 분명한 징표가 있느니라.
그분의 징표 중의 하나는 이러하니라. 하늘과 대지가 그 분의 명령에 의해 존재함이며, 그분이 언제나 지하의 너희를 부르실 때 너희가 지상으로 나타남이니라.
꾸란 30.20-25(이슬람)
인드라는 일체만유의 기틀이니,
보이는 모든 것이 그의 형상이로다.
인드라는 자신의 창조력으로
온갖 형상이 되나니,
그의 수레에 매어진 군마가 수천이로다.
리그베다 6.47.18(힌두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권능과, 하늘과 땅의 법칙을 보여주어 그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게 했도다. 밤이 되어 어둠이 그를 덮자, 그는 별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주님이다”하고, 별이 지자 다시 그가 말하기를 “나는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함이라”라고 하였다.
그가 찬연하게 떠오르는 달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나의 주님이뇨”하더니, 달이 지자 다시 말하기를 “만약 주님이 나를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분명코 방황하는 무리들 속에 있게 되리라”하였다. 그가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주님이고 만물 중에 가장 위대하시도다”고 하더니, 태양이 사라질 때 그가 말하기를 “나의 백성들이여, 이제야 내가 하나님께 비견할 상대를 두는 너희의 잘못을 분명히 알았나니”라고 하더라.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해 나의 얼굴을 돌렸으니, “나는 결코 하나님과 비견할 우상을 두지 않으리라”하더라.
꾸란 6.75-79(이슬람)
보라, 만물은 각기 닮은 것이 있고, 나를 증거 하기 위해 창조되고 지음을 받았나니, 속세의 것이나 영의 것을 막론하고 우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안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 위에 있는 것이나 아래에 있는 것, 모든 것이 다 나를 증거 하느니라 하셨더라.
값진 진주, 모세서 6.63(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 줍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시편 19,1-4(기독교)
말씀선집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신성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피조세계를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라고 기록하였다. 마치 모든 작품은 그 작자의 보이지 않는 성품의 실체적인 전개인 것같이, 피조세계의 삼라만상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니님이 그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그의 실체대상으로 전개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보아 그 작자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것같이, 이 피조만물을 보아서 하나님의 신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리강론, 창조원리 1.1.1)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왕국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몇 십만, 몇 백만 명이 있어도 아직까지 모르는 것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과 의사는 ‘이제 연구할 것이 없다. 그만둬라’ 할 수 없습니다. 눈에 대해서 전부 다 알 때까지 몇 단계나 갔겠습니까? 초입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과학자들이 하나님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95.123, 1977.11.06)
눈이 생겨날 때, ‘내가 이렇게 생겨나고 싶다’ 한다고 눈 자체가 그렇게 생겨날 수 있습니까? ‘나는 돌아가야 되겠다. 눈꺼풀이 깜빡깜빡하는 그 속에 들어가야 되겠다. 물을 뿌려서 축이는 놀음을 해야 되겠다. 공기에는 먼지가 있기 때문에 여기 눈썹으로 스크린을 만들어야 되겠다’ 이렇게 눈이 생각해서 태어났겠습니까?
속눈썹이 있는 걸로 볼 때, 눈썹이 이 세상에 공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생겼겠습니까, 없다는 것을 알고 생겼겠습니까? 이렇게 된 것을 이미 알고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눈 자신이 알아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벌써 눈으로 생겨날 때 이 우주의 공기에 먼지가 있다는 걸 알고 생겨났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바람이 불고 먼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눈 자체가 알고 생겨났습니까, 모르고 생겨났습니까? 모르고 생겨났지만, 그 자체의 누군가가 알아 가지고 눈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 생긴 복사열에 의해서 수증기가 증발된다는 것을 알고 그걸 방어하기 위한 장치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눈 자체가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눈 자체가 알았습니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생겨나기 전에 이 우주적인 지식을 가진 배경적 관념이 있었다 하는 논리를 추리할 수 있습니다.
(117.78-79, 1992.02.01)
하나님을 상상하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상관하려고 하는 세계적인 조직이 무엇입니까? “종교입니다.” 세계적인 국가가 어떤 국가입니까? 그럼 종교를 분석해 보면 그런 게 있습니까? 없으면 그거 다 하나님이고 뭐고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 속에는 그런 사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사상을 무엇보다도 강력히 주장하고 내적인 내용을 갖춘 그러한 세계적이며 초민족적인 애국사상을, 초민족적인 부자관계의 효자 사상을 지니고 ‘민족을 초월하고 세계를 위해서 가자’고 주장하는 종교가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고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95.53, 1977.10.23)
2. 인간 자체에 내재한 하나님의 모습
종교 경전
눈으로 볼 수 있는 이가 아니며, 언설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이가 아니다.
감관으로도, 고행으로도, 혹은 거룩한 제사로도 그는 알려지지 않으며, 다만 마음이 지혜의 은총을 입어 청정하게 될 때,
명상 가운데 자기를 드러내 보이나니, 그는 부분 없는 일자이니라.
문디카 우파니사드 3.18(힌두교)
도라는 것은 있는 듯 없는 듯 황홀하기만 하다. 황홀하면서도 그 안에 형상이 있고, 그 속에 모든 것이 있다. 깊고 그윽하여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 생명의 본질인 정령이 있고, 그 정령은 심히 진실하여 그 속에서 뻗어 나타난다.
예부터 오늘까지 여전히 도라고 부르며, 만물의 근원을 총체적으로 통솔한다. 우리가 무엇으로 만물의 근원의 실상을 알 수 있는가? 바로 도를 가지고 알 수 있다.
도덕경 21(도교)
오, 지혜의 주여! 나는 당신이
거룩한 분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선한 마음으로 나타났을 때
무언의 생각이 되어, 내게 지고선을 일어 주었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널리 외쳤습니다.
아베스타, 야스나 45.15(조로아스터교)
실로 누가 이것을 아는가? 지금 누가 언명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길이 실로 신들에게 이르게 하는가? 최고의 천상에서 굽어보는 이, 다만 그 존재의 가장 낮은 측면들만 드러나 보이도다.
리그베다 3.54.5 (힌두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귀신의 성정과 공효는 위대한 것이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아니 하되, 만물의 본체가 되어 있어서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귀신은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목욕재계하고 옷을 단정히 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들 위의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그들의 좌우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시경에 ‘신의 강림하심은 사람으로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인데, 사람이 어찌 그것을 꺼리고 피할 수 있으랴!’ 라고 노래하였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잘 감지할 수 없는 귀신의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중용 16(유교)
말씀 선집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은 말 뿐이 아닙니다. 원리를 통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불가피적으로 있어야 된다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으며, 내가 생각하기 전에 있었으며, 내 모든 감각, 나의 일체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식하고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닙니까? 알고 인식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인식하고 알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우면 추운 것을 느껴서 아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이 계시다면 신이 계신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세포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 경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체휼적 입장을 어떻게 우리가 확정짓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58.291-292, 1972.06.25)
하나님은 살아 있습니다. 악마도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과 악마가 살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관념과 실재가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전부다 관념입니다. 추상명사입니다. 양심도 관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랑도 관념입니다. 추상명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관념이 아닙니다. 실생활의 모든 면에서 접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186.67, 1989.01.29)
여러분은 사랑을 갖고 있습니까? 생명을 갖고 있습니까? 혈통과 양심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생명, 혈통, 양심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이것들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으로 느껴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할 때, 또는 하나님을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 물을 때, 못 보았다는 말도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면 마음이 압니다.
(447.154-155, 2004.05.01)
자식을 낳아 보아야 부모님께 진정한 의미의 효도를 할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실천해 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같이 하신다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것입니다.
(29.198, 1970.02.28)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본심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고 본성의 선한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던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변론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자연히 안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뱃속에서부터 젖 먹는 법을 배워 가지고 나옵니까? 나자마자 눈앞에 젖이 있으면 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자동적으로 알고, 자동적으로 해결하고, 자동적으로 가야 할 입장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부 다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의하고 의심하는 결과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참한 사실입니다.
(20.306-307, 1968.07.14)
양자를 중심삼고 전자가 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전자와 같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양자와 같은 하나님 마음의 핵심과 관계를 맺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여 복귀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헤아려 볼 때, 우리가 혼자라도 진리의 말씀을 찾아나간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약동하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이 화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진리의 길을 거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찾아나가는 길이 가치 있는 내가 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2.137-138, 1957.03.17)
여러분이 심정으로 그리는 세계는 어떤 곳입니까? 그 세계는 외계의 감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식 세계에서 빚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 정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아주 작은 하나의 미립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t랑을 느낄 수 있는 정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마 11: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통념적인 감성을 가지고는 주체적이요 원형적인 이념세계를 느낄 수 없습니다.
(7.255, 1959.09.20)
성약시대에는 본 전통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영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본고향이 어디냐 하면 영계입니다. 영계를 모르면 하늘나라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영계를 알아야만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하나님이 살고 계신, 활동할 수 있는 영계를 모르면 안 됩니다.
(365.302, 2002.01.14)
3. 역사 배후의 하나님
종교 경전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요한복음 1.18(기독교)
높은 언덕과 산봉우리와 우거진 참나무를 비롯해 무성한 온갖 나무 밑에서 모든 우상들에게 분향하다가, 거기에서 칼에 찔려 우상들이 서 있는 제단 둘레에 쓰러지게 되어야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지 나는 손을 뻗쳐 그 땅을 리블라에 이르는 사막보다 더 황량하게 만들리라. 그제야 사람들은 내가 여화와임을 알 것이다.
에스겔 6.13-14(기독교)
여호와여, 당신의 온갖 피조물들이 감사 노래 부르고 신도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들어 말하고 당신의 공적을 이야기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공적을 사람에게 알리고 당신 나라의 그 찬란한 영광을 알리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당신만이 만세에 왕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언제나 진실하고,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이도다.
누구나 쓰러지면 붙들어 주시고 거꾸러지면 일으켜 주신다.
모든 눈들이 당신만 쳐다보고 기다립니다. 철을 따라 양식을 주실 분 당신밖에 없사옵니다.
당신께서 손만 벌리시면 살아 있는 모든 것 원대로 배부릅니다.
여호와 가시는 길은 언제나 바르시고,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이도다.
시편 145.10-17(기독교)
말씀 선집
이 절대자는 결코 관념적 존재(觀念的存在)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그 자체를 드러내 온 실재적 존재(實在的存在)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상에 수많은 종교지도자 또는 성현(聖賢)들이 시간이나 장소를 달리하여 출현했던 것을 알고 있으며, 이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양심과 심정에 호소하여 이웃에의 사랑을 실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에 한 민족이나 국가가 순응할 때 평화와 융흥(隆興)을 누렸던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혼란과 쇠망에 빠지곤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이 세계적인 혼란 속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는 현대적인 성현의 출현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대망(待望)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사랑의 주체이신 절대자가 있어서 역사나 현실의 배후에서 종교지도자나 성현들을 세워 그들을 통하여 자체의 사랑을 구현해서 도덕적 가치의 세계를 실현하고자 기획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69.238, 1973.11.26)
한 분 하나님
하나님의 통일성과 유일성은 이 절에서 선정된 구절들의 주제이다. 이 구절들은 유일신론적인 아브라함 계열의 신앙 전통에서 명백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동양의 종교 전통 등, 여러 종교에서 유래한다. 하나님의 통일성은 현상세계의 다양성 아래 가려져 있을 수 있으나, 현상세계의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원천이나 원리가 분명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세계 종교의 여러 경전은 궁극적 실재의 다양한 모습들이란, 한 하나님의 여러 측면들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도 세계 종교의 궁극적 근원이 한 하나님이라고 단정한다. 더욱이 그 구절들은 다양성 속의 하나의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물론, 윤리적인 교훈도 강조하고 있다.
종교 경전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여호와 한 분 뿐이시다.
신명기 6.4(기독교)
말하라! 그분은 유일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낳지도 태어나지도 아니 했나니,
그분과 비견할 자 아무도 없느니라.
꾸란 112.1-4(이슬람)
당신은 유일 지고의 존재가, 영원한 현현,
만유를 창조하고 이에 내재하는 실유,
두려움이 없는 자,
미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자,
무시 무형의 자존자,
당신은 거룩한 스승의 은총으로 실현되도다.
아디 그란트, 자푸지, p.1, 물 만트라(시크교)
그는 일체만유 가운데 편재하는 유일신이며, 만유 속에 거하면서 그들의 모든 행업을 지켜보는 만유의 혼이며 관조하는 이요, 자각하는 유일자이며 모든 속성들의 근원입니다.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 6.11(힌두교)
인드라, 마트라, 바루나, 아그니
신성한 날개의 가루다라고 부르더라도,
사람들은 인드라, 야마, 마트라리스완을 말할지라도,
오직 하나 뿐인 이, 현자들은 그를 여러 이름으로 부르노라.
리그 베다 1.164.46(힌두교)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으며 그분 속에 속해 있는 자들은 그분을 경배함에 있어 거만하지 않으며 싫증을 내지 않느니라.
밤낮으로 그분을 찬미해도 지치지 않느니라.
저들이 죽은 자를 일으키는 신들을 땅에서 얻을 수 있었는가?
만일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있었다면 하늘과 땅은 모두 폐허가 되었을 것이노라. 그러므로 그들이 얘기하는 것보다 높으신 옥좌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꾸란 21.19-22(이슬람)
성인은 하나인 도를 품음으로써 천하의 규범이 된다.
도덕경 22(도교)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들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며, 그들이 사는 시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몇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22-28(기독교)
형색이 사라지고 일체의 분별이 멎을 때 남는 것, 그것이 사물의 여실한 본바탕이다. 그것의 본질에 관해 이러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그것을 일러 실유의 진여(眞如)라 부른다. 이 보편 불가해하 진여만이 실유이지만 그것은 진실, 진심, 반야 등으로 다양하게 특징지어진다. 이와 같이 궁극적 실유의 본바탕은 상이 없음을 말하는 법이야말로 모든 깨달은 자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며, 일체만유를 이와 같이 여실하게 알게 될 때 완전한 지혜에 들게 된다.
능가경(불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신들이 아닌 많은 형상들 속에서 나를 보아 왔다. 그 형상들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시다’라는 하나님과 동일한 것이다.“ 랍비 레위가 말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울과 같이 나타나셨다. 그 거울은 많은 사람들을 비춰 주는 것으로 숱한 사람들이 거울을 바라보고 또 거울은 그들을 비춰 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실 때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페시크타 카하나 109b-110a(유대교)
힌두와 무슬림은 같은 한 신을 섬긴다.
아디 그란트, 바이론 p.1158(시크교)
세상의 어느 백성들, 인종이나 종교를 불문하고 그들이 하나의 하늘적 근원에서 그들의 영감을 받았고 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그들이 따르고 지키는 율령의 차이는 그들이 계시 받은 시대의 다양한 요구와 긴급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집 결과인 것을 제외한 모든 율령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고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의 반영이다.
바하울라 저서의 낙수집 111(바하이교)
말씀 선집
존재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262.51, 1994.07.23)
천지간에 참된 분이 있다면 그분이 누구일 것이냐? 절대자입니다. 이 절대자를 오늘날 우리 한국말로 하면 ‘한 분밖에 없는 주인 양반’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주인 양반을 더 줄여서 말하면 하나님이 됩니다. 한 분밖에 없는 주인 양반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39.302, 1971.01.16)
신에 대한 이름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신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근원이 하나이므로 하나의 신입니다. 각 나라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신을 표시하는 이름은 달리 나타나지만 그 본체는 하나입니다.
신이 지향하는 목적은 종교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수많은 종교가 있다 하다라도 각 종교가 가는 길의 목적은 하나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그 귀결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평화와 연결될 수 있으며 천국과 연결될 수 있는 이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210.199-200, 1990.12.23)
새로운 종교를 위한 본체론은 종래의 모든 절대자가 각각 별개의 신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신임을 밝혀야 됩니다. 그와 동시에 신의 속성 중 단지 일부를 파악한 것이 각 종교의 신관이었음을 밝히고, 신의 전모를 옳게 파악하여 모든 종교는 하나의 하나님으로부터 세워진 형제 종교임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122.304, 1982.11.25)
본체론이란 절대자에 관한 이론을 말합니다. 각 종교마다 그 교리가 성립되는 근거로서 절대자가 있습니다. 유대교의 절대자는 여호와요, 기독교의 절대자는 하나님이요, 회회교의 절대자는 알라입니다. 유교나 불교는 절대자를 명시하지 않지만, 유교의 덕목의 근본인 ‘인(仁)’은 천명과 연결되기 때문에 ‘천(天)’이 유교의 절대자라고 볼 수 있으며,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은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진리는 제법의 배후에 있는 ‘진여(眞如)’에서 찾을 수 있다. 고 하니 진여가 불교의 절대자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22.301, 1982.11.25)
종교분쟁의 근본원인도 역시 본체론의 애매성에 있습니다. 절대자는 오직 하나이며 둘이나 셋이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각 종교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절대자만이 바른 신이며 그 외의 신은 참신(神)이 아니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결국 종교마다 절대자가 있는 셈이 되어서 절대자가 여럿이라는 배리(背理)가 성립됩니다.
따라서 결국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모든 종교의 신은 상대적인 신에 불과하였다는 결론이 되어서 각 종교를 통해서 세워지기로 되었던 절대적 가치관, 즉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에 관한 이론은 상대적인 것에 머물고 말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때까지의 종교는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절대적 가치관을 세울 수 없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절대자에 대한 정확한 해명을 해놓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절대적 가치관을 확립하려면 문자 그대로 유일, 절대의 신에 관한 정확하고도 바른 해명을 해주는 본체론을 가진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됩니다.
종래의 여러 종교는 하나님이 세운 종교이므로 이들 종교를 통해서 절대적 가치가 실현되어 온 것으로 일단 간주하였으나, 오늘날 종교분쟁이 벌어지는 것으로 볼 때 각 종교의 신이 절대신이 될 수 없으며 절대적 가치관이 종래의 종교를 통해서는 세워질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2.303-304, 1982.11.25)
각 종교는 자체를 정화시켜야 하며, 우주적인 원리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종교의 중심 가치는 하나님의 참사랑입니다. 참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라는 가르침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살고, 가정은 사회를 위해서 살고, 사회는 국가를 위해서 살고, 국가는 세계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종교는 다른 종교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 중의 원리입니다.
우주적 원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주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을 위하여 자신의 전체를 투입하셨습니다. 또한 역사를 통해서 제멋대로 사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희생하여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 예언자, 성자, 그리고 철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원리를 따랐습니다. (234.222, 1992.08.20)
하나님의 사상에는 원수의 개념이 없습니다. 원수의 개념이 있으면 이원론이 됩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런 개념이 없기 때문에 싸우지 않습니다. (225.123, 1992.01.05)
무형, 신비
하나님은 무형이며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어떤 개념도 초월하고, 감추어져 있으며 불가사의하다. “나의 생각은 너의 생각이 아니며 또한 너의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 유일신 종교 전통에서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진술하기 위함이다. 무한자인 하나님은 형상화함으로써 유한자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언어나 사유개념도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동양 종교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어떻게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 순수정신의 원천이며 전지한 초월적 존재를 감지할 수 있을까?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이 무형이며 눈에 보이지 않으며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여기에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시사한다. 즉,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로만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보이는 인간의 형태로 자신을 현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무지 속에 방치하지 않으며, 종말에는 자신의 가슴 깊이 감추어 둔 사정 모두를 드러낸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을 완전히 실현하게 되며, 지상에서 하나님의 구현체가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종교 경전
어떤 시각으로도 그 분을 인식할 수 없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다. 그분은 모든 것을 감지하고 알고 계시도다.
꾸란 6.103(이슬람)
말로 표상해 낼 수 있는 도는 항구불변의 본연의 도가 아니며,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실체의 이름이 아니다.
무명은 천지의 시초이며, 유명은 만물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항상 무에서 오묘한 도의 본체를 관조해야 하며, 또 유에서 광대무변한 도의 활용을 살펴야 한다.
무와 유는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며, 오직 이름만이 다르다. 이들 둘은 다 같이 깊고 그윽하다. 이들은 끝없이 깊고 그윽하며 모든 도리나 일체 변화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도덕경 1(도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의식의 그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사의 자아는
카스트나 종족 속에 귀속되는 일이 없으며,
이목이나 수족을 지니지도 않는다.
현자들은 말하노니,
크고 작은 일체만유 속에 편만하며,
영원불변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이,
그가 곧 불멸의 자아이니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1.1.6(힌두교)
궁극적 영혼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원도 아니며 삼각형도 아니며 구형도 아니다. 그는 검지도 않고 푸르지도 않고 붉지도 않고 노랗지도 않고 희지도 않다. 그는 좋은 냄새도 아니며 싫은 냄새도 아니다. 그는 톡 쏘거나 쓰지도 않으며, 시거나 달지도 않다. 그는 딱딱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으며,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으며,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며, 까슬까슬하지도 않고 매끈하지도 않다. 그는 몸이 없다. 그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는 집착에서 자유롭다. 그는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니며 중성도 아니다. 그는 청정한 지식이며 직관이다.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어떤 비유도 없다. 그는 무형의 존재이다. 그는 어떤 용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를 파악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는 소리도 아니고 형태도 아니며 맛도 아니고 촉각도 아니다. 단지 나는 너무 많이 말한다.
아차랑가 수트라 5.126-40(자이나교)
샤리푸트라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며, 감각, 표상작용, 행동, 의식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야심경(불교)
하나님께서 너도 모르게 너를 보살피셨다.
이사야 45.15(기독교)
자네가 하나님의 신비를 파헤칠 수라도 있단 말인가? 전능하신 분의 무한하심을 더듬을 수라도 있다는 말인가? 하늘보다도 높은 그것에 어떻게 미치며 저승보다도 깊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 신비는 땅 끝처럼 아득하고 그 무한하심은 바다처럼 넓다네.
욥기 11.7-9(기독교)
모든 것을 드러내는 지성, 그것은 무엇에 의해 드러내지는가? 누구에 의해 아는 자가 알려지는가? 참된 자아는 “이것은 아니다. 저것은 아니다”(내티, 내티)로 묘사된다. 그것은 불가해하다. 그것은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쇠퇴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쇠퇴하지 않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결코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 사랑하는 이여, 아는 자는 누구에 의해 알려져야 하는가?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 4.5.15(힌두교)
형상으로 나를 보았거나
소리로써 나를 찾았던 자들은
그릇되게 정진한 것이니
그 사람들은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금강경 26(불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여호와의 말씀이시다. 이사야 55.8(기독교)
그러므로 하나님에 필적할 것을 만들지 말라. 실로 하나님은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니라.
꾸란 16.74(이슬람)
모세가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자 여호와께서는 대답하셨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여호와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여호와께서 이르셨다.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으라.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 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
출애급기 33.18-23(기독교)
그러므로 너희는 깊이 명심하여라. 여호와께서 호렙의 불길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아무 모습도 보지 못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는 남자의 모습이든 여자의 모습이든 일체 어떤 모습을 본떠 새긴 우상을 모시어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모습이나 공중에서 날개 치는 어떤 새의 모습이나,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어떤 동물의 모습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물고기의 모습도 안 된다. 눈을 하늘로 향하여 해와 달과 별 등 하늘에 있는 모든 천체를 보고 그 앞에 엎드려 예배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만천하 다른 민족들에게 주어 섬기게 하신 것들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도가니 같은 이집트에서 건져내시어 오늘 이렇게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신명기 4.15-18(기독교)
태초에 신이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내일도 계실 것입니다.
그 누가 신의 형상을 만들 수 있으랴?
신은 무형이시며,
당신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십니다.
머물지 않고 사라져 버리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바로 그 말씀!
그래서 신이십니다. 피
그미족의 찬가(아프리카 전통종교)
말씀 선집
여러분들은 영계에 가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하나님은 에너지의 본체이기 때문에 영계에 가서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5.193, 1979.10.21)
하나님은 어떤 형태도 지니지 않습니다. 크다고 하면 무한대요, 작다고 하면 무한히 작은 분이십니다. (35.157, 1970.10.13)
사랑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사랑이 딱 네모로 돼 있으면 네모로 된 사람만 좋아합니다. 사랑은 공기와 같이 형태가 없기 때문에 어느 형태든 다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공기와 같이 크고 둥그런 것을 참사랑으로 길게 빼게 되면 천리, 만리 죽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공기는 ‘아이구! 이거 왜 잡아당기느냐’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너무 잡아 당겨서 뚝 끊어지더라도 ‘그러면 얼마나 좋겠느냐. 어서 끊어지게 해 다오’ 그런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다른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 개념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공기와 같은 형태의 사랑이 딱 끊어지면 그것을 끌고 가는 하나님은 몸뚱이로부터 그 사랑을 감아 나갑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길게 만들어야 겠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167.115, 1987.07.01)
하나님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걸 생각해 봤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근수로 달면 몇 근이나 되겠습니까? 몇 억만 톤이 될까요? 무겁다면 갖고 다니려면 큰일이지만 하나님은 무형이시기 때문에 이상적입니다. 무형이기 때문에 지갑에 넣고 다녀도 무게가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또 무형이기 때문에 아무리 좁은 데 가더라도 가져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아무리 좁은데도, 바늘귀보다 더 좁은 데도 인간이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 크다 하면 큰 데도 마음대로 운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36.107, 1985.12.22)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온 천하를 요리하시는 하나님이 여기 있다고 합시다. 힘으로 말하자면 태백산도 날려 버리고 지구성도 구멍을 낼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인데, 그러한 하나님을 여러분의 눈으로 보면서 살라고 한다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안 보이길 잘했다는 것입니다. 보이면 여러분은 신경이 쇠약해져서 한 시간도 못 산다는 것입니다.(38.245, 1971.01.08)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주인이 되자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따라잡으려고 해도 따라잡지 못하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제일 편리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 노릇할 수 있으면 바람직한 것입니다. 210억 광년이나 되는 우주를 ‘내 품 안에 안겨라’ 해서 몸뚱이를 가진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노릇 해먹겠습니까? 하나님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의 거리가 얼마나 멀겠습니까? 몸뚱이와 마음이 찾아가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하나님이 볼 때도 한심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지혜로운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중앙에서 마음대로 거동할 수 있는 무형적 존재로서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제일 편리하겠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무형이므로 존재세계를 마음대로 뚫고 오더라도 조금도 지장을 안 느낍니다. 여러분의 몸뚱이에 하나님이 와서 마음대로 지나가더라도 여러분은 모릅니다. 하나님이 꾸벅꾸벅 조는 여러분의 몸뚱이를 마음대로 밟고 지나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이 제일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되었다는 논리가 가당합니다.
여러분은 공기가 통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공기가 통하고 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공기가 통하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은 무형의 신으로 계시는 것이 최고 편리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큰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이 우주를 보자기로 싸고도 남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형의 하나님이지만 무형의 하나님의 마음은 이 우주도 작다고 보고, 더 큰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현현하여 지적하고 간섭하신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면서 살라고 한다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신경쇠약에 걸려 하루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엄청난 양의 공기가 여러분의 몸속을 드나드는 것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무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과하고 역사하심을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것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38.168, 1986.01.21)
천주의 대주재 되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눈에 보이게 된다면 그 하나님을 서로 빼앗겠다는 싸움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이 싸움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보였다면 미국과 소련이 서로 자기 하나님이라고 싸우겠습니까, 안 싸우겠습니까?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 싸움을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하사, 이런 싸움이 있을까봐 무형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기를 바라는 것은 망령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안 보이기를 잘했다는 것입니다. (41.287, 1971.02.17)
여기에는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섭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생각과 섭리를 대하고 있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것이 현장에서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이 늘 문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이 하나님은 타락 전에도 계셨고 타락 이후에도 계시지만, 지금 섭리를 대하고 있는 하나님의 생각은 타락한 인간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언제나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하나님이 타락한 세계에 들어와서 일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을 중심삼고 인간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 이상하던 생각을 중심삼고 하나님화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구원섭리 운동이라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됩니다. (161.110, 1987.01.11)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하나님이십니다. 무형의 하나님이 유형의 하나님으로 현현하기 위한 것이 창조이상이라 할 때, 하나님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체도 되지만, 또한 보이는 세계의 실체가 되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98.106, 1999.01.01)
여러분들은 영계에 가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인다구요. 여러분, 힘이 보입니까? 힘이 보여요? 하나님은 에너지의 본체이기 때문에 영계에 가서도 볼 수 없다 이것입니다. 체(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 세계를 지도하고 주관하기 위해서는 실체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냐?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어서 지상에 살다가 천상에 가게 되면 아담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아담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하하하’ 웃는 것은 하나님이 ‘하하하’ 웃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우주가 ‘하하하’ 웃는 것입니다.
무형의 하나님이 실체를 쓴 하나님으로 등장하시기 위한 것이 인간 피조세계 창조라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무형의 하나님이 실체의 하나님으로 등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남극과 북극과 같은 극을 그려야 하나의 자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내적이고 이건 외적이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하나님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원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것이 비로소 도는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5.193-194, 1979.10.21)
초월적 실재
초월성은 절대자의 본질적 속성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세계에 충만하게 드러나며, 다함이없다. 하나님은 존재의 토대이며, 모든 피조물의 원자와 생명 속에 내재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는 우주의 중심이며, 만물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한다. 그러나 세계 속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절대성은 결코 제한되거나 훼손되지 않는다.
어떻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과 결부될 수 있는가? 어떤 구절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국가와 민족의 한계들을 극복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나타난 초월의 의미를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구절들은 우리가 절대적 존재 자신이 거할 곳으로 선택한,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내면세계와 접촉해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 경전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이사야 6.3(기독교)
하나님 이외에 신은 없나니,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다. 그분에겐 졸음도 잠도 없나니,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에게 속하도다. 그분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그분에게 중재할 수 있으랴? 그분은 그들의 앞뒤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그분의 뜻이 아니면 그분 지혜의 일부라도 헤아릴 수 없도다. 그분의 권좌가 천지에 펼쳐져 있어도 그것을 유지하는 데 조금도 피곤을 모르시도다. 그분은 지고하시고 영광으로 가득한 분이시다.
꾸란 2.255(이슬람)
누가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헤아리겠느냐? 하늘을 장뼘으로 재었겠느냐? 땅의 모든 흙을 되에 담아 보았겠느냐? 산을 저울로 달고 언덕을 천칭으로 달았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뜻을 좌우할 수 있었겠느냐? 누가 과연 그에게서 자기를 깨우쳐 달라고, 올바른 인생길을 가르쳐 달라고, 현명한 처세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받았겠느냐?
보아라, 민족들은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요, 천칭에 덮인 가는 먼지일 뿐, 섬들도 고운 가루보다 더 무겁지 않도다. 레바논 산 수풀은 장작으로 쓰기에도 모자라고 거기서 뛰노는 짐승들도 번제물로 바치기에 모자란다. 민족들을 다 모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있으나마나, 허무하여 그 자취도 찾을 수 없도다.
이사야 40.12-17(기독교)
지고한 이 푸르샤는 천 개의 머리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발을 가졌다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대지를 감싸고 있으며, 또한 시방을 초월하여 있도다. 그의 장려함은 이와 같도다. 이미 있었던 것들과 앞으로 있을 이 모든 것이 푸루샤요, 또한 불사계를 지배하도다.
그의 장려함은 이와 같도다. 그러나 푸루샤는 이보다 더 강대하니, 만유는 그의 사분의 일이요, 그의 사분의 삼은 천상의 불사계로다. 푸루샤의 사분의 삼은 하늘 높이 떠올랐으며, 그의 사분의 일은 하계에 태어났나니, 이로부터 그는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갔도다. 생명 있는 것, 생명 없는 것들 속으로
리그베다 10.90.1-4(힌두교)
그대는 불이다.
그대는 태양이다.
그대는 바람이다.
그대는 달이다.
그대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다.
그대는 브라흐마이다.
그대는 물이다. 그대, 만유의 창조자여!
그대는 여자요. 또한 남자로다.
그대는 젊은 미장부요. 앳된 소녀라.
그대는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는 늙은이.
그대는 모든 방면으로 마주해 있나니.
그대는 암청색 나비.
그대는 붉은 눈, 초록빛 날개의 앵무새.
그대는 천둥·먹구름·사계요, 푸른 바다라.
시작이 없는 이여,
시공을 여의어 있는 이여!
삼계가 그대로 말미암아 일어나도다.
스베타스바타라 우파니샤드 4.2-4(힌두교)
영원한 자아는 유일무이요. 영원히 고요한 부동자로되, 생각보다 쾌속하며 느낌보다 민첩하다. 움직임이 없되 모든 움직임을 앞질러 나아가도다. 그를 여의어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영원한 자아는 움직이는 듯 적정 속에 머물며, 먼곳에 있는 듯 지척에 있나니, 언제나 만유 가운데 거하되 또한 이들을 떠나 있다.
영원한 자아는 어느 곳에나 두루 있나니, 그는 곧 빛이요, 나누어질 수 없고, 죄악에 물들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는 초월자요, 내재자이며,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자존자니라.
이샤 우파니샤드 4-8(힌두교)
혼돈하면서도 이루어지는 무엇인가가 천지보다도 먼저 있엇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 들을 수도 없고, 형태가 없어 볼 수도 없으나, 홀로 우뚝 서 있으며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두루 어디에나 번져 나가며 절대로 멈추는 일이 없어, 천하 만물의 모체라 할 수가 있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겠다. 억지로 글자를 지어 도(道)라고 부르고, 억지로 이름을 지어 대(大)라고 할 뿐이다.
그것은 크므로 어디에나 번져 나가고, 어디에나 번져 나가므로 안 가는 곳이 없이 멀리 가고,멀리 가므로 결국은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도덕경 25(도교)
신격은 천계와 나타나고 그들에게 형태가 주어지기 전에 존재했다. 그것은 음과 양을 초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신격은 전체 우주를 주관하는 절대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모든 존재들 속에 살며, 거기서 그것은 영이라 불린다. 인간 속에 편재하는 그것은 마음이라 불린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마음은 천지의 지배자이신 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인간의 마음과 신은 완전히 하나이다.
신은 천지의 근원이며, 만물 영성의 근본이며, 인간 운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분 자신은 무형이지만 만물에게 체계를 부여한 것도 다름 아닌 신이다.
요시다 가네토모, 신도의 대의(신도)
오관을 넘어선 경계에 마음이 있고, 마음을 넘어서 지성이 있으며, 지성보다 더 높은 경계에 위대한 아트만이 있다. 아트만보다 더 높은 경계에 미현현자가 있으며, 이보다 더 높은 곳에 지고·편만 불사의 하신 이, 푸루샤가 있느니라.
카타 우파니샤드 2.3.7-8(힌두교)
부처는 무한자 속에, 존재의 구극에 거하며, 허공에 거하며, 불생불사의 진여에 거하며, 때에 맞추어 의식 있는 존재들에게 현현하며, 과거의 서원들로 한결같으며, 다함이 없고, 모든 중생들과 모든 나라들과 모든 현상들을 버리지 않으며···.
깨달음에 드는 자들이 어떻게 법신을 볼 것인가? 그들은 무한한 거처에서 법신을 보리라. 왜냐? 그들은 별개의 사물이나 현상, 또는 별개의 몸, 또는 별개의 나라, 또는 개별 존재에서 부처를 보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있는 그를 보는 까닭이다.
비유하여 마치 형체 없는 허공이 나아가거나 돌아옴도 없이 생물 무생물의 일체 만유에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바와 같아, 부처도 또한 만유에 편재하여 모든 장소, 모든 생물·무생물, 그리고 모든 나라들에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그곳으로 나아가거나 그곳에서 떠나오는 일이 없는 것은, 법신이란 다만 중생을 위해 스스로 몸을 현현할 뿐 본래 형체가 없는 까닭이다.
대방광불화엄경 37(불교)
도는 텅 비어 있지만
쓰고 또 써도
항상 차는 일이 없고,
깊고 깊어서, 만물의 근원 같도다!
모든 날카로움을 꺾어서,
모든 세상의 어지러움을 풀고,
그 밝은 빛을 조화시켜서
세상의 티끌과 뒤섞이니,
깊고 깊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만 같도다.
도덕경 4(도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초월한 자리에 있는 분입니다. 세계적이요, 우주적인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이요, 세계적인 것으로서 초월한 자리에서 가치의 내용을 지닌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94.282-283, 1977.10.09)
절대적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이 태초의 우주의 기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겁니다. 그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에 속한 전체는 그와 더불어 느끼고, 그와 더불어 인연을 갖고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인간은 4백조개가 되는 세포를 갖고 있는데 모든 세포 자체가 어떤 분야에서건 느끼기만 하면 직접 두뇌에 연락되는 것입니다. 태초의 창조주를 중심삼고 연결되는 모든 존재들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인간으로 태어나서 의식하고 살고 있고 선하고 보다 차원 높은 가치를 추구하면서 비애를 느끼는 전부가 인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 생명은 부모나 사회나 민족, 국가를 통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하나의 기원, 즉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동기를 절대적인 입장에 있는 초월적인 동기와 결부시켜야 합니다. 시대적인 인연이라든가, 환경적인 인연, 혹은 사회적인 여건에 결부시켜서는 안 됩니다. 초월적인 원인에 결부시키고, 초월적인 목적에 결부시켜야만 비약하고 초월적인 동기에 결부시켜야 합니다. 내 생명의 출발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초월적인 동기에 결부시키게 되면 죽더라도 초월적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죽게 디는 것입니다. (36.64, 1970.11.15)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성된 피조세계는 마치 마음을 중심하고 완성한 인간 하나와 같아서,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만 동하고 정하는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인 것이다. 따라서 이 유기체도 성상과 형상을 갖추어야 할 것이니 그의 성상적인 존재가 하나님이시오, 그 형상적인 존재가 피조세계인 것이다.
(원리강론, 창조원리 1.1.1)
모든 것은 돌게 마련입니다. 공기나 모든 소립자를 보더라도 전부 다 둥급니다. 분자면 분자, 전자면 전자도 역시 양자를 중심삼고 돌고 있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놈을 중심삼고 돌게 마련입니다. 태양을 중심삼고 태양계도 돕니다. 은하계도 전체가 하나의 핵을 중심삼고 돌게 마련입니다. 그런 연관관계를 중심삼고 이 우주는 하나의 천태만상의 큰 보따리입니다. 큰 보따리 우주라고 하면 다 들어갑니다. 큰 보따리 우주도 전부 하나의 핵을 중심삼고 도는 것입니다. 그건 누굴 닮아서 그러냐 하면 주인을 닮아서 그렇습니다. 그 주인이 누구냐 하면 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173.134-135, 1988.02.14)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 오늘날 이 세상의 존재의 기원이 되는 가장 모체이신 분입니다. 그분은 존재가치의 기원입니다. 그분 계시므로, 오늘날 이 현상세계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분은 어떤 시대에 변화가 있다고 해서 변하는 분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은 변화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시간이나 공간에 제한 받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제한을 초월한 자리에서 모든 제한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21.249, 1968.11.24)
인간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야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록 작은 하나의 개체이지만 전체의 역사를 대신한 존재요, 미래의 모든 인연을 대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천주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인류역사는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까지 흘러왔는가?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 선지 선열들은 무엇을 바라고 나왔는가? 타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먼 곳으로부터 인연되어서 중심으로 찾아들어오고 있습니다. 즉, 씨족주의 시대로부터 부족, 민족을 거쳐서 국가시대와 국제시대, 세계적인 연맹시대를 거쳐 나오고 있는데,여기에서 하늘은 하나의 대표적인 사람, 즉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의 인연을 겸한 터전 위에 하나님의 심정을 결부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아 나온다는 것입니다.
제1차 대전 당시에는 물질을 중심한 투쟁시기였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뒷전에 두고 오직 물질만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 세계가 물질만능주의를 부르짖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시대에 다 통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애의 인연을 찾아 가는데 있어서 자기의 마음을 중심에 모시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륜의 철칙입니다. 마음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하늘이 칩니다. 지금까지 하늘은 역사노정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마음을 중심으로 선편에 속하여 양심대로 살되 어떤 물질적인 악의 조건에 걸리지 말고 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양심 기준은 천류의 심정을 백퍼센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있는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장벽이 가로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희망봉, 즉 천국의 관문 앞에 곡절의 문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심판의 관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포와 불안과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중심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물질인 몸뚱이를 먼저 지은 후에 영을 불어놓어서 우리는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영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가 물질적인 권한을 중심삼고 하나로 움직일 때 무슨 투쟁시기가 나타날 것인가? 사상투쟁시기가 나타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제2자 대전 이후로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중심하는 사상의 시대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사상은 어떠한 사상이어야 할 것인가? 물질을 뚫고, 마음을 뚫고 영을 중심한 사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영을 중심한 사상의 시대를 찾아나가는 것이 복귀노정입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잃어버린 상태에 아직도 머물고 있고, 영과 양심과 몸의 조화를 잃어버린 상태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4.268-269, 1958.08.03)
주권과 전능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이다. 하나님은 남녀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며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할 것인가에 대한 자유의지를 지니지만, 우리의 삶에 대한 그의 권능을 인정하고 그를 우리의 주(主)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하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주권이 절대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 세계에서 하나님이 항상 악을 벌하고 선에 보답함으로써 정의를 세운다는 주장은 지탱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이 구현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문선명 선생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이를 더하며 언급하기를, 사람들이 방종치 않고 하나님의 통치에 완전히 복종할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은 주권자일 수 있지만, 인간의 타락 때문에 이 상태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원리를 제시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탄이 인간의 심정을 유린함으로써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아무런 제한 없이 통치할 수 있는 주권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이다. 문선명 선생은 이제 그날이 임박하였다고 단언한다.
1. 전능하신 하나님
종교 경전
하늘과 땅의 창조자, 그분께서 명령하사 있으라 하면, 그리 되느니라.
꾸란 2.117(이슬람)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미하니, 실로 그분은 권능과 지혜로 충만하시노라.
그분께 천지의 왕국이 속해 있고, 그분은 삶과 죽음을 주시고 만물을 관장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처음과 끝이시고 밖으로 드러나고 속에 내재하시는 분,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도다.
그분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스스로 권좌에 자리하셨도다.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땅속에서 나오는 것,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시도다. 그분은 항상 너희와 함께하며 너희의 행위를 지켜보고 계시도다.
하늘과 땅의 왕국이 그분께 속하니 모든 것이 그분께 돌아가도다.
그분은 밤이 낮이 되게, 또 낮이 밤이 되게 하시니, 그분은 심중에 있는 모든 생각까지 알고 계시도다.
꾸란 57.1-6(이슬람)
하나님께서 진리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그분이 뜻하신다면, 너희를 제거하시고 새로운 창조로 너희를 대체하실 수 있느니라.
그것은 하나님께 대수롭지 않는 일이니라.
꾸란 14.19-20(이슬람)
당신은 불멸자
지식의 지고무상한 핵심,
세계의 궁극적 토대입니다.
당신은 영원한 법도의 변치 않는 수호자
당신은 영원한 신적 존재입니다.
당신은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습니다.
당신의 힘은 무한하고
당신의 팔들은 무한히 뻗쳐 있으며
태양과 달이 당신의 두 눈입니다.
나는 이와 같이 봅니다.
당신의 입은 제사의 타오르는 불꽃이며
당신의 광채로 세상을 태워 버립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 그리고 사방이 당신 홀로에 의해 편만해 있습니다. 당신의 이 놀랍고 무서운 형상을 보고
삼계가 전율합니다.
오, 전능한 자여!
바가바드기타 11.18-20(힌두교)
인간들이여, 너희는 하나님이 필요하나 하나님은 자족하시고 고귀하신 분이니라.
꾸란 35.15(이슬람)
말씀 선집
하나님이 도대체 어떠한 분이냐?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해서 그저 한 마디만 세계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본심은 어떠한 하나님을 원하느냐? ‘사랑을 가지고 내 어머니 아버지 이상 되는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구나. 우리나라에 의로운 국왕이 있으면, 의로운 대통령이 있으면 그 대통령 이상 되는 분이구나’ 이런 분을 원합니다. (147.273, 86.10.01)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토록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역사의 배후에서 수난을 감내해 오신 것은 하나님이 못나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타락으로 잃어버린 아담 해와의 자리, 즉 완성한 후 아담의 현현을 기다려야 할 복귀섭리에 얽힌 말 못할 사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전권을 가진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당신 스스로 영원의 기준 위에 세운 천리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평화신경, 평화메시지 1.16, 2005.09.12)
많은 사람들이 절대자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구도의 길에서 발견한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되었습니다. 자식이 감옥생활을 하는데 영광을 누리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은 한없이 아픕니다.
또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위해 지은 우주 만상까지도 다 사탄의 주관권에 내주고 말았습니다. 참사랑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사랑의 대상을 잃은 순간부터 한없이 외로운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만유의 주재자로서의 능권(能權)을 한 번도 주장해 보지 못하셨습니다. 못난 타락 인간들도 다 자기를 자랑하고 사는데,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위상을 한 번도 세워 보지 못 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면서도 그들 앞에 스스로 지존하심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원리의 주인이시니 비원리세계로 떨어진 결과 세계에 어떻게 자유로이 운행하시겠습니까? 온갖 불신과 거역의 길을 걸어오는 인간들은 무형의 참부모인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죽었다고까지 하면서 무시하고 살아 왔습니다. 하나님은 긴 역사를 한을 품고 살아 오셨습니다. 오래오래 참아 오셨습니다. (343.197,2001.01.29)
끝날이 되면 될수록 그야말로 초월적인 신이 필요합니다. 악도 초월하고 모든 것을 초월해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신, 악마가 있다면 그 악마의 장애를 받는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해서 자유자래로 할 수 있는 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을 발견하기 전에는 오늘날 이 싸움의 터전을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엮어 온 역사시대, 현세에 있어서의 내적인 역할을 하는 종교의 역사 시대로는 새로운 문화를 극복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악신이 싸우는 그런 신이 아니라 악신이 개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초월적인 신을 중심삼고 출발할 수 있는 자체를 발견하고 그런 자체를 중심 삼게 될 때, 비로소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기원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초월적인 신의 입장에 서서 섭리역사를, 인류역사를 지도하시는 하나님이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고쳐 줄 의사로서 하나님입니다. 수리하는 입장에 있는 하나님입니다. 완전한 사람, 절대적인 사람이 나와서 그 사람이 완전히 절대적인 자리에서 하나의 방향을 향해 이끌어 가도록 하게 하는 신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40.18-19, 1986.02.01)
주인이 없는 이 천지에 아버지께서 주인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금후에 가야 할 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고 지도할 수 있는 중심도 당신이 되셔야 되겠습니다. 저희의 가정이나 개개인이 바라고 나가는 소원의 중심도 아버지가 되셔야 되겠습니다. 세계에서도 필요로 하고, 나라에서도 필요로 하고, 가정에서도 필요로 하고, 개인도 필요로 하는 것이 온 천지를 지으신 주인 되시는 당신이요, 아버지이신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당신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요, 시간과 공간세계의 어떤 제재도 받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분인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당신은 모든 것의 원인의 내용을 갖추신 주체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당신의 인연을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을 저희가 알고 있사옵고, 존재하는 것은 주체이신 당신 앞에 상대적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선 개인이요, 가정이요, 국가요, 세계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햇빛이 비치면, 모든 존재가 그 햇빛을 통해 생명의 틔움을 바라고 그와 더불어 일치하려는 것을 저희들이 바라보게 될 때, 미물도 하나의 중심을 향해서 그와 같이 행하는 현상을 저희 자신들이 바라보게 될 때, 그와 같은 자리에서 당신은 저희 생명의 주체 되시는 아버지요, 저희의 갈 길과 방향을 밝혀 주시는 아버지임을 알고, 당신과 일체가 되고 당신과 하나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길이 막힌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59.65-67, 1972.07.09)
2. 인간사를 주관하는 주인
종교 경전
하늘과 땅의 왕국과 그 안의 만물이 하나님께 속하리니, 그분이야말로 만물의 주인이도다.
꾸란 5.120(이슬람)
여호와께서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출애급기 15.18(기독교)
통치자, 왕, 영주, 재상, 신하들, 이 모두가 신의 창조이니, 그들의 뜻이 신에게 복종하여, 모두가 신에게 기대어 있도다.
아디 그란트, 비라발 키 바르 6.M.4, p.851(시크교)
의의 참다운 창조자요
사람의 행위를 주관하시는 당신을
내 눈으로 보았을 때,
그때, 오, 주여! 선한 생각의 아버지여!
내 마음은 처음이며 끝이신
당신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베스타, 야스나 31.8(조로아스터교)
하늘의 노여움을 겁내고
놀거나 게을리 하지 말라.
천명의 변혁에 경외심을 갖고서
뛰어 달리며 사냥하는 일을 멈추어라.
하늘은 밝게 본다.
그대의 출입 내왕을 다 보고 있다.
하늘은 총명하다.
그대가 방종하고 일락하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시경 254(유교)
지혜의 주는 일마다 빈틈이 없으니, 마귀나 사람에 의해 이전에 이룩된 것, 이후에 이룩될 것들,
이 모두가 실로 그의 뜻이라.
지혜의 주, 그만이 결정자이시니
그의 뜻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리라.
아베스타, 야스나 29.4(조로아스터교)
겸손한 이와 순종하는 이들을 학대하는 자는 누구나,
지엄한 주께서 그를 화염으로 태우리라.
창조자는 완전한 정의를 펴시며
그에게 헌신하는 자들을 보호하시니라.
아디 그란트, 가우리, M.5, p.199(시크교)
사람들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큰 위엄이 이르게 될 것이다.
도덕경 72(도교)
여호와께서 오실 무서운 날이 다가왔다. 득달같이 다가왔다. 여호와께서 오실 날, 역마보다 날쌔게 오는 구나. 군인보다도 잽싸게 닥치는구나.
그날은 천벌이 내릴 날, 모두들 죽도록 고생하는 날, 폭풍에 휩쓸려가는 날, 먹구름이 뒤덮이는 어두운 날, 나팔소리 울리며 함성이 터지는 날이다. “저 든든한 성을 쳐라. 귀퉁이에 솟아 있는 망대를 쳐라.” “내가 사람들을 몰아치리니, 그들은 소경처럼 더듬거리다가 피를땅에 뿌리고 배알을 거름덩이처럼 쏟으리라. 그들이 나에게 죄를 지은 탓이다. 은과 금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으로 그 난을 면하지는 못하리라.” 천벌이 내릴 날, 온 세상은 활활 타버리리라. 그가 세상 사람을 송두리째 순식간에 멸하시리라.
스바냐 1.14-18(기독교)
말씀 선집
지금까지 우리는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불러왔습니다. 종교적인 주체로만 하나님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체인 동시에 생활의 주체요, 생활의 주체인 동시에 이념의 주체입니다. (11.87, 1961.02.12)
나를 완전히 알고 나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절대자인 것입니다. 그 절대자와 내가 관계를 맺어 그 차이를 비교하고 논단할 때 자기가 어떤 존재라는 것이 해명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절대적인 존재, 혹은 주체 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먼저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7.207-208, 1959.09.13)
사탄의 전권시대가 쓰러져서 하나님의 전능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사탄이 마음대로 못 합니다. 자기가 발휘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권능을 사용했지만, 능력의 자리에 못 섰다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반적인 승리의 기반에 전반적인 전능의 역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49.179, 2001.07.19)
인류는 역사적인 전기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의 때는 보이지 않고, 무력하고 존재하지 않은 것 같았던 하나님의 능권이 인류의 생활 속에 시현될 때가 되었습니다. 만상과 우주에 엄존하는 신성한 질서와 합법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절대권을 인간들이 자기의 일과 속에서 체득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역사를 통한 하나님과 참부모님, 그리고 의인들의 희생과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천기반 위에서 이룩된 하나님의 선한 상대기대가 굳건히 조성되었기에 가능한 기적 같은 일입니다. 인류는 이제 점점 하나님을 감지하고 영계와 영인들의 역사를 알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속사람인 영인체를 자각하고 영성이 계발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인간은 자연스럽게 우주의 공법을 체득하고 확실한 인격변화를 일으켜 참사람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인류는 우주의 존재 질서와 인간관계가 이기적 자기중심적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이타적으로 남을 위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404.322, 2003.02.06)
지금까지 사탄권은 국가 기반에 한전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권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우주 기반과 천주 기반을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사탄권은 사라지고 새로운 하늘 주권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 위에서 사탄은 사라지고 새로운 하늘 주권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인에서부터 우주까지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주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전체·전반·전권·전능의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전반은 사탄세계의 전체를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가 된다는 겁니다. 전능은 사탄세계의 전권을 하나님이 쥐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권은 국가기반을 넘지 못합니다. 세계기반은 하나님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295.254, 1998.09.08)
전지성과 편재성
하나님은 만사를 통찰하므로, 어느 것도 그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찰한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든 편재하므로, 그의 눈길을 피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히 생각하며, 주의 깊게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 모두를 직관할 뿐 아니라, 우리 삶의 고난을 보고 동정한다. 그는 모든 삶의 정황에서 우리의 벗이므로,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제11장 ‘예정’ 참조).
종교 경전
동과 서가 하나님께 속하나니, 너희가 어느 방향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 있느니라. 그분은 모든 것을 포용하시고 알고 계시도다.
꾸란 2.115 (이슬람)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훤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시편 139.2-3 (기독교)
오, 주님! 당신은 우리가 숨기는 것과 드러내는 일을 알고 계시나니, 천지간의 일이 하나님께 숨겨질 수 없도다.
꾸란 14.38 (이슬람)
시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대가 거실에 혼자 있을 때를 보면서 그대가 서북쪽에 있는 옥루에도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군자는 동하지 않을 때에도 경건하고 말하지 않을 때에도 성실하다.
중용 33 (유교)
다음의 세 가지를 유념하여라. 그러면 너는 결코 죄의 덫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너를 지켜보는 눈이 있고, 네가 하는 말을 듣는 귀가 있고, 네 모든 행동은 하늘 책에 기록되고 있음을 명심하여라.
미슈나, 아보스 2.1 (유대교)
참으로 하나님만이 심판날을 알고 계시도다. 누구도 내일 무엇을 얻을 것이며, 어디서 죽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하도다. 참으로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도다.
꾸란 31.34 (이슬람)
이 모든 세계의 위대한 주재자는 몰래 행하노라. 여기는 이를 마치 지척에 있는 것처럼 바라보나니, 신들은 그의 이 모든 것을 아는도다.
우리가 몰래 일어나 걷거나 움직일 때,
또 눕거나 일어날 때,
둘이 앉아 비밀스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대왕 바루나는 이미 알고 있도다.
거기를 굽어보는 제3자로서···.
혹 누가 천계들을 뛰어넘어 달아난다 해도
여전히 대왕 바루나를 벗어나지 못하나니,
그의 사자들이 천계에서 내려와 두루 다니며
수천의 눈으로 대지를 지켜보고 있도다.
하늘과 땅 사이에,
또 이들 너머에 있는 것들을.
대왕 바루나가 굽어보고 있네.
사람들의 눈 깜박거림도 그는 세고 있나니,
그는 모든 것을 헤아려 알고 있도다.
아타르바 베다 4.16.1-8 (힌두교)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 셋 사이에 비밀이 있을 수 없나니, 그분은 그들 가운데 네 번째가 되시며, 다섯 사이의 일이라면 그분은 여섯 번째가 되시리라. 그보다 적든 많든, 그분은 항상 그들 가운데 함께하시리.
꾸란 58.7 (이슬람)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거기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시편 139.7-10 (기독교)
도둑질하고자 물속으로 잠수하듯 숨는 자여,
이 세상 어느 왕도 너를 볼 수 없다 해도,
하늘의 왕은 모든 것을 보도다.
요루바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사람을 볼 때 마음을 꿰뚫어 보고 그 다음엔 과거를 보고 현재를 토대로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100.93, 1978.10.08)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한 분이기 때문에 24시간 이상의 자리에 계시는 것입니다. (171.27, 1987.12.05)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하늘 땅 어디를 가든지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 즉 무소부재하다고 했습니다. (8.182, 1959.12.13)
참사랑은 센터에 있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은 센터에 있고, 가정을 중심삼은 센터에 있고, 종족을 중심삼은 센터에 있고, 민족을 중심삼은 센터에 있고, 국가를 중심삼은 센터에 있고, 세계를 중심삼은 센터에 있고, 천주를 중심삼은 센터에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모든 센터에 있습니다. 이 센터에 다 뭉쳐지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도 이러한 사랑의 자리에서 무소부재하신 것입니다.
(195.244, 1989.12.01)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를 품고도 남습니다. 중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기반을 포용하는 사랑의 중심자가 하나님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움직인다고 할 경우에는 작은 것도 전부 따라서 움직여야 됩니다. 하나의 큰 원 안에 전부 들어가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전 세계, 전 우주를 커버한다고 하더라도 이론적인 말이 되는 것입니다. (205.33-34, 1990.07.07)
하나님이 없게 될 때 우주는 다 빈 것입니다. 빈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게 된다면 우주는 꽉 찬 것입니다. 왜 그러냐?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혼자 있더라도 하나님이 있는 줄 알게 될 때 우주는 꽉 찬 것입니다. 어디나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디나 계신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모르게 될 때, 모든 것이 빈 것이고 없는 것입니다. (91.323, 1977.03.01)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편재성을 어떻게 느끼느냐? 공기를 하나님의 입김과 같이 느껴라, 태풍이 불어오거든 그것을 하나님의 콧김과 같이 느끼라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이 있거든 그것을 하나님이 이 세계를 위해서 수난 길을 극복해 나오시면서 흘리신 땀과 같이 느끼라는 것입니다.
태양을 바라보거든 그 태양이 이 우주 전체의 생명의 요인을 상징하였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태양에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교본이요 교재로 전개시킨 것, 사랑하는 아들딸을 기쁘게 하기 위한 교재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자연입니다. 나뭇잎을 보고 자기 아들딸같이 여기고 혼자 중얼거릴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는 성인에 가까운 것입니다. (59.102-103, 1972.07.09)
이 우주 전체에 살고 있는 사람의 주인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죽지 않고 살아서 영원히 바라보는 부모가 있다면, 영계나 육계에서나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부모가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살아 있는 지상생활은 물론 영원한 세계까지 전부 다 볼 수 있는 부모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118.38, 1982.05.02)
내재와 마음 속에 머무름
하나님은 마음속에 거함으로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그가 지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서에서 엘리야의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는 어마어마한 지진이나 폭풍을 몰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작은 목소리’로 나타났다. 우리는 믿음과 겸손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현존함에 귀먹고 눈먼 상태로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주변에 가까이 머물고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 전통에서 하나님의 현현은 순수영혼의 자기 구현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없지만, 동양의 종교 전통에서는 일관되게 신성의 내재성 개념을 가르친다. 수피들은 꾸란에 나오는 등불의 비유를 몸에 비추는 빛으로서 마음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로 해석한다. 힌두교에서 신성의 내재는 존재론적이다. 즉, 궁극적 실재는 자아, 곧 아트만이다. 불교에서 신성의 내재는 여래 또는 불성이라 불리는 참된 내재적 본질을 마음에 의해서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재성 개념은 결코 이기심에 의해 가려지고 미혹된 자아인 개별 영혼과 하나님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제7장 ‘각성’ 참고). 내재적인 하나님의 완전한 구현은 하나의 가능성이며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존재목적이기 때문이다.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은 우주를 완성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도록 인간 각자를 창조하였다.
종교 경전
진시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여, 인간이 자기의 마음속에 속삭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은 인간이 목에 있는 혈관보다 내가 인간에게 더욱 가까이 있느니라.
꾸란 50.16 (이슬람)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누가복음 17.21 (기독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13 (기독교)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생명을 부여하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나를 살찌우는 마음이다.
아라키다 모리타케, 세상에 대한 백편의 시 (신도)
그대는 어찌 신을 구하러 숲으로 가는가? 신은 모두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나니, 그는 또한 그대와 더불어 있음을 알라. 향기가 꽃 속에 머물듯, 사물이 거울 속에 비쳐 있듯, 신이 만유에 거하나니, 그대 안에서 신을 구하라.
아디 그란트, 다나사리, M.9, p.684(시크교)
지극히 높으신 이, 보좌에 영원히 앉아 계시는 이, 거룩하신 분이라 불리는 이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높고 거룩한 보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얻어맞아 용기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살며, 잃은 용기를 되살려 주고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해 주리라.”
이사야 57.15 (기독교)
빛나는 황금의 갑 속에 사랑과 자비의 주가 숨어 있나니,
그는 물듦이 없는 무구청정이며,
부분으로 나누어짐이 없어라.
알지어다, 빛 중의 빛이신 그를.
태양도 달도 별들도 그를 비추지 못하고,
번갯불의 섬광도, 땅 위의 그 어떤 불빛도
그를 비출 수 없나니,
주는 만유를 비추시는 빛이라.
그가 빛날 때 만유도 그를 따라 빛난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2.2.10-11 (힌두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빛이라. 그 빛을 비유하사 벽 위의 등불과 같은 것으로, 그 안에 등불이 있으며, 그 등불은 또한 유리 속에 있도다. 그 유리는 축복받은 올리브기름으로 별처럼 밝게 빛나도다. 그것은 동쪽에 있는 나무도 아니요 서쪽에 있는 나무도 아니니라. 그 기름은 불이 닿지도 아니하나 더욱 빛나 빛 위에 빛을 더하도다.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는 자를 그 빛으로 인도하시며 사람들 위에 비유를 보이시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심으로 충만하시노라.
꾸란 24.35 (이슬람)
주는 청각, 시각, 촉각, 미각, 후각
그리고 마음에 서 있으며,
그는 마음과 감관들이 향수하는 것을 향한다.
미혹된 자들은 그의 흔적을 감지하지 못한다.
오직 지혜의 눈을 지닌 자만이
존재의 상태에 있거나 나아가거나
육체 안에 있거나 경험하고 있는 그를 본다.
또한 요가행자들도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그를
보려고 노력하면 볼 수 있다.
바가바드기타 15,9-11 (힌두교)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20 (기독교)
대매가 마조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조가 답했다. “바로 이 마음이 부처이니라.”
무문관 30 (불교)
마음의 본바탕 속에 부처(트리카야)의 삼신이 있으며, 이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마음이 미혹되어 허망한 외부 사물을 따라 수고로이 움직이는 까닭에 스스로 자신의 내밀한 본질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그 자신 속에 있는 삼신을 깨닫지 못하여 그들이 외부에서 구해지는 줄로 그릇되게 믿고 있다. 마음의 본바탕의 현현인 삼신을 그대의 내면에서 찾으라. 바깥에서 이들을 구하려 하지 말라.
육조단경 6 (불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앞으로 나가서 여호와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있어 산을 뒤흔들고 여호와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 다음에 불이 있어났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다.
열왕기상 19.11-12 (기독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영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 그 중심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145.310, 1986.06.01)
하나님은 관념적 하나님이 아니라 내 생활권 안에 살아 계시는, 피부로 느끼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맥박을 듣고 삽니다. 하나님과 호흡을 같이하며 하나님의 체온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그 심정 속에 인류를 타락으로 잃어버린 슬픔이 꽉 차 있는 것을 알고 냇물 같은 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234.233, 1992.08.22)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을, 잊어버리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아버지!’ 하게 되면,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도 아버지 손이 잡힙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꿈같은 사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면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이러한 체휼적 감정을 어떻게 체득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랑의 감정을 가졌다면, 어디를 가든 ‘내가 이것을 해야 된다’ 할 때, ‘하늘이여, 같이해 주시옵소서’ 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은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느끼게 될 때, ‘고마우신 하나님’ 하게 되는 것입니다. (58.299, 1972.06.25)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느냐 할 때 그거 답변하기 곤란하지요? 하나님은 무형의 신이기 때문에 어디든지 통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아씨의 눈 속에도 들어가고, 어디든지 안 가는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서 사느냐? 하나님의 집이 어디냐? 하나님이 사는 집이 어디냐 하면, 우리 마음의 한복판입니다. 남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남성격 심정이 머무르고, 여자의 마음에는 여성적 심정이 들어가 산다는 것입니다. (128.325-326, 1983.10.02)
오늘날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은 유일무이하신 분이요, 절대적인 분이요, 창조주요, 신성 자체로서 지고한 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 즉 피조물과 창조주는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봅니다. 피조물은 속된 것이고 창조주는 절대적이며 신성한 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사랑의 개념을 중심삼고 볼 때, 아무리 지고지선하신 하나님이요 아무리 저속한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내용이 같아야 됩니다. 심정적 내용이 같아야 됩니다. 즉, 인격을 갖춘 사람과 성품이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138.247, 1986.01.24)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주는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그 크기가 210억 광년이나 되는 대우주입니다. ··· 최고의 보물인 하나님을 어디에 모셔 두겠는가를 자문할 때 우리의 마음보다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실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상 자리에 서서 구형운동을 하면서 영속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이기에 인간은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447.155-156, 2004.05.01)
거대한 하나님이지만 인간은 소우주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 거대한 하나님이 내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을 받아야만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런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무한히 크신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그 속에 흠뻑 들어가야만 하나님도 작용하신다는 것입니다. (31.210, 1970.05.31)
섭리적인 혜택에 의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 지근(至近)에 계십니다. 이제부터는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영적인 경험들, 즉 초월의 세계와 교류를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빈번히 일어나는 영적 역사로 말미암아 인류는 직접 간접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선령의 역사에 의한 감화를 경험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영성의 계발과 함께 결정적인 인격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천도에 합당한 인격으로 바뀐 자가 곧 하나님께서 소망하셨던 참사랑입니다. (404.323-324, 2003.02.06)
아버님께서는 먼 상대의 세계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계시고 우리의 몸을 에워싸고 계셨사옵니다. 우리 주위에 공기가 있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저희들의 생애 전체를 덮고 계시지만 알지 못했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 힘을 받을 때 무한한 힘이 거기에 동하는 것이요, 그 힘을 흡수하게 될 때 영원한 힘으로써 저희들에게 새로운 충격과 새로운 자극을 주심을 아옵니다. (27.41-42, 1969.11.23)
불변과 영원
불변과 영원 모든 종교에서 절대자는 이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와 달리, 세계에 속한 모든 생물과 사물들, 그리고 현상은 덧없고 무상하며 상대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절대자와 상호 관계를 지닐 수 없다. 인간은 두 유형의 성향을 지닌다. 우리는 불변의 요소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동시에 우리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가변적 요소들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굳건하고 변하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절대자와 관계를 확립하는 데 핵심적인 요인이다.
이 점에 관한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에게도 피조물들과 참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한 이런 속성들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더욱이 하나님이 일괄성 없이 변덕스러운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갈망은 언제나 그 불변성을 시험 당한다.
종교 경전
그분은 시작과 끝이요, 드러내기도 하며 감추기도 하시니, 그분은 만사에 능통하신 분이니라.
꾸란 57.3 (이슬람)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다.
요한계시록 22.13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같으십니다.
히브리서 13.8 (기독교)
불성은 그 무엇으로도 멸해 없어지지 않는다.
대반열반경 220 (불교)
위대하고 태어남이 없는 영원한 자아는 불멸·불사·무외·무한이며, 그가 곧 브라흐만이다.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 4.4.25 (힌두교)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라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셨다.
출애급기 3.13-14(기독교)
수부티야, 만일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래가 간다거나 온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고 한다면, 이는 내가 말한 바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이냐?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일도 없고 어디로 가는 일도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하니라.
금강경 29 (불교)
주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3.8 (기독교)
브라흐마의 한 낮이 일천 유가요,
그 한 밤이 또한 일천 유가임을 아는 이,
그가 실로 낮과 밤을 안다.
낮에 이르러 삼라만상이 모습을 드러내니,
이는 저 미현현자에서 그들이 일어남이요,
밤이면 또한 그에게 스러져 녹아드도다.
거듭거듭 만물이 일어나고,
다시 그에게로 녹아들고,
오, 아르주나여! 낮이면 다시 일어나도다.
그러나 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이의 너머에
한층 더 나타나 보이지 않는 이가 있으니,
그는 구극의 경지, 불멸자,
만유가 다 멸해 사라진다 해도
영원히 멸하지 않는 자로다.
누구든 거기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곳,
그곳이 나의 지고한 거처이니라.
바그바드기타 8.17-21 (힌두교)
대지 위의 모든 것은 소멸되어도,
위엄, 축복, 영광으로 가득 찬 주님의 모습만은 영원하리라.
꾸란 55.26-27 (이슬람)
이전에도 이후에도 창조자가 있었으니, 영원한 그를 두고 무엇이 실유일 수 있는가? 또한 그 외에 무엇이 영원할까?
아디 그란트, 자푸지 1, M.1, p.1 (시크교)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나니.
스쳐가는 여호와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이사야 40.6-8 (기독교)
화려한 왕의 수레도 닳아 없어지고 이 몸도 그와 같이 늙어버리지만, 선한 이의 가르침은 시들지 않는다. 이에 선한 이는 선한 이들 가운데 선한 법을 드러낸다.
법구경 151 (불교)
미혹된 일체의 상을 여의고 여여한 법에 거하라. 내가 그대에게 말하노니, 도망치듯 사라지는 무상한 세상을 알라.
문득 사라지는 새벽별처엄,
물 위에 떠다니는 거품처럼,
여름날 먹구름 속에 번득이는 번갯불처럼,
명멸하는 등불처럼, 유령처럼, 꿈처럼.
금강경 32 (불교)
비구들이여, 이러한 곳이 있다. 그곳에는 흙도 없고 물도 없으며,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그곳은 허공으로 가득 찬 곳도 아니고, 식별이 가득 찬 곳도 아니며, 어떤 것도 아닌 곳도 아니며, 상도 아니고 상 아닌 것도 아닌 곳도 아니다. 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니다. 해와 달도 없다.
비구들이여, 그곳에 온다고 말할 수 없고 그곳으로 간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그곳에 머문다고도, 그곳에서 죽는다고도, 그곳에서 태어난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 있는 것도 아니며,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며, 무엇에 의지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로 고통의 끝이다.
자아 없음은 참으로 보기 어렵고
진리는 결코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갈애를 완전히 끊고
집착할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자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다.
비구들이여, 생겨난 것이 아닌 것,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합성되지 않은 것이 있다. 비구들이여, 만일 생겨난 것이 아닌 것,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합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면, 그곳에는 생겨난 것과 이루어진 것과 만들어진 것과 합성된 것을 싫어하여 떠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다나 80 (불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언제나 영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리 영원하시다 하더라도 거기에 내려감이 있고 세상과 하늘땅 앞에 손해를 준다면 그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원하는 영원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류, 혹은 피조세계에 필요 적절하고 가치 있는 내용을 언제나 보급해 주는 자리에서 영원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과거에도 필요했고 현재에도 필요하고 미래에도 필요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일 그러한 내용이 우리에게 없다면, 영원한 하나님은 우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추앙하고 하나님께 속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관계를 맺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22.317, 1969.05.11)
영원을 시간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 안에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41.288, 1971.02.17)
사랑을 하게 될 때 영원·유일·불변의 책임을 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은 무엇이냐? 참사랑밖에 없습니다. 참사랑의 주체가 그런데 참사랑의 대상이 매일같이 변한다면 어떻게 믿고 대하겠습니까? (124.97, 1983.01.30)
영생이라는 것은 사랑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하나님도 우주를 창조할 때 스스로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을 기준으로 세워 놓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더라도 사랑은 영원무궁토록 더 크게 투입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사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절대·유일·불변·영원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는 존재, 상대적 이념을 가진 존재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330.262, 2000.08.18)
하나님은 얼마나 나이가 많겠습니까? 몇 억만 년 동안 기다리며, 별 수 없이 나이가 많아졌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남자라면 수염이 발끝까지 갈 것입니다. 크다면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클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겠냐는 것입니다. 사랑밖에 없습니다. (111.77, 1981.01.25)
인간의 하루하루 생활이 순간적인 생명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영원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를 맺는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2.13, 1957.01.06)
하나님은 한번 정하면 억 천만 년이 가더라도 변하지 않고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을 보게 되면 하루에도 몇 번 변합니다. 아침에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가도 저녁에 가서는 ‘아이쿠, 아니다.’ 합니다. 여러분이 수련을 받을 때, 말씀을 듣게 될 때 ‘그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결심을 하지만, 돌아서게 되면 며칠 안 가서 다 흘려버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결심을 했다고 한다면 그 결심을 몇 해나 지니고 갈 자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한번 결심하면 그것을 몇 천 년이고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분입니다. 가다가 이러고저러고 하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내가 뜻을 위해 간다’고 하지만 금년 말, 혹은 내후년 혹은 십 년, 이십 년, 일생을 그렇게 갈 수 있습니까? 그 기준이 내려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좋아야 가지 나쁘면 못 가겠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내가 죽든지 살든지 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이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나, 죽음 위에 있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극복해야 되고, 변치 않는 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다른 것입니다. 그 둘이 부딪치게 되면 변하는 것은 깨져 나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완연히 남아지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이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때 죽음을 극복하고 삶으로 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넘어서야만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66.43-44, 1973.03.18)
하나님은 자신이 유일한 하나님이며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을 표준해서 나왔기 때문에, ‘진짜 당신이 그래요? 한번 시험해봅시다’ 하고 하나님이 세계적 역사적인 테스트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사탄도 테스트를 합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사탄이 변하게 할 것이라고 야단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까딱없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동요되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연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하나님이 왜 사탄에게 참소 받을까 생각해 보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니까 변하는 사탄에 대해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니까 변하는 사탄에 대해서 변하지 않는 위치를 갖기 위해서 그러는구나.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로구나’ 하고 생각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볼 때 사탄의 인격은 변하는 인격이며 유일하지 않은 성격이며 절대적이 아닌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는 전부 반대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중심삼고 볼 때 변하는 마음과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어느 것이 하나님과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이다 상대적이다. 하는 것을 볼 때 여러분들은 절대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격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닮아야 하나님의 상대가 되므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누구 때문에 영원하다고 합니까? 영원이란 개념은 누구를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까? 유일이란 개념이 누구를 중심삼고 하는 말이며, 불변이란 말은 누구를 중심삼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중심삼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상대를 중심삼고 하는 말인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했겠습니까, 상대적인 개념을 갖고 그런 성격을 세웠겠습니까? 그 개념은 자기를 중심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놓고 설정했을 것이라는 것이 이론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하나님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세상의 사람들이 욕을 하더라도 가만히 있고, 발로 차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 인간이 참사랑의 길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 인간도 절대·유일·불변·영원한 것을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는 절대적인 것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 혼자서는 유일한 것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나 영원한 것이 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상대라는 개념을 놓고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랬고 인간도 그럴 수 있으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설정되어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사랑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123.330-332, 1983.01.09)
아버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주의나 주장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리는 모두 없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아옵니다. 하오니 저희의 마음과 몸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근본 입장에 들어가 새로이 폭발되어 오는 힘과 부활의 눈을 저희의 마음에 갖출 수 있게 하시고, 자신을 중심한 생활을 버리고 천주를 중심한 생활로서 돌이켜 주시옵기를 ,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4-64, 1958.03.09)
최초의 원인
모든 존재의 최초 원인은 태초에 세계를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세 이래 세계를 자체의 힘으로 작동하도록 견지한다. 하나님은 세계를 유지하고 작동시키며, 매 순간 끊임없이 모든 실체를 존재하도록 한다. 더욱이 궁극적 원인자인 하나님은 만물의 존재목적과 자연적 본성을 규정한다. 이와 관련해 문선명 선생은 인간의 원인자인 하나님이 자신과 닮은 인간을 창조한 인격적 신이라고 가르친다.
어느 것도 하나님이 규정한 존재목적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역사의 원인임을 의미한다. 문선명 선생은 역사가 하나님의 목적, 즉 일정한 법칙에 의해 주도되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진행되며 분명한 목적을 지향한다고 가르친다. 세계가 그 섭리의 목적을 달성할 때 원인자인 하나님과 결과물인 인류는 하나 될 것이다.
1. 모든 존재의 원인자
종교 경전
아르주나여, 나는 모든 존재들의 씨앗이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나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보는 강한 것, 아름다운 것, 또는 영적인 힘은 무엇이나 나의 본질 한 조각에서 생긴 것임을 이해 할 지어다.
바가바드기타 10.39, 41 (힌두교)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생겼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6 (기독교)
애정이 깊은 현자는
그 속에 우주가 하나의 가정을 지니게 되는
저 신비로운 존재를 바라본다.
전체는 그 속에서 하나되고 거기로부터 나온다.
주는 피조물들의 기본적 요소이다.
백(白)야주르 베다 32.8 (힌두교)
그분은 창조하시고 되돌려 주실 수 있는 분,
그분은 사랑으로 관대하신 분,
영광스런 옥좌의 주인이시며,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는 분이시니라.
꾸란 85.13-16 (이슬람)
끝없이 그가 선물을 나누어 주나니,
마침내 이를 받은 자는 더 이상 무엇을 간구하며
무엇을 받을 것인가.
삼라만상이 그에게 양식을 받나니,
그는 지엄한 주재자.
그의 명으로 온 우주가 운행되도다.
나나크가 말하노니, 그는 영원한 지복이요,
영원히 충만하도다.
아디 그란트, 자푸지 3,M.1, p.2 (시크교)
신께서 손을 떼시면 세상은 끝날 것이다.
야칸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말씀 선집
몸의 눈, 귀, 코, 입 등은 모두 태어나기 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나왔다. 인간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것을 안 존재는 인간 이상의 전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 존재가 하나님이시다. (뜻길, p.75)
하나님은 이 우주의 원인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작용의 원인적인 존재요, 이런 힘을 주입하는 원인적인 존재요, 방향을 제시하는 원인적인 존재요, 목적을 제시하는 원인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인격적인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반드시 동기를 중심으로 방향을 가지고 목적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확실한 입장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을 통해서 방향을 거쳐서 목적의 세계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89.75-76, 1976.07.11)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는데, 하나님은 제일 원인적인 존재인데 그가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겠느냐? 하나님같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만드는 데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서, 형상대로 만들었습니다. 그 말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닮은 동시에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닮은 동시에 아버지는 누구를 닮았겠어요? 나 닮았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답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가 모색해 보게 될 때,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나 같은 분이다’ 하면, 이건 쏙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127.233, 1983.05.15)
이 땅의 모든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할 수 있는 원인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우리가 지내고 있는 이 나라,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도 결과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환경의 인연이 갖추어지기 위해서는 그 환경이 갖추어질 수 있는 동기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의 사회 형성, 하나의 국가 형성, 하나의 세계 형성을 두고 볼 때, 그것을 이어오는 것은 물론 우리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형성될 수 있는 근본 원인은 인간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결과적 존재의 입장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형성될 수 있는 동기와 내용이 있어야 되고,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개개의 인간에겐 무한한 소망이 있고, 무한한 욕망이 있고, 무한한 이상이 있습니다. 결과인 우리 인간이 이런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럴 수 있는 원인이 있어야 됩니다. 그 원인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전체적인 동기이며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원인인 하나님께서 그런 내용을 지니셨기 때문에, 결과인 인간도 그와 같은 내용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인된 하나님과 귀결점이 인간세계를 중심삼고 나타나야 됩니다. 이것이 인간을 찾아온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23.282-283, 1970.02.11)
2. 역사 배후의 원인자
종교 경전
처음부터 이루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아라. 내가 신이다. 나밖에 없다. 내가 하나님이다. 나와 같은 자 또 어디 있느냐? 처음부터 장차 있을 일을 일러주고 이루어지기도 전에 미리 알려준 자, 나밖에 없다. ‘무엇이든지 내 뜻대로 된다. 나는 결심한 것은 이루고야 만다’ 하고 주장할 자, 나밖에 없다. 나만이 해 돋는 곳에서 독수리를 불러오며, 먼 곳에서 내 뜻을 이룰 사나이를 불러온다. 나는 한 번 말한 것은 이루고야 만다. 계획을 세운 것은 그대로 하고야 만다.
이사야 46.9-11 (기독교)
마치 글을 쓴 종이 두루마리를 마는 것처럼 우리가 하늘을 마는 날을 기억하라. 하나님이 첫 번째 창조를 시작한 것처럼 우리는 그것을 되풀이할 것을 약속하며 반드시 행할 것이니라. 우리는 시편 속에서 (모세에 대한) 훈계 후에 그 땅은 나의 올바른 종들이 상속할 것이라고 이미 기록해 두었느니라. 꾸란 21.104-105 (이슬람)
제가 증언 하나니, 당신이 모든 피조물의 주가 되시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의 교육자이십니다. 제가 증거 하나니, 당신의 능력이 우주 전체를 망라하고 땅의 무리가 결코 당신을 실망시킬 수 없으며, 만백성과 나라의 주권이 당신이 당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전 세계의 쇄신과 전 세계 백성의 통일, 그리고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의 구원 외에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바하울라 저서들의 낙수집 115 (바하마교)
말씀 선집
세계의 모든 종교는 우주의 근본원인을 창조주 혹은 하나님이라는 분을 제일 원인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선이시오, 영원, 불변하시고 유일하시며 절대적인 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셨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창조목적이 선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목적 역시 영원, 불변, 유일, 절대적이어야만 합니다. (100.241, 1978.10.19)
인간 자체를 논하게 될 때, 인간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존재이지 근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제1원인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원인은 모르지만 결과적인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생각할 때, 결과적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사람 될 수 있게 된 동기가 있음에 틀림없으니 제1원인적인 존재로 제시할 그 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에 대한 문제를 놓고 나에 대한 확실한 답, 신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터전 위에서만 내 개인의 인생관이 설정되고, 가정이 어떻게 살아 나가고, 사회가 어떻게 살아 나가고, 국가가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이며,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 앞으로 이 세계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만의 방향이 아닙니다. (141.234, 1986.02.26)
흘러가는 역사 속의 모든 일들이 당신의 섭리와 관계없이 되어지는 일이 없사옵니다. (140.62, 1986.02.01)
역사의 방향이 악을 향하여 나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억제하여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으로 나아갈 방향을 취하듯이, 역사도 역사 자체로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때와 시기, 세기를 역사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이 간섭하고 지배해 나오는 과정을 거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4.191, 1958.04.20)
하나님은 영원하신 존재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섭리해 나오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의 곡절은 시대를 통하고, 시대적인 곡절은 미래를 통하여 연결되는 것입니다. (16.253, 1966.06.19)
하나님의 선
모든 종교 경전은 하나님의 선을 찬미한다. 그 중 대부분은 인격적인 용어로 절대자의 선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사랑이 깊으며, 아름답고 은혜가 충만하며, 동정심이 많고 신실하다. 그런데 절대적 선의 기준은 (인간의) 일상적인 선의 기준을 초월한다. 편파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며 모든 것을 품는 하나님의 선은 (인간의) 선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와 닿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은 두루두루 모든 곳을 비추는 태양과 어느 곳이라도 내리는 비의 고마움에 비유된다. 창조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은 하나님의 선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다. 선의 한가운데 머무르도록 바라면서, 선의 하나님은 자연이나 인간의 마음속 모든 것에 선을 펼치신다.
1.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
종교 경전
여호와는 자애롭고, 자비로우시며, 화를 참으시며, 사랑이 지극하시다.
여호와는 모든 것을 인자하게 보살피시고, 그 부드러운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 미친다.
시편 145.8-9 (기독교)
알라는 친절하며 친절한 자를 사랑한다.
알라는 깨끗하며 깨끗한 자를 사랑한다.
알라는 관대하며 관대한 자를 사랑한다.
무슬림 하디스 914.2(이슬람)
구제자 신
구원자 신
전능하신 그를 우리는 기쁘게 숭배하네.
강력한 신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간청되는
인정 많은 그가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리그 베다 7.100.4 (힌두교)
세계의 주님, 그분은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인도해 주시며,
그분은 나에게 일용할 양식과 마실 것을 주시며,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치료해 주시며,
나의 생명을 앗아간 후 다시 생명을 주시며,
그리고 내가 바라건대 심판의 날에 나의 잘못을 사하여 주실 분이시다.
꾸란 26.78-82 (이슬람)
언제나 그는 창조만물을 소중히 여기시고
모든 이의 번영을 도모하도다.
주여! 당신의 은총은 실로 존귀하며
당신의 너그러움은 가없나이다.
아디 그란트, 키르탄 소힐라 M.1, p.12 (시크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길을 제시해 주었으되, 인간이 감사하고 불신하는 것은 그의 선택이라.
꾸란 76.3 (이슬람)
천도는 편애하지 않는다. 항상 선의 편에 있다.
도덕경 79 (도교)
도는 만물 속에 있는 근원이다. 착한 사람의 보배이며, 또한 착하지 않은 사람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복음 5.45 (기독교)
나는 육체적 존재가 아니다.
우주적 자비가 나의 성스런 몸이다.
내 힘은 육체에 있지 않고 공정함에 있다.
내게는 지혜가 주는 것 이상의
어떤 종교적 투시력도 없다.
내게는 평온한 행복감의 성취 이상의
기적은 없다.
내게는 관용의 실천 이외에
그 어떤 법칙도 없다.
스미요시 신사의 신탁 (신도)
말씀 선집
하나님은 희로애락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하는 분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슬플 때 위로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주인의 자리에 서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역사이래에 한 분밖에 없는 절대적인 부모라는 겁니다. 참사랑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부모의 자리에 서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203.228, 1990.06.26)
하나님이 아무리 영원하시다 하더라도 거기에 내려감이 있고 세상과 하늘땅 앞에 손해를 준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원하는 영원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류, 혹은 피조세계, 존재세계에서 필요적절하고 가치 있는 내용을 언제나 보급해 주는 자리에서 영원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과거에도 필요했고 현재에도 필요하고 미래에도 필요한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만일 그러한 내용이 우리에게 없다 할진대 그 영원한 하나님은 우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22.317, 1969.05.11)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기쁨입니다. 기쁨을 누리시고자 인간과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홀로 느낄 수 없습니다. 기쁨을 누리시려면 반드시 대상, 혹은 짝이 필요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서로 상대기준을 이루어 주고받을 때 비로소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기쁨은 사랑을 주고받을 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대상으로 지으시고, 그 대상과 더불어 무한한 사랑을 주고받으시면서 영원히 기쁨을 누리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곧 창조목적이었던 것입니다. (100.241, 1978.10.19)
우리 개인은 물론,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 중에 선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의 방향도 선을 지향하여 나왔으며, 교육자들이나 신앙인들도 선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며 싸워 나온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나는 것도 선을 위하여 태어나야 되겠고, 사는 것도 선을 위하여 살아야 되겠고, 죽는 것도 선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목적 뿐만이 아니라 인간생활을 엮어온 역사의 목적인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24.13, 1969.06.22)
타락한 우리 인간은 어떻게 다시 선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느냐? 먼저 양심을 통하여 본체의 선을 닮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동하여 하나님의 본체의 선과 말씀의 가치를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피조만물을 지으신 선의 이상인 기쁨을 찾으실 것이요, 선의 목적을 지향해 온 인간들도 하나님의 선의 가치를 느끼는 선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2.321, 1957.07.21)
하늘나라의 이상적 인간이 어떤 것이냐? 그 문으로 어느 도적놈이 들어가거나 어느 누가 들어가도 마음대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세계의 별의별 살인강도라 하더라도 그 문으로 들락날락하는 것을 가만 둔다는 것입니다. 도적놈이 살더라도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판도권 내에 있다 이것입니다. 그건 내 소원권 내에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가져갔더라도 그건 내 소유권 내에서 이동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천국에 담이 있어서 열쇠를 채우고 그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24.328-329, 1991.12.29)
2. 피조물에 현시된 하나님의 선
종교 경전
그분은 일곱 층의 하늘을 조화롭게 창조하신 분이시다. 너희는 자비로우신 분께서 만드신 것에서 어떠한 결함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니라. 보아라, 어떠한 결함이라도 네가 볼 수 있겠느냐? 보고 또 보아라. 너희의 시선은 어지럽고 지칠 뿐이니라.
꾸란 67.3-4(이슬람)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창세기 1.31 (기독교)
세계는 정원,
주는 이를 가꾸는 정원사,
모두를 소중히 여기며 소홀함이 없도다.
아디 그란트, 마즈 아슈트파디, M3, p.118(시크교)
풍년이 들어 기장도, 벼도 많이 거두었으며,
또 곳집도 높아졌다.
천만, 억만 끝없이 많은 오곡으로
술과 단술로 만들어 살더라도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판도군 내에 있다 이것입니다. 그건 내 소원권 내에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가져갔더라도 그건 내 소유권 내에서 이동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천국에 담이 있어서 열쇠를 채우고 그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24.328-329, 1991.12.29)
선대 조상께 바쳐 올려 제사 지내고,
모든 예절을 잘 지키고 행하니,
신이 흠향하사
복을 더욱 내려 주시노라.
시경 279: 풍년 (유교)
그분께서 하늘로부터 비를 내려 너희가 마시게 하고, 나무를 자라게 하여 너희 가축들을 사육케 하셨노라.
그분은 그것으로 하여 곡식과 올리브, 대추 야자의 열매, 포도, 그리고 모든 종류의 과일을 너희를 위해 생산하셨으니, 진실로 그것은 생각하는 자에게 징표가 되리라.
그분은 너희를 위해 낮과 밤, 해와 달과 별들이 그분의 명령에 복종케 하셨으니, 진실로 그것은 이해하는 자에게 징표가 되리라.
그분은 너희를 위해 지상에 다양한 색깔의 사물을 번식 하셨으니, 진실로 그것은 염원하는 자에게 징표가 되리라.
그분은 너희를 위해 바다를 두시어 신선한 생선을 취하게 하시고, 너희가 걸칠 장식품을 얻도록 하셨도다. 또한 너희는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배들을 보나니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되고 즐거움으로 감사하게 되리라.···
너희가 하나님의 은총을 계산하려 하나 결코 그것을 헤아릴 수 없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도다.
꾸란 16.10-18 (이슬람)
큰 도는 어디에나 넘쳐흐르고
자유자재로 좌우로 뻗을 수 있다.
만물은 도를 따라서 생육화성 되고 있다.
그러나 도는 스스로 나서서
만물을 주관하지 않는다.
그리고 도는 모든 조화의 공을 이룩하면서도
스스로 취해 갖는 일이 없으며,
만물을 감싸고 사랑하고 키우면서도
주재하고 지배하지 않는다.
도는 언제나 욕심이 없다.
따라서 은미(隱微)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도는 만물을 귀속시키고도
주재하지 않으므로 크다고도 할 수 있다.
도는 끝내 스스로 크다고 내세우지 않으므로
능히 클 수가 있다.
도덕경 34 (도교)
무시이래로 존재해온 깨달음과 열반의 청정한 통일의 근본 원인은 통합하는 자비의 원리, 청정함, 조화, 닮음, 리듬, 영원함, 그리고 평화의 통일 원리이다. 그대 자신의 본성 광휘 속에 있는 이 원리를 흡수함으로써, 그것의 통일 정신은 온갖 다양한 조건 속에서 발견되고 진전되며 또한 실현된다.
수능엄경 (불교)
말씀 선집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 참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뿌리라는 것입니다. 뿌리는 줄기를 통해서 순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가지는 동서남북으로 뻗는 겁니다. 동서남북으로 뻗으면 뻗을수록 순도 자라고 줄기도 자라고 뿌리도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세계에 참사랑을 중심삼은 종적인 아버지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종적인 참사랑을 중심삼은 아버지가 창조주이신 것이다. (203.352, 1990.06.28)
모든 존재는 작은 것은 큰 것을 위하고, 큰 것은 더 큰 것을 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약육강식이란 말은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말한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본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주를 만든 주인이 사람을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은 무엇을 먹더라도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217.204, 1991.06.01)
하나님은 지혜의 왕이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인류 세계의 참된 사랑과 참된 행복과 참된 평화와 참된 이상을 주체와 상대 관계 가운데 주체를 중심한 방향에 그 기원을 결정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객체를 중심한 입장에 결정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객체를 중심한 입장에 그 기원을 정하든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영원한 이상세계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중심하고 주체만을 위하는 것이 된다면, 또 그와 같은 전통적인 기준을 인간이 만들어 냈다고 한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하고 봉사해야만 된다고 한다면, 거기서는 큰일이 나게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는 하나라든가 통일이라는 문제, 혹은 융합이라든가 발전이라는 원칙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체를 중심삼고 객체가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있어서 객체를 중심하고 하나님 자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가 됩니다. 모든 것이 발전의 원칙을 따르게 되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평화와 행복, 이상과 사랑의 본원(本源)의 기준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72.14-15, 1974.05.07)
신성한 사랑과 자비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사랑은 가장 매력적이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속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와 은총을 느끼는 신비한 경험을 계기로 하나님을 믿는다. 심지어 마음 한가운데 의심을 갖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마음을 움직여 믿음이 생기도록 한다. 창조자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피조세계는 생명을 유지하고 보호받는 자비로 충만한 세계가 된다. 선한 창조는 실로 선한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아니,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 그 이상이다.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처럼, 사랑은 하나님의 창조와 동기 그 자체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이유’이다. 사랑은 또한 하나님이 수많은 고난의 길을 통해 구원섭리 역사를 추구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은 오래 전에 길을 잃고 성령의 자비로운 부름에 귀먹은 우리, 무지한 인간들에 대하여 인내하며 용서하는 하나님을 가르쳐준다. 귀먹고 눈먼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우리는 품에 안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섭리를 멈추지 않는다.
1. 사랑: 하나님의 본질
종교 경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요한일서 4.16
···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포용하나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선을 베풀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은혜가 있게 하리라. 꾸란 7.156 (이슬람)
대자비심은 깨달음의 본질이다. 화엄경 입법계품 (불교)
주여! 당신은 간청의 유무와 무관한 구세자요, 까닭 없이 자비를 베푸는 분이며, 기도가없을 때도 기꺼이 들어주시는 분이며, 관계가 없을 때도 정다운 친구이십니다.
비타라가스타바 13.1 (자이나교)
빛나집만 감추어진 참된 자아는 심장 속에 거한다. 움직이는 것, 숨 쉬는 것, 열리거나 닫혀 있는 모든 것이 참된 자아 속에 산다.
그는 사랑의 원천이며, 그는 생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알려질 수 있다.
그는 인생의 목표이니, 이 목표를 실현하라. 문다카 우파니샤드 2.2.1 (힌두교)
사랑은 맨 처음으로 생겨났으니, 천상의 신들보다도 높고 조상이나 사람들보다 고결하도다. 오, 사랑! 그대는 모든 이의 장자요 지극한 권능이로다.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노라!
땅과 하늘 혹은 대양들과 거룩한 불의 너비보다 너 넓은
오, 사랑! 그대는 모든 이의 장자요 지극한 권능이로다.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노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 가운데,
오, 사랑! 그대는 선의 형상을 그대의 얼굴에 드러내 보이나니, 이 형상들이 우리의 가슴속으로 스며들게 하라.
모든 사악은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시라! 아타르바 베다 9.2.19-25 (힌두교)
선남자야! 자비는 위대한 브라흐마이니,
위대한 브라흐마가 자비요 자비가 곧 여래니라.
선남자야! 자비는 일체중생의 불성이로되
이와 같은 불성이 미망으로 덮인 까닭에
중생이 이를 보지 못한다.
불성이 자비요 자비가 곧 여래니라. 대반열반경 259 (불교)
법(달마)의 황소는 자비의 소산이며,
마음의 흡족함이 창조를 끌어안도다.
이를 아는 자는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리니,
황소의 등에 지워진 짐의 무게가 실로 놀랍구나.
아디 그란트, 자푸지 16, M.1, p.3 (시크교)
인간의 아들아! 잊히도록 오래된 내 존재와 내 본질이 옛 영원 속에 가려진 채, 나는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알았노라. 그래서 내가 너를 창조하여, 네 위에 나의 모습을 새기고, 너에게 나의 아름다움을 계시하였노라. 바하울라의 숨겨진 말씀 아라비아어 3 (바하이교)
말씀 선집
사랑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사랑을 우주적인 것으로 만들고, 사랑을 영원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정서적인 문제를 중심삼아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의 모체입니다. 사랑의 모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사랑이 우러나왔고, 자녀의 사랑이 우러나왔고, 형제의 사랑이 우러나왔고, 친척의 사랑, 민족의 사랑이 우러나왔습니다. 사랑의 갈래라는 것은 원줄기에서 뻗어나가는 가지나 잎과 같이, 물결이 파문이 되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먼 곳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감도의 차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50.267, 1971.11.08)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누가 끊을 것이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의 원천이요, 행복의 원천이요, 평화의 원천입니다. 여러분이 영적 체험을 해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24.325, 1969.09.14)
심정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바탕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창조는 거기서 우러난 것입니다. 모든 이상도 거기서 우러난 것입니다. 모든 것의 완전한 바탕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완전과 완성은 거기서 우러나는 겁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완전과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82.292, 1976.02.01)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한히 기쁜 감정을 갖고 계시며 무한히 슬픈 감정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기쁘고 좋은 감정만 갖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슬프다면 인간들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슬픔의 심정을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11.89, 1961.02.12)
하나님이 왜 생겨났느냐 할 때 사랑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랑이 됐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까지도 사랑 때문에 태어났다는 논리를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사랑 때문에 태어나 사는 하나님은 사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 태어난 만물도 사랑 때문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랑의 세계에서는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303.287, 1999.09.09)
하나님은 모르는 게 없습니다. 지식의 대왕이시고, 능력의 대왕이시며, 전지전능하십니다. 또, 무소부재하십니다.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그분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이아몬드인가? 그건 언제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황금, 보석인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혼자 있어서 ‘아이구, 나 사랑하니 좋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필요한 게 뭐냐? 하나님도 인격적 신이라 하면 입이 있겠지요. 입도 코도 있고, 눈도 귀도 있고, 손 발도 있고, 마음도 있고, 심정도 있을 것입니다. 인격적 신이라면 말입니다.(142.31, 1986.03.03)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은 혼자로서는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절대로 필요한 오직 한 가지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대상, 즉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인 것입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심정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동기가 돼서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특히 이 기간에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닮은 실체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민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원한 무형의 내적 부모요, 완성한 아담 해와은 영원한 유형의 외적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135.11, 1985.08.20)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닮은 것과 사랑하겠습니까, 하나님과 닮지 않은 동물새끼하고 사랑하겠습니까? 닮은 것과 사랑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어떠하냐? 하나님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그런 상대라면 인간을 중심삼고 볼 때 신은 인격적인 신이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요소가 백 퍼센트 화합해야 됩니다. 몸과 마음의 소성에 있어서 전부가 화합할 수 있는 신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정의(知情意)를 가진 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62.274, 1987.04.17)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로부터 찾아지는 것입니다. 상대가 없으면 못 찾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최고의 귀한 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상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상대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상대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상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사랑을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위해 있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사랑이라는 것은 위하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태어나기를 어디에서부터 태어났느냐?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사랑이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어받은 생명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이념을 통해서 생명이 나왔기 때문에 생명에 앞서서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에 뿌리를 박고 인간의 생명이 흘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서 태어나 사랑에서 자라고 사랑의 상대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1대라면 2대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서야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딸을 사랑하듯 그 사랑을 체휼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3.310, 1986.03.21)
2. 신성한 자비
종교 경전
하나님은 가장 훌륭한 보호자이시니, 그분은 자비가 있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니라. 꾸란 12.64 (이슬람)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에게 자비로우시며 그분이 원하시는 자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노라. 그분은 강함과 권능으로 충만하시니라. 꾸란 42.19 (이슬람)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13 (기독교)
자신이 들은 모욕을 하나님보다 더 잘 참는 자가 없느니라.
부카리 및 무슬림 하디스 (이슬람)
신은 꼬리가 없는 암소를 위해 파리를 쫓아 주신다.
요루바족의 격언 (아프리카 전통종교)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도 마련하여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 (기독교)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탱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짐을 지우지 않으시느니라. 인간은 자신이 행한 선의 보상을 받을 것이요, 자신이 저지른 악의 대가를 받느니라. 주여, 우리가 망각했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벌하지 마옵소서. 주여, 저희 선조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신 것처럼 저희에게 짐을 지우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감내할 수 없는 것을 저희에게 지우지 마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저희를 용서하소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꾸란 2.286 (이슬람)
말씀 선집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냐? 절대적으로 위해 살려고 하시는 분입니다.
(175.158, 1988.04.16)
하나님과 우리를 놓고 볼 때 우리가 아무리 고생할지라도 그저 일생 동안, 80 몇 년, 100년 미만입니다. 그러니 3만 6천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백세를 살아야 3만 6천일밖에 못 삽니다. 3만 6천 날은 잠깐입니다. 그걸 못 참겠습니까? 하나님은 몇 만년, 몇 억년 계속해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세계가 그래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태연자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천만 사연이 끊고 있지만 태연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입을 열어서 그 사정이 통할 수 있는 말을 하게 된다면 천년만년 통곡할 수 있는 사연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통곡하는 것이겠습니까? 인류를 위해서 눈물을 지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24.59-60, 1983.01.23)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너희들이 날 사랑해라, 너희들은 나를 위해서 희생해라’ 고 하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는 당신이 먼저 애기 똥을 치우고, 어머니 아버지로서 똥을 치우고, 먼저 희생 봉사하고 온유 겸손한 교육을 위한 교재의 센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116.90-91, 1981.12.20)
하나님은 모든 피조세계를 자기가 지었으면 지은 그 역사를 두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었고,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했다는 것을 두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원칙에 의해 세운 사랑을 중심삼고 위대한 사랑을 했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하더라도 그 사랑을 잊을 수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을 중심 삼았는데 비참하게 된 것을 볼 때, 어떻게 ‘에이 이놈의 자식들! 저희들이 이래서야 되겠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불쌍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115.320, 1981.11.29)
3.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심정
종교 경전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바알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렸다.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에 안아 키워 주고 죽을 것을 살려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호세아 11.9-11 (기독교)
육도 중생 살펴보니 빈궁하고 지혜 없어
생사의 길 잘못 들어 그 고통을 끊지 못해
다섯 가지 욕심과 쾌락에 탐착하되 모우가 꼬리 사랑하듯
탐욕 속에 갇혀 있어 눈도 멀고 소견 없어
큰 부처를 구하지 않고 고통을 못 끊으며
삿된 소견 깊이 물어 괴로움에 얽혔으니
이런 중생 위하여서 큰 자비심 내었노라. 법화경 2 (불교)
말씀 선집
여러분은 자기 자식 하나 교육시키는 것도 힘들지요? 그 자식은 자기의 피살을 이어받은 아들딸입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 마음이 통하여 같이 눈물 흘릴 수 있는 아들딸입니다. 아버지가 눈물 흘리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동할 수 있는 아들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도하고 육성하려면 지극히 어렵지 않습니까? 그것을 볼 때, 오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울어도 본체만체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슬퍼해도 본체만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탄의 혈육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찬양합니다. 망하는 것을 보면 좋아하며 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놓고 지도하고 개척하고 개척의 방향을 가르쳐 주려니 얼마나 수고로우실 것이냐? 그러나 하나에서부터 백, 천, 만까지 위하시는 마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하나님에게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섭리역사를 붙들고 나오실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42.257, 1971.03.21)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붙들어 복귀섭리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인과 아벨을 택하였고, 노아를 택하였고, 또 그 밖의 수많은 가정을 택해 세우셔서 복귀섭리를 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역사를 이끌어 나오시는 하나님의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심정을 억제하면서 오늘 이 시간까지 참고 견디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참고 견디어 나오신 그 안타까운 심정을 느껴 하나님을 붙들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오늘날 이 땅 위에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땅 위에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눈물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즐거움이 있었던 반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서러움이 온 천지만물을 덮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이때까지 참고 견뎌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사람, 또는 하나님의 서글품을 같이하여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도 창조주의 체면을 잊어버리고, 창조주의 영광이나 권세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와 함께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이런 사정에 사무친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4.239, 1958.05.18)
하나님께서는 4천년 동안 인간을 대해 어떠한 마음을 갖고 나오셨는가? 자기를 위하려는 마음을 갖고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당장 죽어 마땅할 인간이요, 고통당해 마땅할 인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대해 마음을 다하는 입장에서 참음의 4천년 역사노정을 걸어오셨으며, 뜻을 다하여 4천년 동안 사탄을 분별하는 싸움의 노정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불변의 사랑의 마음을 갖고 4천년 동안 참아오셨고, 싸워오셨고, 사랑하여 오셨던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78, 1956.05.27)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야, 이놈아, 왜 죄를 지었느냐’ 라고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죄지은 사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사정은 생각지 않고 인간의 사정을 알아주려는 하나님입니다. 슬픈 자에게는 슬픈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고, 고통 받는 자에게는 고통의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고, 억울하고 분통한 자에게는 억울하고 분통한 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 사정을 통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환경 가운데도 그렇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정을 갖고 찾아오셨습니다. 너는 나를 배반해도 나는 네 아버지라는 마음이 있기에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9.232, 1960.05.29)
아버님, 저희들은 고아와 같이 갈팡질팡, 목적도 방향도 모르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역사와 흐름에 따라 뒤넘이 치면서, 생명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밀리고 밀리면서 오늘까지 나온 불쌍한 모습들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반면, 이러한 저희들을 붙드시고, 저희들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도 몰랐사옵고, 사망권내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저희들을 찾으시기 위해 밤과 낮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수고해 오신 주인공이 계시다는 사실을 몰랐사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기쁨의 심정이 하늘과 땅을 통하는 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5.337, 1959.03.08)
창조자
창조자로서 하나님을 다루는 이 절은 세계 창조와 인간 창조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을 포함한다. 어떤 구절들은 말씀으로 비롯된 창조를 묘사하는가 하면, 또 다른 구절들은 절대자 안에 있는 의지로 말미암은 창조를 말한다.
어떤 경전에서는 무로부터의 우주창조를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경전에서는 절대자로부터 유출된 세계, 즉 절대자의 일부 속성이 허공으로 유출되어 형상과 질료의 성질을 띤 세계가 된다고 말한다.
어떤 경전에서는 세계영혼의 발현으로 창조의 근원을 말하면서 영혼이 거할 거처로, 그 다음에 물질을 빚었다고 말하는데 반해, 다른 경전에서는 사랑의 창조 동기를 말하면서 사랑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하여 비존재로부터 존재를 분리하였다고 설명한다(일자로부터 유출된 두 상극의 상호 관계에 의한 창조에 대해서는 제2장 ‘이중 속성’에 포함된 구절 참조). 끝으로 힌두교와 도교의 경전에서는 신의 자기 비움과 희생의 창조를 묘사한다.
이와 같은 창조 설화들은 태초에 어떻게 사물들이 생겨났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 설화들은 창조의 시작부터 적용되었던 동일한 창조원리로 지금도 이 세계를 주관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성서신학자인 루돌프 볼트만이 말했던 것처럼, “창조설화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이 그때 그 때마다 늘 역사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설화들은 우리에게 현재의 자신의 됨됨이를 지시해 준다. 문선명 선생 자신은 하나님이 창조과정에 투입한 수고와 사랑에 대해서 강조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창조과정에서 정성과 수고를 다한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피조물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
정신을 축으로 물질의 창조가 진행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마음을 중심삼고 살아 갈 때 우주적 질서에 부합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사랑을 동기 삼아, 더불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을 구하기 위해 세계를 창조한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에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사랑스런 자녀가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1. 태초에
종교 경전
한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 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나님께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공을 만들어 창공 아래에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을 갈라놓으셨다. 하나님께서 그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이튿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나님께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나님께서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 나거라! 땅 위에 낟알을 내는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 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났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사흘 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나님께서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 밤과 낮을 갈라놓고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또 하늘 창공에서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두 큰 빛 가운데서 더 큰 빛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들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 놓고 땅을 비추게 하셨다. 이리하여 밝음과 어둠을 갈라놓으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나흘 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나님께서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지어 내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나님께서 이것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새끼를 많이 낳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여라. 새도 땅 위에 번성하여라!” 이렇게 닷새 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나님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나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하나님께서 다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엿새 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레 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레 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창세기 1.1-2.3 (기독교)
하나님은 하늘과 땅, 천지간의 사물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신 후 권좌에 오르셨으니 그분이 아니면 너희에겐 어떤 보호자나 중재자도 없노라. 그래도 너희는 이를 교훈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느뇨. 그분은 하늘에서부터 땅에 이르는 만사를 주관하시고 심판 날에는 모든 것이 그분께 귀의하리니, 그 기간은 너희의 헤아리는 천년과 같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며 권능과 자비로 충만하신 분이시라. 그분은 모든 피조물을 완벽한 조화 속에 두시고, 인간을 흙에서 창조하기 시작하셨노라.
꾸란 32.4-7 (이슬람)
도가 만물을 낳고 덕은 키운다. 그럼으로써 만물이 형성되고 형세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만물은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하게 여긴다.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중하게 여김은 시켜서가 아니고, 언제나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도덕경 51 (도교)
거미에서 거미줄이 토해지고
다시 거두어 들여지듯이,
초목이 땅 속에서 싹을 내밀듯이,
터럭이 몸에서 생겨나듯이,
현자들이 일러 말하되,
그렇게 이 우주가 생겨났다.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불사의 자아인 그로부터.
명상의 힘으로 브라흐마가 부풀고,
이로부터 음식이 나왔으며,
음식으로부터 생명, 마음, 땅·수·화·풍·공의 다섯 요소들,
그리고 업의 세계가 차례로 일어났도다.
모든 것을 굽어보며
모든 것을 헤아려 아는 불멸의 자아,
그로부터 브라흐마가 생겨났으며,
형색의 세계가 브라흐마로 말미암아
전변되었으니, 이로써 저 유일자가
일체만물로 현현하였도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1.1.7-9 (힌두교)
거룩하신 그분은 하늘땅을 창조하실 때까지 만들고 부수고를 반복하셨다. 그리고 창조 후에 “보기에 좋더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랍바 9.2 (유대교)
말씀 선집
본래 하나님의 창조는 오늘날 기성교인들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말씀으로 지었다’ 고 믿는 것처럼 무슨 요술을 부리듯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닙니다. 있는 정성을 다하여 자기 일신을 전부 투입하는 놀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성을 안 들이고, 피와 살을 투입하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내 사상 중의 사상이요, 내 전체 중의 전체를 투입했기 때문에 희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78.111-112, 1975.05.06)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으실 때 거기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지어놓고 보기에 선하다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무엇입니까? 어떤 목적을 이루었을 때 느끼는 것입니다. 지으신 만물에 하나님의 목적의식이 내재되어 있기에 창조된 만물을 놓고 하나님은 기쁨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9.168-169, 1960.05.08)
동기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동기를 거치고 과정을 거쳐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과학의 현상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돌연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질서적인 것입니다. 동기를 중심삼고 원리 원칙적인 과정을 거쳐서 실체적인 목적체가 형성되는 세계가 창조 이념세계입니다. 여러분, 성공하는 사람들이 마음의 굳은 각오 없이 성공합니까? 마음의 동기를 중심삼고 환경을 개척하고 변함없이 그것을 밀고 나가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성공하는 데도 그렇거늘 대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시는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9.227, 1960.05.29)
여러분이 바라보는 이 피조세계, 혹은 이 자연에는 각양각색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만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창조되었느냐? 그것은 창조주의 정성어린 심정의 과정을 통하여 지어졌던 것입니다. 아무리 미미한 존재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사랑의 마음을 지닌, 그런 자리에서 지음 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20.248, 1968.07.07)
하나님의 창조를 위한 정성과 투입은 지극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절대 신앙, 절대 사랑, 절대 복종의 기준을 세워 놓고 절대 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토록 정성을 다해서 투입하여 만든 사랑의 대상체입니다. (400.81, 2002.12.27)
여러분은 사랑의 상대가 자기보다 낫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도 자기의 사랑의 상대가 자기보다 낫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백 퍼센트만을 갖고 있어서 백 퍼센트를 투입하면 백 퍼센트 짜리 밖에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 배를 원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걸 잊어버려야 됩니다. 천 번을 투입하고 천 번을 잊어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몇 만 배를 원한다면 몇 만 배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몇 만 배를 투입해야 된다는 논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254.266, 1994.02.15)
2. 인간의 창조
종교 경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창세기 2.7 (기독교)
실로 하나님은 흙의 추출물로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한 방울의 정액으로 만들어 안전한 은신처에 두었도다. 그 다음 그 정액을 응혈로 만들고, 그 응혈로써 살 세포를 만들고, 그 살 세포로써 뼈를 만들어 뼈를 살로써 감싸게 하였나니, 하나님은 하나의 창조를 이루었도다. 가장 훌륭한 창조자 하나님께 축복이 있으소서. 꾸란 23.14 (이슬람)
스스로 우주를 창조하였으나, 이에 끌려 다니지 않으시며,
저 자비로운 주는 또한 신성한 중심(인간)을 만드셨도다.
공기, 물, 불을 섞어 육신의 요새를 만드시고,
(감각의) 아홉 개 처소를 일일이 정하여,
제 십 처에 가없고 알 수 없는 자신의 주처를 정하셨도다.
저 무한한 주께서 무자성(無自性)의 공인 채로 힘을 띠셨도다.
무한한 존재이신 주는 스스로 얽매이지 않으시며, 창조력을 펼쳐 내어 공으로부터 생명 없는 존재를 창조하셨으며,
또한 바람과 물을 생겨나게 하셨도다.
창조를 일으키신 후에 주는 몸의 요새 속에 군주로 거하나니,
주여!(몸의) 불과 물 속에 주의 광채가 있나이다.
공으로 된 주의 본바탕에 보이지 않는 창조의 힘이 실려 있나이다.
아디 그란트, 마루 슬라헤, M.1, p.1037 (시크교)
말씀 선집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흙으로 만들어 놓고, 외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여 내적인 것을 세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지창조의 이치입니다. 현재보다 더 큰 것, 무가치한 것에서 더 가치 있는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이치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인간창조의 이치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인간창조를 볼 때, 인간을 짓게 될 때, 몸뚱이를 먼저 만들어 놓고 영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152.319-320, 1963.08.18)
이 몸뚱이는 하나님께서 있는 정성을 다 들여 흙덩이와 같은 것을 수습하여 영원한 이념의 생명체, 즉 영인체가 자랄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술품도 이 이상의 예술품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야, 일어나라’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최대의 정력을 기울여서 만드신 이 몸뚱이입니다. 거기에 영인체를 불어넣어 하나의 사람을 만드셨습니다.(8.80, 1959.11.08)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원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유의지와 그에 의한 행동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 드리는 실체대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스스로 노력하여서, 그 뜻대로 생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여 그 뜻을 알아 가지고, 그 뜻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원리강론, 인류역사종말론 1.1)
만약 눈이 여기 발 끝에 가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입이 뒤에 가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좋다’가 아닙니다. 질서가 중요한 것입니다. 입은 제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잘 감시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입이 그 곳에 있을 때 손이 운동하기에 제일 좋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손이 뒤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뒤에서 다 감시하려면 얼마나 예민해야 되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다 좋아하는 레버런 문이라도 할 수 없이 ‘야, 하나님은 과학자구나. 하나님은 멋진 양반이다. 정말 멋지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코와 입 사이에 양쪽으로 금이 나 있는데, 나는 동양 사람에게는 금이 있고 서양 사람에게는 금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왜 여기에 벼랑을 만들었습니까? 땀을 흘려서 입에 들어가면 큰일 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이 쑥 들어가지 않고 쑥 나왔습니다.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리고 코가 거꾸로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비 오는 날 큰일 날 것입니다. (104.207-208, 1979.05.06)
3. 사랑과 희생이 서린 창조역사
종교 경전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묘한 암컷이라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은
하늘과 땅을 낳은 근원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항상 있어온 듯하지만,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는다. 도덕경 6 (도교)
그때에는 유도 없었고 무도 없었으며,
공계도 없었고 그 위의 천계도 없었도다.
무엇으로 덥혀 있었던가? 어디에?
누구의 보호 아래?
물은 있었던가, 깊이 모를 물은?
그때에는 죽음도 없었고 불사도 없었으며,
밤의 표징도, 낮의 표징도 없었도다.
스스로의 충동으로, 저 유일자가
숨 없는 숨을 쉬었으니,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도다.
어둠이 있었으니, 모든 것이 어둠에 싸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혼융한 물이었노라.
그때 공허에 감싸여진 것,
저 유일자가 열의 힘으로 생기하였도다.
처음에 의욕이 저 유일한 것에 나타났으니,
이것은 생각의 첫 씨앗이었도다.
마음속 깊이 지혜를 탐구하는 현자들이
무에서 유의 고리를 찾았도다.
열십자의 금이 무로부터 유를 갈라내었으니,
그 위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씨앗을 품은 자와 충만한 힘이 있었으니,
아래로부터는 잠재력이, 위로부터는 충동이.
리그 베다 10.129 (힌두교)
궁극적 존재로 제물로
신들이 희생제를 지낼 때,
봄은 녹은 버터, 여름은 연료,
가을은 공물이었다.
제물이 된 궁극적 존재요 처음으로 태어난 그를
그들은 풀 위에 흩뿌렸다.
그로써 신들은 희생제를 지냈으며,
그 사이드야들과 시성들도.
완전하게 거행된 그 희생제로부터
버터에 응유를 섞은 것이 없어졌다.
이로부터 공중의 새들과
숲 속의 동물들과 가축도 생겨났다.
완전하게 거행된 그 희생제로부터
리그 베다와 사마 베다가 생겨났으며,
찬다(아타르와 베다)도 그것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야주르 베다 또한 그것으로부터 생겨났다.
그것으로부터 말들과
아래 위에 이빨이 있는 짐승들도 생겨났다.
소도 그것으로부터 생겨났으며,
그것으로부터 또한 염소와 양들도 생겨났다.
그의 마음에서 달이 생겨났으며,
그의 눈에서 태양이 생겨났다.
그의 입에서는 인드라와 아그니가 태어났으며,
보유(바람)는 그의 호흡에서 생겨났다.
그의 배꼽으로부터 공계가 생겨났으며,
그의 머리로부터 하늘이 만들어졌다.
그의 발에서 대지가, 그리고 그의 귀에서 방위가 생겨났다.
이로써 그들은 세계들을 형성했다.
리그 베다 10.90.6-10, 13-14 (힌두교)
말씀 선집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자를 만들기 위해서 120퍼센트를 투입했습니다. 천지 창조의 근원적 사상 기반이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희생 봉사와 순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위하게 했느냐? 위하는 원칙을 세웠다는 것은 뭐냐? 공기로 말하면, 평준화된 공기 가운데에서 완전 진공상태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절대 진공권 내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고기압은 자동적으로 저기압 쪽으로 순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의 상대를 찾기 위해서 투입하고 투입하다 보니 그 자리에 있더라도 자연히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적 근거를 중심삼고 피조물들을 쌍쌍제도로 창조했는데, 전진적으로 차원 높은 상부의 급을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의 이상적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했다는 것입니다. (199.276, 1990.02.20)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했느냐? 그것은 아무리 절대자라고 하더라도 자기 혼자로서는 기쁨을 느낄 수 없으며, 설령 기쁘다 하더라도 기쁨의 자극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자가 아무리 ‘나는 절대자다. 나는 사랑의 주인공이다. 생명의 주인공이다’ 라고 한다 해도 절대자 혼자서는 사랑의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요, 천지가 내 몸 속에 있다는 생명의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38.152, 1971.01.03)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왜 지었느냐?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지었다는 사실은,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힘을 투입했다는 것입니다. 힘의 투입입니다. 힘의 투입은 자체의 소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힘을 잔뜩 뽑아냈는데 그것이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소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밥을 먹고 힘든 노동을 하게 되면 빨리 배가 고프지요? 빨리 피곤해지지요? 왜? 힘을 투입하면 주체면 주체 자신에 있어서는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만사에 손해를 보아 가면서 좋아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플러스되는 데서 좋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것은 우시기 위해서, 슬프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좋으시기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반드시 플러스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플러스를 언제 찾느냐? 언제 그것을 찾아 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피조물의 완성이라는 표준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투입하면 그때부터 돌아온다’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장사를 해도 그렇습니다. ‘이만큼 노력하면 그때부터는 이익이 난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만큼의 한계점까지 열심을 다해서 그것만 완전히 통과하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나에게 이익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서 공부하잖아요? 고시니 뭐니 하는 것들도 뭘 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노력하여 그 한계점을 밀고 넘어가게 될 때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지으셨다면 왜 지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힘을 투입한 것입니다. 자기 자체를 소모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중심삼고 투입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투입해 가지고 완성이 되는 날에는 그것이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이 되는 날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 다음에는 돌아옵니다. 이런 원칙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데 있어서 백을 투입했는데 백보다 적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하나님은 창조 위업을 계속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을 투입했으면 돌아오는 데에는 이백, 삼백 이렇게 보다 더 차원 높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무한한 것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창조는 투입하면서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아오는 데에 어떻게 돌아와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보다 차원 높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런 가치의 것으로 돌아올 때 무엇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느냐, 그것이 돌아올 때 기쁠 수 있는 것이 뭐냐?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65.22-23, 1972.11.13)
도대체 하나님이 자기만 생각한다면 천지창조를 했겠느냐? 창조라는 말은 힘의 투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술가가 있으면 그 예술가는 걸작품을 만들기를 원합니다. 예술가가 걸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온 정신과 모든 일체의 정성을 다 투입합니다. 다 투입하는 데서만이 완전한 걸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완전 투입이 아닌 것입니다. 완전 투입, 그 이상 될 수 없다 할 수 있는 곳에서 비로소 걸작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78.111, 1975.05.05)
하나님이 이 우주를 지을 때 절대 신앙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절대 사랑입니다. 창조주로서 사랑의 대상을 절대 사랑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 복종입니다. 절대 복종은 자기 자신까지도 다 없애는 것입니다. 완전 투입하는 것입니다.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개념조차 다 투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로 포인트(영점)입니다. 믿음도 다 퍼부었기 때문에 제로 포인트이고, 사랑도 다 퍼부었기 때문에 제로 포인트이고, 복종도 다 퍼부었기 때문에 제로 포인트입니다.(313.233, 1999.12.19)
하늘 부모
절대자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인연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유대교와 기독교 경전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며, [법화경]에서는 부처를 ‘세상의 아버지’로 부른다. 한편, 어떤 종교 전통에서는 절대자가 신성한 어머니로 간주되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가부장적 이미지를 항상 적용해 왔던 종교에서조차도 모성의 측면, 즉 양육자, 자비의 샘, 보호자로서 하나님을 묘사한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하나님의 본질에는 인간 남성과 여성에 해당하는 어떤 성품이 있다” 고 말한다. 하나님의 부성과 모성은 모든 생명체를 창조하고 자양분을 공급하면서 서로 협동하는 하늘과 땅에 견주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부모 역할은 창조의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꾸준히 지속되는 정서적 심정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 사랑만큼 하나님 부모의 측면을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심지어 신들이 실제로 그 자손을 두기도 하는 다신론에 대해 강력히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하나님을 거룩한 아버지로 공표하지 않는 이슬람조차도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빗대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의 부모성품을 다룰 때 사랑이 핵심이라고 가르친다. 즉 “신인의 부자관계는 우주의 근본이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진정한 부자 관계를 확립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친밀한 포옹으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자녀를 늘 찾고 있는 것이다.
종교 경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6.9 (기독교)
너희는 모두 나의 자녀요 나는 너희의 아버지라 세세생생 너희는 온갖 고뇌로 말라죽게 되었으니 내가 너희 모두를 구하리라. 법화경 3 (불교)
위대한 브라흐마는 나의 태이니,
그 안에 내가 씨를 넣으면
일체만유의 생성이
그로부터 일어나느니라.
오, 바라타족의 후손이여!
어떤 태에서 어떤 형상으로 생겨나든
그것들의 태는 위대한 브라흐마이며
나는 씨를 넣는 아버지니라. 바가바드기타 14.4 (힌두교)
당신은 아버지요 어머니며 친구요 형제로다.
언제 어디서나 나와 더불어
나를 굽어 살피시는 당신
내게 무슨 두려움 있으리오. 아디 그란트, 마즈, M.5, p.103 (시크교)
온 세상 신에게는 모두 다 자녀
사람들은 모두 어버이로 생각하라.
나날이 어버이의 마음은
구제할 준비만을 생각하고 있다. 친필 4.79: 14.35 (천리교)
우리의 아버지, 이것은 당신의 세계이고
당신의 뜻입니다.
우리를 평화롭게 하시고
인간의 영혼을 냉철하게 하소서.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인생길에서 모든 악을 제거하소서. 누에르족의 기도 (아프리카 전통종교)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고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다. 서경 5.1.1 태서 (유교)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10-11 (기독교)
어느 날 한 남자가 아들과 함께 선지자에게 왔다. 선지자는 그 소년을 껴안으며 말했다. “그를 가엾이 여기느냐?” 아버지가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지자가 말했다. “알라는 너보다 더 그를 가엾이 여기고 계신다.” 부카리 하디스 (이슬람)
너희가 어찌 여호와께 이럴 수 있느냐? 이 어리석은 것들아, 미련한 것들아! 그가 너희를 있게 하신 너희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희를 만들고 붙들어 주시는 이가 아니시냐?···
야곱을 만나신 것은 광야에서였다. 스산한 울음소리만이 들려오는 황무지에서 만나 감싸 주시고 키워 주시며 당신의 눈동자처럼 아껴 주셨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해 주실 때, 어느 다른 신이 그와 함께 하였는가.
신명기 32.6-12 (기독교)
하늘 아래 모든 그대들이여!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각하고 모든 만물을 자신의 형제 자매로 생각하라. 아쓰타 신사의 신탁 (신도)
어머니 지구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먹을 양식을 주옵소서!
아버지 태양이여, 우리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의 길을 곧게 하소서!
블랙 앨크 족의 기도 (미주 원주민 종교)
다함없는 그대의 가슴
고결한 모든 이들을 품어 기르시며
꿋꿋함을 허락하시는 그대
온갖 보화를 품고 부를 잉태하여
영원히 부족함이 없는 그대
사라스바치, 성모(聖母)여, 우리의 양식을 위하여 그것을 내려놓으시라.
리그 베다 1.164.49 (힌두교)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이사야 66.13 (기독교)
전 [여성]세계를 옹호하는 이무파의 어머니여!
당신은 내게 너무나 놀라운 어머니입니다.
오, 어머니! 당신은 기둥이요 피난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기 전에
모두가 찬미하며 부복하는 어머니!
내 어머니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장엄하게 다가와 만물에게 물을 주시는 분!
요루바족의 기도 (아프리카 전통종교)
말씀 선집
하나님은 내 친구입니다. 가장 높은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님, 아버지, 왕입니다. 다음은 창조주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자랑습럽습니까?(293.161, 1998.05.26)
하나님 자신이 우주를 왜 지었느냐 할 때 사랑을 중심삼고 부자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근본은 부자의 관계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118.290, 1982.06.20)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는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몸 마음의 주인임은 물론이요, 우리의 이념이나 우리의 감정세계의 주체 자리, 주인 자리에 설 수 있는 분이며, 더 나아가서 우리의 심정의 주인이요 주체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이나 인정에 의해서 관념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입니다.
비단 주인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어떤 격위에 계시는가 하면, 인간의 아버지로 계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놓고 주인으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계십니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요 너희는 내 아들 딸이라 하는 인연을 해명하고, 그러한 관계에서 행복을 노래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생활의 중심이요, 이념의 중심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7.48-49, 1959.07.12)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 아버지는 여러분을 낳아준 아버지입니다. 인간이 타락을 했기에 다시 낳는다는 말이 필요한 것이지 그 분은 본래 여러분을 낳은 아버지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여러분을 다리 놓은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영계에 가면 아버지라고 하는 게 아니라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도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전부가 기독교에서 부르듯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한 집안에서 할아버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손자 역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인간 모두에게 아버지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버지 되시고 인간은 서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21.249, 1968.11.24)
하늘은 아버지를 상징하고, 땅은 어머니를 상징합니다. 제1의 어머니는 여러분을 낳아 준 어머니고, 제2의 어머니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땅은 모든 것을 다 주어서 생명을 길러 줍니다. 그래서 땅은 여자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다 주면서도 불평할 줄 모릅니다. 아무리 더러운 것도 소화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은 제2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제3의 어머니입니다. (279.171, 1996.08.04)
본래 지상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누가 먼저 죽겠습니까? 아들딸이 먼저 죽겠습니까, 부모가 먼저 죽겠습니까? 부모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천상천국에 올라가면 뭣이 되느냐? 그들이 하나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 후 하나님이 실체를 쓴, 아담 해와 몸으로 변화된 영적인 주체적 주인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어머니가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없이 생명체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러한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아담 해와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갈라져 나와 가지고 하나 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를 통해도 그렇고, 아버지를 통해도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이 생긴다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저 영계의 천상천국의 주인공이 누구냐? 실체를 쓰고 살던 내 어머니 아버지가 저 나라에 가서 영원한 천국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무엇이 다릅니까?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여러분이 영적 체험을 하는 데는 반드시 선생님과 어머니가 나타나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걸 볼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생활권 내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주류적인 사상으로 고착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누구의 몸을, 누구의 형상을 입고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 앞에 나타날 수 있느냐? 선생님의 형상과 어머니의 형상을 입고 전 세계의 자녀들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90.196-197, 1977.01.01)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 우리의 부모입니다. 인간의 맨 꼭대기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단 한 분밖에 없는 왕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왕의 아들딸입니다. 왕자 왕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왕자 왕녀가 뭘 하느냐? 그 왕권이 치리하는 곳에서 사랑을 중심삼고 교육을 받고 생활을 하자는 것이 그 세계의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105.26, 1979.07.08)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류는 타락했을망정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그 가정의 아버지로서 또는 인류의 아버지로서, 인간이 그 가정의 식구로서 살 수 있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 모시고, 나는 그 가정의 식구가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소망의 자체요, 이념의 자체요, 생활의 자체요, 행복의 자체인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우리가 소망하는 목적은 완결되는 것입니다. (7.264-265, 1959.09.27)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대상적 위치에 서서 그의 대상적인 가치를 세워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6천년 동안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해야 합니다. ‘얼마나 우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얼마나 바라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얼마나 그리우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하는 그 한마디를 하나님은 듣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서 하늘과 지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라고 축복한 후 6천년의 한을 잊어버리고 ‘오늘이 내 생일이요, 내 환희의 날이로구나!’ 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6천년의 한을 기억하지 않고 새로운 천지에서 새 아들 딸과 정적인 노래를 하며 살고자 하는 분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의 아버지요, 그 아버지의 아들 딸들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7.171, 1959.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