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총기통제법의 인종차별 기원
잘 규율이 잡힌 민병대, 자유국가의 안전에 필요하며,
무기를 보관하고 지닐 권리, 이것들은 침해되지 않을
것이다. : 수정헌법 2조
무기를 지닐 권리가 수정헌법 2조로 시작된 것은 1775년 4월 19일로, 미합중국이 심지어 존재하기 전에, 잘 무장된 식민지 개척자들로 구성된 지역 민병대는 콩코드와 렉싱톤에서 영국 병사와 마주쳐 그들을 물리쳤다. 이런 식민지 개척자들은 그들의 권리를 그들 다수가 생명을 잃었던 것처럼 신성한 것으로 간주했다.
영국 관습법은 무기의 소유를 보호하고 심지어 위임했다. 즉 무기는 단지 사냥을 하는 도구가 아니라 방어용 무기이며 방어용 갑옷으로 이해되어졌다. 1181년 무기법령에서, 국왕 헨리 2세는 왕국의 방어를 위해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하는 것이 영국의 모든 평민들의 의무임을 선포하며, 영주가 그의 주민들에게서 무기를 거둬들이는 것을 금지시켰다. 1)
물론 이런 권리가 미국에서 노예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종종 자유인 흑인들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다, 총기 통제법은 식민지 초기 시절부터 총기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수중에서 멀리하기 위해 사용되어졌다. 신세계에서 최초의 총기통제법은 1500년대에 멕시코에서 실시됐으며 그 당시 스페인 식민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실시됐다. 비슷하게 16세기 신생 스페인의 식민지에서는, 흑인 노예폭동으로 공포에 질려, 모든 흑인, 자유인, 그리고 노예 모두에게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금지했다. 2) 루이지애나에서 프랑스인 식민지 개척자들은 흑인들의 무기소유를 불법으로 간주했다. 3)
최초의 미국 총기 통제법은 영국 식민지들이 설립된 후 몇십년 전에 시행됐다. 1640년 이 해안선에서 실시된 최초의 총기 통제법은 버지니아주에서 통과됐다. 그 법은 흑인들, 심지어 평민들도 총기소유를 금지당했다. 4)
총기는 미국 남북전쟁 몇 년 이후 빠르게 이용이 가능하게 됐으며, 새롭게 해방이 된 흑인과 가난한 백인들도 구입할 수 있는 형편이 됐다. 추가로, 남북전쟁에서 북군으로 싸웠던 흑인들은 총을 소유하는 것이 허용됐다. 백인 지상주의자들은 이것을 위협으로 보고 흑인에게 비무장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흑인들의 비무장을 실행하기 위해서,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 흑인 반대 폭력조직)이 1866년 조직됐다. 그들은 남부 전역에 갱단을 만들어 대규모로 밤에 이동하면서 흑인 가족을 위협하여 총기를 빼앗았다. 총기가 없는 흑인들은 반격을 할 수 없었다. 5)
테네시주, 알칸소주를 포함하여 여러 주는 대부분의 흑인 주민들이 구입할 수 있는 유일한 총기인 값싼 권총의 판매를 금지했다. 앨라바마주와 텍사스주는 같은 이유로 권총 판매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1900년대 초기에, 플로리다주와 남캐롤라이나주와 같은 다른 주도 권총과 연발소총을 소지하고 휴대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그렇지만 회사 폭력배와 흑인 반대 폭력조직(KKK)을 의미하는 보안관과 그들의 전문대리인은 제외됐다. 6) 그런 총기 통제법은 남부에서만 한정되지 않았다. 1911년 셜리반 법은 뉴욕에서 장차 총기를 소유할 사람은 경찰에서 허가증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남부지역과 동부지역의 유럽계 이주민들 중에서 카톨릭신자, 유태인, 흑인들과 같은 냉대를 받는 단체에게는 이 허가증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7)
1967년과 1968년의 빈민가(게토) 폭동으로 자극받아 미의회는 아주 극심한 공포에 빠져 1968년 총기통제법을 아래와 같이 통과시켰다.
흑인에게 무기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서, 그리고 빈민가
흑인과 값싼 총기를 연결짓고 염가판매가 특이하게 수입용 군사 재고제품과 우편주문 수송물의 특성이라고 생각하여, 미의회는 특별허가없이 살 수 있는 구매를 부유한 사람에게는 열려있는 상태로 두면서 이런 출처를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8)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총기의 방어적 사용
미국 시민권리 연합의 한 보고서인 “총기통제의 진실, 인종주의, 집단학살”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기방어를 위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총기 소유권에 관한 확실한 역사가 존재한다.
총기규제와는 대조적으로, 무기를 소지할 자유는 미국의
흑인사회가 반복적으로 남북전쟁 전후에 자신들을 방어
하는 것을 가능케했다. 사적인 총기소유는 1800년대
북부 도시들에서 흑인 공동체의 방어에서 중요한 것으로
증명됐다. 흑인 시민군은 프로비던스(1931), 뉴욕(1834),
피츠버그(1839), 보스톤(1843) 그리고 필라델피아(1849)
에서 흑인을 공격하는 백인 폭도들을 제압했다. 9)
흑인들이 전형적으로 공식적인 주정부 시민군에서 배제되어
있는 동안 여러 도시의 흑인공동체는 그들 자체의 시민군을
길렀다. 흑인 시민군은 필라델피아(1835), 신시내티(1841)
에서 흑인 이웃에 대한 백인 폭도의 공격을 물리쳤다. 10)
멤피스에서 1891년, 한 흑인 시민군은 3일동안 신체적인
폭행의 공포에 질려있는 백명의 남자들을 보호했다. 시민군이 집으로 돌아간 그날 밤 한 백인 폭도가 감방에 뛰어들어 세명 의 흑인남자를 폭행했다. 11)
.
흑인반대단체(KKK)의 구타와 1960년대 초에 시민권리 운 동가들의 살해 등의 일련의 사건이후에, 무장한 흑인들은
운동가들을 호위하고 집을 방어했다. 1964-1965년 루이 지애나, 미시시피 그리고 앨러버마에서 흑인과 시민권리 운동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와 사법권 사수대가 결성됐다.
엄격한 총기 통제법이 실시되는 많은 도시지역은 높은 범죄율을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시민권리 연합에는 아래와 같이 언급되어 있다.
워싱턴 D.C., 이전에 미국의 살인수도로써 알려진 대규모 흑인도시는 대법원의 2008년 헬러 판결이후에 살인율이 급락했다. 그 판결로 인해 수정헌법 2조가 어떤 시민군의 참여와 관계없이 총기를 소유하고 휴대하는 개인의 권리를 확고히 했음을 알게 된다. 헬러는 콜롬비아 특별지구의 엄격하게 제한하는 총기법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규정했다. 그 총기법은 장거리 소총을 자기 집에 보관하는 것을 흉악 범죄로 만들고 효과적으로 자기방어를 위한 총기 사용을 금지했다. 12)
이 규정은 2018년 3월 27일 뉴욕 타임즈 사설란에서 전 대법원 판사 존 폴 스티븐(Steven)에 의해 맹렬히 비난받았다. 그는 또한 수정헌법 2조를 폐기할 것을 촉구했다. 13)
미국 시민권리연합(ACRU) 보도는 다음과 같다.
총기통제법 전문가인 존 로트(Lott) 박사에 의하면, 72,000명 이상의 성인들이 워싱턴 특별시에서 장총을 소유한다고 한다. 헬러 판결이 통과됐을 때, 로트 박사는 다음과 같이 관망했다. “그 판결 이후에 성인 인구의 거의 1/4이 갑자기 법적으로 자기 방어를 위해 그런 총을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시에서의 범죄율은 헬러 판결이후 5년에 걸쳐 가파르게 떨어졌다. 범죄 사용 총기도 특별히 가파르게 떨어졌다. 총을 사용하는 절도가 11.3% 떨어지 고, 총기 사용한 살인은 30.9% 떨어지고, 그리고 살인율은 놀라운 수치인 52.3% 떨어졌다.
로트 박사는 대법원이 2010년 시카고의 권총규제를 철폐한
후, “살인과 총기 범죄율이 금지법 제거 이후에도 상승하지 않았다. 그것은 급락했다. 그 비율은 전국 범죄율 보다 훨씬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14)
그 보고서는 아래와 같이 결론짓는다.
총기통제는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흑인을 탄압 하는 점에서는 유용한 도구로 증명되었다. 반면에 동시에 그것이 범죄자에 대해서는 취약함을 제공했다. 법을 준수 하는 시민의 수중에 있는 총기는, 대조적으로, 반복해서 인종적 소수자를 보호해 왔고 또한 가장 위험한 내륙 도시 들에서 범죄율을 끌어내렸다.
총기통제와 나치독일
스테판 할브르크(Halbrook)는 그의 책 『제 3제국의 총기통제: 유태인의 무장해제 그리고 국가의 적들』 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현재 총기 논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찬성과 반대의 같은 주장은 혼돈기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Weimar Republic)에서 1920년대에 이뤄졌다. 그 공화국은 1931년 모든 소형화기의 총기규제를 시행했다.
할브루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정치적인 반대파 와 유태인을 확인하고, 무장해제하며, 공격하기 위해서 권 력을 장악하고 총기규제 기록을 이용했다, 헌법상의 권리 는 정지되고 총기사용 찬성자 대량 수색 그리고 총기 및 반체제인사 출판물의 압수가 이어졌다. 경찰은 사회민주당 원들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의 총기 면허증을 취소했다. 게스타포는 독립적인 총기 클럽을 금지하고 그들 지도자를 체포했다. 게스타포 변호인 워너 베스트(Best)는 유태인에게 소형화기 허가증의 발행을 금지하고 있는 경찰 에게 지시문을 발부했다.
1938년 독일계 유태인은 모든 무기를 포기하도록 지시
받았으며, 그리고 경찰은 그것에 등록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소유했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무기를 포기했 던 사람들도 게스타포에게 인계되어졌다.
히틀러는 선전장관을 조셉 게벨스(Goebbels)에게 지시하여 ‘깨어진 유리의 저녁’을 연주하게했다. 수정의 밤(크리스 탈 나흐트)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1938년 11월 9일 독일 전역의 수만 개에 이르는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250여개 유대교 사원에 방화했던 날이다, 무기수색으로 행해진 이런 거대한 작전은 이른바 가정, 기업체의 철저한 수색 그리고 유대교 교회의 방화를 의미했다.
SS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믈러는(Himmler)는 총기를 소지 한 유대인은 누구든지 20년간 복역해야 한다는 법령을 내렸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용한 녹슨 회전식 연발 권총이나 총검들도 탁월하게 우수함을 보인 유대인 참전 용사들로부터 몰수되었다. 2만명의 유대 남자들이 수용소 에 투옥되었으며, 풀려나기 위해서는 몸값을 내야만 했다.
프랑스가 나치 침입을 당했을 때, 뉴욕 타임즈는 독일인이 전에 당했던 것처럼 프랑스인은 언론자유, 소형화기 소유 를 박탈당했다고 보도했다. 24시간 이내에 그들의 소형화 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프랑스인은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15)
대부분의 독자들은 나치통치 기간 중에 무장해제된 유태인과 정치적으로 믿을 수 없는 자들에게 그 당시 무엇이 발생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에서 순수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오늘날과 똑같이, 어떤 무기의 금지 그리고 등록같은 총기소유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지지했다.
3장에서 지적했듯이, 이슬람국가 터어키, 소련 연방, 중국 공산국가, 캄보디아 공산국가, 과테말라, 우간다에서 행해진 지난 세기의 많은 다른 살인 행동에서, 총기등록과 몰수는 모든 이런 나라에서의 대량학살에 선행됐다.
다행히 지혜롭게, 미국의 건국 선조들은 모든 미국시민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권리장전을 분명하게 기술했다. 그 권리는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유대·기독교 하나님에게서 유래됐다. 이것은 자기 방어권이 없는, 사냥이나 오락 사격의 목적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믿은 것을 나도 믿는다. 즉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리이며 누구도 혹은 세상의 어떤 권위자도 제지할 권리가 없다. 이것은 단지 미국인의 권리가 아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인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