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분은 녹음용량초과로 축약,전문은 8대교재교본 말씀선집 참고
(말씀선집 제1권 17편)
하나님의 섭리와 초현실적인 모험성
1956.12.02 (일),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는 예수님이 최후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일대 모험적인 각오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하나님의 섭리와 초현실적인 모험성'입니다.'하나님의 섭리와 초현실적인 모험성'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우리들은 우주적인 심판의 날을 앞에 놓고 끊임없이 싸움의 노정을 거쳐 나가고 있습니다.이 노정은 평탄한 노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일대 모험적인 중심을 세워 놓고 남아진 우주의 원한의 심판을 밀어낼 수 있는 승리적인 중심을 갖지 못한다 할진대는, 여러분들은 역사노정의 패배자가 될 것이며, 생애노정의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① 최후의 우주적인 심판과 자기 인식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모험적으로 출발하여 모험적인 종결을 예고하는 섭리역사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진 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내가 이렇게 자유로운 입장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수많은 모험의 고개를 넘어 왔기 때문입니다.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그리고 여러분이 생활에서나 신앙노정에서 이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한다 할진대는, 최후의 우주적인 심판의 고개를 넘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에 앞서 여러분은 하늘이 오늘의 나 한 자체를 불러 세우신 것은 무슨 연유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6천년의 역사적인 원한의 고개를 넘고 있는 나 한 자체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오늘의 나는 천추의 원한과 사탄으로 말미암아 막혀진 우주적인 원한의 고개를 넘을 수 있는 자유의 중심을 만들어 놓았는가, 또 미래에 남아진 원한의 심판대를 자신있게 넘을 수 있는 승리적인 중심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오늘날 여러분의 신앙은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여러분은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고, 현실적인 과정을 거치고, 미래적인 과정을 통하여 전체적인 하늘의 섭리가 완결될 때까지 하늘과 관계맺고 있는 나로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여러가지 문제들을 생각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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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영원무궁토록 살아갈 수 있는 신천지의 기준과 승리적인 자유의 환경을 갖추지 못한다면 역사과정을 거쳐 오신 하나님의 섭리 앞에 여러분은 승리자로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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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모험의 길을 걸어간 노아
이제 과거의 우리 선조들을 회고해 봅시다. 먼저 노아의 일생을 보면 평탄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120년 후에 세상을 물로 심판할 것이니 아라랏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게 될 때의 노아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열 이틀도 아니요, 십이년도 아니요, 120년이었으니…. 아라랏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으라는 그 말씀은 그때의 현실과는 부합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명령을 받고 실행해 나가는 노아의 그때의 실정으로 보면, 그야말로 미친 사람이요, 그 시대에 도저히 부합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명령을 받은 노아는 내적으로 굳은 각오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하루도 아닌 120년이란 기간을 꾸준히 한날을 바라보고 생활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노아야말로 1600년 역사과정에 없었던, 1600년 역사를 대신하여 하늘 앞에 세워진 모험적인 선봉자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정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야 주관해 주시든 말든, 세상 사람들이야 욕을 하든 말든, 한번 내리신 명령을 변치 않는 약속의 뜻으로 믿고 나가는 노아에게는 그 모든 조건들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뜻을 위해 출발한 기준, 생명을 각오하고, 생애를 포기하고 나선 그의 발걸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120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통해 거듭되는 수고의 노정을 말없이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런 노아에게는 가정적인 비난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비난도 컸을 것입니다.그러나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 1600년 역사과정에 아무도 가보지 않은 그 길, 오직 천상의 길을 타개하기 위해 나선 노아의 발걸음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노아는 그때의 사회환경이 가로막고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밀어제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당당히 물리칠 수 있는 모험적인 사람이었음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노아는 자신의 앞길에 어떠한 시험이나 어려움이 닥쳐올지라도 그것을 기필코 헤쳐나갔고, 120년이 지난 후에는 아담 가정이 잃어버린 복귀된 하나의 가정을 찾아 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아의 역사적인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든 고향 산천을 뒤로하고 일가친척과 이웃을 다 포기한 채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실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참으로 막연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자기가 지금까지 살던 모든 환경을 초월했습니다. 가정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알뜰하게 살아온 살림을 전부 포기하고 보따리를 들고 나섰습니다.이러한 아브라함의 걸음은 그야말로 당시의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뜻을 두고 느끼는 사람, 뜻을 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어느 누가 아브라함편에 서서'옳소이다.당신이 가는 길이 지당하오니 어서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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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아브라함의 초현실적인 신앙
하나님께서는 우상장수 데라의 맏아들인 아브라함을 빼앗아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그렇게 세움받은 아브라함은'이제 내가 가는 길에, 내 사랑하는 부모가 붙들어도, 사랑하는 친구가 붙들어도, 사랑하는 형제가 나를 붙들어도 나의 이 중심은 변할 수 없다'는 확고한 각오를 했습니다.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아브라함은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 백세에 만득자로 얻은 이삭까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때 거기에 순종했습니다.그 명령은 역사상에 없었던 하나의 모험적인 조건이 되는 명령이었습니다.그것은 하늘 땅을 대신하고, 천상의 일이나 지상의 일 등 억천만사를 좌우하는 조건이었는데 이것을 모르면서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그 명령을 받은 후 아들을 제단에 놓고 제사드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삼아 칼을 들어 찌르려 했던 아브라함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이것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의식이었습니다.그 당시에 어느 누가 아브라함의 그런 신앙을 인정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제시한 이 모험적인 행동은 곧 아브라함이 하늘에 속한 몸이고 아브라함의 가족이 하늘에 속한 몸들이니, 아브라함은 물론이요 그의 가족과 그의 모든 물질까지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이러한 사실을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드리는 과정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이 아들은 내가 낳았으나 당신 것이오니 당신께 드리겠나이다' 하는 마음으로 이삭을 번제하려 했고, 현실적인 환경을 타개했던 것입니다.이러한 역대 선조들의 신앙의 중심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야곱 역시 그러했고 모세 역시 그러했습니다.하나님은 이들을 세우실때 평탄한 길을 걷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은 출생한 후 에서로부터 장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싸움을 해야 했고, 모세도 나면서부터 싸움의 조건에 걸려 있었습니다.
④ 모험과 혁명의 길을 걸은 모세
모세는 이스라엘민족이 애급땅 원수들의 나라에서 4백년 고난을 거치던 때에 하늘이 불러 세우셨습니다.이리하여 바로의 두려운 압정하에서 3개월 동안 어머니의 보호를 받다가 그 후 바로의 딸에게 붙들림을 받아 궁중에 들어가 40년 생활하였습니다.여러분은 모세의 바로 궁중에서의 생활이 호화롭고 좋은 환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뜻을 대하는 모세는 애급 궁중에 있었지만 애급 백성이 아니었습니다.이스라엘을 대표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이 날이 가면 갈수록 그의 가슴에 사무쳤던 것입니다.그리하여 40평생 홀로 이스라엘의 지조를 품고 생활하던 모세가 궁중을 나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이 애급 사람 앞에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의분심이 폭발되어 애급 사람을 때려 죽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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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모세가 옮긴 발걸음은 모두 모험적인 것이었습니다.현실을 초월한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을 품었기 때문에 그의 삶 전체도 초현실적인 것이요, 바라보는 것도 나가 싸운 것도 초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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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고개였습니다.그러나 모세는, 이미 각오한 몸이었으니 죽든지 살든지 뜻 하나만 이루어지기를 비는 심정으로써 하나님이 가로막고 사탄이 가로막는 시험의 조건을 넘어섰던 것입니다.그리하여 바로 궁중에서 초현실적인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하여 10여차 이상의 이적 기사를 일으켰던 모세는 4천년 역사상에 없었던 우주적인 모험의 혁명가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이처럼 모세는 어떤 사람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뜻을 대한 초현실적인 믿음으로 60만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했습니다.이런 것을 볼 때 모세의 생애 전체는 초현실적인 모험의 행로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⑤ 모험의 역사를 각오하신 예수
민족복귀의 대표자인 모세 다음에 세계복귀의 사명자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예수님은 과거 4천년 역사과정의 수많은 선지 선열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초현실적인 생활을 해 나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그리고 자기 일신이야말로 선지 선열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왔다가 이루지 못하고 간 뜻을 완성해야 할 책임을 진 일신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역사를 회고하여 본 예수님은 수많은 선지 선열들의 원한이 남아져 있고 아직까지 복귀섭리가 종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종결지어야겠다고 각오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4천년의 노정을 개척하기 위한 초현실적인 모험의 노정을 걸어가겠다는 각오를 가졌습니다.수많은 선지 선열들의 모험적인 역사노정을 총합한 노정을 걷고도 남을 수 있는 각오를 가졌던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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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예수의 생애는 무엇을 바탕으로 한 생애였는가. 4천년 역사를 총결산하는 생애였으며, 그때까지 하늘의 원한에 사무쳤던 모험적인 노정을 종결하는 생애였으며, 새로운 승리의 터전을 이루기 위한 지상에 없는 초현실적인 승리의 생애였습니다.
⑥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심
이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모험적인 생애를 갖고 오시는 예수님 앞에 성모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될 뻔 했는가. 성모 마리아와 같은 동정녀 마리아가, 즉 하늘의 여성이 없었던들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땅 위에 마리아와 같은 모험적인 제물의 토대가 없었다 할진대 모험적인 노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갖고 태어나야 했던 예수의 탄생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 일러 주었을 때 마리아는'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일이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다시'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너를 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주여 저는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한마디가 우주적인 모험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 처녀가 잉태한 사실이 밝혀지면 모세를 통하여 세워 놓은 율법에 의하여 당장에 돌멩이에 맞아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마리아는 현실의 환경을 넘어서'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는 죽어도 당신의 것이요, 망해도 당신의 것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늘은 이처럼 지상에 산 실체적인 제물 마리아가 있음으로 해서 예수님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믿고 나가는 신앙생활에도 여러분이 알 수 없는 모험의 길이 많습니다.자기와 약혼한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몽시를 통해 예고받고 요셉은 인간적인 여러가지 고충 때문에 마리아와의 인연을 끊으려고도 하였습니다. 자기와 약혼한 처녀가 잉태했다는 사실은 요셉에게 여러가지 인간적인 고충을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되어진 모든 사실을 자기가 책임지고 마리아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초현실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오늘날 여러분에게는 야곱이 간 길, 요셉이 간 길을 가야 할 사명이 있고 예수님이 간 길, 마리아가 간 길을 따라가야 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초현실적인 장면이 여러분에게 가로놓여 있다는 것, 초현실적으로 통할 수 있는 모험적인 고개가 여러분 앞에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⑦ 탄생부터 초현실적인 모험의 길을 걸으신 예수
4천년 역사의 서러움을 안고, 죽든지 살든지 뜻 하나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질 것을 각오하고 나선 예수님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만민의 구세주 메시아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은 탄생부터가 초현실적이었고, 새로운 이상적인 모험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오늘날 이것이 미완성된 채 재림시에 요구되는 뜻으로 남아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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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의붓자식처럼 사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던 예수님의 모든 생활은 초현실적인 생활이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모든 가정적인 불화에 부딪치면서도 예수님은 묵묵한 가운데 그것을 다 넘어갔습니다. 마침내 뜻을 갖고 나타나 만민의 메시아인 것을 증거하고 나서는 일 역시 현실적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유대교의 신조로 세워 놓은 율법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하늘의 복음을 들고 나섰던 예수님이었기에 가는 곳곳마다 머무는 곳곳마다 현실적으로 환영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가정으로부터 세례 요한으로부터 유대교로부터 몰림받아 의지할 곳 없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의지할 곳 없는 자리에서도 자신을 위안해 줄 곳을 찾은 예수님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예수님은 새로운 신약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처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였을 때는 유대교의 모든 제사장들 혹은 서기관들이 알아줄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졌었습니다. 그런데 3년 공생애 노정을 거치면서부터 예수님의 위치는 점점 떨어져 나중에는 어부들과 보잘것 없는 부녀자들만이 따르는 입장에 처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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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유대백성들이 환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유대성도들이 인정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교회적으로 어느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길을 가야 했습니다.어디를 가나 자유로운 환경에 머무를 수도 없는 입장에 처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⑧ 예수의 비통한 심정
모세가 이스라엘민족 60만 대중을 이끌고 나올 때 그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혔고 뒤에는 바로의 병거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60만 대중을 대신하여 그런 죽음의 시험에서 이기고 남을 수 있는 하나의 신조를 갖고 부딪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60만 대중을 회생시킬 수 있는 길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5병 2어로 5천여 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였던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날 저무는 무렵 들에 널려 있는 수많은 군중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심정이야 말로 현실적으로는 땅 위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늘 앞에 찾아져야 할 일대 모험의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심정을 갖고 아버지 앞에 부르짖었기 때문에 모험적인 창조역사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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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러분은 믿고 있는 자신을 재분석하여 예수님의 생애노정에 맞추어 보아야 되겠습니다.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예수님의 출생 당시부터 30평생의 모험적인 생활을 거쳐 골고다 산정, 수모와 역경의 생활에서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운명의 길, 모험적인 죽음의 길을 가신 그 생애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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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 끝날에 있어서 여러분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무엇일 것인가.생애를 바쳐 모험적인 과정을 거쳐간 예수 그리스도의 안타까운 마음을 가슴에 품고, 온 세계를 대하여 온 하늘 땅을 대하여 누구보다도 훌륭한 제물, 하늘 땅 전체를 동원시켜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우주적인 모험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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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먼저는 역사를 위해 오셨고, 이스라엘교단을 위해서 오셨고, 이스라엘백성을 위해 오셨습니다. 따르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오셨고, 나아가서는 민족과 국가, 세계 그리고 천주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의 삶은 민족과 국가와 세계 그리고 천주를 위한 삶이었고 죽음까지도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의 걸음을 어느 누가 옳다고 하였습니까? 죽음의 고개에서는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도 배반당하고, 홀로 남겨져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나서야 했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에 인간들 대해 서러워하고 원망하려면 땅을 치며 울고 울어도 30평생의 원한을 다 풀 수 없고 그동안 받았던 고충을 보상받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인류가 사탄 치하에서 고통당할 것을 염려하여 긍휼의 심정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히는 죽음의 자리에서까지도 배반한 민족, 배반한 제자, 배반한 모든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신 분이었습니다. 서러움의 예수였던 연고로 그분은 이 땅의 선조들이 4천년의 역사를 들어 호소하여도, 그 당시의 모든 인간을 들어 호소하여도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반대하던 민족을 위하여 자신을 치고 반대하는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4천년 인류 역사상에 없었던 일입니다.또한 이것이 천상과 지상에 사무친 죄악의 담을 헐기 위한 우주적인 모험의 행사였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라면, 여러분은 그 만왕의 왕의 왕비가 되기 위해 그의 약속을 믿고 죽든 살든 모든 것을 뜻 앞에 맡기고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길을 가셨습니다.예수님의 생애는 그러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뜻을 위해 살다 뜻을 위해 그렇게 죽는 것이었습니다.
⑨ 선조들과 예수를 본받아 모험의 길을 가야 할 우리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 것인가. 죽음의 자리에서도 인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셨고 원한의 심정에 사무친 내적 슬픔을 모두 지니고 가신 예수님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땅 위에 뜻 하나를 세워 놓고 모험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들의 마음에 옮겨 가져야 하겠고, 예수님의 죽음을 깨달아 오늘날 우리들이 우주적인 모험의 길을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속에 사무친 원한을 풀어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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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과거 선지 선열들의 걸어간 생애노정과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생애노정을 오늘날 우리들이 어떠한 시대 어떠한 환경에서도 본받아 걸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어느 누가 어느 때 어떠한 조건을 제시한다 할지라도 초현실적인 자신을 세워 우주만상 앞에 호소할 수 있고, 천상의 뜻을 대신한 자로서 나설 수 있는 각오와 배짱을 갖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⑩ 모험적인 제물로 바쳐져야 할 우리
이제 재림의 날이 가까운 오늘날에 있어서 여러분은 6천년 역사의 최후에 남은 하나의 우주적이고 모험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 임무가 우주적이라면 여러분도 상대적으로 우주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모험적인 내적 각오를 갖고 나서야만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신앙생활과 달리 이뤄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초현실적인 모험의 노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진전되어 나왔습니다.
이런 우주적인 모험의 관문을 거쳐야만이 최후의 승리의 깃발을 들고 아버지 앞에 호산나의 개가를 부를 수 있으며, 우주적인 신부의 입장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어떠한 조건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어떤 환경에서 어떤 핍박과 비난이 있을지라도 초현실적인 모험의 기준을 세우는 하늘의 왕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왕자가 되겠다는 각오를 가진 자라야만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최종적으로 책임지고 그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 말씀선집 제1권 17편 원문 &&&&
하나님의 섭리와 초현실적인 모험성
1956.12.02 (일),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는 예수님이 최후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일대 모험적인 각오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하나님의 섭리와 초현실적인 모험성'입니다.'하나님의 섭리와 초현실적인 모험성'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우리들은 우주적인 심판의 날을 앞에 놓고 끊임없이 싸움의 노정을 거쳐 나가고 있습니다.이 노정은 평탄한 노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일대 모험적인 중심을 세워 놓고 남아진 우주의 원한의 심판을 밀어낼 수 있는 승리적인 중심을 갖지 못한다 할진대는, 여러분들은 역사노정의 패배자가 될 것이며, 생애노정의 패배자가 될 것입니다.
① 최후의 우주적인 심판과 자기 인식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모험적으로 출발하여 모험적인 종결을 예고하는 섭리역사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진 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내가 이렇게 자유로운 입장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수많은 모험의 고개를 넘어 왔기 때문입니다.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그리고 여러분이 생활에서나 신앙노정에서 이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한다 할진대는, 최후의 우주적인 심판의 고개를 넘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에 앞서 여러분은 하늘이 오늘의 나 한 자체를 불러 세우신 것은 무슨 연유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6천년의 역사적인 원한의 고개를 넘고 있는 나 한 자체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오늘의 나는 천추의 원한과 사탄으로 말미암아 막혀진 우주적인 원한의 고개를 넘을 수 있는 자유의 중심을 만들어 놓았는가, 또 미래에 남아진 원한의 심판대를 자신있게 넘을 수 있는 승리적인 중심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오늘날 여러분의 신앙은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까?
여러분은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고, 현실적인 과정을 거치고, 미래적인 과정을 통하여 전체적인 하늘의 섭리가 완결될 때까지 하늘과 관계맺고 있는 나로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여러가지 문제들을 생각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이제 하늘이 내 한 자체를 세워서 끝날의 전체적인 사명을 위탁하시고, 나를 세워 승리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뜻이 있다 할진대, 그 뜻은 6천년의 섭리의 뜻을 대신한 뜻일 것입니다.그리고 하늘이 나를 찾아 세우시려는 기준은 최후의 심판의 고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즉, 신천지의 새로운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영원무궁토록 살아갈 수 있는 신천지의 기준과 승리적인 자유의 환경을 갖추지 못한다면 역사과정을 거쳐 오신 하나님의 섭리 앞에 여러분은 승리자로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를 회고해 볼 때, 하늘이 오늘날 나를 세우신 것은 나 하나만을 구하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역사적인 원한을 해명하기 위한 결실체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이것을 여러분은 명심하여 아담으로부터 맺혀진 타락의 원한을 풀어드려야 되겠습니다.또 노아의 모험적인 원한의 심정을 풀어드려야 되겠고, 노아의 모험적인 생애를 풀어드려야 되겠습니다.
그 이후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 등 역대 선지 선열들이 걸어간 모험적인 생애, 그분들이 남기신 유업을 여러분이 맡아 가지고 그것을 하나의 발판으로 삼아 미래에 남아진 심판대를 자신있게 넘을 수 있는 자신있는 중심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그렇지 않는다 할진대는 사탄과의 역사적인 싸움에서 낙오자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② 모험의 길을 걸어간 노아
이제 과거의 우리 선조들을 회고해 봅시다. 먼저 노아의 일생을 보면 평탄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120년 후에 세상을 물로 심판할 것이니 아라랏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게 될 때의 노아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열 이틀도 아니요, 십이년도 아니요, 120년이었으니…. 아라랏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으라는 그 말씀은 그때의 현실과는 부합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명령을 받고 실행해 나가는 노아의 그때의 실정으로 보면, 그야말로 미친 사람이요, 그 시대에 도저히 부합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명령을 받은 노아는 내적으로 굳은 각오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하루도 아닌 120년이란 기간을 꾸준히 한날을 바라보고 생활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노아야말로 1600년 역사과정에 없었던, 1600년 역사를 대신하여 하늘 앞에 세워진 모험적인 선봉자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정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야 주관해 주시든 말든, 세상 사람들이야 욕을 하든 말든, 한번 내리신 명령을 변치 않는 약속의 뜻으로 믿고 나가는 노아에게는 그 모든 조건들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뜻을 위해 출발한 기준, 생명을 각오하고, 생애를 포기하고 나선 그의 발걸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120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통해 거듭되는 수고의 노정을 말없이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런 노아에게는 가정적인 비난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비난도 컸을 것입니다.그러나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 1600년 역사과정에 아무도 가보지 않은 그 길, 오직 천상의 길을 타개하기 위해 나선 노아의 발걸음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노아는 그때의 사회환경이 가로막고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밀어제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당당히 물리칠 수 있는 모험적인 사람이었음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노아는 자신의 앞길에 어떠한 시험이나 어려움이 닥쳐올지라도 그것을 기필코 헤쳐나갔고, 120년이 지난 후에는 아담 가정이 잃어버린 복귀된 하나의 가정을 찾아 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아의 역사적인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든 고향 산천을 뒤로하고 일가친척과 이웃을 다 포기한 채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실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참으로 막연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자기가 지금까지 살던 모든 환경을 초월했습니다. 가정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알뜰하게 살아온 살림을 전부 포기하고 보따리를 들고 나섰습니다.이러한 아브라함의 걸음은 그야말로 당시의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뜻을 두고 느끼는 사람, 뜻을 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어느 누가 아브라함편에 서서'옳소이다.당신이 가는 길이 지당하오니 어서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세상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뜻을 대한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영원히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마음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이끄시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때, 어떠한 모험이 따르는 태산준령이 가로막고, 죽음의 고개가 가로막을지라도 참고 그것들을 뚫고 나갔던 것입니다.
③ 아브라함의 초현실적인 신앙
하나님께서는 우상장수 데라의 맏아들인 아브라함을 빼앗아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그렇게 세움받은 아브라함은'이제 내가 가는 길에, 내 사랑하는 부모가 붙들어도, 사랑하는 친구가 붙들어도, 사랑하는 형제가 나를 붙들어도 나의 이 중심은 변할 수 없다'는 확고한 각오를 했습니다.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아브라함은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 백세에 만득자로 얻은 이삭까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때 거기에 순종했습니다.그 명령은 역사상에 없었던 하나의 모험적인 조건이 되는 명령이었습니다.그것은 하늘 땅을 대신하고, 천상의 일이나 지상의 일 등 억천만사를 좌우하는 조건이었는데 이것을 모르면서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그 명령을 받은 후 아들을 제단에 놓고 제사드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삼아 칼을 들어 찌르려 했던 아브라함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이것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의식이었습니다.그 당시에 어느 누가 아브라함의 그런 신앙을 인정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제시한 이 모험적인 행동은 곧 아브라함이 하늘에 속한 몸이고 아브라함의 가족이 하늘에 속한 몸들이니, 아브라함은 물론이요 그의 가족과 그의 모든 물질까지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이러한 사실을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드리는 과정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이 아들은 내가 낳았으나 당신 것이오니 당신께 드리겠나이다' 하는 마음으로 이삭을 번제하려 했고, 현실적인 환경을 타개했던 것입니다.이러한 역대 선조들의 신앙의 중심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야곱 역시 그러했고 모세 역시 그러했습니다.하나님은 이들을 세우실때 평탄한 길을 걷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은 출생한 후 에서로부터 장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싸움을 해야 했고, 모세도 나면서부터 싸움의 조건에 걸려 있었습니다.
④ 모험과 혁명의 길을 걸은 모세
모세는 이스라엘민족이 애급땅 원수들의 나라에서 4백년 고난을 거치던 때에 하늘이 불러 세우셨습니다.이리하여 바로의 두려운 압정하에서 3개월 동안 어머니의 보호를 받다가 그 후 바로의 딸에게 붙들림을 받아 궁중에 들어가 40년 생활하였습니다.여러분은 모세의 바로 궁중에서의 생활이 호화롭고 좋은 환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뜻을 대하는 모세는 애급 궁중에 있었지만 애급 백성이 아니었습니다.이스라엘을 대표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이 날이 가면 갈수록 그의 가슴에 사무쳤던 것입니다.그리하여 40평생 홀로 이스라엘의 지조를 품고 생활하던 모세가 궁중을 나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이 애급 사람 앞에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의분심이 폭발되어 애급 사람을 때려 죽였던 것입니다.
그 후 바로 궁중을 나와 가지고 남겨진 이스라엘의 축복의 뜻을 마음에 품고 미디안목자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그 생활은 편안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그 시대의 어떤 사람도 그토록 호화로운 바로 궁중을 버리고 목자 생활을 하는 모세를 이해해 주지 못했습니다.그러나 모세는 낙망하지 않고 하늘을 위한 남 모르는 제단, 이스라엘을 위한 숨은 제단을 쌓아 나갔습니다.이런 모세였던 연고로 80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고 민족의 원한을 풀어 줄 수 있는 주인공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뒤 모세가 옮긴 발걸음은 모두 모험적인 것이었습니다.현실을 초월한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을 품었기 때문에 그의 삶 전체도 초현실적인 것이요, 바라보는 것도 나가 싸운 것도 초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모세가 바로 궁중으로 가게 될 때, 하나님이 가라하신 그 길을 가는 모세를 축복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모세의 가는 길을 막고 모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자신의 명령을 받고 가는 모세를 가로막고 죽이려 하셨는가?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여기에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고개였습니다.그러나 모세는, 이미 각오한 몸이었으니 죽든지 살든지 뜻 하나만 이루어지기를 비는 심정으로써 하나님이 가로막고 사탄이 가로막는 시험의 조건을 넘어섰던 것입니다.그리하여 바로 궁중에서 초현실적인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하여 10여차 이상의 이적 기사를 일으켰던 모세는 4천년 역사상에 없었던 우주적인 모험의 혁명가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이처럼 모세는 어떤 사람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뜻을 대한 초현실적인 믿음으로 60만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했습니다.이런 것을 볼 때 모세의 생애 전체는 초현실적인 모험의 행로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⑤ 모험의 역사를 각오하신 예수
민족복귀의 대표자인 모세 다음에 세계복귀의 사명자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예수님은 과거 4천년 역사과정의 수많은 선지 선열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초현실적인 생활을 해 나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그리고 자기 일신이야말로 선지 선열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왔다가 이루지 못하고 간 뜻을 완성해야 할 책임을 진 일신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역사를 회고하여 본 예수님은 수많은 선지 선열들의 원한이 남아져 있고 아직까지 복귀섭리가 종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종결지어야겠다고 각오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4천년의 노정을 개척하기 위한 초현실적인 모험의 노정을 걸어가겠다는 각오를 가졌습니다.수많은 선지 선열들의 모험적인 역사노정을 총합한 노정을 걷고도 남을 수 있는 각오를 가졌던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주적인 모험의 역사를 청산해야 할 사명을 짊어졌기 때문에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모험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의 생활 역시 초현실적인 모험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십자가에 달리는 죽음의 길까지도 초현실적인 모험의 길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생애는 무엇을 바탕으로 한 생애였는가. 4천년 역사를 총결산하는 생애였으며, 그때까지 하늘의 원한에 사무쳤던 모험적인 노정을 종결하는 생애였으며, 새로운 승리의 터전을 이루기 위한 지상에 없는 초현실적인 승리의 생애였습니다.
⑥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심
이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모험적인 생애를 갖고 오시는 예수님 앞에 성모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될 뻔 했는가. 성모 마리아와 같은 동정녀 마리아가, 즉 하늘의 여성이 없었던들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땅 위에 마리아와 같은 모험적인 제물의 토대가 없었다 할진대 모험적인 노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갖고 태어나야 했던 예수의 탄생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 일러 주었을 때 마리아는'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일이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다시'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너를 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주여 저는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한마디가 우주적인 모험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 처녀가 잉태한 사실이 밝혀지면 모세를 통하여 세워 놓은 율법에 의하여 당장에 돌멩이에 맞아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마리아는 현실의 환경을 넘어서'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는 죽어도 당신의 것이요, 망해도 당신의 것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늘은 이처럼 지상에 산 실체적인 제물 마리아가 있음으로 해서 예수님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믿고 나가는 신앙생활에도 여러분이 알 수 없는 모험의 길이 많습니다.자기와 약혼한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몽시를 통해 예고받고 요셉은 인간적인 여러가지 고충 때문에 마리아와의 인연을 끊으려고도 하였습니다. 자기와 약혼한 처녀가 잉태했다는 사실은 요셉에게 여러가지 인간적인 고충을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되어진 모든 사실을 자기가 책임지고 마리아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초현실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오늘날 여러분에게는 야곱이 간 길, 요셉이 간 길을 가야 할 사명이 있고 예수님이 간 길, 마리아가 간 길을 따라가야 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초현실적인 장면이 여러분에게 가로놓여 있다는 것, 초현실적으로 통할 수 있는 모험적인 고개가 여러분 앞에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⑦ 탄생부터 초현실적인 모험의 길을 걸으신 예수
4천년 역사의 서러움을 안고, 죽든지 살든지 뜻 하나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질 것을 각오하고 나선 예수님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만민의 구세주 메시아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은 탄생부터가 초현실적이었고, 새로운 이상적인 모험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오늘날 이것이 미완성된 채 재림시에 요구되는 뜻으로 남아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생활하고 자라게 될 때부터 뜻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동생들의 비난도 받고 참소도 받았습니다. 예수의 30여 평생의 생활은 요셉이 예수님에 대해 처음가진 마음 그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예수님보다 자기의 친아들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역시 당시 사회형태에 맞는 가정 환경을 갖지 못하였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의붓자식처럼 사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던 예수님의 모든 생활은 초현실적인 생활이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모든 가정적인 불화에 부딪치면서도 예수님은 묵묵한 가운데 그것을 다 넘어갔습니다. 마침내 뜻을 갖고 나타나 만민의 메시아인 것을 증거하고 나서는 일 역시 현실적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유대교의 신조로 세워 놓은 율법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하늘의 복음을 들고 나섰던 예수님이었기에 가는 곳곳마다 머무는 곳곳마다 현실적으로 환영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가정으로부터 세례 요한으로부터 유대교로부터 몰림받아 의지할 곳 없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의지할 곳 없는 자리에서도 자신을 위안해 줄 곳을 찾은 예수님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예수님은 새로운 신약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처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였을 때는 유대교의 모든 제사장들 혹은 서기관들이 알아줄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졌었습니다. 그런데 3년 공생애 노정을 거치면서부터 예수님의 위치는 점점 떨어져 나중에는 어부들과 보잘것 없는 부녀자들만이 따르는 입장에 처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념을 세워야 할 예수님 앞에 약속으로는 영원한 약속이 있어야 했고 뜻으로서는 영원한 뜻이 있어야 했었는데, 현실에서는 그런 것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빈들에서 5천여명의 무리를 모아 놓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던 예수님의 심정,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간곡히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은 땅 위의 어느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서러움에 사무친 심정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4천년 역사상에 수많은 선지 선열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모험적인 생활을 하는 비장한 각오와 내적인 서러움을 품고 싸웠으나, 예수님의 내적 서러움에 비길 바가 못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 역사의 모든 원한의 심정을 뚫고 올라가 하나님의 내적 서러움의 심정을 충족시켜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유대백성들이 환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유대성도들이 인정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교회적으로 어느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길을 가야 했습니다.어디를 가나 자유로운 환경에 머무를 수도 없는 입장에 처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⑧ 예수의 비통한 심정
모세가 이스라엘민족 60만 대중을 이끌고 나올 때 그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혔고 뒤에는 바로의 병거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60만 대중을 대신하여 그런 죽음의 시험에서 이기고 남을 수 있는 하나의 신조를 갖고 부딪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60만 대중을 회생시킬 수 있는 길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5병 2어로 5천여 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였던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날 저무는 무렵 들에 널려 있는 수많은 군중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심정이야 말로 현실적으로는 땅 위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늘 앞에 찾아져야 할 일대 모험의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심정을 갖고 아버지 앞에 부르짖었기 때문에 모험적인 창조역사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모험적으로 탄생하신 예수님, 살면서 모험의 길을 가신 예수님, 최후에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할 때까지도 모험적인 표준으로 돌아가셨던 예수님이신 것을 우리는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예수의 생활은 그저 있으나마나한 미미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점잖고 멋있는 그런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믿고 있는 자신을 재분석하여 예수님의 생애노정에 맞추어 보아야 되겠습니다.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예수님의 출생 당시부터 30평생의 모험적인 생활을 거쳐 골고다 산정, 수모와 역경의 생활에서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운명의 길, 모험적인 죽음의 길을 가신 그 생애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생애는 모험으로 출발하여 모험으로 끝나는 생애였습니다.신랑으로 오셨으나 쓸쓸하게 죽음의 길을 가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 나를 구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뼈살에 사무치는 비통한 심정을 우리는 시간시간 마음으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끝날에 있어서 여러분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무엇일 것인가.생애를 바쳐 모험적인 과정을 거쳐간 예수 그리스도의 안타까운 마음을 가슴에 품고, 온 세계를 대하여 온 하늘 땅을 대하여 누구보다도 훌륭한 제물, 하늘 땅 전체를 동원시켜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우주적인 모험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거쳐 오신 하나님의 원한의 심정을 깨달아 천한 자리에서부터 올라가야 되겠습니다. 즐거운 자리에서 어떤 일을 맡고자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심정을 갖고 생활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땅을 위하여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땅을 대하여 원망한다면 그 이상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먼저는 역사를 위해 오셨고, 이스라엘교단을 위해서 오셨고, 이스라엘백성을 위해 오셨습니다. 따르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오셨고, 나아가서는 민족과 국가, 세계 그리고 천주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의 삶은 민족과 국가와 세계 그리고 천주를 위한 삶이었고 죽음까지도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의 걸음을 어느 누가 옳다고 하였습니까? 죽음의 고개에서는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도 배반당하고, 홀로 남겨져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나서야 했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에 인간들 대해 서러워하고 원망하려면 땅을 치며 울고 울어도 30평생의 원한을 다 풀 수 없고 그동안 받았던 고충을 보상받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인류가 사탄 치하에서 고통당할 것을 염려하여 긍휼의 심정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히는 죽음의 자리에서까지도 배반한 민족, 배반한 제자, 배반한 모든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신 분이었습니다. 서러움의 예수였던 연고로 그분은 이 땅의 선조들이 4천년의 역사를 들어 호소하여도, 그 당시의 모든 인간을 들어 호소하여도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반대하던 민족을 위하여 자신을 치고 반대하는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4천년 인류 역사상에 없었던 일입니다.또한 이것이 천상과 지상에 사무친 죄악의 담을 헐기 위한 우주적인 모험의 행사였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라면, 여러분은 그 만왕의 왕의 왕비가 되기 위해 그의 약속을 믿고 죽든 살든 모든 것을 뜻 앞에 맡기고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길을 가셨습니다.예수님의 생애는 그러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뜻을 위해 살다 뜻을 위해 그렇게 죽는 것이었습니다.
⑨ 선조들과 예수를 본받아 모험의 길을 가야 할 우리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 것인가. 죽음의 자리에서도 인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셨고 원한의 심정에 사무친 내적 슬픔을 모두 지니고 가신 예수님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땅 위에 뜻 하나를 세워 놓고 모험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들의 마음에 옮겨 가져야 하겠고, 예수님의 죽음을 깨달아 오늘날 우리들이 우주적인 모험의 길을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속에 사무친 원한을 풀어드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 앞에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복 달라고 빌기 전에 예수의 가슴 속에 사무친 서러움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생애와 십자가의 노정까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과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모험적인 행로의 서러움이 있었음을 오늘날 여러분이 알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못했던 내적 슬픔의 심정을 깨달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주여! 당신의 원한과 역사적인 모든 원한을 저희가 풀어드리겠사옵니다. 저희를 채찍질하여 주시옵소서. 역사적인 모든 민족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그 뜻을 이룰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 한 자체가 쓰러지지 않고 우주적인 역사를 대신하고 수많은 선지 선열들이 남긴 원한을 해원해 드리는 모험적인 제물로 설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가 땅 위에 유업으로 남긴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극한에 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다시 이루어야 할 운명이 우리들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개체의 모험적인 노정을 거쳐서, 가정을 통하고, 사회를 통하고, 국가를 통하고, 세계를 통하여 흘러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 가운데에서 개인이 뜻을 이루려 할 때는 그 개인의 행로에 모험적인 노정이 가해졌습니다. 가정도 역시 그렇고, 사회도 역시 그러했으며, 국가도 역시 그러했고, 세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이런 모험적인 관문이 여러분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들은 모험적인 생사의 기로와 우주적인 심판대 앞에 서 있는 내 일신의 모험, 내 일신의 생명을 대신하여 민족의 생명을 대신하여,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모험적인 제물로 바쳐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과거 선지 선열들의 걸어간 생애노정과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생애노정을 오늘날 우리들이 어떠한 시대 어떠한 환경에서도 본받아 걸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어느 누가 어느 때 어떠한 조건을 제시한다 할지라도 초현실적인 자신을 세워 우주만상 앞에 호소할 수 있고, 천상의 뜻을 대신한 자로서 나설 수 있는 각오와 배짱을 갖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⑩ 모험적인 제물로 바쳐져야 할 우리
이제 재림의 날이 가까운 오늘날에 있어서 여러분은 6천년 역사의 최후에 남은 하나의 우주적이고 모험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 임무가 우주적이라면 여러분도 상대적으로 우주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모험적인 내적 각오를 갖고 나서야만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신앙생활과 달리 이뤄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초현실적인 모험의 노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진전되어 나왔습니다.
이런 우주적인 모험의 관문을 거쳐야만이 최후의 승리의 깃발을 들고 아버지 앞에 호산나의 개가를 부를 수 있으며, 우주적인 신부의 입장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어떠한 조건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어떤 환경에서 어떤 핍박과 비난이 있을지라도 초현실적인 모험의 기준을 세우는 하늘의 왕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왕자가 되겠다는 각오를 가진 자라야만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최종적으로 책임지고 그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