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선생말씀선집 - 제6권 11. 그리운 에덴

만리향 | 20180820195756

말씀선집 제6권 11편

                            그리운 에덴

 
                                       창세기 2:1-25                  1959년 6월 28일(日), 전 본부교회.



<말 씀> 이 시간에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그리운 에덴입니다. 그리운 에덴 이러한 제목을 갖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인간


    본연의 세계와 본연의 동산에서 살고 있던 우리의 조상과 그 조상을 거느리고 있던 선(善)만을 위주하여 움직이셨던 하나님을 놓고 우리가 심각히 생각하게 될 때에, 그분과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먼 거리에 처하여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어떠한 최
고의 선과 더불어 인연을 맺으려는 간곡한 심정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이그 최고의 선, 즉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다는 고민을 우리는 느끼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려는 참다운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살던 아담 해와와 더불어 화동할 수 있었던 만물, 선만을 위주로 할 수 있으며 선만을 찬양할 수 있었던 본연의 그 세계를 막아 버렸던 그 타락의 흔적에 대해서, 더 분하고 강한 적개심을 품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방향도 잘 모르면서 무엇인가를 찾아서 허덕여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참다운 양심을 가다듬어 양심의 주체인 하늘과 영원한 인연을 맺고 영원한 행복의 기준을 찾아 세우고자 하는 간곡한 마음이 우러나면 우러날
수록, 오늘날 이 땅에 대해서는 분개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대하여서도 적개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이 적개심을 막아낼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여기에 미쳐지는 고통 이상의 큰 고통이 없다는 것과 여기에서 해결지어야 할 문제 이상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늘이 있다 할진대 이런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고, 이와 같이 불쌍한 자리에 있는 우리 인간을 찾아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인연을 존중하여 찾아 주는 관계가 있어야만 우리는 하늘이 있다고 인정할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심정이 동하여 사는 에덴


  오늘날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기에 앞서 타락의 종족임을 자인해야 됩니다. 자신의 무엇을 나타내기에 앞서 타락성에 물든 죄악 역사를 드러내고 죄악의 본성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리를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많이 나타나는것을 보게 될 때, 하늘은 기필코 역사적으로 물든 죄상을 청산해야 되고,혈통적으로 맺혀져 내려오는 죄악의 원한을 풀어야 됩니다.
  이 죄악의 원한을 푸는 것이 하늘의 소원이요 우리의 소원인데, 그 모든 것을 드러내는 날이 없다 할진대 해원의 한 날이 없을 것이요, 해방의 한 날이 없을 것입니다. 해원과 해방의 한 날이 없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뜻이 성취되는 한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성취
의 한 날이 없다 할진대는 인간을 대하여 섭리해 나오시던 하나님의 영광의 한 날이 없을 것이요, 섭리를 뒷받침하여 따라 나오고 있는 인간도 영광이 한 날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들은 마음으로 몸으로, 혹은 심령으로 자연의 모든 신성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고, 인간의 본성이 하늘 심정의 감촉을 느껴야되겠고, 본질 본성 본성품을 통하여 몸에 체휼되어 들어오는 어떠한 천심이나 천정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이 땅 위에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풀 한 포기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마음


  들에 자라고 있는 미미한 풀 한 포기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자라고 있는 나무 한그루를 보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내적 심정의 인연을 통한 사정이 거쳐 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상기해 보아야 되겠습
니다.
  비단 초목뿐만 아니고 들에서 뛰놀고 있는 어떠한 짐승이나 곤충, 혹은 어떠한 조류를 막론하고, 이것들이 무심하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통하여 지어졌고, 실체의 손길을 거쳐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느껴봐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 할진대 우리들은 어떠한 생각을 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물을 지어 놓고 다 선한지라 하셨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 풀이면 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시간을 아끼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머무른다 할진대,여러분은 사람을 짓기 전에 만물을 통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사와 접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벗어나 생각할 수 없는 인류문화


  
  인류의 문화는 자연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떠난 인류문화는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제아무리 당당하게 그 위세를 자랑하고 권세를 누린다 해도 자연을 무시한다면 그 모든 것이 성립되지 않 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을 가치 있게 해 주는 것이 자연이요,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만상에 흐르고 있는 심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없고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의 풀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수 있어야 되겠고, 꽃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입장,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곤충이나 새,혹은 어떤 동물을 바라보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맺어지는 그런
내적인 감정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떤 공식과 정의로써, 즉 과학적인 논리로 그것을 해명하지는 못할지라도,혹은 문학적으로 그 정서를 표현하지는 못할지라도, 혹은 예술적으로 그미를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정서적으로 사랑을 체휼하는 힘이 없을지라도
이는 위대한 과학자요, 위대한 문학가요, 위대한 예술가요, 위대한 철학자요, 위대한 종교가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격차가 없는 심정세계



  진정으로 세계적인 위대한 학자가 있다 할진대, 그 학자의 심정 깊이에는 자연의 심정과 화할 수 있는 감성이 있을 것이요, 자기가 연구하는 그분야 이상으로 수시로 연락되는 감성이 있기 때문에 생각지도 않은 암시나 환상이나 혹은 몽시와 같은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전공 분야에 취해 들어가는 그러한 상태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정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큰 일을 한 것은 역사를 보아서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또 그런 감정에 화하여 한 포기의 풀을 대해서도 하나님! 하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종교가가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위대한 종교가인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에서는 불상을 모셔 놓고 복을 빌고 있는데 주체와 대상의 외적인 차이는 참으로 천지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느껴지는 감정을 통하는 모든 것을 하늘과 같이 알고 믿고 대하면, 하늘은 그 마음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루어
주시기에, 여기에서 소원 성취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지금까지 우리들이 살아왔던 과거의 생활과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의 생활은 너무나 무감각적이요, 너무나 무정서적이요, 너무나 몰락된 우주관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서러워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서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된
다면 그는 새 시대의 인물로 소명받을 것이고,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맡을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나는 단정지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자기 주위 환경을 바라보고 얼굴을 찌푸리고 탄식하거나 사회의 모순상을 바라보고 낙망하지 말고,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를 바라보고 그 즐거움에 자기의 슬픈 감정을 잊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새 시대에 남아지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상적이고 심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필코 하나님과 어떠한 인연을 맺으려 할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흐르는 물가를, 넓은 벌판을 흐르는 시내를, 솟아 있는 산맥을, 떠오르는 태양의 아침 햇볕을, 동녘에서 비쳐오는 달빛을, 이 모든 만상을 대해 어느 시기를 가리지 않고 마음으로 노래할 수 있고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면서 꿈꾸고 이상하셨
던, 지으신 그 만물을 맡기려고 하셨던,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신 참다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경치가 좋은 모든 명승지를 찾게 되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더불어 자연을 노래해 보지 못한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시고 싶었던 간절한 내적심정이 있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정적으로 미숙한 자리에 있었기에 아담을 대하여 말씀하실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는 자리에 아담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붙들고, 야, 아담아, 내가 보고 싶은 저 동산의 꽃을 바라보아라, 내가 바라보고 싶은 산천을 같이 바라보자. 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라도 그러한 생활을 하였던들, 오늘의 인류는 이러한 도탄 중의 사망권 내에서 허덕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여러분들은 그리워하여야 되겠습니다. 본연의 에덴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는 세계, 한번 시작하면 그대로 영원히 사랑의 감정에 화할 수 있는 세계, 한번 노래하면 영원 무궁토록 노래에 취할 수 있는 세계, 한번 뛰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뛰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세계, 한번 움직이고 한번 책임지면 이것은 영원한 가치의 책임이 된다 생각하고 노력할 수 있는 세계, 이러한 세계가 그리워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을 지닌 인간을 찾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땅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그러한 사람을 찾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도 산천 혹은 자연이 들어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빌어 가지고 우리의 감정을 높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래요. 만일 본연의 세계에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이 가고 싶은 심정과 같은 심정으로 갈 수 있었던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좋았겠어요.
  이제 여러분들은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풍부한자, 그런 심정을 체휼한 자가 바로 새 시대의, 새로운 이상천국 시대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하기를 인간을 위해서만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안 합니다. 인간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늘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단 말이에요. 예수를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셨는데 갚아야지요.
다음으로 오늘날까지 수고하신 하나님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고, 더 나아가서는 만민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감정에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체험을 해보니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길을 걷다가 고단한 자리에서, 쉬는 자리에서 그런 감정이 있다 하면 하늘이 반드시 같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 그루의 늙은 느티나무 뿌리를 붙들고도 거기에서 하늘의 심정을 노래할 수 있고, 그늘진  큰 바위를 의지하고도 거기를 안식의 보금자리로 하여 하늘의 정서를 노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만물을 놓고 기쁨과 슬픔, 양면을 느껴야 하는 타락인간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이 자연은 어떠한 자연이며, 내가 밟고 있는 이땅은 어떠한 땅이뇨? 서럽게도 타락한 땅, 기뻐하다 말고 슬퍼해야 할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만물을 바라보게 될 때 마음에 좋다고 느껴지는 반면 슬픈 사정이 남아 있는 탄식권에있는 만물임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산고수려한 명승지가 있어 그곳을 바라보고 좋다 하더라도 무한히 슬픈 감정을 느껴 아버지와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의 입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포기의 풀을 붙들고 기쁨을 느끼는 대신 슬퍼하며 울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 하겠고, 기쁨을 돌이켜 하나의 나무를 붙들고 울 줄아는 자신이 되어야 하겠고, 산천 혹은 만상을 바라보고도 깊은 한숨을 쉴 줄 아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에덴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계신 분이 하나님이요, 그러한 심정의 인연을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 인간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연을 바라보고도 에덴을 그리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운 에덴이라 한다면 자연도 그리
워져야 되겠거니와 또 그 속에서 온 피조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사람도 그리워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물이 그리워하는 참다운 사람


  예수님은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양손 양발에 못을 박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는 그들을 대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무모한 원수들을 대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것은 아버지께서 최대의 정력을 기울이시고 심중에 애절한 사정을 거치신 수고의 결
과로 지어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아시기 때문에 복을 빌 수 있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늘의 사정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비록 원수로부터 반대받는 입장에 있었지만 하늘의 본연의 심정을 더듬어 볼 때, 하나님께서 온갖 정력을 다 기울여 지었다는 인연이 있는 인간이었기에 그들 대하여 복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30여년의 생애를 거치시면서 명상이나 혹은 상상 속에서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본연의 참사람이었습니다, 본연의 참사람. 이는 만물이 그리워할 수있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도 자기가 만드는 물건을 대하여 오늘 짓다가 끝나지 않으면 내일 또 가서 그 뒷일을 계속하여 완전히 마무리짓고자 하거든,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지어 놓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그 심정세계에 들어가서 체휼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춤을 춘다면 몇 십년이라도
추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기뻐하시던 아담 해와,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던 아담 해와, 더 나아가서는 만물도 주인이 되어 주기를 고대하고 바라던 아담 해와, 이처럼 하나님이 그리워하였고 만물이 그리워하였던 아담 해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리움이 변하여 저주와 원망이 되고, 행복과 소망이 변하여 탄식과 절망이 되고, 생명이 변하여 사망이 되고, 사랑이 변하여 통곡이 되었다는 사실은 기막힌 일입니다.
  
  땅 위에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성품과 성상을 대신해서 세워진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 여자를 사랑할줄 아는 남자가 되어야 하고 한 남자를 사랑할 줄 아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아담이 바라던 기준의 심정과 해와가 바라
던 기준의 심정을 지닌 자들로서, 자유를 누리며 하늘을 포옹할 수 있는 부부가 땅 위에 있다면 그들에게 온 우주를 넘겨 주고 안식하겠다는 것이하늘의 뜻임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심정의 법도를 유린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심정의 세계에서 무한한 그리움에 허덕이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취미를 갖고 예술을 통하여, 학문을 통하여, 또는 땅 위에 있는 어떠한 사랑의 대상을 통하여 이 그리움을 메우려 하지만 메울 길이 없어 허덕여야 하는 것이 타락한 인류
의 실상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비애요 비극인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움이 여러분의 마음에 솟구쳐 오른다 할진대,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한 만물과 더불어 그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할 줄 알고,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이끌고 있던 본연의 사람 형태를 갖추어 하늘을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쌍수를 들어 오냐, 내 아들아, 내 딸아. 하면서 붙잡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주만상을 관할할 수 있는 인격자를 배양해야 하는 종교의 사명



  그리움이라는 것은 사랑을 빼놓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딴 종교보다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목적은 심정세계의 법도를 활
용하여 생활적인 감정과 대하고 있는 우주 만상의 모든 이치를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그런 인격자를 배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목석과 같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우리 인간을 그리워하는 심정의 기준을 세워 가지고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역사는 천태만상으로 벌어져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알파요 오메가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그리워하고 그 심정을 잃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그러한 심정과 차이가 있다 할진대, 그 인간은 패배자요 역사노정에서의 낙오자일 것입니다. 하늘이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끝이라. 하였거늘, 이것은 고마운 명사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타락한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리운 마음에 슬픈 감정이 가하
여져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본연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가치를 자랑하여야 할 역사적인 책임이 있고, 자랑해야 할 그 가치를 하나님 앞에 높이 세워야 할 책임이있는 연고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가치를 높이려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개체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세우고자 하는데, 이것이 인지
상정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런 이념을 인간은 본래부터 갖고 있었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세우려 하다가 까딱 잘못하면 타락된 세계의 가치를 용납하게되고, 나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세우려다가 까딱 잘못하면 타락의 근거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류는 전체가 부정, 부정입니다. 다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 해와가 모든 것을 갖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는 그런 이념을 갖지 못했고, 그런 심정 문제의 어떠한 무엇도 갖지 못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당당한 권세를 가진 입장에 서지 못한 것이 타락이라는 거예요. 아담이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서 봤어요? 서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본연의 사람을 그리워하여 그를 찾아 나아가야 할 역사적인 조건에 걸려 있는 연고로, 인간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울음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할 존재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울음을 유발시키는 종교가 어디 있는가를 찾아보게 될 때, 기독교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셨는데, 이는  통곡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자신을 보고 통곡하고, 네 가정을 두고 통곡하고 네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네 민족, 네 나라, 네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의 전체를 보고 통곡하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리움의 인연을 새로이 맺기 위한 하늘의 뜻이 남아 있는 연고로 그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교를 통해서만 풀리는 인생문제


  우리는 만물을 그리워할 줄 알고 사람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사람을 그리워해 봤습니까? 순수한 하늘의 심정과 연락되어 무한히 주고도 잊어버리면서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심정을 체휼해 봤습니까? 이런 심정을 유발시키기 위하여 하늘은 종교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구주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신랑 신부라는 표어를 걸어 놓고 섭리해 오신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심정적인 문제를 찾아 하늘을 그리워할 수 있고,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타락이었기에, 그러한 관계가 맺어진 세계를 내 한 자체를 걸어 놓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 복귀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명을 다하겠다는 심정에 사무쳐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할 줄 아는 하나의 모습으로서, 그 심정적이고 그리운 동산의 이념권 내에서 운행하시고 만물을 찾으시며 혹은 인간들을 찾아 움직이시는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하늘이 모른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심정을 갖고 본연의 동산을 찾아 헤맨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모른다 할 수 없고, 전인류가 모른다 할 수 없고, 온 피조만물이 모른다고 할 수 없는 본연의 참다운 사람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운 에덴, 거기에 자라고 있는 만물, 거기에 살고 있는 인간, 거기에 찾아 주시던 하나님이 따로따로 사정을 통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을 중심삼고 위로는 하늘이요 아래로는 만물이 화합하여 응할수 있는 하나의 즐거운 보금자리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하늘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요, 인간들이 위할 수 있는 사람이요,만물이 존중할 수 있는 참다운 주인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일이 종결되지 않는다 할진대 복귀섭리, 즉 하늘이 세우신 전체의뜻은 끝을 맺어 승리의 영광을 볼 수 없고, 우리도 역시 타락의 슬픔을 해원하고서 소원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 다 할진대, 승리의 한 날을 갖춘 세계를 이 땅 위에 건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 말씀선집 제6권 11편, 원문 &&&&



                           그리운 에덴

 
                                         창세기 2:1-25                  1959년 6월 28일(日), 전 본부교회.


<말 씀> 이 시간에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그리운 에덴입니다. 그리운 에덴 이러한 제목을 갖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인간


  타락이 없었던 본연의 동산, 즉 에덴 산을 생각할 때에, 어느 누구나 연상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연상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함을 필하시고 축복하셨던 아담 해와가 연상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중심삼고 죄없는 본연의 우리의 조상들이 있었다는 것
이 연상되는 반면에 죄악의 침범을 받지 아니한 만물이 연상되는 것입니다.
  만물이 있음은 인간을 위함이요, 인간이 있음은 하나님을 위함이었다는것을 생각하여 보게 될 때에, 하늘을 위주한 인간이 되지 못하였고, 인간을 위주하여 화동할 수 있는 만물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 한 사실은, 에덴을 생각하는 인간들 앞에 크나큰 슬픔이요, 혹은 서러움이요, 혹은 억울함
으로 남아져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본연의 세계와 본연의 동산에서 살고 있던 우리의 조상과 그 조상을 거느리고 있던 선(善)만을 위주하여 움직이셨던 하나님을 놓고 우리가 심각히 생각하게 될 때에, 그분과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먼 거리에 처하여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어떠한 최
고의 선과 더불어 인연을 맺으려는 간곡한 심정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이그 최고의 선, 즉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다는 고민을 우리는 느끼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려는 참다운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살던 아담 해와와 더불어 화동할 수 있었던 만물, 선만을 위주로 할 수 있으며 선만을 찬양할 수 있었던 본연의 그 세계를 막아 버렸던 그 타락의 흔적에 대해서, 더 분하고 강한 적개심을 품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을 지향하고 참다운 본연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한편, 이것이 나와인연맺고, 시간성을 넘어 영원히 어떠한 천적인 심정과 인연맺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게 수시로 그천적인 심정과 인연될 수 있는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입
니다. 그런데 이 움직이는 심정을 연결시킬 수 있는 외적 환경이 되지 못한 것이 탄식이요, 또 그럴 수 있는 내적인 사정을 갖추지 못한 것이 우리인간의 탄식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 한 자체가 타락한 아담 해와를 원망하지 않으면 안되고, 오늘날 살고 있는 이 현실의 환경을 원망치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 내가 그냥그대로 휩쓸려서 마음과 몸이 행복스러움을 느낄 수 있느냐? 이것은 도저
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환경을 타개해넘어가야 할, 무엇인지 모르지만 필연적인 곡절의 노정을 거쳐가야 할 그무엇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방향도 잘 모르면서 무엇인가를 찾아서 허덕여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참다운 양심을 가다듬어 양심의 주체인 하늘과 영원한 인연을 맺고 영원한 행복의 기준을 찾아 세우고자 하는 간곡한 마음이 우러나면 우러날
수록, 오늘날 이 땅에 대해서는 분개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대하여서도 적개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이 적개심을 막아낼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여기에 미쳐지는 고통 이상의 큰 고통이 없다는 것과 여기에서 해결지어야 할 문제 이상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늘이 있다 할진대 이런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고, 이와 같이 불쌍한 자리에 있는 우리 인간을 찾아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인연을 존중하여 찾아 주는 관계가 있어야만 우리는 하늘이 있다고 인정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불쌍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슬픈 마음을 억제하시면서 타락한 인류의 발자취를 따라 나오면서 수고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은 다시 느껴야 될 것입니다.


 

  하늘의 심정이 동하여 사는 에덴


  오늘날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기에 앞서 타락의 종족임을 자인해야 됩니다. 자신의 무엇을 나타내기에 앞서 타락성에 물든 죄악 역사를 드러내고 죄악의 본성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리를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많이 나타나는것을 보게 될 때, 하늘은 기필코 역사적으로 물든 죄상을 청산해야 되고,혈통적으로 맺혀져 내려오는 죄악의 원한을 풀어야 됩니다.
  이 죄악의 원한을 푸는 것이 하늘의 소원이요 우리의 소원인데, 그 모든 것을 드러내는 날이 없다 할진대 해원의 한 날이 없을 것이요, 해방의 한 날이 없을 것입니다. 해원과 해방의 한 날이 없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뜻이 성취되는 한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성취
의 한 날이 없다 할진대는 인간을 대하여 섭리해 나오시던 하나님의 영광의 한 날이 없을 것이요, 섭리를 뒷받침하여 따라 나오고 있는 인간도 영광이 한 날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들은 마음으로 몸으로, 혹은 심령으로 자연의 모든 신성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고, 인간의 본성이 하늘 심정의 감촉을 느껴야되겠고, 본질 본성 본성품을 통하여 몸에 체휼되어 들어오는 어떠한 천심이나 천정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이 땅 위에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타락 전 인류의 조상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수습하여 만물은 하늘 앞에 영광의 조건으로,기쁨의 상징적인 대상으로, 미의 대상으로, 자극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외적인 대상으로 세우고, 그 만물로부터 오는 자극을 통하여 내적인 자극
을 일으켜 천성의 심정을 대하여 영광의 실체임을 자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도 슬픔이 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심정에 동하여 살 수 있는 에덴, 선과 화할 수 있는 그에덴, 하늘의 그 이념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그 에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선의 상징이며, 선을 자극시키지 않는 것이 없는 그 에덴, 여러분 자신이 하늘의 심정에 화하고 여러분 한 자체가 선한 자리에 서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영광의 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있어 최대의 행복일 것입니다.
  또 하늘이 그러한 인간과 인연 맺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인연을 더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더듬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참다운 자기의 형상을 대신할 수 있는 본연의 아담 해와, 참다운 선의 부모,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를 짓기 위하여 닷새 동안 모든 만물을 지어 놓았습니다.
이 주인공을 지어 놓고 하나님은 어떠한 심정으로 바라보았겠느냐? 여러분, 이것을 다시 한번 회상하면서 아버지를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시선에 자극을 주는 삼라만상을 매일같이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날을 그저 같은 심정 혹은 같은 감정으로 삼라만상을 대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선을 중심삼은 본연의 자연이 되었을 것인데, 또 그랬더라면 우리의 조상은
이 자연을 보고 어떻게 느꼈으며, 또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느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은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풀 한 포기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마음


  들에 자라고 있는 미미한 풀 한 포기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자라고 있는 나무 한그루를 보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내적 심정의 인연을 통한 사정이 거쳐 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상기해 보아야 되겠습
니다.
  비단 초목뿐만 아니고 들에서 뛰놀고 있는 어떠한 짐승이나 곤충, 혹은 어떠한 조류를 막론하고, 이것들이 무심하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통하여 지어졌고, 실체의 손길을 거쳐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들은 다시 한번 느껴봐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 할진대 우리들은 어떠한 생각을 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물을 지어 놓고 다 선한지라 하셨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 풀이면 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시간을 아끼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머무른다 할진대,여러분은 사람을 짓기 전에 만물을 통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사와 접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포기의 풀을 붙들고도 즐거워하면서 이것이 한 날의 소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쁜 심정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거치어 나온 풀이라는 것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타락한 인간이로되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친구의 입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풀이라면 풀 가운데서 어떠한 풀을 제일 좋아하실까, 꽃이라면 꽃들 가운데서는 어떤 꽃을 사랑하실까, 지으신 나무들 가운데서는 어떤 나무를 더욱 사랑하실까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새는 물론이거니와 날으는 곤충 등 하등동물로부터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지음받은 존재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어느 것을 아버지께서 제일 사랑하실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심정을 흠모하고, 하늘의 이념을 고대하고, 하늘의 복귀의 동산을 바라보는 참다운 마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하나님을 높이면서 영광의 자리, 즐길 수 있는 자리에서 기쁨을 체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나, 미미한 초목으로부터 곤충, 나아가 전체에 이르기까지 미쳐져 있는 아버지의 내적 심정의 인연을 상기하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력을 다 기울여 어떤 곤충을 만들었다할 적에, 그가 기울인 이상의 정력을 가지고 사랑하려는 사람이 나타나 마음과 정을 다해 바라보며 그 곤충을 사랑해 줄 수 있다면, 그 곤충을 만든 분에게는 그 이상의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2천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백성을 찾아 세워 드리기전에 무엇을 찾기 위하여 허덕였을 것인가? 그의 심정은 무엇을 찾아 헤매셨을 것인가? 저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백성을 붙안고 그들이 하늘의탄식권 내에 머물러 있다고 마음을 졸이는 예수님이셨고, 그들을 위해 밤
을 새워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해 주시던 예수님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만일 예수님께서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연의 심정적 인연을 유린당한 만물이 탄식권 내에 놓여 있는 것을 바라보고 울어 주고 밤을 새워가며 슬퍼하신 분이 아니었다면, 그는 만우주를 통치할 수 있고 만우주를 구원할 수 있는 구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하고 싶습니다.
  사람에게서 만물의 요소를 제거하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귀한 한, 자기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를 공급해주는 만물에 대해 인간은 희열의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앞세워 나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어디 가든지 자연의 정도(正道)를 갖출 수
있고,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정도의 자리, 만물과 통하는 자리에 서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자연을 바라보신 예수님은 많은 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유다리 이 풀을 지극히 사랑하실것이다, 꽃들 가운데서도 어느 하나의 꽃을 제일 사랑하실 것이다, 나아가 어떤 나무면 나무, 어떤 산천이면 산천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제일 사랑하실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
다. 오늘 여러분들은 그런 예수님의 사랑의 심정을 다시 한번 회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생애노정에 있어서 얼마만큼의 책임적인 감정을 갖고 하나님이 정을 기울여 지으신 이 만물을 대했습니까? 혹은 이산천을 대했습니까? 한 덩이의 흙을 붙들고 이 흙을 빚으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 할진대 여러분들은 창
조이상을 세우신 하나님의 심정을 무시하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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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벗어나 생각할 수 없는 인류문화


  오늘날 우리들은 이 만물세계, 피조세계의 원리와 법칙, 공리와 공식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야가 과학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에 깊이 숨어 있는 정서적인 분야를 나타낸 것이 문학일 것입니다. 자연에나타나 있거나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어떤 형태로써 구상하여 표현한 것이 예술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근본이치를 해명하려는 분야가 철학인것입니다. 이런 단계 위에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종교와 종교가가 해명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자연 속에 깊이 흐르고 있는 정적인 내용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을 종교가 짊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화는 자연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떠난 인류문화는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제아무리 당당하게 그 위세를 자랑하고 권세를 누린다 해도 자연을 무시한다면 그 모든 것이 성립되지 않  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을 가치 있게 해 주는 것이 자연이요,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만상에 흐르고 있는 심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없고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의 풀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수 있어야 되겠고, 꽃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입장,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곤충이나 새,혹은 어떤 동물을 바라보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맺어지는 그런
내적인 감정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떤 공식과 정의로써, 즉 과학적인 논리로 그것을 해명하지는 못할지라도,혹은 문학적으로 그 정서를 표현하지는 못할지라도, 혹은 예술적으로 그미를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정서적으로 사랑을 체휼하는 힘이 없을지라도
이는 위대한 과학자요, 위대한 문학가요, 위대한 예술가요, 위대한 철학자요, 위대한 종교가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인물이라는 사람, 혹은 위대한 학자라는 사람이 많이있어서 자기들 나름대로 우주를 탐구하고 있지만, 이제까지의 논리를 넘어최후의 문제, 즉 이 우주와 인연되어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무엇을 갖고 나오기 전에는 세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격차가 없는 심정세계


이제까지의 과학적인 논리와 공식과 법칙을 가지고 우주를 바라보고 느끼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거기에서 자기도 모르게 비밀히 통하고 있는 심정적인 감응이 없는 사람은 그 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문학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세계적인 위대한 학자가 있다 할진대, 그 학자의 심정 깊이에는 자연의 심정과 화할 수 있는 감성이 있을 것이요, 자기가 연구하는 그분야 이상으로 수시로 연락되는 감성이 있기 때문에 생각지도 않은 암시나 환상이나 혹은 몽시와 같은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전공 분야에 취해 들어가는 그러한 상태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정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큰 일을 한 것은 역사를 보아서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또 그런 감정에 화하여 한 포기의 풀을 대해서도 하나님! 하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종교가가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위대한 종교가인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에서는 불상을 모셔 놓고 복을 빌고 있는데 주체와 대상의 외적인 차이는 참으로 천지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느껴지는 감정을 통하는 모든 것을 하늘과 같이 알고 믿고 대하면, 하늘은 그 마음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루어
주시기에, 여기에서 소원 성취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지금까지 우리들이 살아왔던 과거의 생활과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의 생활은 너무나 무감각적이요, 너무나 무정서적이요, 너무나 몰락된 우주관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서러워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서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된
다면 그는 새 시대의 인물로 소명받을 것이고,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맡을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나는 단정지어 말하겠습니다.우리는 오늘의 자기 주위 환경을 바라보고 얼굴을 찌푸리고 탄식하거나 사회의 모순상을 바라보고 낙망하지 말고,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를 바라보고 그 즐거움에 자기의 슬픈 감정을 잊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새 시대에 남아지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상적이고 심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필코 하나님과 어떠한 인연을 맺으려 할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통일교인 여러분, 자라고 있는 풀 한 포기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는 심정을 느껴 보십시오. 거기에는 무한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솟아 있는 하나의 산봉우리를 바라보게 될 때에, 어제 보던 감정과 오늘 보는 감정이 다릅니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내 심정에
느껴지는 감정의 차이를 노래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고상한 일입니까? 이는 온 자연과 더불어 화동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래의사람은 그런 사람일 것임에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흐르는 물가를, 넓은 벌판을 흐르는 시내를, 솟아 있는 산맥을, 떠오르는 태양의 아침 햇볕을, 동녘에서 비쳐오는 달빛을, 이 모든 만상을 대해 어느 시기를 가리지 않고 마음으로 노래할 수 있고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면서 꿈꾸고 이상하셨
던, 지으신 그 만물을 맡기려고 하셨던,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신 참다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경치가 좋은 모든 명승지를 찾게 되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더불어 자연을 노래해 보지 못한 하나님


  그러면 본연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 해와와 더불어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한 시간을 가졌느냐 하면 못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아, 저 산을 바라보아라. 저 산은 내가 어떻게 어떻게 지었다, 혹은 저 초목을 바라보아라. 이것은 내가 어떻게 어떻게 지었다. 이 모든 것은 너의 행복을 위해 지은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로 그런 말씀을 하지못하셨습니다. 왜 못하셨느냐? 아담이 아직 철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바라보면서 말씀하시고 싶었던 간절한 내적심정이 있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정적으로 미숙한 자리에 있었기에 아담을 대하여 말씀하실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는 자리에 아담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붙들고, 야, 아담아, 내가 보고 싶은 저 동산의 꽃을 바라보아라, 내가 바라보고 싶은 산천을 같이 바라보자. 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라도 그러한 생활을 하였던들, 오늘의 인류는 이러한
도탄 중의 사망권 내에서 허덕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여러분들은 그리워하여야 되겠습니다. 본연의 에덴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는 세계, 한번 시작하면 그대로 영원히 사랑의 감정에 화할 수 있는 세계, 한번 노래하면 영원 무궁토록 노래에 취할 수 있는 세계, 한번 뛰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뛰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세계, 한번 움직이고 한번 책임지면 이것은 영원한 가치의 책임이 된다 생각하고 노력할 수 있는 세계, 이러한 세계가 그리워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을 지닌 인간을 찾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땅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그러한 사람을 찾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도 산천 혹은 자연이 들어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빌어 가지고 우리의 감정을 높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래요. 만일 본연의 세계에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이 가고 싶은 심정과 같은 심정으로 갈 수 있었던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좋았겠어요.
  이제 여러분들은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풍부한자, 그런 심정을 체휼한 자가 바로 새 시대의, 새로운 이상천국 시대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복귀의 원한을 풀고 역사의 슬픔을 밟고 올라서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붙들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만물을 내 대신 즐겨다오. 이 만물을 내 대신 느껴다오. 이 만물을 내 대신 사랑해다오. 라
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붙들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느 한 때에 신비스러운 분위기, 혹은 은혜의 분위기에서, 자연의 꽃 한 포기를 바라보는 것을 마음으로 그리워한 적이 있었습니까? 또 조상의 누구를 만나는 것과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대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혹은 산천을 바라보게 될 때, 품겨 들어오는 자극에 자기도 모르는 찬미를 하늘 앞에 드린 일이 있습니까?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만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나는 단정합니다. 인간들이 그리워하는 에덴동산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만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그리워할 곳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하기를 인간을 위해서만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안 합니다. 인간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늘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단 말이에요. 예수를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셨는데 갚아야지요.
다음으로 오늘날까지 수고하신 하나님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고, 더 나아가서는 만민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감정에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체험을 해보니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길을 걷다가 고단한 자리에서, 쉬는 자리에서 그런 감정이 있다 하면 하늘이 반드시 같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 그루의 늙은 느티나무 뿌리를 붙들고도 거기에서 하늘의 심정을 노래할 수 있고, 그늘진  큰 바위를 의지하고도 거기를 안식의 보금자리로 하여 하늘의 정서를
노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만물을 놓고 기쁨과 슬픔, 양면을 느껴야 하는 타락인간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 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선한 만물중에서도 제일 사랑하는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꽃이면 꽃 중에서 어느 꽃만을 제일 사랑한다 하는 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이 없다할진대 그는 심정세계에서의 불합격자일 것입니다. 꽃 중에서 무슨 꽃, 나
무 중에서 무슨 나무를 제일 사랑하고, 풀 중에서도 무슨 풀을 제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만 자연이 그리운 마음이 생기는것입니다.
내 생명이 약동하는 동시에 그 생명을 품어줄 수 있고 자연을 끌어들일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 이는 뜻있는 사람이요 함부로 살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이 자연은 어떠한 자연이며, 내가 밟고 있는 이땅은 어떠한 땅이뇨? 서럽게도 타락한 땅, 기뻐하다 말고 슬퍼해야 할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만물을 바라보게 될 때 마음에 좋다고 느껴지는 반면 슬픈 사정이 남아 있는 탄식권에있는 만물임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산고수려한 명승지가 있어 그곳을 바라보고 좋다 하더라도 무한히 슬픈 감정을 느껴 아버지와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의 입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포기의 풀을 붙들고 기쁨을 느끼는 대신 슬퍼하며 울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 하겠고, 기쁨을 돌이켜 하나의 나무를 붙들고 울 줄아는 자신이 되어야 하겠고, 산천 혹은 만상을 바라보고도 깊은 한숨을 쉴 줄 아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에덴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계신 분이 하나님이요, 그러한 심정의 인연을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 인간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연을 바라보고도 에덴을 그리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운 에덴이라 한다면 자연도 그리
워져야 되겠거니와 또 그 속에서 온 피조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사람도 그리워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물이 그리워하는 참다운 사람


  예수님은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양손 양발에 못을 박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는 그들을 대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는 무모한 원수들을 대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것은 아버지께서 최대의 정력을 기울이시고 심중에 애절한 사정을 거치신 수고의 결
과로 지어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아시기 때문에 복을 빌 수 있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늘의 사정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비록 원수로부터 반대받는 입장에 있었지만 하늘의 본연의 심정을 더듬어 볼 때, 하나님께서 온갖 정력을 다 기울여 지었다는 인연이 있는 인간이었기에 그들 대하여 복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30여년의 생애를 거치시면서 명상이나 혹은 상상 속에서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본연의 참사람이었습니다, 본연의 참사람. 이는 만물이 그리워할 수있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도 자기가 만드는 물건을 대하여 오늘 짓다가 끝나지 않으면 내일 또 가서 그 뒷일을 계속하여 완전히 마무리짓고자 하거든,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지어 놓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그 심정세계에 들어가서 체휼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춤을 춘다면 몇 십년이라도
추고 싶어할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법칙의 가치를 통하여 나타나는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은 필요 없습니다. 이는 법칙으로 잴 수 없는 무한한 신축성을 가진 절대적인 원칙을 통하여 지어진 사람이었기에 그 가치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들여다보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체의 속성을 느낄 수 있고, 만우주 전체의 감정이 흐르고 있는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기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기뻐하시던 아담 해와,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던 아담 해와, 더 나아가서는 만물도 주인이 되어 주기를 고대하고 바라던 아담 해와, 이처럼 하나님이 그리워하였고 만물이 그리워하였던 아담 해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리움이 변하여 저주와 원망이 되고, 행복과 소망이 변하여 탄식과 절망이 되고, 생명이 변하여 사망이 되고, 사랑이 변하여 통곡이 되었다는 사실은 기막힌 일입니다.
  이러한 한스러운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놓고 말할 수 없이 한탄해야 할 입장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가운데는 이 한스러운 사실이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박차고, 한스러운 심정을 쓸어 버리고
인간 본연의 심정을 찾고 나서 환희하고, 그 환희의 음성을 높이는 무리는 이 땅 위에 없을 것인가, 하늘은 찾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없느냐, 하늘은 찾을 것입니다.


이런 심정 문제에서, 하늘이 그리워할 수 있고 만물이 그리워할 수 있는 가치적인 사람이 오늘 요모양 요꼴이 되었으니,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시여! 제가 심판을 피하고자 할진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심정의 합격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에덴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즐거워하시던 마음, 가 보고 싶고 만나 보고 싶은 그 마음, 그 심정에 합격됨으로써 심판을 피하여 노래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하늘은 그러기를 바라고있어요. 천륜을 그리워할 줄 아는 내 자신이 되는 동시에 사람이 그리워지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심정을 체휼하게 하기 위하여 일남 일녀를 지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은사인가를 여러분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땅 위에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성품과 성상을 대신해서 세워진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 여자를 사랑할줄 아는 남자가 되어야 하고 한 남자를 사랑할 줄 아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아담이 바라던 기준의 심정과 해와가 바라
던 기준의 심정을 지닌 자들로서, 자유를 누리며 하늘을 포옹할 수 있는 부부가 땅 위에 있다면 그들에게 온 우주를 넘겨 주고 안식하겠다는 것이하늘의 뜻임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런 심정의 법도를 유린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심정의 세계에서 무한한 그리움에 허덕이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취미를 갖고 예술을 통하여, 학문을 통하여, 또는 땅 위에 있는 어떠한 사랑의 대상을 통하여 이 그리움을 메우려 하지만 메울 길이 없어 허덕여야 하는 것이 타락한 인류
의 실상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비애요 비극인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움이 여러분의 마음에 솟구쳐 오른다 할진대,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한 만물과 더불어 그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할 줄 알고,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이끌고 있던 본연의 사람 형태를 갖추어 하늘을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쌍수를 들어 오냐, 내 아들아, 내 딸아. 하면서 붙잡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주만상을 관할할 수 있는 인격자를 배양해야 하는 종교의 사명


여러분이 자기의 가치를 높여 하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한다 할진대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워하던 본연의 동산에 살 수 있는 본연의 사람의가치를 체휼함으로써, 하늘이 그리워지는 심정에 응할 줄 알고 하늘을 그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하
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움이라는 것은 사랑을 빼놓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딴 종교보다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목적은 심정세계의 법도를 활
용하여 생활적인 감정과 대하고 있는 우주 만상의 모든 이치를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그런 인격자를 배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목석과 같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우리 인간을 그리워하는 심정의 기준을 세워 가지고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역사는 천태만상으로 벌어져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알파요 오메가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그리워하고 그 심정을 잃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그러한 심정과 차이가 있다 할진대, 그 인간은 패배자요 역사노정에서의 낙오자일 것입니다. 하늘이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끝이라. 하였거늘, 이것은 고마운 명사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타락한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리운 마음에 슬픈 감정이 가하
여져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잘것없는 이 한 몸뚱이를 붙들고, 본연의 심정에 상처를 입힌 이 타락된 인간을 붙들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하늘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타락한 인간에 대한 슬픔의 흔적을 가슴에 품고 슬픈 감정 속에서 그리워하고 있는 하늘이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런 사람
은 틀림없이 천국에 갈 겁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한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자신의 손을 붙들고 그리워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걸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사랑으로 붙들 수 있는 손이라 할진대 자신이 그 손을 붙들고 울 줄 아
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던 본연의 그 아담의 손을 붙들고 울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담을 붙들고 해와를 붙들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타락의 역사를 밟고 올라설 것입니다.
  우리들은 본연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가치를 자랑하여야 할 역사적인 책임이 있고, 자랑해야 할 그 가치를 하나님 앞에 높이 세워야 할 책임이있는 연고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가치를 높이려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개체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세우고자 하는데, 이것이 인지
상정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런 이념을 인간은 본래부터 갖고 있었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세우려 하다가 까딱 잘못하면 타락된 세계의 가치를 용납하게되고, 나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세우려다가 까딱 잘못하면 타락의 근거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류는 전체가 부정, 부정입니다. 다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 해와가 모든 것을 갖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는 그런 이념을 갖지 못했고, 그런 심정 문제의 어떠한 무엇도 갖지 못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당당한 권세를 가진 입장에 서지 못한 것이 타락이라는 거예요. 아담이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서 봤어요? 서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본연의 사람을 그리워하여 그를 찾아 나아가야 할 역사적인 조건에 걸려 있는 연고로, 인간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울음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할 존재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울음을 유발시키는 종교가 어디 있는가를 찾아보게 될 때, 기독교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셨는데, 이는  통곡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자신을 보고 통곡하고, 네 가정을 두고 통곡하고 네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네 민족, 네 나라, 네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의 전체를 보고 통곡하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리움의 인연을 새로이 맺기 위한 하늘의 뜻이 남아 있는 연고로 그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종교를 통해서만 풀리는 인생문제


  우리는 만물을 그리워할 줄 알고 사람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사람을 그리워해 봤습니까? 순수한 하늘의 심정과 연락되어 무한히 주고도 잊어버리면서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심정을 체휼해 봤습니까? 이런 심정을 유발시키기 위하여 하늘은 종교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구주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신랑 신부라는 표어를 걸어 놓고 섭리해 오신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심정과 그리움의 사정이 연결되어서 드리는 만물을 받게 되는날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심정과 그리움에 사무쳐서 드리는 가정을 받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움에 사무쳐 이 나라, 이 백성, 이 세계가 바쳐지기를 바라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늘 앞에 그리운 심정에 사무쳐 한푼밖에 되지 못하는 이 동전이라도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 그 한푼은 우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한 가정이라도 부족하오나 이 가정을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할 때 그 가정은 천국의 유업
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불쌍한 민족, 광야에서 헤매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그 민족이 하늘을 향한 그리운 심정에 이 민족을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할 때, 하늘은 그 민족에게 지상천국의 주도적인 권한을 주려했던 것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요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인류들 앞에 주어야 할 어떠한 이상주의, 또는 이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늘을 그립게 하고 하늘을 심정적으로 사모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주의가 아니고는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지을 수 없고, 천륜의 근본 문제를 해결지
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적인 문제를 찾아 하늘을 그리워할 수 있고,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타락이었기에, 그러한 관계가 맺어진 세계를 내 한 자체를 걸어 놓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 복귀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명을 다하겠다는 심정에 사무쳐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할 줄 아는 하나의 모습으로서, 그 심정적이고 그리운 동산의 이념권 내에서 운행하시고 만물을 찾으시며 혹은 인간들을 찾아 움직이시는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하늘이 모른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심정을 갖고 본연의 동산을 찾아 헤맨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모른다 할 수 없고, 전인류가 모른다 할 수 없고, 온 피조만물이 모른다고 할 수 없는 본연의 참다운 사람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운 에덴, 거기에 자라고 있는 만물, 거기에 살고 있는 인간, 거기에 찾아 주시던 하나님이 따로따로 사정을 통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을 중심삼고 위로는 하늘이요 아래로는 만물이 화합하여 응할수 있는 하나의 즐거운 보금자리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하늘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요, 인간들이 위할 수 있는 사람이요,만물이 존중할 수 있는 참다운 주인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일이 종결되지 않는다 할진대 복귀섭리, 즉 하늘이 세우신 전체의뜻은 끝을 맺어 승리의 영광을 볼 수 없고, 우리도 역시 타락의 슬픔을 해원하고서 소원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 다 할진대, 승리의 한 날을 갖춘 세계를 이 땅 위에 건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